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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영국군 총사령관을 활약하였고 1946년에 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 이미지 

1. 버나드 몽고매리 소개 

1908년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투신하였습니다. 1910~1914년에도 인도 근무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종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아일랜드, 팔레스타인에서 근문 하였습니다. 1931년 대령, 1938년에는 소장이 되어 팔레스테인에서 사단장으로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제3사단장으로서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독이 군의 공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940년 6월 됭케르크 철수 후에는 제5사단장을 거쳐 1942년에 제8군 사령관으로서 북아프리카 작전을 맡아 롬멜 휘하의 독일군을 엘 알 라멩에서 격파, 전국에 승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정에서는 영국군 총사령관을 서 활약, 원수가 되었습니다. 1946년에 백작이 디어 가터 훈장을 받았고 참모장을 거쳐 1951년~1957년에는 나토 군 최고 사령관 대리로 있었습니다. 

 

2. 몽고메리 역사적 사실 알아보기. 

2-1. 2차 세계대전 이전 사실. 

1987년 런던에서 몽고메리 가의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핸리 몽고메리가 송공회 성직자였기에 금욕적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에 엄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해 완고하고 거만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무심함을 그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으며, 훗날 버나드 몽고메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손자인 데이비드와 만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성격 면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은 그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중충한 소년기 및 청소년기를 보낸 후 왕립 군사 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왕립 워윅 셔 연대 1대대의 보병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보병 소대장으로 참가하였습니다. 몽스 전투에서 대대의 절반이 소멸하고, 국경 전투에서 오른쪽 폐에 총알이 박히고 무릎에도 적탄이 관통하여 사경을 헤매는 경험을 하는 등 여러 지옥도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전간기에는 보병 방어 전술에 대한 책을 저술하여 영국군 내에서 어느 정도 반항을 이끌어냈지만 다시 영국 육군의 화 드는 전차였기 때문에 그이 저작은 상대적으로 묻혔습니다. 

 

1925년 브리티 뉴에서 휴가를 지내던 중 사랑에 빠지고 말았는데 베티 엔더슨이라는 17세 금발미녀였습니다. 

몽고메리는 그녀에게 열심히 작업을 걸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가 부모와 함께 스위스에 렌크라는 곳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것이란 소식을 듣고 그는 그들이 묵을 장소를 알아내 그녀를 다시 만났다고 합니다. 

 

그이 관심을 돌리기 위해 엔더슨은 베티 카버라는 여성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몽고메리와 비슷한 연령대의 미망인으로 12세와 13세인 두 아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몽고메리는 그녀와 그녀의 두 아들과 함께 친구가 되었습니다. 

1927년 둘은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1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나갔고 이듬해 외아들 데이비드가 태어났습니다. 1937년 아니가 벌레에 물린 상처로 전 엽병에 걸려 사망하자 몽고메리는 평생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2-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야이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몽고메리는 프랑스 전선의 영국 원정군 지휘관으로 참전했습니다. 이후 후퇴하는 영국군을 보호하기 위해 아라스 전투로 독일군을 저지하여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도왔습니다. 이후 본토로 귀환해 육 재건에 전념했습니다. 

 

에르빈 롬멜 원수가 이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이 저지른 대삽 질을 메꾸기 위해 급파되어, 번개 같은 작전으로 오코너 중장을 사로잡고 영국 서부 사막 군을 거의 괴멸 상태까지 몰아넣었습니다. 중동 사령관 웨이 벌 대장이 인도로 전출되고  후임이 된 오킨 렉 대장은 서부 사막 군을 제8군, 일명 사막의 쥐때로 재편하고 재도전, 한때 밀어붙이는 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반격당해 닐 리치 중장이 지휘하는 8군의 전력 절반 가량을 날려먹고 (가질라 전투) 토브룩 까지 함락되는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오킨 렉은 엘 아리 메인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닐 리치 중장을 해임하고 8군의 지휘권을 직접 잡고 롬멜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차 엘 알라메인 전투 그러나 오킨 렉은 처칠의 무리한 공세 요구를 비현실적이라 불가능하다고 거부했고 이에 처질은 카이로까지 가서 오킨 렉을 마구 갈구고 패배주의에 물들었다고 해임한 뒤 후임으로 해럴드 알렉산더 대장을 임명하고 8군 사령관으로 몽고메리 중장을 임명합니다. 

하지만 처칠의 기대와 달리 몽고메리 또한 공세에 나서는 게 아니라 전력을 보강하고 우주방어를 일관하였습니다. 8월 30일에 실시된 추측 국의 마지막 대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여 알렘 엘 할파 전투 독일군의 이집트 진공 능력을 완전히 소모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섣부르게 공세에 나서는 대신 처칠의 압박에도 전력을 증가시키는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사이 8군의 전력은 하루가 다르게 증강되어 갔는데 아프리카 군단을 지워하기 위해 투입된 독일 제27전투비행단 소소 정찰기가 시속 300마일의 속도로 8군의 병력 주변을 돌면서 그 시간을 계산해 봤더니 무려 10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2-3. 엘 아라 메인의 승리

엘아라메인전투에 영국병사이미지 

결국 이러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2차 아라 메인 전투에서 아프리카 군단을 거세게 밀어붙인 결과, 상당한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아프리카에서 독이 군이 사실상 괴멸하여 이집트에서 리비아를 커쳐 튀니지 에 이르는 먼 후퇴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몽고메리는 독일군을 추적, 튀니지에 틀어박히기 전에 괴멸시키려 했으나, 기갑 지휘에 서투른 면이 이었던 데다가 롬멜이 몇 차례 효과적으로 반격을 했고, 아천 후로 공군력이 생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해 실패하였습니다. 

 

이무렵 미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류 하여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포위되었고, 독일군은 영우 시 되었던 롬멜이 또다시 패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독일로 불러들였습니다.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륙했던 미군은 카세린 계곡의 참패를 경험하는 등 처음에는 빌빌대어 영국군 장군들뿐 아니라 아이젠하워 조차 자군의 전투력을 의심할 정도였지만, 조지 S, 패튼으로 지휘관이 교체되면서 전력이 급상승, 독일군을 밀어붙이는데 성고 하였습니다. 

결국 양 방향에서 영국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은 아프리카 군단은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합쳐 거의 30만의 포로를 남기고 소멸하였습니다. 

 

2-4. 이탈리아 전역과 D-DAY 후 이야기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상륙하는 연합군 이미지 

 

이후 미국과 함께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실시하는데, 여기서 지격 방 향고 주공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패튼과 사이가 벌어지고,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항상 과감한 공격을 주장하는 패튼과 가급적이면 방어전을 위주로 적군의 힘을 소진시킨 후 마무리를 가한다는 몽고메리는 사사건건 충돌하기 일쑤였습니다. 

 

카세린 전투에서 미군의 한심한 꼴을 본 몽고메리는 미군의 전투력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전공 욕심에 불타는 패튼은 자신의 전공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명장 롬멜을 격파한 명성에 빛나는 몽고베리를 라이벌로 보고 그보다 먼저, 더 많은 전공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몽고메리는 전공 욕심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몽고메리는 다시 사령관이던 알렉산더 정군을 꼬드겨 잘 진격 중이던 미군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진격로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독일군은 무너져 내리던 이탈리아군을 수습하고 방어선을 구성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 결과 시칠리아 전역에 교착 상태에 빠지자 패튼 역시 꼼수를 써서 위력 정찰을 핑계로 진 겨울 개시해 서부 시칠리아를 쓸어버리고 파레르모에 먼저 입성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패튼이 병사들의 원성을 산 것도 이무렵입니다. 

 

몽고메리는 처음에는 패튼을 그다지 신경아 썼지만, 그가 시칠리아에서 엄청난 전과를 세워 자신의 전공이 가려지자 슬슬 약이 올랐는지 이후 패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과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몽고메리와 패튼은 서로 만날 때마다 싸웠고, 이들을 지휘하는 아이젠하워는 뒷머리를 잡고 오마 브리들리가 이를 중재하는 상황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매일 일어난 셈입니다. 이러고도 연합군 홍 사려부가 멀쩡하게 돌았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입니다. 

 

몽고메리는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총지휘하여 작전을 성공 시 켜고, 이후 노르망디에 연합군을 묶어두려는 독일군을 상대로 영연방군을 지휘하며 격전을 치르다가 이후 상륙한 패튼의 3군이 망치 역할을 하는 동안 모루 역할을 수행, 패튼의 부대가 진격하는 동안 독일군의 주력을 붙잡아 두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두 지휘관의 활약으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이후 예상보다 적은 희생으로 훨씬 빨리 파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과정에서 몽고메리와 패튼의 대립은 점차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군의 빛나는 승리를 취재 하 길원 하는데 미국 기자들이 패튼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몽고메리를 무능한 인물 답답한 영국 놈으로 포장하면서 이러한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지크프리트 선과 라인강을 넘어 독일 영내로 먼저 들어가는 장군이 되길 원했던 두 사람은 라이벌보다 먼저 전과를 거두기 위해 서로 더 많은 보충병력과 보급품을 원했고, 그에 반하여 아이젠 하워는 영국군이나 미군 모두 전력을 이것은 영국군과 미군 양부 대가 사이좋게 진격 속도가 떨어지게 만드는 좋지 않은 결과만 낳았습니다. 

 

2-5.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참패하다. 

마켓가든작적 에서 미군공수부대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독일군의 후퇴보다 빠른 진격 속도에 기고만장해져 있었고, 비실거리는 독일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걷오 차기 위해 획기적인 꼼수를 궁리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노르망디 이후 놀고먹는 공수부대가 눈에 들어왔고, 결국 마켓 가든 작전이 몽고메리의 제안으로 기획되게 됩니다. 

 

이것은 영미 3개 공수사단(영국 제1공수사단, 미국 82 공수사단 및 101 공수사단에 추가로 자유 폴란드군 공수여단이 네덜란드 일대에 강하해서 교량을 확보하고, 영국 육군의 주력인 30군단이 확보된 교량을 따라 독일군을 정리하여 최종적으로 아른험을 장악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정체된 전선을 불과 2개 군단급 전력으로 타개한다는 매력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엄청난 떡밥 이 걸려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지크 프리터 선에 전력을 집중하고 네덜란드 방어에는 그다지 ㅎㅁ을 쏟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영국군의 판단이었고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면 아군 기갑부대의 지원하에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적의 방어선을 우화 한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면 아군 기갑부대의 지원하에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적의 방어선을 우회한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렇게 작전 의도 자체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른험 주위에 2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과 정규군 1개 기갑사단, 정규군 보병사단과 그 근처에 무장 친위대 대대가 집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SS기갑 대장인 명장 빌헬름 비트리히가 지휘하는 제2 SSS기갑 군단으로, 무장 친위대 전력 중에서도 정예 부대였고 동부전선에서 죽어라 싸우다가 서부전선을 온 노련한 병사들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서부전선으로 재편된 후, 팔레즈에서 연합군에게 참패하게 됩니다. 서부전선 사령관으로 다시 부임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동부전선에서 온 B집 잔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에 의해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후방의 시골구석, 즉 아른햄으로 보내져 휴식 겸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기하던, 말이 사단이자 연대 수준도 못되게 전력 소멸하였습니다. 

 

그러니 네덜란드 방면이나 독일 본토 쪽으로 공세가 올 것을 대비해서 팔레즈 포켓에서 탈출한 제2SS기 갑 군단을 후방인 아른햄에서 보충과 휴식을 취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을 내린 사람이 하피이면 방어의 사자 모델 원수였습니다. 

 

B집 잔군 총사령관 발터 모델은 영국군 공수부대의 강하로부터 단 3시간 만에 방어 계획을 수립, 친위대뿐 아니라 해군 공군 지상 대원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연합군의 공세를 분새합니다. 

 

발 격 작전 내내 모델 자신이 매일 전선에 나아가 전황을 완전히 파악하여 증원 부대 투입이 매우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SS기갑부대 지휘관 빌헬름 비트리히와 독일군 공수부대 지휘관 쿠르트 슈트 덴트의 지휘역량까지 더해져서 연합군은 그야말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이작전의 실패가 더 뼈아픈 이유는 연합군에서 고급 인력으로 꼽히는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다 말아먹은 주제에 막상 그 상대는 독일군 최정예도 아닌, 2 선급 예비부대나 교도대라는 점에서 전투에도 지고 전쟁에도 진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모델 장군과 그 참모들에게 진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독일군이 매우 강해서 질 수밖에 없었어요 라고 징징대지 못했습니다. 

 

 

한편 이작전의 실패는 훗날 몽고메리의 평가를 크게 깎아먹는 주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작전 실패 자체도 그렇지만, 몽고메리가 작전이 실 폐한 이후 패배의 책임을 정작 용맹하게 분투했지만 정치적으로 돌봐줄 빼이 없는 외국의 망명 장군에게 몽땅 전가하는 지질한 추태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작전에 실패한 것 까지는 그럴 수 있습니다. 대원수 말마따나 인류 역사에 무적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불패의 상승장군 또한 중 없진 않으나 전쟁사를 통틀어서도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전쟁에서 승패는 병가 지상사고 모든 전투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약체화된 독일군에게 쳐 발린 것도, 고급을 통트어 용장 밑에는 약졸이 없는 법이고 다시 독일 측 지휘관인 발터 모델이 겁쟁이나 용려 한 지휘관이 아닌 당대의 손꼽히는 명장이 이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한 작전의 패전 책임을 외국의 망명 장군, 그것도 그냥 별이 아니라 충분히 전선 엣 용맹을 떠 쳤던 장군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운 졸려한 행동은 후대의 사람들이 군인을 평가함에 있어 당연히 크나큰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후세의 인물들이 보기에 몽고메리의 평가는 당연히 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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