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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SAS(Special Air Service)는 1941년 창설된 영국 육군 특수부대이며, 대게릴라전, 직접 타격, 대테러작전, 인질구출, 은밀한 정찰을 포함한 다양한 작전을 수행합니다. 대테러부대의 아버지, 최초 위의 현대전 대테러부대로 불리는 부대이며 과거부터 쌓아 온 여러 실적 데이터와 작전 경험을 토대로 현대까지 특수부대의 최고봉 중 하나로 언급되며 그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명불허전 세계 최고의 대테러부대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2000년대 이후로는 USSOCOM 이 넘사벽으로 어마어마한 기량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JSOC  산하의 티어 1 부대에게 명성이나 실력에 있어서 밀려버린 감이 크며 갈수록 그 격차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영국 해군 특수부대인 SBS( Special Boat service)와 함께 영국 특수부대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 SAS는 영국 특수전사령부 소속 제22공수특전(SAS)연대와 영국 육군 제1정보 감시정찰(ISR) 여단 소속 제21, 23 공수특전(SAS) 연대(상근예비역)로 구성됩니다. SAS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창설되어 다양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해체되었으나, 평화시에도 특수부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47년 향토예비군 부대에 파트타임 상근예비역 부대인 제21공수특전(SAS) 연대가 창설되었고, 추가로 현역 특수부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52년 제22공수특전(SAS) 연대가 창설되었습니다. 1980년 주영국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 님로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습니다. SAS는 세계 각국의 현대 대테러 특수부대에 큰 영향을 끼친 군 대테러 분야의 시조입니다.

영 국영 방 국가의 일원인 호주에는 SASR , 뉴질랜드에는 NAZSAS 가 있으며, 이웃 프랑스는 전후 SAS를 모토 삼아 제11 충격 낙하산 부대 (11E CHOC)를 창설했으며, 현재는 제1 해양 보병 낙하산 연대 가 존재하고 이들의 기량이나 활약상은 원조 못지않습니다. 


https://youtu.be/oefEQ5 TNz0 Q


특징

대테러 전술

이들은 1960년대 이후로 테러리스트와 대테러전에 관한 개념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인질구출이나 테러 진압작전의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북 아일랜드에서 IRA와의 시가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북아일랜드에서 실전 경험 등을 통해 대테러전에서 최고급의 기량을 쌓았으며, 외국 대테러부대와 잦은 교류를 통해 대테러전 노하우를 공유,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977년에 있었던 GSG-9의 "마법의 불꽃" 작전 당시 SAS 고문관들이 섬광탄을 제공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1980년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님로드 작전) 당시, 인질 1명이 사망하자 과감하게 진입해서 테러범들을 전원 제압하고 나머지 인원을 모두 성공적으로 구출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때 SAS가 입었던 민무늬 검은색 전투복과 방독면 MP-5 기관단총 같은 장비들은 군사무기 마니아들에게는 SAS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였고 그들이 보여준 진압작전 노하우와 장비들은 다른 나라 대테러부대들도 널리 받아들이는 일종의 유행이 되었습니다.


영국 지배 하의 홍콩에서 창설된 경찰특공대 비호대(Special Duties Unit)도 영국에서 초빙된 SAS 교관의 훈련을 통해 탄생했습니다.


 

 


심리전 전술

SAS는 또한 심리학 전문가를 반드시 작전에 투입하며, 이는 민사작전과 적지에서 게릴라 편성 및 우호적인 세력 형성에 크나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이라크에서도 자유 의용군 편성에 큰 역할을 했으며, 알려지지 않은 전쟁에서도 많이 활약했다고 하고 특히 오만 내전 당시 심리학 전문가가 대거 투입되어 공산군에 들어간 민간인들을 설득하여 정부군에 편에 서게 하기도 했습니다. 심리학 전술이 실패한다면 심리학 전문가들은 짐만 된다는 일부 밀덕들의 주장이 존재하는데... 과연 그럴까? 아래 예시를 보자면

포틀랜드 전쟁에서도 심리학 전문가가 투입되어 아르헨티나 군 후방에서 혼란을 주려고 했지만 타고 가던 헬리콥터에 역풍이 불었고 움직이던 SAS 대원 전부가 20kg에 가까운 군장+박격포 부속품+박격포탄+중기관총+중기관총탄+기타 등등(...)을 지고 있어서 작전이 8시간이나 지연되는 바람에 취소되었습니다. 그 심리학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던 SAS 지역대는 아르헨티나 공군 전진기지 습격작전을 위해 대기하던 다른 SAS 지역대와 합류하여 함께 아르헨티나군의 폭격기 파괴 임무에 투입되었고,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현대화된다고 해도 군대는 결국 인간으로 이뤄진 조직이고, 병사들을 모두 기계로 바꾸지 않는 한 심리학적인 요인으로 전투에 패배하는 경우 역시 잔존할 것이기 때문에 심리학자가 단순히 낭비가 아닌, 훌륭한 전략적 요소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군기

한편 전시가 아닌 평상시의 훈련 강도와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라서 반대급부로 풀어줄 때는 군기가 거의 개판 5분 전으로 흐트러진다고 합니다. 물론 전문가들이라 어느 정도 선은 지키며, 쉴 때는 확 쉬고 할 때는 확 하는 식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레벨이 다른 군인들이 보기에는 거의 똘끼에 가깝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한 예로, 1962년 그린베레 교환 장교로 SAS에서 1년간 훈련을 받았던 미군 장교 찰스 베크 위스는 난장판이 된 내무실 바닥에 앉아서 휴대용 가스난로로 차를 끓이던 한 SAS 대원에게 주변 정리정돈 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가 "어쩌라고"라는 대답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력과 독특한 훈련 군기 등을 접하고는 훗날 1977년 델타 포스가 창설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미군 특수부대원들의 군기도 어느 정도는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베크 위스의 사례도 당사자들에게는 별일 아닐 수 있는 것이, SAS는 대원들 간에 계급이 없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SAS 대원이 되는 순간부터 계급을 반납하고 SAS 대원(Trooper)으로만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무 중 자신의 본래 계급은 그대로 적용되고 실제 진급도 가능하지만 이는 연대 내부에서는 적용되지 않으며, 연대에서 전출된 다음에야 자신의 정상적인 계급장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단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는 부사관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장교들은 아예 차출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계급 반납이 없습니다. 대원의 경우 의무적인 연대 내 복무 기한을 마치고 짤 없이 한번 방출된 이후로는 추후 본인 의사에 따라 다시 SAS에 부사관으로 자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무작정 군기를 들여 쉬는 중에도 군인들에게 상시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것보다는 체계적인 훈련과 그에 비례한 정신적 보상이 군사의 숙련도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훈련시간 외에 군기를 집어던진 똘끼로 가득 찬 행동을 할지언정 실전으로 돌입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흉기로 탈바꿈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풍문일 뿐인 데다가, 저 일화 자체도 1970년대의 증언 담에 한국군의 내무부 조리에 학을 뗀 밀덕들의 선망이 뒤섞인 카더라 수준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영미권 군대 분위기 자체도 그렇게나 경직된 편이 아니고 사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사생활이 아닌 업무체계는 제 아무리 특수부대라 하더라도 철저히 군의 결정사항을 따릅니다.

다만 문화 면에서 SAS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델타 포스가 복장이나 용모, 내무생활 면에서 상당한 자유도가 보장되는 것으로 보아 SAS 역시 평균적인 영국군보다는 자유도가 보장될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겠습니다. 델타 포스가 정리, 지각 등 기본적인 예의 차원에서 데브그루 보다 까다로운 편임을 감안하면 SAS 역시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선 엄격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

제2차 세계대전

SAS는 중동 지역의 영국 육군 코만도 부대가 연이은 전투로 궤멸 직전에 이르러 1941년 7월 중동 지역 5개 코만도 부대 잔존 병력을 1개 코만도 부대(중동 코만도 부대)로 축소 개편하는 과정에서 제8코만도 소속 데이비드 스털링 대위의 제안으로 창설되었습니다.

 

데이비드 스털링은 중동지역에도 유럽 지역처럼 낙하산으로 침투하는 코만도 공수부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해서, 새로 창설된 중동 코만도의 6개 소대 중 제1, 2소대가 낙하산 침투부대로 편성되었습니다. 중동 코만도 제1, 2소대의 대외 명칭은 공수특전(Special Air Service) L 파견대였는데, SAS라는 이름은 영국에 주둔하던 낙하산 침투 코만도 부대인 제11 SAS의 명칭을 따온 것이었습니다.



1941년 11월 16일 크루세이더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실시된 데이비드 스털링의 첫 SAS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경험이 없었던 수송기는 엉뚱한 곳에 부대원들을 강하시켰고, 장비와 병력 대부분은 흩어져서 다시는 집결하지 못했습니다. 작전에 참가한 62명의 대원 중 22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18명이 부상을 당해, 공격 목표는 구경도 못하고 중간 집결지에서 철수를 해야 했습니다. 이 작전에서 계획대로 실시된 것은 복귀를 위해 대기하던 영국 제8군 직할 장거리 차량 정찰부대인 장거리 사막단(Long Range Desert Group, LRDG)의 퇴출작전뿐이었는데, 이 트럭을 타고 복귀하던 중 스털링은 사막 지형에서 공수작전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대신 자동차 침투작전을 새롭게 구상했습니다.

그가 새로 구상한 새로운 작전은 LRDG의 전문가들이 자동차로 SAS를 목표지점까지 안내해 주면, SAS가 적을 기습 공격하고, 다시 LRDG를 따라 부대로 돌아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1942.6월 마침내 SAS의 두 번째 작전이자 첫 자동차 기습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LRDG의 안내로 리비아에 있는 3개 비행장을 기습 공격한 SAS는 다수의 항공기를 파괴하고,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LRDG의 안내를 받으며 무사히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SAS 작전 중 최고의 성공을 거둔 작전은 1942.7.26일 실시된 시디 하니시(Sidi Haneish) 비행장 기습작전으로 SAS는 LRDG의 도움으로 무더운 낮에는 적의 항공 정찰을 피하고 피로를 막기 위해 위장한 채 잠을 자고, 야간을 이용해 이동하는 식으로 사막을 멀리 돌아 적진 깊숙이 침투한 다음 폭격기와 수송기 37대를 파괴한 작전이었습니다.

1942년 9월 중대 규모의 중동 코만도가 해체되고, 대대 규모의 제1공수특전(SAS) 연대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제1 SAS 연대는 영국군 4개 중대(Sqn), 자유 프랑스군  1개 중대, 그리스 군 1개 중대, Folboat(SBS) 1개 분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이후 SAS는 차량을 이용한 히트 앤드 런 작전으로 1943년 1월 스털링이 £[튀니지]]에서 독일군에 포로로 잡히기 전까지 250여 대의 추축군 항공기를 파괴했습니다. 독일군은 공중전에서 잃는 전투기보다 SAS에 의해 파괴되는 전투기가 더 많았던 날이 있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스털링이 포로로 잡힌 후에는 제1 SAS연대는 특별 기습 중대(Special Raiding Squadron, SRS)와 SBS(Special Boat Section)로 분리되고, 제11코만도 출신으로 SAS 창설 요원이었던 패디 메인 육군 소령이 SRS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이 끝나고 SRS는 시실리와 이탈리아 전역에 참가했습니다.

한편, 1941년 창설되어 국가정보기관인 특수작전 집행부(Special Operations Executive, SOE)의 작전부대로 활동했던 제62코만도(또는 Small Scale Raiding Force, SSRF)가 1943년 해체되면서, 제2공수특전(SAS) 연대(연대장은 데이비드 스털링의 형인 빌 스털링 육군 중령)로 개편되었습니다.

1944년 1월 SRS는 다시 원래대로 제1공수특전(SAS) 연대로 확대 개편되고, SRS 지휘관, 패디 메인 육군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하면서 제1공수특전(SAS) 연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공수특전(SAS) 여단이 창설되어 예하에 영국 육군 제1, 2 SAS연대와 프랑스 제3, 4 SAS연대, 벨기에 제5 SAS연대를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SAS는 이때부터 자동차 기습 대신 독일 점령 치하의 프랑스에 대한 낙하산 기습 침투 작전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1945년 10월 8일 군축의 필요성에 의해 SAS는 해체되었으나, 다음 해인 1946년 장기간 장거리 침투부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47년 1월 1일 향토예비군(Territorial Army)에 제21공수특전(SAS) 연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이 연대 번호는 해체된 SAS 연대를 기념하기 위해 제1, 2 SAS연대의 숫자 1과 2를 가져와 새로운 첫 번째 공수특전(SAS) 연대라는 의미에서 1과 2의 순서를 바꿔 21 연대라는 번호를 붙인 것입니다.

 

말레이시아 정찰대(SAS)

1950년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제21공수특전(SAS) 연대에서 1개 중대가 3개월 간의 6.25 전쟁 파병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작전 소요가 없어서 대신 말레이시아 비상사태(Malayan Emergency, 1948~1960)에 파병을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말레이시아에는 1945년 3월~10월까지 영국 공수특전(SAS) 여단장을 지낸 마이크 칼버트가 말레이시아 정찰대(SAS)를 창설 중이었는데, 그는 극동 주둔 영국군에서 SAS와 친디트 부대 출신 지원자를 받아 A중대를 창설하고, 영국 본토 주둔 제21 SAS 연대에서 파병된 SAS 중대를 말레이시안 스카우트 B중대로 편성했습니다. C중대는 영국령 로디지아에서 영국인 지원자를 받아 창설했습니다. 로디지아 출신 지원자들이 3년 계약이 끝나 귀국한 다음에는 뉴질랜드에서 새로 지원자를 뽑았습니다. 1956년에는 D중대와 육군 낙하산 연대에서 파병된 낙하산 중대를 포함하여 5개 중대로 구성되었습니다.

현역 공수특전(SAS) 부대의 필요성이 인식되어, 1952년 현역 제22공수특전(SAS) 연대가 영국에서 창설되었습니다. 1959년에는 MI9의 뒤를 잇는 도피 및 탈출 전문 부대인 상근예비역 수색대(the Reserve Reconnaissance Unit)를 제23공수특전(SAS) 연대로 개칭하여 세 번째 공수특전(SAS) 연대를 창설했습니다.

친공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정권이 반외세를 외치며 말레이시아 의 공산당을 지원하며 벌어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전쟁에서도 공산 게릴라로 가장한 인도네시아 정규군과 싸웠습니다. 최종적으로 정부를 지키고 민심을 돌리는 데 성공하며 이는 성공적인 대(對) 게릴라전의 대명사로 여전히 거론되고 있습니다.

훗날 월남전에서 미군이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소모하고도 결국 베트남의 민심을 얻지 못해 패배한 것에 비해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SAS는 이 작전에서 FN FAL과 같은 고위력 전투 소총이 특수임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 후에 영국군 최초로 M16을 도입했습니다. 이후 M16은 영국군 내에서 아말 라이트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SAS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SAS의 주력 화기는 M4 카빈 계열인 L119A 2입니다.

 

현대의 SAS

https://youtu.be/QjJ3 HxWNjUc

1980년 님로드 작전 당시 현장 영상.

1982년 포틀랜드 전쟁 당시에도 여러 작전에서 맹활약했지만, 아르헨티나군의  기관포 진지 앞으로 쭉 펼쳐진 평야지대를 거슬러 올라가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영하의 날씨에 고산지대를 행군하고 적의 배후를 습격하는 임무에서 단 한 명의 동사자나 비전투 손실도 입지 않아 이후 다른 나라 군대의 동계작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상 최초로 고어텍스 재질의 야외 상의와 전투화가 지급되었다고 하며, 꾸준한 휴식과 따뜻한 차로 체력을 유지해 성공적으로 전투력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1990년의 걸프전에서도 역시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  발사대 추적이나 전략 목표 정찰, 연락선 차단 등의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때, 브라보 투 제로라는 암호명을 띄고 스커드 미사일 감시를 하러 간 일단의 SAS 부대가 어린 목동 소년에게 우연히 발견되어 위치가 발각되자 헬리콥터로 이탈하려 했지만, 헬리콥터가 오지 않고 적의 추격이 계속되자 도보로 이라크를 횡단하여 거의 시리아 국경 앞에서 1명은 탈출에 성공하고 3명은 전사, 4명은 붙잡혀 포로가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때 포로가 되었던 한 대원이 그들의 희생과 작전 전체가 극비로 취급되는 것에 분개, 전역 후  브라보 두 제로라는 책을 써내며 이들의 활약상과 놀라운 희생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브라보 투 제로 작전팀의 경우 8명의 인원으로 장갑차를 가진 수백의 정규군과 민병대의 추격을 꾸준히 물리치면서 너무 먼 사우디아라비아 쪽 국경보다는 가까운 시리아 쪽 국경을 택해 시리아 국경에서 몇 km 남짓한 지점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만 무사히 시리아로 도망친 사람은 1명뿐이었습니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전투와 추위로 3명이 전사하고, 포로가 된 이후에도 몇 개월에 걸쳐 무수한 고문과 심문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정체를 숨겼습니다. 이라크군이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나고 포로교환을 한 이후였다고 합니다. 대원들의 기량은 그야말로 일당백이지만 특수전 장비나 헬리콥터 같은 지원 요소가 부족했던 한계 때문에 대원들이 불가피한 희생을 치렀다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당시 작전팀 대원들 사이에서도 엇갈린 주장이 나오는 등 논란이 있습니다. 아래 출신 인물 항목 참조하세요.

시에라리온에서는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되었다가 반정부군에 인질로 잡힌 영국군 장병들을 공수부대와 공군과의 협동작전으로 성공적으로 구출하기도 하였습니다(바라스 작전).

2013년 케냐 나이로비 쇼핑몰 인질극(Westgate Shopping MallAttack) 당시 전직 영국 육군 특수부대 SAS 장교 출신으로 나이로비 민간 보안회사에 근무 중이던 도미닉 트롤런(Dominic Troulan) 퇴역 육군 소령이 테러범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인질 100여 명을 구출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동료의 부인과 자녀를 구출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12번이나 쇼핑몰을 왕복하며 인질들을 구출하여 2017년 영국 정부로부터 2등 훈장인 조지 크로스(George Cross, GC) 훈장을 수상했습니다. 민간인에게 조지 크로스 훈장이 수여된 것은 2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트롤런 소령은 1979년 영국 해병대에 병으로 입대하여, 해병대 코만도 부대에서 하사로 전역한 후 영국 육군 부사관으로 재입대했고, 육군 낙하산 연대를 거쳐 육군 특수부대 SAS 장교로 임관, 2009년 소령으로 전역했으며, 포틀랜드 전쟁과 북아일랜드  분쟁,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 참전용사입니다.





기량이 매우 높은 특수부대로 각 대원의 신원 자체가 비밀로 다뤄질 정도입니다. 그만큼 영국의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SAS에 대해서 "그들은 매우 위험한 존재이므로 발견 즉시 사살해야 한합니다."라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SAS는 적국인 독일 음악 릴리 마들렌을 상부의 반대를 무시하고 행진곡으로 채택하였는데 그걸 21세기에 들어서까지도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연합군 내에서도 대 유행곡이었습니다.

2014년 영국군 SAS가 북서부 이라크에서 ISIS에 대한 인간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미리 교신 감청과 무인기 운용을 병행해서 표적들을 확인한 뒤 치누크 수송헬기로 ATV팀을 투입하고 AWM , 바렛 M82 저격소총과 GPMG 등을 사용해 야간에 목표들을 습격한 뒤 고속으로 도망쳐서 빠져나오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쓰인 전통적인 방식의 개량판입니다.

작전이 시작된 지난 4주간의 효과는 꽤 뛰어나서 200여 명 이상의 타깃을 사살시켰는데, 그중에는 장교급 인물이 무려 50% 이상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7년 5월에는 이라크 모술에서 SAS 스나이퍼가 SVD로 영국군을 저격하던 IS 저격수를 2400미터 밖에서 역저 격해 사살했다고 합니다. 저격에 사용한 총 은샤이 택 M20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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