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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저격수는 20세기 들어서 진화를 거듭하여 전쟁의 세기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전쟁과 분쟁이 벌어지면서 저격수의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실전에서 얻은 숱한 시행착오와 갑진 경험, 그리고 계속되는 전술 개발과 훈련으로 저격수는 갈수록 정예화되어 갔습니다. 저격용 소촉과 망원 조준경, 야시경 등 관련 기술의 개발은 더욱 정교한 필살 저격 무기체계의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격수는 현대전의 필수 전력으로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현대의 저격수 훈련 이미지   출처: 미육군

1. 제1차 세계대전, 저격수의 본격적인 등장 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 전투에서 저격수는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했습니다. 개전 초 거의 모든 참전국이 저격수를 운용했지만 망원 조준경을 갖춘 저격수 부대를 운영한 나라는 독일 제국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광학기술과 관련 산업이 발달한 덕분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은 과학기술이 국가를 위해, 전쟁을 위해 적 그적으로 나선 전쟁이었습니다. 특별히 망원 조준경을 갖춘 돌일 제국의 저격수들은 참호 위로 머리를 드러내는 적 병사를 정확하게 조준해 사살하였습니다. 

독일군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망원조준경을 채용하여 정확한 조준사격을 했다. <출처: Public Domain>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처음에는 이러한 정확한 사격이 우연히 명중시킨 것이라고 믿었지만, 나중에 독일군의 망원 조준경을 발견하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독일 제국 육군은 대전 내내 이 저격수들의 활약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에는 독일의 뛰어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산업계가 제작할 수 있었던 고품질의 렌즈가 한 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저격수의 유효성과 살상력을 한층 더 높인 셈입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머리를 참호 밖으로 내밀지도 않고도 전방을 관측할 수 있는 관측용 포대경을 사용했습니다. 

나무 꼬챙이를 이용해 철모만 참호 밖으로 올려 적 저격수의 사격을 유발해 상대 위치를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영국군은 저격수 훈련소를 설치해 전문 저격수 양성에 들어갔습니다. 영국군의 헤스케스 헤스케스-프리처드 대위는 1915년 공식 허가를 받고 저격수 양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1916년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 전선에 있는 랭엄에 제1군 저격, 감시, 정찰 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학교는 처음에는 6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연합군에서 파견된 많은 군인을 교육해 빠른 속도로 전문 저격수를 배출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저격수가 적 사격을 받지 않고 목표물을 관측할 수 있는 포대경, 적의 사격을 유발함으로써 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종이로 만든 가짜 병사 머리 등도 고안해 실전에 응용했습니다. 

가짜 머리에는 고무 튜브를 달아 담배 연기를 내뿜게 해 적이 속아 넘어가도록 유도했습니다. 일단 적이 사격하면 이를 통해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한 뒤 그쪽으로 포격을 가해 무력화했습니다. 

 

헤스케스-프리처드 대위는 저격수와 관측수가 2인 1조로 짝을 이뤄 활동하면서 시너지를 높이는 방법을 비롯해 다양한 현대 저격 기술을 도입하였다고 하고 훈련과정에서 관찰력과 기억력을 동시에 높이는 '킴의 게임'을 도입해 현대 저격수 교육의 바탕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이게임은 참가자들에게 여러 물건을 늘어놓은 것을 보여주고 잠시 눈을 떼게 한 다음 약간의 변형을 가한 뒤 참가자들에게 변화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맞히게 하는 게임으로 보이스카우트나 걸스카우트에서 즐기는 놀이라고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용 소총으로 독일군은 마우저 소총 98, 영국군은 패턴 1914 엔필드와, 리-엔필드 SMLE MK 3, 러시아군은 M1891모신나강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2. 제2차 세계대전, 저격수 전술의 비약적인 발전 하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을 비롯해 다부분의 국가는 특수 저격수 부대를 일시 폐지했지만 스페인 내란이 벌어지면서 저격수는 다시 한번 등장해 그 효율성을 입증했습니다. 저격수의 공격을 당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저격수의 위험성을 다시 절감하게 된 셈입니다. 

 

1930년대의 특수 훈련을 받은 저격수 부대를 보유한 나라는 소련이 유일했습니다. 저격수는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어서 저격하는 기술을 연마한 것을 물론 정규군과 함께 작전하는 능력도 길렀습니다. 특수전을 강조한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소련 저격수는 정상적인 전투 상황에 초점을 맞춘 훈련을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1939년 11월 30일부터 1940년 3월 13일까지 핀란드와 소련 간에 벌어진 겨울전쟁에서는 저격수의 전설이 탄생했습니다. 

당시 핀란드군 저격수 시모 해위해(1905~2002년)는 겨울전쟁 기간 중 502~542명을 사살했습니다. 

1940년 3월 6일 소련군의 야포와 카운터 저격수의 경 격을 동시에 받아 부상을 입고 후송되기까지 미처 100일일 되지 않는 기간에 이룬 대기록입니다. 당시 전선 전역에 걸쳐 섭씨 영하 40도~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계속된 데다 극지의 겨울이라 해가 떠 있는 시간도 짧았음에도 그는 하얀 설상 위장복 차림으로 숨어 눈 덮인 벌판과 숲 속에서 하루 5명꼴로 적을 사살했습니다. 

 

핀란드 저격수의 전설인 시모 해위해 <출처: Public Domain>

해위해는 러시아 모신나강 소총 파생형의 하나로 핀란드에서 제작한 M/28-30 소총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적에게 발각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소총에 망원 조준경을 장착하지 않고 육안으로 저격했다고 하며 필요한 경우 1931년식 수오미 기간 단총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핀란드군은 기후와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하얀 눈밭에서 흰색의 설상 위장복 차림으로 스키를 타고 소련군 앞에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 이 수오미 기관단총으로 연발 사격한 뒤 순식간에 사라지는 설상 기습 전술을 구사했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눈밭 저편에서 저격수가 날리는 총탄까지 더해지자, 소련군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소련군은 해위해를 하얀 죽음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뛰어난 저격수의 존재가 적군의 사기까지 떨어뜨린 경우입니다.  해위해는 1998년 사격 실력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훈련이라고 짧게 답했으며 당시 핀란드는 저격수를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활용하였고 이는 오늘날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저격수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핀란드인의 '궁즉통'은 현대전의 교리까지 바꿔놓았습니다. 

 

3. 뒹케르크 철수 보호한 영국과 프랑스의 저격수들이다. 

프랑스군과 영국군 저격수들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후퇴하는 아군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출처: Public Domain>

제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전역에서는 개전 초부터 저격수가 다시 등장해 적극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1940년 5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 벌어진 프랑스 공방전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저격수들은 각각 적절한 위치에 은폐한 채 단독으로 활용하면서 독일군의 진격을 상당 시간 지연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병, 기갑, 포병 전력의 유기적인 합동 전술을 특징으로 하는 독일의 전격전으로 프랑스가 빠른 속도로 무너졌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저격수들은 치열하고도 효과적인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저격수들이 맹활약한 대표적인 전투가 뒹케르크 전투 또는 다이 너머 작전으로 불리는 연합군 34만 명의 뒹케르크 철수 작전입니다. 맹렬한 속도로 프랑스 영내로 진입한 독일군은 영국과 가까운 북부 항구도시 뒹케르크를 눈앞에 두고 사흘간 진격을 멈췄습니다. 

 

그 틈에 영국군 원정대와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 병력의 상당수가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대형 군함을 물론 수많은 민간인 선박까지 자발적으로 나서 병력을 본국으로 데려간 것을 두고 뒹케르크 정신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군의 진격 지연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 저격수들이 뒹케르크 주변에서 필사적인 작전으로 독일 보병의 접근을 지연시킨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 이후 영국은 다시 한번 특수 저격수 부대의 훈련을 강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하게 사격의 달인을 키우는 것은 물론 은폐를 위한 특수 위장복을 착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주변 자연환경과 구분이 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적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훈련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이 저격수 훈련 대상을 장교와 부사관에 국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투 부대에 배치된 저격수는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격수의 전체 전투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4. 스탈린그라드, 저격수가 흘린 피의 꽃밭을 이루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영웅적 저격수인 바실리 자이체프(왼쪽). <출처: Public Domain>

제2차 세계 대전 중 저격수의 활약이 가장 잘 알려진 전투 중 하나가 1942년 8월 23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벌어졌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입니다. 이전 투를 계기로 독일은 특수 저격수 훈련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포격과 공습 등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와 벽돌더미로 가득한 도심부는 소련군 저격수들이 독일 국방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기에 안성맞춤의 조건이었습니다. 

건물이란 건물은 다부분 무너져 내린 도시의 폐허 속에 숨어 있는 저격수를 찾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련군 저격수들은 어렵지 않게 독일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소련군 저격수 가운데 명성을 얻은 바실리 자이체프(1915~1991)입니다. 

그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1942년 11월 10일부터 12월 17일까지 11명의 저격수를 포함한 225명의 독일군을 사살했습니다. 자이체프의 활약상은 윌리엄 크리가 그가 1973년 펴낸 논 픽선 [에너미 엣 더 게이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자이체프가 독일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자 그를 제거하기 위해 파견된 독일 귀족 출신의 에르빈 쾨니히 대위와 자이체프 간의 팽팽한 싸움을 그린 내용이 핵심입니다. 이스토리는 2001년 할리우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핵심 플루트가 되었습니다. 영국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주드 로 가 자이체프 역으로 맡았습니다. 

 

 

5. 독일 저격수, 적의 소총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다. 

 

소련군에게 노획한 SVT-40으로 사격하는 독일군 병사. 이 소총은 독일군 저격수들도 즐겨 사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독일어로 사프프쉬첸으로 불리는 독일군 저격수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상당수 양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카르비 너 98K를 쓰다가 나중에 게 베어 43으로 장비를 교체했습니다.  이장 비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 일부 저격수 중에는 소련군으로부터 노획한 망원 조준경 장착 모신나강 1891/30 소총이나 반자동 소총인 SVT-38이나 SVT-40, 체코산 마우저 소총을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자극을 받은 독일 국방군은 저격수 훈련을 1942년 새롭게 부활했으며, 1944년까지 31개의 저격수 훈련 중대를 더해 단위부대 당 저격수 수를 비약적으로 늘렸다고 합니다. 

 

ZG 1229 야시경을 장착해 야간저격용으로 활용된 StG 44 돌격소총 <출처: Public Domain>

독일은 뛰어난 광학기술을 저격수용 망원 조준경에 적용하여 세계적인 광학기업인 차이스를 비롯한 다양한 광학업체에서 저격수용 망원 조준경을 개발해 공급했습니다. 대전 말기에 독일군은 현대 돌격 소초의 선구적인 모델로 평가받는 44년형 돌격소총 stg44에 ZG 1229 야시경을 달아 야간 저격용으로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6. 저격수 42만 명을 양성한 소련에 비해 관심이 적었던 미국!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모두 42만 8,355명의 저격수를 교육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9,534명이 최고 등급을 받았습니다.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6개월 교육반을 2개 운영하면서 모두 5만 5,000명의 여성 저격수를 양성하였다고 하며 이 가운데 2,000명 이상이 실제로 군에서 저격수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소련군은 보병 소대나 정찰 소대에 최소한 한 명의 저격수를 배치한 것은 물론, 심지어 포병이나 전차 부대에서도 저격수를 배치했으며 일부 저격수는 PTRD 대전차 라이플에 망원 조준경을 장착해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소련군 저격수 영웅 중에는 몽골 주변이나 중앙아시아 유목민 출신의 소수민족도 적지 않습니다. 

 

소련은 42만8천여 명의 저격수를 키워냈으며, 그 중 5만5천여 명이 여성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미군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 교육을 실시했으나 기초 교육 수준이었고 전술적인 저격 임무보다 장거리 저격에 치중했습니다. 저격수는 머리 부분은 200M, 신체 부분은 400M 거리에서 맞힐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으나, 주변 환경 속에 자신의 신체를 은폐하는 훈련은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훈련 내용도 훈련장에 따라 서로 차이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배출된 저격수의 실력도 들쑥날쑥했습니다.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이렇게 저격수 교육에 관심을 쏟지 않은 것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가지 미군이 제한적인 지역에만 매치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되었고 미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까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등 은폐가 쉽지 않은 건조지대나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울창한 숲 지대와 관목 지대가 많은 서유럽이나 중부 유럽과는 환경이 사뭇 달랐습니다. 

 

하지만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은 서유럽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잘 훈련된 독일군 저격수를 만나 상당한 피해를 보면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노르망디에서도 독일군 저격수들은 울창한 관목 속에 숨어 미군 부대를 에워싸고 모든 방향에서 총탄을 날렸습니다. 

 

미군과 영국군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와 공격하는 것은 물론 1,000M 이상 떨어진 원걸에서도 정확하게 사격하는 독일군 저격수들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격에 대응하는 능력이 부족한 일부 미군 병사들은 총소리가 들리면 대형을 유지하며 그 자리에서 무조건 엎드렸는데 이는 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위치한 독일군 저격수는 이들을 농작물 수확하듯이 한 명씩 차례로 사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군에게 사로잡힌 독일의 히틀러유겐트 저격수 <출처: Public Domain>

일부 독일군 저격수는 전선 후방으로 이동하기도 했으며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다 미군이나 영국군의 진격으로 후방에 남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럴 경우 저격수는 계속 위치를 유지하면서 식량과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 항복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심각한 병력 손실을 입으면서 10대 청소년까지 군대에 동원한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습니다. 

급히 동원된 이들은 복잡한 부대 전술 훈련은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히틀러 유겐트 시절부터 사격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분대 전투나 소대 전투에는 서툴렀지만 전선에서 입수한 버려진 저격용 소총을 들고 단독으로 저격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대로 훈련받은 저격수는 몇 발의 치명적인 사격을 한 다음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본 전술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자신의 안전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어린병사들은 계속 같은 은폐 장소에서 버티다 죽거나 부상을 입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실탄이 떨어져 항복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고 이런 무모함 때문에 이들은 자살 소년단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독일군 저격수는 연합군의 진격에 상당한 지장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연합군은 독일군의 저격수 교육교재와 전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습니다. 

 

7. 태평양 전선에서도 위협적이었던 저격수가 있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미 해병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저격수를 활발하게 운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태평양 전선에서는 일본군이 저격수를 양성해 실전에 투입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정글과 태평양 도서 지역에서 일본군 저격수는 미군, 영국군, 호주군 등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일본군 저격수들은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고 온몸을 풀과 나뭇가지로 위장한 뒤 작은 참호 속에 숨어 저격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인내심이 강했으며 은폐 장소에서 장시간 숨어 보티는 데 능했다고 하며 정글 전투는 불과 수백 미터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진행되는 경우가 만항 장거리 저격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였습니다. 일본군 저격수는 97식 저격총을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본군을 상대로 연합군도 저격수들을 운용했으며 미 해병대가 가장 활발했습니다. 미 해병대는 M1903스프링필드를 저격용 소총을 사용했으며 미군  M1C개런드도 저격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유럽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은 소수의 저격수를 운용했는데 망원 조준경이 달린 카르카노 모델 1891 소총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8. 베트남 전쟁의 신화 하얀 깃털 저격수 해스콕에 대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활동하던 미 해병대의 저격수 카를로스 해스콕 2세(1942~1999)는 확인사살만 93건을 기록했으며 당시에는 저격수와 관측수 외에 장교인 제삼자의 확인이 필요해 공식 기록이 이 정도에 숫자에 그쳤을 뿐이며 실제로는 300~400명을 사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카를로스 해스콕은 확인사살 93건을 기록한 베트남 전쟁 최고의 저격수였다. <출처: Public Domain>

당시 저격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면서 배트 남군은 해스콕에 3만 달러에 상당하는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하며 미군 저격수를 사살할 경우 북 배트 남군이 통산 8~2,000달러의 포상을 해온 것에 비하면 이는 엄청난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스콕은 자신을 노리는 베트남 저격수를 오히려 차례로 무력화했습니다. 베트남군은 해스콕을 '두 카치 롱 짱- 하얀 깃털의 저격수'로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는 해스콕이 자신의 군모에 하얀 깃털을 단 것에서 비롯하며 해스콕을 제거하기 위해 투입된 북 배트 남군 저격수 부대가 하얀 깃털을 단 미군을 노린 것이 확 식해 지자, 미 해병대 저격수들은 모두 자신의 모자에 하얀 깃털을 달아 적을 혼란에 빠트렸다고 합니다. 당시 미 해병대 저격수들의 끈끈한 연대감을 엿볼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스콕은 다낭 서남 지역의 55 고지에서 관측수 존 버크와 함께 어는 북 베트남 저격수의 망원경 안에서 총탄을 발사해 눈을 관통해 머리에 명중시켰으며 이처럼 양측 저격수가 서로 일직선상에서 서는 것은 드문 경우인데, 이럴 경우 약 측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스콕의 북 베트남 저격수보다 먼저 기만하게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며 코브라로만 알려진 이 북베트남 저격수는 그전에 이미 수명의 미 해병을 사살했는데, 해스콕을 무력화하러 온 저격수였을 것을 짐작된다고 합니다. 

미군이나 남베트남군 포로를 잔혹하게 고문한 되 다랴의 출혈로 숨지게 한 것으로 악명 높아 아파치라는 별염을 얻었던 베트콩 저격소대의 여성 소대장도 해스콕의 총탄에 무력화되었다고 합니다. 

 

9. 목표를 무력화한 일발 필살의 신화- 3박 4일간 포복을 하며...

해스콕은 무려 3박4일 동안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하여 저격을 성공시킨 사례도 있었다. <출처: Public Domain>

헤스콕을 유명하게 한 전과는 1967년 3박 4일간의 끝 질긴 추적 끝에 복 베트남군 고위 장교를 1,500야드(약 1371.6m) 거리에서 저격한 것입니다. 이 임무를 그이 베트남 1차 파견이 끝나기 직전에 이뤄졌다고 합니다. 

헤스콕은 귀국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어려운 임무를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온몸을 초목과 나뭇잎으로 덮고 풀밭 위를 조금씩 포복으로 이동해 사격 지점을 향했다고 합니다. 적은 이러한 그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목표물이 시야에 들오자 그는 단 한 발을 발사해 가슴에 적중시켰습니다. 목표물은 즉시 무력화되었습니다. 

 

헤스콕은 이 3박 4일 동안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잠도 거의 자지 못했으며 용 본도 옷을 입은 채로 해결해야 했으며 배설물을 바지 속에 넣은 채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한 일은 저격수의 어려운 임무를 잘 보여주는 사계로 미 해병대에서 지금도 인용된다고 합니다. 

 

당시 해스콕은 자신의 상징이던 하얀 깃털도 제거하고 작전에 임했으며 저격 임무에 무게를 보여주는 일화들입니다. 

1966년 베트남에 도착한 해스콕은 미 해병대 1개 소대에 1명 이상의 저격수를 배치하는 저격수 양성 프로그램을 맡은 짐랜드 대위에게 발탁되어 훈련을 받았으며 교관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 훈련 프로그램에서 사용했던 구호는 지금도 미 해병대 저격수 훈련 과정에서 사용되며 그 말은 바로 '원샷 원킬(일발 필살)입니다. 이는 국적을 떠나 전 세계 모든 저격수의 전술 목표라고 합니다. 

 

한편 해스콕의 대기록은 이라크 전쟁에서 확약한 네이비실 소속 저격수인 크리스 카일 중사가 확인사살 160건을 기록함으로써 깨졌다고 합니다. 크리스 카일의 삼과 기록은 비극적인 총기사고로 2013년 사망한 후 그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10. 테러와 전쟁으로 계속되는 장거리 저격 기록 경신하다. 

위장복인 길리 수트를 입고 L115A1 저격용 소총을 조준하고 있는 영국 해병대 저격수 <출처: (cc)Francis Flinch at wikimedia.org>

해스콕은 베트남 전쟁 중 2,286m 떨어진 거리에서 목표물을 명중시켜 최장거리 저격의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35년 동안 깨지지 않다가 2002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캐나 가군의 롭 펄롱이 2,430m 거리의 저격을 성공하면서 깨졌습니다. 롭 펄롱의 대 기록은 2009년 11월 영국 육군의 크레이크 해리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2,475m 거리에서 목표물을 무력화하면서 새롭게 갱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기록도 2017년 5월 캐나다 특수부대인 JTF-2의 저격수가 이라크에서 3,450M 거리에서 저격의 성공함으로써 또다시 갱신되었습니다. 저격수의 기술과 전술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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