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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의 매래 전쟁을 대비한 야심작!! 줌왈트 구축함에 대해 알아보기.

줌왈트 구축함 DDG-1000 <출처: 미 해군>

■차례 

  1. 줌월트 구축함 개발 역사
  2. 줌월트 구축함 특징
  3. 줌월트 구축함 제원

1. 줌월트 구축함 개발 역사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조세프 맷 켈프(1927~2007) 제독은 수직 발사관 (VLS: Vertical Launch System)을 이용한 새로운 미사일 발사 기술이 도입되는 모음을 보면서 향후 21세기 이후를 대비해 해군 함정의 설계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해전의 양상이 이미 2차 세계 대전 시기부터 두함대가 근거리에서 함포 사격을 주고받는 형태를 벗아나 가시거리 밖에서 미사일과 함재기로 승부를 내는 방향으로 변화했으므로, 새로운 21세기 해전 양상에 특화된 함정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미 해군은 1987년부터 지상공격을 목적으로 한 구축함의 개발을 골자로 한 '함정 운용 특성 연구(SOCS)를 실시해 다양한 형태의 미래 함정을 연구했습니다. 이 설계 중에는 500개가 넘는 수직발사관을 설치해놓고 인 점 함정에서 명령을 받으면 대향의 순항미사일을 발사하는 무장함 개발 계획이나 레일건 개발 계획 등 수많은 아이디어 등장했으나 1989년 출간된 연구 결과 보고서는 냉전의 종식 때문에 연구 기간 중에 등장한 계획 대부분이 시대에 뒤쳐졌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으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대규모 군축이 시작되면서 미래 함정 도이 사업은 파생형 구축함 사업(DDV)으로 변경되어 1991년부터 다시 시작했으며,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은 알레이-버트(Arleigh Buke)급 플라이트 2A 구축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92년 프랭크 켈소 (1933~2013) 미 해군 참모총장은 고급 함정을 위한 수직포( VGAS: Vertical Gun Advanced Ships)를 중심으로 설계한 21세기형 구축함(DD-21) 기술 연구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를 바탕으로 지상 공격을 주목적으로 한 미래형 구축함 개발 사업인 SC-21(Surface Convatant for the 21st Century) 사업이 발주되었습니다. 

 

이사업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사용해 온 함정 기능에 바탕한 함 전 분류 방식에 따른 구축함과 순양함으로 구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신형 함정의 능역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목정이었습니다. 

SC-21이 지향하는 신형 함정은 적 연안에서의 전투 수행과 강습 상륙작전 간 아군이 내륙 지역 침투를 두울 하력 지원 임무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사업은 두 갈래로 나뉘면서 구축함을 틀로 잡아 개발을 시작한 사업은 DD-21이 되었고, 순 향함을 기본으로 삼아 개발을 시작한 사업은 CG-21 사업으로 명명됐습니다. SC-21 사업은 국방획득위원회가 1995 1월부터 사업을 승인해 예산 및 운용효과 분석(COEA: Cost and Operational Effectivenss Analysis)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이사업은 2001년 이후 계속 지연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구축함 크기의 함정이 적 연안 지역 전투에 투입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지적 때문에 의회 내 분위기가 부정적으로 돌아섰으며, 설상가상으로 최초 사업에 착수할 당시 최종 함정 도입 비용으로 7억 5천만 달러를 예상했던 것이 52억 달러까지 치솟은 점도 이사업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이에 구축함 개발을 골자로 했던 DD-21 사업이 크게 수정되면서 연안전투함 (LCS) 사업과 구축함 중심의 DD(X) 사업으로 나뉘었고, 순양함 개발을 목표로 했던 CG-21 사업은 탄도 미사일 방어 순양함 개발 사업인 CG(X)로 변화했습니다. 

 

특히 구출함 개발 사업의 최초 계획 상에서는 총 32척의 구축함을 건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수량은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24대가 되었다가 7대로 줄었으며, 최종적으로 미하원은 일단 한 척의 선두함을 건조할 예산만 배분하면서 이를 기술 시연함으로 명명했습니다. 

 

이렇게 건조하게 된 DDG-1000함의 최초 예산은 2007년 국방수권법에 포함되었으며, 2006년에 승인된 2007년 세출예산에서는 한대분 예산이 증액되어 총 25억 6,800만 달러가 배정되었습니다. 

 

미 해군은 2009년 예산에 14.564톤급 DDG-1000급 일곱 척의 건조 예산을 신청했으나, 선두 함인 DDG-1000 줌왈트 함의 건조 일정부터 크게 지영 됐기 때문에 2008년 7월 22일 자로 메인 주의회 대표단이 개발 진행 상황 조사에 착수했으며 이를 토대로 단 두척만 건조하도록 권고했으나 미 의회 하원 세출 위원회는 2009년 예산에 다시 25억 달러를 배당해 세 번째 DDG-1000급 구축함 건조 예산을 추가로 할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미 해군 쪽에서 DDG-1000급을 두척 건조로 종료하고, 차라리 그 예산으로 절반 가격에 불과한 알레버크급 구추함을 11척가량 추가 도입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이 결정에는 미 해군 정보 계통에서 보고한 총 15건의  DDG-1000 평가보고서가 영향을 끼쳤는데, 해당 보고 슨 모두 DDG-1000이 미사일 공격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평가를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요구가 놀란이 도자 미 해군은 절충안으로 이미 승인된 두척의 줌월트급을 완성하는 대신 약 8대의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을 추가 도입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미 하원 소위원회는 달라진 세계 환경을 기반으로 하여 첨부터 위협 요소와 DDG-1000의 역할을 다시 분석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는 함대 방공과 탄도미사일, 대함 미사일 위협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결과가 도출되었기 때문에 사업 자체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줌왈트급의 신형함포 사격이미지 . <출처: 록히드 마틴>

결국 도널드 원터 미 해군 장관은 2008년 8월 부로 줌월트 그 3번 함을 예정대로 계속 건조하기로 했으며, 건조 계약은 배스 아이언 웍스사와 계약했습니다. 

미하원세출위원회 또한 2009년 국방수권법에 3번 함 건조 비용 일부를 반영하는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미 국방부 계속 줌월트급의 건조 배용이 증가하고 있는데 크게 우려했으며, 이 시점에 이미 대당 건조 비용이 처음 해군의 예상 비용에서 81%를 초과한 59억 6,400만 달러까지도 도달했습니다. 

 

베스 아이언 웍스는 건조 계획을 수립하면서 2013년 4월까지 줌월트 함을 미 해군에 인도하고, 2015년 3월까지 초도 운용능력(IOC)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선두 함인 DDG-1000의 건조 가격은 약 35억 달러로 예특됐으며, 2번 함은 약 25억 달러, 3번 함은 그보다 낮은 가격이 소유될 것으로 계산됐습니다. 하지만 줌 원트급의 연구 개발 비용으로 소요된 금액은 225억 달러가 넘었으므로, 사실상 3척의 평균 대당 건조 가격은 실질적으로 75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DDG-1000은 2009년 2월 11부터 완전 가동 건조에 들어갔으나, 서브 프라미 모기지 사태와 리먼브라더스 사태의 여파가 정부로 미미 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건조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다가 2011년이 11월 되어서야 조선대에 용골을 거치할 수 있었습니다. DDG-1000에는 미 해군 최연소 해군 참모총장을 지낸 엘모 줌 원트 제독의 이름 헌정하기로 하고 2013년 10월 19일 함명식 일자로 잡았지만, 2013년 미 정부가 의회와 예산 합의에 실패하면서 셧다운에 들어서는 바람에 행사가 취소됐습니다. 

 

결국 행사 없이 중 월트 함으로 명명된 DDG-1000은 2013년 10월 29일 자로 진수했으며, 2014년 1월부터 악천후 시험을 시시하던 중 4월 12익 자로 뒤늦게 함명식을 치렀습니다. 

 

줌 월트함을 거의 1년 동안 다 향한 시험을 거치 후 2014년 말에 미 해군에 인도되었습니다. 

 

 

줌월트 함은 거의 1년 동안 다양한 시험을 거친 후 2014년 말에 미 해군에 인도되었고 줌 원트 함의 미래 적인 설계가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점도 있었기 때문에 언론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2. 줌월트 구축함 특징 

 

줌월트급 구축함은 필요 인원수를 최적화한 다목적 함정으로, 대량의 화력을 제공함과 동시에 필요에 따른 정밀 타격이 가능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줌월트급 구축함은 필요 인원수를 최적화한 다목적 함정으로 대량의 하력을 제공함과 동시에 필요에 따른 정밀 타격이 가능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줌 원트급 구축함과 1905년 러일 전쟁 시기 이후에는 거의 현대 함정 설계에 등장한 적이 없는 텀블 홈(TUMVLEHOME)-선체 측면 상부가 안쪽으로 굽는 모양 설계가 동체에 적용되어 있습니다. 

이는 레이더파 피탐 면적(RCS)을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설계는 레이더 전파를 받게 될 경우 반사면적이 축소합니다. 

통합 갑판 또한 적외선과 레이더 특성을 줄이기 위해 (EMC)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선체 상부구조는 전면 복합재를 사용했으며, 통합 다목적 마스트(MAST) 역시 레이더와 적외선 특성이 낮게 나오도록 설계했습니다. 

함정의 전체적인 적외선 특성을 낮추기 위해 배기 억제기를 별도로 개발하여 적용한 것도 줌 원트급의 특징입니다. 

 

줌 월트급 구축함은 알레이 버크급 구축하보다 40% 선체가 크지만, 해군 해상 체계 사령부에 따르면 줌월트급은 RCS가 매우 낮기 때문에 레이더 상에서는 작은 어선 정도의 크기로 잡히게 되어있으며 음향 특성도 로스엔 레스급 잠수함 정도의 불과하며 적외선 발산 율도 타 함정에 비해 크게 낮습니다. 

 

센서나 전자장비는 대북 복합재 재질의 감판실에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미 해군은 한때 DDG1002함의 갑판실을 비용이 낮은 강철 재질로 교체하기 위해 입찰을 진행했으며 3번 함인 린든 존스 함도 강철 재질의 갑판실로 건조 진행 중에 있습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줌왈트급의 날카로운 선형 <출처: 미 해군>

하지만 함정의 스텔스 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존재합니다. 

일단 아프로만 전진하는 항공기, 혹은 2차원적으로 움직이는 지상자와 달리 함정은 파도 때문에 3차원으로 요동을 쳐 전파 반사가 일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으며 줌월트의 가장 큰 임무는 지상 전력에 대한 해상 화력 지원에 있으므로 통상적으로 연에 가깝게 붙어있어야 하는데 이경우 레어더에 아무리 낮게 포착되더라도 가시적으로 포착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1. 줌월트급의 무기체계

처음부터 줌월트급에만 장착하기로 위해 발을 시작한 155mm 첨단 함포 체계(AGS) 두문을 장착하도록 설계했으며, AGS는 장거리 지상공격탄(LRLAP)을 발사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LRAP: 간단하게 말해서 AGS로 쏘는 '탄두가 달린'로켈로 탄두 중량은 약 11KG에 달하며 원형 공산 오차(CEP)가 50m에 불과합니다. 

- AGS: 최대 사거리가 83해리(약 154KM)에 달하며, 함정 당 최대 750발까지 적재하여 자동으로 재장전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포신은 분당 10발을 쏘는 동안 과열하지 않도록 수랭식으로 설계했으며 , AGS를 이용해 준비 사귀어이나 지원사격을 실시할 겨우 그 화격은 M198곡사포 12문에 맞먹는 위력을 보여줍니다. 

줌왈트급의 신형함포는 대체할 저가포탄이 없어 현재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출처: 록히드 마틴>

 

하지만 미 해군은 줌 월트급의 도입 대수를 줄임에 따라 LRAP탄의 도입 수량도 함께 줄어 한 발당 가격이 1백만 달러를 육박하게 되자 2016년 11월부터 LRAP탄 획득을 취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 해군은 이를 대체할 저가의 포타를 대신 알아보고 있으나, 사실 AGS포 자체가 LRLAP탄에 특화시켜 개발한 함포이기 때문에 별도의 포탄을 사용해야 할 경우 포 자체도 개조가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 함포를 찾아내거나 AGS를 개량하는 일은 가까운 시일 내에 이루어질 가능 성이 거의 없으므로 사실상 줌월트급 구추함은 최초 설계됐던 목적처럼 지상 전력에 대한 AGS화력 지원을 실시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건조에 들어간 3번 함인 린든 존슨 함만 155MM AGS화격 지원을 시시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린든 존슨 함에는 레일건을 장착하는 방안을 고려하였으나 , 이미 거조 진행 류리 높아서 설계 변경할 수 없게 되오 함정 완성 후 선체를 개조하여 레일건을 장착하는 방안을 연구 중에 있습니다. 

줌월트급은 선내 유폭을 막고자 외장형 수직발사대를 장착하고 있다. <출처: 미 해군>

또 다른 특징 중 하나 수직 발사대(PVLS)입니다. 이는 수직 발사관을 함정 중아에 위치시켜 만약 적재 포탄이 유폭을 일으키더라고 선체 자체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경우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됐습니다. 

만 양 선내에서 폭발이 일어나더라도 모든 폭발 압력은 선내로 향하지 않고 선외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록히드 마틴사의 AN/SPY-4S밴드 입체 탐색 레이더와 조합된 AN/SPY-3 능동형 전자 주사식 레이더( AESA)가 장착되어 있으며 레이시온 사의 X- 밴드 SPY-3 다목적 레이더가 장장 되어 고고도에 대한 우수한 표적 집중 능력을 발휘합니다. 

 

탑재 항공기로는 MH-60R 시호크 헬리콥터와 MQ-8파이 어스 카우트 무인 헬리콥터를 수납하고 있으며, 항공 자산과 레이더가 결합하여 함대 전체에 강력한 방공 ISR능력을 제공합니다. 

장거리 정밀 타격을 위한 최첨단 기술이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지상에 사전 설치한 탐지 장비의 도움이 없어도 원거리에 떨어진 표적을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영구 자석식 모터( PMM: Permanent -Magner Motor)를 채택할 예정이었으며 pmm이 장착될 경우 사시상 함정 추진 기술의 한 단계 도약될 것으로 내다봤으나 제작사인 노스롭 그루먼이 시간 내 개발을 실패함에 따라 최종 장착되는 못했습니다. 

 

대신 고급 인덕션 모터 (AIM)이 채택됐습니다. 

선두 함인 줌월트 함에는 통한 전력 체계(IPS)가 설치되어 선내의 모든 전력 계통을 통함 관리하도록 설계했으며, 이를 통해 선체의 열방생이나 소음 발생률도 현저하게 줄였습니다. 

 

줌 원트는 간편한 조작성을 위해 케즈(Keds)라는 별칭이 붙는 공통 디스플레이 체계 (CDS: COMMON DISPLAY SYSTEMS)을 채택 승무원들은 케즈를 통해 트랙복과 터치스크린을 통해 간편하게 함정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간편한 디스 플레이 방식과 조작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수수이 인원이 다양한 무기 체계와 센서를 동시에 조작할 수 있어 함정운용을 위한 승무원수를 최소화하였습니다. 

최소 인원은 130명으로 이는 유사 크기의 구축함을 운용하기 위한 최소 승무원 숫자의 절반 가량에 불과합니다. 

 

3. 줌월트 함 제원

종류 유도미사일 구축함
제조사 베스 아이언 웍스(Beth Iron Works)
전장 190m
전폭 24.6m
흘수 8.4m
만재배수량 15,995t
추진체계 47,500마력 롤스-로이스 MT30 가스 터빈 엔진 X 2
                  5,100마력 롤스-로이스 RR4500 터빈 발전기 X 2
                  전기모터 추진식 프로펠러 X 2장
                  총 105,000마력
센서 AN/SPY-3 다목적 레이더(MFR) – X 밴드 능동형 전자주사식 레이더(AESA)
무장 Mk. 57 수직발사관(VLS) 모듈형 x 20 
     ㄴ RIM-162 ESSM(Evolved Sea Sparrow Missile) 
     ㄴ 전술 토마호크(Tomahawk)
     ㄴ 수직발사식 대잠미사일(ASROC) 
     ㄴ 155mm /62구경 고급 함포체계(AGS) x 2 (총 920발/사용불가)
탑재 항공기 SH-60 LAMPS (Light Airborne Multi-purpose System) x 1대 혹은
                      MH-60R 시호크(Seahawk) x 1대
비행 지원장비 비행갑판 및 최대 2대까지 수납 가능한 폐쇄식 행거
대당 가격 42억 4천만 달러 (개발비 제외, 2016년 기준)

참고 문헌 유용원의 군사세계 , 전쟁사 ,조선 디지털 일보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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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작전의 핵심 함정

라이트닝 항모" (Lightning Carrier) [출처] 미 강습상륙함 America함과 일 자위대 F-35A 통합 훈련 실시

상륙작전은 해상의로부터 적진에 상륙해 기동 하는 격고 작전입니다. 

지상 작전과 달리 상륙작전은 병력과 장비를 수송 및 전개시킬 수 있는 상륙함정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양한 상륙함정 가운데 강습 상륙함은 상륙 작전을 위한 병력과 장비 수송을 위한 대형 수송함으로 경항모함과 마 찬 기지로 대형 비행갑판이 있습니다. 상륙 기동부대(해병대)의 기함으로서 상륙작전을 지휘 통제하는 지휘람 기능도 수행합니다. 그밖에 재난 구조, 국제 평화유지 활동 유사시 재외 국민 철수 등 다 야한 임무에 사용되는 다목적 상륙함입니다. 

 

1. 호위 항모에서 시작된 가습 상륙함

제2차 세계 대전은 항공모함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사용된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영국 그리고 미국과 영국 기록 일본은 정규 항공모함 외에 호위 항공모함을 운영하였습니다. 정규 항모에 비해 크기도 작고 속도도 느렸지만 연합군의 호위 항모는 대서양 전투에서는 독일군의 U보트에 맛서 상서단의 보호했으며 태평양전쟁 때에는 상륙작전의 항공지원을 담당했습니다. 

타라와급 강습상륙함은 비행갑판 뿐만 아니라 침수갑판까지 보유하고 있어 각종 상륙정과 상륙돌격장갑차를 운용할 수 있었다 <출처: 미 해군>

전쟁 말기까지 미국과 영국은 160여 척의 호의 항모를 건조하였으며, 종전 후 수명이 다한 함정들은 페기 되었지만 일부 함정들은 살아남아 헬기 상륙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미 해병대는 1940년대 말부터 헬기를 이용한 다양한 공중돌격 연습을 실시하였으며, 이에 따라 미 해군 내에서는 헬기 상륙함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결국 1950년대 중반 호의 항모를 개조한 최초의 헬기 상류함이 미 해군에 배치됩니다. 

2. 강습상륙함의 기준을 제시한 타라와 급

호의 항모를 개조한 헬기 상륙함은 크기가 작아 헬기를 격납하기 어려웠고, 수송할 수 있는 병력도 너무 적어 본격적인 상륙함으로 쓰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상륙작전에 적합한 본격적인 헬기 상륙함이 건조됩니다. 

 

1961년 등장한 이 오지 만금 헬기 상륙함은 20여 대의 헬기를 탑재할 수 있었으며 2,000여 명의 병력이 승선할 수 있었습니다. 

타라와급 강습상륙함은 공중과 해상 돌격이 가능한 강습상륙함으로 이후 개발되는 강습상륙함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출처: 미 해군>

 

또한 9대의 헬기를 경남 할 수 있는 격 남고가 특별히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란 헬기 상류함은 공중돌격을 위한 헬기와 병력만을 수소 하도록 설계되었고 해상돌격에 필요한 상륙정은 다른 상륙함정에서 운용해야 되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결국 미 해군은 1971년 공중과 해상돌격이 모두 가능한 신형 상륙함을 건조합니다. 1976년 미 해군에 배치된 타라와 급은 39,000 여톤 의 강습상륙함으로 넓은 비행갑판뿐만 아니라 침수 갑판까지 보유하고 있어 각종 상륙정과 상륙돌격 장갑차를 운용할 수 있습니다. 

 

3. 공중과 해상돌격이 가능한 강습 상륙함

1 아메리카함은 세계최대의 강습상륙함으로 프랑스 해군의 샤를 드골 항공모함보다 더 큰 함정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미 해군> 2 F-35B 라이트닝 전투기를 운용하기 위해 아메리카함은 이전의 강습상륙함보다 더 큰 비행갑판을 갖게 되었다 <출처: 미 해군>[

또한 타라와 급에는 상류 전술정보 통합체계가 설치되어 상륙작전의 기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해리어 수직이착륙 전투기까지 운용할 수 있게 되어, 경 항공모함의 기능 끼지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1989년 등장한 와스프급은 타라와 급을 확대 개량한 강습 상류함으로 상륙정을 수용하는 침수 갑판의 크기가 대폭 커졌습니다. 특히 고속상륙정인 엑켈(LCAC: Lansding Craft Air Cushion)을 최대 3척까지 운용할 수 있어 단 시간에 많은 병역과 물자를 해상 돌격시킬 수 있습니다. 

 

이밖에 임무에 따라 최대 20대의 AV-88 헤리어 2 수직이착륙 전투기를 운용할 수 있게 되어 적의 워협에 낮은 해상에서 항공모함의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총 8척이 건조된 와스프급 강습 상륙함은 오늘날 미 해군의 주력 강습상륙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 사세보를 모항으로 하는 와스프급 6번 함인 본함 리처드함은 한반도 유사시 가장 먼저 한반도에 전개하는 미 해군 강습상륙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 지금 현제 헤리어는 퇴역하였고 그 자리를 F-35B로 대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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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대(大) 전쟁 최장의 싸움터 그 다섯 번째 이야기

스탈린과 레닌그라드 전투 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 레닌 그라드 전투의 5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차례

  1. 양날의 칼
  2. 티흐빈에서의 반전
  3. 지옥으로 변한 도시
  4. 생명의 길 

1. 양날의 칼

봉쇄당하기 이전에 많은 이들이 소개되었음에 여전히 레닌그라드에는 300여만의 시민과 병력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 외부의 지원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시 동쪽의 라도가 호수를 통하여 물자가 보급되고는 있었지만 수량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독일 공군의 차단 작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통한 보급로도 압도적인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어 활용이 불가능한 지경이었습니다. 

협궤 열차가 곧바로 진입할 수 있게 제작되어 운송 효율을 높인 라도가 호수 횡단 보급선. 운항 도중 독일 공군의 공습에 격침당하기도 하였다. <출처: (cc) RIA Novosti archive, image #310 / Boris Kudoyarov at Wikimedia.org> 

독일이 레닌그라드의 점령을 유보하고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모스크바 공량에 나서기로 한 이상, 상대를 최대한 춥고 배고프게 만들어 항복을 받아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켜 승리를 얻는 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전술입니다. 

더구나 포 의도니 인구가 많을수록 저항 기간을 단축시킬 가능성이 컸습니다. 

 

70년 전 보불전쟁 당시에 독일은 파리를 포의 하여 느긋하게 굴복시킨 전례가 있었습니다. 

10월 들어 라스푸타차(Rasputitsa)가 시작되면서 모스크바 점령을 위한 독일의 태풍 작전이 난관에 부딪히는 시작 하였습니다.  진흙 장군은 결국 모스크바를 구했지만 레닌그라드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스스로 진격을 멈춘 상태였기에 라스푸티차가 독일 북부 집단군에게 끼친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반면, 고립된 레닌그라드로 향한 소련의 생명선이 오히려 장애물을 만났던 것입니다. 

 

라도가 호수를 건너 레닌그라드로 보급품이 가려면 일단 내지에서 호수 남측 연안의 볼호프(volkhov)까지 소송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로 향하던 독일군을 막을 라스푸티차가 여기서는 소련의 보급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됐던 것입니다. 

아무리 소련인들에게 익숙한 자연현상이라 해도 엄청난 진흙 구덩이를 빠져나오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941년 가을의 라스푸티차는 모스크바를 구한 조력자인 동시에 레닌그라드를 고통스럽게 만든 양날의 칼입니다. 

 

 

2. 티흐빈에서의 반전

이처럼 레닌그라드 일대가 안 정화 되자. 스탈린은 10월 8일 주코프를 소환하여 모스크바 방어의 중책을 부여하였습니다. 이는 독일과 소려 모두 레닌그라드를 차후의 문제로 보기 시작하였다는 뜻입니다. 양측 합쳐 800만에 가까운 대군이 쉽없이 충돌하여도 모든 곳에서 동시에 싸우기 힘들 만큼 소련은 넓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닌그라드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전투가 끈났다는 의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레닌그라드 도심에 설치된 대공 감시장치인 청음기. 레닌그라드 일대의 전선은 정체되었지만 싸움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연일 도심을 향한 포격을 계속하였고 그러 수록 소련군의 저항 의지는 커졌습니다. 1941년 겨울 이전까지 소련군이 보여준 모습은 모든 무능의 총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전선으로 달려 나오며 저항하는 놀라운 모습음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권력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점령지에서 나치가 소련인들과 포로들에게 가한 잔학행위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면 항복할 것이라 예상했던 독일은 당황하였고 침공 4개월이 지나면서 이 전쟁에서 이기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볼호프 남부의 티흐빈에서 벌어진 전투는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독일일 볼호프와 이곳을 거쳐 오네가호 서안의 페트로자보츠크를 점령한다면 핀란드군와 직접 연결이 되면서 소련의 유일한 생명선인 라도가 호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라스푸티차가 끝난 직후인 11월 8일, 독일이 타흐빈을 점령하자 소련은 즉각 반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모스크바 방어에 혈안이었음에도 stavka(소련군 최고 사령부)가 반역죄 명목으로 수감 중인 메레츠코프에게 직할대인 제4군을 맡겨 투입하였을 만큼 중대한 위기로 인식할 것이었습니다. 한 달간의 격전 끝에 소련군은 12월 9일 티흐빈을 탕 환하였고 이를 계속 확보하려 제4군을 기반으로 볼호프 전선 군을 창설하여 독일 북부 집단군의 측면을 견제하였습니다. 

 

3. 지옥으로 변한 도시

하지만 포위망 외각에서 선전과 달리 도심의 모습은 비참하였습니다. 쉴 새 없이 계속되는 독일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말미암아 기반 시설은 파괴 도어 갔지만 이를 복구할 자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무섭고 두려웠던 것은 식량난이었습니다. 

10월이 되었을 때 레닌 그라드에는 불과 20일분의 식량만이 남아 잇었습니다. 히틀러가 레닌그라드는 가만 놔두어도 몰락할 거라 자시 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정치국원인 주다노프는 군인과 노동자들에게 1주당 빵 8온스, 나머지 시민들에게는 4온스만 배급하였을 정도로 강력히 식량을 통제하였지만 50만 명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었습니다. 

도시에 널브러진 사체를 수습하는 모습. 독일의 공격에 의한 사상자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기아와 추위에 숨져간 이들이었다. <출처: (cc) RIA Novosti archive, image #216 / Boris Kudoyarov at Wikimedia.org> 

거기에다가 12월이 되어 북극으로부터 엄청난 한파가 몰려오면서 영하 4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고 난방용 에너지가 고갈되자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많은 이들이 죽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루 사망자가 5천 명 선에 이르면서 시가지 곳곳에 시체가 쌓여 가는 모습이 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처절하게 도시를 사수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결국 아사 직전의 수많은 시민들이 사체를 먹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보안대에서 이를 단속하였지만 오로지 생존 본능에만 매달리 이들의 행위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사실 이런 참담한 상황을 신속히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극적인 치안 행위나 강력한 통제보다 식량과 연료를 즉시 공급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주간의 폭격 위험을 피해 가며 라도가 호수 위로 보급품을 가득 실은 선박이 오갔지만 공급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데 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시민들에게 추워 떨다 죽게 만든 엄청난 겨울 한파가 역설적으로 레닌그라드를 구한 생명의 밧줄이 되었습니다. 

 

4. 생명의 길

우선 독일군의 공격이 멎었습니다. 그해 겨울은 따뜻할 것이라는 기상대의 장기 예보만 믿고 전쟁을 벌인 독일은 동계 전투용 장비와 소모품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아 더 이상 싸움을 벌일 여건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모스크바와 로스토프 앞에서 진격이 좌절돼 중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에 비해 9월부터 참호를 파고 포위전을 편 쳤던 북부 집단군의 여건이 상대적으로 나았지만 얼어붙은 대포에서 포탄이 발사되지 않기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의 겨울 혹한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결빙된 라도가 호수가 그동안 볼호프 등에서 레닌그라드로 이어지는 뱃길을 막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좋은 수송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1941년 겨울은 40년 만의 혹한이었다. 동계 피복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한 일선의 독일군들은 더 이상 전투를 벌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11월 20일 이후부터는 구호물자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꽁꽁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 위를 달리기 시작하였고 돌아올 때는 50만의 시민들과 부상당한 4만여 명의 병사들을 싣고 지옥의 도시를 빠져나왔습니다. 

 

물론 이러 수송이 마냥 쉬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야간에도 움직인다 하더라고 독일 공군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었고 얼음이 깨지면서 호수 아래로 차량이 가라앉은 경우도 비일비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미 배로 보급품을 수송할 때도 있었던 위험이었습니다. 이처럼 레닌그라드의 구언 행렬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고 도시는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던 수송차량의 기사들은 죽음의 길이라 불렀지만, 이듬해 4월 24일까지 152일간 열려 있던 라도가 호수의 에 고속도로는 '생명의 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생 명선을 통하여 배급량이 다시 늘리기 시작하였고 시 미들의 사기도 서서히 올라갔습니다. 당연히 소련군의 방어선도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반면 예상을 빗나간 레닌그라드의 회생에 히틀러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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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다드 전투-(4)대전쟁 최장의 싸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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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자체 개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잠수함 발사시험이 15일 국내 최초로 성공했다. 이날 악천후 속에서 실시된 SLBM의 잠수함 발사시험 성공은 세계 7번째다. 사진은 15일 도산안창호함에 탑재돼 수중에서 발사되는 SLBM 발사 모습. (국방부 제공) 

 

1. 한국형 SLBM 역사

2015년 5월 9일 북한이 최초 SLBM인 북극성 1호를 최초로 수중 시험 발사를 했습니다. 사거리는 500~3,000km으로 추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정부도 2017년 7월 24일 장보고 3급 잠수함에 탐재될 SLBM의 핵심기술에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고 정부 비밀 사업으로 방위 사업청, 국방과학 연구소 (ADD) 등과 함께 해당 기술들은 자체 개발 중이었습니다. 

2018년 8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이, 진해 해군 기지에서 잠수함에 탐승도 하면서 휴가를 보내기도 하였으며 장보고 3급 잠수함 1번 함이 진수되는 보도가 수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드디어 도산 안창호 함이 SLBM인 현무 4-4의 수중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세계 7번째 SLBM 개발국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 최초의 SLBM은 1961년 미국이 개발한 폴라리스입니다. 

미국을 비꼬기 윟 6번째 SLBM 개 북국인 북한도 미사일 이름을 북 그 성으로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1년 소련 SLBM을 개발한 후 중국 , 프랑스 인도, 북한의 순서로 SLBM을 개발하였습니다. 

핵보유국인 영국은 SLBM을 개발하지 않고 그들의 전략핵 잠수인 '뱅가드급'에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트라이던트 2 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1-1 특이한 점

핵추진 잠수함이 아닌 재래식 동력 잠수함에 단도 미사일을 장착했다는 점입니다. 

대부 부분의 잠수함이 순항미사일은 발사할 수 있지만 탄도미사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재래식 잠수함에 SLBM을 탑재했던 예는 있습니다. 

 

바로 소련의 골프급 잠수함입니다. 이골프급에 탐재했던 SLBM인 ㄱ27이 북한의 무수단 미사일의 원형입니다. 

하지만 골프급은 최소 하루에 한 번 이상 수상으로 부상하여 엔진을 가동해 추진용 배터리를 충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적에게 노출될 확률이 너무 높아서 미국이 크게 위협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92년 독일로부터 1200톤 209급 잠수함 건조 기술 릉 배워와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 잠수함이 선생인 독일 물리치고 인도네시아 잠수함 사업을 수주하는 기염을 토하였고 30년도 안되어 전인담의 AIP잠 숨 SLBM자찯이라는 쾌거 글 이뤄 냈습니다. 

 

독일이 이제 도산 안창호급에 위협을 느껴 자사 212형 잠수함의 크기를 키워 수직발사관을 채택하겠다는 발표를 했을 정도입니다. 

 

 

2. 도산 안창호급 시스템

공기 불요 시스템인 AIP 시스템을 탑재하여 3주간이나 부상하지 않고 작전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4번 함부터는 기존 납축전지보다 효율이 2배가 넘는 리튬이온 배터리 기반의 AIP 시스템을 탑재하기 때문에 무려 20일 시상을 부상하지 않고 수중 작전을 할 수 있으며 SMBM 숫자도 6발에서 10발로 늘인 것입니다. 가히 침묵의 암살자 이자 최강의 히든 편치라 할 만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잠수함 전문가 'H.I 서튼'  기고를 통해 한국의 도산 안창호 급- 잠수함 능력의 새로운 여명을 예고한 게임 체인저라고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ㅂ슷한 덩치의 최신 잠수함중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 위안급이나 러시아-라다급 보다 압도적인 성능을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 스콜펜급 이나 일본-토류함 등 도 타격력에서 비교 불가합니다. 

 

당연히 해외 수출 시장의 전망도 밝다고 합니다. 인도에 6척 7조 원 규모 차세대 잠수함 사업에서 독보적인 선두에 있다고 합니다. 

3. 다른 SLBM개발국과 다른 점

다른 SLBM 개발국과 다른 점은 핵미사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현무 4-4는 마하 7의 빠른 속도로 500km를 날아가 지하 시설 깊은 곳까지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벙커 버터 능력이 있습니다. 

 

현무 4-4는 핵무기가 아니라서 전쟁을 한방에 종결시킬 능력은 없지만 반대로 전치적 논란이 될 핵무기가 아니기 때문에 실전에서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비핵국가들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생각할 부분임과 동시에, 지하에 많은 전략무기와 지휘 시설을 감취 둔 북한에게 강력한 억지력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1992년 독일로부터 1200톤 209급 잠수함 건조기술을 배워와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 잠수함이 선생인 독일을 물리치고 인도네시아 잠수함 사업을 수주하는 등 30년도 안되어 AIP 잠수함 SLBM장작이라는 쾌거를 이룬 것입니다. 

 

독일이 이제 도산 안창호급에 위협을 느껴 자사 212형 잠수함의 크기를 키워 수직 발사관을 채택하겠다고 발 펴를 했을 정도입니다. 

 

4. 한국 잠수함에 다음 단계

이제 다음 단계는 바로 핵추진 잠수함 건조입니다. 한미 원자력 협정 등 해결해야 할 정치적 요소도 있지만 그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모든 난관을 뚫고 당당히 핵추진 잠수함 건조에 성공하여 비핵보유국으로서는 최초의 핵추진 잠수함의 SLBM 장착이라는 신기원을 이뤄주길 바랍니다. 

 

 

 

 

 

2021.07.15 - [해군무기체계] - SLBM -잠수함 탄도미사일

 

SLBM -잠수함 탄도미사일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비대칭 전력 자산 전력 하나인 SLBM에 대하여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잠수함 탄도 미사일이라고 하는데요. 약칭 SLBM이라 합니다. 자 그럼 이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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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전투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린그라드 시리즈 중 4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차례 

  1. 레닌그라드 영웅 주코프의 등장
  2. 당근 대신 채찍을 주다. 
  3. 독일 히틀러의 변심
  4. 한 번에 먹을 수 없는 먹이 

 

1. 레닌 그 가드 영웅 주코프의 등장

소련을 승리로 이끈 상승장군 게오르기 주코프이미지

레닌그라드 방어를 책임진 북서관구(Northwestern Direction) 사령관 보로실로프는 군사적 능력이 변변찮은 인물이었습니다. 군과 민간을 독려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전선까지 달려 나가 진두지휘하는 용맹함을 발휘하기도 하였지만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예하 북부전선 군 사령관 포포프와 북서 전선 군 사령관 쿠즈네초프가 실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거시적으로 지휘 통솔하기에는 그릇이나 능력이 너무 작았습니다. 

 

키예프 전투 종결 후, 전선을 재정비한 독일군이 전 전선에서 진격을 재개하였고 독일 북부 집단군도 한걸음 더 레닌 그라드에 가까워졌습니다. 

 

신인민위원회는 노약자들을 소련의 내지로 미리 피난시켰으나 이를 능가하는 더 많은 피난민들이 독일군을 피해 레닌그라드로 몰려들었습니다.

포위당하기 직전인 1941년 8월, 기관총 탄띠 제작 교육을 받고 있는 레닌그라드 시민들. 여유롭게 연출된 선전사진이지만, 실제로 남자들은 전선에 차출되었고 후방 지원은 여성들이 담당하였다. <출처: 구 소련 선전사진> 

 

보로실로프는 시민과 피난민 중에 차출한 병력을 북서관구에 긴급 편성하여 방어선에 배치했으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독일이 키예프 공략을 매달려 있는 동안 강화된 방어선이 독일군의 재개된 진격을 틀어막고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팅수 있을지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독소전쟁 개전 이후 지금까지 소련군의 큰 패전 대부분이 전선 중앙과 남부 일대에서 벌어져 북서관구 지역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편이지만 전투 의지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독일 공군의 사정권에 들어온 레닌그라드 도심은 연일 폭격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9월 8일 실리 셀 부르크가 돌일에게 점령당하자 지상으로 레닌 그라드와 연결되는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습니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와 사석에서 농과 욕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이제 친한 이유만으로 더 이상 부서 관구 사령관으로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키예프 방어전을 놓고 대립하다가 좌천시킨 전 총 참모장 주 코프를 소환하여 9월 13일 레닌그라드로 보냈습니다. 

 

2. 당근 대산 채찍을 주다. 

주코프가 레닌그라드 현지에 부임하였을 때 소련군의 사기는 망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가 시야에 보이는 외각 10여 길로 미터까지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쏘는 ㅍ포탄이 시내에 떨어지고 이었습니다. 포위된 상태에서 결사항전을 펼치려면 300여만의 시민들과 100여만의 병력이 먹을 실량이 확보되어야 했는데 그가 부임하기 하루 전에 대규모 식량 저장소가 폭격으로 전소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동안 독일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어 지난 막상 도심이 불타오르자 레닌그라드는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밖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보니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보려는 시민들의 원초적 이 기시미 팽배해지면서 곳곳에서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도심의 모습이 급속도로 흉흉하게 바뀌자 외각에 배치된 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습니다. 

이상태에서 독일군을 저지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주코프는 바닥까지 떨어진 국기를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했습니다. 그도 방어를 자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풀에 꺾여 싸워보지도 않고 순순히 도시를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패배의식에 절어 있던 휘하 장병들을 가혹하다 싶을 만큼 들들 볶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반항하는 이들은 즉각 총살하는 강경책까지 불사하였습니다. 

더불어 민간에 대한 강압적인 통제를 펼침으로써 도심의 치안도 서서히 안정시켜 나갔습니다. 

 

그는 참호를 더욱더 깊게 팠고 도심 요소요소에 대공포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선을 강화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주코프의 굳은 결심은 도시를 수호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렇게 형성돼 레닌 그라드의 단단한 방어망이 앞으로 900여 일 가까이 계속  이상태를 유지하게 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레닌그라드의 운명은 바로 이때 내려진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3. 독일 히틀러의 변심

주코프가 레닌그라드에 도착하기 하루 진인 9월 12일, 히틀러는 북부 집단군 예하의 제4기갑 집단을 모스크바 골량에 투입하라고 OKH(독일 육군 쵝사려부)에 명하였습니다. 이는 전쟁 전부터 레닌 그 가드를 우선 목표로 여기고, 불과 한단 전까지만 해도 공격을 독려하기 위해 중부 집단군에서 제39장갑 군단을 차출하여 북부 집단군을 지원하였던 히틀러의 행태를 고려한다면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모스크바를 먼저 차지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키예프 공력이 끝나자. 히틀러는 갑자기 변심하여 OKH가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입안한 태풍 작전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연이은 격전으로 소모가 컸던 중부 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레닌그라드 목전까지 다가갔던 제4 기갑 집단을 빼버리는 파 겨을 단행하였습니다. 기상천외한 총통의 지시에 사령관 레프를 비롯한 사 북부 집단군 전체가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제4 기갑 집단은 말 그대로 북부 집단군의 돌파를 담당하던 유일한 기동 부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차출하고 더구나 다른 부대를 충원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레닌그라드 점령을 유보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히틀러가 그동안 군부의 요청에도 불고하고 우선순위에서 배제시켜 놓았던 모스크바에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어쨌든 9월 들어 그는 갑자기 이곳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히틀러는 키예프 전투의 결과에 고무되어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전쟁이 거기서 탈것으로 판단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300여만 명의 소련군이 지나 두 달 동안 격파되었고, 소련군의 마지막 전력이라 추정되는 대부분의 예비대들이 모스크바 방어에 투이 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었기에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머 뭐한 피를 입고도 소련의 저항의 지는 꺾어지지 않았습니다. 

 

4. 한 번에 먹을 수 없는 먹이 

어떻게 되었든 레닌 그라드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제4기갑 집단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방향을 틀어 모스크바를 향해 남진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북부 집단군이 레닌그라드 골량을 중단한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9월 17일, 리프는 독일군 6개 사단을 앞세워 레닌그라드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지만 소련의 방어선이 강화된 반면 독일군의 돌파 능력은 현저히 저하되어 별다른 선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레닌그라드의 북쪽을 차단한 핀란드군이 진격의 멈추었습니다. 그들은 지난겨울 전쟁에서 강탈당한 카레리 야를 회복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황한 독일은 OKW(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 작적 부장 요들을 급파하여 레닌그라드 협공을 설득하였으나 핀란드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결국 레닌그라드 진입이 만만치 않자 독일 북부 집단군은 9월 25일부터 진격을 멈추고 포위전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북부 집단군의 예하 부대를 차출하여 모스크바 공략에 투입할 만큼 독일군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라는 두 개의 커다란 먹이를 동시에 먹을 능력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바바로사 계획 수립 당시에는 3개 병단이 세 곳의 전략 목표를 동시에 점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독일은 불과 석 달 만에 그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소련은 광활한 땅이었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저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저만 해도 직접 전선까지 찾아와 레닌그라드 공략이 늦어진다고 닦달하던 히틀러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독일이 진격을 멈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히틀러는 이상태로 가만히 있기만 해도 포위된 레닌그라드의 소련군이 항복하고 나올 것이라 예상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모스크바를 중시하였던 독일 군부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이런 반응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주코프는 이런 상황을 몰랐지만 소련에게 이는 엄청난 호기였습니다. 

 

2021.09.08 - [전쟁사] -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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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 [전쟁사] - 레닌그라드전투 (2)-대전쟁 최장의 싸움터

 

레닌그라드전투 (2)-대전쟁 최장의 싸움터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닌그라드 전투 2번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차례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소련의 반격(대응) 쾌속의 진격 1. 대국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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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2 - [전쟁사] - 레닌그라드- 전투 3번째 이야기

 

레닌그라드- 전투 3번째 이야기

2021.09.08 - [전쟁사] -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오늘은 지난 글에 에어 레닌그라드 전투 3번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총 시리즈 6편 정도 예정되어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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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타이푼급 잠수함 이미지 출처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  유용원의 군사세계  ,  디지틀조선일보

타이푼급 잠수함"항공모함을 능가하는 규모를 자랑하는 전무후무한 초대현 전략 원자력 잠수함.

◆차례

1. 개발 역사 알아보기

2. 타이푼 원자력 잠수함 특징

3. 타이푼급 동급함

4. 타이푼급 운용현황

5. 타이푼 제원

 

1. 개발 역사 알아보기

물속에 스나이퍼 눈에 보이지 않게 수중에서 은밀하게 행동하는 잠수함을 반갑지 않은 존이며 상대국가에게 군사적인 압박을 수중에서 활동하는 잠수함을 대량으로 건조하여 대응했습니다. 

비록 재래식 디젤 잠수함이라고 하여도 바닷속에 숨어 있는 잠수함을 탐지하기란 쉽지 않기에 수시로 출몰하는 소련 해군의 잠수함은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잠수함에 대한 대책으로 미 해군은 냉전 시기에 대잠 항모(CVS)와 대잠 구축함(DDK)으로  대잠 항모 기동함대를 편성하여 소련의 잠수함이 대서양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봉쇄하는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소련 해군의 최대 약점은 지리적인 여건에 있었는데 발탁 함대, 흑해함대, 북해 함대 모두 대양으로 진출하는데 제약이 많습니다. 

 

발탁 함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있는 외레순 해협을 통과해야 대양을 통과할 수 있으며

흑해함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작전이 그대로 노출되는 약점이 있습니다.

북해 함대

거칠기로 유명한 북해를 지나 대서양으로 진출하려고 해도 미 해군과 나토(NATO) 동맹군이 그린란드-아이슬란드-영국으로 이어지는 방어선(GIUK)에 고정식 수중 응향 탐지 장치를 설치하고 철통같이 감시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태평 향 함대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항하는 경우에도 대한 해협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작잔을 편 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입항중인 타이푼급 잠수함. <출처: Mr. Robert Lawson at wikimedia.org>

 

특히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탐재하는 전략 원자력 잠수함의 경우에는 충 항한 다음 수중에서 최대한 오랜 기간 버티면서 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초창기 소련 해군의 전략 원자력 잠수함은 서방국가에 비하여 설계 기술이 부족하여 원자력 추딘 기관의 크기가 크고 고압 터빈에서 발생하는 소음도 큰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고체연료의 제작 기술도 충분하지 않아 탑재하는 미사일 역시 서방측보다 상당히 큰 편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술적인 사정으로 인해 소련 해군의 전략 원자력 잠수함에 탄도 미사일과 원자력 추진기관을 탑재하고 나면 전투체계와 거주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아 잠수함 승조원은 작전 기간 동안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했습니다. 

 

따라서 소련 해군 잠수함의 작전 기간은 불과 한 달로, 미 해군 잠수함이 작전 기간보다 훨씬 짧은 편이었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숨어 있어야 하는 전략 원자력 잠수함으로서는 이러한 점이  큰 약점이었으며, 다른 전략 원자력 잠수함과 교대하기 위해 주요 해협을 자주 통과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미 해군의 구형 대잠 구축함을 대 ㅔ하고자 최신형 대잠 장기를 탑재한 스프루언스(SPRIUANCE)급 구축함을 완성하여 실전에 배치하면서 소련 해군은 기존의 전략 원자력 잠수함으로 정면 스부가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새로운 전략 원자력 잠수함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젝트 941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전략 원자력 잠수함은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규모와 은밀한 작전을 성사시키기 위한 것으로 소련 해군으로도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소련 해군은 미 해군과 나토 동맹국의 감시망을 피해서 아예 대서양으로 진출하지 않고 깊은 바다로 잠수하여 장기간 조용히 대기하는 전술에 집중하고자 했습니다. 이전에도 이러한 전술은 존재하였지만 보유한 전략 원자력 잠수함의 성능이 부족하여 충분하게 작전을 전개하기기 쉽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소련 해군의 전략 원자력 잠수함에 탑재하는 탄도미사일은 대부분 액체 연료 방식이었으며 고체 연료 방식은 양키 2급 탑제하는 R-31 [나토명 SS-N-17 스나이프] 탄도미사일이 유일했습니다. R-31 탄도미사일에 이어 등장한 R-39 [나토명 SS-N-20 스터전] 탄도미사일은 사거리 9,000km에 달하는 장거리 탄도미사일로 사거리가 크게 향상되었지만 무게가 100톤에 이르는 초대형 미사일로 소련 해군의 델타(Delta)급 잠수함에는 탑재가 블가능했습니다. 

러시아 세베로드빈스크(Severodvinsk) 조선소에서 미국 정찰위성에 포착된 타이푼급 잠수함 <출처: U.S. Government Public Release>

따라서 소련 해군은 기존의 전략원잠보다 훨씬 큰 초대형 전략 원잠이 필요했습니다. 

R-39 탄도미사일을 탑재하고 깊은 바닷속에서 승조원이 장기간 작전하려면 함 내 공간이 충분히 커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시작한 프로젝트 941 전략 원자력 잠수함은 웬만한 항고 모함을 능가하는 4만 톤급 잠수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련 해군은 나토에서 분류하는 '아쿨라' 공격 원자력 잠수함과 혼동하도록 고의 적으로 이 전략 원자력 잠수함'상어'를 뜻하는 '아쿨라'라는 암호명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응하여 나토는 소련 해군의 '아쿨라' 전략 원자력 잠수함을 타이푼급이라는 명칭을 붙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잠수함 중에서 가장 큰 타이푼급 전략 원자력 잠수함은 넓은 개인 공간은 물론 체육시설, 사우나 등의 편의 시설도 미 해군 잠수함 수준으로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소련 해군은 덩치가 큰 타이푼급 전략 원자력 잠수함을 신저에 배치하면서 눈에 잘 띄는 주요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북극의 빙하 밑에서 장기간 대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경우 GIUK 방어선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고 깁이 잠수하면 북해의 거친 바다의 영향도 받지 않기에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 가능합니다.. 

 

2. 타이푼 원자력 잠수함의 특징

전무후무한 초대형 잠수함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타이군급 전략 원자력 잠수함은 기존의 다른 잠수함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단일 선체를 가진 잠수함의 경우 승조원이 탐승하는 내암 선체는 견고하게 제작하고 내압 선체를 둘러싸는 외부 선체의 공간에 맬러스트 탱크를 설치하여 부력을 조절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이중 선체는 외부의 공격을 받더라도 내부의 내암 선체를 최대한 보호할 수 있습니다. 

이경우에도 선체는 하나이며 깊은 바다의 수압을 견디도록 단면은 원형으로 설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잠수함은 전략잠수함, 공격잠수함 모두 원형 선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이푼급 잠수함은 특이하게도 대형 탄도미사일을 탑재하는 동시에 내무 공간을 확장하고자 2개의 나 압선체를 나란히 배치하고 그 중간에 탄도미사일을 격 남하는 선체를 끼워 넣는 다중 선체(multi hull) 방식으로 설계되었습니다. 

 

독특한 타원형 선체를 가지고 있는 타이푼급 전략 원자력 잠수함은 추진이 역시 다른 잠수함과 다른 독특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좌우의 원자력 추진 기관과 추진 죽으로 연결돼 7 엽 스크루는 덕택에 둘러싸여 있어 해저면에 앉을 경우에도 스크루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크루 바로 뒤에는 수 평타를 설치했으며 좌우로 조종하는 수직 타는 별도로 설치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방측 잠수함은 수중 소음의 원인이 된 스크루의 거품 발생을 줄이고자 조종 타면의 뒤쪽에 스크루를 설치하는데 러시아 타이푼급 전략 원자력 잠수함의 경우에는 정숙성을 희생하는 대신 조정성과 안전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다만 수상 항해를 할 때 스크루의 대부분이 물 밖으로 노출되는 위치에 설치하여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모두 20발의 R-39(나토명 SS-N-20) 탄도미사일은 잠수함의 앞부분에 집중하여 격납하며, 선수에는 6문의 21인치(533mm) 중어뢰 발사관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중어뢰 발사관은 중어뢰를 비슷하여 RPK-2(SS-N-15) 뷰가(Vyuga) 순항미사일 발사할 수 있으며, 최대 22발까지 중어뢰 또는 미사일을 탑재합니다. 

타이푼급 전략원잠의 전용 발사관에 탑재되는 SS-N-20 탄도미사일 <출처: ww.erasib.ru>

특이하게도 부상할 경우 대잠 항공기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9 k38 이글라(igla) SA-N-8 단거리 함대공 미사일 탑재합니다. 

타이푼급 전략 원자력 잠수함 추진기관은 OK-650 기압 수형 원자로를 사용하며 좌우 내압 선체에 각각 1기씩 설치되어 있어 피탄을 받아 한쪽이 침수되는 경우에도 선체가 각기 독립되어 있습니다. 생존성이 높습니다. 원자로에서 공급하는 에너지로 증기 터빈을 구동하며, 최대 25노트의 속도로 수중 항해가 가능합니다. 

 

타이푼급 전력 원자력 잠수함은 넉넉한 내부 공간 덕분에 최대 90~120일 간 북극해에서 작전이 가능하여 이전 구형 전략 원자력 잠수함 대비 작전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톰 클랜시가 1984년 에 펴낸 소설 (붉은 10월)에 등장하는 타이푼급 전략원자력 잠수함은 7번 함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잠수함입니다. 

3. 타이푼 동급함

타이푼급 잠수함 6척 (러시아 해군)

TK-208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iy Donskoy) 1976년 6월 30일 착공, 1979년 9월 27일 진수, 1981년 12월 29일 취역, 제402조선소 건조, 북해함대 소속
TK-202 1978 4 22일 착공, 1982 9 23일 진수, 1983 12 28일 취역, 402조선소 건조, 1999 6월 퇴역
TK-12 심비르스크(Simbirsk) 1980 4 19일 착공, 1983 12 17일 진수, 1984 12 26일 취역, 402조선소 건조, 1996년 퇴역
 TK-13 1982 2 23일 착공, 1985 4 30일 진수, 1985 12 26일 취역, 402조선소 건조, 1997년 퇴역
TK-17 아르한겔스크(Arkhangelsk) 1983 8 9일 착공, 1986 12 12일 진수, 1987 12 15일 취역, 402조선소 건조, 2006년 퇴역
TK-20 세베르스탈(Severstal) 1985 8 27일 착공, 1989 4 11일 진수, 1989 12 19일 취역, 402조선소 건조, 2004년 퇴역

4. 타이푼급 잠수함 운용현황

타이푼급 전략 원자력 잠수함은 모두 7척 계획되었으나 6척만 러시아 세베로드빈스크에 위치한 제402조 선 소에서 건조되었습니다. 

1981년 ~1989년까지 모두 6척이 취역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초에 소련 체계가 붕괴한 이후 심각한 재정난으로 인해 정상적인 작전이 어려워 항구에 방치되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소련)가 핵무기 감축 조약 START( STRATEGIC ARMS REDUCTION TREATY)- START-2에서 서명하면서 

1996년부터 R-39(SS-N-20) 탄도 미사일은 순차적으로 폐기되었고 R-39 탄도미사일을 탐재하는 타이푼급 전략 원자력 잠수함 역시 필요가 없어져 순차적으로 5척이 퇴역하였습니다. 3척은 패기 처분되었습니다. 

 

선도함인 TK-208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페기 되지 않고 신형 탄도미사일 RSM-56불 라바(BULAVA) 30(나토명 SS-NX32) 테스트 플랫폼으로 개조되었으며 2020년까지 북해함대에서 운용될 예정입니다. 

 

5. 타이푼급 제원

 함명 타이푼급
함종 원자력 추진 전략잠수함[전략원잠(SSBN)]
배수량 18,797(수상), 26,925(수중)
전장 171.5m
전폭 24.6m
흘수 13.0m
잠항심도 300m
승조원 175(사관 55, 수병 120)
주기관 VM-5 PWR 가압수형 원자로(380MW) × 2, GT3A 증기 터빈(60MW) × 2, 2축 추진
무장 R-39(SS-N-20) 탄도미사일 × 20, RPK-2(SS-N-15) 순항미사일, 9K38(SA-N-8) 함대공미사일,
           21인치(533mm) 중어뢰발사관 × 6(합계 22발 수납)
ESM(전자전장비) Rim Hat (Nakat M)
레이더 Snoop Pair(Albatros) 해상탐색 레이더
소나 Shark Gill(능동/수동식), Shark Rib(수동식), Mouse Roar(능동식), Pelamida(견인식, 수동식)
전투체계 3R65

참고문헌: 한국 국방안보포럼, 유용원에 군사세계 , 디지털 조선일보




[네이버 지식백과] 타이푼급 잠수함 - 항공모함을 능가하는 규모를 자랑하는 전무후무한 초대형 전략원잠 (무기 백과사전, 한국 국방안보포럼(KODEF), 유용원의 군사세계, 디지털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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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디펜스- 14일부터 17일까지 영국 런던 엑셀 전시장에서 열리는 DSEI(Defense and Security Equipment International) 국제 방산전시회에서 첨단 지상장비와 무인 방산 시스템 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반가운 소식 있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한화 디팬스가 영국 런던 국제 방산 전시회에서 첨단 지상장비와 무인 방산 시스템을 선보이고 우리나라 명품 자주포 K9A 2도 선보였습니다. 

자세한 소식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DSEI는 영국 국방부와 국제 무역 부가 주관하는 국제 방산 박람회입니다. 

올해 행사에는 30여개국 760개 방산업체들이 참가하였고 국내 방산기업을 한화 디팬스고 유일하게 참가했다는 소식입니다. 

 

1. 한화 디팬스 K9자주표(SPH), 보병 전투장갑차(IFV)등

이번 전시회에 K9 자주포 (SPH)와 차세대 보병 전투 장갑차(IFV), 레드백, 비호 복합 대공 방어체계, 다목적 무인차량 등 최신 지상 무기체계들을 전시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K9 자주포입니다. 

내년에 시작되는 영국 육군의 MFP(MOBILE FIRE PLATFORM) 자주포 획득사업에 제안될 예정이라는 소식입니다. 

영국 정부와 현지 방위산업 관계자들로부터 크게 주목받고 있다고 하는데요. 

 

1-1. MFP 사업이란?

영국 포병요 차세대 자주포 116문을 공급하는 사업으로 한화 디팬스는 K9 자주포의 최신 버진인 K9A 2를 제한하고 현제 개발 중인 K9A 2는 한층 향상된 화격과 방호력, 기동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어필하였으며, 완전 자동화 포탑이 장착되고 

분당 9발까지 발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또 차체 방호력을 업그레이드 한 신형 보호 키트를 장착할 예정이고 복합 소재 고무 궤도를 적용해서 기동성을 향상하는 방안도 구상 중입니다. 

 

1-2. 팀 선더(TEAM THUNDR)

한화 디펜스는 MFP사업 참여를 위해 영국 현지 방위산업체 들과 팀 선더를 결성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를 위해 이번 전시회 기간 동안 

영국의 주요 방산기업

레오나로도(Leonardo UK)
피어슨 엔지니어링(Person Engineeing)
호스트만 디펜스 시스템즈(Horstman Defence Systems)
캐나다의 수시 디팬스 (Soucy Defense)

등과 팀 선더 구성을 위한 양해각서 (MOU)를 체결할 예정이라 밝혔습니다. 이밖에 록히드 마틴 영국 법인과도 MFP 사업협력을 위한 협의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1-3. 한화 디팬스 다목적 무인차량

이번 전시회에서 다목적 무인 차량을 유럽시장에서 처음으로 실물 전시하며 미래 무인화 체계 기술력도 선보이다고 합니다. 

다목적 무인차량은 다양한 전투 상황에서 보병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무인로봇으로 지난 2019년 국내 최초로 개발됐습니다 4륜 구동 전지 추진 방식의 다목적 무인차량은 원격 또는 자율 운행한다고 합니다. 

 

-수색정찰

-통신

-물자 수송

-부상병 이송

-근접 전투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화 디펜스가 자체 개발한 원력 사격통제체계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총성을 감지해 스스로 화기를 돌려 공격할 수 있는 AI 기능 강점입니다. 

 

DSEI 2021 전시회는 한화 디팬스의 선진화된 방산 기술력을 전 세계에 확인시켜줄 수 있는 기회라고 한 회 디팬스 측이 밝히고 있습니다.  진 편년 간 유럽시장에서 거둔 신뢰를 기반으로 유럽지역 고객들에게 더욱더 혁신적인 방산 설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의 면포를 보여준다는 포부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한화 디팬스 파이팅!!!.입니다. 

다른 좋은 소식이 있으면 업로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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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5이글 전투기 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살아있는 전투기 전설인 F-15 이글에 관한 내용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항공기가 군사용을 사용되기 시작된 이후, 공중 우세는 공군이 지향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가치가 되었습니다. 

 

공중우세란? 

공중 전투에 의해 적 전투기의 활동을 저지하거나 격 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개념에 따라 공중에서 적 전투기만을 전문적으로 요격하는, 공중 우세 전투기가 등장합니다. 미국이 개발한 F-15 이 글은 대표적인 공중우세 전투기로 1976년 전력화 성공한 이후 전설적인 실전 기록을 세우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고의 전투기로 명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1. 공중우세전투기의 개발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의 F-86 전투기는 공중정에서 10:1의 격추 교환비를 기록하며, 한반도의 제공권을 장악하는데 일조합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비 공공의 F-86 전투기보다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F-4 팬텀 2 전투기가 등장했지만, 격추 교환비는 3:1에 불과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공중전 격과, 미군은 공중전 특화된 전투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미 공군은 1965년부터 제공권 장약을 주 임무로 하는 성능이 우수한 차세대 전투기의 개발에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1967년 구 소련이 최고 속도가 마하 3으로 추정되는, MIG-25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 공군 MIG-25에 대항하기 위해, 마하 2 이상의 속도로 장시간 초계비행이 가능한 전투기를 요구합니다. 

8개 회사가 참가한 가운데, 치열한 경쟁 끝에 1969년 맥도널 더글라스(MCDonnell Douglas)사 현 보잉사의 시제가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되었습니다. 

1972년 7월 27일 첫 비행에 성공한 F-15A 1호기 <사진 출처: 미 공군>

 

2. 공중전을 위해 태어난 전투기 

1972년 6월 26일 시제 1호기 출고되었고 F-15A라는 제식 명칭화 함께 이글이라는 별칭을 가지게 됩니다. 

F-15 전투기는 쌍발 터보팬 엔진을 장착하고 고성능 공중 우세 전투기입니다. 

 

배트 난 전 당시에 공중전 교훈을 받아들여 근접 공중전에 대비해, 기체는 초음속과 음속을 가로지르는 속도의 비행에서 높은 기동성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또한 공대공 미사일의 단점을 보안 학위 파괴력이 강한 20mm M61A 1 벌컨포를 기총으로 장착했으며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AN/APG-63 레이더를 장착해 기체 하방 탐색 및 공격이 가능하였으며 100km 이상 떨어진 적기를 조기에 탐지하고 동시에 다수의 적기를 원걸에서 요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밖에 적기를 육안으로도 쉽게 실별 하기 위해 넓은 시야의 조종석을  채택했습니다. 높은 추력 대중 중량비를 자랑하는 F-15 전투기는 이륙 60청만에 10,000M까지 상승이 가능합니다. 

F-15 전투기는 가시권 밖 요격능력 외에도 뛰어난 근접 공중전 성능을 가지고 있다.<사진 출처: 미 공군>

 

3. 104:0 실전 스코어

1975년에는 해외 국가로 최초로 이스라엘에 F-15A/B 전투기 23대가 판매되어, 1977년부터 이스라에 공군에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슬라엘 공군의 F-15A/B 전투기는 1979년 시리아 공군의 전투기를 격추시키며, F-15 전투기 최초의 킬 스코어를 기속 합니다. 이후 이스엘 공군은 시라 공군의 공중전 엣 50여 대의 전투기를 겨 추시 키면서 F-15 전투기를 공중전의 전설로 만드는데 일조를 합니다. 

 

1079년부터 F-15A/B 전투기의 엔진과 레이더를 개량한 F-15C/D 전투기를 등장합니다. 

F-15C/D 전투기는 1991년 걸프전과 1999년 코소보 전쟁에서 우수한 성능을 발휘하며 수많은 격추기록을 세웠습니다. 

 

실전 배치후 2008년까지 F-15 전투기는 공중전에서 단한대의 손실 없이 104대 의 적기를 격추시켰으며, 이 기록은 공중전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 전폭기로 변신한 F-15

1980년대 초 미공군은 F-111 전폭기를 대체하면서, 공중전과 지상 폭격 능력을 겸비한 이중 임무 전투기 개발계획을 추진합니다. 다신 제너럴 다이내믹스사 (현 록히드 마틴)의 F-16XL과 복좌형 F-15B를 개조한 F-15E전투기가 후보기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1984년 2월 경쟁 끝에 F-15E전투기가 이중 임무 전투기로 선정되었고 스트라이크 이글(Strike Eagle)이란 별 치을 가지고 있는 F-15E 전투기는 공대공 및 공대지 2개 모드로 운용 가능한 APG -70 레이더를 탑재했고, 전투기의 항속거리와 무장장착능력을 늘리기 위해 컨포멀(CONFORMAL) 연료탱크를 장착했습니다.

-컨포멀 연료탱크란?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투기의 외형과 유사한 형태로 제작된 위부 연료 탱크를 말합니다. 

 

비행하는 F-15 컨포멀 연료탱크 이미지 출처: 미공군

5. 대한민국 공군의 F-15K 슬램이글

대한민국의 F-15K 전투기는 F-15E계열 전투기의 최신 버전 중 하나로, 지난 202년 차기 전투기 사업을 통해 공군의 차기 전투기로 결정되었습니다. 

F15K 전투기의 "K"가 의미하는 것은 대한민국 -KOREA의 약칭으로 한국형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전 투기는 우리 공군의 작전요구에 따라 기준 F-15E전투기에는 없었던 무장과 항공전자장비들을 추가했어며 F-15E계열 전투기 가운데 최초로 줄거리 공대지 순항 미사일인 SLAM-ER을 운용하며, 적외선 탐색 및 추적 장비 (IRST)와 최신 야간 저고도 항법 및 조준 장비인 타이거 아이(Tiger Eyes)를 탑재했으며 또한 헬멧 장착 시현 장치 (jhmcs)와 다 목표 공격능력이 강화된 AN/APG 63(V) 1 레이더 그리고 처력이 강화된 엔진이 장착되었습니다. 

 

F-15K 전투기는 국미 공모를 통해 슬램이글(Slam Eagle)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슬램이글에 슬램은 적을 보면 반드시 격추시키는 조정사의 투혼을 의미합니다. 근래는 영화 [R2B: 리턴 투 베이스]에서 

공군 F15K 슬램이 글 전투기를 실사 촬영하였으며 공중전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알투비: 리턴투베이스 영화포스터 이미지 출처 제작사 홈페이지

6. F-15에 스텔스 기능 업그레이드... 사일런트 이글

F-15E 전투기는 1991년 걸프전을 시작으로 2011년 대 리비아 공습 작적인 오디세이 여명 작전에 이르기까지 

주요 전재에 참가하여 위격적인 성능을 과시한 것이 사실입니다. 

전투기 제작사인 보잉 사는 지나 2009년 3월 스텔스 성능이 더해진 F-15SE사일런스 이글(Silent Eagle) 전투기를 발표했습니다.

F-15SE 전투기는 F-15E전투기의 레이더 반사면적을 최소화시킨 반면, 공대공 및 공대지 능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강점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레이더 반사면적을 줄이기 위해 컨포멀 연료탱크를 개조한 내부 무개 탑 제실을 장착하였고 내부 무기 탑 재실 내부에는 공대공 미사일은 물론 공대지 무기까지 다양하게 탑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필요에 따라서 내부 무기 탑 제실을 제거하고, 기존에 컨포멀 연료탱크를 장작해 F-15E전투기 고유의 무장 체계로 손쉽게 바꿀 수 있기도 합니다. 

 

F-15 제원 (F-15SE 사일런트 이글 기준)
전장 63.8 ft (19.45m) / 전고 18.5 ft (5.64m) / 전폭 42.8 ft (13.05m) / 최고 속도 마하 2.5 / 최대 이륙중량 및 탑재 중량 (기본 / 내부 탑재) 81,000 lbs (36,741kg), 29,500 lbs (11,748kg) / 작전 반경 (기본 / 내부 탑재) A/A: 900nm, 720nm A/G: 1000nm, 800nm / 추력 General Electric F110-GE-129 터보팬 엔진 2대(29,000 lb), 또는 Pratt & Whitney F 100-PW-229 엔진 2대 (29,000 lb) / 무장 20mm M61 A1 벌컨포, AIM-120/AIM-9 공대공 미사일, JDAM, 소구경탄 (Small Diameter Bomb) 등 다양한 공대지 무기
<출처: 보잉사>

 

 

참고문헌: 무기에 세계 , 유용원에 군사세계 , 보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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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투기 이미지

2021.09.08 - [전쟁사] -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오늘은 지난 글에 에어 레닌그라드 전투 3번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총 시리즈 6편 정도 예정되어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독일 계획과 현실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은 전 전선에서 놀라운 속도의 진격을 선보였습니다. 무론 그 와중에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료 고전을 겪은 곳도 이부 있었지만, 마치 찻잔 속의 태 품처럼 대세를 좌우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스크 전투, 스몰 레 수프 전투처럼 인상적인 대승이 주로 독일 중부 집단군 관할에서 연이어 벌이 지다 보니 많이 이들이 전선 중앙부를 주목하였습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최근의 역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전체 전선에서 경쟁하듯이 놀라운 진격을 선보였던 1941년 8월 이전에 바바로사 계획에서 명시한 진격 목표를 달성한 부대는 북부 집단군 바 까에 없었습니다. 특히 노브고로드(Novgoorod)를 향해 진군하던 예하 제56장갑 군단은 개전 4일 만에 무려 320km로 전진하는 놀라운 기록을 선보였습니다. 

 

이처럼 연이어 엄청난 대승을 거둔 전쟁 초기의 겉모습과 달리 독일은 생각보다 어렵게 앞으로 나고 있었습니다. 

이점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데 우선 바바로사 계획에서 예정한 시간이 너무 차이트 하였음을 뜻합니다. 

연거푸 승리하고는 있었지만 이를 달서 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쟁 개시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선두의 기갑부대와 이들을 후속 지원할 보병부대 사에 간극이 생기면서 갈등이 벌어졌고, 그만큼 보급을 추진하는데도 애를 먹었습니다. 

한마디로 소련을 너무 우습게 생산 만용을 부렸던 것입니다. 

독일 북부집단군은 7월 9일이 되었을 때 A선까지 진격하였다. 독일 침공군 중 가장 빠른 속도였는데 사실 이는 바바로사 계획에 명시된 목표대로였다. 결론적으로 독일은 엄청난 대승을 연이어 거두고 있었지만 진격 목표가 너무 과하였다. <출처: (cc) JHB at English Wikipedia at Wikimedia.org> 

부 집단군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서 레닌그라드로 향하던 제4 기갑 집단의 쌍두마차인 제41장갑 군단장 라인하르트와 제56장갑 군단장 만슈타인은 레닌그라드의 계속적인 진군을 주장하였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빨리 전진하다 보니 병사들도 지쳤고 후속해야 할 보급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또한 후방에서 고립된 채 저항하는 소련군도 골칫거리였습니다. 

 

2. 불쌍한 병사들의 부대

7월 중순이 되자 독일 중부 집단군이 도심에 머물며 저항하는 30여만 소련군을 스몰렌스크 일대에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 독일이 전력을 이 일대로 집중시키자 중부 지단 군과 북부 집단군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생기기 시장하였습니다. OKH(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이상태에서 북부 집단군이 홀로 진격을 계속하면 우측 면이 길게 노출될 것이라 판단하여 정지를 명하였고 사령관 레프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라트비아의 리가(Riga)에 입성하여 해방군으로 환영받는 독일군. 이처럼 독일의 초기 진격은 순조로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급 등의 문제로 애를 먹게 된다

 

이처럼 노도와 같았던 독일의 진경이 레닌그라드에서 100km 미터 전방인 일멘(llmen)호 근처에서 멈추고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소련의 움직이도 분주해졌습니다. 

이틈을 놓치지 않고 레닌 고다드 전면에 깊은 참호가 구축되면서 도시 전체가 요새화 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소련군의 반격을 개시하면서 OKH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덧 했지만 아직 소련군의 역량은 독인 군을 넘기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7월 27일 북부 집단군 사령부를 직접 방문한 히틀러가 진경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채근하고 레닌그라드를 즉각 점령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도심에 위치한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전승 행사를 열고 도시명을 아돌프스 브르크로 바꾸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만큼, 이때만 해도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레닌그라드를 우선 목표로 생각하였습니다. 

사령관 레프는 최선을 다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러려면 좀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전선의 모든 곳에서 소모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를 제때 보충하기 힘들 만큼 독일군의 여건은 좋지 못하였습니다. 

비단 북부 집단군만이 더 많은 예비대와 지원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이들은 가장 많은 곤란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관할 섹터가 작다는 이유로 규모도 작았고 이후 전쟁 내내 지원 순위에서도 밀렸습니다. 

그래서 에든버러 대학의 에릭슨 같든 이는 북부 집단군을 '불쌍한 병사들의 부대'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3. 독일 VS소련 양측의 대응

 

이처럼 전잰 전체를 살표 볼 때 주로 조연 역할을 담당하던 북부 집단군에게 그나마 제대로 된 지원이 이루어진 때가 바로 히틀러의 사령부 방문 직후였습니다. 

8월 5일 모스크바 초입의 스몰렌스크에서 벌어진 전투가 종결되자 중부 집단군 소소의 제39 장갑 군단을 레닌그라드 점령에 투입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총통의 이러한 결정을 중부 집단군이 반겼을 리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양 집단군 사이로 벌어졌던 전선이 다시 공고하게 연결되면서 측면의 위험이 제거되고 더불어 장갑 군단의 지원이 더해지자 독일 북부 집단군은 소련을 격파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진격이 잠시 지체된 약 보름의 시간 동안 소련의 방어막도 한층 강화된 상태였습니다. 비록 밀려나고는  있었지만 그동안 소련 북서 전선 군은 나름대로 선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700여 대의 전차를 모두 소모해 버린 라 세이니 전투처럼 격렬한 저항도 있었지만 체계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손실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을 내준 대신 확보한 전력은 이후 레닌 그라드 방위에 있어 커다란 자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근정적인 결과는 스탈린의 시야가 이곳을 벗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만 정신이 파려 있던 스탈린이 해당 지역의 방위 관한 전권을 최측근이 전 국방성 모로시 로프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소련 부서 전선 군 사령관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작전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패배의 책임을 지고 8월 초에 해임되었지만 종전 후인 1948년까지 주요 부대 지휘권을 연임하였을 만큼 큰 처벌은 다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민스크 전투에서 대패한 서부전선군 사령과 파블로프가 스탈린의 분노를 사서 총살당한 것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4. 희생 대신 얻은 것

그런데 바로 이때 레닌그라드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8월 초 전선 남부의 키예프 일대에 80여만의 소련군이 고립되자 독일군이 포의 섬 면전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물에 걸린 먹잇감이 워낙 크다 보니 독일 남부 집단군이 단독으로 작적을 펼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중부 집단군 예하의 제2기갑 집단과 제2군이 진격 방향을 90도 우회하여 키예프를 향해 400여 km를 남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군부의 후퇴 요구를 스탈린이 거부하고 사수를 선언하면서 소련군이 스스로 적진에서 고립을 자초한 형국이었지만, 적을 서둘러 처단하고 싶었던 히틀러의 적극적인 맞대응으로 인하여 전선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모스크바로 직지 하 느려던 중부 집단군은 반발하였지만 독소 전쟁 이전부터 키예프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총통의 명령에 따라야 했습니다. 

 

결국 독일군이 대거 재배치에 들어가면서 키예프 일대를 제외한 전선 전체가 진격을 멈춰야 했습니다. 

이처럼 전선이 정체된 틈을 타서 레닌그라드 남쪽에는 구가 강에서 네바 강에 이르는 외각 방어선과 그 안쪽의 페테 로프에서 콜트 스키를 연결하는 2중 방어선이 완공되었습니다. 더불어 북쪽에는 겨울 전쟁으로 국경이 이르는 거대한 방어선이 구축돼 상태였습니다. 

 

70여만의 소련군이 이거에 몰락한 키예프 전투는 결론적으로 레닌그라드는 물론 이거니와 소련의 생존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독일이 전진을 멈추고 키예프 점령에만 몰입되어 있는 동안 소련 여타 지역의 방어선은 깊게 파 여고 강화되었습니다. 러시아 제국 이래로 항상 그래 왔듯이 소련은 거대한 구토와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용기를 발판 삼아 방어에 필요한 천금 같은 귀중한 시간을 얻었습니다. 

70여만의 소련군이 일거에 몰락한 키예프 전투는 결론적으로 레닌그라드는 물론이거니와 소련의 생존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독일이 전진을 멈추고 키예프 점령에만 몰입되어 있는 동안 소련 여타 지역의 방어선은 깊게 파이고 강화되었다. 러시아 제국 이래로 항상 그래 왔듯이 소련은 거대한 국토와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용기를 발판 삼아 방어에 필요한 천금같이 귀중한 시간을 얻었다.

 

참고문헌: 전쟁사 남도현

2021.09.08 - [전쟁사] -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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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 [전쟁사] - 레닌그라드전투 (2)-대전쟁 최장의 싸움터

 

레닌그라드전투 (2)-대전쟁 최장의 싸움터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닌그라드 전투 2번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차례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소련의 반격(대응) 쾌속의 진격 1. 대국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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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전투 두번째이야기 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닌그라드 전투 2번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차례

  1.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2.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3. 소련의 반격(대응)
  4. 쾌속의 진격

1.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독일은 얼마나 빨리 소련의 기를 꺾어버리느냐에 독소전쟁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초전에 소련의 저항 의지를 신속히 무터 뜨려 항복을 받아내는 쪽을 택했던 것이었습니다. 

 

1년 전의 프랑스가 바로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프랑스는 단지 국토의 15퍼센트만 점령당하고 150만의 대군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7주 만에 항복했습니다. 

 

독일은 우선 진출 목표는 소련 국토의 20% 정도까지만 이르면 소련인 항복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구와 결제력의 70% 정도가 몰려 있는 곳이라 독일이 생각이 결코 잘못된 것이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바로사 계획은 예정 진출선까지 신속히 진출 함과 동시에 초반에 소련군 주력을 섬멸하면 충분히 완수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를 위해 독일은 침공군을 거대한 3개 병단으로 나누어 독립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독일은 주공이 정해지면 여타 병단이 조공이나 견제의 역할을 당 담하였지만 소련 침 곶전에서는 모두 주공의 역할을 담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소련이 단지 한 곳에 돌파구만 열어서는 점령을 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란 뜻입니다. 역설적으로 독일의 배후에는 절정 한 예비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독소전쟁발발후 레닌그라드봉쇄당시 이상대성당 건너편 독일 진지

 

이때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로 예정되었던 병단은 레프 원수가 지휘하는 북부 집단군이었습니다. 

예하 부대중 창을 담당하는 제4 기갑 집단군이 전선 가운데에 돌파구를 열고 진격하면 좌우에서 제18, 16군이 병행하여 돌격할 예정이었습니다. 

 

예하 부대 중 창을 담당하는 제4 기갑 집단군이 전선 가운데에 돌파구를 열고 진격하면 좌우에서 제18, 16군이 병행하여 돌격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진격로를 제1항 공군이 하늘에서 엄중히 호의 할 예정이었고 3개 집단군 중 유일하게 발트 해로 진입할 독일 해군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북부 집단군의 우선 목표인 레닌 그 아드를 점령하려면 발트해 지역을 거쳐 북진하여야 하는데, 진격 거리로만 따지면 우측의 중부 집단군보다 멀었습니다. 

전면의 관할 섹터가 작지만 문제는 진격할수록 우측면에 노출되는 부의가 커진다는 점이었습니다. 

가잔 좋은 방법은 최대한 빨리 내달려 측면으로 등장할지 모를 소련군이 레린그라드 방어에만 몰려들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력과 예비대가 부 졸한 것은 고민 잉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북부 집단군에게 함께 보조를 맞춰서 소련군을 압박해준 강력한 동맹국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북극의 저승사자라 불리우는 핀란드였습니다. 

독소전쟁 단시에 항상 병력이 부족하였던 독일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축국에 가담한 여러 중소 국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는데 핀란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전투력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핀란든가 추축 국에 가담한 것은 독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소련이 미워서였습니다. 

핀란드에게 소련은 영토의 10%를 빼앗아 간 원수였습니다. 

1939년 11월부터 이듬해 봄 까지 4개월간 이어진 이름바 겨울전쟁(Winter War)의 결과였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의 물리적인 피해 규모는 승리한 소련 쪽이 훨씬 컸습니다. 

 

소련은 핀란드 성인 남서의 절반 정도에 해당되는 병력을 동원하였음에도 핀란드의 유격 전술에 말려 핀란드군의 5배가 넘는 처참한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독소전쟁을 고려하던 히틀러에게 두 가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먼저 소련군을 규모 또한 큰 허야 한 군대로 얕보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전투에 능한 핀란드를 독일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독일과 핀란드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약 40여만의 핀란드군이 소련 침공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를 독소전쟁과 분리하여 계속 전쟁이라고 합니다. 

 

 

 

3. 소련의 대응

독일 북부 집단군을 맞상대할 소련군은 34개 사단으로 구성된 북서 전선 군이었습니다. 

이들은 원래 소련의 후방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사이를 담당하던 2선 급 부대였는데, 1년 전 발트 3국을 기습 점령하면서 서독으로 전진 배치된 상태였습니다. 

 

이 때문에 남쪽으로 독일의 동프로이센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타 전선 군에 비해 규모가 작아 그다지 전투력이 강하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배치를 한 이유는 우선 접촉 면적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 그라드에 이르는 소련 레닌그라드 주 일대는 페이푸스호를 비롯한 많은 장애물로 인하여, 독소전쟁의 여탸전선처럼 대규모 부대가 엉켜서 싸우기가 구조적으로 곤란 지형입니다. 

바르바로사작전계획지도 이미지 출처: 국방일보

결론적으로 이일 대는 독서 전쟁 내내 치열하였지만 겉으로는 가장 정적인 전선이 되었습니다. 

사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3년 가까이 계속될 수 있었던 유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여타 전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뒤에 북부 전선 군이 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지역 내의 전체적인 전력은 소련이 우세해 보였지만 이들의 위치도 애매모호하였습니다. 

핀란드가 존재 때문이었는데, 소련이 핀란드의 추축국 가담을 눈치챘다는 증거는 없지만 설령 독일과 핀란드가 한 배를 타지 않았더라도 미리 대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현제 최전선이 되어 버린 발트 3국 민심이 바 소적이라는 점도 부담이었습니다. 강제로 점령하여 합병한 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들이 소련 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독일이 이곳으로 진격하여 온다면 소련군의 입지에서는 적진 한가운데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화이었습니다. 해당 지역에서 징집한 병력을 북서 전선 군에 배치하였지만 소수였고 이들이 소련을 위해 열심히 싸워 줄지도 미지수였습니다. 

 

 

4. 쾌속 진격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남북으로 2,000km에 이르는 전 전선에서 소련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맹렬한 폭격과 포격 직후 전차들이 쇄도하여 들어갔습니다. 소련 병사들이 정신을 차려 앞을 보면 이미 독일군은 자신 들을 지나쳐 등 뒤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저항하다 산화하거나 얌전히 항복하는 것밖에 없었으며 소련의 공군도 1,200 여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미쳐 날아보지도 못하고 개전 첫날 지상에서 격파당하며 참사의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불과 35세 소련 해군 총사령관에 오른 쿠즈네초프가 개전 전장 전선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하여 내린 비상 경계력 덕분에 해군만이 간신히 참사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게 살린 소련 해군의 전력도 전선의 상황을 호전시키는 역할을 단 담하기엔 미약한 수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독소 전쟁 개전 첫날의 모음을 요약하자면 독일의 완벽한 대승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북부 집단군도 1차 목표인 레닌그라드로 향하여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선봉은 동 프로 센 일대에 시동을 켜놓고 대기하던 제4기갑 집잔 소고의 전차들이었습니다. 

3일 후 인 6월 25일 핀란드군이 북극의 초입인 폐차모에서 남쪽의 비푸리 이르는 1,000km의 국경 전역에서 진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덕분에 여차하면 남서쪽으로 전개할 수 도 있었던 소련 북부전선군이 이곳에만 집중을 해아 했습니다. 

소련 부서 전선 군은 호수, 강 저지대 습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지연전을 펼쳤습니다. 

라 세이니에서 한대의 kv-2 전차가 돌일 제6 기갑사단의 진격을 하루 동안 막아내는 놀라운 선선을 펼 지치고 했지만 전반적으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7월 7일 되었을 때에는 독일군 서두 부대가 소련군 12개 사단을 격파하고 500여 km를 진격하여 페이푸스 호 남단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면서 이제 레닌그라드까지는 200여 km가 남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대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3편을 기대해 주시고 

1편을 읽으셨다면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rokmc76.tistory.com/57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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