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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전이란 무엇인가?


목차 

  1. 특수작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2. 다양한 스팩트럼을 포함하는 특수작전은?

전 세계에는 다양한 특수작전을 하는 특수부개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특수부대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특수작전이란 또 무엇이 있는가?

특수작전이란 :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비상사태나 전략적 우발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특수한 작적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정규병력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일이나 정규 벽력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특수작전입니다. 

한마디로 정규병력이 준비 되어 있지 않은 일이나 정규 병력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특수작전인 것입니다. 

 

1. 특수작전에는 어떤것이 있을까요?

특수부대가 수행하는 특수작전은 대표적으로 다음 9가지로 분류합니다. 

타격 작전, 비정규전, 대게릴라 작전, 해외 방어 원조, 대테러작전, 민사 심리작전, 정보작전, 기타 군 통수권자나 국방장관이 지정하는 모든 임무 이렇게 특수작전의 범위는 매우 다양합니다. 

 

보통 특수부대라고 하면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 수수의 인원이 적의 핵심 목표를 파과 하는 모습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렇게 특수작전부대가 사전에 지정된 목표물을 포획, 파괴, 회수 하는 군사작전을 '타격 작전'이라고 합니다. 

타격 작전은 예로부터 특수부대의 대표적인 임무입니다. 

 

그러나 파괴활동만 전부가 아닙니다. 특수부대는 적의 이동상황과 동태를 정확하게 살펴서 전달하는 임무도 수행합니다. 전직 깊숙이 침투하여 국가에서 요구하는 첩보와 제원을 수집하는 군사작전을 '특수 정찰'이라고 합니다. 

걸프전에서 미국과 영국군 특수바대가 수행한 스커드(SCUD) 미사일 정찰활동이 이런 특수 정찰의 사례에 해당합니다. 

 

특수부대는 정규군과는 다른 차원의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특수부대는 적진이나 적 점력지역에서 주민을 규합하여 군사 세력으로 만들어서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활동을 하는 것을 바로 '비정규전'이라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군 점령지역에서 적군의 게릴라를 색출하여 섬멸하는 임무는 '대게릴라 작전'이라 하며 9.11태러후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된 미군 특수 부대는 현지에서 반군을 조직하여 겨우 한 달 만에 수도 카불을 점령했는데, 이것이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비정규전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특수작전에 임하는 특수부대원 (영화에 한장면:액트오브벨러)

 

2. 다양한 스팩트럼을 포함하는 특수작전은?

대표적인 특수작전 영역은 바로 '대테러작전'입니다. 

대테러 작전은 테러범의 활동에 예방하고 대응하며 더 나나아가 사전에 섬멸하는 모든 공세적 군사작전을 말하며 테러조직의 본거지를 공격하거나 , 테러조직이 보유한 대량 살상 무기를 회수하거나 인질을 구출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엔테베 인질 구출작전이나 영국 특수부대의이란 대사관 인질 구출작전이 역사상 유명한 대 테러 작전에 해당합니다. 

삼호주얼리호 인질 구출작전의 경우도 이러 대태러 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수작전은 구사외교에서도 넓은 활약을 합니다. 해외의 동맥 국이 스스로 안보능력을 갖추도록 원조하는 임무를 특수부대가 수행하며 해외 방어 원조에도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것은 이들이 수많은 군사적인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훌륭한 교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당 국가와의 군사적인 비선을 확보하는데 특수부대원의 어학능력과 경력은 자국군에게 커다란 자산이 됩니다. 

현재 우리군이 아랍에미리트(UAE)에 파병한 '아크'부대 역시 이런 해외 방어 원조 임무를 수행합니다. 

 

 

특수부대라고 해서 싸움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역시 전쟁을 위해서는 정보활동이 필수적이며, 여기서도 특수부대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군 수뇌부의 결심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군사적인 기만 행동이나 심리활동 등을 수행하는 '정보작전'도 특수작전의 중요한 분야입니다. 

 

1991년 걸프전에서 소수의 미 해군 특수 부대원이 쿠웨이트 상륙작전을 연출 하면서 이라크 군사단을 기만한 작전이 대표적인 정보작전 사례 가우데 한입니다. 

 

 

여기에 더하면 '민사심리전'이란 고도의 전술 역시 특수 부대의 몫입니다. 

 

민사심리전이란?

군사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아군에 대한 민간의 우호적인 태도를 유발하고, 더나아가 적국 정부와 국민에 대해서 아군이 원하는 행동을 유발하는 포괄적인 작전 형태입니다. 

 

보통은 작전지역에 전문화된 부대가 대민지원활동을 통해 현지 세력을 규합해나기기도 합니다. 

특히 특수작전의 정의를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 아홉가지 임무 가운데 마지막 항목입니다. 즉 군 통수권자나 국방장관이 요구하는 임무라면 '무엇이든'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정규병력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수해하는 것이 특수부대이기에, 세계 어느 특수부대를 막론하고'블가능은 없다'라든가'안되면 되게 하라'와 같은 신조가 생겨나게 됩니다. 

 

참고: 세계 특수작전1 내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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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SAS(Special Air Service)는 1941년 창설된 영국 육군 특수부대이며, 대게릴라전, 직접 타격, 대테러작전, 인질구출, 은밀한 정찰을 포함한 다양한 작전을 수행합니다. 대테러부대의 아버지, 최초 위의 현대전 대테러부대로 불리는 부대이며 과거부터 쌓아 온 여러 실적 데이터와 작전 경험을 토대로 현대까지 특수부대의 최고봉 중 하나로 언급되며 그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명불허전 세계 최고의 대테러부대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2000년대 이후로는 USSOCOM 이 넘사벽으로 어마어마한 기량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JSOC  산하의 티어 1 부대에게 명성이나 실력에 있어서 밀려버린 감이 크며 갈수록 그 격차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영국 해군 특수부대인 SBS( Special Boat service)와 함께 영국 특수부대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 SAS는 영국 특수전사령부 소속 제22공수특전(SAS)연대와 영국 육군 제1정보 감시정찰(ISR) 여단 소속 제21, 23 공수특전(SAS) 연대(상근예비역)로 구성됩니다. SAS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창설되어 다양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해체되었으나, 평화시에도 특수부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47년 향토예비군 부대에 파트타임 상근예비역 부대인 제21공수특전(SAS) 연대가 창설되었고, 추가로 현역 특수부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52년 제22공수특전(SAS) 연대가 창설되었습니다. 1980년 주영국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 님로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습니다. SAS는 세계 각국의 현대 대테러 특수부대에 큰 영향을 끼친 군 대테러 분야의 시조입니다.

영 국영 방 국가의 일원인 호주에는 SASR , 뉴질랜드에는 NAZSAS 가 있으며, 이웃 프랑스는 전후 SAS를 모토 삼아 제11 충격 낙하산 부대 (11E CHOC)를 창설했으며, 현재는 제1 해양 보병 낙하산 연대 가 존재하고 이들의 기량이나 활약상은 원조 못지않습니다. 


https://youtu.be/oefEQ5 TNz0 Q


특징

대테러 전술

이들은 1960년대 이후로 테러리스트와 대테러전에 관한 개념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인질구출이나 테러 진압작전의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북 아일랜드에서 IRA와의 시가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북아일랜드에서 실전 경험 등을 통해 대테러전에서 최고급의 기량을 쌓았으며, 외국 대테러부대와 잦은 교류를 통해 대테러전 노하우를 공유,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977년에 있었던 GSG-9의 "마법의 불꽃" 작전 당시 SAS 고문관들이 섬광탄을 제공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1980년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님로드 작전) 당시, 인질 1명이 사망하자 과감하게 진입해서 테러범들을 전원 제압하고 나머지 인원을 모두 성공적으로 구출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때 SAS가 입었던 민무늬 검은색 전투복과 방독면 MP-5 기관단총 같은 장비들은 군사무기 마니아들에게는 SAS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였고 그들이 보여준 진압작전 노하우와 장비들은 다른 나라 대테러부대들도 널리 받아들이는 일종의 유행이 되었습니다.


영국 지배 하의 홍콩에서 창설된 경찰특공대 비호대(Special Duties Unit)도 영국에서 초빙된 SAS 교관의 훈련을 통해 탄생했습니다.


 

 


심리전 전술

SAS는 또한 심리학 전문가를 반드시 작전에 투입하며, 이는 민사작전과 적지에서 게릴라 편성 및 우호적인 세력 형성에 크나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이라크에서도 자유 의용군 편성에 큰 역할을 했으며, 알려지지 않은 전쟁에서도 많이 활약했다고 하고 특히 오만 내전 당시 심리학 전문가가 대거 투입되어 공산군에 들어간 민간인들을 설득하여 정부군에 편에 서게 하기도 했습니다. 심리학 전술이 실패한다면 심리학 전문가들은 짐만 된다는 일부 밀덕들의 주장이 존재하는데... 과연 그럴까? 아래 예시를 보자면

포틀랜드 전쟁에서도 심리학 전문가가 투입되어 아르헨티나 군 후방에서 혼란을 주려고 했지만 타고 가던 헬리콥터에 역풍이 불었고 움직이던 SAS 대원 전부가 20kg에 가까운 군장+박격포 부속품+박격포탄+중기관총+중기관총탄+기타 등등(...)을 지고 있어서 작전이 8시간이나 지연되는 바람에 취소되었습니다. 그 심리학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던 SAS 지역대는 아르헨티나 공군 전진기지 습격작전을 위해 대기하던 다른 SAS 지역대와 합류하여 함께 아르헨티나군의 폭격기 파괴 임무에 투입되었고,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현대화된다고 해도 군대는 결국 인간으로 이뤄진 조직이고, 병사들을 모두 기계로 바꾸지 않는 한 심리학적인 요인으로 전투에 패배하는 경우 역시 잔존할 것이기 때문에 심리학자가 단순히 낭비가 아닌, 훌륭한 전략적 요소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군기

한편 전시가 아닌 평상시의 훈련 강도와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라서 반대급부로 풀어줄 때는 군기가 거의 개판 5분 전으로 흐트러진다고 합니다. 물론 전문가들이라 어느 정도 선은 지키며, 쉴 때는 확 쉬고 할 때는 확 하는 식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레벨이 다른 군인들이 보기에는 거의 똘끼에 가깝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한 예로, 1962년 그린베레 교환 장교로 SAS에서 1년간 훈련을 받았던 미군 장교 찰스 베크 위스는 난장판이 된 내무실 바닥에 앉아서 휴대용 가스난로로 차를 끓이던 한 SAS 대원에게 주변 정리정돈 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가 "어쩌라고"라는 대답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력과 독특한 훈련 군기 등을 접하고는 훗날 1977년 델타 포스가 창설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미군 특수부대원들의 군기도 어느 정도는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베크 위스의 사례도 당사자들에게는 별일 아닐 수 있는 것이, SAS는 대원들 간에 계급이 없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SAS 대원이 되는 순간부터 계급을 반납하고 SAS 대원(Trooper)으로만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무 중 자신의 본래 계급은 그대로 적용되고 실제 진급도 가능하지만 이는 연대 내부에서는 적용되지 않으며, 연대에서 전출된 다음에야 자신의 정상적인 계급장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단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는 부사관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장교들은 아예 차출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계급 반납이 없습니다. 대원의 경우 의무적인 연대 내 복무 기한을 마치고 짤 없이 한번 방출된 이후로는 추후 본인 의사에 따라 다시 SAS에 부사관으로 자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무작정 군기를 들여 쉬는 중에도 군인들에게 상시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것보다는 체계적인 훈련과 그에 비례한 정신적 보상이 군사의 숙련도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훈련시간 외에 군기를 집어던진 똘끼로 가득 찬 행동을 할지언정 실전으로 돌입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흉기로 탈바꿈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풍문일 뿐인 데다가, 저 일화 자체도 1970년대의 증언 담에 한국군의 내무부 조리에 학을 뗀 밀덕들의 선망이 뒤섞인 카더라 수준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영미권 군대 분위기 자체도 그렇게나 경직된 편이 아니고 사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사생활이 아닌 업무체계는 제 아무리 특수부대라 하더라도 철저히 군의 결정사항을 따릅니다.

다만 문화 면에서 SAS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델타 포스가 복장이나 용모, 내무생활 면에서 상당한 자유도가 보장되는 것으로 보아 SAS 역시 평균적인 영국군보다는 자유도가 보장될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겠습니다. 델타 포스가 정리, 지각 등 기본적인 예의 차원에서 데브그루 보다 까다로운 편임을 감안하면 SAS 역시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선 엄격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

제2차 세계대전

SAS는 중동 지역의 영국 육군 코만도 부대가 연이은 전투로 궤멸 직전에 이르러 1941년 7월 중동 지역 5개 코만도 부대 잔존 병력을 1개 코만도 부대(중동 코만도 부대)로 축소 개편하는 과정에서 제8코만도 소속 데이비드 스털링 대위의 제안으로 창설되었습니다.

 

데이비드 스털링은 중동지역에도 유럽 지역처럼 낙하산으로 침투하는 코만도 공수부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해서, 새로 창설된 중동 코만도의 6개 소대 중 제1, 2소대가 낙하산 침투부대로 편성되었습니다. 중동 코만도 제1, 2소대의 대외 명칭은 공수특전(Special Air Service) L 파견대였는데, SAS라는 이름은 영국에 주둔하던 낙하산 침투 코만도 부대인 제11 SAS의 명칭을 따온 것이었습니다.



1941년 11월 16일 크루세이더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실시된 데이비드 스털링의 첫 SAS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경험이 없었던 수송기는 엉뚱한 곳에 부대원들을 강하시켰고, 장비와 병력 대부분은 흩어져서 다시는 집결하지 못했습니다. 작전에 참가한 62명의 대원 중 22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18명이 부상을 당해, 공격 목표는 구경도 못하고 중간 집결지에서 철수를 해야 했습니다. 이 작전에서 계획대로 실시된 것은 복귀를 위해 대기하던 영국 제8군 직할 장거리 차량 정찰부대인 장거리 사막단(Long Range Desert Group, LRDG)의 퇴출작전뿐이었는데, 이 트럭을 타고 복귀하던 중 스털링은 사막 지형에서 공수작전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대신 자동차 침투작전을 새롭게 구상했습니다.

그가 새로 구상한 새로운 작전은 LRDG의 전문가들이 자동차로 SAS를 목표지점까지 안내해 주면, SAS가 적을 기습 공격하고, 다시 LRDG를 따라 부대로 돌아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1942.6월 마침내 SAS의 두 번째 작전이자 첫 자동차 기습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LRDG의 안내로 리비아에 있는 3개 비행장을 기습 공격한 SAS는 다수의 항공기를 파괴하고,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LRDG의 안내를 받으며 무사히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SAS 작전 중 최고의 성공을 거둔 작전은 1942.7.26일 실시된 시디 하니시(Sidi Haneish) 비행장 기습작전으로 SAS는 LRDG의 도움으로 무더운 낮에는 적의 항공 정찰을 피하고 피로를 막기 위해 위장한 채 잠을 자고, 야간을 이용해 이동하는 식으로 사막을 멀리 돌아 적진 깊숙이 침투한 다음 폭격기와 수송기 37대를 파괴한 작전이었습니다.

1942년 9월 중대 규모의 중동 코만도가 해체되고, 대대 규모의 제1공수특전(SAS) 연대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제1 SAS 연대는 영국군 4개 중대(Sqn), 자유 프랑스군  1개 중대, 그리스 군 1개 중대, Folboat(SBS) 1개 분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이후 SAS는 차량을 이용한 히트 앤드 런 작전으로 1943년 1월 스털링이 £[튀니지]]에서 독일군에 포로로 잡히기 전까지 250여 대의 추축군 항공기를 파괴했습니다. 독일군은 공중전에서 잃는 전투기보다 SAS에 의해 파괴되는 전투기가 더 많았던 날이 있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스털링이 포로로 잡힌 후에는 제1 SAS연대는 특별 기습 중대(Special Raiding Squadron, SRS)와 SBS(Special Boat Section)로 분리되고, 제11코만도 출신으로 SAS 창설 요원이었던 패디 메인 육군 소령이 SRS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이 끝나고 SRS는 시실리와 이탈리아 전역에 참가했습니다.

한편, 1941년 창설되어 국가정보기관인 특수작전 집행부(Special Operations Executive, SOE)의 작전부대로 활동했던 제62코만도(또는 Small Scale Raiding Force, SSRF)가 1943년 해체되면서, 제2공수특전(SAS) 연대(연대장은 데이비드 스털링의 형인 빌 스털링 육군 중령)로 개편되었습니다.

1944년 1월 SRS는 다시 원래대로 제1공수특전(SAS) 연대로 확대 개편되고, SRS 지휘관, 패디 메인 육군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하면서 제1공수특전(SAS) 연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공수특전(SAS) 여단이 창설되어 예하에 영국 육군 제1, 2 SAS연대와 프랑스 제3, 4 SAS연대, 벨기에 제5 SAS연대를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SAS는 이때부터 자동차 기습 대신 독일 점령 치하의 프랑스에 대한 낙하산 기습 침투 작전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1945년 10월 8일 군축의 필요성에 의해 SAS는 해체되었으나, 다음 해인 1946년 장기간 장거리 침투부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47년 1월 1일 향토예비군(Territorial Army)에 제21공수특전(SAS) 연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이 연대 번호는 해체된 SAS 연대를 기념하기 위해 제1, 2 SAS연대의 숫자 1과 2를 가져와 새로운 첫 번째 공수특전(SAS) 연대라는 의미에서 1과 2의 순서를 바꿔 21 연대라는 번호를 붙인 것입니다.

 

말레이시아 정찰대(SAS)

1950년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제21공수특전(SAS) 연대에서 1개 중대가 3개월 간의 6.25 전쟁 파병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작전 소요가 없어서 대신 말레이시아 비상사태(Malayan Emergency, 1948~1960)에 파병을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말레이시아에는 1945년 3월~10월까지 영국 공수특전(SAS) 여단장을 지낸 마이크 칼버트가 말레이시아 정찰대(SAS)를 창설 중이었는데, 그는 극동 주둔 영국군에서 SAS와 친디트 부대 출신 지원자를 받아 A중대를 창설하고, 영국 본토 주둔 제21 SAS 연대에서 파병된 SAS 중대를 말레이시안 스카우트 B중대로 편성했습니다. C중대는 영국령 로디지아에서 영국인 지원자를 받아 창설했습니다. 로디지아 출신 지원자들이 3년 계약이 끝나 귀국한 다음에는 뉴질랜드에서 새로 지원자를 뽑았습니다. 1956년에는 D중대와 육군 낙하산 연대에서 파병된 낙하산 중대를 포함하여 5개 중대로 구성되었습니다.

현역 공수특전(SAS) 부대의 필요성이 인식되어, 1952년 현역 제22공수특전(SAS) 연대가 영국에서 창설되었습니다. 1959년에는 MI9의 뒤를 잇는 도피 및 탈출 전문 부대인 상근예비역 수색대(the Reserve Reconnaissance Unit)를 제23공수특전(SAS) 연대로 개칭하여 세 번째 공수특전(SAS) 연대를 창설했습니다.

친공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정권이 반외세를 외치며 말레이시아 의 공산당을 지원하며 벌어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전쟁에서도 공산 게릴라로 가장한 인도네시아 정규군과 싸웠습니다. 최종적으로 정부를 지키고 민심을 돌리는 데 성공하며 이는 성공적인 대(對) 게릴라전의 대명사로 여전히 거론되고 있습니다.

훗날 월남전에서 미군이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소모하고도 결국 베트남의 민심을 얻지 못해 패배한 것에 비해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SAS는 이 작전에서 FN FAL과 같은 고위력 전투 소총이 특수임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 후에 영국군 최초로 M16을 도입했습니다. 이후 M16은 영국군 내에서 아말 라이트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SAS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SAS의 주력 화기는 M4 카빈 계열인 L119A 2입니다.

 

현대의 SAS

https://youtu.be/QjJ3 HxWNjUc

1980년 님로드 작전 당시 현장 영상.

1982년 포틀랜드 전쟁 당시에도 여러 작전에서 맹활약했지만, 아르헨티나군의  기관포 진지 앞으로 쭉 펼쳐진 평야지대를 거슬러 올라가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영하의 날씨에 고산지대를 행군하고 적의 배후를 습격하는 임무에서 단 한 명의 동사자나 비전투 손실도 입지 않아 이후 다른 나라 군대의 동계작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상 최초로 고어텍스 재질의 야외 상의와 전투화가 지급되었다고 하며, 꾸준한 휴식과 따뜻한 차로 체력을 유지해 성공적으로 전투력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1990년의 걸프전에서도 역시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  발사대 추적이나 전략 목표 정찰, 연락선 차단 등의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때, 브라보 투 제로라는 암호명을 띄고 스커드 미사일 감시를 하러 간 일단의 SAS 부대가 어린 목동 소년에게 우연히 발견되어 위치가 발각되자 헬리콥터로 이탈하려 했지만, 헬리콥터가 오지 않고 적의 추격이 계속되자 도보로 이라크를 횡단하여 거의 시리아 국경 앞에서 1명은 탈출에 성공하고 3명은 전사, 4명은 붙잡혀 포로가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때 포로가 되었던 한 대원이 그들의 희생과 작전 전체가 극비로 취급되는 것에 분개, 전역 후  브라보 두 제로라는 책을 써내며 이들의 활약상과 놀라운 희생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브라보 투 제로 작전팀의 경우 8명의 인원으로 장갑차를 가진 수백의 정규군과 민병대의 추격을 꾸준히 물리치면서 너무 먼 사우디아라비아 쪽 국경보다는 가까운 시리아 쪽 국경을 택해 시리아 국경에서 몇 km 남짓한 지점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만 무사히 시리아로 도망친 사람은 1명뿐이었습니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전투와 추위로 3명이 전사하고, 포로가 된 이후에도 몇 개월에 걸쳐 무수한 고문과 심문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정체를 숨겼습니다. 이라크군이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나고 포로교환을 한 이후였다고 합니다. 대원들의 기량은 그야말로 일당백이지만 특수전 장비나 헬리콥터 같은 지원 요소가 부족했던 한계 때문에 대원들이 불가피한 희생을 치렀다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당시 작전팀 대원들 사이에서도 엇갈린 주장이 나오는 등 논란이 있습니다. 아래 출신 인물 항목 참조하세요.

시에라리온에서는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되었다가 반정부군에 인질로 잡힌 영국군 장병들을 공수부대와 공군과의 협동작전으로 성공적으로 구출하기도 하였습니다(바라스 작전).

2013년 케냐 나이로비 쇼핑몰 인질극(Westgate Shopping MallAttack) 당시 전직 영국 육군 특수부대 SAS 장교 출신으로 나이로비 민간 보안회사에 근무 중이던 도미닉 트롤런(Dominic Troulan) 퇴역 육군 소령이 테러범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인질 100여 명을 구출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동료의 부인과 자녀를 구출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12번이나 쇼핑몰을 왕복하며 인질들을 구출하여 2017년 영국 정부로부터 2등 훈장인 조지 크로스(George Cross, GC) 훈장을 수상했습니다. 민간인에게 조지 크로스 훈장이 수여된 것은 2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트롤런 소령은 1979년 영국 해병대에 병으로 입대하여, 해병대 코만도 부대에서 하사로 전역한 후 영국 육군 부사관으로 재입대했고, 육군 낙하산 연대를 거쳐 육군 특수부대 SAS 장교로 임관, 2009년 소령으로 전역했으며, 포틀랜드 전쟁과 북아일랜드  분쟁,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 참전용사입니다.





기량이 매우 높은 특수부대로 각 대원의 신원 자체가 비밀로 다뤄질 정도입니다. 그만큼 영국의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SAS에 대해서 "그들은 매우 위험한 존재이므로 발견 즉시 사살해야 한합니다."라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SAS는 적국인 독일 음악 릴리 마들렌을 상부의 반대를 무시하고 행진곡으로 채택하였는데 그걸 21세기에 들어서까지도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연합군 내에서도 대 유행곡이었습니다.

2014년 영국군 SAS가 북서부 이라크에서 ISIS에 대한 인간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미리 교신 감청과 무인기 운용을 병행해서 표적들을 확인한 뒤 치누크 수송헬기로 ATV팀을 투입하고 AWM , 바렛 M82 저격소총과 GPMG 등을 사용해 야간에 목표들을 습격한 뒤 고속으로 도망쳐서 빠져나오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쓰인 전통적인 방식의 개량판입니다.

작전이 시작된 지난 4주간의 효과는 꽤 뛰어나서 200여 명 이상의 타깃을 사살시켰는데, 그중에는 장교급 인물이 무려 50% 이상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7년 5월에는 이라크 모술에서 SAS 스나이퍼가 SVD로 영국군을 저격하던 IS 저격수를 2400미터 밖에서 역저 격해 사살했다고 합니다. 저격에 사용한 총 은샤이 택 M20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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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베레

미 육군의 정예 특수부대



미 육군 특수부대의 정식 명칭은 ‘US Army Special Forces’, 말 그대로 ‘미 육군 특수부대입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는 ‘그린베레’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하며 대한민국 육군으로 치면 특전사에 해당하는 부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린베레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영화 람보에서 드러나고 홀연히 적 후방으로 투입되어 파괴와 공포를 몰고 오는 특수부대원의 모습이 굳어진 것도 이런 영향 덕분입니다. 원래 미국은 건국 당시에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소규모 부대의 도움을 받았던 국가입니다. 영화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에서 묘사된 것처럼 프랜시스 매리언(Francis Swamp Fox’ Marion)의 활약은 영국군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결국 독립에 기여했습니다. 매리언 장군은 미국 특수부대의 기원으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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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특수전의 시작: 제1 특수임무대와 OSS

미군은 제2차 대전 동안 제1특수임무부대나 알라모 정찰대, 메릴 특공대에서부터 OSS 침투팀까지 다양한 특수부대들을 운용해왔습니다. 이 중에서 제1 특임대는 우수한 캐나다 지원병 800여 명과 미 육군의 ‘잉여자원’ 1,000여 명을 모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강하와 상륙, 폭파는 물론이고 근접 전투, 침투, 스키, 등반 등 다양한 기술들을 연마했습니다. 제1 특임대는 실험적 성격의 부대이자 미국의 현대적 특수부대의 시초였습니다.

파병 준비가 끝난 1943년에 제1 특임대는 이탈리아 전선으로 투입되어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피해도 대단했습니다. 한 달 간의 전투에서 창설 대원 1,800여 명 중 1,400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1944년에는 안치오 지역에서 무려 사단급 작전구역을 맡아 독일군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제1 특임대는 악마의 여단이란 이름으로 독일군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습니다.

또 다른 주축으론 OSS가 있습니다.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란 전략정보국으로, CIA의 기원이 되는 미국 최초의 정보기관이고, OSS의 역할은 정보수집뿐 아니라 적 후방에서의 준군사작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활동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국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의 적 후방 공작이었습니다. SOE 대원들은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 유럽 주민들을 훈련시켜 독일군의 후방을 타격하는 저항군으로 키워내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OSS는 제드버러(Jedburgh) 팀을 만들어 레지스탕스를 양성하고 이들과 함께 적 후방에서 철도나 교량을 파괴하는 사보타주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이 끝나면서 이들 부대는 해체되었습니다. 적 후방에서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임무는 새로 생긴 정보기관인 CIA로 넘어갔습니다. 6.25가 시작될 때만 해도 미 육군 내에 특수전/비정규전 능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심리전 사무국(Office of Psychological Warfare)만이 유일한 특수작전 관련 부서였습니다.


 


6.25 전쟁 중에 탄생한 제10 특전단

그러나 6.25 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은 군 내부에 특수전 능력을 남겨놓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UN군이 북진한 이후 1950년 겨울을 즈음해 북한 지역에는 수많은 자생적 유격대들이 생겨났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군은 제8군 G-3 휘하에 8086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이들은 이후 8240부대로 통합되면서 한반도의 모든 게릴라 작전을 지원했습니다.

1952년 초에 이르러서는 레오파드, 울프팩, 커클랜드의 3개 지대를 운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외의 특수작전을 군이 아닌 CIA가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CIA는 주한 합동 고문단(JointAdvisory Commission, Korea; JACK)이라는 명칭 아래 한반도에서 적 후방의 파괴공작이나 조종사 구출 같은 임무를 띠고 활동했습니다. 부산의 영도유격대도 실은 이런 CIA 산하의 조직이었습니다.

 

한반도의 특수작전을 관장하기 위해 CCRAK(Combined Command Reconnaissance Activities, Korea; 한국정보활동 통합사령부) 같은 조직이 생겨 미 극동군사령관(즉 UN군 사령관)의 휘하 조직으로 활동했지만, 군이 직접 통제하는 특수부대의 필요성은 여전히 컸습니다.

그리하여 심리전 사무국이 주축이 되어 특수부대가 구상되었습니다. 미 육군의 정예 경보 병부 대인 레인저의 창설 10주년인 1952년 6월 19일, 미 육군 최초의 특수부대인 제10 특전단(SpecialForces Group)이 창설된 것입니다.



제2차 대전의 특전용사였던 아론 뱅크(Aaron Bank) 대령이 지휘하는 제10 특전단이 배치될 장소는 유럽이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인해 전력이 부족해진 유럽전선에 만약 소련군이 침공한다면 제2차 대전 때 같은 유럽의 레지스탕스 작전을 특전단이 이끌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경험은 특전단의 새 교리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저항군을 이끌어 독립을 되찾는다는 레지스탕스의 정신은 부대의 라틴어 모토인 ‘De oppresso liber(압제로부터의 해방)’에서도 나타났습니다.

한국전 이후 국제 정세가 복잡해지면서 특전단의 규모는 점차 늘어났습니다. 우선 1953년 제10특전단이 독일 바트 퇼츠(BadTölz)에 배치되자 나머지 절반의 병력은 포트 브래그(Fort Bragg)에 남아 제77특전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56년 제77특전단에서 다시 몇 개의 분견대들이 극동지역으로 파병되면서 제1특전단이 일본에서 창설되었습니다.

 

한편 베트남 독립전쟁으로 북베트남이 생겨나자, 미국은 1959년부터 남베트남군에 특전단 소속의 군사고문단을 은밀히 파견했습니다.

 

그린베레가 특수부대의 상징이 된 이유?


미 육군 특수부대는 ‘그린베레’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원래 녹색의 베레모는 제2차 대전 당시 영국군 특수부대인 코만도의 상징이었습니다. 코만도가 처음 생겼을 때 다양한 부대 출신자들이 스코틀랜드식 빵모자(Tam o' Shanter)에서부터 포리지 캡, 베레모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양한 모자들을 쓰고 모여들었습니다.



결국 새로운 부대를 상징할 모자를 찾아야만 했는데, 타 부대가 상징으로 선점하지 않은 모자를 찾다 보니 녹색의 베레모가 선정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코만도와 연관된 수많은 서구의 부대들이 녹색 베레모를 썼습니다. 코만도의 후신인 영국 해병 코만도는 물론이고 호주의 육군 코만도, 프랑스의 코몽도 마린, 네덜란드의 KCT 등이 착용하고 있습니다.

미 육군 특수부대가 그린베레를 착용하게 된 계기도 실은 유럽과 관계가 있습니다. 독일에 배치된 제10 특전단에는 제2차 대전 참전용사들이 많았는데, 훈련 시에 철모 대신 다양한 베레모를 쓰고 다녔고 일반 보병이 아닌 특수 군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녹색의 베레모가 부대의 비공식 모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보병 지휘관들은 이런 ‘사제’ 복장을 엄청 싫어하여, 베레모는 유럽스럽고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착용 금지령까지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풀어준 것은 엉뚱하게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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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특수부대야말로 미래의 전쟁에 대한 해답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1961년 10월 12일 포트 브래그를 방문하기 전에 특수전단이 반드시 녹색 베레모를 착용하도록 하라고 특수전 교육단장인 야보로(WilliamP. Yarborough) 준장에게 부탁했습니다.

이날 연설에서 케네디는 공산혁명과의 싸움에서 특수부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린베레는 다가올 도전에서 커다란 활약을 할 것입니다”라고 연설했습니다. 이렇게 케네디 대통령의 축복 속에 특전단은 녹색 베레모 착용을 허락받은 것은 물론이고 그린 베레라는 명성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기본 작전 단위인 ‘A팀’

그린베레의 기본 작전 단위는ODA(Operational Detachment Alpha), 즉 A작전 분견대로, ‘A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80년대 미국의 인기 드라마 ‘A특공대(원제목 A-Team)’도 바로 그 A팀을 가리킨다. A팀은 통상 12명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됩니다.

● 18 알파(A): 대위, 지휘(사관) 주특기
● 180 알파(A): 준위, 지휘(준사관) 주특기
● 18줄로(Z): 상사, 지휘(부사관) 주특기
● 18 브라보(B): 중사, 화기 주특기
● 18브라보(B): 하사, 화기 주특기
● 18 찰리(C): 중사, 폭파 주특기
● 18찰리(C): 하사, 폭파 주특기
● 18 델타(D): 중사, 의무 주특기
● 18델타(D): 하사, 의무 주특기
● 18 에코(E): 중사, 통신 주특기
● 18에코(E): 하사, 통신 주특기
● 18 폭스트롯(F): 중사, 작전·정보 주특기



우리나라 특전사의 특전 중대도 A팀과 편성이 유사합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중대장이 대위, 부중대장이 소위·중위인 반면, 그린베레 A팀은 부중대장이 준위라는 점이 다릅니다. 특히 A팀에서 180 알파와 18 줄루는 마치 팀 내의 아빠와 엄마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A팀의 핵심은 부사관이다. 진급이 우선이어서 보직이동이 잦은 장교보다, 대개 하나의 보직에 붙박이로 붙어있는 부사관들이 더욱 많은 경험과 전문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1개의 팀 가운데 작전·정보, 화기, 폭파, 의무, 통신의 5대 주특기가 모두 존재합니다.

 

특히 이러한 주특기들이 도제식으로 전수될 수 있도록, 한국식으로 치면 사수-부사수처럼 선임자와 후임자를 같이 배치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팀을 2개로 나누어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A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 능력이다. 그린베레는 해외에서 현지 세력을 포섭해서 작전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2개 국어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만 하며 1개는 완전히 능통해야 합니다. 주특기마다 차이가 있으나, 그린베레가 되기 위해서는 100주의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무려 2년에 가까운 양성기간입니다.

한편 ODA 말고 ODB ODC도 있습니다. ODB, 즉 B분견대는 지역대 본부를, C분견대는 대대본부를 의미합니다. 그린베레는 보통 6개의 A팀이 모여 1개의 지역대(B팀, 소령 지휘)를 형성하며, 3개의 지역대가 모여 1개의 대대(C팀, 중령 지휘)가 된다. 보통 특전대대 4개가 모여 1개의 특전단이 구성되므로, 특전단에는 70여 개의 A팀이 있게 되는 셈입니다.

 

한편 모든 특전단에는 찰리팀으로도 불리는 CIF(Commander’s In-extremis Force, 사령관 직할대) 중대가 하나씩 있어서 타격 작전이나 대테러작전만을 전문적으로 수행합니다.

 

베트남전에서의 눈부신 활약

 

케네디 대통령 시절, 그린베레는 제3·5·6·8 특전단이 창설되면서 4개의 부대가 증편됐습니다. 제77특전단은 제7특전단으로 재명명되었습니다. 이렇게 몸집을 불린 그린베레가 본격적으로 투입된 전장은 베트남이었습니다. 원래 그린베레는 게릴라들을 모집하여 북베트남에서 싸우려 했지만 우수하고 신념에 찬 게릴라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남베트남에서 활약하는 공산 게릴라들이 훨씬 더 우수했습니다. 결국 게릴라전보다는 게릴라를 막는 대분란(Counterinsurgency)이 그린베레의 임무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현지 소수민족을 모아서 전략 방어촌을 형성하고 민간 비정규 방어대(CIDG)를 조직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략 방어촌과CIDG 간에는 연계망을 만들어놓고 한 마을이 공격당하면 인근에서 지원하는 시스템도 구축했다. 또한 기동타격대(Mobile Strike Force, 마이크 포스)를 만들어 적에 대한 타격도 실시했습니다.

일부 대원들은 MAC-V/SOG(베트남 군사지원사령부 특수작전단)에 배속되어 CIA와 함께 공산혁명 핵심세력들을 체포·사살하는 HVT작전(High Value Target, 고가치 표적 작전, 즉 참수 작전)을 수행하는 피닉스 프로젝트에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에서의 작전은 제5특전단이 중심이 되어 실시되었으며, 최고 명예훈장 수여자가 16명이나 배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1970년 정도에 그린베레는 상당수 베트남의 전장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그린베레의 베트남전 활약 가운데 가장 높게 평가받은 것은 손타이 포로 구출작전이었습니다.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적 후방으로 침투해 들어간 이 과감한 계획은 1970년 11월 20일 시작되었습니다. 구출작전 자체의 실행은 빈틈이 없었고 수용소까지 도달해 적을 제압했지만 막상 포로들이 없어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군을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과감하게 뛰어든, 그린베레의 용맹성과 존재 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로 남았습니다.

 

 

베트남전 이후 침체기를 맞은 그린베레

베트남전이 끝나면서 그린베레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무려 14년간이나 베트남에서 싸웠지만 현지인을 활용하는 비정규 작전이나 거듭되는 CIA와의 비밀작전을 군 수뇌부는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제6·8 특전단이 70년대 초에 해체되었고, 많은 대원들이 군을 떠났습니다.

인권을 강조하는 카터 행정부의 눈에 그린베레 같은 조직이 좋게 보일 리 없었고 그린베레는 살아남기 위해 매우 낮게 엎드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람보(First blood, 1982) 같은 영화가 나온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다시 전쟁에 뛰어들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한 그린베레는 심지어 1983년의 그레나다 침공에도 참여 범위를 최소화했습니다.

 

그러나 그린베레는 남미와 중동 등에서 소규모 군사활동을 계속해왔다. 대원들은 군사 자문관으로서 공산 게릴라를 막기 위해 정부군을 양성하거나, 반대로 공산정권에 대항하는 게릴라를 비밀리에 양성했습니다.

 



걸프전에서 화려한 부활을 하다.

그린베레가 다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파나마 침공에서부터였습니다. A팀들은 파나마의 라디오 송신국을 파괴했고, 교량을 장악해 적의 증원을 막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스페인어에 능통한 그린베레 대원들은 파나마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달래고 남은 저항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그린베레가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바로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에서부터였습니다. 그린베레의 임무는 크게 2가지로, 첫 번째가 전략 정찰 임무였습니다. 이들은 적진 깊숙이 침투해 적의 동향을 감시했고, 우선순위 표적이던 스커드 미사일을 탐지해 파괴하도록 도왔습니다. 두 번째로, 다국적군에 참여한 아랍 국가들을 준비시키는 것도 그린베레의 몫이었습니다. 그린베레는 군사고문관으로서 다국적군 109개 대대를 전쟁 전에 훈련시켰고, 전투에서는 이들을 직접 이끌면서 승리를 이뤄냈습니다. 그야말로 화려한 재등장이었습니다.

 

이후 그린베레는 보스니아 내전, 아이티 내전 등에 투입되어 1990년대에는 주로 안정화 작전이나 자국민 피난 작전 등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어 9.11 테러가 터지자 그린베레는 제일 먼저 전투에 나섰습니다. 미군 중부사령부조차 빈 라덴이 있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작전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중동을 담당한 제5특전단은 테러 발생 직후에 이미 아프간 전쟁계획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하여 테러 발생 한 달 만인 2001년 10월 19일, 2개의 A팀이 아프간에 침투하면서 시작된 탈레반 정권 전복작전은 11월 12일 A팀이 이끄는 반군들이 수도 카불을 점령함으로써 정점을 찍었습니다. 반군과 함께 말을 타면서 스텔스 폭격기의 공격을 유도하는 그린베레의 모습은 새로운 전투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2003년 이라크에서는 더욱 큰 임무를 맡았습니다. 정규군이 투입되지 않은 서부 사막지역을 제5특전단이 담당하면서 스커드 발사를 막고 적군을 섬멸했습니다. 소위 킬체인(Kill Chain) 작전을 차량화한 특수부대가 수행한 것입니다. 또한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과 연합해 이라크군을 압박하는 것도 그린베레의 몫이었습니다.

 

제10 특전단은 페시메르가(Peshmerga) 반군과 합류해 이라크군 13개 사단 10만여 명의 병력과 싸웠습니다. 특히 이렇게 소수의 인원들이 전투를 수행하려면 항공력의 지원은 필수입니다. 소수정예의 특수부대와 항공전력의 결합으로 적의 전선을 뒤흔드는 전략적인 작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린베레가 입증한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활약 중인 7개의 특전단

미군은 현재 모두 7개(현역 5개, 예비역 2개)의 특전단을 운용하고 있다. 제1특전단은 태평양 및 동남아시아 지역, 제3특전단은 아프리카 지역, 제5특전단은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 제7특전단은 중남미 지역, 제10특전단은 유럽지역을 담당하는 식입니다. 각 특전단마다 담당 지역이 있어 해당 국가의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 A팀 내에 최소한 1명 이상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현재 그린베레는 아프가니스탄 전선은 물론이고 이라크-시리아 전선에도 투입되어 알카에다나 다에시(ISIS)와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필리핀에서도 이슬람 무장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지원작전에 나섰습니다. 물론 그린베레는 제1특전단이 한반도를 관할하고 있어 대한민국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매년 한국군과 정기적인 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북한의 핵 위기 고조 이후에 미군 특수전 부대들이 한반도에 순환 배치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1특전단의 전개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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