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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록히드가 최초로 만든 저 투기인 P-38 라이트닝 전투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록히드가 치초로 만는 P-38라이트닝 쌍발기 비행하는 모습  출처:Public Domain

 

1.  개발 역사 알아보기.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에 미군이 운용했던 전투기의 성능은 좋지 않았습니다. 육군 항공대의 주력인 p-40은 1939년부터 양산을 시작한 신예 기였습니다만 독일의 BF109와 비교했을 때 현격히 열세였습니다. 해군 항공대의 F4F도 일본의 A6M에 밀렸습니다. 그런데 기술 겨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지리적 상황을 고려한 미국의 군사 전략 때문에 전투기보다 폭격기 분야에 우선시하며 벌어진 현상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미국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운이 감돌자 신예기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전쟁 후반기에 하늘의 재왕으로 활약한 P-47, P-51, F6F, F4U 등은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어기에 제때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걸작 전투기 등보다 조금 먼저 등장한 P-38 라이트닝은 비록 명성은 덜하였지만 태평양 전역과 유럽 전역 야측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미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책임졌던 마당쇠 같았던 전투기라 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 들어 P-35, P-36을 서둘러 도입했음에도 여전히 가상적국의 전투기와 대등하게 맞설 수 없음을 인식한 육군항 공대는 1937년 2월 새로운 고고도 요격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항공기 제작 자사들에게 내세운 조건은 최고 속도가 시속 640km, 6분 안에 고도 6,500m까지 상승이 가능하였으며 무장을 강력한 20mm 기관포 장착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많은 업체가 참여해서 치역 하게 경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록히드는 한창 켈리 존슨이 개발 중이던 모델 22를 기반으로 설게 한 후보작을 당국에 제출했으며 제안을 평가한 육군은 타당성이 있다고 보고 xp-38이라는 이름을 무 여하고 개발을 지시했으며 후신인 록히드 마틴은 오늘날 세계 최대의 방산 업체이지만 당시에는 10~20인승 여객기만 만들던 업체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p-38은 록히드가 최초로 만든 군용기였습니다. 

 

 

P38라이트닝관련 동영상

XP-P38은 경쟁을 벌인 벨의 XP-39, 커티스의 XP-40과 비교했을 때 엔진이 2개인 쌍발기여서 외형부터 차이가 많았습니다. 고속으로 비행하려면 엔진이 중요한데 당시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전투기요 엔진의 성능은 그다지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엥 켈리 존슨은 엔진 두 개를 탑재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록히드는 쌍발 여객기를 많이 만들었기에 관련한 노하우는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XP-38자와에 엔진을 장착한 동체를 주익과 수평미익으로 연결한 쌍동 기체입니다. 

 

중앙에 조종석을 배치했는데 엔진이 외부로 빠지면서 빈 전방 공간에 폭격기 요격도 가능한 강력한 무장을 장착했습니다. 

랜딩기어가 좌우 동체와 조종석에 장착되어 있어서 주기할 때나 이착륙 시에 기체를 수평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구조였습니다. 

 

 

사업 이전에 이미 연구가 진행된 상태였기에 XP-38의 개발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져 불과 1년 반 만에 기체가 완성되었고 1939년 1월 27일에 초도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진종 문제처럼 개선할 부분이 많기는 했지만 처음에 유구했던 것보다 빠른 시속 675km를 기록했습니다. 

 

결과에 고무된 육군은 양산 전 단계로 무장을 갖춘 YP-38 실험기 13기를 발주했으며 이후 일사천리로 테스트가 이루어졌고 9월에 P-38이라는 제식명이 부여되었습니다. 

 

독일과 교전상태가 된 영국이 1940년에 자국 요구 사항에 맞춰 엔진과 과급기가 변경된 3기의 라이트닝 1을 도입해 시험을 실시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가 나와 구매를 포기했으나 사실 이는 록히드 개발진도 반발했을 만큼 기체의 특성을 무시한 형식 변경이었기에 좋은 결과가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에 초기 납품 물야도 고속비행이나 급강하 시에 조종이 어려운 문제점이 발견되기도 하였다고 하며 이후 다이브 플림을 장착해 어느 정도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1941년부터 양산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진주만 급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지상 기지를 기반으로 한 육군항공대의 전투기여서 실전은 1942년 여름 이후에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대서양에서 아군 함정, 선상보호를 위해 아이슬란드, 영국 등에 전진 배치되어 비슷한 시기에 유럽 전역 참전도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제2차 대전 당시에 미군이 유럽과 태평양에서 운용하던 작전기가 달랐으며 전자는 육군이, 후자는 해군이 주도한 전장이어서 벌어진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투기의 경우 P-47, P-51은 유럽에서 F6F,, F4U는 태평양에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반면 장거리 비해잉 가능한 P-38은 보다 넓은 공역에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이점을 살려서 양쪽 전역에서 골고루 활약했습니다. 상당히 예외적인 미국의 전투기였습니다. 

 

 

2. 운용역사 알아보기 

P-38은 프로토타입을 포함해 총 10,037기가 제작되었습니다. 

P-47, P-51의 생산량이 15,000 여기 정요였던 점을 고려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수량이며 태평양과 유럽 모두에서 활약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상적인 전과의 대부분은 태평양 전역에서 기록했습니다. 사전에 정보를 획득하고 벌인 작전이지만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인 아마모토 이 소쿠가 탑승한 G4M 폭격기 격추 사례는 상당히 유명합니다. 

 

정찰 기형 일부가 호주, 중국 등에 공급된 것을 제외한다면 제2차 대전 중에 전량 미 육군이 운용했으며 전쟁 후반기인 1943년부터 2 선급으로 물러나지 시작했고 종전 후에 공군이 독립하면서 F-38로 제식명이 바뀌었으나 1949년에 미군에서 완전히 퇴역했습니다 일부가 이탈리아, 콜롬비아, 도미니카 등에 판매 혹은 공여되었고 온두라스에서 1965년까지 운용한 것이 마지막이라 합니다. 

 

3. 제원 살펴보기 

전폭 15.85m
전장 11.53m
전고 3.91m
주익 면적 30.43㎡
최대 이륙 중량 9,798kg
엔진 좌) 앨리슨 V-1710-111 12기통 수랭식 피스톤 엔진, 1,600hp(1,200kW)×1
우) 앨리슨 V-1710-113 12기통 수랭식 피스톤 엔진, 1,600hp(1,200kW)×1
최고 속도 666km/h
실용 상승 한도 13,000m
무장 이스파노 20mm M2 기관포×1
 브라우닝 12.7mm M2 기관총×4
  M10 3연장 4.5인치 로켓발사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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