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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육군 최정예 특수부대로 특수 정찰, 대테러 진압, 인질구출 등과 같을 고난도 임무를 수행하는 대테러부대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일렛은 히브리어로 '정찰대'라는 뜻으로 , 사이렛 메크 칼은 영국 특수부대인 SAS를 모방해서 창설되었습니다. 

1976년 엔테베 작전을 포함하여 1964년 6일 전쟁의 쉬라 크락 작전, 1973년 욤프키프르 전쟁, 사보이 적전, 1982년 레바논 전쟁 등의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이스라엘 특수 부대 사일렛 미트칼 부대로고 이미지와 부대원 이미지  

한편, 사이렛 매트칼은 상당기간 대원을 비밀리에 선발했으나, 1980년대부터 지원자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일렛메트 칼에서는 네타냐후 총리 에후드 바락 전 총리, 모세 알론 에스 라엘 국방장관, 이스라엘 첨보 기관 모사드 수장인 대니 아톰 등 이스라엘 역대 총리들을 비롯해 유수의 정치인들이 배출됐습니다. 

 

1. 엔테베 작전(사일 레 메티칼 부대)

사일렛매트칼의 대표적인 작전으로 1976년 아프리카 엔테베 공항 인질 구출 작정인 일명 엔테베 작전이 있습니다. 

1976년 7월 3일 이스라엘 로드 공항을 출발하여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에어 프랑스 소속 AF-137기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ELP) 테러범 2명과 독일계 혁명 분파인 테러범 2명에게 납치돼 254명의 승객이 인질로 잡혔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즉각 아프리카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사일렛매트칼을 출동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7명의 남치범 전원과 우 간다 군 30명을 사살했으며 10대의 소련제 전투기도 파괴하는 등 기습 작전을 성공리 종료한 작전입니다. 

 

그럼 엔테베 작전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1. 에어프랑스 비행기 피랍

1976년 6월 27일 12시 30분경 이스라엘의 로드 공항을 떠나 파리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소속 A300에어버스 여객기 AF-139편이 중간 기착지인 아테네에 내렸습니다. 

아테네 공 하의 보안은 허술한 편이어서 금속탐지기에 모니터링 요원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56명의 승객을 태운 AF-137편은 이륙 3분 만에 피랍되었습니다. 승객들 가운데 테러범들이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에어프랑스 소속 AF-139편은 중간 기착지인 아테네에서 이륙하자마자 테러범에게 납치되었다. 보안이 허술한 아테네 공항은 테러범이 항공기에 잠입하는 데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이 여객기에는 254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3분 1의 이스라엘 국민이었습니다. 여객기를 남치한 테러범은 모두 4명으로 2명은 형 분파 소속의 독일 테러범이었고 2명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소속의 아랍 테러법이었습니다. 특히 독일인은 남녀 커프로, 남자는 월프리드 보세라는 유명한 청부 테러범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여객기 피랍을 예상하고 쵝 정예 부대인 사이렛 매트칼에 출동대기를 명령했습니다. 

사이렛 매트칼은 부대 명칭을 그디로 말하자면 합동 참모본부 직할 정찰 부대이지만 실제로는 대테러부대입니다. 

여객기를 납치한 4명의 테러범. (좌측 상단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자엘 나지 알 아잠(Jael Naji Al Azam), 파예즈 압둘라힘 자베르(Fayez Abdur-Rahim Jaber), 브리기테 쿨만(Brigitte Kuhlmann, 여자 테러범), 윌프리드 보세(Wilfried Böse).

테러범들은 종종 이스라엘로 여객기를 몰고 와서 정치적인 요구를 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1972년 아람 테러범들은 벨기에의 사베나 항공 여객기를 납치하여 로드 공항으로 몰고 와스는 국제 언론 앞에서 요구사항을 열거한 바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예상한 이스라엘은 사일렛 매트칼을 로드 공항에 대기시키고 인질 구출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피랍 기는 이사라엘 롤 향하지 않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리비아의 벵가지에 기착했습니다. 

사일렛 메트 칼은 다시 기지로 돌아가 추후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벵가지에서 7시간 반을 대기하던 피랍 기는 재급유를 받고 이륙하여 동쪽으로 향하였습니다 부대는 다시 출동대기 상태에 들어갔으며 피랍기가 고드 공항에 내래는 즉시 구출작전을 실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자정이 되자 놀랍게도 피랍기가 아프리카로 향하고 있다는 시실이 확인되었고 다음날 새벽 3시 피랍 기는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내리게 됩니다. 

여기서 팔레스타인 인민 해 아전 선 테러범 3명이 납치법들에 합류했습니다. 

1-2. 피랍기 아프리카로 향하다. 

승객들은 피라 된 에어버스 여객기가 엔테베 공항에 착류 하고도 무려 9시간이나 더 기내에 억류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6월 28일 월요일 정오가 되면서 테러법들은 승객들을 공항 구청사의 승객 로비에 감금하게 됩니다. 

 

그날 늦은 오후 우간다의 대통령인 이지민은 승객들에게 자신이 직접 테러법들과 인질 협사를 하고 있으며, 우간다 병사들이 승객의 안전을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아민은 이스라엘 정부가 테러범과 협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29일 15시 30분경 페루인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의 지휘 하에 움직이는 테러범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발표했습니다. 

 

엔테베 작전 관련 동영상 

서독, 프랑스, 스위스, 케냐, 그리고 이스라엘에 투옥된 테러범 53명의 석방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석방되지 않는 다면 이스라엘 시각으로 7월 1일 14시에 피랍 승객들을 살해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런 발표가 나자 당시 이스라엘 수당이던 이츠하크 라빈은 각료들을 모아 대안을 검토했습니다. 

이스라엘 국방 합참의장인 모타 그를 장군은 라비 수상과 회의에 앞서 군사적 작전을 검토할 것을 자신의 참모들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구리의 참모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공군 유일의 C-130 비행대대장이던 요수아 샤니 중령력은 엔테베에 피랍기가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이미 대략적인 비행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병력과 장비를 싣고 엔테베까지 갈 수 있는 기체는 C-130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공군 참모총장이 작전에 관하여 물었을 때 모든 문제에 대해 유 항하게 대답할 수 있다고 합니다. 

 

 

1-3.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보다!

한편 구리 장군은 라빈 수상에게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보고 했지만 당시로서는 대수롭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당시로서는 이디 아마이 피랍사건의 중재자로 공정히 활동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각은 이 독 재자와의 협상을 통해 인질을 석방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승객의 3분의 2가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으며 항공기도 이스라엘 국적자가 아니라 프랑스 국적기였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가 협상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으며 항공기도 이스라엘 구적기가 아니라 프랑스 국적기였기 때문에 프라스 정부가 협상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서 우간다는 무려 4,000KM 가까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애당초 이런 거리를 극복하고 인질구출 작전을 생 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편 같은 날 저녁 한참 부의장인 에쿠텔 아담 장군은 사이렛 메트 칼의 이전 부대장이던 애 후드 바라크 대령을 호출했습니다. 

그는 바라크에게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특공대원들과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비공식적으로 토의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바라크는 밤새 특수부대원들과 토의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 최초의 인질 구출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특수부대가 고무보트를 가지고 엔테베 공항 인근의 빅토리아 호수로 강하하여 강을 건너서 공항으로 삽입한 뒤, 인질을 구출하고 우간다군에게 투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이전까지 한 번도 고무보트로 하드 덕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그중 가장 작은 문제일 정도로 계획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로서는 이 계획이 가장 최선의 대안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1-4. 엔테베는 중립 지역이 아닌 적이었다. 

작전에 필수 요소는 정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정보가 너무 적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우간다는 원래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첨단 제트기의 제공을 거부하여 이디 아민은 1972년에 이스라엘과 단교를 선언하였습니다 

정실 외교 채널조차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정보를 수집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간다의 무관으로 파견돼 바 있던 이스라엘군의 비 루크 바 레프 준장이 이디 아민과 직접 통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비 루크 바 레프 준장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민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에게 동조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테가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인진을 구출하여 우간다군에게 투항한다는 계획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니 터였습니다 그럼에도 강하 작전 준비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C-130 대대장인 샤니 중령은 고무보트 강하 시험은 실패하여 고무보트가 터졌지만 이후 문제 해결하고 하드 덕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엔테베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승객 47명이 석방되었습니다. 

이들이 프랑스 대사관 을 거쳐 파리로 돌아가자 정보 당국은 피랍 상황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디 아민이 테러범에게 협력하고 있을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우려는 석방인질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기도 했으며 이에 따라 강하 작전의 가능성을 확인한 목요일 저녁, 전혀 다른 구출 작전을 새롭게 입안해야만 했습니다. 

작전의 침투하여 인질을 구해오는 어려운 작전이었습니다.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은 인질협상의 중재자를 자처했지만, 실은 팔레스타인 테러범을 지원하고 있었다. 사진은 이디 아민(좌)과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의 다정한 모습이다. 

1-5. 적의 심리를 이용한 기습작전

특수작전의 핵심 요고가 무엇 이냐고 물어보신다면 사람들은 보통 기습작적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정답이 아닙니다. 

 

기습이란 적이 대비되어 있지 않을 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수작전에서 적은 대개 기습을 예상하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특수부대가 타격할 주요 목표에는 언제나 우수한 경계병력이 있고 인질 구출 작전에는 특수부대의 기습을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는 테러범이 있습니다 특수부대에게 적이 대비되어 있지 않을 때 공격하는 사치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라 볼 수 있습니다. 

특수부대는 상대적 전력 우위에 승부를 거는 부대입니다. 

실제적으로 병력이 적더라도 기습 속도, 그리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적을 기만하고 압도하여 상대적 전력 우위를 통해 임무를 완수합니다. 

 

즉 특수작전의 핵심 요소는 상대적 전력 우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 엘곤은 엉뚱한 곳에 이런 상대적 전력 우위를 찾았습니다. 

 

새로운 구출작전을 입안하는 가운데 다소 엉뚱한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C-130 수송기를 곧바로 엔테베 공항에 착륙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란 이것은 매우 훌륭한 의견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군이 우간다까지 직접 날아가서 작전을 수행하는 모모한 직을 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엔테베 공항에 직접 착륙하는 것은 최고의 기습 효과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적의 심리를 활용한 기만이자 기습작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야간에 조명 없이 C-130을 착륙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은 이전에 한 번도 블랙아웃 랜딩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행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란 프로토 타입 야시경을 보유했던 이스라엘 공군은 사이 사막에서 야간 착률 시험을 성공하면서 구출작전이 가능함을 입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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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군의 특수전단이며 해군 작전사령부 직할 전단 중 하나로

해군의 특수전부대입니다. 

모체인 해군 수중 파괴대의 영문 약칭대로 통상 UDT(Underwater Demolition Term)라 부르기도 하며, 육해공 전천후 작전팀을 의미하는 UDT/SEAL(SEA, AIR, LAND)이라고도 칭합니다. 부대 청설 과정과 SEAL임 무확 잔 과정에서 나타나들 미 해군의 네이비 씰을 모델로, 매년 시행되는 부대원들의 유학이나 연합훈련 및 다양한 교류를 통해 발전하고 있습니다. 

해군 특수전단에 씰 대원들의 훈련 모습  출처 : 해군 특수전 전단

국군 내에서 개방적이고 선진화된 특수부대 중에도 가장 손에 꼽는 부대입니다. 

미군 특수전 부대에서 세계적으로 폴란드 GROM 등과 함께 가장 같이 작전을 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탑 티어급 부대임과 동시에 성공확률이 극히 낮은 선박 작전을 성공적으로 오나 수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부대입니다. 

 

1. 해군 UDT/SEAL

UDT/SEAL이라는 이름은 미 해군 NAVY SLEAL의 모체인 UDT를 벤치마킹하여 창설한 부대에 훗날 미 해군의 UDT가 발전하면 부여된 SEAL 임무를 덧 붇여 UDT.SEAL 이 된 것입니다. 

적 해산 정찰, 첩보 획득, 해상 정찰, 내륙 기습 폭파공작, 해안 장애물 제거,  뢰 탑색 및 소해, 유격 개 및 요인 호송, 특공대 철수 지원 및 수중파괴 임무를 시작되어 UDT 육해공을 가리지않는 전천후 침투, 암살, 직접 타격(DA), 대테러, 경호 임무가 추가되었습니다. (SEAL). 

 

특수전단의 본거지이자, 각종 교육, 훈련 시설을 갖추고 있는 진해에 주둔하며, 대부분의 인원이 속해 있는 제1 특전대 대가 주력부대입니다. 

동애 1함대의 제3 특전대와 평택 2함대 제5특전대대는 함대 기지 또는 각 함대가 관할하는 접 적애 역에서 벌어지는 긴급 상황에 대비하는 부대입니다. 

이외에도 인천을 비롯하여 접적해역 모처 등에도 소수의 해군 특전대원들이 파견 근무하고 있습니다. 

 

진해의 제1특전대대는 공중대, 해상대, 해중 대대 3개 작전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1대대 대원은 이 3개 작전대 중 하나에 소속되어 해당 임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합니다. 

장기복무자의 경우 몇년에 지나면 순환근무로 소속 작전대를 옮는 경우 많아 최소한 2개 이상의 제대를 설립합니다. 

피랍선박 대응훈련을 수행하기 위해 패스트로프 강하 후 진입하고 있는 UDT/SEAL 대원들 출처: 해군특수전단

폭발물 처리(EOD)와 해상 대테러 (MCT: Maritime Counter Terror)는 별도의 교육과정이 필요하며, 장 기자 간부는 해당 제대에 속하지 않더라도 자원하여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도 있습니다. 

 

EOD 및 MCT는 고도의 전문과정이라 폭발물 처리 대대와 특수 임부 대대에는 특전병이 배속되지 않습니다. 

특전병이 배속된다 하더라도 이는 작전요원으로 배속된 것이 아닙니다. 

참고로 해상 대테러(MCT) 교육의 경우, 청해부대 파견 전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교육과정입니다. 

폭발물 처리(EOD) 임부는 1968년 4월 22일 부여되었습니다. 임무 부여에 따른 사전작업으로 1966년 장교 1명, 부사관 2명이 미 해군 폭발물 처리 교유과정에 보내졌으며 최종적으로 19968년 5월 1일 폭발물 처리 대가 창설됨으로써 마무리되었습니다. 

 

폭발물 처리대 (EOD)를 2017년에 확대 개편하여 폭발물 처리 대대로 독립/승격, 현제는 대대급 부대입니다. 

이는 폭발물 처리 임무를 수행하는 단위부대 중 전군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부대입니다. 

 

2018년 9월 1일, 5 전단 55 전대 예하의 SSU가 특수전전단의 해난 구조전대로 편입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해군 UDT/SEAL 에서 육군 특전사처럼 지역 대라는 명칭을 썼지만 이후 작전 대라는 명칭을 바꿨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제1특전대대는 육군 특수전사령부 예하로 배속되고, 오키나와와 미국 본토에서 증원된 미국 특수부대들은 주한 미군 특수전사령부 예하로 배속됩니다. 

그리고 이 대한민국 특수전사령부 육군 특전사 및 여기에 배속된 해군 특수전전단 제1특전대대)와 주한미군 특전 사령부가 병합되어 연합 특수전사령부(CUWTF)를 구성합니다. 

 

2. UDT역사 알아보기.

50년대 초창기 UDT 청사는 1 부두에서 일본 해군이 쓰던 작은 목조건물에서 UDT태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취사장은 함대 사령부에 있어서 먼 거리를 매일 이동해야 하는 매우 불편함이 있었다고 하고 당시 1등 병조 9 하사) 월급이 (100원) 이등병조(중사) 월급 5400원이었다고 합니다. 

 

UDT는 별도 부식비가 나오는데 공군 조정사와 동일한 특급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시절 상사 월급보다 부식비를 더 많이 받았던 시절이라 윤택한 생활은 물론 매끼 고기가 목욕한 기름기 있는 구을 먹을 수 있었는데 모든 것이 UDT(ㅠ-9) 훈련이 지구 상에서 얼마나 혹독하고 힘들었는지 않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6.25 사변을 거치면서 미군으로부터 전달 된 특수작전부대 편성과 운영은 그대로 해군 특전부대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1952년 2월, 미 정철 정보대 (RIU.Reconnaissance lntelligence Unit)가 해체되면서 한국 해군에 정찰 정보대의 창설을 기획했다고 합니다. 

이에 한국 함대 정보국(NID-Naval lnteligence District)은 1952년 11월, 미 해군 특수전부대 UDT양성과정인 B-6 과정에 김성권 중 의릉 유학시켰습니다. 

 

당시 UDT청설 목적은 '요인 암살 및 첩보수집이었습니다. 김중위에 이어 1953년과 1954년 미 해군 B-6 과정에 유학한 11명으로 대한 미국 해군 UDT가 탄생됐습니다. 

 

1955년 5월 25일 한국 함대 B-6 교육과정이 발족됐고 같은 해 11월 9일 제1기 과정 26명을 수료시켜 대한민국 해군 UDT가 창설되었습니다. 

1955년 미국 UDT교육과정 수료사진

해군 지휘부에서는 한국 UDT가 창설된 전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시 미군의 전쟁수행 핵심 전략인 상률 작전을 실시하기 위해 적 해안 정찰, 첩보 획득, 해상 정찰, 내륙기습폭파공작, 해안 장애물 제거, 기뢰 탑색 및 소해, 유격대 및 요인 호송, 특공대 철수 지원 및 수중파괴 임무를 수행하며 큰 활약을 보인 미 해군 UDT를 모체로 하여 창성을 준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 해군 UDT의 선진 교육을 통한 작전개념 정립과 차기 국내에서 배출해야 될 UDT 요원들의 교관 확보와 더불어 임무수행에 필요한 장비 획득이 우선시 되어 1954년과 1955년 해군 내 국가기관과 군인정신이 투철하고 체력이 우수한 대원을 공개모집, 미 8군 주도의 영어시험을 거쳐 최종적으로 장교 3명과 사병 4명 등 총 7명을 최종 선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해군은 설발된 7명을 두 차례로 나누어 미 해군 UDT과정에 유학을 보냈고 장인표 대위 등 7명 전원이 소저의 미 해군 UDT과정을 수료하여 한국 해군 UDT가 탄생되었습니다. 

 

이들은 미 해군 UDT 교육과정에서 습득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UDT찰성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제2전단 예하 함정 교육대(STU)에서 UDT 모집을 공고하였습니다. 지원 자격에 별다른 조건은 없었고, 신체 건강한 해군 장병이면 지원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수료 후 특별대우와 미국 유학 기회 보장, 파격적인 주, 부식을 제공한다는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던 시절이라 해군 내에서 보급품이 제대로 조달되지 못했고 식사 및 의복 지원도 여의치 않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해군에서 제시한 조건은 해군 내에 최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모집공고 후 300여 명의 사병들이 지원하여 지원자들은 팔굽혀펴기, 달리기, 등 1차체력검정을 실시하고 다음날 해안대 방파제 앞 해상에서 2차로 수영 및 잠영 테스트를 거쳐 최종 80명이 선발되었습니다. 

 

 

1955년 8월 5일 UDT1기생이 입교하였고 해군의 최초 UDT 교육은 교육훈련에 필요한 가종 교재와 장비 등이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력 달련과 수영 위주로 제2 전단 예하 함정 교육대(향무) 주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훈령이 필요한 장비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지만 미 해군 UDT 교육과정과 유사한 내용을 구성하여 체력, 지옥주 훈련(극기주), 구보, 수영, 잠수 등의 다양한 교육훈련을 13주간 실시하였고 특히 이때 실시한 잠수 교육은 국내 잠수 역사상 최초로 기록되어 한국 잠수 역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매일 계속되는 강한 훈련에 생도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 해군 UDT과정을 수료한 7명의 교관들은 UDT의 혼과 열정을 심어 죽 위해 미 해군 UDT과정보다 더 강한 훈련으로 교육하였고 1955년 11월 9일 마침내 병 조장 이만수 등 26명은 대한민국 UDT1기로 배출되었습니다. 

 

1955년 11월 9일 UDT1기 수료식과 더불어 장인표 대위를 초대 지휘관으로 교관 7명과 UDT1기생 26명 등 총 33명으로 해군 함대 해변단 에하에 수중파괴대 (UDT)를 창설했습니다. 원래는 해군 현역 장병만을 대상으로 모집하였으나 1988년 이후부터는 민간 모병을 병행하였고, 현재는 미간 모병을 통한 입대자가 대부분입니다. 

 

오늘은 해군 특수전단에 관해 간략하게 알아보았는데 다음에는 UDT 하는 일과 훈련과정 등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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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카족은 네팔 중서부 산악지대에 사는 몽골계 소수 부족으로 구르카 용병은 이들 부족 출신의 용병들을 말합니다. 

영국이 구르카족 전사들을 용병으로 고요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는데 현제 구릉족 전사들은 영국, 인도, 브루나이, 싱가포르 등에서 용병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구르카 용병의 쿠쿠리 훈련 장면 이미지  출처: 영국군

1. 구루 카 용병 개요

영국에서 운영하는 네팔인들로 구성돼 외인부대입니다. 현지에서는 '고르카라고 불리며 고르카 지역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이는 고르카 지방에 사원이 있는 중세 힌두 성전사 그루 고 라크나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네팔의 산간 지방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입니다. 이들의 활약은 어마무시합니다. 

걸어 다니는 전쟁에 사신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세르파와 더불어 기본적으로 세계 최고 고산 재대에서 살아가는 덕에 일반인라면 정시도 못 차릴 고지대에서도 뚜어 다닐 만큼 심폐량이 높으며, 그에 딸 신체 능력도 당연히 뛰어납니다.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매우 우수한 용병으로 유명합니다. 네팔의 3대 수입원으로 마약, 관광, 구르카 용병을 꼽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네팔의 전통칼 이라고도 불리는 쿠크리를 사용합니다. 

다양한 민족이 있는 네팔 구르카 부대원들 중 상당수는 동아 시인 계통입니다. 

 

대영제국이 싱할라족이나 시크교도, 라지푸트 다음으로 가는 전투 민족으로 꼽았으며 이들과 달리 영국 육군의 용병에 긍정적이었던 구르카 용병을 지금까지 잘 고용하고 있습니다. 

영국 육군의 2개 구르카 대대 중 1개 대대는 브루나이에 주둔 중입니다.

 

인도 육군도 자체적으로 구르카 병을 모병하여 10만 명 규모의 구르카 부대를 편성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네팔군도 있습니다. 

 

싱가포르 경찰도 연국 육군에 모병을 위탁하여 2000명 규모의 구르카 부대를 편성하고 있습니다. 

 

브르나 군에도 자체적으로 구르카 병을 모병하여 2,000명 규모의 구르카 예비대가 술탄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 구르카 용병의 역사적 배경

네팔의 고르카 왕국과 동인도 회사에 구르카 전쟁(1814~1816) 중에 영국은 자신들이 구르카도 칭한 고르카 리 군인들에게 김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평화협정에 따라 고르 칼라 군은 동인도 회사 군대와 계약하여 이들로 합류하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네팔 산간 지방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체트리(타 쿠리), 머거르, 구릉의 사람들이 영국과 맞서 싸운 원조 구르카입니다. 

영국군을 공포에 떨게 한 구르카 용사 이미지

 

브리민(브리만 네팔에서는 브리민이라고 부릅니다.), 세르파/타망 들은 입대가 허용돼 않았습니다. 

오늘날 구르카는 모든 네팔의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존의 구릉, 머거르, 체트리(타 쿠리) 외에도 라이, 림부, 세르파, 타망, 네 와리 등이 속해 있습니다. 

 

원래 영국은 각지의 식민지에 현지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세포이 같은 부대)를 창설해 유지해 왔으나, 인도 및 홍콩, 아프리카 등 자국 식민지를 독립시켜주는 과정에서 현지인 부대도 대부분 해체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구르카 용병부대만은 해체하지 않은 채 지금도 대대 규모로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구르카 부대 청설 이래의 전사자도 만여 명에 달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영국 육군의 일부로 정글 등지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큰 손실을 입혔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에서도 활약했습니다. 옆 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나라들은 모두 이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1962년 다시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브루나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싱가포르에 주둔한 구르카 부대가 도입되어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포틀랜드 전쟁 때는 일부 아르헨티나 육군 병력들은 구르카 부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항복하거나 도망쳐 버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영국 육군의 규모가 많이 축소된 최근에도 여전히 중요한 전투부대 중 하나입니다. 

 

1990년대 후반 파키스탄과 국경분쟁에서 인도 육군 소속 구르카 병들이 파키스탄 육군과 대적하여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2-1. 전투 종족으로 영국 육군의 용병이 되다. 

1803년이래 네팔의 구르카 정부는 인도의 국경지대를 노골적으로 침범하여, 영국을 도발했습니다. 

특히 인도 북부의 영국령 촌락을 약 200여 개나 병합하고 갠지스 강 상류까지 침략할 기미를 보였습니다. 영국의 인도 총독 민토 겨은 이 지역은 역구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네팔은 계속 권리를 주장하여 양도하지 않았으므로 새로 부임한 총독 모이라 결이 비상 수단으로 현지에 경찰서를 설치하고 강 결한 태도로 임하였습니다. 

 

당연히 구르카 측이 가만있지 낳고 1814년에 그 경찰서를 습격, 18명의 경찰과 을 살해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도 이에 대응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4개 부대로 편성하여 네팔로 진격시켰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험난한 지세 이용한 구르카족은 여러 성세를 중심으로 완강히 저항함으로써 영국군은 초전에 고전하였으나, 서틀 레지 방변으로 진격한 사령관 D. 옥털로 나의 분전으로 요새를 차례로 격파하고 구르카군의 최후 거점인 마룬 등의 요새를 격파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패배한 구르카 득은 항복하여 영국과 사가 우리 강화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교원에서 출간흔 랜드 엔 피플에 따르면 이 당시 영국군은 구르카 족의 용맹함에 치를 떨면서도 역구 측에게 점심 먹을 시간이니 전투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고 단신들의 티타임 동안에는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구르카족의 매너에 감탄했다는 비회도 있습니다. 

 

특히 구르카족이 머리가 날아간 상태에서도 역 국군을 향해 계속 칼을 위 둘렀다든지,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쿠크리 하나를 들고 왔다든지 하는 이야기도 적혀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휴식시간에 영국이나 구르카 족이 서로 간의 부상자를 치료해주는 훈훈한 광경도 나왔다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구르카족이 적이었으나 그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고 그 결과 영국군에서도 이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2-2. 영국군이 된 전투 종족

이들이 맹활약한 전투로 알라 주는 게 세포이 인도용 병대들의 반란을 진함 한 전투와 영국 -아프가니스탄 전쟁입니다. 

1차 전쟁(1839~1842)에서 호되게 털린 영국은 당시 영국군 및 인도계들로 이뤄진 영국군이 전멸(1명만이 살아 돌아 옴) 다한 것을 교훈 삼아 산악전의 고수인 구르카병을 2차 전쟁에 벌어진 1878년에 대거 파병했습니다. 

그리고 카불 점령에 크나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20만이 넘는 구르카 병이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먼저 진격하며 전설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물로 4만에 이르는 구르카 병이 전사했을 정도로 이들의 피해도 컸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벌어진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구르카 군이 대거 파병 나갔지만 영국은 1차 대전의 피해도 엄청났던 터에 여기에 총력을 다하듯 없어 지원도 흐지부지된 상태였으며, 몇 달 안가 전쟁은 대출 끝났던 탓에 구르카 군은 2차 전쟁과 달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습니다. 

4

구르카 용병부대 구쿠리 한자루면 된다. 


구르카 용병 이야기 2편을 기대해 주세요

2021.10.03 - [전쟁사] - 구르카 용병 -두번째 이야기 (전쟁활약상)

 

구르카 용병 -두번째 이야기 (전쟁활약상)

이번에는 구르카 용병 전쟁 관련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구르카 전적 구르카 병이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건 제2차 세계 대전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나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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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저번 시간에 이어 외인 부재 2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프랑스 외인부대 두번째이야기 썸네일 

1. 현대 외인부대 모습

1960년대 콩고 내전에 참가해서 활약을 많이 했습니다. 외인부대 출신 용병단이 카탕가 반군에 협조해서 아일랜드 유엔 평화유지군과 싸운 자도빌 전투도 있습니다. 70년대에도 자이르 분란과 내전에 참가를 했고 90년대 재발한 2차 콩고 전쟁에도 외인부대 병사들이 많이 참가했습니다. 

외인부대 총기 점검중 이미지 출처 : 외인부대

걸프전, 말리 내전과 미구국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에 투입되었습니다. 

해외 파병 병력이 필요할 경우 차출 1 순 의인 신속전 개군에는 프랑스 육군 제6경 기갑여단과 제9경기갑 해양 여단 , 제11 공수여단, 제27산악 보병여단 등이 있는데, 외인부대 병력도 이들 부대에 소개 있기 때문에 파병을 자주 가는 편입니다. 

 

파병을 나가변 가보급의 3배에 달하는 수당이 나오고, 진급 점수도 팍팍 쌓이기 때문에 , 파병에 대한 선호도는 높다고 합니다. 현제도 북아프리카와 아프가니스탄 등에 여러 분쟁지역에서 활동 중입니다. 

 

2. 외인부대의 생활상 

병력 수급 방식이 모변제이고 수익이 짭짤하고 군장비가 좋다는 점, 훈련의 질이 보장되고 파병을 가서 실전 거인 분위기가 조성되며 짬밥이 아닌 경력을 따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대한 민국 국군과 판박이입니다. 

어느 나라 군대나 그렇겠지만, 한국군과 판박이라는 것은 체벌과 군기 부분에서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훈련소에서나 훈련 상황에서의 애기로 평소의 분위기와 군기는 비교도 안되게 프리 합니다. 

사격제를 취하고 서서쏴자세를 하고 있는 외인부대원 이미지 출처: 외인부대

또한 부대에 따라 다른데, 보통 그러한 불필요한 군기를 잡지 않거나 가혹행위가 덜한 부대가 장비와 훈련의 질 또한 좋은 곳입니다. 그라 해당 장병이 적절한 신체능력과 언어능력을 지녀야 그러한 것이 보장되는 부대로 보내주기 때문입니다. 

나약한 신체+ 불어구사율0%라면 낙후된 부대에 배치되어 어마어마한 부조를 겪으며 로망과는 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외인부대 부대는 훈련의 강도부터가 한국에서 흔히 메이커 부대로 불리는 여러 전방부대와 비견될 정도로 살벌해서 신체가 약하다면 입대 훈련을 중도 포기하고 나갈 확률이 높습니다. 

 

외인부대는 아무래도 프랑스인들을 대신해 전쟁에 나가는 외국인 용병부대이기 때문에 그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 당연 왠만한 한국의 정예 부대급으로 훈련이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하의 특수부대인 코만도를 가려면 아무레도 현역들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불어 실력이 종아야 하고 특전사나 UDT/SEAL과 같은 한국 눈 특수부대에 입대하여 수료 OR 자대 배치 후 거기서도 평타를 칠 정도의 체력은 되어야 합니다. 

 

외인부대 지원자의 8할은 군 경험이 없는 일반이 출신이며, 4개월간의 훈련중 본 대대에서 훈련 소대만 따로 나오서 첫 1달간 훈련을 받는데 농장, 소위 팜(FARM)이라고 부리는 프랑스 외곽에 위치한 훈련소에서의 숙식 훈련을 받는 동안은 상당히 고대 게 훈련하고 정신, 육체적으로 고생시킵니다. 

 

이때 도망가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더러있다고 하고 훈련 중의 중도 포기는 개인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이걸 통화한 사람은 나머지 3달간 특별한 문제가 있거나 정말 마음이 맞지 않아 그만 두 눈 경우를 제외하면 쭉 자재까지 가게 된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자대까지 가는 사람은 지원자의 10% 정도라고 합니다. 

 

의무 복무기간은 5년이며 6개월 단위로 연장을 신청할수 있습니다. 이는 5년은 그 어떠한 사유로도 복무해야만 합니다. 

정식으로 군번을 부여받고 의복무기간이 주어진 군인이 탈영했다가 다시 프랑스에 입국해서 체포될 경우 곧바로 군 교도소행이며 만기 출소 후에도 잔여 복무기간을 다 채워야 합니다. 

이러 경우 당연하지나 탈영한 그 계급에서 지급이 막히며 장기 복무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기본 복무 기간 기준으로 간부가 되려면 죽다 살아날 만큼 치열한 전투를 겪거나 웬만큼 큰 공훈을 세워야 합니다. 

군공이 없을 경우 간부가 되려면 10년 넘게 걸립니다. 

 

2차 대전 직후에는 갈 속이 없진 SS나 독일 국방군 출신 경미한 전범 등 독일인들이 과거를 묻지 않았던 외인부대에 입대했습니다. 

그 외에도 외국인의 신원릉 추적할 방법이 없으니 범죄자 등이 입찰 개 연서가 당시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이사이 과거에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출생지등을 철저히 따져본 다음에 훈련소 입대를 허용합니다. 

범죄자 등은 인터폴 까지 연계한 철저한 신원 조사를 거쳐 가려내고 이렇게 신원 조사를 하는 진짜 이유는 국제 수배범이 이수배를 피해 도피 입대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인데 신원조사에서 수배범이 밝혀지면 바로 인터폴에 넘깁니다. 

3. 외인부대 입대조건

 

외인부대 입대 조건은 

나이는 생일까지 꼼꼼히 따져서 17살 6개월 ~39살 6개월까지만 지원 자격이 있습니다. 39살 7개월부터는 얄짤없이 불합격이며 17살 5개월 이하의 연력은 부모 또는 후견인 동의서가 있어야 하며 외교 마찰이 생겨서는 안 되기 때문에 대사관 공증까지 받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도 14살 0개월 이하일 경우 제한됩니다. 

 

서류는 자신에게 해당되는 모든 서류를 제출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예를 들면 출신 대학교, 예비역의 경우 복무기로, 회사에 다니적이 있으면 재직 증명서 등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모국어는 할줄 알아야 하며 문맹 역시 결격사유입니다. 입대하면 프랑스어를 새로 배워야 하는데, 문맹이라 함은 언어구사능력이 전무하기 때문에 여기서 결격사유가 됩니다. 

 

지병 검사가 엄청나게 까다로운 데 충치도 결격사유입니다. 결핵을 앓은 적이 있어도 결격사유이며 단, 안경 착용자는 안 결을 지참하면 됩니다. 

모든 종류의 후유증이 존재한 지병은 결격사유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서든 복무가 가능한 병력을 충원하는 게 이들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남극, 북극부터 아프리카들의 잔혹하기 짝이없는 적도 부근의 환경, 사막, 섬 같은 환경들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후유증은 업야 하고 더디 서든 부적격해서는 안됩니다. 

 

입대 시엏은 체력 측정과 정신 검사가 있는데 엄정히 선발해서 뽑는 것이니 만큼 체력 측정 기준이 그래도 있는 편입니다. 

생각보다는 빡빡하지는 않은데 이는 '훈련소에서 만들어 준다.'라는 개념이 크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훈련소의 훈련강도는 아무래도 프랑스 정규군의 프랑스인을 대신해 파병을 갈 외국인 용병들을 단기 집중 양성할 목정이라 전체적으로 강하고 실전적인 훈련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4. 외인부대는 다 특수부대?

훈련중인 제2외인공수연대 공수특공대 요원 출처: 외인부대 

외인부대는 정규전을 수행하는 프랑스 육군 전투여단에 배속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정규 부대입니다. 

이중 해외에 가장 많이 파견되었던 부대가 공수연대였고, 또 활약도 인상 깊었기 때문에 외인 부대 특수부대라는 인식이 생겼으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공구 연대 자체는 특수부대가 아닌 공수 알 보병이며, 외인부대 내에서 특수부대는 각 연대마다 있는 코만도 팀입니다. 

 

외인부대는 5개 보병연대, 1개의 기병(기갑)연대와 2개의 공 벼 연대, 그리고 1개의 공수연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다른 2개의 연대가더 있지만 이들은 사령부와 신병훈련소를 책 입지고 있으므로 엄밀히 말해 전투부대의 성격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위이 부대중에서 각 부대 예하의 코만도 공식적으로 특수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인 것입니다. 

즉 외인부대 자체는 특수부대가 아니며 외인부대는 한의 병과로 인식이 될만크 부대 내의 담당 임무가 매우 많습니다. 

 

많은 밀덕들이 또는 특수부대 에 강한 인상을 가진 사람들이 코마도를 들어가려고 하지만 이 코마도는 일반 연대에서 우선적으로 수년 군생활을 해야 합니다. 

체력적으로도 한국의 특수 부대수준을 갖추어야만 하고 거기다 유창한 불어가 가능해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혹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일반 연대들이 다 약하다는 것은 아니며, 모병제인 프랑스군 내에도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온갖 위험한곳에투입시키는 신속전개 충격 군 용병부대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징병제 한국군 보병부대의 병사들에게 실시하는 체력 훈련보다 훨씬 강도가 세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한국에서 특수부대 필이 꼿혀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체력적인 문제 +언어장벽으로 인해 자진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애초에 외인부대 자체는 특수배도 아닐뿐더러 체력이나 언어가 안되면 자연 스래ㅐ 주변에서 갈굼을 당하게 되고 , 그러다 보면 결국 인종차별까지 당하게 되는 등 온갖 수난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강하면 혹은 강해보이면 특수부로 생각하고 보는 민간인들의 대표적인 착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부대의 성격을 굳이 따지자면 (산하에 기병(기갑) 편제가 있기는 하지만 제한적인 특수임무가 가능한 정규 경보병 부대 정도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미국에 레인저내지 한국에 수색대대나 특공대와 비슷한 성격, 물론 이들과도 다른 면모도 많이 보이긴 합니다. 

 



2021.09.26 - [특수부대] -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국민이 아닌 외국 인르로 만 구성돼 부대 외인부대 하면 생각나는 프랑스 외인부대 1. 부대 개요 레지오 에트랑제 (Légion étrangère) 프랑스 육군 소속의 인이 부대, 프랑스군 내의 엘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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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민이 아닌 외국 인르로 만 구성돼 부대 

외인부대 하면 생각나는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외인부대 이미지 

1. 부대 개요

레지오 에트랑제 (Légion étrangère) 프랑스 육군 소속의 인이 부대, 프랑스군 내의 엘리트 부대이자ㅏ 1 순의 해외파병군 중 하나입니다. 외인부대 내에선 기계화 보병, 공수 보병, 경보병, 코만도, 전투공병 등 수많은 성격의 부대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속 전개군 및 충격 군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하에 프랑스 특수전 사령부 소속으로 특공, 정찰, 흑색 작전 등의 특수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인 코마 도도 존재합니다. 

 

프랑스 인이 아닌 타국인 중 18세~40세의 신체 건강한 남성을 모집 대상으로 합니다. 

여군은 뽑지 않습니다. 

 

1831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와 전쟁으로 혼란한 상태였으며 유럽 각구에서 몰려온 부랑자, 망명자 등의 유입은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두 문제를 도시에 해결하고자 루이필리프 1세는 외국인 부랑자, 망명자 등을 용병으로 모집하여 전쟁터로 치워버리다는 방안을 고안해 냈습니다. 거기다 프랑스인들 중 장 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범죄자, 실업자 등도

외인부대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창설된 이후 전제 게의 각종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최근까지 약 3만 5천여 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외인부대는 우리 고향(Legio Patria Nostra) 명예와 충성(Honneur et Fidélité)이라는 부대 정신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또한 프랑스 엘리트 부대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현제도 프랑스 정부의 명령에 따라 북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의 여러 분쟁지역에서 활약 중입니다. 

2012년 기준으로 외인부대의 총 행정 지휘관은 육군 소장이고, 부대의 총규모는 8천여 명의 수준입니다. 

 

공식 행진곡으로는 le Boudin 이 있습니다. 

 

2. 부대 구성

부대구성 마크 

 

부대 전체의 규모는 사단 병역의 규모이지만 외인부대는 지휘계통이 잇는 부대가 이니라 하나의 병과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인부대 사령관은 군령권이 있는 사단장이라기보다는 공병 감인 준종감처럼 병과감에 가깝습니다. 외인부대 사령관은 외인부대에 대한 작전 지휘 권이 없고 인사, 행정 등 군 정권만 행사합니다. 미 해병대 사령관이 미 해병대의 대해 군정권만 행사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3. 프랑스 외인부대 역사

프랑스 외인부대는 1831년 루이 피 리프가 식민지인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용병 5개 대대가 그 시조이며 이후 루리 필 리크가 식민지인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용병 5개 대대가 그 시조이며, 이후 루리 피 리프 시절에 정규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를 통제하는 역활을 부여받았고, 알제리에 기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외에도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카메론 전투에서는 65명의 외인부대가 2천 명의 멕시코 육군과 싸워 5명만 사 아남 았습니다. 전가기에는 모로코에서 리프 전쟁에 참 가히 기도 했습니다. 

 

3-1.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외인부대는 대부분 해외 식민지에 주준하였고, 제13 외인 반여단만 유럽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3 외인 바 여단은 프랑스 항복 이후 역고으로 건너가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고 식민지에 주둔하던 외인부대는 자유 프랑스군과 비사 프랑스 괴뢰군으로 양분되어 1941년 6월 시리아 레바논 전역에서는 자유 프랑스 13 외인 반 여단과 비사 프랑스 6인 외 인보 병연 대가 다마스쿠스에서 서로 교전하기도 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해외로 빠져나간 이념이 다른 독일인들의 사례도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자유 프랑스 소속으로 영국군과 함께 싸운 외인 부대원 준 독일계의 비율이 매우 높았습니다. 

 

비르 하킴 전투 당시 프랑스 외인부대 출처 외인부대 홈페이지

3-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는 베트민 측이 대포와 대공포를 분해해서 산 정상까지 끌고 온 뒤 조립해 포격하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웠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엄청난 희생 끝에 결국 항복하였습니다.

 

외인부대 역사상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전쟁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모두 10,483명이 전사했는데 외인부대 역사상 1 만당 위를 넘기는 전사자는 오로지 베트남 전쟁뿐이었다고 합니다. 전사자 중 한국 출신이 3명 있다고 합니다.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에 대하여 베트민은 악랄한 대우를 했는데 꼴랑 미숫가루 한 줌만 주고 수백 km를 걸어 가게 했습니다. 

당연히 쓰러지는 사람은 개머리판으로 패줬으며 결국 다 죽어가는 사람은 사살했습니다. 

포로 학대라고 프랑스가 분개했으나 이 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저지른 학살과 포로 학대를 내세우는 베트민의 반론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전쟁의 직간접적 원인이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배 때문이란 걸 생각한다면.. 생포된 외인부대원 가운데, 베트남과 간은 공산국가 겸 우방 국이었던 동독 지역을 비롯한 당시 공산국가 지역들의 출신자에 한정하여 고향에 가는 걸 조건으로 우방국 예우 차원에서 조기 석방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독 출신 및 공산권 출신의 왼 인부 대원중 몇 명이 조기 석방되는 경우 있었습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프랑스 군 활주로까지 포위 더어 항공 탈출도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라나 패배가 뻔히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결사항전을 각오한 것을 보면 엄청난 구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3-3. 알제리 전쟁 

우방의 도움으로 2차 대전의 승전국에 오른 프랑스 제4 공화국은 시대가 바뀌어감에도 식민지에 대한 욕심을 포기 못한 채로 이도 차이나 전쟁의 패전과  더부어 알제리 전쟁의 늪에 빠져있었습니다. 

알제리 독립군과의 전쟁에서 자행된 각종 학살과 반 인륜적인 범죄는 특히 프랑스 공수부대와 외인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는데 국내의 반전 운동 돠 해외의 비난 여론으로 프랑스 정부는 코너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알제리는 프랑스 영토라는 우파의 압력과 여론도 거셌고 특히 보수적인 프랑스 군부는 알제리를 포기할 경우 공공연한 구사 쿠데타 협박까지 일삼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 4 공화국은 무 저지고 드골이 다시 정 치르 복귀하면서 5 공화국이 성립되었습니다. 

드골은 우파와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당연히 그들은 드고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알제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드골은 군부와 국우파의 뜻대로 알제리의 기약 없는 늪에 빠져 가망 없는 구사 작전을 감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알제리 전쟁으로 프랑스 경제는 피폐해진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알제리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 알제리를 둘러싸 우파와 좌파의 좌우대립은 국민을 분 열시 킬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군의 징집에 엄청난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고 알제리 내의 프랑스 군의 학살은 해외의 비낭 여론을 형설 하고 있었습니다. 

1961년 에 드골 정부는 알제리 국민의 투표를 통해 프라스의 일부로 남아서 똑같은 프랑스 국민으로 남던지 아니면 완전한 독림을 하던지 그 선택을 알제 링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부수적인 군부에서 엄청난 반발이 있었고 4명의 최고 위급 장군들은 드골을 제거할 구사 반란을 계획했습니다. 

 

프랑스 생 사르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최고위급 엘리트 강성파 장군들이 군사반란을 계획하는 도중 윗글 감지한 드골 정부에서 주요 전쟁 지휘 간들을 속속 해임하거나, 본국이나 유럽으로 발령을 내서 드골에 충성하는 장군들로 하나 둘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 결과 군사반란 당시에는 반란군 측은 퇴역장군이 되었거나 주요 작전 사령관이 아닌 상태였습니다. 다시 주알제리 프랑스군은 47.7만 명 규모였는데, 이중 최정예 엘리트 부대인 공수부대 3개 연대가 포섭이 되어서 (당시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은 2개 구수 사단 ㅈㅇ 제1 외인 공수연대와 14샤쇠르 공수연대, 18샤쇠르 공수연대 3개 연대만 포섭)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특성상 중화기가 없이 경무장을 한 이들 3개 연대의 전투력은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의 0.6%에 불과한 전력이라 결과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반란  개시 6일 만에 반란군은 스스로 항복을 하고 , 반란에 가담한 3개 공수연대 장교 114명을 포함한 220명의 장교가 파면되었고, 이후 반란군 색출 작업을 통해 전체 프랑스군 장교의 3%에 해당하는 1,000여 명이 장교가 주로 공수부대 장교들을 중심으로 파면되었습니다. 

 

이 반란사건의 결과 반란에 가담한 장교들이 이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은 주동자들은 구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 집해는 이뤄지지 않았고 대략 평균 징역 15년 정도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군사 반란 중 사망자는 발란 군 측 외인 공수 연대의 습격에서 무선 소신 소를 지키다 사망한 병사 한 명입니다. 

당시 반란에 가담한 프랑스 정규 육군 공수부대인 녹새 베레 제1 외인 공수연대와 붉은 베레로 유명한 르파로 이제 14, 18샤쇠르 공수연대는 반란사건 후 즉시 부대가 해체되었습니다. 

 

반란군 측에는 군내 사조직인 organization armee sedrete(OAS) 회원이 많았는데 OAS는 당시 극한으로 치닫던 알제리 전쟁에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군사작전에 환멸을 느낀 장군들이 알제리 독립군에 대한 달 법, 불법적 보복을 위해 결정한 초법적 암살 테러단체로 , 임간인에게 대한 무차별 테러나 독립운동가나 정치인에 대한 암살 테라, 불법 체포 및 구금, 고문 등을 이삼았는데 알제리 군사반란을 도도한 장군들이 OAS를 창단한 주도세력들이었습니다. 

 

OAS가담 장교들은 에리트 공수부대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발 나군이 전부 공수부대였고 반란이 실패한 후에는 일부가 탕 영하여 , 드골 대통령 암살 등을 시도하다가 구속되는 가 하면 알제리에서 테러를 이 삼다가 사형을 당하는 등 여파가 있었습니다. 

알제리 반란 사거로 외인부대나 공수부대와 같은 엘트 ㅈ원병 부대의 장교들보다는 징지병 부대 장교들의 충성심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되었습니다. 

 

 

2021.09.26 - [특수부대] - 프랑스 외인부대 2번째 이야기

 

프랑스 외인부대 2번째 이야기

이번에는 저번 시간에 이어 외인 부재 2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 현대 외인부대 모습 1960년대 콩고 내전에 참가해서 활약을 많이 했습니다. 외인부대 출신 용병단이 카탕가 반군에 협조

rokmc76.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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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베레(Green Berets)

 



1952년 애론 뱅크(Aaron Bank) 대령에 의해 창설된 美 육군의 특수부대로, '10 공수특전대'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린베레는 요원들이 녹색 베레모를 쓴 데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이 부대는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공수부대, 레인저 부대 및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예비역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창설자인 뱅크 대령에 의하면 주 임무는 '육해공으로부터 적지에 침투하여 저항군이나 게릴라를 양성하여 유격전을 펼치는 것'이며, 또 다른 임무는 적지 깊숙이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레인저는 강력한 기습 공격을 주로 하지만 그린베레는 적지에서 수개월간을 지내며 작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린베레 요원들은 제한된 물자로 생존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1952년 말 한국전쟁에 첫 번째 그린베레 요원들이 실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후 1957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훈련팀이 창설되었는데, 이 부대는 남베트남에 파견되어 군사자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린베레는 케네디 대통령 당시 전폭적인 지원으로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에 훈련학교의 이름을 'John F. Kennedy Special Warfare Center'라고 바꾸기도 했습니다. 

1971년 베트남에서 철수한 후 그린베레 요원의 수는 줄어들었으나 새로운 훈련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으며 부대 내에도 변화가 일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세계 각국에 파견되었으며 특히 중미의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서는 특수부대의 훈련을 돕기도 했습니다. 또 1989년 12월 파나마에서의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델타포스(Delta Force)


 


델타포스는 정규군이 투입되기 힘든 상황에 뛰어들어 요인 암살, 인질 구출, 적 기지 파괴 등의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미 육군의 특수부대입니다.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며, 대사관 및 항공기 인질 구출 작전, 마약 및 핵물질밀매단 와해 공작 등을 수행합니다. 델타포스는 특수전 장교 출신이자, SAS(Special Air Services, 영국 육군 공수특전단)에서 근무한 바 있는 차알스 베크위드(Charles Beckwith)에 의해 1977년 11월 창설됐습니다.

본부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랙(FortBragg)에  있습니다.

델타포스는 육·해·공군의 다른 특수부대와 달리 특수전사령부(USSOCOM)의 통제 체계에서 벗어나 '연합 특전사'(JSOC: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의 지휘 체계 하에 있습니다. JSOC 산하에 있는 부대는 특수부대 가운데서도 가장 비밀을 요하는 임무만을 수행하는 부대들로 해군의 연구개발단(DevGRU)과 육군의 160 항공단, 공군의 제2항 공사단 일부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델타포스는 1981년 인도네시아 여객기 구출작전, 1984년 베네수엘라 여객기 인질 구출작전, 1989년 파나마 침공 시 미국인 인질 구출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1979년 이란 혁명 때 수도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에 억류된 미국 인질 66명을 구하려다 실패하였습니다.

 


레인저(Ranger)



그린베레, 델타포스와 함께 미국 육군의 3대 특수부대로, 미 육군 특수작전사령부 소속의 경보병 특공부대입니다. 전통적으로 착용해온 검은 베레모가 유명합니다. 레인저 부대의 임무는 일반적으로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적진에 맨먼저 침투, 신속한 공격을 통해 활주로와 기타 목표지점을 점령한 후 다른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사수하는 것입니다. 특히 공항 점령과 기습은 이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모두 자원병으로 이루어진 레인저는 공중, 지상, 해상 등 어떤 경로로도 침투하고 극지, 정글, 사막,산악 지형 등 어떤 상황에서도 싸울 수 있도록 지옥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지원자 200명 중 1명 정도가 최종 과정을 마칠 정도로 선발이 까다롭고 여성 대원은 없습니다.

레인저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특수부대로서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입니다. 당시 이 부대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절벽을 기어올라 대형 포대를 폭파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이후 베트남전과 1983년 그레나다, 1989년 파나마에서 명성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1980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구출작전과 1993년 소말리아에서 모하메드 파라아이디드 체포작전에서 실패한 경험도 있습니다. 베트남전 이후에는 각 보병, 공수사단에 산재된 레인저 중대가 통합되어 '제75레인저 연대'라는 단일 지휘체계로 발족되었으며, 연대 본부는 조지아주 포트베닝에 있습니다. 

 

 


Navy SEAL(네이비실)



미국 해군의 엘리트 특수부대로, 네이비실에서 SEAL은 해상(Sea), 항공(Air), 육상(Land)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것입니다. 육·해·공 어디서든지 전투가 가능한 전천후 부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1962년 1월 1일 케네디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창설됐습니다. 미 해군의 특수전사령부(Special Operation Command) 산하에 속해 있는 SEAL은 태평양 지역에 위치한 제1 특수전단에 1·3·5 팀이, 대서양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제2 특수전단에 2·4·6·8 팀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특히 SEAL팀은 베트남전에 참가하여 군수기지(Logistics Base) 폭파 및 고급정보 수집에 커다란 공헌을 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도 투입되어 미국의 외교정책을 측면에서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SEAL팀이 순수한 군사업무의 수행에서 대테러리즘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9년 12월 발생한 이란 테헤란 미국 대사관 점거 사건 이후부터입니다. 당시 444일간이나 계속된 대사관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SEAL 내에 100명 규모의 SEAL-6을 창설하여 대테러리즘 능력을 보강하게 되었습니다. 


SEAL TEAM-6

네이비실은 1979년 11월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점거 사건 때 억류된 인질 100여 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대원 8명을 잃었습니다. 이에 해군 정보 인원 중에서도 정예요원을 선발, 100여 명으로 구성된 실 팀 6(SEAL Team 6)이 구성돼 대테러전문 부대로의 육성이 이뤄졌습니다. 

SEAL Team 6는 델타포스와 함께 합동특수전사령부(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에 소속되어 있으며, 데브그루(DEVGRU·Development Group)로도 불립니다. 대원 선발과 훈련이 혹독하기로 이름이 높으며, 적장(敵將) 참수 등 가장 까다로운 임무를 맡는 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린 레이더스(Marine Raiders)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 최전선에서 대테러전 및 침투 작전 등을 수행하는 미 해병대 특수전사령부(MARSOC)로, 2006년 2월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창설됐습니다. 이는 태평양 전쟁 때인 1942년 발족했다가 2년 만에 해체됐던 당시 특공대의 이름을 이어받은 부대입니다.

 

미 해병원정대(MEU)

미 해군당국은 MEU(Marine Expeditionary Unit)가 편제상 '특수부대'는 아니지만 '특수전이 가능한 부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해상으로부터의 작전을 지원하는 것이 주임무로, 장비와 병참 및 기술 지원·무기·군함 면에서 일반 부대보다 다양하고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어 막강한 전투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MEU의 보병대대는 일반적으로 육해공 합동작전에 투입되며 경무장 운송수단을 사용하며 또 공군작전부대는 헬리콥터와 헤리어젯(Harrier jets) 같은 고정날개가 장착된 군항 기를 이용합니다.


공군 특수부대
(Air Force Special Operations Forces)

공군특수부대는 근접 항공 지원을 제공하는 부대로, 저격, 급유 및 지원 업무 등도 수행한다. 이 부대는 최첨단의 항법, 정찰 장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Marine Recon



Marine Recon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 존재가 알려진 부대로, 1944년 이전에는 정찰·저격 부대였으나 1944년 4월 상륙 정찰 임무의 2개 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초기에는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 수중폭파팀)와 공동으로 해변 정찰 및 수위 측량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초에는 UDT와 함께 이오지마섬에 투입되어 작전에 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에서는 한국 동해에서 UDT와 함께 철도, 터널 및 교량 폭파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적 후방 200마일 지점에서 후방 교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51년에는 미 해병대 역사상 최초의 헬리콥터 침투 공격을 시도하였습니다. 또 1965년 베트남 전쟁에서는 담당 부대를 지원하여 작전에 임했으며 적의 중심 깊은 곳에서 장거리 정찰 작전을 실시하였습니다. 

1976년부터는 인질 구출작전에도 투입되었으며, 1977년에는 저격병이 추가되어 전투력이 향상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983년 10월에는 그레나다 침공에 투입되었으며 1989년에는 파나마에서의 'Just Cause' 작전에 투입되었다. 1990년에는 걸프전에 투입되어 이라크와의 최전선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여 미 해병대에게 적의 이동로를 알려기도 했으며 걸프전에서 238명의 이라크 군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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