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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미합중국 육군의 장군, 미군 최초의 전차부대 지휘관이자, 30년간 미군 주력전차의 자리를 차지했던 M46/47/48/60 패튼 시리즈의 네이밍 모델로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패튼장군의 인물사진 이미지

1. 패튼의 출생과 성장 배경

패튼은 남부의 부유한 군인 집안에서 태아나 어려서부터 로버트, E리나 스톤월 잭슨 장군의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고 남군 기병대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친 회색 유령 존 싱글톤 모스비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미 육군사관학교 1909년 졸업생이며 동기생으로 제이컵 데비스, 로버트 에이첼 버거, 월리엄 후드 심슨, 존 클리퍼드 하지스 리, 델로스 에몬스와 비록 중퇴하기는 했지만 코트니 하지스 등이 있는데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상금 부대 지휘관으로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패튼 하면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활화산 같은 성격의 사고뭉치 지휘관 하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오죽하면 별명이 싸움닭, 여우라 불리는 에르빈 롬멜과 비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외에도 사고뭉치 같은 게 별명중에서 그나마 가장 좋게 불리는 별명입니다. 

 

졸업하고 소위이던 시절인 1910년 베아트리스 배닝 에이 어패 튼 이랑 결혼했습니다. 

전쟁 애 서 지랄 맞은 명장, 개차반 장군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했으나 가정에선 엄격하면서도 자상하고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패튼이 죽고 나서 미망인 베아트리스는 패튼에 대한 영화 제작을 거절했는데, 보나 마나 남편이 전쟁광으로 날뛰는 꼴로 만드는 꼴을 볼 수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어쨌든 성깔 한번 지라맞았기 때문에 1915년 종업 생인 오마 브래들리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보다 늦게 진급했으며 후베인 2명은 자신들의 선배가 사고 치고 다니는 걸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졸업성적은 103명중 46등이었으며 기병병과로 임관하였습니다. 

 

2. 멕시코 내전과 1차 대전 활약

"진짜 산적은 우리 부대에 있었군"- 존 조지프 블랙잭 퍼싱 장군은 패튼이 멕시고 내전에서 산적 두목의 시신을 보닛에 매단 채 복귀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군 소위 임관 직후 터진 멕시코 내전에서 토벌군 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 육군 준 자의 부관으로 참전, 발란 군 지휘소를 기습하여 장군 하나를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보닛에 매달고 복귀하는 기행을 벌여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말하길 처음으로 실전에 참가했을 때 긴장과 겁에 질려 몸이 얼어붙어 죽기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에 그를 데리온 기라성 같은 조상님들이 노려보는 것을 보자 죽어서 그들을 대한 게 더 무서워져 용기를 내어 또 한 명의 패튼이 전사할 시간이다.라고 외치면 돌격했고 패튼의 부하들은 지휘관이 몸소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올라 함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이 결정되자 역시 원정군 사령관이 된 퍼싱 장군의 발탁으로 미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됩니다. 이후 그는 철저한 기동전의 신봉자가 됩니다. 

 

3. 2차 대전에서의 활약상

3-1. 아프리카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2기 갑사 단장으로 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하게 됩니다. 

카세린 계곡 전투에서 미군이 최악의 졸장 로이드 프레 덴탈 밑에서 독일-이탈리아 추축군에게 민병대 같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치욕적인 대패를 당해 영국군과 기타 연합국에게 조롱을 받게 되자. 열불이 뻗칠 대로 뻗친 미군 지휘부는 평시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자작 지만 전쟁터에서는 승리를 가져오는 악바리 근성이 넘쳐나는 광전사인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2군단의 지휘를 맡기게 됩니다. 패튼은 오합지졸들을 무지하게 갈퀴서 가세린의 치욕에서 깨어나게 해 줍니다. 

 

그는 부하들을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변화시켜 전사로서 바꿔내는 데 성공하여 아프리카 군단에 대한 반격에서 주목할 만한 송과 들을 다수 이뤄냈습니다. 그라나 그는 원하던 롬멜과의 대결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북아프리카전선에 패튼 장군 이미지

3-2. 이탈리아 전선

이탈리아 전선의 시칠리아 상륙전에 미 육군 제7군 사령관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몽고메리 장군의 농가간으로 조고로 돌려지나, 오히려 그이 지휘부 대가 영국군을 따돌리고 거점도시 메시나와 팔레르모를 점령하는 활약을 펼쳐 주객이 전도되게 만들 됩니다. 

 

이후 몽고메리에게 라이벌로 찍히기도 합니다. 이 시기 독일군 내에도 그의 명성이 퍼졌으며, 특히 오합지졸인 줄 알았던 미군을 영국군 이상의 강적으로 변화시킨 데다 자기들만큼이나 기갑전, 속도전에 능한 그에 대해 필요 이상의 신겨을 쓰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연합군 첨보부는 패튼이 지휘하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집단군 급의 가짜 부대인 미 육군 제1집 단군을 조직하고 빈 상자를 대량으로 배치해서 보급품으로 위장하는 등의 포티튜드 작전을 펼쳐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까지 독일 정보부를 속여 먹게 됩니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 당일에도 -영국 내 패튼 부대가 움직이지 않았으니 노르망디는 페이크다 라고 독일군이 결론 내렸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후술 한 야전병원에서 부하를 구타흔 등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보직 해임되어, 한적으로 쫓겨난 상태였기에 당연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 가짜 부대 사령관 시기는 야전병원에서의 폭행에 대한 처벌로 그냥 자리 때우기 식이었는데 이게 당시 패튼을 최중요인물로 바라보던 독일군에게 있어 제대로 시너지를 일으켜 D-DAY 당시의 성과를 내는 하나의 원동역이 된 것입니다. 

 

3-3. 서부전선

유럽전선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후속 부대인 육군 제3군을 이끌고 참가해 '코브라 작전'을 발동시켜 눈앞의 몽고메리 부대에 정신이 팔려 있던 독일군의 뒤통수를 박살 내 패주 하게 만들고 중부 프랑스를 쾌 진격하며 유럽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패튼이 보직 해임되어 있는 동안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묶여서 소모만 가중되는 중이라는 패튼을 복직시킨 것입니다. 

노르망디 상륙 4주호 만난 앙숙 -미육군대장 조지스미스 패튼과 영국육군 원수 버나드몽고메리 이미지 

 

 

영화에도 잘 나와있듯이 패튼과 그의 부하들은 폭주기관차처럼 가는 곳마다 독이 군을 격파하면서 질주했는데 보급부대가 못 따라가서 아이젠하워 사령관 명의로 특별수송대까지 조직했는데도 부족했을 정도입니다. 

패튼은 우리가 빠른 게 아니라 너네가 느리 것이라고 취급했습니다. 

 

이것은 패튼이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고속 기도 전의 신봉자여서인데 선두에 서서 달리는 기갑부대와 정찰대는 적의 어려운 저항에 마주치면 그대로 우회로 찾아 원래 목표로 계속 달려 나가고 뒤 따로 오는 보병과 포병이 아카의 그 적군과 싸우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틈새를 찾아 계속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적군은 더 이상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패트의 기갑 부대가 자기네

영역으로 들어와 전선을 붕괴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만 후속부대들은 패튼이 남겨놓고 우회해버린 적군들을 하나하나 쳐 부서야 했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보급선이 연합군의 역량 밖으로 늘아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보급 문제로 1944년 여름에 진격을 멈추게 됩니다.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시도했던 게 다름 아닌 마켓 가든 작전. 이를 두고 히스토리채널에서는 몽고메리가  때를 써서 패튼의 보급을 가로 쳤다고 표현한다. 

 

이는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 사용 조건은 까다로운 전술이며 일단 상대가 전선에서 별력을 빼서 아군 기갑전력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전선에 압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기병과 마 찬기자로 기갑 저녁이 충력을 잃으면 적진 한가운데 포위되게 되므로 충분한 보급과 휴식. 그리고 예비전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회한 적군을 보병과 포병이 무너뜨리지 못하면 보급로가 위협받는다고 합니다. 

 

한편 패튼은 야전군 사령관 이면서도 끊임없이 전선 시찰을 나가고 전선 근처의 동태를 살피는 한 면 올라오는 정보보고는 꼼꼼하게 살폈습니다. 

 

닥돌도 포지션과 타이밍 싸움이기 때문에 정보 분석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이었습니다. 

그저 적이 보인다고 무조건 싸움을 하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전선의 틈새, 즉 적이 없는 허점을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전선 시찰을 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레로 밑에 설명될 아르덴 공세 때도 오히려 브래들리 장군보다 독일군의 이상 징후를 먼저 파악하고 어느 정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독불장군 같은 성품 덕분에 여전히 상관과 동료들 사이에서 평판은 바닥을 달렸는데, 특히 영국군 지휘관이자 롬멜 장군을 몰아낸 버나드로 몽고메리 영국 육군 원수는 개와 고양이 사이였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몽고메리도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해서 미군 장성들에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기에 어찌 보면 동족 혐오나 마 찬기 지였습니다. 

 

1944년 8월 31일 보급을 위해 프랑스 메츠에서 기도를 멈추었고 그사이 요새를 강화한 메츠가 독일군 10월~11월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11월 23일 메츠를 점령했습니다. 

 

1944년 12월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를 맞아해서 반격 작잔을 성공적으로 이끄었습니다 

단 48시간 만에 서쪽으로 진격 중이던 미 제3군 예하 3개 사단으로 구성단 1개 군단을 뽑아내어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초월적인 기도를 보였습니다. 

즉 독일의 공세를 예측하고 반격 계획을 미리 짜두었다는 의미였습니다. 

 

패튼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한 닥돌 바보가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반면 브래들리와 그 참모들은 독일의 반격에 대한 대배 책을 충분히 세워두지 못했습니다. 당시 뫼즈 강 인근까지 진경 했던 독일 기갑 대장 만토 이페과의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한 일 전에서 큰 타격을 입히며 승리를 거두면서 독일의 공세를 제대로 꺾어버리는 성과를 내는 데 성공했고 이후 아르덴 대공세의 여파로 서부 전선 독일군이 약해지자 3월 23일에 당시 연합군의 골칫거리였던 지크프리트 라인을 돌파하느데 성공합니다. 

 

이 당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 반격 작전을 지행 할 당시 악천후로 인해 진격이 지지부진하고 항공 지원도 원활하 않자, 패튼은 갑갑한 마음에 제3군의 수석 군종 목사에게 기도문을 작성하라고 명했습니다. 

 

기도문의 내용은 전쟁을 위해서 눈과 비가 그치고 쾌청한 날씨를 주시기를 기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문을 작성한 후 다음날인 12월 23일 정말로 날씨가 맑아졌다고 합니다. 영화 패트 대전차 군단에서도 묘사된 실화입니다. 

 

그 이후에는 독일 국내로 진격, 연합군 최초로 라이 강을 자력으로 건너버립니다. 

당시 몽고메리와 아이젠 하워 간에 라인강 도하는 영국군이 먼저 하기로 합의되어 잇었지만, 미군이 먼저  그 유명한 '레마겐의 철교'인 루덴도르프 교를 장악해 버렸고, 미군이 몰려오자 독일 육군 공병들이 뒤늦게 폭파했는데 폭약량을 잘모 계산해서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우연의 일치지만 먼저 건넌 후에 벌어진 일이라 상대적으로 묻혔어도 독자적으로 도강 작전을 진행해서 기습적으로 라인강 건너편을 제압한 후 부교까지 설치한 것이라 전술적 의미에서는 더 가치가 높습니다. 

 

이건 라인강에 오줌 싸면서 인증숏도 찍었습니다. 대대적으로 작전 계획을 짠 뒤 한참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폭격, 포격을 날리며 부산 떨던 몽고메리는 멍 때려야 했습니다. 전쟁 후 대선주자 자리를 노리던 아이젠 하워는 미군 희생이 늘까 봐 노심초사하였고 1945년 4월 14일 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4. 전쟁 이후에 행적과 사망

유럽 전선에서 이긴 패튼은 이제 중국으로 보내져서 이번엔 일본군과 싸울 차례였지만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국행은 취소되었고 독일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독일 바이에른 지역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정치적으로는 처신이 워낙 묻혀 결국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10군 사령관 사이먼 머크너 중장이 전사하자 그 자리로 가기 위해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맥아더의 측근과 접촉했는데 부정적인 의견을 듣고 포기했으며, 결국 맥아더의 육사 동기인 스틸웰이 임명됩니다. 

 

나치당을 미국 민주 공화당 정도로 비유하고 나치 인사들을 관대히 처리해 물의 를 일으켰고 , 오히려 연합국인 공산주의 러시아인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전진 나치 당원을 정부 요직에 임명한 것에 대해서 비난이 빗발치자 독일 공무원의 태반이나 나치당원이다. 그러면 정부 일을 까막눈들 한데 맡기란 말이냐?라고 항변했습니다. 메를린에 입성해서는 우린 괜찮은 민 죽 하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러시아의 야만인들로 채워놓았다고 고 투덜거렸다는 일화가 있으면 독일이 항복한 후 베를린에서 벌어진 연합군 퍼레이드에 참 성했을 때,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가 패튼에게 소련군 전의 갈려함에 전차포의 긴 사정거리를 자랑하자. 제부 하가 그렇게 먼 걸에서 적으 ㄹ쏘는 비겁한 짓을 한다면 제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이 이다.라고 답해 주코프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비슷한 시간에 지구 반대편에 있었던 맥아더 원수는 그때까지의 모든 일본 최고 지도자가 그랬듯이 천황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자신이 다해먹었다. 한마디로 정치적 수완은 영 시원찮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라이 강 서안 슈파이어로 사냥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그가 탄 1939년형 캐딜락 이 트럭에 치이면서 중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사고가 난 날은 미국으로 복귀하기 하루 전인 12 워 9일 아우 투반을 달리다가 패튼이 동승자 (호바트 게이 대령에게 불에 탄 차량을 가리켰고 운전수도 강이 보면서 전방 부주의로 2.5톤 트럭에 부딪혔습니다. 운 저수와 등 승자는 찰과상 만입 었지만 패튼은 뒤로 튕겨나가 머리가 뒷유리창과 부딪힌 탓에 목뼈가 부러졌고 두개골이 갈라져 뼈가 보였습니다. 12일 뒤 하이델베르크 군 병원에서 수면 중에 향년 60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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