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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P-51 머스탱 전투기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탄생 배경과 개발 역사와 특징과 운영현황 관련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P-51머스탱 전투기 비행 이미지   출처: Public Domain 

1. 개발의 역사 

1928년 설립된 미국의 노스 아메리칸 항공은 주로 군용기를 만들어 왔으나 제1차 대전이 끝난 지 엄마 되지 않았기에 파매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장 제임스 킨들버거는 단엽기가 복엽 기를 대체하기 시작하고 1930년대 중반 이후 유럽에 서서히 전운이 고조되자 자체 자금으로 신예 전투기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만큼 기술 개발에 노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때 엔지니어 에드가 슈 무드가 이끄는 개발팀이 훗날 NA-73로 명명된 느 신예기를 설계했습니다. 충분히 군남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킨들버거는 육군 항공대(현 공군)에 도입을 제안했으나 기대와 달리 그다지 관심을 보지 않았습니다. 

노스아메리칸의 NA-73X 실험기. 단순하면서도 고속 비행에 적합한 날렵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출처: Public Domain >

당시 미군은 전쟁이 벌어져도 유럽에서 일아날 것이라 판단해 전투기보다 폭격기를 중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그렇게 확보한 기술을 더욱 갈고 다 닦으며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 고하자 그동안 히틀러를 달래는 데만 급급했던 영국이 마침내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때부터 군비 확충에 나서야 했습니다. 전투기도 마찬가지여서 생산을 늘렸지만 전력 격차를 신속히 줄이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해외에서 전투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는데 당시 여건상 영국이 전투기를 살 수 있던 곳은 중립국이지만 영국의 호의적이고 무기 거래에 크게 제한을 두지 않았던 미국뿐이었습니다. 

 

1940년 4월, 영국 구매사절단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라나 미국은 폭격기 분야에 경쟁력이 있었기에 당시 사용 중인 전투기의 성능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쓸 만하다고 판탄 한 P-40을 선택했지만 생산자인 커티스가 

미국 납품 물량을 대가에도 발차 주문을 수용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사절단은 마침 B-25 폭격기 판촉을 위해 찾아온 킨들버거에게 P-40을 하청 생산해 줄 수 있겠냐고 문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킨들버거는 넉 달의 시간만 준다면 더 좋은 전투기를 제작해 주겠다고 역으로 제안했고 특별히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한 영국이 이를 수용했습니다. 

그렇게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개발이 진행되어 1940년 10월 26일 불과 117일 만에 시제기인 NA-73이 완성되었습니다. 

 

반신반의하던 영국은 NA-73 요구 조건을 모두 충족하자 머스탱 MK I라고 명명하고 320기를 주문했고 1942년부터 본격 남 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선에서는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고도 4,000m 이상으로 올라가면 비행 성능이 급속히 저하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이르러서는 스피트 파이어가 충분히 생산되고 있었기에 머스탱은 공격기로 임무가 전환되었습니다. 

 

하지만 머스탱에 미련이 많았던 시험 비행사 롤란드 하커가 엔진이 문제라 보고 스피트 파이어의 롤스로이스 멀린 61 엔진을 장착하자는 의견을 당국에 제시했습니다. 

 

새롭게 이식된 롤스로이스 멀린 61엔진. 그저 그런 전투기로 끝날 가능성이 컸던 머스탱을 환골탈태 시킨 일등공신이다. <출처: (cc) JAW at Wikipedia.org >

이에 따라 1942년 10월, 엔진을 바꾼 5기의 머스탱이 시험 비행에 나섰습니다. 결과는 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약간의 성능 향상 정도만 기대했으나 당시 최고인 시속 700km의 속도로 비행할 수 있었고 고도에 상관없이 뛰어난 기동력을 발휘했습니다. 항속 거리도 스피트 파이어보다 30% 정도 늘어났습니다. 놀란 영국은 이를 머스탱 MK II로 명명하고 기존 물량 개조 외에 1,000기를 추가 주문했습니다. 

 

일본의 급습으로 제2차 대전에 뛰어들면서 머스탱을 도입했지만 역국과 같은 사유로 A-36 공격기로 소량 사용 중이던 미국도 놀랐습니다. 

변변한 전투기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영국 에스 들려온 소식은 복음이었습니다. 멀린 61일 엔진을 장착한 P-51은 곧바로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가 되어 제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습니다. 비록 탄생과 성능 향상은 영국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P-51은 미국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2. P-51 머스탱 특징

P-51을 개발한 에드가 슈 무드는 공기 저항 감소에 유리하도록 주익이 가장 두꺼운 부의가 중앙에 위치한 층 유식 날개 구조를 체 책했습니다. 당시까지는 드다지 많이 채용하지 않은 신기술이었으나 슈므드는 속도와 향속 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생각대로 강력한 멀린 61 엔진과 결합하면서 당대 최고의 속도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장점은 항속 거리였습니다. 

 

P51머스팅 활약상 동영상자료

 

P-51은 동 시기에 활약한 경쟁작과 비교해 기체의 크기가 그다지 차이 나지 않지만 내부 연료탱크가 큽니다. 여기에 보조 연료탱크까지 부착하면 후기형인 P-51H은 3,000여 km 가량 비행이 가능했습니다. 

 

제2차대던 말에 미국은 폭격기와 함께 적진까지 날아갈 수 있는 p-51가 등장하면서 폭격기의 손실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행 능력을 향상 시 키 층류식 날개는 얼음이 붙거나 피탄 등으로 구조에 조금만 손상을 입어도 성능이 현저히 저하되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수랭식 엔진은 피격되면 쉽게 과열되어 기체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회력이 떨어지고 저속에서 조정이 어렵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전보다 많은 장점 덕분에 P-51은 전쟁 말기에 확실하게 제공권을 장악하며 연합국의 승전을 이끈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3. 운용현황 

종전이 이루어진 1945년까지 총 16,766기가 제작되었습니다. 

1942년 1월 영국 공군을 시작으로 영연방 연합국에서 사용했고 제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친미 국가를 중심으로 20여 개국에 공급되었습니다. 당연히 가장 많이 사용한 이는 미국군 항공대였습니다. 1942년 8월부터 일선에 배치하자마자 곧바로 주력 전투기의 지위를 차지한 후 미군이 참전한 곳으면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참전 시기와 비군의 전략 때문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로 폭격기 호위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유럽 전성에서는 성능 상으로 돌일 전투기들과는 호각지세로 평가받았으나 압도적인 물량으로 제공권을 확실히 확보해 폭격기들이 원활히 작전을 펼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해군 항공대의 역할이 워낙 커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질적으로 일본 전투기를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종전 후 제트 전투기가 주력이 되면서 미국은 공격기로 임무를 전황해 1957년까지 사용했습니다. 

한국 공군에게 F-51(1947년 제식 부호 변경)은 최초의 전투기로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직후에 도입해 1955년 F-86이 도입될 때까지 주력기 임무를 담당했고 승호리 철교 폭파처럼 다양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후 1969년 축구전쟁(엘사바도르-온두라스 전쟁)처럼 중소 국가 간 분쟁 등에서 사용되었고 1984년 도미니카를 마지막으로 군용기로 전량 퇴역했습니다. 

 

 참고 문헌: 한국 국방 포럼,유용원의 군사세계, 작가 남도헌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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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피어스 전자전 시스템 공개하다.

여러 위협을 동시에 탐지 및 차단하는 세계 최초의 전전(EW) 시스템입니다. 

텔아비브 2021- 이스라엘 항공우주 산업(IAI)은 전자전(EW) 시스템의 스콜피어스 제품군을 공개했다고 합니다. 

스콜피어스 전자전 시스템 관련 이미지  출처: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

스콜피어스는 주파수의 방향이 상이한 여러 위협을 동시에 탐지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전자전 시스템입니다. 

전자전 성능을 월등히 향상하는 AESA(능동형 위상배열 레이다) 기술을 기반으로 차세대 전자전 역량을 제공하고 동 시스템은 AESA의 다중 빔 역량을 통해 전 영역을 동시에 스캔하여 표적을 발견하며, 집중된 빔을 이용하여 무인기, 선박, 미사일, 통신 링크, 저피탐 레이다. 등 전자기 스펙트럼에 걸쳐 있는 다양한 위협을 간섭(INTERFERE)할 수 있습니다. 

 

스콜피어스는 레이더, 전자센서, 항법 및 데이터 통신 등 전자기 시스템의 운용을 효과적으로 간섭합니다. 

스콜 시 피어스의 기술 혁신은 기존 전자전 시스템을 능가하는 전례 없는 수시 감도 및 전송 전력 (ERP)이 특징입니다. 

이를 통해 스콜피어스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위협을 동시에 탐지하고 각 위협에 따라 적절한 설루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스콜피어스는 여러 도메인에서 운용 가능합니다. 

 

1. 지상

Scorpius G(Grond)는 지상 및 공중 위협을 탐지 및 간섭하도록 설계된 지상 기반 전자전 시스템입니다. 

모바일 시스템인 Scorpius G는 차량으로 신속하게 배치 가능합니다. 

새로운 범주의 대공방어 시스템을 대표합니다. 소프트 칼 대공 방어는 광범위한 지리적 영역 위에 전자 보호 돔을 생성하여 다양한 현대화된 위협을 무력화시킵니다. 

 

2. 해상 

Scorpius N(Navy)는 해상 분야의 지능형 위협으로부터 선박을 방어하는 전자전 시스템입니다. 

초수평선 대함순항미사일, 무인전투기(UCAV) 및 공중 영상 레이다가 포함됩니다. 스콜피어스의 높은 사거리로 위협을 조기에 탐지하고 표적 화할 수 있어 해상영역의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 필수적인 설루션을 제공합니다. 

 

3. 공중

전투 항공기용 자체보고 PAD형인 Scorpius SP와 넓은 구역에 걸쳐 적의 공중 및 지상 기반 전자기 작전을 간섭하는 Scorpius SJ스탠드오프 재머가 있습니다. 

 

4. 훈련

지난 달 공개된 scorpius T(Trining)는 조종사를 위한 전자전 훈련을 제공합니다. 

Scorpius T는 단일 플랫폼에서 다양한 최신 방공 시스템을 동시에 에뮬레이트 (모방)할 수 있습니다. 고급 에뮬레이션 기능은 5세대 항공기 훈련을 지원합니다. Scorpius T는 국제 공군 훈련 Blue Flag2021에서 데뷔했습니다. 

 

현대 전장은 감지, 통신 및 탐색을 위한 전자기 영역에 따라 변화합니다. 

아군의 전자기 영역 사용을 보호하면서 적군의 사용을 막는 것은 전투 성공과 군의 우월성 보장을 위해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당사의 유능한 엔지니어링들이 개발한 이 신기술을 전자전에 규모를 결정짓는 세계 최초의 전자 방어 및 적 시스템 파괴 역량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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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무기 시장 큰손인 중동에 수출길이 열어 1 발당 15억 원이나 하는 천궁Ⅱ미사일 , 최대속도 마하 5로 미사일 요격시스템을 추고 이스라엘과 치종 견쟁에서 승리하여 세계 시장에서 성능을 인정받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천궁2. 발사대 이미지  출처: 국방부홈페이지 

 

1. 천궁 Ⅱ를 살펴보자. 

 

천궁을 개량해 항공기 교전 능력을 강화하고 탄도탄 요격 능력을 구현한 중거리 중고도 지대공 유도 무기입니다. 

적의 다양한 공중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의 핵심 무기 체계입니다. 

천궁 II 무기체계는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의 하층방어를 담당하는 핵심 전력으로 적 탄도탄 공격을 방어하고 천궁보다 길어진 사거리로 적 항공기에 대한 지대공 방어능력을 제공하는 무기체계입니다. 

 

1-1. 천궁Ⅱ구성 이미지 

천궁2 구성 관련 이미지   출처 : LIG넥스원 홈페이지 

1-2. 간단 제원을 살펴보면

위에서  
   
   
   
   

살펴본 미사일을 아람에미리트 연합(UAE) 수출이 사실상 성사된 것은 세계 무기 시장의 큰손인 중동 지역에 본격적인 수출 교두보를 확보하고 한동안 답보 상태에 있던 대규모 방산 수출의 몰 꼬를 텄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2. 수출 관련 내용 알아보기 

아진 최종 계약을 남겨두고 있지만 2년여 동안 세밀한 부분까지 협상해온 만큼 연내 최종 계약에 벌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정부 당국은 보고 있습니다. 

 

4조 1500억 원(약 35억 달러)은 그동안 우리 방산이 기록한 연간 최고 수출액에 육박하는 규모라고 합니다. 

지금까진 단일 사업으로 방산 수출 최대 규모는 인도네시아 잠수함 수출 등 1조 원대 수준이었습니다. 

 

이번 UAE와의 계약에는 이명박 정부 시절 원전 수출과 아크부대 파병으로 맺은 인연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0년 방한 UAE 왕세자는 우리 특 수배원들이 시범에 김은 인상을 받은 뒤 자국 특수부대 교육 훈련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2011년부터 아크부대가 교대로 UAE에 파병돼 군사 외교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이에 앞서 2009년에는 우리 간 UAE의 원전을 수주했고 이를 위해 군사협력 MOU(양해각서)도 체결했습니다. 

 

이번에 수출이 성사된 천궁은 노후 중거리 지대공 미사일 호크를 대체하려 국방과학연구소 (ADD)와 LIG넥스원 한화 시스템 등이 개발한 중거리 대공 미사일입니다. 

항공기 격추용 천궁과, 적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천궁Ⅱ 두 종류가 있는데 UAE 도입하는 것이 천궁Ⅱ입니다. 

UAE는 총 10역 개 포대를 도입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우려해온 UAE는 미국제 패트리엇과 이스라엘제 바락 8, 그리고 우리 천궁Ⅱ를 후보로 요격미사일 도입을 추진해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패트리엇은 가격이 너무 비싸 일치감치 탈락했고, 이스라엘 바락 8과 최종 경함을 벌이다 승리했습니다. 

 

군 소식통에 따르면 세계 시장에서 성능을 인정받고 있는 이스라엘제 요격 미사일과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의미가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번 수출 성사엔 합참의장, 방위사업 청장 등 최근 UAE를 방문해 방산 세일즈를 한 정부 및 군 고위 관계자들의 활동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동안 중동지역 무기 수출은 UAE 등 무기 수입국의 요청에 따라 엠바고(보도유예)가 유지돼 왔다는 점에서 이번 UAE의 발표는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정부 소시 통은 UAE가 이번 발표 직전 우리 정부 고위층에 사전 통보를 해왔다고 합니다. 

이게적인 공개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며 천궁 II는 교전 통제소와 3차원 위상배열 레이더, 수직발사대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참고문헌: LIG넥스원 국방부 홈페이지 내용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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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한 또 하나의 명작으로 함상형 전투기입니다. 

미 해군에서 함재로 사용하였으며 퇴역할 때까지 F-14 톰캣을 따라올 전투기는 없었습니다. 

F-14D 톰캣 함상전투기 항공모함에서 출격하다.  <출처: 미 해군>

1.F-14 개발 역사 알아보기. 

1960년에 들어서면서 미 공군 전술공군사령부(TAC: tactical Air Commansd)는 적지 종심 타격 임무와 요결 임무를 병행할 전폭기의 도입을 추진하면서 소련의 방공망을 저고도로 돌파해 전술 핵폭탄을 고속으로 투하한 후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는 장거리 요격 전폭기의 요구도를 발행하였습니다. 

 

한편 미 해군은 소련의 장거리 비행 폭격기가 발사하는 장거리 대함 미사일로부터 항모전투단을 보호할 장기 재공형 장거리 요격기가 필요해지게 되면서 적을 최대한 먼저 발견하기 위해 현존 전투기보다 더 강력한 레이더와 사거리가 긴 미사일은 운용할 수 있는 함대 방공 전투기(FAD: Fleet Air Defense aircaft)의 도입을 검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61년 취임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개발 비용 절감을 위해 공군과 해군의 두사업을 하나로 합치도록 지새 해 해군과 공군은 두요 구도를 충족할 수 있는 한대의 플랫폼 개발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 공군이 각자 바른 항공기 간에는 상이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해군과 공군은 별도로 사업을 추진하기 희망했으나 미 국방부는 공군 요구도에 기반한 전술 시험 전투기(TFX) 우선 개발한 후 해군 요구도에 맞춰 일부를 개량하는 방식으로 두 요구도를 충족시키는 방식을 밀어붙였습니다. 

 

이를 위해 종심 침투 핵 투발용 항공기로 개발하던 F111 아드바크를 베이스로 삼은 F-111B형상인 TFX사업용 항공기로 선택됐으며, 이렇게 선정된 공통 플랫폼의 개발업체로 F-111 제조업체인 제너럴 다이내믹스 (GENERAL CYNAMICS)사와 함재기 명가인 그루먼사의 파트너 컨소시엄을 선정했습니다. 

 

하지만 미 해군은 공군의 요구도와 절충을 하다간 정작 해군에 필요한 요구도를 못 맞춘 기체가 나올 것을 우려했습니다. 

특히 F111B은 중량이 너무 무겁고 엔진 실속이 잦다는 문제가 발견되었으며, F-111항 공기 계열의 항모 이 착함 특성이 매우 나쁘다는 점 때문에 함재기로 적합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내용은 토머스 코놀리 미 해군 작전사령부 항공작전 전 차장(중장)이 직접 의회에 보고했으며, 미 해군은 그루먼 사에 F-111B의 형상 변경이나 대안을 찾아보도록 의뢰했습니다. 

 

결국 1968년 5월부터 TFX사업은 중단되었습니다. 

미 해군은 독자적으로 차기 전투기 개발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루먼은 F-111의 수많은 대안과 개량 안을 연구한 끝에 통칭 303 설계를 최종 개발 계획안으로 확전 했으며, 해군이 독자 진행하는 사업의 기체에는 톰켓 (Tom Cat) 아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로 황공기에 고양잇과 이름을 붙여온 그루먼 사의 전통에 토머스 코놀리 제독이 이름을 합쳐 톰의 고양이 (Tom's Cat)라는 의미로 명명한 것입니다. 

 

해군이 독자적으로 시작한 사업은 해군 시험 전투기(vfx: naval fighter experimental)로 명명됐으며, 이번에는 수수한 장거리 함대 방공 요격기를 목표로 잡았습니다. 

그루먼은 TFX사업 중단 후에도 계속 303 설계를 진행했으며, 1967년에 이형상을 미 해군에 정식으로 제안했습니다. 

 

미 해군 항공체계 사령부는 

1968년 7월 VFX사업 제안요청서 (RFP)를 발행하면서 요구도에는 2인승에 트윈 엔진을 갖춘 초음속 공대공 전투기를 요구했습니다. 

입찰이 시작되자 제너럴 다이내믹스와 그루먼 외에도 링-템코-보트 2000년에 그룹 도산 후 미사일 사어 부만 록히드 -마틴이 인수 맥도널 더글라스 1997년 보잉에 합병, 노스 아메리칸 락웰 2001년 그룹 도산 후 항공우주 분야만 보잉이 인수하였고 제안서를 제출했으며 이중 네 업체가 가변익 기체 형상을 제안했습니다. 

 

미 해군은 같은 해 말 맥도널 더글라스와 그루먼을 최종 후보로 선정했으며, 그중 다시 그루먼을 1969년 1월 우선 협상대상자로 선정했습니다. 

미 해군은 전투기의 개발 시간을 절감하고, 앞서 공통 플랫폼 개발을 주차했던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VBS사업의 방향을 트는 것을 막을 요량으로 시제기 개발을 건너뛰고 곧장 실용 개발(FSD)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제식 번호 F-14를 부여받은 VFX 기체는 계약자 선정으로부터 불과 22개월 만인 1970년 12월 21일에 초도비행을 실시했으며, 1973년에 초도 운용 능력(IOC) 판정을 받고 1974년 9월부터 실전배치에 들어갔습니다. 

 

 

F-14는 당시 미국의 최첨단 기술이 놀아 있던 기체인 데다, 장거리 교전 능력이 탁월한 기체였기 때문에 해외로 수출하지 않은 것이 기본 방심이었지만 저치적인 이유로 단 한 차례 수출이 성사된 바가 있습니다. 

 

그 배경은 1972년 4월 9일 소비 에튼 연방 공화국(소련 0은 이라크와 군사지원협정을 체결하면서 이라크에게 전투기와 전차를 비소한 최신 무기를 제공하기로 약속한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소련의 조치는 1968년에 프랑스가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금수조치를 단행하면서 미국이 대신 이스라엘을 후원하기 시작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즉 소련-이라크 협정에 당황한 것은 다르 아닌 이라크의 지역 내 라이벌인 이란이었습니다. 

 

시아파의 거두인 이란 입장에서 수니파의 맹주인 이라크와의 군비 대칭성이 깨진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친미 성향인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는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페르시아만의 품부 한 유전층을 장악할 수 있는 전투기의 필요성을 설파했습니다. 

 

팔레비 국왕은 스스로가 전투기 조종서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투기를 특히 더 각별하게 생각했으며, 소련이 중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지가 하면서부터 소련 공군의 MIG-25가 마하 3의 속도로 계속 이란 영공을 침범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할 최신예 전투기의 도입을 원했습니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반드시 중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상쇄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란의 요정을 신중하게 검토했고 , 이에 따라 핸리 키신저 국가안보 보좌관을 1972년 5월 이란으로 급파하여 이란인 각 겨을 감당할 수 있는 군수 장비는 무엇이든 팔겠다는 백지 수표를 제한했다고 합니다. 

 

이란은 검토 끝에 일찍이 미국이 그 어디에도 판매한 적이 없는 F-14 톰캣과 AIM-54 피닉스 공대공 미사일을 선택했습니다. 미 국방부와 국무부는 이 거래에 대해 어려를 표명했으나, 행정부의 방침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결국 F-14에 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해외 수출 승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1-1. 이란에 판매한 F-14

총 80대의 F-14 DHK 284기의 피니스 미사일 구매 계약을 체결한 후 1976년부터 기체를 인도받기 시작했으나, 인도가 거의 마무리되던 1979년에 이란 이슬람 혁명이 터지면 선 파레 비 왕조가 전복됐습니다. 

이에 이란에 인도될 예정이던 최종 기체인 80호기는 수출이 중단되어 이란에 인도되지 않고 미 해군이 인수했습니다. 

 

이슬람 혁명 후 이란은 혁명 전에 구입한 미제 F-4, F-5 및 F-14의 후속 군수지원이 끊겨 부품 수급에 문제가 발생했으므로 역설계를 통한 유사부품 제작과 기체 부품의 우회 수입을 병행하고 있으며, 역설계 관점에서 입수된 일부 데이터는 소련에게 제공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F-14는 다른 무엇보다도 특위의 세련된 설계 때문에 군, 민을 막론하고 널리 사랑받아온 전투기입니다. 

특히 F-14의 매력은 톰 크루즈 주연의 1986년작 (탑건)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되었고, 그보다 앞선 1980년 작 <최후의 카운트다운>에서는 시간을 거슬러 가 일본군의 영식 함상전투기와 전투를 벌이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관객의 상 살력을 자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어리 88>처럼 현대전을 바탕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에도 중요한 기체로 등장하며, 심지어 머나먼 미래를 배경으로 한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에 등장하는 함재기인 VF-1에 F-14의 디자인을 차용됐을 정도로 특유의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각광받았습니다. 

 

F-14가 운용하는 피닉스 미사일은 무려 190km 밖에서 적기를 격추할 수 있다. <출처: 미 해군>

2. F-14 톰캣의 특지에 대해 알아보자. 

F-14는 초음속, 쌍발엔진, 바 변익을 채택한 전천후 전투기로 최대 24개의 표적을 동시에 탐지할 수 있고 주변 공역을 계속 스캔하는 동안 AIM-54A피닉스 공대공 미사일은 최대 여섯 발까지 발사할 수 있습니다. 

F-14의 전방 조정석은 HUD(HEAD-UP DISPLAY)와 두장의 다목적 평면 스크린 디스플레(MFD)가 설치되어 있으며, 후방 조종석에는 레이더 요격 장교를 위한 AN/APG 71 레이더 디스플레이와 항공 센서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F-14의 가장 뛰어난 점은 장거리 전투 및 탐지 능력입니다. 

F-14는 300KM 가까운 범위의 펴 적을 20개 이상 동시 추적할 수 있어 어지간한 동세대 항공기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적을 먼저 포착하고 추적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등장한 스텔스 기술 때문에 다소 효용성이 격감한 측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F-14의 가잔 확연한 외관상의 특징은 특유의 가변일 설계라 할 수 있습니다. 

가변익은 비행 중 자동으로 각도를 조정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으나, 필요에 따라서는 조정사가 수동으로 변경하여 날개 각도를 조종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이륙 시에는 날개각이 20도를 유지하도록 하여 안정성을 높이고, 이륙 후 비행이나 착륙 시에는 자동으로 날개각이 68도로 조정되어 항력을 줄입니다. 또한 항모 수남시에는 최대 75도까지 날개를 접어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할 수 있게 설계되었습니다. 

 

F-14는 마하 2.5의 속도로 배행이 가능하며, ㄹ-14를 위해 제작된 미사일인 AIM54 피닉스 공대공 미사일을 운용할 경우 최대 190KM 밖에서 적기를 격추할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은 함대 방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건이자 F-14의 간장 뛰어난 장점입니다. 

F-14 내부에는 GE사의 발칸 M61 A1 20mm 기총이 동체 우형에 설치되어 있어 최대 675발까지 사격이 가능합니다. 

 

초창기 F-14A/B형에는 휴즈에서 제작한 AWG-9 전천후 다목적 X-밴드 펄스 -도플러(PULSE-DOPPLER) 레이더가 장착되어 있었으나, 육지 위에서 레이더의 하향 탐지/하방 공격(LOOK DOWN SHOOTDOWN)에서 문제가 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AWG-9가 최대 6개 펴 적에 방사파가 좁은 스포트라이트빔을 차례로 조사하고 이를 받은 AWG-9의 아날로그 컴퓨터는 6개의 표적이 계속 오던 방향대로 진행한다고 가정하여 표적의 미래 위치를 게 산하는데 여기서 표적이 예상 위치에서 빠르게 벗어나버리면 AWG-9의 탐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허점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문제점을 개선한 AN/APG-71 레이더가 F-14D 형부터 장착돼었습니다. 

APG-71은 F-15에 장착되 APG-70과 유사한 기술을 이용한 레이더로, 디지철 처리 속도가 빨라졌을 뿐 아니라 레이더 잔상 필터링이나 탐지 범위 등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AN/APG-71은 최대 740km까지 탐지가 가능하나, 안테나의 설계 한계 때문에 시 질적으로는 최대 370km까지 탐지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휴즈 사는 55대의 레이더와 수리부품을 납품했으나, 추가 구매가 이루어지기 전에 사업이 취소되고 후속 관리는 레이시온사로 넘어갔습니다. 

 

3. F-14 톰캣 제원에 대해 알아보기 

종류 요격기/제공권 장악용 다목적 전투기/ 함대방어용 전투기
제조사 그루만 항공(Grumman Aerospace Co., 現 노스롭-그루만 1969~1991)
승무원 2명 (조종사/레이더 요격장교)
전장 19.1m
날개길이 11.58m (접은 상태), 19.55m (펼친 상태)
전고 4.88m
날개면적 54.5m² (접은 상태), 93.6m² (펼친 상태)
자체중량 19,838 Kg
적재중량 27,700 Kg
최대이륙중량 33,720 Kg
최대 연료 탑재량 7,350 Kg(내부연료탱크)
추력체계 16,10 파운드 GE F110-GE-400 엔진 X 2 (애프터버너 시 28,200 파운드)
최고속도 마하 2.34 (고도 2,485 m/h 조건)
전투반경 926 km
페리 반경 2,960 km
실용상승한도 15,200m
상승률 229 m/s
날개 하중 468.7 kg/m²
추력대비중량 0.88 
기본 무장 20mm M61A1 6연장 개틀링 기관총 (675발)
하드포인트 10개 (동체 하부 6개, 엔진 흡입구 옆 2개, 날개 아래 2개)
무장 - AIM-54 피닉스(Phoenix) 공대공 미사일
  - AIM-7 스패로우(Sparrow) 공대공 미사일
  - AIM-9 사이드와인더(Sidewinder) 공대공미사일
  - MIM-23 호크(Hawk) 미사일(이란 공군/공대공으로 개량)
  - 합동정밀직격탄(JDAM)
  - 레이저유도식 페이브웨이(Paveway) 시리즈
  - Mk 80 계열 폭탄
  - Mk 20 록아이(Rockeye) II 계열 폭탄
 
센서 전술 항공정찰 포드체계(TARPS) / LANTIRN 표적획득 포드
항전체계 -휴즈(Hughes) AN/APG-71 전천후 다목적 X 밴드 펄스-도플러 레이더
  - AN/ASN-130 관성항법체계, 적외선 추적탐색체계
  - 원격조작식 영상 향상 수신기 (ROVER) 
대당 가격 $3,800만 달러 (1998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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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영국군 총사령관을 활약하였고 1946년에 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 이미지 

1. 버나드 몽고매리 소개 

1908년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투신하였습니다. 1910~1914년에도 인도 근무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종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아일랜드, 팔레스타인에서 근문 하였습니다. 1931년 대령, 1938년에는 소장이 되어 팔레스테인에서 사단장으로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제3사단장으로서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독이 군의 공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940년 6월 됭케르크 철수 후에는 제5사단장을 거쳐 1942년에 제8군 사령관으로서 북아프리카 작전을 맡아 롬멜 휘하의 독일군을 엘 알 라멩에서 격파, 전국에 승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정에서는 영국군 총사령관을 서 활약, 원수가 되었습니다. 1946년에 백작이 디어 가터 훈장을 받았고 참모장을 거쳐 1951년~1957년에는 나토 군 최고 사령관 대리로 있었습니다. 

 

2. 몽고메리 역사적 사실 알아보기. 

2-1. 2차 세계대전 이전 사실. 

1987년 런던에서 몽고메리 가의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핸리 몽고메리가 송공회 성직자였기에 금욕적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에 엄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해 완고하고 거만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무심함을 그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으며, 훗날 버나드 몽고메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손자인 데이비드와 만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성격 면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은 그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중충한 소년기 및 청소년기를 보낸 후 왕립 군사 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왕립 워윅 셔 연대 1대대의 보병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보병 소대장으로 참가하였습니다. 몽스 전투에서 대대의 절반이 소멸하고, 국경 전투에서 오른쪽 폐에 총알이 박히고 무릎에도 적탄이 관통하여 사경을 헤매는 경험을 하는 등 여러 지옥도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전간기에는 보병 방어 전술에 대한 책을 저술하여 영국군 내에서 어느 정도 반항을 이끌어냈지만 다시 영국 육군의 화 드는 전차였기 때문에 그이 저작은 상대적으로 묻혔습니다. 

 

1925년 브리티 뉴에서 휴가를 지내던 중 사랑에 빠지고 말았는데 베티 엔더슨이라는 17세 금발미녀였습니다. 

몽고메리는 그녀에게 열심히 작업을 걸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가 부모와 함께 스위스에 렌크라는 곳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것이란 소식을 듣고 그는 그들이 묵을 장소를 알아내 그녀를 다시 만났다고 합니다. 

 

그이 관심을 돌리기 위해 엔더슨은 베티 카버라는 여성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몽고메리와 비슷한 연령대의 미망인으로 12세와 13세인 두 아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몽고메리는 그녀와 그녀의 두 아들과 함께 친구가 되었습니다. 

1927년 둘은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1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나갔고 이듬해 외아들 데이비드가 태어났습니다. 1937년 아니가 벌레에 물린 상처로 전 엽병에 걸려 사망하자 몽고메리는 평생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2-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야이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몽고메리는 프랑스 전선의 영국 원정군 지휘관으로 참전했습니다. 이후 후퇴하는 영국군을 보호하기 위해 아라스 전투로 독일군을 저지하여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도왔습니다. 이후 본토로 귀환해 육 재건에 전념했습니다. 

 

에르빈 롬멜 원수가 이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이 저지른 대삽 질을 메꾸기 위해 급파되어, 번개 같은 작전으로 오코너 중장을 사로잡고 영국 서부 사막 군을 거의 괴멸 상태까지 몰아넣었습니다. 중동 사령관 웨이 벌 대장이 인도로 전출되고  후임이 된 오킨 렉 대장은 서부 사막 군을 제8군, 일명 사막의 쥐때로 재편하고 재도전, 한때 밀어붙이는 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반격당해 닐 리치 중장이 지휘하는 8군의 전력 절반 가량을 날려먹고 (가질라 전투) 토브룩 까지 함락되는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오킨 렉은 엘 아리 메인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닐 리치 중장을 해임하고 8군의 지휘권을 직접 잡고 롬멜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차 엘 알라메인 전투 그러나 오킨 렉은 처칠의 무리한 공세 요구를 비현실적이라 불가능하다고 거부했고 이에 처질은 카이로까지 가서 오킨 렉을 마구 갈구고 패배주의에 물들었다고 해임한 뒤 후임으로 해럴드 알렉산더 대장을 임명하고 8군 사령관으로 몽고메리 중장을 임명합니다. 

하지만 처칠의 기대와 달리 몽고메리 또한 공세에 나서는 게 아니라 전력을 보강하고 우주방어를 일관하였습니다. 8월 30일에 실시된 추측 국의 마지막 대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여 알렘 엘 할파 전투 독일군의 이집트 진공 능력을 완전히 소모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섣부르게 공세에 나서는 대신 처칠의 압박에도 전력을 증가시키는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사이 8군의 전력은 하루가 다르게 증강되어 갔는데 아프리카 군단을 지워하기 위해 투입된 독일 제27전투비행단 소소 정찰기가 시속 300마일의 속도로 8군의 병력 주변을 돌면서 그 시간을 계산해 봤더니 무려 10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2-3. 엘 아라 메인의 승리

엘아라메인전투에 영국병사이미지 

결국 이러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2차 아라 메인 전투에서 아프리카 군단을 거세게 밀어붙인 결과, 상당한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아프리카에서 독이 군이 사실상 괴멸하여 이집트에서 리비아를 커쳐 튀니지 에 이르는 먼 후퇴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몽고메리는 독일군을 추적, 튀니지에 틀어박히기 전에 괴멸시키려 했으나, 기갑 지휘에 서투른 면이 이었던 데다가 롬멜이 몇 차례 효과적으로 반격을 했고, 아천 후로 공군력이 생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해 실패하였습니다. 

 

이무렵 미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류 하여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포위되었고, 독일군은 영우 시 되었던 롬멜이 또다시 패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독일로 불러들였습니다.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륙했던 미군은 카세린 계곡의 참패를 경험하는 등 처음에는 빌빌대어 영국군 장군들뿐 아니라 아이젠하워 조차 자군의 전투력을 의심할 정도였지만, 조지 S, 패튼으로 지휘관이 교체되면서 전력이 급상승, 독일군을 밀어붙이는데 성고 하였습니다. 

결국 양 방향에서 영국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은 아프리카 군단은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합쳐 거의 30만의 포로를 남기고 소멸하였습니다. 

 

2-4. 이탈리아 전역과 D-DAY 후 이야기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상륙하는 연합군 이미지 

 

이후 미국과 함께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실시하는데, 여기서 지격 방 향고 주공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패튼과 사이가 벌어지고,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항상 과감한 공격을 주장하는 패튼과 가급적이면 방어전을 위주로 적군의 힘을 소진시킨 후 마무리를 가한다는 몽고메리는 사사건건 충돌하기 일쑤였습니다. 

 

카세린 전투에서 미군의 한심한 꼴을 본 몽고메리는 미군의 전투력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전공 욕심에 불타는 패튼은 자신의 전공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명장 롬멜을 격파한 명성에 빛나는 몽고베리를 라이벌로 보고 그보다 먼저, 더 많은 전공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몽고메리는 전공 욕심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몽고메리는 다시 사령관이던 알렉산더 정군을 꼬드겨 잘 진격 중이던 미군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진격로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독일군은 무너져 내리던 이탈리아군을 수습하고 방어선을 구성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 결과 시칠리아 전역에 교착 상태에 빠지자 패튼 역시 꼼수를 써서 위력 정찰을 핑계로 진 겨울 개시해 서부 시칠리아를 쓸어버리고 파레르모에 먼저 입성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패튼이 병사들의 원성을 산 것도 이무렵입니다. 

 

몽고메리는 처음에는 패튼을 그다지 신경아 썼지만, 그가 시칠리아에서 엄청난 전과를 세워 자신의 전공이 가려지자 슬슬 약이 올랐는지 이후 패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과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몽고메리와 패튼은 서로 만날 때마다 싸웠고, 이들을 지휘하는 아이젠하워는 뒷머리를 잡고 오마 브리들리가 이를 중재하는 상황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매일 일어난 셈입니다. 이러고도 연합군 홍 사려부가 멀쩡하게 돌았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입니다. 

 

몽고메리는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총지휘하여 작전을 성공 시 켜고, 이후 노르망디에 연합군을 묶어두려는 독일군을 상대로 영연방군을 지휘하며 격전을 치르다가 이후 상륙한 패튼의 3군이 망치 역할을 하는 동안 모루 역할을 수행, 패튼의 부대가 진격하는 동안 독일군의 주력을 붙잡아 두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두 지휘관의 활약으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이후 예상보다 적은 희생으로 훨씬 빨리 파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과정에서 몽고메리와 패튼의 대립은 점차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군의 빛나는 승리를 취재 하 길원 하는데 미국 기자들이 패튼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몽고메리를 무능한 인물 답답한 영국 놈으로 포장하면서 이러한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지크프리트 선과 라인강을 넘어 독일 영내로 먼저 들어가는 장군이 되길 원했던 두 사람은 라이벌보다 먼저 전과를 거두기 위해 서로 더 많은 보충병력과 보급품을 원했고, 그에 반하여 아이젠 하워는 영국군이나 미군 모두 전력을 이것은 영국군과 미군 양부 대가 사이좋게 진격 속도가 떨어지게 만드는 좋지 않은 결과만 낳았습니다. 

 

2-5.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참패하다. 

마켓가든작적 에서 미군공수부대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독일군의 후퇴보다 빠른 진격 속도에 기고만장해져 있었고, 비실거리는 독일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걷오 차기 위해 획기적인 꼼수를 궁리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노르망디 이후 놀고먹는 공수부대가 눈에 들어왔고, 결국 마켓 가든 작전이 몽고메리의 제안으로 기획되게 됩니다. 

 

이것은 영미 3개 공수사단(영국 제1공수사단, 미국 82 공수사단 및 101 공수사단에 추가로 자유 폴란드군 공수여단이 네덜란드 일대에 강하해서 교량을 확보하고, 영국 육군의 주력인 30군단이 확보된 교량을 따라 독일군을 정리하여 최종적으로 아른험을 장악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정체된 전선을 불과 2개 군단급 전력으로 타개한다는 매력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엄청난 떡밥 이 걸려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지크 프리터 선에 전력을 집중하고 네덜란드 방어에는 그다지 ㅎㅁ을 쏟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영국군의 판단이었고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면 아군 기갑부대의 지원하에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적의 방어선을 우화 한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면 아군 기갑부대의 지원하에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적의 방어선을 우회한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렇게 작전 의도 자체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른험 주위에 2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과 정규군 1개 기갑사단, 정규군 보병사단과 그 근처에 무장 친위대 대대가 집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SS기갑 대장인 명장 빌헬름 비트리히가 지휘하는 제2 SSS기갑 군단으로, 무장 친위대 전력 중에서도 정예 부대였고 동부전선에서 죽어라 싸우다가 서부전선을 온 노련한 병사들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서부전선으로 재편된 후, 팔레즈에서 연합군에게 참패하게 됩니다. 서부전선 사령관으로 다시 부임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동부전선에서 온 B집 잔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에 의해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후방의 시골구석, 즉 아른햄으로 보내져 휴식 겸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기하던, 말이 사단이자 연대 수준도 못되게 전력 소멸하였습니다. 

 

그러니 네덜란드 방면이나 독일 본토 쪽으로 공세가 올 것을 대비해서 팔레즈 포켓에서 탈출한 제2SS기 갑 군단을 후방인 아른햄에서 보충과 휴식을 취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을 내린 사람이 하피이면 방어의 사자 모델 원수였습니다. 

 

B집 잔군 총사령관 발터 모델은 영국군 공수부대의 강하로부터 단 3시간 만에 방어 계획을 수립, 친위대뿐 아니라 해군 공군 지상 대원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연합군의 공세를 분새합니다. 

 

발 격 작전 내내 모델 자신이 매일 전선에 나아가 전황을 완전히 파악하여 증원 부대 투입이 매우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SS기갑부대 지휘관 빌헬름 비트리히와 독일군 공수부대 지휘관 쿠르트 슈트 덴트의 지휘역량까지 더해져서 연합군은 그야말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이작전의 실패가 더 뼈아픈 이유는 연합군에서 고급 인력으로 꼽히는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다 말아먹은 주제에 막상 그 상대는 독일군 최정예도 아닌, 2 선급 예비부대나 교도대라는 점에서 전투에도 지고 전쟁에도 진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모델 장군과 그 참모들에게 진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독일군이 매우 강해서 질 수밖에 없었어요 라고 징징대지 못했습니다. 

 

 

한편 이작전의 실패는 훗날 몽고메리의 평가를 크게 깎아먹는 주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작전 실패 자체도 그렇지만, 몽고메리가 작전이 실 폐한 이후 패배의 책임을 정작 용맹하게 분투했지만 정치적으로 돌봐줄 빼이 없는 외국의 망명 장군에게 몽땅 전가하는 지질한 추태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작전에 실패한 것 까지는 그럴 수 있습니다. 대원수 말마따나 인류 역사에 무적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불패의 상승장군 또한 중 없진 않으나 전쟁사를 통틀어서도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전쟁에서 승패는 병가 지상사고 모든 전투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약체화된 독일군에게 쳐 발린 것도, 고급을 통트어 용장 밑에는 약졸이 없는 법이고 다시 독일 측 지휘관인 발터 모델이 겁쟁이나 용려 한 지휘관이 아닌 당대의 손꼽히는 명장이 이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한 작전의 패전 책임을 외국의 망명 장군, 그것도 그냥 별이 아니라 충분히 전선 엣 용맹을 떠 쳤던 장군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운 졸려한 행동은 후대의 사람들이 군인을 평가함에 있어 당연히 크나큰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후세의 인물들이 보기에 몽고메리의 평가는 당연히 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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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미합중국 육군의 장군, 미군 최초의 전차부대 지휘관이자, 30년간 미군 주력전차의 자리를 차지했던 M46/47/48/60 패튼 시리즈의 네이밍 모델로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패튼장군의 인물사진 이미지

1. 패튼의 출생과 성장 배경

패튼은 남부의 부유한 군인 집안에서 태아나 어려서부터 로버트, E리나 스톤월 잭슨 장군의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고 남군 기병대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친 회색 유령 존 싱글톤 모스비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미 육군사관학교 1909년 졸업생이며 동기생으로 제이컵 데비스, 로버트 에이첼 버거, 월리엄 후드 심슨, 존 클리퍼드 하지스 리, 델로스 에몬스와 비록 중퇴하기는 했지만 코트니 하지스 등이 있는데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상금 부대 지휘관으로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패튼 하면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활화산 같은 성격의 사고뭉치 지휘관 하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오죽하면 별명이 싸움닭, 여우라 불리는 에르빈 롬멜과 비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외에도 사고뭉치 같은 게 별명중에서 그나마 가장 좋게 불리는 별명입니다. 

 

졸업하고 소위이던 시절인 1910년 베아트리스 배닝 에이 어패 튼 이랑 결혼했습니다. 

전쟁 애 서 지랄 맞은 명장, 개차반 장군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했으나 가정에선 엄격하면서도 자상하고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패튼이 죽고 나서 미망인 베아트리스는 패튼에 대한 영화 제작을 거절했는데, 보나 마나 남편이 전쟁광으로 날뛰는 꼴로 만드는 꼴을 볼 수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어쨌든 성깔 한번 지라맞았기 때문에 1915년 종업 생인 오마 브래들리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보다 늦게 진급했으며 후베인 2명은 자신들의 선배가 사고 치고 다니는 걸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졸업성적은 103명중 46등이었으며 기병병과로 임관하였습니다. 

 

2. 멕시코 내전과 1차 대전 활약

"진짜 산적은 우리 부대에 있었군"- 존 조지프 블랙잭 퍼싱 장군은 패튼이 멕시고 내전에서 산적 두목의 시신을 보닛에 매단 채 복귀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군 소위 임관 직후 터진 멕시코 내전에서 토벌군 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 육군 준 자의 부관으로 참전, 발란 군 지휘소를 기습하여 장군 하나를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보닛에 매달고 복귀하는 기행을 벌여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말하길 처음으로 실전에 참가했을 때 긴장과 겁에 질려 몸이 얼어붙어 죽기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에 그를 데리온 기라성 같은 조상님들이 노려보는 것을 보자 죽어서 그들을 대한 게 더 무서워져 용기를 내어 또 한 명의 패튼이 전사할 시간이다.라고 외치면 돌격했고 패튼의 부하들은 지휘관이 몸소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올라 함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이 결정되자 역시 원정군 사령관이 된 퍼싱 장군의 발탁으로 미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됩니다. 이후 그는 철저한 기동전의 신봉자가 됩니다. 

 

3. 2차 대전에서의 활약상

3-1. 아프리카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2기 갑사 단장으로 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하게 됩니다. 

카세린 계곡 전투에서 미군이 최악의 졸장 로이드 프레 덴탈 밑에서 독일-이탈리아 추축군에게 민병대 같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치욕적인 대패를 당해 영국군과 기타 연합국에게 조롱을 받게 되자. 열불이 뻗칠 대로 뻗친 미군 지휘부는 평시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자작 지만 전쟁터에서는 승리를 가져오는 악바리 근성이 넘쳐나는 광전사인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2군단의 지휘를 맡기게 됩니다. 패튼은 오합지졸들을 무지하게 갈퀴서 가세린의 치욕에서 깨어나게 해 줍니다. 

 

그는 부하들을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변화시켜 전사로서 바꿔내는 데 성공하여 아프리카 군단에 대한 반격에서 주목할 만한 송과 들을 다수 이뤄냈습니다. 그라나 그는 원하던 롬멜과의 대결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북아프리카전선에 패튼 장군 이미지

3-2. 이탈리아 전선

이탈리아 전선의 시칠리아 상륙전에 미 육군 제7군 사령관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몽고메리 장군의 농가간으로 조고로 돌려지나, 오히려 그이 지휘부 대가 영국군을 따돌리고 거점도시 메시나와 팔레르모를 점령하는 활약을 펼쳐 주객이 전도되게 만들 됩니다. 

 

이후 몽고메리에게 라이벌로 찍히기도 합니다. 이 시기 독일군 내에도 그의 명성이 퍼졌으며, 특히 오합지졸인 줄 알았던 미군을 영국군 이상의 강적으로 변화시킨 데다 자기들만큼이나 기갑전, 속도전에 능한 그에 대해 필요 이상의 신겨을 쓰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연합군 첨보부는 패튼이 지휘하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집단군 급의 가짜 부대인 미 육군 제1집 단군을 조직하고 빈 상자를 대량으로 배치해서 보급품으로 위장하는 등의 포티튜드 작전을 펼쳐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까지 독일 정보부를 속여 먹게 됩니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 당일에도 -영국 내 패튼 부대가 움직이지 않았으니 노르망디는 페이크다 라고 독일군이 결론 내렸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후술 한 야전병원에서 부하를 구타흔 등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보직 해임되어, 한적으로 쫓겨난 상태였기에 당연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 가짜 부대 사령관 시기는 야전병원에서의 폭행에 대한 처벌로 그냥 자리 때우기 식이었는데 이게 당시 패튼을 최중요인물로 바라보던 독일군에게 있어 제대로 시너지를 일으켜 D-DAY 당시의 성과를 내는 하나의 원동역이 된 것입니다. 

 

3-3. 서부전선

유럽전선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후속 부대인 육군 제3군을 이끌고 참가해 '코브라 작전'을 발동시켜 눈앞의 몽고메리 부대에 정신이 팔려 있던 독일군의 뒤통수를 박살 내 패주 하게 만들고 중부 프랑스를 쾌 진격하며 유럽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패튼이 보직 해임되어 있는 동안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묶여서 소모만 가중되는 중이라는 패튼을 복직시킨 것입니다. 

노르망디 상륙 4주호 만난 앙숙 -미육군대장 조지스미스 패튼과 영국육군 원수 버나드몽고메리 이미지 

 

 

영화에도 잘 나와있듯이 패튼과 그의 부하들은 폭주기관차처럼 가는 곳마다 독이 군을 격파하면서 질주했는데 보급부대가 못 따라가서 아이젠하워 사령관 명의로 특별수송대까지 조직했는데도 부족했을 정도입니다. 

패튼은 우리가 빠른 게 아니라 너네가 느리 것이라고 취급했습니다. 

 

이것은 패튼이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고속 기도 전의 신봉자여서인데 선두에 서서 달리는 기갑부대와 정찰대는 적의 어려운 저항에 마주치면 그대로 우회로 찾아 원래 목표로 계속 달려 나가고 뒤 따로 오는 보병과 포병이 아카의 그 적군과 싸우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틈새를 찾아 계속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적군은 더 이상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패트의 기갑 부대가 자기네

영역으로 들어와 전선을 붕괴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만 후속부대들은 패튼이 남겨놓고 우회해버린 적군들을 하나하나 쳐 부서야 했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보급선이 연합군의 역량 밖으로 늘아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보급 문제로 1944년 여름에 진격을 멈추게 됩니다.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시도했던 게 다름 아닌 마켓 가든 작전. 이를 두고 히스토리채널에서는 몽고메리가  때를 써서 패튼의 보급을 가로 쳤다고 표현한다. 

 

이는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 사용 조건은 까다로운 전술이며 일단 상대가 전선에서 별력을 빼서 아군 기갑전력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전선에 압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기병과 마 찬기자로 기갑 저녁이 충력을 잃으면 적진 한가운데 포위되게 되므로 충분한 보급과 휴식. 그리고 예비전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회한 적군을 보병과 포병이 무너뜨리지 못하면 보급로가 위협받는다고 합니다. 

 

한편 패튼은 야전군 사령관 이면서도 끊임없이 전선 시찰을 나가고 전선 근처의 동태를 살피는 한 면 올라오는 정보보고는 꼼꼼하게 살폈습니다. 

 

닥돌도 포지션과 타이밍 싸움이기 때문에 정보 분석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이었습니다. 

그저 적이 보인다고 무조건 싸움을 하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전선의 틈새, 즉 적이 없는 허점을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전선 시찰을 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레로 밑에 설명될 아르덴 공세 때도 오히려 브래들리 장군보다 독일군의 이상 징후를 먼저 파악하고 어느 정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독불장군 같은 성품 덕분에 여전히 상관과 동료들 사이에서 평판은 바닥을 달렸는데, 특히 영국군 지휘관이자 롬멜 장군을 몰아낸 버나드로 몽고메리 영국 육군 원수는 개와 고양이 사이였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몽고메리도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해서 미군 장성들에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기에 어찌 보면 동족 혐오나 마 찬기 지였습니다. 

 

1944년 8월 31일 보급을 위해 프랑스 메츠에서 기도를 멈추었고 그사이 요새를 강화한 메츠가 독일군 10월~11월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11월 23일 메츠를 점령했습니다. 

 

1944년 12월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를 맞아해서 반격 작잔을 성공적으로 이끄었습니다 

단 48시간 만에 서쪽으로 진격 중이던 미 제3군 예하 3개 사단으로 구성단 1개 군단을 뽑아내어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초월적인 기도를 보였습니다. 

즉 독일의 공세를 예측하고 반격 계획을 미리 짜두었다는 의미였습니다. 

 

패튼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한 닥돌 바보가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반면 브래들리와 그 참모들은 독일의 반격에 대한 대배 책을 충분히 세워두지 못했습니다. 당시 뫼즈 강 인근까지 진경 했던 독일 기갑 대장 만토 이페과의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한 일 전에서 큰 타격을 입히며 승리를 거두면서 독일의 공세를 제대로 꺾어버리는 성과를 내는 데 성공했고 이후 아르덴 대공세의 여파로 서부 전선 독일군이 약해지자 3월 23일에 당시 연합군의 골칫거리였던 지크프리트 라인을 돌파하느데 성공합니다. 

 

이 당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 반격 작전을 지행 할 당시 악천후로 인해 진격이 지지부진하고 항공 지원도 원활하 않자, 패튼은 갑갑한 마음에 제3군의 수석 군종 목사에게 기도문을 작성하라고 명했습니다. 

 

기도문의 내용은 전쟁을 위해서 눈과 비가 그치고 쾌청한 날씨를 주시기를 기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문을 작성한 후 다음날인 12월 23일 정말로 날씨가 맑아졌다고 합니다. 영화 패트 대전차 군단에서도 묘사된 실화입니다. 

 

그 이후에는 독일 국내로 진격, 연합군 최초로 라이 강을 자력으로 건너버립니다. 

당시 몽고메리와 아이젠 하워 간에 라인강 도하는 영국군이 먼저 하기로 합의되어 잇었지만, 미군이 먼저  그 유명한 '레마겐의 철교'인 루덴도르프 교를 장악해 버렸고, 미군이 몰려오자 독일 육군 공병들이 뒤늦게 폭파했는데 폭약량을 잘모 계산해서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우연의 일치지만 먼저 건넌 후에 벌어진 일이라 상대적으로 묻혔어도 독자적으로 도강 작전을 진행해서 기습적으로 라인강 건너편을 제압한 후 부교까지 설치한 것이라 전술적 의미에서는 더 가치가 높습니다. 

 

이건 라인강에 오줌 싸면서 인증숏도 찍었습니다. 대대적으로 작전 계획을 짠 뒤 한참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폭격, 포격을 날리며 부산 떨던 몽고메리는 멍 때려야 했습니다. 전쟁 후 대선주자 자리를 노리던 아이젠 하워는 미군 희생이 늘까 봐 노심초사하였고 1945년 4월 14일 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4. 전쟁 이후에 행적과 사망

유럽 전선에서 이긴 패튼은 이제 중국으로 보내져서 이번엔 일본군과 싸울 차례였지만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국행은 취소되었고 독일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독일 바이에른 지역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정치적으로는 처신이 워낙 묻혀 결국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10군 사령관 사이먼 머크너 중장이 전사하자 그 자리로 가기 위해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맥아더의 측근과 접촉했는데 부정적인 의견을 듣고 포기했으며, 결국 맥아더의 육사 동기인 스틸웰이 임명됩니다. 

 

나치당을 미국 민주 공화당 정도로 비유하고 나치 인사들을 관대히 처리해 물의 를 일으켰고 , 오히려 연합국인 공산주의 러시아인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전진 나치 당원을 정부 요직에 임명한 것에 대해서 비난이 빗발치자 독일 공무원의 태반이나 나치당원이다. 그러면 정부 일을 까막눈들 한데 맡기란 말이냐?라고 항변했습니다. 메를린에 입성해서는 우린 괜찮은 민 죽 하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러시아의 야만인들로 채워놓았다고 고 투덜거렸다는 일화가 있으면 독일이 항복한 후 베를린에서 벌어진 연합군 퍼레이드에 참 성했을 때,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가 패튼에게 소련군 전의 갈려함에 전차포의 긴 사정거리를 자랑하자. 제부 하가 그렇게 먼 걸에서 적으 ㄹ쏘는 비겁한 짓을 한다면 제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이 이다.라고 답해 주코프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비슷한 시간에 지구 반대편에 있었던 맥아더 원수는 그때까지의 모든 일본 최고 지도자가 그랬듯이 천황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자신이 다해먹었다. 한마디로 정치적 수완은 영 시원찮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라이 강 서안 슈파이어로 사냥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그가 탄 1939년형 캐딜락 이 트럭에 치이면서 중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사고가 난 날은 미국으로 복귀하기 하루 전인 12 워 9일 아우 투반을 달리다가 패튼이 동승자 (호바트 게이 대령에게 불에 탄 차량을 가리켰고 운전수도 강이 보면서 전방 부주의로 2.5톤 트럭에 부딪혔습니다. 운 저수와 등 승자는 찰과상 만입 었지만 패튼은 뒤로 튕겨나가 머리가 뒷유리창과 부딪힌 탓에 목뼈가 부러졌고 두개골이 갈라져 뼈가 보였습니다. 12일 뒤 하이델베르크 군 병원에서 수면 중에 향년 60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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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장군으로 유명한 인물 에르비 롬멜을 아시나요?

인물 탐구를 통해 전쟁영웅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며 연전연승을 했던 전쟁영웅으로 에르빈 롬멜, 연합국, 특히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에게는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자 때로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치 독일 히틀러의 충성스러운 부하 장군이었지만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끊어야 했던 비운의 군인이기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롬멜의 모습 이미지 

1. 히틀러 암살에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1944년 7월 9일, 카이사르 폰 호프 아커가 라 로셰-기용에 있는 롬멜을 찾아왔습니다. 

롬멜과 같은 슈마 벤 출신인 흐프아카는 1차 세계대전 때 중장으로 참전한 아버지를 통해 롬멜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만나자마자 롬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호프 아커는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상 계획과 베를린 그룹의 쿠데타 움직임, 암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서부 전선의 전쟁이 즉각 중단될 것이며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수님, 즉 롬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라나 그들 사이의 대화 내용과 롬멜의 반응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롬멜이 암살 계획에 동의하며 적극적 동참 의사를 밝혔다는 증언이 있는가 하면,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총통(히틀러) 비서관 마틴 보어만이 1944년 9월 27일에 기록했습니다. 슈튈프나겔, 폰 호프 아커, 이미 처형된 클루게의 척 라스겐스 중령, 그리고 아지 살아 있는 많은 피고인들이 증언하기를 , 롬멜이 이 계획을 전적으로 이해했고 암살 계획이 성공하면 새 정부를 위해 자신이 나설 것이라 밝혔다고 합니다. 

 

호프 아커는 7월 11일 베를린에서 클라우스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만났습니다.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는 총통 사령부 회의실에서 히틀러 폭사 계획을 실행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북아프리카 리미아에서 만난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이탈로가리볼디와 에르빈 롬멜 1941년2월

2.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무훈,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마지노선 돌파하다. 

1891년 11월 15일 브렌츠와 맞닿은 하이덴하임에서 교사였던 아버지 에르빈 롬멜과 루츠 가문 출신 어머니 헬레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신교도였고 롬멜은 매우 평안하고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의 마당과 정원에서 매일 뛰어놀 수 있었습니다. 

 

2-1. 1910년 3월 당시 18세의 롬멜은 왕실 보병 사관후보생으로 지원하면서 지신의 이력서를 위와 같은 시작 했습니다. 롬멜은 본래 항공기술자를 지망했지만 교사나 군인이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2-2. 1911년 3월부터 롬멜은 단치히의 군사 학교를 다녔고 11월 졸업하여 이듬해 1월 장교가 됐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롬멜은 프랑스 전선과 루마니아,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습니다. 그는 상황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전술적 판단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2-3. 1917년 10월 마타주르 산 습격에서 롬멜은 이탈리아군에 승리를 거두며 큰 공을 세웠지만, 프러시아 최고 권위의 푸얼 메리 테 훈장이 부당하게 다른 장교에게 수여됐다는 것을 알고 진정서를 제출해 결국 훈장을 받았습니다. 

 

2-4. 1920년 12월 슈투트가르트 보병 연대 참모가 되어 8년을 그곳에서 보냈고, 1929년 9월 드레스덴 보병학교 감독관으로 부임하여 사관후보생들을 가르쳤습니다. 

 

2-5. 1933년 10월 롬멜은 17 보병연대 제3대대 지휘관이 됐습니다. 

롬멜은 임명식 연설에서 '총통이신 아돌프 히틀러의 특별한 능력'을 역설했지만, 이는 히틀러에 대한 특별한 추종보다는 군비 확장 정책을 취한 히틀러에 대한 독일군 장교들의 전반적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2-6. 1939년 8월 롬멜은 서열을 뛰어넘어 소장으로 진급하고 총통 지휘본부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트 고데 슴베 르크 제7 전차부대 지휘권을 받아 프랑스 전투에 참가해 1940년 5월 16일 마지노선을 돌파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 친애하는 롬멜 장군 당신이 이룬 업적은 당신 스스로도 자아스러운 일일 것이오. 다가오는 새해에는 당신과 당신 부대에 좋은 일이 생길 것을 기원하오 '라고 롬멜에게 전했습니다. 

3. '사막의 여우'롬멜, 독일 민족의 영웅이자 연합군의 최대의 적이 되다. 

1941년 2월 12일 롬멜은 트리폴리 공항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 땅을 밟았습니다. 그로부터 6일 전 히틀러는 롬멜에게 독일 추축군 통수권을 주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의 진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습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잃게 되면 무솔리니의 정치적 입지가 어려워져 독일-이탈리아 축이 위협 당하리라 판단했습니다. 

 

롬멜 도착 이틀 뒤 독일 전 터 부대가 트리폴리 항구에 도착했고 2월 16일 선두 부대가 최전선에 도달했습니다. 

 

롬멩의 추축군은 아프리카 군단이라는 정식 명칭을 얻었습니다. 

3월 24일 아프리카 군단은 치열한 전투 없이 사막의 요새 엘아게일라를 점령했습니다. 3월 31일 롬멜은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키레나이카로 진격했습니다. 

롬멜은 군 지휘부와 달리 히틀러가 자신의 진격을 옹호하리라 예상했습니다. 그 예상은 들어맞았습니다. 

 

등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많은 수가 그리스로 이동한 탓에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롬멜은 기습 공격으로 소름까지 2주 만에 진격하여 영국군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사망 전의 대가 리처드 오코너 장군을 포로로 잡는 전과까지 올렸습니다. 

 

그러나 1941년 4월 10부터 감행한 토브 록 요새 공격에서는 큰 피해를 입고 성공하지 못했으며, 물자 보급에서 큰 곤란을 겪기 시장했습니다. 

그러나 롬멜에게는 전진만인 있을 뿐이었습니다. 

 

1941년 6 울 롬멜은 리비아 국경 제대로 향하는 300대의 영국 전차부대의 80대의 전차로 맞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롬멜은 인습적인 전술에서 벗어나 88mm 구경 고사포를 배치해 적 전차를 공격했습니다. 토 부록의 요새전에서 실패한 것과 달리 롬멜은 이동 전에서는 승승장구했습니다. 

 

괴벨스는 일기장에 -롬멜은 독일군이든, 이탈리아군이든 병사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다. 그는 거의 신화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괴벨스는 롬멜을 통해 민족 영웅의 이미지를 창출하려 했습니다. 이에 따라 롬멜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편지가 독일 전역에서 답지를 했습니다. 

 

4.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야하한다. -학살 행위는 커다란 범죄이다. 

히틀러는 더 많은 전차와 무기 보급품을 보내달라는 롬멜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롬멜이 지금까지 처럼 최소한의 병력과 장비로 계속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전진하도록 밀어붙이면서도 충분한 장비를 갖춰주지 않는 히틀러 밑에서 롬멜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미고 자가는데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기갑 군단 병역을 거이 소모하고 70대의 전차만으로 지원군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1941년 12월 7일 아프리카 군단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초 롬멜의 기갑 군단은 엘 아게 일라 서쪽 마르사 엘 브레가 요새에서 54대의 전차와 물자 보급을 받았지만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전력에는 못 미쳤습니다. 

그리나 롬멜은 과감한 어쩌면 무모한 선제공격을 감행했습니다. 

 

1월 17일 아내 루시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아마 그들은 나를 미친놈 취급을 할 거요. 그라나 나 절대 미치지 않았소. 그들보다 더 넓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1월 21일 아침 롬멜의 군단은 전지 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승리를 거두며 전진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승리이자 전진이었습니다. 

 

1942년 1월 24일 롬멜은 독일군 대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수상 처칠의 의회 연설 일부입니다. 

'이 전쟁의 참상과 상관없이 개인적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 

 

1942년 6월 11일에는 비르 하차임을 무너뜨리고 영국군 제8군을 퇴각시켰고 6월 20일에 토브룩 요새를 함락시켰습니다. 

22일에 롬멜은 육군 원수로 임명됐습니다. 

그란 7월 1일부터 엘 알라메인 전선에서 역국 폭격기의 공습 속에 아프리카 기갑 군대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롬멜이 나치의 집단 수용소와 학살 행위에 관해 알게 된 것은 1943년 말이었습니다. 

이듬해 6월 롬멜과 대화한 해군 사령관 루게는 롬멜이 한 말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여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저위의 지도부는 깨끗하지 못하다. 학살행위는 커다란 범죄다. 

 

-제국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으며, 히틀러에게 급히 전쟁을 졸료 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히틀러가 이성을 찾지 못한다면 스스로라도 독립적으로 움직이겠다고 했습니다. 

 

5. 지치지 않는 불굴의 전사- 그의 마음은 과연 어디를 향했던가?

1944년 10월 14일 토요일 11시경 12명의 게슈타포가 롬멜의 집 주위를 둘러쌌습니다. 정각 12시경 총통의 위임을 받아 7월 20일 암살 기도 계획에 공모한 죄를 묻기 위해 브루크도 르푸와 마이 제이 왔습니다. 

롬멜에게 주어진 선택은 자살 아니면 특별 제판이었습니다. 

부르크도 르푸는 롬멜에게 자신이 청산가리를 한 통 가지고 왔다고 말하며, 근족의 안전은 보장되며 장례식은 예우를 갖춰 치를  것이라 말했습니다. 

 

롬멜의 마지막 막은 '가져가야 되나?' 였다고 합니다. 집을 ㄹ나서기 전 가죽 외투에 지갑이 들어 있는 걸 별견하고 중얼거린 말입니다. 

집에서 500m 떨어진 작은 숲, 검은색 메르세데스 차 안에서 음독했고 차는 곧바로 울름의 군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공식 사인은 서부전선에서 근무 중 입은 부사 악화에 따른 심장마비' 10월 18일 울름 시청에서 열린 공시 추도식에서 육군 원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낭독한 추도사의 첫머리입니다. 

'지치지 않는 불굴의 전사는 구각 상회 주의적 이념으로 추만 해 있었으며, 그것은 그에게 힘이 원천이었고 행동의 기본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총통을 향해 있었다 라고 추도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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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하여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 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6.25 전쟁 때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지휘하였습니다. 하니만 중공군과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되었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리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이미지

1880년 미국 아카소 주의 리틀록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이 집안은 스코틀랜드 계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에 참정하여 정공을 세웠고 이후 판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 2세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하여 승리했고 이후 필리핀 반군과 전투를 벌여 무공을 세웠습니다. 그의 아마 지는 필리핀 군정장관을 역입 하며 미국 군부에서 명망이 높았습니다. 어머니는 미국 남부의 명문가 출신이며 아들 더그러스 맥아더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학업에 매우 열성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들 더글러스 맥아더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자 근처 호텔에 머물며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형 맥아더 아서 3세도 군인이었으며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축함 함장으로 복무하다 1923년 12월 맹장염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1892년 텍사스 군사학교를 입학하였고 1899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입학하여 1903년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해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 공병대에 배속되었으며 그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필리핀 제3 공병대대로 파견되어 근무하였습니다. 

 

1904년 캘리포니아 파괴 부대에 배속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에 주둔하는 태평양 사단의 공병참모 대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해 육군 소장인 아버지 맥아더 아서 2세의 부관이 되었습니다. 

1906년 루스벨트 대통령 부관이 되었으며 1907년 워싱턴 D.C. 에 소재하는 미국 공병학교에서 입학하였습니다. 

다음 해 포병학교 교관을 역입 하고 1908년 제3공병대대 보급장교가 되었습니다. 

 

1911년 대위, 1915년 소령, 1917년 대령으로 승 진하였습니다. 1917년 레인보우 사단으로 불린 제42보병사단의 참모자에 배속되어 프랑스 전선에 배치되었고 임시 육군 준장이 되었습니다. 

1918년 제42보병사단 예하부대인 제84여단의 여단장으로 지휘를 맡아 최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습니다.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하여 많은 무공을 세웠으며 7번의 은성 무공 훈장을 받으며 뛰어난 지휘관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919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그해 미국 웨스트포인트 교장으로 취임하여 1920년 정식 육군 준장이 되었습니다. 

 

1922년 10월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1925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여 귀국하였습니다. 

1926년볼티모어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 제3군단장에 취임하였고 192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올림픽대회 때는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미 육군 제3군단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92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올림픽대회 때는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 주돈 하는 미국 제9단장이 되었으며 그해 11월 20일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미국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1935년 참모총장에서 퇴임하였으며 군에서는 동부아시아를 지칭하는 극동 통으로 알려졌고, 1936년 필리핀군의 군사고문으로 근무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이때 육군 소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그의 부관이었습니다. 

1937년 퇴역하여 예비역 대장이 되었습니다. 

만주사변 이후 세력을 확장한 일본군이 남중구의 주요 거점 항구를 점령하고 베트남 사이공 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하며 남하하자 미국은 필리핀 방어를 위해 조치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미국의 대일 관계가 긴박하였던 1941년 7월 26일 맥아더 군사고문에서 미 육군 소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여 다음날 중장으로 승진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필리핀 마닐라에서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였습니다. 

1931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투를 벌였으나 마닐라를 빼앗기고 1942년 3월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하였습니다.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연합군 남서 태평양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일 작전을 지휘하였습니다. 

 

그해 가을부터 영국군, 호주군이 참전한 뉴기니 작전을 비롯하여 반격작전을 전개하였고, 1944년 필리핀에 상륙하여 작전을 전개했고 그해 5성 장군이 되었습니다. 

1945년 7월에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하였고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였고 , 9월 미 해군 전함 미주리 호에서 일본 천황으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하도록 조인식을 주관하였습니다. 

이후 일본 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일본 군정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전후 전범재판인 극동 궁 제군 사재판을 맡았으며, 해당 재판에서 생체실험을 자해한 731 부대 책임자로 이시이 시로를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을 점령한 동안에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토지개혁 등 여러 가지 여러 가지 개혁적인 조치를 취했으며, 시민권, 남녀평등권, 노동조합법 등 여러 가지 선진적인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자신의 전용 비행기인 바탄기를 타고 한반도 정찰을 감행하였습니다. 수원에 착륙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고 한강 이남의 정세를 직접 정찰하였습니다.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 육군 제24, 제25사단이 방어전을 펼쳤고 일본에 주둔하는 제8군을 한반도로 이동시켰습니다. 

불리한 한반도 정세를 전환하기 위해서는 인천 상륙작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본국에 설득하였고 7월 25일 미국 함 참을 통해 승인을 받았습니다. 

 

1950년 9월 15일 바닷물이 차올라 만조 기 되는 날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인민군을 압록강 국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그는 만주 폭격과 중국 연안 봉쇄, 대만의 국부 군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4월 11일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귀국 후 레밍턴 랜드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 1962년에는 웨스 포인트에서 의무, 명예, 국가를 주체로 연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아시아와 유럽에서는 훌륭한 군이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전작 미국에서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1964년 4월 5일 워싱턴 월터 육군병원에서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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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특전사가 도입할지도 모르는 독일 시그사우어 MCX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그사우어 MCX제품 이미지 출처: 독일 시그사 참조

방위 사어청은 보안 유출로 문제가 된 차기 특수작전용 기관단총 구매사업에 1형 사업물량 1만 600여 정의 도입을 뒤로 미루고 차기 기관단총 구매 사업 2형 사업을 우선 추진해, 1700 역정을 해외에서 직구로 급선회한 것으로 알려진 소식이 있어서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에 강력한 후보로는 독일에 시그사우어 (SIG SAUER) 사의 MCX 기관단총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소식에 따르면 군 당국은 1만 6000정을 도입하는 특수작전용 기관단총 구매사업 1형과 함께 해외에서 최신 기관단총 1700정을 도입하는 차기 기관단총 구매사업 2형도 추진하면서 그 유력한 후보로 HK-416이 거론됐는데 기관단총 구매사업 1형에서 다산의 DSAR-15PC가 선동되면서 HK-416은 도입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합니다. 

 

DSAR-15PC가 HK-416을 한국형으로 개량 발전시킨 모델이기 때문이라는 의견입니다. 

그란 다산의 기관단총 구매사업 1형이 잠정 개발 중지되면서 구매사업 2형이 우선 추진되고 시그사우어 MCX가 유력하다는 소식입니다. 

 

두사업은 별개인 만큼 서고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앞으로 두고 봐야 합니다. 

 

그럼 이번에는 시그사우어 MCX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시그사우어 MCX개요 

MCX는 SIG SAUER사의 모듈로 카빈 계열입니다. 

자사의 9mm 기관단총 SIG MPX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MCX로 무장한 영국  대테러무장경찰 (CTSFO)

이소 총은 2013년에 개최된 미 방산협회 (NDIA) 주관의 SOFIC(특수전 산업 전시회)에 참여한 SIG 사의 부스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는데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 실질적인 홍보는 2015년 라스베이거스 총기 전시회(SHOT SHOW)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훌륭한 성능과 수려한 외관으로 AF-15계 역에도 도전장을 내미는 중으로, 미 해병대 레이더스, 영국 대테러 무장경찰(CTSFO), 네덜란드 해병 특수부대(MARSOF), 독일 부장 경찰 등에서의 운용이 속속들이 확이 되는 가운데, 2017년에는 300 AAC Blackout 사양의 MCX 레트로가 미 특수작전사령부(USSOCOM)의 소음기 부착형 윗 총 몸 도입사업에도 선정되어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USSOCOM에서 추가로 5.56mm 탄약 사양의 소음기 부착형, 윗 총 몸(SURG) 도입 사업에도 MCX 버투스 11.5인치 총열 버선의 상 부총 몸이 호신 화기(PDW) 변환용 키트로 선정되어 기존 보유한 MK.18 CQBR의 하부 총몸에 장착될 예정입니다. 

 

총사업비는 48,000,000US달러라고 합니다. 

같은 2018년도부터 베를린과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SEK에서 운용 중입니다. 

 

 

2021년을 기준으로 외부에 노출돼 수밖에 없는 델타포스의 자성 호위 임무에 완제품형 MCX LVAW가 계속 쓰이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며, PDW키트는 2018년의 10정 계약 이후에 별다른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지 성능 평가 단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외에는 영국 경찰 CTSFO 등 다양한 부대에서 운용되고 있습니다. 

 

2. 시그사우어 MCX특징 알아보기.

초기형은 최대 중량이 2.7KG로 상당히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중량을 줄인 결과 내구성이 약해지는 문제가 생겼고, MCX버투스 업그레이드되면서 중량이 HK416과 유사한 3.4~3.6KG로 늘어나 나게 되었습니다. 

 

소음기와 STANAG탄창 호환을 전제로 한 300 BLK(7.62 × 35mm) 탄약까지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명칭에도 드러나듯이 모듈식 설계를 갖추어 어댑터만 있으면 다른 AR-15 계열의 아랫 총몸과도 안정적으로 결함 됩니다. 

물론 어댑터 없이도 그대로 장착은 되는데, 이상 태론 노리쇠 부품인 복좌 용수철이 달려 있는 스프링 고정판인 스프링 플레트 윗부분이 바깥으로 노출됩니다. 

 

이 뒤판이 플라스틱 재질이라 만약 사격 중 반동이나 총기 수입 불랴으로 파손되면 복좌 용수철이 사용자의 안면으로 날아들어 눈으로 안면 국소부위 피부 등을 다치게 될 수 있어 여기에 덮어주는 AR-15 계열 아랫 총 몸 전용의 어댑터 사용을 권장하는 것입니다. 

정품 외에 개머리판 장착용 피카티니 레일만 달려 있는 몇몇 타사 어뎁터는 행당 부분을 완전히 가려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MCX를 LR-300, ARAK처럼 개량형 AR-15 계열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좌 영수 철이 단열에서 복열로 바뀌고 위치가 노리쇠 위쪽으로 옮겨간 덕분에 AR-15 특유의 버퍼 튜브가 없어졌습니다. 

 

이덕분에 접철실 개머리판을 사용할 수 있으며, 기이고 소폭 줄어들었습니다. 

이런 구조는 길리를 줄이 수 있고 반동 특성이 좋아지는 편이라 MG5등에도 채용한 바 있습니다. 

 

 

독일 시그사우어 MCX 관련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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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지하 시설물은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 벙커버스터를 아시나요?

오늘은 벙커 버스터에 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벙커버스터는 대형 관통 폭탄으로 지하에 위치함 적의 핵심 시설물을 파괴하는 데 사용됩니다. 특히 지난 1991년 걸프전쟁 당시 미군이 개발한 GBU -28 벙커버스터는 레이저 유도 장치를 장착해 높은 정화 도로 지하 깊숙이 위치한 이라크 군의 주요 시설물을 파괴했습니다. 

 

걸프전 당시 일약 스타로 등극하게 된 벙커버스터는 이후 미국이 주도한 전쟁에서 뻐지지 않고 등하는 핵심 무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공군도 미국으로부터 200역 발을 도입해, F15K 전투기에 장착해 운용하고 있습니다. 

 

 GBU -28 벙커버스터 이미지  촐처: 대한민국 공군

1. 초대형 폭탄의 개발 배경

제1차 세계대전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은 공군력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전쟁 발발 함께 독일 공습에 대비해 주요 군사시설물을 엄체화하고 지하화 했습니다. 역국 공군은 독일 군의 주요 시설물에 폭격기를 대규모로 동원해, 연일 폭격을 가했지만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용된 일반용 폭탄은 충격파와 파편 효과로 목표물을 파괴하는데, 엄체화되고 지하화 된 목표물에는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었습니다. 

 

1941년 역국의 항공 공학자 반스 월리스는 10톤급의 초대형 폭탄의 개발을 영국 공군에 제안합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 공군은 대형 폭탄 1발보다는 소형 폭탄을 여러 발 투하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반스 월리스가 개발한 도약 폭탄이 실전에서 독일의 댐을 성공적으로 파괴하면서, 영국 공군도 그이 초대형 폭탄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반스 윌리스가 개발한 도약 폭탄이 실전에서 독일의 댐을 성공적으로 파괴하면서 영국 공군도 초대형 폭탄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

2. 톨보이와 그랜드슬램

이후 반스 윌리스 톨보이와 그랜드 슬램 초대형 폭탄을 개발하게 됩니다. 

최초 개발된 톨보이는 길이 6.4m, 직경 94cm, 무개 5.4톤 급의 폭탄으로 폭뢰형 고성능 폭약인 토팩스를 2.4톤가량을 내장하고 있었습니다. 

톨보이는 폭탄 무게와 강하 속도가 맞물려 4.9m 두께의 콘크리트도 관통할 수 있었다. <출처: 영국공군>

폭탄 무게와 강하 속도가 맞물려 톨보이는 4.9m 두께의 콘크리트도 관통할 수 있었고 폭탄이 관통할 때 발생하는 충격파로 거대한 내부 분열 현상을 일으켜 인접 건물이나 시설물까지 동시에 붕괴시킬 수 있었습니다. 

 

어마 어한 크기를 자랑했던 톨보이는 랭커스터 폭격기 1대에 딱 한 발만 실을 수 있었습니다. 톨보이는 전쟁 기간 동안 850여 발이 생산되었고 독일 군의 v1과 v2 기지를 파괴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독일 해군의 전함 타르 피츠 함을 격침시키는데도 이용되었습니다. 

 

뒤이어 개발된 그랜드 슬램을 톨보이 보다 2배 가까운 무게를 자랑했습니다. 

총 40역 발의 그랜드 슬램이 전쟁 기간 동안 투하되었는데 주로 교량과 u보트 기지 공격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3. 한국전쟁에서 사용된 초대형 유도폭탄 타르 존 알아보기.

타르존은 유도장치가 부착되어 일반폭탄보다 높은 명중률을 자랑했고 특히 북한의 수력발전소와 교량을 파괴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미 육군 항공대는 초대형 유도 폭탄 개발에 착수하게 됩니다. 

타르 존(Tawon)으로 불리던 유도폭탄은, 영국 공군이 사용했던 톨보이에 라디오 원격 조정 장치를 장착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타르 존은 북한 공습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톨보이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던 타르 존은 B-29 폭격기에 단 한 발만 장착이 가능했습니다. 

총 30여 발이 사용돼 타르 존은 유도장치가 부탁되어 일반 폭탄보다 높은 명줄률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특히 북한의 수력발전소와 교량을 파괴하는데 효과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공습작전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B-29 폭격기 한대와 승무원 전원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결국 미군은 안전문제로 타르 존의 사용을 중지하게 됩니다. 또한 크기는 작고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전술 핵무기가 등장함에 따라, 초대형 폭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4. GBU-28-8인치 포신으로 급하게 만들다. 

자취를 감추었던 초대형 폭탄은 걸프전쟁에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이라크는 중동전쟁과 이란-이라크전을 겪으면서 주요 전쟁 지휘시설을 지하 깊숙한 곳에 설치했습니다. 

벙커버스터로 알려진 GBU-28은 걸프전쟁 당시 8인치 화포의 포신을 이용해 급하게 개발되었다. <출처: 미공군>

 

바로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자 다국적군의 공습이 이들 시설에 집중되었지만,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미공군은 급하게 이라크의 자하 시설물을 파괴할 신형 무기를 개발하게 되고, 미 육군에서 사용되던 8인치 화포 보신을 이용해 대형 관통 폭탄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폭탄 이름은 BLU-113으로 알려진 대형 관통폭탄은 무게가 2.1톤이었고 286KG의 고폭약을 내장했습니다. 

 

이러한 BLU-113에 레이저 유도장치가 결함이 되었고, 훗날 벙커버스터로 알려진 GBU-28이 탄생하게 됩니다. 

1991년 2월 말 공습작전에 처음 사용되게 됩니다. 

 

F-111 전투기에 장착된 GBU-28은 바그다드 외각의 공군기지에 위치한 이라크군 지휘시설에 투하되었습니다. 지표면을 뚫고 지하 깊숙이 들어간 GBU-28은, 거대한 폭음을 일으키며 목표물을 완벽하게 파괴했습니다. 

 

5. 세계 최대의 항공폭탄 GBU-57 MOP를 알아보자. 

지난 1997년에는 BLU-113 대형 관통 폭탄 GPS와 관성항법장치를 결합한 GBU-37 GAM이 미공군에 전력화되었습니다. 

 

레이저로 유도되는 GBU-28과 달리 기상이 좋지 않아도 사용이 가능했던 GBU-37, 은 최초의 전천후 정밀 유도 벙커버스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쟁을 거치면서 걸프전의 스타였던 벙커버스터도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습니다. 

무게만 14톤에 달하는 GBU-57은, 지표면은 60m, 콘크리트 표면은 8m까지 관통할 수 있다. <출처: 미 공군>

전쟁 당시 같은 지점에 두발이 벙커버스터를 순차적으로 투하해 , 더 높은 관통력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군은 초대형 벙 커버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개발된 초대형 관통 폭탄 GBU-57 MOP는 무게만 14톤에 길이는 5.2M에 달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개발한 그래드 슬램보다도 더 무거운 GBU-57은 일반 콘크리트는 60M, 강화 콘크리트는 8M까지 관통할 수 있습니다. 

미공군의 전략폭격기에서만 운용되는 GBU-57은 GPS로 유도되며 지난 2011년까지 10여 발이 도입되었습니다. 

 

참고문헌:무기의 세계, 김대영,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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