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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저격수는 20세기 들어서 진화를 거듭하여 전쟁의 세기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전쟁과 분쟁이 벌어지면서 저격수의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실전에서 얻은 숱한 시행착오와 갑진 경험, 그리고 계속되는 전술 개발과 훈련으로 저격수는 갈수록 정예화되어 갔습니다. 저격용 소촉과 망원 조준경, 야시경 등 관련 기술의 개발은 더욱 정교한 필살 저격 무기체계의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격수는 현대전의 필수 전력으로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현대의 저격수 훈련 이미지   출처: 미육군

1. 제1차 세계대전, 저격수의 본격적인 등장 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 전투에서 저격수는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했습니다. 개전 초 거의 모든 참전국이 저격수를 운용했지만 망원 조준경을 갖춘 저격수 부대를 운영한 나라는 독일 제국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광학기술과 관련 산업이 발달한 덕분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은 과학기술이 국가를 위해, 전쟁을 위해 적 그적으로 나선 전쟁이었습니다. 특별히 망원 조준경을 갖춘 돌일 제국의 저격수들은 참호 위로 머리를 드러내는 적 병사를 정확하게 조준해 사살하였습니다. 

독일군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망원조준경을 채용하여 정확한 조준사격을 했다. <출처: Public Domain>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처음에는 이러한 정확한 사격이 우연히 명중시킨 것이라고 믿었지만, 나중에 독일군의 망원 조준경을 발견하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독일 제국 육군은 대전 내내 이 저격수들의 활약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에는 독일의 뛰어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산업계가 제작할 수 있었던 고품질의 렌즈가 한 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저격수의 유효성과 살상력을 한층 더 높인 셈입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머리를 참호 밖으로 내밀지도 않고도 전방을 관측할 수 있는 관측용 포대경을 사용했습니다. 

나무 꼬챙이를 이용해 철모만 참호 밖으로 올려 적 저격수의 사격을 유발해 상대 위치를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영국군은 저격수 훈련소를 설치해 전문 저격수 양성에 들어갔습니다. 영국군의 헤스케스 헤스케스-프리처드 대위는 1915년 공식 허가를 받고 저격수 양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1916년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 전선에 있는 랭엄에 제1군 저격, 감시, 정찰 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학교는 처음에는 6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연합군에서 파견된 많은 군인을 교육해 빠른 속도로 전문 저격수를 배출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저격수가 적 사격을 받지 않고 목표물을 관측할 수 있는 포대경, 적의 사격을 유발함으로써 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종이로 만든 가짜 병사 머리 등도 고안해 실전에 응용했습니다. 

가짜 머리에는 고무 튜브를 달아 담배 연기를 내뿜게 해 적이 속아 넘어가도록 유도했습니다. 일단 적이 사격하면 이를 통해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한 뒤 그쪽으로 포격을 가해 무력화했습니다. 

 

헤스케스-프리처드 대위는 저격수와 관측수가 2인 1조로 짝을 이뤄 활동하면서 시너지를 높이는 방법을 비롯해 다양한 현대 저격 기술을 도입하였다고 하고 훈련과정에서 관찰력과 기억력을 동시에 높이는 '킴의 게임'을 도입해 현대 저격수 교육의 바탕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이게임은 참가자들에게 여러 물건을 늘어놓은 것을 보여주고 잠시 눈을 떼게 한 다음 약간의 변형을 가한 뒤 참가자들에게 변화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맞히게 하는 게임으로 보이스카우트나 걸스카우트에서 즐기는 놀이라고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용 소총으로 독일군은 마우저 소총 98, 영국군은 패턴 1914 엔필드와, 리-엔필드 SMLE MK 3, 러시아군은 M1891모신나강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2. 제2차 세계대전, 저격수 전술의 비약적인 발전 하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을 비롯해 다부분의 국가는 특수 저격수 부대를 일시 폐지했지만 스페인 내란이 벌어지면서 저격수는 다시 한번 등장해 그 효율성을 입증했습니다. 저격수의 공격을 당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저격수의 위험성을 다시 절감하게 된 셈입니다. 

 

1930년대의 특수 훈련을 받은 저격수 부대를 보유한 나라는 소련이 유일했습니다. 저격수는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어서 저격하는 기술을 연마한 것을 물론 정규군과 함께 작전하는 능력도 길렀습니다. 특수전을 강조한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소련 저격수는 정상적인 전투 상황에 초점을 맞춘 훈련을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1939년 11월 30일부터 1940년 3월 13일까지 핀란드와 소련 간에 벌어진 겨울전쟁에서는 저격수의 전설이 탄생했습니다. 

당시 핀란드군 저격수 시모 해위해(1905~2002년)는 겨울전쟁 기간 중 502~542명을 사살했습니다. 

1940년 3월 6일 소련군의 야포와 카운터 저격수의 경 격을 동시에 받아 부상을 입고 후송되기까지 미처 100일일 되지 않는 기간에 이룬 대기록입니다. 당시 전선 전역에 걸쳐 섭씨 영하 40도~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계속된 데다 극지의 겨울이라 해가 떠 있는 시간도 짧았음에도 그는 하얀 설상 위장복 차림으로 숨어 눈 덮인 벌판과 숲 속에서 하루 5명꼴로 적을 사살했습니다. 

 

핀란드 저격수의 전설인 시모 해위해 <출처: Public Domain>

해위해는 러시아 모신나강 소총 파생형의 하나로 핀란드에서 제작한 M/28-30 소총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적에게 발각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소총에 망원 조준경을 장착하지 않고 육안으로 저격했다고 하며 필요한 경우 1931년식 수오미 기간 단총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핀란드군은 기후와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하얀 눈밭에서 흰색의 설상 위장복 차림으로 스키를 타고 소련군 앞에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 이 수오미 기관단총으로 연발 사격한 뒤 순식간에 사라지는 설상 기습 전술을 구사했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눈밭 저편에서 저격수가 날리는 총탄까지 더해지자, 소련군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소련군은 해위해를 하얀 죽음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뛰어난 저격수의 존재가 적군의 사기까지 떨어뜨린 경우입니다.  해위해는 1998년 사격 실력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훈련이라고 짧게 답했으며 당시 핀란드는 저격수를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활용하였고 이는 오늘날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저격수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핀란드인의 '궁즉통'은 현대전의 교리까지 바꿔놓았습니다. 

 

3. 뒹케르크 철수 보호한 영국과 프랑스의 저격수들이다. 

프랑스군과 영국군 저격수들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후퇴하는 아군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출처: Public Domain>

제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전역에서는 개전 초부터 저격수가 다시 등장해 적극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1940년 5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 벌어진 프랑스 공방전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저격수들은 각각 적절한 위치에 은폐한 채 단독으로 활용하면서 독일군의 진격을 상당 시간 지연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병, 기갑, 포병 전력의 유기적인 합동 전술을 특징으로 하는 독일의 전격전으로 프랑스가 빠른 속도로 무너졌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저격수들은 치열하고도 효과적인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저격수들이 맹활약한 대표적인 전투가 뒹케르크 전투 또는 다이 너머 작전으로 불리는 연합군 34만 명의 뒹케르크 철수 작전입니다. 맹렬한 속도로 프랑스 영내로 진입한 독일군은 영국과 가까운 북부 항구도시 뒹케르크를 눈앞에 두고 사흘간 진격을 멈췄습니다. 

 

그 틈에 영국군 원정대와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 병력의 상당수가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대형 군함을 물론 수많은 민간인 선박까지 자발적으로 나서 병력을 본국으로 데려간 것을 두고 뒹케르크 정신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군의 진격 지연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 저격수들이 뒹케르크 주변에서 필사적인 작전으로 독일 보병의 접근을 지연시킨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 이후 영국은 다시 한번 특수 저격수 부대의 훈련을 강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하게 사격의 달인을 키우는 것은 물론 은폐를 위한 특수 위장복을 착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주변 자연환경과 구분이 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적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훈련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이 저격수 훈련 대상을 장교와 부사관에 국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투 부대에 배치된 저격수는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격수의 전체 전투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4. 스탈린그라드, 저격수가 흘린 피의 꽃밭을 이루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영웅적 저격수인 바실리 자이체프(왼쪽). <출처: Public Domain>

제2차 세계 대전 중 저격수의 활약이 가장 잘 알려진 전투 중 하나가 1942년 8월 23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벌어졌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입니다. 이전 투를 계기로 독일은 특수 저격수 훈련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포격과 공습 등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와 벽돌더미로 가득한 도심부는 소련군 저격수들이 독일 국방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기에 안성맞춤의 조건이었습니다. 

건물이란 건물은 다부분 무너져 내린 도시의 폐허 속에 숨어 있는 저격수를 찾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련군 저격수들은 어렵지 않게 독일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소련군 저격수 가운데 명성을 얻은 바실리 자이체프(1915~1991)입니다. 

그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1942년 11월 10일부터 12월 17일까지 11명의 저격수를 포함한 225명의 독일군을 사살했습니다. 자이체프의 활약상은 윌리엄 크리가 그가 1973년 펴낸 논 픽선 [에너미 엣 더 게이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자이체프가 독일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자 그를 제거하기 위해 파견된 독일 귀족 출신의 에르빈 쾨니히 대위와 자이체프 간의 팽팽한 싸움을 그린 내용이 핵심입니다. 이스토리는 2001년 할리우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핵심 플루트가 되었습니다. 영국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주드 로 가 자이체프 역으로 맡았습니다. 

 

 

5. 독일 저격수, 적의 소총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다. 

 

소련군에게 노획한 SVT-40으로 사격하는 독일군 병사. 이 소총은 독일군 저격수들도 즐겨 사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독일어로 사프프쉬첸으로 불리는 독일군 저격수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상당수 양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카르비 너 98K를 쓰다가 나중에 게 베어 43으로 장비를 교체했습니다.  이장 비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 일부 저격수 중에는 소련군으로부터 노획한 망원 조준경 장착 모신나강 1891/30 소총이나 반자동 소총인 SVT-38이나 SVT-40, 체코산 마우저 소총을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자극을 받은 독일 국방군은 저격수 훈련을 1942년 새롭게 부활했으며, 1944년까지 31개의 저격수 훈련 중대를 더해 단위부대 당 저격수 수를 비약적으로 늘렸다고 합니다. 

 

ZG 1229 야시경을 장착해 야간저격용으로 활용된 StG 44 돌격소총 <출처: Public Domain>

독일은 뛰어난 광학기술을 저격수용 망원 조준경에 적용하여 세계적인 광학기업인 차이스를 비롯한 다양한 광학업체에서 저격수용 망원 조준경을 개발해 공급했습니다. 대전 말기에 독일군은 현대 돌격 소초의 선구적인 모델로 평가받는 44년형 돌격소총 stg44에 ZG 1229 야시경을 달아 야간 저격용으로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6. 저격수 42만 명을 양성한 소련에 비해 관심이 적었던 미국!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모두 42만 8,355명의 저격수를 교육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9,534명이 최고 등급을 받았습니다.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6개월 교육반을 2개 운영하면서 모두 5만 5,000명의 여성 저격수를 양성하였다고 하며 이 가운데 2,000명 이상이 실제로 군에서 저격수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소련군은 보병 소대나 정찰 소대에 최소한 한 명의 저격수를 배치한 것은 물론, 심지어 포병이나 전차 부대에서도 저격수를 배치했으며 일부 저격수는 PTRD 대전차 라이플에 망원 조준경을 장착해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소련군 저격수 영웅 중에는 몽골 주변이나 중앙아시아 유목민 출신의 소수민족도 적지 않습니다. 

 

소련은 42만8천여 명의 저격수를 키워냈으며, 그 중 5만5천여 명이 여성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미군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 교육을 실시했으나 기초 교육 수준이었고 전술적인 저격 임무보다 장거리 저격에 치중했습니다. 저격수는 머리 부분은 200M, 신체 부분은 400M 거리에서 맞힐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으나, 주변 환경 속에 자신의 신체를 은폐하는 훈련은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훈련 내용도 훈련장에 따라 서로 차이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배출된 저격수의 실력도 들쑥날쑥했습니다.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이렇게 저격수 교육에 관심을 쏟지 않은 것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가지 미군이 제한적인 지역에만 매치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되었고 미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까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등 은폐가 쉽지 않은 건조지대나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울창한 숲 지대와 관목 지대가 많은 서유럽이나 중부 유럽과는 환경이 사뭇 달랐습니다. 

 

하지만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은 서유럽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잘 훈련된 독일군 저격수를 만나 상당한 피해를 보면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노르망디에서도 독일군 저격수들은 울창한 관목 속에 숨어 미군 부대를 에워싸고 모든 방향에서 총탄을 날렸습니다. 

 

미군과 영국군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와 공격하는 것은 물론 1,000M 이상 떨어진 원걸에서도 정확하게 사격하는 독일군 저격수들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격에 대응하는 능력이 부족한 일부 미군 병사들은 총소리가 들리면 대형을 유지하며 그 자리에서 무조건 엎드렸는데 이는 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위치한 독일군 저격수는 이들을 농작물 수확하듯이 한 명씩 차례로 사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군에게 사로잡힌 독일의 히틀러유겐트 저격수 <출처: Public Domain>

일부 독일군 저격수는 전선 후방으로 이동하기도 했으며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다 미군이나 영국군의 진격으로 후방에 남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럴 경우 저격수는 계속 위치를 유지하면서 식량과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 항복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심각한 병력 손실을 입으면서 10대 청소년까지 군대에 동원한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습니다. 

급히 동원된 이들은 복잡한 부대 전술 훈련은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히틀러 유겐트 시절부터 사격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분대 전투나 소대 전투에는 서툴렀지만 전선에서 입수한 버려진 저격용 소총을 들고 단독으로 저격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대로 훈련받은 저격수는 몇 발의 치명적인 사격을 한 다음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본 전술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자신의 안전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어린병사들은 계속 같은 은폐 장소에서 버티다 죽거나 부상을 입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실탄이 떨어져 항복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고 이런 무모함 때문에 이들은 자살 소년단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독일군 저격수는 연합군의 진격에 상당한 지장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연합군은 독일군의 저격수 교육교재와 전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습니다. 

 

7. 태평양 전선에서도 위협적이었던 저격수가 있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미 해병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저격수를 활발하게 운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태평양 전선에서는 일본군이 저격수를 양성해 실전에 투입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정글과 태평양 도서 지역에서 일본군 저격수는 미군, 영국군, 호주군 등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일본군 저격수들은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고 온몸을 풀과 나뭇가지로 위장한 뒤 작은 참호 속에 숨어 저격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인내심이 강했으며 은폐 장소에서 장시간 숨어 보티는 데 능했다고 하며 정글 전투는 불과 수백 미터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진행되는 경우가 만항 장거리 저격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였습니다. 일본군 저격수는 97식 저격총을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본군을 상대로 연합군도 저격수들을 운용했으며 미 해병대가 가장 활발했습니다. 미 해병대는 M1903스프링필드를 저격용 소총을 사용했으며 미군  M1C개런드도 저격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유럽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은 소수의 저격수를 운용했는데 망원 조준경이 달린 카르카노 모델 1891 소총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8. 베트남 전쟁의 신화 하얀 깃털 저격수 해스콕에 대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활동하던 미 해병대의 저격수 카를로스 해스콕 2세(1942~1999)는 확인사살만 93건을 기록했으며 당시에는 저격수와 관측수 외에 장교인 제삼자의 확인이 필요해 공식 기록이 이 정도에 숫자에 그쳤을 뿐이며 실제로는 300~400명을 사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카를로스 해스콕은 확인사살 93건을 기록한 베트남 전쟁 최고의 저격수였다. <출처: Public Domain>

당시 저격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면서 배트 남군은 해스콕에 3만 달러에 상당하는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하며 미군 저격수를 사살할 경우 북 배트 남군이 통산 8~2,000달러의 포상을 해온 것에 비하면 이는 엄청난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스콕은 자신을 노리는 베트남 저격수를 오히려 차례로 무력화했습니다. 베트남군은 해스콕을 '두 카치 롱 짱- 하얀 깃털의 저격수'로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는 해스콕이 자신의 군모에 하얀 깃털을 단 것에서 비롯하며 해스콕을 제거하기 위해 투입된 북 배트 남군 저격수 부대가 하얀 깃털을 단 미군을 노린 것이 확 식해 지자, 미 해병대 저격수들은 모두 자신의 모자에 하얀 깃털을 달아 적을 혼란에 빠트렸다고 합니다. 당시 미 해병대 저격수들의 끈끈한 연대감을 엿볼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스콕은 다낭 서남 지역의 55 고지에서 관측수 존 버크와 함께 어는 북 베트남 저격수의 망원경 안에서 총탄을 발사해 눈을 관통해 머리에 명중시켰으며 이처럼 양측 저격수가 서로 일직선상에서 서는 것은 드문 경우인데, 이럴 경우 약 측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스콕의 북 베트남 저격수보다 먼저 기만하게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며 코브라로만 알려진 이 북베트남 저격수는 그전에 이미 수명의 미 해병을 사살했는데, 해스콕을 무력화하러 온 저격수였을 것을 짐작된다고 합니다. 

미군이나 남베트남군 포로를 잔혹하게 고문한 되 다랴의 출혈로 숨지게 한 것으로 악명 높아 아파치라는 별염을 얻었던 베트콩 저격소대의 여성 소대장도 해스콕의 총탄에 무력화되었다고 합니다. 

 

9. 목표를 무력화한 일발 필살의 신화- 3박 4일간 포복을 하며...

해스콕은 무려 3박4일 동안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하여 저격을 성공시킨 사례도 있었다. <출처: Public Domain>

헤스콕을 유명하게 한 전과는 1967년 3박 4일간의 끝 질긴 추적 끝에 복 베트남군 고위 장교를 1,500야드(약 1371.6m) 거리에서 저격한 것입니다. 이 임무를 그이 베트남 1차 파견이 끝나기 직전에 이뤄졌다고 합니다. 

헤스콕은 귀국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어려운 임무를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온몸을 초목과 나뭇잎으로 덮고 풀밭 위를 조금씩 포복으로 이동해 사격 지점을 향했다고 합니다. 적은 이러한 그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목표물이 시야에 들오자 그는 단 한 발을 발사해 가슴에 적중시켰습니다. 목표물은 즉시 무력화되었습니다. 

 

헤스콕은 이 3박 4일 동안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잠도 거의 자지 못했으며 용 본도 옷을 입은 채로 해결해야 했으며 배설물을 바지 속에 넣은 채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한 일은 저격수의 어려운 임무를 잘 보여주는 사계로 미 해병대에서 지금도 인용된다고 합니다. 

 

당시 해스콕은 자신의 상징이던 하얀 깃털도 제거하고 작전에 임했으며 저격 임무에 무게를 보여주는 일화들입니다. 

1966년 베트남에 도착한 해스콕은 미 해병대 1개 소대에 1명 이상의 저격수를 배치하는 저격수 양성 프로그램을 맡은 짐랜드 대위에게 발탁되어 훈련을 받았으며 교관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 훈련 프로그램에서 사용했던 구호는 지금도 미 해병대 저격수 훈련 과정에서 사용되며 그 말은 바로 '원샷 원킬(일발 필살)입니다. 이는 국적을 떠나 전 세계 모든 저격수의 전술 목표라고 합니다. 

 

한편 해스콕의 대기록은 이라크 전쟁에서 확약한 네이비실 소속 저격수인 크리스 카일 중사가 확인사살 160건을 기록함으로써 깨졌다고 합니다. 크리스 카일의 삼과 기록은 비극적인 총기사고로 2013년 사망한 후 그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10. 테러와 전쟁으로 계속되는 장거리 저격 기록 경신하다. 

위장복인 길리 수트를 입고 L115A1 저격용 소총을 조준하고 있는 영국 해병대 저격수 <출처: (cc)Francis Flinch at wikimedia.org>

해스콕은 베트남 전쟁 중 2,286m 떨어진 거리에서 목표물을 명중시켜 최장거리 저격의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35년 동안 깨지지 않다가 2002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캐나 가군의 롭 펄롱이 2,430m 거리의 저격을 성공하면서 깨졌습니다. 롭 펄롱의 대 기록은 2009년 11월 영국 육군의 크레이크 해리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2,475m 거리에서 목표물을 무력화하면서 새롭게 갱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기록도 2017년 5월 캐나다 특수부대인 JTF-2의 저격수가 이라크에서 3,450M 거리에서 저격의 성공함으로써 또다시 갱신되었습니다. 저격수의 기술과 전술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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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베스트셀러 전투기 F-16 전투기가 21세기에 맞추어 4.5세대 전투기로 거듭난 F-16 바이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F-16V의 모습. 기수의 뾰족한 돌기는 피토관 외에 센서류이며, 조종석 좌우에 삼각형으로 튀어나온 부분이 여분의 연료를 탑재한 컨포멀 탱크(CFT: Conformal Tank)이다. (출처: Lockheed-Martin Corp.)

 

1. 개발 역사 및 배경에 대해 알아보기.

1978년에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된 50년 가까이 4,600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된 F-16 시리즈는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4세대 전투기라 할 수 있습니다.  F-16이 등장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로 미국에 경량형 전투기 사업(LWF)을 꼽을 수 있습니다. 

1-1. 미국에 경량화 전투기 사업 배경

미공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추진한 야심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종사이자 학자인 존 보이드 대령과 국방구 관료인 동시에 수학자인 토머스 크리스티 박사가 제창한 에너지 기동성 이론에 입각하여 전투기 요구도를 수립한 사업이라 합니다. 

이 이론의 골자는 최소한 에너지 손실로 기동 할 수 있는 작은 경략급 전투기가 향후 공중전에서 우세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동조하는 집단은 - (전투기 마피아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미 공군은 이 이론에 기반하여 LWF 사업을 추진하였고 1972년 제안요청서를 발행하자 제너럴 다이내믹스, 노스롭을 포함한 5개 업체가 RFP에 회신을 하였으며 공군이 그중 2개 업체를 추려 제너럴 다이내믹스가 모델 401과 노스롭의 P-600으로 선정하여 파이터 마피아는 LWF 사업이 반드시 추진될 수 있는 예산이 할당되도록 노력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미 공군은 결함 끝에 제너럴 다이내믹스의 모델 401을 LWF사업 기체로 선정했으며, 제식 명칭 YF-16을 부여한 후 별칭으로 매를 뜻하는 펠컨(Falcon)이 붙여졌다고 하며 실제 야전에서는 독사를 의미하는 바이퍼라는 별칭으로 통용됐다고 합니다. 

 

이후 양산기로 채택된 F-16의 활약은 전 세계적으로 눈부셨습니다. 

2010년까지 전 세계 27개국에 4,500대가 넘는 F-16이 팔렸고, 대한민국, 일본, 중화민국(타이완)등에는 기술 이전 형태로 기술이 전수되어 F-16 설계에 기반한 한국항공 우주산업 T-50 골든이글이나 일본의 미쓰비시 중공업의 F-2, 타이완에 AIDC의 F-CK-1징궈전투기등이 탄생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1-2. F-16 바이퍼 탄생 배경

 

반세기 넘게 고객의 요구도 변화를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진화해온 F-16 시리즈는 2010년대로 넘어오면서 최종 진화작업에 돌입하게 됩니다. 특히 주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가맹국이나 미국의 동맹국 공군의 주기종이 서서히 F-35 라이트닝 2로 바뀌어가고 있고, 미공군 역시 5세대 전투기인 F-22 랩터 및 F-35를 주 기종으로 운용하는 만큼 4세대 전투기인 F-16도 상호 운용성 향상을 위해 업그레이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F-16이 기대받는 능력은 적 방공망 제압(SEAD) 임무 외에도 공대공, 공대지, 적지 종심 작전 및 해상 차단 능력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요 잠재 적국의 주 기종 역시 계속 능력이 진화하고 있으므로 이에 맞춰 F-16의 능력도 향상할 필요가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적기의 원거리 탐지 및 포착 능력, 실시간 추적 능력, 전천후 상황에서 탐지가 어려운 표적의 식별 능력 등이 필요해졌고, 무엇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운용 유지비를 최소화하는 것이 미래 F-16의 방향성이었습니다. 

 

F-16바이퍼 관령 동영상 이미지 

무엇보다 구형 F-16의 업그레이드가 가장 절실했던 국가는 초기 형상인 F-16(A/B)을 도입한 타이완이었습니다. 

타이완은 미국의 부시 행정부 시절이던 1992년 대만 관계법에 의거하여 피스 펭후앙 사업을 통해 150대의 F-16블록 20형(120대 A형과 30대의 B형)을 도입을 하였습니다. 

 

당시 타이완은 기존에 운용하던 노후 F-104 스타 파이터와 F-5E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해 F-16 도입을 타진하였으며 미국은 중국을 자극할 가능성 때문에 F-16 후기 형상(C/D)이 아닌 초창기 형상을 판매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초기형 F-16 150대는 노후 F-5E만 교체할 정도의  물량이었으며  J-11등 중궁 인민해방군 공군의 신형 기종에 대응하기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타이완 정부는 계속 미 정부에 신형 전투기 판매를 요청하였습니다. 타이완 정부는 최초 F-35 라이트닝 2 도입을 희망하였으나 미 정부에서 끝내 판매 사인을 해주지 않아서 F-16C/D형 추가 도입으로 방향을 틀어 협상을 진행하였습니다. 

 

오랜 협상 끝에 미 정부는 1999년 타이완에 F-16 브록 52형으로 66대를 판매하기로 했으나 2000년 5월, 타이완의 신임 총통으로 야당 민진당 소속의 첸슈이바엔 후보가 당선되자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중화민국 입법원은 F-16C/D형 추가 구매 예산을 빼 버리게 됩니다. 

 

미국은 이 상황에서 타이완과 계속 협상을 진행하고자 했으나 난항이 계속되자 2005년에 협상을 중단했으며 타이완은 2008년 국민당의 마잉주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자 다시 F-16 도입을 놓고 미국과 협상을 재개했으나, 이번에는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당시 세계 기후변화 이슈를 주도하던 믹구는 중국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중국을 자극할 수 있는 타이완에 대한 신형 전투기 판매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중국 인민 해방군의 전려기 급속도로 현대화하면서 양안 간 재래식 전력의 대칭성이 크게 무너질 조 집이 보이게 되자 오바마 행정부는 신규 전투기 판매 대수가 기 보유 전투기의 업그레이드를 제안했고 오바마 행정부는 1992년에 판매한 F-16A/B형중 약 100여 대를 업그레이드하는 방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어쨌든 신규 판매가 이 니므로 대만 관계법을 위반하거나 중국을 자극할 명분을 주지 않았으며 타이완 입장에서는 신기종에 가까운 업그레이드 기체를 얻을 수 있으므로 쌍방을 모두 만족시키는 묘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의 F-16 제 조사 인 록히드 마틴은 타이완의 현지 항공업체인 AIDC(한샹항공공업 분유 공사)와 공동 투자 형태로 F-16의 새 형상을 개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최신 형상에는 V라는 형상 부로를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별칭도 V라는 부호와 머리글자를 맞추기 위해 그간 비공식적으로 불려 온 이름인"바이퍼"로 정하게 됩니다.. 

 

한편 미공군 역시 초창 기형 F-16A/B형의 현대화가 필요해졌기 때문에 2012년부터 F-16 업그레이드 사업을 통칭 CAPES사업을 발주 하아였고, 원 제조사인 록히드 마틴(최초 제작은 제너럴 다이내믹스 했으나, 1992년 항공 부분만 분리해 록히드에 매각)에 사업을 의뢰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과 타이완 양국은 공동을 F-16 업그레이드 사업을 시작하였고 우선적으로 집중한 부분은 F-16의 스텔스 성의 향상과 능동현 전자 주사식(AESA) 레이더의 장착이었습니다. F-16V는 AESA 레이더 장착 외에도 신형 전자전 장비와 항전장비를 교체했고, 조종석을 전면 디지털식으로 바꾸었으며, 정보 교신량을 증가할 수 있도록 용량과 처리 속도가 향상된 데이터링크 체계를 깔았습니다. 또한 항속 거리를 향상하기 위해 F-16E/F에서 이미 적용된 적이 있는 항공기 외장 장착형 연료탱크 통칭 '컨포멀 텡크(CFT)를 설치하였고 록히드 마틴은 F-16V사향으로 업그레이드된 F-16블록 70형을 같은 해 2월 15일에 열린 싱가포르 에어쇼에서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미공군은 CAPES사업을 예산 문제로 진해를 못하다가 취소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업이 절실했던 타이완은 자비 부담을 늘리면서 까지 F-16V의 개발 및 시험 예산을 댔고, 그 결과 2015년 10월 16일에 F-16-V의 초도비행을 실시하게 됩니다. 

 

F-16V는 이날 처음으로  AM/APG-83 세이버 AESA 레이더를 F-16V에 장착하고 비행했습니다. 

F-16V의 신규 판매 수익을 배분하기로 했습니다. F-16 시리즈는 전세적으로 4,600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인 만큼 앞으로도 한참 동안 더 '바이퍼'로 진화한 팰컨이 전 세계 하늘을 누비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2. F-16 바이퍼 특징 알아보기. 

큰 틀에서 볼 때 F-16V의 외형은 기존 F-16의 모습과 유사하나, A/B/C/D형상보다 블록 60/62형인 E/F형상에 가깝다고 합니다. 

우선 F-16V의 조종석 계기판 중웅에는 이스라엘 엘빗 시스템즈에서 개발한 6"× 8"의 대형 기둥형 디스플레이창이 설치됐으며 최신형 미션 컴퓨터, 용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이더넷 데이터 버스, 신형 자동 지상 충돌 회피 시스템을 비롯, 항전장비와 전자장비 체계가 대폭 향상되었습니다. 

 

특히 V업그레이드는 블록 형상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현존 F-16을 대상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는 점이 가증 크 장점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F-16V의 조종석 디스플레이 목업. 패널 중앙 하단에 기둥식 대형 디스플레이 창(CPD: Center Pedestal Display)이 특징적이다. (출처: Chris Pocock/AINOnline)

F-16V가 기존 F-16A~F형과 가장 현격한 성능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레이더 탐지 및 운용능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제조사인 록히드마틴은 기존 F-16 시리즈에는 통합이 어려웠던 AESA 레이더를 통합하는 핵심 기술을 개발해 초기형 F-16에도 AESA 레이더 장착이 가능해졌습니다. F-16V에는 노스롭 그루먼사의 AN/APG-83 압축형 고소 빔(SAVR"세이버") 레이더가 채택되어 기존의 AN/APG-66이나 AN/APG-68 레이더를 대체한다고 합니다.

 

AESA 레이더는 다층 영억에 레이더 신호를 뿌릴 수 있어 상대방에게 역탐지 당하거나 재밍당할 가능성이 낮으며, 반도체 소자를 이용해 항공기 주변이 탐지 영역과 범위,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하며 AN/APG-83 레이더는 기존 기계식 레이더에 비해 처리능력과 전송 속도가 높아졌으며, 원거리에서도 현저하게 뚜렷한 지상 지형을  그려낸다고 합니다. 

 

최대 탐지 범위가 370KM를 넘어가며 대당 가격은 250만 달러로 알려져 있습니다. AN/APG-83 레이더는 전천후로 표적 탐지 및 획득이 가능하며, 신형 능동/수동 내부 전전 체계(바이퍼 실드)가 통합되어있어 전전대 응이 가능하다 합니다. 

 

v사양 업그레이드 패키지는 고객 국의 요구에 따라 바뀔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능동형 전자 주사식(AESA) 레이더, 모듈실 미션 컴퓨터, 대용량 고속 이더넷 링크 데이터 통신체계, AN/APX-125 고급 피아식별장치, LN-260 내장형 GPS/INS, 고급 레이더 수신 경고장치(RWR), 적외선 수색 추적(IRST) 장비, AN/ALQ-213 전자전 관리 장치,, 합동 임무계획체계(JMPS), 합동 헬멧 고정식 추적체계(JHMCS) 2, 자동 지상충돌 회비 체계, 3-D 오디오 장착 디지털 의사소통 시스템 등이 교체 혹은 설치된다고 합니다. 

 

또한 엔진을 통제하는 디지털 비행 통제 컴퓨터도 성능이 개선되어 오토파일럿이나 오토 스트롤 성능이 향상됐습니다. 

F-16V는 AESA 레이더가 장착됨에 따라 스탠드오프 계열 무장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통함 가능해진 대표적인 무장은 GBU-54 레이더 합동 정밀직격탄(LJDAM), GBU-39 소구경 폭탄(SCB), CBU-105 풍향 보정 확산탄(WCMD), AIM-9X사이드와인더 등이 있습니다. 

 

F-16V는 제한적으로 방공 제압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 AMG-88 대방사 미사일(HARM)이나 합동 정밀직격탄(JDAM)등을 운용하여 적 레이더 시설을 타격할 수 있다고 합니다. 

 

F-16V에는 록히드마틴의 스나이퍼 표적획득 포드가 장착되어 있어 자동으로 표적을 식별 및 추적하며, 정확한 표적의 GPS 위치를 계산할 수 있으므로 스탠드오프 범위 안에 표적이 있다면 정밀 유도무기로 제거할 수 있다고 합니다. 

 

록히드 마틴은 주로 기존 운용 중이던 구형 F-16을 대상으로 F-16V사양 업그레이드를 실시하고 있으나, 향후 주문 고객이 있을 경우 처음부터 V 사양에 맞춰 개발한 형상인 F-16블록 70/72형을 양산할 예정입니다. 

록히드마틴은 현제 소수의 신규 국가가 새로 제작한 F-16V 구매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므로 조만간 F-16V의 양산이 시작될 것을 보입니다. 록히드 마틴은 F-16V사양 업그레이드를 적용할 경우 2060년까지도 운용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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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자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보신 무기 쌍차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무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근접무기 중 하나입니다.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근접무기 쌍차 이미지

1. 쌍차 무기 개요

중국과 동남아 등 아시아 각지에서 사용한 무기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쌍차 무기의 형태 

무기의 형태는 위 사진을 보시다시피 쇠막대 양쪽으로 가지가 나 있는 모양이며 삼지창의 날처럼 생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방향으로 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지만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향한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무기는 일본에서 만지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3. 쌍차무기 명칭의 유래 알아보기 

무기의 명칭을 알아보면 쌍차라는 이름이 많이 쓰이며 일본에서는 사이, 중국에서는 철척, 팔 기차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영어로 sai라고 하는 것이 일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임속에서 쌍차를 사용하는 워존 동영상 모습입니다. 

4. 쌍차 무기 사용법 및 상세 내용

사용법을 살펴보자면 한 손에 들고 사용하거나 양손에 하나씩 들고 사용하며 쌍차라는 명칭도 두 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자주 보여서 그런 듯합니다. 심지어는 세게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파지법은 날이 몸 앞을 향하게 바로 잡는 것과 날이 팔꿈치 쪽으로 향하게 하여 거꾸로 잡는 것이 있습니다. 가지를 이용하여 바꿔 잡을 수 있으며 쌍차를 상용함에 있어서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동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용법은 위 동영상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

 

또한 중국에서는 후난, 푸젠 광둥 등 남부 지방의 객가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무기로 보이며 일본에서는 쌍절곤, 톤파 등과 마찬가지로 원래 일본의 고무 술에는 없었고 오키나와의 고무 술에 존재하는 무기였다고 하며 일본에 유입되면서 닌자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다만 일본의 무기 중에 짓테가 있으며 보통 가지가 하나만 있지만 쌍차처럼 두 개가 달린 것도 존재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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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육군에 대표 메이커 부대인 맹호부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맹호부대 로고와 월남점 파병당시 군인의 모습 이미지

대한민국 육군의 기계화 보병사단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 창설된 부대이며 메이커 사단 중 하나입니다. 

상징명칭은 맹호 부대이고 경례구호는 맹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016년 기준으로 사단 공식 구호" 강한 수기사! 살맛 나는 맹호부대!"이며 이전 공식 구호는 "조국이 부르면! 맹호는 간다!"라고 합니다. 

 

약칭은 수시사로써 수방사, 정보사 같은 사령부의 약칭인 줄 아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특히나 수바사와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에 배속받은 신병들은 서울 간다고 조하기도 합니다만 이름과는 다르게 서울에 있는 부대는 아니고 경기도 동북부 가평, 포천 쪽이라 보면 됩니다. 

차라리 30 기계화여단이 서울에서 더 가깝습니다. 실제로 이름만 보고 수도에 있는 줄 알고 좋아했다가 실망했다는 병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수도군단과 비슷한 케이스이며 그래도 둘 다 수도권인 경기도에 있으니 틀린 명칭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1. 맹호부대의 역사 

1949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로 창설되었는데 당시에는 그 명칭처럼 서울 향토방위를 담당하던 경비부대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발발하고 한강방어선 전투를 끝으로 서울이 함락되어 수도방위라는 의미가 사라지자 7월 5일 해체 후 (구) 수도사단(현: 7사단)으로 부터 수도 명치과 1 연대를 넘겨받아 7월 8일 1,8,18 연대 근간의 수도사단으로 재편한 게 현재의 수도사단입니다. 

 

이 신생 수도사단 역시 박격포 정도가 중화기였을 정도로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진천 전투를 치르었으나 김석원 준장의 활약으로 북한군 2사단을 7일간 묶어두었고 청주 전투에서도 민가에서 빌린 곡괭이와 대검으로 진지공사를 해야 할 정도였으나 이역시 부대 건재를 유지하며 속리산을 거쳐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그 후 안강-기계 전투를 치를 때 제7보병사단 재창설을 위해 8 연대가 떠났고 그 빈자리에 독립 기갑연대가 예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천 상륙 자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통일의 꿈을 안고 청진까지 맹진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흥남에서 배를 타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통일이 꿈을 안고 청진까지 맹진하였으나, 중곡 군의 개입으로 흥남에서 배를 

타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와중에 18 연대가 3사단 26 연대와 배를 바꿔 탄 버렸는데 처수의 난잡함 속에서 원대복귀를 위해 서로 목적지를 바꿀 수도 없어서 결국 연대를 맞교환해 18 연대 대신 26 연대가 예속되었습니다. 그 후 38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고지전에 투입되기도 했으며 (수도고지- 지능형 능선 전투 등) 이따금 후방의 지리산 공비 토벌에도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휴전 협정 이후 수도사단은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과 이동면에 산재해 있게 되며 1953년 9월 18일 기갑연대 3대대 11 중대장 안도현 대위와 일행 장교가 2개 중대를 이끌고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으로 이동했는데, 이후 이 중대들은 훗날 제27보병사단의 모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지역 향토방위 위주 보대로 제6군관구 사령부(현 수도군단)와 30사단(현 30 기갑여단), 33사단(현 17사단)이 담당하게 되었으며 지금의 수방사는 1961년 용산구 후암동에서 재창설된 수도경비사령부의 후신이라 합니다. 

베트남 전쟁 때 파병된 부대중 하나이며 현재도 최정예 부대로 수도권 방위 및 반격 작전의 중추를 맡고 있다고 합니다. 

 

베트남전에서 철수한 사단은 사실상 해체 도니 상태였으나 (베트남전 파병 시 여기저기서 파견을 받아 병력이 운용되었기에) 미 7사단 철수 시 장비를 인수받아 최초의 기계화사단이었던 32사단이 수도사단으로 단대호를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현재는 제20 기계화 벼 병사 단과 함께 제7군단의 예하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현제 경기도 일대에 주둔하고 있다고 합니다. 

1980년대 이전에는 제5군단의 예하부대로 편성되어 있던 적이 있으며 지금처럼 제7기동군단으로 편성된 것은 1983년 이후입니다. 그 당시 막 기계화보병사단이 된 제20 기계화 보병사단과 함께 제7군단 예하로 예속 변경이 되었습니다. 

 

2. 맹호부대의 특징 알아보기

일반 소속 부대 역시 훈련의 강도가 높고 빈도도 매우 잦은 편이고 맹호부대에 입대한다면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고 합니다.  한전 역자가 말하길... 장갑차 좀 탔다 내렸다 하다 보면 전역한다. 정말 훈련 빈도는 지나칠 정도로 놀아서 한 달에 3회, 심하면 4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며 준비태세만 하루에 4번, 훈련-복귀 훈련- 복귀를 반복하다 보면 당신도 어느새 전역한다. 

한때는 국군에서 제일 먼저 최신장비를 배치받았지만 지금은 제20 기계화보병사단에 밀리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덕에 수시사에서는 20사단을 테스트베드 부대이기 때문에 장비들이 먼저 들어오는 거지 수시 사랑 붙으면 양기 사는 상대도 안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히는 k1전차는 수기사가 그 이후 개량형인 K1A1과 K21 장갑차는 20사단이 먼저 지급받았으며 이제는 K2 흑표전차도 20사단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K21은 수기사에도 배치가 되고 있고 어느새 전량 배치가 완료되어 있으며 2015년까지 점진적으로 확정하였다고 합니다. 

더불어 최신장비 들어온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닌 것이 이전에 쓰던 주차호를 전부 없애고 새로 만들어야 하고 그에 따른 교리 및 교범 사용법 등이 바뀌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다시 교육훈련을 실시해야 하므로 그만큼 간부나 병사나 죽어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걸 종합적으로 따져볼 때 실상은 붙으면 그게 그거입니다. 

 

20사단이 화력 최강부대라고는 하지만 최신 장비가 언제나 1 순의 배급되는 같은 7군단인 이상 수기사와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해병대의 구호인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의 원조가 "한번 맹호는 영원한 맹호"라는 말이 있는데 한국 해병대의 "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은 '미 해병에 "Once Marine, Always Marine'에서 빌려온 구호이어서 당연히 틀린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월남전에서 접촉한 맹호 부대원들이 임의로 자신들의 구호로 차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맹호부대 가 동영상

 

3. 명칭과 상징  알아보기 

일반적인 사단과는 달리 번호로 매기는 형식이 아닌 저런 식의 이름을 채용하는 지라 면 사다인지 궁금해하는 훈련병들도 존재합니다. 숫자로 분류할 시에는 대체적으로 0사단이나 10 사산이라고 부르며 애초에 다른 사단과 달리 숫자로 명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라도 말하지 않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게도 제3보병사단 하고 많이 엮이는데 그 이유는 원산 최초 입 서문제가 있습니다. 이유는 원산 전투 다시 원산에 함께 투입된 제3보병사단과의 전투 지경선이 애매하게 설정된 탓에 서로 이를 자주 침범했고, 급기야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과 3사단 26 연대장 이차 엽 대통령이 여왕산 산록에서 옥신각신 하까지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문제는 서로가 원산에 먼저 입성했다고 주장하는 수준으로 번졌고 차다 못한 당시 1 군단장이었던 김백일 장군이 당시 사단장이었던 이종찬 장군과 송요찬 장군을 불러 공동 입성으로 합의시켰다고 합니다. 

 

상징은 울부짖는 호랑이. 맹호 마크의 의는 외곽의 방패는 국가방위, 포효하는 호랑이는 용맹한 비호부대, 번득이는 눈은 번개부대, 녹색 바탕은 희망을 상징하며 혜산진 부대를 나타냈습니다. 

적색 맹호 혓바닥은 수기사 포병여단, 백색 둘레는 단결을 의미합니다. 군북의 부대 마크는 보안 문제로 한동안 폐지되었다가 1982년 여름에 다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병사들이 휴가를 나라깨 마장동 군장품 가계에서 사제를 부착하고 했었으며 그런데 새로 지급 도니 마크에 비하면 사제는 그야말로 엉성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사실 부대 마크가 새로 디자인되었기 때문으로 인터넷을 뒤지면 훨씬 볼품없는 예 마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타사 단과 달리 맹호 마크는 위낙 복잡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현재는 위장용 투컬러 패턴의 마크로 교체되어 저 원색의 부대마크는 일반 전투복에서는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다른 부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전차 전면 장갑 등에 그려 넣었던 부대 마크도 전부 지워진 상태이며 공식적으로 원색 마크를 사용할 수 있는 복장은 근무 목 이난 정복 아니면 예복 물론 사단 소속 병사는 군악대가 아니라면 평생 입어볼 일 없는 옷들입니다. 

 

전역 때 군장점에서 원색 마크의 휘갑치기를 쳐서 나갈 수는 있다면 디지털 전투복에 이 약장을 달면 너무 눈에 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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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록히드가 최초로 만든 저 투기인 P-38 라이트닝 전투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록히드가 치초로 만는 P-38라이트닝 쌍발기 비행하는 모습&nbsp; 출처:Public Domain

 

1.  개발 역사 알아보기.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에 미군이 운용했던 전투기의 성능은 좋지 않았습니다. 육군 항공대의 주력인 p-40은 1939년부터 양산을 시작한 신예 기였습니다만 독일의 BF109와 비교했을 때 현격히 열세였습니다. 해군 항공대의 F4F도 일본의 A6M에 밀렸습니다. 그런데 기술 겨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지리적 상황을 고려한 미국의 군사 전략 때문에 전투기보다 폭격기 분야에 우선시하며 벌어진 현상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미국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운이 감돌자 신예기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전쟁 후반기에 하늘의 재왕으로 활약한 P-47, P-51, F6F, F4U 등은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어기에 제때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걸작 전투기 등보다 조금 먼저 등장한 P-38 라이트닝은 비록 명성은 덜하였지만 태평양 전역과 유럽 전역 야측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미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책임졌던 마당쇠 같았던 전투기라 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 들어 P-35, P-36을 서둘러 도입했음에도 여전히 가상적국의 전투기와 대등하게 맞설 수 없음을 인식한 육군항 공대는 1937년 2월 새로운 고고도 요격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항공기 제작 자사들에게 내세운 조건은 최고 속도가 시속 640km, 6분 안에 고도 6,500m까지 상승이 가능하였으며 무장을 강력한 20mm 기관포 장착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많은 업체가 참여해서 치역 하게 경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록히드는 한창 켈리 존슨이 개발 중이던 모델 22를 기반으로 설게 한 후보작을 당국에 제출했으며 제안을 평가한 육군은 타당성이 있다고 보고 xp-38이라는 이름을 무 여하고 개발을 지시했으며 후신인 록히드 마틴은 오늘날 세계 최대의 방산 업체이지만 당시에는 10~20인승 여객기만 만들던 업체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p-38은 록히드가 최초로 만든 군용기였습니다. 

 

 

P38라이트닝관련 동영상

XP-P38은 경쟁을 벌인 벨의 XP-39, 커티스의 XP-40과 비교했을 때 엔진이 2개인 쌍발기여서 외형부터 차이가 많았습니다. 고속으로 비행하려면 엔진이 중요한데 당시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전투기요 엔진의 성능은 그다지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엥 켈리 존슨은 엔진 두 개를 탑재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록히드는 쌍발 여객기를 많이 만들었기에 관련한 노하우는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XP-38자와에 엔진을 장착한 동체를 주익과 수평미익으로 연결한 쌍동 기체입니다. 

 

중앙에 조종석을 배치했는데 엔진이 외부로 빠지면서 빈 전방 공간에 폭격기 요격도 가능한 강력한 무장을 장착했습니다. 

랜딩기어가 좌우 동체와 조종석에 장착되어 있어서 주기할 때나 이착륙 시에 기체를 수평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구조였습니다. 

 

 

사업 이전에 이미 연구가 진행된 상태였기에 XP-38의 개발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져 불과 1년 반 만에 기체가 완성되었고 1939년 1월 27일에 초도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진종 문제처럼 개선할 부분이 많기는 했지만 처음에 유구했던 것보다 빠른 시속 675km를 기록했습니다. 

 

결과에 고무된 육군은 양산 전 단계로 무장을 갖춘 YP-38 실험기 13기를 발주했으며 이후 일사천리로 테스트가 이루어졌고 9월에 P-38이라는 제식명이 부여되었습니다. 

 

독일과 교전상태가 된 영국이 1940년에 자국 요구 사항에 맞춰 엔진과 과급기가 변경된 3기의 라이트닝 1을 도입해 시험을 실시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가 나와 구매를 포기했으나 사실 이는 록히드 개발진도 반발했을 만큼 기체의 특성을 무시한 형식 변경이었기에 좋은 결과가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에 초기 납품 물야도 고속비행이나 급강하 시에 조종이 어려운 문제점이 발견되기도 하였다고 하며 이후 다이브 플림을 장착해 어느 정도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1941년부터 양산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진주만 급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지상 기지를 기반으로 한 육군항공대의 전투기여서 실전은 1942년 여름 이후에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대서양에서 아군 함정, 선상보호를 위해 아이슬란드, 영국 등에 전진 배치되어 비슷한 시기에 유럽 전역 참전도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제2차 대전 당시에 미군이 유럽과 태평양에서 운용하던 작전기가 달랐으며 전자는 육군이, 후자는 해군이 주도한 전장이어서 벌어진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투기의 경우 P-47, P-51은 유럽에서 F6F,, F4U는 태평양에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반면 장거리 비해잉 가능한 P-38은 보다 넓은 공역에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이점을 살려서 양쪽 전역에서 골고루 활약했습니다. 상당히 예외적인 미국의 전투기였습니다. 

 

 

2. 운용역사 알아보기 

P-38은 프로토타입을 포함해 총 10,037기가 제작되었습니다. 

P-47, P-51의 생산량이 15,000 여기 정요였던 점을 고려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수량이며 태평양과 유럽 모두에서 활약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상적인 전과의 대부분은 태평양 전역에서 기록했습니다. 사전에 정보를 획득하고 벌인 작전이지만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인 아마모토 이 소쿠가 탑승한 G4M 폭격기 격추 사례는 상당히 유명합니다. 

 

정찰 기형 일부가 호주, 중국 등에 공급된 것을 제외한다면 제2차 대전 중에 전량 미 육군이 운용했으며 전쟁 후반기인 1943년부터 2 선급으로 물러나지 시작했고 종전 후에 공군이 독립하면서 F-38로 제식명이 바뀌었으나 1949년에 미군에서 완전히 퇴역했습니다 일부가 이탈리아, 콜롬비아, 도미니카 등에 판매 혹은 공여되었고 온두라스에서 1965년까지 운용한 것이 마지막이라 합니다. 

 

3. 제원 살펴보기 

전폭 15.85m
전장 11.53m
전고 3.91m
주익 면적 30.43㎡
최대 이륙 중량 9,798kg
엔진 좌) 앨리슨 V-1710-111 12기통 수랭식 피스톤 엔진, 1,600hp(1,200kW)×1
우) 앨리슨 V-1710-113 12기통 수랭식 피스톤 엔진, 1,600hp(1,200kW)×1
최고 속도 666km/h
실용 상승 한도 13,000m
무장 이스파노 20mm M2 기관포×1
 브라우닝 12.7mm M2 기관총×4
  M10 3연장 4.5인치 로켓발사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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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 민스크 전투에 대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민스크 시내 모습 이미지

1. 인류사 중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을 기습 침공하였습니다. 흔히 동부전선 이록 부르며 제2차 대전을 구성하던 하나의 전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라는 정의 해도 무방한 독소전쟁이 발발을 하게 됩니다. 러시아(소련)에서는 대조국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한마디로 강철과 강철이 정면으로 충돌하였은 인류사 중 최대의 재앙으로 불리는 전투입니다. 

 

역사에 일일이 기록될 수 없을 만큼 그동안 수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독소전쟁만큼 격렬하고 잔인한 전쟁은 없었으며 불과 4년이라는 기간 동안 430만의 독일군을 포함한 무려 500만의 추축국 병사들이 사망을 한 전투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1000만의 군인이 전하고 더불어 1,500만의 민간인이 전쟁의 폭풍 속에 사라져 간 소련에 비해 그다지 많은 숫자라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물절 피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인적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적, 물절 피해가 어마어마했던 이유는 편 혐한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나치와 이에 못지않은 볼셰비키가 조도한 충돌이라는 점도 있었고 일단 규모가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장소였만 일부 한정된 공간에서만 싸움이 벌어진 130여 년 전 나폴 레오의 원정 당시와 비교한다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1942년 말에 전선의 길이는 남북으로 2,500km에 달할 정도였으며 4년 동안 동서로 왕복 5000km를 이동하며 쉼 없이 교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동안, 그런 거대한 공간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전투들이 벌어지며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파르티잔의 소규모 특공 전도 있었지만, 전쟁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같은 거대한 충돌들도 많았으며 독소전쟁은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전투들의 집합체 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거대 전투 중 하나였 연 1941년 6월 민스크 전주는 독소전쟁의 서막을 알린 역사적 전투입니다. 

 

 

2. 작전명 바바로사에 대해 알아보자.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 독소전쟁의 발발 원인은 너무 많아 여러 권의 책으로 발행해도 모자랄 만큼 방대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히틀러입니다. 사실 아무리 국민 간의 감정이 나쁘더라도 전쟁은 그렇게 쉽게, 그리고 함부로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은 아닙니다. 모든 전쟁은 예외 없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한 권력자나 집단의 확고 부동한 의지에 의해서 벌어집니다. 히틀러는 동방에 순수 아리아인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임을 누누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목적을 달서 하기 위해 소련과 절멸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였을 정도로 전쟁에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망성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을 보유하자 실제로 소련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40년 12월 18일, 총통 명령 21호를 통해 히틀러는 OKH(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에 구체적인 소련 침공 계획을 입안하려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러한 총통의 의지에 따라 OKH는 바바로사 계획으로 명명된 치공 안을 수립하였으며 침공 4개월 안에 소련의 핵심을 붕괴시키고 볼가강 하구에 아스트라한에서 백해의 아르한겔스크에 이르는 이른바 A-A선까지 진출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당초 독일은 1941년 5월 15일 작전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유고슬라비아 점령 때문에 5주라는 시간을 날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후 소련이 살아날 수 있게 된 천금 같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겨울 눈보라와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물러난 히틀러는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초상화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나에게 지난 간 5주를 돌려달라고 절규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나 OKH모두 자신감이 충만했던 1941년 5주라는 시간의 중요함을 몰랐습니다. 

 

3. 사상 최대의 침공군 조직하다.

소련 침공을 위해 독일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침공군을 준비하는 독일군의 모습 이미지

독일은 소련을 일거에 석권하기 위하여 33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여타 추축국과 위성 국가들로부터 50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았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기점으로 전선의 주역으로 정립되어 가던 전차 3,300여 대와 작전기 2,000 여기가 투입되었습니다. 이는 당시까지 지구 상에 등장한 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었습니다. OKH는 이러한 대군을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군이라는 거대한 3개 병단으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관할 육해공군을 망라하여 구성된 이들 집단군은 북에서 남으로 북부 집단군, 중부 집단군, 남부 집단군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70~100여 만의 병력과 장비로 중무장하였고 전쟁이 개시되면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에 이르는 전략 목적까지 단숨에 진군하여 점령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예상 진격로 중간에 위치한 여타 요충 지긍도 당연히 접수하여야 하고 이를 막기 위해 달려들 소련군도 격파하여야 했습니다. 

 

즉, 독일군은 점령과 섬멸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전쟁 초반에 벨로루시, 서부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신속히 장악해 소련의 항전의지를 꺾을 참이었습니다 소련이 거대한 국토와 인구를 가진 나라지만 독일이 1차적 목표로 삼은 이 지역에 인구와 국부의 70%가 몰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을 독일이 점령한다면 소련은 순식간 덩치만 커다란 단 판 빠진 찐빵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속도와 집중이었는데 지금까지 일사천리로 유럽을 석권한 독일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자신감이 없이 이 정도의 전쟁을 감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석 달이 되기 전에 소련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개 될 것입니다. 우리가 대문을 박차기만 하면 러시아는 썩은 건물을 무 저닐 것이다라고 확신하며 지난 1936년 라인란트 진군 시와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 당시 보여 주었던 히틀러의 초조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4. 부족했던 소련의 준비 상황

약 2년 전인 1939년 8월 모두가 철천지 원수라고 생각하던 소련과 독일은 물로 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을 체결하여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에 이 둘은 사이좋게 폴란드를 침공하여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처럼 표면상으로 동맹국이었지만 양측 모두 이런 우호가 단지 필요에 따른 일시적인 관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라고는 가리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라고는 단정하지 않았지만 소련도 충돌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노골적인 반공, 반소, 반슬라브 신념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자신들도 공산주의 세계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럽으로 영향력을 넓혀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치 독일을 넘어야 했고 둘 사이에 양보와 타협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독일이 서유럽을 석권하자 소련의 불안감은 장가 하였고 나름대로 군비 증가에 착수하여 1942년 말까지 1차 사업을 완료할 예정이었습니다. 

 

독일이 사상 최대의 원정군을 준비하였지만, 시실 당시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500여 만에 달하는 상비군을 보유한 나라였습니다. 

거기에 더해 18,000여 대의 전차와 12,000 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였는데, 이는 수량으로 독일의 5배가 넓은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국토가 넓었기에 당연히 규모가 컸던 것인데 유럽 쪽의 위기가 점차 증가하자 그중 약 400만의 대군과 대다수의 장비를 유럽 접경 지역에 집결시켜 놓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장비가 구식이었고 가동률도 저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개전 당시에 움직일 수 있는 전차는 40%에 불과하였으며 이제 막 생산되기 시작한 T-34나 KV간은 최신 전차는 국경지역에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지난 1937년 대축 청기 간 동안 완전히 무너져 내린 지휘체계가 더 큰 문제였으며 이런 총체적인 무능이 빚은 참사가 지난 1939년에 있었던 겨울 전쟁이었고, 이 때문에 독일은 더욱 소련군을 폄하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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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의 창설의 역사적 배경부터 현재까지 알아보자. 해적에게 공납하던 국가에서 세계 최강의 해군 보유국으로 발돋움한 미 해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미 해군 로고 이미지&nbsp; &nbsp;출처: 미해군

해군력은 진정한 국제적인 무력 수단입니다. 지구의 3/4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지상군이 기동 할 수 없는 지역을 이동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상군이 이동할 수 없는 지역으로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이동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핵심적인 수로를 지키거나 해안이나 인구 밀집지 근처까지 상당한 병력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군력은 타국의 주권 영억을 침범하지 안거나 갈등이 없이 수천 해리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해군력은 국가에게 상당한 외교적인 역량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군사력을 특정한 지역에 배치하여 동맹이나 협력국가를 지원하고 안전을 보장하며, 적대적 세력의 도발행위를 막거나 위협할 수 있습니다. 

해군력을 강압적으로 사용하는 활동을 포함 외고라고 하며 근대 제국주의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중요한 국가적 역량으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단순히 위협뿐만 아니라 타국의 방문을 통한 친선외교나 국제적인 재난의 발생 시 구호나 인도적 지원물자의 제공 등에 있어서도 해군의 발휘하는 역량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사실 해군력이란 국가의 성장에 따라 그 성쇠가 좌우되며 특히 해군력은 선진국형 전력입니다. 

역사적으로 해상로를 장악한 세력이 세계의 무역과 통상을 좌우해 왔으며,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지금의 믹구에 이르기까지 무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국가들은 응당 그에 걸맞은 해군력을 보유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목도리하고 있는 미중 패권 경쟁도 군사력의 분야에서는 해군력의 대결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1. 해적이 두려워서 헌납까지 했던 미국이었다. 

미 해군은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빈약한 연안해군에 불과했습니다. 미 식민지 주민들은 독립전쟁에 앞서 대륙 해군부터 창설하여 최소한의 전력을 갖춰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과 맞서 싸워야 했던 조지 워싱턴은 파리에 있던 벤자민 프랭클린을 통하여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 함대가 1781년 9월 5일 체서피크 해전에서 영국군을 격파함으로써 역 국군의 추가적 증원을 막을 수 있었고, 결국 영국 육군은 1781년 10월 19일 미 독립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돌립이 이루어지자마자 대륙 해군을 해체하고 보유했던 선박들을 팔아 버렸습니다. 

제헌의회가 더 이상 해군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라나 위협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의원들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바르바리 해적들에 의해 미국의 상선들이 약탈당하면서 무역에 위협이 가해졌던 것입니다. 

의회는 1784년 곧바로 호위함 6척의 구매를 승인했고, 1798년에는 해군성의 설립을 인가하게 됩니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15세기말부터 19세기초까지 3백년간 북아프리카 일대를 거점으로 선박을 약탈하고 노예를 잡는 등 악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출처: Heritage History>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한심스러웠던 것인가 하면 미국의 상선들은 바르바리 해적들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고 합니다. 독립 이전 역국 상선의 깃발을 달았을 때는 해적들이 감히 건드리지 못했지만 독립 이후 더 이상 보호해줄 강력한 해군이 없었던 미국 상선들은 가장 인기 높은 나포의 대상이었고 외교관 자격으로 파리에 있던 토마스 제퍼슨은 나포된 선박과 선원들을 석방하기 위해 여러 국가들과 접촉했는데 스페인 정부가 협상을 도와주면서 제시한 해결책은 남달랐다고 합니다. 

 

나포를 막으려면 조공을 제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제퍼슨은 모로코와 알제리의 조약을 제안했지만, 이도 지켜지지 않거나 혹은 엄청난 비용의 요구가 뒤따랐습니다. 

특히 알제리에 10년이나 억류되었던 미국 선원 115명의 석방에는 무려 1백만 불이 소요되었는데, 이는 1795년 당시 미정부 예산의 1/6의 해당하는 말도 엄청난 금액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건들이야 말로 미국이 해군력을 다시 추구하게 된 강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해군력이 생겨났지만, 양성에는 시간이 필요했던 이웃에도 미국의 상선의 안전통행과 인질 석방을 위해 매년 1백만 불을 계속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 기눚으로 미정부 지출의 10%에 해당하는 기준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2. 전쟁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다. 

해양에서의 자신감은 독립 후 미국에서 필수적이었으며 유럽에 대한 수출이야말로 생명선과도 같았습니다. 결국 토마스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미국은 트리폴리 토후에 과도한 공남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트리폴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제퍼슨은 미 해군에게 대응을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트리폴리 제1차 바르바리 전쟁(1801~5)으로 미국은 해군력으로 북서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준동하는 해적들을 소탕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미 해군은 물론 미국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고 한편 제퍼슨은 1802년 해군 사관 학고를 창설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 영국이 나폴 레옹 전쟁에 몰두하던 사이 미국은 영국 식민지인 토론토 등을 점령하면서 1812년 미영 전쟁이 펼쳐졌습니다. 막강한 영국 해군은 미국의 주요 항구들을 봉쇄했고, 이를 바탕으로 위싱턴 DC 볼티모어, 메릴린드, 뉴올리언스, 루이지애나 들 주요 해안도시들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호위함들은 단편적인 전투를 통하여 작은 승리들을 축적했고, 특히 레이크 에리 전투에서 페리 제독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북서부 제해권을 회복했습니다. 

 

이후 미 해군은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조직을 점차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미 의회는 예산에 엄격한 제한을 둠에 따라 함선의 크기에는 제약이 있었지만, 척수는 어느 정도 늘어남에 따라 점차 조직도 증편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1812년 전쟁에서 급조된 체서피크 베이 소함대나 소형 포함을 모아서 활동하던 모기 함대가 있었지만 전후에 곧바로 사라졌습니다. 

 

다만 1813년 창설되었던 뉴올리언스 전대는 이후 카브리해적들을 상대하면서 상선들을 보호했습니다. 

1821년 태평양 전대가 창설되어 페루의 독립을 도왔고, 미국인 소유 설탕 농장이 번성하던 하와이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켜냈습니다. 

 

한편 해적의 기승은 심각하여 1815년~1822년 사이 무려 3000여 척의 미국 상선이 카리브해에서 해적에 나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822년 서인도 전대가 정식으로 창설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세미놀 전쟁으로 플로리다 원주민들을 정리했습니다. 

1838년 국내 전대가 창설되어 대서양의 상선 보호를 담당하는 한편, 동인도 전대가 창설되어 중국과의 교역에 대응했으며 동인도 전재는 중국의 아편전쟁에서 미국민과 재산을 지켜냈고 1852년에는 페리 제독의 원정으로 일본의 개항을 이끌어냈습니다. 

 

한편 미국의 태평양 내해를 담당하는 태평양 전대는 맥시고 전쟁(1846! 8)에서 캘리포니아를 획득하면서 임시정부의 역할까지 수행했습니다. 

 

3. 해군력이 국력에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미 해군은 창설 초기부터 절대로 강한 군대가 아니었으나 국제교역의 중요성과 해군력의 상관계를 몰랐던 정치인들의 눈에는 해군력이란 그저 예산의 낭미에 불과했었으나 유럽이란 시장에 목숨을 걸고 있던 신흥공업국가로서 정체성을 깨달은 미국은 부지불식간에 해군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유럽으로부터 신대륙의 자유로운 권리를 보장하고 자유롭게 세계 무역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특히 미국도 제국주의 경쟁에 뒤늦게 참여하면서 해군력을 급격히 증강시켰습니다. 특히 시어도어 루주 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는 자국의 최신 전함으로 구성도니 함대를 전 세계로 파견하면서 마음껏 자국의 해군력을 과시하게 됩니다. 

이를 통하여 미국은 제국주의 시대의 한 축을 차지하는 열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추후 1차 대전으로 영국의 영향력이 쇠퇴해가자 미국의 해군력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분명 해군력은 손쉽게 건설할 수 있는 구사력이 아니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세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국가라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힘이라는 점을 미 해군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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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의 대형 수송헬기 킹 스탤리온을 아시나요?

수송헬기의 왕의 귀환 시콜스키사 CH 53K 킹 스텔리온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시콜스키 CH-53K 킹 스탤리온 대형 수송헬기 <출처: Lockheed Martin>

 

1, CH 53K 킹스탤리온 개발 역사 알아보기 

시콜스키 CH53K 킹 스탤리온 대형 수송헬기는 다양한 작전을 수행하는 미 해병대를 위해 만든 대형 수송 헬기입니다. 

킹 스탤리온의 초기형인 CH-53 시 시 탤리 온은 미 해병대의 요청으로 1962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하였고 시제기인 YCH-53A는 1964년 10월 14일에 처음 제작되었고 64-GE-6 터보 샤프트 엔진 2개를 장착한 시 스탤리온은 1966년부터 생산되어 CH 53A/D 시 스탤리온, HH-53BC 슈퍼 졸리 그린 자이언트, CH-53E 슈퍼 스탤리온, MH-53/H/J/M 페이브 로우와 같은 다양한 파생 모델이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미 해병대는 1981년 부터 운영해온 CH- 53E 슈퍼 스탤리온으로는 한계를 느꼈으며 적의 레이더 유도방식 지대공 미사일을 회피하면서도 더 많은 수송능력을 갖춘 차세대 대형 수송헬기가 필요해지자, 미 해병대는 교체 기종으로 시콜스키사의 CH-53 킹 스탤리온을 도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미 해병대는 ( 고도 3,000피트 기온 섭씨 33도 조건에서 12.245톤의 화물을 헬기 하부에 견인해서 110해리를 이동 가능해야 한다.)고 개발사인 시콜스키 사에 요구하였으며 킹 스탤리온에 요구되는 비행성능을 확보하려면 기어 박스 및 기타 중요 구성품을 재설계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개발 기간이 3년 더 걸렸다고 합니다. 

 

시콜스키사는 초도 소량 생산 방식으로 CH- 53K 시제기 2대를 제작하여 시험비행등 다양한 성능 검증 과정을 거쳐 미 해병대에 인도할 예정이고 현제는 연간 24대의 CH-53K를 생산할 수 있지만 양산체계가 갖추어지는 2020년부터 생산량이 확대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 해병대는 현재 시카고 웨스트 팜 비치 시설에서 CH-53K 킹스텔리온에 대한 초기 운영 시험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CH-53K 킹스탤리온 관련 동영상

 

2. CH53K 킹 스탤리온 특징 알아보기

킹 스탤리온 대현 수송헬기의 가장 큰 특징은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차세대 전자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 기존 CH-53 시리즈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성능이 우수하다는 것입니다. BAE 사의 통합된 차세대 전자식 비행제어 시스템 도입ㅁ으로 전장 비행에 대한 안전성을 높였고, 지능화된 항전장비를 장착해 주야간 작전능력을 높였습니다. 

 

2015년 첫 비행시험을 한 후 마무리 개발단계인 CH-53K는 GE 38-1B 터보샤프트 엔진 3기를 장착해서 강력한 출력을 낼 수 있습니다. 엔진의 연료효율은 기존의 모델에 비해 25%나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헬기에서 핵심부품 중 하나인 메인 로터 기어박스의 수리 및 정비 주기가 기존의 CH-53E의 2,000시간보다 약 400시간 증가한 2,400시간으로 연장되어 비행 안전성 및 수송능력이 향상되었고 킹 스탤리 오는 대형 수송헬기는 기체 중략 결 향화로 기존의 CH-53E보다 수송능력이 향상되어 최대 15.9톤까지 수송할 수 있다고 합니다. 

 

2명의 조종사 및 3명의 중기관총수 외에도 완전 무장한 37명의 전투병력이나 승객 55명을 수송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헬기에서 탑승자가 비상탈출에 용이하도록 창문을 대형화했다고 합니다. 

 

킹 스탤리온 헬기에 장착된 3기의 고출력 엔진 때문에 악조건에도 비행 성능이 우수하며 또한 근접지원 지상지원업무가 많은 헬기 운용 특성상 지대공 공격을 받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CH 53K킹 스탤리온 헬기는 지대공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 지향성 적외선 방해 장비를 장착하여 지대공 미사일의 센서에 레이저를 발사해야 헬기와 다른 방향으로 유도해서 회비 할 수 있습니다. 지대공 미사일 공격을 받는 상황에 노출되더라도 특수작전을 수행 가능합니다. 

 

위쪽비상 탈출이 용이하도록 창문을 대형화한 CH-53K 킹 스탤리온, 킹 스탤리온 동체 내부 전투병 탑승 모습(왼쪽)과 CH-53K 킹 스탤리온 동체 내부에 다목적 고기동차량 수송을 위한 고정 작업 모습(오른쪽) <왼쪽 사진 출처: Lockheed Martin> / <오른쪽 사진 출처: Sikorsky >

 

킹 스탤리온은 조종석에 최신 디지털 디스플레이어를 적요하고 차세대 항전장비를 장착해 조종 및 비행 성능을 극대화했으며 고효율 4세대 신소재 로터 블레이드와 고출력 고 효율 엔진을 채택해서 수송 효율을 대폭 개선했습니다. 경량 고강선 복함 신소재를 사용하여 기체의 내외부를 경량화를 했고 동체 구조를 재설계해서 내부 공간을 확장해 적재 공간을 확대했습니다. 해병대 상류함 리프트에 적재가 가능하도록 자동 블레이드 폴딩 시스템도 적용했습니다. 

 

킹 스탤리온 대형 수송헬기는 미 해병대가 요구한 모든 성능을 충족시켰지만, 생산 예상 가격이 최신형 F-35A 스텔스 전투기보다 높았기 때문에 미 의회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국방부는 해병대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200대 규모의 도입 계획을 승인해서 현재 도입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3. 제원 살펴보기 

제조사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 / 시콜스키(Sikorsky)
형식 대형 수송헬기
전장 30.2m
전폭 17.24m
전고 8.46m
자체중량 15,071kg
적재중량 33,600kg
최대이륙중량 38,400kg
엔진 3 ×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GE38-1B 터보샤프트(Turboshaft) 7,500shp
로터 7엽 메인 로터 / 4엽 테일 로터
순항속도 315km/h
상승한도 4,380m
적재중량 33,600kg
탑승인원 정원 37명 (승객 좌석 장작 가능 수량 55석)
승무원 5명(조종사 2명, 좌우 및 후미 중기관총 사수 3명)
시제기 초도비행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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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체인은 본래의 용법과는 달리 그 본질이 벗어난 채료 대중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아 왔습니다. 이하에서는 한때 국민의 여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킬체인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킬 체인 개념도이미지 <출처: : (c) IntelEdge Inc>

1. 킬체인과 표적처리 알아보기. 

1-1. 킬체인이란?

살상 또는 제거라는 의미 킬(Kill)과 순환하는 고리를 의미하는 체인(Chain)을 조합한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적은 제거하기 위한 순환고리라는 뜻입니다. 이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시간과 위치에 상관없이 고정된 표적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위치를 변화하는 표적을 무력화하기 위한 일련의 타격체계를 가리킵니다. 즉 갑작스럽게 등장한 목표를 찾아내고 추적하여 이를 공격하고, 만 양에 한 번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면 또다시 공격을 반복하여 목표를 완전히 파괴하는 군사작전입니다. 

 

사실상 킬체인을 이해하는 표적처리라는 개념부터 알아야 합니다. 

 

1-2. 표적처리란?

말 그대로 표적을 대응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합니다. 즉 군사작전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의 핵심적인 능력을 파악하고 그 능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공격할 목표를 정하고 공격하는데, 그러한 절차를 바로 표적처리라고 부릅니다. 표적처리는 인류가 전쟁을 시작한 초기부터 존재해 왔지만 현대전에 접어들어 장거리에서 정밀하게 공격할 수 있는 역량이 강화되면서 그 의미는 더울 중요해 젔습니다. 특히 단한발로 적군은 물론 적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핵무기의 운용에서 표적처리는 핵전략의 전부라고 할 만큼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킬체인 관련 동영상

따라서 군사작전의 수행은 물론이고 그 상위 개념인 군사전략을 구상하는 단계에서도 표적처리는 가장 핵심적인 역량이기도 합니다. 손쉽게 말하면 이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보수 있듯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나 지위 통제시설 등 핵심 목표를 칼리브르 순항미사일이나 이스칸데르 탄도미사일로 공격하며 우크라이나군의 역량을 무력화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런 공격은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군의 핵심역량을 파악하고 그 역량을 제거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공격하는 표적처리 과정을 거쳤습니다. 물론 우크라이나군이 이후에도 꾸준히 전투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군의 펴 적 처리 역량이 한계가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이 표적처리는 어느 나라의 군대이고 육해공군과 구분 없이 전략 기획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표적처리 개념을 가장 잘 발전시킨 곳은 바로 미군이며 미군은 합동 교범 3=6- 펴 적 처리라는 문건까지 발간하여 반드시 합동군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2. 표적이 다르면 처리 방법도 다르게 된다.  

표적 치리를 위해서는 우선 펴 적의 종류부터 이해하여야 합니다. 

표적은 크게 계획 표적과 임기 표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계획표적

이미 펴 적 치리 과정 정을 거쳐 사전에 타격이 계획된 표적을 가리키는 것

 

2) 임기 표적

사전에 식별이 되지 못하여 표적 치리 대상으로 반영되지 못한 표적입니다. 

 

이들 표적은 당연히 처리절차가 다르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표적 치리 정차가 시작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할 일은 목표 하달입니다. 지휘관의 명확하게 목표, 지침, 의도를 밝히는 것은 모든 전략/작전의 기반이 됩니다.

  1. 이렇게 목표가 서고 지침과 의도가 전달되면 실무로 돌입
  2. 표적개발/우선 위화 과정 이렇게 표적을 선정하고 그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과정은 사실 제일 어려우면서 중요합니다. 표적 선정하고 그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과정은 사실 제일 어려우면서 중요합니다. 상당한 정보활동으로 적의 중심 파을 파악 가장 먼저 공격해야 할 표적부터 정하는 일로 작전의 방향이 여기서 다정해지기 때문
  3. 전력선 정의 단계로 군에서는 이 단계를 능력 분석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아군의 보유 전력 가운데 해당 표적을 가장 잘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기체계와 부대를 선정하고 이를 엄마 정도 파괴할 수 있는가를 결정
  4. 지휘관의 결심에 따른 전력 할당의 단계-표적 선정과 전력 선정이 끝나면 이제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세워서 육해공군 각 부대에 타격 임무를 배분합니다. 
  5. 임무수행- 계획에 따라 곡 격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6. 평가 과정- 타격된 표적에 원하는 효과가 발생했는지와 표적 타격에 선정한 무기체계가 과연 적절했는지를 동시에 판단하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경우 다시 공격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계획 표적처리절차입니다. 

한편 이렇게 미리 식별되지 못한 표적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표적을 식별하고 이를 제거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이를 계획 표적처리와 달리 긴급표적처리라고 부르며 긴급표적처리는 신속한 식별과 판단, 그리고 빠른 부대의 투입이 필요하므로, 군사적전 가운데 고난도의 작전에 속합니다. 즉 첨단의 전력을 가지고 평상시에 능력을 갈고닦은 군대가 아니면 손쉽게 수행 하수 없는 작전에 속합니다. 

 

3. 긴급표적처리가 바로 킬체인

위쪽: 탐지 단계에서는 이상징후를 광역에서 탐지하여 킬체인을 가동시키기 시작한다. 사진은 KAI가 제작할 425 사업용의 영상레이더(SAR) 위성(좌)과 우리 공군이 도입한 RQ-4 글로벌 호크(우)의 모습이다. 아래쪽: 킬체인에서 탐지, 확인, 추적, 평가 등의 단계에서는 차세대 중고도 무인기(좌)같은 무기체계가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며, 최신 센서를 장착한 전장감시통제 항공기(우)는 이에 더하여 결심에서까지 역할할 수 있다. <출처: Public Domain>

긴급표적처리는 시한성 표적을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를 미군에서 F2T 2EA로 부르며, 우리에게 익숙한 명치인 킬체인으로도 불립니다. 

 

F2T 2EA는 Find(탐지)- Fix(확인)-Track(추적)-Target(결심)- Engagement(교전)- Assessment(평가)의 준말로, 긴급표적처리 절차를 6단계로 세분화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F2T 2EA는 존 보이드 대령의 OODA루프를 표적처리 절차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차례대로 살펴보면 첫 단계인 탐지는 전장을 감시하면서 정보를 수집하다가 이상 징후를 탐지하는 단계입니다. 

 

1. 탐지 단계

그야말로 이상 징후 여부를 드넓게 감시하는 것으로 정찰 위성 등 광역 탐지 수단을 활용합니다. 

특히 과역 탐지 단계에서의 우주기반 상황인식은 킬체인의 시작점으로 그 중요성을 매우 높습니다. 

 

2. 확인단계 

이상 징후를 특정하기 위해연 센서를 집중하여 위치를 확인하고 적인지 아군인지 식별하는 단계입니다. 

바로 이 단계에서 PID(적극 식별)를 통하여 적대세력인지 아닌지 확실한 판단을 내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 가계 됩니다. 

 

3. 추적 단계

추적 단계에서는 적으로 식별된 표적을 정찰위성이나 전선 감시 통제기 또는 무인기 등 어떤 ISR 자산으로 추적할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표적 추적을 유지하게 됩니다. 

 

4. 결심(Target)

이 단계가 되면 이제 어떠한 무기체계와 부대를 투입하여 표적을 제거할 것인지 결정합니다. 다양한 타격수단 가운데 시간과 위치에 따라 이를 타격할 수 있는 적절한 타격무기체계와 그 운용부대를 선정하고 교전에 필요한 조건의 충족 여부를 판단하여 교전을 결심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표적의 인근에서 아군을 대피시키고 위험성을 판단한 후에야 지휘관은 교전을 결심하고 교전 행동을 승인하게 됩니다. 

 

5. 교전(Engement)

여기서는 해당 부대가 교전 명령을 하달받은 후에 표적감시를 인계받고 표적까지 기동하여 정해진 무장을 투하하거나 발사하여 표적을 제거하게 됩니다. 

 

6. 평가 (Assessment)

적의 펴 적이 완전히 파괴되었는지 전투 피해평가(Bettle Damage Assessment, BDA)와 무기체계가 유효했는지 무장 효과 평가를 빠르게 실시한 후에 표적이 아직도 건재하다면 재 공격을 실시하여 네 번째 조준이나 다섯 번째 교전 단계에서부터 다시 교전을 시작합니다. 

만약 표적이 파괴되었다면 킬체인은 완료하게 됩니다. 

 

4. 킬체인에서 중요한 것은 ISTAR

이렇게 킬체인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무기체계가 필요합니다. 

통상 이러한 무기체계는 표적획득체계, 지휘통신체계, 타격체계의 3가지 체계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이 3가지 체계는 각군이나 합동군 차원의 화력운용체계에 해당하며, 특히나 육군에서는 대화력 전이 긴급 타격체계와 유사합니다. 이러한 화력 운용체계의 특징은 이 중 단 한 가지만 빠지더라도 전혀 기능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통상 킬체인이라고 하면 강력한 무기체계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우나라의 경우에도 기상의 여부와 관계없이 원거리를 타격할 수 있는 현무 2탄 도탄이나 신속하고도 정밀하게 적 표적을 제거할 수 있는 F-35A나 KF-16과 F-15K 전투기의 정밀타격 무장 등이 있기 때문에 한반도 전구에서 북한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군은 킬체인 작전을 홈 보하면서 우리 군의 보유한 각종 탄도미사일 발사나 첨단 전투기에 의한 첨단 무장의 투발을 선전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타격체계 위주의 홍보로 인하여 대중은 킬체인의 핵심을 강력한 타격무기체계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수한 타격체계를 확보에만 집중하는 일은 킬체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행태입니다. 

F2T 2EA라는 킬체인의 절차에서 알 수 있듯이, 타격체계를 활용하는 교전 절차는 6단계 가운데 1가지에 불과하며, Find-Fix-Track과 Assessement의 4단계 ISTAR(정보감시, 펴 적 획득, 정찰) 활동에 해당합니다. 즉 ISTAR 활동이야말로 킬체인의 핵심 능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획 펴 적 처리에서는 사전에 충분한 ISTAR활동으로 펴 적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공격할 수단을 치밀하게 계획합니다. 계획 표적처리의 ISTAR 활도는 길게는 수년간 축적해놓은 정보에서부터 적어도 수개월에서 수주의 정보수집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킬체인에서 ISTAR에 소요되는 시간은 수분에 불과합니다. 즉 임기 표적에 대한 충분한 정보분석으로 표적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이후에 다양한 ISTAR 무기체계를 배치하여 끊임없는 감시를 수행해야만 킬체인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시간이 관건인 킬체인에서 정찰위성, 무인기, 전장감시 통제기 등 다양한 표적획득체계를 확보하고 이를 최신 지휘통제체계로 연결해야 성공적인 킬체인 작전이 가능합니다. 

 

 

 

 

 

5. 한국의 맥락에서 킬체인과 선제타격이란?

북핵 위협을 맞이한 대한민국에서 킬체인은 단순히 군사작전을 뛰어넘어 군사전략으로서 취급되고 있습니다. 이동식 미사일을 사용하는 북한의 미사일 공격 전숭은 마치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이 수행한 스커드 미사일 공격과 유사했습니다. 애초에 긴급표적처리라는 개념이 스커드 미사일처럼 짧은 시간 동안만 노출되는 시한성 임기 표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개발되었으머로, 당연히 대한민국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공격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2021년부터 킬체인을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KMPR(제3축)의 임무수행 체계도 <출처: 2016 국방백서>

우리 군은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대응하여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 (KAMD)를 준비해왔으며, 2016년에는 북한의 6차 핵실험에 대응하여 대량 응징 정보복(KMPR)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킬체인과 KAMD, KMPR을 합쳐 북핵 대응전략으로 한국형 3축 체계가 구축되었습니다. 하지만 2018년부터 킬체인과 KMPR전략이 합쳐져 전략 타격체계로 통일되었는데 북한을 자극한다는 지적에 따라 용어를 통일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후 킬체인이란 용어는 더 이상 공식적 전략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대중에게는 킬체인은 (전략표적 타격)으로만 인식되고 있습니다. 

 

특히 일부에서는 킬체인을 선제타격과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되면서 호전적 전략이라는 비나까지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제타격이란 이미 적의 공격이 확실시되어 적이 공격을 개시하기 직전에 선제적으로 제압하는 것을 가리키며, 기본적으로는 방어행위입니다. 

 

일부 여론이 호전적이라고 비난하는 공격 형태를 가리키는 명칭은 선제타격이 아니라 예방타격입니다. 

 

※예방타격이란?

적의 명백한 공격 징후가 없을 때에도 단순히 공격 가능성만으로 적을 미리 공격하는 행위이며, 이는 방어를 넘어서서 정당하고도 명백한 이유가 부족한 공격행위에 해당합니다. 

요건데 킬체인은 긴급한 위협이 되는 표적을 처리하는 군사작전의 하나이며, 선제타 격의 여러 가지 방안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즉 킬체인은 선제타격의 방법일 뿐이며 아무런 위협을 가하지 않는 대상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명백히 자국의 국민과 영토에 피해를 입히려고 할 때 그 표적을 먼저 제거함으로써 국가를 지켜내는 방어 행동입니다. 

 

 

6. 킬체인의 미래를 알아보다. 

한편 킬체인 자체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킬체인에도 적의 공격 임박 시를 정확히 언제로 보아야 하는지 판단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적의 공격 준비태세가 향상될수록 킬체인 수행 시간을 단축해야만 하는데 그 단축에는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소요되는 한계도 존제합니다. 

 

킬체인의 수행절차인 각 단계를 수행하는 무기체계는 고성능, 고가의 장비로 구성된다는 점도 커다란 단점이 됩니다. 

만약에 이러한 무기체계가 적의 의해 무력화될 경우 킬체인의 순환고리가 끊기면서 작전의 전체 그림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차 위성이나 고고도 무인기가 무력화된다면 킬체인에서 아예 Find(탐지) 단계부터 기능할 수없으므로, 이후의 모든 무기체계와 작전 수행절차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실제로 중국이나 러시아는 A2AD(반접근 지역거부) 능력으로 킬체인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으며, 북한도 이러한 전략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개념에 대응하여 새롭게 등장하는 개념이 모자이크전입니다. 즉 전투의 핵심기능을 다양한 무기체계로 분산하여 중저가의 우수한 무기체계를 중 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무기체계가 일부 소실되더라도 작전의 전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노드가 끊겨도 다른 노드로 계속적으로 작전 수행이 가능한 형태의 전쟁 수행방법을 모자이크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자이크전에서 긴급표적처리는 더 이상 단선의 킬체인이 아니라 다중노드의 킬 웹이 됩니다. 

 

이렇게 킬 엡을 구성할 수 있는 모자이크전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무기체계 하나에만 매달리는 방법을 떠나서 보급 가능한 다양한 무기체계를 확장시켜야만 합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타격체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작전의 전체 그림을 이해하며, 킬체인/킬 엡의 핵심기능을 수행하는 ISR항공기 등 표적 획득체계를 더욱 적극적으로 확보해야만 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의 상황에 맞는 모자이크전 수행 양상을 구상하기 위하여 k-모자이크전을 수립하며 다중 킬 웹을 구상하는 노력을 할 필요도 제기됩니다. 

 

셋째로 ISR활동을 통한 저 보우 위를 활용하여 곧바로 결심하고 전력을 할당할 수 있는 결심 위위로 전환해야만 합니다. ㄹ

예를 들면 북한처럼 엄청난 지상군 세력을 갖춘 적에 대항하여 곧바로 정보를 수집하고 임무를 할당하는 전장감시 통제기 같은 기체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정보 우위와 결심 우위, 그리고 타격의 우위를 결합하기 위한 가장 필수요소인 지휘통제체계를 더욱 현대화해야만 합니다. 미국이 5G 통신이 가능한 차세대 지휘통제 네트워크인 (합동 전역 역 지휘통제)를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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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스버그 샷건 개발 역사

모스버그 모델 590 샷건 이미지&nbsp; <출처: O.F. Mossberg & Sons, Inc.>

 

오스카 모스버그( Oscar Frederick Mossberg, 1867~1937)는  20세가 되면서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넘어왔습니다. 그의 지인이자 같은 나라 출신인 아이버 존슨(Iver Johnson)은 모스버그에서 일자리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매사추세츠에 위치한 아이버 존슨 총포 자전거(Iver Johnson Arms & Cycle Works)사에서 일하면서 모스버그는 총기업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아이버 존슨의 주력 상품은 리볼버였고, 머지않아 모스버그는 리볼버와 샷건의 생산라인의 관리직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과정에서 아이버 존슨 리볼버의 랫치 결합부를 설계하는 등 스스로 총기의 설계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모스버그는 셔턱 암스를 거쳐 스티븐슨 암스 & 툴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다가 1914년 모스버그는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으로 이주하면서 1차 대전을 맞아 기관총 생산을 준비하던 마린-록웰이라는 회사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종전 후 회사가 도산하게 되어 53세의 모스버그는 두 아들 아이버와 해롤드와 함께 모스버그 & 손즈 사를 창립했습니다. 

 

모스버그는 최초의 총기로 모스버그 브라우니라는 4발들이 22LR 구경 권총을 만들었습니다. 브라우니는 기본적으로 델린저 디자인으로 덫에 걸린 동물의 처리용으로 선전되어 팔렸습니다. 

이 간단한 총기는 상당한 인기를 끌어 1920년~1932년 사이에 무려 3만 7천여 정이 팔려나갔습니다. 브라우니의 성공으로 회사는 사옥을 사들였고 1922년에는 22LR 구경 펌프 액션 소총을 만들어 또 다른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1937년에는 모스버그는 3번째 공장을 뉴헤이븐에 세우고 민간시장에서 인기를 끌 수 있는 저렴하고도 단순한 총기들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한편 같은 해에 창업주인 오스카 모스버그가 작고 하면서 큰 아들 핼롤드가 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스카 모스버그(중앙)는 두 아들인 해롤드(좌)&middot;아이버(우)와 함께 1919년 '모스버그 & 손즈'사를 창립했다. <출처: O.F. Mossberg & Sons, Inc.>

한편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모스버그는 애초에 27%였던 군용 총기 생산라인을 100%로 전환했습니다. 인원도 200여 명이 추가되어 총원 500여 명의 직원들은 24시간 3교대로 연합군을 위한 총기를 생산했습니다. 주된 생산품으로는 M2기관총의 주요 부품을 비롯하여, 엔필드 No 4 소총, 모델 42/22 볼트액션 소총 등 미 육군과 해군의 초기 훈련을 위한 총기들도 생산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에 이르자 모스버그는 다시 22LR 구경의 다 양한 표적용 총기나 스포츠 총기들을 만들면서 입문 수준의 사냥꾼들이나 스포츠 사격자들에 대한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모스버그는 새로운 볼트액션 소총이나 펌프 액션 샷건의 설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955년에는 200 시리즈 산탄총이 채용하고 있었다고 하고 200K는 조절식 쵸크를 200D는 교환식 쵸크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약실 장전이나 노리쇠 격발 준비 여부를 표시하는 표시기를 장착하여 안전을 고려했다는 점도 매우 독특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 모스버그는 드디어 좀 더 전통적이고 전통적인 펌프 액션 샷건인 모델 500을 개발하여 1961년 발매했습니다. 모델 500은 칼 벤슨이 설계를 맡아 만든 12 게이지 샷건으로 사냥 입문자를 겨냥하여 만든 산탄총이었습니다. 

특히 저렴한 가격과 간단한 정비성을 목표로 하였으므로 가능한 부품을 최소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모델 500은 당대의 어떤 총기보다도 부품의 수가 적은 총기로 만들어져 누구나 살 수 있는 저렴한 샷건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스버그는 22구경의 모델K, 모스버그 모델200D, 모스버그500D 모델 이미지 출처:<출처: Public Domain>

특히 모델 500은 누구든 간단히 조립할 수 있는 구조였기에 그 자체로 충분히 모듈화 총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튜브, 펌프 액션 손잡이, 개머리판 등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으며, 따라서 탄환과 총 역 등이 서로 다른 다양한 버전들이 출시되었습니다. 한 가지 무제는 초기 발매한 모델 500은 펌프 액션을 연결해주는 기다린 철재 바(BAR, 막대기)가 1개였는 데, 1970년부터는 펌프 액션 바를 2개로 만들어 바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분산했습니다. 이는 샷건의 대명사였던 레밍턴 모델 870의 특허가 끝나는 해가 1970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30여 년간 모델 500은 커다란 변화가 없이 꾸준히 출시되었습니다. 경찰과 군은 물론이고 민간에서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어 레밍턴 870과 함께 펌프 액션 샷건 시장을 양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델 500은 저렴한 가격뿐만 아니라 나름의 혁신을 거듭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일례로 샷건 중에서는 최초로 망원 조준 경용 칸티레버 마운트를 통합한 강선 총열까지 채용했고, 심지어는 50 구경 머즐 로더 총열까지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모스버그는 모델 500의 염가판인 매버릭 88(상)이나 상자형 탄창을 사용하는 모델 590M(하)을 선보이면서 사용자들에게 다양한 선택을 제공하고 있다. <출처: O.F. Mossberg & Sons, Inc.>

한편 107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모스버그는 모델 500을 바탕으로 군경 샷건 시장에 도전할 새로운 모델 590을 만들었습니다. 모델 590은 모델 500에 비하여 장탄수를 높이고 손잡이가 개머리판의 소재에서 내구성을 높였으며, 매거진 튜브가 설계를 변경했습니다. 특히 매거진 튜브는 폐쇄형이었던 M500과 달리 M590에서는 개방형으로 설계되어 손쉽게 매거진 스프링과 팔로워를 제거하고 총기 청소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레밍턴 870처럼 매거진 튜브 확장기를 쉽게 장착할 수 있어 장탄수를 늘리기 용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군용 사양의 590이 한번 더 개량을 거치면서 모델 590A1이 등장했습니다. 방아쇠 울과 안전장치가 알루미늄으로 바뀌었으며, 특히 미 해군의 요청에 따라 총열이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과거 작전 시에 함정 내의 좁은 철제 구조물과 총열이 부딪힐 경우 손상이 자주 일어남에 따라 해군이 총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를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스버그는 590A1 샷건이 군의 요구에 바탕하여 만들어져서 유일하게 MIL-S-3443 시험기준을 평가한 소총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동 기준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장약이 정말 충전된 12 게이지 벅샷을 3천 발 이상 발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최근 들어 모스버그는 짧은 총열의 총기들을 통해 새로운 샷건의 수요를 만들어냈습니다.  

원래 모스버그는 590A1 컴 팩트나 500 콤팩트 크루저 등을 만들었는데, 이는 12인치 이하의 총열을 갖춰 미국 연방 총기법에 의해 소드 오프 샷건의로 규정되어 소유에 엄격한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제작될 당사자부터 12인치에서 18인치 사이인 길이에 강선 없는 총열을 장착하면 소드오프 샷건이 아니라 기타 총기로 분류되어 간단한 등록 비용만 납부하면 소유가 가능했습니다. 이에 따라 14인치 총역에 5발들이 매거진 튜브를 장착한 590 쇼크웨이브라는 모델을 2017년 샷 결판터 발매했으며, 이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모스버그 500 계열의 산탄총으로는 매버릭 88도 있어며 매버릭 88은 원래 1980년대 모스버그 M500의 염가형 버전으로 만들어진 라인업이었습니다. 특히 일부 부품을 해외에서 조달함으로써 가격을 극단적으로 낮췄고, 몇 가지 버전을 추가하여 상품성을 높였습니다. 

 

한편 590의 진화는 계속되어 2018년 셨쇼에서는 590M 맥 페드가 소개되었습니다. 590M은 매거진 튜브가 아니라 직접 탄창을 결합하여 발사하는 모델로, 탄창은 5/10/15/20발 등 다양한 옵션이 있습니다. 또한 샷건 액세서리로 인기가 높은 맥풀사의 손잡이와 개머리판을 채용한 맥풀 시리즈, 공구 없이 총 역과 개머리판을 자유자재로 조합할 수 있는 FLEX 등이 발매되면서, 모스 벅 산탄 총은 여전히 현역을 지키고 있습니다. 

 

 

2. 모스버그 샷건 특징 알아보기 

모스버그 500과 590은 전형적인 펌프 액션 샷건입니다. 따라서 통상의 펌프 액션 샷건처럼 총 역 아래 매거진 튜브에 탄환을 장전합니다. 펌프 액션 이란 말 그대로 당김을 통하여 탄피를 배출하고 약실에 장전하기 때문에 붙은 명칭입니다. 즉 손잡이를 당기면 노리쇠 뭉치가 뒤로 밀려나면서 약실 안에 있던 탄피가 배출됨과 동시에 매거진 튜브의 새 탄환이 엘리베이터에 실리게 됩니다. 

 

다시 손잡이를 앞으로 당기면 엘리베이터가 탄환을 위로 올리면서 노리쇠 뭉치가 탄환을 약실로 물고 들어옵니다. 손잡이가 앞으로 완전히 밀린 상태가 되면 노리쇠가 탄환을 약실에 잠가 사격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특히 펌프 액션에서 취약한 부분은 장전 손잡이와 노리쇠 뭉치를 연결하는 펌프 액션 바입니다. 모스버그 모델 500의 초기형은 펌프 액션 바를 1개만 사용했었지만, 1970년부터는 펌프 액션 바를 2개 사용하여 스트레스로 인한 변형이나 파손의 위험성을 줄였습니다. 방아쇠 울 왼쪽에 달린 안정장치로 펌프 액션을 잠글 수 있으며, 누르면 잠금이 해제됩니다. 또한 방아쇠 안전장치는 총몸의 위쪽 끝에 달려있습니다. 오른손 사수나 왼손 사수에 관계없이 쉽게 조작할 수 있습니다. 안전장치를 앞으로 밀면 안전, 뒤로 당기면 발사가 되며, 안전 상태에서는 빨간 점이 보입니다. 

 

모스버그 500/590 샷건의 기본형은 18.5인치 총역에 6발들이 매거진 튜브로 장착하고 있습니다. 한편 20인치 총역을 장착한 모델은 매거진 튜브도 도욱 길어져서 8발이 장탄됩니다. 이외에도 약실에 한 발을 더 넣을 수 있어 실제로는 최대 7발 또는 9발을 수납할 수 있습니다. 한편 규제 대상인 590A1 클래스 III 샷건은 14인치의 총열을 채용하고 있으며, 매거진 튜브에는 5발이 수납되며, AOW로 분류되는 590S 쇼크웨이브의 경우에는 14.375인치의 총열에 4발들이 매거진 튜브에 있다고 합니다. 

590M 맥페드(Mag-Fed) 소총의 주요 특징

특히 모스버그 590 시리즈는 총 열과 매거진 튜브를 원하는 사양으로 바꿀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한편 모스버그 590은 본격적인 전투용 샷건으로 만들어져 대검을 장착할 수 있도록 착검용 마운트를 장착했습니다. 또한 애초에 M16 소총의 총구에 장착되도록 만들어진 M7이나 M9대검의 형태를 고려하여 매거진 캡에 총구 쪽 마운트가 걸리도록 설계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소총용 조준장치를 채용하여 가늠자에 고스트 링을 채용하여도 옥 했습니다. 최근에는 총기의 학장 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총 몸 상부에 피카티니 레일을 장착하는 것은 물론, 손잡이를 MLOK 마운트로 개조한 모델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편 모스버그는 기존의 매거진 튜브 장전 방식을 대신하여 탄창 방식을 채용한 590M 시리즈를 선보였습니다. 탄창은 최소 5발들이에서 최대 20발 들이 까지 모두 4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레밍턴 870 시르즈도 탄창 장전 방식인 870DM을 선보였습니다. 모스버그는 복열 탄창을 채용하여 레밍턴보다 훨씬 훌륭한 효율성을 보였습니다. 한편 서드 파티 제품으로 MD암즈사에서는 사이가 12 산탄총에서 채용했던 것과 동일한 20발 들이 드럼 탄탕을 590M용으로 발매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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