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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독자, 설계 건조한 중형급(3,000T급) 잠수함이며 2018년 진수식이 거행되었던 함 명인 '도산 안창호 함은 독립운동과 민족 번영에 이 비지 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입니다. 

도산안창호함 진수식 이미지  출처 대한민국 해군 

1. 국내 최초 SLBM 중형급 잠수함 도산 안창호 함에 대해 알아보자. 

국내 독자 기술로 설계, 건조된 천 3000t급 잠수함인 도산 안창호 함이 13일 해군에 인도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도산 안창호 함은 국내 잠수함으로 처음으로 SLBM(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수직 발사관 6기를 장착해 전략 타격 능력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도산 안창호 함에 대해 알아보면 길이가 83.3m, 폭 9.6m이며 수중 최대 속력은 20 kts(37km/h), 탑승인원은 50여이라 합니다. 배수량은 3,320t으로 무장과 화물 등을 탑재한 만재배수량은 3,400~3,500t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기존 1800t급과 마찬가지로 공기 불요 추진체계(AIP)에 고성능 연료전지를 적용했다고 합니다. 연속 잠함 능력은 (약 20일)이며 기존 잠수함보다 20% 정도 향상됐습니다. 특히 도산 안창호 함은 초기 설계 단계부터 민, 관, 군 협력으로 주요 핵심 장비를 개발하여 탑재, 전체 국산화 비율을 향상했으며 기존 잠수함과 달리 SLBM(잠수함 탄도미사일) 발사가 가능하다 합니다. 

 

여기서 SLBM이 무엇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간략하게 설명드리면....

2. SLBM이란?

바닷속의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탄도미사일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고체연료 로켓을 추진 수단으로 하여 함체에 수직으로 설치된 발사관에서 발사가 됩니다. 

2021.09.19 - [해군무기체계] - 한국형 SLBM 개발사업

 

한국형 SLBM 개발사업

1. 한국형 SLBM 역사 2015년 5월 9일 북한이 최초 SLBM인 북극성 1호를 최초로 수중 시험 발사를 했습니다. 사거리는 500~3,000km으로 추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정부도 2017년 7월 24일 장보고 3급

rokmc76.tistory.com

 

2-1. SLBM은 최대 사거리 500km인 현무 -2B를 개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SLBM은 최대 사거리 500km인 현무-2B 개량한 것으로으로 알려졌으며 최근 수중 바지선 시험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도산 안창호 함에서 SLBM 수중 발사에 성골 할 경우 우리나라는 북한 이에 세계 8번째 SLBM개발 성공국이 된 것입니다. 

SLBM 외에 어뢰와 기뢰, 대함 미사일 순항미사일 등도 갖추고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함은 앞으로 1년간의 전력화 과정을 거쳐 내년 8월 실전 배치된다고 합니다. 

장보고- 3급 배치 (Batch)-12번 함인 안무함은 2020년 11월에 지수 되었고 최근에는 신채호 함으로 함명이 결정된 3번 함은 곳 진수식을 열리 예정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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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0은 지상전력에 대한 직접 지원에 특화된 항공기로 다양한 탑재 장비와 지상 공격에 특화된 무장, 센서, 항법장비, 화력 통재 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AC-130은 파나마, 걸프전, 대테러전쟁 등을 걸치면서 여전히 맹활약 하고 있다. (출처: USAF)

1. AC130 스펙터의 특징 알아보기. 

AC-130은 기동력을 포기한 대신 최대한의 무장과 항법장비류를 싣고 공중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게 제작되었어며, 기상 상호 아이나 주야 환경을 가리지 안혹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AC-130은 형성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주로 20mm 미니건과 M61 벌칸을 기본으로 탑재하며,  필요에 따라 105mm M102 곡사포나 40mm 포를 장비하기도 합니다. 

 

또한 주익 아래의 파일런에는 AGM-114 헬파 이어 미사일이나 GBU-39 SDB(Small Diameter Bomb) 등도 장착하여 운용이 가능합니다. 

 

수차례 업그레이드를 받은 AC-130은 비교적 최근에도 업그레이드 과정을 거치면서 AC-130U로 명명되었습니다. 

AC-130 시리즈 중 가장 최근 형상인 AC-130U는 현존하는 무기체계 중 가장 복잡한 무기체 계류로 분류됩니다. 

 

임무 컴퓨터와 항전 체계 소프트웨어에는 609,000라인의 명령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무기체계에는 측면 발사식 무기체계가 다양한 최첨단 센서와 항 범장 비, 화력통제체계와 연동되어 아군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고 주변의 적군만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정밀성을 부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장갑 방호체계 (APS: Armor Protection System) ALLTV IDS 등을 포함한 고해상도 센서, 항전장비, 전자전체계, 공격 레이더, 고성능 화력통제체계 크게 개선됐습니다. 

 

위쪽이미지:AC-130U에는 기본 무장으로 25mm 개틀링 기관포와 105mm 곡사포가 장착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총신이 지상을 내려다보는 형태로 설치되어 있다. (출처: USAF/Airman 1st Class Jacob T. Stephens)                                                                                                                                                             아레쪽이미지:베트남 전쟁 중 AC-130 스펙터의 105mm 곡사포를 장전 중인 제이콥 머서(Jacob Mercer) 상사(좌)의 모습. 그는 1972년 6월 18일에 전사했다. (출처: USAF)

AC-130U형에 추가된 AN/APQ-180 합성 개구식(SAR) 공격 레이더는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표적을 탐지 및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성능을 자랑할 뿐 아니라 장비하고 있는 40mm 및 105mm 무기체계 가 장확 하게 획득한 표적을 핀 포인트식으로 때릴 수 있도록 추적합니다. 

 

화력 통제체계는 이중 표적 공격 능력을 제공하여 최대 1km까지 떨어져 있는 두 개의 표적을 두 개의 다른 센서가 각각 탐지하여 두 개의 다른 무기체계로 동시에 공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는 특히 현존하는 그 어떤 공대지 무기체계에도 존재하지 않는 능력이기 때문에 AC-130U의 능력이 더더욱 빛납니다. 

항법장비는 관성항법(INS뿐 아니라 GPS까지 복합적으로 활용이 가능하며, 항공기는 기내 압력 차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고고도로 올라가 비행함으로써 연료와 비행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고, AC-130H보다 훨씬 더 원거리까지 비행이 가능합니다. 

1-1. AC-130U의 방어체계

레이더 적외선 추적식 공대공 미사일을 회피할 수 있도록 채프와 플레이어를 살포할 수 있는 대응체계를 탐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AC-130 시리즈는 스텔스 설계가 반영되어 있진 않으나, 대신 AC-130의 엔진에는 적외선 열상 방어 장비가 설치되어 있어 엔진에서 발생하는 열을 최대한 분산시켜 적외선 유도미사일에 추적당하지 않도록 제작했습니다. 

 

AC-130U는 AC-130H를 기본 설계로 삼았으며, 1990년 12월 20일에 초도 비행을 신시한 후 회계연도 1992년부터 획들 예상이 반영되어 걸프전 때 상실된 AC-130H 보충분을 포함한 13대의 획득이 추진되었습니다. 

 

AC-130U는 시험평가를 거쳐 1994년 7월 1일부터 미 공군 특수전사령부에 전달되었으며, 해당 기체는 이후 항구적 자유작전(OEF: Operation Enduring Freedom)에 최초 투입된 후 지속적으로 추가 도입이 진행되었습니다. 

 

AC-130 프레어 방출 영상 

AC-130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성공적으로 운용했던  만큼 아직은 그 효용성이 통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분 가는 계속 현역 무기체계로 운용될 가능성이 높은데 미 공군은 AC-130에 헬파이어 미사일이나 JSOW미사일을 비롯한 스탠드오프 방식의 미사일 통합, 정찰/공격용 무인항공기(UAV)의 유-무인기 통합, 동체 기반을 AC-130에서 더 높게 비행이 가능하고, 더 속도가 높으며, 적재 중량이 큰 다른 기체로 대체하는 방안 등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센서 탐 제가 가능하고 탑승 인원이 넉넉하다는 장점 등을 이용하여 공역 내에 전개시킨 UAV나 UCA의 협조 작전이나 공격을 실시할 수 있는 공중 통제센터로 활용하는 방은 등도 연구 중입니다.  AC-130의 대체 기종에 대한 연구는 AC(X) 사업으로 명명되어 대안을 검토하는 초창기 단계에 머물고 있으나 만약 이 건 십 개념이 미래 전장에서도 살아남는다면 이는 아마 무인 항공기의 비행 모선 역할을 수행하게 될 가능성도 커 보이는 상황입니다. 

 

2. 운용현황

AC-130은 베트남에서 첫 데뷔했으며, 전쟁 기간 중 1,000여 대가 넘는 적 차량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적절한 근접 항공지원을 통해 수많은 장병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스푸키는 1983년 어전트 퓨리 작전이 개시되자 그레나다 투입되어 적 방공체계 제압 및 지상전력 공격을 실시했고, 작전에 핵심 내용 중 하나였던 포인트 셀린즈 활주에 지상공격을 실시하여 우군 지상전력이 성공적으로 공중강습에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작전 후 해당 작전에 참가한 AC-130 승무원들은 윌리엄 터너 중장 부대 표장을 수훈했다고 합니다. 

 

AC-130은 1989년 파나마 침공작전에도 투입되어 파나마 방위군 사령부와 지휘체계를 격파했습니다. 

이듬해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벌어진 걸프전, 통칭 사막의 방패 및 사막의 폭풍 작전에서는 우군 전력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과 병력 방호 임무를 실시했으며, 소말리아에서 신시된 컨티뉴 호프 작전과 유나이티드 실드 작적에서도 우군 전력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 임무를 소화했습니다. 

 

AC-130은 유고 내전의 일부였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쟁에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 개입하기로 했을 때에도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97년에는 알바니아, 리베리아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미국 국적의 민간 인들을 철수시키기 위해 이탈리아서부터 파견되어 작전 지역에 전개됐던 비가 있으며, 이듬해인 1998년부터 이라크에 대한 국제 연함((UN) 핵무기 사찰이 개시되자 이에 대한 압박용으로 이라크 지역에서 운용되기도 했습니다. 

 

AC-130의 최신형 상인 AC-130U는 항구적 자유작전(OEF/ 아프가니스탄)어도 투입되어 미군과 다국적군 지원 작전을 실시했으며, 최근 시리아 내전과 IS사태 간에서 중동 지역에 전개되어 운용 중입니다. 

 

AC-130은 주로 무장 정찰과 항공 차단, 그리고 아군 전력에 대한 직접 지원 임무를 주로 소화 중입니다. 

AC-13

 

미공군은 당분간 AC-130의 운용 가치가 유지될 것으로 보고 있으며 무장 표적 체계 및 센서 패키지의 업그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업그레이드 실시 시동체 기골, 윙박스, 항전장비, 통신체계를 전반적으로 정비하면서 수명 연장을 실시할 계획입니다. 

 

3. 제원

  1. 종류: 지상공격/근접 항공지원용 건십(Gunship)
  2. 제조사: 록히드 /록히드-마틴/보잉
  3. 승무원 13명 (장교 5명, 조종사, 부조정사, 항법사, 화력통제장교, 전자전 장교 및 병사/부사관 8명, 비행 엔지니어, TV 운용관, 적외선 탐지장비 운용관, 적외선 탐지장비 운용관, 탑재 관리관, 기총수 ×4)
  4. 전장: 29.79m
  5. 날개 길이: 40.41m
  6. 날개 면적: 162.16㎡
  7. 총중량: 55,520kg
  8. 최대 이륙 중량 : 70,307kg
  9. 추진체계: 4,910마력(3,660kw) 엘리슨 T56-A-15 터보프롭 엔진 ×4
  10. 프로펠러 4 엽 정속 역회전 프로펠러
  11. 최고 속도: 480km/h
  12. 항속 거리: 4,100km
  13. 실용 상승 한도:12,000m
  14. 무장:
    AC-130A 프로젝트 건십 II
         
          ㄴ 7.62mm GAU-2/A 미니건 x 4           ㄴ 20mm M61 벌칸 6 연장 회전식 기관총 x 4
    AC-130A 서프라이즈 패키지, 페이브 프론토, AC-130E
       
            ㄴ 7.62mm GAU-2/A 미니건 x 2           ㄴ 20mm M61 벌칸 기관총 x 2           ㄴ 40mm L/60 보포스(Bofors) 기관포 x 2
    AC-130E 페이브 이지스
        
           ㄴ 20mm M61 벌칸 기관총 x 2           ㄴ 40mm L/60 보포스 기관포 x 1           ㄴ 105mm M102 곡사포 x 1
    AC-130H 스펙터(후기 무장)
             
      ㄴ 제네럴 다이내믹스 25mm GAU-12/U 이퀄라이저(Equalizer) 5 연장 회전식 기관총 x 1           ㄴ 40mm 보포스 기관포 x 1           ㄴ 105mm M102 곡사포 x 1
    AC-130W 스팅어 II / AC-130J 고스트 라이더
               ㄴ 30mm ATK GAU-23/A 기관포 x 1           ㄴ 105mm M102 곡사포 x 1(고스트 라이더에만 해당)           ㄴ 건슬링거(Gunslinger) 발사관 체계                     - AGM-176 그리핀(Griffin) 미사일                     - GBU-44/B 바이퍼 스트라이크(Viper Strike) 탄(10발)           ㄴ 주익 하부 장착식 AGM-114 헬파이어(Hellfire)(4발 장착 가능)           ㄴ GBU-39 SDB(Small Diameter Bombs)(4발 장착 가능)           ㄴ GBU-53/B SDB II(4발 장착 가능)
  15. 항전장비:
    AC-130H 스펙터
         
          ㄴ 노스롭-그루먼(Northrop-Grumman) AN/APN-241 다목적 항법장비
               ㄴ 모토롤라(Motorola) AN/APQ-150 비컨 트래킹 레이더(Beacon Tracking Radar)
               ㄴ 큐빅 코퍼레이션(Cubic Corporation) AN/ARS-6 PLS(Personnel Locator System)
               ㄴ 레이시언(Raytheon) AN/AAQ-26 적외선 탐지 세트(IDS)
               ㄴ 제네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AN/ASQ-145 LLLTV(Low Light Level Television)
               ㄴ 텔레다인 라이언(Teledyne Ryan) AN/APN-218 도플러 항법 레이더
                AN/APN-59 수색 및 기상 레이더

    AC-130U 스푸키 II
             
      ㄴ 레이시언 AN/APQ-180 다목적 공격 레이더
               ㄴ 레이시언 AN/AAPQ-26 IDS
               ㄴ 록히드-마틴 AN/AAQ-39 건십 다층 센서 체계(GMS2)
                GEC-마르코니(Marconi) ALLTV (All Light Level Television)
               ㄴ 레이시언 AN/ALR-69 디지털 레이더 경고 수신기(RWR)
                L-3 커뮤니케이션즈(Communications) AN/AAR-44 UV 미사일 접근 경고체계(MAWS)
                ITT 엑셀 리즈(Exelis) 엑셀 리즈(Exelis) 엑셀 리즈(Exelis) AN/ALQ-172 전자전 대응장비(ECM)
                BAE 시스템즈 AN/ALQ-196 저주파 대역 재머(LBJ)
               ㄴ 노스롭-그루먼 AN/AAQ-24 네메시스(Nemesis) 레이저 지향성 적외선 대응장비(DIRCM)
                BAE 시스템즈 AN/ALE-47 채프/플레어 대응수단 살포 체계(CMDS)

    대당 가격:
     4,600만 달러(AC-130H, 1992년 기준) / 2 1천만 달러(AC-130U, 2016년 기준)

    참고문헌 한국 국방 안모 포럼,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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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취역한 미공군의 지상 지원용 공격기 인 건쉽 통칭 천사의 날개를 두른 하늘 위에 전함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록히드 마틴의 C-130 허큘리스를 기반으로 기관포 및 곡사포 위주의 무장을 장착 그래서 미국은 공중에서 포격을 하는 유일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AC-130 스펙터 건십 항공기 이미지   출처 : 미공군

 

1. 개발 역사 알아보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은 치열한 전장 환경뿐 아니라 전 인도차이나 반도에 걸쳐 있는 드 넓은 전장 환경 때문에 별력의 집중성과 화력지원으로 큰 고민을 안았습니다. 

특히 지상전력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CAS: Close Air Support)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이는 전장 공간이 넓었기 때문에 병력의 이동 간 적 기습에 취약해지는 경향도 있었고, 사방에서 출몰하는 게릴라 긴급한 화력지원이 필요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에 미 공군은 민수용으로 제작한 더글러스사의 DC-3을 군용으로 개량하여 7.62mm 미니건과 각종 무장을 장착한 AC-47 스푸키(Spoky)를 베트남에 투입했습니다. 구니 버드로 불린 AC-47은 최초 야간 공격 간 적진지 위치를 표시하기 위한 전광탄을 쏟아낼 목적의 플레이어십 목적으로 설계했었으나, 개발이 논의되던 중 베트콩이 야간 기습이 빈번해졌기 때문에 기체에 충분한 무장을 장착할 필요가 높아져 설계가 변경된 것입니다. 

 

AC-47은 애초에 조명탄을 투입하는 플레어십으로 개발되었다가 건십으로 바뀌었다. 출처: 미공군

이에 따라 미공군은 세계 최초로 고정익 기체에 부장을 탑재해 지상전력을 지원하는 내용의 건십 프로젝트를 과감하게 출범했습니다. 

미공군은 거대한 플랫폼에 대구경 화력 체계와 다양한 무장을 통합하면서 이 새로운 개념의 고정익 항공기에 원래 남북 전쟁 중 강철 포함에 붙였던 건십이라는 명칭을 차용했습니다. 

 

건십 항공기는 기동성이 중점을 두지 않되 적재 중량은 커야 하고, 목표 상공에 최대한 오래 머물며 표적을 제거해야 하므로 제트엔진 대신 프로 페러식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건십 항공기는 기동성에 중점을 두지 않되 적재 중량은 커야 하고, 목표 상공에 최대한 오래 머물며 표적을 제거해야 하므로 제트 엔진 대신 프로 페러식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완성된 AC-47 DMS 900m 상공 세어 원형을 그리며 비행하며 17초 내에 약 4,200 제곱미터의 면적 구서구석까지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습니다. 

 

미공군은 단 두 주 만에 개조를 완료한 AC-47 두대를 전장에 투입했으며, 1964년 12월 14일에 첫 전투에 투입되면서 21명의 베트콩을 제거했습니다. 또한 12월 23일에는 탄옌(thanh yen)의 전초기지에 적들이 야간 기습을 가해오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전개됐으며 AC-47은 4,500발의 총알을 쏟아붓고 17발의 전광탄을 날리면서 적의 기습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 공군은 AC-47 스푸키를 통해 건십의 효용성을 확인했으나 항공기의 탑재 중량, 항속거리, 화력이 조금씩 부종 했으므로 본격적으로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화력지원을 실시할 수 있는 건십 전용 항공기를 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공군은 차세대 건십 항공기 요구도를 잡으면서 탑재 능역과 항속 거리에서 유리한 수 솔기 기반의 C-130 허큘리스를 비본 기체로 선택했습니다. 특히 허큘리스는 터보프롭 기반의 항공기였기 때문에 제트기보다는 속도가 떨어지지만 헬기보다는 빨랐고 고고도에서 체공이 가능 시간이 길었으며, 탑재 중량이 커 다양한 무장을 동체뿐 아니라 주익 하부까지 장착해 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AC130 건십 설명 동영상 

미공군은 1967년 부로 우선 JC-130A 중 기체 번호 54-1626번기를 선택하여 AC-130A건쉽 2 프로젝트를 위한 시제기 개조용으로 지정했습니다. 기체의 개조 작업은 오하이오주 데이튼에 위치한 라이트 패터슨 공군기지 내의 미공군 항공역학 체계부가 담당했습니다. 

 

AC-130A에는 직접 관측 야시경이 전방 도어에 장착되었고, FLIR초창기 모델이 좌측 렌딩기어 옆에 설치됐습니다. 

기본 무장으로는 미니건과 회전식 기관포가 왼쪽 측면에 지상을 바라보도록 장착됐습니다. 

 

특이하게도 AC-130에 아날로그 방식의 하력 통제 컴퓨터 시제품 하대를 제작하여 설치한 건 당시 라이트-페터슨 공군기지 내 미공군 항전장비 연구소에서 근무 중이던 왕립 공군의 톰핀커트 중령이었습니다. 

 

이렇게 개조가 완료된 AC-130은 프로리다주에 위치한 에글린 공군 기지에서 초도 비행을 실시한 후 계속 시험 평가와 개조를 지속적으로 진행했습니다. 

 

AC-130은 1967년 9월부터 전투 시험평가 인증을 받았으며, 처음으로 베트남에 전개되어 주월 한국 군사령부도 위치하고 있던 나랑 공군 기지에 배치되어 90일간 시험 평가를 진행했습니다. 

사격 중인 AC-47 스푸키 건십 (출처: Public Domain)

이후 실전에 투입된 AC-130은 베트남에 전개되어 전쟁 기간 중 10,000대가 넘는 적 차량을 격파했고 수없이 많은 근접 항공지원(CAS) 임무를 소화하면서 우군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AC-130은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베트남 하늘에 등장하여 야간에는 천사의 날개로 불리는 200만 촉광의 전광탄을 쏟아내며 밤하늘을 밝혔고, 주간에는 적에게 첨첨이 포위된 우군 머리 위로 날아가 사방의 적들을 일소했습니다. 

 

AC-130은 베트남 전쟁 종전 뒤에도 반세기 넘는 기간 동안 그레나다, 파나마,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활약했습니다. 

 

한편 미공군은 AC-130을 실전에 배치하면서 이를 후속할 기체를 개발하는 내용의 프로젝트 건십 3 사업을 1968년 2월부터 발주했습니다. 

 

이에 페어차일드 항공의 C-119 플라잉 박스카를 바탕으로 한 AC-119G 섀도를 개발했습니다. 당초 AC-119는 앞서 운용한 AC-47 스푸키와 교체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므로 총 52대가 양산되어 베트남에 전개되었지만 섀도는 덩치에 비해 화력과 출력이 부족해 AC-130에 비견할 만한 성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운용 주체였던 미 제71 특수작전 비행대대가 1969년 부로 본토 귀환이 결정되자 소수의 기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AC-119도 미본토로 회수되었다가 1975년경에 대부분 퇴역 치리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AC- 130은 몇 차례 대체 기종의 개발이 고려됐지만 실질적으로 이를 대신할 기체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AC-130은 몇 차례 대체 기종의 개발이 고려됐지만 실질적으로 이를 대신할 기체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AC-130은 몇 차례 대체 기종의 개발이 고려됐지만 실질적으로 이를 대신할 기체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AC-130은 1960년대 첫 개발로부터 반세기가 넘은 현제까지도 건재하게 운용되고 있습니다. 

 

AC-130은 비교적 최근인 이라크 자유작전과 항구적 자유작전뿐 아니라 IS 척결 작전에도 참가하여 활약한 바 있으나 안타깝게도 미공군은 AC-130이 미래 전장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항공기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일단 동체가 크고 뭉툭하기 때문에 레이더 신호 특성이 높고, 비행 속도는 낮기 때문에 생존성이 계속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건십의 특성상 적지 종심을 직접 파고들어야 하므로 이 또한 미래 전장 환경에서 분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전무가 들은 미래 건십의 임무를 인명피해 부담이 없고 스텔스 성이 높은 무인항공기 계통이 데채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전장 위의 AC-130은 건재하므로 그 미래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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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G3개발사 전편에 이어 2번째 시간을 이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새로운 소총을 만들어버린 HK사.

어렵사리 만들어진 CETME/HK의 소총의 앞날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서독군은 1956년 벨기에제 FN FAL 벨기에제 G1 자동소총으로 제식 채용하게 되면서 BGS도 당연히 G1을 채용하게 되면서 CETME/HK 소총을 더 이상 채용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BGS에 납품하기로 한 시제 총기의 생산은 HK의 경험 부족으로 난항을 거듭했습니다.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HK는 CETME 소총의 독일 생산에 성고하고 시험용 총기 400 여정을 1956년 10월에 BGS에 납품하였으며, 이후 1957년 4월까지 시험평가가 실시되었습니다. 

 

 

 

 

CETME/HK의 소총이 개발되는 사이 서독 연방군과 BGS는 FN FAL을 G1 소총으로 제식채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한편 1958년이 되자 이제 서독 국방부 가 CETME/HK 소총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서독군도 이미 FN FAL소총을 G1 자동소총으로 제 식체 용하고 있었지만, 서동 정부가 FAL 소총의 라이선스 생산을 요구하자 FN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2차 대전 시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기억에 벨기에 정부는 직도입은 몰라도 면허 생산은 허용할 수 없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서독군은 자국서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자동소총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마침 BGS에서 시험 평가하고 있던 CETME/HK 소총은 매우 시의 적절한 대안이었고, 결국 BMV는 1958년 4월 17일 시험 평가용 소총을 400 정이나 주문했습니다. 

 

이에 따라 HK7월 1일까지 400 정의 CETME/HK 소총과 함께 1,600개의 탄창과 기타 수리부속을 납품했습니다. 

 

독일 정부는 사실상 CETME/HK 소총의 채용을 결심하고 매우 진지하게 시험평가에 나섰습니다. 

BWB(국방기술 조달청)는 꼼꼼한 시험평가 과정을 실시하면서 여러 가지 사항을 개산 하도록 요구했습니다. 

 

BWB는 우선 본격적인 시험평가에 앞서서는 17가지의 개선사항을, 시험평가 종료 후에는 4가지 개선사항을, 그리고 양산 전에는 3가지 개선사항을 요구했습니다. 

 

2. 요구사항 내용

1. 시험평가 전 개선 요구사항

  1. 소여 기와 총류탄 발사기를 결합하여 설계할 것. 
  2. 가늠쇠 보호장치를 강화하여 제작할 것
  3. 가늠자는 플림 -업이나 다이얼 방식으로 제작할 것
  4. 운반 손잡이에 고정 장착을 장착할 것. 
  5. 조종간 고정장치의 위치를 변경할 것. 
  6. 탄피의 배출 시 발향을 바꾸는 기구를 부착할 것. 
  7. 개머리판 끝부분의 재질을 금속 대신 고무로 변경할 것. 
  8. 권총 손잡이의 양산 절차를 단순화할 것. 
  9. 멜빵의 장착 위시를 변경할 것. 
  10. 잔 전손 잡이을 길게 제작할 것. 
  11. 파이프의 위약을 변경할 것. 
  12. 반동 스프링 가이드를 변경할 것. 
  13. 권총 손잡이에 장착되는 핀을 변경할 것. 
  14. 버퍼링 장치를 변경할 것. 
  15. 개머리판의 형상을 변경할 것. 
  16. 방아쇠 안전장치의 모양을 변경할 것. 
  17. 장전 손잡이를 더울 인체공학적인 형상으로 변경할 것. 

2. 시험 평가 종료 후 개선 요구사항. 

  1. 양각대를 강화할 것. 
  2. 손 보호를 위한 대책을 강구할 것. 
  3. 권총 손잡이의 형상을 더욱 인체공학적으로 교체할 것. 
  4. 전체 중량을 감소할 것. 

3. 시험평가 종료 후 양산 전 개선사항

  1. 안전장치가 걸려있는 상태에서도 장전이 가능하도록 방아쇠 구조를 변경할 것. 
  2. 20발이 수납 가능한 탄창을 제작할 것. 
  3. 마지막 탄환 발사 이후 약실이 개방된 상태로 되도록 만들 것. 

 

 

G3소총 설명 동영상

독일군을 위한 개조 과정에서 HK가 만드는 소총은 점점 CETME 소총과는 다른 소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CETME소총의 총몸은 저탄소강, 즉 연철로 만들 졌습니다. 사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돌격소총들을 만들 때부터 총몸에 저탄소강을 썼는데, 돌격소총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CETME 소총도 단영히 이런 전철을 따랐던 것입니다. 

 

저탄소강을 사용하면 손쉽게 가공이 가능하여 부족한 설비로도 저가로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가공을 위한 저탄소강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CETME 소총은 독일의 돌격 소총처럼 상대적으로 저위력의 탄환을 발사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로러로킹의 지염블로백 작동방식을 사용한 것도 처음에 채용했던 탄환의 위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7.62mm NATO탄을 사용하면서 총기에 가해지는 스트레스가 극도로 증가하면서 더 이상 저탄소강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HK는 저탄소강을 대신하여 더욱 강성이 높은 합금강을 채용하였습니다. 또한 노리쇠를 구성하는 노리쇠 앞쪽과 노리쇠 뭉치, 롤러 등도 모두 강성이 높은 다른 재질로 바뀌었습니다. 

 

HK는 원활한 작동을 위해 무려 20가지가 넘는 롤러들을 개발하여 원하는 것을 채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3. G3소총 드디어 채용되다. 

한편 HK가 소총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라인 메탈의 HK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사실 라인 메탈은 윈래부터 CETME 소총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독일 내 생산을 CETME에 제한했지만 HK를 이미 파트너로 선정했기에 좌절된 바 있습니다. 

 

이제 독일 내 양산을 놓고 1957년 CETME는 HK/라인 메탈 팀과 협상에 들어갔는데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CETME는 이제 독일 국방부와  직접 면허생산 계약을 맺고자 했습니다. 

독일 국방부도 CETME와 직접 계약을 체결하기를 바랐지만, 해외수추권한까지도 확보하기 바랐는데, 이 부분에서 결국 CETME와 대립하면서 계약은 체결되지 못했습니다. 

 

계약이 이뤄지지 못하자 1958년 3월쯤에 이르러 CETME/HK 소총의 독일 생산을 위한 모든 준비작업이 중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페인이 채용한 CETME 모델 B 소총은 NATO표준탄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과연 FN FAL을 대체할 만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까지 더해졌습니다. 게다가 서독 연방군의 규모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애초에 50만 명 규모의 군대를 목표했지만 숫자는 계속 줄어갔습니다. 

이는 차기소총의 생산량과도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CETME는 새롭게 계약 협상을 진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심지어는 그간 꺼려왔던 해외 수출 권리까지도 독일 측에 넘길 수 있음을 밝혔습니다. 

CETME 소총의 뿌리가 독일의 STG45(M)이며 그 개발의 주역이 루드비히 포 그림러를 포함한 독일 총기 설계자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독일의 핏줄을 가진 총기가 독일인의 손에 들오온 셈이었습니다. 

 

CETME 측이 양보하자 계약은 이사천리로 잰 행 되었습니다. 

1959년 2월이 되자. CETME, HK, 라인 메탈은 물론이고 독일과 스페인 양국 국방부까지 서명한 계약서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에 딸 대금이 지급되고 생상에 필요한 기술 문건들이 이전되면서 드디어 CETME/HK 소총의 독일 생산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1959년 소독 연방군은 CETME/HK 소총을 자동소총,으로 제식 채용하였습니다. 

 

한편 연방군을 위한 G3 양산에서 서독 국방부는 신생업체인 HK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HK 이외에도 라인 메탈에서도 G3가 생상 되었으며, 초도 주문량으로 HK와 라인 메탈은 각각 65,000정을 생산했습니다. 

 

HK와 별도로 라인 메탈도 독자적인 GE변형 모델들을 개발했으나,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G3가 성공하면 할수록 CETME와 HK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특히 이미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CETME 소총의 개발자였던 포그럼러가 마우저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CETME는 마우저와 전략적 협력을 하기에 이렀는데, 포 그림러는 마우저에서 시험용 기관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5 정의 시제 기관총이 만들어져 서독 연방군의 제공되었지만, 이미 MG3라는 우수한 기관총을 보유하던 연방군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우저의 CETME소총 개발은 방향을 잃고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4. G3소총으로 미래를 HK 미래를 열다. 

실전 배치된 G3는 현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독일군의 G3실전배치와 만족스러운 운용은 다른 NATO 회원국 드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군대로부터 관심을 끌었습니다. 

독일 다음으로 채용한 것은 포르투갈로, 이들은 CETME 사양이 아니라 G3사양으로 자구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은 스칸디 나비아이 3개국으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자국에서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이외에도 터키, 파키스탄, 이란, 그리스와 프랑스에서도 G3면허 생산되었습니다. 한때 FN FAL로 나토 전역을 장악할 것 같았던 FN FAL 은 G3에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HK의 야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던 G3의 작동방식에 바탕하여 다양한 총기들을 개발했는데 5.56 × 45mm탄을 사용하는 HK33과9mm파라블러탄을 사용하는 MP5 기관단총을 만들면서 제품군을 다양화했습니다. 

 

물론 G3자체를 경기관총화여 만든 HK 11(탄창 급탄 방식)과 HK21(탄띠 급탄 방식)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G3는 기관총보다 저격총으로 만들어져 더욱 인기를 끌었습니다. G3SG/1에서 시작하여 MSG3이 등장했습니다. 

이후에는 프로 플로팅 배럴을 장착한 PSG1과 MSG90까지 등장했습니다. 

 

물론 HK의 주력 상품군은 G3만은 아니었습니다. 

HK4권충이나 P9, VP90등 다시 기준으로 획기적인 총기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HK가 마우저나 라인 메탈, 발터 등의 거물들을 제치고 독일의 대표적인 총기업체로 성장할 수 있던 것은 G3소총의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1.12.22 - [육군무기체계] - G3 소총 개발사 - 스페인이 부린 제주에 대박친 독일의 소총 을 아시나요! (1부)

 

G3 소총 개발사 - 스페인이 부린 제주에 대박친 독일의 소총 을 아시나요! (1부)

G3소총 개발 배경과 소총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해 클러& 코흐의 등장하다. 2차 대전에 패전한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무기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습니

rokmc76.tistory.com

 

참고문헌:한국 국방 안보 포럼,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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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3소총 개발 배경과 소총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해 클러& 코흐의 등장하다. 

2차 대전에 패전한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무기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STG44나 MG42 같은 당내 최고의 명작 총기를 만들던 독일 엔지니어들은 프라스나 스페인 등이 국가로 건너가서 총기연구소에서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런 가운데 전직 마우저(Mauser)사의 엔지니어들이 모여서 특수 정밀가공업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회사는 처음에는 마우저 공장 인근에 방공호로 쓰이던 자리에 작업장을 차려놓고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회사가 바로 헤클러 & 코흐(hk)입니다. 

 

헤클러 & 코흐 G3 자동소총 <출처: Public Domain>

헤클러 & 코흐는 두 창업자들의 이름에서 회사명을 따왔습니다. 

마우저의 관리자였던 에드문드 헤클러 (1906~1960)와 티오 도어 코흐(1905~1976)는 마우저 출신 총기 설계자로 HSC권총을 설계했던 알랙스 자이들(1909~1989)을 영입하고 익명의 자산가들의 지원을 받아 1949년 창업을 했습니다. 

 

HK는 원래 총기사업을 할 생각은 아니었고, 처음에는 제작기계용 정밀부품 등을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서독의 연방국경경비대(BGS)와 연합군 점령군 사령부가 K98K 소총과 MG42 기관총의 수리부속을 요청함에 따라 1951년 HK가 그 부품을 만들면서 총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HK 본사의 모습 <출처: Heckler & Koch GmbH>

총기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HK는 방공호 작업장에서 나와 오베른 도르프의 구도시인 린덴 호프의 언덕에 구 마우저의 건물로 공장을 옮겼으며 특히 1955년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여 서독은 NATO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군대를 재건하기 시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서독의 무기 생산 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 HK는 본격적으로 총기회사로 전환을 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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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ETME 와 HK가 만나게 되다. 

한편 HK주 거래처였던 BGS는 1954년 스페인의 국립 조병창인 CETME에서 발배한 7.92mm 시제 자동소총인 모델 2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시험평가를 담당했던 BGS 담장자는 이탄 환이 7.62mm 구경이라면 BGS가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CETME는 7.62mm×41mm CETME탄환을 사요 하는 모델 A1을 정식으로 발매했습니다. 

그러나 BGS에서 얘기했던 7.62mm탄환은 1954년 NATO의 제식 탄환으로 선정된 7.62 × 51mm NATO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실수를 깨달은 CETME는 NATO탄과 유사한 규격을 갖춘 7.62 mm×51mm CTTME탄을 개발하고 이를 발사하는 모델 A2와 모델 B를 속속 발매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 CETME 소총은 NATO 규격탄에 맞는 모델이 아니었고, 규격에 민감한 독일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BGS는 NATO탄을 사용하는 CETE 소총의 시제 모델 400정을 만들어 달라고 발수했습니다. 

 

독일의 엄격한 요구에 고심하던 CENTME는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독일의 협력사를 찾기 시작하였으며 

BGS와 협력하던 HK가 결국 1954년 부터 CETME와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두 회사를 연결시켜주었던 것은 네덜란드의 탄약 화사 MWM의 사장인 헨크 비저였습니다. 

 

물론 HK는 최초에는 소총의 개발에 도움을 주는 역할에 한정되었습니다. 비록 조력의 역할이었지만 HK는 CETME 개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7.62 × 51mm탄의 원활한 사격을 위하여 각인 약실을 채택하도록 약실 설계를 바꾼 것도 HK였다고 합니다. 

 

CETME 소총의 독일 도입이 구체화 되면서 독일 내의 양산이 거론되면서 CETME는 독일 내 양산을 위해 마우저와 접촉했으나, 마우저는 CETME의 제안을 비웃으며 이언 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CETME는 1956년 HK를 양산파트너로 지정하고 이에 따라 CETME의 독 일용 소총의 개발과 양산을 HK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HK는 이제 베팅에 나섰으며 당시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3개국을 제외한 CETME 소초의 전 세계 생산 권한을 갖고 있던 것도 역시 헨크비저였습니다. 

 

아예 생산설비를 갖출 것이라면 전세계로 총기를 판매하겠다고 결정한 HK는 비저에게 이 권리를 양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비저가 이를 승낙하건 아니건 간에, CETME의 결정이 없이는 전 세계의 생산 권한은 양도될 수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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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병대의 차세대 수륙양용 장갑차(Amphivious Combat Vehicle) 해병대에 처음으로 인도 돼었다는 소식입니다. 

이 ACV는 미 해병대가 40년째 운영하고 있는 30T짜리 궤도형 상륙돌격 장갑차(AAV)를 대체할 예정이라 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한국 해병대도 관심을 갖고 있는 모습입니다. 

미국 방산 전문 메매체 디팬스 블로그와 아미레 커그 니션닷컴 등에 따르면, 미 해병대 1사단은 지난 4월 캘리포니아주 두웬티나인 팜스에 있는 해병 공지 전투센터에서 인수식을 갖고 ACV를 첫 인도분을 인후 했다고 밝혔습니다. BAE스스템스는 총 48대를 인도하였다고 합니다. 

미해병대 차세대 ACV 이미지  출처:미해병대

 1. ACV인수 관련 내용

미 해병대 1사단은 2020년 11월 4일 캘리포니아주 투웬티 나인 팜스에 있는 해병공지전투센터에서 인수식을 가졌으며 ACV를 천 인도분을 인수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BAE시스템스는 총 48대를 인도했다고 합니다. 

 

미 해병대는 2020년 2월 저율 초도 생산(LRIP) 단계에 따라 ACV26대를 1억 1350만 달러에 발주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ACV발주량은 116대로 늘어났습니다. 미 해병대는 2018년 6월 BAE시스템스와 30대를 1억 98만 달러에 생산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계약에는 총 12억 달러, 204대를 생산하는 선택 사안을 붙어 있었습니다. 

 

BAE가 제작한 ACV는 기동성과 생존성, 응용성이 개선된 상륙 장갑차량입니다. 

바퀴 8개인 해병 개 운용한 기존의 LAV-25에 비해서 상당히 크고 무겁습니다. 그만큼 장갑과 무장이 강화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고 합니다. 양산되면 미국에서 운용되는 8륜 장갑차 가운데 가잔 큰 장갑차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6실 린더 700마력 엔진의 디젤 엔진의 강력한 힘 덕분에 유지에서 최고 시속 105km 바다에선 시속 6노트(시속 11km) 정도의 속력을 낸다고 합니다. 육지에서 최대 주행거리는 523km, 바다에서 12해리 혹은 22km 정도를 항해한다고 합니다. 

 

 

미 해병대가 1983년부터 운용 중인 8륜형 수륙 장갑차 LAV-25는 무게가 12.8톤에 불과합니다. 총 753대가 발주됐습니다. 

용접 강 철장급을 해 소구 결 소총탄 방호 능역을 갖고 있습니다. 부가 장갑을 설치하면 사방 14.5mm 탄, 전면 30mm 탄 방호능력을 갖는다고 합니다. 

 

 

2. 제원 알아보자

길이 6.39m
너비 2.69m
탑승인원 승무원3명,보병6명
엔진마력 275마력 디젤엔진
최고속력 시속 100km
주무장  부시마스터 25mm, 체인건1문 7.62mm기관총 

 

미 해병대는 궤도형 AAV도 운용 중입니다. 

이 AAV는 1972녀부터 양상 됐습니다. 한국군도 국내에서 면허 생산해 운용하고 있습니다. 길이 7.94m, sjql3.27 m, 높이 3.26m로 승무원 3명 외에 해병대원 21명을 태웁니다. 

 

40mm 자동 유탄 발사기 1문과 구경 12.7mm 기관총으로 무장합니다. 400마력짜리 엔진을 장착해서 야지에서 25~32km, 수상 13.2km, 도로에서 시속 72km 속력을 낸다고 합니다. 

 

 

미해병대 ACV관련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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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호주 정상회담서에 의하면 K9 자주포 30문 K10 탄약운반 장갑차 15대 납품, 생산하기로 하였으며 명품 K9 자주포 7번째 수출 쾌거를 올린 셈이 됩니다. 호주 현지 생산시설 걸립 등 현지화 전략 주효합니다. 

한 화대 펜스가 호주 정부와 K9 자주포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K방산 수출의 새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이번 계약은 13일 문제인 대통령과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가 캔버라 국회의사당에서 양국 정상회담을 진행하는 가운데 체결됐습니다. 

행사에는 한화 디펜스 대표와 리처드 조 한화 디펜스 호주 법인장 등 주요 관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호주 정부는 육군 현대화 노력의 일환으로 LAND 8116 자주포 도입 사업을 추진해 왔으며, 2020년 9월 한화 디펜스의 K9 자주포를 단독 후보 기종으로 선정한 후 최종 협상을 진행해 왔습니다. 

 

한화디펜스 K9자주포 이미지 

1. 한화 디펜스 K9 자주포 관련 내용

계약 체결에 따라 한화 디펜스는 호주 육군에 K9 자주포 30문과 K10 탄약운반장갑차 15대를 공급하게 됩니다. 

이는 K9자주포를 Five Eyes국가에 처음으로 수출하는 것이고 아시아 국가 중 처음으로 주요 무기체계를 호주에 수출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특히, 호주 빅토리아주 질롱 시에 자주포 생산시설을 건립해 현지에서 자주포 생산 및 남 품을 진행할 예정이라 하고 호주 방위산업 활성화는 물론 한국-호주 방산협력 확대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번 계약은 세계 자주포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는 k9의 우수성과 신뢰성을 다시 한번 입증한 쾌거이며, 국내 방산기업 최초로 해외 생산거점을 확보함으로써 명실상부 글로벌 선두 방산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1-1. 호주 관련내용

리처드 조 한화 디펜스 호주법인장은 오랜 노력 끝에 호주군에 k9 자주포를 공금 하는 뜻깊은 결실은 맺어 영광이라 말하고 앞으로 호주 육군의 전투력과 자주 국방력 강화에 기여하기 위해 호주 현지 협력사들과 함께 적기 납품 등 약속된 사항들을 빈틈없이 지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한국과 호주 정부가 지속적인 국방, 안보 협력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이번 계약의 큰 원동력으로 꼽히고 양국 정상은 2019년 9월 국방, 방산 협력을 의제로 정상회담을 개최하였으며 이어 12월에는 외교, 국방(2+2) 장관 회의를 열어 방산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한 바 있습니다. 이어 지난 6월 10월 한국-호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경제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1-2. 한국 한화 디펜스 측 의견 

한화 디펜스 한국-호주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정상회담 자리에서 한화 디팬스가 양국 경제협력의 한축이 된 점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며, 이번 계약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국방부와 방위사업청, 국방과학연구소 등 우리 정부의 노력에 감사드린다고 하였으며  이어 한화 디펜스는 대한민국 대표 방산기업으로서 양국의 경제협력과 방산협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현지화 프로그램 등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세계 1등 자주포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k9성능개량과 첨단기술 개발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 강조하였습니다. 

 

K9 자주포는 155mm/52 구경장 자주포로 압도적인 화력과 높은 기동성 및 생존성을 자랑합니다. 장거리 화격 지원과 실시간 집중 화력 제공이 가능하며, 산악지형과 설원, 사막 등 다양한 환경에서의 운용성이 검증됐습니다. 

 

지난 2001년 터키를 시작으로 폴란드와 인도, 핀란드, 노르웨이, 에스토니아 등에 600여 문이 수출됐으며, 금번 호주와의 계약으로 k9수출 국가는 7개국으로 늘어났습니다. 

 

호주 육군이 운용할 k9자주포는 덩치가 큰 거미라는 뜻의 헌츠맨(Huntsman)으로 명칭이 지어졌으며, 기존 k9 자주포 대비 방호력과 감시, 정찰 능력이 강화된 제품이 납품될 예정이라 합니다. 

 

◈호주 자주포 도입사업(LAND 8116) 개요

호주 자주포 도입사업에 수출되는 K9 헌츠멘 이미지  출처: 한화디펜스

◈AS9 HUNTSMAN

사업예산 9억~13억 호주달러(AUD)
공급 품목 AS9자주포 30문, AS10탄약운반차 15대 정비 부품 및 시험정비 등
납품 기간 25~27
생산 시설 22.2분기 혀지공장 착공(빅토리아주 질롱시

◈K9 자주포 제원

K9자주포 기동훈련 이미지  출처 : 국방일보

구분 주요제원
전투 중량 47톤
전장(차체)전폭/전고 12m(7.44)/3.5m/3.4m
최고속도/항속거리 시속67km/360km
엔진 출력  최대 1,000마력
주무장/부무장 155mm/52구경 강선포/12.7mmk6기관총
최대 사거리 40km
발사속도 급속3발/15초, 최대6발/분(3분간)
초탄발사 정시 시 30초 이내, 기동시 60초 이내 
탄약 적재량 48발

 

◈K10 탄약운반장갑차 제원

k10탄약운반장갑차 이미지  출처: 한화디펜스

구분 주요제원
전투중량 47톤
전장 8.5m
최대속도/항속거리 시속67km/360km
엔진출력 최대 1,000마력
탄두 적재량 104발
장약 적재량 504유닛
이송속도 분당10발
탄약제고관리 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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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독일 권총 루거 P08을 아시나요. 오늘은 2차 대전 중 전리품으로 인지 많은 루거 P08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영화를 보면 교전 직후 점령지를 수색하여 전리품을 챙기는 장면이 종종 그려지고 있는 가끔 고가의 귀중품을 습득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대방의 무기 노획이 주목입니다. 

루거p08권총 이미지 

그 이유는 차후에 적들이 무기를 재사용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필요할 경우 아군이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아룬이 사용하기 곤란한 노획 무기는 추후 적들이 재사용하지 못하도록 즉시 파기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니만 언제 줄을지도 모르는 전쟁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적의 무기나 장비라면 일단 보유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중 모든 사병들에게 지급되지 않지만 휴대가 편리하며, 가지고 있다고 특별히 손해 볼 것이 없는 권총이 대표적입니다. 

 

원래 노획 무기는 부대가 관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실전에 투입된 많은 병사들을 일일이 통제하기는 힘든 법입니다. 

더구나 권총의 경우는 참전 기념물로 습득하려는 경우도 많습니다. 

 

뭐 굳이 무기를 기념물로 가지려 할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전쟁이라는 시공간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현상입니다. 어쩌면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기를 원하고 이를 기념하고자 하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모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2사세계 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 투입되었던 미군들이 전리품으로 갖고 싶었던 독일군 무기라면 단연코 루거 P08권총이었습니다. 

 

1. 독특한 특징이 있는 루거의 모습에 대해 

P08이 최고의 전리품으로 대접받은 이유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고장이나 오발이 자주 발 생하여 독일 군내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던 점을 생각한다면 굳이 무기로 재사용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실화를 바탕으로 2001년 제작된 유명한 TV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이를 노획하여 자랑하고 다녔던 병사가 어이없게 오발로 목숨을 잃는 모습이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무기라는 측면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P08의 인기의 이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자료에는 독일군 고급장교들만이 착용하였던 무기라서 그랬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이권 총을 노획하였다면 독일군 장교를 사살 혹은 포로로 잡았다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의미하므로 많은 미군 병사들이 가지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총을 잡았을 때의 그립감이 상당히 호 펴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폼이 나는 모양새입니다. 

 

루거자동권총 동영상 

우리와 달리 총기의 보유와 사용이 자유로운 미국인들에게 권총은 하나의 문화라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미군 중에는 군대에 오기 전에 이미 여로 종류에 총을 잡아보았던 이들이 많았고 따라서 새롭거나 쉽게 접하지 못했던 권총이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습니다 

 

비록 모든 독일군 장교들이 P08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회형적인 면에서 독일군을 상징할 만한 독특한 점이 있어 인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2. 미군도 사용하려 검토하였던 권총이다. 

제2차 대전을 상징하는 권총으로 만한 알려졌지만 사실 P08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1898년 독일 총기 제작사인 루드비히 뢰베 사의 게오르그 루거 가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기존의 권총을 계량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1893년 후고 보어 하르트 가 반자동 보어 하르트 권총을 개발했는데 구조가 너무 복잡하고 무거웠습니다. 

 

이러한 단점을 보오나 하여 탄생한 권총이 바로 P08으로 토글 액션 (Toggle action)이라 불리는 특수한 쇼트 리코일 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권총에 대해 처음 관심을 보였던 곳은 독일이 아니었습니다. 

1900년 스위스 육군이 7.62mm파라블럼탄을 사용하는 P1900모델을 3,000정 구입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납품 사례입니다. 

비슷한 시계에 불가리아에도 1 만정이 판매되었는데 민수용이었다고 알려지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후에 미군들이 혈안이 되어 수집하려 다녔지만 미군용을 ㅊ택되 수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1903년 미 육군 당국은 차기 권총 후보들로 P1900과 9mm 파라블럼 탄을 사용하는 P1902모델을 각각 구매하여 테스트하였습니다. 

 

심사 끝에 자국산 콜트(colt)를 채택하면서 미군 납품은 무산되었지만, 이후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재미있었던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3.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호전에 특화된 무기로 발전하다. 

이처럼 해외에서의 호평과 달리 정차 독일에서는 1904년 해군에 의하여 겨우 제식화 되었습니다. 해군용 모델은 105mm 총신을 가졌는데 1905년 독일의 식민지였던 동아프리카와 서남아프리카에서 저항 진압에 사용되면서 처음 올 실전에 데뷔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핵심인 육군에서는 1908년에서야 채택하였고 이때 비로소 P08이라는 제식 부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명성에 비한다면 자국 내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아 시작은 이처럼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향 생산되어 독일군에 납품돼 P08은 제1차 대전 당시에 참호전에 적합한 무기로 유명해지면서 갑자기 명성을 떨쳤습니다 

근접전을 위해 트롬멜 탄창과 개머리판을 장착한 P08 <출처 : (cc) Kar98 at Wikimedia.org>

참호전이 일상화되자 보병들이 적진까지 들고 뛰어간 소총들은 검이나 몽둥이 용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속사가 가능한 권총은 좁은 곳에서 적과 근접하였을 때 사용하기 편리한 무기로 등장하였습니다. 막연히 고급장교용 무기로 생각하던 P08이 이처럼 최전선의 사병들도 애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P08용으로 32발을 탑재할 수 있는 트롬멜탄창이 등장하였고 이를 장착한 P08마치 기관단총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최초로 전선에 투입된 기관단총인 MP18이 P08과 같은 9mm탄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한다는 재미있는 부분이 아니가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기관단총 처엄 자동 연사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수의 능력에 따라 속사가 가능하였고 30발이 넘는 장탄량은 상대보다 많은 이점을 제공하여 주었습니다. 

 

p08은 발사 후 복좌 장치가 후방으로 접히면서 탄피를 배출시키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탄환을 장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였습니다. 그러데 이러한 특징은 이물질의 총기내 유입을 불러와 툭하면 고장을 내는 원인이 되었고, 신뢰성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1922년 9mm탄의 사용이 금지되며 7, 62mm탄용으로 p08이 일부 생산되었으나 고가의 제작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양산이 되지 않았습니다. 

 

4. 권총 성능보다 모야으로 얻어진 유명세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독일군은 재부 장하면서 새롭게 개방된 발터(Walter) P38을 표준 권총으로 채택하였습니다. 

이처럼 p08은 도태될 운명이었지만 전쟁이 거대해지고 무기와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부족한 수량을 보충하며 전쟁 말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일부 자료에는 1945년까지 p08이 생산되었다고는 하는데  제2차 대전 당시에 사용된 대부분이 1922년 이전 생산된 재고물량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구시대의 무기가 되어버린 p08이 최일선에서 활약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형식적으로 무장을 하는 고급장교, 해군 승조원, 공군 조정사 그리고 점령지를 관리하는 후위 부대에서 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적에게 포위된 고급 장교들이 명예를 지키려 자살하는 데 사용하는 무기로 인식되면서 연합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P08이 본의 아니게 독일군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루거 권총은 명중률이 높고 장탄수가 많다는 장점을 갖추지만, 툭하면 작동이 불량일 만큼 신뢰성이 너무 문제가 많아 오래전에 사라질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 상황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들었고 그로 인해 성능에 비해 명성을 얻은 권총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종전 후에는 군경용으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였음에도 콜렉터들에게 골동품으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어쩌면 이처럼 눈요기 감으로 나마 볼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인 멋진 외형의 루거 P08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생각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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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도전을 수행하다. 

토요일 아침이 되자 대운들은 지정된 시간보다 앞서 부대에 집결했습니다. 

최종 검열을 위해 인진 구출 계획의 수정과 장비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충동 직전까지도 새로운 정보들이 속속 들여왔기 때문입니다. 

엔테베 작전 -작전계획 파해치기. 썸네일 이미지

 

장비점검이 끝나자 공격 부대인 사이렛 메트 칼의 지휘관인 요나단'요니' 네타냐후 중령은, 이작전의 초대 목표는 인질 구출이지 적의 근거지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시간이 가잔 중용한 용소 중 하나였습니다. 30분에서 1시간 안에 인질 구출부터 퇴출까지 완수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질 구출에 직접적인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목표물 이외에는 가급적이면 교전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질 구출에 성공하고 나면, 그땐느 부주적인 목표물과도 교전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방침을 세우고 우발 사태 발생 시 행동요령들을 토의하면서 사이렛 매트칼의 전술 토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갔습니다. 

 

11시 30분경 사이렛 매트칼과 공군 수송 비행대대를 포함한 구출 부대는 합참의 장성들 앞에서 작전계획을 보고 했습니다. 

구출 부대는 13시 20분 로드 공항에서 출발하여 시나이반도의 사름알세이크 항공기지로 향했습니다. 

수송기와 지상 구출 부대와의 합동훈련은 아질 실시된 바가 없었고 지휘계통도 조종 대고 있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정부는 아직 구출작전의 실시 여부를 결정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비 기를 포함한 5대의 c-130 수송기는 러시아 정보수집선과 이집트 레이더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저공비행으로 사막 위를 날았습니다. 무더운 사막 위를 저공비행하던 수송기는 심한 난기류까지 만나서 샤름 알 셰이크 항공기지에 착륙했을 때에는 모든 대윈들이 심한 멀미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는 사이렛 매트칼 대운 중 1명은 심한 구토 증세로 구출 작전에서 제외되기까지 했습니다. 

 

2. 아프리카 대륙으로 출발하다. 

15시 30분 숌론 장군은 구출 부대의 출동을 명령했습니다. 

더 이상 출발을 미루었다가는 자정의 공격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왔기 때문입니다.. 라빈 수상이 아직 구출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임무가 취소된다면 부대를 소환하면 그만이었습니다. 

 

1번기에는 숌론 장군과 지휘부, 요니와 사이렛 미트 칼 대원 29명, 사이렛 차하님 대운 52명, 벤츠 승용차, 랜드 로보 2대가 실려 있었습니다. 2번기에는 지취부 추가 인원, 사이렛 찬하 님 17명, 그리고 장감차 2대와 숌론의 지휘용 지프 1대, 3번기에는 사이렛 골라니 30명과 장급 차 2대, 그리고 지프 1대, 4번기에는 사이렛 골라니 20명, 의료반 20명, 지상 재급유 요원 10명, 그리고 급유펌프가 실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잔뜩 별력과 장비를 실은 c-130은 이륙 시부터 제한 중량을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비행은 약 7시간 반이 걸리는 여정이었습니다. 샤롬 알 세이크를 이륙한 c-130 편대는 고도 50피트로 초저공비행을 하면 선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레이더 감사 망을 피해 홍해를 건너 에티오피아에 도달했습니다. 

 

일단 에티오피아 영공에 접어들자 c-130은 다시 고도를 2만 피트로 올리고 정상적인 비행을 했습니다. 

당시 에티오피아에는 대공 수색 레이더가 없었기 때문에 구출 부대가 발각될 염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 남남서로 비행을 계속하던 편대는 케냐의 북쪽을 거쳐 우간다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22시 30분경 드디어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몇 분만 더 가면 엔테베였습니다. 

 

c-130이 엔테베 공항 관제탑과 착륙 중인 브리티시 항공 여객기의 교신 내용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한편 작전의 총고나 지휘를 위한 공군 사령부도 출동했습니다. 에쿠 델 아담 합참 부의장과 벤야민 펠레드 공군참모총장은 보잉 707 지휘 통제기에 탐승하여 구출 부대의 총괄적인 지휘와 이스라엘 본국과의 연락 임무를 맡았습니다. 

 

3. 야간의 착륙을 하다. 

계획에 따라 나머지 c-130 수송기 3대는 편대에서 이탈하여 상고에 대기하고 1분기가 엔테베 공항으로 접근을 시작했습니다. 숌론 장군과 요니 줄 령도 조종석에 모여 지상을 향해 c-130이 내려가는 순간을 지켜보았습니다. C130은 모든 조명을 끈 채 레이더만으로 고도를 측정하면서 지상으로 향했습니다. 원래 야시경을 사용하기로 했었지만 장비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어 레이더 착륙을 감행했습니다. 

 

페테랑 조종사 샤니 중령은 완벽한 조정하에 기체는 1976년 7월 3일 23시(엔테베 현지 시각으로는 자정)에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엔테베 작전상황이미지- 1번기가 23시(현지 시각 자정)를 기하여 착륙을 개시하면서 구출작전이 시작되었다.

 

기체가 착륙하자 기내는 작전 준비로 바빠졌습니다. 사이렛 매트칼은 벤츠와 랜드로버의 시동을 켜고 출발할 준비를 했습니다. 한 면 사이렛 찬하 님 대원 10명은 착륙한 뒤 정지하기 위해 감속하는 c-130의 사이드 도어로 뛰어내려 활주로에 비상등을 설치했습니다. 활주로의 끝에 도착한 c-130은 기수를 돌려서 구청사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c-130의 후방 램프가 열리면서 33대의 차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간다군으로 위장한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이 드디어 구출작전을 시작한 것입니다. 

 

4. 밤의 정적을 가르는 총성 소리. 

29명의 사이렛 메트 칼 대원들은 모두 우간다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벤츠 승용차 1대와 랜드로버 군용 지프 2대에 탑승했습니다. 

 

라이트를 켠 3대의 차량은 약 70km 속력으로 달렸습니다. 라이트를 끄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오히려 끄고 달릴 경우 우간다 경비 병력에게 의심을 살 위험이 있었고 또 어두운 밤에 헤드라이트를 켜면 강력한 빛 때문에 눈이 부셔 경기병들이 차량 안의 이스라엘 특수부대원들을 알아보기 힘든 게 분명했습니다. 

약 1분을 달리자 차량 행력은 구청사로 향하는 차량 전용 도로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길 양쪽에서 우간다군 경비병 2명이 나타났습니다. 

오른쪽 경비병이 벤츠를 향해 정차 명력을 내렸습니다. 벤츠가 계속 달리자 경비병은 소총을 장전하고 차량을 세우라는 수신호를 보냈습니다. 경비병이 사정권 내에 들어오자 요니는 벤츠의 속도를 줄이고 마치 신분을 증명이라도 할 듯 창문을 내렸습니다. 

뒷좌석에 앉은 요니와 다른 대원은 소음기를 단 베레타 M1951권총을 경비병들에게 발사했습니다. 

그러나 경비병은 쓰러지듯 총알을 피하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우간다군으로 위장한 사이렛 매트칼의 기만전술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비록 최초의 교전으로 기습의 효과를 잃기는 했지만, 테러범들은 어둠 속에서 구출부대를 우간다군으로 착각했다. 사진은 우간다 군복과 AK로 무장한 사이렛 매트칼 대원의 모습이미지.

아무리 숙련된 대테러 부대원이라 해도 이동하는 차량에서 좁은 승용차 창문 사이로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길가 오른쪽에 있던 경비병은 이러서 서 벤츠 앞에 소총을 발사했습니다. 

 

왼쪽 경비병은 구청사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후방의 두 번째 랜드로버에 탐승한 대원들이 사격에 가세해 경비병들을 모두 사살했습니다. 

그라나 밤의 정적을 가르는 총성으로 인해 이제 기습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요니는 대원들에게 전속력으로 달리 것을 지시했습니다. 청사까지는 겨우 200m도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5. 구청사로 돌입 시작. 

구청사 쪽으로 다가가면서 요니의 눈앞에는 테러범들과 우간다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들 누구도 사이렛 메트 칼의 차량 행렬에 총격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구청사의 중앙홀 입구에 차량을 세운다는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요니는 벤츠와 랜드 로보를 구청사 관제탐 아래쪽에 신속히 세웠습니다. 인질 구추 부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테러범과 우간다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니는 정차와 동시에 대원들에게 건물 소탕을 명령했습니다. 

사이렛 매트칼의 부지 휘관인 무키 배 처 소령은 자신의 공격 제대를 이끌고 구청사 건물로 돌진하면서 건물 밖의 우간다 병사들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테러범들은 달하나면서 외쳤습니다. 

 

사일렛 메트 칼은 일단 구청사에 도착한 이후 3개 제대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대운들은 작전계획에 따라 구청사의 진입구에 집결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운들이 진입을 주저하는 듯 보였습니다. 

요니는 전진 하라고 수차례 소리쳤지만 무키는 계속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핵심인 구출작전에서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그것은 인질의 사망으로 연경 됐습니다. 요니는 무키 앞으로 달려 나와 도력을 지시했습니다. 

실제로 지연된 시간은 15초 정도였지만, 요니에게는 1초가 아까웠던 것입니다. 

 

그 순간 도열한 대원들의 뒤에서 총성이 들렸습니다. 관제탐 뒤에 나무 박스 사이에서 우간다 경비 영이 대원들을 향해 총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대원들은 곧바로 응시하여 불청객을 제압했습니다. 

그러나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인 벌어졌습니다. 방금 전의 총격에 요니가 쓰러졌던 것입니다. 

 

요니 중령이 쓰러졌다는 소리를 대원 하나가 외였지만 대원들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요니는 이미 작전의 준비 단계에서 대운들에게 확고히 지사 했으며 자신을 포함하여 누가 쓰러지더라도 개의치 말고 작전을 수해하라흔 것이었습니다. 

대원들은 요니를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그의 지시대로 3개 제대로 나뉘어 작전을 진행했습니다. 

 

엔테베 공항 구청사 공격도 이미지

6. 구청사에서 벌어진 혈전

요니의 돌격 명령에 제일 머전 달려 들어간 것은 이미르 오퍼라는 22 세의 젊은 대원이었습니다. 

아미르가 중앙홀의 입구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보이자 테러범 1명이 유리창을 뚫고 AK-47 소총을 난사했습니다. 

아미르는 첫 번째 출입문 대신 두 번째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갔습니다. 

 

실내 한가운데 인질들이 엎드려 있었습니다. 또다시 총알이 아미르 쪽을 날아왔습니다. 아미르는 누 운자 신을 노리는 테러범을 향해 기관단총을 발사하여 사실했습니다. 그리고 CQB(근전전 투기 술)의 기본에 따라 오른쪽 벽을 계속 따라가면서 테러범을 찾았습니다. 

 

한편 아미르의 뒤를 따라 두 번째로 진입한 암논 펠레드가 그의 왼쪽을 돌면서 실내를 수색했습니다. 그때 엎드려 있던 인질들 사이에서 2명의 남녀가 AK소총을 들고 아미르를 겨누면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원래 이들은 창밖에서 이동하고 있는 구출 부대원들을 조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달려 들어온 아미르에 놀라 반사적으로 조준 방향을 발 꾼 것이었습니다. 

 

펠레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테러범 2명을 탄창 하나로 애 치웠습니다. 

바로 이때 무키 소령과 아모스 오랜 이라는 대원이 동시에 중앙홀로 들왔습니다. 기둥 뒤에 숨어 있던 테러범 한 명이 아모스를 겨누고 AK소총을 발사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아모스도 그 테러범을 발견하고는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둘은 것의 동시에 총을 발사했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 났습니다. 아모스의 탄환이 테러범의 총을 뚫고 들어가 공기를 멈추고 테러범을 사살한 것이었습니다. 불과 0.1초도 안 되는 간발의 차이로 아모스의 발사가 빨랐던 것입니다. 

 

7. 대혼란의 현장 

C-130이 착륙한 지 3분 만에 테러범 7명 중 4명을 사살하고 인질을 확보했습니다. 그라나 아지 인질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우간다군을 오나 벽하게 제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테러범들이 공격해올 가능서도 높았습니다. 인질을 확보하고 중앙홀을 점령한 작전 1 제대의 대원들은 긴장했습니다. 

 

제일 먼저 진입한 아미르는 갖고 있던 확성기로 영어와 히브리어로 인질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혼란에 빠른 인질들은 간단한 지시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질들 가운데 1명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대원들이 긴장하고 총을 겨누었지만 어린 소녀임을 알고 총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인질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습니다. 대운들의 지시를 듣지 못하고 일어나 19세 청년이 테러범으로 오인되어 사실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편 인질 가운데 또 다른 2명이 사살된 채 발견되었는데 테러범과 대원들 간의 총격이 오가는 과정에서 도비탄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질을 확보하고 있는 사이에 작전 1 제대의 나마지 팀은 VIP 라운지 점령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원 들은 VIP라운지 정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원중 한 명이 안쪽으로 수류탄을 던졌지만 수류탄은 도로 빵으로 튀어나와 대원들 옆에서 터졌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대운 1명 만이 파편에 경상을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곧바로 다른 진입구를 찾은 팀이 VIP라운지로 돌입하자 2명의 손을 올이고 대원들에게 다가왔습니다. 

 

대원들은 그들에게 멈추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계속 다가왔습니다. 대원들은 이들이 인질인지 테러범인지 잠사 고민하는 사이 다가오는 자들의 허리춤에서 수류탄 주머니를 보았습니다. 

 

대원들은 주저 없이 소총을 발사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테러범의 손에 꽉 쥐어져 있던 수류탄이 떨어지면서 폭발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기적적으로 중상자는 없었습니다. 팀원들은 VIP라운지 인근을 계속 수색하다가 한쪽 방에서 중어 있는 테러범은 발견했습니다. 

 

대원들이 방금 가한 치열한 총격 과정에서 도비탄에 맞아 숨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8. 우간다군을 제압하다. 

작전 1세대가 인질을 구출하는 사이 2 제대는 구청사의 2층을 공격했습니다. 

2층은 원래 식당이 있던 자리로 인질 사건이 발생한 이후 우 우간다 군 경비 병력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눈에 보이는 병사들을 하나둘씩 사살했습니다. 

그란 막상 2층에 올라갔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담요와 침낭뿐이었습니다. 총격이 시작되자 우간군은 현장에서 도망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한편 구청사 밖에서는 지휘 통제반이 관제탐의 우간다군과 치열하게 총격을 주고받았습니다. 지휘 통제반은 랜드로버에 탑재된 50 구경 기관총을 관제탐에 발사했지만 적의 사격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청사를 점령한 대운들도 교전에 참가했지만 적의 사격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소 총격이 잦아들자 군위관이 쓰러진 요니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AK소총 찬이 요니의 쇄골 아래를 뚫고 들어갔습니다. 부상이 심해서 요니를 살리 수 없음을 안 군의관의 대처에게 상황을 알렸습니다. 부지휘관인 부처는 자신이 작전지휘관을 인계받았음을 전 대원에게 알렸습니다. 이제 문제는 관제탐을 포함한 청사 주변을 제압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편 작전이 시작된 지 6분이 나나 2분기가 착륙했습니다. 1분기가 차량을 전개한 장소에 대기 중이던 숌론 장군은 2번 기로부터 자신의 지휘 지프를 수령하고 장갑차 2대를 이끌고 구청사에 도착했습니다. 관제탑에 있던 우간다군이 간헐적으로 사격을 가해오자 숌론은 장갑차에 교전을 명령했습니다. 장갑차에서 기관총과 RPG를 발사하자 관제탑은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교전 와중에 3번 기도 도착했습니다. 나머지 장감차 2대가 3번 기로부터 발진하여 구청사 뒤편에 전개했습니다 엔테베 도심으로부터 이어지는 도로에서 나타날 지고 모르는 우간다 증원 별 역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사이 최초에 전재했던 장감차 2대중 1대가 인근의 우간다 공군기 쪽으로 향했습니다. 장갑차는 주기되어 있던 우 간다 군 미그 -17기들을 산산조각 냈으며 이스라엘군이 우간다군의 미그기를 공격한 것은 이스라엘 군의 안전 한 퇴출을 위해 사전에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디 아민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복수라는 성격이 더 짙었습니다. 

 

이로써 작전 개시 15분 만에 인질의 구출과 우간다군 제압이라는 어려운 임무가 와수 되었습니다. 

그라나 작전이 완전히 성공했다고 말하기에는 일렀습니다. 모든 인질과 부대원이 엔테베 이서 안전히 퇴출하기 전까지는 작전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특수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퇴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9. 발 빠른 퇴출 하다. 

몇 분 후에 재금유팀과 의료진을 실은 4분기가 도착했습니다. 

의료진이 요니를 포함한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가운데 재급유팀도 재 파릴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한편 구청사를 확보한 구출 부대는 인질을 청사 앞쪽에 모아 랜드로버와 트럭으로 수송까지도 후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인질의 호송에 여념이 없는 사이 엔테베로부터 이어진 도로에 우간다군을 태운 수송트럭 2대가 나타났습니다. 

그라나 이스라엘군이 준비한 장갑차는 손쉬운 표적을 쓸어버렸습니다. 

 

어둠과 혼란 속에서 인질들은 구출 부대원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원들이 여라 차례 소지품을 버리고 차량에 탑승하려고 주의를 주었지만, 인질들 중 몇몇은 소지품을 챙기기 위해 호송 대열을 이탈하여 구청사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또 공포 속에서 히스테리에 빠진 인징 몇몇은 대원들의 지시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원들이 강제로 수소기로 끌고 가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어둠과 혼란 속에서 대원들은 인질의 수조차 점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퇴출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질이 아니라 재급유였습니다. 

사이렛 미트 칼이 구청사를 점령하는 사이 사이렛 찬하 님은 교전 없이 신청사를 점령하고 연료탱크를 확보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사일렛 매트칼과 사이렛 골라니가 구청서를 확보하고 인질을 소개하는 동안 재금유팀은 사이렛 찬하 님과 합류하여 신속하게 재급유를 시장했습니다. 수송기 4대에 전부 재급유하기 위해서는 무려 40분 이상이 추가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구출 부대에게는 이런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때 707 공중지휘 통제기로부터 긴급 전문이 들왔습니다. 케냐 정부가 이스라엘군의 재급유를 허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엔테베에서 나이로비 까지라면 약 1시간 거리로 현재의 연룔로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구출 부대는 재급유를 중단했고, 인질을 태 운수 송기 1대가 먼저 엔테베 공항을 이륙했습니다. 시계는 23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10. 구출 부대의 퇴출까지 90분 걸림. 

이렇게 인질을 소개하고도 구출부대의 상당수는 엔테베에 남았습니다. 인질 호송 수송기로부터 구출자가 모두 105명이라는 보고를 받자, 곤 중지휘 통제 기는 지상의 숌론 장군에게 남은 인질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정보에 따르면 인진 수는 106명 이어 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구출된 인질은 이스라엘인 93명과 에어프랑스 승무원 12명을 합해 총 105명이었습니다. 구출되지 못한 인징 1명은 치료를 위해 구청사에서 병원으로 옮겨졌던 73세 도리프 로크였습니다. 그녀는 다음날 이디 아미의 수하들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숌론은 잔류 인질이 없는지 청사 주변을 수색했습니다. 피랍기 내부에 인질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기된 에어버스기까지 수색했습니다. 

 

철저한 수색 끝에 구출 부대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인질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편 구출 부대는 공항 청사 주변의 주차장에 시간 지연식 폭약을 설치하여 우간다군의 추적 의지를 꺾고자 했습니다. 

 

7월 4일 0시 30분 3대의 C-130이 엔테베를 이륙하면서 모든 작전은 종료되었습니다. 

C-130이 최초로 착륙한 지 90분 만에 인질을 구출하고 모든 대원을 회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인도한 모세처럼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20세기 최대의 인질 구출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작전 결과, 테러범 7명과 우간다군 45명이 사사되었고, 인질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구출 부대원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상 최대의 인질 구출작전에서 사망한 단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출 부대의 지휘관 요니 네타냐후였습니다. 총망받던 장교인 요니 중령은 지휘관이 최전선에서 이끄는 강한 군대 이스라엘 국방군의 전통을 장렬하게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과연 이스라엘 정부와 국방군이 이런 위험한 작전을 감행했어야만 했는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욤 키푸르 전쟁의 실망스러운 성과로 인해 사기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대테러작전에서는 1974년 마일라 초등학교의 인질 구출작전에서 23명의 초등학생 사망하고 , 1975년의 텔아비브 사보이 호텔에서는 인질 8명과 3명을 잃는 등 눈에 띄는 실패를 거듭해 왔습니다. 작전 실패라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군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도박에 뛰어든 셈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리더십과 창조력, 강인한 전투력, 길고 강한 애국심으로 무자한 젊은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사상 최악의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사상 최대의 인질 구출작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수행해 성공해냈습니다. 

무엇보다도 뛰어난 전문 특수작전에 대한 지도부의 신뢰가 없었다면 작전은 실행조차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최고의 부대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예상이나 인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부가 일선 부대를 엄마나 굳게 신뢰하는 가의 문제라는 점을 엔테베의 인질 구출작전은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2021.12.09 - [특수부대] - 사이렛매트칼- 이스라엘의 대 테러 부대/ 엔테베 작전 1부

 

사이렛매트칼- 이스라엘의 대 테러 부대/ 엔테베 작전 1부

이스라엘 육군 최정예 특수부대로 특수 정찰, 대테러 진압, 인질구출 등과 같을 고난도 임무를 수행하는 대테러부대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일렛은 히브리어로 '정찰대'라는 뜻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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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0 - [전쟁사] - 엔테베 작전-20세기 최대의 인질구출 작전을 말하다. (2부)

 

엔테베 작전-20세기 최대의 인질구출 작전을 말하다. (2부)

엔테베 작적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인질 구출 작전으로 적의 허를 찌른 특수작전이었습니다. 그럼 1부에 이어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1. 완성되지 못한 작전계획과 협상시한 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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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테베 작적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인질 구출 작전으로 적의 허를 찌른 특수작전이었습니다. 그럼 1부에 이어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1. 완성되지 못한 작전계획과 협상시한 

이작전 계획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c-130 4대를 엔테베 공항에 착류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엔테베 공항은 최근에 개수가 이루어져 구청사와 신청사로 나눠 있었습니다. 인질들이 있는 곳은 구청사 쪽이었습니다. 

엔테베 작전당시 c-130 수송기에서 내리고 있는 사이렛 메트칼 대원들 모습

c130 1분기가 구청사에 착류 하면, 사이렛 메트 칼이 인질 구출 작전을 수행합니다. 

1번기에 사이렛 메트 칼과 함께 동승한 공수부대원은 신청사를 점거하기로 하고 2분기에는 탑승하는 장갑차와 특수부대 및 공수부대는 사이렛 메트 칼을 증원하여 화력지원 임무를 맡게 되고 3, 4번기에 탑승한 예비 병력에게는 구출한 인질들을 안전하게 탑승 하키는 임무를 부여하게 됩니다. 

 

구출 작전의 총지휘관인 덴 숌론 준장은 구출작전 자체에 대해서 대체로 만족했으나, 전력 구성에 대서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구출 부대는 테러범뿐만 아니라 우간다군과도 교전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작전계획이 아진 구체와 되지 못한 사이에 협상 시한이 다가왔고 구르합참의 장이 라빈 수상에게 아직 군사작전을 실행할 수 없는 상태라고 보고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긴급회의를 열고 테러범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여태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라비 정부는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해 협상을 벌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테러범을 풀어줄 용의까지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무려 206명의 인질이 붙잡혀 있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교적 부담이 큰 탓도 있었습니다. 

 

 

한편 이런 이스라엘의 결정을 받아들인 테러범들은 인질 처형 시기를 7월 4일 일요일로 연장해주었습니다. 

또한 테러범은 100명의 인질을 추가로 풀어주었습니다. 

이제 엔테베 공항에는 이스라엘 국민이거나 이스라엘 국적이 아닌 유대인들, 그리고 에어프랑스 승무원 12명까지 포함해 총 106명의 인질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유대인을 공격하겠다는 테러범의 의도는 명백해졌습니다. 

 

이는 오히려 여론에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정부에게 항전 의지를 심어주어 군사작전을 결시하도록 재촉하는 계기가 되게 됩니다. 

 

2. 구출 부대의 규모를 논하다

한편 당시 국방장관이던 시몬 페레스는 참모들을 불러 의견을 물으면서 구출 작전의 가능성을 심도 깊게 논의했다고 합니다. 그를 합참의장은 여전히 단 이틀간의 준비로는 이러 대규모 구출 작전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며 작전은 사상자 발생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스라엘군으로서는 마알랏 초등학교 참사(1974년 5월 15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테러범 3명이 마알랏의 한 초등학교에 난입하여 105명의 학생과 교사를 인질로 잡은 사건) 이후 더 이상 군사작전으로 인한 재앙을 감당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주요 목표지점인 엔테베 공항 구 청사에 대한 정보가 너무 피상적인 점도 문제였습니다. 열띤 토의 끝에 페레스 장관은 곧바로 세부 작전의 입안과 훈련을 실시를 지시하였고 숌론 장군을 작전 지휘관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모들은 작전은 언제라도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회의가 끝난 직후 숌론 회의가 끝난 직후 숌론 장군은 사이렛 매트칼 부대장 요나단 요니 네타냐후를 호출했습니다. 

숌론이 제사한 작전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이렛 매트칼이 구청사와 인근 지역을 점령하는 동안 공수부대와 골라니 부대가 신청사와 관제탑을 제압하고 인질 구출 부대의 증원 및 호위 병력으로 대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숌론은 대규모 병력으로 전력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요니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더욱 작고 기동성 있는 부대의 규모를 유지행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숌론의 작계는 너무 광대해서 실행에 옮기는 데 제한 사항이 많으므로, 병력의 규모를 줄여 더욱 유연성 있는 작전을 실행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요니의 주장이었습니다. 

 

결국 숌론은 부대 구종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요니가 작전의 세부를 구상하도록 전체적인 기본 방안만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요니는 밤새 작전의 세부를 검토했습니다. 

 

3. 작전의 세부사항 알아보다. 

결국 다음날인 7월 2일 금요일 오전 7시를 가해 숌론은 최종 작전 명력을 하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석방된 인질들을 조사하면서 인질의 정확한 위치, 우간다군의 배치 현황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 중이었지만, 이는 그때까지 사이렛 매트칼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작전 계획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상태로 입안되었습니다. 

 

구분 구성부대 및 지휘관 임무
지휘제대 지휘통신부
(지휘 : 댄 숌론 준장)
1. 작전 전반에 대한 지휘통제
2. 통신 총괄
공격제대 사이렛 매트칼
(지휘 : 요니 네타냐후 중령)
1. 구청사 내의 인질구출작전 실시
2. 구출 인질을 C-130까지 호송
지원제대 사이렛 찬하님/사이렛 골라니
(지휘 : 숄 모파즈)
1. 적 증원 병력이 공격제대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차단
2. C-130을 보호하며 지상급유 지원
3. 주기된 우간다군 미그기를 파괴하여 차후 추적을 방지
4. 구출된 인질들이 C-130에 탑승할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
항공제대 C-130 비행대대
(지휘 : 요수아 샤니 중령)
1. 구출부대를 엔테베 공항까지 은밀히 수송, 야간 착륙
2. 지상에서 재급유 실시 후 인질 및 병력을 싣고 퇴출

 

4. 공격 제대의 임무을 알아보다. 

우선 C-130 1분기가 모든 조명을 끈 채로 어두운 활주로에 착륙합니다. 이를 위해서 C-130 비행대의 대대장 샤니 중력이 직접 1번가의 조종간을 잡을 예정이었습니다. 

한편 착륙한 1분기가 활주로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특수부대 1배 조가 수송기에서 뛰어내려 후속 기체를 위해 지상 유도등을 설치합니다. 

1번기에서 내린 구조대는 우간군으로 위장하고 구청사로 접근합니다. 

 

원래는 사이렛 매트칼이 이디 아민 일행으로 위장하고 구청사로 접근하려고 했었습니다. 때마침 이디 아민이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에서 회담을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실로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민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중지되었고, 대신 우 간군 고위 장성의 방문처럼 위장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35명의 사이렛 메트 칼 대원들은 몯 우간다 군복을 입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대원들은 우간다인 처럼 보이기 위해 검은색 위장크림을 칠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야간에 기습하는 작전이므로 우간다군 결계병에게 발각될 위험이 적었고, 얼굴에 검은색 위장크림을 칠할 경우 오히려 내부 소탕 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한편 차량으로는 벤츠 승용차 1대, 랜드로버 군용 지프 2대를 선택했습니다. 

랜드로 보는 우간군이 흔히 사용하는 병력수송차량이고, 벤츠는 우간다 장성이 관용차량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엔테베 작전에 대한 동영상

일단 구청사에 도착한 부대는 3개 조로 나뉘어 작전 1팀이 3개 출입문을 동시에 파쇄하여 1층으로 진입한 뒤 테러범을 제압하고 인질은 구출합니다. 

이와 함께 작전 2팀이 구청사 2층으로 올라가 주둔하고 우간군을 제압합니다. 

한편 지휘 통제반은 청사 외부에서 대기하면서 랜드로버에 탑재된 50 구경 기관총으로 위협 지대를 제압합니다. 

 

요니는 관제탑을 공격 목표에서 제외했습니다. 

관제탐을 공격하려면 인원이 더 필요한 데다가 공격 과정에서 희생자가 나올 확률 또한 높았기 때문입니다. 특수전에서는 목표가 집중될수록 소요 인원과 작전 시간이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상대적으로 전력 우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5. 지원, 항공 제대의 임무를 알아보자.

인질구출 부대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바로 구청사 200미터 부근에 위치한 우간군의 기지였습니다. 여기에는 무려 1,000명의 병력과 함께 미국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을 차단하는 임무는 사일렛 매트칼이 아닌 사이렛 찬하 님과 사이렛 골라니로 구성된 합동기동부대에게 밭겨졌습니다. 

다수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 제대에는 M113 장갑차 4대가 포함되었습니다. 

 

사이렛 매트칼이 인질을 구출하는 동안 사이렛 찬하 님은 구청사 인근에 차단선을 구축하여 우간다군의 증원을 막습니다. 

또한 일부가 우간다 공군의 미그기에 폭탄을 설치하여 적 전투기의 C-130 요격을 사전에 방지했습니다. 

한편 사이렛 고라니는 C-130 근처에 남아 항공기를 보호하고 인질과 구출대의 퇴로를 확보했습니다. 

 

항공 제대는 사실상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았습니다. 4,000KM 거리를 급유 없이 침투 비행하고, 야간에 조명도 없이 아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적진 한 가우데에 착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지휘관과 조정 사들은 그 짧은 시간에도 훈련을 반복하면서 단기간 내에 야간비행기술을 놀랄 만끜 향상했습니다. 

 

이렇게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최종 협상 시한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작전의 실행까지는 채 이틀도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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