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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기관총의 아버지 격인 맥심 기관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14년 9월 프랑스 마른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독일의 맹공을 간신히 막아낸 후 전선의 곳곳에는 상대를 견제하기 위한 참호가 깊게 파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치 상황은 잠시고 전쟁 초기의 치열한 기동전이 곧바로 재현될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 파인 참호들은 서로 연결 디어 하나의 거대한 방어 진지로 변하였고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총기발물관에 있는 초기 맥심기관총 이미지

방어 글 위한 구조물인 참호는 전선에 고착화돼었음을 의미하였고 이때부터 전재의 대부분은 양측이 만들어놓은 참호 선사에서 벌여졌습니다. 장장 4년 동안 수백만의 양측 병사들이 이곳에서 사상당했을 정도로 싸움은 참혹했습니다. 

 

전투에 많은 무기들이 동원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기관총은 최고의 살인 기계였습니다. 그러데 공교롭게도 독일군과 연합국 모두 같은 기관총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로 모든 기관총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맥심 기관총이었던 것입니다. 

 

1. 맥심 기관총의 개발 역사

기관총은 오늘 반정부 무잔 조직이나 테러 단체들도 갖추고 있는 무기입니다. 가장 커다란 수요자로 할 수 있는 구에서 분다나 소대 같은 가장 말단 소부대의 필수 무장입니다. 

그만큼 흔하기도 한 데다 소총의 위력이 향상되고 다양한 종류의 휴대용 중화 기기 등장하면서 종종 위력을 간과하는 경우마저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익숙해서 그럴 뿐이지 기관총은 탄생 이후 지금까지 보병용으로 대단한 화력 투사 수단입니다. 

기관총은 한마디로 역사를 바꾼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 즉 화기의 등장으로 역사가 크게 바뀌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많이들 간과하자만 그러한 화기의 시대에서도 19세 게 후반에 등장한 기관총은 커다란 변곡점이었습니다. 단발로 사격하는 기존 총과 연사가 가능한 기관총의 위력 차이는 그야말로 대단했습니다. 

 

인류에게는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이른바 대량 살상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습니다. 

맥심은 그러한 엄청난 역사를 이끈 최초의 기관총이 입니다. 맥심 이전에도 캐틀링 건처럼 연사가 가능한 총들이 존재했기에 범위를 어디까지로 하냐에 따라 기관총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탄생 당시에 맥심과 연사가 가능한 여타 총기와의 기술적 차이는 상이했습니다. 

맥심기관총 개발자 하이람 맥심이 기관총 앞에서 찍은 이미지

한마디로 맥심은 형제 사용 중인 모든 기관총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1866년 친구를 따라 우연히 사격장에 방문한 하이람 맥심 은 사격할 때 발생하는 충격 때문에 사수가 흔들리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이를 에너지로 이용하면 노리쇠를 일일이 조작하지 않고도 탄환을 자동으로 급탄 하고 발사가 가능한 총을 만등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동화된 총이 있다면 적은 병력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발화할 수 있을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83년에 반동을 이용하는 자동화된 총의 특허를 출원했고 이듬해 프로토 타입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총을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맥심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발가에는 장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자동화되었으므로 사수는 오로지 목표물만 바라보고 사격하면 됩니다. 

 

분당 최대 650발의 속도는 숙련된 30만 명의 사수가 발사하는 볼트액션 소총의 화력과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전문가라면 맥심의 위력을 충분히 알았지만 여려 이유로 판매는 부진했습니다. 너무 무거운 데다 이동수단의 성능이 떨어지던 시기였기에 용도가 제한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가격이 비싸서 차라리 소총을 더 많이 투입하는 것이 호율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기관총이나 자동화된 소총의 장점이 입증된 20세 게 중반까지도 탄의 낭비가 심하다고 생각했을 저도였으니 생산력이 떨어지던 당시에는 더했습니다. 

 

기대를 많인 가졌던 미군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실망한 그는 영국으로 이주해서 판촉에 나섰습니다. 

병력이 부족해 주로 요새를 거점 삼아 군을 운용하는 식민지 정부 등이 관심을 갖고 시험 삼아 구입했고 1888년 11월, 시에라리온에서 원주민 탄압에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착 군 당국에서는 이 혁신적인 화기에 대해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아 맥심은 판매를 위해 직접 유럽 각국을 돌며 시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러던 1893년 짐바브웨이에서 원주민 저항이 벌어졌을 때 4 정의 맥심을 보유한 50여 명의 경비대가 무려 4천여 명의 원주민의 공격을 막아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마디로 학살이었고 이것은 제1차 대전의 비극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습니다. 그러나 맥심 때문이 아니라 유럽인인 뛰어난 반면 식민지인들이 열등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착각해서 정착 주문량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을 때 도움을 준 이가 현재도 세계적인 방산 업체인 빅커스-암스트롱의 전신인 빅커스의 설립자의 아들인 알버트 빅커스입니다. 기관총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의 도움으로 1897년 맥심 총기사가 설림 되어 보다 체계 적으로 생산과 판매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국군이 제식 무기로 도입하자 자극을 받을 독일과 러시아도 도입에 나섰습니다. 

성능에 만족한 이들은 직도입뿐 아니라 면허 생산에 나서 자체 개량도 시도했습니다. 덕분에 빅커스, MG08, PM1910 같은 파생형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각국 기관총 역사의 중간 시조가 되었습니다. 

 

1905년 발발한 러일 전쟁에서 상당한 전과를 남겼고 이후 제1차 대전에서는 최고의 상상 무기라는 명성을 날리며 이후 세계사를 바꾼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맥심은 본격적인 기관총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맥심기관총 설명 영상

2. 맥심 기관총 특징

맥심이 새로운 역사를 개막한 기관총이나 단점도 많았습니다. 일단 무겁고 부피가 커서 다루기가 어려웠습니다. 

거기에다 최초에는 공랭식이었으나 연사력을 늘리기 위해 수랭식으로 바뀌면서 무개가 더욱 늘었습니다. 

MG08의 경우는 모든 부속 장비와 소모품을 포함해 총 69kg에 이르렀습니다. 가뜩이나 20세기 초에 이동 수단의 성능이 떨어져 주로 진지에 거치해 놓고 방어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보통 4명에서 6명으로 구송된 팀이 운영했습니다. 사격 시에는 사수에 조수만으로도 가동할 수 있지만 옮기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국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중화기 취급을 받으며 대개 독립 중대에서 운용했습니다. 분당 최대 600발의 연사력은 오늘날 기관총에 비해서는 떨어지나 기관총의 목적이 지역 제압이니 전투를 벌이는 데 충분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작은 생각에서 출발한 총기사의 이정표

제1차 대전을 계기로 많이 부각되었지만 사실 맥심 기관총은 당시 처음 등장한 신무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를 만들어낸 하이람 맥심이 1883년에 특허를 출원하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무기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 태생으로 영국으로 귀하 한 발명가 맥심은 사격 시에 발생하는 반동을 이용하면 탄환을 자동으로 재장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아이디어는 총기 역사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당시 대부부 느이 총은 수동으로 재장전하는 형태였으므로 연사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투에 많은 인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계속 방아쇠를 당겨 쏘는 반자동 총이나 캐틀링건처럼 임부 연사가 가능한 총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수동식이었고 사용이 불편하였습니다. 

 

연구 끝에 맥심은 새로운 개념의 총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고 이를 맥심 기관총이라 명명하였습니다. 

발사에서 장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자동화되었으므로 사수는 오로지 목표물만 바라보고 사격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맥심 기관총은 현대식 자동화기 또는 기관총의 호시로 보는데, 이전의 개틀링건 방식과 달리 탄띠 급탄식을 채택하여 분당 최대 650발의 발사속도를 가졌습니다. 이는 숙련된 50명의 사수가 발사하는 소총의 하력과 맞먹는 것이었을 만큼 당시 에는 상상하기 힘든 경이적인 수준이었습니다. 

 

 

4. 이미 시현돼 된 무서운 화력에 맥심 기관총

처음에는 개인이나 식민지 정부 등에서 시험 삼아 구입하였고 1888년 11월,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에라리온에서 원주민 탄압에 처음 상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착 군 당국에서는 이혁 신적인 화기에 대해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아 맥심은 판매를 위해 직접 유럽 각국을 돌며 시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시범을 본 많은 이들은 빠른 발사 속도에 경악하며 관심을 표명하였고 속속 구매의사를 보였지만 정착 주문량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1889년 최초로 도입하였지만 대량 채용을 거부하였던 영구 군의 생각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관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맥심 기관총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적어도 5~6명의 인원이 필요했고 수랭식 시스템을 채용하였음에도 종종 과열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따라서 강력한 화력을 인정하지만 일선에서 보병들이 사용하기에는 곤란한 무기로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들이 속속 등장하였습니다. 1893년 짐바브웨에서 원주민의 항거가 벌어졌는데 4 정의 맥심 기관총을 보유한 불과 50여 명의 경비대가 무려 4천여 명의 원주민의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한마디로 학살이었고 이것은 제1차 대잔의 비극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습니다. 

 

특히 정규전이었던 1905년 러일전쟁 당시에 1 정의 러시아군 맥심 기관총에 일본군 1개 대대가 도륙되기도 했습니다. 

러일전쟁의 여순 전투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을 도륙한 러시아군의 사진. 이 전투는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일본이 결국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일본 군의 인명피해는 러시아 군보다 훨씬 컸다. 

5. 피아 모두가 채택한 기관총

동 시기에 맥심 기관총의 효용성을 깨달은 여러 나라들이 라이선스 제작에 들어갔는데 그중 가장 앞장섰던 나라가 독일이었습니다. 

MG08 스팬 다 우어라 명명된 독일형 맥심 기관총은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썰매 모양의 거치 대등을 장착하는 식으로 일부 개조가 이루어졌지만 기본적인 사양은 동일하였습니다. 그 격과 1914년 제1차 대전 발발 당시에 독일은 총 10 만전의 맥심 기관총을 장비한 최대 보유국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군사대국인 러시아군도 같은 방식으로 맥심 기관총을 라이선시 생산하였습니다. 

러시아용은 별도의 제식 소총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약실이 개조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양 개조로 가장 무거웠던 맥심 기관총으로 물렸는데 이것이 PM M1905기관총입니다. 

 

제1차 대전 당시에는 이를 좀 더 개량한 PM M1910이 대량 사용되었는데 이후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에 공급되어 우리와 악연이 있습니다. 

맥심의 모국이기도 했던 영국도 애용하였지만 제1차 대전 직전에 보병대 대당 2정만 배 치아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경쟁국에 비해 홀대를 받았다고 할 수 도 있습니다. 영국군이 제식 화한 모델은 맥심 기관총의 가장 큰 단점인 무개를 반 정도로 대폭 중린 비커스 기관총이었습니다. 

 

현대식 기관총과 비교한다면 이것 또한 무거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여타 국가의 맥심 기관총과 비교한다면 훨씬 다루기 용이하였습니다. 

 

6. 맥심 기관총이 지배한 죽음의 경쟁

1914년 인류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지옥을 현실에 만들어내었습니다.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희생이 그토록 컸던 점은 무기의 발달에 비해 전쟁을 지휘하는 이들의 생각이 너무 고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나폴 레오 시대의 공격 제일 사고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돌격명령을 받고 적진을 향해 뛰쳐나간 병사들이 상대편 참호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속수무책 당하는 것이 전선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기갑장비를 이용하여 참호선을 돌파하는 작전을 펼 피겠지만 당시만 해도 포격 후 보병이 돌격하는 방식 외에 마땅히 구사할 전술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포탄의 비를 퍼부어도 상대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고 이렇게 살아남은 방어자들은 포연을 헤치고 돌격하는 공격자가 사거리 안 안에서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조금씩 다를 뿐인 맥심 기관총에 의해서 무명의 병사들은 하염없이 숨져갔습니다. 

맥심 기관총의 영국판 경량형,비커스 기관총을 쏘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영국군 병사

참호를 파고 전선이 고 차화 되자 맥심 기관초의 위력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너무 무거워 공격 시에는 재빠르게 옮겨 다니며 지원할 수 없었지만 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나섰을 때는 다가오는 적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알을 퍼부어대는 데 적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렇게 참호전과 더불어 맥심 기관총은 제1차 세계대전의 학살을 뜻하는 대명사를 바뀌어 갔습니다. 바로 죽음의 경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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