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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42 HIMARS

C-130 수송기로 운반 가능한 경량, 장거리 화력지원 무기입니다.



개발의 배경

성공적인 무기가 플랫폼을 바꿔서 응용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함대함 미사일이 지대함이나 공대함 미사일로, 공대공 미사일이 지대공이나 함대공 미사일로 운용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최근에는 궤도형 차체를 사용하던 자주포 등의 화력 장비가 차륜형 차체에 탑재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궤도형 차체는 지형 극복 능력이나 방어 능력 면에서 우수하지만, 전개 속도가 느리고, 중량이 무겁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동안 차륜형 차체는 방어력이나 지형 극복 능력에서 궤도형에 뒤진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이제는 기술의 발전으로 상당히 많이 극복되었습니다.

 


강력한 화력을 보유했지만 중량 등의 문제로 운반 가능 수송기에 제약이 있었던 M270 MLRS <출처 : 미 육군. Photo Credit: 1st Lt. Reymond Ramos, 313th FA>


미군의 대표적인 광역 제압 무기인 M270/M270 A1 다연장 로켓 발사 시스템(MLRS, Multiple Launch Rocket System)은 1976년 미 육군 항공 미사일 지휘부(AMCOM, Aviation and Missile Command Division)가 야포와 함께 운용할 로켓 무기를 위한 일반 지원 로켓 체계(GSRS, General Support Rocket Systems)를 요구하면서 개발되었습니다.
GSRS 사업은 나토 회원국인 영국, 독일, 프랑스가 참가하면서 공동 개발로 성격이 변했고, 사업 명칭도 다연장 로켓 체계(MLRS, Multiple Launched Rocket System)로 변경되었습니다. MLRS의 시제품은 1980년에 출고되었습니다. MLRS로 사업이 바뀌면서 로켓탄 구경이 227mm로 변경되었습니다. 1983년 3월 M270이라는 제식 번호를 부여받고 미 육군에 배치가 시작되었습니다.

 

M270 MLRS는 M2 브래들리 보병 전투차(IFV)의 차대를 활용한 유나이티드 디펜스(United Defence)가 개발한 LP M993 궤도식 차체에 227mm 로켓탄 12발이 탑재되었습니다. 궤도식 차체를 사용한 이유는 트럭 차체를 사용하면 지지대를 사용하여 차체를 고정하지 않는 이상 발사 반동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차체 반동은 로켓의 명중률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야전 부대와 함께 작전할 수 있는 야지 기동력을 요구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M270 MLRS는 걸프전 동안 이라크군으로부터 “강철비(Steel Rain)”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차체 중량 20톤, 전투중량 25톤에 이르는 중량은 냉전이 종식된 뒤 미 국방부가 중점을 둔 해외 신속 전개 부대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M270 MLRS는 1990년대 초반 미 공군이 운영하던 C-5A 갤럭시(Galaxy)와 C-141 스타 리프터(Starliter) 수송기로만 항공 수송이 가능했고, C-130 허큘리스(Hercules) 수송기는 탑재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최대 속도도 60km/h에 불과하기 때문에 차륜형 장갑차량과 속도를 맞출 수 없었습니다.

 

1996년, 미 국방부는 신개념 기술시범(ACTD, Advanced Concept Technology Demonstration) 프로그램에 따라 록히드마틴 미사일 및 화력 통제 사업부와 M270과 공통성을 유지하면서 C-130 수송기로도 수송이 가능한 차륜식 고기동 장거리 화력 체계 개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화력 체계의 목적은 포병, 대공방어 진지, 트럭, 경장갑 및 병력 수송 차량, 그리고 지원 병력과 지원 진지와 교전하고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운전석 앞 창문에 보호 패널이 붙은 초기 생산형 M142 HIMARS <출처 : 미 육군>


1999년 12월, 록히드마틴은 XM-142 고기동 포병 로켓 시스템(High Mobility Artillery Rocket System) 줄여 HIMARS 초기 프로토타입을 생산했습니다. 2000년 10월에는 뉴멕시코주 화이트 샌드 시험장에서 이 프로토타입을 사용하여 사거리 연장형 로켓탄 18발 사격 시험을 했습니다. 2002년 엔지니어링 제작 및 개발(EMD, Engineering Manufacturing Development) 단계가 완료되었습니다.

 

2003년 3월에는 미 육군과 해병대로부터 초기 저율 생산(LRIP) 계약을 수여받았습니다. 첫 LRIP 계약을 통해 미 육군은 발사대 89대, 미 해병대는 발사대 4대를 계약했습니다. 2004년 1월에는 두 번째 LRIP 계약을 통해 발사대 26개가 추가로 계약되었습니다. LRIP로 생산된 HIMARS는 2004년 11월 이라크 프리덤 작전에서 초기 운용 시험과 평가를 완료하였고, 2005년 1월 발사대 38대를 생산하는 세 번째 LRIP 계약을 맺었습니다.

 


M142 HIMARS는 신속하게 이동하여 정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출처 : 미 중부사령부 / photo by Sgt. Aaron Ellerman>


2005년, 미 육군은 M270에 개량형 화력통제 시스템(IFCS, Improved Fire Control System)과 개량형 발사관 기계 시스템(ILMS, Improved Launcher Mechanical System)을 통합한 M270A 1으로 개량을 실시했습니다. M142 HIMARS도 M270A 1에 준하는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받았습니다.

 

M142 HIMARS는 최종 시험이 끝난 후인 2005년 6월부터 노스캐롤라이나 포트 브래그(Fort Bragg)의 미 육군 제18 공수군단 제27 야전포병연대를 시작으로 정식 배치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첫 전율 생산 계약이 체결되었다. 미 해병대는 제14연대 제2대대가 2007년 7월부터 처음으로 HIMARS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특징

M142 HIMARS는 이미 증명된 두 가지 체계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습니다. 미군의 대표적인 중형 전술차량인 FMTV(Family of Medium Tactical Vehicles) 계열 5톤 트럭에 M270 A1 MLRS의 차체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결합되어 미 육군과 해병대의 신속 이동, 장거리 화력 지원 요구를 달성했습니다.

 

FMTV 계열 차량은 오스트리아 슈타이어(Steyr)의 12 M18 트럭을 기반으로 미 국방부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도록 개량되었습니다. 1996년부터 배치된 FMTV 계열 차량은 공통 차체를 기반으로 다양한 탑재 능력과 임무 구성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FMTV는 탑재 능력 2.5톤, 4X4 구동의 경-중형 전술차량(LMTV)과 탑재 능력 5톤, 6X6 구동의 중형 전술 트럭(MTV)으로 나뉩니다.

M142 HIMARS용 차체는 MTV 계열을 사용하며, M1140 발사 차량과 M1084 재보급 차량으로 구성됩니다.

MTV는 330마력의 캐터필러 C7 디젤엔진과 앨리슨(Allison) 3700SP 자동변속기를 장착했습니다.

 


M142 HIMARS 캐빈은 위에 출입구가 있다. <출처 : Public Domain>


차체 앞에 위치한 캡 안에는 지휘관, 운전수 그리고 사수를 포함하여 총 3명이 탑승합니다. 차체 지붕에 상하 개폐식 출입구가 있으며, 자체 방어용 기관총 거치가 가능하다. 캡 안에는 컴퓨터화된 화력 통제장치가 있어 좌표만 입력하면 사격 제원 산출에서 로켓탄 조준까지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1998년 7월 평가 중인 초기저율생산된 제품에 장착된 사격통제장비 <출처 : Public Domain>


M142 HIMARS는 경량, 고기동을 목표로 했습니다. 길이 7m, 폭 2.4m. 높이 3.3m, 최고 속도 100km/h, 주행 거리 480km의 제원을 가집니다. 로켓탄 6발을 모두 장착한 전투 중량이 16,200kg에 불과하여 C-130 수송기로도 충분히 수송이 가능합니다.  

 

M142 HIMARS는 M270 A1 MLRS가 운용하는 것과 동일한 무장을 운용합니다. 차체 후방에 탑재되는 발사 적재 모듈((LLM, Launcher Loader Module)은 M270/M270A 1용 227mm 로켓 6발 모듈 1개를 적재합니다.

 

발사대는 360도 회전하며, 재장전용 크레인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227mm 로켓 모듈 외에 MGM-140/MGM-164 육군 전술 미사일 시스템(ATACMS, Army Tactical Missile System) 1발을 적재할 수 있습니다.

로켓탄 모듈 1개 재장전에 소요되는 시간은 160초입니다.



운용 가능한 탄종은 M77 이중 목적 개량 고폭탄(DPICM, Dual Purpose Improved Conventional Munition) 자탄을 탑재한 사거리 32km의 M26 시리즈 로켓탄; M85 자탄 404개를 탑재하고 사거리가 60km로 연장된 M30 유도형 MLRS(GMLRS) 계열, 사거리 128km 이상의 MGM-140/MGM-168 육군 전술 미사일 시스템(ATACMS) 등이 있다. 발사 차량에는 발사 시 차체를 고정할 지지대가 없는데, 소량의 로켓탄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야 하기 때문에 주로 GMLRS를 사용하여 명중률을 높이고 있습니다.

M142 HIMARS 편제는 M142 HIMARS 발사대 1대, M1084 재보급 트럭 2대, 로켓탄을 탑재한 Mk.38 보급용 트레일러 2대로 구성됩니다. M1084 재보급 트럭은 화물칸에 6 연장 로켓 포트 2개를 적재하고, 후방에 재장전용 크레인을 탑재하고 있습니다.

 

M1084 재보급 트럭이 견인하는 Mk.38 재보급 트레일러도 6 연장 로켓 포트 2개를 적재합니다.

 

따라서, M142 HIMARS 발사대 1대는 기본으로 탑재된 6발 외에도 로켓탄 48발을 추가로 보급받을 수 있다. 재보급은 최근 도입되고 있는 오쉬코쉬 디펜스에서 생산하는 FMTV 대체용 차량 MTVR(Medium Tactical Vehicle Replacement) MK.37 재보급 차량(Resupply Vehicle)으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운용 현황
 
M142 HIMARS는 미 육군과 해병대 외에 일부 국가에 수출되어 운용되고 있습니다. 첫 해외 도입국은 싱가포르로 2007년 9월 HIMARS 도입을 요청했고, 2009년 말에 첫 물량이 싱가포르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아랍에미리트, 요르단이 도입했고, 2019년 3월 기준으로 캐나다, 카타르, 폴란드, 루마니아가 미국에 판매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M142 HIMARS는 비교적 최근은 2005년부터 정식 운용을 시작했고, 주로 중동에서 작전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정식 운용이 시작되기 전엔 2004년 11월 이라크 프리덤 작전에서 초기 운용 시험과 평가를 진행했고, 정식 배치 이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일부 운용되었습니다.

 

2015년 여름부터는 미 육군이 이라크에서 이슬람 국가(IS)와 전투를 위해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미 육군은 2016년 3월부터 요르단에서 시리아 내 IS 표적을 공격했고, 4월에는 시리아 인근 터키 국경에도 배치했습니다.

 

미 육군은 다영 역작 전(Multi-Domain Operation)을 위해 개발하고 있는 ATACMS를 대체할 장거리 정밀 화력(LRPF, Long Range Precision Fire)으로 불리던 신형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정밀 타격 미사일(PrSM, Precision Strike Missile)도 HIMARS에서 운용할 예정입니다. PrSM 프로그램은 2018 회계연도 2분기에 레이시언(Raytheon) 그리고 록히드마틴과 경쟁 개발 계약을 맺고 현재 설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ATACMS를 대체할 LRPF의 설계 개념 <출처 : 미 육군>


PrSM은 원래 최대 사거리가 499km로 예정되었지만, 미국이 2019년 러시아와 맺었던 중거리 핵무기 조약(INF) 탈퇴를 준비하면서 그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초기 버전은 지상이나 해상의 고정된 표적을 공격하지만, 나중에 지상이나 해상의 이동 표적 공격 능력도 보유할 예정입니다. M124 HIMARS는 PrSM 2발을 운용할 예정입니다.

 

이밖에도 미 국방부는 M142 HIMARS를 다양하게 시험했습니다. 2009년 3월, 뉴멕시코주 화이트 샌드 미사일 시험장에서 HIMARS 모듈 안에 AIM-120 암람(AMRAAM)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의 지상형인 SLAMRAAM 발사대를 통합하고 미사일 2발을 발사했습니다.  

 

2017년 10월, 다운 블리츠(Dawn Blitz) 훈련 동안 미 해군 상륙함 USS 앵커리지(Anchorage) 갑판에서 HIMARS 발사 시험이 있었습니다. 2018년 7월, 미 해군이 주최하는 격년제 국제 해군 훈련인 환태평양(RIMPAC) 군사 훈련에서 하와이주 카우아이(Kauai) 섬에 있는 하와이 미사일 시험장에서 GMLRS를 발사하여 미 해군 퇴역 상륙함 USS 라신(Racine)을 격침시키는 훈련을 했습니다.

 

 

변형과 파생형



M142 HIMARS는 어떤 변형이나 파생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파생형 개발 시도는 영국에서 한 번 시도되었습니다. 록히드마틴 UK와 인시스(INSYS)는 영국 육군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HIMARS와 유사한 경량 이동식 포병 무기 시스템/로켓(Lightweight Mobile Artillery Weapon System/Rocket), LIMAWS(R)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차체는 슈파 캣(Supacat) SPV600 6X6을 사용하고 HIMARS와 동일하게 227mm 로켓 6발 모듈을 탑재할 계획이었지만, 2007년 9월 취소되었습니다.

 

제원

- 제작사 : 록히드-마틴(Lockheed-Martin)  
- 구분 : 다연장로켓 발사기(MLRS)
- 승무원 : 3명
- 중량 : 16,200kg (227mm 로켓 6발 포함) / 13,500kg(227mm 로켓 제외)
- 제원 : 전장: 7m X 전고: 3.3m X 전폭: 2.4m
- 파워팩 : 330마력 캐터필러 C7 디젤엔진 + 앨리슨(Allison) 3700SP 자동변속기
- 운용 탄종 (사거리) : M26(32km), M26 A1/A2(45km), M30/31 GMLRS(84km), GMLRS+(120km), MGM-140 ATACMS(128km~)
- 재장전 시간 : 160초
- 최고 속도 : 98km/h (도로)
- 주행거리 : 48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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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3일 프랑스 파리, 어둠이 내린 시내에 총성과 폭음이 난무했습니다. 파리의 공연장과 축구 경기장 등 6곳에서 총기 난사와 자살폭탄 공격 등 최악의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한 것입니다. IS(Islamic State) 즉 이슬람 국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시민 130여 명이 숨졌습니다.

 

파리 테러가 처음 발생한지 46시간이 흐른 뒤, 프랑스는 행동에 들어갔다. 프랑스 공군의 전투기들이 스마트 폭탄을 만재한 채 시리아의 락까로 향했습니다. 락까는 이슬람 국가의 주요 근거지로, 이 공습의 선두에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최신예 전투기 라팔(Rafale)이 있었습니다.

 

공동개발에서 독자개발로

1970년대 중반, 프랑스군은 해군과 공군에서 운용 중인 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한 차세대 전투기 개발에 나서게 됩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서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특히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신형 전투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각 나라별로 전투기를 독자 개발하기에는 엄청난 비용과 기술적인 난제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유럽의 항공산업을 이끌던 프랑스, 영국, 서독은 의기투합해 유럽을 대표하는 차세대 전투기를 공동 개발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1983년 돌연 이 계획에서 탈퇴하고 독자 개발로 돌아섭니다. 프랑스는 항공모함에서도 운용이 가능한 차세대 전투기가 필요했지만, 다른 개발 국가들은 이러한 전투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공동개발을 할 경우 자칫 자국의 항공산업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도 큰 문제였습니다.

 

1986년 화려하게 등장한 라팔 A



유럽의 차세대 전투기 개발계획에서 이탈한 프랑스는, 1983년 차세대 전투기의 척도가 될 기술시범기 개발계획을 발표합니다. 1986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기술 시범기는 이후 라팔 A로 알려지게 됩니다. 프랑스어로 돌풍 혹은 광풍이란 뜻을 지닌 라팔은, 1986년 영국의 판보로 에어쇼(Farnborough Airshow)에 참가하여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됩니다. 특히 프랑스는 이 기회를 통해 라팔의 제작기술을 과시하는 동시에 세계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홍보활동을 벌였습니다. 1988년 프랑스 정부와 제작사인 닷소(Dassault) 사간에Dassault 본격적인 개발 계약이 맺어졌습니다. 이후 프랑스 공군과 해군의 작전요구를 반영한 시제기 4대가 제작에 들어갔고, 1991년 5월 프랑스 공군이 사용하게 될 단좌형 전투기인 라팔 C가 첫 비행에 성공한다. 라팔 C는 라팔 A와 달리 프랑스가 개발한 M88 터보팬(Turbofan) 엔진이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기체 크기도 줄어들었고 스텔스기능이 일부 적용되었습니다.

 

작지만 강력한 다목적 전투기



옴니 롤(Omni-role) 즉 다목적 전투기로 개발된 라팔은 공대공 및 공대지 임무 외에, 정찰 그리고 전투기끼리 공중급유까지 가능하며 심지어 핵 공격 능력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전투기의 크기 또한 동급 다른 전투기와 비교했을 때 작은 편에 속합니다. 특히 파생형 가운데는 항공모함의 좁은 갑판에서 운용되는, 함상전투기까지 있어 개발 당시부터 무게와 크기의 제약이 심했습니다.

유로파이터 타이푼이나 F/A18E/F 슈퍼호넷 전투기와 비교했을 때 라팔은 길이와 날개면적이 가장 작습니다. 그러나 무장 탑재능력과 추력대 중량비는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와 함께 소형 경량화와 스텔스 능력을 갖기 위해 개발 당시부터 첨단 신소재를 과감히 적용하였다. 동체와 날개 대부분을 복합재료로 만들었으며, 레이더 반사 면적이 큰 부분에는 레이더 흡수 재료를 사용해 생존성을 높였습니다. 라팔은F-22나 F-35나F-35 전투기와 달리 완전한 스텔스 전투기는 아니지만, 일부에서는 세미(Semi) 즉 반() 스텔스 전투기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항공기술이 집약된 전투기



프랑스는 전투기의 4대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기체와 항공전자장비 그리고 엔진과 무장까지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나라입니다. 이 때문에 라팔의 주요 구성품들은 프랑스의 최첨단 항공기술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라팔 전투기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RBE2 레이더는 다기능 레이더로 초기에는 수동 위상 배열 레이더로 개발되었지만, 이후 능동 위상 배열 레이더로 발전했습니다. 능동 위상 배열 레이더로 개량된 RBE2 레이더는, 최대 200㎞ 밖에서 적 전투기를 탐지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전투기의 기수 앞에는 FSO(Front Sector Optronic)라는 적외선 및 광학장비가 달려 있습니다. 

 

FSO는 주야간 공중전에 유용하게 사용되며, 특히 레이더에 잘 잡히지 않는 스텔스 전투기를 탐지하는데 유효한 수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밖에 적의 레이더를 교란하는 동시에, 공대공 및 지대공 미사일에서 전투기를 보호하기 위해 통합형 전자전 장비인 스펙트라(Spectra)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 프랑스군에 배치된 라팔

 



 2001년 프랑스군에 라팔이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라팔 A가 첫 비행을 한 지 16년 만입니다. 애초 프랑스군은 250대의 라팔 전투기를 도입하려고 했지만, 탈냉전과 국방예산의 감축으로 인해 210여 대만 도입하기로 결정합니다. 또한 공군형 라팔의 경우 단좌형인 라팔 C 보다는 복좌형인 라팔 B를 더 많이 구입합니다. 프랑스 공군은 걸프전쟁에 참전한 결과, 지상 공격 및 정찰 임무에 단좌기보다는 복좌기가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해군형 라팔인 라팔 M의 경우 복좌형의 양산이 계획되었지만, 예산 문제로 인해 취소되었습니다.

라팔은 F1(France 1)에서 F3R로 점진적으로 개량되고 있으며, F3에서 완전한 다목적 전투기의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라팔은 2002년부터 아프간 전쟁에 투입되었으며, 2007년에는 최초로 GBU-GBU-12 레이저 유도폭탄을 투하해 지상군을 지원했습니다. 이후 2011년 리비아에서 벌어진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으며, 공중전은 아니지만 활주로에서 이륙하는 리비아 공군의 경 공격기를 격추시키기도 했습니다.

 

 수출에 성공하다!



라팔은 지난 2015년까지 140여 대가 생산되었으며, 프랑스 공군은 2040년까지 주력 전투기로 운영할 예정입니다. 라팔은 개발 초기부터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습니다. 특히 미라주 계열 전투기의 경우 수출시장에서 성공한 전투기로 알려졌고, 라팔도 그러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수출은 요원했습니다. 라팔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여러 국가에서 판매활동을 벌였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고, 2011년 프랑스 국방장관인 제라르 롱게(GerardGerard Longuet)는 가격 경쟁력 약화와 해외 판매 부진으로 라팔 전투기 생산이 중단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2015년 이집트가 24대의 복좌형 라팔 DM 전투기를 구입하기로 결정했으며, 2016년 1월 6대를 인수했습니다.

 

이밖에 카타르 또한 24대의 라팔 전투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밖에 한때 세계 최대의 전투기 도입사업으로 주목받았던, 인도의 차기 다목적 전투기 사업에서 라팔은 치열한 경쟁 끝에 승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애초 인도 현지 생산이 포함된 126대 대신, 36대를 직접 도입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제원

 

전폭 10.90m 
전장  15.30m
전고 5.30m
자체중량 10톤(ton) 
최대이륙중량  24.5톤(ton)
최고속도 마하 1.8
 착륙거리 450m 
실용상승한도 50,000피트(f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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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이 Su-35(Sukhoi Su-35)는 러시아 수호이사가 제공권 확보  전폭기 용도로 개발한 다목적 전투기다. 나토명은 플랭커-E입니다.

개발 배경

Su-27의 현대화 필요성에 따라 Su-27M(T-10M)이라는 성능 향상 모델을 개발했는데, 이것이 바로 Su-35이다. Su-35는 정밀 유도무기를 사용한 지상공격능력을 보유한 본격적인 다목적 전투기로, 1988년 6월 28일에 1호기가 첫 비행을 했습니다. Su-35는 10대 정도의 테스트기가 제작되었으며, Su-37로 불리는 Su-35BM 모델이 비행을 하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 Su-35S가 러시아 공군에 납품되면서 생산 표준이 되었습니다.

 

역사

수호이 35는 동일한 이름은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기종인 수호이27계열 전투기 두 종을 말하며 첫번째 수호이35는 T-10M 계획을 통해 소련 시절 수호이27 개량사업에서 비롯된 수호이30과 함께 파생된 기종을 의미하며 현재 러시아가 운용중인4.5세대 전투기는 2000년대 이후 T-10BM이란 별개의 계획에 의해 수호이27을 바탕으로 개발되어 수호이35S라는 명칭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전투기들은 수호이27 계열기기는 하나 분파가 다른 친척 관계의 계열기라 보면 적당할 것이다. 첫번째 수호이35는 수호이 Su-30과 근접한 사촌 격의 전투기로 분류되는데, 두 전투기가 기체 특성이나 디자인 등에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선 첫 번째 수호이 35에 대해서 설명한다.

SU-35는 구 소련이 미국의 F-15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Su-27의 개량형으로, 1996년부터 실전에 배치된 최신 기종입니다. 수호이 35는 기존 수호이 27S를 개량하는 사업에서 파생되었고 수호이 30과 그 분파가 가까운 T-10M이라는 계획을 통해 사업이 진행됩니다.

 

이 사업은 수호이 27이 실전 배치된 1980년 초반부터 진행되어 왔고 1988년에 수호이 27M 시제기가 첫 비행을 한데 이어 1991년부터 이 기종의 발전형을 기반으로 양산형이 제작되어 수호이 35라는 명칭을 부여받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수호이 35의 본래 명칭은 수호이 27M로 수출을 목적으로 수호이 35란 이름이 붙게 되었으나 정작 수출 실적은 없습니다.

 

이 비행기는 세계 최초로 3단계 날개 형태( 카나드, 주날개, 수평 꼬리날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날개 형태는 기동성이 우수한 SU-27의 기동을 더욱 증가시켰습니다.

이는 추력편향 노즐을 장착한 701번 수호이 35,즉 수호이37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고 이전엔 구연하기 어려웠던 쿨비트 기동 등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기동을 능히 선보였습니다. 추력편향노즐을 장비한 수호이35 계열기들은 공중전에 매우 막강해서 근접 전시 F-22도 힘든 싸움이 될 거라고 평가될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우리나라에선 서울 에어쇼에 수호이 37이 참가해 이런 기동을 펼쳐 보임으로 90년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신비의 전투기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서울 올림픽 때 이들 기종이 우리 공군의 기종과 모의 공중전을 하기도 하는 등 우리와 교류가 있었던 기종이기도 합니다.

 

기동성 말고도 수호이 35의 개량 주체였던 전자장비 개량과 전천후 다목적화(멀티롤)도 이루어져 레이더도 기계식에서 N011M PESA 위상배열 레이더로 변경하여 이전까지 문제였던 레이더 해상도를 현대화 함과 동시에 추적 능력을 서방권 기체와 동급으로 끌어올리게 되며 보다 우세한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의 사거리 이점을 살리게 되어 BVR 교전에서도 서방권 기체와 대등하거나 근소한 우위를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멀티롤 기체로 거듭나기 위해 Su-27의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공대지 무장 체계를 현대화하여 SU-35는 러시아가 자랑하는 최고의 전투기로 인식되었고 각종 유도폭탄을 비롯하여 순항미사일의 플랫폼으로 전용되어 미국의 F-15E와 유사한 방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특징

Su-35는 슈퍼크루즈가 가능한 러시아 최초의 양산 전투기입니다. 파워업 한AL-35F(AL-31FM) 엔진을 탑재했으며, 공중급유 프로브와 통합 연료탱크를 장착했습니다. 구조도 경량화를 위해 일부에 알루미늄-티타늄 합금을 사용하고, 복합재료의 사용량을 늘렸습니다.

항전장비는 러시아 기체로서는 최고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주크-27 펄스 도플러 레이더를 채용하여 15개 표적을 동시에 추적할 수 있으며, 그중에 미사일 6개를 동시에 유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후방의 테일콘에 패조트론N-012 레이더를 장착하여 적기의 미사일 발사 여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글라스 콕핏을 채용하여 다기능 LCD 디스플레이 적용했으며, HOTAS 조종간을 채용하여 전반적으로 현대화했다. 플라이-바이-와이어 시스템도 종전의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개량했다. 하드포인트의 수는 총 12개소입니다.

1996년 4월 2일에 첫 비행을 한 Su-37은 Su-35에 추력변향 노즐을 추가한 기종으로 일반적인 전투기와는 차원이 다른 기동성을 지니고 있다. Su-37은 1996년 서울 에어쇼에서 공개되어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 바 있습니다. 러시아 공군은 채택하고 있지 않으나 인도에 공급하는 Su-30K의 일부 기체에 추력변향 노즐을 장착할 예정입니다.



운용현황

러시아 공군은 최초 물량으로 48대를 주문하여 2010년부터 Su-35S를 운용 중이다. 2011년 1월에는 2대를 추가하여 50대를 2015년까지 러시아 공군이 인수할 계획입니다.

 

변형 및 파생 기종

Su-27M/Su-35 기본형. 최초에는 Su-27M으로 알려진 Su-27의 현대화 모델.
Su-35UB Su-35의 복좌형. 수직미익을 확장했으며, 전방 동체는 Su-30과 유사하다.
Su-35BM Su-35의 업그레이드 모델. 항전장비를 현대화하고 기골을 강화했다.
Su-35S Su-35BM의 러시아 자국 모델. 러시아 공군의 주문으로 2009년 11월 첫 양산기를 생산하여 2010년 말 인도했으며, 2011년 5월 초도비행을 했다.
Su-37 플랭커-F Su-35의 추력편향 모델. Su-27M(Su-35)의 11번째 프로토타입으로 제작되었다. 엔진으로는 추력편향의 AL-31FU 엔진을 장착했다.

제원 정보

기종 Su-35
형식 쌍발 터보팬 다목적 전투기
전폭 15.30m
전장 21.90m
전고 5.90m
주익면적 62.04㎡
자체중량 18,400KG
최대이륙중량 25,300kg
엔진 AL-31F1 추력편향 터보팬(31,900파운드) × 2
최대속도 마하 2.25
실용상승한도 59,100피트
최대항속거리 3,600km
무장 30mm GSH-30 기관포 1문
하드포인트 12개소에 8,000kg 무장 탑재
항전장비  AESA레이더
승무원 1명
초도비행 1988년 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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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아 AMV 차륜형 장갑차

모듈식 설계를 채택한 핀란드 차륜형 장갑차입니다.



개발의 역사적 배경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바르샤바 조약국은 아니었지만, 소련의 영향력을 크게 받았고 군사 장비도 소련제 장비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초반 자국에서 개발한 XA-180 파시(Pasi) 차륜형 장갑차를 도입하면서 소련제 장비 의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XA-180과 개량형 XA-200 계열은 핀란드군 수요뿐만 아니라 스웨덴, 노르웨이 등 많은 국가에 수출되면서 성능을 입증받았습니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장비도 개량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1990년대 초반, 핀란드 국방군(FDF)은  XA-180 계열을 대체할 새로운 차륜형 장갑차를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형 장갑차량에 대한 연구는 1997년 시수 오토와 다른 핀란드 자동차 회사 발멧(Valmet)이 합쳐져 만들어진 국영회사 파트리아(Patria Plc)가 담당했습니다.

파트리아는 FDF의 요구 조건과 그동안 스웨덴, 노르웨이 등 XA-180 계열 차륜형 장갑차를 도입한 국가들로부터 받은 피드백을 검토했습니다. 파트리아는 FDF가 방어력이 높아진 병력수송 장갑차(APC)와 함께 다양한 변형과 파생형을 만들기 원했기에 방어력과 확장성을 보장하기 위해 8X8 구성을 최적의 설계로 제안했습니다. 

 

FDF는 파트리아의 연구를 검토한 후, 1999년 공식적인 개념 연구를 지시했고, 회사는 공식적으로 2000년부터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파트리아는 이미 자체적으로 요구 조건을 충족할 신형 차량을 연구 및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신형 차륜형 장갑차는 기존 XA-180 계열의 특징인 쉬운 유지 보수, 낮은 유지비, 범용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방어력 요구 조건과 구성을 수용하기 위해 모듈(module)식 설계를 채택했습니다. 모듈식 설계를 채택한 덕분에 차량 중량도 장갑 모듈 장착에 따라 최소 16톤에서 최대 27톤까지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습니다. 

 



파트리아는 내부적으로 신형 차륜형 장갑차를 장갑 모듈 차량이라는 뜻의 AMV(Armored Modular Vehicle)로 명명하고 있었습니다. 모듈화는 장갑, 무장, 장비 등과 엔진 등을 손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기본 설계부터 미래 확장성을 반영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듈화가 이루어지면 이에 맞게 설계된 다른 장비들의 호환성이 높아지며, 운영유지비가 절감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파트리아의 AMV 시제품은 2001년 11월에 완성되었습니다. FDF는 같은 해 12월에 평가용 샘플 2대를 주문했고, 2003년에 인도받았습니다. 평가를 거친 후, FDF는 1990년대 중반부터 파트리아가 개발하고 있던 포탑형 박격포 시스템인 아모스 AMOS(Advanced Mortar System)를 탑재한 AMV 24대를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FDF는 AMV를 장갑차량을 뜻하는 XA와 엔진 출력 360kW를 합쳐 XA-360으로 명명했습니다. 

 

AMV는 FDF의 주문에 앞서 2002년 12월에 폴란드 국방부가 690대를 주문하면서 수출이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1999년 나토(NATO)에 가입한 폴란드는 OT-64 SKOT 차륜형 APC 대체 차량을 찾고 있었습니다. 폴란드는 이미 개발된 차량을 라이선스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스위스 모와 그(MOWAG)의 피라니아(Piranha)와 오스트리아 슈타이어(Steyr) 판두르(Pandur), 그리고 파트리아의 AMV를 평가했습니다.

평가 결과 파트리아 AMV가 선정되었고, 폴란드 남부 실롱스크 주의 시 에미아 노비체 실롱스키에(Siemianowice Śląskie)에 위치한 로소마크(Rosomak) S.A에서 라이선스 생산하기로 했다. 폴란드군은 AMV를 KTO(Kołowy Transporter Opancerzony, 영어 Wheeled Armored Personnel Carrier) 로소마크(Rosomak, 영어 Wolverine)로 명명했습니다.

 

이 외에도 남아공에서 벳져(Badger)라는 이름으로 도입했고,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아랍에미리트가 도입하면서 수출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파트리아는 초기 모델인 AMV에 이어 2013년에는 탑재량, 방어력, 성능을 향상한 AMV-XP를 개발하여 다양한 요구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AMV-XP는 추가 장갑재를 장착하여 최대 30톤까지 전투 중량이 늘어났고, 엔진도 신형으로 교체했다. 2017년에는 해상 상황(Sea Stage)-3에서도 수상 주행이 가능한 전투 중량 28톤의 AMV28A를 발표했습니다.

파트리아는 XA-180과 비슷한 크기의 차량을 원하는 고객을 위해 AMV 개발 경험을 활용하여 파트리아 6X6이라는 파생형도 개발했습니다. 파트리아 6X6는 핀란드, 라트비아 그리고 에스토니아가 참여한 분대급 병력 수송을 위한 공통 차량 획득 프로그램의 기반이 될 예정입니다.

 



파트리아는 정찰, 지원 및 전투 임무를 위해 AMV를 무인차량으로 개발하고 있다. 2018년 9월 벨기에서 열린 유럽 지상로봇 시험(ELROB)에서 호송 임무용 무인 차량 능력을 시연하여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특징

AMV는 8X8 차륜형 장갑차가 가지는 일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종석 뒤에 엔진이 있었던 X-180과 비교하여 AMV는 차체 전면 우측에 엔진이 위치합니다. 그 결과 X-180이 가졌던 조종석 우측에 위치한 차 장석과 병력실 사이의 통로 대신, 조종석 바로 뒤로 병력 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종석은 위에 위치한 하나의 해치를 통해 접근이 가능하며, 해치에는 대형 잠망경 1개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주행 시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해치와 차체 사이에 보조 창틀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AMV는 길이 7.7m, 폭은 2.8m, 높이 2.3m이며, 중량은 장갑에 따라 기본형 16톤에서 최대 26톤까지 다양하게 구성이 가능합니다. 조종수는 차체 왼쪽 앞에 탑승하고, 지휘관은 그 뒤에 탑승하는 텐덤식 설계를 갖추고 있으며, 병력실에는 8명에서 최대 12명까지의 보병이 탑승할 수 있습니다. APC가 아닌 경우 포탑 등 부가 장비를 최대 10톤까지 실을 수 있습니다.

병력실은 의자를 제거하고 의무후송용 들것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병력실 후방에는 승하차를 위한 도어가 있고, 천장에 2개의 해치가 있습니다. 차체 위에 기관총 등을 장착한 원격 무장대(RCWS)를 장착할 경우 내부에 운용 콘솔과 함께 고장 시에도 외부를 살필 수 있도록 여러 개의 잠망경이 달린 큐폴라가 달립니다.

 

AMV의 가장 큰 특징은 운용자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장갑, 무장, 센서 등을 장착할 수 있는 모듈화 설계입니다. 이 덕분에 동일한 차체 구조와 엔진을 유지하면서도 APC, 통신, 지휘, 화력지원, 그리고 기관포를 장착한 보병 전투차(IFV)까지 다양한 구성이 가능합니다. 

 

AMV의 차체는 장갑재를 용접하여 만들어졌고, 전면과 측면에 장갑재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방어력 향상이 가능합니다. 차체 전면은 최대 30mm 기관포에서 발사된 날개 안정 분리 철갑탄(APFSDS)까지 방어하며 RPG-7도 방어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2008년 초, 폴란드 육군의 KTO 로소마크 장갑차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차체 전면에 RPG-7 공격을 받고도 무사히 귀환한 적이 있습니다.

 

측면은 기본형이 중기관총까지 방어가 가능하며, 급조폭발물(IED) 방어력도 우수하여 TNT 10kg에 달하는 폭발력을 견디며, 차체 하부는 지뢰 방어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차체는 파편 방지용 라이너도 적용되어 있으며, 탑승 병력을 화생방(NBC) 위협에서 보호하기 위한 방호 장치와 자동 소화 장비를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습니다.

 



파트리아는 AMV의 차체를 하나의 공통 플랫폼으로 만들지 않고, 용도별로 사용하기 좋도록 기본 모델, 천장을 높인 하이 루프(High Roof) 모델, 그리고 대형 무기(Heavy Weapon) 플랫폼으로 세분화시켰습니다. 기본 모델은 APC, IFV, 지휘차량, 장갑 앰뷸런스, 정찰차량, 유도미사일 차량, 장갑구난회수차량(ARRV), 그리고 120mm 네모(NEMO) 박격포 시스템 차량에 쓰이고 있습니다.

 

천장을 높인 하이루프 모델은 병력실 높이를 기본형보다 34cm 높인 것으로 지휘, C4I, 장갑앰뷸런스 또는 정비차량용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형 무기 플랫폼은 차체 강도를 더 높여 AMOS 120mm 박격포 시스템이나 105/120mm 기동포(MGS) 운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엔진은 핀란드용 차량은 480마력(360kW)의 스카니아 DC 12 디젤엔진 또는 543마력(405kW)의 스카니아 DI 12 디젤엔진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외 도입국의 요구에 따라 다른 엔진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변속기는 전진 7단. 후진 1단의 ZF 자동변속기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도로에서는 최대 100km/h의 속도로 주행이 가능하며, 325리터의 연료를 탑재하여 중량에 따라 600~850km를 달릴 수 있습니다.

 



8개의 바퀴는 독립형 유기압 현수장치를 장착하고 있으며, 8륜 모두 구동한다. 방향 전환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축으로 이루어집니다. 타이어는 피탄 시에도 주행이 가능한 런플랫 타이어를 채택했고, 중앙 타이어 압력 모니터링 시스템을 통해 타이어 압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운용국 요구에 따라 수상 주행이 가능하도록 차량 후방에 소형 워터제트를 장착할 수 있습니다. 워터제트를 장착한 경우 최대 10km/h의 속도로 수상 주행이 가능하며, 이 경우 차량 전면에 자동 접이식 파도막이를 장착합니다.

 

 

무장은 APC의 경우 7.62mm 또는 12.7mm 기관총을 장착한 RCWS를 장착할 수 있으며, 그 외에 운용국 요구에 따라 다양하게 장착합니다. 서방제 무장 외에도 아랍에미리트(UAE)처럼 운용국이 요구할 경우 러시아제 BMP-3 포탑을 달 수도 있다. 이 외에도 AMOS나 NAMO 같은 120mm 포탑식 박격포를 운용할 수 있는 등 무장 선택의 폭이 넓습니다.

 

제원(AMV 기본 모델)

개발 및 제작: 파트리아 자동차 유한회사
중량: 16톤(기본 장갑) / 27톤(최대 장갑)
길이: 7.7m
폭: 2.8m
높이: 2.3m
엔진: 스카니아 DC 12 공랭식 슈퍼차저 디젤엔진(480마력) 또는 스카니아 DI 12 수랭식 슈퍼차저 디젤엔진(543마력)
변속기: ZF 에코맨 7 HP902 자동변속기(전진 7단, 후진 1단)
현가장치: 독립식 유기압 서스펜션
최고 속도: 100km/h 이상(도로), 10km/h(수상)
주행 거리: 600Km(최대 장갑) / 850km(기본 장갑)
무장: 콩 스베 르크 프로텍터 RCWS 1문(APC)
탑승 인원: 승무원 2~3명 + 기계화보병 8~12명

 

운용 현황


AMV는 개발국 핀란드 외에 폴란드, 스웨덴,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UAE에서 운용하고 있습니다. 핀란드는 노르웨이 콩스버그(Kongberg)의 프로텍터(Protector) RCWS를 장착한 APC인 XA-360 62대와 AMOS 박격포 시스템을 탑재 박격포 차량인 XA-361 18대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폴란드는 AMV의 최대 운용국으로 KTO 로소마크라는 이름으로 라이선스 생산하여 배치하고 있습니다. 2002년 APC, IFV, 앰뷸런스 등 690대를 라이선스 생산하기로 결정했고, 그 후 추가 주문을 통해 1,197대를 보유할 예정입니다.

크로아티아는 2007년 84대를 주문한 후 2008년 42대를 주문하여 총 126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듀로 다코 빅(Đuro Đaković)에서 생산했다. 앞으로 엘빗의 30mm 기관포 탑을 장착한 AFV형 42대를 추가로 도입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슬로베니아는 2006년 AMV 30대를 주문하여 도입을 완료했고 SKOV 스바론(Svarun)으로 부르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NEMO 120mm 박격포 시스템을 탑재한 AMV도 운용하고 있다. 슬로바키아는 2017년 11월 개량형인 AMV-XP 81대를 주문했다. 

스웨덴은 2009년 113대를 주문했지만, 스웨덴 법원이 경쟁 도입을 요구하면서 도입 평가를 다시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 8월 AMV를 도입하고 다시 결정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2007년 벳져라는 이름으로 현지 라이선스 생산을 결정했고 데넬 랜드 시스템(Denel Land Systems)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병력수송차, 지휘, 화력지원, 박격포 탑재, 그리고 대전차 차량 등 다섯 가지 차량 238대를 도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UAE는 2008년 15대를 주문하면서 운용국이 되었습니다. 일부 차량은 NEMO 박격포 시스템을 탑재하고, 나머지는 BMP-3 포탑을 탑재했습니다. BMP-3 포탑 탑재형은 공간 확보를 위해 차체가 약 0.4m 길어졌다. 2016년에는 추가로 40대를 추가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AMV가 제안되었지만 실패한 적도 있다. 2015년 미 해병대의 AAV-7 상륙장갑차 대체 사업인 상륙 전투차량(ACV) 1.1 사업에서 록히드마틴은 하복(Havoc)이라는 이름으로 AMV를 제안했지만, 록히드마틴이 협력 계약을 파기하고 입찰을 포기하면서 이탈리아 이베코(IVECO)와 손잡은 BAE 시스템이 사업을 따냈습니다. 호주 육군이 진행한 전투정찰차량 도입 프로그램인 LAND 400 Phase 2에서는 최종 단계에서 독일-네덜란드 합작 복서(BOXER)에 패했습니다. 

 

 

2020년 12월 기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해외 경쟁 사업은 일본 육상자위대의 96식 APC 대체 사업이다. 원래 일본 고마쓰(Gomatsu)가 대체 차량을 개발하고 있었지만, 환경 규제에 맞는 디젤엔진 개발 등으로 인한 비용 상승을 이유로 개발을 포기하면서 새로 공개경쟁으로 사업이 진행되면서 일본 미쓰비시중공업(MHI)의 8X8 장갑차, 미국 제너럴 다이내믹스 랜드 시스템(GDLS)의 LAV 6.0 그리고 파트리아의 AMV-XP가 경쟁하고 있습니다.

AMV를 도입한 국가들 중 일부는 전투 임무에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곳으로 폴란드가 있는데, 2007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장갑 앰뷸런스(MEDEVAC)를 포함하여 50대의 KTO 로고마크 장갑차를 운용했습니다.

 

2008년에는 탈레반의 RPG-7 공격을 받았지만 무사히 귀환한 기록이 있고, 몇 차례의 IED 공격에서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KTO 로소마크에서 첫 희생자는 2009년 차량 하부에서 폭발한 IED로 인해 차량이 전복되면서 차체 밖으로 몸을 내놓고 있던 병사가 숨지면서 발생했습니다.

 

 

폴란드는 2008년에서 200년까지 아프리카 차드에 유럽연합군 소속으로 파견되어 16대의 KTO 로고마크를 운용했습니다. 예멘 내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연합군으로 참가하고 있는 UAE는 BMP-3 포탑 장착형 AMV를 현지에서 운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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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 세계대전 최강 전차라 불리는 티거 전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42년 8월 29일, 4대로 구성된 독일의 소규모 전차부대가 레닌그라드 동남부의 소도시인 므가(Mga)의 기차역을 출발하여 인근 고지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 뒤로 소수의 인원을 태운 차량이 함께 이동하였는데, 전투 병력은 아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차량에는 헨셀(Henschel)에서 파견 나온 민간인 기술자들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진격에 나선 4대의 전차들은 헨셀이 야심만만하게 만든 신형 전차로 이번이 최초의 실전 투입이었습니다.

 

기술진들은 그 결과를 측정하기 위해 독일 본토에서 1,5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최전선까지 온 것입니다. 비록 전차들은 움직임이 느렸지만 후속한 차량들이 곧바로 쫓아가기 어려울 만큼 움푹 파인 대지를 거침없이 가로질러 순식간에 고지 위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허겁지겁 고지 위로 쫓아간 기술진들이 보게 된 상황은 몹시 실망스러웠습니다. 4대의 전차 중 3대가 더 이상 작전을 펼칠 수 없는 상태였는데, 적의 공격에 의해 파손된 것이 아니라 엔진이나 변속기에 고장이 발생하여 기동이 불가능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무런 전과 없이 1대만 출발하였던 곳으로 귀환하였고 적진에 방치된 나머지 3대는 우여곡절 끝에 회수되었습니다.

이처럼 최초 실전에서 한심한 모습을 보여준 전차가 독일 6호 전차, 즉 너무나도 유명한 티거(Panzerkampfwagen VI Tiger Ausf.E)다. 몇 달 간 독일군 전차 부대원들에게 들려오던 ‘기적의 신형 전차가 등장할 것’이라는 소문에 비해 그 시작은 퍽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베를린 정책 당국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망신스러운 데뷔와 달리 이후 티거는 ‘제2차 대전을 상징하는 전차’라는 명성을 얻으며 역사에 남았습니다.

 

일선의 신형 전차에 대한 요구

 



현대 의미의 전차를 처음 만든 건 영국이지만 전차를 지상전의 왕자로 만든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제2차대전 당시 독일은 무기사에 길이 남을 여러 종류의 전차를 등장시켰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독일은 제1차 대전에서 패하면서 중화기의 보유와 개발에 제한을 받았던 나라다. 따라서 1934년 히틀러가 재군비를 선언한 후 본격적으로 전차 제작에 나섰을 때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제일 먼저 제작한 1호, 2호 전차는 차마 전차라고 언급하기 부끄러울 정도였고 전쟁 직전에 도입이 개시된 3호, 4호 전차도 주변국의 경쟁 전차를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전차의 크기를 기존에 설치된 교량을 건널 수 있는 중량까지로 제한하였고 이런 기준에 맞추어 전차를 개발하다 보니 화력과 방어력 일부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독일의 전차들은 선봉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다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전차의 성능보다 전차 부대의 편제 및 운용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여러 지휘관들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일선에서는 신형 전차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었는데 그간의 전과를 분석한 당국도 전차의 생존 능력을 높이려면 결국 화력과 방어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1941년 초, 육군 병기국은 4호 전차를 후속할 신형 전차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유수의 무기 업체들이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던 초기에는 중량 30톤 내외에 75mm구경의 포를 장착하는 이른바 VK3601이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기동력을 희생하더라도 강력한 화력이 필요하다며 개발에 적극 개입하자 50톤이 훨씬 넘는 VK4501로 개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방어력 때문이었지만 대구경 포를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전차의 크기가 커져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헨셀과 포르셰가 최종 경쟁에 나섰지만 88mm 56구경장 포와 75mm 70구경장 포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독일의 전성기라서 시간적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VK4501 프로젝트가 이제 막 개시된 1941년 7월, 동부전선에서 들려온 소식은 독일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소련군의 T-34와 KV 전차가 기존 독일군의 모든 전차들을 능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신형 전차의 개발을 앞당겨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이때 노획한 소련의 전차들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습니다. 사실 티거는 이후 등장한 5호 전차 판터(Panther)나 6호 전차 B형 쾨니히스 티거(Königstiger)와 달리 전통적인 독일의 전차 형태를 이어받은 마지막 작품입니다.

특히 차체의 각진 모양이 4호 전차와 비슷한데 무게가 2배 가까이 나가므로 한마디로 크기를 확장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에 걸맞은 동력장치, 현가장치가 제작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고민은 끝까지 완벽하게 해결되지 못하였고 결국 티거 전차의 약점으로 남게 되었지만 그나마 노획한 소련 전차들로부터 많은 기술적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시제품이 1942년 4월 20일, 생일을 맞은 히틀러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각종 실험 결과 헨셀의 VK4501(H)이 선택되었고, 그해 중반에 전선 투입을 목표로 양산에 착수하였습니다.

어쩌면 전쟁 중이라서 가능할 수 있었던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개발과 양산 과정이었습니다. 원래 ‘티거’는 포르셰가 자신들의 프로젝트였던 VK4501(P)에 붙인 예명이었는데 재미있게도 이것이 이후 6호 전차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승리만 계속하다가 1941년 겨울을 기점으로 진격이 막힌 독일군은 티거를 운용할 별도의 부대를 창설하였을 만큼 새롭게 등장한 중전차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습니다.

 

화력과 방어력이 답

가장 먼저 창설된 부대 중 하나인 제502중전차대대 소속의 4대가 가장 앞에 소개한 전투에 투입되면서 티거는 전쟁사에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사실 데뷔는 창피하게 막을 내렸지만 이는 하루라도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하던 히틀러의 조급증이 벌인 결과였습니다. 제대로 된 실험도 거치지 않고 실전에 투입되었던 것이었고 당시 전장 환경도 티거가 작전을 펼치는 데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점을 보완한 티거가 위력을 입증하는 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1942년 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밀려나던 추축국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제501중 전차대대가 이듬해 5월까지 신형 M4을 비롯한 150여 대의 미군 전차를 격파한 것이었습니다. 실패로 시작한 동부전선에서도 빛을 발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대규모 전차들이 자웅을 겨룬 기갑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1943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티거는 상대방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공군의 지원 없는 전차부대 간의 원거리 교전은 일방적이라 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주포의 사거리와 화력 차이가 크다 보니 티거는 상대방의 사거리 밖에서 유유자적하게 공격할 수 있었던 반면 상대는 티거 격파를 위해 최대한 빨리 근접하여 치고 들어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위험했습니다.

방어력도 티거의 위력을 더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통적인 독일 전차의 디자인을 따른 티거는 경사장갑이 아니었음에도 전면 장갑이 100mm에 이르러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했습니다. 티거의 명성은 뛰어난 공격력으로 인한 것이지만 어지간한 상대의 공격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방어력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단 생존은 승리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데, 방어력이 나쁘면 나의 생존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2차 대전을 상징하는 전차가 되다. 

 

화력과 방어력 대신 포기했던 기동력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크게 느리지 않았고, 티거가 본격 활약하기 시작한 1943년부터 독일이 수세에 몰리면서 전쟁 초기와 같은 대대적인 공세를 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비 요소가 많은 복잡한 구조는 야전에서 곤란을 안겨주었고, 특히 엔진과 변속기의 성능은 그 당시 기술로 더 이상 개량이 어려웠습니다.

미군과 소련군의 주력으로 활약한 M4와 T-34가 수만 대씩 생산되었던 것과 비교하기 곤란하게도, 티거는 겨우 1,347대 생산에 그쳤지만 그 작은 수치로 제2차 대전을 대표하는 전차가 되었다는 점이 티거의 위대함일 것입니다. 이는 두말할 필요 없이 놀라운 전과 때문입니다. 기갑전에서 약 1대 5 정도의 교환비를 보인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1대 10 이상의 놀라운 전과를 얻은 부대도 있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치열한 기갑전이 연속으로 벌어졌던 동부전선에서, 1943년 한 해 동안 소련군이 손실한 기갑 차량이 약 22,000대였는데 이 중 약 5,000대가 티거에 의해 격파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당연히 전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에이스들 대부분이 티거를 이용했는데, 100대 이상의 적 전차를 격파한 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나 미하일 비트만(Michael Wittmann)이 대표적인 인물이며

이후 등장한 쾨니히스티거가 더 강하다는 평가지만, 전쟁 말기에 등장하여 인상적인 전과를 올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였다. 반면 티거는 역사상 개별 전차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전과를 올린 전차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차만 가지고 전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도 없지만 전선에서 마주한 상대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처럼 다가오는 대단한 무기였다. 무기사에 길이 빛날 명작임에 틀림없습니다.

 

제원

중량 54톤 / 전장 8.45m / 전폭 3.56m / 전고 3.00m / 승무원 5명 / KwK 36 L/56 88mm 전차포 / MG34 기관총 2정 / 항속거리 150km / 최대속도 45.4k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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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미국에 B2 스피릿 스텔스 폭격기 이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작국가 미국
제작사 노스롭 그루먼
구분 작전기

 개발배경

B-52를 대체할 스텔스 폭격기의 개발계획은 1978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록히드사와 노스럽 사가 경쟁을 벌인 끝에 1981년 10월에 노스럽사가 주계약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존재 사실조차 공개하지 않았을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했으며, 1988년 4월 의회의 강력한 요구로 상상도를 공개했었습니다. B-2의 시작 1호기는 같은 해 11월 22일에 팜데일에 위치한 공군 공장에서 롤 아웃하여 일반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특징

B-2는 종래의 다른 기체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닌 전익기로, 날개의 뒷전이 W자형으로 다듬어져 있습니다. 레이더 전파의 반사율을 나타내는 레이더 반사 단면(RCS)을 극소화하고 엔진에서 나오는 적외선 방출을 억제하는 스텔스 성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항공역학 성능을 높인 결과 B-1을 능가하는 항속 성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전익 형태를 선택하게 되면 미익과 동체 엔진 나셀과 같은 RCS 증가요소를 배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날개의 중간 부분에 조종석과 폭탄 창, 각종 장비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같은 스텔스 성능을 추구하면서도 F-117A가 다면체로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B-2의 경우 매끄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은 컴퓨터를 이용한 CAD/CAM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큽니다.

특이한 주익 평면형은 전파를 강하게 반사하는 모서리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 폭탄 창의 문을 포함한 개폐부, 공기 흡입구, 노즐 등을 모두 주익의 앞전 후퇴 각도인 33도와 일치하도록 설계했으며 또 평면상의 전파 반사는 주익의 앞전 후퇴각에 대응되는 4군데의 로브로 한정됩니다.

엔진은 F110에서 발전한 F118 터보팬 엔진(애프터버너 생략)을 장착했고 엔진의 배기가스는 차가운 바깥공기와 섞여 온도를 낮춘 후 날개 위쪽에 설치된 배기구를 통해 배출되므로 적외선 탐지를 피할 수 있습니다. 기체구조는 주로 복합재료를 사용했으며 외판 자체는 레이더 흡수 재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1983년경 미 공군은 당초 고고도 침투용으로 개발된 B-2에 저공침투 능력을 추가했으며, 저공비행의 하중 증가에 대처하고자 토크박스 구조를 근본 적적으로 변경했습니다. 따라서 원래 W자형이던 날개의 뒷전 모양이 2중 W자형으로 바뀌었습니다.



B-2의 비행제어 시스템도 종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설계되었습니다. 외익부 뒷전에는 4개 조종 익면이 마련되어 있는데, 안쪽의 3개 익면은 엘러본으로서 롤과 피치를 제어합니다. 가장 바깥쪽은 드래그 러더(drag rudder: 항력 방향타)라고 불리며 어느 한쪽을 상하로 열어 저항을 증가시켜 기수의 방향을 바꾸는 요 제어(Yaw Control)를 담당합니다.

 

또한 양쪽의 드래그 러더를 동시에 열면 스피드 브레이크의 역할을 하고, 엘러본은 플랩의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중앙 날개의 뒷전에 있는 삼각형 익면은 종방향 트림과 돌풍 하중 경감을 분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복잡한 조종 익면을 제어하기 위해 4중 디지털 플라이-바이-와이어를 이륙, 착륙, 전투, 이 세 가지 모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B-2의 최대속도는 마하 0.8 정도의 아음속으로 비교적 저속으로 순항하며 항속거리는 무장 16,919kg 탑재시 hi-hi-hi의 경우 11,680km, hi-lo-hi의 경우 8,340km, 무장 10,886kg 탑재시 hi-hi-hi의 경우 12,230km에 달하고 있습니다.

기체의 중앙부에는 좌우 2개의 폭탄 창이 있고 회전식 발사대가 각각 1기씩 설치되어 있습니다. 주무장으로는 SRAM(단거리 공격 미사일),AGM-129 ACM 등을 모두 16발까지 탑재할 수 있고 그밖에 자유낙하 핵폭탄, 범용 폭탄, 유도폭탄 등을 최대 18,144kg까지 탑재할 수 있습니다.

B-2의 본래 임무는 소련의 이동식 전략 미사일을 격파하는 것으로, 목표물 수색용으로 노즈 랜딩기어실의 좌우에 APQ-181 위상배열 레이더를 장비하고 있습니다. APQ-181 레이더는 레이더 현대화사업(RadarModernization Program)에 따라 현재 J-밴드의 AESA 레이더로 업그레이드했습니다.

B-2의 1호기(AV-1)는 1989년 7월 17일에 팜데일에서 초도비행을 실시했고 에드워드 공군기지로 옮겨 비행 테스트를 시작했습니다. 시제기는 6대를 제작했으며, AV-6은 1993년 2월에 비행했고, 테스트용 기체도 테스트 종료 후 개조작업을 거쳐 실전부대에 배치했습니다.

 

 운용현황

미 공군은 당초 B-2 폭격기를 132대 도입할 것을 요구했는데 획득비용이 1대당 5억 달러까지 치솟자 의회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21대 만을 생산하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미주리주 화이트맨 기지는 유일한 실전부대인 제50 폭격 비행단(393BS/715BS)을 편성했고, AV-8을 1993년 12월 17일에 인수했습니다. 워낙 기체가 고가인 탓에 각 기체에는 주 이름을 딴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B-2는 코소보 항공전에 투입되어 최초로 JDAM을 투하하면서 첫 실전 경험을 많이 쌓았습니다. 이후 아프간 대테러전쟁과 2차 걸프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특히 아프간에 투입된 B-2A는 중간 기착 없이 무려 44시간 18분을 비행하여 최장시간 실전 폭격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2008년 2월에는 괌 앤더슨 공군기지에 착륙하던 B-2 폭격기 한 대를 착륙 사고로 잃는 사고도 발생했습니다.

변형 및 파생 기종


블록 10 초도생산형으로 핵무기 전용사양. 재래식 무장으로는 범용폭탄만을 투하할 수 있을 뿐이다. 1990년까지 10대를 생산했습니다
블록 20 재래식 무장의 운용이 가능한 사양으로 CBU-87/B폭탄과 범용폭탄을 운용합니다.
블록 30 JDAM과 JSOW 등 정밀유도무기를 운용할 수 있는 사양으로, AV20 스피릿 오브 펜실베이니아부터 적용했고. 기존의 블록 10/20 양산기들도 1995년부터 블록 30 사양으로 개수하기 시작하여 2000년 업그레이드를 종료했습니다.

제원 정보

 


 

기종 B-2A Block 30
형식 스텔스 폭격기
전폭 52.12m
전장 20.9m
전고 5.1m
주익면적 460㎡
자체중량 71,000kg
최대이륙중량 171,000kg
엔진 GE F118-GE-100 터보팬(17,300파운드) × 4
최대속도 764km/h
실용상승한도 50,000피트
최대항속거리 10,400km
무장 AGM-154 JSOW 16발
250파운드급 GBU-39 SDB 216발
500파운드급 GBU-30 JDAM 80발, 750 파운드급 CBU-87 36발, 2,000파운드급 GBU-32 JDAM 16발
B61/B83 핵폭탄 16발
18,144kg 탑재 가능
항전장비 APQ-181 레이더
승무원 2명
초도비행 1989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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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SAS(Special Air Service)는 1941년 창설된 영국 육군 특수부대이며, 대게릴라전, 직접 타격, 대테러작전, 인질구출, 은밀한 정찰을 포함한 다양한 작전을 수행합니다. 대테러부대의 아버지, 최초 위의 현대전 대테러부대로 불리는 부대이며 과거부터 쌓아 온 여러 실적 데이터와 작전 경험을 토대로 현대까지 특수부대의 최고봉 중 하나로 언급되며 그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명불허전 세계 최고의 대테러부대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2000년대 이후로는 USSOCOM 이 넘사벽으로 어마어마한 기량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JSOC  산하의 티어 1 부대에게 명성이나 실력에 있어서 밀려버린 감이 크며 갈수록 그 격차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영국 해군 특수부대인 SBS( Special Boat service)와 함께 영국 특수부대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 SAS는 영국 특수전사령부 소속 제22공수특전(SAS)연대와 영국 육군 제1정보 감시정찰(ISR) 여단 소속 제21, 23 공수특전(SAS) 연대(상근예비역)로 구성됩니다. SAS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창설되어 다양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해체되었으나, 평화시에도 특수부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47년 향토예비군 부대에 파트타임 상근예비역 부대인 제21공수특전(SAS) 연대가 창설되었고, 추가로 현역 특수부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52년 제22공수특전(SAS) 연대가 창설되었습니다. 1980년 주영국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 님로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습니다. SAS는 세계 각국의 현대 대테러 특수부대에 큰 영향을 끼친 군 대테러 분야의 시조입니다.

영 국영 방 국가의 일원인 호주에는 SASR , 뉴질랜드에는 NAZSAS 가 있으며, 이웃 프랑스는 전후 SAS를 모토 삼아 제11 충격 낙하산 부대 (11E CHOC)를 창설했으며, 현재는 제1 해양 보병 낙하산 연대 가 존재하고 이들의 기량이나 활약상은 원조 못지않습니다. 


https://youtu.be/oefEQ5 TNz0 Q


특징

대테러 전술

이들은 1960년대 이후로 테러리스트와 대테러전에 관한 개념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인질구출이나 테러 진압작전의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북 아일랜드에서 IRA와의 시가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북아일랜드에서 실전 경험 등을 통해 대테러전에서 최고급의 기량을 쌓았으며, 외국 대테러부대와 잦은 교류를 통해 대테러전 노하우를 공유,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977년에 있었던 GSG-9의 "마법의 불꽃" 작전 당시 SAS 고문관들이 섬광탄을 제공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1980년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님로드 작전) 당시, 인질 1명이 사망하자 과감하게 진입해서 테러범들을 전원 제압하고 나머지 인원을 모두 성공적으로 구출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때 SAS가 입었던 민무늬 검은색 전투복과 방독면 MP-5 기관단총 같은 장비들은 군사무기 마니아들에게는 SAS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였고 그들이 보여준 진압작전 노하우와 장비들은 다른 나라 대테러부대들도 널리 받아들이는 일종의 유행이 되었습니다.


영국 지배 하의 홍콩에서 창설된 경찰특공대 비호대(Special Duties Unit)도 영국에서 초빙된 SAS 교관의 훈련을 통해 탄생했습니다.


 

 


심리전 전술

SAS는 또한 심리학 전문가를 반드시 작전에 투입하며, 이는 민사작전과 적지에서 게릴라 편성 및 우호적인 세력 형성에 크나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이라크에서도 자유 의용군 편성에 큰 역할을 했으며, 알려지지 않은 전쟁에서도 많이 활약했다고 하고 특히 오만 내전 당시 심리학 전문가가 대거 투입되어 공산군에 들어간 민간인들을 설득하여 정부군에 편에 서게 하기도 했습니다. 심리학 전술이 실패한다면 심리학 전문가들은 짐만 된다는 일부 밀덕들의 주장이 존재하는데... 과연 그럴까? 아래 예시를 보자면

포틀랜드 전쟁에서도 심리학 전문가가 투입되어 아르헨티나 군 후방에서 혼란을 주려고 했지만 타고 가던 헬리콥터에 역풍이 불었고 움직이던 SAS 대원 전부가 20kg에 가까운 군장+박격포 부속품+박격포탄+중기관총+중기관총탄+기타 등등(...)을 지고 있어서 작전이 8시간이나 지연되는 바람에 취소되었습니다. 그 심리학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던 SAS 지역대는 아르헨티나 공군 전진기지 습격작전을 위해 대기하던 다른 SAS 지역대와 합류하여 함께 아르헨티나군의 폭격기 파괴 임무에 투입되었고,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현대화된다고 해도 군대는 결국 인간으로 이뤄진 조직이고, 병사들을 모두 기계로 바꾸지 않는 한 심리학적인 요인으로 전투에 패배하는 경우 역시 잔존할 것이기 때문에 심리학자가 단순히 낭비가 아닌, 훌륭한 전략적 요소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군기

한편 전시가 아닌 평상시의 훈련 강도와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라서 반대급부로 풀어줄 때는 군기가 거의 개판 5분 전으로 흐트러진다고 합니다. 물론 전문가들이라 어느 정도 선은 지키며, 쉴 때는 확 쉬고 할 때는 확 하는 식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레벨이 다른 군인들이 보기에는 거의 똘끼에 가깝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한 예로, 1962년 그린베레 교환 장교로 SAS에서 1년간 훈련을 받았던 미군 장교 찰스 베크 위스는 난장판이 된 내무실 바닥에 앉아서 휴대용 가스난로로 차를 끓이던 한 SAS 대원에게 주변 정리정돈 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가 "어쩌라고"라는 대답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력과 독특한 훈련 군기 등을 접하고는 훗날 1977년 델타 포스가 창설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미군 특수부대원들의 군기도 어느 정도는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베크 위스의 사례도 당사자들에게는 별일 아닐 수 있는 것이, SAS는 대원들 간에 계급이 없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SAS 대원이 되는 순간부터 계급을 반납하고 SAS 대원(Trooper)으로만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무 중 자신의 본래 계급은 그대로 적용되고 실제 진급도 가능하지만 이는 연대 내부에서는 적용되지 않으며, 연대에서 전출된 다음에야 자신의 정상적인 계급장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단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는 부사관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장교들은 아예 차출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계급 반납이 없습니다. 대원의 경우 의무적인 연대 내 복무 기한을 마치고 짤 없이 한번 방출된 이후로는 추후 본인 의사에 따라 다시 SAS에 부사관으로 자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무작정 군기를 들여 쉬는 중에도 군인들에게 상시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것보다는 체계적인 훈련과 그에 비례한 정신적 보상이 군사의 숙련도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훈련시간 외에 군기를 집어던진 똘끼로 가득 찬 행동을 할지언정 실전으로 돌입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흉기로 탈바꿈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풍문일 뿐인 데다가, 저 일화 자체도 1970년대의 증언 담에 한국군의 내무부 조리에 학을 뗀 밀덕들의 선망이 뒤섞인 카더라 수준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영미권 군대 분위기 자체도 그렇게나 경직된 편이 아니고 사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사생활이 아닌 업무체계는 제 아무리 특수부대라 하더라도 철저히 군의 결정사항을 따릅니다.

다만 문화 면에서 SAS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델타 포스가 복장이나 용모, 내무생활 면에서 상당한 자유도가 보장되는 것으로 보아 SAS 역시 평균적인 영국군보다는 자유도가 보장될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겠습니다. 델타 포스가 정리, 지각 등 기본적인 예의 차원에서 데브그루 보다 까다로운 편임을 감안하면 SAS 역시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선 엄격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

제2차 세계대전

SAS는 중동 지역의 영국 육군 코만도 부대가 연이은 전투로 궤멸 직전에 이르러 1941년 7월 중동 지역 5개 코만도 부대 잔존 병력을 1개 코만도 부대(중동 코만도 부대)로 축소 개편하는 과정에서 제8코만도 소속 데이비드 스털링 대위의 제안으로 창설되었습니다.

 

데이비드 스털링은 중동지역에도 유럽 지역처럼 낙하산으로 침투하는 코만도 공수부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해서, 새로 창설된 중동 코만도의 6개 소대 중 제1, 2소대가 낙하산 침투부대로 편성되었습니다. 중동 코만도 제1, 2소대의 대외 명칭은 공수특전(Special Air Service) L 파견대였는데, SAS라는 이름은 영국에 주둔하던 낙하산 침투 코만도 부대인 제11 SAS의 명칭을 따온 것이었습니다.



1941년 11월 16일 크루세이더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실시된 데이비드 스털링의 첫 SAS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경험이 없었던 수송기는 엉뚱한 곳에 부대원들을 강하시켰고, 장비와 병력 대부분은 흩어져서 다시는 집결하지 못했습니다. 작전에 참가한 62명의 대원 중 22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18명이 부상을 당해, 공격 목표는 구경도 못하고 중간 집결지에서 철수를 해야 했습니다. 이 작전에서 계획대로 실시된 것은 복귀를 위해 대기하던 영국 제8군 직할 장거리 차량 정찰부대인 장거리 사막단(Long Range Desert Group, LRDG)의 퇴출작전뿐이었는데, 이 트럭을 타고 복귀하던 중 스털링은 사막 지형에서 공수작전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대신 자동차 침투작전을 새롭게 구상했습니다.

그가 새로 구상한 새로운 작전은 LRDG의 전문가들이 자동차로 SAS를 목표지점까지 안내해 주면, SAS가 적을 기습 공격하고, 다시 LRDG를 따라 부대로 돌아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1942.6월 마침내 SAS의 두 번째 작전이자 첫 자동차 기습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LRDG의 안내로 리비아에 있는 3개 비행장을 기습 공격한 SAS는 다수의 항공기를 파괴하고,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LRDG의 안내를 받으며 무사히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SAS 작전 중 최고의 성공을 거둔 작전은 1942.7.26일 실시된 시디 하니시(Sidi Haneish) 비행장 기습작전으로 SAS는 LRDG의 도움으로 무더운 낮에는 적의 항공 정찰을 피하고 피로를 막기 위해 위장한 채 잠을 자고, 야간을 이용해 이동하는 식으로 사막을 멀리 돌아 적진 깊숙이 침투한 다음 폭격기와 수송기 37대를 파괴한 작전이었습니다.

1942년 9월 중대 규모의 중동 코만도가 해체되고, 대대 규모의 제1공수특전(SAS) 연대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제1 SAS 연대는 영국군 4개 중대(Sqn), 자유 프랑스군  1개 중대, 그리스 군 1개 중대, Folboat(SBS) 1개 분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이후 SAS는 차량을 이용한 히트 앤드 런 작전으로 1943년 1월 스털링이 £[튀니지]]에서 독일군에 포로로 잡히기 전까지 250여 대의 추축군 항공기를 파괴했습니다. 독일군은 공중전에서 잃는 전투기보다 SAS에 의해 파괴되는 전투기가 더 많았던 날이 있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스털링이 포로로 잡힌 후에는 제1 SAS연대는 특별 기습 중대(Special Raiding Squadron, SRS)와 SBS(Special Boat Section)로 분리되고, 제11코만도 출신으로 SAS 창설 요원이었던 패디 메인 육군 소령이 SRS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이 끝나고 SRS는 시실리와 이탈리아 전역에 참가했습니다.

한편, 1941년 창설되어 국가정보기관인 특수작전 집행부(Special Operations Executive, SOE)의 작전부대로 활동했던 제62코만도(또는 Small Scale Raiding Force, SSRF)가 1943년 해체되면서, 제2공수특전(SAS) 연대(연대장은 데이비드 스털링의 형인 빌 스털링 육군 중령)로 개편되었습니다.

1944년 1월 SRS는 다시 원래대로 제1공수특전(SAS) 연대로 확대 개편되고, SRS 지휘관, 패디 메인 육군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하면서 제1공수특전(SAS) 연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공수특전(SAS) 여단이 창설되어 예하에 영국 육군 제1, 2 SAS연대와 프랑스 제3, 4 SAS연대, 벨기에 제5 SAS연대를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SAS는 이때부터 자동차 기습 대신 독일 점령 치하의 프랑스에 대한 낙하산 기습 침투 작전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1945년 10월 8일 군축의 필요성에 의해 SAS는 해체되었으나, 다음 해인 1946년 장기간 장거리 침투부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47년 1월 1일 향토예비군(Territorial Army)에 제21공수특전(SAS) 연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이 연대 번호는 해체된 SAS 연대를 기념하기 위해 제1, 2 SAS연대의 숫자 1과 2를 가져와 새로운 첫 번째 공수특전(SAS) 연대라는 의미에서 1과 2의 순서를 바꿔 21 연대라는 번호를 붙인 것입니다.

 

말레이시아 정찰대(SAS)

1950년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제21공수특전(SAS) 연대에서 1개 중대가 3개월 간의 6.25 전쟁 파병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작전 소요가 없어서 대신 말레이시아 비상사태(Malayan Emergency, 1948~1960)에 파병을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말레이시아에는 1945년 3월~10월까지 영국 공수특전(SAS) 여단장을 지낸 마이크 칼버트가 말레이시아 정찰대(SAS)를 창설 중이었는데, 그는 극동 주둔 영국군에서 SAS와 친디트 부대 출신 지원자를 받아 A중대를 창설하고, 영국 본토 주둔 제21 SAS 연대에서 파병된 SAS 중대를 말레이시안 스카우트 B중대로 편성했습니다. C중대는 영국령 로디지아에서 영국인 지원자를 받아 창설했습니다. 로디지아 출신 지원자들이 3년 계약이 끝나 귀국한 다음에는 뉴질랜드에서 새로 지원자를 뽑았습니다. 1956년에는 D중대와 육군 낙하산 연대에서 파병된 낙하산 중대를 포함하여 5개 중대로 구성되었습니다.

현역 공수특전(SAS) 부대의 필요성이 인식되어, 1952년 현역 제22공수특전(SAS) 연대가 영국에서 창설되었습니다. 1959년에는 MI9의 뒤를 잇는 도피 및 탈출 전문 부대인 상근예비역 수색대(the Reserve Reconnaissance Unit)를 제23공수특전(SAS) 연대로 개칭하여 세 번째 공수특전(SAS) 연대를 창설했습니다.

친공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정권이 반외세를 외치며 말레이시아 의 공산당을 지원하며 벌어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전쟁에서도 공산 게릴라로 가장한 인도네시아 정규군과 싸웠습니다. 최종적으로 정부를 지키고 민심을 돌리는 데 성공하며 이는 성공적인 대(對) 게릴라전의 대명사로 여전히 거론되고 있습니다.

훗날 월남전에서 미군이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소모하고도 결국 베트남의 민심을 얻지 못해 패배한 것에 비해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SAS는 이 작전에서 FN FAL과 같은 고위력 전투 소총이 특수임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 후에 영국군 최초로 M16을 도입했습니다. 이후 M16은 영국군 내에서 아말 라이트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SAS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SAS의 주력 화기는 M4 카빈 계열인 L119A 2입니다.

 

현대의 SAS

https://youtu.be/QjJ3 HxWNjUc

1980년 님로드 작전 당시 현장 영상.

1982년 포틀랜드 전쟁 당시에도 여러 작전에서 맹활약했지만, 아르헨티나군의  기관포 진지 앞으로 쭉 펼쳐진 평야지대를 거슬러 올라가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영하의 날씨에 고산지대를 행군하고 적의 배후를 습격하는 임무에서 단 한 명의 동사자나 비전투 손실도 입지 않아 이후 다른 나라 군대의 동계작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상 최초로 고어텍스 재질의 야외 상의와 전투화가 지급되었다고 하며, 꾸준한 휴식과 따뜻한 차로 체력을 유지해 성공적으로 전투력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1990년의 걸프전에서도 역시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  발사대 추적이나 전략 목표 정찰, 연락선 차단 등의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때, 브라보 투 제로라는 암호명을 띄고 스커드 미사일 감시를 하러 간 일단의 SAS 부대가 어린 목동 소년에게 우연히 발견되어 위치가 발각되자 헬리콥터로 이탈하려 했지만, 헬리콥터가 오지 않고 적의 추격이 계속되자 도보로 이라크를 횡단하여 거의 시리아 국경 앞에서 1명은 탈출에 성공하고 3명은 전사, 4명은 붙잡혀 포로가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때 포로가 되었던 한 대원이 그들의 희생과 작전 전체가 극비로 취급되는 것에 분개, 전역 후  브라보 두 제로라는 책을 써내며 이들의 활약상과 놀라운 희생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브라보 투 제로 작전팀의 경우 8명의 인원으로 장갑차를 가진 수백의 정규군과 민병대의 추격을 꾸준히 물리치면서 너무 먼 사우디아라비아 쪽 국경보다는 가까운 시리아 쪽 국경을 택해 시리아 국경에서 몇 km 남짓한 지점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만 무사히 시리아로 도망친 사람은 1명뿐이었습니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전투와 추위로 3명이 전사하고, 포로가 된 이후에도 몇 개월에 걸쳐 무수한 고문과 심문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정체를 숨겼습니다. 이라크군이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나고 포로교환을 한 이후였다고 합니다. 대원들의 기량은 그야말로 일당백이지만 특수전 장비나 헬리콥터 같은 지원 요소가 부족했던 한계 때문에 대원들이 불가피한 희생을 치렀다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당시 작전팀 대원들 사이에서도 엇갈린 주장이 나오는 등 논란이 있습니다. 아래 출신 인물 항목 참조하세요.

시에라리온에서는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되었다가 반정부군에 인질로 잡힌 영국군 장병들을 공수부대와 공군과의 협동작전으로 성공적으로 구출하기도 하였습니다(바라스 작전).

2013년 케냐 나이로비 쇼핑몰 인질극(Westgate Shopping MallAttack) 당시 전직 영국 육군 특수부대 SAS 장교 출신으로 나이로비 민간 보안회사에 근무 중이던 도미닉 트롤런(Dominic Troulan) 퇴역 육군 소령이 테러범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인질 100여 명을 구출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동료의 부인과 자녀를 구출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12번이나 쇼핑몰을 왕복하며 인질들을 구출하여 2017년 영국 정부로부터 2등 훈장인 조지 크로스(George Cross, GC) 훈장을 수상했습니다. 민간인에게 조지 크로스 훈장이 수여된 것은 2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트롤런 소령은 1979년 영국 해병대에 병으로 입대하여, 해병대 코만도 부대에서 하사로 전역한 후 영국 육군 부사관으로 재입대했고, 육군 낙하산 연대를 거쳐 육군 특수부대 SAS 장교로 임관, 2009년 소령으로 전역했으며, 포틀랜드 전쟁과 북아일랜드  분쟁,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 참전용사입니다.





기량이 매우 높은 특수부대로 각 대원의 신원 자체가 비밀로 다뤄질 정도입니다. 그만큼 영국의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SAS에 대해서 "그들은 매우 위험한 존재이므로 발견 즉시 사살해야 한합니다."라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SAS는 적국인 독일 음악 릴리 마들렌을 상부의 반대를 무시하고 행진곡으로 채택하였는데 그걸 21세기에 들어서까지도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연합군 내에서도 대 유행곡이었습니다.

2014년 영국군 SAS가 북서부 이라크에서 ISIS에 대한 인간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미리 교신 감청과 무인기 운용을 병행해서 표적들을 확인한 뒤 치누크 수송헬기로 ATV팀을 투입하고 AWM , 바렛 M82 저격소총과 GPMG 등을 사용해 야간에 목표들을 습격한 뒤 고속으로 도망쳐서 빠져나오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쓰인 전통적인 방식의 개량판입니다.

작전이 시작된 지난 4주간의 효과는 꽤 뛰어나서 200여 명 이상의 타깃을 사살시켰는데, 그중에는 장교급 인물이 무려 50% 이상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7년 5월에는 이라크 모술에서 SAS 스나이퍼가 SVD로 영국군을 저격하던 IS 저격수를 2400미터 밖에서 역저 격해 사살했다고 합니다. 저격에 사용한 총 은샤이 택 M20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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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슈타이어 마리 허가 1977년에 개발하고 오스트리아 육군 이 채용한 불펍식 돌격소총 . AUG는 독일어로 Armee Universale Gewehr, 즉, "군용 다목적 소총"의 약자입니다.

독일어권 알파벳의 독일어 머릿글자 약어이므로 현지 발음으론 "아우게" 지만, 세계 대부분은 영어가 익숙하므로 보통 "에이 유지" 또는 일부층에선 "어그" 등으로 부른다. 16개국에 팔린 총으로, 불펍 총기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개량형으로 시대의 대세 인피 카티니 레일 도배를 한 AUG A3까지 나와있으며, 상당히 많은 종류의 바리에이션이 존재합니다.

 


https://youtu.be/U4 Db8 V38 cLg


역사

베트남전을 거치며 미군은 7.62 mm 계열의 대구경 탄약이 소구경 탄약에 비해 큰 이점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기존 NATO 표준 탄약이었던 7.62 × 51mm 탄약 외에 신형의 5.56 ×45mm NATO 탄약 또한 나토 표준 탄약으로 지정하였고, 이를 사용하는 M16 소총을 도입하였습니다. 이때 미국의 동맹국인 NATO 회원국들은 미국이 사용 탄약을 바꿈에 따라 기존의 전투 소총들을 갈아치울 필요가 있었고, 화기의 콘셉트가 완전히 변해버려 급하게 개발 및 도입된 전투 소총과는 달리 기존 소총에 하자가 없어 급하게 바꿀 필요가 없는 신형 소총의 개발은 시간적 기술적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 따라서 많은 국가들은 자국산 신형 소총을 개발했다. 이 시기 대표적으로 영국의 SA80 , 프랑스의 FAMAS, 벨기에의 FN FNC, 독일의 H&K G36 등이 개발되었으며, 그 와중에 유럽의 총기 명가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 사에서 AUG를 개발하게 됩니다.

슈타이어 AUG는 보병들이 기계화됨에 따라 짧은 소총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 트렌드에 맞춰 불펍식으로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서방국가와 달리 불펍의 단점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던 슈타이어 사는 당시에는 특이하다고 여겨진 여러 가지 장치를 적용하여 신형 소총을 제작하였습니다. 1977년 총의 설계가 완료되었고 StG-77이라는 이름으로 오스트리아 군에 테스트되었으며, 1978년 정식으로 도입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높은 범용성과 우수한 설계 덕분에 AUG는 오스트리아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제식으로 채택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호주군에서는 F88이라는 이름으로 제식 채용되었습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원 제작사가 경영난에 시달리면서 저작권은 대략 21세기에 원 제작 회사를 떠났습니다. 미군의 차기 제식 소총 프로젝트인 ACR 사업의 백지화와 IWS=2000  대물 저격총 등의 실패로 인해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어쩔 수 없이 팔아버렸기 때문입니다.

현대에는 불편한 확장성으로 인하여 슈타이어에 의해 몇 차례 개조되어 레일 부착형인 A3 모델이 사용되고, 호주에서는 독자적으로 기존에 도입한 AUG인 F88을 베이스로 하여 F90소총으로 개조한 모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징

디자인

일단 디자인부터가 특이합니다. 사실 총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게 무슨 SF 영화 소품인가요?" 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불펍식 소총이지만 영국제 소총 SA80 이 감히 대적할 수도 없을 만큼의 편의성과 신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펍 소총이라 리시버와 탄창이 그립/방아쇠보다 뒤에 있기 때문에 총열의 길이를 희생하지 않고도 총 전체 길이를 짧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일례로 기본형 AUG가 총길이 80센티미터로 M16 소총보다 20센티미터나 짧은데, 총열 길이는 둘 다 50센티미터로 똑같습니다. AUG 카빈 모델이나 서브 카빈 모델은 더 짧아서, 가장 짧은 서브 카빈은 총길이가 63센티미터밖에 안 됩니다. 기관단총이 아니라 돌격소총인데도 이렇게 콤팩트한 것입니다.

하지만 불펍식 구조라 거기서 오는 모든 단점 또한 다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탄창을 들 수 있는데, 탄창이 후방에 위치하여 교환이 불편하고 총 몸 깊이 들어가는 편이라 확장성 또한 떨어집니다. 또한 전형적인 유럽식 노리쇠 멈치로 인하여 신속 재장전이 안되므로 탄창 교환 속도는 AR 계열보다는 확실히 느린 편입니다. 또한 작동 구조가 대부분 뒤에 있기 때문에, 저격소총이나 기관총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돌격소총의 총열이 무게 중심을 완전히 잡아주질 못합니다.

 

따라서 앞뒤 벨런스가 좀 안 맞는다. 조준경은 권총 손잡이 위에 위치하기 때문에 무게중심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때문에 총기 작동 시 총구가 튀어 오르는 현상이 비교적 심합니다. 그래서 수직 손잡이를 부착하여 어느 정도 해결하였고, 피스톤을 총열보다 낮게 배치하여 반동을 완화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불펍식 소총이 으레 그렇듯 무게 중심과 형상, 겨드랑이 근처에서 걸리적거리는 탄창의 존재, 일반형 소총에 비해 짧은 리치 때문에 총검술용으로는 영 좋지 못한 소총입니다. 일단 착검은 가능하긴 한데, 아무리 나름 앞뒤로 무게 배분을 했다고 해도 역시 리시버가 개머리판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무게중심이 총의 후방에 집중되어 총검을 휘두를 때 검에 무게가 잘 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총검술 시 파지 할 곳도 (즉 손으로 잡고 휘두를 부분이) 마땅치 않다고. 현대전으로 와서 총검술이 사장되기 직전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이 피스톤의 가스 방출기가 수직 손잡이 바로 위에 위치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방출되는 가스에 사수의 손이 익을 수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장갑을 착용하고 사격하기를 권하며, 손잡이를 잡는 위치가 총열에 너무 가깝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다만 일상적으로 겪을 만큼 심각한 결함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기본 개발 콘셉트가 맞게 좌우대칭과 모듈러식 설계를 적용하였습니다. 불펍 소총의 가장 큰 문제가 탄피 배출로 인한 좌우대칭 설계의 불편함입니다.

 

AUG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좌우 방향 노리쇠를 따로 제작하였고, 탄피 배출구의 위치를 조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당시에 어떤 소총도 가지지 못했던 AUG만의 장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애초 탄피 배출 방향을 잘 조정해 별도의 총기 손질 없이도 쏘는 손을 바꾸기 편한 21세기 현대 소총의 유행(SCAR, F2000 등)은 따라잡지 못해 엄폐물을 끼고 쏘는 손을 엄폐물 방향에 맞게 바꾸는 것이 요구되는 특수전이나 시가전과 같은 상황에서 불리합니다. 정작 총은 시가전에 유리한 불펍인 게 함정 때문에 과거에 비해 특수부대의 신규 채택률이 떨어졌습니다.

AUG는 총의 부품이 대부분 모듈화 되어 있어 교체가 쉬운 소총입니다. '다목적 소총'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요 콘셉트는 "부품만 바꿔 끼워서 서로 다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모듈러 설계의 총을 만들자"였고, 이런 기초 설계 덕에 총열을 다른 보병용 소총보다 훨씬 빠르고 자유롭게 부품을 갈아 끼울 수 있어서 단총 신 카빈, 중 총열의 분대 지원화기로 손쉽게 탈바꿈시킬 수 있다. 단,  기관단총 버전인 AUG Para는 의외로 돌격소총 버전 AUG와 외형이 거의 같을 뿐 내부구조가 완전히 다릅니다. 작동 방식부터가 블로우백 방식으로 다르고, 총열과 볼트 어셈블리가 돌격소총 AUG와 전혀 호환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모듈식 설계 때문에 구조가 매우 폐쇄적이어서 현대에는 애프터마켓 부품 사용 시 제약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단발/연발 사격이 둘 다 가능함에도 대부분의 연발 총기에서 볼 수 있는 사격 모드 조정 간이 없는 것도 특징입니다. 대신에 방아쇠를 반만 당기면 반자동이 되고 깊게 당기면 자동으로 나갑니다. F1 기관단총에서 이미 쓰인 방식인데 두꺼운 장갑을 끼고 조정 간을 조작하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위험할 것 같기도 하지만, 쏴본 사람 말에 따르면 중간에 걸리는 느낌이 있어서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아무래도 급하게 쏘다가 연발로 당겨버린다던가 하는 오발사고의 위험은 어쩔 수 없기는 하다. 또 이 구조와 불펍 구조로 인한 방아쇠 장치의 문제로 트리거 느낌은 엉망이라 합니다.

반면 안전장치는 있다. 방아쇠와 그립 바로 위에 있는 커다란 블록을 누르면 되는데, 안전 모드로 두면 블록이 우측으로 튀어나와 검지를 불편하게 찌르므로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안전 모드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이프티 셀럭터 블록은 그냥 엄지로 꾹 누르면 작동되므로, 두꺼운 장갑을 낀 경우 조작이 어려운 타 소총들의 실렉터에 비해 조작이 쉽습니다.

 

AUG는 이처럼 장갑을 낀 상태에서 조작하는 것을 배려한 부분이 많다. 방아쇠 울도 일반적으로 검지 손가락만 들어가는 형태의 다른 총기들과 달리 손가락 4개가 모두 들어가도록 대형화되어 있습니다. 장전 손잡이가 무지하게 큰 것도 마찬가지 이유. 하지만, AUG에서 장전 손잡이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좌우 배려가 안 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AUG의 장전 손잡이는 총위에 설치되어 있는데, 사격 시 연동되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휴대 시 커다란 장전 손잡이가 여기저기 걸려대서 문제입니다. 이는 F90에서는 접을 수 있게 개량하여 해결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거대한 장전 손잡이가 광학장비와 간섭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AUG는 이렇다 할 노리쇠 멈치가 없어 이 경우 매우 불편합니다. 광학장비를 달고 장전 손잡이를 당기면 손등이 긁히기 딱 좋습니다. 따라서 장전 시는 손바닥이 위로 가게 하여 손잡이를 당겨야 합니다. 이 부분은 딱히 개선되지 않았고, F90의 경우는 마운트의 높이를 높이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여전히 불편하긴 하지만 전보다는 괜찮다고. 최근 A2-A3 버전은 장전 손잡이가 접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준장치


기계식 가늠자/가늠쇠 대신 1.5 배율 망원 조준경이 기본 조준장치라는 점도 특징이라면 특징. 불펍 소총의 특징인 조준선의 짧은 길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부분으로, 크리스털 업계에서는 유명한 스와로브스키의 자회사 스와로브스키 옵틱이 만든 조준경입니다. 이쪽도 정밀 광학기기로 유명합니다.

원가 절감을 위해 배율 조절 기능은 존재하지 않으며, 흔히 생각하는 십자 조준선 같은 건 없고 가운데가 빈 원형입니다. 이 원형은 테두리가 살짝 두께가 있는데, 테두리 바깥쪽은 100미터 거리에서, 안쪽은 300미터에서 키 180cm인 사람이 이 원형 안에 들어오도록 조준하고 쏘면 맞는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방식입니다. 그보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사람이 원형보다 커지므로 역시 가운데에 맞추고 쏘면 맞는다는 조준경 위에는 간단한 개방형 예비 가늠자와 가늠쇠가 붙어 있습니다.

이후 A2 버전에서 피카타니 레일을 붙이는 개량이 되면서 기본 스코프가 빠지기 시작했고, A3 버전부터는 아예 처음부터 스코프와 수직 손잡이 없이 출고됩니다.



AUG는 쇼트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이며 독특하게도 리턴 스프링 튜브 막대가 총열 좌우로 길쭉하게 있기 때문에 롱 스트로크 피스톤 방식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총열 우측에 가스 조절기가 있고 가스 조절기를 분리하면 작은 크기의 가스 피스톤과 스프링이 나옵니다. 노리쇠는 스프링 튜브 막대 끝에 위치하며 리턴 스프링은 각 튜브 막대 안에 1개씩 내장되어있습니다. 필드 스트립만 했을 때 어 스프링 어디 있지? 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트리거는 총내부의 와이어에 의해 움직이며, 해머와 시어 등은 모듈화 되어 개머리판에 내장되어있습니다. 개머리판 뚜껑을 열고 꺼낼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렇다 할 특징은 없어 작동구조의 신뢰성이 높은 편이고, 모듈화가 잘 되어 있긴 하지만 독자 규격의 탄창이라 스타나 그 탄창 등이 호환되지 않습니다.

https://youtu.be/9 ib5 JYNxV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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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STEN) 기관단총

급하게 만들다 생긴 악명



굳이 영국이 아니더라도 섬나라는 당연히 해군에 군비를 주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방어 측면에서 본다면 침략을 받았을 때 바다에서부터 적을 막아내는 것이 유리하고, 반대로 대외 팽창에 돌입했을 때는 경쟁자보다 빨리 밖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리적, 군사적 이점을 최대한 살린 영국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5대양 6대주 곳곳을 지배하는 역사상 최대의 패권 국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급하게 만든 기관단총

하지만 그렇다고 영국의 육군이 약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먼저 세계 곳곳에 있는 엄청난 식민지를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약할 수가 없었죠. 또한 전통적으로 영국은 유럽 대륙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힘의 균형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개입을 마다하지 않았던 나라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제1, 2차 세계대전 모두가 그러한 예입니다. 그래서 소수지만 강력한 육군을 운용했고 품질 좋은 국산 무기로 충실히 무장시켰습니다.

지원병으로만 구성 되어 장기간 충실히 훈련시켰던 덕분에 1, 2차 대전 초기의 영국 육군은 징집된 독일군이나 프랑스군에 비해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소수였기에 부대 간 대결에서 열세였지만 적어도 사격술을 비롯한 병사 개개인의 능력은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전통의 주변 육군 강국들에 비한다면 미흡한 측면이 많았고 정책상 오판으로 말미암아 무기 개발을 등한시하여 고전을 겪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본격 등장한 기관단총도 있었습니다. 영국은 참호전의 호된 경험에도 불구하고 기관단총을 효과가 없는 무기로 오판했습니다.

 

사거리가 짧고 파괴력이 약한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정작 기관단총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자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부랴부랴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탄생한 기관단총은 급하게 만든 만큼 문제점도 많았습니다. 바로 스텐(STEN) 기관단총입니다.

 



대륙에서 몰락한 정예 원정군

영국이 오랫동안 유지하여 온 기본 외교 전략은 여러 나라가 어깨를 접한 유럽 대륙에서 유일 강자의 등장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대륙에 군대를 파견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여 경우에 따라 본토를 지키는 병력의 수배에 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1차 대전 당시에는 연 인원 700여 만 명(영연방 전체로는 880만)의 대규모 병력을 유럽 대륙으로 보내 독일과 싸우도록 조치했고 엄청난 피해도 감수하였습니다.

2차 대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독일에 선전 포고하고 고트 경(Sir Gort)이 지휘하는 30만의 영국해외원정군(BEF)을 동맹국 프랑스에 파견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 전개한 영국 해외 원정군은 피아 통틀어 유일하게 모든 병력이 차량화된 정예부대로 당시 영국 육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연합군은 독일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침공을 개시하자, 연합군은 뛰어난 작전을 구사한 독일군에게 초반부터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 독일 기갑부대에 의해 배후가 차단당한 영국군은 북프랑스의 됭케르크(Dunkirk) 해변까지 밀려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바다를 건너 도망가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독일의 다음 목표는 영국 본토였기 때문입니다.

 

절실히 요구되었던 무기?

 



결론적으로 포위된 30만의 원정군이 기적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됭케르크 철수작전은 이후 영국이 반격에 나설 때 든든한 자원이 되었고 반면 눈앞의 먹이를 그대로 살려준 독일군은 이를 두고두고 원통해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영국 해외 원정군은 모든 장비를 해안가에 내팽개치고 몸만 빠져나온 상태여서 본토 방어에 무기가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육군은 맨몸으로 바다를 방패 삼아 해군과 공군이 독일의 침략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만일 이 상태에서 강력한 독일 육군이 무사히 해협을 건너 영국 본토 상륙에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습니다.

 

영국은 모든 산업시설을 총동원하여 무기 생산에 나섰습니다. 바로 이때 대륙으로부터 허겁지겁 도망쳐 온 많은 장병들은 기관단총을 요구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독일군이 난사하는 기관단총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들은, 같은 장비가 있어야 적과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영국군도 일부 병력이 미국에서 도입한 톰슨(Thompson)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는 있었습니다만 그 동안 기관단총의 필요성을 너무 간과하다 보니 개발도 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도입한 수량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은 즉시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관단총을 만들라는 지시를 관계 기관에 내렸고, 그렇게 해서 ‘스텐’으로 명명된 새로운 기관단총이 1942년 등장했습니다.

 

너무 급하게 만든 총

 



‘스텐(STEN)’은 설계자인 셰퍼드(Reginald V. Shepherd)와 터핀(Harold Turpin), 그리고 엔필드(Enfield) 조병창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입니다. 대강 지은 이름만큼 급박한 전황을 고려하여 생산성을 염두에 두다 보니 형태와 구조도 극히 단순했고, 그로 인해 가격이 극히 저렴하고 생산성도 뛰어나 단기간 동안 무려 약 400만 정이 생산되었습니다.

탄생한 지 8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제작되는 톰슨의 생산량이 약 270만 정인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많은 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의 MP38, MP40 같은 멋진 기관단총을 상상하던 병사들은 마치 쇠파이프를 잘라서 대강 만든 것 같은 스텐 기관단총을 처음 보고는 실망했습니다. 탄창을 옆에서 꽂는 형태부터 상당히 특이한데, 경우에 따라서는 ‘과연 이것이 총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만큼 조잡해 보였습니다. 처음 이를 들고 돌격하는 영국군을 본 독일군이 스텐을 총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았다는 이야기까지 전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무기가 굳이 외형이 멋있을 필요는 없으므로 이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작 커다란 문제는 너무 막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품질이 조악하다는 점이었습니다. Mk5와 최종형인 Mk6은 여타 기관단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지만 그 이전 모델들은 한마디로 ‘가지고 다니기 무서운 총’이라는 악평을 들었습니다.

 

오픈 볼트 방식 총들 대부분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스텐은 유독 충격에 약했습니다.

실수로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총알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연사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병사들이 도망 다니는 일이 흔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탭댄스를 추는 것에 비유해서 ‘죽음의 탭댄스’라는 말까지 탄생했습니다. 그만큼 초기 모델의 안정성은 최악이었습니다. 더불어 화상을 피하려 탄창을 잡고 쏘면 급탄 불량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스텐 기관단총에 대한 초기 평가는 ‘조악한 품질’이라는 한마디로 종합할 수 있었습니다.

 

간과하고 있던 사실은

하지만 사실 이러한 악평처럼 무조건 사용하기 어려운 기관단총이었다면 더 이상 생산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품질이 너무 나빠 아군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많다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스텐을 상당히 튼튼한 걸작이라며 노획하여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독일군이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후 형성된 서부전선에서 주로 후기에 생산된 모델을 접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습니다.

 

스텐은 조악한 시설에서도 빨리 만들어 낼 수 있어서 폴란드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카피 생산했고 당장 한 정의 총도 아쉽던 전쟁 말기의 독일도 이를 카피한 포츠담 장비(Gerät Potsdam), MP3008 같은 총을 만들었습니다. 초기 모델들이 비록 엄청난 악평을 받았지만 분명한 것은 스텐은 이후 꾸준한 개량을 통해 성능을 개선하고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여 거대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관단총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25전쟁이나 수에즈 위기처럼 이후 영국군이 직접 참전한 전쟁에서도 꾸준히 사용되었고, 이후 등장한 스털링(Sterling) 기관단총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사실 품질이 나쁜데도 생산성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총기를 수백만 정 이상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적보다 아군에게 더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이미 무기가 아닙니다. 어쩌면 스텐 기관단총을 이야기할 때 그동안 이런 당연한 점을 간과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원(Mk2 기준)
탄약 9×19mm 파라블럼 / 급탄 32발 막대 탄창 / 작동방식 블로우백, 오픈 볼트 / 전장 760mm / 중량 3.2kg / 발사속도 분당 500발 / 유효사거리 1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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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핵심가치

핵심가치 의의가. 일반적 정의

핵심가치(核心價値 : Core Value) : 핵심(Core) + 가치(Value)의 합성어.
내면세계의 기준이 되는 가치관, 목표를 향해 공유하고 실천하는 사고와 행동의 기준

나. 핵심가치의 특징과 역할

핵심가치는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거나 표현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핵심가치는 핵심적
(Core)이어야 하며, 윤리적(Ethic)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고, 구성원들의 열정적(Passionate) 공감과 지지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 지속(Constant)되어야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

다. 핵심가치의 역할

첫째, 해병대 장병들을 일치단결시켜 위기 극복을 위한 구심점 역할
둘째, 해병대 문화의 중심으로 해병대 장병들의 정체성 및 상호 간 신뢰, 소속감 강화
셋째, 해병대 장병 스스로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
넷째, 해병대 장병들의 사고와 행동의 기초적 준거, 조직의 윤리적 환경 조성에 기여


한 번 해병대가 된다는 것은 해병대의 가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사령관은 해병대 장병 및 군무원 모두가 해병대의 핵심가치를 이해하고, 이 가치가 어떻게 전통적으로 해병대에서 이어왔는지, 또 앞으로 변함없이 계승되기를 분명한 목표로 가슴에 새겨 주길 바랍니다.
- 해병대 재창설 기념 및 핵심가치 선포식 기념사 중 -

해병대 마크



싸움터 어느 곳에서나 영광을 쟁취하였던 해병대를 상징하는 ‘해병대 마크’는 해병대 조직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설 초기에는 해병대 마크가 제정되지 않아 해군 장교 모표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1951년 8월 1일 별도의 해병대 모표를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모표는 장·사병용으로 구분하여 장교용은 독수리와 별은 은색, 닻은 금색이며, 사병용은 전 부분을 금색으로 하여 구분하였습니다. 해병대 마크는 자신이 해병임을 항상 자랑스러워하면서 해병대에 대한 무한한 충성과 명예심의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군대의 위치를 알리고 장병의 사기를 북돋우며 군대의 명예와 단결을 상징하기 위한 군기(軍旗)인 해병 대기 중앙에 새겨지며 제복의 어느 한 부분에 압인 하거나 배지로 제작된 것을 부착하며 또는 간행물 표지에 표시하기도 하고 스티커로 만들어 차량에 부착하는 등 널리 애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병대 마크는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용맹스럽게 적과 싸워 승리하는 해병대를 상징합니다. 마크는 리본(‘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독수리, 별, 닻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표는 리본이 생략된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크의 각 부분이 상징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 리본
독수리가 입에 물고 있는 리본에 적힌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는 해병대가 존재하는 목적을 나타 낸글귀로서 내 한 목숨 해병대라는 조직과 조국에 바친다는 의미 합니다.

▶ 독수리
용맹성과 승리의 상징으로 민족과 조국의 수호신이면서 전장에서 승리의 불사신이기를 갈망하는 해병대의 기상을 의미▶ 별
지상전투를 상징하기도 하는 별은 조국과 민족의 생존을 위한 국방의무의 상징으로 조국과 민족을 지키는 해병대의 신성한 사명을 나타 냅니다.

▶ 닻
해양 또는 해군을 상징하기도 하는 닻은 배를 일정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갈고리로서 기울어져 있는 모양의 닻은 함정이 정박 또는 정선하여 해병대 고유의 임무인 상륙작전 개시를 의미입니다.

 

팔각모



일반적으로 모자(帽子)는 예의를 지키기 위하여 또는 추위나 더위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거나 장식적 또는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서 머리에 쓰는 것을 총칭하여 일컫는다. 이러한 모자는 과거에 주로 개인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여러 형태로 구분 짓기도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용도와 편리성, 선호도 등에 따라 그 형태도 다양하게 변모하였습니다. 군대에서도 용도에 따라 여러 형태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특히 평상시 장, 사병이 공통적으로 쓰는 전투모는 색깔 및 형태에 따라 해당 군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해병대를 상징하는 ‘팔각모’는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팔각모는 신라시대 전 신라인의 정신이기도 하였던 화랑도 정신인 오계(五戒)와 세 가지 금기(禁忌)를 포함하며 팔계(八戒)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 팔각모는 팔각(八角)의 의미와 "팔극(八極)"의 의미를 함축

『팔극(八極)의 의미』
- "지구 상 어디든지 가서 싸우면 승리하는 해병대"임을 상징합니다.

『팔각(八角)의 의미(화랑도 정신인 오계(五戒)와 세 가지 금기(禁忌)를 표현)』
- 국가에 충성하라(事君以忠)
- 뜻 없이 죽이지 말라(殺生有擇)
- 벗에게 믿음으로 대하라(交友以信)
- 욕심을 버려라(禁慾)
- 부모에게 효도하라(事親以孝)
- 유흥을 삼가라(愼遊興)
- 전투에 후퇴하지 말라(臨戰無退)
- 허식을 삼가라(愼虛飾)

 

▶ 팔각의 중심점은 지휘관을 중심으로 하여 여덟 가지 해병대의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국가에 충성하라(事君以忠)
- 평화의 독립 수호
- 적에게 용감
- 엄정한 군기
- 긍지와 전통
- 희생정신으로 국가에 헌신
- 불굴의 투지
- 가족적인 단결 도모
- 필승의 신념으로 승리 쟁취

 

붉은 명찰



해병대에서는 오른쪽 가슴에 붉은 명찰(속칭)을 달 수 있을 때 비로소 해병대의 일원이 되었음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만큼 붉은 명찰은 해병대 장병들에게 단순히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는 표식물이 아니라 ‘해병대 아무개’라는 해병대에 소속된 한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명령인 동시에 징표인 것입니다.

이러한 명찰이 상징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진홍색
'피'와 '정열', '용기', '신의' 그리고 '약동하는 젊음'을 조국에 바친 해병대의 전통을 상징.
(약칭 : 피와 정열)

▶황색
해병대는 신성하며, 해병은 언제나 예의 바르고 명랑하며 활기차고, 땀과 인내의 결정체임을 상징.
(약칭 : 땀과 인내)

 

해병대 역사

 

해병대 창설(1949.4.15.)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과 여·순사 건의 전훈에 따라 상륙작전을 수행할 부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이어서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 대령이 공포되었고 당시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 26명과 부사관 54명, 그리고 병 300명(해군 13기에서 특별 모집한 해병대 병 1기생)으로 구성된 380명은 초대 사령관 신현준 중령 지휘 아래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해병대 정신으로 해병대의 굳건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949년 8월 1일 장교와 부사관을 해군에서 추가로 증원받고 해군 14기 중 440명을 해병대 병 2기로 특별 모집하여, 2개 대대 규모로 증편하였습니다.

 


6.25 전쟁

 

▶ 해병대와 한국전쟁

 

해병대는 창설된 지 불과 1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장항·군산·이리지구에 투입되어 적의 남진을 지연시켰고 진동리지구 전투에서는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빛나는 영예를 차지하였으며 통영 상륙 작전에서는‘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영원한 애칭을 얻는 등 연전연승하였습니다.

 

특히, 북괴군의 발악적인 최후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해병대는 동년 9월 15일 한반도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인천 상륙작전에 미 제1해병사단과 같이 참가하여 북진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9월 20일부터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감행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수훈을 세웠습니다.

 

인천에서 함정으로 원산·함흥지역으로 이동, 분전하던 해병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하였고, 1951년 1·4 후퇴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전을 실시할 때 북진하던 중 적의 철옹성과 같았던 도솔산과 펀치볼 일대를 공격, 이를 탈취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 받고 ‘신인이 경탄할 공훈’이라는 격찬을 받았습니다.

 

한편, 해병대는 1951년 2월부터 동·서해안 전략도서 확보 작전을 수행하여, 휴전 뒤 서해 5개 도서를 아군의 통제 하에 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52년 3월, 중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해병대는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를 1년 4개월 동안 수행하면서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을 격퇴하고 현 전선에서 휴전을 맞이하였습니다.

 

▶ 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1950. 7. 15. ~ 21.)

 

북괴군이 남침을 개시한 이후 북괴군 제6사단 제13연대는 1950년 7월 초천안을 점령하였고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호남지역으로 진입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해병대의 고 길훈 부대는 제주기지를 떠나 7월 16일 군산에 상륙한 후 장항 북쪽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북괴군의 진출을 지연시켰고 7월 20일까지 군산, 이리 방면에서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 여적이 순조롭게 남하하지 못하도록 저지하였습니다.

 

진동리 지구 전투(1950. 7. 31. ~ 8. 13.)

 

1950년 8월 3일,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북괴군 제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적 제6사단 공격의 예봉을 꺾고 침공을 저지, 창군이래 최대의 전공을 세워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다. 동년 8월 7일부터 미 육군 제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 특수임무부대가 방어작전 시 공세 활동의 일환으로 진주 방향에 대규모 역공격(1950.8.7.~ 8.12.)을 실시하는 동안, 우리 해병대는 서북산 일대의 적을 격퇴하여 진동리와 마산 간의 보급로에 대한 적 위협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통영 상륙작전(1950. 8. 17. ~ 9. 22.)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북괴군은 거제도를 점령하여 전략요충지인 마산과 진해를 봉쇄하기 위하여 적 제7사단 예하 제51연대 1개 대대(약 370명)를 통영 방면으로 진출시켰습니다. 이후 약 250명의 적이 후속하여 통영 시내에는 약 600명의 적이 준동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해병대의 김성은 부대는 1950년 8월 17일 18:00에 7척의 해군 함정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국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이 작전에서 해병대는 작전의 승패를 가름하는 망일봉 고지를 적보다 5분 먼저 점령하여 공격해 올라오는 적을 격퇴시킨 후 통영시내에 잔존하고 있던 적을 완전히 격멸하였습니다.

 

이후 원문고개를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증원을 시도하던 적 부대를 격퇴시킴으로써 낙동강 교두 보선의 서측방 위협을 제거하였습니다. 통영 상륙작전은 당시 우군의 낙동강 교두보 방어작전 중에서 한국군 단독 상륙작전이자 유일한 공격작전이었고 당시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여 종군기자인 마가렛 히긴스가 본국으로 타전한 기사에서 ‘귀신도 잡을 수 있는 부대’라고 격찬하여, 여기에서 유래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표어는 오늘날까지 우리 해병대를 대표하는 표어로 국민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경인지구 작전(1950. 9. 15. ~ 10. 7.)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괴군의 발악적인 최후 공세를 저지한 가운데 맥아더 장군은 병참선을 차단하여 남침한 적을 고립시킨 후 섬멸함으로써 조기에 전쟁을 종결한다는 계획 아래 1950년 9월 15일, 261척의 함정으로 구성된 유엔군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미 제1해병사단과 한국 해병대를 선두로 세계 전사에 빛날 인천 상륙작전을 전개하였 습니다.

 

이 작전에서 제7합동상륙기동부대는 48시간 동안 항공모함 함재기 약 200대를 활용한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9월 15일 06:30에 미 제5해병연대 제3 대대가 20척의 상륙주정으로 녹색 해안에 상륙, 저항하던 적을 완전히 격멸하고 월미도를 탈취·확보하였습니다.

 

동일 17:30 한·미 해병대가 400여 척의 상륙장갑차 및 상륙주정에 분승하여 적색 해안과 청색 해안에 상륙하여 인천을 방어하던 북괴군을 격파하고 인천 시가지와 해안두보를 탈취·확보함으로써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작전을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수도 서울을 조기에 탈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해안두보를 확보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미 제10군단은 9월 18일부터 서울 방향으로 진격하여 11일 동안 작전을 전개한 끝에 서울 외곽 지역과 시가지에서 저항하던 북괴군을 격멸하고 서울을 탈환하였습니다.

 

이 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한국 해병대는 선봉부대로 서울 서측방에서 중심부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 육군 제7보병사단과 한국 육군 제17보병 연대는 서울 남측 방과 동 측방으로 우회 기동 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한국 해병대는 9월 20일, 한강을 도하하여 수색 방향으로 진격한 뒤 적의 최후방어선인 104 고지와 연희고지군 일대에서 저항하던 적을 격파하여 수도 서울 탈환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시가지 전투를 전개한 끝에 9월 27일 06:10,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90일 동안 적의 점령 아래 있었던 서울을 탈환하고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환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후 양주군 북한강 일대에서 잔적을 소탕하다가 명에 의거, 인천으로 이동하여 차후 작전을 준비하였습니다.

 

▶ 북진. 철수. 재 반격작전(1950년 10월 ~ 1951년 6월)

 

1950년 10월 1일,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한·중 국경의 혜산진까지 북진할 때, 해병대는 10월 7일부터 대대별 순차적으로 인천을 출항, 목포·묵호에 각각 1개 대대가 상륙하여 잔적을 소탕한 후 원산·함흥으로 이동하였고 2개 대대는 원산에 상륙하여 고성·원산·함흥지구 전투를 수행하였습니다. 10월 25일, 중공군이 불법 개입하여 공세를 취하자 원산·함흥을 철수하여 진해에 집결한 해병대는 12월 20일, 제1연대와 독립 제5대대로 개편하였습니다.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함락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재 반격작전에 우리 해병대도 참가하여 영덕·안동·홍천·화천지구 전투를 수행하였습니다.

 



전략도서 확보 작전(1951. 2. 14. ~ 1953. 7. 27.)

 

6·25 전쟁 동안 해병대는 부대의 특성을 활용하여 38도선 이북 동·서해안의 전략도서 확보 작전으로 해군 활동을 보장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해병대는 동해안 도서 확보를 위하여 1951년 2월 2일, 독립 제42중대를 편성하여 2월 14일, 원산 앞 여도에 상륙한 후 영흥만 일대의 신도 등 7개 도서를 점령함으로써 원산항을 봉쇄하였으며 서해안 도서작전을 위하여 독립 제41중대를 편성하여 서해안의 교동도(4월 2일), 백령도(4월 23일), 진남포에 인접한 석도(5월 7일)를 차례로 점령하였습니다.

 

1951년 8월 28일, 독립 제43중대는 함경도 명천 부근의 양도에 상륙하여 차기 작전을 대비하던 중, 1952년 2월 20일, 적 1개 대대가 기습적으로 상륙하여 공격하였으나 이를 정말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고 한편 1952년 1월 15일, 해안선 봉쇄를 강화하기 위하여 해병대 사령부 직할부대로 해병 도서부대를 편성하여 제7 대대를 도서인 석모도 및 초도에 주둔하게 하고, 제9대대를 백령도 및 연평도에 증강 배치하였으며 제8대대를 동해 도서인 여도 및 양도에 주둔하게 하여 휴전 시까지 약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전략도서 확보 작전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 작전은 휴전 뒤 백령도를 비롯한 서북 5개 도서를 아군 통제하에 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김포 지구 전투(1951. 3. 7. ~ 1953. 7. 27.)

 

1950년 9월 21일, 수도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한 해병대 제3대대는 김포 비행장을 공격하는 적 2개 대대를 격퇴하고 김포·강화도를 확보하였습니다.

 

1951년 1월 24일, 영덕·안동지구에 출동하여 작전을 수행하던 해병대 독립 제5대대는 2월 16일, 수도 서울 재 수복작전을 전개하기 위하여 인천에 상륙, 잔적을 소탕하고 인천시를 방어(1951.2.26.~3.6.)하면서 서울 영등포 일대에 정찰대를 파견, 서울 재 수복작전에 기여하였고 3월 7일부터 김포 지구 작전을 전개하여 잔적을 소탕하고 김포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뒤, 휴전 시까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과 대치하여 수도 서울로의 침공을 저지하면서 한강 너머 개풍군 및 개성 부근 일대에서 정찰대를 운용하여 월암리 전투 등 50여 회의 작전을 수행하고 한강을 사수하여 수도권 방어에 기여하였습니다.



도솔산 지구 전투(1951. 6. 4. ~ 20.)

 

국군과 유엔군이 1951년 5월,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격퇴한 직후 미 제1 해병사단 제5해병연대가 양구군 해안면의 펀치볼 남서쪽에 있는 전략 요충지 도솔산(1,148 고지)을 공격하다가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피해가 속출하자 공격임무를 한국 해병대 제1연대에게 부여하였습니다.

 

6월 4일,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능선 상에 철조망을 비롯한 무수한 장애물을 설치하고 암석지대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수류탄과 중화기로 무장한 적이 완강히 저항하므로 주간 공격을 야간 공격으로 전환하여 결사적인 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1단계 작전(1951.6.4.~6.12.)으로 공격 목표 #1에서 목표 #16까지 점령한 뒤 캔자스선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제2단계 작전(1951.6.13.~6.20.)을 전개하여 공격 목표 #17에서 목표 #24까지 점령하고 배 저 선까지 진출하였습니다.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도솔산으로부터 대우산으로 연결되는 산악지역에 배치된 북괴군 제5군단 제12사단과 제32사단의 정예 부대가 난공불락이라고 호언장담하며 방어하고 있던 적의 진지에 대해 혈전 17일 동안 피와 땀으로 얼룩진 치열한 공방전과 무수한 희생 끝에 24개 목표를 점령하였던 것입니다.

 

도솔산을 탈환하여 중동부 산악지대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우군 전선에 활로를 개척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에 의한 ‘피의 능선’,‘단장의 능선’ 전투 등이 이어져 마침내 지대 내의 적 방어선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가 종료된 후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도솔산을 방문하여 ‘무적 해병대’라 칭하면서,‘무적 해병’ 휘호를 하사하였고, 8월 19일에는 해병대 제1연대에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하였습니다.



▶ 김일성/모택동 고지 전투(1951.8.31. ~ 9.3.)

 

휴전회담이 제기된 직후 미 제1해병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양구 북쪽 해안분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지형상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3주간 피의 대공방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제1단계 작전(1951.8.21.~9.1.)에서 현재 을지전망대와 가전리 일대(924 고지-1,026 고지-702 고지-660 고지)에 배치된 북괴군 제3군단 제1사단을 치열한 혈전 끝에 격퇴하고 펀치볼을 확보하였으며, 제2단계 작전(1951.9.1.~9.20.)에는 간무봉 일대의 적을 제압하여 내금강산을 통제할 수 있는 중요 지형을 장악하였고, 좌측방의 한국 국군 제5사단의 가칠봉 점령을 용이하게 하였습니다. 한국 해병대의 김일성(924) 고지 및 모택동(1026) 고지 전투는 펀치볼 작전의 제1단계 작전으로서 펀치볼 북쪽 능선 일대에 천문학적 숫자의 지뢰가 매설되었으나 4일 동안 이를 뺏고 빼앗기는 혈전 끝에 이들을 탈환함으로써 펀치볼을 조기에 확보할 수 있었고, 한국 해병대의 위용을 국내외에 다시 한번 과시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신인이 경탄할 공훈’이라 격찬하였습니다.

 



▶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1952. 3. 17. ~ 1953. 7. 27.)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개최됨에 따라 피아간 더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초 진지 쟁탈전이 계속되었습니다.

 

1952년 들어 수도 서울에 가중되는 중공군의 위협에 대비하는 군사적 보완책으로 미 제8군은 부대 재배치를 착수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미 제1해병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를 가장 위협이 되는 서부전선으로 배치하였다. 이에 따라 1952년 3월 17일, 중·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 장딴지 구로 투입된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1953년 휴전 시까지 1년 4개월 동안 오늘날의 판문점에서 사천강을 따라 임진강 하구까지 11km에 달하는 주 저항선 전방의 8개 전초 진지에서 중공군 제65군 예하 2개 사단(제194·195사단)의 공격을 격퇴하였습니다.

 

1952년 10월 1일부로 전투단으로 개편된 해병대 제1 전투단은 사천강을 경계선으로 중공군 2개 사단에 의해 감행된 네 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격을 격퇴하여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개성-문산 축 선을 지켜 수도권 방어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고 군사 분계선을 아군에 유리하게 확정 짓도록 하였습니다.

 

▶ 교육단 창설(1953. 2. 1.)

 

6·25 전쟁 기간 중 교육훈련의 중요성을 절감, 독자적인 해병대의 장교, 부사관, 병을 양성하기 위하여 해병학교 및 해병훈련소를 기간으로 해병 교육단을 창설하여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식 교육훈련으로 강인한 해병을 창출하는 산실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 제1여단 창설(1954. 2. 1.)

 

제1 전투단을 기간으로 제1여단을 창설하여 파주군 금촌면에 주둔하면서 상륙작전부대로서 조직을 정비하고 서부전선 및 수도권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고, 1954년 3월 17일 미 해병대 제1사단의 본국 철수로 작전지역 작전권을 인수하였습니다.


이승만 여단기 수여식

제1상륙 사단 창설(1955. 1. 15.)

제1여단을 기간으로 제1상륙 사단을 창설하여 수도권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상륙훈련을 실시하였고, 1959년 3월 28일에는 파주 금촌에서 포항으로 이동하여 상륙작전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1959년 3월 30일, 대통령령 제1468호에 따라 제1상륙 사단으로 개칭하였다가 1973년 10월 10일, 제1해병사단으로 부대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제1사단은 국가 유일의 전략 기동 부대로서 완벽한 출전준비태세를 유지하다가 유사시 동·서해안에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부대로서, 북괴군 5개 군단을 고착,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해병 제1 상륙사단 부대기


▶ 해병대 사령부 서울 용산으로 이전(1955. 3. 26.)

 

1949년 4월 15일 진해에서 창설한 후 6·25 전쟁이 발발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해병대 사령부는 전투부대와 함께 부산 → 인천 → 서울 → 고성 → 원산 → 진해로 이동하다가 1951년 5월 20일에 부산 용두산 공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렇듯 싸우면서 자라온 해병대사령부는 휴전 후 서울 용산으로 이동하여 해병대 부대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1956년 6월 준공한 서울 용산의 해병대 사령부 전경


도서부대 창설

 

동해안의 여도, 모도, 사도, 황토도, 웅도, 양도 부대와 서해안의 초도, 석도 부대가 휴전협정에 따라 진해로 철수하여 해병 제2연대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령도와 연평도에 주둔했던 서해부대는 계속 잔류하여 서해안의 5개 전략도서 방어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4년 3월 17일, 미 해병대가 본국으로 철수함에 따라 도서작전에 대한 작전권을 인수하였습니다.

그 뒤 서해 도서 부대(1955.2.1.), 해병 함대 부대(1958.4.15.), 함대 해병 경비부대(1959. 4. 1.)로 개편되었으며, 1960년 1월 1일부로 해병 도서 경비부대로 증·개편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보급 정비단 창설(1955. 6. 1.)

 

해병대 전 부대에 대한 독자적인 보급 및 정비지원을 위하여 보급 정비창을 보급 정비단으로 개편하였습니다. 이 부대는 각종 보급품의 청구·획득·저장 및 불출하고 해병대 군수물자의 3, 4단계(LVT는 4, 5단계) 정비를 담당하는 전투근무지원 모든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전시 작전부대를 위한 전방 전투 근무지원단을 편성하여 지원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특히, 차량, 공병, 통신, 정비교육과 병참 물자의 생산(LVT 재생) 및 기술검사, 이동정비를 실시하면서 무기, 장비의 폐품처리 등과 같은 업무도 담당하였습니다.

 

▶ 해병 제1상륙 사단 포항으로 이동(1959. 3. 28.)

해병대는 포항에서 주둔하고 있었던 미 해병대 제1비행사단이 귀국함에 따라 1956년 7월 1일, 포항기지를 창설하여 오천 비행장(K-13) 기지를 인수하고 주둔지 경계 및 교육시설을 관리, 유지하면서 포항기지에 예비역 교육대를 설치하여 예비역 해병 입영 근무 소집을 실시하다가, 1958년 4월 15일 해병 포항기지로 개편하였다. 해병 제1상륙 사단은 상륙작전부대로서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상륙작전 및 지상작전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9년 3월 28일 파주 금촌에서 포항으로 이동하여 상륙작전 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제1상륙 사단이 포항으로 이동함에 따라 1959년 2월 26일, 제1연대를 기간으로 제1임시 여단을 신 편한 후 김포반도에 계속 주둔케 하여 서부전선 및 수도권 방어를 수행하였습니다.

 

▶ 해병대 베트남 전쟁 파병

 

1965년 8월 13일, 정부와 국회는 북베트남 침략에 직면한 자유 베트남 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파병부대로 제2여단(청룡부대)을 창설하여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상 전투부대로는 최초로 외국 원정군으로 파월하였습니다.

 

캄란에 상륙한 청룡부대는 투이호아지구, 추라이지구, 호이안 지구 전투를 수행하면서, 6년 5개월 동안 짜빈동 작전 등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조국의 명예와 해병대의 용맹성을 발휘하여 ‘신화를 남긴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였습니다.

 


한국 해병대 베트남전쟁 이동경로


▶ 청룡부대 창설(1965. 9. 20.)

 

공산군의 위협에 대처하고 있는 자유 우방국으로서 공동 운명체의 사명감을 느껴 동남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는데 기여하고, 6·25 전쟁 시 자유 우방 국가들의 은혜에 보답하며, 자유와 정의를 이룩한다는 사명과 의의를 가지고 5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에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초 해병대 1개 여단을 포함한 육군 1개 사단(-1)의 파월을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경북 포항기지에서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해병 제2 여단을 창설하여 박정희 대통령 참석 아래 전 국민의 축복과 성원을 보내는 가운데 결단식을 가졌습니다. 제2여단은 미 수송선에 탑승하여 동년 10월 3일, 부산항을 출항하여 10월 9일, 베트남 캄란 만에 도착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청룡부대기 수여


▶ 캄란 지구 작전(1965. 10. 9. ~ 11. 4.)

 

청룡부대는 캄란 항에 상륙(1965.10. 9.)한 이후 동년 10월 19일부로 미 제101 공정사단 제1여단으로부터 캄란만 일대의 전술 책임지역을 인수하였습니다. 1965년 10월 24일부터 제2대대는 워싱턴 작전을 전개하여 판랑 일대 부손 비행장 전술기지의 확장공사에 따른 방호작전을 수행하였으며, 11월 4일부터는 부손 비행장을 위협하는 까투산의 적을 소탕하는 백경 작전을 실시하여 18년 동안 베트콩의 아성으로 군림하였던 까투산을 탈환하였습니다. 그 뒤 제3대대는 나짱 서북쪽에서 번개 1·2·3호 작전을 수행하여 1번 도로를 위협하는 베트콩을 완전히 소탕하여 적의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나트랑 서북쪽 산악지역과 나트랑 비행장을 안전하게 확보하였습니다.


청룡부대 캄란만에 상륙


▶ 투이호아(Tuy Hoa) 지구 작전(1965. 12. 16. ~ 1966. 8. 17.)

나짱 서북쪽에서 번개 작전을 수행하였던 청룡부대는 남베트남 3대 곡창지대 중 하나로서 베트콩의 식량 공급원 지역이었던 ‘투이호아’로 이동한 후 청룡 1호(여단급) 작전을 전개하여 투이호아 평야 지역을 평정하고 봉로 만 일대에서 준동하던 북베트남 정규군과 베트콩 약 1,500명을 정말 소탕한 후 남베트남의 대동맥인 1번 도로를 개척하였습니다.

 

그 뒤 약 1개월 동안 투이호아 서남부 평야에서 주민들과 피난민 추수 보호를 위한 청룡 2호 작전을 실시하였고, 이후에도 양민 보호, 촌락 재건 등을 위한 재건작전을 수행한 뒤 봉로 만 부두시설과 1번 도로 개척을 위한 미 건설 공병부대의 항만 및 교량 건설과 비행장 건설공사를 방호하였습니다.

 

특히 1965년 8월 11일, 귀순자의 첩보에 따라 투이호아 서쪽 14km 지점에서 실시한 기습작전과 적극적인 탐색작전에서 베트콩의 동굴을 탐색하던 청룡부대 제3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는 선두에서 동굴 탐색을 실시하던 중, 적이 던진 수류탄으로 뒤따르는 부하들이 위험해지자 이를 가슴에 안고 산화하여 부하를 보호함으로써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전 국군의 귀감이 되었으며 군인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뚜이호아 지역 청룡부대 본부


▶ 추라이(Chu Lai) 지구 작전(1966. 8. 18. ~ 1967. 12. 21.)

북베트남군의 주요한 해상 침투로인 동시에 연합군의 최대 보급기지인 다낭 비행장과 남베트남군 1군단 지역 배후에서 위협하는 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추라이지구(쾅 나이 성)로 이동한 청룡부대는 황금, 비봉, 용안, 투망, 강구, 짜빈동, 뇌룡, 용머리, 테로 이매복, 용화 작전 등 수많은 작전을 수행하여 추라이지구 내 전술 책임지역을 확보하였습니다. 특히 짜빈동 작전에서 북베트남 정규군 1개 연대의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도 육박전, 역습 등을 실시하여 4시간 동안의 사투 끝에 적을 격퇴하여 베트남전 사상 중대 규모로는 최대의 전승 기록을 남겼습니다.

 

▶ 짜빈동 작전(1967. 2. 14. ~ 15.)

짜빈동 작전(1967.2.14.23:20~1967.2.15.07:24)은 청룡부대 제3대대 제11중대가 손티 군 짜빈동에서 북베트남 정규군 제2사단 제1연대 및 지방 게릴라가 인해전술로 파상적인 기습공격을 가해옴에 따라 전술기지의 외곽과 내곽 방어선으로 연하는 교통호를 이용하여 일제 사격과 수류탄 및 크레모아 지뢰를 이용, 침입하는 적을 격퇴하였습니다.

 

한때는 제3소대의 진지 일부가 돌파되어 치열한 진내 육박전까지 전개하였지만 지원화기의 적절한 운용, 역습 부대의 과감한 공격 등으로 4시간의 사투 끝에 적의 주력을 격퇴하고 전술기지를 방어하였다. 이 전투 결과 한국 해병대의 막강한 전투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룡부대 제11중대는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하였고 제11중대 사병 전원은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습니.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제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군인 최고 명예인 태극무공훈장 수여받았고, 1968년 5월에는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도 수상하였습니다.

 


태극무공훈장을 수훈하는 정경진 11중대장


▶ 호이안(Hoi An) 지구 작전(1967. 12. 22. ~ 1972. 1. 31.)

청룡부대는 미 해병대 제3상륙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고 베트남 제2의 전략도시인 다낭과 호이안시를 연결하는 1번 도로를 확보하여 베트남 정부의 통제구역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라이 지역에서 호이안 지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호이안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북베트남 정규군 제3사단이 대규모 구정공세를 가해 왔으나 반격작전인 괴룡 작전을 1개월 이상 실시하여 적을 격퇴시켜 호이안 지역은 물론, 다낭 지역을 지향하였던 적의 위협을 제거하였습니다.

 

그 후 전술 책임지역 내 적 섬멸을 위한 용진 작전, 추수 보호작전 등을 전개하였고, 서룡 작전, 포병대대 방어작전, 승룡 작전, 황룡 작전 등을 전개하여 지역 내 적을 대부분 소탕하고 호이안 지역을 평정하였습니다.

 

특히, 승룡 12-1호(고노이 섬) 작전 및 15-1호(베리아 반도 상륙) 작전은 베트남 전투사에 길이 빛날 작전이었습니다.

 


총탄난 철모를 보고 있는 청룡


▶ 고노이 섬(승룡 12-1) 작전(1969. 6. 3. ~ 19.)

청룡부대는 작전 기간 중 다낭 남방 20km 지점에 있는 북베트남군 제36 연대의 난공불락 요새지인 고노이 섬의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지원을 받으며 수륙양면과 공중 등 입체적인 기습공격작전을 감행하여 지역 내 적을 정말 소탕하고 장비(도저 30대)를 이용, 산재한 지하 통로 및 적의 전략적 은거지를 완전히 제거한 작전입니다. 이 작전으로 디엔반 군과 호이안 시는 외곽으로부터 적의 위협을 받지 않고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었습니다.

 

▶ 베리아(승룡 15-1) 반도 상륙작전(1969. 9. 5. ~ 30.)

다낭 30km 지점에 위치한 베리아 반도는 북베트남 정규군과 베트콩이 근거지로 이용하여 호이안 지역과 다낭 일대의 군사시설을 위협하던 적의 요새지였습니다. 청룡부대는 인천 상륙작전 이래 처음으로 베트남전 사상 최초로 한·미 해병대가 연합으로 미 제7함대의 지원 하에 여단급 상륙작전(한국 해병대 RLT급, 미 해병대 BLT급)을 감행하여 베리아 반도의 적을 소탕하고 초토화함으로써 적의 지역 사용을 거부하였으며, 억류된 1,900여 명의 양민을 구출하였습니다.

 


베리아반도에 상륙하는 청룡 용사들


▶ 개선 및 파병 결과

베트남전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열린 파리평화협정이 진행되어 미 대통령인 닉슨이‘베트남 전쟁의 베트남 전화 계획’을 추진하면서 이에 따라 철군 계획을 발표하여 1971년 12월 4일에 제1진이 철수하기 시작하여 1972년 2월 24일, 제5진이 마지막으로 철수하여 2월 29일에 부산항에 도착함에 따라 제2여단(청룡부대)은 개선하여 귀국을 완료하였다. 건군 사상 처음으로 해외 원정군으로 장도에 올랐던 제2여단은 캄란 만에 상륙한 이래 6년 5개월간 여단급 작전 55회와 대대급 작전 106회를 비롯하여 소부대 작전 144,173회를 통해 적 사살 9,688명, 포로 및 귀순 1,321명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한편, 8,810톤의 구호활동 및 대민 진료, 403,729명에 대한 교육지원, 1,593회 건설 지원, 450,064명의 친선 활동 등 대민 봉사활동을 전개함으로써 3회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비롯하여 1회의 미 대통령과 베트남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하였습니다.

 


부산항 3부두에 개선하는 청룡부대 용사들


▶ 제5해병여단(’ 66. 11. 23)

 

해병대는 제1사단 제2연대를 기간으로 제2여단(청룡부대)을 편성하여 파병한 후 제1사단이 전략 기동예비대로서 임무수행에 지장을 초래하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해병대 임무수행능력 보강을 위하여 5,470명의 병력이 보충되어 창설 이후 최초로 30,430명으로 증강된 병력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해병대는 증강된 병력으로 1966년 11월 14일, 제5연대를 신편 하고 이 부대를 기간으로 1966년 11월 23일, 새로운 전투여단인 제5여단을 창설하여 8년 동안 김포반도에서 휴전선을 지킨 제1임시 여단과 1967년 1월 23일, 부대를 교대함으로써 서부전선 수도권 방어력을 보강하였습니다. 제1임시여단은 수도권방어 임무를 마치고 제1사단으로 복귀함에 따라 제1사단 전투력이 강화되어 전략 기동예비대로서 임무 수행 능력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 지휘 참모대학(’ 64. 1. 1)

 

1964년 1월 1일에 창설된 해병 참모 지휘 학교는 1967년 7월 1일부로 국본 일명(해) 제9호에 의거, 해병 지휘참모대학으로 개편되어 대학반, 고등군사반을 운영하였습니다. 해병대 위관 및 영관 장교에게 연대급 및 사단급 이상 부대의 지휘관과 참모의 직능 수행에 필요한 지상전 및 상륙작전에 관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 해병 교육기지사령부 창설(1967.5.16.)

 

재진부대 행정 및 근무지원 임무를 위하여 1959년 2월 5일 국본 일명(해) 제50호에 의거 해병교육단에서 증편된 진해기지는 대통령령 제3070호에 의거, 해병 교육기지사령부로 개편되어 해병대 장병의 각종 특기교육과 장교, 부사관 후보생, 신병에 대한 기초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해병학교, 상륙 전학교, 해병훈련소, 상남 보병 훈련 연대, 수송교육대, 통신 교육대, 사격장 관리대 등을 지휘·관리하였으며, 국방부 훈령 제157호(1973.7.10.)에 의거 교육 기능이 해군교육단에 통합 운영되고 1973년 10월 10일부로 해체되었습니다.

 

▶ 상륙전 기지사령부 창설(1967.5.16.)

 

해병대 포항기지를 기간으로 대통령령 제3071호(1967. 5.16.)에 의거하여 상륙전 기지사령부를 창설하여 포항기지의 경비(전시 1개 RLT편성)를 담당하며, 1971년 7월 1일부로 예비군 훈련연대(제21,22,23연대)를 예속하여 예비역의 동원과 관리,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전략기동부대 예비대로서 언제든지 출전 가능하도록 준비하며, 상륙전 훈련에 필요한 교장시설 및 수용시설을 관리하였으나, 국방부훈령 제157호(1973.7.10.)에 따라 1973년 9월 1일부로 상륙전기지사령부 임무와 시설 및 제21연대 임무는 해병사단에, 제22연대는 해군 목포 경비부에, 제23연대는 해군 제5해역사에, 제36 특별 대대는 해군 제주 경비부에 각각 인계하고 해체되었습니다.

 

▶ 상남 보병 훈련 연대 창설(1957.1.23.)

 

1957년 1월 23일, 해병훈련소에 상남 야외훈련대를 창설하여 최고의 강한 해병을 양성하는 실전적 야외 교육훈련을 실시하다가 1963년 3월 1일 상남 훈련 연대로 개칭하였습니다. 1971년 7월 1일에는 상남 훈련 연대를 상남 보병 훈련 연대로 개편하였다가 국방부 훈령 제157호(1973. 7.10.)에 따라 해병대 사령부 해체 직전인 1973년 9월 1일부로 상남 보병 훈련 연대가 해체되면서 해군 교육단에 인계되었고, 1977년 1월 1일까지 20년간 20여만 명의 해병대 장병을 양성하였습니다.

 

현 창원시에 있는 상남지역의 34만 평의 부지에 상남 훈련 연대 본부(현 용호동 롯데아파트), 각개전투 및 침투 사격장, 수류탄 교장(현 일동 아파트), 중·소대 전술훈련장(현 반송아파트), 각종 직사·곡사화기 사격장(현 도민 사격장), 벽암지 교육대, 공수 교육대 등 20여 개의 해병대 전술훈련장과 야외 교육훈련장이 산재되어 있었습니다.

 

▶ 해병대 항공부대 창설(’ 58. 3. 1)

 

해병대 항공대는 1958년도에 U-6(L-20) 2대를 최초 도입하여 1958년 3월 1일부로 제1사단 항공 관측대를 금촌 비행장에서 창설하여 처음으로 항공기를 운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2년 5월 31일에는 해병대 항공병과를 창설하여 해병대 조종사가 직접 해병대 항공기를 운용하면서 각종 훈련 및 작전에 참여하였습니다.

 

1963년 3월 18일에는 제1임시 여단 예하에 항공 관측대가 창설되어 수도권 지역의 항공정찰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1965년 9월 20일 제2여단 항공대가 창설되어 베트남 파병 기간 중 총 450여 회의 출격을 통해 1,537시간을 비행하며, 근접 항공지원, 탐색 및 정찰, 사탄 유도, 전단 살포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여 해병대가 각종 전투에서 승리를 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1968년에 1·21 사태,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시 대간첩 작전에 참가하였던 해병대는 헬리콥터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69년 2월 해병대 사령부 직할 경비대 예하에 헬기교육대를 여의도 비행장에서 창설 하였고, 1971년 7월 해병대사령부 직할 항공대를 여의도비행장에 창설하였으며, 1972년 7월 성남 신촌리 비행장으로 이전하였습니다.

 

그러나 1973년 10월 10일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어 해군에 통·폐합됨에 따라 약 16년간의 장대했던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해병대가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 12대(고정익 5, 회전익 7)는 모두 해군으로 전환되었고, 1977년도에는 해군 함대항공단이 김해비행장에서 K-3비행장으로 이전하면서 K-3비행장이 통합 되었고, 1978년도에는 해병대 항공병과가 해체되면서 해병대 항공병과 정원 125명(장교 89, 준사관 4, 부사관 32)도 해군에 흡수 통합되었습니다.

 

이후 1987년도에 해병대사령부가 재창설되면서 헬기를 갖고자 하는 많은 노력으로 1994년도와 1995년도에 다목적 헬기(UH-60) 10대를 상륙기동헬기로 도입하였으나 당시 해병대는 운용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해군 제6항공 전단 예하에서 운용하게 되었습니다.

 

2012년도에 상륙기동 및 공격헬기 확보와 항공단 창설계획이 반영된 ’ 12~’ 30 국방개혁 기본계획이 승인되어 공지기동 해병대로 도약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2014년 9월 12일부로 해병대 항공병과를 창설하여 항공인력을 양성하였고, 2016년도에는 시제기를 개발하여 양산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2021년 항공단 창설을 목표로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1958년 최초 해병대에 도입된 U-6기


해병대 시련기

 

▶ 해병대 사령부 해체(’ 73.10.10)

 

 

군은 유신과업 수행을 위한 군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고, 전투력 위주로 정비를 강화하여 자주국방 태세를 조속히 확립하며, 국가 자립경제 발전을 위해 경제적으로 군을 관리·운영하기 위하여 대통령 분부 사항 (1973. 5.29.) 및 해병대 운영 개선에 관한 국방부 훈령 제157호(1973.7.10.)에 의거, 해병대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전투부대를 제외한 해병대 사령부와 교육 및 지원부대를 해군에 통·폐합시켰습니다.

 

▶ 해병 참모부(’ 73.10.1)

 

국방부 훈령 제157호에 의거하여 해군본부 내 해병 참모부를 편성·운영하여 해군참모총장을 보좌하고 제2참모차장의 지시에 따라 해병대 부대의 상륙작전, 도서방어작전, 교육훈련과 교리 발전에 관한 사항을 분장하였으며, 해병대 사령부 재창설 시까지 해병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 관리하였습니다.

 

▶ 연평부대(1974.9.20.) 및 제6해병여단(1977.1.1.) 창설

 

해군본부 일반명령 제10호에 의거 1974년 3월 11일 해군 도서 경비부대를 해군 도서방어부대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1974년 9월 20일부로 연평도를 경비하던 2중대와 우도 경비소대를 통합하여 해군 도서방어부대 예하부대로 연평부대를 창설하였고, 제6해병여단 예속의 연평부대를 실질적인 지휘가 가능하도록 1996년 1월 1일 해병대 사령부 직할부대로 예속 변경하였으며, 해군 본부 일반명령 제9호에 의거 1977년 1월 1일부로 해군 도서방어부대를 해체하고 제6해병여단을 창설하였습니다. 제6해병여단과 연평부대는 서해 최북단 6개 전략도서를 방어하는 부대로서 적 활동을 감시하며, 경제수역 확장 및 주변 어로작업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 제2해병 훈련단 창설(1977.1.1.)

 

1977년 1월 1일 창설된 제2해병 훈련단은 1987년 11월 1일 해군본부 직할에서 해병대 사령부 예하로 예속 변경되었으며, 1996년 11월 1일 해병대 교육 훈련단으로 개칭하여 교육부대에 적합하도록 일반형 참모 형태에서 부장형 참모 형태로 조직을 개편하였습니다.

 

1998년 3월 1일, 해병대 사관후보생 양성과정을 해군 교육사령부에서 인수하고 장교 교육대를 장교 교육 대대로 개편하여 예하에 장교 초군반 중대와 사관후보생 중대를 편성함으로써 해병대 장교 양성교육을 25년 만에 해병대 주관으로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2002년 3월 1일부로 상륙전 교육대대를 창설하고 상륙전 고군반 교육과정을 해군대학으로부터 인수하였으며, 2004년 4월 1일부로 포병 교육대와 수색 교육대를 신편 하여 현재의 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교육훈련단 현대화 필요성에 따라 2000년 8월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사업이 추진되어 명실상부한 해병대 양성·보수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제2해병사단 창설(1981.4.16.)

 

해병 제2여단은 1973년 10월 10일 국방부 훈령 제157호에 의거, 제2해병여단으로 부대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1979년 4월 1일 제2포 병단을 창설하고 1981년 4월 15일에 제1연대, 제5연대, 제8연대를 신편 하여 1981년 4월 16일, 해군본부 일반명령 제8호에 의거 제2해병사단을 창설하였습니다.

 

제2사단은 수도권 서측 관문인 김포와 강화도(26개 부속도서 포함)를 방어하며, 유사시 연안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 해병대 사령부 재창설(’ 87. 11. 1)

 

경제적 군 운용이라는 미명 하에 해병대 사령부 및 교육, 군수지원부대가 해체되어 해군에 14년간 통합 운용된 해병대는 전력 관리의 문제점이 나타나 상륙작전에 관한 지휘구조를 개선할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해병대 부대를 통합 지휘할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하였다.


해병대사령부 재창설(1987. 11. 1)


▶ 상륙지원단 창설(1994.4.4.)

1977년 1월 1일부로 제1해병사단 해안 지원단으로 창설되었다가 1994년 4월 4일 해병대 사령부 직할부대인 상륙지원단을 창설하였습니다. 이후 2014년 2월 4일부로 해병대 군수지원단으로 개칭되었다가 2015년 4월 6일부로 해병대 군수단으로 개칭되어 전·평시 해병대 전 부대에 대한 군수지원 전담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 해병대사령부 발안으로 이전(’ 94. 4. 6)

해병대 사령부는 재창설된 직후부터 해군본부 부속건물인 기지병원을 개축하여 사용하던 중 재경부대 교외 이전계획(1988. 4.15.)에 의거, 경기도 서해안으로 해병대사령부 이전을 결정하고 52개 지역을 대상으로 33회 검토하여 현 위치인 화성시 봉담읍 형제산 기슭에 사령부를 신축한 후 이전함으로써 해병대의 전통을 계승하고 미래지향적인 해병대 역사를 창조하는 요람지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 연합 해병구성군사령부(CMCC) 창설(2008.2.20.)

한·미 군사위원회 제21차 상설회의 각서(2008. 2.20.)에 따라 연합사의 연합해병 능력의 통합성을 향상하기 위해 창설하였습니다.

 

연합사령부에 대한 주요 변경내용은 창설과 동시에 연합 해병 구성군사령부는 지정된 한국 해병대 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지정 또는 명시된 미 해병대 부대는 한국 전구에 도착과 동시에 연합 해병 구성군사령부로부터 전구 작전통제 또는 전술통제를 받으며, 정전 시 연합 해병 구성군사령부 사령관은 한국 해병대 사령관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시 지휘권 전환을 위한 발전과 협조를 지원하기 위하여 향후 연합 해병 구성군사령부의 모든 연합사 연습 및 연습계획 발전은 한국 해병대 주도로 실시하고, 전시 연합 해병 구성 군사령관은 미 해병 장성이 수행하여 임무를 계획하고 시행하기 위한 본부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2011.6.15.)

연평도 포격전(2010.11.23.) 발발 후 정보, 감시자산 및 타격수단이 강화된 강력한 서북도서 전담 방위사령부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백령도, 연평도 등 서해 5도 방어를 전담하는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창설하였습니다.

 

해병대 사령부를 모체로 정보참모처, 작전참모처, 화력참모처와 항공지원작전본부, 해상지원 작전본부 등 창군 이래 최초로 육·해·공군 전력을 운영하는 합동참모부의 성격으로 편성된 서북도서방위사령부는 해병대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실질적인 작전사령부로서 합동작전 운용능력을 완벽하게 발휘하고 있습니다.

 

▶ 제9해병여단 창설(2015.12.1.)

1950년 12월 11일, 해군본부 직할부대인 해군 제주기지로 창설되었고 1962년 10월 15일, 육·해·공군 및 해병대가 포함된 통합사령부가 창설되었습니다.

 

1974년 1월 28일에는 지·해상 방어 임무를 수행하도록 육·공군이 해체되고 해병대 장성이 지휘하도록 개편되었으며, 1986년 2월 1일부로 제주 방어사령부로 개편되어 제주해역 및 주변 도서방어 임무를 수행토록 하였습니다.

 

이후 ’ 14~’ 30 국방개혁 기본계획 추진으로 2014년 3월 12일, 국방부 부대 구조 개편 지시에 따라 해병대 제9여단이 창설되어 통합방위작전과 예비군 관리 및 교육훈련 임무 수행으로 남방해역 도서군 안정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 지휘관리 개선



1973년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된 이후 14년 만인 1987년에 재창설되었으나 지휘권 행사를 위한 법령이 개정되지 않아 여전히 재창설 이전과 같이 해군에 예속된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에 역대 사령관들은 상부에 문제점을 끊임없이 제기하였고, 예비역들도 전우회를 중심으로 국회 및 청와대에 관련 법령 개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차적으로 해병대는 작전지휘체계를 보강하기 위하여 부대령 부대와는 그 위상이 다른 직제령 부대로서 해병대 사령부가 해병대 부대를 지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90년 8월 1일부로 공포된 법률 제4249호 국군조직법과 1990년 9월 29일 공포된 대통령령 재 13113호 해병대 사령부 직제령에 의해 해병대 사령부는 육군의 군사령부나 해·공군의 작전사령부와는 다르게 합참 군령 계선상의 작전사령부이면서 해병대 운영에 관한 제반 사항을 관장하는 군정 사령부임을 보장하여 해병대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실질적인 지휘기능이 보장되지 않아 1993년도에 해병대 지휘관리 개선 연구팀을 발족하여 작전 및 부대 지휘 시 문제점을 해군본부에 건의하였고, 1997년 12월 해군본부와 국방부에 해병대 지휘관리체제 개선위원회가 구성되어 1991년 1월 21일 해병대사령관이 해병대 부대를 지휘하도록 조직 및 정원에 관한 통칙, 해병대 직제령, 군 인사법 시행령, 국방 기획관리 예산 및 군수품 관리, 국방 보고 규정, 군무원 인사관리지침, 예비군 실무편람 등 법령 및 규정을 개정하여 미래전에 대비한 다목적 신속대응군으로서 해병대 위상을 제고하였습니다.

 

해병대는 1·2차 지휘관리 개선을 통해 일부 법률 개정의 성과를 얻었으나 여전히 예산, 전력, 예산분야 등에 관한 실질적인 지휘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이 발생하여 해병대에 대한 국민적 여론과 국회의 요구에 의해 2011년 1월 14일, 해병대의 인사·예산권을 강화하고 해병대의 주임무를 상륙작전으로 명시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해병대 독자적 지휘권 확립 법안이 발의되었고, 2011년 4월 22일과 6월 23일 국회 국방위원회 및 국회 본회를 통과하여 2011년 7월 14일 국군조직법, 군수품 관리법, 군 인사법 등의 개정법률안이 공포되어 2011년 10월 15일부로 시행되어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국군조직법상 육·해·공군과 함께 국군의 한 조직으로 해병대사령관은 인사, 예산, 전력 편성 등 해병대 지휘에 있어 독자적인 지휘권 행사를 법적으로 보장받아 해병대 및 해병대사령관의 위상과 권한이 통·폐합 이전의 수준으로 강화되었습니다.

 

▶ 다목적 신속대응군



해병대는 소수 정예군으로서 임무와 역할이 다양하고 막중하다. 상륙작전, 지상작전, 특화거점방어, FEBA 방어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국토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인 서북도서에는 제6여 단과 연평부대가, 제주도에는 기존의 제주 방어사령부를 해체하고 제9여단을 창설(2016.12.1.)하여 이를 굳건히 방어하고 있다. 21세기 해병대는 현재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미래의 전장환경에 적합한 다목적 신속대응군으로서 고강도 전면전으로부터 전쟁 이외의 군사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상시 전투 준비가 완료된(Force in readines)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장차 전의 양상은 해상을 통한 전력투사로 연안지역 중심의 작전이 전개될 것이다. 따라서 장차전의 양상에 대비하여 해상 및 공중을 통한 입체적 상륙돌격, 연안 도시지역 작전, 초수평선 입체 기동 상륙작전, 전략도서 및 전략기지 방어 작전 등의 교리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해병대 관련 표어


▶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표어는 미 해병대의 ‘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에서 한국전쟁시 유래한 것으로? 한국 해병대가 57년간 사용해 온 우리의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자유 우방국가의 모든 해병대가 임무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평화의 선봉군으로 갖는 이 표어에 대한 긍지는 그 어느 것보다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해병대의 특성을 대변하는 상징 문구로서 해병대의 일원으로서 자부심과 긍지, 명예심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이것 이상으로 해병대 의식 구조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1987년부터 ‘해병대 정신’의 표어로 사용되고 있는 이것은 현역·예비역은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도 ‘해병대’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문구로서 애칭 되고 있다.

 

▶ 귀신 잡는 해병대

낙동강 전선의 피아가 대치된 상황에서 한국 해병대 김성은 부대(1개 대대)는 진동리 서방 고사리 지구 섬멸전에서 6. 25 이후 파죽지세로 침공해 온 북괴군의 예봉을 꺾고 침공을 저지함으로써, 국군 최초의 큰 전과를 획득하였다. ‘50. 8. 5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획득한 뒤, 통영 상륙작전에서 ‘50. 8. 17 - 9. 11간 한국 최초로 단독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적을 완전 격멸하자, ‘50년 8월 23일 통영상륙 작전에 대한 취재차 원문고개로 해병대(김성은 부대)를 방문한 미 『뉴욕 헤럴드 트리뷴』기자【마가렛트 히킨즈】는 해병대가 통영에서 거둔 전과처럼 기습적인 양동 상륙 작전으로 우세한 적군(북괴군 7사단 600여 명)을 공격해서 적의 점령지를 탈환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고, ‘귀신 잡는 해병대’의 표제 아래 취제 기사를 널리 보도함으로써, ‘귀신잡는 해병대’란 말의 씨를 뿌려 놓은 계기가 되었으며, 이 전공으로 국방부 장관의 표창이 수여되었다

 

.▶ 무적해병

51년 6월 초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격퇴한 뒤 캔자스(KANSAS) 선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 한국 해병대 제1 연대가 중동부 산악 지역의 태백산맥에서 가장 험준한 전략적 요충지인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 제5연대가 1차 공격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한국 해병대가 임무를 교대하여 ‘51. 6. 4 ∼ 6. 20간 천연 요새인 난공불락의 진지를 돌파하여, 피와 땀으로 혈전 17일간의 끈질긴 공격 끝에 적 1개 연대 규모를 격멸하고, 24개 고지를 탈취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해병대 공훈을 치하하기 위하여 ‘51년 이승만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 및 미 8군 사령관을 대동하고 해병대 제1연대를 방문, 부대 표창장과 감사장을 수여하면서 격려사를 통하여 아 해병대를 ‘무적 해병대’라 칭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무적 해병’ 휘호를 하달하였다.

 

▶ 신화를 남긴 해병대

 

해병대는 월남의 공산세력을 분쇄하고, 영원한 세계평화를 성취하겠다는 사명으로 건군 사상 최초로 해외 원정하는 전투부대의 선진으로 청룡부대를 1965년 10월 9일 【캄란】만에 상륙시켰다. 해병대 제2여단 (청룡부대)은 【캄판】【판랑】【나짱】방어전을 수행한 후, 1966년 9월 19일 【추라이】로 이동하여 작전임무 수행 중 월맹 정규군 제2사단 1 연대와 21 연대 및 지방 게릴라 1개 대대가 1967년 2월 14일 23시 0분에 손 틴군 짜빈동에 위치한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에 인해전술로 파상적인 기습공격을 가해왔으나, 해병 제11중대는 중대 전술 기지를 사수하면서 수류탄, 크레모아, 지원화기의 적시 적절한 운영, 역습 부대의 과감한 공격과 육박전으로 4시간의 사투 끝에 적 사살 243명의 대전과를 획득하였고, 중대 병력으로 막강한 적의 대부대를 저지 섬멸한 쾌거는 월남전 사상 유례없는 대첩이었으며, 해병대의 용감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 작전지역을 방문한 미 해병대 제3상륙 군단장 월드 중장은 ‘내가 월맹 전에서 처음 보는 전과다. 전장병의 용감성은 우방 군의 귀감이다’라고 격찬하였으며 외신기자들이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표제 하에 대장(정경진 대위), 소대장(신원배 소위)은 최고의 훈장인 태극 무공훈장을 받는 한편 유공장병들도 국내외 많은 훈장을 받았다.

 

▶ 최강부대 해병대

 

창설 당시 신현준 초대 사령관은 훈시를 통해 ‘해병대는 일치단결하여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 유사시에 대비한 최강의 부대가 되도록 교육훈련에 정진하자’고 역설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대』,『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하였고, 1951. 8. 30 펀치볼 작전의 일환으로 실시된 일명 김일성(924) 고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투를 『神人이 경찬한 공훈』이라고 격찬함으로써 해병대가 최강부대임을 증명시켰다. 또한 1953년 3월 24일 미 8군 사령관 테일러 중장이 진해 해병기지 방문 시 해병대 창설 4주년을 맞이한 해병대에 대한 격려사에 ‘최강부대’라는 칭호를 준 것이 유래가 되었다.

 

▶ 무에서 유를 창조

 

해상으로부터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여 해안두보(海岸頭堡)라는 실지 영을 확보하여 무(無)의 상태에서 병력과 장비, 물자를 축적하여 유(有)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륙작전의 특수성과 초창기의 불비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최강 해병을 만들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창설했다는 해병대 역사 속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병대 특유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정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 해병혼

 

해병대 정신의 근저(根底)가 되는 해병 혼은 바로 ‘필승의 신념’으로 승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동시에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해병대의 핵심가치이자 정신 체계를 상징한다.

 

▶ 안되면 될 때까지

‘안되면 될 때까지’라는 표어는 해병대가 창설 이후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면서 6 · 25 전쟁과 베트남전 등 수많은 전투에서 불패의 신화를 이룩하며 만들어낸 표어이다. 해병대는 부여된 임무는 반드시 완수하고 만다는 사명감과 특유의 강한 충성심으로 지금까지 제시된 목표를 한 번도 완수하지 못한 적이 없는 불굴의 정신을 가진 부대이다. 이 표어는 해병대 중에서도 가장 강한 훈련을 받는다는 해병대 수색대의 표어로 활용되어 왔으나 지금은 해병대의 임무 완수 정신을 상징하는 표어로 사용되고 있다.

 

▶ 국민과 함께 해병대와 함께 국민과 함께하는 해병대라는 표어는 해병대 창설 50주년을 맞이하여 창설된 표어로 당시 해병대는 전 부대 장병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국민과 함께! 해병대와 함께"라는 표어를 제작하였다. 이후 해병대는 헌신적인 대민지원과 철저한 임무 완수를 통해 "국민에게는 신뢰와 사랑을 받고, 적에게는 전율과 공포를 주는 부대"로 더욱 발전하여 대한민국 최정예 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표어는 100% 지원자로 구성되는 해병대의 강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용어로 해병대 특유의 교육훈련, 전우애, 충성심 등에서 우러나온 표어이다. 또한 타군과 차별화되는 해병대의 명예와 전통 속에서 자기 자신이 해병대의 일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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