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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육군 최정예 특수부대로 특수 정찰, 대테러 진압, 인질구출 등과 같을 고난도 임무를 수행하는 대테러부대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일렛은 히브리어로 '정찰대'라는 뜻으로 , 사이렛 메크 칼은 영국 특수부대인 SAS를 모방해서 창설되었습니다. 

1976년 엔테베 작전을 포함하여 1964년 6일 전쟁의 쉬라 크락 작전, 1973년 욤프키프르 전쟁, 사보이 적전, 1982년 레바논 전쟁 등의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이스라엘 특수 부대 사일렛 미트칼 부대로고 이미지와 부대원 이미지  

한편, 사이렛 매트칼은 상당기간 대원을 비밀리에 선발했으나, 1980년대부터 지원자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일렛메트 칼에서는 네타냐후 총리 에후드 바락 전 총리, 모세 알론 에스 라엘 국방장관, 이스라엘 첨보 기관 모사드 수장인 대니 아톰 등 이스라엘 역대 총리들을 비롯해 유수의 정치인들이 배출됐습니다. 

 

1. 엔테베 작전(사일 레 메티칼 부대)

사일렛매트칼의 대표적인 작전으로 1976년 아프리카 엔테베 공항 인질 구출 작정인 일명 엔테베 작전이 있습니다. 

1976년 7월 3일 이스라엘 로드 공항을 출발하여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에어 프랑스 소속 AF-137기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ELP) 테러범 2명과 독일계 혁명 분파인 테러범 2명에게 납치돼 254명의 승객이 인질로 잡혔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즉각 아프리카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사일렛매트칼을 출동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7명의 남치범 전원과 우 간다 군 30명을 사살했으며 10대의 소련제 전투기도 파괴하는 등 기습 작전을 성공리 종료한 작전입니다. 

 

그럼 엔테베 작전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1. 에어프랑스 비행기 피랍

1976년 6월 27일 12시 30분경 이스라엘의 로드 공항을 떠나 파리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소속 A300에어버스 여객기 AF-139편이 중간 기착지인 아테네에 내렸습니다. 

아테네 공 하의 보안은 허술한 편이어서 금속탐지기에 모니터링 요원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56명의 승객을 태운 AF-137편은 이륙 3분 만에 피랍되었습니다. 승객들 가운데 테러범들이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에어프랑스 소속 AF-139편은 중간 기착지인 아테네에서 이륙하자마자 테러범에게 납치되었다. 보안이 허술한 아테네 공항은 테러범이 항공기에 잠입하는 데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이 여객기에는 254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3분 1의 이스라엘 국민이었습니다. 여객기를 남치한 테러범은 모두 4명으로 2명은 형 분파 소속의 독일 테러범이었고 2명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소속의 아랍 테러법이었습니다. 특히 독일인은 남녀 커프로, 남자는 월프리드 보세라는 유명한 청부 테러범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여객기 피랍을 예상하고 쵝 정예 부대인 사이렛 매트칼에 출동대기를 명령했습니다. 

사이렛 매트칼은 부대 명칭을 그디로 말하자면 합동 참모본부 직할 정찰 부대이지만 실제로는 대테러부대입니다. 

여객기를 납치한 4명의 테러범. (좌측 상단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자엘 나지 알 아잠(Jael Naji Al Azam), 파예즈 압둘라힘 자베르(Fayez Abdur-Rahim Jaber), 브리기테 쿨만(Brigitte Kuhlmann, 여자 테러범), 윌프리드 보세(Wilfried Böse).

테러범들은 종종 이스라엘로 여객기를 몰고 와서 정치적인 요구를 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1972년 아람 테러범들은 벨기에의 사베나 항공 여객기를 납치하여 로드 공항으로 몰고 와스는 국제 언론 앞에서 요구사항을 열거한 바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예상한 이스라엘은 사일렛 매트칼을 로드 공항에 대기시키고 인질 구출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피랍 기는 이사라엘 롤 향하지 않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리비아의 벵가지에 기착했습니다. 

사일렛 메트 칼은 다시 기지로 돌아가 추후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벵가지에서 7시간 반을 대기하던 피랍 기는 재급유를 받고 이륙하여 동쪽으로 향하였습니다 부대는 다시 출동대기 상태에 들어갔으며 피랍기가 고드 공항에 내래는 즉시 구출작전을 실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자정이 되자 놀랍게도 피랍기가 아프리카로 향하고 있다는 시실이 확인되었고 다음날 새벽 3시 피랍 기는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내리게 됩니다. 

여기서 팔레스타인 인민 해 아전 선 테러범 3명이 납치법들에 합류했습니다. 

1-2. 피랍기 아프리카로 향하다. 

승객들은 피라 된 에어버스 여객기가 엔테베 공항에 착류 하고도 무려 9시간이나 더 기내에 억류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6월 28일 월요일 정오가 되면서 테러법들은 승객들을 공항 구청사의 승객 로비에 감금하게 됩니다. 

 

그날 늦은 오후 우간다의 대통령인 이지민은 승객들에게 자신이 직접 테러법들과 인질 협사를 하고 있으며, 우간다 병사들이 승객의 안전을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아민은 이스라엘 정부가 테러범과 협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29일 15시 30분경 페루인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의 지휘 하에 움직이는 테러범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발표했습니다. 

 

엔테베 작전 관련 동영상 

서독, 프랑스, 스위스, 케냐, 그리고 이스라엘에 투옥된 테러범 53명의 석방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석방되지 않는 다면 이스라엘 시각으로 7월 1일 14시에 피랍 승객들을 살해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런 발표가 나자 당시 이스라엘 수당이던 이츠하크 라빈은 각료들을 모아 대안을 검토했습니다. 

이스라엘 국방 합참의장인 모타 그를 장군은 라비 수상과 회의에 앞서 군사적 작전을 검토할 것을 자신의 참모들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구리의 참모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공군 유일의 C-130 비행대대장이던 요수아 샤니 중령력은 엔테베에 피랍기가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이미 대략적인 비행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병력과 장비를 싣고 엔테베까지 갈 수 있는 기체는 C-130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공군 참모총장이 작전에 관하여 물었을 때 모든 문제에 대해 유 항하게 대답할 수 있다고 합니다. 

 

 

1-3.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보다!

한편 구리 장군은 라빈 수상에게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보고 했지만 당시로서는 대수롭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당시로서는 이디 아마이 피랍사건의 중재자로 공정히 활동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각은 이 독 재자와의 협상을 통해 인질을 석방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승객의 3분의 2가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으며 항공기도 이스라엘 국적자가 아니라 프랑스 국적기였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가 협상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으며 항공기도 이스라엘 구적기가 아니라 프랑스 국적기였기 때문에 프라스 정부가 협상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서 우간다는 무려 4,000KM 가까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애당초 이런 거리를 극복하고 인질구출 작전을 생 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편 같은 날 저녁 한참 부의장인 에쿠텔 아담 장군은 사이렛 메트 칼의 이전 부대장이던 애 후드 바라크 대령을 호출했습니다. 

그는 바라크에게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특공대원들과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비공식적으로 토의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바라크는 밤새 특수부대원들과 토의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 최초의 인질 구출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특수부대가 고무보트를 가지고 엔테베 공항 인근의 빅토리아 호수로 강하하여 강을 건너서 공항으로 삽입한 뒤, 인질을 구출하고 우간다군에게 투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이전까지 한 번도 고무보트로 하드 덕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그중 가장 작은 문제일 정도로 계획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로서는 이 계획이 가장 최선의 대안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1-4. 엔테베는 중립 지역이 아닌 적이었다. 

작전에 필수 요소는 정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정보가 너무 적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우간다는 원래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첨단 제트기의 제공을 거부하여 이디 아민은 1972년에 이스라엘과 단교를 선언하였습니다 

정실 외교 채널조차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정보를 수집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간다의 무관으로 파견돼 바 있던 이스라엘군의 비 루크 바 레프 준장이 이디 아민과 직접 통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비 루크 바 레프 준장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민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에게 동조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테가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인진을 구출하여 우간다군에게 투항한다는 계획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니 터였습니다 그럼에도 강하 작전 준비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C-130 대대장인 샤니 중령은 고무보트 강하 시험은 실패하여 고무보트가 터졌지만 이후 문제 해결하고 하드 덕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엔테베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승객 47명이 석방되었습니다. 

이들이 프랑스 대사관 을 거쳐 파리로 돌아가자 정보 당국은 피랍 상황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디 아민이 테러범에게 협력하고 있을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우려는 석방인질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기도 했으며 이에 따라 강하 작전의 가능성을 확인한 목요일 저녁, 전혀 다른 구출 작전을 새롭게 입안해야만 했습니다. 

작전의 침투하여 인질을 구해오는 어려운 작전이었습니다.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은 인질협상의 중재자를 자처했지만, 실은 팔레스타인 테러범을 지원하고 있었다. 사진은 이디 아민(좌)과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의 다정한 모습이다. 

1-5. 적의 심리를 이용한 기습작전

특수작전의 핵심 요고가 무엇 이냐고 물어보신다면 사람들은 보통 기습작적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정답이 아닙니다. 

 

기습이란 적이 대비되어 있지 않을 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수작전에서 적은 대개 기습을 예상하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특수부대가 타격할 주요 목표에는 언제나 우수한 경계병력이 있고 인질 구출 작전에는 특수부대의 기습을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는 테러범이 있습니다 특수부대에게 적이 대비되어 있지 않을 때 공격하는 사치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라 볼 수 있습니다. 

특수부대는 상대적 전력 우위에 승부를 거는 부대입니다. 

실제적으로 병력이 적더라도 기습 속도, 그리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적을 기만하고 압도하여 상대적 전력 우위를 통해 임무를 완수합니다. 

 

즉 특수작전의 핵심 요소는 상대적 전력 우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 엘곤은 엉뚱한 곳에 이런 상대적 전력 우위를 찾았습니다. 

 

새로운 구출작전을 입안하는 가운데 다소 엉뚱한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C-130 수송기를 곧바로 엔테베 공항에 착륙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란 이것은 매우 훌륭한 의견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군이 우간다까지 직접 날아가서 작전을 수행하는 모모한 직을 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엔테베 공항에 직접 착륙하는 것은 최고의 기습 효과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적의 심리를 활용한 기만이자 기습작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야간에 조명 없이 C-130을 착륙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은 이전에 한 번도 블랙아웃 랜딩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행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란 프로토 타입 야시경을 보유했던 이스라엘 공군은 사이 사막에서 야간 착률 시험을 성공하면서 구출작전이 가능함을 입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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