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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장군으로 유명한 인물 에르비 롬멜을 아시나요?

인물 탐구를 통해 전쟁영웅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며 연전연승을 했던 전쟁영웅으로 에르빈 롬멜, 연합국, 특히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에게는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자 때로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치 독일 히틀러의 충성스러운 부하 장군이었지만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끊어야 했던 비운의 군인이기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롬멜의 모습 이미지 

1. 히틀러 암살에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1944년 7월 9일, 카이사르 폰 호프 아커가 라 로셰-기용에 있는 롬멜을 찾아왔습니다. 

롬멜과 같은 슈마 벤 출신인 흐프아카는 1차 세계대전 때 중장으로 참전한 아버지를 통해 롬멜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만나자마자 롬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호프 아커는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상 계획과 베를린 그룹의 쿠데타 움직임, 암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서부 전선의 전쟁이 즉각 중단될 것이며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수님, 즉 롬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라나 그들 사이의 대화 내용과 롬멜의 반응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롬멜이 암살 계획에 동의하며 적극적 동참 의사를 밝혔다는 증언이 있는가 하면,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총통(히틀러) 비서관 마틴 보어만이 1944년 9월 27일에 기록했습니다. 슈튈프나겔, 폰 호프 아커, 이미 처형된 클루게의 척 라스겐스 중령, 그리고 아지 살아 있는 많은 피고인들이 증언하기를 , 롬멜이 이 계획을 전적으로 이해했고 암살 계획이 성공하면 새 정부를 위해 자신이 나설 것이라 밝혔다고 합니다. 

 

호프 아커는 7월 11일 베를린에서 클라우스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만났습니다.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는 총통 사령부 회의실에서 히틀러 폭사 계획을 실행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북아프리카 리미아에서 만난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이탈로가리볼디와 에르빈 롬멜 1941년2월

2.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무훈,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마지노선 돌파하다. 

1891년 11월 15일 브렌츠와 맞닿은 하이덴하임에서 교사였던 아버지 에르빈 롬멜과 루츠 가문 출신 어머니 헬레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신교도였고 롬멜은 매우 평안하고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의 마당과 정원에서 매일 뛰어놀 수 있었습니다. 

 

2-1. 1910년 3월 당시 18세의 롬멜은 왕실 보병 사관후보생으로 지원하면서 지신의 이력서를 위와 같은 시작 했습니다. 롬멜은 본래 항공기술자를 지망했지만 교사나 군인이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2-2. 1911년 3월부터 롬멜은 단치히의 군사 학교를 다녔고 11월 졸업하여 이듬해 1월 장교가 됐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롬멜은 프랑스 전선과 루마니아,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습니다. 그는 상황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전술적 판단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2-3. 1917년 10월 마타주르 산 습격에서 롬멜은 이탈리아군에 승리를 거두며 큰 공을 세웠지만, 프러시아 최고 권위의 푸얼 메리 테 훈장이 부당하게 다른 장교에게 수여됐다는 것을 알고 진정서를 제출해 결국 훈장을 받았습니다. 

 

2-4. 1920년 12월 슈투트가르트 보병 연대 참모가 되어 8년을 그곳에서 보냈고, 1929년 9월 드레스덴 보병학교 감독관으로 부임하여 사관후보생들을 가르쳤습니다. 

 

2-5. 1933년 10월 롬멜은 17 보병연대 제3대대 지휘관이 됐습니다. 

롬멜은 임명식 연설에서 '총통이신 아돌프 히틀러의 특별한 능력'을 역설했지만, 이는 히틀러에 대한 특별한 추종보다는 군비 확장 정책을 취한 히틀러에 대한 독일군 장교들의 전반적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2-6. 1939년 8월 롬멜은 서열을 뛰어넘어 소장으로 진급하고 총통 지휘본부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트 고데 슴베 르크 제7 전차부대 지휘권을 받아 프랑스 전투에 참가해 1940년 5월 16일 마지노선을 돌파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 친애하는 롬멜 장군 당신이 이룬 업적은 당신 스스로도 자아스러운 일일 것이오. 다가오는 새해에는 당신과 당신 부대에 좋은 일이 생길 것을 기원하오 '라고 롬멜에게 전했습니다. 

3. '사막의 여우'롬멜, 독일 민족의 영웅이자 연합군의 최대의 적이 되다. 

1941년 2월 12일 롬멜은 트리폴리 공항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 땅을 밟았습니다. 그로부터 6일 전 히틀러는 롬멜에게 독일 추축군 통수권을 주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의 진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습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잃게 되면 무솔리니의 정치적 입지가 어려워져 독일-이탈리아 축이 위협 당하리라 판단했습니다. 

 

롬멜 도착 이틀 뒤 독일 전 터 부대가 트리폴리 항구에 도착했고 2월 16일 선두 부대가 최전선에 도달했습니다. 

 

롬멩의 추축군은 아프리카 군단이라는 정식 명칭을 얻었습니다. 

3월 24일 아프리카 군단은 치열한 전투 없이 사막의 요새 엘아게일라를 점령했습니다. 3월 31일 롬멜은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키레나이카로 진격했습니다. 

롬멜은 군 지휘부와 달리 히틀러가 자신의 진격을 옹호하리라 예상했습니다. 그 예상은 들어맞았습니다. 

 

등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많은 수가 그리스로 이동한 탓에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롬멜은 기습 공격으로 소름까지 2주 만에 진격하여 영국군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사망 전의 대가 리처드 오코너 장군을 포로로 잡는 전과까지 올렸습니다. 

 

그러나 1941년 4월 10부터 감행한 토브 록 요새 공격에서는 큰 피해를 입고 성공하지 못했으며, 물자 보급에서 큰 곤란을 겪기 시장했습니다. 

그러나 롬멜에게는 전진만인 있을 뿐이었습니다. 

 

1941년 6 울 롬멜은 리비아 국경 제대로 향하는 300대의 영국 전차부대의 80대의 전차로 맞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롬멜은 인습적인 전술에서 벗어나 88mm 구경 고사포를 배치해 적 전차를 공격했습니다. 토 부록의 요새전에서 실패한 것과 달리 롬멜은 이동 전에서는 승승장구했습니다. 

 

괴벨스는 일기장에 -롬멜은 독일군이든, 이탈리아군이든 병사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다. 그는 거의 신화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괴벨스는 롬멜을 통해 민족 영웅의 이미지를 창출하려 했습니다. 이에 따라 롬멜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편지가 독일 전역에서 답지를 했습니다. 

 

4.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야하한다. -학살 행위는 커다란 범죄이다. 

히틀러는 더 많은 전차와 무기 보급품을 보내달라는 롬멜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롬멜이 지금까지 처럼 최소한의 병력과 장비로 계속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전진하도록 밀어붙이면서도 충분한 장비를 갖춰주지 않는 히틀러 밑에서 롬멜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미고 자가는데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기갑 군단 병역을 거이 소모하고 70대의 전차만으로 지원군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1941년 12월 7일 아프리카 군단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초 롬멜의 기갑 군단은 엘 아게 일라 서쪽 마르사 엘 브레가 요새에서 54대의 전차와 물자 보급을 받았지만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전력에는 못 미쳤습니다. 

그리나 롬멜은 과감한 어쩌면 무모한 선제공격을 감행했습니다. 

 

1월 17일 아내 루시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아마 그들은 나를 미친놈 취급을 할 거요. 그라나 나 절대 미치지 않았소. 그들보다 더 넓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1월 21일 아침 롬멜의 군단은 전지 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승리를 거두며 전진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승리이자 전진이었습니다. 

 

1942년 1월 24일 롬멜은 독일군 대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수상 처칠의 의회 연설 일부입니다. 

'이 전쟁의 참상과 상관없이 개인적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 

 

1942년 6월 11일에는 비르 하차임을 무너뜨리고 영국군 제8군을 퇴각시켰고 6월 20일에 토브룩 요새를 함락시켰습니다. 

22일에 롬멜은 육군 원수로 임명됐습니다. 

그란 7월 1일부터 엘 알라메인 전선에서 역국 폭격기의 공습 속에 아프리카 기갑 군대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롬멜이 나치의 집단 수용소와 학살 행위에 관해 알게 된 것은 1943년 말이었습니다. 

이듬해 6월 롬멜과 대화한 해군 사령관 루게는 롬멜이 한 말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여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저위의 지도부는 깨끗하지 못하다. 학살행위는 커다란 범죄다. 

 

-제국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으며, 히틀러에게 급히 전쟁을 졸료 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히틀러가 이성을 찾지 못한다면 스스로라도 독립적으로 움직이겠다고 했습니다. 

 

5. 지치지 않는 불굴의 전사- 그의 마음은 과연 어디를 향했던가?

1944년 10월 14일 토요일 11시경 12명의 게슈타포가 롬멜의 집 주위를 둘러쌌습니다. 정각 12시경 총통의 위임을 받아 7월 20일 암살 기도 계획에 공모한 죄를 묻기 위해 브루크도 르푸와 마이 제이 왔습니다. 

롬멜에게 주어진 선택은 자살 아니면 특별 제판이었습니다. 

부르크도 르푸는 롬멜에게 자신이 청산가리를 한 통 가지고 왔다고 말하며, 근족의 안전은 보장되며 장례식은 예우를 갖춰 치를  것이라 말했습니다. 

 

롬멜의 마지막 막은 '가져가야 되나?' 였다고 합니다. 집을 ㄹ나서기 전 가죽 외투에 지갑이 들어 있는 걸 별견하고 중얼거린 말입니다. 

집에서 500m 떨어진 작은 숲, 검은색 메르세데스 차 안에서 음독했고 차는 곧바로 울름의 군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공식 사인은 서부전선에서 근무 중 입은 부사 악화에 따른 심장마비' 10월 18일 울름 시청에서 열린 공시 추도식에서 육군 원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낭독한 추도사의 첫머리입니다. 

'지치지 않는 불굴의 전사는 구각 상회 주의적 이념으로 추만 해 있었으며, 그것은 그에게 힘이 원천이었고 행동의 기본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총통을 향해 있었다 라고 추도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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