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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 민스크 전투에 대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민스크 시내 모습 이미지

1. 인류사 중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을 기습 침공하였습니다. 흔히 동부전선 이록 부르며 제2차 대전을 구성하던 하나의 전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라는 정의 해도 무방한 독소전쟁이 발발을 하게 됩니다. 러시아(소련)에서는 대조국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한마디로 강철과 강철이 정면으로 충돌하였은 인류사 중 최대의 재앙으로 불리는 전투입니다. 

 

역사에 일일이 기록될 수 없을 만큼 그동안 수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독소전쟁만큼 격렬하고 잔인한 전쟁은 없었으며 불과 4년이라는 기간 동안 430만의 독일군을 포함한 무려 500만의 추축국 병사들이 사망을 한 전투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1000만의 군인이 전하고 더불어 1,500만의 민간인이 전쟁의 폭풍 속에 사라져 간 소련에 비해 그다지 많은 숫자라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물절 피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인적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적, 물절 피해가 어마어마했던 이유는 편 혐한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나치와 이에 못지않은 볼셰비키가 조도한 충돌이라는 점도 있었고 일단 규모가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장소였만 일부 한정된 공간에서만 싸움이 벌어진 130여 년 전 나폴 레오의 원정 당시와 비교한다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1942년 말에 전선의 길이는 남북으로 2,500km에 달할 정도였으며 4년 동안 동서로 왕복 5000km를 이동하며 쉼 없이 교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동안, 그런 거대한 공간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전투들이 벌어지며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파르티잔의 소규모 특공 전도 있었지만, 전쟁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같은 거대한 충돌들도 많았으며 독소전쟁은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전투들의 집합체 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거대 전투 중 하나였 연 1941년 6월 민스크 전주는 독소전쟁의 서막을 알린 역사적 전투입니다. 

 

 

2. 작전명 바바로사에 대해 알아보자.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 독소전쟁의 발발 원인은 너무 많아 여러 권의 책으로 발행해도 모자랄 만큼 방대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히틀러입니다. 사실 아무리 국민 간의 감정이 나쁘더라도 전쟁은 그렇게 쉽게, 그리고 함부로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은 아닙니다. 모든 전쟁은 예외 없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한 권력자나 집단의 확고 부동한 의지에 의해서 벌어집니다. 히틀러는 동방에 순수 아리아인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임을 누누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목적을 달서 하기 위해 소련과 절멸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였을 정도로 전쟁에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망성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을 보유하자 실제로 소련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40년 12월 18일, 총통 명령 21호를 통해 히틀러는 OKH(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에 구체적인 소련 침공 계획을 입안하려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러한 총통의 의지에 따라 OKH는 바바로사 계획으로 명명된 치공 안을 수립하였으며 침공 4개월 안에 소련의 핵심을 붕괴시키고 볼가강 하구에 아스트라한에서 백해의 아르한겔스크에 이르는 이른바 A-A선까지 진출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당초 독일은 1941년 5월 15일 작전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유고슬라비아 점령 때문에 5주라는 시간을 날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후 소련이 살아날 수 있게 된 천금 같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겨울 눈보라와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물러난 히틀러는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초상화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나에게 지난 간 5주를 돌려달라고 절규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나 OKH모두 자신감이 충만했던 1941년 5주라는 시간의 중요함을 몰랐습니다. 

 

3. 사상 최대의 침공군 조직하다.

소련 침공을 위해 독일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침공군을 준비하는 독일군의 모습 이미지

독일은 소련을 일거에 석권하기 위하여 33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여타 추축국과 위성 국가들로부터 50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았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기점으로 전선의 주역으로 정립되어 가던 전차 3,300여 대와 작전기 2,000 여기가 투입되었습니다. 이는 당시까지 지구 상에 등장한 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었습니다. OKH는 이러한 대군을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군이라는 거대한 3개 병단으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관할 육해공군을 망라하여 구성된 이들 집단군은 북에서 남으로 북부 집단군, 중부 집단군, 남부 집단군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70~100여 만의 병력과 장비로 중무장하였고 전쟁이 개시되면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에 이르는 전략 목적까지 단숨에 진군하여 점령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예상 진격로 중간에 위치한 여타 요충 지긍도 당연히 접수하여야 하고 이를 막기 위해 달려들 소련군도 격파하여야 했습니다. 

 

즉, 독일군은 점령과 섬멸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전쟁 초반에 벨로루시, 서부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신속히 장악해 소련의 항전의지를 꺾을 참이었습니다 소련이 거대한 국토와 인구를 가진 나라지만 독일이 1차적 목표로 삼은 이 지역에 인구와 국부의 70%가 몰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을 독일이 점령한다면 소련은 순식간 덩치만 커다란 단 판 빠진 찐빵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속도와 집중이었는데 지금까지 일사천리로 유럽을 석권한 독일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자신감이 없이 이 정도의 전쟁을 감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석 달이 되기 전에 소련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개 될 것입니다. 우리가 대문을 박차기만 하면 러시아는 썩은 건물을 무 저닐 것이다라고 확신하며 지난 1936년 라인란트 진군 시와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 당시 보여 주었던 히틀러의 초조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4. 부족했던 소련의 준비 상황

약 2년 전인 1939년 8월 모두가 철천지 원수라고 생각하던 소련과 독일은 물로 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을 체결하여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에 이 둘은 사이좋게 폴란드를 침공하여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처럼 표면상으로 동맹국이었지만 양측 모두 이런 우호가 단지 필요에 따른 일시적인 관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라고는 가리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라고는 단정하지 않았지만 소련도 충돌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노골적인 반공, 반소, 반슬라브 신념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자신들도 공산주의 세계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럽으로 영향력을 넓혀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치 독일을 넘어야 했고 둘 사이에 양보와 타협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독일이 서유럽을 석권하자 소련의 불안감은 장가 하였고 나름대로 군비 증가에 착수하여 1942년 말까지 1차 사업을 완료할 예정이었습니다. 

 

독일이 사상 최대의 원정군을 준비하였지만, 시실 당시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500여 만에 달하는 상비군을 보유한 나라였습니다. 

거기에 더해 18,000여 대의 전차와 12,000 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였는데, 이는 수량으로 독일의 5배가 넓은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국토가 넓었기에 당연히 규모가 컸던 것인데 유럽 쪽의 위기가 점차 증가하자 그중 약 400만의 대군과 대다수의 장비를 유럽 접경 지역에 집결시켜 놓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장비가 구식이었고 가동률도 저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개전 당시에 움직일 수 있는 전차는 40%에 불과하였으며 이제 막 생산되기 시작한 T-34나 KV간은 최신 전차는 국경지역에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지난 1937년 대축 청기 간 동안 완전히 무너져 내린 지휘체계가 더 큰 문제였으며 이런 총체적인 무능이 빚은 참사가 지난 1939년에 있었던 겨울 전쟁이었고, 이 때문에 독일은 더욱 소련군을 폄하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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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의 창설의 역사적 배경부터 현재까지 알아보자. 해적에게 공납하던 국가에서 세계 최강의 해군 보유국으로 발돋움한 미 해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미 해군 로고 이미지   출처: 미해군

해군력은 진정한 국제적인 무력 수단입니다. 지구의 3/4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지상군이 기동 할 수 없는 지역을 이동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상군이 이동할 수 없는 지역으로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이동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핵심적인 수로를 지키거나 해안이나 인구 밀집지 근처까지 상당한 병력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군력은 타국의 주권 영억을 침범하지 안거나 갈등이 없이 수천 해리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해군력은 국가에게 상당한 외교적인 역량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군사력을 특정한 지역에 배치하여 동맹이나 협력국가를 지원하고 안전을 보장하며, 적대적 세력의 도발행위를 막거나 위협할 수 있습니다. 

해군력을 강압적으로 사용하는 활동을 포함 외고라고 하며 근대 제국주의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중요한 국가적 역량으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단순히 위협뿐만 아니라 타국의 방문을 통한 친선외교나 국제적인 재난의 발생 시 구호나 인도적 지원물자의 제공 등에 있어서도 해군의 발휘하는 역량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사실 해군력이란 국가의 성장에 따라 그 성쇠가 좌우되며 특히 해군력은 선진국형 전력입니다. 

역사적으로 해상로를 장악한 세력이 세계의 무역과 통상을 좌우해 왔으며,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지금의 믹구에 이르기까지 무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국가들은 응당 그에 걸맞은 해군력을 보유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목도리하고 있는 미중 패권 경쟁도 군사력의 분야에서는 해군력의 대결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1. 해적이 두려워서 헌납까지 했던 미국이었다. 

미 해군은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빈약한 연안해군에 불과했습니다. 미 식민지 주민들은 독립전쟁에 앞서 대륙 해군부터 창설하여 최소한의 전력을 갖춰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과 맞서 싸워야 했던 조지 워싱턴은 파리에 있던 벤자민 프랭클린을 통하여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 함대가 1781년 9월 5일 체서피크 해전에서 영국군을 격파함으로써 역 국군의 추가적 증원을 막을 수 있었고, 결국 영국 육군은 1781년 10월 19일 미 독립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돌립이 이루어지자마자 대륙 해군을 해체하고 보유했던 선박들을 팔아 버렸습니다. 

제헌의회가 더 이상 해군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라나 위협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의원들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바르바리 해적들에 의해 미국의 상선들이 약탈당하면서 무역에 위협이 가해졌던 것입니다. 

의회는 1784년 곧바로 호위함 6척의 구매를 승인했고, 1798년에는 해군성의 설립을 인가하게 됩니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15세기말부터 19세기초까지 3백년간 북아프리카 일대를 거점으로 선박을 약탈하고 노예를 잡는 등 악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출처: Heritage History>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한심스러웠던 것인가 하면 미국의 상선들은 바르바리 해적들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고 합니다. 독립 이전 역국 상선의 깃발을 달았을 때는 해적들이 감히 건드리지 못했지만 독립 이후 더 이상 보호해줄 강력한 해군이 없었던 미국 상선들은 가장 인기 높은 나포의 대상이었고 외교관 자격으로 파리에 있던 토마스 제퍼슨은 나포된 선박과 선원들을 석방하기 위해 여러 국가들과 접촉했는데 스페인 정부가 협상을 도와주면서 제시한 해결책은 남달랐다고 합니다. 

 

나포를 막으려면 조공을 제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제퍼슨은 모로코와 알제리의 조약을 제안했지만, 이도 지켜지지 않거나 혹은 엄청난 비용의 요구가 뒤따랐습니다. 

특히 알제리에 10년이나 억류되었던 미국 선원 115명의 석방에는 무려 1백만 불이 소요되었는데, 이는 1795년 당시 미정부 예산의 1/6의 해당하는 말도 엄청난 금액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건들이야 말로 미국이 해군력을 다시 추구하게 된 강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해군력이 생겨났지만, 양성에는 시간이 필요했던 이웃에도 미국의 상선의 안전통행과 인질 석방을 위해 매년 1백만 불을 계속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 기눚으로 미정부 지출의 10%에 해당하는 기준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2. 전쟁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다. 

해양에서의 자신감은 독립 후 미국에서 필수적이었으며 유럽에 대한 수출이야말로 생명선과도 같았습니다. 결국 토마스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미국은 트리폴리 토후에 과도한 공남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트리폴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제퍼슨은 미 해군에게 대응을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트리폴리 제1차 바르바리 전쟁(1801~5)으로 미국은 해군력으로 북서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준동하는 해적들을 소탕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미 해군은 물론 미국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고 한편 제퍼슨은 1802년 해군 사관 학고를 창설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 영국이 나폴 레옹 전쟁에 몰두하던 사이 미국은 영국 식민지인 토론토 등을 점령하면서 1812년 미영 전쟁이 펼쳐졌습니다. 막강한 영국 해군은 미국의 주요 항구들을 봉쇄했고, 이를 바탕으로 위싱턴 DC 볼티모어, 메릴린드, 뉴올리언스, 루이지애나 들 주요 해안도시들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호위함들은 단편적인 전투를 통하여 작은 승리들을 축적했고, 특히 레이크 에리 전투에서 페리 제독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북서부 제해권을 회복했습니다. 

 

이후 미 해군은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조직을 점차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미 의회는 예산에 엄격한 제한을 둠에 따라 함선의 크기에는 제약이 있었지만, 척수는 어느 정도 늘어남에 따라 점차 조직도 증편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1812년 전쟁에서 급조된 체서피크 베이 소함대나 소형 포함을 모아서 활동하던 모기 함대가 있었지만 전후에 곧바로 사라졌습니다. 

 

다만 1813년 창설되었던 뉴올리언스 전대는 이후 카브리해적들을 상대하면서 상선들을 보호했습니다. 

1821년 태평양 전대가 창설되어 페루의 독립을 도왔고, 미국인 소유 설탕 농장이 번성하던 하와이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켜냈습니다. 

 

한편 해적의 기승은 심각하여 1815년~1822년 사이 무려 3000여 척의 미국 상선이 카리브해에서 해적에 나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822년 서인도 전대가 정식으로 창설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세미놀 전쟁으로 플로리다 원주민들을 정리했습니다. 

1838년 국내 전대가 창설되어 대서양의 상선 보호를 담당하는 한편, 동인도 전대가 창설되어 중국과의 교역에 대응했으며 동인도 전재는 중국의 아편전쟁에서 미국민과 재산을 지켜냈고 1852년에는 페리 제독의 원정으로 일본의 개항을 이끌어냈습니다. 

 

한편 미국의 태평양 내해를 담당하는 태평양 전대는 맥시고 전쟁(1846! 8)에서 캘리포니아를 획득하면서 임시정부의 역할까지 수행했습니다. 

 

3. 해군력이 국력에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미 해군은 창설 초기부터 절대로 강한 군대가 아니었으나 국제교역의 중요성과 해군력의 상관계를 몰랐던 정치인들의 눈에는 해군력이란 그저 예산의 낭미에 불과했었으나 유럽이란 시장에 목숨을 걸고 있던 신흥공업국가로서 정체성을 깨달은 미국은 부지불식간에 해군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유럽으로부터 신대륙의 자유로운 권리를 보장하고 자유롭게 세계 무역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특히 미국도 제국주의 경쟁에 뒤늦게 참여하면서 해군력을 급격히 증강시켰습니다. 특히 시어도어 루주 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는 자국의 최신 전함으로 구성도니 함대를 전 세계로 파견하면서 마음껏 자국의 해군력을 과시하게 됩니다. 

이를 통하여 미국은 제국주의 시대의 한 축을 차지하는 열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추후 1차 대전으로 영국의 영향력이 쇠퇴해가자 미국의 해군력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분명 해군력은 손쉽게 건설할 수 있는 구사력이 아니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세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국가라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힘이라는 점을 미 해군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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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솜 전투는 전투 첫날 58,000여 명의 달하는 영국군 사상자(그때까지 하루 사상자 기록으로 최고 기록이었으며 이중 3분의 1이 전사자였습니다.)로 인해 잘 알려진 전투입니다. 이전 투는 1916년 7월 1일 아라스와 알메르트 사이 솜 강 북쪽 30km에 걸친 전선에서 시작해서 11월 18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전쟁 2년차인 1915년, 배수가 안 되는 참호 속 영국군 병사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이후 사진 속 병사들은 모두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1. 솜 전투배경 

본디 솜 전투는 1915년 말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합동작전으로 계획했었습니다. 이작전은 프랑스군 최고 사령관 조세프 조르프가 입안했습니다. 영토 탈환보다 독일 예비 병력을 소모하게 해서 독일군 전체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소모전이 목적이었으나 이 계획은 1915년 12월 19일에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더글러스 헤이그가 동의하였습니다. 그는 영국 정부에 1016년 이 대규모 공세에 관한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이전 투를 위해 영국군은 공격 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그는 영국 정부에 1916년이 대규모 공세에 관한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이전 투를 위해 영국군은 공격 부대를 편성하였고, 프랑스군과 더불어 우세한 병력과 장비를 집중해 공격에 나서려고 했으나 독일 베르됭 전투로 말미암아 많은 프랑스군이 이 지역으로 파견되어 다른 성격의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결국 작전은 변경되고 프랑스 요구로 8월 1일 계획했던 작전이 7월 1일로 당기게 됩니다. 이는 베르됭에 대한 독일의 압박을 줄이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헤이그는 조프르로부터 이작전의 모든 권한을 위입받습니다. 

헤이그는 꼼꼼하게 작전을 준비하고, 선봉부대 지휘관인 롤라 손 장군과 함께 세부 작전을 수립합니다.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우)와 환담 중인 조프르 프랑스군 총사령관. 전쟁 초반에 독일의 공세를 극적으로 꺾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프랑스군의 희생이 커지면서 1916년 12월 해임되었다.

2. 솜 전투 경과 내용 알아보기. 

6월 26일 독일군 진지에 대한 5일 동안의 영국군의 대규모 포격으로 작전이 시작됩니다. 이는 독일이 베르됭 공격에서 생각한 것과 마차가지로 포격으로 독일군 병력을 괴멸시킨 뒤 보병을 무인지대를 거쳐 적의 참호로 돌격시키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특히 주안점은 기관총과 철조망의 제거였습니다. 이포 격에는 영국군의 1500문의 대포가 동원되었고 거의 비슷한 숫자의 프랑스군 대포도 합세하였습니다. 

 

대규모 포격 뒤에 보병의 돌격이 시작되었고 포병의 지원사격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보병이 첫 번째 통신망과 관측으로 정확하게 포격을 계속하였으며 즉 전방의 전선 상황에 따라 계속 포격이 대상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작전 지역 서쪽은 헨리 로리 손의 이러한 대규모 포격 진격전의 결과로 중앙부의 헤이그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들은 어느 정도 전진한 뒤 그곳의 진지를 강화했습니다. 로라손의 부대는 이작전을 위해 많은 보급품과 전투 물자를 투입합니다. 그러는 동안 영국 제4군의 나머지 부대가 있는 북쪽에서는 제3군의 1개 군단이 합류한 뒤 기병 돌격전과 함께 독일 전선 돌파를 위해 돌격하게 됩니다. 

 

또한 헤이그의 후위에 있던 7 왕립 경기병대가 독일군의 라인을 분리시키기 위해 돌격하고 같은 시간 남쪽의 프랑스 제6군의 1개 군단이 작전계획대로 전지를 시작합니다. 

27개 사단이 이 전투에 동원되었고 그중 80%가 영국군이었습니다. 연합국은 750,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그에 비해 독일군은 제2군 예하의 16개 사단이 전부였습니다. 이는 명확히 연합군에게 우세한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연합국의 대규모 포격은 독일군의 잘 짜인 철조망과 견고하게 지어진 벙커들을 파괴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연합국은 많은 수의 포탄을 낭비한 결과만을 초래합니다.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포탄에 불발탄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뇌관의 문제도 있었지만, 지상에 떨어진 포탄이 충격을 뇌관이 작동하여 터기기에는 너무 물렁해서 그대로 땅속으로 파고 들어간 채 터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지금 까지도 서부전선의 농부들은 벙커나 방공호에 숨어있었고 연합국은 엄청난 포격으로 독일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7월 1일 아침 7시 30분 대규모 17개의 지하 부설 지뢰 폭파와 함께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는데 사실 최초의 지뢰 폭파는 10분 전인 7시 20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지뢰 폭파를 통한 공격 방식은 오늘날에도 보입니다. 

 

첫 번째 대규모 돌격이 감행되었고 사실 이는 독일군들에게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독일군들은 지난 8일간의 포격으로 이미 연합국의 대공세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라나 사전 대규모 포격의 실패로 인해 영국군은 첫 주 동안 아주 짧은 구간의 전진만을 성공시킵니다. 

무엇보다 내심 제거되었을 것으로 기대했던 철조망 지대와 기관총 진지들이 상당수가 여전히 포격 전처럼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솜전투관련 내용 동영상

시실보다 성고적인 돌격은 남부 라인의 끝자락에 위치한 프랑스군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스군은 돌격전 몇 시간 포격을 계속하였고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독일군을 혼란에 빠트린 것입니다. 또한 독일군들은 베르됭에서 엄청난 피해로 인해 프랑스군이 대규모 공격을 이 지역에서 감행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전투 초반 그들의 계획을 거의 모두 달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 국군은 독일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원래의 진지로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많은 수의 보병들이 느린 속도로 독일군의 방어선을 향해 전진하였습니다. 이는 독일 기관총 사수들에게 좋은 표적이 될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영국군이 무인 진대에서 전사했습니다. 

 

첫날의 58,000명에 달하는 영국군 희생에도 불구하고 헤이그는 다음날 다시 진격을 명령합니다. 

이는 성공하긴 하지만 많은 피해와 함께 결국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진 못합니다. 아무튼 7월 11일 영국군은 독일의 첫 번째 방어 진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날 독일군은 베르됭 전투에서 15개 사단을 이 지역으로 보내 방어를 강화합니다. 

 

7월 19일 지역의 독일군은 재편되고 방어를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헤이그는 이 공세를 여름을 지나 11월까지 계속하게 됩니다. 비록 독일군의 포지오 장군을 사로잡는 등의 몇 번의 괄목한 만한 성과도 있었지만 전선은 다시 고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9월 초순 프랑스 제10군이 이 공세에 합류하고 산발적인 공세를 계속합니다. 특히 후반에는 전차가 전선에 등장해 영국군의 15개 사단에서 이탱크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 첫 번째 탱크의 등장은 처음에 50대로 시작하였으나 기관총 중대에 배속되어 3,4소대로 편성되었습니다. 그리고 9월 솜에 도착하는데 기계적 결함과 고장으로 인해 탱크의 순사는 24대로 줄어있었습니다. 

솜전투당시 영국군의 전차위에 서있는 독일군의 모습

 

이 탱크의 등장은 독일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활약도 했지만 이 초반의 탱크들은 많은 결함과 고장으로 그리 신뢰받지는 못하였습니다. 

 

9월 15일 처음으로 탱크가 전선에 투입되었고 이날의 전투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로왈슨의 부대는 프랑스의 제6군이 영국 주력의 우익으로 터 독일군의 공세를 막으며 이를 격파하는 동안 전 참호를 돌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동안 캐나다군은 그들의 7개대의 전차와 함께 Courcelette를 점령하고 제15 스코틀랜드 사단은 Martinquich를 점령합니다. 

9월 25일~27일 사이 해이그는 새로운 공세를 시작합니다. 

그 후 영국군은 여러 번의 공격을 감행하는데 그 성과는 그리크지 못했습니다. 프랑스군도 이 공세에 가담합니다. 프랑스의 조프르 장군은 헤이그에게 공세를 계속할 것을 주문하는데 이 당시 프랑스군은 베르됭에서 공격을 계속해 잃은 땅을 계속해서 되찾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는 공세의 중단으로 솜의 독일군이 베르됭으로 다시 배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1월 13일 영국군은 마지 말 공세를 취해 독일군의 Beaumont Hamel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 솜 전투는 11월 18일 폭설로 인해 중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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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인 1950년 11월 말~ 12월 초까지 함경남도 장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진호전투 당시 미 해병대 장병이미지

1950명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함경도 장진 군 지역에서 미국 제1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중국군 제9병단에 속한 3개 군단 병력과 벌인 전투입니다. 영어로 장진의 일본어 독음인 초신을 가져와 초신 호전 투나 초신호 작전이라고 합니다. 김일성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까지 진격해  갔던 유엔군이 12만 명에 이르는 중국군에 포위되어 격전을 벌이다가 흥남으로 철수한 사건입니다. 

 

1. 장진호 전투 배경과 원인 알아보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된 뒤 패퇴를 거듭하던 한국군과 미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면적인 반격으로 전환했습니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으며,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김일성 정권은 산악지대인 평안북도 강계로 달하나 그곳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중국은 10월 25일 중국 인민지원군을 창설해 북한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했으며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뒤 동부전선을 맡은 미 제10군단의 군단장 알모드 중장은 부대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시켰습니다. 국군 제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진격해서 10월 10일 함경남도 원산을 점령한 뒤 두만강 유역까지 계속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10월 29일 이원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부전호와 압록강 유역의 혜산진 방면으로 진격했고, 10월 27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은 개마고원의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11월에 들어서면서 중국군과의 전투가 본격화되면서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했던 유엔군은 청천강 유역으로 물러났습니다. 동부전선에서도 11월 8일 무렵부터는 중국군이 전투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몬드 중장은 휘하의 부대들에게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더욱 신속히 전격 할 것으로 명령했고, 11월 21일 미제 7사단 제17연대는 압록강 유역의 혜산진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장진호전투 관련 동영상

2. 장진호 전투 발발과 전개 과정 알아보기. 

미 제1해병사단은 함흥에서 장진 군을 거쳐 강계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진격했는데, 11월 11일에는 황초령(1,206m)을 지나 장진면 고토리에 이르렀고, 11월 15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 우리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11월 19일에는 장진호 서북쪽에 있는 서한면 유담리까지 나아갔습니다. 

 

낭림산맥 동쪽에 있는 장진 군은 희색복(2,185m) 아득령(1,479m), 유린산(1,925m) 문암산(1,852m) 등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해발고도 1천 미터 이상의 고원지대입니다. 이 지역은 10월이 되면 벌써 눈이 내리고 겨울 날씨가 시작되는데, 겨울철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져 중강진과 할게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꼽힙니다. 미 제1해병사단의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겨울철 추위가 닥쳐오자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하갈 우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곳에 활주로를 만드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7 연대와 제5연대를 유담리 일대로 전진 배치하고, 제1연대는 하갈우리와 고토리를 잇는 후방의 보급로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장진호전투 관련 지도

장진호 우측의 동하면 신흥리와 후동리 일대에는 아몬드 중장의 명력에 따라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병력을 중심으로 편성된 페이스 특수 임부 대가  미 제1해병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었습니다. 

 

그러자 중국군은 제9병단에 속한 3개 군단 병력(12만 명)을 장진호 일대로 집중시켰습니다. 내륙으로 깊숙이 진출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을 제압하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진출한 국군과 미군의 퇴로를 차단해서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1월 11일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건너온 중국군은 산지를 따라 은밀히 이동해 11월 20일 무렵에는 유담리 인근에 집결했습니다. 

 

미 제1해병사단은 낭림산맥을 넘어가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2사단, 한국군 제2군단 등과 청천강 상류 지역에서 연합작전을 벌이기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1월 24일 덕천, 영원 지역을 담당하던 한국군 제2군단이 중국군에 크게 패 하면서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중국군은 11월 27일 밤부터 인해전술로 장진호 일대의 미군을 에워싸고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11월 27일 밤부터 다음날까지 계속된 중국군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하갈우리, 유담리, 고토리를 있는 연결도로가 차단되면서 미군은 고립되었습니다. 특히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는 부대장인 매클레인 대령마저 전사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아몬드 군단장은 미 제1해병사단의 사단장인 스미스 소장이 장진호 일대에 배치된 유엔군 병력에 대해 통합 지휘권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유담리에 있는 병력의 일부를 하갈 우리로 이동시켜 페이스 특수임무대를 지원하고 하갈우리와 고토리 있는 도로를 회복하라는 명령를 내렸습니다. 그란 유담리에 있는 해병 제5연대와 제7연대도 중국군에 포위되어 병력을 이동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스미스 소장은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에게 하갈 우리로 집 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1월 29일 영국 해병대의 41 특공대 소속인 드라이스데일 중령이 지휘하는 드리스데일 특수임무부대가 29대의 전차와 141대의 차량을 이끌고 고토리에서 하갈 우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일부 병력만 하갈 우리에 도달하였소 있었습니다. 

 

이처럼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11월 30일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담리에 있던 제7연대와 제5연대는 12월 1일부터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미공군이 전폭기를 동원해서 네이팜탄을 퍼부으며 이들의 철수를 지원했으나,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제7연대와 제5연대는 12월 4일이 되어서야 하갈 우리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장진호 우측에 주둔하던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도 12월 1일 하갈 우리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의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공군의 오폭으로 네이팜탄이 행렬 한가운데서 터지면서 철수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천여 명이 전사했고, 3천여 명의 부대원 가운데 385명만이 부상을 입지 않은 상태로 하갈 우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3. 장진호 전투 결과와 영향 알아보기. 

하갈 우리에 집 격한 미 제1해병사단은 완성된 활 수로를 이용해 12월 2일부터 4천여 명에 이르는 부상자들을 일본으로 후송했습니다. 부상자들 가운데 3분의 1 가량은 동상 환자였습니다. 그리고 12월 6일 수 솔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은 뒤 1쳔여대의 하챨을 이용해 12월 7일 고토리로 철수했으며, 아몬드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흥남으로 이동했습니다. 

 

12월 11일 흥남에 도착한 미 제1해병사단은 흥남철수작전에 따라 제10군단 휘하의 다른 부대들과 함께 배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습니다. 

 

11월 27일부터 시작된 장진호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유엔군은 1만 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망자: 1,029명, 실종자: 4,894명, 부상자 4,582명, 동상 등 비전투 요인에 의한 사상자 7,338명) 이러한 피해는 군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어서 당시 언론들에서는 장진호 전투를 진주만 피습 이후에 미군이 겪은 최악의 패전으로 평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1996년부터 유해발굴단을 북한에 파견해서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을 벌였습니다. 

 

한편 중국군도 장진호 전투에서 4만 8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숫자는 19,202명에 이르렀고, 동상 등의 비전투 요인으로 발생한 사상자 숫자도 28,954명이나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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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지 전투 2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최후의 대반격에 대해 연합군이 붙인 이름입니다. 

벌지(Bulge)는 영어로 '주머니'라는 뜻입니다. 독일군의 진결에 의해 전선의 일부가 돌출 도니 것을 가리켜 미군이 붙여 준 이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독일군은 작전명[라인을 수호하라]의 아래에서 대공세를 펼쳤습니다. 대반격은 서부 전역 사령부이었던 게프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의해 입안된 것으로 룬트슈테트 공세 혹은 지명에서 유래 도니 아르덴 공세로 불리기도 합니다. 

벌지전투관련 시자전투를 시연한 그래팩이미지&amp;amp;nbsp;

1. 벌지 전투 배경 

1944년 9월 4일 영국군은 벨기에 안트베르펜을 해방하였고 보급거점으로써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독일군을 몰아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사용 가능을 위한 목적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보급선이 길어져 연합군의 진격은 전지 되고 전선은 교착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9월 17익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 계획한 마켓 가든 작전이 개시되어 라인강 확보를 위한 전투가 시도되었으나, 이 작전은 너무나도 무모하게 진행되어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전선에서도 소련에 의한 바그라티온 작적이 폴란드 동부에서 끝나가던 시기였지만 소련군은 1944년 12월 말까지 폴란 든 서부로 진격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히틀러는 건곤 인척이라 할 수 있는 반격작전을 구상했습니다. 1940년 프랑스에 대한 전격전 승리를 재현하는 것으로 벨기에 아르덴 지방의 삼림지대를 기갑부대로 돌파하여 단번에 안트베르펜까지 진격하여 이곳을 탈환하고, 서부전선 북쪽의 연합군을 포위, 괴멸시킨다는 작전 안이었습니다. 

 

군 수뇌부의 룬트슈테트와 발터 모델은 이 계획이 무모하다고 반대했으나 묵살되고 히틀러는 이 작전의 성공으로 서부전선이 정체되고 만약 연합군과 강화를 실현한다면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또 한 가지 작전 안으로써 북부의 광대한 전선에 분산된 코트니 호지스 장군 휘하의 미 1군 을 협공하여 괴멸시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적군의 포위, 분단이 쉽고, 아군의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으나 연합군 전력의 일부를 줄이는 것밖에는 성과가 없고, 전쟁의 귀추를 변화시킬 작전 안이 아니었기에 기각되었습니다. 

 

작전 시기는 아르덴 숲이 안개에 휩싸이는 겨울로 잡았습니다. 이미 제공권은 연합군으로 옮겨졌기에 항공기에 의한 격렬한 폭격으로부터 부대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작전에 참가하는 전력으로 정예 약 20개 사단을 준비하고 신예의 티거 2 전차도 포함시켰으나, 내실은 동부전선에서의 출혈의 간접적인 영향 때문에 거이 모든 부대가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훈련도가 낮고 새로 편성된 국민 척탄병 사끼지 투입시킬 정도였다고 합니다. 

군수품과 연료의 부족도 심각할 정도로 증가하여 만족할 만한 양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작전은 1944년에 전쟁 중 최대치에 도달한 독일의 병기 생산량의 대부분이 투입된 정예 부대로 작전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그러나 공격을 예정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작전 도중 연합군의 보급 거점을 탈취할 필요가 있는 등, 처음부터 위험을 안고 있던 작전이었습니다. 

한 가지라도 잘못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작전 전체에 파급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었습니다. 

연합군 상층부는 독일 집결의 정보나 공세작전의 조후를 보고 받았으나, 독일에게는 공세에 나설 여력은 남아있지 않다고 판단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르덴 지방은 깊은 삼림과 산악지대였기에 기갑부대가 쉽사리 통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지구의 방위에는 약체화 댄 부대를 배치할 정도였습니다. 

 

이 판단은 전후에 통렬한 비판이 내려졌습니다. 이미 독일군의 전차부대는 1940년에 같은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 사이를 뚫고 프랑스에 쳐들어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2. 벌지 전투 계획 

9월 중순에 아르덴 숲을 통과하여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주력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뮤즈강까지 도달한 뒤 북서쪽의 엔트워프와 브뤼셀로 진격할 예정이었습니다. 가장 곤란한 것은 작전 개시로부터 신속한 이동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뮤즈강을 넘는 다면 극적으로 개선되어 해안까지 도달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작전은 연합군 첩보 본부에 라인란트의 방어작전과 오인시키기 위해 라인을 수호하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독일의 노래에서 따온 명칭이기도 합니다. 

 

2-1. 4개군의 작전 투입 결정하다. 

  • 요제프 디트리히 가 이끄는 SS 6 기갑 군은 1944년 10월 26일에 새롭게 편성되었습니다. 이군에는 무장 친위대의 정예 사단 1 SS기 갑사단 LSAH와 12 SS기갑사단 히틀러 유젠트가 참가했습니다. 그들은 주요 공격 부대로써 북부 공격을 감행 예정이고, 목표는 엔트 위프의 확보였습니다. 
  • 하소 폰 만토이펠이 이끄는 5 기갑 군은 중아 공격을 담당해 브뤼셀 확보가 목표였습니다. 
  • 하소 폰 만토이펠이 이끄는 5 기갑 군은 중앙 공격을 담당해 브뤼셀 확보가 목표였습니다. 
  • 에리히 브란덴베르크가 이끄는 7군은 측면지원과 남부 공격을 담당하였습니다. 
  • 15군은 재편성되어 최북부 배치되었습니다. 임무는 이 지역의 미군 세력을 붙잡아 공격에 대한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벌지전투 독일군과 연합군에 대치상황 설명 이미지&amp;amp;nbsp;

2-2. 공격의 성공에는 3가지 요점

  • 공격은 완전히 기습이어야 한다는 점 
  • 악천후여야 한다는 점, 연합군의 제공권을 무효화시키고 보급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 시기는 겨울 중에도 혹설기를 설정한다. 
  • 신속한 지격이어야 한다는 점- 모델 원수는 뮤즈 강까지 4일 만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공격에 앞서 독일군의 부대 이동을 연합군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해방에서는 레지스탕스로부터 유익한 정보를 얻었으나, 연합군이 독일 국경에 달콤한 당시로써 그런 정보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애니그마에 의 암호화된 무선통신으로 지령을 내리는 독일군을 감청해 울트라 암호 해독기로 해독하였으나, 독일 국내에서는 이러한 지령이 전화와 텔레프린터를 사용하여 송수신되었습니다. 

 

또한 다가올 공세를 생각해 무선 교신의 특별차단 지령으로 교신이 감소하였습니다. 

(독일 국내에 있던 전화 난 전보 등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독일 국방군 내에서 숙청으로 독일군의 통신보안은 재 강화되어 정보 누출의 감소가 현저해졌습니다. 

또한 가을의 짙은 안개와 날씨는 연합군의 정찰기가 지형을 정찰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첨보부로부터 이전의 보고 - 독일군은 말기 상황에 다다라 공세에 나설 여력이 없습니다. 

근거로 아르덴의 정세에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아르덴 방면에는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부대를 재건 중이었습니다. 또한 같은 지역을 지키던 99 보병사단과 106 보병사단은 미국 본토에서 도착한 신참 보병사단이었기에 대부분 전투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중에 99사단은 선전했으나, SS 6 기갑 군 등의 맹공을 받았던 106사단은 순식간에 궤멸당해 다수의 병사가 독일군에게 항복했습니다. 

 

 

3. 독일군의 공격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벨기에 아르덴 숲을 통과해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끊이지 않던 악천후로 인해 연합군은 항공기를 뛰울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돌연 기습으로 허를 찔린 미들턴 장군의 미 8군은 크레르보, 히지겐 등 일부 거점에서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여단, 연대, 대대 등 고급 부대장의 전사 및 부상이 속출하여 괴멸당하거나, 포로가 되거나, 포의 되거나 하는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움과 혼란을 틈타 벌어진 독일군의 진격은 최초 수일 동안만 계속되었을 뿐이었습니다. 12월 하순에 이르고 독일군의 주력 부대는 여러 지역에서 급히 달려온 미군에 의한 강력한 저항을 만나 전진은 매우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또 각 전선의 진격 속도도 큰 편타가 생겨, 속공에 성공한 부대가 포위당해 집중적인 반격을 당하는 사태가 속출했습니다. 

히틀러는 처음엔 연함군이 이사태에 대응하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라는 것을 인시하는 데 수일 아이젠하워가 각국 수상과 상담하여 부대의 배치전환을 명령하는 데 수일, 그리고 배치전환 명령을 받을 부대가 현지에 도달하는 데 수일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이 정도 시간이 걸린다면 작전은 틀림없이 성골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합군의 반응을 히틀러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빨랐습니다. 또한 아이젠 하워의 결단도 빨랐습니다. 그는 각국 수뇌 등과 상담하지 않고 부대의 배치전환을 단행하고 당시 프랑스에서 제건 중이던 101 공수사단을 바스토뉴로 82 공수사단을 생비트로 급히 보냈습니다. 히틀러의 생각은 첫날부터 엇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4. 사퇴서 작전 알아보기 

연합국 점령지역 후방으로 골수 부대를 강하시켜, 본 작전의 지원 및 연합군의 교란을 노린 사퇴서 작전이 계획되었습니다. 사퇴서 작전에는 작적 개시가 12월 16일 이른 오전으로 예정되었으나 악천후와 연료 부족 때문에 결국 하루가 늦은 12월 17일 새벽 03:00으로 강하 시간이 설정되었습니다. 강하 부대의 목표지 전은 말메디에서 11km 북쪽의 [바라크 미하일] 십자로였습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데아 하이트 대령과 부하들은 그 지점을 확보하고 제12 SS기갑사단 히틀러 유켄트가 도착할 때까지 24시간 동안 그 지점에서 연합군의 증원과 보금을 방해할 예정이었습니다. 

제745전차대대 M4셔면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아헨에서 전투중인 미 제1보병사단 제26보병연대 시지지 전투 이미지&nbsp;

 

12월 17일 오전 0시 직후, 112대의 JU 52수 솔기에 약 1,300명의 팔슈름예거를 탐승시키고, 짙은 구름과 강한 눈보라를 헤치고 이륙했습니다. 그 결과 다수의 수송기가 예정된 코스를 벗어났고, 또 강하 지점에 접근한 수송기도 강풍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강하 예정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 낙하했습니다. 

 

17일 정오쯤 약 300명이 목적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전력이 충분하지 못해 연합군에 대한 저항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하이트 대령은 십자로를 확보한다는 계획을 파기하고 부근에서 게릴라 전술을 펼칠 것을 부하에게 명력 했습니다. 낙하 범위가 광범위하고 분산되었기 때문에 각지에서 보고가 잇달아 연합군사령부는 대규모 골수 작전이 실시된 것으로 오인하였습니다. 

 

많은 혼란이 발생한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인원 배치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전선에 대한 증원이 뒤늦은 결과 독일군의 공세를 용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5. 그라이프 작전

오토스 코르 체니 친위대 중령이 이그는 제150 기갑여단이 미군의 군복을 착용하고 영어를 구사하는 병사들이 포획한 연합군의 차량과 연합군의 것으로 위장항 차량을 사용하여 저 후방지역에 침입했고 실제 완벽하게 영어를 이야기할 수 있고, 그곳에서 태어나 후방지역에 침투하는 것이 가능한 이는 20여 명 정도였지만 이런 부대의 존재는 그 행동 이상의 혼란을 발생시켰다고 합니다. 

 

1943년 9월 친의대장교이자 전쟁영웅 오토 스토르체니와 함께찍은 아돌프히틀러 사진 이미지&nbsp;

본대는 뮤즈강에 놓여 있는 다리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였고 미군 병사의 군복을 착용한 독일 병사의 존재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조지 패튼 장군도 이 소문을 듣고 놀라 12월 17일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그라 우츠들이 여러 곳에서 출몰하여 전화선 절단하건 나 도로표식을 바꿔 아군의 방어 거점에 도착을 할 수 없게 혼란을 주고 있다고 보고 하였다고 합니다. 

 

독일 병사는 미군의 군복을 착용하다가 체포되면 대부분 그 장소에서 스파이로 간주하여 총살시켰으며 제네바 조약 아래에서 군복을 착용에 관련된 항목과 전시포로에 대한 취급이 모순이 되었지만 총살은 이 시점에서 일반적인 행위였습니다. 스코프 체니와 그 부하들은 이러한 처벌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미군 군복 안에 독일군 군복을 착용하였습니다. 

 

후방지역에서의 방해공작 중 몇 명의 병사가 연합군에 의해 채포 되었으나, 이미 각오를 다진 그들은 최후까지 거짓 자백을 하여 연합군에게 혼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임무에 관련해서 취조받을 때 파리에 있던 아이젠 하위의 유과와 살해가 목적이라고 답을 하였고 아이젠 하위의 호위는 대폭으로 증가하고 그는 사령부에서 나올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반면 그들은 정직하게 부대의 지휘관은 스코프 체니입니다.라고 자백했다고 합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만 팔에 침입하여 아이젠하워가 있는 장소에 다다르는 것이 무리인 작전이었지만 지금까지 믿지 못할 작전을 성공시킨 스코르체니가 지휘하고 있었기에 연합군은 이 자 백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그 결과 후방지역의 여러 곳에 검문소가 설치되어 병력과 장비의 이동이 정체되었습니다. 

야전헌병은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질문(미키마우스의 여자 친구 이름, 유명한 야구시합의 스코어, 일리노이주의 주도 등)을 모든 병사들에게 엄격하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헌병의 질문을 받은 오말 브랜들리 장군은 일리노이주의 주도를 수프 리핑 드라고 정확하게 답했으나 헌병은 주도를 시카고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 억류되어다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리노 이주 최대의 도시는 확실히 시카고였기에 결국 많은 미국인의 오해한 것입니다. )

이러한 일련의 사건의 여파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란 별명이 붙은 스코르체니 자신은 이 작전이 실패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첫날 달성하려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고, 부대의 존재가 밝혀진 이상 작전을 고집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코르체니의 작전을 징지 시키고 , 제150 기갑사단의 병사들을 통상의 군복으로 바꿔 입히고, 보통의 기갑여단으로서 전투에 투입시켰습니다. 

 

6. 말메디 학살사건

북부에서 SS 6 기갑 군의 주력인 4,800명의 병사와 600대의 차량으로 이루어진, 요아힘 파이 커 SS중력이 이끄는 파이퍼 전투단이 벨기에 서부로 진출했습니다. 12월 17일 07:00시에 그들은 뷰 리켄의 미군의 연료 보급기지를 확보하고, 서쪽으로 진격에 앞서 연료를 제보 급한 데 성공했습니다. 

 

12:30분 말메디와 리 누빌 사이의 고지, 보 호즈 마을 근처에서 285 포병 관득 대대와 조우했습니다. 소규모 전투 후 미군 부대는 항복하고 포로 약 150명이 무장해제되어 심자로 부근 들판에 8열 횡대로 세워졌습니다. 이어 기관총 사격으로 최소 84명이 사살되었습니다. 

 

말메디 학살사건게 윈쪽 영화 제연 이미지와 오른쪽 실제 학삭당시 사진 이미지&nbsp;

훗날 재판에서 검찰 측 기록에 의하면 기갑부대를 지휘하던 장고의 명령에 의해 곧 1명의 전차병이 포로를 피스톨로 소았고, 계속해서 다른 병사들이 기관총으로 총격을 가했다고 전해지며 공식 견해에 대해선 여러 가지 모순과 의문이 남았습니다.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실제 도망을 준비한 포로에 대해 위협 발포에 의해 패닉이 발생하고 뒤이어 도망치려는 포로들을 쏜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습니다. 최후까지 아직 숨이 붙어있던 자들을 돌면서 죽인 자들도 있다고 하며 그들은 이전에 더렌의 마을에서 미군의 폭격 앞에 희생된 벨기에 민간인의 무참한 시체를 처리하고 또 전투 경험이 낮은 자들도 많아 미군 병사에 대한 증오에 의해 사적인 보복 가능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후 파이퍼 SS중령은 체포되어 말메디 사건의 책임을 묻는 재판이 열려 파이퍼를 포함한 친위대 대원 43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저 반적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56년까지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전투는 계속되었고, 1 SS기 갑사단 LSSAH 사단은 밤까지 미 99 보병사단을 공격해 이들을 격파했습니다. 파이퍼 전투단은 스다부로에 도착했습니다. 

 

말메디학살관련 동영상 자료

7. 파이퍼 전투단의 공격

파이퍼는 12월 18일 스타 벨롯에 들어갔으나, 미군 방어부대의 격력 한 저항을 받았습니다. 미군의 배제는 어려웠기에 그는 소부대를 마을에 남기고 트로와 퐁의 다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다리는 퇴각하는 연합군에 의해 파괴된 뒤였습니다. 

 

파이퍼는 라그 레즈에서 스토몽으로 향했습니다. 파이퍼의 접근을 알아챈 미군 공병부대는 다리를 폭파하고, 미군은 참호를 파고 전투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파이퍼 전투단은 독일군 주력과 단절되고, 미군이 스타부로를 탈환하자 보급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스토몽의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파이퍼는 라 글제로 후퇴해 방어 진지에서 구원 부대를 기대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구원 부대는 연함군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했고 12월 23일 파이퍼는 퇴각을 결정했습니다. 전투단은 그들의 귀중한 차량 및 전차 등의 장비를 버리고 도보로 탈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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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생비트 

생비트의 중심부는 중요한 도로의 교차지점 에어서 폰 만토 아펠과 디트리히  부대의 주요 목표였습니다. 바 어부 대는 미군 제7 기갑사단에 제106 보병사단과 제9 기갑사단, 제28 보병사단의 일부가 함 쳐져 있었습니다. 

브르스 C 클라크 장군 지휘하의 이 부대는 독일군의 공격에 저항하여 진격을 최대한 늦추었습니다. 독이 군은 12월 21일이 되어서 겨우 생 비트를 확보했으나 미군의 저항은 계속되었기에 참호로 퇴각했습니다. 

 

12월 23일까지 독일군은 그들의 측면을 분쇄하고, 미군은 센 강의 서쪽으로 퇴각했습니다. 독일 측의 계획은 12월 17일 18:00까지 생 비트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계획의 지연으로 작전 진행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9. 바스토뉴

12월 19일 연합군 상급 지휘관들은 베르됭 요새의 지하기지에서 회의를 가졌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패튼에게 제3군을 북부에 대한 반격에 나서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패튼은 48시간 안에 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 실제 패튼은 회의 출석하기 전 부하에게 북부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이젠하워가 물었을 때 이미 그 일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2월 21일 코코트 장군의 제26국민 척탄병 사단을 주력으로 한 독일군은 연합국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제일 먼저 도착하여 전주 방위 진 지를 구축하여, 미 육군 제101 공정사단 및 제10 기갑사단의 일부가 수비하던 바스토뉴를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수비대의 책 입자였던 제101 공정 사단장 대리 앤서니 맥컬리프 준장은 독일군의 항복 권고에 대해 NUTS라고 답하고 부관이 그 말을 그대로 편지에 적어서 공식 회답으로 독일군에게 보낸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사단장 멕스웰 D 테일러 장군은 회의 때문에 부대를 떠났었고, 사단장 대리인 맥컬리프 준장이 지휘를 맡고 있었습니다. )

 

독일군은 면 군데 개별 지점에 대해 순차적으로 공격을 집중했습니다. 이것은 방어 측에게 공격이 격퇴되면 끊이지 않고 증원을 보내 이를 강화했으나, 한편으론 독일군의 병력수의 이점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조기 바스토뉴 공략은 실패했고, 귀중한 며칠을 낭비하여 바스토뉴를 포위한 채 서쪽으로 진격해야만 했습니다. 남은 부대는 그 후 몇 차례 바스토뉴에 대한 공격에 나섰으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10.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다. 

12월 23일 날씨가 회복되면서 연합군은 공중폭격과 공중 보급을 개시했습니다. 항곡 폭격은 독일군의 보급기지에 대해 괴멸적인 타격을 주었고 P-47 썬더볼트는 도로상의 독일군을 공격했습니다. 거기에 바스토뉴에 대해 공중보급으로 의약품, 식료, 모포, 탄약이 보급되었습니다.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외과의팀이 글라이더로 현지에 들어가 부상자 구원에 나섰습니다. 

12월 24일 보급선의 한계를 넘어선 독일군의 진격은 뮤즈강 근처에서 속력을 잃었습니다. 연료와 탄약의 고갈이 치명적이었습니다. 

 

또한 작전이 개시된 뒤 독일군은 무선 봉쇄를 해제했기 때문에 연합군의 정보부는 손쉽게 독일군의 위치를 알아내어 적적한 반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파이퍼 전투단의 소모와는 별도로 경미한 상황이었습니다. 24일 밤 하소 폰 만토 이펠은 작전의 중지와 철수를 진언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패튼의 제3군은 바스토뉴를 구원하기 위해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12월 26일 16:50분 제4기갑사단의 일부가 바스토뉴에 도달하여 포위를 깨뜨렸습니다. 

1월 13일 독일군은 바스토뉴에서 퇴각했습니다. 1월 23일에는 독일군 사령부에 의해 작전중지가 결정되었습니다. 전투는 공식적으로 1945년 1월 27일 날 종료되었습니다. 

 

11. 전투 후 영향

작전에 의해 연합군은 다수의 전력을 잃어 진공 계획을 수개월간 늦추게 되었으나, 연합군은 손실 도니 전력을 보충할 수 있었고 독일군은 결정적인 패퇴와 손실을 입어 전쟁 종결은 빨라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방어를 굳히지 않고 공세에 나섰던 독일군의 핵심 병력이 보급이 끊어져 궤멸당하였기에 진공에 의한 연합군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독일은 동부전선에 군을 돌릴 여력도 없어졌기에 소련의 진격 속도를 8일 빠르게 만드는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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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3~1856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연합군이 크림반도, 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국가들끼리 처음 벌인 전쟁으로 이 전쟁에서 패한 후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백의의 천사'폴 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야전병원에서 활동하여 간호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여성들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열었습니다. 

1854년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격돌하는 영국군과 러시아군.

크림전쟁 개요
전쟁주체 - 러시아vs영국, 오스만투르크, 사르디니아
전쟁 시기-1853~1856
전쟁터- 크림반도와 흑해, 백해, 발트해, 동유럽 등등
주요전투- 시노페 해전, 알마 전투, 발라클라바 전투, 세바스토폴 포위전

 

1. 하나 된 유럽 그 속의 불만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체제 하의 유럽은 한 동안 단결 속의 평화를 구가하는 듯했습니다. 1815년에 국제 평화, 세계 질서, 기독교 세계의 안보를 모토로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신성동맹을 결성했으며, 이후 영국, 교황령(참여 거부), 튀르크(비기독교 국가라 하여 참여를 권유하지 않음)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일단 이 동맹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또한 역시 1815년에 본래의 대 프랑스 동맹이던 4국 동맹(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도 부활했습니다. 

이후 신성동맹은 다분히 이념적인(가맹국의 행동에 대한 구속 조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래도 헤겔은 이를 유럽 통합 정신의 구현으로 찬양했습니다. )

 

4국 동맹 1818년에 프랑스를 추가하여 5국 동맹이 되었습니다. 실질적인 국제협의 기구가 되어 빈 체제 유지에 힘을 썼다고 합니다. 

1821년에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대항해 사르디니아에서 일어난 혁명에 러시아가 병력을 지원해준 일이 한 예였습니다. 

단결된 유럽은 비기독교 제국에 맞서 어깨를 나란히 싸우기도 했습니다. 

 

1821~1832년까지 벌어진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영국, 러시아, 프랑스가 오스만튀르크와 싸워 그리스 독립을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는 유럽 문명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기에, 이는 십자군 전쟁 이래 유럽이 거둔 의미심장한 쾌거라고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단경에는 큰 불안 요소가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바로 두강 대국,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이었습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 단일 패권 세력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대외전략에 따라 나폴레옹 타도에 앞장섰으나 이제는 러시아를 또 다늘 패권 세력 후보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신성동맹에 가입하지 않으면서 4국 동맹을 주도하고, 종전의 적인 프랑스도 그 동맹에 끌어들인 것은 확실히 러시아를 견제하는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도와 이탈리아 혁명 진암에 병력을 보내고, 남아메리카의 예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스페인을 지지하는 등의 행동도 러시아 입장에서는 구체제 유지 -복원이라는 빈 회의의 대의에 충실한 것뿐이라지만, 영국의 눈에는 야심 가득한 세력 팽창 시도로 보였습니다. 

 

당시 크게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언론도 러시아 공포증 확산에 한몫했습니다. 언론은 러시아의 야심을 경 계해 야한 드는 종말론적, 음모론적 보도로 꾸준히 독자를 자극했는데 표트르 1세의 유훈이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특집 보도가 그 최고봉이었습니다. 

 

수준 낮은 위조문서일 뿐이었던 이 유훈은 러시아는 장차 유럽을 정복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전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크림전쟁 관련 상황 지도   출처 :doopedia.co.kr

이런 영국에 러시아도 불만스럽기는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겉보기로는 러시아가 유럽의 지도자가 되면서 건국 이래 최대의 영광을 누리는 듯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국제 질서의 균형자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독일 전쟁만 해도 러시아로서는 유럽 문명의 고향을 되찾는다는 명분 외에 그리스 정교의 보하자로서 이교도들의 손에서 신도시들을 구한다는 유럽 문명의 고향을 되찾는다는 명분 외에 그리스 정교의 보호자로서 이교도들의 손에서 신도들을 구한다는 명분도 가졌지만, 독립된 그리스는 대체로 친영 국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말았습니다. 

 

2. 동방의 위기 과연 어떻게 

 

크림전쟁 관련 동영상

그러나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당시 유럽의 세력 균형에 가장 큰 변수가 되었던 것은 튀르크였습니다. 188세기 이래 계속 내리막이었던 오스만 튀르크는 이제 유럽과 아프리카에 뻗쳤던 세력권을 대부분 상실하고 튀르크의 본거지를 지킬 힘조차 의심받고 있었습니다. 유럽 각국은 저마다 튀르크에게서 영토와 이권을 빼앗으려 하면서도, 자친 제국 자체가 붕괴하여 동방이 대혼란에 빠지거나 다른 나라가 동방의 패권을 거머쥐는 일을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독립전쟁이 마무리되자마자, 시실상 독립 상태에 있던 이집트가 무하마드 알리가 시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1832년에 그리스 독립전쟁에 이집트 병력을 지원해준 대로 시리아를 내놔라고 튀르크 조정을 요구하고, 이것이 거부되자 전쟁에 들어갔습니다. 

 

코나 전투에서 이집트군이 튀르크 군을 대파하면서 독자적으로 시리아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달은 튀르크는 유럽 각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응한 나라는 러시아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1833년에 흑해 함대를 파견하여 튀르크를 돕고 나서자, 영국과 프랑스도 허겁지겁 함대를 파견했습니다. 튀르크를 돕자는 뜻이 아니라 러시아가 자친 튀르크를 지배하에 둘 지도 모르는 상황을 방지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외국의 중재로 이집트가 시리아에서 물러나기로 하고 튀르크의 위기가 해소되자, 러시아는 튀르크와 비밀리에 운키아르스켈레시 조약을 맺어 상호방위 동맹을 수립하면서 다른 외국 군함에게 튀르크의 항구를 8년간 폐쇄하기로 했습니다. 

이사실을 알게 된 영국과 프랑스는 강력히 반발했으며 우리는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러시아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3국 동맹에 합 이하고, 다시 오스트리아와 뮌헨 그레츠 협정을 맺어 중부 유럽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정책을 지지하는 데신 튀르크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을 지지받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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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도 이에 맞서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과 새로 4국 동맹을 맺었습니다 바야흐로 튀르크를 둘러싸고 유럽 주요 열강 사이의 분의 각 심상치 않아졌으며, 흑해에 파견된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의 함대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1839년에 이집트와 튀르크는 다시 시리아를 놓고 충돌하게 됩니다. 

당시 튀르크는 마흐무드 2세의 서구식 개혁으로 면모가 일신해 있었으나, 이번에도 이집트군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서구 열강은 이법에도 개입했는데, 다만 러시아가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 가운데 영국은 튀르크를 프랑스는 이집트를 지원함으로써 서로 보조가 어긋났습니다. 

 

1840년에 이집트가 시리아의 남부를 차지하되 나머지 점령지는 튀르크에 둘려주도록 하는 내용으로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합의안을 내놓자 이집트는 프랑스를 믿고 거부했으나, 영국이 곧바로 실력 행사에 들어가고 프랑스가 한걸음 물러섬으로써 결국 굴복했습니다. 

 

다시 프랑스와 다른 유럽 4개국이 협상 테이블에 않아 튀르크 문제를 논의한 결과, 1841년에 해협 조약을 체결하여 튀르크가 평상시에는 흑해로 진입하는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을 폐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즉 어떤 유럽 국가도 해군으로 튀르크를 공략하지 않도록 합의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한때 유럽이 영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두 진영으로 나누어 대전이라도 치를 듯했던 상황은 마무리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불씨는 몇 년 뒤 다시 한번, 이번에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피어올랐습니다. 

 

3. 과거의 적들과 손잡고 과거의 전우와 싸우다. 

문제는 '성지' 팔레스타인의 관할권에 있었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이 땅에 대해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의 보호자 자격을 내세우며 현지의 기독교 성직자와 교회에 대한 보호권 명목으로 사실상의 관할권을 튀르크에게서 용인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의 정확한 하계와 법적 근거는 분명하지가 않았는데 (1774년에 러시아와 튀르크가 맺은 조약에 아주 짧고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는 조항이 전부였습니다. ) 

 

1851년에 새로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프랑스 쪽에서 그러고 보니 우리도 18세기에 튀르크와 비슷한 협약을 맺었습니다. 며 팔레스타인의 가톨릭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관할권을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톨릭교도는 그리스 정교도의 십 부 느이 일에도 못 미쳤던 만큼 다소 무리한 요구였으나, 튀르크는 프랑스의 위협이 두렵기도 하고, 러시아의 과도한 관할권 행사가 못마땅하기도 해서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연히 발끈한 러시아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 남부 주둔군에 동원령을 내리고, 흑해 해군을 경비 태세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주제 영욱 대사와 면담하다가 우리가 손잡고 튀르크를 분할합니다. 

 

셀비아, 불가리아를 독립시키고, 이집트는 영국령으로 하는 게 어떻소?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엄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아무튼 그 소식을 접한 런던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특히 오래전부터 대표적인 반러시아론자로 유명했던 파머스턴 외무장관은 러시아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며 치를 떨었습니다. 

 

 

아무튼 러시아는 1853년 초 멘시코프를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해 프랑스에 대한 관할권 허가를 철회하도록 종용했습니다. 이에 프랑스는 그리스의 살라미스까지 해군을 출동시키고, 영국도 반러시아론자 스트 레드퍼드를 튀르크 주재 대사로 파견했습니다. 

 

스트 레드퍼드는 결국 멘시코프가 빈손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다뉴브 공국으로 불리는 발칸 반도의 왈라키아와 볼 다비아에 병력을 보내자(이 지역은 15세기 말부터 튀르크 제국에 속한 자치령이었는데, 러시아와 튀르크의 꾸준한 영토권 마찰이 있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가 나섰습니다. 

 

러시아의 행동이 자친 발칸 전역에서 분쟁을 일으킬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우호관계에 있는 러시아와 정면으로 맞설 수 없던 오스트리아는 1853년 7월에 빈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대표들을 초청하여 중재회의를 열었습니다. 

 

성지 관할권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체면을 세워주고, 대신 러시아는 튀르크나 다뉴브에 대한 침공을 포기한다는 선에서 대략 합의되었으나 스트 레드퍼드가 아주 사소한 문제를 꼬집고 나서면서 회단은 결렬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이후에도 거듭 중재안을 내놓았고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깨달은 러시아도 이에 호응했으나, 영국의 강경한 태도에 번번이 무산되었습니다. 

 

1853년 10월, 영국의 부추김에 따라 튀르크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많은 경우 이때를 크림전쟁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러나 유럽 세력끼리의 격돌은 그 뒤 1년이나 지나서 시작되었기에, 기점을 1854년으로 잡기도 합니다.)

 

1854년 1월에 영국과 프랑스의 해군이 흑해에 진입했으며, 3월에는 영국, 프랑스와 튀르크의 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로써 불과 얼마 전, 그리스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손잡고 튀르크와 싸웠던 두나라는 이제 편을 바꾸어 어제의 전우와 맞서게 되었습니다. 

 

6월에는 오스트리아도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했는데, 러시아와 실제로 싸우기보다는 압박하려는 목적이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이후에도 종전 때까지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9월에는 영국, 프랑스 원정군이 크림반도에 상륙, 10월에 세바스 토플 공략을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전쟁이었습니다. 기독교 유럽의 대동단결을 내걸었던 신성동맹도, 빈 체제도 결정적으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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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무솔리니 북아프리카로 진출하고자 했으나 연합군 반격을 받아 패배했습니다. 이탈리아 군을 지원한 독일군은 롬멜 장군의 지휘 아래 영국의 사막 군단을 제압하며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알 알라메인에서 일어난 몽고메리 장군과 의 전투에서 롬멜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알알라메인 전투의 영웅 롬멜과 몽고메리 장군 이미지 

1. 롬멜과 몽고메리,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맞붙었다. 

2차대전 중 여러 전장에서는 유명한 장군들이 서로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가 가우데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대결은 독일의 롬멜 장군과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맞붙은 싸운이었습니다. 당시 언론들은 두 장군을 각각 사막의 여우와 사막의 생쥐라고 부르며 흥미 있게 보도했습니다. 

 

2. 북아프리카,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유럼 내 작전에 앞서 경험을 쌓는 훈련장이 되다. 

북아프리카는 히틀러나 연합군에게 지중해를 장악하는 요충이기는 하지만 결코 양측의 사 할을 결정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용한 전장은 엉덩이 끼지나 유럼 대륙이었습니다. 그러나 1941~42년에 영국군과 미국군이 유럼 대륙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는 입장에서 북아프리카는 독일군 전력을 분산시키고 잔 접적으로 동부 전선의 소련군을 지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등메 노르마 디 상륙작전과 같은 큰 작전을 실행하기 앞서 결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훈련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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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잘것 없는 군대로 서투른 공격을 감행한 무솔리니,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다. 

본래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은 히틀러가 아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일을 벌임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1940년 여름 히틀러가 프랑스를 함락시키는 모습을 보고 무솔리니는 북아프리카로 진출해 옛 로마제국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히틀러와 아무런 협의도 없이 이집트와 그리스를 침공한 그는 히틀러와 달리 전략도, 계획도 없고 보잘것없는 군대로 서투른 공격을 했다가 도리어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곧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작전지휘 롬멜 이미지 

4. 이탈리아의 패베로 독일이 지중해 지역으로 들어가 가다. 

이탈리아군의 패배는 독일을 지중해 지역으로 끌어들였습니다. 1941년 봄 독일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유린하고 크레타섬을 침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히틀러는 1941년 2월 롬멜 휘하의 1개 기갑 군단 (아프리카 군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아프리카에 파견해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군을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알 알라메인 전투 이야기 동영상

 

5. 북 아프리카에서 연전 연승하던 연합군, 롬멜이 도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다. 

롬멜이 오기 전까지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 총사령관 웨이블 대장은 비록 2개 사단 밖에 되지 않는 열세한 병력이지만 사막에서 500마일을 진격해 10개의 이탈리아 사단을 격퇴시켰고, 해상에서 커닝험 제독의 지중해 함대는 이탈리아 해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롬멜이 크리폴리에 도착한 이후 전제는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위대한 지휘관과 성능이 좋은 장비를 지닌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은 영국의 사막 군단을 제압하며 눈부신 속도로 진격했습니다. 독일 탱크는 영욱 탱크보다 속도가 빠르고, 독일의 88밀리 대전차포는 영국의 어느 대포 보도 위력이 강했습니다. 그것은 본래 고사포였으나 롬멜은 창의력을 발휘, 그것을 개조하여 대전차포로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6. 롬멜, 독일 기갑군단의 강점인 기동성과 화력의 우세를 활용하다. 

 

롬멜은 작전지역을 넓게 이용하고 독일 기갑 군단의 강점인 기동성과 화격의 우세를 최대로 활용했습니다. 그는 유인 전의 대가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선제공격으로 영국 탱크를 유인한 다음, 대전차포 엄호 하에 기갑부대를 진격시켜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7. 전진을 거듭하던 독일군, 극심한 보급 문제로 알 알라메인에서 진격을 중단하다. 

 

1941년 겨울 독일은 잠수함 u보트를 사용해 장비와 보급품의 지중해 통화를 보호함으로써 보급난을 해결했습니다. 이듬해 6월에는 중요 기지인 토부르크를 빼앗고 영국군을 계속 추격했습니다. 알래산드리아에서 55마일 떨어진 알 알라메인에까지 퇴각했을 때 영국군은 참으로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영국군은 철군을 고려하고 있었고, 이집트 정치인들은 슬리가 확실해 보이는 독일군 편에 설까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데 그 순간에 롬멜은 진격을 중단하고 말았으니, 그것은 증원군을 기대할 수 없고 보급기지에서 너무 떨어진 곳에서 최악의 보급 난을 겪고 있어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일군 주력은 소련 땅에서 카프카스를 향한 지격에 초력을 기울이고 있어 아프리카를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영국군과 영국군의 수장 몽고메리 장군 이미지 

8. 롬멜의 공격이 한계상황에 이른 가운데 영국 몽고메리 장군이 부입합니다. 

영국 지상군은 알 알라메인에서 방어진 지를 구축하고 공군은 토브룩에 대해 맹폭을 가했습니다. 토브룩 기지를 이용할 수 없게 된 독일군 보급은 후방 약 600마일 떨어진 벵가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롬멜 군의 공격이 한계상황에 이르렀더 1942년 8월경 몽고메리 장군이 이집트 주둔 영국 제8군 사령관으로 새로 부입했습니다. 

 

9. 몽고메리, 모든 면에서 크게 우세를 점할 때까지 작전을 개시하지 않고 전투 준비를 하다. 

몽고메리는 부임하자마자 곧 반격을 실시하라는 압력을 상당히 받았지만 완전히 준비될 때까지는 작전을 개시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장비와 군수품을 충분히 확보, 우선 방어에 충실하고 모든 것이 확실할 때 공격한다는 그의 작전 스타일은 과거 나폴레옹을 상대한 웰링턴 장군과 같았습니다. 

 

그는 병력, 탱크, 공군력에서 두세 배 우세를 유지할 때까지 기다리며 철저한 전투준비를 했습니다. 정교한 위장 계획을 세워 가짜 설비들을 짓고, 적에게 마치 남쪽에서 주공을 실시할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10. 몽고메리, 순전히 숫자와 화력으로 독일을 제압하고 승리하다. 

그러다가 드디어 10월 23일 보병사단을 투입, 기갑사단을 뒤따르도록 하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펼쳤습니다. 몽고메리는 독일 기갑 사단이 영국 기갑사단을 공격하도록 유도해 기갑사단 간에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 보병으로 하여금 적 보병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12일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영국군은 어떤 기발한 기동이나 전술이 아니라, 순전히 숫자와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고 승리했습니다. 전투에 투입된 영국군 병력과 탱크는 각각 23만 명과 1,030대였으며, 독일군은 10만 명과 500대였습니다. 

 

11. 롬멜, 첫 참패 후 철군하며 북 아프리카를 연합군에 내주게 되다. 

몽고메리의 우직한 전술에 처음으로 참패를 당한 롬멜은 이지 더 이상 공격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증원군과 보급품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석유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는 트리폴리를 거쳐 튀니스로 장거리 철수를 하고 1943년 5월에 시칠리아로 철군함으로써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연합군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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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중 전쟁의 반전이 시작되는 미드웨이 해전 2번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미드웨이 해전은 행운의 여신이 미군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드웨이 해전당시 와일드켓의 전투장면 이미지 

1. 미드웨이 1차 공습 

미드웨이 해전 1차 공습을 시가대 별로 설명드리겠습니다. 

 

1-1. 05: 40분 

같은 침로로 아데아 디위의 PBY비행정을 후속하던 체이스 대위의 PBY 비행정은 수많은 일본 함재기들이 미드웨이 섬을 향하여 비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보고 하였습니다. 

 

1-2. 06: 00분

미드웨이 섬에서는 몰려오는 일본 공격대를 요격할 전투기 26기(F2A 버펄로 20기, F4F와일드 켓 6기)가 출격했습니다. 

이어서 TBF뇌격기 6기와 B-26 마 로더 폭격기 4기, SB2U 급강하 폭격기 6기로 혼성 편성된 공격대가 나구모 부대를 향하여 출격하였습니다. 

 

1-3. 06:07분

미드웨이를 경유하여 일본군 항모 부대 발견의 보고를 받은 미 17 기동부대 사령관 플레처 제독은 즉시 행동에 들어가 휘하 요크타운에게 공격 준비를 하도록 명령하고 16 기동부대 사령관 스플루언스 소장에게 일 기도 함대 공격대를 발진시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미 해군의 항모 3척은 즉시 출결 준비를 개시하였습니다. 

 

1-4. 07:00분

스플루언스 제독의 항모들,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이 먼저 공격대를 발진시켰습니다. 

 

1-5. 06:16분

도모나가 공격대 107기가 함상 공격기 (97식 공격기), 함상 폭격기 (99식 폭격기), 함상전투기 (제로 전투기) 순으로 미군 요격기들이 엄호하고 있던 미드웨이로 접근해 갔습니다. 전투는 고공에서 비행하던 미 해군 PBY 비행정이 조명탄을 투하하고 미군기들이 선재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군 요격기들은 선두의 도모나가 대장 기를 포함한 함상 공격 기대에 달려들어 불을 뿜었습니다. 

그러자 후속하던 제고기 편대가 이들을 역습하면서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습니다. 약 15분간의 공준 전에서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조종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 제로 전투 기대의 슬리로 마감되었습니다. 성능이 제로 전투기에 비해 떨어지는 미 해군 F2A 버펄로 기 20기 중에 13개가 격추되었고 와일드 켓은 2개 격추되었습니다. 

 

도모나가 대장 기도 피격을 당해 무전기가 사용 불능이 되었고 그는 2분기를 가까이 불러 비상용 소형 흑판에 쓴 자기의 희망 교신 내용을 보여 주고 본부로 중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1-6. 07:00분

공격의 성과가 불만족스럽다고 판단한 도모나가 대위는 나구모 기동부대에게 가우, 가우, 가우, 연속 신호를 보냈습니다. 

2차 공격이 필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1-7.  7:49분

미드웨이 공격이 진행되던 중 순양함 지쿠 마에서 발진한 4호기가 날씨가 안 좋아 시계가 불량하여 정찰을 중지하고 돌아가겠다는 송신을 보내왔습니다. 

6분 뒤에 도네에서 발진한 1호 정찰기가 적 항공기 15기가 아군 함대를 향하여 이동 중이라는 급전을 발신하였습니다. 

공중에서 전투 초계 비행 중이던 제로기에 더해서 6기의 제로기가 더 발진하였습니다. 

이 미군 공격대는 미 항모에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10기의 정찰기였습니다. 

일본 기동함대는 각 항모에 잔류한 제로기 21기에게 출격을 명하여 함대의 항공 엄호를 강화하였습니다. 

 

일본군 공격대가 계속 미드웨이를 공격하는 동안 미군 해군과 육군 항공 대는 일본 기동함대를 공격하였습니다. 

일본 기동함대는 각 항모에 잔류한 제로기 21기에게 출격을 명하여 함대의 항공 엄호를 강화하였습니다. 일본군 공격대가 계속 미드웨이 공격하는 동한 미군 해군과 육군 항공대는 일본 기동함대를 공격하였습니다. 

 

1-8. 07:05분

중순양함 도네는 접근하는 미군 폭격기 10기를 발견했습니다.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TBF 어벤저 뇌격기 공격대 6기와 어뢰로 무장한 B-26 4기였습니다. 

미군 은 미드웨이를 공격하는 도모나가 공격대 요격에 미드웨이 기지의 모든 전투기를 투입하였기 때문에 이들 일본 함대 공격대에게는 전투기 호의를 붙이지 못했습니다. 

B-26 마로더 <출처 : wikipedia>

아카키와 도네에서 즉시 대공 사격을 하였고, 제로기 10기도 공격에 가세하였습니다. 

항모 아카키에게 저공으로 접근한 미 뇌격기 6기 중 3기가 먼전 격추되고 남은 3기 중 2기는 어뢰 투하 후에 격추되었습니다. 어네스트 중위가 지휘하는 한 기만 무사히 귀환하였습니다. 

 

아카키는 투하한 어뢰들을 몯 무사히 피했습니다. 일본 항모들이 입었던 유일한 피해는 뇌격기에서 발사한 기촐 소사에 아카키의 3번 대공포가 선회 불능으로 파괴된 것 분이었습니다. 아카키를 뇌격했었던 B-26 2기도 격추되었고 나머지 두기는 귀환했지만 너무 손상이 심해 폐기 처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B-2에서 발사한 어로 2~3발이 명중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아카키에 명주한 어뢰는 없었습니다. 

 

2. 미드웨이 2차 공습 결정

도모나가 대위의 보고를 접한 나구모 사령관은 미드웨이 2차 공습을 결정하였습니다. 

곤도 노부 다케 중장의 2함대 미드웨이 공략 부대가 6월 7일 실시할 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미군 기지 내 항공전력의 철저한 파괴가 필수적이었습니다. 1차 공습이 미흡한 결과로 끝났으나 제2차 공습은 당연히 실시하여야 했습니다. 

 

니구모 사령부는 적 함대 출현의 가능성에 대비해서 공격용 어뢰를 장착하고 대기하고 있었던 97식 함상 공격기들을 육상 공격을 위한 폭탄으로 무장 전환하라는 명력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의 유동성에 대비해서 아무 무장도 하지 않고 대기했었던 99식 함상 폭격기들에게도 신속한 폭장의 명력이 내렸습니다. 미드웨이 해전 전에 항모 히류에서 실험해본 바에 의하면 죄장의 어뢰를 풀고 폭탄을 장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반이라는 데이터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데 함대 엄호의 제로기가 편대들이 미 공격대와 공중전을 치르고 연료 보급과 실탄 장전을 위해서 항모에 귀환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미드웨이에 공중 공격을 가한 도모나가 대위의 1차 공격대도 귀환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항모들은 무장 전환 작업이 있던 비행 갑판 아래 격 남고나 비행갑판은 극히 혼란한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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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 기동함대 공격대 급속 발진 

미 해군 기동부대는 하와이에서 중계된 카타리나 비행정의 보고로 일본 기동부대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공격 타이밍을 저울질하던 미 해군의 17 기동부대의 지휘관 플렛처 소장은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남서 변침 수색 공격하라 였습니다. 한 시간 뒤인 

 

3-1. 아침 7시

16 기동부대의 스풀루언스 소장은 휘하 항모 엔터프리이즈와 항모 호넷에 공격대 발진 명령을 내렸습니다. 

항모 엔터프라이즈에서 총 57기의 함재 기각 항모 호넷에서 총 60기의 함재기가 출결 채비에 나섰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의 정찰기가 함대의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언제 적 함재기 공습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발진 작업은 더욱 긴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스플루언스는 작전 실행단계에서 참모장 에리엇 브라우닝 대령의 진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실행단계에서는 지위권을 이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일분을 다투는 위기의 순간에 아직 일본의 공격대가 발진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가하려고 하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각개 약진의 이 전범은 병력의 추가 투입이라는 안 좋은 방법일 수도 있었습니다. 결과 미 공격대들은 크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 기동함대에게 미 항모 부대 공격대를 발진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 방공망을 약화시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기회를 만등었습니다. 

 

제17기동부대의 플랫처 사령관도 초계에 나섰던 정차기들이 모두 돌아온 뒤인 아침 8시 30분, 35기의 공격대를 발진시켰습니다. 

 

4. 나구모의 시간 낭비 

나구모 부대는 이전문에 즉각 대응하지 않고 야마구치 제독의 소류 항모에 배치된 두기의 신형 스이 세이 정찰기에게 추가 정찰을 명하였습니다. 

스에세이 정찰기들이 발진한 직후 소율의 공격대를 선두로 미드웨이 1차 공격대가 귀환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미드웨이 2차 공격대가 폭탄을 장비하고 출격 준비를 완료하고 갑판에서 정렬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5. 야마구치 소장의 긴급 건의 

항모 히류와 소류 두척의 항모로 구성된 제2항공 전대 사령관이며 맹장인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미 항모 발견 소식에 "지금은 일분일초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1차 출격했던 도모나가 대위의 100기의 회수를 포기하더라도 즉시 전 항모 공격대를 발진 준비가 급하다"라고 건의했지만 이런 파격적인 건의는 나구모 사령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갑판은 대 혼란을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1차 공격대를 수용하는 것이 먼저냐, 2차 공격대를 발진하는 것이 먼녀냐, 적 항모들을 부수기 위한 출격이 먼저냐 하는 결정을 놓고 참모들과 지휘관들 사이에 강들이 있었습니다. 

 

항모 함대 상공에 도착한 미드웨이 1차 공격대 함재기들은 연료가 거의 다 고강 되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차해서 상황이 나빠지면 100기 정도의 함재기들과 무려 200여 명의 탐승원들을 수장시켜야 하는 상황입니다. 

 

센다 미노루 항공 참모는 노련한 경험을 쌓은 탑승원들이 죽어가는 것을 눈을 뜨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1차 공격 대함 제기 회수가 금선 무라고 건의하고 이를 강행했습니다. 

 

새로 철현 한 항모 부대가 설사 공격대를 발진시키더라도 전투 초계 제로 전투기 부대가 완전하게 방어하리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 항모 부대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귀환하는 미드웨이 공격대를 모두 수용하고 기동부대 공격대를 발진시키기로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때까지 함대 공격용 어뢰를 장착하고 비행갑판에서 대기 중인 공격기들이 있던 일본 항모는 한 척도 없었습니다. 

5-1. 08:37분

나구모 기동부대는 미드웨이 1차 공격대를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5-2. 08:55분

돌아온 함재기를 모두 회수 완료 후 비로소 북으로 변침하여 적 기동부대를 포착하여 격멸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함 편 적 함대 발견의 타전을 했던 도네의 4호 정찰기가 추가 정보를 보내온 것은 미드웨이 공격대를 한창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5-3. 08:55분

체공시간 10시간인 도네의 영식 수상 정찰기는 귀환 중이었습니다. 

일본은 미드웨이 1차 공격대를 모두 수용한 시각은 09:30분이었습니다. 

 

6. 미 항모 뇌 격대의 전멸과 수훈

엔터프라이즈 호의 뇌격기, 미드웨이 섬 (왼쪽부터)

수용 완료가 마무리될 무렵 일본 함대는 공격대의 발진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6-1. 09:20분

존 C왈드론 소령이 이끄는 항모 호넷의 뇌 격대 TBD기 14기가 기동부대의 상공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이들 뇌 격대는 도중에 구름 때문에 호의기 들과 떨어졌습니다. 이뇌 격대는 아카키와 중 순양함 치쿠마의 견시들에게 최초로 목격되었고 엄호하던 제로기 8기가 요격하였습니다. 

 

뇌격기들은 제로기들을 무시하고 아카키에게 육박하였으나 일본 초계 전투기들의 요격 능력은 막강하였습니다. 

때문에 호넷의 뇌격기 전기가 격추되었습니다. 한기는 아카키의 ㅎ마교에 접근하다가 추락하였고 해면에 불시착한 나한 뇌격기에서 탈출하여 표류하던 죠지 게이 소위 외에 29명의 탐승원들이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게이 소의는 해전 후에 미 비행정에 발견되어 구조되었습니다. 전후 이들 뇌격 대원 전원은 모두 미국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호텟의 뇌격기는 전멸하였고 폭격기들과 전투기들은 모두 일본 항모를 찾지 못하고 헤마다가 연료가 떨어지자 미드웨이 섬으로 향하였습니다. 

전투기 F4F와일드켓 기 전기와 폭격기 SBD3기는 연료 고갈로 바다에 불시착하였습니다. 나머지는 SBD20기는 모두 호넷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6-2. 09:37분

콘신 린제이 소령이 이끄는 엔터프라이즈의 뇌 격대 14기가 나무고 부대의 상공에 도달했으나 이 부대도 역시 통신상의 문제로 와일드 켓 전투기 부대의 호의를 받지 못하고 일본 제로기 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뇌 격대는 항모 카카를 노렸으나 10기나 격추당하고 탑승원 29명이나 전사하는 참변을 겪었습니다. 

 

6-3. 10:00 분

일본 항모 소류에서 발진시킨 쾌속의 신형 스이 세이가 미 함대를 발견했습니다.

함대의 정확한 위치는 도네 4회 기각 보고한 위치와 100km 이상 차이가 있었습니다. 

 

6-4. 10:10 분

요크타운 제3의 뇌 격대 12기가 나구모 부대 상공에 도착하였습니다. 뇌 격대는 구름에 가려진 다른 3척의 항모보다 앞에서 노출된 항모 히류를 공격하였습니다. 

 

이 뇌 격대는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나 제로기의 공격에 TBD10기가 격추되어 2기는 연료 부족으로 해면에 불시착하는 참극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요크타운의 뇌격 대원 24명 중 21명이 전사했습니다. 일본 항모 히류에게 어뢰 5발을 발사했지만 명중탄은 없었습니다. 

 

뇌 격대들은 모두 섬멸되었지만 간접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이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1. 뇌 격대는 일본 기동부대를 연속으로 흔들어 이들로 하여금 신속한 반격에 나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2. 미군기들은 대부분의 일본 전투 초계기들이 뇌 격대에 눈이 팔려 자기 위치를 이탈하게 만들었습니다. 
  3. 많은 제로기들의 실탄과 연료를 소모하게 만드어서 다음 미군 폭격대 요격에 대처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일본의 제로기들도 계속되는 이함-전투-착함-보급-이함을 되풀이하느라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마지마 공격을 시도하다가 섬멸된 요크타운의 뇌 격대는 특히 승리를 위한 중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일본 기동부대 남동쪽에서 저공으로 공격해온 요크타운의 뇌 격대를 영격 하느라 일본 호의 전투기들은 모두 남동쪽 해역 저공에 몰려들어 일본 기동부대 상공의 고공을 비워 놨었기 때문입니다. 
  4. 요크타운의 요격 직후 발생한 일본 초계기들의 방심을 곧 일본 기동부대의 참변으로 결론이 나게 됐습니다. 

여러 번 되풀이하다가 실패로만 끝난 미 뇌격 대원중에 바다에 불시착하거나 낙하한 미 해군 조종사 2명과 한 명의 탑승 원을 표류하다가 일본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일본 해군은 이들로부터 중요한 정보들을 뽑아내고 물을 넣은 석유통에 묶어 바닷속에 수장시키는 잔인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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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도전을 수행하다. 

토요일 아침이 되자 대운들은 지정된 시간보다 앞서 부대에 집결했습니다. 

최종 검열을 위해 인진 구출 계획의 수정과 장비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충동 직전까지도 새로운 정보들이 속속 들여왔기 때문입니다. 

엔테베 작전 -작전계획 파해치기. 썸네일 이미지

 

장비점검이 끝나자 공격 부대인 사이렛 메트 칼의 지휘관인 요나단'요니' 네타냐후 중령은, 이작전의 초대 목표는 인질 구출이지 적의 근거지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시간이 가잔 중용한 용소 중 하나였습니다. 30분에서 1시간 안에 인질 구출부터 퇴출까지 완수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질 구출에 직접적인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목표물 이외에는 가급적이면 교전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질 구출에 성공하고 나면, 그땐느 부주적인 목표물과도 교전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방침을 세우고 우발 사태 발생 시 행동요령들을 토의하면서 사이렛 매트칼의 전술 토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갔습니다. 

 

11시 30분경 사이렛 매트칼과 공군 수송 비행대대를 포함한 구출 부대는 합참의 장성들 앞에서 작전계획을 보고 했습니다. 

구출 부대는 13시 20분 로드 공항에서 출발하여 시나이반도의 사름알세이크 항공기지로 향했습니다. 

수송기와 지상 구출 부대와의 합동훈련은 아질 실시된 바가 없었고 지휘계통도 조종 대고 있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정부는 아직 구출작전의 실시 여부를 결정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비 기를 포함한 5대의 c-130 수송기는 러시아 정보수집선과 이집트 레이더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저공비행으로 사막 위를 날았습니다. 무더운 사막 위를 저공비행하던 수송기는 심한 난기류까지 만나서 샤름 알 셰이크 항공기지에 착륙했을 때에는 모든 대윈들이 심한 멀미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는 사이렛 매트칼 대운 중 1명은 심한 구토 증세로 구출 작전에서 제외되기까지 했습니다. 

 

2. 아프리카 대륙으로 출발하다. 

15시 30분 숌론 장군은 구출 부대의 출동을 명령했습니다. 

더 이상 출발을 미루었다가는 자정의 공격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왔기 때문입니다.. 라빈 수상이 아직 구출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임무가 취소된다면 부대를 소환하면 그만이었습니다. 

 

1번기에는 숌론 장군과 지휘부, 요니와 사이렛 미트 칼 대원 29명, 사이렛 차하님 대운 52명, 벤츠 승용차, 랜드 로보 2대가 실려 있었습니다. 2번기에는 지취부 추가 인원, 사이렛 찬하 님 17명, 그리고 장감차 2대와 숌론의 지휘용 지프 1대, 3번기에는 사이렛 골라니 30명과 장급 차 2대, 그리고 지프 1대, 4번기에는 사이렛 골라니 20명, 의료반 20명, 지상 재급유 요원 10명, 그리고 급유펌프가 실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잔뜩 별력과 장비를 실은 c-130은 이륙 시부터 제한 중량을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비행은 약 7시간 반이 걸리는 여정이었습니다. 샤롬 알 세이크를 이륙한 c-130 편대는 고도 50피트로 초저공비행을 하면 선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레이더 감사 망을 피해 홍해를 건너 에티오피아에 도달했습니다. 

 

일단 에티오피아 영공에 접어들자 c-130은 다시 고도를 2만 피트로 올리고 정상적인 비행을 했습니다. 

당시 에티오피아에는 대공 수색 레이더가 없었기 때문에 구출 부대가 발각될 염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 남남서로 비행을 계속하던 편대는 케냐의 북쪽을 거쳐 우간다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22시 30분경 드디어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몇 분만 더 가면 엔테베였습니다. 

 

c-130이 엔테베 공항 관제탑과 착륙 중인 브리티시 항공 여객기의 교신 내용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한편 작전의 총고나 지휘를 위한 공군 사령부도 출동했습니다. 에쿠 델 아담 합참 부의장과 벤야민 펠레드 공군참모총장은 보잉 707 지휘 통제기에 탐승하여 구출 부대의 총괄적인 지휘와 이스라엘 본국과의 연락 임무를 맡았습니다. 

 

3. 야간의 착륙을 하다. 

계획에 따라 나머지 c-130 수송기 3대는 편대에서 이탈하여 상고에 대기하고 1분기가 엔테베 공항으로 접근을 시작했습니다. 숌론 장군과 요니 줄 령도 조종석에 모여 지상을 향해 c-130이 내려가는 순간을 지켜보았습니다. C130은 모든 조명을 끈 채 레이더만으로 고도를 측정하면서 지상으로 향했습니다. 원래 야시경을 사용하기로 했었지만 장비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어 레이더 착륙을 감행했습니다. 

 

페테랑 조종사 샤니 중령은 완벽한 조정하에 기체는 1976년 7월 3일 23시(엔테베 현지 시각으로는 자정)에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엔테베 작전상황이미지- 1번기가 23시(현지 시각 자정)를 기하여 착륙을 개시하면서 구출작전이 시작되었다.

 

기체가 착륙하자 기내는 작전 준비로 바빠졌습니다. 사이렛 매트칼은 벤츠와 랜드로버의 시동을 켜고 출발할 준비를 했습니다. 한 면 사이렛 찬하 님 대원 10명은 착륙한 뒤 정지하기 위해 감속하는 c-130의 사이드 도어로 뛰어내려 활주로에 비상등을 설치했습니다. 활주로의 끝에 도착한 c-130은 기수를 돌려서 구청사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c-130의 후방 램프가 열리면서 33대의 차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간다군으로 위장한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이 드디어 구출작전을 시작한 것입니다. 

 

4. 밤의 정적을 가르는 총성 소리. 

29명의 사이렛 메트 칼 대원들은 모두 우간다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벤츠 승용차 1대와 랜드로버 군용 지프 2대에 탑승했습니다. 

 

라이트를 켠 3대의 차량은 약 70km 속력으로 달렸습니다. 라이트를 끄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오히려 끄고 달릴 경우 우간다 경비 병력에게 의심을 살 위험이 있었고 또 어두운 밤에 헤드라이트를 켜면 강력한 빛 때문에 눈이 부셔 경기병들이 차량 안의 이스라엘 특수부대원들을 알아보기 힘든 게 분명했습니다. 

약 1분을 달리자 차량 행력은 구청사로 향하는 차량 전용 도로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길 양쪽에서 우간다군 경비병 2명이 나타났습니다. 

오른쪽 경비병이 벤츠를 향해 정차 명력을 내렸습니다. 벤츠가 계속 달리자 경비병은 소총을 장전하고 차량을 세우라는 수신호를 보냈습니다. 경비병이 사정권 내에 들어오자 요니는 벤츠의 속도를 줄이고 마치 신분을 증명이라도 할 듯 창문을 내렸습니다. 

뒷좌석에 앉은 요니와 다른 대원은 소음기를 단 베레타 M1951권총을 경비병들에게 발사했습니다. 

그러나 경비병은 쓰러지듯 총알을 피하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우간다군으로 위장한 사이렛 매트칼의 기만전술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비록 최초의 교전으로 기습의 효과를 잃기는 했지만, 테러범들은 어둠 속에서 구출부대를 우간다군으로 착각했다. 사진은 우간다 군복과 AK로 무장한 사이렛 매트칼 대원의 모습이미지.

아무리 숙련된 대테러 부대원이라 해도 이동하는 차량에서 좁은 승용차 창문 사이로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길가 오른쪽에 있던 경비병은 이러서 서 벤츠 앞에 소총을 발사했습니다. 

 

왼쪽 경비병은 구청사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후방의 두 번째 랜드로버에 탐승한 대원들이 사격에 가세해 경비병들을 모두 사살했습니다. 

그라나 밤의 정적을 가르는 총성으로 인해 이제 기습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요니는 대원들에게 전속력으로 달리 것을 지시했습니다. 청사까지는 겨우 200m도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5. 구청사로 돌입 시작. 

구청사 쪽으로 다가가면서 요니의 눈앞에는 테러범들과 우간다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들 누구도 사이렛 메트 칼의 차량 행렬에 총격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구청사의 중앙홀 입구에 차량을 세운다는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요니는 벤츠와 랜드 로보를 구청사 관제탐 아래쪽에 신속히 세웠습니다. 인질 구추 부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테러범과 우간다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니는 정차와 동시에 대원들에게 건물 소탕을 명령했습니다. 

사이렛 매트칼의 부지 휘관인 무키 배 처 소령은 자신의 공격 제대를 이끌고 구청사 건물로 돌진하면서 건물 밖의 우간다 병사들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테러범들은 달하나면서 외쳤습니다. 

 

사일렛 메트 칼은 일단 구청사에 도착한 이후 3개 제대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대운들은 작전계획에 따라 구청사의 진입구에 집결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운들이 진입을 주저하는 듯 보였습니다. 

요니는 전진 하라고 수차례 소리쳤지만 무키는 계속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핵심인 구출작전에서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그것은 인질의 사망으로 연경 됐습니다. 요니는 무키 앞으로 달려 나와 도력을 지시했습니다. 

실제로 지연된 시간은 15초 정도였지만, 요니에게는 1초가 아까웠던 것입니다. 

 

그 순간 도열한 대원들의 뒤에서 총성이 들렸습니다. 관제탐 뒤에 나무 박스 사이에서 우간다 경비 영이 대원들을 향해 총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대원들은 곧바로 응시하여 불청객을 제압했습니다. 

그러나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인 벌어졌습니다. 방금 전의 총격에 요니가 쓰러졌던 것입니다. 

 

요니 중령이 쓰러졌다는 소리를 대원 하나가 외였지만 대원들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요니는 이미 작전의 준비 단계에서 대운들에게 확고히 지사 했으며 자신을 포함하여 누가 쓰러지더라도 개의치 말고 작전을 수해하라흔 것이었습니다. 

대원들은 요니를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그의 지시대로 3개 제대로 나뉘어 작전을 진행했습니다. 

 

엔테베 공항 구청사 공격도 이미지

6. 구청사에서 벌어진 혈전

요니의 돌격 명령에 제일 머전 달려 들어간 것은 이미르 오퍼라는 22 세의 젊은 대원이었습니다. 

아미르가 중앙홀의 입구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보이자 테러범 1명이 유리창을 뚫고 AK-47 소총을 난사했습니다. 

아미르는 첫 번째 출입문 대신 두 번째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갔습니다. 

 

실내 한가운데 인질들이 엎드려 있었습니다. 또다시 총알이 아미르 쪽을 날아왔습니다. 아미르는 누 운자 신을 노리는 테러범을 향해 기관단총을 발사하여 사실했습니다. 그리고 CQB(근전전 투기 술)의 기본에 따라 오른쪽 벽을 계속 따라가면서 테러범을 찾았습니다. 

 

한편 아미르의 뒤를 따라 두 번째로 진입한 암논 펠레드가 그의 왼쪽을 돌면서 실내를 수색했습니다. 그때 엎드려 있던 인질들 사이에서 2명의 남녀가 AK소총을 들고 아미르를 겨누면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원래 이들은 창밖에서 이동하고 있는 구출 부대원들을 조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달려 들어온 아미르에 놀라 반사적으로 조준 방향을 발 꾼 것이었습니다. 

 

펠레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테러범 2명을 탄창 하나로 애 치웠습니다. 

바로 이때 무키 소령과 아모스 오랜 이라는 대원이 동시에 중앙홀로 들왔습니다. 기둥 뒤에 숨어 있던 테러범 한 명이 아모스를 겨누고 AK소총을 발사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아모스도 그 테러범을 발견하고는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둘은 것의 동시에 총을 발사했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 났습니다. 아모스의 탄환이 테러범의 총을 뚫고 들어가 공기를 멈추고 테러범을 사살한 것이었습니다. 불과 0.1초도 안 되는 간발의 차이로 아모스의 발사가 빨랐던 것입니다. 

 

7. 대혼란의 현장 

C-130이 착륙한 지 3분 만에 테러범 7명 중 4명을 사살하고 인질을 확보했습니다. 그라나 아지 인질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우간다군을 오나 벽하게 제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테러범들이 공격해올 가능서도 높았습니다. 인질을 확보하고 중앙홀을 점령한 작전 1 제대의 대원들은 긴장했습니다. 

 

제일 먼저 진입한 아미르는 갖고 있던 확성기로 영어와 히브리어로 인질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혼란에 빠른 인질들은 간단한 지시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질들 가운데 1명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대원들이 긴장하고 총을 겨누었지만 어린 소녀임을 알고 총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인질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습니다. 대운들의 지시를 듣지 못하고 일어나 19세 청년이 테러범으로 오인되어 사실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편 인질 가운데 또 다른 2명이 사살된 채 발견되었는데 테러범과 대원들 간의 총격이 오가는 과정에서 도비탄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질을 확보하고 있는 사이에 작전 1 제대의 나마지 팀은 VIP 라운지 점령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원 들은 VIP라운지 정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원중 한 명이 안쪽으로 수류탄을 던졌지만 수류탄은 도로 빵으로 튀어나와 대원들 옆에서 터졌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대운 1명 만이 파편에 경상을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곧바로 다른 진입구를 찾은 팀이 VIP라운지로 돌입하자 2명의 손을 올이고 대원들에게 다가왔습니다. 

 

대원들은 그들에게 멈추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계속 다가왔습니다. 대원들은 이들이 인질인지 테러범인지 잠사 고민하는 사이 다가오는 자들의 허리춤에서 수류탄 주머니를 보았습니다. 

 

대원들은 주저 없이 소총을 발사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테러범의 손에 꽉 쥐어져 있던 수류탄이 떨어지면서 폭발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기적적으로 중상자는 없었습니다. 팀원들은 VIP라운지 인근을 계속 수색하다가 한쪽 방에서 중어 있는 테러범은 발견했습니다. 

 

대원들이 방금 가한 치열한 총격 과정에서 도비탄에 맞아 숨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8. 우간다군을 제압하다. 

작전 1세대가 인질을 구출하는 사이 2 제대는 구청사의 2층을 공격했습니다. 

2층은 원래 식당이 있던 자리로 인질 사건이 발생한 이후 우 우간다 군 경비 병력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눈에 보이는 병사들을 하나둘씩 사살했습니다. 

그란 막상 2층에 올라갔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담요와 침낭뿐이었습니다. 총격이 시작되자 우간군은 현장에서 도망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한편 구청사 밖에서는 지휘 통제반이 관제탐의 우간다군과 치열하게 총격을 주고받았습니다. 지휘 통제반은 랜드로버에 탑재된 50 구경 기관총을 관제탐에 발사했지만 적의 사격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청사를 점령한 대운들도 교전에 참가했지만 적의 사격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소 총격이 잦아들자 군위관이 쓰러진 요니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AK소총 찬이 요니의 쇄골 아래를 뚫고 들어갔습니다. 부상이 심해서 요니를 살리 수 없음을 안 군의관의 대처에게 상황을 알렸습니다. 부지휘관인 부처는 자신이 작전지휘관을 인계받았음을 전 대원에게 알렸습니다. 이제 문제는 관제탐을 포함한 청사 주변을 제압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편 작전이 시작된 지 6분이 나나 2분기가 착륙했습니다. 1분기가 차량을 전개한 장소에 대기 중이던 숌론 장군은 2번 기로부터 자신의 지휘 지프를 수령하고 장갑차 2대를 이끌고 구청사에 도착했습니다. 관제탑에 있던 우간다군이 간헐적으로 사격을 가해오자 숌론은 장갑차에 교전을 명령했습니다. 장갑차에서 기관총과 RPG를 발사하자 관제탑은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교전 와중에 3번 기도 도착했습니다. 나머지 장감차 2대가 3번 기로부터 발진하여 구청사 뒤편에 전개했습니다 엔테베 도심으로부터 이어지는 도로에서 나타날 지고 모르는 우간다 증원 별 역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사이 최초에 전재했던 장감차 2대중 1대가 인근의 우간다 공군기 쪽으로 향했습니다. 장갑차는 주기되어 있던 우 간다 군 미그 -17기들을 산산조각 냈으며 이스라엘군이 우간다군의 미그기를 공격한 것은 이스라엘 군의 안전 한 퇴출을 위해 사전에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디 아민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복수라는 성격이 더 짙었습니다. 

 

이로써 작전 개시 15분 만에 인질의 구출과 우간다군 제압이라는 어려운 임무가 와수 되었습니다. 

그라나 작전이 완전히 성공했다고 말하기에는 일렀습니다. 모든 인질과 부대원이 엔테베 이서 안전히 퇴출하기 전까지는 작전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특수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퇴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9. 발 빠른 퇴출 하다. 

몇 분 후에 재금유팀과 의료진을 실은 4분기가 도착했습니다. 

의료진이 요니를 포함한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가운데 재급유팀도 재 파릴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한편 구청사를 확보한 구출 부대는 인질을 청사 앞쪽에 모아 랜드로버와 트럭으로 수송까지도 후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인질의 호송에 여념이 없는 사이 엔테베로부터 이어진 도로에 우간다군을 태운 수송트럭 2대가 나타났습니다. 

그라나 이스라엘군이 준비한 장갑차는 손쉬운 표적을 쓸어버렸습니다. 

 

어둠과 혼란 속에서 인질들은 구출 부대원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원들이 여라 차례 소지품을 버리고 차량에 탑승하려고 주의를 주었지만, 인질들 중 몇몇은 소지품을 챙기기 위해 호송 대열을 이탈하여 구청사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또 공포 속에서 히스테리에 빠진 인징 몇몇은 대원들의 지시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원들이 강제로 수소기로 끌고 가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어둠과 혼란 속에서 대원들은 인질의 수조차 점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퇴출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질이 아니라 재급유였습니다. 

사이렛 미트 칼이 구청사를 점령하는 사이 사이렛 찬하 님은 교전 없이 신청사를 점령하고 연료탱크를 확보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사일렛 매트칼과 사이렛 골라니가 구청서를 확보하고 인질을 소개하는 동안 재금유팀은 사이렛 찬하 님과 합류하여 신속하게 재급유를 시장했습니다. 수송기 4대에 전부 재급유하기 위해서는 무려 40분 이상이 추가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구출 부대에게는 이런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때 707 공중지휘 통제기로부터 긴급 전문이 들왔습니다. 케냐 정부가 이스라엘군의 재급유를 허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엔테베에서 나이로비 까지라면 약 1시간 거리로 현재의 연룔로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구출 부대는 재급유를 중단했고, 인질을 태 운수 송기 1대가 먼저 엔테베 공항을 이륙했습니다. 시계는 23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10. 구출 부대의 퇴출까지 90분 걸림. 

이렇게 인질을 소개하고도 구출부대의 상당수는 엔테베에 남았습니다. 인질 호송 수송기로부터 구출자가 모두 105명이라는 보고를 받자, 곤 중지휘 통제 기는 지상의 숌론 장군에게 남은 인질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정보에 따르면 인진 수는 106명 이어 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구출된 인질은 이스라엘인 93명과 에어프랑스 승무원 12명을 합해 총 105명이었습니다. 구출되지 못한 인징 1명은 치료를 위해 구청사에서 병원으로 옮겨졌던 73세 도리프 로크였습니다. 그녀는 다음날 이디 아미의 수하들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숌론은 잔류 인질이 없는지 청사 주변을 수색했습니다. 피랍기 내부에 인질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기된 에어버스기까지 수색했습니다. 

 

철저한 수색 끝에 구출 부대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인질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편 구출 부대는 공항 청사 주변의 주차장에 시간 지연식 폭약을 설치하여 우간다군의 추적 의지를 꺾고자 했습니다. 

 

7월 4일 0시 30분 3대의 C-130이 엔테베를 이륙하면서 모든 작전은 종료되었습니다. 

C-130이 최초로 착륙한 지 90분 만에 인질을 구출하고 모든 대원을 회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인도한 모세처럼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20세기 최대의 인질 구출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작전 결과, 테러범 7명과 우간다군 45명이 사사되었고, 인질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구출 부대원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상 최대의 인질 구출작전에서 사망한 단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출 부대의 지휘관 요니 네타냐후였습니다. 총망받던 장교인 요니 중령은 지휘관이 최전선에서 이끄는 강한 군대 이스라엘 국방군의 전통을 장렬하게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과연 이스라엘 정부와 국방군이 이런 위험한 작전을 감행했어야만 했는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욤 키푸르 전쟁의 실망스러운 성과로 인해 사기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대테러작전에서는 1974년 마일라 초등학교의 인질 구출작전에서 23명의 초등학생 사망하고 , 1975년의 텔아비브 사보이 호텔에서는 인질 8명과 3명을 잃는 등 눈에 띄는 실패를 거듭해 왔습니다. 작전 실패라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군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도박에 뛰어든 셈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리더십과 창조력, 강인한 전투력, 길고 강한 애국심으로 무자한 젊은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사상 최악의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사상 최대의 인질 구출작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수행해 성공해냈습니다. 

무엇보다도 뛰어난 전문 특수작전에 대한 지도부의 신뢰가 없었다면 작전은 실행조차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최고의 부대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예상이나 인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부가 일선 부대를 엄마나 굳게 신뢰하는 가의 문제라는 점을 엔테베의 인질 구출작전은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2021.12.09 - [특수부대] - 사이렛매트칼- 이스라엘의 대 테러 부대/ 엔테베 작전 1부

 

사이렛매트칼- 이스라엘의 대 테러 부대/ 엔테베 작전 1부

이스라엘 육군 최정예 특수부대로 특수 정찰, 대테러 진압, 인질구출 등과 같을 고난도 임무를 수행하는 대테러부대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일렛은 히브리어로 '정찰대'라는 뜻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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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0 - [전쟁사] - 엔테베 작전-20세기 최대의 인질구출 작전을 말하다. (2부)

 

엔테베 작전-20세기 최대의 인질구출 작전을 말하다. (2부)

엔테베 작적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인질 구출 작전으로 적의 허를 찌른 특수작전이었습니다. 그럼 1부에 이어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1. 완성되지 못한 작전계획과 협상시한 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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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테베 작적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인질 구출 작전으로 적의 허를 찌른 특수작전이었습니다. 그럼 1부에 이어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1. 완성되지 못한 작전계획과 협상시한 

이작전 계획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c-130 4대를 엔테베 공항에 착류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엔테베 공항은 최근에 개수가 이루어져 구청사와 신청사로 나눠 있었습니다. 인질들이 있는 곳은 구청사 쪽이었습니다. 

엔테베 작전당시 c-130 수송기에서 내리고 있는 사이렛 메트칼 대원들 모습

c130 1분기가 구청사에 착류 하면, 사이렛 메트 칼이 인질 구출 작전을 수행합니다. 

1번기에 사이렛 메트 칼과 함께 동승한 공수부대원은 신청사를 점거하기로 하고 2분기에는 탑승하는 장갑차와 특수부대 및 공수부대는 사이렛 메트 칼을 증원하여 화력지원 임무를 맡게 되고 3, 4번기에 탑승한 예비 병력에게는 구출한 인질들을 안전하게 탑승 하키는 임무를 부여하게 됩니다. 

 

구출 작전의 총지휘관인 덴 숌론 준장은 구출작전 자체에 대해서 대체로 만족했으나, 전력 구성에 대서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구출 부대는 테러범뿐만 아니라 우간다군과도 교전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작전계획이 아진 구체와 되지 못한 사이에 협상 시한이 다가왔고 구르합참의 장이 라빈 수상에게 아직 군사작전을 실행할 수 없는 상태라고 보고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긴급회의를 열고 테러범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여태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라비 정부는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해 협상을 벌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테러범을 풀어줄 용의까지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무려 206명의 인질이 붙잡혀 있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교적 부담이 큰 탓도 있었습니다. 

 

 

한편 이런 이스라엘의 결정을 받아들인 테러범들은 인질 처형 시기를 7월 4일 일요일로 연장해주었습니다. 

또한 테러범은 100명의 인질을 추가로 풀어주었습니다. 

이제 엔테베 공항에는 이스라엘 국민이거나 이스라엘 국적이 아닌 유대인들, 그리고 에어프랑스 승무원 12명까지 포함해 총 106명의 인질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유대인을 공격하겠다는 테러범의 의도는 명백해졌습니다. 

 

이는 오히려 여론에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정부에게 항전 의지를 심어주어 군사작전을 결시하도록 재촉하는 계기가 되게 됩니다. 

 

2. 구출 부대의 규모를 논하다

한편 당시 국방장관이던 시몬 페레스는 참모들을 불러 의견을 물으면서 구출 작전의 가능성을 심도 깊게 논의했다고 합니다. 그를 합참의장은 여전히 단 이틀간의 준비로는 이러 대규모 구출 작전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며 작전은 사상자 발생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스라엘군으로서는 마알랏 초등학교 참사(1974년 5월 15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테러범 3명이 마알랏의 한 초등학교에 난입하여 105명의 학생과 교사를 인질로 잡은 사건) 이후 더 이상 군사작전으로 인한 재앙을 감당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주요 목표지점인 엔테베 공항 구 청사에 대한 정보가 너무 피상적인 점도 문제였습니다. 열띤 토의 끝에 페레스 장관은 곧바로 세부 작전의 입안과 훈련을 실시를 지시하였고 숌론 장군을 작전 지휘관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모들은 작전은 언제라도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회의가 끝난 직후 숌론 회의가 끝난 직후 숌론 장군은 사이렛 매트칼 부대장 요나단 요니 네타냐후를 호출했습니다. 

숌론이 제사한 작전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이렛 매트칼이 구청사와 인근 지역을 점령하는 동안 공수부대와 골라니 부대가 신청사와 관제탑을 제압하고 인질 구출 부대의 증원 및 호위 병력으로 대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숌론은 대규모 병력으로 전력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요니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더욱 작고 기동성 있는 부대의 규모를 유지행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숌론의 작계는 너무 광대해서 실행에 옮기는 데 제한 사항이 많으므로, 병력의 규모를 줄여 더욱 유연성 있는 작전을 실행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요니의 주장이었습니다. 

 

결국 숌론은 부대 구종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요니가 작전의 세부를 구상하도록 전체적인 기본 방안만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요니는 밤새 작전의 세부를 검토했습니다. 

 

3. 작전의 세부사항 알아보다. 

결국 다음날인 7월 2일 금요일 오전 7시를 가해 숌론은 최종 작전 명력을 하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석방된 인질들을 조사하면서 인질의 정확한 위치, 우간다군의 배치 현황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 중이었지만, 이는 그때까지 사이렛 매트칼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작전 계획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상태로 입안되었습니다. 

 

구분 구성부대 및 지휘관 임무
지휘제대 지휘통신부
(지휘 : 댄 숌론 준장)
1. 작전 전반에 대한 지휘통제
2. 통신 총괄
공격제대 사이렛 매트칼
(지휘 : 요니 네타냐후 중령)
1. 구청사 내의 인질구출작전 실시
2. 구출 인질을 C-130까지 호송
지원제대 사이렛 찬하님/사이렛 골라니
(지휘 : 숄 모파즈)
1. 적 증원 병력이 공격제대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차단
2. C-130을 보호하며 지상급유 지원
3. 주기된 우간다군 미그기를 파괴하여 차후 추적을 방지
4. 구출된 인질들이 C-130에 탑승할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
항공제대 C-130 비행대대
(지휘 : 요수아 샤니 중령)
1. 구출부대를 엔테베 공항까지 은밀히 수송, 야간 착륙
2. 지상에서 재급유 실시 후 인질 및 병력을 싣고 퇴출

 

4. 공격 제대의 임무을 알아보다. 

우선 C-130 1분기가 모든 조명을 끈 채로 어두운 활주로에 착륙합니다. 이를 위해서 C-130 비행대의 대대장 샤니 중력이 직접 1번가의 조종간을 잡을 예정이었습니다. 

한편 착륙한 1분기가 활주로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특수부대 1배 조가 수송기에서 뛰어내려 후속 기체를 위해 지상 유도등을 설치합니다. 

1번기에서 내린 구조대는 우간군으로 위장하고 구청사로 접근합니다. 

 

원래는 사이렛 매트칼이 이디 아민 일행으로 위장하고 구청사로 접근하려고 했었습니다. 때마침 이디 아민이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에서 회담을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실로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민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중지되었고, 대신 우 간군 고위 장성의 방문처럼 위장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35명의 사이렛 메트 칼 대원들은 몯 우간다 군복을 입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대원들은 우간다인 처럼 보이기 위해 검은색 위장크림을 칠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야간에 기습하는 작전이므로 우간다군 결계병에게 발각될 위험이 적었고, 얼굴에 검은색 위장크림을 칠할 경우 오히려 내부 소탕 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한편 차량으로는 벤츠 승용차 1대, 랜드로버 군용 지프 2대를 선택했습니다. 

랜드로 보는 우간군이 흔히 사용하는 병력수송차량이고, 벤츠는 우간다 장성이 관용차량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엔테베 작전에 대한 동영상

일단 구청사에 도착한 부대는 3개 조로 나뉘어 작전 1팀이 3개 출입문을 동시에 파쇄하여 1층으로 진입한 뒤 테러범을 제압하고 인질은 구출합니다. 

이와 함께 작전 2팀이 구청사 2층으로 올라가 주둔하고 우간군을 제압합니다. 

한편 지휘 통제반은 청사 외부에서 대기하면서 랜드로버에 탑재된 50 구경 기관총으로 위협 지대를 제압합니다. 

 

요니는 관제탑을 공격 목표에서 제외했습니다. 

관제탐을 공격하려면 인원이 더 필요한 데다가 공격 과정에서 희생자가 나올 확률 또한 높았기 때문입니다. 특수전에서는 목표가 집중될수록 소요 인원과 작전 시간이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상대적으로 전력 우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5. 지원, 항공 제대의 임무를 알아보자.

인질구출 부대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바로 구청사 200미터 부근에 위치한 우간군의 기지였습니다. 여기에는 무려 1,000명의 병력과 함께 미국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을 차단하는 임무는 사일렛 매트칼이 아닌 사이렛 찬하 님과 사이렛 골라니로 구성된 합동기동부대에게 밭겨졌습니다. 

다수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 제대에는 M113 장갑차 4대가 포함되었습니다. 

 

사이렛 매트칼이 인질을 구출하는 동안 사이렛 찬하 님은 구청사 인근에 차단선을 구축하여 우간다군의 증원을 막습니다. 

또한 일부가 우간다 공군의 미그기에 폭탄을 설치하여 적 전투기의 C-130 요격을 사전에 방지했습니다. 

한편 사이렛 고라니는 C-130 근처에 남아 항공기를 보호하고 인질과 구출대의 퇴로를 확보했습니다. 

 

항공 제대는 사실상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았습니다. 4,000KM 거리를 급유 없이 침투 비행하고, 야간에 조명도 없이 아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적진 한 가우데에 착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지휘관과 조정 사들은 그 짧은 시간에도 훈련을 반복하면서 단기간 내에 야간비행기술을 놀랄 만끜 향상했습니다. 

 

이렇게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최종 협상 시한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작전의 실행까지는 채 이틀도 남지 않았습니다. 

 

2021.12.09 - [특수부대] - 사이렛매트칼- 이스라엘의 대 테러 부대/ 엔테베 작전 1부

 

사이렛매트칼- 이스라엘의 대 테러 부대/ 엔테베 작전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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