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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시간에 이어 VSS빈토 레즈에 특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또 제원에 대하여 살표 보도록 하겠습니다. 

VSS 빈토레즈의 내부구조 <출처: Общественное достояние>

1. VSS 빈토 레스 특징을 알아보자. 

VSS 빈토레즈는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이며 AK-47 계열 소총의 롱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AK-47소총은 가스 피스톤을 밀어내는 부분이 거의 소염기와 가깝게 맨 앞쪽에 있는데 반하여, 빈토 레즈는 거대한 소음기에 비하여 총열이 짧아 가스 피스톤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습니다. 

 

AK와 마찬가지로 회전식 노리쇠를 채용하였는데, 6개의 러그로 약실을 폐쇄하고 개방합니다. 격발 방식은 독특하게도 스트라이커 방식을 채용했습니다. 

 

한 가지 독특한 것은 VSS빈토 레즈는 절삭가공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AK 소총들은 양산의 편의성과 비용절감을 위하여 프레스 가공으로 만들어졌지만 빈토 레즈는 특수부대용 특수 촐기로서 높은 신뢰성을 요구했고 제식 소총만큼 대량으로 생산할 일도 없었으므로 절삭가공이 채택되었습니다. 

 

내부구조도 AK와 유사하면서 독특한데, AK처럼 리코일 스프링이 총 몸 상부 덮개를 동시에 고정시키는 구조이지만, 그 수직으로 아래쪽에 리코일 스프링을 하나 더 장착하였습니다. 

 

또한 소음기로 인해 발생하는 탄매가 사수의 눈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 총 몸 상부덕ㅂ개와의 결합부에는 고무링이 장착되었습니다. 

 

 

VSS레토레즈 내부 작동구조 원리설명 동영상

AK와의 또 다른 차이점은 단연 발 조정 간에 있습니다. 

AK소총은 총몸의 오른쪽에 조정 간에 장착되어, 맨 위로부터 안전-연발-단발로 조작됩니다. 

빈토 레즈도 AK 소총처럼 총 몸 오른쪽에 레버가 달려있지만, 이는 안전-사격만을 조절합니다. 단발과 연발을 선택하는 조정 간은 방아쇠 울 안쪽에 방아쇠와 권총 손잡이 사이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조정간 레버를 안쪽으로 당기만 단발이라고 바깥쪽으로 밀어내면 연발로 발사되므로, 사격 중에도 비교적 간단히 단-연발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1-1. 빈토 레즈의 최대 특징

역시 소음기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총열의 길이는 200mm(7.9인치)로 짧은 편이며, 총열에는 54개의 구멍이 뚫려있어 소음기로 가스를 방출 시 키 도옥 되어 있습니다. 

소음기는 거의 40cm에 가까운 기다란 길이로, 약 1/3 정도가 총열과 결합되는 내장형이며, 음향 감소를 위해 일체형 베플을 장착하여 가스와 소음을 감소시킵니다. 제작사는 소음기의 성능을 1,500발까지 성능을 보장하는데, 사용자의 관리에 따라서는 사격장에서 5천 발까지 버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KGB 등 정보기관의 비밀작전을 위한 총기로 개발되었으므로 은닉하여 이동할 수 있을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빈토 레즈는 소음기, 총 몸, 개머리판의 3 부분으로 손쉽게 분해되어 이동할 수 있도록 요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MBNP-1 야시 조준경을 결합하고 3개의 탄탕과 함께 3 부분으로 분리된 총기를 450 ×370 ×140mm 크기의 브리프케이스에 휴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브리프케이스에 넣고 은밀하게 이동한 이후에 사격지점에서 총기를 결함 하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조준 기구는 기계식으로는 가늠자가 최대 400m까지 표시하도록 했습니다. 특수임무용이니만큼 소요군에서는 다양한 조준경을 결합할 수 있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조준경은 AK소총처럼 총 몸 좌측에 장착되는 도브테일 마운트 방식으로 PSO-1이나 PSV 주간 조준경에서 MBNP-1, NSPUM, NSPU-3 야시 조준 경부 투 PO 4 ×34 조준경까지 다양한 종류의 조준경을 장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편 개머리판은 AS발 소음 돌격소총과는 달리 고정식으로 목제로 만들어졌습니다. 

 

VSS를 현대화한 모델인 VSSM은 2014년에서야 등장했다. <출처: Общественное достояние>

한편 VSS 빈토 레즈는 1980년대 말에 제식 장비가 되다 보니 조준경 이외의 다 향한 부가장비를 장착할 수 없다는 한 게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실전 배치된 지 무려 27년 만에 현대화 모델인 VSSM이 등장했습니다. VSSM 총 몸 윗부분과 총열 덮개 부분에 파카 티니 레일은 장착하도록 하였으며, 폴 미머 플라스틱제 개머 미판에 칙 패드를 장착하여 접용점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탄창에 투명 플라스틱을 채용하여 잔탄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2. VSS 빈토레즈 운용현황

VSS 빈토레즈는 치명성을 갖춘 소음 총기에 목말라있던 스케츠 나츠들의 요구를 충족시켰습니다. 

1987년 시험평가 직후 곧바로 채용되면서 GRAU 분류명 6P29를 부여받았으며, 곧바로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한편 국내의 대테러 및 치안활동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으로 1990년 8월 수후미의 교도소 폭동 당시, KGB 소속 특수부대인 알파와 내무군 소속의 특수부대들이 진압 당시 VSS를 사용하면서 그 유용성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993년 10월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 최고의회가 예친 대통령의 의회 해산에 반발하며 의사당을 점거하자. 진압을 거부한 알파와 빔펠을 대신하여 누 무군 소속의 특수부대 비탸즈가 진입 작전을 펼칠 때에도 VSS빈토 레즈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VSS가 전투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체첸 재전에서부터였습니다. 

AS발 소음 돌격 소총과 함께 VSS는 러시아 특수부대들이 애용하던 총기였습니다. VSS와 AS의 공격에 피해를 입은 체첸 반군은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소음 소총의 공격에 치를 떨었습니다. 특히 야간 최대 사거리 300m 정도에서 매복 기습을 하면 반군들은 저항할 틈도 없이 제거되기 일쑤였습니다. VSS가 일선에 배치됨에 따라 특수부대는 더 이상 소음기를 장착한 AK소총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2000년대 접어들어 러시아가 체첸 테러범들의 공격에 노출될 때마다 VSS는 일선에 섰습니다. 

특히 2002년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이나 2004년 배스란 공립학교 인질극 등에서 FSB와 내무군의 특수부대들이 VSS와 AS를 주무장으로 테러범을 제압 해나 기도 했습니다. 이어진 돔바스 전쟁에서는 분리주의 반군에 의해 활용되었습니다. 

 

시리아 내전 개입에서도 러시아 특수부대들은 VSS와 AS를 무장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한편 2014년 VSSM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총기들을 조금씩 교체해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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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VSS 빈토 레즈 파생형 알아보기 

  • RG036: 최초의 시제 소음 저격소총 7.62mm 구경 RG037 탄환을 사용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VSS 빈토레즈 격소총의 초기 프로토타입인 RG036 소총 <출처: militaryexp.com>

  • VSS빈토 레즈: 1987년 채용된 양산형 총기. GRAU 분류명 6P29로 부여되었으며, KGB에 의해 빈토 레즈로 명명되었습니다. 

VSS 빈토레즈 소음저격소총 <출처: zonawar.ru>

  • VSSM: VSS의 현대회 모델. 2014년 발매되었으며, 현대적인 요구에 맞추어 피가티니레일과 조절 가능한 신형 개마 리판이 장착되었고, 양각 대외 투명 탄창을 채용했습니다. GRAU 분류명은 6 P29M입니다. 

VSSM 빈토레즈 <출처: Public Domain>

  • AS발: VSS 빈토 레즈를 기반으로 한 소음 돌격소총 모델. VSS와 거의 유사한 구조로 접철식 개머리판을 채택한 것이 특징입니다. 1087년 이후 계속적으로 채용되었으며 최근에는 이에 바탕한 개량형인 SR-3도 만들어졌습니다. 

AS 발 소음돌격소총 <출처: Public Domain>

 

4. VSS 제원 알아보기 

구경  9 x 39 mm (SP5, SP6)
제조사 KB 토치마쉬, 툴라 무기공장
중량 2.6 kg (PSO-1 조준경 장착시 3.7 kg)
전체길이 894 mm
총열길이 200mm
총구초속 280 ~ 295 m/s 
사거리 유효 350 m (머리 100 m, 몸통 200 m)
최대사거리 주간 400 m, 야간 300 m
장탄수 10발 또는 20발 들이 탄창
연사율 최대 800 ~ 900 발/분 (전투시 30~60 발/분)
가격 75,000 루블

 

2022.01.29 - [무기역사관] - vss 빈토레즈- 러시아 특수부대가 자랑하는 조용한 암살무기

 

vss 빈토레즈- 러시아 특수부대가 자랑하는 조용한 암살무기

오늘은 러시아 특수부대 저격 소총 VSS 빈토 레즈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요즘 배틀그라운드에서 핫한 소총으로 유명합니다. 개발 역사와 관련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개발의 역

rokmc76.tistory.com

 

 

 

참고문헌: 유용원의 군사세계 , 한국 국방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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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러시아 특수부대 저격 소총 VSS 빈토 레즈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요즘 배틀그라운드에서 핫한 소총으로 유명합니다. 개발 역사와 관련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러시아특스부대가 사용하고 있는 VSS모습 이미지 

1. 개발의 역사 

소련에서 채용한 최초의 실용적 소음 무기는 1930년대 마틴 형제가 개발한 브라잇 소음기는 2개의 감압실로 구성되었으며, 고무 패키로 기밀성을 유지했는데, 성능은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습니다. 브리밋 소음기는 2개의 감압실로 구성되었으며, 고무패킹으로 기밀성을 유지했는데, 성능은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습니다. 

 

브리밋 소음기는 기존의 총기에 결합하여 소음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설계되어 나강 리볼버는 물론이고 모신나강 소충에 까지 장착할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군의 소화기는 제식 소총과 유탄발사기가 위주였고 다 야한 옵션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소음 무기도 역시 제식의 소총이나 권총에 소음기를 추가하고 특수 탄약을 장작 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소총에서는 AKM이나 AK-74에 PBS-1 소음기를 장착하거나, 마카로프 PB나 스테츠 킨 APB 등이 활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기들은 사거리나 제압 능력, 소음 감소 등 그 어느 성능에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브라밋' 소음기는 일선 전장에서부터 적 후방의 파르티잔 활동에서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출처: warspot.ru>

냉전시절 특수정 차과 비밀임무 등 특수작전을 주도하던 것은 KGB(국가보안위원회)와 GRU(정보 총국)였습니다. 

상황을 보다 못한 KGBDHK GRU는 비밀 임무에 특화된 소총을 별도로 개발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총기의 개발에 앞서 탄환부터 문제였습니다. 아음속으로 소음을 줄이면서도 방탄조끼를 관통하여 적을 상사하는 충분한 파괴력을 가진 탄환은 소련군에는 아지 없었습니다. 

 

따라서 신형 탄 완의 개발부터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는 중앙정밀기계공학 연구소의 몫이었습니다. 토 치마 쉬는 1944년 병기 인민위원회의 명령으로 1944년 5월 소화기 및 항공 기관포 과학연구소라는 명칭으로 창성되었습니다. 

 

토 치마 쉬는 특수 탄약과 소화기 등에 특화된 개발을 수행해 왔으며, 특히 1960~70년대 SPP-1이나 APS(특수 수중 돌격소총)와 같은 수중발사 총기 등에 만들면서 독특한 역량을 과시한 바 있습니다. 

차기소음총기의 탄환으로 5.45x39mm탄의 탄피와 7.62x39mm탄의 탄자가 결합된 RG037이 개발되었지만, 소요군에서 원하는 관통력과 소음감소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출처: Общественное достояние> 

그러나 개발 초기부터 토 치마 쉬는 혼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임무의 특성이 다르고 개성이 강한 각각의 특수부대들이 제가 했던 서로 다른 요구들을 통합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특히 소음 감소와 관통력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습니다. 

 

개발을 맡은 자발린과 드보랴닌노바는 AK-74의 탄환인 5.45 ×39mm의 탄피에 7.62 ×39mm의 탄자를 결함 한 RG037탄을 개발했지만, 당대에 새롭게 도입되던 서구의 방탄복을 무력화시키기에는 다소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토 치마 쉬는 RG037의 개발을 1985년까지 계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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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벨린-드보랴니노바는 RG037의 대안으로 7.62 ×39mm의 탄환 규격을 바탕으로 9mm 직경의 탄자를 결합한 탄환을 개발했습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탄종은 9 × 39mm탄으로 정해졌으며 보통탄은 SP5로 명명되었습니다. 한편 프롤로프와 코르니 로바의 설계로 강청 탄심을 내장한 철갑탄인 SP6도 만들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400m의 거리에서도 레벨 2/3의 방탄복이나 헬멧을 관통할 수 있으며 4mm 강철탄을 관통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소프트 스킨 차량에 대한 공격도 가능해졌습니다. 

 

 

vss총기 설명 동영상

이렇게 탄종이 정해지는 사이에 총기의 개발도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먼저 개발이 진행된 것은 RG036 소음 저격소총으로, 크라시니코프의 주도하에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 최초로 개발된 7.62mm 구경의 RG037탄이 기반이 되었으며, 카라시니코프 소총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작동방식은 AK소총의 가스 피스톤 방식을 개량한 것으로 소음기 확장되는 가스압을 이용하도록 하였으나 다양한 작동 환경에서 신뢰성이 떨어지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시제 소총이 1981년 말 개발되었는데 역시 RG037탄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다만 작동방식을 원래 AK소총의 것을 활용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신뢰성을 높였습니다. 이소음 저격소총은 추후에 VSS(특수 저격소총의 의미) 빈 토레즈로 명명되었습니다. 

VSS 빈토레즈는 1980년대말 채용된 이래 러시아 특수부대의 상징과도 같은 총기가 되었으며, 현재는 개량형인 VSSM도 등장했다. <출처: Общественное достояние>

한편 토치마쉬의 노련한 설계자인 세르듀코프가 참가하면서 총기의 신뢰성이 더욱 간조 되었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소음 저격소총만을 생산하려고 했지만 특수부대에서 제식 무장으로 요구함에 따라 1983년경부터 소음 돌격소총까지 개발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새로운 소음 돌격소총은 AS(특수부대 소총이라는 뜻) 발로 명명되었습니다. 

빈토 레즈와 발이라는 코드명이 붙은 것은 KGB가 특수 총기에 B자(영문 알파벳 V에 해당)로 시작되는 이름을 붙여 온 전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1985년에서야 총기와 탄약의 요구 조건이 완벽히 정해졌습니다. 우선 탄환은 RG037에서 9 × 39mm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AS발과 VSS 빈토 레즈도 총기 형태를 완성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1987년 AS발과 VSS빈토 레즈가 모두 완성되었고, 시제 양산 총기들이 시험평가를 위해 육군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후 시험평가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인 두 총기들은 모두 소련군의 특수부대들에 의해 채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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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조선시대 비밀병기이며 세계에서도 인정한 일명 아기살이라는 편전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전을 사용하는 드라마속 장면  출처:SBS 

영화 최종병기 활과 사극 드라마 속에서 자주 보이는 활 쏘는 장면중 일반화 살보다 작은 화살을 특수 제작된 대롱 비슷한 것을 이용하여 발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특히 최종병기 활을 보면 주인공 박해일이 쏜 편전이 만주족 병사의 발목을 그대로 관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에서 잠깐 나왔지만 우리말로 아기살이라고도 부르며, 이를 번역해 동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동전, 변전도 편전의 다른 이름입니다. 

 

1. 편전 - 반으로 쪼갠 대나무 통에 넣어서 쏘는 매우 짧은 특수한 화살을 말하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국조오례의 서례]의 병기 도설은 

철촉에 화살대의 길이가 1척 2촌인 화살을 편전이라 가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척은 주적일 경우는 20cm 내외, 영조척일 경우 30cm 내외이므로 길이가 1척 2촌이라면 대략 24~36cm 정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실물 유물을 살펴보면 기록보다 조금 더 긴 것도 많아 45~46cm급도 흔합니다. 

 

한국의 전통무기를 연구한 최초의 서양인이었던 존 부츠가 수집한 편전을 보면 길이가 1.5피트(45.72cm)로 일반적인 너 투 용 화살의 길이인 2피트 10인치(86.36cm)의 약 절반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 각궁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거리를 감안해 보면 이렇게 짧은 화살은 활에서 제대로 펼쳐서 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편전을 쏠 때는 [최종병기 활]에서 잘 나오듯 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동아에 화살을 넣어 쏘아야 합니다. 

 

즉 편전이란 반으로 쪼갠 대나무 통에 넣어서 쏘는 매우 짧은 특수한 화살 내지 그런 화살을 사용한 사격 법을 뜻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아와 편전 이미지  

 

2. 조선시대, 최고의 무기로 여겼던 편전 

편전은 드물게 사격했지만 실제 조선시대에는 편저는 최근 무로 평가받는 핵심 병기였습니다. 

무예 쪽으로도 일가견이 있었던 태종 이방원(1367~1422) 은 적을 공격하는 무기로 편전만 한 것이 없습니다. 

선언하고 편전 사격 훈련을 권장했습니다. 세종대에도 국방을 책임진 부서인 병조에서 국왕에게 편전은 적을 막는데 중요한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평가는 조선 후기에도 이어져 조선군 각급 부대의 무기 보유 목록을 보면 편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필수 무기 중의 하나였습니다. 무 과시 업에서도 편전은 대표적인 평가 항목 중 하나였습니다. 

 

3. 편전의 장점 

3-1. 긴 사거리 장점인 편전 

1929년에 조선 궁술 연구회가 펴낸 [조선 궁술]에는 과거시험에서 편전을 130보 거리에서 쏘지만 이것은 과거의 규정일 뿐 1,000보(약 1,200m) 이상을 능히 도달하며, 두껍고 무거운 갑옷도 관통할 수 있습니다. 는 설명이 나오며 이 때문에 한때 편전의 사거리가 1,000 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국왕 태종은 편전의 사거리가 200보(약 240m)라고 언급했습니다. 

세종대의 유명한 과학자였던 이전은 편전은 아무리 약한 활을 쏘아도 300보(약 360m)나 됩니다. 즉 1,000 보라는 사거리는 일 번 적인 편전의 사거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냈던 류성룡은 [징비록]에 강가 (대동강 남쪽)에서 왜군이 쏜 조총이 1,000 여보를 날아와 대동관에 이르렀습니다. 

연광정 방패 뒤에서 군관 강사익으로 하여금 편전을 쏘았더니 화실이 강 건너 왜적이 잇는 모래벌판 위까지 날아갔다는 취지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류성룡의 목격담은 결국 편저도 1,000 여보 가까이 날아갔다는 이야기여서 [조선 궁술]과 유사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제 대동관 정면 대동강의 실제 강폭은 500m 미만이어서 1000 여보는 하나의 목 학적 표현이고 실제 사거리는 500m 내외였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즉 실제 편전의 사거리는 일반적인 화살보다 길어 약 200~300m 수준이라고 할 수 있고 

 

예외적인 경우 약 500m까지 날아갔을 가능성은 있지만 1,000보(1,200m)라는 이야기는 과장일 가능 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전통무기에 대해 처음으로 연구한 서구권 학자 존 부츠는 1934년 그의 논문-한국의 무기와 갑옷에서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일본 전무가의 발언을 인용해 1592년 히데요시의 침략(임진왜란)다잇 일본의 장궁 사거리 350야드인데 반해 편전의 사거리는 500야드(457.2m)에 달했습니다. 

 

이기록도 편전 사거리의 최대치가 대략 500m였음을 뒷받침하는 자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1000보는 되지 않는 다 고해도 사거가 500m 정도면 전근대 활 중에서 최상급에 속하니 말입니다. 

 

사거리가 가장 긴 활로 알려진 튀르크 활의 기록상 최대 사거리는 800m가 넘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이고, 일반적인 튀르크 활의 사거리는 최대 사거리는 300~500m 정도입니다. 영국 장궁의 최대 사거리 200~300m 수준입니다. 

 

3-2. 강력한 위력 

활은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명중률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단순히 긴 사거리 때문에 펴 전을 그렇게 높게 평가했다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더구나 활만 있으면 쏠 수 있는 일반적인 화살과 달리 편전은 사격할 때 통 아라는 보조기구가 필요하므로 사격 법이 상대적으로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조 선 네에서 시종일관 편전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습니다. 

 

심지어 만주족(야인), 왜인(일본인)들에게 편전 사격기술이 넘어갈까 봐 국경지역에 편전 사격 연습을 금지하거나 외국인이 보는 앞에서 편전 사격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편전을 비밀 무기처럼 생가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편전은 사거리 외에 또 다른 장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기록을 찾아보면 편전의 장점으로 사거리와 함께 관통력, 적이 대응하기 힘들다는 점 등 세 가지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편전 사용 관련 과학증명 동영상 

편전의 관통력, 달리 말하면 살상력이 뛰어나다는 주장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으로 유명한 약포 정탁(1526~1605)의 문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탁은 활의 위력이 조총보다는 못하다고 인정하면서도 편전의 경우에는 조총과 맞먹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활의 위력이 조총보다는 못하다고 인정하면서도 편전의 경우에는 조총과 맞먹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정탁은 그의 문집에 편전은 멀리 쏘는데 장점이 있습니다. 30~40보 거리에서는 2명을 쓰러트릴 수 있고, 100보까지는 1명을 쓰러트릴 수 있으며 200보(240m)까지도 중상을 입일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1619년 조선 원병이 명나라를 도와 만주족과 싸우다가 참패한 수프 루후 전투에 참전했던 이민환은 조선군이 얼마나 처절하게 패전했는지 그 참상을 적나라한 기록으로 남긴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런 이민환조차도 편전에 대해서는 적 (만주족)들은 먼 곳에서도 갑옷을 뚫을 수 있는 편전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언급해 편전의 위력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재확인시켜줍니다. 

 

3-3. 적이 막거나 피하기 어렵다. 

편전의 또 다른 장점은 적이 대응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91년 만주족이 평안도 창성에 침입했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쪽 사람이 처음에 장전으로 쏘았더니, 저들 중 갑옷을 입은 자는 뛰면서 휘드루기도 하고 혹은 그 화살을 주워서 도로 쏘았습니다. 그래서 편전으로 쏘았더니 저 사람들이 피할 수가 없어서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1555년 왜구들이 전라도에 침입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었다고 하고 당시 전추 참전자들은 조정에 우리 군사가 장전을 쏘자 칼로 받아쳐 무주지 못하게 하다가 편전을 쏘자 왜인 들이 모두 두려워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즉 일반적인 화살을 칼로 받아칠 정도였지만, 편전은 그렇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편전의 선능에 대한 정확한 측정은 이루어진 적이 없지만 방송사 다큐 프로그램의 재현 시범에서는 개량 각궁을 사용한 일반적인 화살의 비행속도가 59.8m/s인데 비해, 편전의 비행속도는 71.8m/s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화살의 비행속도는 발사 직후의 속도와 평균 속도가 차이가 날 수 있고 화사의 무게, 활의 성능, 활을 쏘는 사람의 힘에 따라서도 편차가 있지만 유사한 조건에서 사귀어할 경우 일반 화살보다는 편전의 비행속도가 빠르다는 점은 확인된 것입니다. 

 

최종병기 활 편전 사용 영상자료 

조선시대 방식으로 제작한 각국을 이용한 비공식적인 각종 실험에서 77~90m/s정도의 속도를 기록한 적도 있습니다. 

측정 방법과 기준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전에는 특정 수치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이 같은 속도는 현대 양궁의 하살 속도인 66m/s보다 빠른 것이고, 뿔과 힘줄과 나무를 조합해서 만든 합성 궁중에 가장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튀르크 활중에서도 평균 이상에 속하는 활이 낼 수 있는 속도라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이동하는 물체의 에너지는 질량에 비례하고, 속도의 제곱에 비례합니다. 

편전의 무게에 대해 확실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화살의 4/5 수준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편전은 일반적인 화살에 비해 20% 정도 무게를 줄이는 대신 속도를 15~33% 정도 높임으로써 운동에너지를 높인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편전의 과학적 메커니즘에는 아직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지만 이렇게 상대적으로 큰 에너지를 지닌 화살을 보다 가까운 표적에 쏠 경우 관통력은 높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편전의 비행속도가 일반적인 화살보다 대략 15~33% 정도 빠르다고 해도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만주족과 왜인들은 조선군의 장전을 피하거나 칼로 쳐내면서도, 편전에는 대응하지 못했을 까. 그 의문을 풀어주눈 해답은 태종 이방원의 목격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413년 태종 이방원은 편의 사격 장면을 직접 본 후 - 크기가 작아보기가 어렵지만, 맞추면 반드시 물건을 파괴했습니다. 고 설명하고 있으며 즉 상대적으로 짧은 길이 때문에 실전에서 화살의 비행궤적을 보기가 월씬 어렵고, 그 때문에 대응하기도 힘든 것이 편전의 또 다른 장점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달리 편전을 사용할 때 사용하는 통 아가 일종의 착시효과를 이리 키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부츠는 그의 논문에 조선 구식 군대 병사의 아군을 지켜보는 순간 적에게 편전에 명중된다고 설명한 것이 전형적이 사례입니다. 

 

4. 편전은 세계사에 유일한 무기는 아니지만 조선의 특색 있는 무기이다. 

세종(1397~1450) 이 국왕으로 있던 1435년에 조선 조정은 편전이 만주족(여진족)에게 전해지면 안 된다며, 비밀 유지 문제를 집중 논의했습니다. 

1437년 3월 6일에는 왜인이 편전을 모방할 우려가 있다면 외국인이 있는 장소에서는 편전을 쏘지 말라는 조정의 정식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 3월 19일에는 만주족 거주자와 가까운 함길도 지역에도 평전 사격을 비밀리에 시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연산군 재위 시절에는 1503년에는 중국 명나라에 편전을 보내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편전은 다른 나라에 없는 것이니, 다는 나라 사람들이 알게 하였는 안 되겠다는 기록도 나오고 있으며 즉 편전은 만주족 이난 왜인들에게는 그 사격 법이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 무기였고 명나에서도 별로 사하지 않던 무기였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이덕무는 [청장 관전서]- 편전은 우리나라에만 있다며 감강신이 원병(몽골군)에게 포위되어 병기가 모두 떨어졌을 때 원병의 화살 하나를 얻으면 넷으로 잘라 통편으로 쏘니 이것이 편전의 시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덕무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려 시대 대몽항전기(1231~1259) 때 처음오 생긴 우리나라 고유 무기가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미 조선시대에도 당나라(618~907)의 통전이나 통사가 편전과 유사한 무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잔틴제국(330~1453)의 경보병이 사용했던 솔레나리온도 편전과 거의 동일한 개념의 무기라고 할 수 있고 이후 튀르크나 아랍 국가들도 유사한 무기를 사용했던 솔레나리온은 정확도를 약간 희생하는 대신 속도를 높인 화살로 일반적인 화살보다 약 2배의 사거리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즉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편전이 우리나라만의 고유 무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중국의 명나라는 편전이라는 무기 개념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전쟁에 대량 사용한 사례가 없고 만주족과 왜인들도 마찬가지여서 14세기 말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편전은 우리나라만의 특색 있는 무기였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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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중국 초음속 미사일 DF 17 개발 배경에 이어 특징과 운용현황에 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민해방군은 2019년 10월 1일 국경절의 열병식을 통하여 최초의 극초음속미사일인 DF-17을 공개했다. &lt;출처: 인민해방군&gt;

 

1. 초음속 미사일 특징 알아보기. 

DF-17은 기본적으로 중거리 탄도미사일입니다. DF-17은 2단으로 구성된 미사일로 1단에 해당하는 기본 발사체와 2단인 극 초음속 비행채로 구성됩니다. 

우선 기본 발사체는 DF-16 미사일의 1단에 해당하며, 손쉽게 말해서 DF-17은 DF-16의 1단 탄두부를 HGV로 바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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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16은 미사일의 1단에 해당하며, 손쉽게 말해 DF-17은 DF-16의 1단 탄두부를 HGV로 바꾼 것입니다. 

중국 로켓군의 주력 단거리 고체연료방식 미사일로, 과거 주력이었던 DF-11가 DF 15를 대체하여 2010년대 초반부터 배치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DF-16은 1톤의 탑재 중량에 800~1000km를 비행할 수 있으며, 1단은 22종의 탄두가 존재하는데 일반 탄두 이외 MARV 탄두는 상대적으로 정밀한 목표 타격이 가능하다 합니다. 

 

DF-16(좌, 중간)과 DF-16B 단거리 미사일의 모습 &lt;출처 : Public Domain&gt;

한편 WU-14로 알려졌던 극초음속 발사체가 결합되면서 DF-17은 사거리가 거의 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애초에 극초음속 탄두가 기존 사거리보다 1,000~1500km 정도 사거리를 늘려줄 뿐만 아니라 속도까지 증가시키므로 DF-17은, 1,800~2500km의 사거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시험비행에서 DF-17은 부스터 분리 후에 마하 10의 속도로 대기권에 재진입했으며, 60km 고도에서 11분간 1,400km를 활공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DF-17의 HGV는 스크램젯으로 추진되며, 목표를 향한 정밀기 송은 물론이고 미사일 방어체계의 요격미사일에 대한 회피 기도도 가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발사 차령으로 후배이 산장 완산 특수차량 유한회사가 만든 WS2500 10륜 특수차량을 채용했습니다. 

완샨 특수차량은 2011년 북한으로 ICBM 발사 차량의 차대를 판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회사로, 중국의 거의 모든 이동식 발사 차량을 이 회사에서 만듭니다. 

WS2500 차량은 20톤의 차량으로 DF-16과 DF-21의 발사 차량으로 유명합니다. 

 

DF-17의 발사 차량은 2019년 열병식에서는 미사일이 외부에 공개되는 형식이지만, 2021년에는 차량 뚜껑에 덮개가 장착된 모습이 확인되었습니다. 

 

 

중국 극초음속 미사일 동영상 뉴스

 

2. 극초음속 미사일 파생형 알아보기. 

2-1. DF-17 극초음속 미사일

중국 최초의 극초음속 미사일, 다소 짧은 사거리인 DF-16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추진체로 삼았으나 HGV의 비행능력으로 인하여 중기 탄도 미사일 되었습니다. 

 

 

2-2. 화성-8 극초음속 미사일 

북한 최초의 극초음속 미사일로 2021년 9월 28일 시험발사가 공개되었습니다. 극초음속 활강체의 형상은 중국의 DF-17을 벤치마킹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1단 발사채와 발사 차량은 화성-12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것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습니다. 

 

3. 제원 살펴보기 

 

분류 중거리탄도미사일(MRBM)/극초음속무기체계 
전체길이 11 m 추정
발사중량 15,000 kg
비행속도  마하 5~10
사정거리 1,800 ~ 2,500 km
실전배치 2019년

 

 

2022.01.18 - [육군 무기체계] - 중국의 극초음속 미사일 DF-17을 아시나요?

 

중국의 극초음속 미사일 DF-17을 아시나요?

중국의 극초음속 미사일 DF-17 극 초음속 미사일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속력은 마하 10의 속도로 미군을 격파하려 A2/AD의 주역입니다. 1. DF-17 개발 역사 알아보기. 1945년 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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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극초음속 미사일 DF-17 극 초음속 미사일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속력은 마하 10의 속도로 미군을 격파하려 A2/AD의 주역입니다. 

 

2019년 열병식에 등장한 DF-17 극초음속미사일 <출처: 인민해방군>

1. DF-17 개발 역사 알아보기. 

1945년 공산당이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건국된 중화 인민 공화국은 대만으로 물러난 국미당 정부가 미국을 이끌고 공격해올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은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6.25 전쟁에 직접 개입하였습니다. 펴면 적으로는 북한을 지켜주는 항 미원 조 전쟁이었지만, 실은 자국의 안보위협인 미국에 대하여 한반도에서 예방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후 1.2차 대만해협 위기(1954~1958)에서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며 중국을 견제했고, 한편 중국은 호치민을 도와 북 베트남 독립부터 남베트남 공산화까지 지원하면서 미국과 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중소국경분쟁 등으로 소련이 중국의 당면한 위협으로 자리하면서 1970년대에 이르러 미중 간의 극적인 데탕트(긴장완화)가 성립되었습니다. 이러한 국제관계의 급변으로 인한 중국 공산당 정부는 1971년부터 대만 국민당 정부를 대신하여 UN 상임이사국이 되었으며 , 미중간의 협력관계는 1980년대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 난 1989년 천안문 6.4 민주화 항쟁을 공산당 정부가 유혈 진합에 나서면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제재가 잇달았고, 특히 미국은 대중 무기수출 중지 등의 조치에 나섰습니다. 

 

한편 1996년중국이 대만의 총통 직접선거를 겨냥하여 대대적 군사훈련으로 압박을 가하자 미국은 2개의 항모전단을 급파하여 중국의 압박에 대항했습니다. 

 

이러한 제 3차 대만 해협 위기를 통해 중국은 해양력과 항공력의 우위에 바탕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능력을 상쇄시킬 능력을 개발해야 함을 절감했습니다. 

 

이에 따라 과거 지상군 위주로 구송되었던 중국의 인민 해방군은 1990년대 들어 군사력 현대화를 추진하면서 해군과 공군의 강화에 최우선적인 순위를 부여했습니다. 

공군은 SU-27등 러시아 전투기를 도입하고 국내 생산형인 J-11을 준비했고, 자국산 4세대 전투기인 J-10을 독자 개발함은 물론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인 J-XX(현 J-20)의 개발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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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은 러시아제 수상전투함과 잠수홤 등 도입했고, 자국산 구축함과 회위함을 개발하는 한편 항공모함까지 도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아무리 해,공군을 증강해도 미군을 압도하기에 어려웠습니다. 이에 따라 우선적으로 미국이 동아시아로 접근을 못하게 막는 반접근 지역 거부 전략을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반 저금 지역 거부(A2/AD) 전략이란 우선 중국의 동남부 해안선부터 200해리까지의 해역인 제1도련에서는 지역거부를 200~600해리까지의 제2도려련에서 반접근을 주로 하는 전략을 뜻합니다. 

 

목표는 미국이 제1,2 도련 내에서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포기여 후회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항모나 스텔스 전투기 이외에 이러한 A2/AD 전략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자신이 바로 탄도미사일입니다. 

 

중국은 둥펑 계열의 탄도 미사일로 미 항모전단을 공격하여 침몰시키는 전술을 기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재래식 탄두를 사용할 겨울 3차례 공격이 예상되는 데, 제1차 공격으로 항모의 갑판을 노려 항공기와 갑판을 파괴하고, 제2파는 항모의 엔진 등 추진부를 공격하여 항행을 무력화시키고, 제3파에 항모를 침몰시킨다는 것입니다. 

물론 공격의 대상은 항모에 그치지 않고 도련선 내에 존재하는 미군의 항공기지나 해군항을 포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미 항모전단을 공격할 대표적인 대함탄도탄(ASBM)은 DF-21D와 DF026B가 대표적입니다. 

 

한편 2000년대 들어서 중국은 DF-26등 정밀한 탄도미사일을 넘어서 요격이 불가능한 미사일을 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극초음속 무기체계에 대한 연구개발에 나섰습니다. 

 

특히 2012년 극 초음속 시뮬레이션이 가능한 JF12퐁동터널을 완공하고 이듬해부터 초기 시제 모델인 WU-14 극초음속 활강체의 퐁 동모 델과 이를 탄두로 탑재한 DF-ZF 미사일 풍동 모델에 대한 시험평가를 실시하였습니다. 

 

중국은 2014년부터 WU-14 극초음속 활강체(HGV)의 시험발사를 시작했다. <출처 : Public Domain>

한편 2000년대 들어서 중국은 DF-26  등 정밀한 탄도 미사일을 넘어서 요격이 불가능한 미사일을 추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극초음속 무기 체계에 대한 연구 개발에 나섰고 특히 2012 년 극초음속 시뮬레이션 이 가능한 JF-12 풍동 터널을 완공화고 이듬해부터 초기 시제 모델인 WU-14 극초음속 활강체(HGV)의 풍동 모델과 이를 탄두로 답재한 DF-ZF미사일의 풍동 모델에 대한 시험 평가를 실시하였습니다. 

 

(WU-14와 DF-ZF는 모두 미 국방부에서 붙인 식별명) 풍동시험장은 마하 5~9에 해당하는 풍동은 물론이고 3000도씨에 이르고 고열까지 모사하면서 실시한 상황을 최대한 모사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중국은 2014년 1월 9일 최초로 WU-14 극초음속 비행채(HGV)의 시험 비행을 실시하였으며 

이사실은 미국의 위싱턴 프리비 콘이라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처음을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중국 국방부는 이튿날 이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로써 중국은 러시아와 미국에 이어 극초음속 비행체의 개발에 성공한 3번째 국가로 인정되었습니다. 

특히 WU-14는 기존에 중국이 보유하는 다양한 탄도미사일에 탄두를 대신하여 정착 가능한 HGV로, 다양한 결합 하여 미국의 SM-3 대단도 미사일의 요격을 회피할 수 있는 능력을 추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중국은 2014년 1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무려 9차례의 HGV발사 시험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발사에 사용된 것은 WU-14 장착한 DF-ZF로 이로써 실전테세를 갖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2019년 10월 1일 국경절에 중국은 DF-ZF로 알려졌던 DF-17 공개함으로써 극초음속 미사일의 실전배치를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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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 카의 정식 명칭은 슈투어츠캄프플록 초이크는 급강하 폭격기라는 뜻으로, 독일어의 특성상 단어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줄여서 슈투카라고 불렸으며 곳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2차대전당시 독일의 폭격기 슈투카 이미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던 2차 대전은 당시까지 실용화되었거나 아니면 시험 삼아 만든 무기가 그야말로 아낌없이 등장하였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다시 무기를 모두 거론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 인상적인 모습을 남기며 그 전쟁을 상징하게 된 무리를 추려보는 것은 가능합니다. 

 

'슈투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JU87 폭격기도 그런 무기 중 하나입니다. 

제2차 대전사를 언급할 때 독일의 팽창과 침략 개시 시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시기를 설명하는 각종 문헌이나 시청각 자료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이 바로 JU87입니다. 

비록 최고 성능의 폭격기라도 단정할 수는 없지만 JU 87만큼 2차 대전을 떠올리게 하는 무기는 없을 것입니다. 

 

1. 생각한 것보다 어려운 폭격 비행을 알아보기. 

요즘은 외과수술 타격이라고도 불리는 초정밀 공격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종종 오폭 뉴스를 점할 때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하늘에서 지상의 목표물을 정확하게 공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조수석에 탐승한 승무원이 대략 위치를 짐작하고 손으로 폭탄을 투하였던 제1차 대전 초기에는 명중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후 폭격기의 고도와 속도를 계산하여 폭탄을 투하하는 기술이 등장하였지만 여전히 명중률이 높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2차 대전 당시에는 대규모 편대가 출결 하여 폭탄의 비를 퍼붓는 이른바 융단 폭격이 보편화되었습니다. 

강력해 보이고 무시무시하지만 사실 쏟아부은 수많은 폭탄 중 하나만이라도 명중하면 성공이라 생각하던 방식이어서 효율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일단 낭비되는 폭탄도 문제지만 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격추되는 폭격기도 많았습니다. 전쟁을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수행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무지막지한 소모전을 감당하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폭격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었습니다. 

폭격기의 안전을 고려한다면 고고도에서 고속으로 비행하며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 좋지만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결론은 폭탄을 목표 위치까지 최대한 근점 하여 투하하는 것이었습니다. 저고도로 비행하면 격추당할 위험이 커지게 됩니다. 

Ju 87의 급강하 폭격 개념도. 목표물까지 정확히 근접하여 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기에 이동 표적물의 공격도 가능했다.

이때 고고도로 비행 중 목표를 발견하면 곧바로 강하하여 최대한 근접한 후 폭탄을 투하하는 방법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급강하 폭격기입니다. 

 

개념은 1 차세 게 대전 다시부터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급강하할 때 기체가 받는 정항을 극복하는 등의 여러 난제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 들어 이런 문제를 해결한 급강하 폭격기들이 본격 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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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건과 함께 시작된 프로젝트 알아보기. 

재군비 선언 이전부터 비밀리에 독일 공군의 재건을 준비하던 우 데트는 1933년 미국 방문 다시 커티스 사의 F11C 급강하 폭격기의 시범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연구를 위해 즉시 2개를 구입하여 본국으로 가져갔을 만큼 급강하 폭격기가 향후 독이 군에게 반드시 필요한 무기임을 직감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으로 1935년 도입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전부터 급강하 폭격기 개발을 하던 유수의 항공기 제작사들이 경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융커스 사의 엔지니어인 풀먼이 설계한 JU87이 치열한 경쟁 끝에 낙점되었습니다. 

기체 구조가 튼튼하였고 야전에서 장비도 쉬웠는데, 회형상 특징은 강착 장치가 고정식이었고 주익이 기체 아래의 시계를 확보하기 용이한 갈매기 날개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급강하 돌입시 조종사의 의식을 잃을 가능성을 대비하여 특정 고도에서 폭탄을 자동 투하하고 기체의 자세를 잡아주는 장치도 설치되었습니다. 

 

이론적으로 JU87 DMS 90도의 수직강하도 가능하였지만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폭탄 투하 후 이탈 등을 고려하여 속도를 시속 240km 정도로 줄인 후 80도 정도의 각도로 강하였다고 합니다. 독일에서 ju 87은 급강하 폭격기의 약칭인 슈투카로 불리는데 사실 슈투카는 모든 종류의 급강하 폭격기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이지만, 활약이 워낙 인상적이다 보니 이후 ju87을 일컫는 대명사처럼 여기 지게 되었습니다. 

 

재미있게도 개발 당시에 엔징의 완성되지 않아 5기의 실험기들에 롤스로이스 사의 캐스트랄 엔진이 장착되었습니다. 

상업적으로 판매되는 엔진이긴 했지만 영국은 본의 아니게 적국의 무기 개발에 공헌을 하게 돼 새입니다. 

시험 중 여러 사고를 겪으며 개량을 거치 후 1937년부터 ju87A 형을 시작으로 독일 공군에 납품되기 시작하였고 곧바로 스페인 내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슈트카 설명 동영상

3. 전격전을  이끌어 가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JU87은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들이 요충지를 급습하여 상대를 흔들어 놓으면 곧바로 기갑부대가 돌풍같이 진격하여 전선을 돌 하한 후 적의 후방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포위된 상대방은 궤멸되거나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전격전이라 명명된 이러한 독일의 기동전에 의해 폴란드와 프랑스가 순식간에 점령당했습니다. 

급강하 돌입 시 발생하는 소음에 더해 이른바 '에라 코 나팔'이라 불린 무시무시한 사이렌 굉음으로 인해 폭격을 당하는 지상군은 공항 상태에 빠져 우 왕자와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전과는 대대적으로 홍보되었고 이때부터 슈투카는 독일의 승리를 자랑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특히 폭격의 정확도가 뛰어난 것으로 확인되면서 독일 공국의 수장이 괴링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급강하 폭격기 만능론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영원할 것 같았던 슈투카의 전성기도 거기서 멈추게 됩니다. 

이른바 공군만의 전쟁으로 표현되는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꼬리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의 상대는 공군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편이어서, 슈투카의 활약은 무주공산에서 펼쳐진 것이었습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이라는 보검을 가진 영국의 하늘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동안 간과했던 약점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속도가 느린 슈투카는 한마디로 영국 공군의 날렵한 전투기들의 밥이었는데, 특히 급강하에 돌입할 때 공격을 받으면 소수 무책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에게도 뛰어난 BF 109 전투기가 있었지만 항속 거리가 짧아 폭격에 나선 슈투카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영국 공군에게도 뛰어난 BF 109 전투기가 있었지만 항속 거리가 짧아 폭격에 나선 슈투카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했습니다. 영국 공군 조종사들이 슈투카 파티를 벌인다고 할 정도로 갈수록 피해가 커지자 결국 돌일은 8월 19일부터 슈투카의 영국 본토 항공전 투입을 중지하였습니다. 

 

 

4. 슈투카 전설이 되다. 

슈투카의 흑백사진이며 이률장면과 비행장면 이미지 

하지만 히틀러의 엄청난 도발 욕구가 있는 한 슈투카가 계속 의기소침한 채 뒷방에 물러나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사상 최대의 독소전쟁을 개시하자 전선의 주역으로 다시 떠오른 것입니다. 영국에서와 달리 독일이 초전부터 제공권을 장악해 버리면서 이전처럼 손쉽게 폭탄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동부전선에서 전차 같은 이용 표적 공격에 뛰어난 전과를 보였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날이 갈수록 전투가 격화되면서 슈투카는 새롭게 변시 하였습니다. 

상부를 타격하면 단 한 발로도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37mm 기관포를 주익에 장착한 개량 기종이 소련 기갑 붇재의 저승사자로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대포 새라고 불린 슈투카로서, 독소전쟁 중반부터 기갑 전 녘이 절대 영세였던 독일 지상군에게는 천군만마, 소련군에게는 지옥의 사자 같은 존재였습니다. 

 

슈투카와 이기종이 구사한 전술은 냉전시기에 미국이 근접지원용 공격기를 개발할 때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지상군 근접 지원 전투의 모범이라 할 수 있었는데, 특히 519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한 전설적인 슈투카 에이스인 루델이 쓴 자서전 '트로츠뎀'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뜻의 독일어이며 새로운 공격기를 개발하던 미국 엔지니어들의 필독서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 한 탱크 킬러가 바로 너무나도 유명한 A-10입니다. 

총 6,500 여기가 생산된 슈투카는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에도 일부 공급되었지만 대부분 독일군에 의해 소비되었습니다. 

 

성능만 놓고 본다면 전쟁 초기를 지나면서 시대에 뒤쳐진 폭격기로 취급될 수 있었지만 마땅한 대체기가 없었던 독일은 이를 개량하면서 끝까지 애용하였습니다.

 

아마도 특유의 외양도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2차 대전 내내 꾸준히 사용되었기에 슈투카가 그 시대를 상징하는 무기가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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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휴대용 대전차 로켓 추진 병기. 팬저 파우스트를 개량한 팬저 파우스트 3은 최대 사거리 900m에서 700mm 두계의 압연 강판을 뚫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육군도 운용 중입니다. 

독일이 1992년부터 운용을 시작한 휴대용 대전차무기 판저파우스트 3 이미지  <출처 : 독일연방군 Bundeswehr/Sebastian Wilke>

1. 개발의 역사 

무기의 개발은 위협의 발전에 따른 결과입니다. 

전차의 발전은 이를 상대하기 위한 대전차 무기의 발전을 불러옵니다. 대전차 무기 가운데, 보병의 근거리에서 운용할 수 있는 로켓포나 무반동총 등과 같은 휴대용 무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일원이었던 서독은 1955년 미국 등에 의해 재군비가 시작되면서 소련이 점령한 동동을 포함한 바르샤바 조약의 막강한 전차 전력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서독 연방군 (분데스 베어)은 M20 슈퍼바카 등 미국제 무기로 무장을 시작했지만, 1963년부터 판저 파우스트 (Panzefaust) 44mm DM2 아우스프룽 1. 란체(이하 판저 파우스트 44로)라는 자체 개발품으로 무장했습니다. 

연방군은 PzF 44를 소대와 중대급에서 운용했습니다. 대대급에서는 스웨덴 사브가 개발한 칼 구스타프의 독일 제식 명인 슈베 레 판저 파우스트 칼 구스타프를 운용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의 신형 전차 개발은 바른 속도로 이루어졌고, 이를 상대하기 위해선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연방군은 1973년 1월 23일 새로운 휴대용 대전차 무기에 전술적 요구 사항을 마련하면서 신형 무기 개발에 나섰습니다. 

 

요구된 사항은

  1. 알려진 모든 전차에 대해서 효과적일 것. 
  2. 안전하고 손쉬운 취급이 가능할 것.
  3. 낮은 교육비용
  4.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도 발사가 가능할 것 등이었습니다. 

1978년 10월 업체인 제안 요청이 발행되었고 , 1979년 초에 판저 파우스트 44 개발을 주도한 당시 다이너마이트 -노벨이 개발 계약을 따냈다고 합니다. 

 

다이너마이트 노벨은 판저 파우스트 44 개발 경험을 살려 빠르게 개발을 진행했고, 1979년 11월 초기 시제품 제작을 마쳤습니다. 

발사관 내부 직경과 발사체 직 겨울 따 판저 파우스트 60/110으로 불렸던 초기 시제품은 1980년 처음 시험되었으며 

1984년 시스템에 대한 사용 인증이 내려졌습니다. 

 

이무기 대전차 무기를 뜻하는 판저 파우스트라는 이름을 이어받았고 세 번째라는 뜻으로 판저 파우스트 3, 줄여 판저 파우스트 3으로 명명되었습니다. 

 

판저 파우스트 3은 전작이 판저 파우스트 44 란체처럼 발사관에 로켓 추진식 탄두를 끼워 발사하는 방식으로 개발되었습니다. 

판저 파우스트 3은 인증된 지 2년 후인 1986년부터 첫 병사 시험이 진행되었고 1987년 7월부터 배치를 위한 저율 양산이 시작되었습니다. 연방군은 1987년 11월에 초기 운용 능력을 선언하면서 도입을 시작했지만, 1992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도입이 선언되었습니다. 

 

공식 도입 선언인 정어진 것은 소련의 붕괴와 동독과의 통일 때문이었습니다. 

판저 파우 3은 통일된 독일 연방군이 채택하기 이전인 1989년 일본어 라이선스 생산을 결정하면서 처음 도입했습니다. 

1991년에는 스위스가 도입을 경정하는 등 수출이 이루어졌습니다. 

 

판저 파우스트 3은 일본, 스위스에 이어 독일 연방군에 성공적으로 도입된 이후, 사용자 피드백을 적극 수렴하면서 계속 발전했습니다. 

 

발전은 탄두 개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 이루어진 개량은 폭발 반응 장갑(ERA)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탄두를 텐덤형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개발형 판저 파우스트 3의 탄두는 단일 성형 작약 대전차고 폭탄(HEAT)타니었지만, 개량형은 탄두 앞쪽에 ERA 상대하기 위한 선단 탄두를 하나 덜 달았습니다. 

 

이렇게 개량된 것을 판저 파우스 3 -T로 명명했습니다. 

이후 다이나 레이 전라는 컴퓨터 화된 조준장치로 교체한 판저 파우트스 3-T600 벙커 등 구조물을 파괴하기 위해 장애물 극복용 HEAT와 내부에서 폭발하는 파편 탄두로 구성된 벙커 파우스트 등 여러 개량형이 개발되었습니다. 

 

전차잡는 판저파우스트 3 설명 동영상

2. 판저 파우스트 3 특징

휴대 가능한 다회용 대전차 무기로 개발되었습니다. 

  1. 발사관
  2. 조준기가 합쳐진 발사장치
  3. 탄두 로켓 추진체 그리고 반동과 후폭풍 감소용 카운터 메스가 합쳐진 카트리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로켓탄두가 부착된 발사관과 분리된 발사장치 <출처 : sni_tb.fortunecity.ws>

발사관은 금속재 파이프에 복합재가 덧대어진 형태로 여러 번 사용해도 폭발력 등으로 인한 변형이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발사관 중앙에는 헥크러운트 코흐가 제작한 발사 장치를 결합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 결얄화가 요구되었고, 카트리지 포함 무개를 10kg 이하로 줄인 버전도 나왔고, 이를 판저 파우스트 3 LWD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빌 시장 치는 2.5 배률 광학 조준경이 up-7v망원 조준경과 손잡이, 격발 장치, 그리고 개머리판이 합쳐져 있다고 하며 조준경은 주간 전용이며, 야간 운용을 위해서는 사수가 야시고 극을 쓰건, 광할 조준경 대신 심 라드 KN205f 2 야간 조준경을 장착했습니다. 

 

이외에도 헨솔트가 개발한 다이나 레이지라는 컴퓨터화된 조준장치를 대신 부착할 수도 있습니다.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심 라드 is 2000 탄도 컴퓨터가 결합 도니 다이나 레인지를 사용할 경우 유호 사거리가 정지 목표 600m, 이동 목표 400m까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이나 레이지 부착 모델은 판저 파우스트 3 T-600, 판저 파우스트 3 -IT-600등으로 뒤에 600을 붙여 부른다고 합니다. 

왼쪽 이미지 UV7 조준경 각 부 설명 ,오른쪽 이미지 컴퓨터화 된 다이나레인지 사격통제장치 <출처 : modernfirearms.net>

2010년대 중반부터는 더 발전된 다이나 호크 화력 통제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조준경 밑으로 앞에서부터 전방 손잡이, 권통손잡이, 어깨 받이가 접혀 있습니다. 전방 손잡이와 어깨 받이를 표고, 나중에 권총 손잡이를 펴면 격발용 방아쇠가 드러나게 됩니다. 

 

전방 손잡이는 바닥에 엎드려 사용할 때 발사 각도를 조정하기 쉽도록 손잡이를 돌려 길이를 조정할 수 있지만, 없는 것도 있습니다. 

안전 레버는 s(안전과 발사(f)로 되어 있습니다. 안전 레버 앞에는 발사 고나에서 발사장치를 제거할 때 쓰는 레버가 위치합니다. 

 

판저 파우스트 3의 핵심을 카트리지입니다. 

카트리지는 탄두, 초진체 그리고 비행 안정용 핀으로 이루어진 탄체, 내부에서 점화하여 가스를 발생시키는 점화부, 그 뒤로 작은 플라스틱 공이 채워진 반동 및 후폭품 억제용 카운터 메스의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로 조립되어 있으며, 발사관 앞에서 끼우는 방식으로 재장전이 가능합니다. 

탄체의 직격은 스위스만 채택한 124 mmHEAT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110mm입니다. 기본형인 판저 파우스트 3의 경우 탄두는 성형 작약으로 이루어진 대턴차고 폭탄(HEAT)을 사요 합니다. 

 

탄체 앞쪽에 성형 작약에 의해 형성된 메탈 제트가 제대로 충분히 발생하도록 탄두를 표면에서 이격 시키는 역할을 하는 연장관이 있습니다. 

 

연장관은 장갑차량을 상대할 경우 뽑아서 고정하지만, 건물 등 소프트 스킨 표적의 경우 폭풍 파편 효과를 위해 연장관을 빼지 않아도 됩니다. 

 

연장관을 사용할 경우 400mm 장갑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 

판져 파우스트 탄은 DM12와 DM12A1이 있습니다. 

탄체 중량 3.9kg, 발사준비상태 중량 12.8kg, 탄 포함 전체 길이 1350mm, 포구속도는 초기 160m/s, 최대 243m/s의 제원을 가집니다. 

 

일반적인 유효 사거리는 이동 표적 300m, 정지 표적 400m,  정도지만 유효사거리를 600m로 늘린 탄도 개발되었습니다. 

개량형인 판져 파우스트 3T는 폭발 반응 장갑(ERA)을 적용한 장갑차량이 늘어나면서 이를 처리하기 위해 선단부 HEAT을 추가한 탠덤 탄두를 채택했습니다. 

외형적으로 탄체 앞쪽에 뭉툭한 파이프가 추가된 형태입니다. 

 

 

판저 파우스트 판저 파우스트 3T는 ERA와 함께 700mm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 판저 파우스트 3T용 탄은 DM22입니다. 

탄체 중량 4.3kg, 발사준비 상태 중량 13.2kg, 탄 포함 전체 길이 1400mm, 포구 속도는 초기 150m/s제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파괴력을 더 향상하기 위해 연장관이 3단으로 된 판져 파우스트 3 -IT도 개발되었습니다. 

Dm72탄을 사용하는 판져 파우스트 3 IT는 900mm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 사거리 600mm탄을 기준으로 탄체 중량 4.3kg, 발사준비상태 중량 15.1kg , 탄 포함 전체 길이 1400mm, 포구속도는 초기 150m/s, 최대 227m/s의 제월은 가지게 됩니다. 

 

벙커 파우스트는 적 벙커를 처리하기 위해 구조물을 파괴하기 위한 선단부 고폭탄 (HE)과 이로 인해 생긴 구멍을 통해 건물 내부로 들어가 폭발하는 파편 탄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벙커 파우스트용 탄은 DM32로 표시됩니다. 

 

17mm의 장갑판 또는 360mm의 벽돌 벽을 관통할 수 있고 그 후 파편탄(FRAG)이 내부에서 기폭 됩니다. 자체 중량 4.3kg, 발사준비상태 중량 13.3kg, 탄 포함 전체 길이 1270mm, 포구 속도는 초기 150m/s, chleo 227m/s의 제원을 가지게 됩니다. 

 

개량형을 포함하여 판저 파우스트 3 계열이 운용하는 탄은 대부분 HEAT가 대부분이고, 이밖에 점착 유탄(HESH) 조명탄, 연막탄 등이 다 야한 탄종이 존재합니다. 

 

훈련을 위한 장비도 개발되었고 판저 파우스트 EX는 탄두의 모양과 무게만 같을 뿐 추진체가 없는 훈련용입니다. 

 

3. 운용현황

개발국 독일, 라이선스 생산한 일본과 벨게애, 그리고 직도입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모리셔서, 네덜란드, 페루, 대한민국, 기록 스위스 등 총 11개국입니다. 

 

일본은 IHI 에어로스페이스에서 라이선스 생산했으며, 110mm 개인 휴대 대전차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라이선스 생산은 우리나에서도 이루어졌으면 풍산에서 생산했습니다. 

 

국가급 단체 외에 이슬람 국가 is와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이라크 내 쿠르드족에게도 발사관 200개와 탄 2,500발정고가 지원되었습니다. 

 

판져 파우스트 계열은 아프가니스탄전, 이라크전, 시리아 내전 등에서 일부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발사인 다이너마이트 노벨은 판저 파우스트 3 대체하기 위해 일회용 무반동 유탄 무인기 RGW 시 리즈를 개발했습니다. 독일군에서 운용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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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중 전쟁의 반전이 시작되는 미드웨이 해전 2번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미드웨이 해전은 행운의 여신이 미군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드웨이 해전당시 와일드켓의 전투장면 이미지 

1. 미드웨이 1차 공습 

미드웨이 해전 1차 공습을 시가대 별로 설명드리겠습니다. 

 

1-1. 05: 40분 

같은 침로로 아데아 디위의 PBY비행정을 후속하던 체이스 대위의 PBY 비행정은 수많은 일본 함재기들이 미드웨이 섬을 향하여 비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보고 하였습니다. 

 

1-2. 06: 00분

미드웨이 섬에서는 몰려오는 일본 공격대를 요격할 전투기 26기(F2A 버펄로 20기, F4F와일드 켓 6기)가 출격했습니다. 

이어서 TBF뇌격기 6기와 B-26 마 로더 폭격기 4기, SB2U 급강하 폭격기 6기로 혼성 편성된 공격대가 나구모 부대를 향하여 출격하였습니다. 

 

1-3. 06:07분

미드웨이를 경유하여 일본군 항모 부대 발견의 보고를 받은 미 17 기동부대 사령관 플레처 제독은 즉시 행동에 들어가 휘하 요크타운에게 공격 준비를 하도록 명령하고 16 기동부대 사령관 스플루언스 소장에게 일 기도 함대 공격대를 발진시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미 해군의 항모 3척은 즉시 출결 준비를 개시하였습니다. 

 

1-4. 07:00분

스플루언스 제독의 항모들,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이 먼저 공격대를 발진시켰습니다. 

 

1-5. 06:16분

도모나가 공격대 107기가 함상 공격기 (97식 공격기), 함상 폭격기 (99식 폭격기), 함상전투기 (제로 전투기) 순으로 미군 요격기들이 엄호하고 있던 미드웨이로 접근해 갔습니다. 전투는 고공에서 비행하던 미 해군 PBY 비행정이 조명탄을 투하하고 미군기들이 선재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군 요격기들은 선두의 도모나가 대장 기를 포함한 함상 공격 기대에 달려들어 불을 뿜었습니다. 

그러자 후속하던 제고기 편대가 이들을 역습하면서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습니다. 약 15분간의 공준 전에서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조종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 제로 전투 기대의 슬리로 마감되었습니다. 성능이 제로 전투기에 비해 떨어지는 미 해군 F2A 버펄로 기 20기 중에 13개가 격추되었고 와일드 켓은 2개 격추되었습니다. 

 

도모나가 대장 기도 피격을 당해 무전기가 사용 불능이 되었고 그는 2분기를 가까이 불러 비상용 소형 흑판에 쓴 자기의 희망 교신 내용을 보여 주고 본부로 중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1-6. 07:00분

공격의 성과가 불만족스럽다고 판단한 도모나가 대위는 나구모 기동부대에게 가우, 가우, 가우, 연속 신호를 보냈습니다. 

2차 공격이 필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1-7.  7:49분

미드웨이 공격이 진행되던 중 순양함 지쿠 마에서 발진한 4호기가 날씨가 안 좋아 시계가 불량하여 정찰을 중지하고 돌아가겠다는 송신을 보내왔습니다. 

6분 뒤에 도네에서 발진한 1호 정찰기가 적 항공기 15기가 아군 함대를 향하여 이동 중이라는 급전을 발신하였습니다. 

공중에서 전투 초계 비행 중이던 제로기에 더해서 6기의 제로기가 더 발진하였습니다. 

이 미군 공격대는 미 항모에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10기의 정찰기였습니다. 

일본 기동함대는 각 항모에 잔류한 제로기 21기에게 출격을 명하여 함대의 항공 엄호를 강화하였습니다. 

 

일본군 공격대가 계속 미드웨이를 공격하는 동안 미군 해군과 육군 항공 대는 일본 기동함대를 공격하였습니다. 

일본 기동함대는 각 항모에 잔류한 제로기 21기에게 출격을 명하여 함대의 항공 엄호를 강화하였습니다. 일본군 공격대가 계속 미드웨이 공격하는 동한 미군 해군과 육군 항공대는 일본 기동함대를 공격하였습니다. 

 

1-8. 07:05분

중순양함 도네는 접근하는 미군 폭격기 10기를 발견했습니다.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TBF 어벤저 뇌격기 공격대 6기와 어뢰로 무장한 B-26 4기였습니다. 

미군 은 미드웨이를 공격하는 도모나가 공격대 요격에 미드웨이 기지의 모든 전투기를 투입하였기 때문에 이들 일본 함대 공격대에게는 전투기 호의를 붙이지 못했습니다. 

B-26 마로더 <출처 : wikipedia>

아카키와 도네에서 즉시 대공 사격을 하였고, 제로기 10기도 공격에 가세하였습니다. 

항모 아카키에게 저공으로 접근한 미 뇌격기 6기 중 3기가 먼전 격추되고 남은 3기 중 2기는 어뢰 투하 후에 격추되었습니다. 어네스트 중위가 지휘하는 한 기만 무사히 귀환하였습니다. 

 

아카키는 투하한 어뢰들을 몯 무사히 피했습니다. 일본 항모들이 입었던 유일한 피해는 뇌격기에서 발사한 기촐 소사에 아카키의 3번 대공포가 선회 불능으로 파괴된 것 분이었습니다. 아카키를 뇌격했었던 B-26 2기도 격추되었고 나머지 두기는 귀환했지만 너무 손상이 심해 폐기 처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B-2에서 발사한 어로 2~3발이 명중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아카키에 명주한 어뢰는 없었습니다. 

 

2. 미드웨이 2차 공습 결정

도모나가 대위의 보고를 접한 나구모 사령관은 미드웨이 2차 공습을 결정하였습니다. 

곤도 노부 다케 중장의 2함대 미드웨이 공략 부대가 6월 7일 실시할 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미군 기지 내 항공전력의 철저한 파괴가 필수적이었습니다. 1차 공습이 미흡한 결과로 끝났으나 제2차 공습은 당연히 실시하여야 했습니다. 

 

니구모 사령부는 적 함대 출현의 가능성에 대비해서 공격용 어뢰를 장착하고 대기하고 있었던 97식 함상 공격기들을 육상 공격을 위한 폭탄으로 무장 전환하라는 명력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의 유동성에 대비해서 아무 무장도 하지 않고 대기했었던 99식 함상 폭격기들에게도 신속한 폭장의 명력이 내렸습니다. 미드웨이 해전 전에 항모 히류에서 실험해본 바에 의하면 죄장의 어뢰를 풀고 폭탄을 장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반이라는 데이터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데 함대 엄호의 제로기가 편대들이 미 공격대와 공중전을 치르고 연료 보급과 실탄 장전을 위해서 항모에 귀환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미드웨이에 공중 공격을 가한 도모나가 대위의 1차 공격대도 귀환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항모들은 무장 전환 작업이 있던 비행 갑판 아래 격 남고나 비행갑판은 극히 혼란한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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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 기동함대 공격대 급속 발진 

미 해군 기동부대는 하와이에서 중계된 카타리나 비행정의 보고로 일본 기동부대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공격 타이밍을 저울질하던 미 해군의 17 기동부대의 지휘관 플렛처 소장은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남서 변침 수색 공격하라 였습니다. 한 시간 뒤인 

 

3-1. 아침 7시

16 기동부대의 스풀루언스 소장은 휘하 항모 엔터프리이즈와 항모 호넷에 공격대 발진 명령을 내렸습니다. 

항모 엔터프라이즈에서 총 57기의 함재 기각 항모 호넷에서 총 60기의 함재기가 출결 채비에 나섰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의 정찰기가 함대의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언제 적 함재기 공습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발진 작업은 더욱 긴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스플루언스는 작전 실행단계에서 참모장 에리엇 브라우닝 대령의 진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실행단계에서는 지위권을 이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일분을 다투는 위기의 순간에 아직 일본의 공격대가 발진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가하려고 하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각개 약진의 이 전범은 병력의 추가 투입이라는 안 좋은 방법일 수도 있었습니다. 결과 미 공격대들은 크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 기동함대에게 미 항모 부대 공격대를 발진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 방공망을 약화시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기회를 만등었습니다. 

 

제17기동부대의 플랫처 사령관도 초계에 나섰던 정차기들이 모두 돌아온 뒤인 아침 8시 30분, 35기의 공격대를 발진시켰습니다. 

 

4. 나구모의 시간 낭비 

나구모 부대는 이전문에 즉각 대응하지 않고 야마구치 제독의 소류 항모에 배치된 두기의 신형 스이 세이 정찰기에게 추가 정찰을 명하였습니다. 

스에세이 정찰기들이 발진한 직후 소율의 공격대를 선두로 미드웨이 1차 공격대가 귀환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미드웨이 2차 공격대가 폭탄을 장비하고 출격 준비를 완료하고 갑판에서 정렬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5. 야마구치 소장의 긴급 건의 

항모 히류와 소류 두척의 항모로 구성된 제2항공 전대 사령관이며 맹장인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미 항모 발견 소식에 "지금은 일분일초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1차 출격했던 도모나가 대위의 100기의 회수를 포기하더라도 즉시 전 항모 공격대를 발진 준비가 급하다"라고 건의했지만 이런 파격적인 건의는 나구모 사령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갑판은 대 혼란을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1차 공격대를 수용하는 것이 먼저냐, 2차 공격대를 발진하는 것이 먼녀냐, 적 항모들을 부수기 위한 출격이 먼저냐 하는 결정을 놓고 참모들과 지휘관들 사이에 강들이 있었습니다. 

 

항모 함대 상공에 도착한 미드웨이 1차 공격대 함재기들은 연료가 거의 다 고강 되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차해서 상황이 나빠지면 100기 정도의 함재기들과 무려 200여 명의 탐승원들을 수장시켜야 하는 상황입니다. 

 

센다 미노루 항공 참모는 노련한 경험을 쌓은 탑승원들이 죽어가는 것을 눈을 뜨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1차 공격 대함 제기 회수가 금선 무라고 건의하고 이를 강행했습니다. 

 

새로 철현 한 항모 부대가 설사 공격대를 발진시키더라도 전투 초계 제로 전투기 부대가 완전하게 방어하리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 항모 부대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귀환하는 미드웨이 공격대를 모두 수용하고 기동부대 공격대를 발진시키기로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때까지 함대 공격용 어뢰를 장착하고 비행갑판에서 대기 중인 공격기들이 있던 일본 항모는 한 척도 없었습니다. 

5-1. 08:37분

나구모 기동부대는 미드웨이 1차 공격대를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5-2. 08:55분

돌아온 함재기를 모두 회수 완료 후 비로소 북으로 변침하여 적 기동부대를 포착하여 격멸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함 편 적 함대 발견의 타전을 했던 도네의 4호 정찰기가 추가 정보를 보내온 것은 미드웨이 공격대를 한창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5-3. 08:55분

체공시간 10시간인 도네의 영식 수상 정찰기는 귀환 중이었습니다. 

일본은 미드웨이 1차 공격대를 모두 수용한 시각은 09:30분이었습니다. 

 

6. 미 항모 뇌 격대의 전멸과 수훈

엔터프라이즈 호의 뇌격기, 미드웨이 섬 (왼쪽부터)

수용 완료가 마무리될 무렵 일본 함대는 공격대의 발진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6-1. 09:20분

존 C왈드론 소령이 이끄는 항모 호넷의 뇌 격대 TBD기 14기가 기동부대의 상공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이들 뇌 격대는 도중에 구름 때문에 호의기 들과 떨어졌습니다. 이뇌 격대는 아카키와 중 순양함 치쿠마의 견시들에게 최초로 목격되었고 엄호하던 제로기 8기가 요격하였습니다. 

 

뇌격기들은 제로기들을 무시하고 아카키에게 육박하였으나 일본 초계 전투기들의 요격 능력은 막강하였습니다. 

때문에 호넷의 뇌격기 전기가 격추되었습니다. 한기는 아카키의 ㅎ마교에 접근하다가 추락하였고 해면에 불시착한 나한 뇌격기에서 탈출하여 표류하던 죠지 게이 소위 외에 29명의 탐승원들이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게이 소의는 해전 후에 미 비행정에 발견되어 구조되었습니다. 전후 이들 뇌격 대원 전원은 모두 미국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호텟의 뇌격기는 전멸하였고 폭격기들과 전투기들은 모두 일본 항모를 찾지 못하고 헤마다가 연료가 떨어지자 미드웨이 섬으로 향하였습니다. 

전투기 F4F와일드켓 기 전기와 폭격기 SBD3기는 연료 고갈로 바다에 불시착하였습니다. 나머지는 SBD20기는 모두 호넷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6-2. 09:37분

콘신 린제이 소령이 이끄는 엔터프라이즈의 뇌 격대 14기가 나무고 부대의 상공에 도달했으나 이 부대도 역시 통신상의 문제로 와일드 켓 전투기 부대의 호의를 받지 못하고 일본 제로기 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뇌 격대는 항모 카카를 노렸으나 10기나 격추당하고 탑승원 29명이나 전사하는 참변을 겪었습니다. 

 

6-3. 10:00 분

일본 항모 소류에서 발진시킨 쾌속의 신형 스이 세이가 미 함대를 발견했습니다.

함대의 정확한 위치는 도네 4회 기각 보고한 위치와 100km 이상 차이가 있었습니다. 

 

6-4. 10:10 분

요크타운 제3의 뇌 격대 12기가 나구모 부대 상공에 도착하였습니다. 뇌 격대는 구름에 가려진 다른 3척의 항모보다 앞에서 노출된 항모 히류를 공격하였습니다. 

 

이 뇌 격대는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나 제로기의 공격에 TBD10기가 격추되어 2기는 연료 부족으로 해면에 불시착하는 참극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요크타운의 뇌격 대원 24명 중 21명이 전사했습니다. 일본 항모 히류에게 어뢰 5발을 발사했지만 명중탄은 없었습니다. 

 

뇌 격대들은 모두 섬멸되었지만 간접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이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1. 뇌 격대는 일본 기동부대를 연속으로 흔들어 이들로 하여금 신속한 반격에 나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2. 미군기들은 대부분의 일본 전투 초계기들이 뇌 격대에 눈이 팔려 자기 위치를 이탈하게 만들었습니다. 
  3. 많은 제로기들의 실탄과 연료를 소모하게 만드어서 다음 미군 폭격대 요격에 대처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일본의 제로기들도 계속되는 이함-전투-착함-보급-이함을 되풀이하느라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마지마 공격을 시도하다가 섬멸된 요크타운의 뇌 격대는 특히 승리를 위한 중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일본 기동부대 남동쪽에서 저공으로 공격해온 요크타운의 뇌 격대를 영격 하느라 일본 호의 전투기들은 모두 남동쪽 해역 저공에 몰려들어 일본 기동부대 상공의 고공을 비워 놨었기 때문입니다. 
  4. 요크타운의 요격 직후 발생한 일본 초계기들의 방심을 곧 일본 기동부대의 참변으로 결론이 나게 됐습니다. 

여러 번 되풀이하다가 실패로만 끝난 미 뇌격 대원중에 바다에 불시착하거나 낙하한 미 해군 조종사 2명과 한 명의 탑승 원을 표류하다가 일본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일본 해군은 이들로부터 중요한 정보들을 뽑아내고 물을 넣은 석유통에 묶어 바닷속에 수장시키는 잔인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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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크 MH-47은 특수작전을 위해 개조된 헬기로 특수 작정의 짐꾼 역할만 하던 헬기가 주역으로 바뀐 대형 침투 헬기입니다. 지금부터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MH-47G 시누크 대형 특수작전헬리콥터 <출처: US Army>

1. 시누크 MH-47 개발 역사 

전쟁사에 헬기가 등장한 이후 병력의 투입과 퇴출에 있어서 그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중요해졌습니다. 특히 공중강습(Air Assault)과  같은 전투 수행개념이 발전하면서 헬기는 현대 입체 기동전의 중심 전력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헬기 강습에 특화된 Air Cavalry(공중기동부대: 직역하면 항공기병)이라는 개념이 정착되어 과거 경기병이 수행하던 속도를 통한 충격과 돌파구 형성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렇게 전투 수행 개념이 전쟁 속에서 정착하면서 헬기 전력은 발전을 거듭해 나갔습니다. 

 

공중기동전력의 중심으로는 분대급을 투입할 수 있는 UH-1 이로쿼이를 시작으로 UH-60 블랙호크 가 정착했으며 이를 대체하기 위한 미래 헬기 사업이 현재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헬기를 활용하는 작전에 가장 익숙한 부대는 바로 특수 작전 부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적의 종심에 위치하는 전략적 위치에 정확히 침투하여 작전을 수행하는 타격 작전은 특수부대의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이에 따라 종심 침투 수단은 역사적으로나 실무적으로 특수부대의 핵심적인 과제였습니다. 

 

항공기를 사용한 특수부대의 초기 타격 작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그라닛 작전에서 코흐 특공대는 글라이더를 정확하게 에방에 마일 요새에 인위적으로 불시착시켜 각 분대와 장비를 목표지점에 정밀하게 투여함으로써 작전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헬기가 등장한 현대라면 굳이 글 라어 더 불시착과 같은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정미한 투입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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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의 사용이 증가함과 함께 특수작전의 빈도는 높아져 갔는데, 특히 베트남전에서는 특수부대원의 침투와 퇴출에 헬기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적전 중에도 가장 과감한 작전 중 하나는 1970년 11월 21일에 실시된 손타이 인질 구출작전이었습니다. 

적진 한가운데 위치한 포로 수용서에 과감한 침투가 가능했던 HH-3E 공군 특수 작전 헬기 5대를 투입한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 실시되었던 이글 크로우 작전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해병대 헬기 조종사가 이끌던 RH-53D 편대는 특수작전 침투 임무에 특화되지 않았던 탓에, 최소 작전요구 기체가 작전지역까지 도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중간 기착지에서 충돌 사고까지 일으켜 버렸습니다. 

미국은 테헤란 주재 자국 대사관의 인질을 구하기 위해 이글 크로우 작전을 실시했으나, 특수작전 헬기의 부재로 구출작전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사상자만 낸 채 후퇴해야만 했다. <출처 : US DoD, Public Domain>

이글 크로우 작전의 실패는 미국에 커다란 각성의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전 해참 총장인 할로웨이 제독을 수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또다시 유사한 상황이 있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검토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할로웨이 보고서의 권고사항에 따라 최대의 헬기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미 육군은 특수작전에 특화된 헬기부대의 창설을 서둘렀습니다. 

 

이에 따라 제101 공수사단 휘하 제158 항공대대의 c중대와 d 중대를 차출하여 1981년 제158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158)가 창설되어, 당시로서는 가장 최신형 헬기인 UH-60 블랙호크가 우선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여기에 제229 공격헬기 대대의 OH-6A카 유즈(후에 MH-6 리트버드로 변경)와 제159 지원 헬기 대대의 CH-47 시누크 헬기가 합류하면서 켄터키주 포트 켐벨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TF-158은 TF-160으로 부대명칭을 변경했으며, 그레나다 침공에서 특수부대를 침투시키는 핵심전력으로 활약하면서 미 육군의 특수전 항공부대로 자리 매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MH-47시누쿠 설명 동영상

TF-160에서 주축이 되는 기종은 MH-6와 MH-60 두 가지였지만 대형 수송 헬 게인 CH-47, 시누크의 존재감은 대단했습니다. 

1개의 특수작전팀을 간신히 탑승시킬 수 있는 MH-60과는 달리 시누크는 2~3개의 팀을 탑승시키고 난 차량이나 고무보트 가지 탑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시누 쿠를 특수작전용을 개조하는 사업이 TF-158 창설 직후에 시작되었습니다. 

 

기체는 구형의 CH-47A 6대와 CH-47C 6대가 CH-47D 사양으로 개수된 후에 FLIR와 미니건 등을 장착하는 방식으로 1984년~1987년까지 모두 12대가 만들어졌으며, MH-47D로 명명되었습니다. 

 

한편 MH-47의 유용성이 계속적으로 입증됨에 따라 육군은 업그레이드 모델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1987년 12월 보잉사에 개발사업을 맡겼다고 합니다. 

 

MH-47E로 명명된 신형 특수전용 시누크는 지형 추적/회피 레이더를 장착하여 저공침투 비행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CH-47SD의 연료탱크 증강과 항전장비 업그레이드를 적용하는 등 다양한 개선 사향을 적용했습니다. 

 

MH-47E시제기의 초도비행은 1990년 5월 31일 실시되었으며, 초도양 산기는 걸프전 이후인 1993년 9월에서야 인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육군은 모두 6억 9천만 불 (양산비 3억 5천만 불)을 투입하여 1995년 5월까지 MH-47E 26대를 인수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MH-47D/E는 대형 수송능력과 장거리 침투 능력으로 인하여 9.11 테러 이후 대테러 전쟁에서 강 각광받는 특수작전용 헬기로 등극했습니다. 특히 미 공군이 2007년 마지막 MH-53M 페이 브로우 특수작전 헬기를 퇴역시킴에 따라 MH-47은 미군의 유일한 장거리 전천후 대형 특수작전 헬기가 되면서 기체는 더욱 혹사되고 심지어 몇몇 기체는 전투 중에 격추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미 육군이 엔진과 디지털 조종석 개량을 적용한 신형 CH-47F를 확보함에 따라 특수전 항공연대도 2001년 기존의 MH-47D/E를 업그레이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하여 MH47G 시누크 개발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육군이 애초에 요구했던 MH-47G형은 모두 61대였지만 추후에 1대가 추가되어 모두 62대를 도입했습니다. 

기존 MH-47D/E형을 재제작하여 기체를 확보함은 물론이고 CH-47F 신규 기체를 MH-47G형으로 개수하여 확보하고 있습니다. 

 

MH-47G의 초도기는 2004년 5월 6일에 롤 아웃하였습니다. 특히 미 육군에서 가장 바븐 기체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MH-47G의 순자를 채우기 위하여 빠르게 작업을 진행했으나, 2011년 3월이 되어서야 마지막 62번째 기체를 인도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MH-47G는 수명 연장과 성능 향상을 동시에 실시하는 블록 2 업그레이드 사업을 2018년 7월부터 실시하고 있습니다. 

블록 2 업그레이드의 대상 기체는 예산이 허락하는 하에서 매년 조금씩 늘 붕장어 있습니다. 2021년 11월 말까지 모두 30대가 개수 대상이 되었습니다. 블록 2 초호기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 속에서도 2020년 9월 SOCOM에 인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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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AEW&C: Airborne Early Warning & Control)는 고성능 레이더 원거리에서 비행하는 적 항공기를 포착해 지상기지에 보고하고, 아군의 전투기를 지휘, 통제하는 항공기를 말합니다. 

피스아이 조기 경보 통제기 활주로 이륙대기 이미지 출처: 대한민국 공군

 

피에스아이는 공중의 전투 지휘 사령부라는 별칭을 갖고 있으며 공중조기경보통제기에 탑재되는 레이더는 지상의 레이더보다 우수한 수색 및 탐지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360도 전방위 수색이 가능함은 물론, 저고도에서 낮게 비행하는 항공기도 잡아낼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산 정상에 위치한 지상레이더는 전시에 적의 일차 공격 목표이기 때문에 , 적의 공격으로 파괴되면 아군의 방공 통제가 한순간에 무력화될 수 있습니다. 

 

반면 공중 조기 경보기톤제기는 공중에서 비행하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는 지상의 레이더에 비해 생존 서인 월등히 높습니다. 

 

1. 공군의 피스아이 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에 대해 알아보자.

걸프전 이후 우리공군도 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의 도입을 위해, 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 획득 사업인 E-X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사업은, 1998년에는 IMF라는 국가적 경제난으로 사업이 일시 보류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2006년 11월, 공군의 공중조기 경보 통제기로 미국 보잉사의 737 공중 조기경보 통제기를 선정했습니다. 

737 공중저기경보통제기는 우리나 외에도 오스트레일리아와 터키가 운용할 예정입니다. 

 

2008년 4월 공군은 737 공조기경보통제기에 피스아이(Peace Eye)라는 제식 명칭을 부여했습니다. 

피스아이는 함반도의 평화를 수호하는 감시자라는 의미를 담도 있습니다. 피스아이 공중 조기경보 통제기는 2012년까지 총 4대가 도입될 예정입니다. 

 

일반적으로 공중조기경보기들은 동체 상부에 원반 형태의 레이더를 장착하나, 피스아이 공중 조기경보기는 바 형태의 레이더를 장착하는 점이 눈에 띕니다. 

 

피스아이 설명 동영상

2. 피스아이의 눈 톱해트 레이더를 아시나요?

피스아이 공중조기경보기에는 미국 노스럽 그루 만사가 제작한 톱 해드 레이더가 장착되었다고 합니다. 

레이더 모양이 서양의 중절모와 비슷해서, 톱해트라는 이름을 붙여졌습니다. 똡해트는 L밴드 소수신 모듈을 탑재한 AESA 레이더로 현존하는 공중 조기경보 통제기 레이더 중 가장 발전된 레이더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공중조기경보통제기에 탑재된 레이더들은 360도 전방위 탐색만 가능합니다. 

반면 톱해트 레이더는 레이더 빔의 방향을 순간적으로 바꿀 수 있는 AESA 레이더의 장점을 활용해 360도 전방위 탐색과 특정지역의 집중 감시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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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할수 있습니다. 톱해트 레이더는 3000여 개의 표적을 동시에 추적할 수 있고, 일반적인 360도 전방위 탐색 시 탐지거리는 약 370km입니다. 

집중 감시 때의 최대 탐지 거리는 약 749km로 알려져 있습니다. 피스아이 공중 조기경보기에는 톱해트 레이더 외에도 지휘 통제를 위해 LINK 11/16 데이터 링크와 다양한 통신장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3. 주변국의 공중 조기경보통제기 알아보자. 

일본 항공지위대는 1980년대부터 13대의 E-2C호크아이 공중 조기경보기를 운영했습니다. 

일본 항공자위대의 공중조기경보통제기, E-767 에이왁스.

 

1990년대에는 레이더와 지휘 통재 기능이 강화된 E-767에어왁스기를 4대를 도입했다고 하며 보잉사가 제작한 E-767 에어 왁스 기는 767 여객기를 플랫폼으로, 노스롭 그루먼사의 AN/APY-2 PESA레이더를 탑재했습니다. 

 

AN/APY-2 레이더의 최대 탐지 거리는 약 800km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도 다수의 공중 조기경보 통제기를 운용 중입니다. 

중국의 콩징 2000 공중조기경보통제기. <출처: 중국 인민해방군>

2006년 1우러 콩장 2000 공중 조기경보 통제기와 콩장 200 공중 조기경보기로 구성된 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 부대를 발족시켰습니다. 

중국은 1990년부터 이스라엘에서 공중조기경보공중 조기경보 통제기 도입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비밀리에 기술 구매 방식으로 공중 조기경보 통제기를 자체 개발하게 됩니다. 

 

중국 인민 해방군이 운용 중인 콩진 2000 공중 조기경보 통제기는 러시아 일류신사의 IL-76 수송기를 플랫폼으로 합니다. 레이더의 최대 탐지거리는 약 470km로 알려져 있으며 5대가 생산되어 운용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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