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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공수 작전

상륙작전의 최종 목표는 내륙으로 진공 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의 집중이 필요한 교두보의 확보입니다.

 

다음 단계는 내륙으로의 진격이고 이 과정에서 경계할 것은 교두보 확보를 거부하는 적의 반격이며 교두보 확보 단계에서는 이런 적의 반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적의 반격을 차단하기 위해서 중요 접근로와 교량 등을 선제공격을 해서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차

  1. 교두보 확보 단계에서 적의 반격 차단을 위해 공수작전을 실시 
  2. 미군의 공수 작전
  3. 미군,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급조 부대를 만들어 전투
  4. 영국·캐나다군의 공수 작전.
  5. 영국·캐나다군, 독일의 맹렬한 반격을 물리쳐

1.교두보 확보 단계에서 적의 반격 차단 위해 공수작전을 실시

노르망디에서는 특히 적이 측면 공격이 우려되는 교두보의 동쪽과 서쪽의 차단이 절실했습니다. 결과 노르망디 상륙 개시 전에 주요 거점을 사전에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공수 투하 작전이 실시됩니다.

 

공수 작전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자유 프랑스군등 4개국의 공수 부대들에 의해서 행하여졌습니다. 미군 82 공정 사단과 101 공정 사단은 유타 해안의 서쪽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 6 공정 사단은 유타 해변의 서쪽 사단의 목표가 주어졌다. 영국군에 배속된 530 자유 프랑스 낙하산 부대는 브리타니 지역의 목표가 할당되었습니다.

공수작전을 하기위한 병사들의 모습(출처: 미드 밴드오브 브라더스)

노르망디에서는 특히 적이 측면 공격이 우려되는 교두보의 동쪽과 서쪽의 차단이 절실했습니다. 결과 노르망디 상륙개시 전에 주요 거점을 사전에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공수 투하 작전이 실시됩니다. 공수 작전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자유 프랑스군 등 4개국의 공수 부대들에 의해서 행하여졌습니다. 미군 82 공정 사단과 101 공정 사단은 유타 해안의 서쪽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 6 공정 사단은 유타 해변의 서쪽 사단의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에 배속된 530 자유 프랑스 낙하산 부대는 브리타니 지역의 목표가 할당되었습니다.

 


2.미군의 공수 작전

미국의 82공수 사단과 101 공수 사단은 총 13, 000명이었습니니다. 이 병력은 야간에 투하되어 서쪽에서 노르망디로 접근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간 공수 작전이라는 생소한 전술은 숱한 문제점을 야기했으며 목표를 달성함에 미흡한 점이 많았었고 야간 공수 작전은 전쟁 중에는 다시는 시도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45%나 되는 병력이 목표 지점에 낙하하지 못하고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서 병력 집중이 불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이 병력의 분산 투하는 연이어 날아올 C-47 수송기의 야간 비행을 유도할 레베카/유레카 시스템이라는 전자 비콘 발신 장치가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에서 비롯된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C-47수송기 2차세계대전시 사용되던 수송기 이미지

노르망디 공수 작전의 첫 개시는 6월 6일이 시작되는 새벽 00:48에서 01:48 사이에 101 공수사단에 의해서 감행되었습니다. 이어서 01:51에서 02:42사이 82 공수 사단이 투하되었습니다. 두 사단의 공수 작전에 무려 400기의 C-47 수송기가 동원되었습니다. 간격을 두고 새벽 직전에 글라이더들이 대전차포와 양 사단의 추가 지원 병력들이 투하되었습니다. 공수 작전은 상륙 작전이 있던 6월6일 저녁 무렵에 82사단의 포 24문이 글라이더로 공수되었습니다,

그다음 날인 6월 7일에도 325 글라이더 보병 연대가 82 사단에 증파되었고 두 번의 낙하산에 의한 보급품 투하가 있었지만 이 날의 투하는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대규모 공수 작전의 효율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24시간이 지났지만 투하된 82 공수 사단 병력 중 2,000명과 101 공수 사단의 2,500명만이 지휘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광활한 지역에 되는대로 뿌려진 병력의 대다수는 아직도 부대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3. 미군,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급조 부대를 만들어 전투

 

그러나 공수 작전의 실패는 생각지도 않은 긍정적인 결과를 부수적으로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너무 넓은 지역에 뿌려진 병력은 독일군으로 하여금 병력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작은 부대로 흩어지는 결과를 낳아 상륙작전 부대가 집중 돌파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취약한 미군 상륙 부대의 남쪽 측면을 보호하게 하는 전과를 얻게 하였습니다.

분산 낙오 된 공수 부대원은 흩어질 대로 흩어져 헤매다가 다른 부대원을 만나면 서로 급조 전투 부대를 만들어 그중 최상 계급자인 부사관이나 초급 장교들이 지휘를 하며 주력 본대를 찾아 돌아왔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82 사단은 6일 새벽 프랑스의 작은 도시(Sainte-Mere-Eglise)를 점령하였습니다. 이 도시는 노르망디 작전에서 최초로 해방된 프랑스 도시였습니다.


4.영국·캐나다군의 공수 작전.

노르망디의 최초 공수 투하는 6일이 시작되는 자정이 막 지난 6일 00:16, 캉(Caen) 운하와 오른(Orne) 강에 걸린 다리를 점령을 목적으로 영국 6 공수 사단의 글라이더 수송 공수 부대가 착륙함으로써 개시되었습니다. 이 다리들은 상륙 해안에서 단지 7km 떨어진 곳에 전략적 위치에 위에 있었습니다. 독일군이 반격하기 위해서는 이 두 교량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동쪽으로 진격하는 연합군 입장에서도 반드시 건너야 하는 요충 지중의 요충지였습니다.

 

영국군 6 공수 사단의 목표는 세 개였습니다. 이 교량들을 점령하고 연합군 상륙부대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예상되는 독일 기갑부대 반격으로부터 확보하는 것이고 부차적으로 두 다리 근처에 있는 독일군의 메르빌(Merville) 포대를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포대는 영 캐나다 군이 상륙하는 소드 해안을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세번째 목표는 디브(Dives) 강 다리에 걸린 다리를 폭파하여서 독일군 우회 돌파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었습니다.


5.영국·캐나다군, 독일의 맹렬한 반격을 물리쳐

영국군 6 공수 사단소속의 3,5 공수 연대와 이에 배속된 1 캐나다 공수 대대는 글라이더로 강하 착륙하자마자 독일 716 보병사단의 예하 부대로부터 맹렬한 반격을 받았습니다.

 

교량 점령까지는 해냈지만 새벽 무렵에 이들은 오른 강의 남쪽에서부터 강 양쪽을 따라 반격해오는 폰 록크 대령 지휘하의 독일 21 전차 사단 전투단의 강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투는 치열하였고 양쪽 다 피해가 속출했고 그러나 영국 캐나다 공수부대는 이를 잘 버티어냈습니다. 정오경 영국 1 특수 임무 여단 코만도 부대의 증원을 받았습니다. D-Day 저녁 무렵까지 영국과 캐나다 공수 부대는 잘 고수해서 오른 강의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반격은 다음 날도 계속되었습니다. 6월 10일, 독일 346 보병 사단은 대공세를 취해서 동쪽 변두리의 한 구석에 침투했습니다. 그러나 12일 영국 공수 부대원들이 브레빌(Breville) 마을의 전투에서 참호를 파고 응전하는 독일군을 강습해서 이들을 모두 패주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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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해상 작전 이야기

노르망디 작전의 예비 단계는 해군의 역할이 중대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국 해군 사령관은 영국 해군의 버트람 램지 경(Sir Bertram H Ramsay)이 임명된 사실에서 알 수가 있듯이 작전에 동원된 함선들은 영국 측이 주동이 되어서 마련한 것들이었습니다.

사령관 램지 경은 전쟁 초기 독일군에게 패주한 영국군과 프랑스군들을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수송 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연합군의 북 아프리카 상륙 작전에서 해군 작전 기획 책임자로 일했었고 시실리 섬의 침공 때도 두 개 함대 중에 한 개 함대를 지휘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해군 상륙 작전 지휘의 최고 베테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목차

  1. 독일 해군의 방해를 원천봉쇄 하기.
  2. 함포 화력 지원.
  3. 연합군 해군이 피해.

1. 독일해군의 방해를 원천 봉쇄하기.

작전명 넵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중요한 해군 목표는 노르망디 침공의 해상 루트와 상륙 예정 해변을 독일 해군(Kriegsmarine)의 방어와 반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침공 해상 루트의 보호 임무는 영국 본토 해군 함대에게 부여되었습니다.

 

독일 해군이 바다에서 침공 함대에 가해올 위협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르웨이의 북방 해안과 발트해에 기지를 두고 있는 독일 함대의 주력 대형 함에 의한 해상(海上)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대형 전함들은 영국 해군과 공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었고 순양함들은 훈련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함대의 출동 연료도 부족했었고 출동한다 해도 영국 해군이 이들 수상 함대가 통과할 빌헬름 황제 운하(Kaiser-Wilhelm-Kanal, 발트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독일의 운하) 해역에 설치한 대량의 기뢰 지대에 걸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설사 이런 불리한 조건을 뚫고 상륙 해안에 출동한다 해도 영국 해군의 함대는 독일 함대가 제압하기에 너무 막강했습니다. 그러므로 독일의 수상 함대는 연합군에 대해서 별다른 위협이 될 수가 없어서 작전 수립 단계에서 독일 대형 함대에 대응하는 부분을 제외하였습니다.

 

U보트이미지 2차세계대전 악명이 높음

연합군 해군에게 예견 가능한 진짜 위협은 대서양에서 위협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일 해군의 U보트(잠수함) 부대였었습니다.

U 보트를 감시하기 위해서 미 해군의 호위 항공모함 세 척과 영국 공군 해안 감시대 소속 정찰기들이 영국 본토에서 먼바다까지 나아가서 정찰을 했지만 별다른 U 보트의 활동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합군 해군은 U 보트에 대한 경계 활동을 지속하면서 프랑스 브리타니와 비스케이 만으로부터 상륙지점에 접근할만한 길목에는 함대를 배치해서 봉쇄하였습니다.

프랑스 연안에는 기뢰 지대가 여러 곳 설치되어 독일 해군 함정이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엄호 거리 내에 항로로 통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독일 함선들이 할 수없이 연합함대의 구축함들이 출몰하는 먼바다로 나와 항해를 해야 했습니다. 연합군 해군은 만반의 대비를 하면서 독일 해군의 동정을 살폈지만 작전 개시 전까지 별다르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쯤에서 만족하지 못한 연합군 해군은 독일 해군에게 더욱 압박을 가했습니다. 도버 해협의 접근로는 모두 기뢰를 깔아 접근이 불가능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공중 초계와 레이다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독일 전투함이 출항할만한 항구들은 모두 폭격해서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훼방 놓을 수도 있는 독일 함대의 출현을 경계하는 연합군 해군이 침공 전까지 격침한 독일의 군함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 함대의 상륙작전 방해라는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리는 목표는 완수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상륙 작전 당일(D-day) 작전을 방해한 독일의 U 보트는 한 척도 없었습니다.

 


2. 함포 화력 지원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해군이 맡은 중요한 임무는 전함에서 순양함, 구축함, 그리고 상륙정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함정의 화력을 상륙 작전 지원에 최대로 동원하는 것이었스니다.

D-day에 지원된 해군 함정의 화력지원은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한 본보기를 든다면 주노 해안에서 캐나다 상륙부대에게 지원된 화력은 큰 실패로 끝났던 1942년의 디에프 기습 작전 때의 몇 배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구형 전함 HMS 라미리스와 아스파트와 포함 HMS 로버트는 오른(Orne) 동쪽의 해안 포대를, 순양함들은베르쉬르 메르(Ver-sur-Mer)와 물리노(Moulineax)의 해안 포대를, 11척의 구축함들은 각 상륙부대에 근접하여 전면 적 요새를 직접 사격으로 파괴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정통 군함 외에 수십 척의 상륙정들을 다양한 상륙 화력 지원함으로 개조하는 작업도 행해졌습니다. 8척의 상륙용 함정들에 각각 두 문의 4.7인치 포들을 장치했고 다른 8척은 기관포를, 또 다른 8척은 1,100발을 일시에 발사하는 로켓 발사기를, 8척의 상륙정은 24발의 폭뢰를 발사하는 무장을 해서 독일군이 해변에 설치한 기뢰들을 파괴하는 기능을 주었습니다. 24척의 탱크 운반 상륙정들은 상륙 해안으로 질주하는 시간에도 적 해안 목표를 향해 발사가 가능한 자주 곡사포를 장비했었습니다.

해군의 함정들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화력은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군사 목표를 타격할 뿐만 아니라 해안선 먼 후방까지도 타격하여 군 병력의 집결을 지장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독일군 룬트슈테트 원수는 이 점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적[연합군]은 매우 강한 해군력을 교두보 연안에 전개하여서 이 전력을 아주 빠르게 대응하는 기동 화력 기지로 활용하였다. 이 화력 지원은 항시 대기하고 있다가 육군이 요청하면 바로 실시되었습니다. 주간에 실시되는 해상 포격은 정찰기에 의해서 유도되었으며 육군 전방 화력 통제 장교들이 통제하였습니다. 신속하고 막강한 해군 화력은 그 유효 사거리 내에서 벌어지는 지상전투에서 연합군에게 전투의 결정적인 프리미엄을 제공하였습니다. 기갑 부대의 탱크조차도 주간에는 해군의 가공할 화력이 타격을 가하는 개활지에서는 기동 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3. 연합군 해군이 피해

큰 역할을 한 연합군 해군은 역시 독일 육상 화력에 피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상륙 지휘함의 한 척이었던 HMS 로포드는 상륙작전 3일째인 1944년 6월 8일 주노 해변에서 적의 공습을 받고 침몰하였습니다.

상륙 작전 중 유일한 수상 함끼리의 해전은 D 데이 당일 오후 소드 피시 해안 연안에서 동부 기동함대를 공격한 4척의 독일 어뢰정이 발사한 18발의 어뢰 중 한 발이 노르웨이 구축함 스베너 함에게 명중해서 이를 격침한 것입니다.

 

독일 어뢰정들이 겨눈 것은 구식 영국 전함들이었는데 빗나가서 노르웨이 구축함을 격침하게 되었다. 독일 구축함들은 어뢰를 발사한 뒤에 연막을 치고 도주해버렸습니다.

 

그 외에 독일이 해안에 설치한 기뢰에 의해서 미(美) 구축함 코리 함과 PC정, 그리고 여러 척의 상륙함이나 상륙정들이 격침되었습니다.

참고문헌: (전쟁사, 김창원,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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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양측 작전계획

노르망디 상륙작전 두번째 이야기

상륙작전은 대량의 인원과 물자를 영불해협을 횡단하는 항해를 통해 수송되어야 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지역은 그 폭이 무려 50 마일로서 이 넓은 해안은 5개의 작전 구역으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각 작전 구역에는 작전 명칭이 부여되었는데 유타(Utah), 오마하(Omaha), 골드(Gold), 주노(Juno), 그리고 소드(Sword)였습니다.


차례

  1. 연합군 상륙계획
  2. 독일군의 방어 계획
  3. 독일군의 병력 배치
  4. 히틀러의 실수

1. 연합군 상륙계획

미군과 영국군 캐나다 군이 각각 담당한 해안선의 침공 구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미군 1군은 73,000명의 병력으로 오마하와 유타, 두 개의 해안 목표를 공격했는데 이 병력 중 15,600명은 공수 병력이었습니다.

  • 오마하 해안 : 미군 5군단- 1사단과 29사단
  • 유타 해안 : 미군 7군단 -4 사단 90사단의 359 RCT. 101 공수사단과 82사단의 상륙 해안 후방 내륙 강하, 영국군 2군이 이 구간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6 공수 사단 7,900명이 침공 구역 좌측에 투하되었다
  • 소드 해안 : 영국군 코만도 부대의 2개 여단, 1군단의 3 사단과 27 기갑 여단
  • 주노 해안 : 캐나다 1군단- 캐나다 3사단, 캐나다 2 기갑여단, 영국군 제 4 코만도 부대
  • 골드 해안 : 영국군 30군단의 3 사단. 캐나다군 1개 기갑여단

노르망디상륙작전상황지도이미지 


2.독일군의 방어 계획

한편 연합군 침공에 대비해서 독일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원수를 대서양 해안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방어 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독일은 대서양 연안에 걸쳐 4년 동안 교통호와 화력 지원 요새와 벙커들로 바느질로 조밀하게 누빈듯한 방어선을 만들었습니다.

 

독일군의 최초 방어선은 영불 해협이었습니다. 영국이 영국 본토 공격을 노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나폴레옹의 해군을 분쇄한 천연의 장애물입니다. 이제는 그 반대로 독일군이 활용하게 된 것이죠.

 

두 번째의 방어선은 해안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총통 명령 51호로서 벨기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뻗쳐 있는 이 해안지대를 ‘대서양 방벽’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요새화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방어공사가 집중된 곳은 바로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가까운 도버해협의 해안 쪽이었습니다. 즉 앞에서 말한 기만 작전이 행해진 칼레 해안이었습니다.

 

롬멜은 상륙작전은 만조(滿)때 감행되리라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콘크리트 벙커와 포대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철조망을 밀집시켰으며 해변에는 상륙정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수천 개의 방어물과 수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습니다.

 

연합군은 방비가 엄중한 칼레를 공격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조금 더 떨어진 독일 7군과 15군의 전투 지경선이 있는 노르망디를 상륙 예정지로 선택했습니다.

침공이 발발하면 두 독일 군() 사이에 책임 전투 구역을 두고 큰 혼선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대서양 방벽’으로 마련한 방어시설 <출처 (cc) Bundesarchiv>

롬멜은 상륙작전은 만조(滿)때 감행되리라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콘크리트 벙커와 포대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철조망을 밀집시켰고 해변에는 상륙정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수천 개의 방어물과 수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습니다.

연합군은 방비가 엄중한 칼레를 공격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조금 더 떨어진 독일 7군과 15군의 전투 지경선이 있는 노르망디를 상륙 예정지로 선택했습니다. 침공이 발발하면 두 독일 군() 사이에 책임 전투 구역을 두고 큰 혼선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3.독일군의 병력 배치

롬멜사진 이미지

연합군이 상륙 작전을 감행한 노르망디 상륙지점은 4개의 독일군 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716 독일 보병사단은 상륙 해안의 최동단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상륙할 예정이었습니다. 716 보병사단은 신체적으로 약한 독일병사들과 다른 나라들에서

 

징병한 병사들, 그리고 소련군 포로들로 포함 잡다한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 전투력을 의심받고 있었습니다.

 

오마하 해안에는 독일 정예 35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단 병사들은 대소 전쟁의 동부전선에서 실전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정예 사단이 방어하던 오마하 해안을 공격했었던 미군 병사들의 피해율이 가장 높았었습니다.

해안으로 뻗어 나온 코탕탱(Contentin) 반도 내륙에는 루프트바페 소속의 91공수 사단이 주둔했고독일 공군인 루프트바페는 보병 전투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709 보병 사단은 코탕탱 반도 동쪽과 북쪽 해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기타 노르망디 해안 인근 주변 지역에 주둔한 부대들을 여기 소개해보면, 243 보병 사단은 코탕탱 반도의 서쪽 해안을 방비했고, 711사단은 페이 드 코(Pays de Caux)의 서쪽 지역 방어를 맡았고, 30기동 여단은 예비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30기동 여단은 아주 독특한 부대로서 모두 자전거로 이동하는 기동 부대였습니다.

독일군의 기갑 예비군에 대해서는 특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롬멜은 상륙 저지 부대로서 최고 유효 수단인 기계화 사단들의 사용을 두고 집단군 사령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는 순수하게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휘하 서부 기갑 집단군 부대들을 레오 게이르 폰 슈베펜부르그(Geyr von Schweppenburg) 장군의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 집단군은 후에 제 5 기갑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됩니다. 5 기갑군은 노르망디 방어를 위해서 다시 재배치 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실전 경험을 풍부히 쌓은 롬멜은 연합군의 항공력이 훨씬 우세하였으며 전투가 발발하면 기갑부대의 이동에 막대한 장애가 발생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갑부대들은 이동거리가 짧은 해안으로 가능한 한 가까운 지역에 배치되기를 강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는 침공 첫 날 해안에서 적의 상륙을 저지할 한 개 기갑사단이 적이 해안에 교두보를 설치가 완료된 침공 삼일 째 되는 날 반격에 나선 3개 기갑 사단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게이르는 기갑군은 파리와 루엥의 중간 지점에 중점 위치해 있다가 적의 교두보가 확인되면 기갑군을 집중 투입해서 이를 궤멸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두 사람은 기갑의 운용을 두고 갈등을 빚다가 이 문제를 히틀러에게 직접 중재해주도록 하기로 하였습니다.

 

히틀러는 그의 버릇대로 양쪽 다 만족하지 못할 중재안을 내놓았습니다. 롬멜에게는 단지 3개 기갑 사단만이 주어질 예정이었습니다. 이 3개 사단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전 해안선을 커버하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나머지 사단들은 ‘OKW 예비대‘라는 명칭을 주고 게이르의 휘하에 두고 적의 상륙 공격이 있을 시에 반격하도록 했는데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사용할 수 있는 사단은 단 3개 사단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4개 사단들은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상륙할 경우에 출동하도록 하였습니다.


 

4.히틀러의 실수

히틀러는 예의 버릇대로 집중할 병력을 분산시키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결정은 게이르 휘하의 OKW 예비대 3개 사단을 출동시킬 때는 히틀러의 직접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개시할 때인 6월 6일에는 OKW 예비대 전차 사단장들은 히틀러의 지시가 없어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히틀러는 깨우지 말라는 지시를 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그의 부관들은 감히 그의 엄명을 무시하고 그를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프랑스내의 기갑부대들은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 롬멜이 구상하던 바와는 동떨어진 역할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출처및 참고사항: (전쟁사, 김창원,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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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상륙작전 썸네일 이미지

노르망디 상륙작적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중 가장 큰 스케일에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많아서 시리즈로 올릴계획입니다. 그 첫 번째 내용입니다.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D-DAY: 사상 최대의 작전

 

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군이 주력이 되고 기타 캐나다, 자유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폴란드, 노르웨이 등 8개국의 연합군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령 노르망디 해안에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감행 습니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에 동원된 병력만 무려 15만 6천 명이었습니다.

그들의 적인 노르망디 해안의 독일 방어군은 약 1만 명으로 추산되었습니다.

 

D-Day : 작전명 오버로드. 작전명 넵튠

노르망디상륙작전투입전 상륙정에 탑승장면 이미지


목차

  1. D-DAY: 작전명 오버로드, 작전명넵튠
  2. 상륙작전의 전모
  3. 기만 작전
  4. 작전에 필요한 날씨
  5. 작전 강행 결정
  6. 독일의 방심

1.D-DAY: 작전명 오버로드, 작전명 넵튠

연합군 측은 당시 작전명 오버로드(Overlord)라는 북부 유럽 침공 작전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 개시 단계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작전명은 넵튠(Neptune) 작전이었습니다. 오버로드는 대군주를 뜻하고 있으며 넵튠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해신의 이름에서 따온 작전명입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영국군의 프레데릭 모건 중장이 이끄는 기획팀이 계획을 세웠는데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으며 육해공군을 모두 망라한 것이었습니다.

 

넵튠 작전은 1944년 6월 6일 개시되어서 노르망디 교두보가 완전하게 확보된 1944년 6월 30일 종료되었습니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제 하워장군이었고 지상군 사령관은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였었습니다.

독일 측의 방어사령관은 프랑스 주둔 독일 집단군의 총사령관인 장군이 아이젠아워와 같은 격의 최고 지휘관이었으며 대서양 해안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장군은 북 아프리카에서 용맹을 떨친 에르빈 롬멜 장군이었습니다.장군이었습니다.

둘 다 원수였지만 롬멜이 훨씬 후배였습니다.

아이젠하아워가 공수부재원들에게 독려하는 장면이미지 


2. 상륙작전의 전모

상륙작전 개시일인 6월 6일은 D-day라는 음어로서 이미 연합군 내부에서 사용했었습니다. 이 암호는 나중에 아주 유명한 명칭이 되었고 추가 설명한다면D-day의 D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Day의 약자라고 합니다.

 

세계 각 군마다 이 D-day에 해당하는 고유의 단어가 있는데 우리에게 역시 낯익은 Zero-hour와 비슷한 말입니다.

상륙 작전은 두 단계로 시행되었습니다.

 

1944년 6월 6일이 되자 자정 경에 공수부대의 야간 투입 작전이 있었고 이어서 날이 밝자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먼저 노르망디 침공 작전의 시작이 되는 공수 작전을 소개해보면. 24,000명이나 되는 공수 부대원의 공수작전이 상륙 작전 전야()인 6월 5일과 6일 사이 자정 조금 후에 실시되었습니다.

 

공수 작전에 참가한 공수 부대는 미국, 영국, 그리고 캐나다와 자유 프랑스 군의 부대들이었습니다.

해안에 보병과 기갑부대로 구성된 상륙부대가 해안에 상륙하기 시작한 것은 그날 아침 06:30분입니다.

해상의 일기가 아주 황천 상황이어서 기습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상륙작전이 아주 힘든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내린 작전 감행의 결단이 결실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3. 기만 작전

기습은 상륙작전이 불가능해 보이는 날씨의 덕도 보았지만 연합군 측이 독일군에게 전개했었던 기만 작전의 성공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그 기만 작전은 보디가드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는데 독일군의 경계심을 상륙 예상 지점인 노르망디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만 작전의 핵심은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로 하여금 연합군의 상륙이 노르망디가 아니라 영불해협의 연결항구인 칼레(Calais) 북쪽 지역에 행해질 것이라고 오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미 1군이 패턴 장군의 지휘 아래 도버 해협을 건너 칼레에 곧 상륙 작전을 할 듯이 양동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르망디에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칼레에 상륙할 듯한 위장 작전은 계속되어서 독일군의 방어 병력 집중을 막았습니다.

 

연합군은 기만작전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머’나 ‘텍 사블’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위장 작전이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기만작전은 연합군의 중폭격기들이 칼레 앞바다인 도버 해협 상공을 비행하며 방대한 양의 얇은 금속 박편을 살포하여 독일군 레이다를 교란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레 해안에 곧 상륙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 오산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위장 작전에 사용된 가짜 전차.위장작전에 사용된 가짜 비행기 사진이미지


4. 작전에 필요한 날씨

매월 10일 간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가능하였다. 그중에 만월(滿)이 되는 날의 밝음과 조류가 작전 실시에 가장 이상적이었습니다.

밝기는 공중 침투하는 항공기 조종사나 글라이더 조종사들이 지형지물의 식별에 필수였었고 조류는 상륙정들이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상륙 저지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서 가능한 최대로 높은 해수면이 필요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6월 5일이 바로 그런 만월이 뜨는 날이었습니다.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잠정적으로 6월 5/6 사이 야간을 작전 개시일로 결정했었습니다. 그러나 5월에는 아주 쾌청했던 일기가 6월에 들어와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5. 작전 강행 결정

6월 4일 악천후는 작전 실시 불가함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강풍과 파도는 상륙 모선이 상륙정을 발진시킬 수가 없게 했고 낮은 시계()는 항공기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했었습니다. 이미 병력을 싣고 영국의 항구를 출발하였던 함선들은 영국 남해안으로 다시 돌아와 만이나 강구에서 대피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상식으로 본다면 6월 5일 침공계획은 전면 취소하여야 했고 함선들은 항구로 돌아오고 병사들은 원래 머무르던 기지 생활관으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미 상륙 작전에 사용될 어마어마한 무기와 군수품들이 모두 바다에 떠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만월이 뜰 때까지는 무려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대기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6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에서 중대한 회합이 있었습니다. 이 회합에서 영국 공군 기상대장 JM 스태그 대령은 6월 6일에는 기상이 약간 좋아질 것이라는 예보를 브리핑했습니다. 지상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와 아이젠하워 참모장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장군은 작전을 원 계획대로 강행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 항공군 사령관 레이 말로리(Sir Trafford Leigh-Mallory) 경은 작전 강행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연합군 해군 사령관 버트람 램지(Sir Bertram H Ramsay) 제독은 중도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스태그 대령의 기상예보를 근거로 작전 강행을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작전은 강행되었지만 악천후는 결과적으로 충분한 항공 지원을 불가능하게 하여, 강력하게 요새화 되어 있는 오마하와 주노(Juno)의 해안 방어력에 대한 충분한 타격을 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6. 독일의 방심

한편 영불 해협 방면보다도 더 험한 북부 프랑스의 악천후는 독일군을 안심하고 경계를 풀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그간 미영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임박했음을 계속적으로 경고받고 있어서 높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끔찍한 악천후는 적어도 며칠간은 마음을 놓아도 좋으리라고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일부 부대는 비상 경계령을 일시 해제하기도 하였고 많은 고위 지휘관들은 주말을 맞아 위치를 떠나거나 했습니다. 해안선 방어를 책임진 에르빈 롬멜 원수는 아내의 생일 축하를 위해 며칠간 독일의 집으로 귀가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 십 명의 사단장이나 연대장 그리고 대대장들이 침공 대비를 위한 워 게임(war game) 연습을 위해서 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상륙작전후 오마하해변모습 사진이미지

참고문헌: 유용원에 군사세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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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중동 전쟁사 마지막 4차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라마단 전쟁또는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전쟁... 이제 시작합니다. 


목차

  1. 개요
  2. 전간기-소모전
  3. 대 복수극의 시작
  4. 전쟁경고
  5. 미국의 장비 지원과 경과
  6. 전쟁 결과
  7. 전쟁 영향

1개요

전쟁이 일어난 당일이  욤 키푸르라는 유대교 전통의 속죄이었기 때문에 흔히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10월 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전쟁 기간은 1973년 10월 6일~ 1973년 10월 25일.

 


2. 전간기 소모전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은 각각 시나이반도와 골란 고원을 잃어버린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의 인정과, 항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과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 지역을 반환하는 것을 비밀리에 제안했으나 이스라엘한테 영토를 빼앗긴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 8개 국가들은 같은 해 9월 수단의 하르툼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무 평화, 무인 정, 무협상, 3 무 원칙을 공식화하며 단박에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출혈을 강요하고 반환을 압박하기 위해 쇼련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벌였고 이에 양국이 대치하는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 사이에 수년 동안 국지전이 계속되었는데 이를 소모전(حرب الاستنزاف/מלחמת ההתשה)이라고 합니다.

전쟁 아닌 전쟁으로 3년 넘게 이어져 온 소모전은 1970년 8월 휴전협상이 타결되면서 끝을 맺었으나 양쪽의 대치는 수에즈 운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이집트는 주요 밥줄인 수에즈 운하가 폐쇄되면서 경제적 손해가 막심했고 이스라엘 역시 소모전으로 인한 지속적인 출혈에 점점 부담이 가해지고 있었습니다.

 


3. 대 복수극의 시작

1970년 9월 28일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서방국가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아랍국의 단결을 도모했고, 구태의연한 국내 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한편으로 사다트는 시나이 반도의 일괄적인 반환을 요구한 나세르와 달리 일단 폐쇄된 수에즈 운하부터 정상화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스라엘에게 수에즈 운하에서 20마일(약 32km)만 뒤로 물러날 것을 제안했으나 이스라엘의 무성의한 반응에 결국 전쟁을 통해 시나이를 회복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이스라엘한테 영토를 빼앗긴 주변국과 공조를 강화합니다. 하지만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예루살렘을 빼앗긴 요르단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PLO를 지원해 줬다가 오히려 검은 9월로 나라 전체가 뒤집히는 난리가 났기 때문에 이집트에 미온적이었고, 결국 골란 고원 문제로 이스라엘에 이를 갈던 시리아가 또 이집트와 손을 잡는다. 당시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또한 본인의 정치적 위세를 강화하기 위해 대이스라엘 적대 감정을 활용할 여지가 충분했습니다.

사다트는 군대의 체질과 훈련강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변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소련 고문단을 초빙하고, 이전의 전훈을 연구하여 대응 방법을 연구하고, 최신 병기들을 대거 도입하면서 철저한 훈련과 함께 군 조직의 개편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장교단의 경우, 병사, 수병, 부사관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이전의 귀족적 악습을 타파하고 젊은 대학생들을 장교로 선출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보안에 심혈을 기울여, 6일 전쟁처럼 시작하기도 전에 맞고 뻗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도 모사드에서 사전에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을 감지하여 보고했기에 일단은 전쟁에 대비하기는 했으나, 정작 골다 메이어 총리를 비롯한 수뇌부가 지금까지의 연승에서 비롯된 긴장감 상실과 아랍군에 대한 오판으로 인해 이전과 다른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진짜 전쟁준비를 숨기기 위해 몇 차례씩 허울뿐인 동원령을 발령했는데, 이스라엘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똑같이 동원령을 내리려 할 경우 동원령에 소집된 국민들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야 하는 문제가 있어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집트의 동원령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무리였습니다. 전쟁 개시 직전에 서로 다른 루트들을 통해서 결정적 정보들을 확인한 뒤에도 후술 할 외교적 이유로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결정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고다 메이어 총리와 모세 다얀 국방부 장관이 속한 노동당 내각의 발목을 붙잡고 말았습니다.

한편 사다트는 공격할 생각이 없으면서 이스라엘을 긴장시켰던 나세르와는 정반대로 공격할 생각을 숨기고 이스라엘이 긴장을 풀게 만드는 술책을 썼는데, 바로 이스라엘을 상대로 몇 개월에 한 번씩 곧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공갈협박을 날렸던 것입니다.

 

처음에야 여기에 잔뜩 졸았던 이스라엘이었으나 이집트 측이 실제로는 별다른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이를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로 파악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공갈 협박만 날리는 상황이 사다트 집권 후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자 이스라엘 측은 사다트를 그냥 위협만 일삼는 허풍쟁이로 여기게 됩니다.

 

심지어 사다트가 4차 중동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날린 진짜 전쟁 협박에도 거짓말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

10월 5일, 이집트에 심어놓은 최고위급 스파이인 아슈라프 마르완으로부터 당장 내일 전쟁이 시작된다는 정보가 전달되었으나 몇 달 전 마르완이 같은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 때문에 이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는 불투명한 문제였으며, 골다 메이어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간 시점은 전쟁 시작 몇 시간 전의 일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모사드는 마르완의 경고를 긴급히 메이어 총리에게 전달했고 메이어는 이를 매우 심각한 징조로 받아들여 즉시 장군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하게 했지만 예비군 동원에만 최소 24시간이 걸리는 상황에서 마르완의 첩보는 너무도 늦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욤 키푸르 당일인 10월 6일에, 이스라엘에서 많은 군인들이 휴가를 떠나고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이집트, 시리아 연합군의 전면적인 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https://youtu.be/am-hznmutd8


4. 전쟁 경과

이전 세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이 모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난 것에 비해 이 전쟁에서는 이스라엘군이 초반에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개전 당일,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거대한 모래벽과 영구 진지로 구성된 바레브 선을 돌파하기 위해 8천이 넘는 특수부대를 사전에 도하시켜 미리 요새 후방과 이스라엘군의 기동로 근처에 매복시켰고, 철저한 공견 준비 사격 뒤 운하 도하를 개시했습니다. 이때 이집트 육군 공병은 독일에서 수입한 고성능의 소방펌프를 동원해 모래벽을 적셔서 무너뜨려 버리는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해 이스라엘이 요새 철거에만 이틀은 걸릴 거라고 장담하던 바레브 선을 단 9시간 만에 돌파해버렸습니다.

 

해당 작전의 창의성은 기존에는 병역이 면제되던 대학생들까지 입대시켜가며 군 장병들의 질적 향상을 꾀하던 이집트군의 와신상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래벽이라고 하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까지 바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국경 도발(방어선에 냅다 포격을 가하는 등)에 이스라엘군이 거의 완벽하게 대응해 왔고 심지어 전술핵의 폭발력에도 버틸 수 있을 거란 예상까지 나오던 곳이었습니다.

 

이집트군은 이러한 바레브 선의 약점을 꿰뚫었고 사전에 모의실험까지 거친 후 해당 작전을 실행하는 철두철미함을 발휘하였습니다. 바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모래벽에서 그치지 않고 화공을 위해 기름 탱크를 준비해 두었고 고지대에 콘크리트 벙커를 추가 설치하긴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이 날이 욤 키푸르였기에 해당 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이스라엘군 병력 대부분이 휴가 간 상황이었습니다.  이집트군은 MI-8  수송헬기로 기습 강습을 해 기름 탱크를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군의 화공 전법을 무력화시켰으며 고지대의 벙커의 경우 똑같은 높이의 토산을 쌍아 올려서 그 위에 전차를 올려 콘크리트 벙커를 격파해 버렸습니다. 이 돌파 작전에서 이집트군의 병력 8만 명 중 전사자는 단 208명에 그쳤으며, 당시 3만 명 이상의 피해를 예상하고 있던 이집트 수뇌부는 이런 예상외의 대성공에 기뻐서 날뛰었다고 합니다.

 

이후 잘 훈련된 이집트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수비대 요새 근처에 신속 전개하여, 이스라엘군의 기동예비대인 육군 252 기갑사단 예하 전차 여단들의 진격로를 틀어막고 적극적인 대전차 방어전을 구사합니다.

 

이스라엘군은 반격을 위해 전차 부대를 투입하지만 이집트군은 이미 잘 준비된 방어 진지에서 대전차 미사일을 준비시켜 놓고 잇었습니다.  이집트군은 결국 시나이 반도에 전개된 이스라엘 전차의 60%인 150여 대를 격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웁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공군조차 이집트 방공군의 지대공 미사일에게 하루 만에 전 보유대수의 10%가 넘는 전투기를 상실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어 이전 전쟁을 항상 승리로 이끌었던 공군력에도 기대기 힘들어졌습니다.

 

사실 항공전에서 하루 만에 10%의 손실률이면 거의 기록적인 수준으로, 앞으로도 이런 손실률이 지속된다면 항공전역 수행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열흘 내로 공군기를 모조리 상실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초 이런 끔찍한 피해를 입자 지상군 전선이 엄청난 위기에 빠져있음에도, 일시적으로 지상군에 대한 지원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주요 피해는 이집트 방공군이 보유한 러시아제 신형2 K12 KUB(나토 코드 SA-6) 지대공 미사일과 23mm 4 연장를 탑재한'쉴카 대공기관포 차량'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집트 공군은 애초부터 형편없던지라 방공군의 활약이 컸던 것입니다. 



10월 8일에는 이스라엘에서 2개 기갑사단이 더 투입되었지만 이들 역시 이집트군 대전차 미사일의 화력 앞에 혼쭐이 나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전차부대가 보병부대의 지원이나 포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단독으로 진격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이 이스라엘의 인구 문제로 인한 보병의 부족, 그리고 제3차 중동전쟁에서 보여준 이스라엘군 기갑부대의 맹활약에 의한 전차 만능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반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보병의 대전차 공격능력 자체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집트군이 더 많은 부대를 투입하여 시나이 사막을 가로지르기 전에 일단 그 기세부터 꺾고 보자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군의 계획이었던 것. 이 때문에 공세 주력이었던 2개 동원 기갑사단은 아예 사단 보병과 포병이 본토에서 한창 이동 중인 상태에서 전차만으로 선공에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이러한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인 편에 속했습니다. 당시 보병의 주력 대전차화기인 RPG-7은 명중률이 낮고 사거리도 짧았기에 베트남 전쟁 같은 정글이면 몰라도 교전 거리가 길게 나오는 시나이 사막의 특성상 이스라엘군은 적 보병의 방어 진지 정도는 전차포로 장거리에서 공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이집트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전차전 같은 정공법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던 터라, 이집트군은 RPG보다 더 강한 소련 AT-3 말륫카(나토코드명 새 거 Sagger) 대전차 미사일을 이미 대거 들여온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1. 진지에 숨어서 이스라엘 전차를 기다린다. 이때 AT-3는 뒤에, RPG-7은 앞에 겹겹이 위치시킵니다.
2. 이스라엘 전차가 오면 AT-3을 쏘고 숨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차의 시야가 생각 이상으로 좁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위에도 서술하였듯이 당시 이스라엘군은 전차의 눈이 되고 서포트를 해줄 보병 없이 전차만으로 돌격했기 때문에 이 전략이 더 빛을 발했습니다.
3. 엄폐물로 숨으면서 장전하고 장전이 되면 다시 쏘는 식으로 이스라엘 전차를 순차적으로 부순다.
4. 이스라엘 전차가 만약 살아서 엄페물 방향으로 접근하면 파괴력에 비하여 정확도가 떨어지는 RPG-7으로 처리합니다.

물론 이스라엘군은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국경에서의 분쟁을 통해 말 륫카 미사일의 존재와 그 성능을 파악하고 있었고 치명적인 수준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AT-3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으며,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단점을 이를 뒷받침해줄 기동 전략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돌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 대전차 보병의 전술적 역량을 낮게 평가하는 실수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당시 시나이 사막에서 투입 가능했던 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는 참패를 겪었습니다. 앞서 2일간의 전투에서만 이스라엘군은 300대가 넘는 전차를 잃었고, 골란 고원까지 포함하면 800대가 넘는 전차가 파괴되었습니다. 훗날 파괴된 전차 중에서 400여 대는 이후 회수해서 수리해 다시 쓸 수 있는 상태였고, 거기다 미국의 긴급원조로 수령한 대량의 패튼 시리즈와 아랍 측의T-55, T- 62 전차도전차도 다수 노획해 종전 후에는 전차 보유수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전차를 젊은 간부의 관이라 부를 만큼 인원 손실이 커 노련한 전차 승무원들을 잃은 것은 회복하지 못했으며 전차 보유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 후의 이야기로 전쟁 중이던 당시에는 가히 뼈를 박살 낸 치명타를 입은 상태였습니다.

이집트군은 소련식의 조직적인 보병 중심 대전차 방어진 지를 구축하여 이스라엘군을 끌어들였습니다. 특히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군의 반격에 맞선 이집트군은 이미 전날 밤 운하 일대의일대의 원래 방어책임을 맡고 있던 이스라엘군 만들러 소장의 252 기갑사단 전차 전력의 60%를 대전차 방어전에서 격파할 정도로 그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전날보다 더욱 취약한 상태로 공격해 오는 이스라엘군 2개 사단에 맞서 말 그대로 최고의 선전을 펼쳤던 것입니다. 그나마 이스라엘군의 반격은 이집트군이 진격을 멈추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만드는 효과는 거두어 결국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는다는 당초 목적 자체는 달성했습니다. 대신 만약 이집트가 작심하고 제대로 밀어붙일 경우 이에 맞서기 어렵다고 여겨졌습니다.

원래 소련식 군사교리의 특성상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합니다. 6.25 때에도 이러한 특성이 보이지만, 중앙 집중화된 지휘체계상 각 제대는 원래의 목표선까지 진출하면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상태를 보고하고 피아 간의 상황을 분석해서 다음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대기하게 됩니다.

 

당시 이집트 지휘부는 지난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했던 이집트군이 예상 이상의 전공을 세우자 이것이 이스라엘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이스라엘을 너무 밀어붙일 경우 미군이 전면 개입하거나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이집트의 목적도 수에즈 운하 회복과 미국-이스라엘과의 수교였지 이스라엘 전멸이 아니었으므로 더 이상 진격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지리멸렬해서 상급 지도부가 공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도 여유를 얻어 일부 동원병력을 먼저 시리아 전선에 돌리는 도박수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나이 전선에서 우세를 차지한 이집트군은 예상되는 역습에 대비한 방어선을 구축하였습니다.

한편, 시리아군 역시 초전에 헬기를 이용한 대규모 특수부대 강습으로 헤르몬 산의 이스라엘군 관측소 겸 진지를 한 시간 만에 점령하고, 기갑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이스라엘군 제188기갑여단의 방어선을 남단에서 수적 우위로 돌파하며 쾌조의 진격을 거듭해 7일에는 요르단 강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시리아군 기갑부대가 골란 고원 서쪽 저편에서 빛나는 갈릴리 호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진출한 것입니다.

다만, 이때 시리아군은 소련식 교리에 치중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탄약도, 연료도 아직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요단강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부대가,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는 교리를 철저히 지키느라, 자신들의 작전지역을 넘어서 요단강을 도하하여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습니다.

 

사실 시리아로서는 승리의 경험이 없다 보니 이것이 실제로 진격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 이스라엘 측의 유인작전인지 구분할만한 전술 안을 가진 지휘관이 없던 데다, 멋대로 행동했다가 최상층 지휘부에게 찍혀서 숙청당할 위험도 있기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시간을 끌지 않고 요단강을 넘어 진격했다면, 이스라엘 군의 동원사단이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하게 변하자 다급해진 이스라엘군은 일단 가장 가까운 시리아군부터 몰아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장 이집트 방면은 시나이 반도를 제물로 바치면서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있었으나, 시리아 방면은 골란 고원이 돌파당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시리아군의 공격 앞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용병력을 대부분 골란 고원에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골란 고원의 방어선 북단을 담당한 이스라엘 현역 부대인 제7기갑여단, 그중에서도 카할라니 중령이 이끈 제77전차대대는 1:10의 수적 열세 하에서 몰려드는 시리아군 기갑부대를 말 그대로 혈전(血戰) 끝에 격퇴하면서 동원 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으로 투입될 시간을 벌었습니다.

 


5. 미국의 장비 지원과 반격

자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마지막 보루인 미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8일 밤 골다 메이어 총리는 전술핵탄두 조립을 승인했습니다. 특급 비밀이어야 할 핵무기의 준비는 그다지 비밀스럽지 않게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여차하면 이집트와 시리아에 쏴버리겠다는 협박이자,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되는 것을 미국이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계산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9일 오전 미국 국무부에 날아들었다.

이스라엘이 대놓고 핵무기를 조립하는 반응을 보이자 미국은 소련에 연락을 취해 접촉하였습니다. 최악의 상황인 이스라엘이 핵공격을 실제로 실시할 경우, 소련은 이집트에 핵무기를 공급해서 핵 보복을 시행하도록 허락하여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을 공멸시키고 이후 미국과 소련은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주 내용입니다. 즉, 여차하면 미국과 소련은 양국의 전면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버섯구름 아래로 사라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교 안보 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직하며 외교정책을 장악했던 헨리 키신져는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제3차 중동전쟁의 후속 편을 찍어버리면, 이후 미국 입장에서 아랍국가들을 회유하여 평화협정을 주도,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게 될 여지가 아예 사라지기 때문에 초기에 대대적 지원을 꺼려했던 것입니다. 전쟁 초기 키신저의 큰 그림은 이스라엘이 아예 망하지 않을 만큼만 지원, 이스라엘이 아랍군을 1967년 휴전선까지 다시 몰아내면 그때 정전을 중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지원을 받긴 받았으니 군말할 수 없고, 아랍 측도 미국의 영향력으로 멸망을 모면하게 될 테니 미국이 중동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만만했던 키신저였지만 개전 초기 전황이 이스라엘에 불리해지자 지원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랍 측의 보이콧을 의식한 기업들이 차터 항공편을 내주지 않았고, 군사적 충돌에 예민했던 국방부도 협조를 거부해 첫 1주 간은 엘알 항공기 7대가 미국까지 날아와 장비를 직접 가져가는 것으로 충당해야 했습니다.

 

미국은 전선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12-13일 사이 영국에 부탁하여 휴전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사다트의 완강한 거부로 실패, 전쟁이 생각보다 장기전으로 돌입될 위험에 처하자 14일경에야 최대 물량 지원을 시작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워터게이트 사건에 정신이 팔려있어 중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닉슨이 당장 하라고 밀어붙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리처드 닉슨 행정부였지만 그 대응은 빨랐다. NATO 최전선, 즉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신예 M60A 1을 포함한 대규모 전차와 항공기, 막 배치가 시작된 스마트 폭탄을 비롯한 정밀 유도 병기는 물론, 일설에는 핵무기까지 포함된 대규모 지원이, 봉쇄된 바다와 지상을 넘어 항공로를 통해 날아들었다습니다.

 

공장에서 갓 나온 F-4 들이 공중급유기의 급유를 받으며 이스라엘까지 날아왔고 대서양과 지중해에 전개해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A-4를 잔뜩 싣고 와 이스라엘 근해에서 이함시켜 배달해주었습니다. 이 무제한 작전(니켈 그라스 작전)은 33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이스라엘이 치른 전술적 대가는 막대했지만 지난 3차 중동전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선제공격을 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미국의 압박으로 2차 중동전에 이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외교적 패배를 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략적으로는 아랍 측의 공격 가능성을 48시간 전에 파악하고도 선제공격보다 먼저 공격을 당하고, 그 뒤에 방어전에 들어간다는 도박수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둬 이것으로써 다시 전략적인 승리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군을 재정비해 반격에 성공한 것도 이스라엘군의 전술적 승리라 하겠습니다. 무기를 쥐어줘도 운영하지 못해 패한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미국의 지원에 더해 예비 병력의 바닥까지 긁어모은 3개 동원 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에 전개된 10일경,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에 대한 전면적 반격(Counter-offensive)을 실시해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완전히 박살난 시리아군은 500대가 넘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시리아 공군 역시 10일 마지막 결전을 노리고 대규모로 출격했으나 이스라엘 공군에 격퇴당해 시리아 전선은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는 상황으로 돌변했습니다.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군의 포격이 떨어지고 있었고 시리아 정부는 일대 패닉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는 요르단에 대한 성의와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소련의 으름장으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암만-다마스쿠스 가도에서 진격을 중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리아가 하도 박살이 난 관계로 이라크군과 요르단 군도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과의 전투에 일부 참전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도 애초에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오면 요르단이 아랍 연합국을 구원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고, 요르단도 전쟁을 요르단 본토 쪽으로 확대시키지 않으려 했기에 투입한 병력의 수가 적었습니다.

 

이라크군은 투입되자마자 이스라엘군에게 관광당하고 공군은 시리아를 도와주러 급파된 소수의 요르단군 전투기와 오인 교전을 벌이다가 패해서 퇴각하는 등 시리아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전투력 면에서는 별 도움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사우디 군도 일부 참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 주장은 여단 규모 부대를 골란 고원에 파병해서 시리아의 방위를 지원하긴 했으나 파견 시점이 늦어져서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나 시리아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시리아 영내 작전 기간 중 미국제와 영국제 장비를 상당량 노획했는데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조기 참전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시나이의 이집트군은 지난 제3차 중동전쟁과는 다르게 시리아가 말아먹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에서 뛰어나와 이스라엘로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정면대결은 무리였는지 아주 박살이 나버렸고, 16일 새벽 아리에 샤론 소장(나중에 수상이 된 바로 그 사람)이 지휘하는 이스라엘군이 이집트군의 전투 지경선을 파고들어 수에즈 운하를 기습도 하해 텅텅 빈 수에즈 서안으로 밀고 들어가 수에즈 운하 남반부의 이집트 3군 병력을 포위하면서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3군을 포위 섬멸함으로 이집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려 했지만 이스라엘을 기사회생시킨 미국과 이집트, 시리아의 뒤에 있던 소련이 개입했습니다. 두 나라는 모두 이스라엘이 3군을 물리적으로 섬멸하여 이집트에 불필요한 굴욕을 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천명했으며 이스라엘이 포위된 3군에게 식량, 의료지원을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특히 키신저는 만약 이스라엘이 3군을 섬멸하려 한다면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이집트 편으로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선을 넘는 순간 이스라엘이 얻은 모든 성과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중대한 개입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대한 결정적인 설욕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외교적 승리만 거둔 수에즈 전쟁이나 군사적으로 재앙적으로 가깝게 패한 6일 전쟁과 달리 이집트 쪽이 외교적, 군사적으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던 지상전과 달리 해상전에선 이스라엘 해군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개전 첫날 저녁 시리아 라타키아항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자국산 가브리엘 함대함 미사일을 이용해 시리아 해군 소속 미사일 고속정  3척과 어뢰정 1척, 소해정 1척을 격침시켰고 시리아군이 발사한 스틱스 미사일은 ECM에 의해 모조리 빗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후 발팀에서 벌어진 이집트 해군과의 결전에서도, 이스라엘군 고속정 6척이 이집트군 고속정 4척 중 3척을 격침시키는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6. 결과

개전 초기 궁지에 몰리게 된 이스라엘은 자국의 핵미사일 제리코 1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이집트 또한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핵탄두가 탑재 가능한 스커드 미사일 B형으로 반격할 준비를 해 핵전쟁으로 확전 될 양상을 보인 무시무시한 전쟁이었습니다. 게다가 양측을 지원했던 미국의 닉슨과 키신져, 소련의 브레즈네프와 각료들은 서로의 잘못된 판단과 오해가 쌓여 이스라엘과 이집트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초강대국 간의 전면 핵전쟁 직전의 상태까지 갈 뻔했습니다.

 

이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대의 전면 핵전쟁 위기였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두 번에 걸친 정전 시도가 무산되자 위험천만한 미-소 대립 양상으로 치닫긴 했지만, 미국에서 소련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데프콘이 상향 조정되었다는 주장은 과장에 가깝습니다.

 

여러 학자들도 굳이 핵무기가 아닌 재래식 병력도 소련이 실제로 투입했을 가능성이 적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24-25일의 위기는 브레즈 네프의 과장 섞인 일방적 개입 위협과 극도로 긴장을 탄 키신저의 강경 대응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우발적 핵전쟁 문서에도 나와있듯, 그 이후 사소한 오해나 경솔한 행동이 누적되어 핵전쟁이 발발했을 위험은 충분하지만 말입니다.

이스라엘군은 그렇게 자랑하던 정예 기갑부대와 공군이 이스라엘군의 자만심과 방심으로 인해 이집트 대전차 보병들과 방공군에게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이 닥치면 자연히 해결된다는 임기응변적 사상과 예비군을 빨리 소집하면 된다는 현역병 최소화 사상이 동시에 파기됩니다.

 

이는 실제로 전쟁에 돌입하니 예비군이 동원 완료되는 72시간을 소수의 현역병이 다수의 적군을 상대로 버티지 못해서 파국이 일어났으며, 후방에 비축해둔 물자도 일선 부대로 제대로 수송되지 않아 곤란을 겪었습니다. 전후 탈 장군(메르카바 전차 개발로 유명합니다.)에 의하면 이스라엘군이 소모한 각종 탄약은 비축되어 있던 물량 내였고 유일하게 175mm 포탄(M107 자주포)만 비축분을 다 소모하고 미국의 긴급지원 포탄까지 사용했을 뿐 105mm 전차포탄의 경우 약 30만 발의 비축분 중 절반 정도를 소모했다고 합니다.

 

급박한 전황 속에 보급체계도 혼돈에 빠져 급한 대로 전방 탄약고들의 탄약들이 우선 일선 부대에 공급되어 소모된 후 후방 비축탄들이 보급대의 트럭에 실린 채 원활하게 보급되지 않아 일선 부대들이 탄약 부족에 시달린 것입니다.

무엇보다 극심한 소모전을 겪고 나니 세 집 걸러 한 집 꼴로 집안 남자들이 죽어서 돌아오는 끔찍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때 다수의 이스라엘군 장교와 장군들이 전사해서 여단장과 대대장, 중대장이 전사하지 않은 부대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에 이스라엘은 사회적으로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사전에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난 여론이 빗발쳐 이스라엘 의회에서는 전쟁 대비 실패에 대한 조사를 위해 아그라 나트 위원회가 구성되어 청문회를 벌였고,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모세다 얀 국방장관은 하루아침에 나라를 말아먹을 뻔한 졸장이 되어 사직서를 내야만 했습니다. 전쟁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은 간신히 승리를 거두고 메이어는 총리직은 유지하긴 했으나, 결국 새 내각이 구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어 역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임해야만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수많은 전쟁 영웅들, 이스라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장성들이 되려 범죄자들로 몰리면서 많은 수의 별이 떨어지고 배신감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난 장성들과 고급 장교들의 수도 상당했습니다. 이스라엘군에서 가장 미약하고 천대받던 해군 만이 라타키아 해전의 승리 덕분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중동의 지역 강국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무너졌으며, 언제든지 전멸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이스라엘 스스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는 비교적 온건파인 노동당 내각을 무너뜨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과격파들 간의 난맥상을 낳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군사전략은 다시 6 일전쟁 때처럼 외부의 위협이 들이닥치기 전에 예방적으로 선제공격으로 회귀했고, 이는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에서 증명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F-15 전투기를 해외 도입국 중 세계 최초로 도입하고, 자국 사정에 걸맞은 메르카바 전차를 개발하는 등 무기 도입 과정에서 욤 키푸르 전쟁의 뼈저린 교훈을 대폭 반영했고, 1982년 레바논 내전에서 일방적으로 시리아군을 격파하며 복수를 단행합니다.

한편, 이집트는 놀라운 선전 덕에 협상 테이블에서 당당한 기조를 유지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군이 반격하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는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집트 역시 전보다 훨씬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보다 더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는 사실은 지난 전쟁과 똑같았고,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무릎 꿇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사다트는 이스라엘과의 화평 정책으로 외교정책을 180도 선회했습니다.

 

결국 이집트에게 입은 피해와 이집트의 전향적 태도에 이스라엘이 한 발 양보해 1974년 시나이 잠정 협정으로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습니다. 그 후 몇 년에 걸친 협상 끝에 지미 카터 행정부 때인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워싱턴 D.C.  협정으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 후 시나이 반도는 1982년 완전히 이집트의 손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다트 대통령은 이 공로로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과 함께 78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지만,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체결에 반발한 이슬람 과격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그리고는 전쟁 중에 활약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권좌에 앉아 30년간 집권하게 됩니다.

이는 아직도 골란고원을 못 찾은 시리아와 비교되는데, 사실 골란 고원의 전략적 가치는 단순한 완충지대인 시나이 반도와는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골란 고원을 차지하면 고지대에서 이스라엘 영토를 내려다볼 수 있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요르단 강을 수원을 차단하여 이스라엘의 목을 죄는 게 가능하게 되기 때문. 단 이 경우 요르단도 같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방어에 성공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영토를 되찾는 데 성공한 이집트도 전략적으로 성공을 이뤘다고 할 수 있지만 시리아는 빼도 박도 못하게 완벽한 패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집트는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이기지 못한 적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는 점을 근거로 이 전쟁을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으로 대대적으로 기념합니다.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한 10월 6일은 이집트의 국경일인 국군의 날로 지정되어 있으며 10월 6일(السادس من أكتوبر‎), 또는 라마단 10일(العاشر من رمضان)이라는 지명이 이집트 곳곳에 존재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협정을 체결하면서 시나이 반도를 포기한 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는데 우선 시나이에 사는 베드인 유목민에게 자치권을 주면서 달래고 유전 탐사 등 시나이 반도 내 여러 지하자원 개발을 실시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여러 곳 건설하는 등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점령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통치 자체는 꽤나 안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직후 닥친 오일 쇼크로 인해 이스라엘 경제가 휘청하면서 안 그래도 군사비 확보를 위해 쩔쩔매는 이스라엘이 막대한 돈을 들여 이스라엘 본토 면 적에 3배에 달하는 시나이 반도를 개발해야 할 동기를 상실하였습니다.

 

또 시나이 개발을 위해서는 인구가 필요한데 당시 1980년 당시의 이집트의 인구는 약 4500만 명이었던 것에 반해 이스라엘 인구는 고작 390만 명에 불과하여 이스라엘은 부족한 인구를 늘리기 위해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여기 유대인들은 당연히 위험한 데 오기 싫어하여 거부했습니다.

 

 동원 병력 또한 차이가 났는데 이스라엘은 예비군까지 포함해서 총력전으로 열심히 긁어모은 병력이 41만 5천 명이었던데 반해 이집트 주도의 아랍 연합군 측은 백만이 넘었고, 이것도 전력을 동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 없이 이스라엘군만으로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을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에서 밀어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이는 이집트가 6일 전쟁 이전 영토를 모두 차지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소련이 정전에 합의하자, 이스라엘과 이집트도 협상에 들어가 국경선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7. 전쟁 영향

제4차 중동전쟁은 여러 가지 일화를 만들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수출을 금하는 바람에 오일쇼크가 발생해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때의 오일쇼크로 이스라엘 경제도 큰 타격을 입어서 1970년대 중후반에 두 자릿수대, 1980년대 상반기에 세 자릿수대 인플레이션으로 경기침체를 겪게 되었습니다.

 

특히 1984년 당시의 물가상승률은 445%를 기록하여 중남미 국가들을 제치고 세계 최악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렸습니다. 이 탓에 1977년 총선에서 리쿠드가 집권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를 내주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플레이션 문제는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해결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이미 위력을 보여준 지대공 미사일은 여기서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는 미국에 자극을 주어 페트리어트 미사일이 부활하는 데에 기폭제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이전까지 무적을 자랑했던 전차부대가 대전차 미사일에 농락당하면서, 전차 무용론까지 등장할 정도로 군사 학계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제기된 전차 무용론은 보병 등의 지원 세력이 없는 전차부대의 단독 공격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이 골자이며, 보병-전차 합동 전술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었습니다.

 

또한 전차의 장갑 강화와 정밀 FCS 도입을 골자로 한 3세대 전차 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쟁의 당사자인 이스라엘군에서는 단시간에 숙련된 기갑 병력이 쓸려나간 뼈저린 교훈으로 주력 전차인 메르카바 전차의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메르카바의 특징인 보병 탑승 능력과 승무원의 생존성에 대한 집착 등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개전 당일 이스라엘 공군의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대공전력 중 SA-6에 대한 ECM 미비와 이스라엘 해군의 스틱스 교란 성공은 이후 서방, 특히 미국의 ECM 및 ECCM 개발 집착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즉, 현대전과 근미래 전의 다양한 무기체계 및 전술 개념과 그 효용이 이 전쟁에서 확고해진 것입니다.

또한, 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주변의 여러 아랍 국가들 중에서 유달리 이집트와 과하게 적대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할 수 있는 세력과의 적대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건국 이래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던 데다 환골탈태한 이집트에게 제일 피해를 많이 본 뒤, 이집트만 배제시켜도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월등히 유리해짐을 깨달은 것입니다. 거기에 사다트와 무바라크 정권도 이스라엘과 크게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고 있어, 시나이 반도 쪽은 그나마 평화로워졌습니다. 2018년 경, 시나이 반도의 다에시를 소탕하기 위해 이집트군이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했는데 이스라엘을 자극할 소지가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은 이를 묵인하며 오히려 협력하는 모습까지 보여줬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역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 가운데 군사력이 이스라엘에 비해 뒤처지지 않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크게 개선하였습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무력을 포함한 분쟁을 겪는 국가는 레바논이나 시리아 같은 중동 내에서도 군사력이 한 수 아래이거나 혼란 속에 빠진 국가들이며 그 이외에는 이란, 이라크, 오만, 쿠웨이트, 기타 북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국경을 맞닿지도 않으며 거리가 멀어 실제적인 군사력 투입이 서로 무리인 국가 정도입니다.

인구가 적어 전쟁을 수행할 인원이 늘 부족한 이스라엘군이지만 이 전쟁에서의 병력 부족은 여러모로 치명적이었고 이를 벌충하기 위해 징병제는 꾸준히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성까지 징병하고 3년 가까운 기간을 청년들을 군대에 붙잡아 놓고 있어 이스라엘 사회가 군국주의, 근본주의에 경도되고 보수화, 극우화가 진행됨에도 징병이 면제된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인 하레디가 사회적인 혜택에 힘입어 꾸준히 늘어나고 젊은이들의 군 기피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징병 가능 인원이 계속 줄어들자 결국 반발을 무릅쓰고 하레디에 대한 징병을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제4차 중동전쟁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에 시큰둥했고 오히려 중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트러블메이커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미국이 대놓고 이스라엘 편을 들면서 2020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밀월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몇 년 뒤 미국의 주요 중동 파트너인 이란 팔라비 왕조가 붕괴하면서 더욱 이러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걸프전쟁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주요 우방이 된 이후에도 미국-이스라엘의 밀월관계(라기보다는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관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친 이스라엘 정책은 이스라엘과 관계가 험악한 중동 주요 국가가 미국을 더욱 혐오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미국의 중동 정책에 운신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미국 정계에서도 맹목적인 이스라엘 편애와 지원이 얻는 이득(이스라엘과의 관계 유지, 미국 내 유대인의 자본 및 지지 확보)에 비해 손실(석유, 중동에서의 외교 전략의 한계, 중동 및 이슬람계 테러 조직의 준동 등)이 크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조금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은 있었으나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오히려 더욱 강해진 친 이스라엘 외교 정책을 꺼내 들면서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 

 

그러나 2020년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낙선하고, 중동 이슬람권과의 관계 개선을 주창하는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 역시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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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중동전쟁 썸네일

이번에는 중동전쟁에 3번째 이야기 3차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차 중동전쟁은 6일전쟁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1. 개요
  2. 전쟁 배경
  3. 전쟁의 시작
  4. 분석및 결과

1개요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두어 엄청난 영토를 획득했던 전쟁. 6일 전쟁이라는 별명으로 매우 유명하다. 아랍 측에서는 6월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1,2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국제정세나 여론이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세계의 눈치를 많이 보던 상황에서 전쟁 발발 시 UN의 개입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UN이 개입하고 중재하는 순간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작전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UN이 개입하기 전의 단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장기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 언론에서는 이집트군의 가짜 승리를 계속 보도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로운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이스라엘의 승전보가 세계에 최대한 늦게 알려지는 것이 도움이 됐기 때문입니다.

 

 


2.전쟁 배경

제2차 중동전쟁에서 압도적인 패전을 당하고도,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 둔 이집트의 가멀 압델 나세르는 아랍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야심 차게 전쟁준비에 나서게 됩니다. 소련의 군사고문단과 최신 장비를 들여와 전쟁준비에 나서며, 한편으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물밑 지원하면서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합니다.

 

한편, 예루살렘 서안지구를 두고 충돌을 계속하던 요르단 및 골란고원을 거점으로 이스라엘과 무력충돌을 벌이던 시리아 역시 이집트와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아랍국과의 국경선에서 일부러 도발을 걸며 영토를 확장시키고 있었습니다.

 

원래 6일 전쟁 이전의 이스라엘 영토는 상당히 작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좁은 영토 때문에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게다가 영토 형상의 문제상 임시수도인 텔아비브가 조금만 밀리면, 함락돼서 국토가 양분될 지경이었을 정도로 중부 이스라엘 쪽 땅이 취약했습니다.

 

이후 6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얻어낸 땅을 합쳐도 남한 크기에 못 미쳤고, 가장 큰 적인 이집트와의 화해 및 현실적으로 인구문제상 관리가 힘든 시나이 지역을 돌려주면서, 현재 영토는 남한의 1/5밖에 안 되며…. 그래서 이스라엘은 빠져나갈 구멍을 둔 도발을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호 간에 비무장지대로 합의했던 곳에 경작용 트랙터를 끌고 들어가는 등의 수단으로 아랍 병사들의 선제공격을 유도했습니다.

 

아랍 병사들이 경고사격이라도 하는 순간에 국지전으로까지 전투가 확대되는 등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 이어졌으며,

그래서 제2차 중동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은 자국의 정보력을 모조리 쏟아 부어 주변국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며 전쟁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적자원의 불리함과 좁은 영토 때문에, 장기적인 소모 방어전에 유리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선제타격론으로 대표되는 예방전쟁이 군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실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제2차 중동전쟁인 수에즈 전쟁에서 나세르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군사적으로 크게 패하고도 정치적으로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때문에 나세르는 이번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시위를 통해 강력한 압박을 줌으로써,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입지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례로 이스라엘의 항구로 향하는 선박을 봉쇄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집트 공수부대는 대전차화기, 대공포, 해안포는 배치했지만, 실제 봉쇄에 중요한 기뢰는 전혀 부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이집트의 움직임이 대하서 블러핑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야 조금만 잘못 했다간 지중해 앞바다에 온 국민이 몸을 던져 죽는 수도 있는 판국이었고 주변국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결코 녹록하게 대처할 수도 없었습니다. 앞선 2차 중동전쟁도 이스라엘에서 나세르가 아랍의 결집을 위해 이스라엘을 제물로 삼을 것이 틀림없다고 이스라엘에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나세르는 3차 중동전쟁의 전야는 물론이고 2차 중동전쟁의 전야에도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가 원하던 것은 이집트를 맹주로 하는 아랍의 통합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이집트군은 예멘에서 벌어지던 왕당파와 살레의 공화파 간의 내전에 정규군 절반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심각한 손실로 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또한 당시 공군 원수인 압둘 하킴 아메르 원수의 무능함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습니다. 경직된 지휘체계와 무능력한 아메르로 인해, 이집트 공군은 공습으로부터 전투기를 보호할 쉘터 하나도 짓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압둘 하킴 아메르는 이미 2차 중동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임박했음에도, 모든 보고를 무시한 채 술과 노래로 세월을 보내며 태업을 한 무능의 대명사로서, 그 대가로 이집트는 수에즈 일대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이집트의 유능한 장교들은 이스라엘의 군사전략을 조사하고 중동전쟁의 대세는 장차 선재공격이 될 것이라며 이스라엘이 선제공격하기 전에 먼저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상부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다 떠나서 나세르는 유대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정신론적, 혈 통론적인 우월성을 맹신하면서 결전의 날이 온다면 퇴폐 서구 문명에 물든 '겁쟁이' 이스라엘은 허망하게 무너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대(對) 이스라엘 압박용으로 시나이 지역에 이집트군을 전개시켜 놓긴 했지만, 이는 블러핑 용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과 아랍권 전역에 보여주기 위한 쇼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을 집중 타격할 것으로 보였던 3국(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들 중에 그나마 이스라엘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요르단으로, 요르단 국왕 후세인1세는 대표적인 평화주의자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당시 이집트가 주도했던 언론플레이에 전(全) 아랍권이 광분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친(親) 이스라엘적 태도를 취했다가는 정권이 위태로운 처지였습니다.

 

요르단군은 이집트군의 전쟁 개시에 따라 군사행동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소나마 전쟁준비가 되어있긴 하지만, 실제 이집트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요르단의 준비는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리아군은 쿠데타에 가까운 정권 싸움 때문에(…) 이스라엘 공격 (혹은 방어)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리아군의 태도는 6일 전쟁 발발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초기 이스라엘의 기습을 받고도 언론플레이로 거짓 승리를 보도한 이집트 덕분에 계속 정권 싸움을 하고 있었고(…), 이집트군의 패퇴 이후에는 다소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UN에 의한 정전협정이 발효되자 다시 정권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집트 정보부는 해안봉쇄가 시작되며 이스라엘 내부에서 선제타격을 준비한다는 것을 포착했지만, 이 정보 역시 경직된 조직 탓으로 상부로 전달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형식적이지만 이집트의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여론은 매우 심각해집니다.

 

사실 이집트도 '아랍의 소리'란 라디오 방송으로 중동 여론을 선동하고 있었으며, 이 방송은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멸망을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과의 협상을 준비하려던 장관이 실각하고, 선제타격론파가 정권을 잡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동원령이 내려지기 시작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실제로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소련이 문제였습니다. 소련이 아랍 세력을 지원한다면, 중동의 문제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판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소련에게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연막을 치고 있었고, 다른 아랍국가들 역시 자신들의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18년간 불리한 전세를 한 번에 역전시킬 선제타격론 교리가 연구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개전 48시간 동안 상대의 공군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사막에서의 전쟁은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집트가 먼저 선제타격을 가해 이스라엘의 공군력에 큰 타격을 준다면, 좁은 영토와 부족한 인적자원을 가진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 될 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망의 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3.전쟁의 시작

6월 5일,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시간을 노려,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은 사막에서 초저공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기지들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을 자랑하던 이집트 공군에 대해 주요 공곤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동시에  기습폭격을 가했습니다.

 

약 3시간에 걸친 폭격으로, 이집트 공군은 450여 대의 항공기 중 300여 대를 상실하고, 공군기지와 레이더 기지 등을 모조리 잃는 엄청난 피해를 입습니다. 단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력 80%를 격파한 것입니다. 이후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이집트 영토를 오가며, 그야말로 이집트군을 초토화시키며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자국 영토의 3배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해 현대 전사(現代戰史)의 전설을 만들게 됩니다.

이집트 육군은 이스라엘군의 번개 같은 진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집트군은 나세르의 최측근이었던 압둘 하킴 아메르 공군원수 겸 국방장관이 시리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모든 최전선 지휘관들이 아메르를 마중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야 했고 지휘 공백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집트 육군에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제2차 중동전쟁 당시 돌파되었던 구역인 시나이 반도 방면 이스라엘 국경선의 중앙부와 남부에 강력한 병력을 모아둔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해당 방면으로 이스라엘군의 공격이 들어오면, 반격해서 꺾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좁은 남단부 영토를 관통해서 요르단과 직접 연결한 다음,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이번에는 국경선의 북부에서 강력한 공세를 해서 돌파에 성공했으며, 이후 아부 아게일라 전투에서 패하면서 시나이 반도의 전군이 포위당할 위험성에 빠지자 패주(敗走)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에 도착한 뒤였다(…). 이스라엘군은 공세가 한 번 실패하면 자국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절박감에 고속 공세를 단행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나 공세에만 목을 메달았는지 전차 부대의 기동력을 보급이 못따라가자 헬리콥터로 급히 공수했으며 전투식량이 떨어지자 보급을 기다리지 않고 장군들도 주스로 떼웠을 정도였으며 이집트군 포로가 발생하면 생수 하나 던져준 채 그대로 풀어주고 목표를 향해 기동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집트군 방어 거점이 있을 경우 후방 부대에게 소탕을 맡기고 그대로 무시하고 진격하는 기동부대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 소탕에 몰두하다가 시간을 뺏겨 UN에게 저지당하기 이전에 차라리 수에즈 운하 주요 거점을 고속 기동으로 선제 장악해 이집트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시나이 반도의 방어병력을 포위 섬멸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삼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는 개전 뒤 1시간이 지난 후부터 요르단군과 이스라엘군의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서로 예비군을 주축으로 하여 지루한 대치전 양상을 보이다가, 7일을 기점으로 이스라엘군이 전차를 동반한 부대가 강습하며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요르단 군은 그 명성답게 가장 정예화되고 훈련도가 높은 군대라, 이스라엘군이 초반에 매우 힘들어했지만, 장비가 부실하고 제공권을 상실한 처지라서 결국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서안에 남은 요르단 군은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결국 패주 하여 요르단강 동쪽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시리아군은 뒤늦게 실전에 참가했는데, 이들은 이집트군이 신나게 깨지고 있는줄은 상상도 못 하고 이집트군이 자신들이 승리하고 있다는 자체 주장을 정말인 줄 알고 참전(…)했다가, 개전 첫날 이집트군을 개박살내고 돌아온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 폭격을 당해, 역시 2/3의 전력을 상실하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습니다.

 

일부 지상군은 이스라엘 국내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아랍국들 간의 상호불신과 지휘체계의 혼란으로 대부분 격퇴당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국제사회의 개입을 더욱 빨리 요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내부 깊숙이까지 진격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으나, 국제사회 개입보다는 전선에서 싸우던 시리아군이 그 소식에 먼저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그나마 끝까지 남아있던 기갑부대가 요르단강에서 수장당하면서, 아예 지상공격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집트와 요르단을 박살 낸 이스라엘은 마지막 남은 골칫거리인 골란고원 요새에 대한 전면공격을 결정하고 전력을 투입합니다.

골란고원은 해발고도 500m의 바위산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서, 엄폐물도 찾기 힘든 척박한 지역이었습니다. 여기에 두꺼운 콘크리트 요새를 다중 철조망으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에도 시리아군의 병력 상실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은 그 난공불락의 절벽을 전차와 기계화보병이 탑승한 장갑차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골란고원은 땅이 자잘히 부서지는현무아  이라 폭약으로 현무암 바위를 부수고 그 지역을 불도저로 길을 닦으며 올라갔다. 거기다가 엘리 코헨이 상세히 관찰한 골란 고원에 대한 정보들은 이스라엘군의 요새 점령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시리아군의 지뢰지대와 포격을 버텨 내면서 여단 내 90%의 사상자가 나오면서도 현무암을 부수고 길을 내느라 철조망을 부술 폭약이 모두 소진되자 철조망을 돌파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군은 그동안 올라오느라 8명밖에 남지 않은 병력 중 일부가 자신의 몸을 철조망에 내 던져서 자기 몸에 덮어 얼마 안 남은 전우들이 지나갈 수 있게끔 길을 내어 주었고 결국 9일 밤 이처럼 이스라엘군의 처절한 진격에 방어선이 뚫리자, 날이 밝기도 전에 모든 병력이 철수해 버렸고 골란고원에 이스라엘 국기가 올려졌다. 

이를 지켜보던 골라니 여단의 여단장 요나 여단장은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골란 고원에 이스라엘 깃발이 올라왔고. 이를 망원경으로 보던 여단장은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시리아의 이러한 졸전과 이스라엘군의 영토 확장 능력에 놀란 국제사회는 즉각 정전을 요구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랍세계에서 서방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한 소련의 압박에 못 이겨 이스라엘은 정전(停戰)에 수락합니다.

 

하지만 소련 내 강경파 군부는 실제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군부의 계획대로라면 이스라엘에 소련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예정이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소련 상륙군에 이스라엘의 폭격이 가해지는 즉시 소련의 직접 개입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그런 상황이라면 미군 역시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즉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계획을 알게 된 소련 수뇌부가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막고 정전을 요구하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시켰습니다. 사실 소련이 선전하고 다니던 군사압박 역시 아랍권에 대한 립 서비스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6월 10일 오후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아랍 3국은 중동 불패 이스라엘군의 전설을 하나 더 만들어줬습니다. 

 

 

 


4. 분석 및 결과

6일 전쟁의 발발 원인은 실제 이스라엘의 예방전쟁적 성향도 있었지만 이스라엘로서는 이집트(정확히는 나세르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세르는 언론과 군사적 선계 공격의 가능성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궁지로 모는 정치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선제공격과 승리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는 이집트의 군사적 위협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와 같은 굴욕(?)을 견뎌낸다면, 평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내는 바로 이집트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더불어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내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세르 역시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예상도 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군의 공세에 이집트군이 어느 정도 방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집트군이 방어를 하는 사이에 국제사회의 중재가 개입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중재로 정전이 발효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세계에 대한 이집트의 정치, 외교적 선전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으니까. 다만 이스라엘군이 예상보다 너무 강했고, 이집트군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능했다 보니,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은 요르단의 입지가 이스라엘이나 아랍 측 모두에게 크게 상승하는 영향을 주었습니다. 물론 요르단도 풍요로운 요르단강 서안을 날려먹은 데다가 관광수입 측면에서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상실해서 큰 타격을 입었고, 영토 회복을 위한 모든 노력이 불가능해지는 등의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패전의 와중에서도 끝까지 가장 잘 싸운 국가로 인정받았기에, 제4차 중동전쟁부터는 이스라엘과도 암묵적인 우호관계를 맺고, 아랍 측에도 나름대로 군사지원을 하는 등의 양다리를 걸쳐도,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 위치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런 위치는 앞서 언급했듯 제3차 중동전쟁 때까지 이스라엘과의 교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도록 아랍 측에게 압박받은 것과는 천지차이로 달라진 것입니다. 물론 이걸로 당시 요르단 GDP 40% 이상을 생산하던 요르단강 서부 영토의 상실로 인한 영토 축소 + 경제, 인구의 대손실을 메꾸기엔 너무 손해지만... 지도에 나온 요르단강 서안지구가 1967년에 빼앗긴 요르단 영토입니다. 골란고원은 돌덩이, 시나이 반도는 사막으로 전략적 요충지지만, 인구, 경제면에선 큰 도움이 안 되는데, 이 요르단강 서안 지역 땅은 전략적 요충지 + 경제적 요지라 이후 이스라엘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이집트는 자만심과 독재 체제 특유의 경직된 의사결정 시스템으로 인해 결정적인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제 무기들을 대량으로 들여와 군사력을 강화한 것은 좋은데  이를 아랍민족주의와 연계해 정치적으로만 활용하려 했었고, 자신들의 군사력을 믿고 자신만만해한 결과 이스라엘과 전쟁하면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약점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으며 결국 이스라엘군에 제대로 허를 찔리게 된 셈이었습니다.

한편 나세르는 종전 3일 뒤 대국민 방송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하야할 것을 표명했지만, 이후 3주 동안 거리로 국민들이 밀려 나와 외치는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는 아우성에 "그렇다면 국민들의 의사에 따라 다시 복귀하겠다." 고 밝히고 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나세르의 정적, 이스라엘, 미국 등은 이 같은 과정을 나세르의 정치적 쇼로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국방장관 아메르는 패전의 책임으로 실각했으며, 이후 자신의 오랜 친구인 나세르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한다.

그동안 시리아는 골란 고원을 통해 이스라엘을 내려다보며 공격을 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유일한 수자원인 갈릴리 호수로부터의 상수도 공급을 불안정하게 할 수 있었으나 전쟁의 참패를 통해 전략적 거점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균형의 추가 완전히 이스라엘에게 기울어지는 수모를 당했습닏.

그리고 50년 만에 기밀문서를 공개하면서 이스라엘이 이집트 니나 이반도에서 핵폭탄 투하 계획을 가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쟁 이후인 1967년 11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는 이스라엘이 이 전쟁으로 인한 점령지에서 즉각 철수할 것을 주장하는 결의안(242호)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결의안을 무시하였고, 현실적인 통치의 어려움이 생긴 시이 이반도를 1981년 이집트 측에 반환한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점령지들(골란고원,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지구 등)을 자국의 영토로 삼고 있습니다.

6일 전쟁 당시 텔아비브는 이스라엘의 임시수도, (1948년~1977년)였다. 국운을 걸고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도시계획을 수립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국회의사당과 중앙정부청사와 대법원 및 복지부처와 공안기관(공안부+경찰청+소방청+교 도청)과 이스라엘 은행을 차례로 이전했습니다.

 

그래서 1977년에 이르면 예루살렘이 명실상부한 행정수도로 탈바꿈했지만, 국내외의 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여 경제부처와 방위기관(국방부+육군청+해군청+공군청)과 국유기업 및 대사 관관 공사관과 영사관은 텔 아비브 시내에 있는데, 최근에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앞장서서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했으며, 과테말라, 루마니아 등 몇몇 나라들이 상당수 국가가 대사관을 인전 하거나 고려하는 중입니다.

전쟁 도중인 6월 8일에 이스라엘군의 전투기와 어뢰정이 미군 정보 수집함 USS 리버티를 공격하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리버티 사건. 이 공격으로 34명이 사망하고 17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함선 자체도 크게 파손당했습니다.

 

당시 함장인 윌리엄 로렌 맥고나글(William L. McGonagle)은 본인도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사태를 수습하고 함선을 살렸습니다. 이 공으로 맥고나글 함장은 명예 훈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임무 자체가 기밀인 데다, 미국은 이스라엘과의 외교 문제 때문에 이 사건을 은폐해야 했습니다. 결국 사건은 한참 뒤에야 알려졌으며 일부 자세한 사안은 아직도 비밀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맥고나걸의 명예훈장 수여식조차 비밀리에 매우 조촐하게 치러야 했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얼마나 이집트군이 속절없이 털렸는지 수백 대의 이지브군 전차들이 상태가 온전한 채로 이스라엘군에 노획될 지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 T-55  전차들을 티란으로 개조해 쏠쏠하게 써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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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또는 시나이 전쟁) - 1956년 발발

2차중동전쟁썸네일

이번에는 2차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1. 개요
  2. 전쟁배경배경
  3. 전쟁 전황
  4. 전쟁 영향
  5. 학살
  6. 여담

1. 개요

제2차 중동전쟁.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이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공격해 일어난 전쟁. 이스라엘 측은 시나이 전쟁(카데쉬 작전)이라고도 한다. 이집트(아랍 연맹 측)에서는 삼국 침략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전쟁 기간은 1956년 10월 29일~ 1957년 3월.

 


2. 전쟁 배경

1956년 7월 26일 ,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양팔 외교전략을 취했습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아스완 댐을 짓고, 소련과 무기 협정을 맺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도입하려 했던 것. 하지만 동유럽산 무기 도입 때문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측은 아스완 댐 건설비용 지원을 거부했고, 이에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은 다음번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친소 노선을 펼치며 수에즈 운하를 집어삼킨 이집트에 영국과 프랑스는 크게 반발하였고,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선박이 수에즈 운하 통과를 금지당하는 데 크게 격분했습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는 단순히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 재산 피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를 연상시키는 침략적 팽창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1930년대 히틀러를 상대했던 앤서니 이든, 영국 총리는 나세르를 중동의 히틀러로 간주하였고, 제2의 히틀러가 중동에서 패권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방지하는 예방전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나세르의 행동을 징벌하지 않으면, 나세르가 서방을 우습게 알고 폭주할 것이라 여겨 군사행동을 결의하였으며 이집트에게 큰 위협을 느끼던 이스라엘 역시 동맹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사실 비단 수에즈 운하만이 이 전쟁의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이든 정권은 이라크에서 값싸게 석유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나세르가 훼방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나세르는 이집트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 아랍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이라크에서 영국의 입김을 제거하려 들었고 영국은 이에 열 받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기 몰레 정권 역시 나세르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었는데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알제리 전쟁에 나세르가 개입하여 반프랑스 게릴라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이집트를 타격할 준비를 하는 한편 이스라엘에 프랑스제 최신 병기를 지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름대로 고민이 컸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호전적인 나세르가 선제공격을 해올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고 당시 가자지구에서 양측 간 계속된 제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전과가 훨씬 크긴 했어도 이스라엘에 지속적으로 타격을 주는 팔레스타인 민족 게릴라인 페다이가 나세르의 지원을 받아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들 페다인에 의해 이스라엘의 한 키부츠 지도자인 로이 로스버그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모세다 얀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정당한 싸움을 하는 저들이 어중간한 대응으론 절대로 우리를 모두 죽이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테니 유대인들이 살기 위해서는 외세의 간교한 평화협상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면서 투지를 불태웠습니다.

 

 

 

 


3. 전쟁 전황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삼국 외무장관은 셰브르에서 3자 회담을 벌였다. 이집트 공격을 결의했는지 안 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쳐서 싸우고 있으면 영국과 프랑스가 질서유지를 구실로 개입하는 구도로 진행되어야 했지만, 양측은 전쟁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고, 이스라엘군이 혼자서 이집트를 거의 발라버렸습니다. 이스라엘 국경의 시나이 반도 방향에서 시작된 공세는 전선 중앙부와 남부 방향의 돌파로 일찍 전세가 결정돼버렸고 11월 5일,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시나이 반도의 최남단까지 모조리 점령하여 전쟁은 이집트의 완패로 마무리될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영국 공순 부대와 프랑스 외인부대가 도착하여 이집트는 완전히 3면에서 적군의 공격을 받는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자신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는 것에 분노해 압박을 넣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핵전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던 소련도 이집트를 감싸며 핵폭격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세르가 중동의 히틀러이며 나세르를 좌시하는 것은 1930년대 유럽의 참사를 재현할 것이라는 인식을 전혀 공유하지 않았던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과격한 군사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당연히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미국으로선 '고작' 수에즈 운하 하나 때문에 소련과의 전면 핵전쟁까지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행동은 제국주의의 뽕에 취해서 수십 년 전처럼 식민정책을 유지하겠다는 행동이었으므로 도덕적 정당성도 부족했으며, 세계대전으로 식민지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유진영 국가의 이런 행동은 필연적으로 독립할 식민지 국가들을 죄다 공산국가로 만들 수도 있는 악수 중의 악수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소련이 무력을 사용해도 영국과 프랑스를 돕지 않겠다고 압박을 가했다습니다 더 나아가서 영국에 대한 재정지원 중단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석유 제재까지 가했습니다. 그리고 미 해군 6함대 소속 미드웨이급 항공모함  코랄 시와 에섹스급 항공모함 랜돌프가 지중해로 급파되어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무력시위를 했습니다. 미국이 정말로 양측과의 교전도 염두했는지 미 해군의 알레이 버크 제독이 당장 6함대 사령관에게 영국과 프랑스의 적대행위에 대배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정도. 결국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 초강대국들이 손 잡고 압박을 가하니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 백기 투항을 해야 했습니다.

 

UN의 중재로 1956년 11월 6일,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철군하고 1957년 3월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영-프 연합군의 재침과 소련군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미 해군의 포레스 탈급 항공모함 포레 스타일이 추가 증원되었습니다.

 


4. 전쟁 영향

영국과 프랑스는 가장 큰 손해를 봤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고도 오히려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두 나라가 우려했던 나세르를 중심으로 한 아람 민족주의의 단결과 이집트의 패권 차지라는 나세르의 목적에 오히려 힘을 실어준 격이었습니다. 서방 세계의 불협화음과 전후 영국의 결정적인 실책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이 사건은 당시 영국 총리였던 앤서니 이든이 최악의 건강 상태 속에서 제대로 된 판단과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던 것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대중들의 지지뿐 아니라 보수당의 지지까지 잃게 되어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당연히 정치인으로서의 생명도 끝났습니다.

이 전쟁이 끝난 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 핵전쟁의 위기에 닥치면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독자적인 핵전력 개발에 나서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2차 대전 기간 중에도 많은 연구를 해 왔고, 풍부한 핵연료와 실험지를 가진 호주의 도움까지 등에 업은 영국은 비교적 빨리 핵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프랑스는 진도가 늦었습니다. 거기에 먼저 핵클럽에 가입한 영국은 재빨리 자신들을 배신했던 미국 편에 붙어 프랑스의 핵개발에 딴지를 걸면서 올챙이 시절 모르는 개구리란 게 어떤 건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열 받은 프랑스 정부는 조국의 핵무장을 외치면서 막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후 1960년 샤를 드골이 재집권하여 알제리로 혼란스러웠던 프랑스의 내정을 휘어잡으면서 프랑스의 핵개발은 가속화됩니다. 이 와중에 영원히 자국 영토로 못 박으려던 알제리는 기어코 전쟁으로 독립해버렸습니다.

서방 세계의 패권이 영국, 프랑스가 아닌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국력 차이는 일찍이 미국이 압도한 지 오래였지만 수에즈 전쟁은 전 세계에 이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부 시각에서는 이 시점으로 서방 국가들이 (소련 제외) 국제 연합 UN의 눈치를 보는 새 시대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왜냐면 미국 또한 국제 사회 분위기로 인해 정책 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후로 미국 또한 베트남 전쟁 등 여러 국제사회 눈치에 더욱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시대의 변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 학살

한편 이집트 쪽에서 유대인을 향한 테러 공격과 게릴라가 있었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점령 당시에 이스라엘에 테러를 가했던 게릴라들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모고 한 민간닝들을 죽이고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유엔 소속의 의사들조차 그에 휘들리 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 다그 함마르셀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진위여부를 이스라엘에 추궁했고 이스라엘 크 세네트(이스라엘의 국회)에서도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있었다는 어찌 된 일이냐고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외무장관 골다 메이어는 '그런 것 없어요. 우릴 해방자로 반겨주던데?' 하고 잡아뗐으며, 참모총장 모셰 다얀은 아랍인들이 먼저 공격을 했기 때문에 죽인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작 데파이의 수장이었던 노인은 2003년에 페달이들은 중동전쟁 터지고 죄다 이집트로 진작에 달아났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페다이 혐의를 받고 죽은 사람들은 데파이와 친해서 떠벌리고 다녔던 사람들이라고. 어쨌든 유엔 감시단과 이스라엘의 합동 조사단은 300~500명가량의 무고한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살해된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미국 만화가 조 사코의 책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Footnotes in Gaza)>이 1956년 11월에 자행된 이스라엘군의 가자 주민 학살 사건을 다뤘습니다.

수상이었던 다비드 벤구리온은 미국에 다른 건 몰라도 가자 지구만큼은 이스라엘이 확보하겠다고 억지를 부렸지만 퇴짜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불과 11년 후에 제3차 중동전쟁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6. 여담

냉전 초기에 핵을 둘러싼 동맹국의 위기와 소련의 핵을 동원한 무력개입 협박,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소련이 정말로 핵을 동원해서 무력을 사용했다면 미국이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에 대한 논의 때문에 미국에서는 대체역사소설이나 첩보물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재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 의해 영화(1969)로도 제작된 레온 유리스의 소설  토파즈에서는 수에즈 위기 당시의 프랑스의 병크와 반미 노선, 소련에서 2차 대전 때부터 심어둔 프랑스 고위층 첩자에 의한 작품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작중에선 미국에 악몽과 같던 프랑스 NATO 탈퇴도 이 첩자와 소련이 이룩한 최고의 성과로 나옵니다.

 

이 작품에는 늙은 프랑스 대통령이 소련 첩자에게 자기도 모르게 놀아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름 자체는 창작된 가상의 인물로 나오지만 '반미 성향, 2차 대전 레지스탕스 출신, 강경 민족주의자' 성향에다 알제리 사건 등의 행적을 볼 때 샤를 드 골이 맞습니다.

이 내용은 1960년 대 초에 있었던 사파이어 스캔들을 소재로 각색한 것으로, 소련에서 망명한 KGB 고위 인사가 미국 정보당국에 프랑스의 정보기관과 드골 정부 고위층에 다수의 소련 스파이들이 침투해있다고 폭로한 사건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폭로는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 상호 불신을 고조시켜서 양국의 첩보 협력 관계를 한동안 마비시켰습니다.

포스트 아포클립스 소설 <해변에서(On the Beach)>에서는 수에즈 위기 때 소련에 대한 미국의 오인 공격으로 핵전쟁이 벌어졌다고 묘사합니다.

해리 터틀도브의 장편 대체 역사소설 <The World of Difference>에서는 미국과 소련 출신의 주인공 모두 수에즈 위기 당시 벌어진 아랍 공중전에 참가한 파일럿 출신이라는 언급이 있었습니다.

당시 캐나다의 총리였던 레스터 B. 피어슨은 이 전쟁을 중재한 공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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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중동전쟁 이스라엘건국 썸네일


목차

  1. 개요
  2. 상세정보
  3. 전력상황 1) 이스라엘 전력상황 2) 아랍국가 전력상황
  4. 전황
  5. 여담

 

1. 개요 1차 중동전쟁 - 이스라엘 건국

아랍권에서는 1948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여 1948 전쟁(1948حرب)이라고 부른다.

 


2.상세정보

2차 세계대전 종결 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무주공산이 된 팔레스타인 지역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를 둘러싸고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충돌이 지속되었으며, UN의 영국령 팔레스타인 영국령 팔레스타인 분할안도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지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지도


3. 전력상황

1) 이스라엘 전력상황

1947년 11월 하가 나는 1929년 폭동 이후로 잘 조직된 유대인 민방위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1936년~1938년 의 폭동 이후로, 2,000여 명의 직업군인과 한 달에 3~4일 정도 군사 훈련을 받는 만여 명의 지원자들이 이 정예부대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이 기동부대는 25살 이상의 지역단위 민방위군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35,000명 정도가 하가 나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이들은 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정규적인 군사집단이 아닌 지하조직 형태였기 때문에 화기 입수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1946년 다비드 벤구리온은 유대인 공동체가 비유대인들의 습격에 대항하여 스스로 방어할 수가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동구권 진영의 무기들로 무장하기 시작합니다. 1947년 9월, 하가 나는 1만 정의 소총과 702 정의 경기관총, 2,666 정의 기관단총, 186 정의 중기관총, 2인치 박격포 672문과 3인치 박격포 92문을 보유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47년 10월에서 48년 7월 사이, 무기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들은 3백만 발의 9mm 권총탄과 수류탄 15만 개, 기관단총 1만 6천 정, 3인치 박격포 210개를 생산하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수입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기는 부족하였고 평균적으로 하가 나의 대원 3명당 1개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정예부대도 3명당 무기 2자루 정도를 보유하는 것에 그쳤으며 그나마 M4 셔먼 30대로 쥐꼬리만큼의 기갑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전쟁 초기에 충분한 수량의 중기관총과 대포, 장갑차량이나 대전차, 대공 무기를 보유할 수 없었습니다.

2) 아랍연맹 전력 상황

팔레스타인은 국가적 무장단체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청년 측의 무장 조직이 있었다. 약 11,000~12,000명 정도가 존재했으며 크게 후 샤니 후타와 후샤니 나즈다 두 파벌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발발 이후에 팔레스타인 국가 방위군이 새로 조직되었으며 12월 아브 알 퀘디르 후세이니는 시리아에서 훈련된 100여 명의 아랍 성전 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몇몇 지원자들과 영국군 출신의 베테랑들과 합류합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군의 무장은 매우 안 습했는데, 1942년 이스라엘의 첩보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는 약 5만여 정의 화기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지만 굉장히 낡고 신뢰도가 낮았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경단 조직들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도 영국 식민 당국에게 총기를 요청하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총을 사서 조달하기도 했습니다.

아랍연합은 다양한 아랍국가에서 지원한 6천여 명의 자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아랍 해방군을 조직했고 파워 알 콰오지의 지휘 하에 사마리아와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에 파견했습니다.

요르단은 위에서 서술했듯이 영국군의 훈련 하에 정예부대를 보유했으며 8천 명에서 만 2천 명의 부대가 4개의 보병 및 기계화연대로 조직되어있었으며 40문의 야포와 75대의 장갑차를 보유했었습니다.

이라크 왕국은 12개 여단 21,000명의 군대를 보유했으며 영국제 전투기 100여대로 이루어진 공군까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 4개 보병여단을 파견했으나 최종적으로 만 5천 명에서 만 8천 명까지 증파했습니다. 5월 15일에는 이라크 공병대가 요르단 강에 가교를 건설하여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 아주 조금의 성과를 거둔 바는 있습니다. 이후, 나 블루스 예닌 툴 칼람 삼각지대 내에서 이스라엘군의 발악으로 격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위치를 고수한 바 있으며 이라크군은 예닌 지역을 사수하던 중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그나마 좀 나은 케이스이며

이집트 왕국은 약 4만여 명의 병력을 전개할 수 있었는데 군사적으로 적정 연령에 있는 인구 중 80%가 병역을 거부(…)했고 보급체계가 눈물겨워 국가 경계선 지역에만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초기에 병력만 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으며 영국제 25파운드 포 6문과 6파운드 대전차포 8문, 1 정의 중기관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집트 공군은 30기의 스핏파이어와 4기의 허리케인, C47 20기 등으로 폭격을 수행했습니다.

시리아는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만 2천여 명의 병력과 전차대대를 파견하였습니다. 5월 15일부터 16일에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마크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한 바 있으나 며칠 뒤에 다가니아에서 패주 합니다. 전반적으로 시리아군은 방어로 돌아선 6월 10일 이후 소규모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스라엘의 정착민 촌락에 소규모의 공격을 가했습니다.

레바논은 규모가 작은 3천5백 명의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천여 명의 침공군은 북부 갈릴리를 지나 이스라엘군과 교전하였으며 결국 1949년 3월 23일 휴전협정에 사인해 버렸습니다.

 


4. 전황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총리 디비드 벤구리온이 텔아비브 미술관의 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함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왕국, 이집트 왕국, 요르단은 아랍 연합군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여기에 사우디 아라비아, 예멘은 자금과 자원병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아랍 각지에서 지원자들로 구성된 아랍 해방군이 결성되어 파견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무력충돌 기간 동안 결성된 성전 군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스라엘군의 전력은 그야말로 보잘것없어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잡다한 무기들을 되는 대로 지급해서 총기를 든 병사 10명이 있으면 그중 7~8명은 각자 다른 탄을 사용하는 총기여서 탄약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부대에서는 소유한 총기에 넉넉한 탄약을 가진 병사가 주로 교전을 하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그 병사가 쉴 동안 그 총을 돌려쓰고 기지 방어만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에 반해 영국의 지도를 받은 정예군을 보유했던 요르단, 강력한 공군력을 가진 이집트, 이라크, 프랑스제 기갑장비로 무장한 시리아의 전력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방어에 주력하며 전선을 유지했습니다.

여기서 영국식 교육을 받았던 아랍 5개국 정규군에 맞서 싸운 이스라엘군의 전설이 시작됩니다.

지원도 보급도 모자란 판에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사용 가능한 모든 전략을 펼치며 총 20여 일간의 치역 한 공방전 속에서 이스라엘 군은 끝내 두 도시를 지켜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때 골다 메이어 총리의 명언도 나왔는데 :우리는 아랍을 상대로 한 최종병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면 끝장이라는 절박감이다. "

가장 격렬한 전투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테이비브 가도를 둘러싼 전선에서 벌어졌습니다. 5월 말부터 개시된 이스라엘의 공세로 인해 요르단 군은 패주 했고, 반격에 나섰던 이라크, 요르단 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북부와 남부 전선 역시 키부츠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대포까지 끌고 와 저항하는 이스라엘군에 막혀 진척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6월 11일 UN의 중재로 30일 동안 휴전이 선언되면서 양쪽 모두 숨 고르기를 할 시간을 벌었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미국 등 서방에서 무기를 대거 들여와 전력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7월 8일 이집트군의 기습으로 전쟁이 재개되자 이스라엘군은 방어에서 아랍 연합군에 대한 전면 공세로 전환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주변 거점을 점령하며 가나안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였습니다.

 

결국 10일 후인 7월 18일 UN의 중재 아래 2차 휴전이 선언되었습니다.

 

UN은 전쟁을 끝낼 중재안으로 또 다른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내놓았지만, 양쪽 모두 이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측은 도리어 분할안을 제안한 스웨덴 대표 폴케 베르나도테를 암살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평화협상은 실마리를 얻지 못한 채 10월 15일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습니다.

전쟁이 재개되자 이스라엘은 북쪽 갈릴리 호 일대를 노린 공세를 펼쳤고 단 10여 일 만에 아랍 연합군을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몰아내고 갈릴리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다음 목표로는 아랍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차지하기에는 아직 애로사항이 있는 가자지구와 요를 단강 서아지고 대신 무수지나 다름없던 남쪽 네게브 사막을 향한 파상공세를 펼쳤습니다.

 

허를 찔린 아랍 연합군은 네게브 사막 전체를 이스라엘에게 내어주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까지 진격했습니다.

 

결국 반격 능력을 상실한 아랍 국가들은 각자 차례대로 이스라엘과 휴전을 체결하였고 1949년 3월 10일 홍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에일라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78%를 장악했고, 나머지 지역 중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장악한 지역에 살고 있던 7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을 떠나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랍 연합군은 압도적인 전력이었지만 실상은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서로 간의 불신으로 인해 단합이 전혀 되지 않아 전쟁을 효율적으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얼마 전까지 영국 및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나아가 당시에는 왕가와 반 왕파들의 갈등과 내전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보입니다. 보통 아랍 연합 군위 수적, 학격면에서 오세 했던 거에만 집중하지만 사실 이들은 장비는 우살지 몰라도 내부적을 심각하게 분열되어 문 게가 이스라엘보다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집트만 해도 파루크 왕가에 불만이 큰 장교들은 일부 작전을 무시했으며 다 이겨 놓고도 일부러 후퇴하여 패배를 자초했습니다. 이는 만일 이집트군이 승리하면 왕가에 대한 지지가 커질 테고, 그러면 왕가를 뒤엎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전쟁에 패배하면서 쿠데타의 명분을 얻은 군부는 3년 만에 파루크 국왕의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기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쿠데타로 뒤집어엎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귀족 출신으로 우쭐거리는 장교와 강제 징집된 사병들의 갈등도 커서 되려 유럽인 교관들이 "장비만 좋지, 이건 허수아비 군대다."라고 비웃으며 회고할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베두인족으로 구성된 정예군을 가진 요르단 군의 경우 지금까지도 미국이나 영국 군사기관들과 교류하는 아랍권의 최정예 군대로 통합니다. 다만 요르단은 근본적으로 소국인 데다 가난하고 석유가 없어서 이 훌륭한 군인들에게 사우디나 쿠웨이트  같은 장비 빨을 세워줄 수는 없다는 점이 있어서 대세에 영향을 주기 힘들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결사적인 저항은 표면적인 전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구시가를 포함한 중요 지역을 탈환하거나 추가로 점령하기 위해서, 아랍연맹 측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제2차 중동전쟁으로 비화됩니다.

 

 


5. 여담

이스라엘 독립전쟁 기간 동안 이스라엘군은 소련의 허가하에 체코 슬로바키아에서 받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싸웠고, 아랍 연합군은 영국군이 남기고 간 대량의 영국제 무기로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쓴 독일제 무기는 상당 부분이 체코슬로 바키아에서 생산한 물량이었고, 독립 초기 이스라엘을 중동의 반서방 거점(다른 중동국가가 다 친영미 계열이던 시절이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소련이 체코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지시했기 때문에 프라하 공항에서 한동안 이스라엘행 무기 수송기만 이륙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이 보유했던 메서슈미트도 실은 독일제 오리지널이 아니라 체코 제인 아비아 S199였고,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우지 기관단총도 그 원형은 체코제의 Vz25 기관단총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체코가 보유하고 있던 카구팔(kar98) 소총 생산시설을 통째로 구입해서 Kar-98K를 생산, 한동안 제식 소총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전후 이스라엘은 빠르게 친미 노선으로 갈아탔기 때문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격노하여 책임자들을 숙청했으며 소련 내부의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반파시즘유대인위원회 위원장 솔로몬 미호옐스가 암살되었으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부인인 폴리나 젬추 지나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몰로토프에게 이혼당하고 체포당했습니다. 소련의 유대인 탄압은 크렘린 의사 음모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으나 1953년 스탈린이 급사하면서 흐지부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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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중동전쟁은 1차부터 4차까지 전쟁을 치른 세계대전 이후 최대 전쟁입니다. 

1차부터 4차 전쟁까지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1. 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전쟁또는 독립전쟁) - 1948년 발발
  2. 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또는 시나이 전쟁) - 1956년 발발
  3.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  1967년
  4. 4차 중동전쟁-(라마단 전쟁, 욤 키푸르 전쟁) - 1973년 발발

1948년 이스라엘 성립 이후, 1948년~1973년까지 4차례에 걸쳐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에 벌어진 전쟁을 말합니다.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은 모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쟁 전보다 확장되었습니다.

 

 

1. 제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 전쟁 또는 독립전쟁) - 1948년 발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대립 분쟁을 조율할 수 없게 된 영국은 문제 해결을 국제연합(UN)에 위임하였습니다. 이에 UN은 1947년,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인의 2개 국가로 독립시키는 결의를 채택하게 됩니다.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는 아랍 국가들의 즉각적인 반발로 이어졌으며, 아랍 국가들의 대 이스라엘 선전포고가 일어나게 됩니다.  제1차 중동전쟁은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등에서 참전하며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제국의 협공이었기에, 전세가 아랍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아랍 진영 내에 불화가 일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시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하면서 점차 이스라엘에 유리한 전세가 조성되었습니다.  

1차 중동전쟁은 1948년 11월 6일, UN 안전보장 이사회의 휴전 결의 채택으로 일시 중지되고 1949년 1월 이스라엘 대표와 이집트 대표의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휴전협정으로 1차 중동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그런데 1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쟁 전보다 더 확장되었습니다.

 

과거 UN 분할 안에 의한 이스라엘의 영토 면적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56%이었으나, 휴전 후 이스라엘-아랍 간 국경 재조정은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적용되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의 80%를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1차 중동전쟁 이후 약 80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대이동이 불가피해졌고, 이들은 인접 아랍 국가들로 피난하였습니다. 

https://rokmc76.tistory.com/46

 

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건국

목차 개요 상세정보 전력상황 1) 이스라엘 전력상황 2) 아랍국가 전력상황 전황 여담 1. 개요 1차 중동전쟁 - 이스라엘 건국 아랍권에서는 1948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여 1948 전쟁(1948حر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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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또는 시나이 전쟁) - 1956년 발발

 

이집트의 나세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경영권을 소유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은 1956년 10월 29일 시나이 반도의 요충지를 점령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하여 이집트 공군을 거의 전멸시킨 것은 물론 수에즈 운하까지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에서의 세력 신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프의 군사행동을 비난하며 엄정중립을 선언하였습니다. 또 소련도 영-프 양국의 군사 개입에 강력한 비난 성명을 냄과 동시에 이들에 대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공격 등을 시사했습니다.

 

결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는 하였지만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1956년 11월 전쟁을 중지했으며, 이후 UN총회에서 영-프-이스라엘 3개 점령군의 즉각 철수가 결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가 인정되었습니다.

https://rokmc76.tistory.com/47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또는 시나이 전쟁) -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또는 시나이 전쟁) - 1956년 발발 이번에는 2차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개요 전쟁배경배경 전쟁 전황 전쟁 영향 학살 여담 1. 개요 제2차 중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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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  1967년 발발

 

제3차 중동전쟁은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의 빈번한 충돌이 계기가 되어 발발하였습니다. 당시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1967년 4월 제1차 중동전쟁의 정전협정에서 비무장지대로 설정된 골란고원 일대에 이스라엘이 농작물을 경작한다는 일방적인 조치를 발표하면서 시리아의 분노를 촉발시켰습니다.

이집트가 아카바만의 입구인 티란 해협을 봉쇄한 것을 계기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원조를 받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가자 지역, 구예루살렘 지역, 요르단강 서안 지역, 골란고원, 시나이반도의 8,600km 2를 새로 점령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지배에 들어간 영토 면적은 이스라엘 독립 초기의 8배가 넘는 102,400km 2로

 

https://rokmc76.tistory.com/48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이번에는 중동전쟁에 3번째 이야기 3차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차 중동전쟁은 6일전쟁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개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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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중동전쟁(라마단 전쟁 또는 욤 키푸르 전쟁) - 1973년 발발

제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과거 3차례 중동전쟁에서 잃었던 영토 회복을 위해 1973년 10월 6일 수에즈 전선과 골란고원의 양 전선에서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의 피해는 막심했으나, 이스라엘은 개전 6일 만에 반격을 시작하면서 초기 열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용의주도한 작전에 따라 시나이반도의 이집트 주력부대가 포위됐고, 이후 UN에서의 미-소 결의로 휴전이 성립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점령한 골란고원을 1981년 합병했으며 이 문제로 2000년 시리아와의 평화협상이 중단됐습니다.

 

위 내용과 같이 간단하게 중동전쟁에 대해 설명하였는데요. 각 전쟁에 대해 다음 글에 세 시리즈로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https://rokmc76.tistory.com/49

 

4차중동전쟁-라마단 전쟁 또는 욤 키푸르 전쟁

오늘은 중동 전쟁사 마지막 4차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라마단 전쟁또는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전쟁... 이제 시작합니다. 목차 개요 전간기-소모전 대 복수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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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임진왜란의 발발함- 1592년 4월, 일본의 침략
  2. 의병과 관군의 승리하다-조선의 반격이 시작
  3. 진주 대첩과 진주성 함락- 피로 싸워 막아내다.
  4. 왜란의 영향은- 전쟁이 가져온 영향
  5. 이순신 장군의 알아보기

1.임진왜란의 발발함- 1592년 4월, 일본이 침략

"10만 군사를 기르자" - 이이의 십만양병설
1583년 어느 날, 이이는 왕을 찾아가 “나라가 태평하니 군대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아 적이 침범해 와도 막아낼 수 없습니다.”라며 10만의 군사를 길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통신사 사신으로 일본에 간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는 달랐습니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으니 전쟁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김성일은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일본은 2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습니다.

빠르게 밀려오는 왜군
1592년 4월, 왜군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구실로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왜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한양을 향해 쳐들어왔어.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조선 군대는 여기저기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선조는 신립 장군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신립은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막아내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결국 신립은 강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왜군은 20여 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선조는 평양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로

2. 의병과 관군의 승리 - 조선의 반격이 시작

우리 고장은 우리가 지키자 - 의병
전쟁 초기에는 관군의 패배로 나라 전체가 큰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손에 죽었고, 온 나라가 일본군에 짓밟혔습니다.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켜낸 분이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우리 수군이 입니다.
한편, 바다에서 승리가 계속되는 동안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의병이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난 의로운 병사들을 말합니다. 의병은 마을의 지리에 밝다는 이점을 이용해 매복·기습·유격(게릴라) 전을 벌이며 용감히 왜군을 막아냈습니다. 주로 전직 관료와 유생, 승려가 의병장이었고, 농민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은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경상도의 곽재우와 정인홍,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고경명과 김천일, 함경도의 정문부 등이 있습니다.

또 묘향산의 서산대사와 금강산의 사명대사도 승병장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특히 곽재우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채 백마를 타고 싸워 ‘홍의장군’이라 불리었는데, 왜적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주요 의병의 활동 지역

3. 진주 대첩과 진주성 함락 - 피로 싸워 막아내다.

1592년 4월, 전쟁이 시작된 후 일본군의 세력은 파죽지세였습니다. 그래서 전쟁 초기 1~2개월 동안 관군은 계속 지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조선군도 승전보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전투가 10월에 벌어진 진주성 싸움이야.
당시 진주 목사 김시민은 4,000명도 안 되는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3만에 가까운 일본군에 비하면 크게 열세였습니다. 10월 6일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일본군은 사다리와 나뭇단을 성벽에 기대어 놓고 그것을 밟고 기어올라 성벽을 넘으려 했습니다. 또 3층짜리 누각을 만들어 그 위에서 조총으로 사격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성안의 백성들은 김시민의 지휘 아래 활을 쏘아 일본군을 막아내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에게는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물을 끼얹어 물리쳤습니다. 일본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김시민은 왜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1593년, 진주성에서의 패배를 앙갚음하려는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은 함락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 당시, 논개라는 여성은 적장을 끌어안고 장렬하게 순국했습니다.

4. 왜란의 영향 - 전쟁이 가져온 것들

불타고 있는 경복궁
전쟁은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도착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됐습니다. 명군과 일본군이 두 차례의 전투를 치른 뒤 1593년 4월, 휴전 회담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어서, 백성들은 왜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명나라 군대를 먹여 살리느라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1597년 일본이 휴전 회담을 깨고 다시 쳐들어 왔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해. 하지만 조선의 육군과 수군은 왜군을 모두 물리치고 전쟁을 끝냈습니다.

7년에 걸친 두 차례의 왜란으로 온 나라는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잡혀갔습니다. 또 정부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백성에게 곡물을 받고 벼슬을 팔아 신분을 높여 주어 신분 제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 경복궁, 불국사 등이 불에 타는 등 문화재의 손실도 컸습니다. 그리고 도자기 기술자와 성리학자들이 일본에 납치되어 갔는데, 이들은 후에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5. 이순신 장군을 알아보기

이순신장군사진

이순신 장군의 생애
이순신 장군은 1545년 서울에서 태어났어.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했던 그는 28세 때 무과(武科)에 응시했지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거꾸로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낙방을 했습니다.
하지만 4년 뒤 무과에 합격한 후 여러 변경 지역의 장수와 정읍 현감을 거쳐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었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전라 좌수사로 있던 이순신은 1592년 5월 옥포 해전을 첫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어 사천·당항포·한산도·부산포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거북선설명

거북선이란?
거북선은 조선의 판옥선을 개량해 만들었습니다.
판옥선이란? 조선 수군의 전투함이야. 노를 젓는 1층과 함포를 발사하는 2층으로 구성된 크고 높은 배로, 왜군이 쉽게 배 위에 뛰어오르지 못했습니다. 거북선은 돌격용 전투함으로, 구조는 판옥선과 비슷하지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철심이 박힌 거북 등딱지 같은 것이 있고, 그 아래 노를 젓는 사람과 포를 쏘는 포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뱃머리에 용머리와 도깨비 머리를 달고 있어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2개의 돛이 기동력을 높일 수 있어, 적의 배 사이로 깊숙이 침투하여 접근전을 펼칠 수 있는 조선 수군의 최고 무기였습니다.

한산도 대첩
이순신 장군의 가장 통쾌한 승리가 뭘까? 바로 세계 3대 해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한산도 대첩입니다. 1592년 7월 몇 차례의 해전에서 패한 일본 수군이 모든 함대를 모아 총공격에 나서자,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로 유인했습니다. 그런 다음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적의 함대를 둘러싸 포위하는 ‘학익진 전술’을 폈습니다. 포위당한 왜군은 많은 군사와 배를 잃고 도망치기에 바빴습니다.

명량 대첩
1597년 8월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돌아왔을 때, 남아 있는 배는 겨우 13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부녀자들에게 강강술래를 하며 빙글빙글 돌게 하여 군사가 많은 것 같이 위장하고, 물살이 거센 울돌목(명량)으로 왜선을 유인하여 133척을 대파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명량 대첩입니다.

노량 대첩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1598년 11월,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왜군을 격파하기 위해 일본군 전함 300척과 노량에서 최후의 해전을 벌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을 맞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죽는 순간까지도 “싸움이 위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의 진정한 영웅은 이렇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 참고

참고문헌: 한국사 개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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