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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인 1950년 11월 말~ 12월 초까지 함경남도 장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진호전투 당시 미 해병대 장병이미지

1950명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함경도 장진 군 지역에서 미국 제1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중국군 제9병단에 속한 3개 군단 병력과 벌인 전투입니다. 영어로 장진의 일본어 독음인 초신을 가져와 초신 호전 투나 초신호 작전이라고 합니다. 김일성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까지 진격해  갔던 유엔군이 12만 명에 이르는 중국군에 포위되어 격전을 벌이다가 흥남으로 철수한 사건입니다. 

 

1. 장진호 전투 배경과 원인 알아보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된 뒤 패퇴를 거듭하던 한국군과 미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면적인 반격으로 전환했습니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으며,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김일성 정권은 산악지대인 평안북도 강계로 달하나 그곳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중국은 10월 25일 중국 인민지원군을 창설해 북한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했으며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뒤 동부전선을 맡은 미 제10군단의 군단장 알모드 중장은 부대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시켰습니다. 국군 제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진격해서 10월 10일 함경남도 원산을 점령한 뒤 두만강 유역까지 계속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10월 29일 이원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부전호와 압록강 유역의 혜산진 방면으로 진격했고, 10월 27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은 개마고원의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11월에 들어서면서 중국군과의 전투가 본격화되면서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했던 유엔군은 청천강 유역으로 물러났습니다. 동부전선에서도 11월 8일 무렵부터는 중국군이 전투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몬드 중장은 휘하의 부대들에게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더욱 신속히 전격 할 것으로 명령했고, 11월 21일 미제 7사단 제17연대는 압록강 유역의 혜산진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장진호전투 관련 동영상

2. 장진호 전투 발발과 전개 과정 알아보기. 

미 제1해병사단은 함흥에서 장진 군을 거쳐 강계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진격했는데, 11월 11일에는 황초령(1,206m)을 지나 장진면 고토리에 이르렀고, 11월 15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 우리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11월 19일에는 장진호 서북쪽에 있는 서한면 유담리까지 나아갔습니다. 

 

낭림산맥 동쪽에 있는 장진 군은 희색복(2,185m) 아득령(1,479m), 유린산(1,925m) 문암산(1,852m) 등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해발고도 1천 미터 이상의 고원지대입니다. 이 지역은 10월이 되면 벌써 눈이 내리고 겨울 날씨가 시작되는데, 겨울철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져 중강진과 할게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꼽힙니다. 미 제1해병사단의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겨울철 추위가 닥쳐오자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하갈 우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곳에 활주로를 만드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7 연대와 제5연대를 유담리 일대로 전진 배치하고, 제1연대는 하갈우리와 고토리를 잇는 후방의 보급로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장진호전투 관련 지도

장진호 우측의 동하면 신흥리와 후동리 일대에는 아몬드 중장의 명력에 따라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병력을 중심으로 편성된 페이스 특수 임부 대가  미 제1해병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었습니다. 

 

그러자 중국군은 제9병단에 속한 3개 군단 병력(12만 명)을 장진호 일대로 집중시켰습니다. 내륙으로 깊숙이 진출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을 제압하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진출한 국군과 미군의 퇴로를 차단해서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1월 11일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건너온 중국군은 산지를 따라 은밀히 이동해 11월 20일 무렵에는 유담리 인근에 집결했습니다. 

 

미 제1해병사단은 낭림산맥을 넘어가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2사단, 한국군 제2군단 등과 청천강 상류 지역에서 연합작전을 벌이기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1월 24일 덕천, 영원 지역을 담당하던 한국군 제2군단이 중국군에 크게 패 하면서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중국군은 11월 27일 밤부터 인해전술로 장진호 일대의 미군을 에워싸고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11월 27일 밤부터 다음날까지 계속된 중국군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하갈우리, 유담리, 고토리를 있는 연결도로가 차단되면서 미군은 고립되었습니다. 특히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는 부대장인 매클레인 대령마저 전사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아몬드 군단장은 미 제1해병사단의 사단장인 스미스 소장이 장진호 일대에 배치된 유엔군 병력에 대해 통합 지휘권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유담리에 있는 병력의 일부를 하갈 우리로 이동시켜 페이스 특수임무대를 지원하고 하갈우리와 고토리 있는 도로를 회복하라는 명령를 내렸습니다. 그란 유담리에 있는 해병 제5연대와 제7연대도 중국군에 포위되어 병력을 이동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스미스 소장은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에게 하갈 우리로 집 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1월 29일 영국 해병대의 41 특공대 소속인 드라이스데일 중령이 지휘하는 드리스데일 특수임무부대가 29대의 전차와 141대의 차량을 이끌고 고토리에서 하갈 우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일부 병력만 하갈 우리에 도달하였소 있었습니다. 

 

이처럼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11월 30일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담리에 있던 제7연대와 제5연대는 12월 1일부터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미공군이 전폭기를 동원해서 네이팜탄을 퍼부으며 이들의 철수를 지원했으나,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제7연대와 제5연대는 12월 4일이 되어서야 하갈 우리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장진호 우측에 주둔하던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도 12월 1일 하갈 우리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의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공군의 오폭으로 네이팜탄이 행렬 한가운데서 터지면서 철수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천여 명이 전사했고, 3천여 명의 부대원 가운데 385명만이 부상을 입지 않은 상태로 하갈 우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3. 장진호 전투 결과와 영향 알아보기. 

하갈 우리에 집 격한 미 제1해병사단은 완성된 활 수로를 이용해 12월 2일부터 4천여 명에 이르는 부상자들을 일본으로 후송했습니다. 부상자들 가운데 3분의 1 가량은 동상 환자였습니다. 그리고 12월 6일 수 솔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은 뒤 1쳔여대의 하챨을 이용해 12월 7일 고토리로 철수했으며, 아몬드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흥남으로 이동했습니다. 

 

12월 11일 흥남에 도착한 미 제1해병사단은 흥남철수작전에 따라 제10군단 휘하의 다른 부대들과 함께 배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습니다. 

 

11월 27일부터 시작된 장진호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유엔군은 1만 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망자: 1,029명, 실종자: 4,894명, 부상자 4,582명, 동상 등 비전투 요인에 의한 사상자 7,338명) 이러한 피해는 군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어서 당시 언론들에서는 장진호 전투를 진주만 피습 이후에 미군이 겪은 최악의 패전으로 평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1996년부터 유해발굴단을 북한에 파견해서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을 벌였습니다. 

 

한편 중국군도 장진호 전투에서 4만 8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숫자는 19,202명에 이르렀고, 동상 등의 비전투 요인으로 발생한 사상자 숫자도 28,954명이나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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