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제2차 세계대전

[ Second World War / World War II ,  ]

 

더보기

요약

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입니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전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흔히 1939년 9월 1일에 일어난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 선전포고에서 발발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1941년 독일의 소련 공격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 등의 과정을 거쳐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습니다.

 

전쟁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3국 조약을 근간으로 한 추축국[, Axis Powers] 진영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연합국 진영의 대립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경과에 따라 각 진영에 가담한 국가들은 변동이 있으며, 중립을 표방한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실제로는 어느 한 진영에 적극 가담한 나라도 있습니다.

이 전쟁으로 세계에서 수천만에 이르는 인명 피해가 나타났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도 커다란 변동이 나타났습니다.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 24일 국제연합이 창설되었으며, 전후 경제 질서의 회복을 위해 1944년 체결된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달러가 세계의 기축 통화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미국 중심의 경제 체제가 성립하였습니다. 소련 군대가 주둔한 동유럽, 외몽고, 북한 등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중국에서도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세계는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동유럽,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또한 1960년대까지 패전국의 지배 아래 식민지 상태에 있던 나라들도 상당수가 주권국가로 독립을 이루면서 국제 관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더보기

목차

  • 1. 제 2차세계대전전사
  • 2. 제2차 세계대전의 경과
    • 1) 제2차 세계대전과 영독 전쟁
    • 2) 제2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
    • 3) 제2차 세계대전과 대동아공영권
    • 4)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
    • 5) 제2차 세계대전과 유럽의 종결
    • 6)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항복
  • 3.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세계와 전후처리
    • 1)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결과와 책임추궁
    • 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양극체제와 평화조약

더보기

1. 제2차 세계대전의 전사


네이버이미지 참고


 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는 전반적 위기단계에 돌입하였다. 더욱이 자본주의 제국의 발전의 불균등이 두드러졌고, 1929∼33년의 세계공황은 이와 같은 불균등에 근거하는 국제 대립을 일거에 첨예화시켰습니다.

 

즉 자본주의 열강의 블록화와 폐쇄경제적인 경향은, 자본주의국으로서 기초가 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국내 정책의 정돈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1931년 9월 중국 동북에서 침략 행동을 개시, 1932년 ‘만주국’을 성립시켜, 이 지역에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1933년 3월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부인하자 일본은 곧 연맹을 탈퇴하였습니다. 한편 독일에서는 국내 정치의 혼란 가운데에서 1933년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외치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같은 해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의 불만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1935년 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1936년 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를 본 이탈리아는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여 36년 5월에는 전토를 정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침략의 확대, 전쟁 위기의 절박을 앞에 두고 반파시즘, 민주주의 옹호를 주창하는 민중의 반전운동도 활발해져서, 이것을 배경으로 1935년 여름의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인민전선의 결성을 제창, 1936년 2월에는 에스파냐에, 같은 해 6월에는 프랑스에 인민전선 정부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는 독 ·이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내란이 벌어졌고, 중국에서는 1936년의 시안[西安] 사건을 계기로 항일 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자, 일본은 이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1937년 7월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도발하였습니다.

 

1936년 11월 독 ·일은 방공협정()을 체결하였고, 1937년 11월 이탈리아가 이에 가입하여 독 ·이 ·일 3국은 반소()를 공공연히 외쳤으며, 이것을 구실로 하여 국내에서의 파시즘화와 대외침략을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똑같이 공산주의를 겁내는 미 ·영 ·프의 지배층으로부터 그 침략을 용인받으려고 하였습니다. 미 ·영 ·프의 지배층은 일면으로는 독 ·이 ·일과 제국주의적 대립을 나타내면서도, 일면으로는 이들 3국의 창끝이 소련이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 에로 향해지는 한, 이와 타협한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스 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안슐루스)하였습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습니다.

[광고]

이리하여 독일은 동 ·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한편 국제연맹 또는 집단 안전보장 체제는 붕괴되어 갔습니다.

 

소련은 독 ·일의 연맹 탈퇴 후인 1934년 9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집단 안전보장정책에 노력(리트비노프 외교)하게 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이 뮌헨 회담에서 제외된 것은 리트비노프 외교의 기초가 상실된 것을 의미 한합니다.

 

더욱이 에스파냐에서는 1939년 1월 독 ·이가 원조하는 프랑코가 인민전선 정부를 타도했습니다.

1939년 5월 소련 외상 V.M.몰로토프가 취임하여 무력 외교로 자국의 안전을 꾀하려 하였습니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고 이어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그단스크)를 요구하였습니다. 끝없는 히틀러의 요구에 영 ·프에서도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양국은 폴란드에 원조를 약속하였습니다.

 

독일 ·폴란드 간의 긴장 격화와 함께 영국은 대독 개전에 대비하여 소련과 교섭을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독일과도 교섭하고 있었습니다. 뮌헨 회담 이래로 소련의 영 ·프에 대한 불신은 숨길 수 없게 되었고, 8월에는 영 ·소 교섭이 정체되고, 이에 따라 독 ·소 교섭이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이미 폴란드 공격을 결의하고 있던 히틀러는 동서에 걸치는 2 정면(二正面) 전쟁을 피할 필요가 있었고, 소련은 독일-폴란드 전쟁이 반소(反蘇) 전쟁으로 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8월 23일의 독 ·소 불가침 조약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전혀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양국이 제휴하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영 ·프의 유화정책은 결정적으로 파탄되었으며, 대소 침략을 겨냥한 일본의 대독 군사동맹 교섭은 도각으로서 끝나 버렸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파시즘에 반대해 온 유럽의 공산주의자, 소련 지지파, 인민전선 옹호자들이었습니다.

 

소련의 중립을 확보한 독일은 예정대로 1939년 9월 1일 폴란드에 침입하였다. 9월 3일 영 ·프는 독일에 선전()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의 더치하버공습 1942년 6월 3일 미국 알래스카주의 더치하버에 일본군이 폭격기를 사용하여 공격하고 있다. 출처: nara


더보기

2. 제2차 세계대전의 경과

1) 제2차 세계대전과 영독 전쟁

폴란드에 침입한 독일군은 2주일이 못 되어서 폴란드군 주력을 격파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도한 준비뿐만 아니라, 전략공군과 기갑부대의 밀접한 제휴에 의거한 전격전의 성공에 따른 것이었다. 폴란드전 종료 후 히틀러는 영·프에게 화평을 제의하였지만 영·프는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영·프는 서부전선에서 적극적 공세를 취하지 않아, 여기에서는 약 반 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볼 수 없었다(기묘한 전쟁:Phony War). 영·프는 독·불 국경에 연하여 구축된 요새 마지노선에 의존하고, 해상봉쇄·경제 압박에 의하여 독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소련은 영·독전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이라 하여 중립의 입장을 취하였지만, 독일의 군사력과 침략성을 겁내어 국경 방위선을 서쪽으로 확대하려 하였습니다.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은 폴란드에 있어서의 러시아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폴란드에 침입하고 부그 강변까지 진격하여, 9월 28일 독·소 양국 사이에서 폴란드를 분할하였습니다. 이어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와 각각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1940년 7월에는 이들 3국을 소련령으로 편입하였습니다.

또 1940년 6월에는 루마니아로부터 베 시라 비아 지방과 부코비나 북부를 획득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습니다. 더욱이 핀란드에게는 영토의 교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1939년 11월 전쟁을 개시하여 1940년 3월에 간신히 그 요구를 실현시켰습니다(소련-핀란드 전쟁).

 

이때, 거의 유명무실해졌던 국제연맹은 창립 이래 최초로 소련을 제명 처분하였고, 영 ·포도 핀란드 원조를 위하여 병력을 파견코자 하였습니다. 영 ·프는 핀란드 원조를 구실로 나르비크 등 노르웨이 제항()을 확보하여, 독일 공업에 불가결한 스웨덴 철광석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독일군은 선수를 쳐서, 1940년 4월 덴마크를 점령함과 동시에 노르웨이에 침입하여 영 ·프군을 격퇴하였습니다. 이 성공에는 육군장관 V.A.크비슬링 등 노르웨이 파시스트의 공모()가 기여하였는데, 크비슬링이라는 이름은 이후 ‘조국을 판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 5월 10일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에서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체임벌린 내각이 물러나고, 대독 강경론자인 처칠이 노동당을 포함하는 거국내각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똑같이 중립국인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침입하였고, 나아가서 마지노선의 북단을 가로질러 영국 해협으로까지 진출하여 영 ·프군을 남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북부에 고립된 영 ·프군 30만은 됭케르크에서 영국 본토로 기적적으로 철수하였다(됭케르크의 철수).

한편, 독일군은 파리를 목표로 쇄도하여, 6월 14일 파리를 점령하였습니다. 이 정세를 보고 있던 이탈리아는 6월 10일 갑자기 참전하여 남프랑스에 침입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6월 16일 P.레노가 사직하고 H.P.페탱이 수상이 되어, 다음날 휴전을 제의하였습니다.

 

6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했을 때와 똑같이 콩피에뉴의 열차 안에서 휴전협정은 조인되었습니다. 이 결과 프랑스 본국의 약 2/3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놓였고, 남부의 나머지 지역은 ‘자유지대’로서 비시(Vichy)로 옮긴 페탱 정부에 위임되었습니다. 비시 정권은 7월 10일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파쇼적인 신헌법을 공포하였습니다.

 

한편 항복과 동시에 탈출한 드골은 런던에서 대독 항전(對獨抗戰)을 국민에게 호소하여 ‘자유 프랑스위원회’를 결성하였습니다. 히틀러는 계속하여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단행을 결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에 불가결한 영국 해협의 제공권을 둘러싼 전투, 즉 ‘브리튼의 싸움(Battle of Britain)’에서는 영국 공군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1940년 9월에는 이 작전을 무기 연기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방 제국’의 건설은 히틀러 본래의 목적이었는데, 이 실현에 의하여 군사 경제의 기반을 강화하여 영 ·미에 대항코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발칸제국에 대한 공작이 활발해졌습니다. 이곳은 대소() 공격의 전진기지로서 뿐만 아니라, 터키를 거쳐 중동으로 진출하는 데에도, 더욱이 루마니아의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공급지로서도 확보해 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1940년 8월,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가하여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헝가리에, 또한 도 브루야 지방을 불가리아에 할양시켜 분규 중에 있는 영토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아울러 이들 3국을 독 ·이 ·일 3국 동맹에 가맹시켜 기지를 확보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무솔리니는 1940년 10월 돌연히 그리스에 침입하였으나, 2주간도 못되어 좌절하고 독일의 원조를 요청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우선 그리스의 고립을 획책하고 1941년 3월 유고슬라비아를 독 ·이 ·일 3국동맹에 가맹시켰으나, 2일 후에는 친서구적인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므로, 4월 유고슬라비아에 침입하여 단시일에 전토를 제압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에도 침입하여 영국군을 격퇴하고, 더욱이 5월에는 공수부대가 크레타섬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발칸 제국을 제압한 4월 말, 히틀러는 6월 22일을 소련에 대한 공격일로 명령하였습니다. 5월 10일 나치스 부총통 헤스는 단신 비행기를 조정하여 영국 본토로 가서, 대소 전(對蘇戰)을 위하여 영 ·독 휴전을 실현코자 하였으나 무위로 끝났습니다. 한편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5월 6일 스탈린이 새 수상이 되어 예상 못한 사태에 대처하게 되었습니다.

 

더보기

2) 제2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핀란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소련으로 침입하였습니다. 북부군은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향하였고, 중부군은 모스크바로 직진하였으며, 남부군은 우크라이나로 동진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소련군 주력을 2개월 내에 분쇄하고 우크라이나와 캅카스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소련군에 대한 과소평가, 사회주의 체제의 급속한 내부 붕괴의 기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략은 엄동(嚴冬)의 도래와 함께 정체되었고, 12월에는 소련군의 반공(反攻)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대소 전의 단기 승리를 전제로 하는 히틀러의 세계전략의 좌절을 의미합니다.

 

더욱이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영·미는 즉각 소련에 대한 원조를 성명하였고, 8월 12일 영·미가 ‘대서양 헌장’으로 전쟁 목적을 분명히 밝히자 소련은 즉각 이를 지지하는 등, 영·미·소의 반(反) 파시즘 연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해 12월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937년 7월 이래로 일본은 중일전쟁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었고, 영·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습니다. 1940년 5월 이래 독일이 네덜란드·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 본토 상륙의 기미가 보이자, 일본은 1940년 9월에 독일·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하였고 '호기 남진(好機南進)'의 방침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수출 제한과 미·영 결속, 장제스 정권에 대한 원조 강화로 대응하였습니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에서는 재차 '북진론'이 대두되어 대소 전의 준비가 진행(관동군 특별연습)되지만, 정부로서는 '남진' 방침을 결정하고 7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였습니다. 이것은 미·일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습니다. 미국은 즉각 미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였고 대일 석유 수출을 금지하였습니다.

이 조치는 일본 군부의 대미 개전론을 자극하였고, 10월에 주전파인 도조[東條]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고, 사흘 뒤인 11일에는 독일·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 포고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세계의 여러 전장(戰場)은 일체가 되었고, 연합국(민주주의) 대 추축극(파시즘)이라는 기본적 대항 관계(성격)가 명료해졌습니다. 1942년 1월 1일, 미·영·중·소 등 26개국은 '연합국 선언'에 조인하였습니다.

한편, 중국 충칭[重慶]에 거점을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한 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와 사이판, 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습니다.

더보기

3) 제2차 세계대전과 대동아공영권


레이테만전투


일본은 진주만 공격과 함께 말레이반도 해역에서 영국의 신예 전함 2척을 격침하여 제해권을 잡았습니다.

또 개전과 동시에 육군은 말레이반도 ·필리핀에 상륙하여 1942년 2월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영국 극동군을 무조건 항복시켰습니다. 필리핀에서는 1942년 1∼3월 마닐라를 위시하여 수마트라섬 ·자바섬을 점령하고,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습니다. 또한 원장 루트의 절단, 인도에 대한 대영이 간 공작을 위해 미얀마에 침입하여 양곤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리하여 남방 작전은 일단락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주전장습인 중국 전선은 교착상태가 계속되었고 중국의 항전 체제는 강화되어 갔습니다.

1942년 1월에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는 ‘대동아공영권()’의 건설 방침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남진’의 목적의 하나는 전략물자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에 ‘대동아공영권’이란 유럽의 식민지 지배에 대체되는 새로운 일본의 식민지적 체제에 불과하였습니다.

 

일본의 침략과 가혹한 점령정책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각지에서 반일 저항운동이 일어나고 이 저항을 통하여 아시아의 민족해방 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편 히틀러는 1939∼42년에 정복한 유럽 제국을 그 인종론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편성하고자 하였다(신질서).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에는 독일 사정관()에 의한 민간정부가 설치되었지만, 언젠가는 대독일 제국으로 편입할 예정이었습니다.

룩셈부르크 ·알자스로렌 ·단치히 등은 대독일 제국에 합병되었습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는 ‘열등 인종’으로 취급된 슬라브계 주민이나 유대인은 강제이주, 대량 멸절하고, 이에 대신하여 독일인을 식민시킬 계획이었습니다.

 

점령지역의 행정권은 히틀러의 친위대(SS)에게 위임되었습니다. 또한 히틀러의 국가 비밀경찰(게슈타포)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명령받고, 독일의 지배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 유대인을 잡아들여 아우슈비츠 ·트레 브링 카 등의 가스실에서 420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습니다.

 

군수생산 강화에 따라 심각화되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1942년 3월 노동 총감 자우케르는 독일 지배하의 유럽 전토에서 노동자의 강제징용을 시작하여 적어도 750만 명이 독일의 공장으로 송출되었습니다. 이상의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는 나치스의 점령지 지배에 대하여, 민중들은 지하투쟁을 포함한 갖가지 형태로 저항하였습니다.

연합군의 반공은 동 ·서에서도 이러한 민중의 저항운동과 맞호응하면서 전개되었습니다.

 

더보기

4)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미 회담에서 먼저 독일 타도에 전력을 다한다는 유럽 제1주의가 결정되지만, 독일 타도의 전략을 놓고 영국과 소련은 대립하였습니다.

 

소련이 유럽에서의 ‘제2전선’을 요구한 데 대하여 영국은 북아프리카 작전을 고집하였습니다. 지중해에서 중동·인도에 이르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체제를 확보하고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부터 공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1942년 여름에 북아프리카 전선은 긴박해졌습니다. 패배를 거듭하는 이탈리아군을 원조하러 간 롬멜 장군의 기갑사단은 토브룩을 점령하고 카이로 약 100km까지 육박하였습니다. 1942년 10월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영 ·미 연합군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습니다.

 

독일·이탈리아군은 동서에서 협공을 받아 1943년 5월에 북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소탕되었고, 이어서 영·미 양국은 이탈리아 진공작전을 계획합니다.

이와 같이 제2전선이 연기됨으로써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의 95%를 떠맡은 것은 소련이었습니다. 1942년 봄 재개된 독일군의 공격은 남부전선에 중점을 두었고,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에서는 독·소 양군의 촌토()를 다투는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격전 결과 포위당했던 독일군은 1943년 1월 말 항복하였는데, 이 패배가 가져다준 영향은 매우 컸다. 민중의 저항운동을 비롯하여 연합국 진영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군부 내의 히틀러에 대한 불신이 커졌으며, 이탈리아는 영·미 측과의 강화를 획책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독·소전은 히틀러에게는 ‘사활의 투쟁’이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총동원 체제를 취하였지만, 1943년 여름의 총공격에서 실패하였고, 이후 대세를 만회하지 못하였습니다.

1943년 7월 영·미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와 보수파가 무솔리니를 감금하고 바돌리오 내각을 성립시켰습니다(7월 25일).

 

바돌리오는 즉각 영·미와 교섭을 개시하여 9월 3일 무조건 항복을 하였습니다. 항복은 9월 8일 발표되었고, 남이탈리아로 피신하였던 국왕과 바돌리오 정부는 10월 13일 독일에 선전 포고하였습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구출하고 북이탈리아에 공화파 시스트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1945년 5월 초까지 계속되지만, 이 일종의 내란 상태에서 국왕과 보수파의 권위는 상실되었습니다(1946년 5월, 왕제폐지).

1943년 태평양에서의 전국도 전환하였습니다.

 

서전에 성공한 일본은 제2단계 작전으로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차단하려 하였지만,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전, 특히 같은 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일본 해군 기동함대의 주력()이 상실되었고,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은 미국군이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942년 8월 미국군은 과달카날섬에 상륙하였다. 격전 끝에 1943년 2월 일본군은 패퇴하였다. 이후 미국군의 반공은 격렬하여 뉴기니·솔로몬제도·길버트 제도·마셜제도로 향하여 전개되었습니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선언에서 미·영·중은 전후 일본의 영토 처리 방침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944년 3월 미얀마의 일본군은 임팔 작전으로 인도에 침입하려 하였으나 7월 대패하였습니다. 마리아나 제도에 육박하는 미군도 7월 사이판섬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 공습의 기지를 얻었습니다.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위하여 10월 레이테섬에 상륙하였습니다. 일본 해군은 전력을 다하여 레이테 만의 미 함대를 격멸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중국 전선에서도 1943∼44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산사 군에에 의하여 화북과 화중에 ‘해방구’가 만들어짐에 따라 일본군은 간신히 점과 선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더보기

5) 제2차 세계대전과 유럽의 종결


라인강변의 전투출처: nara


이탈리아 항복 후의 1943년 11월, 영 ·미 ·소는 제2전선의 실시에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영 ·미 연합군은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습니다. 영 ·미군의 진격과 함께 프랑스의 저항운동도 활발하여져, 8월에는 파리 시민이 봉기하여 파리를 해방하고 드골을 맞아들였습니다.

 

독일에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가 7월 20일 반히틀러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미 ·영군에 호응하여 소련군의 진격도 활발하여, 1944년 가을에는 소련 영토를 해방하였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격과 이에 호응하는 지하 저항 전의 격화를 앞에 두고 동유럽의 동맹 제국은 동요하여, 잇달아 대독 참전으로 방향 전환하였습니다.

 

1944년 3월 루마니아는 소련군이 육박하자 국왕과 군부가 인민민주주의 블록에 협력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9월 소련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독일에 선전하였습니다.

 

불가리아는 영 ·미에 선전하고 소련에는 형식상 선전하지는 않았으나, 소련이 1944년 9월 선전하자 조국전선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습니다(10월).

 

이어 소련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들어오지만, 이곳에서는 일찍이 저항운동이 활발하여 1942년 유고 인민해방군이 결성되었고, 1943년 11월 티토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인민해방군은 1944년 10월 베오그라드를 해방하였고, 거의 자력으로 독일군을 전토에서 일소하였습니다. 이어서 소련군은 헝가리로 향하였습니다. 홀 티 섭정이 휴전을 제의하자 독일은 홀 티를 감금하고 친독적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공산당 등의 ‘헝가리 전선’은 소련군의 협력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습니다(45.1).

 

소련군은 1945년 2월 부다페스트를 함락시켰으며,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동 유럽제국에는 저항운동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미 1944년 10월 스탈린과 처칠은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에는 소련의, 그리스에는 영국의 우월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영 ·소가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티토 정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분규가 생겼다. 저항운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런던 망명정부는 반소적이라고 하여 소련은 이와 단교하고, 1944년 7월 루블린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1944년 8월 런던 망명정부는 무력봉기에 의한 바르샤바 해방을 시도하였으나, 독일군에게 진압되었습니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고, 폴란드의 두 정권의 통일과 국경에 관하여는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일단 해결을 보았습니다.

 

또한 이 회담에서는 독일 처리 문제가 검토되었으며, 소련의 대일참전도 결정되었습니다.

히틀러는 1944년 12월 서부전선 아르덴에서 일대 반격을 시도하지만 4일 만에 괴멸당하고 말았습니다. 1945년 2월 소련군은 오데르, 4월 나이세강에 도달하였습니다.

 

동시에 영 ·미군도 공격을 재개하여, 3월 쾰른을 점령하고 라인강을 건너 4월 25일 엘베강의 토르고에서 소련군과 교환하였으며, 이 날 소련군은 베를린에 돌입하였습니다. 사태에 절망한 히틀러는 4월 30일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자살하였습니다.

 

후계자로 임명된 데니츠 제독은 군대와 민간인을 가능한 한 영 ·미 점령지구로 옮기면서 5월 7일 무조건 항복하여 9일 항복이 정식 조인되었습니다. 5월 23일 데니츠 정부의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독일의, 제3제국은 명실공히 소멸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이 4월 29일 항복하면서 무솔리니는 4월 28일 밀라노 근교에서 살해되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더보기

6)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항복

1944년 11월 이래, 미군 폭격기 B-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은 격화되었습니다. 19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 탈환하고 이오 섬에에 상륙하였습니다. 4월에는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 3개월이나 걸린 오키나와전에서는 전 도민이 동원되어 희생됨으로써(9만여 명), 닥쳐올 본토 결전의 비참한 양상을 암시하였습니다.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 선언’에서 대일() 처리 방침을 명시함과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습니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은 이 날 대일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에 이르러 일본 군부도 항복을 결의하고 10일 밤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전파의 ‘국체 수호’ 고집으로 진통을 겪다가 일본왕의 결단으로 14일 가까스로 수락을 통고하고, 15일 일본왕은 이것을 국민에게 방송하였습니다.

 

30일 미군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였고,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가 조인되면서 태평양전쟁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습니다.


1945년 일본의 공식항복조인식에서 맥아더 장군이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일본의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함상에서 서명하고 있다.출처: nara


더보기

3.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세계와 전후처리

1)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결과와 책임추궁

제2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전장()으로 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전쟁이었습니다. 참가국은 연합국 측이 49개국, 동맹국 측이 8개국이며, 중립국은 스위스 등 6개국에 불과하였습니다.

동원병력 1억 1000만 명,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 명으로, 그중에서 독 ·소 양국의 희생이 가장 많아 소련의 전사자 1,36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000만 명, 전인구의 약 1/10, 독일의 전사자 50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550만 명, 전인구의 약 1/10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일본의 전사자는 185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50만 명, 전인구의 약 1/40이라고 합니다. 이 개수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동원 병력수는 약 2배, 전사자는 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입니다.

 

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의 희생자가 현저히 많습니다. 이것은 나치스의 인종론적 절멸 정책에 유래합니다. 민간인의 희생자 가운데 약 500만 명은 유대인인데 이것은 나치스 지배하의 유대인 총수의 약 70%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의 전쟁이 민간인을 제외하지 않은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살육) 전쟁으로 된 데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전비, 파괴된 재산을 오늘날의 물가에 맞추어 재평가한다면 너무나 방대하여서 아마도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최초부터 전쟁 책임의 소재가 명료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국내에서는 파시즘화를 추진하면서 대외침략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연합국은

첫째로는 전쟁범죄인을 단죄하고(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군사재판),

둘째로는 일본 ·독일을 점령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민주화를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확실히 파시즘에 대항하는 연합국의 공통된 슬로건은 ‘민주주의’였으나, 자본주의국과 사회주의국과는 그 이해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차이는 일본 ·독일의 처리를 에워싸고 양 체제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최대의 피해를 받고 대독 전쟁 승리에 최대의 기여를 하였던 소련은, 내외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소련의 지도하에 동유럽 제국은 인민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체제를 취하였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오랜 대일 항전에 견디어 낸 중화민국이 5 대국의 하나가 되었으나, 국 공대 립은 내전으로 발전하여 1949년 10월 중국 정권의 성립을 보았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의 패퇴와 동시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는 베트남 공화국,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에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성립되지만, 종전의 식민국인 프랑스 ·네덜란드는 이것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민족해방운동은 고조되어 잇달아 독립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패전국 일본 ·이탈리아는 물론, 전승국 영국 ·프랑스 뒤이어 식민지를 잃었습니다. 더욱이 영국에는 노동당 내각이 성립되었고,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저항운동 가운데에서 공산당의 힘이 신장되었습니다.

미국만이 ‘민주주의 병기창’으로서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최대 최강의 자본주의국으로서 세계를 지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보기

2)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양극체제와 평화조약

미 ·소를 정점으로 하는 양 체제의 대립이 격화, 냉전화함으로써 추축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은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1946년 7~10월의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트리에스테(Trieste) 문제를(Trieste)문제를 둘러싸고 미 ·소가 대립하였으나, 1947년 2월 10일 간신히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에 대한 강화조약이 조인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게 영토를 할양하였습니다.

트리에스테는 국제연합 통치하의 자유지역이 되었으나, 1954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 분할되어 일단 해결을 보았습니다.

루마니아는 1940년의 소련에의 영토 할양을 재확인하였으나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대부분을 회복하였습니다. 헝가리의 국경은 거의 1938년의 국경으로 되었고, 불가리아는 도브루자 남부지방의 영유가 인정되어 41년의 국경을 거의 유지하였습니다. 핀란드에 대하여는 1939년의 소련-핀란드 전쟁에 의한 소련에의 영토 할양이 인정되었습니다.

 

독일 처리 방침은 1945년 8월 2일 포츠담 의정서에서 명확히 되었으나 그 해석을 에워싸고 미 ·소는 매사에 대립하여, 1947년 말의 런던 4국 외상회담은 결렬되었습니다. 1949년에는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과 독일 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되었고, 미 ·영 ·프는 1952년 5월 서독과 ‘평화 확정 조약’을 맺었으며 1954년 10월 파리협정에서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고 사실상의 단독 강화를 체결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1953년 5월 동독에 자립권을 주었고, 1955년 9월 동독의 주권을 회복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두 개의 독일은 고정화되었습니다.

 

1945년 7월 26일의 대일 포츠담 선언에 명시되었으나, 대일 강화 문제에서도 미 ·소는 일치되지 않았으며, 또 일본 여론도 분열하였습니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습니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조인을 거부하였습니다. 중국은 초청되지 않고 인도 ·미얀마 ·유고슬라비아는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중화민국 ·인도 ·미얀마와는 별도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두산백과사전 참조

728x90
반응형
반응형

 


목차


1차 세계대전

1.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과 원인

1) 제1차 세계대전과 재 국주의 열강

2) 제1차 세계대전과 삼국 협상 및 삼국동맹

3) 제 1차 세계대전과 발칸문제

2. 제1차 세계대전 발발

3. 제1차 세계대전의 경과

4. 제1차 세계대전과 교전국의 국내 정세

5. 제1차 세계대전과 비밀 외교

6.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7. 제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 조약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전쟁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사 중 큰 전쟁 세계대전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고 그중에서 1차 세계대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차 세계대전

1. 제1차 세계대전 배경과 원인 

1914년부터 4년간 계속되었던 세계 전쟁입니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고,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산백과사전 참고

1) 제1차 세계대전과 제국주의 열강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전쟁이었습니다.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의 성립이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 단계로 들어가, 각국은 대형화한 경제력의 배출구(판로)를 필요로 했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는데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 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 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습니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미국과 프랑스·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습니다.

 

2) 제1차 세계대전과 삼국 협상 및 삼국동맹

러 ·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 ·프랑스 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 ·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서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 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 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 협상을 성립시켰습니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3국 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습니다.

 

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을 더하여 갔습니다.

 

3국 협상과 3국 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18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 ·Cairo ·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

 

(Berlin ·Byzantium ·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 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 사건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 ·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19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 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습니다.

 

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습니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 구인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습니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 도달하였습니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병사 -네이버 이미지 참조


3) 제1차 세계대전과 발칸문제

발칸은 일찍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유럽의 화약고’였습니다. 이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제민족의 결집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이 영향을 겁내어, 독일의 지지하에 범게르만 주의를 주창하여 이에 대항하였습니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바랐으나 러 ·일전쟁과 제1혁명(1905)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배후의 독일과의 충돌이 두려워 1909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병합 정책 지지 성명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1912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에게 발칸 동맹을 결성케 하였고 같은 해, 동맹은 투르크와 싸워(제1차 발칸전쟁) 승리하였으나 투르크로부터 얻은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913년 재차 전쟁(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패한 불가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세르비아의 승리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승리를 뜻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리하여 유럽의 일각 발칸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세력 확장 때문에 소국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곳에서의 전쟁의 불꽃이 전 유럽을 휩쓰는 위험한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2.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 연습의 통감으로 이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G.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 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이것이 일부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을 포고하였습니다. 그동안, 오스트리아는 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세르비아 강경 방침에 대한 독일 측의 양해를 얻었습니다.

 

 

종래의 정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끌려서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 방침을 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독일 측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독일의 정부 ·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 전쟁으로 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와 같은 강경 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 측의 군비 강화가 1914년 여름에 그 절정에 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915년 또는 1916년이었으므로, 따라서 지금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 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대(對) 오스트리아 동원을 하고 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 이 또한 전쟁의 국지화()를 불가능케 하였습니다.

 

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여러 차례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29일 심야, 영국의 중립 예상이 무너지고 전쟁 개입이 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그때까지의 강경한 태도를 약간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위기로 그치지 않고 마침내 대전으로 급선회하고 말았습니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하여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의 기한부로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러시아로부터 아직 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대 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여 선전포고를 해놓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을 위하여 벨기에에 침입하였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하여 다음날(4일) 대독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 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 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3. 제1차 세계대전의 경과



독일의 작전은 서쪽에서 프랑스를 먼저 굴복시키고, 이어 동쪽으로 옮겨서 러시아를 칠 계획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일군은 개전 후 가장 먼저 북서 프랑스로 침입, 파리로 육박하였으나 1914년 9월 초순 마른(Marne)의 싸움에서 진격이 저지되었습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의외로 빨리 프로이센으로 침입하였으나,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원수의 지휘 하에 8월 말 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대패시켰다(타넨베르크 전투). 그러나 동서 공히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곧이어 참호전(塹壕戰)으로 바뀌어, 전선은 교착(膠着)되었습니다.

 

이 사이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연합국 측으로 참전(8.23)하여, 이 기회에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의 독일의 권익을 빼앗고, 특히 중국에서의 발판을 굳히려고 하였습니다. 한편 전전() 독일과의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 있던 오스만튀르크는 11월 2일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유럽의 전선은 캅카스,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으며, 1915년 2월에서 4월에 걸쳐 영·프 연합함대는 다르다네스 해협에서 격렬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1915년 4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최초로 독가스를 영국군을 상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동년 연합국과 동맹국 쌍방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3국 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의 동향이었습니다.

 

참전의 조건에 대하여 양진영과 거래하였던 이탈리아는 결국 동년 4월 ‘런던 밀약’에 의해 ‘미수복지’와 달마티아 등의등의 영토 획득을 약속받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하고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였습니다. 이탈리아는 군사적으로는 약체이었기 때문에 그 참전이 전국()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불가리아가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여 독일 ·오스트리아군은 그 협력을 얻어 세르비아를 점령하였습니다. 한편 1916년 8월에는 루마니아가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였으나, 곧 동맹군에 의하여 제압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1915∼16년 동맹국은 동유럽 ·발칸에서 적극적 공세로 나와 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서부전선에서의 교착상태는 의연 타결되지 않았습니다. 즉, 16년 2월에서 6월에 걸쳐, 독일군은 베르됭 요새에서 4회에 걸치는 대공 격을 가하여 50만 명의 병사를 희생하며 막대한 탄약을 소모하여 사투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페탱 장군의 지휘 하에 요새를 굳게 지켰으며, 6월 말부터 영 ·프 연합군은 서쪽의 솜(Somme)에서 총반격으로 나왔고, 9월 15일 영국은 최초로 18대의 전차를 병기로서 전장에 투입하였다(솜 전투). 약 5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영 ·프군은 90만 명, 독일군도 60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육상에서와는 달리, 해상에서는 영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습니다. 독일 해군은 대폭적 증강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비하여 수적으로도 열세이어서 개전 이래 북해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해전으로는 1915년 12월 도거 뱅크의 해전과 1916년 5월 유틀란트 해전이 있었을 뿐인데, 모두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고, 영국의 해상 지배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전쟁에서 신병기로 등장한 전차는 영국에 이어 1917년 프랑스, 1918년 독일이 각각 그 뒤를 이었으며, 주로 정찰용으로 쓰인 비행선은 독일이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4. 제1차 세계대전과 교전국의 국내 정세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즈음하여, 각국 정부는 전쟁이 각각 상대방 측의 공격에 의하여 야기된 정당방위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국민에게 그것을 믿게끔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드높은 애국심의 고양()이 엿보였습니다.

 

각국의 지도자가 가장 근심한 것은 국내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동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은 그 대회 때마다 전쟁 반대 결의를 하였는데, 특히 1912년의 바젤 대회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으로써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국 특히, 서유럽 대국의 사회주의 정당 내부에는 기회주의나 내셔널리즘의 경향이 강하여서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는 자세는 어느 정도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일부를 제외하고 종래의 슬로건에서 180도 전환하여 전쟁 협력으로 내달았습니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사회주의 정당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부의 군사예산에 찬성하고, 정부와 ‘성내 평화(城內平和:Burgfriede)’를 맺어(1914.8.4) 전쟁 협력을 약속하였으며,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그 뒤를 따름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장기화함으로써 국민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였습니다.

이 전쟁 중에 예를 든다면 독일에서는 인구 6,000만 명 가운데 1,100만 명이 동원되었고, 그중 전사자 177만 명, 부상자 422만 명을 내었고, 국민 가운데 5명에 1명이 동원되어 그 반수 이상이 사상(死傷) 한 것이 되는데, 이 비율은 프랑스에서 거의 같고 영국에서는 약간 떨어집니다.

 

또한 이 전쟁은 공전의 물량() 전쟁으로 이미 개전 당초, 불과 1주일간의 나름의 싸움에서 탄약 100만 발, 솜의 싸움에서는 그 20배인 2,000만 발이 소모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쟁 수행을 위하여 각국은 자국의 경제력을 동원하고 경제 전체를 전쟁을 위한 것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여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지자, 각국 정부에게는 국민의 불만을 누르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만드는 일이 사활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는 1916년 12월에, 로이드 조지 거국 이치 내각이이 만들어졌고, 프랑스에서도 1917년 11월에 클레망소 내각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들 내각은 경제통제를 강화하고, 군수생산을 높이는 한편, 국내외 반전 평화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그러나 영 ·프 양국은 식민지에게 식량과 원료의 공급을 강제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150만 명, 아프리카에서 100만 명이나 되는 원주민을 병사 혹은 노동자로서 유럽의 전선과 공장에 투입하여, 식민지인의 희생으로써 본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식민지나 해외시장을 모두 빼앗긴 동맹국 측에서는 물자의 부족, 국민생활의 궁핍은 그야말로 심각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이미 1915년부터 빵의 배급제를 도입하였고, 곧이어 고기 ·우유 ·버터 등도 배급제가 되었습니다. 1916년 겨울을 예로 들면, 어른 한 사람의 1주일분 배급량은 빵 1,900g, 감자 2,500g, 버터 80g, 고기 250g, 설탕 180g으로서 평상시의 3분의 1에 불과하였습니다.

 

더욱이 1916년 말에는 노동력 부족을 보충키 위하여, 국내에 있는 16∼60세의 남자를 탄광이나 공장에 동원하는 힌덴부르크 계획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불만이 높아짐에 따라 1917년 7월 의회 다수파가 ‘화평 결의’를 행한 뒤, 재상 베트만 호르웨크는 강경노선의 군부와 의회 사이에 끼어 맥없이 사임하고, 이후 군부에 의한 사실상의 군사독재체제가 성립되었습니다.

 

한편 같은 해 4월 사회민주당에서 ‘성내 평화’에 협력하지 않는 좌파가 따로 분열하여 독립 사회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노동자의 반전() 운동과 스트라이크가 번져갔습니다.

 

 

5. 제1차 세계대전과 비밀 외교

제1차 세계대전중에 교전국은 결속을 다지고 또한 중립국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전후의 영토나 세력권의 재분배를 약속하였습니다. 1915년 협상국 측은 이탈리아에게 ‘미수복지’를 비롯하여 터키령과 아프리카의 독일령 식민지 등의 분할을 약속하였습니다.

 

또,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령 마케도니아를 약속받고 동맹국 측으로, 루마니아는 헝가리령트란시비니아의 영유를 미끼로 연합국 측에 끌려들었습니다.

 

또, 빈사의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 오스만 튀르크의 영토를 에워싸고 영 ·프는 러시아에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영유를 약속하였으며, 다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1916년 5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러시아에 흑해 동남 연안을, 프랑스에게 시리아를, 영국에는 남 메소포타미아의 영유를 각각 약속하였습니다.

 

또한 투르크령 서아시아에서는 아랍인의 독립운동이 고조되었는데, 영국은 1916년 초에 아랍인에게 전후 이 지방에 아랍국가 건설을 약속(마크마옹 선언)하는 한편, 1917년 11월 연합국에 사는 유대인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같은 지역의 팔레스티나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확약하였습니다(밸푸어 선언).

 

또 인도에 대하여서도 전쟁 협력의 대상()으로서 전후의 자치()가 약속되었으나,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끝났습니다. 똑같이 동맹국 측에서도 독일은 대전 중 러시아령의 핀(Finn) 사람, 발트 3국의 제민족,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에게 독립을 약속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러시아 제국의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의위아스 카이 정부에게 산둥성이나 만주, 몽골을 위시한 중국 전토에서의 일본의 권익 획득에 대한 ‘21개 조 요구’를 강요하고, 최후통첩에 의하여 그 대부분을 승인케 하였습니다.

 

 

6.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은 최종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독일은 같은 해 1월, 무제한 잠수함전의 개시를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영국 주변의 해역에서 중립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상선을 무경고로 격침하여 식량이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영국을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과 경제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 미국의 참전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미국 참전의 효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즉 6~8개월 이내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독일 자신의 패배가 결정적이 되는 위험한 도박이었습니다.

 

독일의 잠수함은 이 싸움에서 예정을 상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영국도 중립국의 상선까지 동원하여 곤경을 타개하였기 때문에 결국 무제한 잠수함전은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야기시켰을 뿐,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리하여 패배가 결정적으로 된 독일에게 있어, 나머지 승리의 최후의 기회라고 할 러시아 혁명이 같은 해 3월(러시아 2월)에 일어났습니다. 러시아는 정치 ·경제 체제의 후진성 때문에 장기에 걸치는 총력전에는 견디지 못하여, 군수품 ·식량의 부족, 정정(政情) 불안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3월 혁명이 일어나 차르 정부가 쓰러졌고, 이어 11월(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소련 정권이 성립하여, 즉각 정전을 전() 교전국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소련 정부의 평화 호소와비밀 외교의 폭로는 세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14개 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연합국 측의 동요를 억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의 일각이 무너졌으며, 독일과 러시아는 같은 해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동부전선의 부담에서 해방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폈으나 3~7월의 반복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자, 독일은 이 공격에서 힘이 소진되었고, 7월 18일에는 미군의 증원을 얻은 연합군이 반격으로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승리의 평화’를 주장하여 모든 타협을 거부해 오던 군부도 이에 패배를 자인하고, 9월 말에는 연합국에게 휴전 제의를 하도록 정부에 제안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군부의 괴뢰 내각은 쓰러지고, 의회 다수파로 이루어진 막스 폰 바덴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신내각은 즉시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한편,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14개 조’에 의거하는 화평 개입을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이에 동맹 측은 총 붕괴되어, 9월 30일 불가리아, 10월 27일 오스트리아, 30일에는 오스만튀르크로 항복이 잇따랐습니다.

독일에서도 11월 3일 킬 군항()에서 수병(水兵) 폭동이 일어나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곧이어 제정()이 붕괴되고, 임시정부는 11월 11일 연합국과의 휴전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리하여 5년에 걸쳐 세계의 민중에게 커다란 희생을 입히고 싸웠던 제국주의 전쟁은 2개의 혁명을 유발하고, 연합국 측의 승리로서 종결되었습니다.

 

7. 제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조약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강화 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심의하는 이 회의를 주도한 이념은 미국 대통령 T.W. 윌슨의 ‘14개 조’의 원칙이었으나, 이것은 세계 민중의 평화에의 원망을 대표함과 동시에 세계 정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미국의 제국주의 요구의 표출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3 대국이 주도한 이 강화 회의는 열강의 거래의 무대가 되었으며, 그러나 윌슨의 이념은, 독일에 복수하여 그 힘을 될 수 있는 한 약화시키고 그 대신 스스로 패권을 확립하려 한 영 ·프 양 제국주의 국의 현실적 이해 앞에 패하여 크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6월 28일 베르사유에서 조인된 강화조약의 내용은 독일 국민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 되었습니다. 즉, 이에 따라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각각 약간의 영토를 할양함으로써, 인구의 15%와 유럽에서의 영토의 10%를 잃었습니다.

 

또 엄격한 군비제한이 부과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하여졌습니다. 특히, 무거운 짐이 된 것은 배상으로서, 1921년에 1,320억 마르크가 결정되었습니다.

한편, 다른 동맹 제국과의 강화조약은 생제르맹 조약(9.10:對오스트리아), 뇌이 조약(11.27:對불가리아), 세브르 조약(20.8.10:對터키), 트리아농 조약(對헝가리) 등 각각 별개로 체결되었습니다.

 

베르사유조약을 중심으로 이들 조약이 형성한 전후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부릅니다. 이 체제는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 등 동맹국측의 구제국을 해체하여 단일 소국가로 하였을뿐 아니라,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서 발칸과 동유럽에는 다수의 소국가(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발트 3국)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자결’의 원칙도 패전국이나 비유럽 세계의 식민지 ·종속국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동유럽에서의 신국가 건설도 동맹 제국을 약화하고, 나아가서는 소련을 묶어 두려는 의도하에서 행하여진 것이었습니다.

또한, 베르사유조약은 세계전쟁의 비참한 경험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평화유지 기구로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안국인 미국이 가맹하지 않았으며, 독일이나 소련도 당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맹은 평화유지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었다. 결국 베르사유체제 그 자체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의 재편성에 불과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로서는 지극히 불충분하여 새로운 국제 대립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참고문헌: 두산 백과사전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