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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민이 아닌 외국 인르로 만 구성돼 부대 

외인부대 하면 생각나는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외인부대 이미지 

1. 부대 개요

레지오 에트랑제 (Légion étrangère) 프랑스 육군 소속의 인이 부대, 프랑스군 내의 엘리트 부대이자ㅏ 1 순의 해외파병군 중 하나입니다. 외인부대 내에선 기계화 보병, 공수 보병, 경보병, 코만도, 전투공병 등 수많은 성격의 부대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속 전개군 및 충격 군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하에 프랑스 특수전 사령부 소속으로 특공, 정찰, 흑색 작전 등의 특수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인 코마 도도 존재합니다. 

 

프랑스 인이 아닌 타국인 중 18세~40세의 신체 건강한 남성을 모집 대상으로 합니다. 

여군은 뽑지 않습니다. 

 

1831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와 전쟁으로 혼란한 상태였으며 유럽 각구에서 몰려온 부랑자, 망명자 등의 유입은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두 문제를 도시에 해결하고자 루이필리프 1세는 외국인 부랑자, 망명자 등을 용병으로 모집하여 전쟁터로 치워버리다는 방안을 고안해 냈습니다. 거기다 프랑스인들 중 장 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범죄자, 실업자 등도

외인부대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창설된 이후 전제 게의 각종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최근까지 약 3만 5천여 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외인부대는 우리 고향(Legio Patria Nostra) 명예와 충성(Honneur et Fidélité)이라는 부대 정신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또한 프랑스 엘리트 부대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현제도 프랑스 정부의 명령에 따라 북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의 여러 분쟁지역에서 활약 중입니다. 

2012년 기준으로 외인부대의 총 행정 지휘관은 육군 소장이고, 부대의 총규모는 8천여 명의 수준입니다. 

 

공식 행진곡으로는 le Boudin 이 있습니다. 

 

2. 부대 구성

부대구성 마크 

 

부대 전체의 규모는 사단 병역의 규모이지만 외인부대는 지휘계통이 잇는 부대가 이니라 하나의 병과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인부대 사령관은 군령권이 있는 사단장이라기보다는 공병 감인 준종감처럼 병과감에 가깝습니다. 외인부대 사령관은 외인부대에 대한 작전 지휘 권이 없고 인사, 행정 등 군 정권만 행사합니다. 미 해병대 사령관이 미 해병대의 대해 군정권만 행사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3. 프랑스 외인부대 역사

프랑스 외인부대는 1831년 루이 피 리프가 식민지인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용병 5개 대대가 그 시조이며 이후 루리 필 리크가 식민지인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용병 5개 대대가 그 시조이며, 이후 루리 피 리프 시절에 정규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를 통제하는 역활을 부여받았고, 알제리에 기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외에도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카메론 전투에서는 65명의 외인부대가 2천 명의 멕시코 육군과 싸워 5명만 사 아남 았습니다. 전가기에는 모로코에서 리프 전쟁에 참 가히 기도 했습니다. 

 

3-1.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외인부대는 대부분 해외 식민지에 주준하였고, 제13 외인 반여단만 유럽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3 외인 바 여단은 프랑스 항복 이후 역고으로 건너가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고 식민지에 주둔하던 외인부대는 자유 프랑스군과 비사 프랑스 괴뢰군으로 양분되어 1941년 6월 시리아 레바논 전역에서는 자유 프랑스 13 외인 반 여단과 비사 프랑스 6인 외 인보 병연 대가 다마스쿠스에서 서로 교전하기도 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해외로 빠져나간 이념이 다른 독일인들의 사례도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자유 프랑스 소속으로 영국군과 함께 싸운 외인 부대원 준 독일계의 비율이 매우 높았습니다. 

 

비르 하킴 전투 당시 프랑스 외인부대 출처 외인부대 홈페이지

3-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는 베트민 측이 대포와 대공포를 분해해서 산 정상까지 끌고 온 뒤 조립해 포격하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웠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엄청난 희생 끝에 결국 항복하였습니다.

 

외인부대 역사상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전쟁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모두 10,483명이 전사했는데 외인부대 역사상 1 만당 위를 넘기는 전사자는 오로지 베트남 전쟁뿐이었다고 합니다. 전사자 중 한국 출신이 3명 있다고 합니다.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에 대하여 베트민은 악랄한 대우를 했는데 꼴랑 미숫가루 한 줌만 주고 수백 km를 걸어 가게 했습니다. 

당연히 쓰러지는 사람은 개머리판으로 패줬으며 결국 다 죽어가는 사람은 사살했습니다. 

포로 학대라고 프랑스가 분개했으나 이 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저지른 학살과 포로 학대를 내세우는 베트민의 반론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전쟁의 직간접적 원인이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배 때문이란 걸 생각한다면.. 생포된 외인부대원 가운데, 베트남과 간은 공산국가 겸 우방 국이었던 동독 지역을 비롯한 당시 공산국가 지역들의 출신자에 한정하여 고향에 가는 걸 조건으로 우방국 예우 차원에서 조기 석방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독 출신 및 공산권 출신의 왼 인부 대원중 몇 명이 조기 석방되는 경우 있었습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프랑스 군 활주로까지 포위 더어 항공 탈출도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라나 패배가 뻔히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결사항전을 각오한 것을 보면 엄청난 구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3-3. 알제리 전쟁 

우방의 도움으로 2차 대전의 승전국에 오른 프랑스 제4 공화국은 시대가 바뀌어감에도 식민지에 대한 욕심을 포기 못한 채로 이도 차이나 전쟁의 패전과  더부어 알제리 전쟁의 늪에 빠져있었습니다. 

알제리 독립군과의 전쟁에서 자행된 각종 학살과 반 인륜적인 범죄는 특히 프랑스 공수부대와 외인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는데 국내의 반전 운동 돠 해외의 비난 여론으로 프랑스 정부는 코너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알제리는 프랑스 영토라는 우파의 압력과 여론도 거셌고 특히 보수적인 프랑스 군부는 알제리를 포기할 경우 공공연한 구사 쿠데타 협박까지 일삼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 4 공화국은 무 저지고 드골이 다시 정 치르 복귀하면서 5 공화국이 성립되었습니다. 

드골은 우파와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당연히 그들은 드고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알제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드골은 군부와 국우파의 뜻대로 알제리의 기약 없는 늪에 빠져 가망 없는 구사 작전을 감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알제리 전쟁으로 프랑스 경제는 피폐해진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알제리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 알제리를 둘러싸 우파와 좌파의 좌우대립은 국민을 분 열시 킬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군의 징집에 엄청난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고 알제리 내의 프랑스 군의 학살은 해외의 비낭 여론을 형설 하고 있었습니다. 

1961년 에 드골 정부는 알제리 국민의 투표를 통해 프라스의 일부로 남아서 똑같은 프랑스 국민으로 남던지 아니면 완전한 독림을 하던지 그 선택을 알제 링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부수적인 군부에서 엄청난 반발이 있었고 4명의 최고 위급 장군들은 드골을 제거할 구사 반란을 계획했습니다. 

 

프랑스 생 사르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최고위급 엘리트 강성파 장군들이 군사반란을 계획하는 도중 윗글 감지한 드골 정부에서 주요 전쟁 지휘 간들을 속속 해임하거나, 본국이나 유럽으로 발령을 내서 드골에 충성하는 장군들로 하나 둘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 결과 군사반란 당시에는 반란군 측은 퇴역장군이 되었거나 주요 작전 사령관이 아닌 상태였습니다. 다시 주알제리 프랑스군은 47.7만 명 규모였는데, 이중 최정예 엘리트 부대인 공수부대 3개 연대가 포섭이 되어서 (당시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은 2개 구수 사단 ㅈㅇ 제1 외인 공수연대와 14샤쇠르 공수연대, 18샤쇠르 공수연대 3개 연대만 포섭)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특성상 중화기가 없이 경무장을 한 이들 3개 연대의 전투력은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의 0.6%에 불과한 전력이라 결과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반란  개시 6일 만에 반란군은 스스로 항복을 하고 , 반란에 가담한 3개 공수연대 장교 114명을 포함한 220명의 장교가 파면되었고, 이후 반란군 색출 작업을 통해 전체 프랑스군 장교의 3%에 해당하는 1,000여 명이 장교가 주로 공수부대 장교들을 중심으로 파면되었습니다. 

 

이 반란사건의 결과 반란에 가담한 장교들이 이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은 주동자들은 구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 집해는 이뤄지지 않았고 대략 평균 징역 15년 정도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군사 반란 중 사망자는 발란 군 측 외인 공수 연대의 습격에서 무선 소신 소를 지키다 사망한 병사 한 명입니다. 

당시 반란에 가담한 프랑스 정규 육군 공수부대인 녹새 베레 제1 외인 공수연대와 붉은 베레로 유명한 르파로 이제 14, 18샤쇠르 공수연대는 반란사건 후 즉시 부대가 해체되었습니다. 

 

반란군 측에는 군내 사조직인 organization armee sedrete(OAS) 회원이 많았는데 OAS는 당시 극한으로 치닫던 알제리 전쟁에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군사작전에 환멸을 느낀 장군들이 알제리 독립군에 대한 달 법, 불법적 보복을 위해 결정한 초법적 암살 테러단체로 , 임간인에게 대한 무차별 테러나 독립운동가나 정치인에 대한 암살 테라, 불법 체포 및 구금, 고문 등을 이삼았는데 알제리 군사반란을 도도한 장군들이 OAS를 창단한 주도세력들이었습니다. 

 

OAS가담 장교들은 에리트 공수부대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발 나군이 전부 공수부대였고 반란이 실패한 후에는 일부가 탕 영하여 , 드골 대통령 암살 등을 시도하다가 구속되는 가 하면 알제리에서 테러를 이 삼다가 사형을 당하는 등 여파가 있었습니다. 

알제리 반란 사거로 외인부대나 공수부대와 같은 엘트 ㅈ원병 부대의 장교들보다는 징지병 부대 장교들의 충성심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되었습니다. 

 

 

2021.09.26 - [특수부대] - 프랑스 외인부대 2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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