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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저격수는 20세기 들어서 진화를 거듭하여 전쟁의 세기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전쟁과 분쟁이 벌어지면서 저격수의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실전에서 얻은 숱한 시행착오와 갑진 경험, 그리고 계속되는 전술 개발과 훈련으로 저격수는 갈수록 정예화되어 갔습니다. 저격용 소촉과 망원 조준경, 야시경 등 관련 기술의 개발은 더욱 정교한 필살 저격 무기체계의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격수는 현대전의 필수 전력으로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현대의 저격수 훈련 이미지   출처: 미육군

1. 제1차 세계대전, 저격수의 본격적인 등장 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 전투에서 저격수는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했습니다. 개전 초 거의 모든 참전국이 저격수를 운용했지만 망원 조준경을 갖춘 저격수 부대를 운영한 나라는 독일 제국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광학기술과 관련 산업이 발달한 덕분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은 과학기술이 국가를 위해, 전쟁을 위해 적 그적으로 나선 전쟁이었습니다. 특별히 망원 조준경을 갖춘 돌일 제국의 저격수들은 참호 위로 머리를 드러내는 적 병사를 정확하게 조준해 사살하였습니다. 

독일군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망원조준경을 채용하여 정확한 조준사격을 했다. <출처: Public Domain>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처음에는 이러한 정확한 사격이 우연히 명중시킨 것이라고 믿었지만, 나중에 독일군의 망원 조준경을 발견하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독일 제국 육군은 대전 내내 이 저격수들의 활약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에는 독일의 뛰어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산업계가 제작할 수 있었던 고품질의 렌즈가 한 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저격수의 유효성과 살상력을 한층 더 높인 셈입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머리를 참호 밖으로 내밀지도 않고도 전방을 관측할 수 있는 관측용 포대경을 사용했습니다. 

나무 꼬챙이를 이용해 철모만 참호 밖으로 올려 적 저격수의 사격을 유발해 상대 위치를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영국군은 저격수 훈련소를 설치해 전문 저격수 양성에 들어갔습니다. 영국군의 헤스케스 헤스케스-프리처드 대위는 1915년 공식 허가를 받고 저격수 양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1916년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 전선에 있는 랭엄에 제1군 저격, 감시, 정찰 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학교는 처음에는 6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연합군에서 파견된 많은 군인을 교육해 빠른 속도로 전문 저격수를 배출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저격수가 적 사격을 받지 않고 목표물을 관측할 수 있는 포대경, 적의 사격을 유발함으로써 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종이로 만든 가짜 병사 머리 등도 고안해 실전에 응용했습니다. 

가짜 머리에는 고무 튜브를 달아 담배 연기를 내뿜게 해 적이 속아 넘어가도록 유도했습니다. 일단 적이 사격하면 이를 통해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한 뒤 그쪽으로 포격을 가해 무력화했습니다. 

 

헤스케스-프리처드 대위는 저격수와 관측수가 2인 1조로 짝을 이뤄 활동하면서 시너지를 높이는 방법을 비롯해 다양한 현대 저격 기술을 도입하였다고 하고 훈련과정에서 관찰력과 기억력을 동시에 높이는 '킴의 게임'을 도입해 현대 저격수 교육의 바탕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이게임은 참가자들에게 여러 물건을 늘어놓은 것을 보여주고 잠시 눈을 떼게 한 다음 약간의 변형을 가한 뒤 참가자들에게 변화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맞히게 하는 게임으로 보이스카우트나 걸스카우트에서 즐기는 놀이라고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용 소총으로 독일군은 마우저 소총 98, 영국군은 패턴 1914 엔필드와, 리-엔필드 SMLE MK 3, 러시아군은 M1891모신나강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2. 제2차 세계대전, 저격수 전술의 비약적인 발전 하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을 비롯해 다부분의 국가는 특수 저격수 부대를 일시 폐지했지만 스페인 내란이 벌어지면서 저격수는 다시 한번 등장해 그 효율성을 입증했습니다. 저격수의 공격을 당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저격수의 위험성을 다시 절감하게 된 셈입니다. 

 

1930년대의 특수 훈련을 받은 저격수 부대를 보유한 나라는 소련이 유일했습니다. 저격수는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어서 저격하는 기술을 연마한 것을 물론 정규군과 함께 작전하는 능력도 길렀습니다. 특수전을 강조한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소련 저격수는 정상적인 전투 상황에 초점을 맞춘 훈련을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1939년 11월 30일부터 1940년 3월 13일까지 핀란드와 소련 간에 벌어진 겨울전쟁에서는 저격수의 전설이 탄생했습니다. 

당시 핀란드군 저격수 시모 해위해(1905~2002년)는 겨울전쟁 기간 중 502~542명을 사살했습니다. 

1940년 3월 6일 소련군의 야포와 카운터 저격수의 경 격을 동시에 받아 부상을 입고 후송되기까지 미처 100일일 되지 않는 기간에 이룬 대기록입니다. 당시 전선 전역에 걸쳐 섭씨 영하 40도~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계속된 데다 극지의 겨울이라 해가 떠 있는 시간도 짧았음에도 그는 하얀 설상 위장복 차림으로 숨어 눈 덮인 벌판과 숲 속에서 하루 5명꼴로 적을 사살했습니다. 

 

핀란드 저격수의 전설인 시모 해위해 <출처: Public Domain>

해위해는 러시아 모신나강 소총 파생형의 하나로 핀란드에서 제작한 M/28-30 소총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적에게 발각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소총에 망원 조준경을 장착하지 않고 육안으로 저격했다고 하며 필요한 경우 1931년식 수오미 기간 단총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핀란드군은 기후와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하얀 눈밭에서 흰색의 설상 위장복 차림으로 스키를 타고 소련군 앞에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 이 수오미 기관단총으로 연발 사격한 뒤 순식간에 사라지는 설상 기습 전술을 구사했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눈밭 저편에서 저격수가 날리는 총탄까지 더해지자, 소련군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소련군은 해위해를 하얀 죽음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뛰어난 저격수의 존재가 적군의 사기까지 떨어뜨린 경우입니다.  해위해는 1998년 사격 실력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훈련이라고 짧게 답했으며 당시 핀란드는 저격수를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활용하였고 이는 오늘날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저격수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핀란드인의 '궁즉통'은 현대전의 교리까지 바꿔놓았습니다. 

 

3. 뒹케르크 철수 보호한 영국과 프랑스의 저격수들이다. 

프랑스군과 영국군 저격수들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후퇴하는 아군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출처: Public Domain>

제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전역에서는 개전 초부터 저격수가 다시 등장해 적극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1940년 5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 벌어진 프랑스 공방전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저격수들은 각각 적절한 위치에 은폐한 채 단독으로 활용하면서 독일군의 진격을 상당 시간 지연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병, 기갑, 포병 전력의 유기적인 합동 전술을 특징으로 하는 독일의 전격전으로 프랑스가 빠른 속도로 무너졌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저격수들은 치열하고도 효과적인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저격수들이 맹활약한 대표적인 전투가 뒹케르크 전투 또는 다이 너머 작전으로 불리는 연합군 34만 명의 뒹케르크 철수 작전입니다. 맹렬한 속도로 프랑스 영내로 진입한 독일군은 영국과 가까운 북부 항구도시 뒹케르크를 눈앞에 두고 사흘간 진격을 멈췄습니다. 

 

그 틈에 영국군 원정대와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 병력의 상당수가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대형 군함을 물론 수많은 민간인 선박까지 자발적으로 나서 병력을 본국으로 데려간 것을 두고 뒹케르크 정신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군의 진격 지연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 저격수들이 뒹케르크 주변에서 필사적인 작전으로 독일 보병의 접근을 지연시킨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 이후 영국은 다시 한번 특수 저격수 부대의 훈련을 강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하게 사격의 달인을 키우는 것은 물론 은폐를 위한 특수 위장복을 착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주변 자연환경과 구분이 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적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훈련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이 저격수 훈련 대상을 장교와 부사관에 국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투 부대에 배치된 저격수는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격수의 전체 전투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4. 스탈린그라드, 저격수가 흘린 피의 꽃밭을 이루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영웅적 저격수인 바실리 자이체프(왼쪽). <출처: Public Domain>

제2차 세계 대전 중 저격수의 활약이 가장 잘 알려진 전투 중 하나가 1942년 8월 23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벌어졌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입니다. 이전 투를 계기로 독일은 특수 저격수 훈련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포격과 공습 등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와 벽돌더미로 가득한 도심부는 소련군 저격수들이 독일 국방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기에 안성맞춤의 조건이었습니다. 

건물이란 건물은 다부분 무너져 내린 도시의 폐허 속에 숨어 있는 저격수를 찾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련군 저격수들은 어렵지 않게 독일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소련군 저격수 가운데 명성을 얻은 바실리 자이체프(1915~1991)입니다. 

그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1942년 11월 10일부터 12월 17일까지 11명의 저격수를 포함한 225명의 독일군을 사살했습니다. 자이체프의 활약상은 윌리엄 크리가 그가 1973년 펴낸 논 픽선 [에너미 엣 더 게이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자이체프가 독일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자 그를 제거하기 위해 파견된 독일 귀족 출신의 에르빈 쾨니히 대위와 자이체프 간의 팽팽한 싸움을 그린 내용이 핵심입니다. 이스토리는 2001년 할리우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핵심 플루트가 되었습니다. 영국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주드 로 가 자이체프 역으로 맡았습니다. 

 

 

5. 독일 저격수, 적의 소총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다. 

 

소련군에게 노획한 SVT-40으로 사격하는 독일군 병사. 이 소총은 독일군 저격수들도 즐겨 사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독일어로 사프프쉬첸으로 불리는 독일군 저격수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상당수 양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카르비 너 98K를 쓰다가 나중에 게 베어 43으로 장비를 교체했습니다.  이장 비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 일부 저격수 중에는 소련군으로부터 노획한 망원 조준경 장착 모신나강 1891/30 소총이나 반자동 소총인 SVT-38이나 SVT-40, 체코산 마우저 소총을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자극을 받은 독일 국방군은 저격수 훈련을 1942년 새롭게 부활했으며, 1944년까지 31개의 저격수 훈련 중대를 더해 단위부대 당 저격수 수를 비약적으로 늘렸다고 합니다. 

 

ZG 1229 야시경을 장착해 야간저격용으로 활용된 StG 44 돌격소총 <출처: Public Domain>

독일은 뛰어난 광학기술을 저격수용 망원 조준경에 적용하여 세계적인 광학기업인 차이스를 비롯한 다양한 광학업체에서 저격수용 망원 조준경을 개발해 공급했습니다. 대전 말기에 독일군은 현대 돌격 소초의 선구적인 모델로 평가받는 44년형 돌격소총 stg44에 ZG 1229 야시경을 달아 야간 저격용으로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6. 저격수 42만 명을 양성한 소련에 비해 관심이 적었던 미국!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모두 42만 8,355명의 저격수를 교육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9,534명이 최고 등급을 받았습니다.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6개월 교육반을 2개 운영하면서 모두 5만 5,000명의 여성 저격수를 양성하였다고 하며 이 가운데 2,000명 이상이 실제로 군에서 저격수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소련군은 보병 소대나 정찰 소대에 최소한 한 명의 저격수를 배치한 것은 물론, 심지어 포병이나 전차 부대에서도 저격수를 배치했으며 일부 저격수는 PTRD 대전차 라이플에 망원 조준경을 장착해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소련군 저격수 영웅 중에는 몽골 주변이나 중앙아시아 유목민 출신의 소수민족도 적지 않습니다. 

 

소련은 42만8천여 명의 저격수를 키워냈으며, 그 중 5만5천여 명이 여성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미군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 교육을 실시했으나 기초 교육 수준이었고 전술적인 저격 임무보다 장거리 저격에 치중했습니다. 저격수는 머리 부분은 200M, 신체 부분은 400M 거리에서 맞힐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으나, 주변 환경 속에 자신의 신체를 은폐하는 훈련은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훈련 내용도 훈련장에 따라 서로 차이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배출된 저격수의 실력도 들쑥날쑥했습니다.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이렇게 저격수 교육에 관심을 쏟지 않은 것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가지 미군이 제한적인 지역에만 매치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되었고 미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까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등 은폐가 쉽지 않은 건조지대나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울창한 숲 지대와 관목 지대가 많은 서유럽이나 중부 유럽과는 환경이 사뭇 달랐습니다. 

 

하지만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은 서유럽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잘 훈련된 독일군 저격수를 만나 상당한 피해를 보면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노르망디에서도 독일군 저격수들은 울창한 관목 속에 숨어 미군 부대를 에워싸고 모든 방향에서 총탄을 날렸습니다. 

 

미군과 영국군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와 공격하는 것은 물론 1,000M 이상 떨어진 원걸에서도 정확하게 사격하는 독일군 저격수들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격에 대응하는 능력이 부족한 일부 미군 병사들은 총소리가 들리면 대형을 유지하며 그 자리에서 무조건 엎드렸는데 이는 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위치한 독일군 저격수는 이들을 농작물 수확하듯이 한 명씩 차례로 사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군에게 사로잡힌 독일의 히틀러유겐트 저격수 <출처: Public Domain>

일부 독일군 저격수는 전선 후방으로 이동하기도 했으며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다 미군이나 영국군의 진격으로 후방에 남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럴 경우 저격수는 계속 위치를 유지하면서 식량과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 항복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심각한 병력 손실을 입으면서 10대 청소년까지 군대에 동원한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습니다. 

급히 동원된 이들은 복잡한 부대 전술 훈련은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히틀러 유겐트 시절부터 사격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분대 전투나 소대 전투에는 서툴렀지만 전선에서 입수한 버려진 저격용 소총을 들고 단독으로 저격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대로 훈련받은 저격수는 몇 발의 치명적인 사격을 한 다음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본 전술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자신의 안전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어린병사들은 계속 같은 은폐 장소에서 버티다 죽거나 부상을 입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실탄이 떨어져 항복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고 이런 무모함 때문에 이들은 자살 소년단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독일군 저격수는 연합군의 진격에 상당한 지장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연합군은 독일군의 저격수 교육교재와 전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습니다. 

 

7. 태평양 전선에서도 위협적이었던 저격수가 있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미 해병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저격수를 활발하게 운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태평양 전선에서는 일본군이 저격수를 양성해 실전에 투입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정글과 태평양 도서 지역에서 일본군 저격수는 미군, 영국군, 호주군 등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일본군 저격수들은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고 온몸을 풀과 나뭇가지로 위장한 뒤 작은 참호 속에 숨어 저격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인내심이 강했으며 은폐 장소에서 장시간 숨어 보티는 데 능했다고 하며 정글 전투는 불과 수백 미터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진행되는 경우가 만항 장거리 저격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였습니다. 일본군 저격수는 97식 저격총을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본군을 상대로 연합군도 저격수들을 운용했으며 미 해병대가 가장 활발했습니다. 미 해병대는 M1903스프링필드를 저격용 소총을 사용했으며 미군  M1C개런드도 저격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유럽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은 소수의 저격수를 운용했는데 망원 조준경이 달린 카르카노 모델 1891 소총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8. 베트남 전쟁의 신화 하얀 깃털 저격수 해스콕에 대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활동하던 미 해병대의 저격수 카를로스 해스콕 2세(1942~1999)는 확인사살만 93건을 기록했으며 당시에는 저격수와 관측수 외에 장교인 제삼자의 확인이 필요해 공식 기록이 이 정도에 숫자에 그쳤을 뿐이며 실제로는 300~400명을 사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카를로스 해스콕은 확인사살 93건을 기록한 베트남 전쟁 최고의 저격수였다. <출처: Public Domain>

당시 저격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면서 배트 남군은 해스콕에 3만 달러에 상당하는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하며 미군 저격수를 사살할 경우 북 배트 남군이 통산 8~2,000달러의 포상을 해온 것에 비하면 이는 엄청난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스콕은 자신을 노리는 베트남 저격수를 오히려 차례로 무력화했습니다. 베트남군은 해스콕을 '두 카치 롱 짱- 하얀 깃털의 저격수'로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는 해스콕이 자신의 군모에 하얀 깃털을 단 것에서 비롯하며 해스콕을 제거하기 위해 투입된 북 배트 남군 저격수 부대가 하얀 깃털을 단 미군을 노린 것이 확 식해 지자, 미 해병대 저격수들은 모두 자신의 모자에 하얀 깃털을 달아 적을 혼란에 빠트렸다고 합니다. 당시 미 해병대 저격수들의 끈끈한 연대감을 엿볼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스콕은 다낭 서남 지역의 55 고지에서 관측수 존 버크와 함께 어는 북 베트남 저격수의 망원경 안에서 총탄을 발사해 눈을 관통해 머리에 명중시켰으며 이처럼 양측 저격수가 서로 일직선상에서 서는 것은 드문 경우인데, 이럴 경우 약 측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스콕의 북 베트남 저격수보다 먼저 기만하게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며 코브라로만 알려진 이 북베트남 저격수는 그전에 이미 수명의 미 해병을 사살했는데, 해스콕을 무력화하러 온 저격수였을 것을 짐작된다고 합니다. 

미군이나 남베트남군 포로를 잔혹하게 고문한 되 다랴의 출혈로 숨지게 한 것으로 악명 높아 아파치라는 별염을 얻었던 베트콩 저격소대의 여성 소대장도 해스콕의 총탄에 무력화되었다고 합니다. 

 

9. 목표를 무력화한 일발 필살의 신화- 3박 4일간 포복을 하며...

해스콕은 무려 3박4일 동안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하여 저격을 성공시킨 사례도 있었다. <출처: Public Domain>

헤스콕을 유명하게 한 전과는 1967년 3박 4일간의 끝 질긴 추적 끝에 복 베트남군 고위 장교를 1,500야드(약 1371.6m) 거리에서 저격한 것입니다. 이 임무를 그이 베트남 1차 파견이 끝나기 직전에 이뤄졌다고 합니다. 

헤스콕은 귀국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어려운 임무를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온몸을 초목과 나뭇잎으로 덮고 풀밭 위를 조금씩 포복으로 이동해 사격 지점을 향했다고 합니다. 적은 이러한 그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목표물이 시야에 들오자 그는 단 한 발을 발사해 가슴에 적중시켰습니다. 목표물은 즉시 무력화되었습니다. 

 

헤스콕은 이 3박 4일 동안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잠도 거의 자지 못했으며 용 본도 옷을 입은 채로 해결해야 했으며 배설물을 바지 속에 넣은 채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한 일은 저격수의 어려운 임무를 잘 보여주는 사계로 미 해병대에서 지금도 인용된다고 합니다. 

 

당시 해스콕은 자신의 상징이던 하얀 깃털도 제거하고 작전에 임했으며 저격 임무에 무게를 보여주는 일화들입니다. 

1966년 베트남에 도착한 해스콕은 미 해병대 1개 소대에 1명 이상의 저격수를 배치하는 저격수 양성 프로그램을 맡은 짐랜드 대위에게 발탁되어 훈련을 받았으며 교관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 훈련 프로그램에서 사용했던 구호는 지금도 미 해병대 저격수 훈련 과정에서 사용되며 그 말은 바로 '원샷 원킬(일발 필살)입니다. 이는 국적을 떠나 전 세계 모든 저격수의 전술 목표라고 합니다. 

 

한편 해스콕의 대기록은 이라크 전쟁에서 확약한 네이비실 소속 저격수인 크리스 카일 중사가 확인사살 160건을 기록함으로써 깨졌다고 합니다. 크리스 카일의 삼과 기록은 비극적인 총기사고로 2013년 사망한 후 그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10. 테러와 전쟁으로 계속되는 장거리 저격 기록 경신하다. 

위장복인 길리 수트를 입고 L115A1 저격용 소총을 조준하고 있는 영국 해병대 저격수 <출처: (cc)Francis Flinch at wikimedia.org>

해스콕은 베트남 전쟁 중 2,286m 떨어진 거리에서 목표물을 명중시켜 최장거리 저격의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35년 동안 깨지지 않다가 2002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캐나 가군의 롭 펄롱이 2,430m 거리의 저격을 성공하면서 깨졌습니다. 롭 펄롱의 대 기록은 2009년 11월 영국 육군의 크레이크 해리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2,475m 거리에서 목표물을 무력화하면서 새롭게 갱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기록도 2017년 5월 캐나다 특수부대인 JTF-2의 저격수가 이라크에서 3,450M 거리에서 저격의 성공함으로써 또다시 갱신되었습니다. 저격수의 기술과 전술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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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영국군 총사령관을 활약하였고 1946년에 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 이미지 

1. 버나드 몽고매리 소개 

1908년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투신하였습니다. 1910~1914년에도 인도 근무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종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아일랜드, 팔레스타인에서 근문 하였습니다. 1931년 대령, 1938년에는 소장이 되어 팔레스테인에서 사단장으로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제3사단장으로서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독이 군의 공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940년 6월 됭케르크 철수 후에는 제5사단장을 거쳐 1942년에 제8군 사령관으로서 북아프리카 작전을 맡아 롬멜 휘하의 독일군을 엘 알 라멩에서 격파, 전국에 승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정에서는 영국군 총사령관을 서 활약, 원수가 되었습니다. 1946년에 백작이 디어 가터 훈장을 받았고 참모장을 거쳐 1951년~1957년에는 나토 군 최고 사령관 대리로 있었습니다. 

 

2. 몽고메리 역사적 사실 알아보기. 

2-1. 2차 세계대전 이전 사실. 

1987년 런던에서 몽고메리 가의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핸리 몽고메리가 송공회 성직자였기에 금욕적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에 엄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해 완고하고 거만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무심함을 그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으며, 훗날 버나드 몽고메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손자인 데이비드와 만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성격 면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은 그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중충한 소년기 및 청소년기를 보낸 후 왕립 군사 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왕립 워윅 셔 연대 1대대의 보병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보병 소대장으로 참가하였습니다. 몽스 전투에서 대대의 절반이 소멸하고, 국경 전투에서 오른쪽 폐에 총알이 박히고 무릎에도 적탄이 관통하여 사경을 헤매는 경험을 하는 등 여러 지옥도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전간기에는 보병 방어 전술에 대한 책을 저술하여 영국군 내에서 어느 정도 반항을 이끌어냈지만 다시 영국 육군의 화 드는 전차였기 때문에 그이 저작은 상대적으로 묻혔습니다. 

 

1925년 브리티 뉴에서 휴가를 지내던 중 사랑에 빠지고 말았는데 베티 엔더슨이라는 17세 금발미녀였습니다. 

몽고메리는 그녀에게 열심히 작업을 걸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가 부모와 함께 스위스에 렌크라는 곳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것이란 소식을 듣고 그는 그들이 묵을 장소를 알아내 그녀를 다시 만났다고 합니다. 

 

그이 관심을 돌리기 위해 엔더슨은 베티 카버라는 여성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몽고메리와 비슷한 연령대의 미망인으로 12세와 13세인 두 아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몽고메리는 그녀와 그녀의 두 아들과 함께 친구가 되었습니다. 

1927년 둘은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1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나갔고 이듬해 외아들 데이비드가 태어났습니다. 1937년 아니가 벌레에 물린 상처로 전 엽병에 걸려 사망하자 몽고메리는 평생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2-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야이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몽고메리는 프랑스 전선의 영국 원정군 지휘관으로 참전했습니다. 이후 후퇴하는 영국군을 보호하기 위해 아라스 전투로 독일군을 저지하여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도왔습니다. 이후 본토로 귀환해 육 재건에 전념했습니다. 

 

에르빈 롬멜 원수가 이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이 저지른 대삽 질을 메꾸기 위해 급파되어, 번개 같은 작전으로 오코너 중장을 사로잡고 영국 서부 사막 군을 거의 괴멸 상태까지 몰아넣었습니다. 중동 사령관 웨이 벌 대장이 인도로 전출되고  후임이 된 오킨 렉 대장은 서부 사막 군을 제8군, 일명 사막의 쥐때로 재편하고 재도전, 한때 밀어붙이는 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반격당해 닐 리치 중장이 지휘하는 8군의 전력 절반 가량을 날려먹고 (가질라 전투) 토브룩 까지 함락되는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오킨 렉은 엘 아리 메인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닐 리치 중장을 해임하고 8군의 지휘권을 직접 잡고 롬멜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차 엘 알라메인 전투 그러나 오킨 렉은 처칠의 무리한 공세 요구를 비현실적이라 불가능하다고 거부했고 이에 처질은 카이로까지 가서 오킨 렉을 마구 갈구고 패배주의에 물들었다고 해임한 뒤 후임으로 해럴드 알렉산더 대장을 임명하고 8군 사령관으로 몽고메리 중장을 임명합니다. 

하지만 처칠의 기대와 달리 몽고메리 또한 공세에 나서는 게 아니라 전력을 보강하고 우주방어를 일관하였습니다. 8월 30일에 실시된 추측 국의 마지막 대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여 알렘 엘 할파 전투 독일군의 이집트 진공 능력을 완전히 소모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섣부르게 공세에 나서는 대신 처칠의 압박에도 전력을 증가시키는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사이 8군의 전력은 하루가 다르게 증강되어 갔는데 아프리카 군단을 지워하기 위해 투입된 독일 제27전투비행단 소소 정찰기가 시속 300마일의 속도로 8군의 병력 주변을 돌면서 그 시간을 계산해 봤더니 무려 10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2-3. 엘 아라 메인의 승리

엘아라메인전투에 영국병사이미지 

결국 이러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2차 아라 메인 전투에서 아프리카 군단을 거세게 밀어붙인 결과, 상당한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아프리카에서 독이 군이 사실상 괴멸하여 이집트에서 리비아를 커쳐 튀니지 에 이르는 먼 후퇴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몽고메리는 독일군을 추적, 튀니지에 틀어박히기 전에 괴멸시키려 했으나, 기갑 지휘에 서투른 면이 이었던 데다가 롬멜이 몇 차례 효과적으로 반격을 했고, 아천 후로 공군력이 생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해 실패하였습니다. 

 

이무렵 미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류 하여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포위되었고, 독일군은 영우 시 되었던 롬멜이 또다시 패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독일로 불러들였습니다.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륙했던 미군은 카세린 계곡의 참패를 경험하는 등 처음에는 빌빌대어 영국군 장군들뿐 아니라 아이젠하워 조차 자군의 전투력을 의심할 정도였지만, 조지 S, 패튼으로 지휘관이 교체되면서 전력이 급상승, 독일군을 밀어붙이는데 성고 하였습니다. 

결국 양 방향에서 영국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은 아프리카 군단은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합쳐 거의 30만의 포로를 남기고 소멸하였습니다. 

 

2-4. 이탈리아 전역과 D-DAY 후 이야기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상륙하는 연합군 이미지 

 

이후 미국과 함께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실시하는데, 여기서 지격 방 향고 주공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패튼과 사이가 벌어지고,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항상 과감한 공격을 주장하는 패튼과 가급적이면 방어전을 위주로 적군의 힘을 소진시킨 후 마무리를 가한다는 몽고메리는 사사건건 충돌하기 일쑤였습니다. 

 

카세린 전투에서 미군의 한심한 꼴을 본 몽고메리는 미군의 전투력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전공 욕심에 불타는 패튼은 자신의 전공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명장 롬멜을 격파한 명성에 빛나는 몽고베리를 라이벌로 보고 그보다 먼저, 더 많은 전공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몽고메리는 전공 욕심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몽고메리는 다시 사령관이던 알렉산더 정군을 꼬드겨 잘 진격 중이던 미군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진격로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독일군은 무너져 내리던 이탈리아군을 수습하고 방어선을 구성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 결과 시칠리아 전역에 교착 상태에 빠지자 패튼 역시 꼼수를 써서 위력 정찰을 핑계로 진 겨울 개시해 서부 시칠리아를 쓸어버리고 파레르모에 먼저 입성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패튼이 병사들의 원성을 산 것도 이무렵입니다. 

 

몽고메리는 처음에는 패튼을 그다지 신경아 썼지만, 그가 시칠리아에서 엄청난 전과를 세워 자신의 전공이 가려지자 슬슬 약이 올랐는지 이후 패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과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몽고메리와 패튼은 서로 만날 때마다 싸웠고, 이들을 지휘하는 아이젠하워는 뒷머리를 잡고 오마 브리들리가 이를 중재하는 상황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매일 일어난 셈입니다. 이러고도 연합군 홍 사려부가 멀쩡하게 돌았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입니다. 

 

몽고메리는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총지휘하여 작전을 성공 시 켜고, 이후 노르망디에 연합군을 묶어두려는 독일군을 상대로 영연방군을 지휘하며 격전을 치르다가 이후 상륙한 패튼의 3군이 망치 역할을 하는 동안 모루 역할을 수행, 패튼의 부대가 진격하는 동안 독일군의 주력을 붙잡아 두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두 지휘관의 활약으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이후 예상보다 적은 희생으로 훨씬 빨리 파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과정에서 몽고메리와 패튼의 대립은 점차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군의 빛나는 승리를 취재 하 길원 하는데 미국 기자들이 패튼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몽고메리를 무능한 인물 답답한 영국 놈으로 포장하면서 이러한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지크프리트 선과 라인강을 넘어 독일 영내로 먼저 들어가는 장군이 되길 원했던 두 사람은 라이벌보다 먼저 전과를 거두기 위해 서로 더 많은 보충병력과 보급품을 원했고, 그에 반하여 아이젠 하워는 영국군이나 미군 모두 전력을 이것은 영국군과 미군 양부 대가 사이좋게 진격 속도가 떨어지게 만드는 좋지 않은 결과만 낳았습니다. 

 

2-5.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참패하다. 

마켓가든작적 에서 미군공수부대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독일군의 후퇴보다 빠른 진격 속도에 기고만장해져 있었고, 비실거리는 독일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걷오 차기 위해 획기적인 꼼수를 궁리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노르망디 이후 놀고먹는 공수부대가 눈에 들어왔고, 결국 마켓 가든 작전이 몽고메리의 제안으로 기획되게 됩니다. 

 

이것은 영미 3개 공수사단(영국 제1공수사단, 미국 82 공수사단 및 101 공수사단에 추가로 자유 폴란드군 공수여단이 네덜란드 일대에 강하해서 교량을 확보하고, 영국 육군의 주력인 30군단이 확보된 교량을 따라 독일군을 정리하여 최종적으로 아른험을 장악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정체된 전선을 불과 2개 군단급 전력으로 타개한다는 매력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엄청난 떡밥 이 걸려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지크 프리터 선에 전력을 집중하고 네덜란드 방어에는 그다지 ㅎㅁ을 쏟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영국군의 판단이었고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면 아군 기갑부대의 지원하에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적의 방어선을 우화 한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면 아군 기갑부대의 지원하에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적의 방어선을 우회한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렇게 작전 의도 자체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른험 주위에 2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과 정규군 1개 기갑사단, 정규군 보병사단과 그 근처에 무장 친위대 대대가 집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SS기갑 대장인 명장 빌헬름 비트리히가 지휘하는 제2 SSS기갑 군단으로, 무장 친위대 전력 중에서도 정예 부대였고 동부전선에서 죽어라 싸우다가 서부전선을 온 노련한 병사들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서부전선으로 재편된 후, 팔레즈에서 연합군에게 참패하게 됩니다. 서부전선 사령관으로 다시 부임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동부전선에서 온 B집 잔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에 의해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후방의 시골구석, 즉 아른햄으로 보내져 휴식 겸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기하던, 말이 사단이자 연대 수준도 못되게 전력 소멸하였습니다. 

 

그러니 네덜란드 방면이나 독일 본토 쪽으로 공세가 올 것을 대비해서 팔레즈 포켓에서 탈출한 제2SS기 갑 군단을 후방인 아른햄에서 보충과 휴식을 취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을 내린 사람이 하피이면 방어의 사자 모델 원수였습니다. 

 

B집 잔군 총사령관 발터 모델은 영국군 공수부대의 강하로부터 단 3시간 만에 방어 계획을 수립, 친위대뿐 아니라 해군 공군 지상 대원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연합군의 공세를 분새합니다. 

 

발 격 작전 내내 모델 자신이 매일 전선에 나아가 전황을 완전히 파악하여 증원 부대 투입이 매우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SS기갑부대 지휘관 빌헬름 비트리히와 독일군 공수부대 지휘관 쿠르트 슈트 덴트의 지휘역량까지 더해져서 연합군은 그야말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이작전의 실패가 더 뼈아픈 이유는 연합군에서 고급 인력으로 꼽히는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다 말아먹은 주제에 막상 그 상대는 독일군 최정예도 아닌, 2 선급 예비부대나 교도대라는 점에서 전투에도 지고 전쟁에도 진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모델 장군과 그 참모들에게 진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독일군이 매우 강해서 질 수밖에 없었어요 라고 징징대지 못했습니다. 

 

 

한편 이작전의 실패는 훗날 몽고메리의 평가를 크게 깎아먹는 주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작전 실패 자체도 그렇지만, 몽고메리가 작전이 실 폐한 이후 패배의 책임을 정작 용맹하게 분투했지만 정치적으로 돌봐줄 빼이 없는 외국의 망명 장군에게 몽땅 전가하는 지질한 추태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작전에 실패한 것 까지는 그럴 수 있습니다. 대원수 말마따나 인류 역사에 무적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불패의 상승장군 또한 중 없진 않으나 전쟁사를 통틀어서도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전쟁에서 승패는 병가 지상사고 모든 전투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약체화된 독일군에게 쳐 발린 것도, 고급을 통트어 용장 밑에는 약졸이 없는 법이고 다시 독일 측 지휘관인 발터 모델이 겁쟁이나 용려 한 지휘관이 아닌 당대의 손꼽히는 명장이 이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한 작전의 패전 책임을 외국의 망명 장군, 그것도 그냥 별이 아니라 충분히 전선 엣 용맹을 떠 쳤던 장군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운 졸려한 행동은 후대의 사람들이 군인을 평가함에 있어 당연히 크나큰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후세의 인물들이 보기에 몽고메리의 평가는 당연히 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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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미합중국 육군의 장군, 미군 최초의 전차부대 지휘관이자, 30년간 미군 주력전차의 자리를 차지했던 M46/47/48/60 패튼 시리즈의 네이밍 모델로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패튼장군의 인물사진 이미지

1. 패튼의 출생과 성장 배경

패튼은 남부의 부유한 군인 집안에서 태아나 어려서부터 로버트, E리나 스톤월 잭슨 장군의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고 남군 기병대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친 회색 유령 존 싱글톤 모스비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미 육군사관학교 1909년 졸업생이며 동기생으로 제이컵 데비스, 로버트 에이첼 버거, 월리엄 후드 심슨, 존 클리퍼드 하지스 리, 델로스 에몬스와 비록 중퇴하기는 했지만 코트니 하지스 등이 있는데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상금 부대 지휘관으로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패튼 하면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활화산 같은 성격의 사고뭉치 지휘관 하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오죽하면 별명이 싸움닭, 여우라 불리는 에르빈 롬멜과 비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외에도 사고뭉치 같은 게 별명중에서 그나마 가장 좋게 불리는 별명입니다. 

 

졸업하고 소위이던 시절인 1910년 베아트리스 배닝 에이 어패 튼 이랑 결혼했습니다. 

전쟁 애 서 지랄 맞은 명장, 개차반 장군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했으나 가정에선 엄격하면서도 자상하고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패튼이 죽고 나서 미망인 베아트리스는 패튼에 대한 영화 제작을 거절했는데, 보나 마나 남편이 전쟁광으로 날뛰는 꼴로 만드는 꼴을 볼 수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어쨌든 성깔 한번 지라맞았기 때문에 1915년 종업 생인 오마 브래들리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보다 늦게 진급했으며 후베인 2명은 자신들의 선배가 사고 치고 다니는 걸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졸업성적은 103명중 46등이었으며 기병병과로 임관하였습니다. 

 

2. 멕시코 내전과 1차 대전 활약

"진짜 산적은 우리 부대에 있었군"- 존 조지프 블랙잭 퍼싱 장군은 패튼이 멕시고 내전에서 산적 두목의 시신을 보닛에 매단 채 복귀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군 소위 임관 직후 터진 멕시코 내전에서 토벌군 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 육군 준 자의 부관으로 참전, 발란 군 지휘소를 기습하여 장군 하나를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보닛에 매달고 복귀하는 기행을 벌여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말하길 처음으로 실전에 참가했을 때 긴장과 겁에 질려 몸이 얼어붙어 죽기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에 그를 데리온 기라성 같은 조상님들이 노려보는 것을 보자 죽어서 그들을 대한 게 더 무서워져 용기를 내어 또 한 명의 패튼이 전사할 시간이다.라고 외치면 돌격했고 패튼의 부하들은 지휘관이 몸소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올라 함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이 결정되자 역시 원정군 사령관이 된 퍼싱 장군의 발탁으로 미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됩니다. 이후 그는 철저한 기동전의 신봉자가 됩니다. 

 

3. 2차 대전에서의 활약상

3-1. 아프리카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2기 갑사 단장으로 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하게 됩니다. 

카세린 계곡 전투에서 미군이 최악의 졸장 로이드 프레 덴탈 밑에서 독일-이탈리아 추축군에게 민병대 같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치욕적인 대패를 당해 영국군과 기타 연합국에게 조롱을 받게 되자. 열불이 뻗칠 대로 뻗친 미군 지휘부는 평시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자작 지만 전쟁터에서는 승리를 가져오는 악바리 근성이 넘쳐나는 광전사인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2군단의 지휘를 맡기게 됩니다. 패튼은 오합지졸들을 무지하게 갈퀴서 가세린의 치욕에서 깨어나게 해 줍니다. 

 

그는 부하들을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변화시켜 전사로서 바꿔내는 데 성공하여 아프리카 군단에 대한 반격에서 주목할 만한 송과 들을 다수 이뤄냈습니다. 그라나 그는 원하던 롬멜과의 대결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북아프리카전선에 패튼 장군 이미지

3-2. 이탈리아 전선

이탈리아 전선의 시칠리아 상륙전에 미 육군 제7군 사령관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몽고메리 장군의 농가간으로 조고로 돌려지나, 오히려 그이 지휘부 대가 영국군을 따돌리고 거점도시 메시나와 팔레르모를 점령하는 활약을 펼쳐 주객이 전도되게 만들 됩니다. 

 

이후 몽고메리에게 라이벌로 찍히기도 합니다. 이 시기 독일군 내에도 그의 명성이 퍼졌으며, 특히 오합지졸인 줄 알았던 미군을 영국군 이상의 강적으로 변화시킨 데다 자기들만큼이나 기갑전, 속도전에 능한 그에 대해 필요 이상의 신겨을 쓰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연합군 첨보부는 패튼이 지휘하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집단군 급의 가짜 부대인 미 육군 제1집 단군을 조직하고 빈 상자를 대량으로 배치해서 보급품으로 위장하는 등의 포티튜드 작전을 펼쳐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까지 독일 정보부를 속여 먹게 됩니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 당일에도 -영국 내 패튼 부대가 움직이지 않았으니 노르망디는 페이크다 라고 독일군이 결론 내렸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후술 한 야전병원에서 부하를 구타흔 등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보직 해임되어, 한적으로 쫓겨난 상태였기에 당연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 가짜 부대 사령관 시기는 야전병원에서의 폭행에 대한 처벌로 그냥 자리 때우기 식이었는데 이게 당시 패튼을 최중요인물로 바라보던 독일군에게 있어 제대로 시너지를 일으켜 D-DAY 당시의 성과를 내는 하나의 원동역이 된 것입니다. 

 

3-3. 서부전선

유럽전선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후속 부대인 육군 제3군을 이끌고 참가해 '코브라 작전'을 발동시켜 눈앞의 몽고메리 부대에 정신이 팔려 있던 독일군의 뒤통수를 박살 내 패주 하게 만들고 중부 프랑스를 쾌 진격하며 유럽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패튼이 보직 해임되어 있는 동안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묶여서 소모만 가중되는 중이라는 패튼을 복직시킨 것입니다. 

노르망디 상륙 4주호 만난 앙숙 -미육군대장 조지스미스 패튼과 영국육군 원수 버나드몽고메리 이미지 

 

 

영화에도 잘 나와있듯이 패튼과 그의 부하들은 폭주기관차처럼 가는 곳마다 독이 군을 격파하면서 질주했는데 보급부대가 못 따라가서 아이젠하워 사령관 명의로 특별수송대까지 조직했는데도 부족했을 정도입니다. 

패튼은 우리가 빠른 게 아니라 너네가 느리 것이라고 취급했습니다. 

 

이것은 패튼이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고속 기도 전의 신봉자여서인데 선두에 서서 달리는 기갑부대와 정찰대는 적의 어려운 저항에 마주치면 그대로 우회로 찾아 원래 목표로 계속 달려 나가고 뒤 따로 오는 보병과 포병이 아카의 그 적군과 싸우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틈새를 찾아 계속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적군은 더 이상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패트의 기갑 부대가 자기네

영역으로 들어와 전선을 붕괴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만 후속부대들은 패튼이 남겨놓고 우회해버린 적군들을 하나하나 쳐 부서야 했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보급선이 연합군의 역량 밖으로 늘아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보급 문제로 1944년 여름에 진격을 멈추게 됩니다.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시도했던 게 다름 아닌 마켓 가든 작전. 이를 두고 히스토리채널에서는 몽고메리가  때를 써서 패튼의 보급을 가로 쳤다고 표현한다. 

 

이는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 사용 조건은 까다로운 전술이며 일단 상대가 전선에서 별력을 빼서 아군 기갑전력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전선에 압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기병과 마 찬기자로 기갑 저녁이 충력을 잃으면 적진 한가운데 포위되게 되므로 충분한 보급과 휴식. 그리고 예비전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회한 적군을 보병과 포병이 무너뜨리지 못하면 보급로가 위협받는다고 합니다. 

 

한편 패튼은 야전군 사령관 이면서도 끊임없이 전선 시찰을 나가고 전선 근처의 동태를 살피는 한 면 올라오는 정보보고는 꼼꼼하게 살폈습니다. 

 

닥돌도 포지션과 타이밍 싸움이기 때문에 정보 분석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이었습니다. 

그저 적이 보인다고 무조건 싸움을 하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전선의 틈새, 즉 적이 없는 허점을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전선 시찰을 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레로 밑에 설명될 아르덴 공세 때도 오히려 브래들리 장군보다 독일군의 이상 징후를 먼저 파악하고 어느 정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독불장군 같은 성품 덕분에 여전히 상관과 동료들 사이에서 평판은 바닥을 달렸는데, 특히 영국군 지휘관이자 롬멜 장군을 몰아낸 버나드로 몽고메리 영국 육군 원수는 개와 고양이 사이였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몽고메리도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해서 미군 장성들에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기에 어찌 보면 동족 혐오나 마 찬기 지였습니다. 

 

1944년 8월 31일 보급을 위해 프랑스 메츠에서 기도를 멈추었고 그사이 요새를 강화한 메츠가 독일군 10월~11월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11월 23일 메츠를 점령했습니다. 

 

1944년 12월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를 맞아해서 반격 작잔을 성공적으로 이끄었습니다 

단 48시간 만에 서쪽으로 진격 중이던 미 제3군 예하 3개 사단으로 구성단 1개 군단을 뽑아내어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초월적인 기도를 보였습니다. 

즉 독일의 공세를 예측하고 반격 계획을 미리 짜두었다는 의미였습니다. 

 

패튼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한 닥돌 바보가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반면 브래들리와 그 참모들은 독일의 반격에 대한 대배 책을 충분히 세워두지 못했습니다. 당시 뫼즈 강 인근까지 진경 했던 독일 기갑 대장 만토 이페과의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한 일 전에서 큰 타격을 입히며 승리를 거두면서 독일의 공세를 제대로 꺾어버리는 성과를 내는 데 성공했고 이후 아르덴 대공세의 여파로 서부 전선 독일군이 약해지자 3월 23일에 당시 연합군의 골칫거리였던 지크프리트 라인을 돌파하느데 성공합니다. 

 

이 당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 반격 작전을 지행 할 당시 악천후로 인해 진격이 지지부진하고 항공 지원도 원활하 않자, 패튼은 갑갑한 마음에 제3군의 수석 군종 목사에게 기도문을 작성하라고 명했습니다. 

 

기도문의 내용은 전쟁을 위해서 눈과 비가 그치고 쾌청한 날씨를 주시기를 기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문을 작성한 후 다음날인 12월 23일 정말로 날씨가 맑아졌다고 합니다. 영화 패트 대전차 군단에서도 묘사된 실화입니다. 

 

그 이후에는 독일 국내로 진격, 연합군 최초로 라이 강을 자력으로 건너버립니다. 

당시 몽고메리와 아이젠 하워 간에 라인강 도하는 영국군이 먼저 하기로 합의되어 잇었지만, 미군이 먼저  그 유명한 '레마겐의 철교'인 루덴도르프 교를 장악해 버렸고, 미군이 몰려오자 독일 육군 공병들이 뒤늦게 폭파했는데 폭약량을 잘모 계산해서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우연의 일치지만 먼저 건넌 후에 벌어진 일이라 상대적으로 묻혔어도 독자적으로 도강 작전을 진행해서 기습적으로 라인강 건너편을 제압한 후 부교까지 설치한 것이라 전술적 의미에서는 더 가치가 높습니다. 

 

이건 라인강에 오줌 싸면서 인증숏도 찍었습니다. 대대적으로 작전 계획을 짠 뒤 한참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폭격, 포격을 날리며 부산 떨던 몽고메리는 멍 때려야 했습니다. 전쟁 후 대선주자 자리를 노리던 아이젠 하워는 미군 희생이 늘까 봐 노심초사하였고 1945년 4월 14일 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4. 전쟁 이후에 행적과 사망

유럽 전선에서 이긴 패튼은 이제 중국으로 보내져서 이번엔 일본군과 싸울 차례였지만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국행은 취소되었고 독일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독일 바이에른 지역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정치적으로는 처신이 워낙 묻혀 결국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10군 사령관 사이먼 머크너 중장이 전사하자 그 자리로 가기 위해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맥아더의 측근과 접촉했는데 부정적인 의견을 듣고 포기했으며, 결국 맥아더의 육사 동기인 스틸웰이 임명됩니다. 

 

나치당을 미국 민주 공화당 정도로 비유하고 나치 인사들을 관대히 처리해 물의 를 일으켰고 , 오히려 연합국인 공산주의 러시아인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전진 나치 당원을 정부 요직에 임명한 것에 대해서 비난이 빗발치자 독일 공무원의 태반이나 나치당원이다. 그러면 정부 일을 까막눈들 한데 맡기란 말이냐?라고 항변했습니다. 메를린에 입성해서는 우린 괜찮은 민 죽 하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러시아의 야만인들로 채워놓았다고 고 투덜거렸다는 일화가 있으면 독일이 항복한 후 베를린에서 벌어진 연합군 퍼레이드에 참 성했을 때,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가 패튼에게 소련군 전의 갈려함에 전차포의 긴 사정거리를 자랑하자. 제부 하가 그렇게 먼 걸에서 적으 ㄹ쏘는 비겁한 짓을 한다면 제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이 이다.라고 답해 주코프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비슷한 시간에 지구 반대편에 있었던 맥아더 원수는 그때까지의 모든 일본 최고 지도자가 그랬듯이 천황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자신이 다해먹었다. 한마디로 정치적 수완은 영 시원찮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라이 강 서안 슈파이어로 사냥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그가 탄 1939년형 캐딜락 이 트럭에 치이면서 중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사고가 난 날은 미국으로 복귀하기 하루 전인 12 워 9일 아우 투반을 달리다가 패튼이 동승자 (호바트 게이 대령에게 불에 탄 차량을 가리켰고 운전수도 강이 보면서 전방 부주의로 2.5톤 트럭에 부딪혔습니다. 운 저수와 등 승자는 찰과상 만입 었지만 패튼은 뒤로 튕겨나가 머리가 뒷유리창과 부딪힌 탓에 목뼈가 부러졌고 두개골이 갈라져 뼈가 보였습니다. 12일 뒤 하이델베르크 군 병원에서 수면 중에 향년 60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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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장군으로 유명한 인물 에르비 롬멜을 아시나요?

인물 탐구를 통해 전쟁영웅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며 연전연승을 했던 전쟁영웅으로 에르빈 롬멜, 연합국, 특히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에게는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자 때로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치 독일 히틀러의 충성스러운 부하 장군이었지만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끊어야 했던 비운의 군인이기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롬멜의 모습 이미지 

1. 히틀러 암살에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1944년 7월 9일, 카이사르 폰 호프 아커가 라 로셰-기용에 있는 롬멜을 찾아왔습니다. 

롬멜과 같은 슈마 벤 출신인 흐프아카는 1차 세계대전 때 중장으로 참전한 아버지를 통해 롬멜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만나자마자 롬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호프 아커는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상 계획과 베를린 그룹의 쿠데타 움직임, 암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서부 전선의 전쟁이 즉각 중단될 것이며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수님, 즉 롬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라나 그들 사이의 대화 내용과 롬멜의 반응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롬멜이 암살 계획에 동의하며 적극적 동참 의사를 밝혔다는 증언이 있는가 하면,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총통(히틀러) 비서관 마틴 보어만이 1944년 9월 27일에 기록했습니다. 슈튈프나겔, 폰 호프 아커, 이미 처형된 클루게의 척 라스겐스 중령, 그리고 아지 살아 있는 많은 피고인들이 증언하기를 , 롬멜이 이 계획을 전적으로 이해했고 암살 계획이 성공하면 새 정부를 위해 자신이 나설 것이라 밝혔다고 합니다. 

 

호프 아커는 7월 11일 베를린에서 클라우스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만났습니다.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는 총통 사령부 회의실에서 히틀러 폭사 계획을 실행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북아프리카 리미아에서 만난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이탈로가리볼디와 에르빈 롬멜 1941년2월

2.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무훈,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마지노선 돌파하다. 

1891년 11월 15일 브렌츠와 맞닿은 하이덴하임에서 교사였던 아버지 에르빈 롬멜과 루츠 가문 출신 어머니 헬레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신교도였고 롬멜은 매우 평안하고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의 마당과 정원에서 매일 뛰어놀 수 있었습니다. 

 

2-1. 1910년 3월 당시 18세의 롬멜은 왕실 보병 사관후보생으로 지원하면서 지신의 이력서를 위와 같은 시작 했습니다. 롬멜은 본래 항공기술자를 지망했지만 교사나 군인이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2-2. 1911년 3월부터 롬멜은 단치히의 군사 학교를 다녔고 11월 졸업하여 이듬해 1월 장교가 됐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롬멜은 프랑스 전선과 루마니아,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습니다. 그는 상황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전술적 판단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2-3. 1917년 10월 마타주르 산 습격에서 롬멜은 이탈리아군에 승리를 거두며 큰 공을 세웠지만, 프러시아 최고 권위의 푸얼 메리 테 훈장이 부당하게 다른 장교에게 수여됐다는 것을 알고 진정서를 제출해 결국 훈장을 받았습니다. 

 

2-4. 1920년 12월 슈투트가르트 보병 연대 참모가 되어 8년을 그곳에서 보냈고, 1929년 9월 드레스덴 보병학교 감독관으로 부임하여 사관후보생들을 가르쳤습니다. 

 

2-5. 1933년 10월 롬멜은 17 보병연대 제3대대 지휘관이 됐습니다. 

롬멜은 임명식 연설에서 '총통이신 아돌프 히틀러의 특별한 능력'을 역설했지만, 이는 히틀러에 대한 특별한 추종보다는 군비 확장 정책을 취한 히틀러에 대한 독일군 장교들의 전반적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2-6. 1939년 8월 롬멜은 서열을 뛰어넘어 소장으로 진급하고 총통 지휘본부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트 고데 슴베 르크 제7 전차부대 지휘권을 받아 프랑스 전투에 참가해 1940년 5월 16일 마지노선을 돌파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 친애하는 롬멜 장군 당신이 이룬 업적은 당신 스스로도 자아스러운 일일 것이오. 다가오는 새해에는 당신과 당신 부대에 좋은 일이 생길 것을 기원하오 '라고 롬멜에게 전했습니다. 

3. '사막의 여우'롬멜, 독일 민족의 영웅이자 연합군의 최대의 적이 되다. 

1941년 2월 12일 롬멜은 트리폴리 공항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 땅을 밟았습니다. 그로부터 6일 전 히틀러는 롬멜에게 독일 추축군 통수권을 주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의 진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습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잃게 되면 무솔리니의 정치적 입지가 어려워져 독일-이탈리아 축이 위협 당하리라 판단했습니다. 

 

롬멜 도착 이틀 뒤 독일 전 터 부대가 트리폴리 항구에 도착했고 2월 16일 선두 부대가 최전선에 도달했습니다. 

 

롬멩의 추축군은 아프리카 군단이라는 정식 명칭을 얻었습니다. 

3월 24일 아프리카 군단은 치열한 전투 없이 사막의 요새 엘아게일라를 점령했습니다. 3월 31일 롬멜은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키레나이카로 진격했습니다. 

롬멜은 군 지휘부와 달리 히틀러가 자신의 진격을 옹호하리라 예상했습니다. 그 예상은 들어맞았습니다. 

 

등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많은 수가 그리스로 이동한 탓에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롬멜은 기습 공격으로 소름까지 2주 만에 진격하여 영국군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사망 전의 대가 리처드 오코너 장군을 포로로 잡는 전과까지 올렸습니다. 

 

그러나 1941년 4월 10부터 감행한 토브 록 요새 공격에서는 큰 피해를 입고 성공하지 못했으며, 물자 보급에서 큰 곤란을 겪기 시장했습니다. 

그러나 롬멜에게는 전진만인 있을 뿐이었습니다. 

 

1941년 6 울 롬멜은 리비아 국경 제대로 향하는 300대의 영국 전차부대의 80대의 전차로 맞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롬멜은 인습적인 전술에서 벗어나 88mm 구경 고사포를 배치해 적 전차를 공격했습니다. 토 부록의 요새전에서 실패한 것과 달리 롬멜은 이동 전에서는 승승장구했습니다. 

 

괴벨스는 일기장에 -롬멜은 독일군이든, 이탈리아군이든 병사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다. 그는 거의 신화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괴벨스는 롬멜을 통해 민족 영웅의 이미지를 창출하려 했습니다. 이에 따라 롬멜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편지가 독일 전역에서 답지를 했습니다. 

 

4.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야하한다. -학살 행위는 커다란 범죄이다. 

히틀러는 더 많은 전차와 무기 보급품을 보내달라는 롬멜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롬멜이 지금까지 처럼 최소한의 병력과 장비로 계속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전진하도록 밀어붙이면서도 충분한 장비를 갖춰주지 않는 히틀러 밑에서 롬멜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만으로는 미고 자가는데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기갑 군단 병역을 거이 소모하고 70대의 전차만으로 지원군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1941년 12월 7일 아프리카 군단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초 롬멜의 기갑 군단은 엘 아게 일라 서쪽 마르사 엘 브레가 요새에서 54대의 전차와 물자 보급을 받았지만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전력에는 못 미쳤습니다. 

그리나 롬멜은 과감한 어쩌면 무모한 선제공격을 감행했습니다. 

 

1월 17일 아내 루시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아마 그들은 나를 미친놈 취급을 할 거요. 그라나 나 절대 미치지 않았소. 그들보다 더 넓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1월 21일 아침 롬멜의 군단은 전지 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승리를 거두며 전진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승리이자 전진이었습니다. 

 

1942년 1월 24일 롬멜은 독일군 대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수상 처칠의 의회 연설 일부입니다. 

'이 전쟁의 참상과 상관없이 개인적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 

 

1942년 6월 11일에는 비르 하차임을 무너뜨리고 영국군 제8군을 퇴각시켰고 6월 20일에 토브룩 요새를 함락시켰습니다. 

22일에 롬멜은 육군 원수로 임명됐습니다. 

그란 7월 1일부터 엘 알라메인 전선에서 역국 폭격기의 공습 속에 아프리카 기갑 군대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롬멜이 나치의 집단 수용소와 학살 행위에 관해 알게 된 것은 1943년 말이었습니다. 

이듬해 6월 롬멜과 대화한 해군 사령관 루게는 롬멜이 한 말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여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저위의 지도부는 깨끗하지 못하다. 학살행위는 커다란 범죄다. 

 

-제국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으며, 히틀러에게 급히 전쟁을 졸료 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히틀러가 이성을 찾지 못한다면 스스로라도 독립적으로 움직이겠다고 했습니다. 

 

5. 지치지 않는 불굴의 전사- 그의 마음은 과연 어디를 향했던가?

1944년 10월 14일 토요일 11시경 12명의 게슈타포가 롬멜의 집 주위를 둘러쌌습니다. 정각 12시경 총통의 위임을 받아 7월 20일 암살 기도 계획에 공모한 죄를 묻기 위해 브루크도 르푸와 마이 제이 왔습니다. 

롬멜에게 주어진 선택은 자살 아니면 특별 제판이었습니다. 

부르크도 르푸는 롬멜에게 자신이 청산가리를 한 통 가지고 왔다고 말하며, 근족의 안전은 보장되며 장례식은 예우를 갖춰 치를  것이라 말했습니다. 

 

롬멜의 마지막 막은 '가져가야 되나?' 였다고 합니다. 집을 ㄹ나서기 전 가죽 외투에 지갑이 들어 있는 걸 별견하고 중얼거린 말입니다. 

집에서 500m 떨어진 작은 숲, 검은색 메르세데스 차 안에서 음독했고 차는 곧바로 울름의 군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공식 사인은 서부전선에서 근무 중 입은 부사 악화에 따른 심장마비' 10월 18일 울름 시청에서 열린 공시 추도식에서 육군 원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낭독한 추도사의 첫머리입니다. 

'지치지 않는 불굴의 전사는 구각 상회 주의적 이념으로 추만 해 있었으며, 그것은 그에게 힘이 원천이었고 행동의 기본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총통을 향해 있었다 라고 추도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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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하여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 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6.25 전쟁 때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지휘하였습니다. 하니만 중공군과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되었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리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이미지

1880년 미국 아카소 주의 리틀록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이 집안은 스코틀랜드 계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에 참정하여 정공을 세웠고 이후 판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 2세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하여 승리했고 이후 필리핀 반군과 전투를 벌여 무공을 세웠습니다. 그의 아마 지는 필리핀 군정장관을 역입 하며 미국 군부에서 명망이 높았습니다. 어머니는 미국 남부의 명문가 출신이며 아들 더그러스 맥아더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학업에 매우 열성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들 더글러스 맥아더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자 근처 호텔에 머물며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형 맥아더 아서 3세도 군인이었으며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축함 함장으로 복무하다 1923년 12월 맹장염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1892년 텍사스 군사학교를 입학하였고 1899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입학하여 1903년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해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 공병대에 배속되었으며 그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필리핀 제3 공병대대로 파견되어 근무하였습니다. 

 

1904년 캘리포니아 파괴 부대에 배속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에 주둔하는 태평양 사단의 공병참모 대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해 육군 소장인 아버지 맥아더 아서 2세의 부관이 되었습니다. 

1906년 루스벨트 대통령 부관이 되었으며 1907년 워싱턴 D.C. 에 소재하는 미국 공병학교에서 입학하였습니다. 

다음 해 포병학교 교관을 역입 하고 1908년 제3공병대대 보급장교가 되었습니다. 

 

1911년 대위, 1915년 소령, 1917년 대령으로 승 진하였습니다. 1917년 레인보우 사단으로 불린 제42보병사단의 참모자에 배속되어 프랑스 전선에 배치되었고 임시 육군 준장이 되었습니다. 

1918년 제42보병사단 예하부대인 제84여단의 여단장으로 지휘를 맡아 최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습니다.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하여 많은 무공을 세웠으며 7번의 은성 무공 훈장을 받으며 뛰어난 지휘관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919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그해 미국 웨스트포인트 교장으로 취임하여 1920년 정식 육군 준장이 되었습니다. 

 

1922년 10월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1925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여 귀국하였습니다. 

1926년볼티모어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 제3군단장에 취임하였고 192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올림픽대회 때는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미 육군 제3군단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92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올림픽대회 때는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 주돈 하는 미국 제9단장이 되었으며 그해 11월 20일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미국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1935년 참모총장에서 퇴임하였으며 군에서는 동부아시아를 지칭하는 극동 통으로 알려졌고, 1936년 필리핀군의 군사고문으로 근무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이때 육군 소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그의 부관이었습니다. 

1937년 퇴역하여 예비역 대장이 되었습니다. 

만주사변 이후 세력을 확장한 일본군이 남중구의 주요 거점 항구를 점령하고 베트남 사이공 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하며 남하하자 미국은 필리핀 방어를 위해 조치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미국의 대일 관계가 긴박하였던 1941년 7월 26일 맥아더 군사고문에서 미 육군 소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여 다음날 중장으로 승진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필리핀 마닐라에서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였습니다. 

1931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투를 벌였으나 마닐라를 빼앗기고 1942년 3월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하였습니다.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연합군 남서 태평양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일 작전을 지휘하였습니다. 

 

그해 가을부터 영국군, 호주군이 참전한 뉴기니 작전을 비롯하여 반격작전을 전개하였고, 1944년 필리핀에 상륙하여 작전을 전개했고 그해 5성 장군이 되었습니다. 

1945년 7월에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하였고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였고 , 9월 미 해군 전함 미주리 호에서 일본 천황으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하도록 조인식을 주관하였습니다. 

이후 일본 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일본 군정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전후 전범재판인 극동 궁 제군 사재판을 맡았으며, 해당 재판에서 생체실험을 자해한 731 부대 책임자로 이시이 시로를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을 점령한 동안에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토지개혁 등 여러 가지 여러 가지 개혁적인 조치를 취했으며, 시민권, 남녀평등권, 노동조합법 등 여러 가지 선진적인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자신의 전용 비행기인 바탄기를 타고 한반도 정찰을 감행하였습니다. 수원에 착륙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고 한강 이남의 정세를 직접 정찰하였습니다.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 육군 제24, 제25사단이 방어전을 펼쳤고 일본에 주둔하는 제8군을 한반도로 이동시켰습니다. 

불리한 한반도 정세를 전환하기 위해서는 인천 상륙작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본국에 설득하였고 7월 25일 미국 함 참을 통해 승인을 받았습니다. 

 

1950년 9월 15일 바닷물이 차올라 만조 기 되는 날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인민군을 압록강 국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그는 만주 폭격과 중국 연안 봉쇄, 대만의 국부 군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4월 11일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귀국 후 레밍턴 랜드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 1962년에는 웨스 포인트에서 의무, 명예, 국가를 주체로 연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아시아와 유럽에서는 훌륭한 군이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전작 미국에서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1964년 4월 5일 워싱턴 월터 육군병원에서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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