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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이 되자 아프리카에도 독립을 쟁취하는 국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해 메만 17개국의 나락 유럽 열강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기운에 힘입어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은 악명 높은 식민 통치를 해 온 프라스에 대해 강력하게 투쟁했습니다. 

 

알제리 전쟁당시 군인들의 모습

1.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라고 해도 무방하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제1회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열리면서 아프리카 대륙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피어올랐습니다. 반둥 회의에서는 서양 열강의 지배를 받아왔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29개국 대표들이 모여서 식민주의 가 사라져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3년 후인 1958년 아프리카인들은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전체 아프리카 민족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가나의 독립을 이끌었던 콰메는 쿠마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해방과 연결되지 않는 우리의 독립은 무의미합니다. 

 

이 말에 힘입어 아프리카 각국의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960년에는 아프리카 대류의 17개 국가가 영국, 프랑스, 벨기에로 부터 독립했습니다. 

2. 프랑스, 무자비한 식민 통치를 하다.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한 알제리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면적이 넓은 나라입니다. 프랑스는 1830년대에 알제리를 식민지로 차지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800만 명의 알제리인 이슬람교도들을 지배하며 통치자고 군림했습니다. 

이들은 피에 누아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00만 명에 지나지 않는 피에 누아르들은 결코 알제리인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권리를 요구하는 알 제인 들을 잔혹하게 학살했습니다. 

 

피에 누아프들은 결코 알제리인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지 않았고 권리를 요구하는 알제리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했습니다. 피에 누아르들은 1945년 5월 8일 알제리 동부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에도 무차별 학살로 답했습니다. 

 

1900년대 초의 피에 누아르 가족

3. 알제리, 프랑스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다. 

알제리인들은 이제 투쟁만이 살 길이라고 생 갈했습니다. 

1947년부터 민주 자유 슬이 운동 소속의 다원들은 비밀리에 군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봉기를 준비했습니다.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봉기를 준비하였으나 지도자 대부분이 체포되어 실패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중심 인물인 벤 베라는 이집트의 카이로로 도망치 다음, 1954년에 다시 민족해방전선을 조직했습니다. 

봉기 이도 11월 1일로 잡았습니다. 민족해방전선은 독립을 하게 되면 알제리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독립전쟁 알제리 관련 동영상 자료첨부: 토크멘터리 전쟁사

 

4. 튀니스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프랑스와 싸우다. 

민족해방전선이 주도한 알제리 무장 투쟁은 무자비한 프랑스 군대의 진압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의 독립 투쟁은 이후 8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프랑스 내부에서는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을 지지하는 쪽과 알제리의 식민 지배를 주장하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민족해방전선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알제리에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족해방전선은 같은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알제리 곳곳에서 독립을 위한 폭탄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1958년, 민족 해방전선은 알제리와 국경 릉 접히고 있는 튀니스에 알제리 공화국 임시 정부를 세우고 더욱 조직적을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알제리 전쟁 관련 지도 이미지 

5. 프랑스, 알제리 독립을 승인하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프라스와 스위스의 국경 지대에 있는 에비앙에서 민족해방전선과 협상을 벌였습니다. 

이런 중에도 피에누아르는 무장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을 원하는 알제리인들을 무 참치 죽였습니다. 

 

드골 대통렫과 민족해방전선의 협상 결과에 따라 1962년 7월 1일, 알제리에서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투표 결과, 91%가 독립을 찬성하자 드골 대통령은 이틀 후인 7월 3일, 알제리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알제리 독립 전쟁은 거대 열강 프랑스에 대한 알제리 무장 해방전선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참고문헌: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 서울대학교 푸리급은 역사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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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전쟁사 중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전쟁인 베트남전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1960년에 결성된 남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 (NLF)이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북 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 배트 남정부와 이들을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입니다. 

베트남의 독 김을 위해 프라스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1954)과 구분해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하며 월남전이라고도 합니다. 

배트남 전쟁 핼리본 작전중인 미군 이미지 

남 베트남 정부 붕괴된 1975년 4월 30일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북 베트남이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과 남 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이라는 성격을 띠었으나,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한 뒤에 전쟁은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 하에서 한국, 타이,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등이 참전한 국제적인 전쟁으로 비화되었으며, 미국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으로 군사개입의 범위를 넓히면서 전장도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한편 전쟁 중에 미국, 한국군에 의해 미라이 학살, 빈호아 학살, 퐁니 퐁넛 양민 학살 등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1. 베트남 전쟁의 배경 

베타남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조직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자 호찌민을 중심으로 1941년 5월 19일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뒤에 베트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그해 9월 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수립과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퐁 항구에 함포 사격을 가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배트남전쟁의 전재 지도 이미지 

전쟁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 가 함락될 때까지 9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되어, 북의 17˚선을 경계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제네바 협정에서는 1956년 국제감사위원회의 감독 아래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으나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으오딘지엠은 선거 실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이 베트민의 토지개혁으로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회수하고, 친 가톨릭 정책을 펼쳐 민중의 반발을 샀습니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 초기에 카오다이나 호아하오등의 종교집단을 중심으로 시작된 봉기에  베트민의 구성원들이 합세하면서 1950년대 중반에는 이른바 베트콩이라고 불리는 게릴라 군사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지엠 정권은 1958년 반공법을 시행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으로 반발을 억누르려 했으나, 남베트남의 반란 세력은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을 결성해 정부군과 본격적으로 맞섰습니다. 

이들은 민족민주정부의 수립, 토지개혁, 평화통일, 중립 외고 등 10개 항을 강력으로 내세웠습니다. 

 

2. 베트남 전쟁의 경과 

지엠 정권에 대한 반발이 확대되자. 

1963년 즈엉반민 등은 미국의 방조 아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 디지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이렇든 남 베트남의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의 존슨 정부는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를 늘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1964년 8월 7일 북베트남에 폭격을 가해 전쟁을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했습니다. 

 미국은 그 뒤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백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부었으며, 약 55만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병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 등에 파병을 요청해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68년 1월 30일 음력 설날을 이요한 구정 대공세를 펼쳐 주요 도시들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요 시설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를 배경으로 1969년 6월 8일에는 남베트남 공화국 임시 혁명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은 곧바로 빼앗겼던 도시와 시설들을 탈환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군사개입의 중단을 내세운 닉슨이 대통령으로 단성 되었습니다. 

닉슨은 1969년 닉스 독트린(Nixon Dodrine)을 새로운 안보 외고 전략으로 내세우며 미군의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구정 대공세 이후인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북 베트남의 정전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1972년까지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1970년 이후에는 미국이 캄보디아의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장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972년 4월 남베트남 민족해방 전선이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 미국은 북베트남의 모든 항만에 기뢰를 부설하고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는 등 북베트남에 대한 공해를 더웅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배트남 전쟁 정리동영상

그러나 1972년 여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정전 협상이 비밀리에 재개되었고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경되었습니다. 

파리협정은 남북의 휴전과 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구성, 60일 안에 모든 미군의 철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미군은 남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북베트남과 미군 상이에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으며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규모를 크게 줄였고, 오일쇼크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1974년 1월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과 남 베트남 정부 간의 강등은 다시 무력 충돌로 확대되었습니다. 

 

결국 북 베트남은 1975년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해 4 울 30일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했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던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시 이공이 점령된 뒤 남베트남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이 통합해낸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습니다. 

 

3. 베트남 전쟁과 한국

한편,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입니다.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1만 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피해 등의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1999년에는 1만 6천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고엽제 제조사들인 미국의 다우케미컬과 몬산토 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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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중 일본과 미국과 벌어진 전쟁. 태평양 전쟁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알찬 내용으로 준비하였으니 많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태평양전쟁 썸네일 이미지

목차 

  1. 태평양전쟁 주개념
  2. 2차 세계대전 확장 개념
  3. 대동아공영권
  4. 노구교 사건
  5. 미드웨이 해전

1. 태평양전쟁 주개념

태평양전쟁

태평양전쟁당시 정글속 군인들의 모습

일본은 2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국을 만든 이후 중국에 항일 여론이 거세지자 1937년 노구교 사건(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중국군의 유격 전술로 전쟁은 점차 장기화되어갔습니다. 

 

일본은 군수물자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 인도차이나의 천연자원을 원했기 때문에 , 독일, 이탈리아와 더불어 3국 동맹을 맺고, 인도네시아 남부에 병력을 배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미국은 인도차이나와 중국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면 석유 금수조치를 취했고, 미국 내 일본 자신의 동력과 함께 모든 교역의 금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미 미국이 장개석 정부에 계속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관계는 이미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나빠진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천연자원이 나지 않는 일본은 미국이 자원 수출을 중지한다면 진행하던 모든 것을 손에서 놓고 물러나든지 동남아시아의 천연자원을 얻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주준해 있는 진주만을 기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주만 기습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미국의 함정 16척과 항공기 177대를 파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피해는 다만 항공기 29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실패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다신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은 바다에 나가 있어서 피해를 면하였습니다. 이항 공모함 들은 그 후 미국 해군의 초기 태평양 방위체제에서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진주만 해안에 있던 구사시설과 유류 저장설비도 피해를 면하여,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입은 타격을 신속히 복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제1차 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피하고자 했던 미국 내의 여론은 180도 바뀌어, 미국이 직접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본은 순식간에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 전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필리핀을 점령했고,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을 점령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남태평양을 잇는 긴 병참선을 확립하여 일본을 압박하려 하였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싸움에 결말을 내기 위해 해군력과 공군력을 미드웨이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의 대형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하고, 대형 순양함도 1척 침목 시켰습니다. 

일본이 목표로 한 미국의 항공모함 요크타운 호는 격침되었지만 미드웨이 섬은 안전했습니다.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과 가장 우수한 해군 조종사를 거의 다 잃어버렸고, 그 후 일본과 연합군의 해군력을 사실상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연합군은 일본이 점령한 지역들을 하나하나 탈환하기 시작했습니다. 

필리핀과 보는 이 섬이 연합국의 손에 들어가자 일본은 더 이상 석유를 수송할 수 없게 되었고,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지경에 처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에 투하되자 일본은 1945년 8월 14일 패전을 선언하였습니다. 

 

2. 제2차 세계대전 확장 개념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패전 국민이라는 굴욕감과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 마이 마르 공화국 아래서의 사회 혼란 및 정치 불안 때문에 몹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돌프 히틀러는 극력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지향하면서 독일 국민의 위대함을 강조함으로써 독일 민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1933년 독재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은밀히 독일을 재무자 하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는 1936년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라인란트를 점령하였고 이미 에티오피아에서 침략행위를 하고 있었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와 손을 잡고, 로마와 베를린을 잇는 추축을 선언했습니다. 

 

1938년 히틀러는 독일군을 보내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오스트리아는 당잔 독일에 병합되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폴란트를 차지하기 위해서 소련과 비밀협상을 벌야, 독, 소 불가침 조약을 맺고 1939년 마침내 히틀러는 폴란드에 침공했고,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했습니다. 

 

2차 대전 초반에는 독일인 확실한 위였습니다. 객과적 군사력은 연합국에 비해서 열세였던 독일이지만 기갑사단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뛰어난 공군력을 이용하여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접수하고 네덜란드, 심지어는 연합국의 하나였던 프랑스까지 점령하기 이르게 됩니다. 

 

이에 반해 연함군은 병력의 우위를 믿고 수비적으로 소극적인 자세로 전쟁에 임했기 때문에 독일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점에서 독일에 비해 앞서고 있었는데 그것은 막강한 해군력이었습니다. 

 

프랑스까지 집어삼킨 독일은 모든 공격을 영국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란 영국해협은 막강한 독일 육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천혜의 장벽이었으며 영국과의 공중전에서 사실상 독일이 패전함으로써 히틀러의 영국 침공은 무기한 연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독일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를 추축국으로 끌어들인 독일은 그릿 와 유고 슬라미 아를 쉽게 점령하였고 이에 미국은 무기대여정 잭을 펼쳐 1차 세계대전 이후 잉여 전쟁물자를 연합국에 공국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사실상 공사주의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싫어했습니다. 

따라서 1939년에 맺은 독, 소 불가침 조약도 그에게는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전 유럽을 점령하게 되자 시선을 소련에 두었습니다. 소련군은 핀란드를 점령하는데도 20만 이상의 사상자를 낸 약한 군대로 보였고, 정치적으로도 공산주의에서 해방돼 민중들이 독일군을 반길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소련에 대대적인 침공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연합군을 돕는 결전이었습니다. 역국은 섬에 고립되어 있었고 사실상 미국과 소련은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의 이러한 소련 침공은 연합군의 숨통을 튀어주는 결 저이 었습니다. 소련은 독일 군을 영토 깊숙이까지 끌어들여 모스크바의 겨울을 이요하여 독일의 우수한 야포와 기갑사단, 항공기를 무력화시켜 승리를 이끌어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참전은 독일에게 매우 뼈아픈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직접적인 참전으로 대대적으로 충원된 병력은 아프리카 전선에서 추축국을 밀어내었으며, 이탈리아 상륙작적으로 무솔리니 정부가 실각하고 이탈리아가 연합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스탈린의 군대가 전격적으로 진격하였으나 이미 독일은 이들을 막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독일의 점령지 정책이 너무도 가혹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저항 세력들이 암약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후방에 있는 부대들이 점령지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움직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노르망디 상류 작전으로 연합군이 유럽에 상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독일군은 히틀러의 독단적인 작전으로 계속되는 실패를 맛보았고, 고의 사령부가 몇 번 씨이나 교체되는 상황 속에서 연합군에 계속 뒤로 밀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945년 5월 8일 기점으로 유럽의 전쟁은 끝이 나게 됩니다. 

 

 

3. 대동아공영권

대동아공영권 지도 이미지[출처] 일본의 조선 침략 과정 69년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과 1941년에는 각각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확전을 개시하기 전까지, 일본 사회를 지배했던 시대적 정신음 반외세, 반 서구와는 거리가 먼 일종의 친 서구 주의였습니다. 

이는 일본이 기존의 봉건적 막부 체제를 타도하고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 시대부터 추구하여 온 가치였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화 이론 가이자 교육가, 학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에서 주장되었던 타아 입구론은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 봉건적 잔재를 털어나 개 근대 문물, 제도의 수입에 매진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더 바 있습니다. 개항 이래 끊임없이 근대화를 추가해온 일본은 1930년대 중반까지도 서구를 근대화의 모델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군국주의적 야욕이 빚어낸 침략 전쟁이었던 마주 사변-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에게는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 있던 미국이 일본에게 중국, 만주, 한국 , 대만 등지에 주둔 중인 일본군의 즉각 철수를 요청합니다. 대륙 진출을 오랫동안 꿈꿔완던 일본으로서는 이와 같은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미일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 철강, 지하자원 등 산업에 필요한 핵심 원료 수출을 전면 중단하게 됩니다. 

 

 

새로운 원료 생산지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프랑스 식민통치하에 있던 인도차이나를 침략하여 점령하고 1941년 12월에는 강경파의 주장에 따라 진주만 폭격을 감행함에 따라 4년간에 걸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기에 이릅니다. 이와 같은 군구의 가치를 파기하고 이전과는 180도로 방향을 바꾼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 논리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념 논리에 불과한 것일 뿐, 그 내면은 동아시 여러 국가와 민족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침략과 수탈, 폭력적 지배의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또한 근대화의 길을 완전히 버리고 과거의 동아시아 질서로 회귀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근대적 선짓국 대열에 동참하는 기존의 입장 자체는 크게 변한 바 없이 다만 그 모델을 미국이나 유럽의 강대국들로 삼지 않고 일본 스스로 선짓국의 모델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대동아 공영권의 정치·경제적 측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본은 1941년 인도차이나를 무력으로 점거하고 이에 대해 미국과 열국 등이 일본을 상대로 한 자금 이동과 석유 등의 자원 수출을 금지함에 따라 기존의 산업 시설과 국내외적 생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급자족적 블록경제를 구축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군부를 비롯한 정치권은 일본·만주·중국을 잇는 지역권을 중심으로 주요 산업시 서울 세우고 여기에 인도차이나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을 원료 공급지와 상품 판매 시장으로 삼는 광역 블록 경제권을 구상하였던 것입니다. 

 

'대동아공영권'은 이와 같은 침약적 영토확장을 이념적인 수준 엣 미화한 슬로건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은 대 도아 공영권을 주창하며 태평양 전쟁을 서양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동아시아 민족을 해방시키는 해방전쟁'이라는 선전 하였지만 자신들이 계획한 동아시아 경제블록 구상과 그 실제 진행 과정 자체가 제국주의적 확장 전재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4. 노구교 사건

중일전쟁이 발단이된,노구교(루거차오/마르코폴로가 극찬한 다리로 유명합니다.)

중일 전재의 발단이 된 사건으로 노구교 근체어서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몇 발의 실탄 사격 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즉각 전투태세에 들어가 이튿날 8일 새벽 중국군 진지를 공격해 루거우차오를 점령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중국 측의 계획적인 도발'이라고 단정하면서 파병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중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중국 측에서는 제2차 국 공합장이 울어졌습니다. 

 

 

5.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전쟁 당시SBD(Daurtless)급강하푝격이과 TBD데버스테터 뇌격기 이미지

일본은 태평양의 패권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서 4척의 중항 공모함과 3척의 경 항공모함을 포함한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미드웨이 섬과 알류샨 열도의 기지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암호를 해독한 뒤 일본의 이고를 예측한 미국 정보국은 미리 대비해 태평양 함대의 중항 공모함 3척을 집결시켰습니다. 

 

이전 투는 주로 공준전 위주로 벌어졌는데 일본군은 여기서 미국의 함공모함 요크타운호를 결심시키기는 했지만 모든 함공모함을 잃었고 우수한 전투기 조정사들이 거의 잔사 하게 되어 전면 철수를 하게 됩니다. 

 

이미드 훼이 해전은 로 미국은 태평야에서 일본과 비슷한 해군 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어 두 나라의 전쟁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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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중인 1967년 2/14일~15일 사이에 베트남 짜빈동에서 벌어진 한국 해병대와 북 배트 남군 간의 전투. 

짜빈동전투 썸네일 이미지 

1. 짜빈동 전투 개요

1967년 2월 14일 ~15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월맹, 배트 공과 대한민국 해병대 제2 해병대 제2해병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배트 남군의 지휘관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총 2,400명 이상의 병력이 참전했고 이준 243명이 전사 2명이 포롤 잡혔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장교 10명, 사병 284명으로 구성된 2 여단 3대대 11중대가 참전했으며, 이중 15명, 전사 33명이 부상당했습니다. 11중대 중대 정은 정경진 대위였고 이슬리로 당시 중대 전술기지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대한민국 국군 상황

1966년 9/23일 제 해병여단은 베트남 중구 꽝응아이성 북부지역 쭈라이로 이 동핸 지역 평정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려나 행당 지역은 배트 공의 활동이 상당히 왕성한 지역으로, 북 배트남 전규군의 침 추가 용이한 지역이었습니다. 

 

기지 바로 남쪽의 짜빈동 마을은 국군이 우물을 이용하기 위해 자주 찾는 것으로 주민들과 군인들이 친밀한 상태였습니다. 그러 난 잦은 부비 트램 폭발사고로 조사한 결과 주민들이 논밭에 일하는 척 부비트랩을 매설하는 것을 발견하고 주민들이 일하던 곳을 패하서 다니자 부비트랩 사고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즉 우호적 관계라고 믿었던 주미들은 친 베트콩 성향이었고 중대 기지는 사실상 적지에 있는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투 당일 1967년 2.14일 이미 다수의 적이 기지 가까이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피난민들이 중대 기지 근처를 떠도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중대장의 판단으로 결계를 강화했습니다. 

 

당시 짜빈동 기지 내에는 3개 소총 소대, 1개 화기 소대, 그리고 배고 부대로 1중대 1소대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 81mm 박격포 1개 소대, 81mm 박격포 1개 반 106mm 무반동총 1개분대 등으로 총 별력 294명이었고 다음 감 부들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중대장 정경진 대위 부중대장 양백수 대위, 화기소대장 김기홍 중위, 1 소대장 신원배 소위, 2 소대장 김성부 소의, 3 소대장 이수현 소위 60mm 박격포 반장 김상열 중사, 1중대 3 소대장 전정상 소위 , 105mm 포병 관측장교 김세창 중위, 중포 중대 1 소대장 FDC반장 김세기 대위, 중포 중대 2 소대장 이정국 중위.

 

이 병력은 북쪽에 3소대, 남서쪽 1소대, 남동쪽 2소대를 배치했고 주요 화기를 중앙에 배치하여 전 지역에 대한 지원이 가능하도록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증원된 1중대 3소대가 예비로 각 소대 후방에 1개 분대씩 배치됐다가 적의 주 접근로였던 3소대 후방에 다시 배치됐습니다. 

 

그리고 2/14에서 2/15일 밤사이에 걸쳐 규모가 증각 된 연대 규모의 북 배트 남군이 짜빈동 일대에 위치하던 국군 해병대 2 여단 3대대 11중대의 전술기지를 급습했습니다. 

 

짜빈동 전투 관련 영상

 

3. 전투 경과 

3-1. 짜빈동 1차 공격

제11중대가 주둔하고 있던 짜빈동 마을은 꽝응아이성 북쪽 12km 지점에 위치했습니다. 

기지는 둘레가 800m, 높이가 30m 정도 되는 구릉지대에 타원형으로 설치되었습니다. 배트 남군의 기습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해병여단은 예하부대에 경계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11중대는 여단의 지시에 따라 주변 지역의 수색 및 정찰을 강화하면서 기지 보강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주요 화기의 진지를 유개화 하며, 기존에 구축했던 교통호와 개인호를 보강했습니다. 

조명지뢰와 대인지뢰를 추가로 매설하고 많은 부분을 보완하면서 2/14일 밤을 맞았습니다. 1967년 2/14일 밤에는 초승달이 떴으나 오후 10시 무렵부터 짙은 안개와 가랑비가 내려 시야 확보가 어려워졌습니다. 

오후 11시 30분경에는 배트 남군 침투ㅜ 부대가 3소대 전방기지 외각 철조망을 파기 통(폭탄 통)으로 폭파시켰고

 

중대는 즉각 81mm 조명탄을 뛰어 적정을 확인하였으며 1소대 규모의 적들이 숲으로 도주하는 것을 발견, 집중 사격으로 가했습니다. 

 

배트 남군은 산발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중대의 하력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습니다. 

그들이 도주한 후 중대장은 2차 공격에 대비해 50%의 병력을 저 투 배치하고 결계를 강화했습니다. 이때를 이용해 11중대는 중대의 방어태세와 상극 부대의 지원 화력을 재점검함으로 써 예상되는 취약점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습니다. 

 

3-2. 2차 공격

3-2-1. 적의 거센 공격

11중대는 적의 제1차 공격이 감행된 후 전투 준비를 마쳤습니다. 

11중대와 돌산 사이에는 마른 냇가가 있었는데, 김세창 중위는 군대 군데 냇가에 낮은 둔덕들에 적이 은폐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그가 소속된 해포 7중대에게 포대 효력사로 서너 차례 위치를 이동하며 의심지역에 대한 요란 사격을 실시하였습니다.  그곳엔 월맹의 선봉대 대가 있었고, 표병 대대의 카운터를 맞고 와해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월 뱅 군은 후방 대대와 임무 교대를 하는데 4시간 걸렸습니다. 

덕분에 자정에 총 공격하려던 월맹군은 4 시감이나 시간을 미루게 되었습니다. 오전 4시 10분경 지난밤 적과 교전한 바 있는 제3소대 전방에서 은밀히 접근하는 적을 발견 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대장은 즉시 전 병력을 완편 배치했고 적들은 최대한 끌어들여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어서 조명탄이 터지자 중대 전술 기지를 포의 하던 베트남 군은 기지를 향해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11중대 역시 대응 사격을 가함으로써 한 동안 포격전의 양상이 지속됐습니다. 

 

베트남군의 공세는 상당히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해병대의 집중적인 포화 속에서도 3소대 정면에서 돌파를 시도하던 베트남군 주력은 외곽 철조 마을 폭파하고 3소대 진지를 돌파했습니다. 

 

이어서 1소대 지역의 일부 진지도 돌파당했고 4.3인치 박격포 소대가 위치한 포진지가 적의 공격을 받아 박격포 사격을 중지해야 했습니다. 

 

이에 중포 중대 제2소대장의 지휘로 박격포를 숨기고 박력포 소대를 2개 분대로 나누어 포 진진 와 포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11중대는 모든 가용병력을 모여 역음을 감행했으나 중대 전체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사이 2 여단 본부에서는 11중대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판단하고 진내 사격, 즉 브로큰 애로우 상황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미군 교과서에 실린 대한민국 해뱅대의 신화 짜빈동 전투 이야기 동영상

3-2-2. 상황의 반전과 결사항전

11중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날이 밝으면서 11중대의 역습은 성공했고 베트남군도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수 병사들이 부상당했으나 후송은 생각지도 못하는 나전이 벌어졌습니다. 

이학현 상병은 교통호에 적이 진입하자 수류탄을 터트려 적과 함께 산화하였다고 합니다. 송영섭 일병은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되어 사격을 지속하다가 적탄 6발을 맞고 증상을 입자 자신들의 무기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기관총의 총열을 뽑아서 풀숲에 멀리 던져버린 후 수류탄을 이용해 자폭하였습니다. 

 

진지를 돌파했던 적들을 모두 사살한 것은 오전 7시 20분경으로 상황이 반전되자 기지 외각에서 저항하던 1개 중대 규모의 베트남군도 북서쪽으로 도주했습니다. 여단은 그쪽으로 지원 하력을 집중했습니다. 

 

한편 11중대의 피해가 크자 2여간응 오전 5시 20분경부터 6중대를 비상 대기시켰습니다. 그러나 비와 안래로 시야가 불량했기 때문에 6중대는 오전 7시 30분에야 공중 기동으로 주변 수색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4. 짜빈동 전투 결과 

확인된 11중대의 전과는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 등이었으며, 확인된 전과 이외에도 다수의 적들인 포격 등으로 인해 사망 혹은 부상한 것으로 추정되고 확인된 베트남군의 시신 중에는 1 연대 90대 대장을 비롯한 다수의 장교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써 11중대는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 베트남 정규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중대 전술기지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해병대의 전투력을 과시했으며 앞서 두코 전중에서 대두된 중대 전수 기지의 중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전투였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해병대는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 후 호찌민이 짜빈동 전투의 결과를 보고 받은 후 한국군을 만나면 일단 후퇴하고 인민의 재산과 병력을 보호하도록 하고 100%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 싸우지 말라는 지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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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구르카 용병 전쟁 관련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늠늠한 구르카 용병

1.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구르카 전적

1,2차대전 구르카 용병 참전 , 작전을 지휘 하고 있는 구르카 용병들의 모습 이미지 출처:국방TV

구르카 병이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건 제2차 세계 대전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나 영국-아프라 니스탄 전쟁에서 별다른 사진 이난 취재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상당한 자료와 취재가 이뤄졌기 때문에 북 아프리카에서는 독일 국방군을 상대로,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습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 장병들의 증언에는 이들이 밤마다 독일군의 진지를 주기적으로 기습해 장병들의 목이나 귀를 베어가는 공포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고 실제로  이들의 전과를 의심하여 참호 구축이나 화장실 청소나 하라고 비아냥대던 영국 육군 장교 앞에서 적군에서 도륙해 온 귀를 한부 구니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육군은 정글전에 능해서 역국 육군 지휘관들이 정글에서 싸우기를 꺼려했는데, 그러자 구르카족은 이 정글에서 일본 육군을 겁내지 않고 맞서 싸웠고, 엄청난 활약들을 하였다고 합니다. 

 

일본군의 막 나가는 전술 반자이 돌격에도 구르카들은 코웃음 치면서 무쌍을 찍기도 했습니다. 

사실 영국군의 화력에 반자이 돌격을 하던 일본군은 마구 털리던 와중에 가까스로 영국 눈 진지에 일본도나 총칼 들고 와봐야 쿠크리 들고 기다리던 쿠르가를 만나면.. 그야말로 일본군 피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고]1997년에 월간 지오 한글판에서 이들에 관한 취재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2차 대전 당신 이들은 쿠쿠리 하나로 일본 군들을 대적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도를 단숨에 동강 내고 쿠크리 하나 나로 일본 육군 15명을 메아 죽인 구르카 병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2차 대전 당시 구르카 대의 용맹함과 무시무시함, 잔혹함은 적과 아군을 가지 않고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 생활을 하던 미군 병사들을 구르카 부대가 구출하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수용소에서 포르들을 학대하던 일분군 병사들의 귀를 잘라 선물한 일화도 있습니다. 

폭격기 승무원은 양곤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양곤에는 앞서 언급한 포로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karng thomasian 과같은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chindits병사의 이야기인데 양곤 수용소를 해방한 구르카 연대가 어디인지는 불명이지만 

(양곤 탈환 작전에는 10 구르카 소총 연대, 3구가 소총 연대, 구르카 부대에서 따로 차출한 대대로 구송돼 50인도 공수여단 등 많은 구르카 부대가 참전했기 때문에 알기 힘듭니다. ) 전우였던 chindits에 대한 일본군의 학대에 분노하여 저랬을 수 있습니다. 

 

2. 포틀랜드 전쟁의 구르카의 전설

 

1982년 포틀랜드, 포트리 스텐리를 지키는 아르헨티나 군이 구르카 들이 온다고 실제로 영국군이 계속 민사심리전을 펼쳤고 SAS부대가 기습을 담당할 예가있 었는데 아르헨티나군이 구르카들이 온다고 하자 서로들 달아나거나 손 들고 기어 나와서 이들은 무혈 입 성하여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심지어 몇몇은 이들에게 항복하면서 제발 구르카에게 우릴 넘기지 말아 달라고 울며 사정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이걸 전해 들은 구르카 병들은 우린 저항하지 않는 자, 포로는 일절 건드리지 않는다.라고 하면 불쾌해했었다고 합니다. 

 

다만 위의 서술은 레퍼런스 있는 것도 아니어서 걸러들어야 하지만 만약 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포트 스트리가 아닐 구스 그린 전투 때 벌어진 일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스 그린을 지키던 아르헨티나 군은 신병 의주로 편성되어 급조된 부여였으므로 사기도 낮았고 훈련 도도 낮았기 때문입니다. 

 

구스 그린 전투 뒤에 한 전초기 기지에서 추위와 배고픔음을 못 이겨 아르헨티나군이 (코마도와 교대 후 주둔해 있던) 구르카에게 항복했고 , 구르카들은 항복한 아르헨티나군에게 몸수색을 위해 엎드려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다 엎드렸는데 한 공군 장교가 버티고 있자 구르카 들이 쿠크리로 위협해서 엎드리게 한 기록이 있습니다. 

구스 그린 전투 후에 근방 아르헨티나군은 대체로 구르카에게 항복했다고 합니다. 

이사실은 포클 렌든 전쟁 문서에도 기록되어있는 팩트입니다. 

 

실제로 포트 스텐리 주둔 아르헨티나군은 주변 감제고지랑 방어선이 무너져 항복을 하였고 스탠리와 주변 감제고지를 지키는 아르헨티나군은 사기도 높고 혹한기 훈련 등 훈련도 제대로 받고 무장도 충분한, 나름 정예 부대였습니다. 

으외로 영국군은 제법 고전하고 있었는데 이때 구르카 대대는 스탠리 주변 감제고지인 윌리엄 산 점령에 투입되었고 감제고지를 수비하는 아르헨티나 군은 사기도 높고 장비도 충분했기에 구르카를 보고 졸기는커녕 박격보를 쏴서 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에는 아르헨티나 군의 반격으로 13명이 추가로 부상을 입은 사실도 있습니다. 

 

윌리엄 산 점령 작전은 스코츠 가드가 주도한, 그리고 또 다른 감제고지인 텀블다운 산 점령과 같은 작전 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영국군 근위대 가 텀블다운 산 점령의 주공을 맡는 동안 구르카 대대는 텀블다운 산 남쪽의 월리엄 산을 공격하는 조공 맡은 것입니다. 

 

3. 카길 전쟁

199년 파키스 타과 인도가 카슈미르에서 벌인 국지전인 카킬 전쟁에서 인도군 소속 구르카 병들도 참전했습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 의하면 역시 백병전에서 이들은 무서운 활약을 했기에 파키스탄군들이 절대로 이들과 가까이서 싸우지 말라는 분부도 내렸다고 합니다. 

 

당시 중앙일보 보대에 의하면 구르카 병 등과 백 정전을 벌이던 파키스탄군이 호되게 당하게 되어 물량전으로 반격하였을 정도로 이때 부상을 입고 포가 된 구르카들이 종전 뒤 풀려나서 인도군 훈장을 받고 후한 보상을 받은 사실도 있습니다. 

 

파키스탄 군도 용병인 그들은 꽤 우대해 줬는데, 만일 박대했다가 나중에 보복당할까 두려워해서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파키스탄에 것 주하는 파슈툰족드고 만만치 않게 전투민족이고 파키스탄의 주 인종인 펀자브 인들도 무서운 민족으로 꼽힙니다. 이들도 히말라야 못지않게 척 밥한 산지 힌두쿠시를 중심으로 온갖 외세 공격을 자기 힘으로 막아내던 전투 민족입니다.  그런 이들이 상당수인 파키스탄군도 구르카에게 무척 고전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미 120년 전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그루 카 군들이 파슈툰족이 다수히 카불을 함락할 때 이름을 날렸던 걸 보면 이게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4. 구르카 병과 30인 탈레반들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영국 구르카 용병들 출처 :AFP

네팔 비마 출신의 영국 구르카 연대 3대대 소속, 딥 프라사드 푼 하사는 2010년 9월 17일 아프간 헬만드 주 라힘 칼라이 근처에 있는 기지에서 야간 경비 근무를 서다가, 전바의 어둠 속에서 뭔가 땅 파는 소리 들었습니다. 그느 처음 짐시의 소리인 줄 알았으나 수리의 정채는 IED를 매설 중이 더 2명의 탈레반들이었습니다. 

 

그의 소대는 순찰을 나간 시점이었기에 그는 즉시 무전기로 지휘관에게 보고하고 심각대에 거치돼 있던 GPMG 1문을 때어 들고, 개인 화기인 SA80 한정과 하부 레일에 부착돼 유탄 발사기 한정, 수류탄 다수, 무전기 두대를 가지고 지붕을 올라간 후 사격을 개시 탈레반들도 RPG를 발사해서 사격을 가해왔으나 푼 하사는 15분 이상 그 위치를 사수하면서 400여 발의 탄환ㄴ고 수십 정의 수류탄 등등 손에 잡히는 무기를 몽땅 사용해 최소 세명 이상의 탈레 반응ㄹ 죽이고 다수를 부상 입혔다고 합니다. 

 

그때 푼 하사는  덩치 큰 탈레반 전자 한 명이 벽까지 완전히 접근해 왔고 그가 사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하사는 지붕 위에서 사격하고 있던지라 무거운 GPMG로는 사격 각도가 잘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놈이 접근해서 벽을 타고 오르려는 것까지 발견. 이에 푼한 L85A 2를 들고 발사 하 형 했지만, 이미 단기간 안에서 별다른  관리 조치 없이 400여 발을 연달아 손 직후라 기능 고장이 발생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주위에 무기로 사용할만한 마땅한 물건을 찾다가 삼 삭대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대응하였다고 합니다. 

홀로 30여 명의 탈레반들을 물리치 공훈으로 푼 하사는 2011년 3월 25일 용 십자훈장을 받았습니다. 

 

5. 선발과정 

 

 

구르카 용병 선발과정 동영상

구르카의 급여 난 연금은 원칙적으로 영국군의 동등합니다. 

2018년 기준으로 이병이 연간 14,000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2,260만 원 정도입니다. 이 정도면 영국에서도 고속이라 할 순 없지만 결코 적지 않는 연봉입니다. 한데 네팔에서는 이 정도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을 받는 것입니다. 

연간 국민소득이 같은 시기 한국(27000달러)의 70분의 1 수준인 400달러(50만 원 정도)가 조금 넘는 최빈국(2015년)이므로 구르카로 복무하고 전역한 사람은 부유층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2~300명 선발에 경쟁률은 매년 2만 명 가까이 응시하므로 70:1을 넘습니다. 

신체검사와 체력 테스트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면접 등 다 야한 전형을 요구하고 17세에서 21세 사이만 응시 가능하므로 사회 엘리트인 대학생 등리 몇 년씩 구리 카 준비에만 매달려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카트만두에는 구리 준비를 위한 사설 학원 20 역군 가량이 성업 중입니다. 

또 아버지가 용병 출신이면 직접 아들을 훈련시키기도 합니다. 용병 역사가 200년이나 되다 보니 3대가 용병이거나 친척 중에 용병이 많은 집안도 있습니다. 구르카 민족이 많이 모여 살고, 도시 자체가 히말랴 산자락에 있어서 심신을 단련하기 최고인 포카라에는 한국의 학원가 마냥 용병 양성 학원 단지가 있습니다. 도시 곳곳에 고등학교처럼 보이는 운동장 딸린 건물의 80%는 용병 학교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네팔 버전 한국식 공무원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08년도 기준 경쟁률이 700"1을 넘는 다고 합니다. 

2015년 2월 기준으로 영국군 가운데 구르카 출신 은 장교가 110명, 사병이 2,610명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사교육을 만이 하는 도시민에 합격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해 40명 선의 합격자를 배출하는 유명 사설 학원의 수강료는 한화 월 3만 원으로 한국이라면 용돈 수준이나 네팔에서는 부유층이거나 구르카 출신의 아버지가 있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이런 학원은 전직 구르카 출신이 운영하며 영국군의 선발 전형에 맞춘 커큘럼으로 교육을 합니다. 

 

반면 지방민이나 저소득층은 밭일이나 평소 운동 등으로 체력을 단련한 수밖에 없고, 영어나 수학도 이들에게는 큰 장애물인데 네팔은 아지 학교조차 없는 지방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천 명 가량인 1차 합격자도 한 번도 배해 보지 못한 시골 마을도 많습니다. 그러니 최종 선발되면 가문의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발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면 구르카 출신 모병관이 가을에 고향을 돌면서 지역 예선을 실시합니다. 

여기서는 키와 가슴 둘례 등 신체조건과 기본적인 체력 테스트를 치르며 약 2~3배 수를 선발합니다. 예선 통과자들은 포카라에 위치한 모병소에 입소하여 보름간 최종 경선을 진행합니다. 이때 입소자는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모병소로 들어가는데 마치 한국의 수능 등굣길 분위기입니다. 

 

다양한 선발 전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체력 테스트로서 다양한 고목을 수행하는 주에 하나라도 미달되면 그 즉시 탈락입니다. 




2021.10.02 - [특수부대] - 구르카 용병- 영국에서 활약하는 구르카 ,전쟁터의 사신으로 불리다.

 

구르카 용병- 영국에서 활약하는 구르카 ,전쟁터의 사신으로 불리다.

구르카족은 네팔 중서부 산악지대에 사는 몽골계 소수 부족으로 구르카 용병은 이들 부족 출신의 용병들을 말합니다. 영국이 구르카족 전사들을 용병으로 고요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는

rokmc76.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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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대(大) 전쟁 최장의 싸움터 그 다섯 번째 이야기

스탈린과 레닌그라드 전투 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 레닌 그라드 전투의 5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차례

  1. 양날의 칼
  2. 티흐빈에서의 반전
  3. 지옥으로 변한 도시
  4. 생명의 길 

1. 양날의 칼

봉쇄당하기 이전에 많은 이들이 소개되었음에 여전히 레닌그라드에는 300여만의 시민과 병력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 외부의 지원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시 동쪽의 라도가 호수를 통하여 물자가 보급되고는 있었지만 수량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독일 공군의 차단 작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통한 보급로도 압도적인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어 활용이 불가능한 지경이었습니다. 

협궤 열차가 곧바로 진입할 수 있게 제작되어 운송 효율을 높인 라도가 호수 횡단 보급선. 운항 도중 독일 공군의 공습에 격침당하기도 하였다. <출처: (cc) RIA Novosti archive, image #310 / Boris Kudoyarov at Wikimedia.org> 

독일이 레닌그라드의 점령을 유보하고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모스크바 공량에 나서기로 한 이상, 상대를 최대한 춥고 배고프게 만들어 항복을 받아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켜 승리를 얻는 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전술입니다. 

더구나 포 의도니 인구가 많을수록 저항 기간을 단축시킬 가능성이 컸습니다. 

 

70년 전 보불전쟁 당시에 독일은 파리를 포의 하여 느긋하게 굴복시킨 전례가 있었습니다. 

10월 들어 라스푸타차(Rasputitsa)가 시작되면서 모스크바 점령을 위한 독일의 태풍 작전이 난관에 부딪히는 시작 하였습니다.  진흙 장군은 결국 모스크바를 구했지만 레닌그라드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스스로 진격을 멈춘 상태였기에 라스푸티차가 독일 북부 집단군에게 끼친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반면, 고립된 레닌그라드로 향한 소련의 생명선이 오히려 장애물을 만났던 것입니다. 

 

라도가 호수를 건너 레닌그라드로 보급품이 가려면 일단 내지에서 호수 남측 연안의 볼호프(volkhov)까지 소송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로 향하던 독일군을 막을 라스푸티차가 여기서는 소련의 보급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됐던 것입니다. 

아무리 소련인들에게 익숙한 자연현상이라 해도 엄청난 진흙 구덩이를 빠져나오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941년 가을의 라스푸티차는 모스크바를 구한 조력자인 동시에 레닌그라드를 고통스럽게 만든 양날의 칼입니다. 

 

 

2. 티흐빈에서의 반전

이처럼 레닌그라드 일대가 안 정화 되자. 스탈린은 10월 8일 주코프를 소환하여 모스크바 방어의 중책을 부여하였습니다. 이는 독일과 소려 모두 레닌그라드를 차후의 문제로 보기 시작하였다는 뜻입니다. 양측 합쳐 800만에 가까운 대군이 쉽없이 충돌하여도 모든 곳에서 동시에 싸우기 힘들 만큼 소련은 넓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닌그라드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전투가 끈났다는 의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레닌그라드 도심에 설치된 대공 감시장치인 청음기. 레닌그라드 일대의 전선은 정체되었지만 싸움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연일 도심을 향한 포격을 계속하였고 그러 수록 소련군의 저항 의지는 커졌습니다. 1941년 겨울 이전까지 소련군이 보여준 모습은 모든 무능의 총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전선으로 달려 나오며 저항하는 놀라운 모습음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권력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점령지에서 나치가 소련인들과 포로들에게 가한 잔학행위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면 항복할 것이라 예상했던 독일은 당황하였고 침공 4개월이 지나면서 이 전쟁에서 이기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볼호프 남부의 티흐빈에서 벌어진 전투는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독일일 볼호프와 이곳을 거쳐 오네가호 서안의 페트로자보츠크를 점령한다면 핀란드군와 직접 연결이 되면서 소련의 유일한 생명선인 라도가 호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라스푸티차가 끝난 직후인 11월 8일, 독일이 타흐빈을 점령하자 소련은 즉각 반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모스크바 방어에 혈안이었음에도 stavka(소련군 최고 사령부)가 반역죄 명목으로 수감 중인 메레츠코프에게 직할대인 제4군을 맡겨 투입하였을 만큼 중대한 위기로 인식할 것이었습니다. 한 달간의 격전 끝에 소련군은 12월 9일 티흐빈을 탕 환하였고 이를 계속 확보하려 제4군을 기반으로 볼호프 전선 군을 창설하여 독일 북부 집단군의 측면을 견제하였습니다. 

 

3. 지옥으로 변한 도시

하지만 포위망 외각에서 선전과 달리 도심의 모습은 비참하였습니다. 쉴 새 없이 계속되는 독일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말미암아 기반 시설은 파괴 도어 갔지만 이를 복구할 자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무섭고 두려웠던 것은 식량난이었습니다. 

10월이 되었을 때 레닌 그라드에는 불과 20일분의 식량만이 남아 잇었습니다. 히틀러가 레닌그라드는 가만 놔두어도 몰락할 거라 자시 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정치국원인 주다노프는 군인과 노동자들에게 1주당 빵 8온스, 나머지 시민들에게는 4온스만 배급하였을 정도로 강력히 식량을 통제하였지만 50만 명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었습니다. 

도시에 널브러진 사체를 수습하는 모습. 독일의 공격에 의한 사상자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기아와 추위에 숨져간 이들이었다. <출처: (cc) RIA Novosti archive, image #216 / Boris Kudoyarov at Wikimedia.org> 

거기에다가 12월이 되어 북극으로부터 엄청난 한파가 몰려오면서 영하 4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고 난방용 에너지가 고갈되자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많은 이들이 죽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루 사망자가 5천 명 선에 이르면서 시가지 곳곳에 시체가 쌓여 가는 모습이 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처절하게 도시를 사수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결국 아사 직전의 수많은 시민들이 사체를 먹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보안대에서 이를 단속하였지만 오로지 생존 본능에만 매달리 이들의 행위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사실 이런 참담한 상황을 신속히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극적인 치안 행위나 강력한 통제보다 식량과 연료를 즉시 공급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주간의 폭격 위험을 피해 가며 라도가 호수 위로 보급품을 가득 실은 선박이 오갔지만 공급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데 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시민들에게 추워 떨다 죽게 만든 엄청난 겨울 한파가 역설적으로 레닌그라드를 구한 생명의 밧줄이 되었습니다. 

 

4. 생명의 길

우선 독일군의 공격이 멎었습니다. 그해 겨울은 따뜻할 것이라는 기상대의 장기 예보만 믿고 전쟁을 벌인 독일은 동계 전투용 장비와 소모품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아 더 이상 싸움을 벌일 여건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모스크바와 로스토프 앞에서 진격이 좌절돼 중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에 비해 9월부터 참호를 파고 포위전을 편 쳤던 북부 집단군의 여건이 상대적으로 나았지만 얼어붙은 대포에서 포탄이 발사되지 않기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의 겨울 혹한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결빙된 라도가 호수가 그동안 볼호프 등에서 레닌그라드로 이어지는 뱃길을 막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좋은 수송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1941년 겨울은 40년 만의 혹한이었다. 동계 피복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한 일선의 독일군들은 더 이상 전투를 벌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11월 20일 이후부터는 구호물자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꽁꽁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 위를 달리기 시작하였고 돌아올 때는 50만의 시민들과 부상당한 4만여 명의 병사들을 싣고 지옥의 도시를 빠져나왔습니다. 

 

물론 이러 수송이 마냥 쉬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야간에도 움직인다 하더라고 독일 공군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었고 얼음이 깨지면서 호수 아래로 차량이 가라앉은 경우도 비일비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미 배로 보급품을 수송할 때도 있었던 위험이었습니다. 이처럼 레닌그라드의 구언 행렬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고 도시는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던 수송차량의 기사들은 죽음의 길이라 불렀지만, 이듬해 4월 24일까지 152일간 열려 있던 라도가 호수의 에 고속도로는 '생명의 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생 명선을 통하여 배급량이 다시 늘리기 시작하였고 시 미들의 사기도 서서히 올라갔습니다. 당연히 소련군의 방어선도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반면 예상을 빗나간 레닌그라드의 회생에 히틀러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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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전투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린그라드 시리즈 중 4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차례 

  1. 레닌그라드 영웅 주코프의 등장
  2. 당근 대신 채찍을 주다. 
  3. 독일 히틀러의 변심
  4. 한 번에 먹을 수 없는 먹이 

 

1. 레닌 그 가드 영웅 주코프의 등장

소련을 승리로 이끈 상승장군 게오르기 주코프이미지

레닌그라드 방어를 책임진 북서관구(Northwestern Direction) 사령관 보로실로프는 군사적 능력이 변변찮은 인물이었습니다. 군과 민간을 독려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전선까지 달려 나가 진두지휘하는 용맹함을 발휘하기도 하였지만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예하 북부전선 군 사령관 포포프와 북서 전선 군 사령관 쿠즈네초프가 실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거시적으로 지휘 통솔하기에는 그릇이나 능력이 너무 작았습니다. 

 

키예프 전투 종결 후, 전선을 재정비한 독일군이 전 전선에서 진격을 재개하였고 독일 북부 집단군도 한걸음 더 레닌 그라드에 가까워졌습니다. 

 

신인민위원회는 노약자들을 소련의 내지로 미리 피난시켰으나 이를 능가하는 더 많은 피난민들이 독일군을 피해 레닌그라드로 몰려들었습니다.

포위당하기 직전인 1941년 8월, 기관총 탄띠 제작 교육을 받고 있는 레닌그라드 시민들. 여유롭게 연출된 선전사진이지만, 실제로 남자들은 전선에 차출되었고 후방 지원은 여성들이 담당하였다. <출처: 구 소련 선전사진> 

 

보로실로프는 시민과 피난민 중에 차출한 병력을 북서관구에 긴급 편성하여 방어선에 배치했으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독일이 키예프 공략을 매달려 있는 동안 강화된 방어선이 독일군의 재개된 진격을 틀어막고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팅수 있을지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독소전쟁 개전 이후 지금까지 소련군의 큰 패전 대부분이 전선 중앙과 남부 일대에서 벌어져 북서관구 지역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편이지만 전투 의지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독일 공군의 사정권에 들어온 레닌그라드 도심은 연일 폭격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9월 8일 실리 셀 부르크가 돌일에게 점령당하자 지상으로 레닌 그라드와 연결되는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습니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와 사석에서 농과 욕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이제 친한 이유만으로 더 이상 부서 관구 사령관으로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키예프 방어전을 놓고 대립하다가 좌천시킨 전 총 참모장 주 코프를 소환하여 9월 13일 레닌그라드로 보냈습니다. 

 

2. 당근 대산 채찍을 주다. 

주코프가 레닌그라드 현지에 부임하였을 때 소련군의 사기는 망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가 시야에 보이는 외각 10여 길로 미터까지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쏘는 ㅍ포탄이 시내에 떨어지고 이었습니다. 포위된 상태에서 결사항전을 펼치려면 300여만의 시민들과 100여만의 병력이 먹을 실량이 확보되어야 했는데 그가 부임하기 하루 전에 대규모 식량 저장소가 폭격으로 전소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동안 독일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어 지난 막상 도심이 불타오르자 레닌그라드는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밖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보니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보려는 시민들의 원초적 이 기시미 팽배해지면서 곳곳에서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도심의 모습이 급속도로 흉흉하게 바뀌자 외각에 배치된 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습니다. 

이상태에서 독일군을 저지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주코프는 바닥까지 떨어진 국기를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했습니다. 그도 방어를 자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풀에 꺾여 싸워보지도 않고 순순히 도시를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패배의식에 절어 있던 휘하 장병들을 가혹하다 싶을 만큼 들들 볶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반항하는 이들은 즉각 총살하는 강경책까지 불사하였습니다. 

더불어 민간에 대한 강압적인 통제를 펼침으로써 도심의 치안도 서서히 안정시켜 나갔습니다. 

 

그는 참호를 더욱더 깊게 팠고 도심 요소요소에 대공포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선을 강화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주코프의 굳은 결심은 도시를 수호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렇게 형성돼 레닌 그라드의 단단한 방어망이 앞으로 900여 일 가까이 계속  이상태를 유지하게 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레닌그라드의 운명은 바로 이때 내려진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3. 독일 히틀러의 변심

주코프가 레닌그라드에 도착하기 하루 진인 9월 12일, 히틀러는 북부 집단군 예하의 제4기갑 집단을 모스크바 골량에 투입하라고 OKH(독일 육군 쵝사려부)에 명하였습니다. 이는 전쟁 전부터 레닌 그 가드를 우선 목표로 여기고, 불과 한단 전까지만 해도 공격을 독려하기 위해 중부 집단군에서 제39장갑 군단을 차출하여 북부 집단군을 지원하였던 히틀러의 행태를 고려한다면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모스크바를 먼저 차지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키예프 공력이 끝나자. 히틀러는 갑자기 변심하여 OKH가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입안한 태풍 작전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연이은 격전으로 소모가 컸던 중부 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레닌그라드 목전까지 다가갔던 제4 기갑 집단을 빼버리는 파 겨을 단행하였습니다. 기상천외한 총통의 지시에 사령관 레프를 비롯한 사 북부 집단군 전체가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제4 기갑 집단은 말 그대로 북부 집단군의 돌파를 담당하던 유일한 기동 부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차출하고 더구나 다른 부대를 충원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레닌그라드 점령을 유보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히틀러가 그동안 군부의 요청에도 불고하고 우선순위에서 배제시켜 놓았던 모스크바에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어쨌든 9월 들어 그는 갑자기 이곳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히틀러는 키예프 전투의 결과에 고무되어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전쟁이 거기서 탈것으로 판단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300여만 명의 소련군이 지나 두 달 동안 격파되었고, 소련군의 마지막 전력이라 추정되는 대부분의 예비대들이 모스크바 방어에 투이 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었기에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머 뭐한 피를 입고도 소련의 저항의 지는 꺾어지지 않았습니다. 

 

4. 한 번에 먹을 수 없는 먹이 

어떻게 되었든 레닌 그라드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제4기갑 집단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방향을 틀어 모스크바를 향해 남진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북부 집단군이 레닌그라드 골량을 중단한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9월 17일, 리프는 독일군 6개 사단을 앞세워 레닌그라드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지만 소련의 방어선이 강화된 반면 독일군의 돌파 능력은 현저히 저하되어 별다른 선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레닌그라드의 북쪽을 차단한 핀란드군이 진격의 멈추었습니다. 그들은 지난겨울 전쟁에서 강탈당한 카레리 야를 회복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황한 독일은 OKW(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 작적 부장 요들을 급파하여 레닌그라드 협공을 설득하였으나 핀란드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결국 레닌그라드 진입이 만만치 않자 독일 북부 집단군은 9월 25일부터 진격을 멈추고 포위전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북부 집단군의 예하 부대를 차출하여 모스크바 공략에 투입할 만큼 독일군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라는 두 개의 커다란 먹이를 동시에 먹을 능력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바바로사 계획 수립 당시에는 3개 병단이 세 곳의 전략 목표를 동시에 점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독일은 불과 석 달 만에 그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소련은 광활한 땅이었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저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저만 해도 직접 전선까지 찾아와 레닌그라드 공략이 늦어진다고 닦달하던 히틀러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독일이 진격을 멈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히틀러는 이상태로 가만히 있기만 해도 포위된 레닌그라드의 소련군이 항복하고 나올 것이라 예상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모스크바를 중시하였던 독일 군부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이런 반응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주코프는 이런 상황을 몰랐지만 소련에게 이는 엄청난 호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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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투기 이미지

2021.09.08 - [전쟁사] -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오늘은 지난 글에 에어 레닌그라드 전투 3번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총 시리즈 6편 정도 예정되어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독일 계획과 현실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은 전 전선에서 놀라운 속도의 진격을 선보였습니다. 무론 그 와중에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료 고전을 겪은 곳도 이부 있었지만, 마치 찻잔 속의 태 품처럼 대세를 좌우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스크 전투, 스몰 레 수프 전투처럼 인상적인 대승이 주로 독일 중부 집단군 관할에서 연이어 벌이 지다 보니 많이 이들이 전선 중앙부를 주목하였습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최근의 역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전체 전선에서 경쟁하듯이 놀라운 진격을 선보였던 1941년 8월 이전에 바바로사 계획에서 명시한 진격 목표를 달성한 부대는 북부 집단군 바 까에 없었습니다. 특히 노브고로드(Novgoorod)를 향해 진군하던 예하 제56장갑 군단은 개전 4일 만에 무려 320km로 전진하는 놀라운 기록을 선보였습니다. 

 

이처럼 연이어 엄청난 대승을 거둔 전쟁 초기의 겉모습과 달리 독일은 생각보다 어렵게 앞으로 나고 있었습니다. 

이점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데 우선 바바로사 계획에서 예정한 시간이 너무 차이트 하였음을 뜻합니다. 

연거푸 승리하고는 있었지만 이를 달서 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쟁 개시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선두의 기갑부대와 이들을 후속 지원할 보병부대 사에 간극이 생기면서 갈등이 벌어졌고, 그만큼 보급을 추진하는데도 애를 먹었습니다. 

한마디로 소련을 너무 우습게 생산 만용을 부렸던 것입니다. 

독일 북부집단군은 7월 9일이 되었을 때 A선까지 진격하였다. 독일 침공군 중 가장 빠른 속도였는데 사실 이는 바바로사 계획에 명시된 목표대로였다. 결론적으로 독일은 엄청난 대승을 연이어 거두고 있었지만 진격 목표가 너무 과하였다. <출처: (cc) JHB at English Wikipedia at Wikimedia.org> 

부 집단군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서 레닌그라드로 향하던 제4 기갑 집단의 쌍두마차인 제41장갑 군단장 라인하르트와 제56장갑 군단장 만슈타인은 레닌그라드의 계속적인 진군을 주장하였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빨리 전진하다 보니 병사들도 지쳤고 후속해야 할 보급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또한 후방에서 고립된 채 저항하는 소련군도 골칫거리였습니다. 

 

2. 불쌍한 병사들의 부대

7월 중순이 되자 독일 중부 집단군이 도심에 머물며 저항하는 30여만 소련군을 스몰렌스크 일대에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 독일이 전력을 이 일대로 집중시키자 중부 지단 군과 북부 집단군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생기기 시장하였습니다. OKH(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이상태에서 북부 집단군이 홀로 진격을 계속하면 우측 면이 길게 노출될 것이라 판단하여 정지를 명하였고 사령관 레프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라트비아의 리가(Riga)에 입성하여 해방군으로 환영받는 독일군. 이처럼 독일의 초기 진격은 순조로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급 등의 문제로 애를 먹게 된다

 

이처럼 노도와 같았던 독일의 진경이 레닌그라드에서 100km 미터 전방인 일멘(llmen)호 근처에서 멈추고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소련의 움직이도 분주해졌습니다. 

이틈을 놓치지 않고 레닌 고다드 전면에 깊은 참호가 구축되면서 도시 전체가 요새화 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소련군의 반격을 개시하면서 OKH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덧 했지만 아직 소련군의 역량은 독인 군을 넘기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7월 27일 북부 집단군 사령부를 직접 방문한 히틀러가 진경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채근하고 레닌그라드를 즉각 점령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도심에 위치한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전승 행사를 열고 도시명을 아돌프스 브르크로 바꾸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만큼, 이때만 해도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레닌그라드를 우선 목표로 생각하였습니다. 

사령관 레프는 최선을 다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러려면 좀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전선의 모든 곳에서 소모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를 제때 보충하기 힘들 만큼 독일군의 여건은 좋지 못하였습니다. 

비단 북부 집단군만이 더 많은 예비대와 지원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이들은 가장 많은 곤란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관할 섹터가 작다는 이유로 규모도 작았고 이후 전쟁 내내 지원 순위에서도 밀렸습니다. 

그래서 에든버러 대학의 에릭슨 같든 이는 북부 집단군을 '불쌍한 병사들의 부대'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3. 독일 VS소련 양측의 대응

 

이처럼 전잰 전체를 살표 볼 때 주로 조연 역할을 담당하던 북부 집단군에게 그나마 제대로 된 지원이 이루어진 때가 바로 히틀러의 사령부 방문 직후였습니다. 

8월 5일 모스크바 초입의 스몰렌스크에서 벌어진 전투가 종결되자 중부 집단군 소소의 제39 장갑 군단을 레닌그라드 점령에 투입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총통의 이러한 결정을 중부 집단군이 반겼을 리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양 집단군 사이로 벌어졌던 전선이 다시 공고하게 연결되면서 측면의 위험이 제거되고 더불어 장갑 군단의 지원이 더해지자 독일 북부 집단군은 소련을 격파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진격이 잠시 지체된 약 보름의 시간 동안 소련의 방어막도 한층 강화된 상태였습니다. 비록 밀려나고는  있었지만 그동안 소련 북서 전선 군은 나름대로 선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700여 대의 전차를 모두 소모해 버린 라 세이니 전투처럼 격렬한 저항도 있었지만 체계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손실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을 내준 대신 확보한 전력은 이후 레닌 그라드 방위에 있어 커다란 자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근정적인 결과는 스탈린의 시야가 이곳을 벗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만 정신이 파려 있던 스탈린이 해당 지역의 방위 관한 전권을 최측근이 전 국방성 모로시 로프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소련 부서 전선 군 사령관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작전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패배의 책임을 지고 8월 초에 해임되었지만 종전 후인 1948년까지 주요 부대 지휘권을 연임하였을 만큼 큰 처벌은 다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민스크 전투에서 대패한 서부전선군 사령과 파블로프가 스탈린의 분노를 사서 총살당한 것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4. 희생 대신 얻은 것

그런데 바로 이때 레닌그라드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8월 초 전선 남부의 키예프 일대에 80여만의 소련군이 고립되자 독일군이 포의 섬 면전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물에 걸린 먹잇감이 워낙 크다 보니 독일 남부 집단군이 단독으로 작적을 펼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중부 집단군 예하의 제2기갑 집단과 제2군이 진격 방향을 90도 우회하여 키예프를 향해 400여 km를 남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군부의 후퇴 요구를 스탈린이 거부하고 사수를 선언하면서 소련군이 스스로 적진에서 고립을 자초한 형국이었지만, 적을 서둘러 처단하고 싶었던 히틀러의 적극적인 맞대응으로 인하여 전선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모스크바로 직지 하 느려던 중부 집단군은 반발하였지만 독소 전쟁 이전부터 키예프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총통의 명령에 따라야 했습니다. 

 

결국 독일군이 대거 재배치에 들어가면서 키예프 일대를 제외한 전선 전체가 진격을 멈춰야 했습니다. 

이처럼 전선이 정체된 틈을 타서 레닌그라드 남쪽에는 구가 강에서 네바 강에 이르는 외각 방어선과 그 안쪽의 페테 로프에서 콜트 스키를 연결하는 2중 방어선이 완공되었습니다. 더불어 북쪽에는 겨울 전쟁으로 국경이 이르는 거대한 방어선이 구축돼 상태였습니다. 

 

70여만의 소련군이 이거에 몰락한 키예프 전투는 결론적으로 레닌그라드는 물론 이거니와 소련의 생존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독일이 전진을 멈추고 키예프 점령에만 몰입되어 있는 동안 소련 여타 지역의 방어선은 깊게 파 여고 강화되었습니다. 러시아 제국 이래로 항상 그래 왔듯이 소련은 거대한 구토와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용기를 발판 삼아 방어에 필요한 천금 같은 귀중한 시간을 얻었습니다. 

70여만의 소련군이 일거에 몰락한 키예프 전투는 결론적으로 레닌그라드는 물론이거니와 소련의 생존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독일이 전진을 멈추고 키예프 점령에만 몰입되어 있는 동안 소련 여타 지역의 방어선은 깊게 파이고 강화되었다. 러시아 제국 이래로 항상 그래 왔듯이 소련은 거대한 국토와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용기를 발판 삼아 방어에 필요한 천금같이 귀중한 시간을 얻었다.

 

참고문헌: 전쟁사 남도현

2021.09.08 - [전쟁사] -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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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 [전쟁사] - 레닌그라드전투 (2)-대전쟁 최장의 싸움터

 

레닌그라드전투 (2)-대전쟁 최장의 싸움터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닌그라드 전투 2번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차례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소련의 반격(대응) 쾌속의 진격 1. 대국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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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전투 두번째이야기 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닌그라드 전투 2번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차례

  1.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2.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3. 소련의 반격(대응)
  4. 쾌속의 진격

1.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독일은 얼마나 빨리 소련의 기를 꺾어버리느냐에 독소전쟁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초전에 소련의 저항 의지를 신속히 무터 뜨려 항복을 받아내는 쪽을 택했던 것이었습니다. 

 

1년 전의 프랑스가 바로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프랑스는 단지 국토의 15퍼센트만 점령당하고 150만의 대군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7주 만에 항복했습니다. 

 

독일은 우선 진출 목표는 소련 국토의 20% 정도까지만 이르면 소련인 항복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구와 결제력의 70% 정도가 몰려 있는 곳이라 독일이 생각이 결코 잘못된 것이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바로사 계획은 예정 진출선까지 신속히 진출 함과 동시에 초반에 소련군 주력을 섬멸하면 충분히 완수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를 위해 독일은 침공군을 거대한 3개 병단으로 나누어 독립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독일은 주공이 정해지면 여타 병단이 조공이나 견제의 역할을 당 담하였지만 소련 침 곶전에서는 모두 주공의 역할을 담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소련이 단지 한 곳에 돌파구만 열어서는 점령을 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란 뜻입니다. 역설적으로 독일의 배후에는 절정 한 예비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독소전쟁발발후 레닌그라드봉쇄당시 이상대성당 건너편 독일 진지

 

이때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로 예정되었던 병단은 레프 원수가 지휘하는 북부 집단군이었습니다. 

예하 부대중 창을 담당하는 제4 기갑 집단군이 전선 가운데에 돌파구를 열고 진격하면 좌우에서 제18, 16군이 병행하여 돌격할 예정이었습니다. 

 

예하 부대 중 창을 담당하는 제4 기갑 집단군이 전선 가운데에 돌파구를 열고 진격하면 좌우에서 제18, 16군이 병행하여 돌격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진격로를 제1항 공군이 하늘에서 엄중히 호의 할 예정이었고 3개 집단군 중 유일하게 발트 해로 진입할 독일 해군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북부 집단군의 우선 목표인 레닌 그 아드를 점령하려면 발트해 지역을 거쳐 북진하여야 하는데, 진격 거리로만 따지면 우측의 중부 집단군보다 멀었습니다. 

전면의 관할 섹터가 작지만 문제는 진격할수록 우측면에 노출되는 부의가 커진다는 점이었습니다. 

가잔 좋은 방법은 최대한 빨리 내달려 측면으로 등장할지 모를 소련군이 레린그라드 방어에만 몰려들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력과 예비대가 부 졸한 것은 고민 잉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북부 집단군에게 함께 보조를 맞춰서 소련군을 압박해준 강력한 동맹국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북극의 저승사자라 불리우는 핀란드였습니다. 

독소전쟁 단시에 항상 병력이 부족하였던 독일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축국에 가담한 여러 중소 국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는데 핀란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전투력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핀란든가 추축 국에 가담한 것은 독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소련이 미워서였습니다. 

핀란드에게 소련은 영토의 10%를 빼앗아 간 원수였습니다. 

1939년 11월부터 이듬해 봄 까지 4개월간 이어진 이름바 겨울전쟁(Winter War)의 결과였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의 물리적인 피해 규모는 승리한 소련 쪽이 훨씬 컸습니다. 

 

소련은 핀란드 성인 남서의 절반 정도에 해당되는 병력을 동원하였음에도 핀란드의 유격 전술에 말려 핀란드군의 5배가 넘는 처참한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독소전쟁을 고려하던 히틀러에게 두 가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먼저 소련군을 규모 또한 큰 허야 한 군대로 얕보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전투에 능한 핀란드를 독일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독일과 핀란드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약 40여만의 핀란드군이 소련 침공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를 독소전쟁과 분리하여 계속 전쟁이라고 합니다. 

 

 

 

3. 소련의 대응

독일 북부 집단군을 맞상대할 소련군은 34개 사단으로 구성된 북서 전선 군이었습니다. 

이들은 원래 소련의 후방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사이를 담당하던 2선 급 부대였는데, 1년 전 발트 3국을 기습 점령하면서 서독으로 전진 배치된 상태였습니다. 

 

이 때문에 남쪽으로 독일의 동프로이센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타 전선 군에 비해 규모가 작아 그다지 전투력이 강하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배치를 한 이유는 우선 접촉 면적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 그라드에 이르는 소련 레닌그라드 주 일대는 페이푸스호를 비롯한 많은 장애물로 인하여, 독소전쟁의 여탸전선처럼 대규모 부대가 엉켜서 싸우기가 구조적으로 곤란 지형입니다. 

바르바로사작전계획지도 이미지 출처: 국방일보

결론적으로 이일 대는 독서 전쟁 내내 치열하였지만 겉으로는 가장 정적인 전선이 되었습니다. 

사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3년 가까이 계속될 수 있었던 유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여타 전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뒤에 북부 전선 군이 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지역 내의 전체적인 전력은 소련이 우세해 보였지만 이들의 위치도 애매모호하였습니다. 

핀란드가 존재 때문이었는데, 소련이 핀란드의 추축국 가담을 눈치챘다는 증거는 없지만 설령 독일과 핀란드가 한 배를 타지 않았더라도 미리 대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현제 최전선이 되어 버린 발트 3국 민심이 바 소적이라는 점도 부담이었습니다. 강제로 점령하여 합병한 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들이 소련 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독일이 이곳으로 진격하여 온다면 소련군의 입지에서는 적진 한가운데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화이었습니다. 해당 지역에서 징집한 병력을 북서 전선 군에 배치하였지만 소수였고 이들이 소련을 위해 열심히 싸워 줄지도 미지수였습니다. 

 

 

4. 쾌속 진격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남북으로 2,000km에 이르는 전 전선에서 소련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맹렬한 폭격과 포격 직후 전차들이 쇄도하여 들어갔습니다. 소련 병사들이 정신을 차려 앞을 보면 이미 독일군은 자신 들을 지나쳐 등 뒤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저항하다 산화하거나 얌전히 항복하는 것밖에 없었으며 소련의 공군도 1,200 여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미쳐 날아보지도 못하고 개전 첫날 지상에서 격파당하며 참사의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불과 35세 소련 해군 총사령관에 오른 쿠즈네초프가 개전 전장 전선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하여 내린 비상 경계력 덕분에 해군만이 간신히 참사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게 살린 소련 해군의 전력도 전선의 상황을 호전시키는 역할을 단 담하기엔 미약한 수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독소 전쟁 개전 첫날의 모음을 요약하자면 독일의 완벽한 대승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북부 집단군도 1차 목표인 레닌그라드로 향하여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선봉은 동 프로 센 일대에 시동을 켜놓고 대기하던 제4기갑 집잔 소고의 전차들이었습니다. 

3일 후 인 6월 25일 핀란드군이 북극의 초입인 폐차모에서 남쪽의 비푸리 이르는 1,000km의 국경 전역에서 진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덕분에 여차하면 남서쪽으로 전개할 수 도 있었던 소련 북부전선군이 이곳에만 집중을 해아 했습니다. 

소련 부서 전선 군은 호수, 강 저지대 습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지연전을 펼쳤습니다. 

라 세이니에서 한대의 kv-2 전차가 돌일 제6 기갑사단의 진격을 하루 동안 막아내는 놀라운 선선을 펼 지치고 했지만 전반적으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7월 7일 되었을 때에는 독일군 서두 부대가 소련군 12개 사단을 격파하고 500여 km를 진격하여 페이푸스 호 남단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면서 이제 레닌그라드까지는 200여 km가 남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대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3편을 기대해 주시고 

1편을 읽으셨다면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rokmc76.tistory.com/57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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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가드 전투 이미지 출처:영화레닌그라드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즈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차례

  1. 모두가 원했던 도시 레닌그라드
  2. 소련 혁명상징 도시
  3. 독일의 당연한목표
  4.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

1. 모두가 원했던 도시 레닌그라드 

1940년 7월 초, 프랑스를 평정한 직후,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Oberkommando des Heeres)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독일군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차출하여 이 시 조직으 설치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하달된 임무는 소련 침공에 관한 기초적 계회를 수립하는 것이 이었습니다. 

아직 히틀러의 정식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명령이 내려올 것이 분명하였기에 미리미리 대비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8월 8일, 이곳에 파견 나온 제18군 참모장 마르크스(Erich Marcks)는 러시아의 빈약한 도로망을 염두에 두고 수립한 작전 초안을 상부에 보고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후 바바로사 계획(Operation Barbarbossa)으로 알력진 소련 침공 전락의 최초 뼈대가 됩니다. 

 

마르크스는 주공을 크게 둘로 나누어 모스크바와 키예프로 신속히 진격함과 동시에 소련군의 주의를 분사시킬 목적으로 조공을 이도시로 향하도록 작전을 수립합니다. 

 

이를 검토한 참모장 항더(Franz Halder)는 키예프보다 정치적 상징성을 훨씬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먼전 점령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타당하다며, 계획을 수정하여 12월 5일 히틀러에게 보고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키예프와 레닌그라드를 우선 점령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격국 전쟁 지휘부의 갑론을박 끝에 침고군 주력을 셋으로 나누어 모스크바, 키예프 그리고 이도시를 일거에 점령하도록 수정한 최종 침고 계획이 채택되었습니다. 

 

실전이 오고 간 모스크바나 키예프와 달리, 이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당연한 목표라고 보았던 레닌그라드였습니다. 

 

독일이 그렇게 생각하였던 만큼 소련 또한 이곳을 지키고자 했으며 레닌그라드는 엄청난 혈전의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도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에서 최장이라 할 수 있는 900여 일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이전 투에 이름이 바로 레닌그다드 포위전입니다. 

 

레닌그다드 전투관련 해 히틀러와 참모들의 작전회의 이미지

 

2. 소련 혁명 상징도시

1703년 제정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원래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였지만 스웨덴이 강점하고 있던 네바강 하구의 습지대를 탈환하게 됩니다. 그는 발트해 연안의 이곳을 유럽으로 향한 창으로 삼기로 하고 새로운 도시의 건설에 착수하게 됩니다.  자신에 이름을 따서 상트 레테르 부르크로 도시의 이름을 정한 그는 1712년 이곳을 수도로 없겼을 정도로 애착과 기대가 컸습니다. 

 

이렇게 시작돼 이도시는 이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러시아 제2의 대도시가 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위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흔히 러시아의 심장으로 블리는 모스바는 정치적 상징성이 큰 반면, 해상을 통한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트 페테르브르크는 학술, 문화, 예술 분야를 선도하여 러시아의 머리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소련을 태동시킨 혁명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외부 세계의 흐름을 러시아에서 가장 먼저 접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절대 왕정에 반발한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을 만큼 반골 기질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공 산형명이 시작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905년 이른바'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발한 이후 민심이 계속 흉흉해지자 1914년 도시의 이름을 좀 더 러시아의 친화적인 페트로그라드로 개칭하였지만 이미 권력에 등을 돌린 대중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제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이 도시에서 3월 혁명, 11월 혁명이 연이어 버리시면 제정 러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 아인 소련이 탄 행하였습니다.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다시 이름을 바뀐 점만 보더라도 소련 공산 쥐의 역사에서 이도시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레닌그라드는 소련 혁명의 산징과도 같은 도시였습니다. 

 

 

 

 

3. 독일의 당연한 목표

상징성이 먹고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대도시였지만 독일이 레닌그라드를 점령해야 할 당위성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먼저 표트르 대제가 이곳에 도시를 만들었던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상 독일이 레린그라드를 점령하면 소련은 발트해를 통해 밖으로 나갈 통로가 차단되어 버립니다.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상 독일인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면 소련은 발트해를 통해 밖으로 나갈 톨로가 차단되어 버리고 맙니다. 

 

소련은 거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지만 의외로 해상 출입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 , 레린그다드는 구중 얼마 안 되는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반면 독일이 이곳을 차지하면 소련 내륙으로 칙 나갈 수 있는 중요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독일군의 핵심 브레인들이 침공 계획을 짜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 보급로였습니다. 

유럽에 비해 몹시 적은 철도와 몇 개 되지도 않은 열악한 도로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홍이어서 소련 내부에서 주공의 지향 방향은 극히 제한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독일군은 갈수록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이는 전쟁의 패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레니 그 라드가 확보는 독일 본토에서 소련의 중심으로 향하는 거대한 해상 보급로의 출입구가 개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곳을 교두보 삼아 독일이 최종 진출 목표로 설정한 A-A선(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의 북쪽 끝인 아르한겔스크는 반쪽 통로이지만 이곳이 막히면 소련이 외부와 연력 될 수 있는 바닷길은 극동과 흑해만 남게 됩니다. 

 

레닌크가드는 이처럼 혁명이니 역사성이니 하는 추상적 명분보다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독일에게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반대로 소련에게는 어떠한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사수해야 할 싸움터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외부 연결이 언제든 가능한 해안도시여서 대륙 한가운데 위치한 모스크바와 달리 소련의 전통적으로 구사해온 청야 작전이 방어에 그다지 효과가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4.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

이도시가 아무리 해안가 도시라도 해군력이 약한 독일이 바다를 통해 이곳을 점령할 수는 없었습니다. 

소련도 해군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독일 또한 이를 단숨에 격파하고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킬 만한 역량은 없었습니다. 사실 주변에 40여만의 병력이 지키고 있는 350만 인구의 대도시를 해군으로만 순식간에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타 전선과의 연결을 고려했을 때 이곳만 먼저 차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육상으로 900km를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여야 하는데,  사실 소련과의 전쟁을 한창 계획 중인 독일에게 이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설령 레닌그라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소련을 군사적으로 굴 북 시키려면 그 이상은 진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마치 깔때기 입구처럼 진격하면 할수록 넓어지는 소련의 지리적 구조에 있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전선이 커진다는 의미인데 최종 목표로 설정한 A-A선까지 가면 출발선 다시 보다 약 2배 정도 전신이 넓어지게 됩니다. 전선 남부는 추측 국에 가담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도움을 받아 후속 보급에 그다지 문제가 없었지만 레닌그라드로 다가가야 할 북부는 일단 진력 방향부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구조상 동쪽으로만 직진하면 되는 모스크바, 키예프와 달리 레닌그다는 발트해 연안을 따라 복동진 해야 했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관련지도 이미지

그것은 독일의 진격이 길어질수록 우측면이 그대로 노출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살실 소련이 1940년 6월 14일, 3국을 침공하여 합병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일 발트 3국이 독일 편에 붙는다면 레닌그라드는 바로 밑이 훤하게 열리는 샘입니다. 

풀란드를 분할할 때 독일과 사전 밀양을 맺고 취한 군사 행동이었지만, 소련의 발트 3국 점령은 레닌그라드 방어를 위한 사전조치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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