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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하여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 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6.25 전쟁 때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지휘하였습니다. 하니만 중공군과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되었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리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이미지

1880년 미국 아카소 주의 리틀록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이 집안은 스코틀랜드 계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에 참정하여 정공을 세웠고 이후 판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 2세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하여 승리했고 이후 필리핀 반군과 전투를 벌여 무공을 세웠습니다. 그의 아마 지는 필리핀 군정장관을 역입 하며 미국 군부에서 명망이 높았습니다. 어머니는 미국 남부의 명문가 출신이며 아들 더그러스 맥아더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학업에 매우 열성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들 더글러스 맥아더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자 근처 호텔에 머물며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형 맥아더 아서 3세도 군인이었으며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축함 함장으로 복무하다 1923년 12월 맹장염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1892년 텍사스 군사학교를 입학하였고 1899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입학하여 1903년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해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 공병대에 배속되었으며 그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필리핀 제3 공병대대로 파견되어 근무하였습니다. 

 

1904년 캘리포니아 파괴 부대에 배속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에 주둔하는 태평양 사단의 공병참모 대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해 육군 소장인 아버지 맥아더 아서 2세의 부관이 되었습니다. 

1906년 루스벨트 대통령 부관이 되었으며 1907년 워싱턴 D.C. 에 소재하는 미국 공병학교에서 입학하였습니다. 

다음 해 포병학교 교관을 역입 하고 1908년 제3공병대대 보급장교가 되었습니다. 

 

1911년 대위, 1915년 소령, 1917년 대령으로 승 진하였습니다. 1917년 레인보우 사단으로 불린 제42보병사단의 참모자에 배속되어 프랑스 전선에 배치되었고 임시 육군 준장이 되었습니다. 

1918년 제42보병사단 예하부대인 제84여단의 여단장으로 지휘를 맡아 최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습니다.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하여 많은 무공을 세웠으며 7번의 은성 무공 훈장을 받으며 뛰어난 지휘관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919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그해 미국 웨스트포인트 교장으로 취임하여 1920년 정식 육군 준장이 되었습니다. 

 

1922년 10월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1925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여 귀국하였습니다. 

1926년볼티모어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 제3군단장에 취임하였고 192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올림픽대회 때는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미 육군 제3군단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92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올림픽대회 때는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 주돈 하는 미국 제9단장이 되었으며 그해 11월 20일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미국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1935년 참모총장에서 퇴임하였으며 군에서는 동부아시아를 지칭하는 극동 통으로 알려졌고, 1936년 필리핀군의 군사고문으로 근무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이때 육군 소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그의 부관이었습니다. 

1937년 퇴역하여 예비역 대장이 되었습니다. 

만주사변 이후 세력을 확장한 일본군이 남중구의 주요 거점 항구를 점령하고 베트남 사이공 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하며 남하하자 미국은 필리핀 방어를 위해 조치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미국의 대일 관계가 긴박하였던 1941년 7월 26일 맥아더 군사고문에서 미 육군 소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여 다음날 중장으로 승진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필리핀 마닐라에서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였습니다. 

1931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투를 벌였으나 마닐라를 빼앗기고 1942년 3월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하였습니다.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여 연합군 남서 태평양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일 작전을 지휘하였습니다. 

 

그해 가을부터 영국군, 호주군이 참전한 뉴기니 작전을 비롯하여 반격작전을 전개하였고, 1944년 필리핀에 상륙하여 작전을 전개했고 그해 5성 장군이 되었습니다. 

1945년 7월에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하였고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였고 , 9월 미 해군 전함 미주리 호에서 일본 천황으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하도록 조인식을 주관하였습니다. 

이후 일본 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일본 군정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전후 전범재판인 극동 궁 제군 사재판을 맡았으며, 해당 재판에서 생체실험을 자해한 731 부대 책임자로 이시이 시로를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을 점령한 동안에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토지개혁 등 여러 가지 여러 가지 개혁적인 조치를 취했으며, 시민권, 남녀평등권, 노동조합법 등 여러 가지 선진적인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자신의 전용 비행기인 바탄기를 타고 한반도 정찰을 감행하였습니다. 수원에 착륙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고 한강 이남의 정세를 직접 정찰하였습니다.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 육군 제24, 제25사단이 방어전을 펼쳤고 일본에 주둔하는 제8군을 한반도로 이동시켰습니다. 

불리한 한반도 정세를 전환하기 위해서는 인천 상륙작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본국에 설득하였고 7월 25일 미국 함 참을 통해 승인을 받았습니다. 

 

1950년 9월 15일 바닷물이 차올라 만조 기 되는 날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인민군을 압록강 국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그는 만주 폭격과 중국 연안 봉쇄, 대만의 국부 군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4월 11일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귀국 후 레밍턴 랜드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 1962년에는 웨스 포인트에서 의무, 명예, 국가를 주체로 연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아시아와 유럽에서는 훌륭한 군이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전작 미국에서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1964년 4월 5일 워싱턴 월터 육군병원에서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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