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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자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보신 무기 쌍차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무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근접무기 중 하나입니다.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근접무기 쌍차 이미지

1. 쌍차 무기 개요

중국과 동남아 등 아시아 각지에서 사용한 무기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쌍차 무기의 형태 

무기의 형태는 위 사진을 보시다시피 쇠막대 양쪽으로 가지가 나 있는 모양이며 삼지창의 날처럼 생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방향으로 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지만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향한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무기는 일본에서 만지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3. 쌍차무기 명칭의 유래 알아보기 

무기의 명칭을 알아보면 쌍차라는 이름이 많이 쓰이며 일본에서는 사이, 중국에서는 철척, 팔 기차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영어로 sai라고 하는 것이 일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임속에서 쌍차를 사용하는 워존 동영상 모습입니다. 

4. 쌍차 무기 사용법 및 상세 내용

사용법을 살펴보자면 한 손에 들고 사용하거나 양손에 하나씩 들고 사용하며 쌍차라는 명칭도 두 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자주 보여서 그런 듯합니다. 심지어는 세게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파지법은 날이 몸 앞을 향하게 바로 잡는 것과 날이 팔꿈치 쪽으로 향하게 하여 거꾸로 잡는 것이 있습니다. 가지를 이용하여 바꿔 잡을 수 있으며 쌍차를 상용함에 있어서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동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용법은 위 동영상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

 

또한 중국에서는 후난, 푸젠 광둥 등 남부 지방의 객가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무기로 보이며 일본에서는 쌍절곤, 톤파 등과 마찬가지로 원래 일본의 고무 술에는 없었고 오키나와의 고무 술에 존재하는 무기였다고 하며 일본에 유입되면서 닌자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다만 일본의 무기 중에 짓테가 있으며 보통 가지가 하나만 있지만 쌍차처럼 두 개가 달린 것도 존재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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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록히드가 최초로 만든 저 투기인 P-38 라이트닝 전투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록히드가 치초로 만는 P-38라이트닝 쌍발기 비행하는 모습  출처:Public Domain

 

1.  개발 역사 알아보기.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에 미군이 운용했던 전투기의 성능은 좋지 않았습니다. 육군 항공대의 주력인 p-40은 1939년부터 양산을 시작한 신예 기였습니다만 독일의 BF109와 비교했을 때 현격히 열세였습니다. 해군 항공대의 F4F도 일본의 A6M에 밀렸습니다. 그런데 기술 겨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지리적 상황을 고려한 미국의 군사 전략 때문에 전투기보다 폭격기 분야에 우선시하며 벌어진 현상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미국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운이 감돌자 신예기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전쟁 후반기에 하늘의 재왕으로 활약한 P-47, P-51, F6F, F4U 등은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어기에 제때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걸작 전투기 등보다 조금 먼저 등장한 P-38 라이트닝은 비록 명성은 덜하였지만 태평양 전역과 유럽 전역 야측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미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책임졌던 마당쇠 같았던 전투기라 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 들어 P-35, P-36을 서둘러 도입했음에도 여전히 가상적국의 전투기와 대등하게 맞설 수 없음을 인식한 육군항 공대는 1937년 2월 새로운 고고도 요격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항공기 제작 자사들에게 내세운 조건은 최고 속도가 시속 640km, 6분 안에 고도 6,500m까지 상승이 가능하였으며 무장을 강력한 20mm 기관포 장착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많은 업체가 참여해서 치역 하게 경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록히드는 한창 켈리 존슨이 개발 중이던 모델 22를 기반으로 설게 한 후보작을 당국에 제출했으며 제안을 평가한 육군은 타당성이 있다고 보고 xp-38이라는 이름을 무 여하고 개발을 지시했으며 후신인 록히드 마틴은 오늘날 세계 최대의 방산 업체이지만 당시에는 10~20인승 여객기만 만들던 업체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p-38은 록히드가 최초로 만든 군용기였습니다. 

 

 

P38라이트닝관련 동영상

XP-P38은 경쟁을 벌인 벨의 XP-39, 커티스의 XP-40과 비교했을 때 엔진이 2개인 쌍발기여서 외형부터 차이가 많았습니다. 고속으로 비행하려면 엔진이 중요한데 당시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전투기요 엔진의 성능은 그다지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엥 켈리 존슨은 엔진 두 개를 탑재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록히드는 쌍발 여객기를 많이 만들었기에 관련한 노하우는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XP-38자와에 엔진을 장착한 동체를 주익과 수평미익으로 연결한 쌍동 기체입니다. 

 

중앙에 조종석을 배치했는데 엔진이 외부로 빠지면서 빈 전방 공간에 폭격기 요격도 가능한 강력한 무장을 장착했습니다. 

랜딩기어가 좌우 동체와 조종석에 장착되어 있어서 주기할 때나 이착륙 시에 기체를 수평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구조였습니다. 

 

 

사업 이전에 이미 연구가 진행된 상태였기에 XP-38의 개발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져 불과 1년 반 만에 기체가 완성되었고 1939년 1월 27일에 초도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진종 문제처럼 개선할 부분이 많기는 했지만 처음에 유구했던 것보다 빠른 시속 675km를 기록했습니다. 

 

결과에 고무된 육군은 양산 전 단계로 무장을 갖춘 YP-38 실험기 13기를 발주했으며 이후 일사천리로 테스트가 이루어졌고 9월에 P-38이라는 제식명이 부여되었습니다. 

 

독일과 교전상태가 된 영국이 1940년에 자국 요구 사항에 맞춰 엔진과 과급기가 변경된 3기의 라이트닝 1을 도입해 시험을 실시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가 나와 구매를 포기했으나 사실 이는 록히드 개발진도 반발했을 만큼 기체의 특성을 무시한 형식 변경이었기에 좋은 결과가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에 초기 납품 물야도 고속비행이나 급강하 시에 조종이 어려운 문제점이 발견되기도 하였다고 하며 이후 다이브 플림을 장착해 어느 정도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1941년부터 양산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진주만 급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지상 기지를 기반으로 한 육군항공대의 전투기여서 실전은 1942년 여름 이후에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대서양에서 아군 함정, 선상보호를 위해 아이슬란드, 영국 등에 전진 배치되어 비슷한 시기에 유럽 전역 참전도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제2차 대전 당시에 미군이 유럽과 태평양에서 운용하던 작전기가 달랐으며 전자는 육군이, 후자는 해군이 주도한 전장이어서 벌어진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투기의 경우 P-47, P-51은 유럽에서 F6F,, F4U는 태평양에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반면 장거리 비해잉 가능한 P-38은 보다 넓은 공역에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이점을 살려서 양쪽 전역에서 골고루 활약했습니다. 상당히 예외적인 미국의 전투기였습니다. 

 

 

2. 운용역사 알아보기 

P-38은 프로토타입을 포함해 총 10,037기가 제작되었습니다. 

P-47, P-51의 생산량이 15,000 여기 정요였던 점을 고려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수량이며 태평양과 유럽 모두에서 활약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상적인 전과의 대부분은 태평양 전역에서 기록했습니다. 사전에 정보를 획득하고 벌인 작전이지만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인 아마모토 이 소쿠가 탑승한 G4M 폭격기 격추 사례는 상당히 유명합니다. 

 

정찰 기형 일부가 호주, 중국 등에 공급된 것을 제외한다면 제2차 대전 중에 전량 미 육군이 운용했으며 전쟁 후반기인 1943년부터 2 선급으로 물러나지 시작했고 종전 후에 공군이 독립하면서 F-38로 제식명이 바뀌었으나 1949년에 미군에서 완전히 퇴역했습니다 일부가 이탈리아, 콜롬비아, 도미니카 등에 판매 혹은 공여되었고 온두라스에서 1965년까지 운용한 것이 마지막이라 합니다. 

 

3. 제원 살펴보기 

전폭 15.85m
전장 11.53m
전고 3.91m
주익 면적 30.43㎡
최대 이륙 중량 9,798kg
엔진 좌) 앨리슨 V-1710-111 12기통 수랭식 피스톤 엔진, 1,600hp(1,200kW)×1
우) 앨리슨 V-1710-113 12기통 수랭식 피스톤 엔진, 1,600hp(1,200kW)×1
최고 속도 666km/h
실용 상승 한도 13,000m
무장 이스파노 20mm M2 기관포×1
 브라우닝 12.7mm M2 기관총×4
  M10 3연장 4.5인치 로켓발사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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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스버그 샷건 개발 역사

모스버그 모델 590 샷건 이미지&nbsp; <출처: O.F. Mossberg & Sons, Inc.>

 

오스카 모스버그( Oscar Frederick Mossberg, 1867~1937)는  20세가 되면서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넘어왔습니다. 그의 지인이자 같은 나라 출신인 아이버 존슨(Iver Johnson)은 모스버그에서 일자리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매사추세츠에 위치한 아이버 존슨 총포 자전거(Iver Johnson Arms & Cycle Works)사에서 일하면서 모스버그는 총기업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아이버 존슨의 주력 상품은 리볼버였고, 머지않아 모스버그는 리볼버와 샷건의 생산라인의 관리직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과정에서 아이버 존슨 리볼버의 랫치 결합부를 설계하는 등 스스로 총기의 설계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모스버그는 셔턱 암스를 거쳐 스티븐슨 암스 & 툴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다가 1914년 모스버그는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으로 이주하면서 1차 대전을 맞아 기관총 생산을 준비하던 마린-록웰이라는 회사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종전 후 회사가 도산하게 되어 53세의 모스버그는 두 아들 아이버와 해롤드와 함께 모스버그 & 손즈 사를 창립했습니다. 

 

모스버그는 최초의 총기로 모스버그 브라우니라는 4발들이 22LR 구경 권총을 만들었습니다. 브라우니는 기본적으로 델린저 디자인으로 덫에 걸린 동물의 처리용으로 선전되어 팔렸습니다. 

이 간단한 총기는 상당한 인기를 끌어 1920년~1932년 사이에 무려 3만 7천여 정이 팔려나갔습니다. 브라우니의 성공으로 회사는 사옥을 사들였고 1922년에는 22LR 구경 펌프 액션 소총을 만들어 또 다른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1937년에는 모스버그는 3번째 공장을 뉴헤이븐에 세우고 민간시장에서 인기를 끌 수 있는 저렴하고도 단순한 총기들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한편 같은 해에 창업주인 오스카 모스버그가 작고 하면서 큰 아들 핼롤드가 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스카 모스버그(중앙)는 두 아들인 해롤드(좌)&middot;아이버(우)와 함께 1919년 '모스버그 & 손즈'사를 창립했다. <출처: O.F. Mossberg & Sons, Inc.>

한편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모스버그는 애초에 27%였던 군용 총기 생산라인을 100%로 전환했습니다. 인원도 200여 명이 추가되어 총원 500여 명의 직원들은 24시간 3교대로 연합군을 위한 총기를 생산했습니다. 주된 생산품으로는 M2기관총의 주요 부품을 비롯하여, 엔필드 No 4 소총, 모델 42/22 볼트액션 소총 등 미 육군과 해군의 초기 훈련을 위한 총기들도 생산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에 이르자 모스버그는 다시 22LR 구경의 다 양한 표적용 총기나 스포츠 총기들을 만들면서 입문 수준의 사냥꾼들이나 스포츠 사격자들에 대한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모스버그는 새로운 볼트액션 소총이나 펌프 액션 샷건의 설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955년에는 200 시리즈 산탄총이 채용하고 있었다고 하고 200K는 조절식 쵸크를 200D는 교환식 쵸크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약실 장전이나 노리쇠 격발 준비 여부를 표시하는 표시기를 장착하여 안전을 고려했다는 점도 매우 독특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 모스버그는 드디어 좀 더 전통적이고 전통적인 펌프 액션 샷건인 모델 500을 개발하여 1961년 발매했습니다. 모델 500은 칼 벤슨이 설계를 맡아 만든 12 게이지 샷건으로 사냥 입문자를 겨냥하여 만든 산탄총이었습니다. 

특히 저렴한 가격과 간단한 정비성을 목표로 하였으므로 가능한 부품을 최소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모델 500은 당대의 어떤 총기보다도 부품의 수가 적은 총기로 만들어져 누구나 살 수 있는 저렴한 샷건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스버그는 22구경의 모델K, 모스버그 모델200D, 모스버그500D 모델 이미지 출처:<출처: Public Domain>

특히 모델 500은 누구든 간단히 조립할 수 있는 구조였기에 그 자체로 충분히 모듈화 총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튜브, 펌프 액션 손잡이, 개머리판 등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으며, 따라서 탄환과 총 역 등이 서로 다른 다양한 버전들이 출시되었습니다. 한 가지 무제는 초기 발매한 모델 500은 펌프 액션을 연결해주는 기다린 철재 바(BAR, 막대기)가 1개였는 데, 1970년부터는 펌프 액션 바를 2개로 만들어 바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분산했습니다. 이는 샷건의 대명사였던 레밍턴 모델 870의 특허가 끝나는 해가 1970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30여 년간 모델 500은 커다란 변화가 없이 꾸준히 출시되었습니다. 경찰과 군은 물론이고 민간에서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어 레밍턴 870과 함께 펌프 액션 샷건 시장을 양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델 500은 저렴한 가격뿐만 아니라 나름의 혁신을 거듭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일례로 샷건 중에서는 최초로 망원 조준 경용 칸티레버 마운트를 통합한 강선 총열까지 채용했고, 심지어는 50 구경 머즐 로더 총열까지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모스버그는 모델 500의 염가판인 매버릭 88(상)이나 상자형 탄창을 사용하는 모델 590M(하)을 선보이면서 사용자들에게 다양한 선택을 제공하고 있다. <출처: O.F. Mossberg & Sons, Inc.>

한편 107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모스버그는 모델 500을 바탕으로 군경 샷건 시장에 도전할 새로운 모델 590을 만들었습니다. 모델 590은 모델 500에 비하여 장탄수를 높이고 손잡이가 개머리판의 소재에서 내구성을 높였으며, 매거진 튜브가 설계를 변경했습니다. 특히 매거진 튜브는 폐쇄형이었던 M500과 달리 M590에서는 개방형으로 설계되어 손쉽게 매거진 스프링과 팔로워를 제거하고 총기 청소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레밍턴 870처럼 매거진 튜브 확장기를 쉽게 장착할 수 있어 장탄수를 늘리기 용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군용 사양의 590이 한번 더 개량을 거치면서 모델 590A1이 등장했습니다. 방아쇠 울과 안전장치가 알루미늄으로 바뀌었으며, 특히 미 해군의 요청에 따라 총열이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과거 작전 시에 함정 내의 좁은 철제 구조물과 총열이 부딪힐 경우 손상이 자주 일어남에 따라 해군이 총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를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스버그는 590A1 샷건이 군의 요구에 바탕하여 만들어져서 유일하게 MIL-S-3443 시험기준을 평가한 소총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동 기준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장약이 정말 충전된 12 게이지 벅샷을 3천 발 이상 발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최근 들어 모스버그는 짧은 총열의 총기들을 통해 새로운 샷건의 수요를 만들어냈습니다.  

원래 모스버그는 590A1 컴 팩트나 500 콤팩트 크루저 등을 만들었는데, 이는 12인치 이하의 총열을 갖춰 미국 연방 총기법에 의해 소드 오프 샷건의로 규정되어 소유에 엄격한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제작될 당사자부터 12인치에서 18인치 사이인 길이에 강선 없는 총열을 장착하면 소드오프 샷건이 아니라 기타 총기로 분류되어 간단한 등록 비용만 납부하면 소유가 가능했습니다. 이에 따라 14인치 총역에 5발들이 매거진 튜브를 장착한 590 쇼크웨이브라는 모델을 2017년 샷 결판터 발매했으며, 이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모스버그 500 계열의 산탄총으로는 매버릭 88도 있어며 매버릭 88은 원래 1980년대 모스버그 M500의 염가형 버전으로 만들어진 라인업이었습니다. 특히 일부 부품을 해외에서 조달함으로써 가격을 극단적으로 낮췄고, 몇 가지 버전을 추가하여 상품성을 높였습니다. 

 

한편 590의 진화는 계속되어 2018년 셨쇼에서는 590M 맥 페드가 소개되었습니다. 590M은 매거진 튜브가 아니라 직접 탄창을 결합하여 발사하는 모델로, 탄창은 5/10/15/20발 등 다양한 옵션이 있습니다. 또한 샷건 액세서리로 인기가 높은 맥풀사의 손잡이와 개머리판을 채용한 맥풀 시리즈, 공구 없이 총 역과 개머리판을 자유자재로 조합할 수 있는 FLEX 등이 발매되면서, 모스 벅 산탄 총은 여전히 현역을 지키고 있습니다. 

 

 

2. 모스버그 샷건 특징 알아보기 

모스버그 500과 590은 전형적인 펌프 액션 샷건입니다. 따라서 통상의 펌프 액션 샷건처럼 총 역 아래 매거진 튜브에 탄환을 장전합니다. 펌프 액션 이란 말 그대로 당김을 통하여 탄피를 배출하고 약실에 장전하기 때문에 붙은 명칭입니다. 즉 손잡이를 당기면 노리쇠 뭉치가 뒤로 밀려나면서 약실 안에 있던 탄피가 배출됨과 동시에 매거진 튜브의 새 탄환이 엘리베이터에 실리게 됩니다. 

 

다시 손잡이를 앞으로 당기면 엘리베이터가 탄환을 위로 올리면서 노리쇠 뭉치가 탄환을 약실로 물고 들어옵니다. 손잡이가 앞으로 완전히 밀린 상태가 되면 노리쇠가 탄환을 약실에 잠가 사격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특히 펌프 액션에서 취약한 부분은 장전 손잡이와 노리쇠 뭉치를 연결하는 펌프 액션 바입니다. 모스버그 모델 500의 초기형은 펌프 액션 바를 1개만 사용했었지만, 1970년부터는 펌프 액션 바를 2개 사용하여 스트레스로 인한 변형이나 파손의 위험성을 줄였습니다. 방아쇠 울 왼쪽에 달린 안정장치로 펌프 액션을 잠글 수 있으며, 누르면 잠금이 해제됩니다. 또한 방아쇠 안전장치는 총몸의 위쪽 끝에 달려있습니다. 오른손 사수나 왼손 사수에 관계없이 쉽게 조작할 수 있습니다. 안전장치를 앞으로 밀면 안전, 뒤로 당기면 발사가 되며, 안전 상태에서는 빨간 점이 보입니다. 

 

모스버그 500/590 샷건의 기본형은 18.5인치 총역에 6발들이 매거진 튜브로 장착하고 있습니다. 한편 20인치 총역을 장착한 모델은 매거진 튜브도 도욱 길어져서 8발이 장탄됩니다. 이외에도 약실에 한 발을 더 넣을 수 있어 실제로는 최대 7발 또는 9발을 수납할 수 있습니다. 한편 규제 대상인 590A1 클래스 III 샷건은 14인치의 총열을 채용하고 있으며, 매거진 튜브에는 5발이 수납되며, AOW로 분류되는 590S 쇼크웨이브의 경우에는 14.375인치의 총열에 4발들이 매거진 튜브에 있다고 합니다. 

590M 맥페드(Mag-Fed) 소총의 주요 특징

특히 모스버그 590 시리즈는 총 열과 매거진 튜브를 원하는 사양으로 바꿀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한편 모스버그 590은 본격적인 전투용 샷건으로 만들어져 대검을 장착할 수 있도록 착검용 마운트를 장착했습니다. 또한 애초에 M16 소총의 총구에 장착되도록 만들어진 M7이나 M9대검의 형태를 고려하여 매거진 캡에 총구 쪽 마운트가 걸리도록 설계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소총용 조준장치를 채용하여 가늠자에 고스트 링을 채용하여도 옥 했습니다. 최근에는 총기의 학장 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총 몸 상부에 피카티니 레일을 장착하는 것은 물론, 손잡이를 MLOK 마운트로 개조한 모델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편 모스버그는 기존의 매거진 튜브 장전 방식을 대신하여 탄창 방식을 채용한 590M 시리즈를 선보였습니다. 탄창은 최소 5발들이에서 최대 20발 들이 까지 모두 4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레밍턴 870 시르즈도 탄창 장전 방식인 870DM을 선보였습니다. 모스버그는 복열 탄창을 채용하여 레밍턴보다 훨씬 훌륭한 효율성을 보였습니다. 한편 서드 파티 제품으로 MD암즈사에서는 사이가 12 산탄총에서 채용했던 것과 동일한 20발 들이 드럼 탄탕을 590M용으로 발매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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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개발되지 말았어야 할 핵무기 실험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핵을 발견은 양날의 검으로 인류에 훌륭한 에너지원이자 무시무시한 폭탄을 제조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핵실험에 관한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016년 1월 복한 조선 중양 TV에 한복을 입은 리춘히 아나운서가 등장하면서 올해 일흔두 살인 아나운서는 조선 중앙 TV에 대표적인 간판스타였습니다. 2006년 북한이 첫 핵실험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을 때, 2011년 김정일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리 아나운서가 등장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김정일의 사망 이후 방송을 끝인 줄 알았던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은 뭔가 또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등장한 리 아나운서는 특유의 격양된 목소리로 북한이 처음으로 수소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습니다.라고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북한은 2006년과 209년, 2013년에 원자폭탄 실험을 했습니다. 수소폭탄은 원자폭탄보다 만들기 어렵고 위력도 수천 배나 강하기 때문에 북한이 정말 실험에 성공했는지는 검증이 필요합니다. 

 

핵폭발 이미지 

성공 여부를 떠나 북한이 여전히 핵무기 개발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확인됐습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열었고 새로운 대북 제재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하는 핵무기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미국 언론인 위신 턴 포스트는 -1945년부터 2016년 1월 6일 북한까지 총 2055번의 핵실험이 있었다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핵실험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세계 최초의 핵실험은 1945년 7월 16일 이뤄졌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던 중이었습니다.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아인슈타인의 편지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아인슈타인 박사입니다. 독일 출신으로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고 광전효과 연구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하안 아인슈타인은 나치의 집권을 피해 1933년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39년관 1941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빨리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축구했습니다. 히틀러의 독일이 핵폭탄을 만들고 있으니 미국이 보다 빨리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독일의 위력은 세계를 집어삼킬 기세였고 불안한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핵무기를 만드는 연구였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고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과학자들도 힘을 보탰습니다. 

가제트 핵 실험의 폭탄인- 가제트 폭탄의 모습

3년의 노력 끝에 맨해튼 프로잭트 팀은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 엘라모 고도 사막에서 세계 최초의 핵실험을 실시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비밀이었던 이 핵실험에는 트리니티라는 암호명이 폭탄에는 가제트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가제트는 오전 5시 29분 45초에 성공적으로 폭발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핵폭탄을 하늘에 엄청난 섬광을 만들어 냈고 12km까지 버섯 기중을 만들었습니다. 실험 장소로부터 240km 나 떨어진 곳에서도 핵폭탄이 만들어낸 빗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가제트는 TNT20 킬로톤(kiloton)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 증명됐습니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뉴멕시코 주에선 뭔가 이상한 일어났다는 불안감으로 가득 챴습니다. 정부는 공군 기지에 있던 탄약 창고가 폭발한 것 일고 속였습니다. 

 

핵폭발영상 

2.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꼬마와 뚱보

최초의 핵실험은 핵무기가 정말 가능한 것인지 그 위력은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최초의 핵실험이 트리니티였다면 핵무기가 인류에 첫 신고식을 한 곳은 일본 히로시마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항복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끝까지 연합군과 대치했습니다. 미국은 새로 발명한 핵무기를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했습니다. 리틀 보이라는 이름의 이 폭탄은 히로시마 600m 상송에서 폭발했습니다. 폭발 당시 사망자먄 8만 명, 이후 방사능 오엽으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수십만 명에 달했습니다. 

 

사람들은 단 한 번의 폭발로 도시 하나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폭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과학적 도박을 했습니다. 성공적인 핵폭발을 자축했습니다. 1945년 8월 9일에는 일본 나가사키의 두 번째 핵폭탄 팻맨(Fat Man) 투하됐습니다. 나가사키에서 천 넉 달 동안에만 6~8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은 그 해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낸 일등공신이 꼬마와 뚱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핵폭탄의 사용이 적적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습니다. 사망자 대부분이 민간인이었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조차도 평생 후유증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갔습니다. 핵폭탄이 전쟁을 파릴 끝내긴 했지만 전쟁이 몇년 더 지속됐다고 해서 원자폭탄만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특히 미국이 나 가사 킹 두 번째 핵폭탄을 떨어뜨린 것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기보다 두 번째 핵폭탄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많습니다. 목적의 정당성을 떠나 핵폭탄의 위력이 사망자 수로 증명된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핵실험이었습니다. 

 

3. 최초의 수소 핵폭탄 실험 아이비 마이크

원자폭탄이 우라늄 원자핵을 분열시키는 과정에서 나오는 열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수소 폭탄은 수소 원자핵의 유합 반응을 이용합니다. 핵융합 과정에선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됩니다. 수소 폭탄의 위력은 원자폭탄의 수백~수천 배입니다. 

 

수소폭탄은 미국에 귀화한 헝가리의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가 1951년 폴란드 수학자 스테니 슬로 울람의 구상 (분열 폭탄을 핵융합을 위한 기폭제로 쓸 수 있다는 것)을 토대로 만든 텔러-울림 설계에 바탕해 만들어졌습니다. 

 

최초의 수소 핵폭탄의 이름은 아이비 마이크입니다. 첫 실험은 1951년 태평양의 산호초 섬에네웨타크에서 진행됐습니다. 아이비 마이크의 위력은 tnt1040만 t으로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핵폭탄의 450배에 달했습니다. 

 

태평양의 산호초섬 에네웨타크(Enewetak Atoll)에서 1956년에 행해진 핵실험. 이 섬에 서 20세기 중반에만 여러 차례의 핵실험이 있었다.

원자폭탄에 이어 수소폭탄까지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미국은 세계 엣 가장 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가진 나라이자 유일하게 핵폭탄을 써본 나라인 미국은 무서운 속도로 핵무기 수를 늘려 나갔습니다. 

미국 핵실험 사상 가장 위력이 컸던 것은 1954년 3월 실험한 수소폭탄 캐슬 브라보였습니다. 실험 당시 5만 5000도 C의 열풍이 만들어졌고 200km 거리까지 충격파가 전해졌다고 합니다. 

 

미국은 1962년 한 해에만 96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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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국에 질 수 없어 소련의 폭주를 하다. 

냉전시대의 또 한 축이었던 소련도 핵무기 개발에 욕심을 냈습니다. 미국이 1945년 핵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확인된 위 소련의 마음은 더 급해졌습니다. 소련은 독일 나치 정권에서 핍박받았던 유대계 과학자들을 납치하다시피 데려와 핵무기 개발에 투입시켰습니다. 

 

1946년부터 원자로 건설을 시작했고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의 초원 세어 처음으로 원자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소련의 첫 핵폭탄(RDS-1)은 첨보 활동을 통해 미국의 풀루토늄 설계도면을 복사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원자 핵폭탄은 미국의 것을 베낀 것이었지만 수소 핵폭탄은 자체 기술로 완성했습니다. 

매국이 만든 수 소폭탕은 습식 수소폭탄이었습니다. 폭탄의 원료 인중 수소를 액상으로 보존하기 위한 별도의 냉각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무기로 상용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소련은 이런 단점을 보완한 건식 수소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소련은 1953년 TNT40만 톤급의 건식 수소폭탄 RDS6S를 만들었습니다. 

1955년 만든 수소폭탄은 1.6메가톤 급의 위력을 보였습니다. 당시 폭발의 위력이 너무 커서 폭발 지점에서 수십km 떨어져 있던 병사 한 명이 폭발로 파괴된 건물에 깔려 숨졌고, 실험 장소 외각의 작은 마을에 있었던 두 살 소녀도 대비 소 밖에서 놀다가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수소폭탄의 위력을 나타내는 동영상 

1961년 소련이 만든 수소폭탄 '차르 붐바'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강력한 힘을 가진 폭탄으로 기록됐습니다. 차르는 황제, 붐바는 폭탄이라는 뜻입니다. 

1961년 10월 30일 소련 북극해 군도 노바야 제믈랴 제도에서 실행된 이 핵실험은 폭탄의 황제라는 이름값을 보여줬습니다. 위력은 무려 TNT5800만T이었습니다. 1000km 떨어진 곳에서도 폭발하는 모습이 보였고 폭탄으로 만들어진 지니 파는 지구를 세 바퀴나 돌았습니다. 

 

실험 장소에서 1000km 떨어진 핀란드에서 차르 붐바의 위력에 유리창이 깨진 정도였다고 합니다. 차르 붐바의 힘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 자폭탕의 3800배였습니다. 

 

5. 핵실험을 한 나라들 과연 어떤 나라들일까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 번째로 핵실험에 성공한 나라는 영국입니다. 영국은 돌 일과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 나라 핵 무개 발에 몰두하기 어려웠습니다. 영국은 자체적으로 개발하던 정보를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넘기고 대신 핵무기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정보를 건네받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영국이 직접 핵실험을 한 것은 1952년 10월 2일이었습니다. 

 

영국은 호주 몬테벨로 섬에서 처음 올 핵실험을 했습니다. 위력은 25 킬로톤, 비슷한 시기 미국과 소련이 보유한 핵무기와 비교하면 힘이 많이 떨어졌지만 영국은 독자 개발했다는 데 의미를 두었습니다. 

1957년에는 수소폭탄 실험도 성공했습니다. 

 

프랑스의 핵실험은 영국보다 늦은 1960년 2월 13일 알제리 남부 사하라 사막에서 처음 실시됐습니다. 

첫 번째 폭탄의 이름은 푸른 날쥐였습니다. 원자 핵폭탄이었고 위력은 70 킬로톤이었습니다. 1968년에는 수소폭탄 실험에도 성공했습니다.

 

중국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핵무기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첫 실험은 1964년 10월 16일 위구르 지역의 소름 호수인 로프노르에서 실시했습니다. 원자 핵폭탄이었고 위력은 22 킬로톤이었습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보단 많이 뒤졌고 위력도 약한 편이었지만 중국은 세계 어세 다섯 번째,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됐습니다. 

3년 뒤인 1967년에는 수소폭탄 실험도 성공했습니다. 

 

다섯 나라 외에도 인도가 1974년과 1998년 핵실험을 했고 파키스탄도 1998년 두 번의 핵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핵실험을 했다는 것이 곧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수소폭탄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북한은 2006년도 2009년, 2013년 원자폭탄 실험을 했습니다. 

 

 

6. 핵을 가진 인류의 미래는?

북한이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고 발표한 날 위싱턴포스트는 71년 동안 인류가 행한 핵실험을 정리해 발표했습니다. 위싱턴포스트에 따르면 1945년부터 2016년 1월까지 8개 국가가 총 2055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가장 많은 핵실험을 나 나라는 미국으로 1945년부터 1992년까지 1032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소련은 1949년~1990년까지 715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1960년부터 1996년까지 1998번의 핵실험을 한 프랑스였습니다. 

 

영국은 1952년부터 1991년까지, 중국도 1964년부터 1996년까지 45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경쟁적으로 핵폭탄을 개발하던 나라들은 1996년 유엔 산하 포 관적 핵실험 금지 조약기구(CTBTO)에 서명하고 추가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현제 CTBTO에 서명한 나라는 183개국이며 북한과 인도, 파키스탄은 이조약에 서명하지 않았고 미국과 중국은 서명은 했지만 비준은 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21세기에 핵실험을 한 유일한 나라입니다. 

 

핵을 가진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제2차 세계 대전 후 세계가 정면충돌하지 않고 21세기를 맞은 것은 열강들이 서고가 갖고 있는 핵무기의 힘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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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시간에 이어 VSS빈토 레즈에 특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또 제원에 대하여 살표 보도록 하겠습니다. 

VSS 빈토레즈의 내부구조 &lt;출처: Общественное достояние&gt;

1. VSS 빈토 레스 특징을 알아보자. 

VSS 빈토레즈는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이며 AK-47 계열 소총의 롱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AK-47소총은 가스 피스톤을 밀어내는 부분이 거의 소염기와 가깝게 맨 앞쪽에 있는데 반하여, 빈토 레즈는 거대한 소음기에 비하여 총열이 짧아 가스 피스톤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습니다. 

 

AK와 마찬가지로 회전식 노리쇠를 채용하였는데, 6개의 러그로 약실을 폐쇄하고 개방합니다. 격발 방식은 독특하게도 스트라이커 방식을 채용했습니다. 

 

한 가지 독특한 것은 VSS빈토 레즈는 절삭가공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AK 소총들은 양산의 편의성과 비용절감을 위하여 프레스 가공으로 만들어졌지만 빈토 레즈는 특수부대용 특수 촐기로서 높은 신뢰성을 요구했고 제식 소총만큼 대량으로 생산할 일도 없었으므로 절삭가공이 채택되었습니다. 

 

내부구조도 AK와 유사하면서 독특한데, AK처럼 리코일 스프링이 총 몸 상부 덮개를 동시에 고정시키는 구조이지만, 그 수직으로 아래쪽에 리코일 스프링을 하나 더 장착하였습니다. 

 

또한 소음기로 인해 발생하는 탄매가 사수의 눈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 총 몸 상부덕ㅂ개와의 결합부에는 고무링이 장착되었습니다. 

 

 

VSS레토레즈 내부 작동구조 원리설명 동영상

AK와의 또 다른 차이점은 단연 발 조정 간에 있습니다. 

AK소총은 총몸의 오른쪽에 조정 간에 장착되어, 맨 위로부터 안전-연발-단발로 조작됩니다. 

빈토 레즈도 AK 소총처럼 총 몸 오른쪽에 레버가 달려있지만, 이는 안전-사격만을 조절합니다. 단발과 연발을 선택하는 조정 간은 방아쇠 울 안쪽에 방아쇠와 권총 손잡이 사이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조정간 레버를 안쪽으로 당기만 단발이라고 바깥쪽으로 밀어내면 연발로 발사되므로, 사격 중에도 비교적 간단히 단-연발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1-1. 빈토 레즈의 최대 특징

역시 소음기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총열의 길이는 200mm(7.9인치)로 짧은 편이며, 총열에는 54개의 구멍이 뚫려있어 소음기로 가스를 방출 시 키 도옥 되어 있습니다. 

소음기는 거의 40cm에 가까운 기다란 길이로, 약 1/3 정도가 총열과 결합되는 내장형이며, 음향 감소를 위해 일체형 베플을 장착하여 가스와 소음을 감소시킵니다. 제작사는 소음기의 성능을 1,500발까지 성능을 보장하는데, 사용자의 관리에 따라서는 사격장에서 5천 발까지 버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KGB 등 정보기관의 비밀작전을 위한 총기로 개발되었으므로 은닉하여 이동할 수 있을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빈토 레즈는 소음기, 총 몸, 개머리판의 3 부분으로 손쉽게 분해되어 이동할 수 있도록 요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MBNP-1 야시 조준경을 결합하고 3개의 탄탕과 함께 3 부분으로 분리된 총기를 450 ×370 ×140mm 크기의 브리프케이스에 휴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브리프케이스에 넣고 은밀하게 이동한 이후에 사격지점에서 총기를 결함 하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조준 기구는 기계식으로는 가늠자가 최대 400m까지 표시하도록 했습니다. 특수임무용이니만큼 소요군에서는 다양한 조준경을 결합할 수 있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조준경은 AK소총처럼 총 몸 좌측에 장착되는 도브테일 마운트 방식으로 PSO-1이나 PSV 주간 조준경에서 MBNP-1, NSPUM, NSPU-3 야시 조준 경부 투 PO 4 ×34 조준경까지 다양한 종류의 조준경을 장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편 개머리판은 AS발 소음 돌격소총과는 달리 고정식으로 목제로 만들어졌습니다. 

 

VSS를 현대화한 모델인 VSSM은 2014년에서야 등장했다. &lt;출처: Общественное достояние&gt;

한편 VSS 빈토 레즈는 1980년대 말에 제식 장비가 되다 보니 조준경 이외의 다 향한 부가장비를 장착할 수 없다는 한 게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실전 배치된 지 무려 27년 만에 현대화 모델인 VSSM이 등장했습니다. VSSM 총 몸 윗부분과 총열 덮개 부분에 파카 티니 레일은 장착하도록 하였으며, 폴 미머 플라스틱제 개머 미판에 칙 패드를 장착하여 접용점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탄창에 투명 플라스틱을 채용하여 잔탄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2. VSS 빈토레즈 운용현황

VSS 빈토레즈는 치명성을 갖춘 소음 총기에 목말라있던 스케츠 나츠들의 요구를 충족시켰습니다. 

1987년 시험평가 직후 곧바로 채용되면서 GRAU 분류명 6P29를 부여받았으며, 곧바로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한편 국내의 대테러 및 치안활동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으로 1990년 8월 수후미의 교도소 폭동 당시, KGB 소속 특수부대인 알파와 내무군 소속의 특수부대들이 진압 당시 VSS를 사용하면서 그 유용성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993년 10월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 최고의회가 예친 대통령의 의회 해산에 반발하며 의사당을 점거하자. 진압을 거부한 알파와 빔펠을 대신하여 누 무군 소속의 특수부대 비탸즈가 진입 작전을 펼칠 때에도 VSS빈토 레즈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VSS가 전투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체첸 재전에서부터였습니다. 

AS발 소음 돌격 소총과 함께 VSS는 러시아 특수부대들이 애용하던 총기였습니다. VSS와 AS의 공격에 피해를 입은 체첸 반군은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소음 소총의 공격에 치를 떨었습니다. 특히 야간 최대 사거리 300m 정도에서 매복 기습을 하면 반군들은 저항할 틈도 없이 제거되기 일쑤였습니다. VSS가 일선에 배치됨에 따라 특수부대는 더 이상 소음기를 장착한 AK소총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2000년대 접어들어 러시아가 체첸 테러범들의 공격에 노출될 때마다 VSS는 일선에 섰습니다. 

특히 2002년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이나 2004년 배스란 공립학교 인질극 등에서 FSB와 내무군의 특수부대들이 VSS와 AS를 주무장으로 테러범을 제압 해나 기도 했습니다. 이어진 돔바스 전쟁에서는 분리주의 반군에 의해 활용되었습니다. 

 

시리아 내전 개입에서도 러시아 특수부대들은 VSS와 AS를 무장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한편 2014년 VSSM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총기들을 조금씩 교체해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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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VSS 빈토 레즈 파생형 알아보기 

  • RG036: 최초의 시제 소음 저격소총 7.62mm 구경 RG037 탄환을 사용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VSS 빈토레즈 격소총의 초기 프로토타입인 RG036 소총 &lt;출처: militaryexp.com&gt;

  • VSS빈토 레즈: 1987년 채용된 양산형 총기. GRAU 분류명 6P29로 부여되었으며, KGB에 의해 빈토 레즈로 명명되었습니다. 

VSS 빈토레즈 소음저격소총 &lt;출처: zonawar.ru&gt;

  • VSSM: VSS의 현대회 모델. 2014년 발매되었으며, 현대적인 요구에 맞추어 피가티니레일과 조절 가능한 신형 개마 리판이 장착되었고, 양각 대외 투명 탄창을 채용했습니다. GRAU 분류명은 6 P29M입니다. 

VSSM 빈토레즈 &lt;출처: Public Domain&gt;

  • AS발: VSS 빈토 레즈를 기반으로 한 소음 돌격소총 모델. VSS와 거의 유사한 구조로 접철식 개머리판을 채택한 것이 특징입니다. 1087년 이후 계속적으로 채용되었으며 최근에는 이에 바탕한 개량형인 SR-3도 만들어졌습니다. 

AS 발 소음돌격소총 &lt;출처: Public Domain&gt;

 

4. VSS 제원 알아보기 

구경  9 x 39 mm (SP5, SP6)
제조사 KB 토치마쉬, 툴라 무기공장
중량 2.6 kg (PSO-1 조준경 장착시 3.7 kg)
전체길이 894 mm
총열길이 200mm
총구초속 280 ~ 295 m/s 
사거리 유효 350 m (머리 100 m, 몸통 200 m)
최대사거리 주간 400 m, 야간 300 m
장탄수 10발 또는 20발 들이 탄창
연사율 최대 800 ~ 900 발/분 (전투시 30~60 발/분)
가격 75,000 루블

 

2022.01.29 - [무기역사관] - vss 빈토레즈- 러시아 특수부대가 자랑하는 조용한 암살무기

 

vss 빈토레즈- 러시아 특수부대가 자랑하는 조용한 암살무기

오늘은 러시아 특수부대 저격 소총 VSS 빈토 레즈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요즘 배틀그라운드에서 핫한 소총으로 유명합니다. 개발 역사와 관련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개발의 역

rokmc76.tistory.com

 

 

 

참고문헌: 유용원의 군사세계 , 한국 국방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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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러시아 특수부대 저격 소총 VSS 빈토 레즈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요즘 배틀그라운드에서 핫한 소총으로 유명합니다. 개발 역사와 관련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러시아특스부대가 사용하고 있는 VSS모습 이미지 

1. 개발의 역사 

소련에서 채용한 최초의 실용적 소음 무기는 1930년대 마틴 형제가 개발한 브라잇 소음기는 2개의 감압실로 구성되었으며, 고무 패키로 기밀성을 유지했는데, 성능은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습니다. 브리밋 소음기는 2개의 감압실로 구성되었으며, 고무패킹으로 기밀성을 유지했는데, 성능은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습니다. 

 

브리밋 소음기는 기존의 총기에 결합하여 소음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설계되어 나강 리볼버는 물론이고 모신나강 소충에 까지 장착할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군의 소화기는 제식 소총과 유탄발사기가 위주였고 다 야한 옵션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소음 무기도 역시 제식의 소총이나 권총에 소음기를 추가하고 특수 탄약을 장작 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소총에서는 AKM이나 AK-74에 PBS-1 소음기를 장착하거나, 마카로프 PB나 스테츠 킨 APB 등이 활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기들은 사거리나 제압 능력, 소음 감소 등 그 어느 성능에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브라밋' 소음기는 일선 전장에서부터 적 후방의 파르티잔 활동에서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출처: warspot.ru>

냉전시절 특수정 차과 비밀임무 등 특수작전을 주도하던 것은 KGB(국가보안위원회)와 GRU(정보 총국)였습니다. 

상황을 보다 못한 KGBDHK GRU는 비밀 임무에 특화된 소총을 별도로 개발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총기의 개발에 앞서 탄환부터 문제였습니다. 아음속으로 소음을 줄이면서도 방탄조끼를 관통하여 적을 상사하는 충분한 파괴력을 가진 탄환은 소련군에는 아지 없었습니다. 

 

따라서 신형 탄 완의 개발부터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는 중앙정밀기계공학 연구소의 몫이었습니다. 토 치마 쉬는 1944년 병기 인민위원회의 명령으로 1944년 5월 소화기 및 항공 기관포 과학연구소라는 명칭으로 창성되었습니다. 

 

토 치마 쉬는 특수 탄약과 소화기 등에 특화된 개발을 수행해 왔으며, 특히 1960~70년대 SPP-1이나 APS(특수 수중 돌격소총)와 같은 수중발사 총기 등에 만들면서 독특한 역량을 과시한 바 있습니다. 

차기소음총기의 탄환으로 5.45x39mm탄의 탄피와 7.62x39mm탄의 탄자가 결합된 RG037이 개발되었지만, 소요군에서 원하는 관통력과 소음감소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출처: Общественное достояние> 

그러나 개발 초기부터 토 치마 쉬는 혼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임무의 특성이 다르고 개성이 강한 각각의 특수부대들이 제가 했던 서로 다른 요구들을 통합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특히 소음 감소와 관통력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습니다. 

 

개발을 맡은 자발린과 드보랴닌노바는 AK-74의 탄환인 5.45 ×39mm의 탄피에 7.62 ×39mm의 탄자를 결함 한 RG037탄을 개발했지만, 당대에 새롭게 도입되던 서구의 방탄복을 무력화시키기에는 다소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토 치마 쉬는 RG037의 개발을 1985년까지 계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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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벨린-드보랴니노바는 RG037의 대안으로 7.62 ×39mm의 탄환 규격을 바탕으로 9mm 직경의 탄자를 결합한 탄환을 개발했습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탄종은 9 × 39mm탄으로 정해졌으며 보통탄은 SP5로 명명되었습니다. 한편 프롤로프와 코르니 로바의 설계로 강청 탄심을 내장한 철갑탄인 SP6도 만들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400m의 거리에서도 레벨 2/3의 방탄복이나 헬멧을 관통할 수 있으며 4mm 강철탄을 관통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소프트 스킨 차량에 대한 공격도 가능해졌습니다. 

 

 

vss총기 설명 동영상

이렇게 탄종이 정해지는 사이에 총기의 개발도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먼저 개발이 진행된 것은 RG036 소음 저격소총으로, 크라시니코프의 주도하에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 최초로 개발된 7.62mm 구경의 RG037탄이 기반이 되었으며, 카라시니코프 소총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작동방식은 AK소총의 가스 피스톤 방식을 개량한 것으로 소음기 확장되는 가스압을 이용하도록 하였으나 다양한 작동 환경에서 신뢰성이 떨어지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시제 소총이 1981년 말 개발되었는데 역시 RG037탄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다만 작동방식을 원래 AK소총의 것을 활용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신뢰성을 높였습니다. 이소음 저격소총은 추후에 VSS(특수 저격소총의 의미) 빈 토레즈로 명명되었습니다. 

VSS 빈토레즈는 1980년대말 채용된 이래 러시아 특수부대의 상징과도 같은 총기가 되었으며, 현재는 개량형인 VSSM도 등장했다. <출처: Общественное достояние>

한편 토치마쉬의 노련한 설계자인 세르듀코프가 참가하면서 총기의 신뢰성이 더욱 간조 되었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소음 저격소총만을 생산하려고 했지만 특수부대에서 제식 무장으로 요구함에 따라 1983년경부터 소음 돌격소총까지 개발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새로운 소음 돌격소총은 AS(특수부대 소총이라는 뜻) 발로 명명되었습니다. 

빈토 레즈와 발이라는 코드명이 붙은 것은 KGB가 특수 총기에 B자(영문 알파벳 V에 해당)로 시작되는 이름을 붙여 온 전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1985년에서야 총기와 탄약의 요구 조건이 완벽히 정해졌습니다. 우선 탄환은 RG037에서 9 × 39mm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AS발과 VSS 빈토 레즈도 총기 형태를 완성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1987년 AS발과 VSS빈토 레즈가 모두 완성되었고, 시제 양산 총기들이 시험평가를 위해 육군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후 시험평가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인 두 총기들은 모두 소련군의 특수부대들에 의해 채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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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조선시대 비밀병기이며 세계에서도 인정한 일명 아기살이라는 편전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전을 사용하는 드라마속 장면  출처:SBS 

영화 최종병기 활과 사극 드라마 속에서 자주 보이는 활 쏘는 장면중 일반화 살보다 작은 화살을 특수 제작된 대롱 비슷한 것을 이용하여 발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특히 최종병기 활을 보면 주인공 박해일이 쏜 편전이 만주족 병사의 발목을 그대로 관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에서 잠깐 나왔지만 우리말로 아기살이라고도 부르며, 이를 번역해 동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동전, 변전도 편전의 다른 이름입니다. 

 

1. 편전 - 반으로 쪼갠 대나무 통에 넣어서 쏘는 매우 짧은 특수한 화살을 말하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국조오례의 서례]의 병기 도설은 

철촉에 화살대의 길이가 1척 2촌인 화살을 편전이라 가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척은 주적일 경우는 20cm 내외, 영조척일 경우 30cm 내외이므로 길이가 1척 2촌이라면 대략 24~36cm 정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실물 유물을 살펴보면 기록보다 조금 더 긴 것도 많아 45~46cm급도 흔합니다. 

 

한국의 전통무기를 연구한 최초의 서양인이었던 존 부츠가 수집한 편전을 보면 길이가 1.5피트(45.72cm)로 일반적인 너 투 용 화살의 길이인 2피트 10인치(86.36cm)의 약 절반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 각궁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거리를 감안해 보면 이렇게 짧은 화살은 활에서 제대로 펼쳐서 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편전을 쏠 때는 [최종병기 활]에서 잘 나오듯 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동아에 화살을 넣어 쏘아야 합니다. 

 

즉 편전이란 반으로 쪼갠 대나무 통에 넣어서 쏘는 매우 짧은 특수한 화살 내지 그런 화살을 사용한 사격 법을 뜻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아와 편전 이미지  

 

2. 조선시대, 최고의 무기로 여겼던 편전 

편전은 드물게 사격했지만 실제 조선시대에는 편저는 최근 무로 평가받는 핵심 병기였습니다. 

무예 쪽으로도 일가견이 있었던 태종 이방원(1367~1422) 은 적을 공격하는 무기로 편전만 한 것이 없습니다. 

선언하고 편전 사격 훈련을 권장했습니다. 세종대에도 국방을 책임진 부서인 병조에서 국왕에게 편전은 적을 막는데 중요한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평가는 조선 후기에도 이어져 조선군 각급 부대의 무기 보유 목록을 보면 편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필수 무기 중의 하나였습니다. 무 과시 업에서도 편전은 대표적인 평가 항목 중 하나였습니다. 

 

3. 편전의 장점 

3-1. 긴 사거리 장점인 편전 

1929년에 조선 궁술 연구회가 펴낸 [조선 궁술]에는 과거시험에서 편전을 130보 거리에서 쏘지만 이것은 과거의 규정일 뿐 1,000보(약 1,200m) 이상을 능히 도달하며, 두껍고 무거운 갑옷도 관통할 수 있습니다. 는 설명이 나오며 이 때문에 한때 편전의 사거리가 1,000 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국왕 태종은 편전의 사거리가 200보(약 240m)라고 언급했습니다. 

세종대의 유명한 과학자였던 이전은 편전은 아무리 약한 활을 쏘아도 300보(약 360m)나 됩니다. 즉 1,000 보라는 사거리는 일 번 적인 편전의 사거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냈던 류성룡은 [징비록]에 강가 (대동강 남쪽)에서 왜군이 쏜 조총이 1,000 여보를 날아와 대동관에 이르렀습니다. 

연광정 방패 뒤에서 군관 강사익으로 하여금 편전을 쏘았더니 화실이 강 건너 왜적이 잇는 모래벌판 위까지 날아갔다는 취지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류성룡의 목격담은 결국 편저도 1,000 여보 가까이 날아갔다는 이야기여서 [조선 궁술]과 유사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제 대동관 정면 대동강의 실제 강폭은 500m 미만이어서 1000 여보는 하나의 목 학적 표현이고 실제 사거리는 500m 내외였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즉 실제 편전의 사거리는 일반적인 화살보다 길어 약 200~300m 수준이라고 할 수 있고 

 

예외적인 경우 약 500m까지 날아갔을 가능성은 있지만 1,000보(1,200m)라는 이야기는 과장일 가능 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전통무기에 대해 처음으로 연구한 서구권 학자 존 부츠는 1934년 그의 논문-한국의 무기와 갑옷에서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일본 전무가의 발언을 인용해 1592년 히데요시의 침략(임진왜란)다잇 일본의 장궁 사거리 350야드인데 반해 편전의 사거리는 500야드(457.2m)에 달했습니다. 

 

이기록도 편전 사거리의 최대치가 대략 500m였음을 뒷받침하는 자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1000보는 되지 않는 다 고해도 사거가 500m 정도면 전근대 활 중에서 최상급에 속하니 말입니다. 

 

사거리가 가장 긴 활로 알려진 튀르크 활의 기록상 최대 사거리는 800m가 넘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이고, 일반적인 튀르크 활의 사거리는 최대 사거리는 300~500m 정도입니다. 영국 장궁의 최대 사거리 200~300m 수준입니다. 

 

3-2. 강력한 위력 

활은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명중률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단순히 긴 사거리 때문에 펴 전을 그렇게 높게 평가했다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더구나 활만 있으면 쏠 수 있는 일반적인 화살과 달리 편전은 사격할 때 통 아라는 보조기구가 필요하므로 사격 법이 상대적으로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조 선 네에서 시종일관 편전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습니다. 

 

심지어 만주족(야인), 왜인(일본인)들에게 편전 사격기술이 넘어갈까 봐 국경지역에 편전 사격 연습을 금지하거나 외국인이 보는 앞에서 편전 사격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편전을 비밀 무기처럼 생가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편전은 사거리 외에 또 다른 장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기록을 찾아보면 편전의 장점으로 사거리와 함께 관통력, 적이 대응하기 힘들다는 점 등 세 가지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편전 사용 관련 과학증명 동영상 

편전의 관통력, 달리 말하면 살상력이 뛰어나다는 주장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으로 유명한 약포 정탁(1526~1605)의 문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탁은 활의 위력이 조총보다는 못하다고 인정하면서도 편전의 경우에는 조총과 맞먹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활의 위력이 조총보다는 못하다고 인정하면서도 편전의 경우에는 조총과 맞먹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정탁은 그의 문집에 편전은 멀리 쏘는데 장점이 있습니다. 30~40보 거리에서는 2명을 쓰러트릴 수 있고, 100보까지는 1명을 쓰러트릴 수 있으며 200보(240m)까지도 중상을 입일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1619년 조선 원병이 명나라를 도와 만주족과 싸우다가 참패한 수프 루후 전투에 참전했던 이민환은 조선군이 얼마나 처절하게 패전했는지 그 참상을 적나라한 기록으로 남긴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런 이민환조차도 편전에 대해서는 적 (만주족)들은 먼 곳에서도 갑옷을 뚫을 수 있는 편전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언급해 편전의 위력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재확인시켜줍니다. 

 

3-3. 적이 막거나 피하기 어렵다. 

편전의 또 다른 장점은 적이 대응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91년 만주족이 평안도 창성에 침입했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쪽 사람이 처음에 장전으로 쏘았더니, 저들 중 갑옷을 입은 자는 뛰면서 휘드루기도 하고 혹은 그 화살을 주워서 도로 쏘았습니다. 그래서 편전으로 쏘았더니 저 사람들이 피할 수가 없어서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1555년 왜구들이 전라도에 침입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었다고 하고 당시 전추 참전자들은 조정에 우리 군사가 장전을 쏘자 칼로 받아쳐 무주지 못하게 하다가 편전을 쏘자 왜인 들이 모두 두려워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즉 일반적인 화살을 칼로 받아칠 정도였지만, 편전은 그렇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편전의 선능에 대한 정확한 측정은 이루어진 적이 없지만 방송사 다큐 프로그램의 재현 시범에서는 개량 각궁을 사용한 일반적인 화살의 비행속도가 59.8m/s인데 비해, 편전의 비행속도는 71.8m/s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화살의 비행속도는 발사 직후의 속도와 평균 속도가 차이가 날 수 있고 화사의 무게, 활의 성능, 활을 쏘는 사람의 힘에 따라서도 편차가 있지만 유사한 조건에서 사귀어할 경우 일반 화살보다는 편전의 비행속도가 빠르다는 점은 확인된 것입니다. 

 

최종병기 활 편전 사용 영상자료 

조선시대 방식으로 제작한 각국을 이용한 비공식적인 각종 실험에서 77~90m/s정도의 속도를 기록한 적도 있습니다. 

측정 방법과 기준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전에는 특정 수치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이 같은 속도는 현대 양궁의 하살 속도인 66m/s보다 빠른 것이고, 뿔과 힘줄과 나무를 조합해서 만든 합성 궁중에 가장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튀르크 활중에서도 평균 이상에 속하는 활이 낼 수 있는 속도라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이동하는 물체의 에너지는 질량에 비례하고, 속도의 제곱에 비례합니다. 

편전의 무게에 대해 확실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화살의 4/5 수준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편전은 일반적인 화살에 비해 20% 정도 무게를 줄이는 대신 속도를 15~33% 정도 높임으로써 운동에너지를 높인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편전의 과학적 메커니즘에는 아직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지만 이렇게 상대적으로 큰 에너지를 지닌 화살을 보다 가까운 표적에 쏠 경우 관통력은 높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편전의 비행속도가 일반적인 화살보다 대략 15~33% 정도 빠르다고 해도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만주족과 왜인들은 조선군의 장전을 피하거나 칼로 쳐내면서도, 편전에는 대응하지 못했을 까. 그 의문을 풀어주눈 해답은 태종 이방원의 목격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413년 태종 이방원은 편의 사격 장면을 직접 본 후 - 크기가 작아보기가 어렵지만, 맞추면 반드시 물건을 파괴했습니다. 고 설명하고 있으며 즉 상대적으로 짧은 길이 때문에 실전에서 화살의 비행궤적을 보기가 월씬 어렵고, 그 때문에 대응하기도 힘든 것이 편전의 또 다른 장점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달리 편전을 사용할 때 사용하는 통 아가 일종의 착시효과를 이리 키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부츠는 그의 논문에 조선 구식 군대 병사의 아군을 지켜보는 순간 적에게 편전에 명중된다고 설명한 것이 전형적이 사례입니다. 

 

4. 편전은 세계사에 유일한 무기는 아니지만 조선의 특색 있는 무기이다. 

세종(1397~1450) 이 국왕으로 있던 1435년에 조선 조정은 편전이 만주족(여진족)에게 전해지면 안 된다며, 비밀 유지 문제를 집중 논의했습니다. 

1437년 3월 6일에는 왜인이 편전을 모방할 우려가 있다면 외국인이 있는 장소에서는 편전을 쏘지 말라는 조정의 정식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 3월 19일에는 만주족 거주자와 가까운 함길도 지역에도 평전 사격을 비밀리에 시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연산군 재위 시절에는 1503년에는 중국 명나라에 편전을 보내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편전은 다른 나라에 없는 것이니, 다는 나라 사람들이 알게 하였는 안 되겠다는 기록도 나오고 있으며 즉 편전은 만주족 이난 왜인들에게는 그 사격 법이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 무기였고 명나에서도 별로 사하지 않던 무기였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이덕무는 [청장 관전서]- 편전은 우리나라에만 있다며 감강신이 원병(몽골군)에게 포위되어 병기가 모두 떨어졌을 때 원병의 화살 하나를 얻으면 넷으로 잘라 통편으로 쏘니 이것이 편전의 시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덕무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려 시대 대몽항전기(1231~1259) 때 처음오 생긴 우리나라 고유 무기가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미 조선시대에도 당나라(618~907)의 통전이나 통사가 편전과 유사한 무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잔틴제국(330~1453)의 경보병이 사용했던 솔레나리온도 편전과 거의 동일한 개념의 무기라고 할 수 있고 이후 튀르크나 아랍 국가들도 유사한 무기를 사용했던 솔레나리온은 정확도를 약간 희생하는 대신 속도를 높인 화살로 일반적인 화살보다 약 2배의 사거리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즉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편전이 우리나라만의 고유 무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중국의 명나라는 편전이라는 무기 개념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전쟁에 대량 사용한 사례가 없고 만주족과 왜인들도 마찬가지여서 14세기 말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편전은 우리나라만의 특색 있는 무기였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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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 카의 정식 명칭은 슈투어츠캄프플록 초이크는 급강하 폭격기라는 뜻으로, 독일어의 특성상 단어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줄여서 슈투카라고 불렸으며 곳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2차대전당시 독일의 폭격기 슈투카 이미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던 2차 대전은 당시까지 실용화되었거나 아니면 시험 삼아 만든 무기가 그야말로 아낌없이 등장하였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다시 무기를 모두 거론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 인상적인 모습을 남기며 그 전쟁을 상징하게 된 무리를 추려보는 것은 가능합니다. 

 

'슈투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JU87 폭격기도 그런 무기 중 하나입니다. 

제2차 대전사를 언급할 때 독일의 팽창과 침략 개시 시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시기를 설명하는 각종 문헌이나 시청각 자료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이 바로 JU87입니다. 

비록 최고 성능의 폭격기라도 단정할 수는 없지만 JU 87만큼 2차 대전을 떠올리게 하는 무기는 없을 것입니다. 

 

1. 생각한 것보다 어려운 폭격 비행을 알아보기. 

요즘은 외과수술 타격이라고도 불리는 초정밀 공격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종종 오폭 뉴스를 점할 때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하늘에서 지상의 목표물을 정확하게 공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조수석에 탐승한 승무원이 대략 위치를 짐작하고 손으로 폭탄을 투하였던 제1차 대전 초기에는 명중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후 폭격기의 고도와 속도를 계산하여 폭탄을 투하하는 기술이 등장하였지만 여전히 명중률이 높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2차 대전 당시에는 대규모 편대가 출결 하여 폭탄의 비를 퍼붓는 이른바 융단 폭격이 보편화되었습니다. 

강력해 보이고 무시무시하지만 사실 쏟아부은 수많은 폭탄 중 하나만이라도 명중하면 성공이라 생각하던 방식이어서 효율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일단 낭비되는 폭탄도 문제지만 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격추되는 폭격기도 많았습니다. 전쟁을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수행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무지막지한 소모전을 감당하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폭격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었습니다. 

폭격기의 안전을 고려한다면 고고도에서 고속으로 비행하며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 좋지만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결론은 폭탄을 목표 위치까지 최대한 근점 하여 투하하는 것이었습니다. 저고도로 비행하면 격추당할 위험이 커지게 됩니다. 

Ju 87의 급강하 폭격 개념도. 목표물까지 정확히 근접하여 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기에 이동 표적물의 공격도 가능했다.

이때 고고도로 비행 중 목표를 발견하면 곧바로 강하하여 최대한 근접한 후 폭탄을 투하하는 방법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급강하 폭격기입니다. 

 

개념은 1 차세 게 대전 다시부터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급강하할 때 기체가 받는 정항을 극복하는 등의 여러 난제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 들어 이런 문제를 해결한 급강하 폭격기들이 본격 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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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건과 함께 시작된 프로젝트 알아보기. 

재군비 선언 이전부터 비밀리에 독일 공군의 재건을 준비하던 우 데트는 1933년 미국 방문 다시 커티스 사의 F11C 급강하 폭격기의 시범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연구를 위해 즉시 2개를 구입하여 본국으로 가져갔을 만큼 급강하 폭격기가 향후 독이 군에게 반드시 필요한 무기임을 직감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으로 1935년 도입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전부터 급강하 폭격기 개발을 하던 유수의 항공기 제작사들이 경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융커스 사의 엔지니어인 풀먼이 설계한 JU87이 치열한 경쟁 끝에 낙점되었습니다. 

기체 구조가 튼튼하였고 야전에서 장비도 쉬웠는데, 회형상 특징은 강착 장치가 고정식이었고 주익이 기체 아래의 시계를 확보하기 용이한 갈매기 날개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급강하 돌입시 조종사의 의식을 잃을 가능성을 대비하여 특정 고도에서 폭탄을 자동 투하하고 기체의 자세를 잡아주는 장치도 설치되었습니다. 

 

이론적으로 JU87 DMS 90도의 수직강하도 가능하였지만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폭탄 투하 후 이탈 등을 고려하여 속도를 시속 240km 정도로 줄인 후 80도 정도의 각도로 강하였다고 합니다. 독일에서 ju 87은 급강하 폭격기의 약칭인 슈투카로 불리는데 사실 슈투카는 모든 종류의 급강하 폭격기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이지만, 활약이 워낙 인상적이다 보니 이후 ju87을 일컫는 대명사처럼 여기 지게 되었습니다. 

 

재미있게도 개발 당시에 엔징의 완성되지 않아 5기의 실험기들에 롤스로이스 사의 캐스트랄 엔진이 장착되었습니다. 

상업적으로 판매되는 엔진이긴 했지만 영국은 본의 아니게 적국의 무기 개발에 공헌을 하게 돼 새입니다. 

시험 중 여러 사고를 겪으며 개량을 거치 후 1937년부터 ju87A 형을 시작으로 독일 공군에 납품되기 시작하였고 곧바로 스페인 내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슈트카 설명 동영상

3. 전격전을  이끌어 가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JU87은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들이 요충지를 급습하여 상대를 흔들어 놓으면 곧바로 기갑부대가 돌풍같이 진격하여 전선을 돌 하한 후 적의 후방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포위된 상대방은 궤멸되거나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전격전이라 명명된 이러한 독일의 기동전에 의해 폴란드와 프랑스가 순식간에 점령당했습니다. 

급강하 돌입 시 발생하는 소음에 더해 이른바 '에라 코 나팔'이라 불린 무시무시한 사이렌 굉음으로 인해 폭격을 당하는 지상군은 공항 상태에 빠져 우 왕자와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전과는 대대적으로 홍보되었고 이때부터 슈투카는 독일의 승리를 자랑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특히 폭격의 정확도가 뛰어난 것으로 확인되면서 독일 공국의 수장이 괴링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급강하 폭격기 만능론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영원할 것 같았던 슈투카의 전성기도 거기서 멈추게 됩니다. 

이른바 공군만의 전쟁으로 표현되는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꼬리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의 상대는 공군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편이어서, 슈투카의 활약은 무주공산에서 펼쳐진 것이었습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이라는 보검을 가진 영국의 하늘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동안 간과했던 약점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속도가 느린 슈투카는 한마디로 영국 공군의 날렵한 전투기들의 밥이었는데, 특히 급강하에 돌입할 때 공격을 받으면 소수 무책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에게도 뛰어난 BF 109 전투기가 있었지만 항속 거리가 짧아 폭격에 나선 슈투카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영국 공군에게도 뛰어난 BF 109 전투기가 있었지만 항속 거리가 짧아 폭격에 나선 슈투카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했습니다. 영국 공군 조종사들이 슈투카 파티를 벌인다고 할 정도로 갈수록 피해가 커지자 결국 돌일은 8월 19일부터 슈투카의 영국 본토 항공전 투입을 중지하였습니다. 

 

 

4. 슈투카 전설이 되다. 

슈투카의 흑백사진이며 이률장면과 비행장면 이미지 

하지만 히틀러의 엄청난 도발 욕구가 있는 한 슈투카가 계속 의기소침한 채 뒷방에 물러나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사상 최대의 독소전쟁을 개시하자 전선의 주역으로 다시 떠오른 것입니다. 영국에서와 달리 독일이 초전부터 제공권을 장악해 버리면서 이전처럼 손쉽게 폭탄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동부전선에서 전차 같은 이용 표적 공격에 뛰어난 전과를 보였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날이 갈수록 전투가 격화되면서 슈투카는 새롭게 변시 하였습니다. 

상부를 타격하면 단 한 발로도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37mm 기관포를 주익에 장착한 개량 기종이 소련 기갑 붇재의 저승사자로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대포 새라고 불린 슈투카로서, 독소전쟁 중반부터 기갑 전 녘이 절대 영세였던 독일 지상군에게는 천군만마, 소련군에게는 지옥의 사자 같은 존재였습니다. 

 

슈투카와 이기종이 구사한 전술은 냉전시기에 미국이 근접지원용 공격기를 개발할 때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지상군 근접 지원 전투의 모범이라 할 수 있었는데, 특히 519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한 전설적인 슈투카 에이스인 루델이 쓴 자서전 '트로츠뎀'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뜻의 독일어이며 새로운 공격기를 개발하던 미국 엔지니어들의 필독서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 한 탱크 킬러가 바로 너무나도 유명한 A-10입니다. 

총 6,500 여기가 생산된 슈투카는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에도 일부 공급되었지만 대부분 독일군에 의해 소비되었습니다. 

 

성능만 놓고 본다면 전쟁 초기를 지나면서 시대에 뒤쳐진 폭격기로 취급될 수 있었지만 마땅한 대체기가 없었던 독일은 이를 개량하면서 끝까지 애용하였습니다.

 

아마도 특유의 외양도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2차 대전 내내 꾸준히 사용되었기에 슈투카가 그 시대를 상징하는 무기가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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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소총으로 모신나강이 있습니다. 

오늘은 모신나강 소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개발 배경과 소총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신나강 소촐 이미지 

1. 모신나강 개발의 역사 

1877년 발칸반도로 세력을 확장하기를 원하던 러시아는 오랫동안 일대를 지배해온 오스만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전쟁이 16세기 이후 12번째였을 정도로 약국은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약 10개월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한 러시아는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시킨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등을 위성국으로 거느리며 스리브족의 맹주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러시아 군부는 엄청난 피해에 곤혹스러웠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의 향방에 결정적인 역할은 담당한 플레브나 공성전에서 두배나 많은 병력을 투입해서 승리했지만 전사자가 3배가 더 많았을 정도입니다. 

보유한 무기의 성능 차이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특히 소총의 질적 격차가 컸습니다. 

오스만 군이 무장한 윈체스터 소총이 러시아군의 벼르단 소총보다 사거리가 길고 연사력도 월등한 소총입니다. 

 

이처럼 러시아는 레버 액션 윈체스터에도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1880년대가 되자 소총의 대세는 그보다 훨씬 뛰어난 볼트액션식으로 넘어가던 중이었습니다. 주변국의 최신 동향을 접한 러시아는 상황이 위중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1889년 신예 소총 개발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상금을 내건 국제 공모에 최종적으로 툴라 조병창의 모신과 벨기에의 엔지니어인 나강을 제안이 경쟁을 벌였습니다. 

모신은 프랑스의 르벨 M1886 소총과 한창 개발 중이던 오스트리아의 만리허 소총을 참조한 프로토 타입을 제출하게 됩니다. 

 

한창 개방 중이던 7.62mm탄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었으나 제작과 유지 보수가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나강의 제안은 9mm탄을 사용하므로 추가 개조가 요구되었고 바로 직전에 있었던 자국군의 소총 사업에서 독일마저 우의 M1889 소총에게 밀렸기에 품질도 의문시되었습니다. 

 

모신나강과 같은 1891년 제식화된 다양한 종류의 7.62×54mmR 탄. 120년이 지난 현재도 많이 사용 되는 걸작 총탄. < 출처 : (cc) CynicalMe at Wikimedia.org >

이에 추가 공모를 실시했으나 이 두 소총을 앞서는 후보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결국 개발자들에게 성능개선을 요구했고 그렇게 해서 개령된 모델로 시험을 진행하여 나온 결과물의 나강의 제출안이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며 가장 기초적인 무기인 소총을 계속해서 외국산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존심 문제라는 의견도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볼트액션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20세기 전반에 모든 열강들은 예외 없이 자국산 소총을 사용하였으며 고심 끈에 군부는 모신의 제출안을 개조해서 나강이 설계한 탄창을 결합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개발되어 1891년 부터 양산에 들어간 새로운 제식 소총에 세출 소총 m1891이라는 제식명이 부여되었고 모신에게는 포상금이 지급되었습니다. 그러자 나강이 자신도 개발자라며 소송을 걸어 배상받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후 세줄 소총 M1891은 모신나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소련은 공로를 가리기 위해 무기명을 개발자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비록 재정 로시아 시절에 개발되었지만 세중 소총 M1891이라는 이름은 소련군의 무기 체계가 어울리지 않았기에 혁명의 혼란기가 정기된 직후인 1924년에 모신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러한 이유와 더불어 단지 탄창 때문에 나강의 이름까지 붙이는 것은 억지라며 현제 러시아에서는 모신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모신나강 덕분에 러시아는 경쟁국들과 같은 시기에 본격적인 볼트액션 소총 시대에 돌입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의 공업 수준이 떨어져서 생산의 상당 부분을 외주에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샤텔로 조병창, 미국의 레밍턴, 웨스팅하우스 등에서도 제작이 우어졌습니다. 여담으로 설계도가 러시아의 도량형인 아르신 방식으로 표기되어 업체들이 수치를 재계산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개발 과정과 자국 산업 수준의 불신 때문에 모신나강에 대한 일선의 최초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새롭게 표준이 된 7.62 × 54 mmR탄의 초기 불량률이 높았던 점도 나쁜 평판을 만드는 데 일조했지만 선입견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뿐이지 경쟁 소총과 비교했을 때 성능은 그다지 차이 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문제가 되었던 7.62 × 54 mmR탄도 실제로는 1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 사용 중일만큼 뛰어난 총탄입니다. 

모 시나강이 생각보다 좋은 소총이라는 사실은 한참 후인 제2차 대전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개발 당시에 군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최대한 구조를 단순화시킨 덕분에 모신나강은 어지간한 악조건에서도 무난히 작정했습니다. 

 

독소전쟁 초반이던 1941년 겨울에 윤활유가 얼어붙어 돌이 군의 무기는 작동하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모신나강은 같은 상황에서도 사격에 문제가 없었고 한마디로 기본에 충실한 소총이었던 것입니다. 

 

2. 모신나강의 특징 알아보기. 

모신나강의 외관은 기존에 사용하던 베르단과 유사하나 5발을 내부 탄창에 장찬 할 수 있어 연사 속도가 빨랐습니다. 

노리쇠 작동이 악명이 높았던 카르카노 소총 같은 사계도 있지만 사실 볼트 액션 소총은 기계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아 연사력은 수의 숙련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모신나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수많은 실전을 거치며 조준기, 노리쇠, 방아쇠 등의 개량이 이루어져서 성능이 꾸준히 향상되었습니다. 

 

전설적인 저격수인 시모 헤위헤. 핀란드산 모신나강인 M24를 사용했다. < 출처 : Public Domain >

모신나강은 총신이 상당히 긴 편이며 러시아식 스파이크 총검까지 달면 무려 병사들의 신장과 맞먹은 173cm를 넘길 정도여서 휴대가 불편했습니다. 

러시아 평원처럼 넓은 개활지에서 백 병정을 벌인 경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제1차 대전에서 일상화가 된 참호전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량이 이루어질수록 총신이 중어 들었는데 특히 1907년에 등장한 기병 대용 m1907 카빈은 총신이 28.9cm나 짧아졌습니다. 

 

볼트액션 소총은 사격의 정확도가 높습니다. 여기에  모신나강은 긴 총신 덕분에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때문에 전쟁사에 길이 빛날 많은 저격수들이 애용했습니다. 1939년 발발한 겨울 전쟁 당시에 3개월 동안 적군 542명을 사살한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인 헤위헤도 핀란드산 모 시너가 인 m24를 사용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게도 소련군은 자신들이 개발한 모신 나강에 게 치욕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3. 모신나강 제원

제작사 툴라 조병창 외
구경 7.62m
탄약 7.62×54mmR
급탄 5발 들이 스트리퍼 클립
전장 1,232mm
총열 730mm
중량 4kg
유효 사거리 500m
작동 방식 볼트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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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기관총의 아버지 격인 맥심 기관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14년 9월 프랑스 마른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독일의 맹공을 간신히 막아낸 후 전선의 곳곳에는 상대를 견제하기 위한 참호가 깊게 파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치 상황은 잠시고 전쟁 초기의 치열한 기동전이 곧바로 재현될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 파인 참호들은 서로 연결 디어 하나의 거대한 방어 진지로 변하였고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총기발물관에 있는 초기 맥심기관총 이미지

방어 글 위한 구조물인 참호는 전선에 고착화돼었음을 의미하였고 이때부터 전재의 대부분은 양측이 만들어놓은 참호 선사에서 벌여졌습니다. 장장 4년 동안 수백만의 양측 병사들이 이곳에서 사상당했을 정도로 싸움은 참혹했습니다. 

 

전투에 많은 무기들이 동원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기관총은 최고의 살인 기계였습니다. 그러데 공교롭게도 독일군과 연합국 모두 같은 기관총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로 모든 기관총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맥심 기관총이었던 것입니다. 

 

1. 맥심 기관총의 개발 역사

기관총은 오늘 반정부 무잔 조직이나 테러 단체들도 갖추고 있는 무기입니다. 가장 커다란 수요자로 할 수 있는 구에서 분다나 소대 같은 가장 말단 소부대의 필수 무장입니다. 

그만큼 흔하기도 한 데다 소총의 위력이 향상되고 다양한 종류의 휴대용 중화 기기 등장하면서 종종 위력을 간과하는 경우마저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익숙해서 그럴 뿐이지 기관총은 탄생 이후 지금까지 보병용으로 대단한 화력 투사 수단입니다. 

기관총은 한마디로 역사를 바꾼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 즉 화기의 등장으로 역사가 크게 바뀌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많이들 간과하자만 그러한 화기의 시대에서도 19세 게 후반에 등장한 기관총은 커다란 변곡점이었습니다. 단발로 사격하는 기존 총과 연사가 가능한 기관총의 위력 차이는 그야말로 대단했습니다. 

 

인류에게는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이른바 대량 살상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습니다. 

맥심은 그러한 엄청난 역사를 이끈 최초의 기관총이 입니다. 맥심 이전에도 캐틀링 건처럼 연사가 가능한 총들이 존재했기에 범위를 어디까지로 하냐에 따라 기관총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탄생 당시에 맥심과 연사가 가능한 여타 총기와의 기술적 차이는 상이했습니다. 

맥심기관총 개발자 하이람 맥심이 기관총 앞에서 찍은 이미지

한마디로 맥심은 형제 사용 중인 모든 기관총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1866년 친구를 따라 우연히 사격장에 방문한 하이람 맥심 은 사격할 때 발생하는 충격 때문에 사수가 흔들리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이를 에너지로 이용하면 노리쇠를 일일이 조작하지 않고도 탄환을 자동으로 급탄 하고 발사가 가능한 총을 만등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동화된 총이 있다면 적은 병력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발화할 수 있을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83년에 반동을 이용하는 자동화된 총의 특허를 출원했고 이듬해 프로토 타입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총을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맥심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발가에는 장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자동화되었으므로 사수는 오로지 목표물만 바라보고 사격하면 됩니다. 

 

분당 최대 650발의 속도는 숙련된 30만 명의 사수가 발사하는 볼트액션 소총의 화력과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전문가라면 맥심의 위력을 충분히 알았지만 여려 이유로 판매는 부진했습니다. 너무 무거운 데다 이동수단의 성능이 떨어지던 시기였기에 용도가 제한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가격이 비싸서 차라리 소총을 더 많이 투입하는 것이 호율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기관총이나 자동화된 소총의 장점이 입증된 20세 게 중반까지도 탄의 낭비가 심하다고 생각했을 저도였으니 생산력이 떨어지던 당시에는 더했습니다. 

 

기대를 많인 가졌던 미군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실망한 그는 영국으로 이주해서 판촉에 나섰습니다. 

병력이 부족해 주로 요새를 거점 삼아 군을 운용하는 식민지 정부 등이 관심을 갖고 시험 삼아 구입했고 1888년 11월, 시에라리온에서 원주민 탄압에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착 군 당국에서는 이 혁신적인 화기에 대해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아 맥심은 판매를 위해 직접 유럽 각국을 돌며 시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러던 1893년 짐바브웨이에서 원주민 저항이 벌어졌을 때 4 정의 맥심을 보유한 50여 명의 경비대가 무려 4천여 명의 원주민의 공격을 막아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마디로 학살이었고 이것은 제1차 대전의 비극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습니다. 그러나 맥심 때문이 아니라 유럽인인 뛰어난 반면 식민지인들이 열등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착각해서 정착 주문량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을 때 도움을 준 이가 현재도 세계적인 방산 업체인 빅커스-암스트롱의 전신인 빅커스의 설립자의 아들인 알버트 빅커스입니다. 기관총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의 도움으로 1897년 맥심 총기사가 설림 되어 보다 체계 적으로 생산과 판매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국군이 제식 무기로 도입하자 자극을 받을 독일과 러시아도 도입에 나섰습니다. 

성능에 만족한 이들은 직도입뿐 아니라 면허 생산에 나서 자체 개량도 시도했습니다. 덕분에 빅커스, MG08, PM1910 같은 파생형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각국 기관총 역사의 중간 시조가 되었습니다. 

 

1905년 발발한 러일 전쟁에서 상당한 전과를 남겼고 이후 제1차 대전에서는 최고의 상상 무기라는 명성을 날리며 이후 세계사를 바꾼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맥심은 본격적인 기관총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맥심기관총 설명 영상

2. 맥심 기관총 특징

맥심이 새로운 역사를 개막한 기관총이나 단점도 많았습니다. 일단 무겁고 부피가 커서 다루기가 어려웠습니다. 

거기에다 최초에는 공랭식이었으나 연사력을 늘리기 위해 수랭식으로 바뀌면서 무개가 더욱 늘었습니다. 

MG08의 경우는 모든 부속 장비와 소모품을 포함해 총 69kg에 이르렀습니다. 가뜩이나 20세기 초에 이동 수단의 성능이 떨어져 주로 진지에 거치해 놓고 방어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보통 4명에서 6명으로 구송된 팀이 운영했습니다. 사격 시에는 사수에 조수만으로도 가동할 수 있지만 옮기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국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중화기 취급을 받으며 대개 독립 중대에서 운용했습니다. 분당 최대 600발의 연사력은 오늘날 기관총에 비해서는 떨어지나 기관총의 목적이 지역 제압이니 전투를 벌이는 데 충분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작은 생각에서 출발한 총기사의 이정표

제1차 대전을 계기로 많이 부각되었지만 사실 맥심 기관총은 당시 처음 등장한 신무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를 만들어낸 하이람 맥심이 1883년에 특허를 출원하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무기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 태생으로 영국으로 귀하 한 발명가 맥심은 사격 시에 발생하는 반동을 이용하면 탄환을 자동으로 재장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아이디어는 총기 역사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당시 대부부 느이 총은 수동으로 재장전하는 형태였으므로 연사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투에 많은 인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계속 방아쇠를 당겨 쏘는 반자동 총이나 캐틀링건처럼 임부 연사가 가능한 총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수동식이었고 사용이 불편하였습니다. 

 

연구 끝에 맥심은 새로운 개념의 총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고 이를 맥심 기관총이라 명명하였습니다. 

발사에서 장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자동화되었으므로 사수는 오로지 목표물만 바라보고 사격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맥심 기관총은 현대식 자동화기 또는 기관총의 호시로 보는데, 이전의 개틀링건 방식과 달리 탄띠 급탄식을 채택하여 분당 최대 650발의 발사속도를 가졌습니다. 이는 숙련된 50명의 사수가 발사하는 소총의 하력과 맞먹는 것이었을 만큼 당시 에는 상상하기 힘든 경이적인 수준이었습니다. 

 

 

4. 이미 시현돼 된 무서운 화력에 맥심 기관총

처음에는 개인이나 식민지 정부 등에서 시험 삼아 구입하였고 1888년 11월,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에라리온에서 원주민 탄압에 처음 상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착 군 당국에서는 이혁 신적인 화기에 대해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아 맥심은 판매를 위해 직접 유럽 각국을 돌며 시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시범을 본 많은 이들은 빠른 발사 속도에 경악하며 관심을 표명하였고 속속 구매의사를 보였지만 정착 주문량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1889년 최초로 도입하였지만 대량 채용을 거부하였던 영구 군의 생각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관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맥심 기관총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적어도 5~6명의 인원이 필요했고 수랭식 시스템을 채용하였음에도 종종 과열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따라서 강력한 화력을 인정하지만 일선에서 보병들이 사용하기에는 곤란한 무기로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들이 속속 등장하였습니다. 1893년 짐바브웨에서 원주민의 항거가 벌어졌는데 4 정의 맥심 기관총을 보유한 불과 50여 명의 경비대가 무려 4천여 명의 원주민의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한마디로 학살이었고 이것은 제1차 대잔의 비극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습니다. 

 

특히 정규전이었던 1905년 러일전쟁 당시에 1 정의 러시아군 맥심 기관총에 일본군 1개 대대가 도륙되기도 했습니다. 

러일전쟁의 여순 전투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을 도륙한 러시아군의 사진. 이 전투는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일본이 결국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일본 군의 인명피해는 러시아 군보다 훨씬 컸다. 

5. 피아 모두가 채택한 기관총

동 시기에 맥심 기관총의 효용성을 깨달은 여러 나라들이 라이선스 제작에 들어갔는데 그중 가장 앞장섰던 나라가 독일이었습니다. 

MG08 스팬 다 우어라 명명된 독일형 맥심 기관총은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썰매 모양의 거치 대등을 장착하는 식으로 일부 개조가 이루어졌지만 기본적인 사양은 동일하였습니다. 그 격과 1914년 제1차 대전 발발 당시에 독일은 총 10 만전의 맥심 기관총을 장비한 최대 보유국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군사대국인 러시아군도 같은 방식으로 맥심 기관총을 라이선시 생산하였습니다. 

러시아용은 별도의 제식 소총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약실이 개조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양 개조로 가장 무거웠던 맥심 기관총으로 물렸는데 이것이 PM M1905기관총입니다. 

 

제1차 대전 당시에는 이를 좀 더 개량한 PM M1910이 대량 사용되었는데 이후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에 공급되어 우리와 악연이 있습니다. 

맥심의 모국이기도 했던 영국도 애용하였지만 제1차 대전 직전에 보병대 대당 2정만 배 치아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경쟁국에 비해 홀대를 받았다고 할 수 도 있습니다. 영국군이 제식 화한 모델은 맥심 기관총의 가장 큰 단점인 무개를 반 정도로 대폭 중린 비커스 기관총이었습니다. 

 

현대식 기관총과 비교한다면 이것 또한 무거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여타 국가의 맥심 기관총과 비교한다면 훨씬 다루기 용이하였습니다. 

 

6. 맥심 기관총이 지배한 죽음의 경쟁

1914년 인류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지옥을 현실에 만들어내었습니다.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희생이 그토록 컸던 점은 무기의 발달에 비해 전쟁을 지휘하는 이들의 생각이 너무 고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나폴 레오 시대의 공격 제일 사고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돌격명령을 받고 적진을 향해 뛰쳐나간 병사들이 상대편 참호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속수무책 당하는 것이 전선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기갑장비를 이용하여 참호선을 돌파하는 작전을 펼 피겠지만 당시만 해도 포격 후 보병이 돌격하는 방식 외에 마땅히 구사할 전술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포탄의 비를 퍼부어도 상대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고 이렇게 살아남은 방어자들은 포연을 헤치고 돌격하는 공격자가 사거리 안 안에서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조금씩 다를 뿐인 맥심 기관총에 의해서 무명의 병사들은 하염없이 숨져갔습니다. 

맥심 기관총의 영국판 경량형,비커스 기관총을 쏘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영국군 병사

참호를 파고 전선이 고 차화 되자 맥심 기관초의 위력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너무 무거워 공격 시에는 재빠르게 옮겨 다니며 지원할 수 없었지만 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나섰을 때는 다가오는 적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알을 퍼부어대는 데 적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렇게 참호전과 더불어 맥심 기관총은 제1차 세계대전의 학살을 뜻하는 대명사를 바뀌어 갔습니다. 바로 죽음의 경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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