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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중동 전쟁사 마지막 4차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라마단 전쟁또는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전쟁... 이제 시작합니다. 


목차

  1. 개요
  2. 전간기-소모전
  3. 대 복수극의 시작
  4. 전쟁경고
  5. 미국의 장비 지원과 경과
  6. 전쟁 결과
  7. 전쟁 영향

1개요

전쟁이 일어난 당일이  욤 키푸르라는 유대교 전통의 속죄이었기 때문에 흔히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10월 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전쟁 기간은 1973년 10월 6일~ 1973년 10월 25일.

 


2. 전간기 소모전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은 각각 시나이반도와 골란 고원을 잃어버린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의 인정과, 항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과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 지역을 반환하는 것을 비밀리에 제안했으나 이스라엘한테 영토를 빼앗긴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 8개 국가들은 같은 해 9월 수단의 하르툼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무 평화, 무인 정, 무협상, 3 무 원칙을 공식화하며 단박에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출혈을 강요하고 반환을 압박하기 위해 쇼련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벌였고 이에 양국이 대치하는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 사이에 수년 동안 국지전이 계속되었는데 이를 소모전(حرب الاستنزاف/מלחמת ההתשה)이라고 합니다.

전쟁 아닌 전쟁으로 3년 넘게 이어져 온 소모전은 1970년 8월 휴전협상이 타결되면서 끝을 맺었으나 양쪽의 대치는 수에즈 운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이집트는 주요 밥줄인 수에즈 운하가 폐쇄되면서 경제적 손해가 막심했고 이스라엘 역시 소모전으로 인한 지속적인 출혈에 점점 부담이 가해지고 있었습니다.

 


3. 대 복수극의 시작

1970년 9월 28일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서방국가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아랍국의 단결을 도모했고, 구태의연한 국내 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한편으로 사다트는 시나이 반도의 일괄적인 반환을 요구한 나세르와 달리 일단 폐쇄된 수에즈 운하부터 정상화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스라엘에게 수에즈 운하에서 20마일(약 32km)만 뒤로 물러날 것을 제안했으나 이스라엘의 무성의한 반응에 결국 전쟁을 통해 시나이를 회복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이스라엘한테 영토를 빼앗긴 주변국과 공조를 강화합니다. 하지만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예루살렘을 빼앗긴 요르단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PLO를 지원해 줬다가 오히려 검은 9월로 나라 전체가 뒤집히는 난리가 났기 때문에 이집트에 미온적이었고, 결국 골란 고원 문제로 이스라엘에 이를 갈던 시리아가 또 이집트와 손을 잡는다. 당시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또한 본인의 정치적 위세를 강화하기 위해 대이스라엘 적대 감정을 활용할 여지가 충분했습니다.

사다트는 군대의 체질과 훈련강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변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소련 고문단을 초빙하고, 이전의 전훈을 연구하여 대응 방법을 연구하고, 최신 병기들을 대거 도입하면서 철저한 훈련과 함께 군 조직의 개편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장교단의 경우, 병사, 수병, 부사관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이전의 귀족적 악습을 타파하고 젊은 대학생들을 장교로 선출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보안에 심혈을 기울여, 6일 전쟁처럼 시작하기도 전에 맞고 뻗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도 모사드에서 사전에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을 감지하여 보고했기에 일단은 전쟁에 대비하기는 했으나, 정작 골다 메이어 총리를 비롯한 수뇌부가 지금까지의 연승에서 비롯된 긴장감 상실과 아랍군에 대한 오판으로 인해 이전과 다른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진짜 전쟁준비를 숨기기 위해 몇 차례씩 허울뿐인 동원령을 발령했는데, 이스라엘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똑같이 동원령을 내리려 할 경우 동원령에 소집된 국민들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야 하는 문제가 있어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집트의 동원령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무리였습니다. 전쟁 개시 직전에 서로 다른 루트들을 통해서 결정적 정보들을 확인한 뒤에도 후술 할 외교적 이유로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결정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고다 메이어 총리와 모세 다얀 국방부 장관이 속한 노동당 내각의 발목을 붙잡고 말았습니다.

한편 사다트는 공격할 생각이 없으면서 이스라엘을 긴장시켰던 나세르와는 정반대로 공격할 생각을 숨기고 이스라엘이 긴장을 풀게 만드는 술책을 썼는데, 바로 이스라엘을 상대로 몇 개월에 한 번씩 곧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공갈협박을 날렸던 것입니다.

 

처음에야 여기에 잔뜩 졸았던 이스라엘이었으나 이집트 측이 실제로는 별다른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이를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로 파악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공갈 협박만 날리는 상황이 사다트 집권 후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자 이스라엘 측은 사다트를 그냥 위협만 일삼는 허풍쟁이로 여기게 됩니다.

 

심지어 사다트가 4차 중동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날린 진짜 전쟁 협박에도 거짓말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

10월 5일, 이집트에 심어놓은 최고위급 스파이인 아슈라프 마르완으로부터 당장 내일 전쟁이 시작된다는 정보가 전달되었으나 몇 달 전 마르완이 같은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 때문에 이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는 불투명한 문제였으며, 골다 메이어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간 시점은 전쟁 시작 몇 시간 전의 일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모사드는 마르완의 경고를 긴급히 메이어 총리에게 전달했고 메이어는 이를 매우 심각한 징조로 받아들여 즉시 장군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하게 했지만 예비군 동원에만 최소 24시간이 걸리는 상황에서 마르완의 첩보는 너무도 늦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욤 키푸르 당일인 10월 6일에, 이스라엘에서 많은 군인들이 휴가를 떠나고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이집트, 시리아 연합군의 전면적인 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https://youtu.be/am-hznmutd8


4. 전쟁 경과

이전 세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이 모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난 것에 비해 이 전쟁에서는 이스라엘군이 초반에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개전 당일,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거대한 모래벽과 영구 진지로 구성된 바레브 선을 돌파하기 위해 8천이 넘는 특수부대를 사전에 도하시켜 미리 요새 후방과 이스라엘군의 기동로 근처에 매복시켰고, 철저한 공견 준비 사격 뒤 운하 도하를 개시했습니다. 이때 이집트 육군 공병은 독일에서 수입한 고성능의 소방펌프를 동원해 모래벽을 적셔서 무너뜨려 버리는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해 이스라엘이 요새 철거에만 이틀은 걸릴 거라고 장담하던 바레브 선을 단 9시간 만에 돌파해버렸습니다.

 

해당 작전의 창의성은 기존에는 병역이 면제되던 대학생들까지 입대시켜가며 군 장병들의 질적 향상을 꾀하던 이집트군의 와신상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래벽이라고 하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까지 바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국경 도발(방어선에 냅다 포격을 가하는 등)에 이스라엘군이 거의 완벽하게 대응해 왔고 심지어 전술핵의 폭발력에도 버틸 수 있을 거란 예상까지 나오던 곳이었습니다.

 

이집트군은 이러한 바레브 선의 약점을 꿰뚫었고 사전에 모의실험까지 거친 후 해당 작전을 실행하는 철두철미함을 발휘하였습니다. 바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모래벽에서 그치지 않고 화공을 위해 기름 탱크를 준비해 두었고 고지대에 콘크리트 벙커를 추가 설치하긴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이 날이 욤 키푸르였기에 해당 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이스라엘군 병력 대부분이 휴가 간 상황이었습니다.  이집트군은 MI-8  수송헬기로 기습 강습을 해 기름 탱크를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군의 화공 전법을 무력화시켰으며 고지대의 벙커의 경우 똑같은 높이의 토산을 쌍아 올려서 그 위에 전차를 올려 콘크리트 벙커를 격파해 버렸습니다. 이 돌파 작전에서 이집트군의 병력 8만 명 중 전사자는 단 208명에 그쳤으며, 당시 3만 명 이상의 피해를 예상하고 있던 이집트 수뇌부는 이런 예상외의 대성공에 기뻐서 날뛰었다고 합니다.

 

이후 잘 훈련된 이집트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수비대 요새 근처에 신속 전개하여, 이스라엘군의 기동예비대인 육군 252 기갑사단 예하 전차 여단들의 진격로를 틀어막고 적극적인 대전차 방어전을 구사합니다.

 

이스라엘군은 반격을 위해 전차 부대를 투입하지만 이집트군은 이미 잘 준비된 방어 진지에서 대전차 미사일을 준비시켜 놓고 잇었습니다.  이집트군은 결국 시나이 반도에 전개된 이스라엘 전차의 60%인 150여 대를 격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웁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공군조차 이집트 방공군의 지대공 미사일에게 하루 만에 전 보유대수의 10%가 넘는 전투기를 상실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어 이전 전쟁을 항상 승리로 이끌었던 공군력에도 기대기 힘들어졌습니다.

 

사실 항공전에서 하루 만에 10%의 손실률이면 거의 기록적인 수준으로, 앞으로도 이런 손실률이 지속된다면 항공전역 수행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열흘 내로 공군기를 모조리 상실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초 이런 끔찍한 피해를 입자 지상군 전선이 엄청난 위기에 빠져있음에도, 일시적으로 지상군에 대한 지원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주요 피해는 이집트 방공군이 보유한 러시아제 신형2 K12 KUB(나토 코드 SA-6) 지대공 미사일과 23mm 4 연장를 탑재한'쉴카 대공기관포 차량'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집트 공군은 애초부터 형편없던지라 방공군의 활약이 컸던 것입니다. 



10월 8일에는 이스라엘에서 2개 기갑사단이 더 투입되었지만 이들 역시 이집트군 대전차 미사일의 화력 앞에 혼쭐이 나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전차부대가 보병부대의 지원이나 포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단독으로 진격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이 이스라엘의 인구 문제로 인한 보병의 부족, 그리고 제3차 중동전쟁에서 보여준 이스라엘군 기갑부대의 맹활약에 의한 전차 만능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반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보병의 대전차 공격능력 자체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집트군이 더 많은 부대를 투입하여 시나이 사막을 가로지르기 전에 일단 그 기세부터 꺾고 보자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군의 계획이었던 것. 이 때문에 공세 주력이었던 2개 동원 기갑사단은 아예 사단 보병과 포병이 본토에서 한창 이동 중인 상태에서 전차만으로 선공에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이러한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인 편에 속했습니다. 당시 보병의 주력 대전차화기인 RPG-7은 명중률이 낮고 사거리도 짧았기에 베트남 전쟁 같은 정글이면 몰라도 교전 거리가 길게 나오는 시나이 사막의 특성상 이스라엘군은 적 보병의 방어 진지 정도는 전차포로 장거리에서 공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이집트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전차전 같은 정공법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던 터라, 이집트군은 RPG보다 더 강한 소련 AT-3 말륫카(나토코드명 새 거 Sagger) 대전차 미사일을 이미 대거 들여온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1. 진지에 숨어서 이스라엘 전차를 기다린다. 이때 AT-3는 뒤에, RPG-7은 앞에 겹겹이 위치시킵니다.
2. 이스라엘 전차가 오면 AT-3을 쏘고 숨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차의 시야가 생각 이상으로 좁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위에도 서술하였듯이 당시 이스라엘군은 전차의 눈이 되고 서포트를 해줄 보병 없이 전차만으로 돌격했기 때문에 이 전략이 더 빛을 발했습니다.
3. 엄폐물로 숨으면서 장전하고 장전이 되면 다시 쏘는 식으로 이스라엘 전차를 순차적으로 부순다.
4. 이스라엘 전차가 만약 살아서 엄페물 방향으로 접근하면 파괴력에 비하여 정확도가 떨어지는 RPG-7으로 처리합니다.

물론 이스라엘군은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국경에서의 분쟁을 통해 말 륫카 미사일의 존재와 그 성능을 파악하고 있었고 치명적인 수준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AT-3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으며,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단점을 이를 뒷받침해줄 기동 전략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돌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 대전차 보병의 전술적 역량을 낮게 평가하는 실수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당시 시나이 사막에서 투입 가능했던 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는 참패를 겪었습니다. 앞서 2일간의 전투에서만 이스라엘군은 300대가 넘는 전차를 잃었고, 골란 고원까지 포함하면 800대가 넘는 전차가 파괴되었습니다. 훗날 파괴된 전차 중에서 400여 대는 이후 회수해서 수리해 다시 쓸 수 있는 상태였고, 거기다 미국의 긴급원조로 수령한 대량의 패튼 시리즈와 아랍 측의T-55, T- 62 전차도전차도 다수 노획해 종전 후에는 전차 보유수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전차를 젊은 간부의 관이라 부를 만큼 인원 손실이 커 노련한 전차 승무원들을 잃은 것은 회복하지 못했으며 전차 보유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 후의 이야기로 전쟁 중이던 당시에는 가히 뼈를 박살 낸 치명타를 입은 상태였습니다.

이집트군은 소련식의 조직적인 보병 중심 대전차 방어진 지를 구축하여 이스라엘군을 끌어들였습니다. 특히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군의 반격에 맞선 이집트군은 이미 전날 밤 운하 일대의일대의 원래 방어책임을 맡고 있던 이스라엘군 만들러 소장의 252 기갑사단 전차 전력의 60%를 대전차 방어전에서 격파할 정도로 그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전날보다 더욱 취약한 상태로 공격해 오는 이스라엘군 2개 사단에 맞서 말 그대로 최고의 선전을 펼쳤던 것입니다. 그나마 이스라엘군의 반격은 이집트군이 진격을 멈추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만드는 효과는 거두어 결국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는다는 당초 목적 자체는 달성했습니다. 대신 만약 이집트가 작심하고 제대로 밀어붙일 경우 이에 맞서기 어렵다고 여겨졌습니다.

원래 소련식 군사교리의 특성상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합니다. 6.25 때에도 이러한 특성이 보이지만, 중앙 집중화된 지휘체계상 각 제대는 원래의 목표선까지 진출하면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상태를 보고하고 피아 간의 상황을 분석해서 다음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대기하게 됩니다.

 

당시 이집트 지휘부는 지난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했던 이집트군이 예상 이상의 전공을 세우자 이것이 이스라엘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이스라엘을 너무 밀어붙일 경우 미군이 전면 개입하거나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이집트의 목적도 수에즈 운하 회복과 미국-이스라엘과의 수교였지 이스라엘 전멸이 아니었으므로 더 이상 진격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지리멸렬해서 상급 지도부가 공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도 여유를 얻어 일부 동원병력을 먼저 시리아 전선에 돌리는 도박수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나이 전선에서 우세를 차지한 이집트군은 예상되는 역습에 대비한 방어선을 구축하였습니다.

한편, 시리아군 역시 초전에 헬기를 이용한 대규모 특수부대 강습으로 헤르몬 산의 이스라엘군 관측소 겸 진지를 한 시간 만에 점령하고, 기갑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이스라엘군 제188기갑여단의 방어선을 남단에서 수적 우위로 돌파하며 쾌조의 진격을 거듭해 7일에는 요르단 강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시리아군 기갑부대가 골란 고원 서쪽 저편에서 빛나는 갈릴리 호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진출한 것입니다.

다만, 이때 시리아군은 소련식 교리에 치중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탄약도, 연료도 아직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요단강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부대가,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는 교리를 철저히 지키느라, 자신들의 작전지역을 넘어서 요단강을 도하하여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습니다.

 

사실 시리아로서는 승리의 경험이 없다 보니 이것이 실제로 진격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 이스라엘 측의 유인작전인지 구분할만한 전술 안을 가진 지휘관이 없던 데다, 멋대로 행동했다가 최상층 지휘부에게 찍혀서 숙청당할 위험도 있기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시간을 끌지 않고 요단강을 넘어 진격했다면, 이스라엘 군의 동원사단이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하게 변하자 다급해진 이스라엘군은 일단 가장 가까운 시리아군부터 몰아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장 이집트 방면은 시나이 반도를 제물로 바치면서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있었으나, 시리아 방면은 골란 고원이 돌파당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시리아군의 공격 앞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용병력을 대부분 골란 고원에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골란 고원의 방어선 북단을 담당한 이스라엘 현역 부대인 제7기갑여단, 그중에서도 카할라니 중령이 이끈 제77전차대대는 1:10의 수적 열세 하에서 몰려드는 시리아군 기갑부대를 말 그대로 혈전(血戰) 끝에 격퇴하면서 동원 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으로 투입될 시간을 벌었습니다.

 


5. 미국의 장비 지원과 반격

자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마지막 보루인 미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8일 밤 골다 메이어 총리는 전술핵탄두 조립을 승인했습니다. 특급 비밀이어야 할 핵무기의 준비는 그다지 비밀스럽지 않게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여차하면 이집트와 시리아에 쏴버리겠다는 협박이자,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되는 것을 미국이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계산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9일 오전 미국 국무부에 날아들었다.

이스라엘이 대놓고 핵무기를 조립하는 반응을 보이자 미국은 소련에 연락을 취해 접촉하였습니다. 최악의 상황인 이스라엘이 핵공격을 실제로 실시할 경우, 소련은 이집트에 핵무기를 공급해서 핵 보복을 시행하도록 허락하여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을 공멸시키고 이후 미국과 소련은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주 내용입니다. 즉, 여차하면 미국과 소련은 양국의 전면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버섯구름 아래로 사라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교 안보 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직하며 외교정책을 장악했던 헨리 키신져는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제3차 중동전쟁의 후속 편을 찍어버리면, 이후 미국 입장에서 아랍국가들을 회유하여 평화협정을 주도,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게 될 여지가 아예 사라지기 때문에 초기에 대대적 지원을 꺼려했던 것입니다. 전쟁 초기 키신저의 큰 그림은 이스라엘이 아예 망하지 않을 만큼만 지원, 이스라엘이 아랍군을 1967년 휴전선까지 다시 몰아내면 그때 정전을 중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지원을 받긴 받았으니 군말할 수 없고, 아랍 측도 미국의 영향력으로 멸망을 모면하게 될 테니 미국이 중동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만만했던 키신저였지만 개전 초기 전황이 이스라엘에 불리해지자 지원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랍 측의 보이콧을 의식한 기업들이 차터 항공편을 내주지 않았고, 군사적 충돌에 예민했던 국방부도 협조를 거부해 첫 1주 간은 엘알 항공기 7대가 미국까지 날아와 장비를 직접 가져가는 것으로 충당해야 했습니다.

 

미국은 전선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12-13일 사이 영국에 부탁하여 휴전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사다트의 완강한 거부로 실패, 전쟁이 생각보다 장기전으로 돌입될 위험에 처하자 14일경에야 최대 물량 지원을 시작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워터게이트 사건에 정신이 팔려있어 중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닉슨이 당장 하라고 밀어붙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리처드 닉슨 행정부였지만 그 대응은 빨랐다. NATO 최전선, 즉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신예 M60A 1을 포함한 대규모 전차와 항공기, 막 배치가 시작된 스마트 폭탄을 비롯한 정밀 유도 병기는 물론, 일설에는 핵무기까지 포함된 대규모 지원이, 봉쇄된 바다와 지상을 넘어 항공로를 통해 날아들었다습니다.

 

공장에서 갓 나온 F-4 들이 공중급유기의 급유를 받으며 이스라엘까지 날아왔고 대서양과 지중해에 전개해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A-4를 잔뜩 싣고 와 이스라엘 근해에서 이함시켜 배달해주었습니다. 이 무제한 작전(니켈 그라스 작전)은 33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이스라엘이 치른 전술적 대가는 막대했지만 지난 3차 중동전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선제공격을 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미국의 압박으로 2차 중동전에 이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외교적 패배를 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략적으로는 아랍 측의 공격 가능성을 48시간 전에 파악하고도 선제공격보다 먼저 공격을 당하고, 그 뒤에 방어전에 들어간다는 도박수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둬 이것으로써 다시 전략적인 승리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군을 재정비해 반격에 성공한 것도 이스라엘군의 전술적 승리라 하겠습니다. 무기를 쥐어줘도 운영하지 못해 패한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미국의 지원에 더해 예비 병력의 바닥까지 긁어모은 3개 동원 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에 전개된 10일경,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에 대한 전면적 반격(Counter-offensive)을 실시해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완전히 박살난 시리아군은 500대가 넘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시리아 공군 역시 10일 마지막 결전을 노리고 대규모로 출격했으나 이스라엘 공군에 격퇴당해 시리아 전선은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는 상황으로 돌변했습니다.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군의 포격이 떨어지고 있었고 시리아 정부는 일대 패닉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는 요르단에 대한 성의와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소련의 으름장으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암만-다마스쿠스 가도에서 진격을 중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리아가 하도 박살이 난 관계로 이라크군과 요르단 군도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과의 전투에 일부 참전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도 애초에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오면 요르단이 아랍 연합국을 구원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고, 요르단도 전쟁을 요르단 본토 쪽으로 확대시키지 않으려 했기에 투입한 병력의 수가 적었습니다.

 

이라크군은 투입되자마자 이스라엘군에게 관광당하고 공군은 시리아를 도와주러 급파된 소수의 요르단군 전투기와 오인 교전을 벌이다가 패해서 퇴각하는 등 시리아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전투력 면에서는 별 도움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사우디 군도 일부 참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 주장은 여단 규모 부대를 골란 고원에 파병해서 시리아의 방위를 지원하긴 했으나 파견 시점이 늦어져서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나 시리아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시리아 영내 작전 기간 중 미국제와 영국제 장비를 상당량 노획했는데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조기 참전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시나이의 이집트군은 지난 제3차 중동전쟁과는 다르게 시리아가 말아먹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에서 뛰어나와 이스라엘로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정면대결은 무리였는지 아주 박살이 나버렸고, 16일 새벽 아리에 샤론 소장(나중에 수상이 된 바로 그 사람)이 지휘하는 이스라엘군이 이집트군의 전투 지경선을 파고들어 수에즈 운하를 기습도 하해 텅텅 빈 수에즈 서안으로 밀고 들어가 수에즈 운하 남반부의 이집트 3군 병력을 포위하면서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3군을 포위 섬멸함으로 이집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려 했지만 이스라엘을 기사회생시킨 미국과 이집트, 시리아의 뒤에 있던 소련이 개입했습니다. 두 나라는 모두 이스라엘이 3군을 물리적으로 섬멸하여 이집트에 불필요한 굴욕을 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천명했으며 이스라엘이 포위된 3군에게 식량, 의료지원을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특히 키신저는 만약 이스라엘이 3군을 섬멸하려 한다면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이집트 편으로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선을 넘는 순간 이스라엘이 얻은 모든 성과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중대한 개입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대한 결정적인 설욕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외교적 승리만 거둔 수에즈 전쟁이나 군사적으로 재앙적으로 가깝게 패한 6일 전쟁과 달리 이집트 쪽이 외교적, 군사적으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던 지상전과 달리 해상전에선 이스라엘 해군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개전 첫날 저녁 시리아 라타키아항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자국산 가브리엘 함대함 미사일을 이용해 시리아 해군 소속 미사일 고속정  3척과 어뢰정 1척, 소해정 1척을 격침시켰고 시리아군이 발사한 스틱스 미사일은 ECM에 의해 모조리 빗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후 발팀에서 벌어진 이집트 해군과의 결전에서도, 이스라엘군 고속정 6척이 이집트군 고속정 4척 중 3척을 격침시키는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6. 결과

개전 초기 궁지에 몰리게 된 이스라엘은 자국의 핵미사일 제리코 1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이집트 또한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핵탄두가 탑재 가능한 스커드 미사일 B형으로 반격할 준비를 해 핵전쟁으로 확전 될 양상을 보인 무시무시한 전쟁이었습니다. 게다가 양측을 지원했던 미국의 닉슨과 키신져, 소련의 브레즈네프와 각료들은 서로의 잘못된 판단과 오해가 쌓여 이스라엘과 이집트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초강대국 간의 전면 핵전쟁 직전의 상태까지 갈 뻔했습니다.

 

이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대의 전면 핵전쟁 위기였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두 번에 걸친 정전 시도가 무산되자 위험천만한 미-소 대립 양상으로 치닫긴 했지만, 미국에서 소련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데프콘이 상향 조정되었다는 주장은 과장에 가깝습니다.

 

여러 학자들도 굳이 핵무기가 아닌 재래식 병력도 소련이 실제로 투입했을 가능성이 적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24-25일의 위기는 브레즈 네프의 과장 섞인 일방적 개입 위협과 극도로 긴장을 탄 키신저의 강경 대응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우발적 핵전쟁 문서에도 나와있듯, 그 이후 사소한 오해나 경솔한 행동이 누적되어 핵전쟁이 발발했을 위험은 충분하지만 말입니다.

이스라엘군은 그렇게 자랑하던 정예 기갑부대와 공군이 이스라엘군의 자만심과 방심으로 인해 이집트 대전차 보병들과 방공군에게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이 닥치면 자연히 해결된다는 임기응변적 사상과 예비군을 빨리 소집하면 된다는 현역병 최소화 사상이 동시에 파기됩니다.

 

이는 실제로 전쟁에 돌입하니 예비군이 동원 완료되는 72시간을 소수의 현역병이 다수의 적군을 상대로 버티지 못해서 파국이 일어났으며, 후방에 비축해둔 물자도 일선 부대로 제대로 수송되지 않아 곤란을 겪었습니다. 전후 탈 장군(메르카바 전차 개발로 유명합니다.)에 의하면 이스라엘군이 소모한 각종 탄약은 비축되어 있던 물량 내였고 유일하게 175mm 포탄(M107 자주포)만 비축분을 다 소모하고 미국의 긴급지원 포탄까지 사용했을 뿐 105mm 전차포탄의 경우 약 30만 발의 비축분 중 절반 정도를 소모했다고 합니다.

 

급박한 전황 속에 보급체계도 혼돈에 빠져 급한 대로 전방 탄약고들의 탄약들이 우선 일선 부대에 공급되어 소모된 후 후방 비축탄들이 보급대의 트럭에 실린 채 원활하게 보급되지 않아 일선 부대들이 탄약 부족에 시달린 것입니다.

무엇보다 극심한 소모전을 겪고 나니 세 집 걸러 한 집 꼴로 집안 남자들이 죽어서 돌아오는 끔찍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때 다수의 이스라엘군 장교와 장군들이 전사해서 여단장과 대대장, 중대장이 전사하지 않은 부대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에 이스라엘은 사회적으로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사전에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난 여론이 빗발쳐 이스라엘 의회에서는 전쟁 대비 실패에 대한 조사를 위해 아그라 나트 위원회가 구성되어 청문회를 벌였고,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모세다 얀 국방장관은 하루아침에 나라를 말아먹을 뻔한 졸장이 되어 사직서를 내야만 했습니다. 전쟁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은 간신히 승리를 거두고 메이어는 총리직은 유지하긴 했으나, 결국 새 내각이 구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어 역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임해야만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수많은 전쟁 영웅들, 이스라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장성들이 되려 범죄자들로 몰리면서 많은 수의 별이 떨어지고 배신감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난 장성들과 고급 장교들의 수도 상당했습니다. 이스라엘군에서 가장 미약하고 천대받던 해군 만이 라타키아 해전의 승리 덕분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중동의 지역 강국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무너졌으며, 언제든지 전멸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이스라엘 스스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는 비교적 온건파인 노동당 내각을 무너뜨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과격파들 간의 난맥상을 낳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군사전략은 다시 6 일전쟁 때처럼 외부의 위협이 들이닥치기 전에 예방적으로 선제공격으로 회귀했고, 이는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에서 증명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F-15 전투기를 해외 도입국 중 세계 최초로 도입하고, 자국 사정에 걸맞은 메르카바 전차를 개발하는 등 무기 도입 과정에서 욤 키푸르 전쟁의 뼈저린 교훈을 대폭 반영했고, 1982년 레바논 내전에서 일방적으로 시리아군을 격파하며 복수를 단행합니다.

한편, 이집트는 놀라운 선전 덕에 협상 테이블에서 당당한 기조를 유지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군이 반격하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는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집트 역시 전보다 훨씬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보다 더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는 사실은 지난 전쟁과 똑같았고,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무릎 꿇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사다트는 이스라엘과의 화평 정책으로 외교정책을 180도 선회했습니다.

 

결국 이집트에게 입은 피해와 이집트의 전향적 태도에 이스라엘이 한 발 양보해 1974년 시나이 잠정 협정으로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습니다. 그 후 몇 년에 걸친 협상 끝에 지미 카터 행정부 때인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워싱턴 D.C.  협정으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 후 시나이 반도는 1982년 완전히 이집트의 손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다트 대통령은 이 공로로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과 함께 78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지만,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체결에 반발한 이슬람 과격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그리고는 전쟁 중에 활약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권좌에 앉아 30년간 집권하게 됩니다.

이는 아직도 골란고원을 못 찾은 시리아와 비교되는데, 사실 골란 고원의 전략적 가치는 단순한 완충지대인 시나이 반도와는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골란 고원을 차지하면 고지대에서 이스라엘 영토를 내려다볼 수 있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요르단 강을 수원을 차단하여 이스라엘의 목을 죄는 게 가능하게 되기 때문. 단 이 경우 요르단도 같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방어에 성공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영토를 되찾는 데 성공한 이집트도 전략적으로 성공을 이뤘다고 할 수 있지만 시리아는 빼도 박도 못하게 완벽한 패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집트는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이기지 못한 적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는 점을 근거로 이 전쟁을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으로 대대적으로 기념합니다.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한 10월 6일은 이집트의 국경일인 국군의 날로 지정되어 있으며 10월 6일(السادس من أكتوبر‎), 또는 라마단 10일(العاشر من رمضان)이라는 지명이 이집트 곳곳에 존재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협정을 체결하면서 시나이 반도를 포기한 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는데 우선 시나이에 사는 베드인 유목민에게 자치권을 주면서 달래고 유전 탐사 등 시나이 반도 내 여러 지하자원 개발을 실시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여러 곳 건설하는 등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점령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통치 자체는 꽤나 안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직후 닥친 오일 쇼크로 인해 이스라엘 경제가 휘청하면서 안 그래도 군사비 확보를 위해 쩔쩔매는 이스라엘이 막대한 돈을 들여 이스라엘 본토 면 적에 3배에 달하는 시나이 반도를 개발해야 할 동기를 상실하였습니다.

 

또 시나이 개발을 위해서는 인구가 필요한데 당시 1980년 당시의 이집트의 인구는 약 4500만 명이었던 것에 반해 이스라엘 인구는 고작 390만 명에 불과하여 이스라엘은 부족한 인구를 늘리기 위해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여기 유대인들은 당연히 위험한 데 오기 싫어하여 거부했습니다.

 

 동원 병력 또한 차이가 났는데 이스라엘은 예비군까지 포함해서 총력전으로 열심히 긁어모은 병력이 41만 5천 명이었던데 반해 이집트 주도의 아랍 연합군 측은 백만이 넘었고, 이것도 전력을 동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 없이 이스라엘군만으로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을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에서 밀어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이는 이집트가 6일 전쟁 이전 영토를 모두 차지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소련이 정전에 합의하자, 이스라엘과 이집트도 협상에 들어가 국경선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7. 전쟁 영향

제4차 중동전쟁은 여러 가지 일화를 만들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수출을 금하는 바람에 오일쇼크가 발생해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때의 오일쇼크로 이스라엘 경제도 큰 타격을 입어서 1970년대 중후반에 두 자릿수대, 1980년대 상반기에 세 자릿수대 인플레이션으로 경기침체를 겪게 되었습니다.

 

특히 1984년 당시의 물가상승률은 445%를 기록하여 중남미 국가들을 제치고 세계 최악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렸습니다. 이 탓에 1977년 총선에서 리쿠드가 집권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를 내주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플레이션 문제는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해결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이미 위력을 보여준 지대공 미사일은 여기서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는 미국에 자극을 주어 페트리어트 미사일이 부활하는 데에 기폭제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이전까지 무적을 자랑했던 전차부대가 대전차 미사일에 농락당하면서, 전차 무용론까지 등장할 정도로 군사 학계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제기된 전차 무용론은 보병 등의 지원 세력이 없는 전차부대의 단독 공격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이 골자이며, 보병-전차 합동 전술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었습니다.

 

또한 전차의 장갑 강화와 정밀 FCS 도입을 골자로 한 3세대 전차 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쟁의 당사자인 이스라엘군에서는 단시간에 숙련된 기갑 병력이 쓸려나간 뼈저린 교훈으로 주력 전차인 메르카바 전차의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메르카바의 특징인 보병 탑승 능력과 승무원의 생존성에 대한 집착 등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개전 당일 이스라엘 공군의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대공전력 중 SA-6에 대한 ECM 미비와 이스라엘 해군의 스틱스 교란 성공은 이후 서방, 특히 미국의 ECM 및 ECCM 개발 집착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즉, 현대전과 근미래 전의 다양한 무기체계 및 전술 개념과 그 효용이 이 전쟁에서 확고해진 것입니다.

또한, 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주변의 여러 아랍 국가들 중에서 유달리 이집트와 과하게 적대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할 수 있는 세력과의 적대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건국 이래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던 데다 환골탈태한 이집트에게 제일 피해를 많이 본 뒤, 이집트만 배제시켜도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월등히 유리해짐을 깨달은 것입니다. 거기에 사다트와 무바라크 정권도 이스라엘과 크게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고 있어, 시나이 반도 쪽은 그나마 평화로워졌습니다. 2018년 경, 시나이 반도의 다에시를 소탕하기 위해 이집트군이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했는데 이스라엘을 자극할 소지가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은 이를 묵인하며 오히려 협력하는 모습까지 보여줬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역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 가운데 군사력이 이스라엘에 비해 뒤처지지 않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크게 개선하였습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무력을 포함한 분쟁을 겪는 국가는 레바논이나 시리아 같은 중동 내에서도 군사력이 한 수 아래이거나 혼란 속에 빠진 국가들이며 그 이외에는 이란, 이라크, 오만, 쿠웨이트, 기타 북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국경을 맞닿지도 않으며 거리가 멀어 실제적인 군사력 투입이 서로 무리인 국가 정도입니다.

인구가 적어 전쟁을 수행할 인원이 늘 부족한 이스라엘군이지만 이 전쟁에서의 병력 부족은 여러모로 치명적이었고 이를 벌충하기 위해 징병제는 꾸준히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성까지 징병하고 3년 가까운 기간을 청년들을 군대에 붙잡아 놓고 있어 이스라엘 사회가 군국주의, 근본주의에 경도되고 보수화, 극우화가 진행됨에도 징병이 면제된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인 하레디가 사회적인 혜택에 힘입어 꾸준히 늘어나고 젊은이들의 군 기피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징병 가능 인원이 계속 줄어들자 결국 반발을 무릅쓰고 하레디에 대한 징병을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제4차 중동전쟁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에 시큰둥했고 오히려 중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트러블메이커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미국이 대놓고 이스라엘 편을 들면서 2020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밀월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몇 년 뒤 미국의 주요 중동 파트너인 이란 팔라비 왕조가 붕괴하면서 더욱 이러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걸프전쟁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주요 우방이 된 이후에도 미국-이스라엘의 밀월관계(라기보다는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관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친 이스라엘 정책은 이스라엘과 관계가 험악한 중동 주요 국가가 미국을 더욱 혐오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미국의 중동 정책에 운신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미국 정계에서도 맹목적인 이스라엘 편애와 지원이 얻는 이득(이스라엘과의 관계 유지, 미국 내 유대인의 자본 및 지지 확보)에 비해 손실(석유, 중동에서의 외교 전략의 한계, 중동 및 이슬람계 테러 조직의 준동 등)이 크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조금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은 있었으나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오히려 더욱 강해진 친 이스라엘 외교 정책을 꺼내 들면서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 

 

그러나 2020년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낙선하고, 중동 이슬람권과의 관계 개선을 주창하는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 역시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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