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중동전쟁.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이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공격해 일어난 전쟁. 이스라엘 측은 시나이 전쟁(카데쉬 작전)이라고도 한다. 이집트(아랍 연맹 측)에서는 삼국 침략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전쟁 기간은 1956년 10월 29일~ 1957년 3월.
2. 전쟁 배경
1956년 7월 26일 ,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양팔 외교전략을 취했습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아스완 댐을 짓고, 소련과 무기 협정을 맺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도입하려 했던 것. 하지만 동유럽산 무기 도입 때문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측은 아스완 댐 건설비용 지원을 거부했고, 이에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은 다음번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친소 노선을 펼치며 수에즈 운하를 집어삼킨 이집트에 영국과 프랑스는 크게 반발하였고,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선박이 수에즈 운하 통과를 금지당하는 데 크게 격분했습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는 단순히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 재산 피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를 연상시키는 침략적 팽창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1930년대 히틀러를 상대했던 앤서니 이든, 영국 총리는 나세르를 중동의 히틀러로 간주하였고, 제2의 히틀러가 중동에서 패권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방지하는 예방전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나세르의 행동을 징벌하지 않으면, 나세르가 서방을 우습게 알고 폭주할 것이라 여겨 군사행동을 결의하였으며 이집트에게 큰 위협을 느끼던 이스라엘 역시 동맹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사실 비단 수에즈 운하만이 이 전쟁의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이든 정권은 이라크에서 값싸게 석유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나세르가 훼방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나세르는 이집트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 아랍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이라크에서 영국의 입김을 제거하려 들었고 영국은 이에 열 받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기 몰레 정권 역시 나세르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었는데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알제리 전쟁에 나세르가 개입하여 반프랑스 게릴라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이집트를 타격할 준비를 하는 한편 이스라엘에 프랑스제 최신 병기를 지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름대로 고민이 컸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호전적인 나세르가 선제공격을 해올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고 당시 가자지구에서 양측 간 계속된 제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전과가 훨씬 크긴 했어도 이스라엘에 지속적으로 타격을 주는 팔레스타인 민족 게릴라인 페다이가 나세르의 지원을 받아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들 페다인에 의해 이스라엘의 한 키부츠 지도자인 로이 로스버그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모세다 얀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정당한 싸움을 하는 저들이 어중간한 대응으론 절대로 우리를 모두 죽이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테니 유대인들이 살기 위해서는 외세의 간교한 평화협상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면서 투지를 불태웠습니다.
3. 전쟁 전황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삼국 외무장관은 셰브르에서 3자 회담을 벌였다. 이집트 공격을 결의했는지 안 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쳐서 싸우고 있으면 영국과 프랑스가 질서유지를 구실로 개입하는 구도로 진행되어야 했지만, 양측은 전쟁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고, 이스라엘군이 혼자서 이집트를 거의 발라버렸습니다. 이스라엘 국경의 시나이 반도 방향에서 시작된 공세는 전선 중앙부와 남부 방향의 돌파로 일찍 전세가 결정돼버렸고 11월 5일,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시나이 반도의 최남단까지 모조리 점령하여 전쟁은 이집트의 완패로 마무리될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영국 공순 부대와 프랑스 외인부대가 도착하여 이집트는 완전히 3면에서 적군의 공격을 받는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자신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는 것에 분노해 압박을 넣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핵전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던 소련도 이집트를 감싸며 핵폭격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세르가 중동의 히틀러이며 나세르를 좌시하는 것은 1930년대 유럽의 참사를 재현할 것이라는 인식을 전혀 공유하지 않았던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과격한 군사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당연히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미국으로선 '고작' 수에즈 운하 하나 때문에 소련과의 전면 핵전쟁까지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행동은 제국주의의 뽕에 취해서 수십 년 전처럼 식민정책을 유지하겠다는 행동이었으므로 도덕적 정당성도 부족했으며, 세계대전으로 식민지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유진영 국가의 이런 행동은 필연적으로 독립할 식민지 국가들을 죄다 공산국가로 만들 수도 있는 악수 중의 악수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소련이 무력을 사용해도 영국과 프랑스를 돕지 않겠다고 압박을 가했다습니다 더 나아가서 영국에 대한 재정지원 중단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석유 제재까지 가했습니다. 그리고 미 해군 6함대 소속 미드웨이급 항공모함 코랄 시와 에섹스급 항공모함 랜돌프가 지중해로 급파되어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무력시위를 했습니다. 미국이 정말로 양측과의 교전도 염두했는지 미 해군의 알레이 버크 제독이 당장 6함대 사령관에게 영국과 프랑스의 적대행위에 대배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정도. 결국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 초강대국들이 손 잡고 압박을 가하니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 백기 투항을 해야 했습니다.
UN의 중재로 1956년 11월 6일,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철군하고 1957년 3월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영-프 연합군의 재침과 소련군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미 해군의 포레스 탈급 항공모함 포레 스타일이 추가 증원되었습니다.
4. 전쟁 영향
영국과 프랑스는 가장 큰 손해를 봤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고도 오히려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두 나라가 우려했던 나세르를 중심으로 한 아람 민족주의의 단결과 이집트의 패권 차지라는 나세르의 목적에 오히려 힘을 실어준 격이었습니다. 서방 세계의 불협화음과 전후 영국의 결정적인 실책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이 사건은 당시 영국 총리였던 앤서니 이든이 최악의 건강 상태 속에서 제대로 된 판단과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던 것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대중들의 지지뿐 아니라 보수당의 지지까지 잃게 되어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당연히 정치인으로서의 생명도 끝났습니다.
이 전쟁이 끝난 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 핵전쟁의 위기에 닥치면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독자적인 핵전력 개발에 나서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2차 대전 기간 중에도 많은 연구를 해 왔고, 풍부한 핵연료와 실험지를 가진 호주의 도움까지 등에 업은 영국은 비교적 빨리 핵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프랑스는 진도가 늦었습니다. 거기에 먼저 핵클럽에 가입한 영국은 재빨리 자신들을 배신했던 미국 편에 붙어 프랑스의 핵개발에 딴지를 걸면서 올챙이 시절 모르는 개구리란 게 어떤 건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열 받은 프랑스 정부는 조국의 핵무장을 외치면서 막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후 1960년 샤를 드골이 재집권하여 알제리로 혼란스러웠던 프랑스의 내정을 휘어잡으면서 프랑스의 핵개발은 가속화됩니다. 이 와중에 영원히 자국 영토로 못 박으려던 알제리는 기어코 전쟁으로 독립해버렸습니다.
서방 세계의 패권이 영국, 프랑스가 아닌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국력 차이는 일찍이 미국이 압도한 지 오래였지만 수에즈 전쟁은 전 세계에 이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부 시각에서는 이 시점으로 서방 국가들이 (소련 제외) 국제 연합 UN의 눈치를 보는 새 시대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왜냐면 미국 또한 국제 사회 분위기로 인해 정책 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후로 미국 또한 베트남 전쟁 등 여러 국제사회 눈치에 더욱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시대의 변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 학살
한편 이집트 쪽에서 유대인을 향한 테러 공격과 게릴라가 있었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점령 당시에 이스라엘에 테러를 가했던 게릴라들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모고 한 민간닝들을 죽이고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유엔 소속의 의사들조차 그에 휘들리 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 다그 함마르셀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진위여부를 이스라엘에 추궁했고 이스라엘 크 세네트(이스라엘의 국회)에서도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있었다는 어찌 된 일이냐고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외무장관 골다 메이어는 '그런 것 없어요. 우릴 해방자로 반겨주던데?' 하고 잡아뗐으며, 참모총장 모셰 다얀은 아랍인들이 먼저 공격을 했기 때문에 죽인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작 데파이의 수장이었던 노인은 2003년에 페달이들은 중동전쟁 터지고 죄다 이집트로 진작에 달아났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페다이 혐의를 받고 죽은 사람들은 데파이와 친해서 떠벌리고 다녔던 사람들이라고. 어쨌든 유엔 감시단과 이스라엘의 합동 조사단은 300~500명가량의 무고한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살해된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미국 만화가 조 사코의 책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Footnotes in Gaza)>이 1956년 11월에 자행된 이스라엘군의 가자 주민 학살 사건을 다뤘습니다.
수상이었던 다비드 벤구리온은 미국에 다른 건 몰라도 가자 지구만큼은 이스라엘이 확보하겠다고 억지를 부렸지만 퇴짜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불과 11년 후에 제3차 중동전쟁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6. 여담
냉전 초기에 핵을 둘러싼 동맹국의 위기와 소련의 핵을 동원한 무력개입 협박,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소련이 정말로 핵을 동원해서 무력을 사용했다면 미국이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에 대한 논의 때문에 미국에서는 대체역사소설이나 첩보물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재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 의해 영화(1969)로도 제작된 레온 유리스의 소설 토파즈에서는 수에즈 위기 당시의 프랑스의 병크와 반미 노선, 소련에서 2차 대전 때부터 심어둔 프랑스 고위층 첩자에 의한 작품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작중에선 미국에 악몽과 같던 프랑스 NATO 탈퇴도 이 첩자와 소련이 이룩한 최고의 성과로 나옵니다.
이 작품에는 늙은 프랑스 대통령이 소련 첩자에게 자기도 모르게 놀아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름 자체는 창작된 가상의 인물로 나오지만 '반미 성향, 2차 대전 레지스탕스 출신, 강경 민족주의자' 성향에다 알제리 사건 등의 행적을 볼 때 샤를 드 골이 맞습니다.
이 내용은 1960년 대 초에 있었던 사파이어 스캔들을 소재로 각색한 것으로, 소련에서 망명한 KGB 고위 인사가 미국 정보당국에 프랑스의 정보기관과 드골 정부 고위층에 다수의 소련 스파이들이 침투해있다고 폭로한 사건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폭로는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 상호 불신을 고조시켜서 양국의 첩보 협력 관계를 한동안 마비시켰습니다.
포스트 아포클립스 소설 <해변에서(On the Beach)>에서는 수에즈 위기 때 소련에 대한 미국의 오인 공격으로 핵전쟁이 벌어졌다고 묘사합니다.
해리 터틀도브의 장편 대체 역사소설 <The World of Difference>에서는 미국과 소련 출신의 주인공 모두 수에즈 위기 당시 벌어진 아랍 공중전에 참가한 파일럿 출신이라는 언급이 있었습니다.
당시 캐나다의 총리였던 레스터 B. 피어슨은 이 전쟁을 중재한 공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아랍권에서는 1948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여 1948 전쟁(1948حرب)이라고 부른다.
2.상세정보
2차 세계대전 종결 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무주공산이 된 팔레스타인 지역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를 둘러싸고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충돌이 지속되었으며, UN의 영국령 팔레스타인 영국령 팔레스타인 분할안도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지게 됩니다.
3. 전력상황
1) 이스라엘 전력상황
1947년 11월 하가 나는 1929년 폭동 이후로 잘 조직된 유대인 민방위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1936년~1938년 의 폭동 이후로, 2,000여 명의 직업군인과 한 달에 3~4일 정도 군사 훈련을 받는 만여 명의 지원자들이 이 정예부대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이 기동부대는 25살 이상의 지역단위 민방위군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35,000명 정도가 하가 나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이들은 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정규적인 군사집단이 아닌 지하조직 형태였기 때문에 화기 입수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1946년 다비드 벤구리온은 유대인 공동체가 비유대인들의 습격에 대항하여 스스로 방어할 수가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동구권 진영의 무기들로 무장하기 시작합니다. 1947년 9월, 하가 나는 1만 정의 소총과 702 정의 경기관총, 2,666 정의 기관단총, 186 정의 중기관총, 2인치 박격포 672문과 3인치 박격포 92문을 보유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47년 10월에서 48년 7월 사이, 무기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들은 3백만 발의 9mm 권총탄과 수류탄 15만 개, 기관단총 1만 6천 정, 3인치 박격포 210개를 생산하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수입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기는 부족하였고 평균적으로 하가 나의 대원 3명당 1개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정예부대도 3명당 무기 2자루 정도를 보유하는 것에 그쳤으며 그나마 M4 셔먼 30대로 쥐꼬리만큼의 기갑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전쟁 초기에 충분한 수량의 중기관총과 대포, 장갑차량이나 대전차, 대공 무기를 보유할 수 없었습니다.
2) 아랍연맹 전력 상황
팔레스타인은 국가적 무장단체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청년 측의 무장 조직이 있었다. 약 11,000~12,000명 정도가 존재했으며 크게 후 샤니 후타와 후샤니 나즈다 두 파벌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발발 이후에 팔레스타인 국가 방위군이 새로 조직되었으며 12월 아브 알 퀘디르 후세이니는 시리아에서 훈련된 100여 명의 아랍 성전 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몇몇 지원자들과 영국군 출신의 베테랑들과 합류합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군의 무장은 매우 안 습했는데, 1942년 이스라엘의 첩보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는 약 5만여 정의 화기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지만 굉장히 낡고 신뢰도가 낮았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경단 조직들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도 영국 식민 당국에게 총기를 요청하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총을 사서 조달하기도 했습니다.
아랍연합은 다양한 아랍국가에서 지원한 6천여 명의 자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아랍 해방군을 조직했고 파워 알 콰오지의 지휘 하에 사마리아와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에 파견했습니다.
요르단은 위에서 서술했듯이 영국군의 훈련 하에 정예부대를 보유했으며 8천 명에서 만 2천 명의 부대가 4개의 보병 및 기계화연대로 조직되어있었으며 40문의 야포와 75대의 장갑차를 보유했었습니다.
이라크 왕국은 12개 여단 21,000명의 군대를 보유했으며 영국제 전투기 100여대로 이루어진 공군까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 4개 보병여단을 파견했으나 최종적으로 만 5천 명에서 만 8천 명까지 증파했습니다. 5월 15일에는 이라크 공병대가 요르단 강에 가교를 건설하여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 아주 조금의 성과를 거둔 바는 있습니다. 이후, 나 블루스 예닌 툴 칼람 삼각지대 내에서 이스라엘군의 발악으로 격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위치를 고수한 바 있으며 이라크군은 예닌 지역을 사수하던 중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그나마 좀 나은 케이스이며
이집트 왕국은 약 4만여 명의 병력을 전개할 수 있었는데 군사적으로 적정 연령에 있는 인구 중 80%가 병역을 거부(…)했고 보급체계가 눈물겨워 국가 경계선 지역에만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초기에 병력만 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으며 영국제 25파운드 포 6문과 6파운드 대전차포 8문, 1 정의 중기관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집트 공군은 30기의 스핏파이어와 4기의 허리케인, C47 20기 등으로 폭격을 수행했습니다.
시리아는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만 2천여 명의 병력과 전차대대를 파견하였습니다. 5월 15일부터 16일에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마크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한 바 있으나 며칠 뒤에 다가니아에서 패주 합니다. 전반적으로 시리아군은 방어로 돌아선 6월 10일 이후 소규모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스라엘의 정착민 촌락에 소규모의 공격을 가했습니다.
레바논은 규모가 작은 3천5백 명의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천여 명의 침공군은 북부 갈릴리를 지나 이스라엘군과 교전하였으며 결국 1949년 3월 23일 휴전협정에 사인해 버렸습니다.
4. 전황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총리 디비드 벤구리온이 텔아비브 미술관의 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함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왕국, 이집트 왕국, 요르단은 아랍 연합군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여기에 사우디 아라비아, 예멘은 자금과 자원병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아랍 각지에서 지원자들로 구성된 아랍 해방군이 결성되어 파견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무력충돌 기간 동안 결성된 성전 군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스라엘군의 전력은 그야말로 보잘것없어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잡다한 무기들을 되는 대로 지급해서 총기를 든 병사 10명이 있으면 그중 7~8명은 각자 다른 탄을 사용하는 총기여서 탄약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부대에서는 소유한 총기에 넉넉한 탄약을 가진 병사가 주로 교전을 하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그 병사가 쉴 동안 그 총을 돌려쓰고 기지 방어만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에 반해 영국의 지도를 받은 정예군을 보유했던 요르단, 강력한 공군력을 가진 이집트, 이라크, 프랑스제 기갑장비로 무장한 시리아의 전력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방어에 주력하며 전선을 유지했습니다.
여기서 영국식 교육을 받았던 아랍 5개국 정규군에 맞서 싸운 이스라엘군의 전설이 시작됩니다.
지원도 보급도 모자란 판에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사용 가능한 모든 전략을 펼치며 총 20여 일간의 치역 한 공방전 속에서 이스라엘 군은 끝내 두 도시를 지켜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때 골다 메이어 총리의 명언도 나왔는데 :우리는 아랍을 상대로 한 최종병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면 끝장이라는 절박감이다. "
가장 격렬한 전투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테이비브 가도를 둘러싼 전선에서 벌어졌습니다. 5월 말부터 개시된 이스라엘의 공세로 인해 요르단 군은 패주 했고, 반격에 나섰던 이라크, 요르단 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북부와 남부 전선 역시 키부츠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대포까지 끌고 와 저항하는 이스라엘군에 막혀 진척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6월 11일 UN의 중재로 30일 동안 휴전이 선언되면서 양쪽 모두 숨 고르기를 할 시간을 벌었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미국 등 서방에서 무기를 대거 들여와 전력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7월 8일 이집트군의 기습으로 전쟁이 재개되자 이스라엘군은 방어에서 아랍 연합군에 대한 전면 공세로 전환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주변 거점을 점령하며 가나안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였습니다.
결국 10일 후인 7월 18일 UN의 중재 아래 2차 휴전이 선언되었습니다.
UN은 전쟁을 끝낼 중재안으로 또 다른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내놓았지만, 양쪽 모두 이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측은 도리어 분할안을 제안한 스웨덴 대표 폴케 베르나도테를 암살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평화협상은 실마리를 얻지 못한 채 10월 15일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습니다.
전쟁이 재개되자 이스라엘은 북쪽 갈릴리 호 일대를 노린 공세를 펼쳤고 단 10여 일 만에 아랍 연합군을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몰아내고 갈릴리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다음 목표로는 아랍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차지하기에는 아직 애로사항이 있는 가자지구와 요를 단강 서아지고 대신 무수지나 다름없던 남쪽 네게브 사막을 향한 파상공세를 펼쳤습니다.
허를 찔린 아랍 연합군은 네게브 사막 전체를 이스라엘에게 내어주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까지 진격했습니다.
결국 반격 능력을 상실한 아랍 국가들은 각자 차례대로 이스라엘과 휴전을 체결하였고 1949년 3월 10일 홍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에일라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78%를 장악했고, 나머지 지역 중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장악한 지역에 살고 있던 7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을 떠나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랍 연합군은 압도적인 전력이었지만 실상은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서로 간의 불신으로 인해 단합이 전혀 되지 않아 전쟁을 효율적으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얼마 전까지 영국 및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나아가 당시에는 왕가와 반 왕파들의 갈등과 내전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보입니다. 보통 아랍 연합 군위 수적, 학격면에서 오세 했던 거에만 집중하지만 사실 이들은 장비는 우살지 몰라도 내부적을 심각하게 분열되어 문 게가 이스라엘보다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집트만 해도 파루크 왕가에 불만이 큰 장교들은 일부 작전을 무시했으며 다 이겨 놓고도 일부러 후퇴하여 패배를 자초했습니다. 이는 만일 이집트군이 승리하면 왕가에 대한 지지가 커질 테고, 그러면 왕가를 뒤엎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전쟁에 패배하면서 쿠데타의 명분을 얻은 군부는 3년 만에 파루크 국왕의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기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쿠데타로 뒤집어엎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귀족 출신으로 우쭐거리는 장교와 강제 징집된 사병들의 갈등도 커서 되려 유럽인 교관들이 "장비만 좋지, 이건 허수아비 군대다."라고 비웃으며 회고할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베두인족으로 구성된 정예군을 가진 요르단 군의 경우 지금까지도 미국이나 영국 군사기관들과 교류하는 아랍권의 최정예 군대로 통합니다. 다만 요르단은 근본적으로 소국인 데다 가난하고 석유가 없어서 이 훌륭한 군인들에게 사우디나 쿠웨이트 같은 장비 빨을 세워줄 수는 없다는 점이 있어서 대세에 영향을 주기 힘들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결사적인 저항은 표면적인 전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구시가를 포함한 중요 지역을 탈환하거나 추가로 점령하기 위해서, 아랍연맹 측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제2차 중동전쟁으로 비화됩니다.
5. 여담
이스라엘 독립전쟁 기간 동안 이스라엘군은 소련의 허가하에 체코 슬로바키아에서 받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싸웠고, 아랍 연합군은 영국군이 남기고 간 대량의 영국제 무기로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쓴 독일제 무기는 상당 부분이 체코슬로 바키아에서 생산한 물량이었고, 독립 초기 이스라엘을 중동의 반서방 거점(다른 중동국가가 다 친영미 계열이던 시절이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소련이 체코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지시했기 때문에 프라하 공항에서 한동안 이스라엘행 무기 수송기만 이륙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이 보유했던 메서슈미트도 실은 독일제 오리지널이 아니라 체코 제인 아비아 S199였고,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우지 기관단총도 그 원형은 체코제의 Vz25 기관단총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체코가 보유하고 있던 카구팔(kar98) 소총 생산시설을 통째로 구입해서 Kar-98K를 생산, 한동안 제식 소총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전후 이스라엘은 빠르게 친미 노선으로 갈아탔기 때문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격노하여 책임자들을 숙청했으며 소련 내부의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반파시즘유대인위원회 위원장 솔로몬 미호옐스가 암살되었으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부인인 폴리나 젬추 지나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몰로토프에게 이혼당하고 체포당했습니다. 소련의 유대인 탄압은 크렘린 의사 음모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으나 1953년 스탈린이 급사하면서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중동전쟁은 1차부터 4차까지 전쟁을 치른 세계대전 이후 최대 전쟁입니다.
1차부터 4차 전쟁까지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전쟁또는 독립전쟁) - 1948년 발발
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또는 시나이 전쟁) - 1956년 발발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 1967년
4차 중동전쟁-(라마단 전쟁, 욤 키푸르 전쟁) - 1973년 발발
1948년 이스라엘 성립 이후, 1948년~1973년까지 4차례에 걸쳐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에 벌어진 전쟁을 말합니다.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은 모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쟁 전보다 확장되었습니다.
1. 제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 전쟁 또는 독립전쟁) - 1948년 발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대립 분쟁을 조율할 수 없게 된 영국은 문제 해결을 국제연합(UN)에 위임하였습니다. 이에 UN은 1947년,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인의 2개 국가로 독립시키는 결의를 채택하게 됩니다.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는 아랍 국가들의 즉각적인 반발로 이어졌으며, 아랍 국가들의 대 이스라엘 선전포고가 일어나게 됩니다. 제1차 중동전쟁은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등에서 참전하며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제국의 협공이었기에, 전세가 아랍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아랍 진영 내에 불화가 일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시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하면서 점차 이스라엘에 유리한 전세가 조성되었습니다.
1차 중동전쟁은 1948년 11월 6일, UN 안전보장 이사회의 휴전 결의 채택으로 일시 중지되고 1949년 1월 이스라엘 대표와 이집트 대표의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휴전협정으로 1차 중동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그런데 1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쟁 전보다 더 확장되었습니다.
과거 UN 분할 안에 의한 이스라엘의 영토 면적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56%이었으나, 휴전 후 이스라엘-아랍 간 국경 재조정은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적용되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의 80%를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1차 중동전쟁 이후 약 80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대이동이 불가피해졌고, 이들은 인접 아랍 국가들로 피난하였습니다.
제3차 중동전쟁은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의 빈번한 충돌이 계기가 되어 발발하였습니다. 당시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1967년 4월 제1차 중동전쟁의 정전협정에서 비무장지대로 설정된 골란고원 일대에 이스라엘이 농작물을 경작한다는 일방적인 조치를 발표하면서 시리아의 분노를 촉발시켰습니다.
이집트가 아카바만의 입구인 티란 해협을 봉쇄한 것을 계기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원조를 받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가자 지역, 구예루살렘 지역, 요르단강 서안 지역, 골란고원, 시나이반도의 8,600km 2를 새로 점령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지배에 들어간 영토 면적은 이스라엘 독립 초기의 8배가 넘는 102,400km 2로
제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과거 3차례 중동전쟁에서 잃었던 영토 회복을 위해 1973년 10월 6일 수에즈 전선과 골란고원의 양 전선에서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의 피해는 막심했으나, 이스라엘은 개전 6일 만에 반격을 시작하면서 초기 열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용의주도한 작전에 따라 시나이반도의 이집트 주력부대가 포위됐고, 이후 UN에서의 미-소 결의로 휴전이 성립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점령한 골란고원을 1981년 합병했으며 이 문제로 2000년 시리아와의 평화협상이 중단됐습니다.
위 내용과 같이 간단하게 중동전쟁에 대해 설명하였는데요. 각 전쟁에 대해 다음 글에 세 시리즈로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935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하겠다고 전격적으로 선언했습니다.이는 명백한 도발 행위였으나 제1차 대전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던 영국,프랑스는 강력한 제재를 내리는 대신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잘못된 선택을 했고 이후 계속해서 수동적으로끌려다녔습니다.만일 이때 연합국이 군사 행동까지 불사하고 강력하게 대처했다면 인류사 최대의 비극인제2차대전의 발발을 막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제1차 대전 패전 이후20년 가까이 가해진 제약으로 말미암아 전력이 열세인 상황이었습니다.재군비 선언 후10만으로 제한받았던 병력은 즉각 증강시킬 수 있었지만 개발과 배치에 시간이 걸리는 무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히틀러가 비무장으로 설정된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키라고 명령했을 때 군부가 아직 때가 아니라며 반발하고 나섰을 정도로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사실 독일은 히틀러의 집권 이전부터 비밀리에 각종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으나 재무장을 선언했다고 당장 최신 무기를 쏟아낼 형편은 아니었습니다.독일의 국력이나 기술력을 고려할 때 시간만 충분히 준다면 전력 확충은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히틀러가 내일이라도 전쟁을 벌일 것처럼 서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그래서 당장 필요하지만 백지상태와 다름없던 전차,전투기 같은 분야에 투자를 우선해야 했습니다. 반면 기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분야는 개량 등을 통해 전력을 확충하기로 결정했습니다.그렇게 탄생한 대표작 중 하나가제2차대전 내내 독일군의 기본 제식 화기로 사용된Kar98 k소총입니다.히틀러가재무장을 선언한 바로 그 해 채택되었을 만큼Kar98k이속전속결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에 사용하던Gewehr 1898(이하Gew98)소총을 기반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Gew98은 유명한총기 제작자인 파울마우저(PaulMauser)가1895년 만든 볼트액션 소총이다. 1898년부터 독일군에 공급된Gew98은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주변국의 경쟁작들과 비교하면 구조,기능,성능에서 상당히 조화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평가를 받아 해외에도 인기리에 판매되었다.제1차 대전 당시 미군의 제식 소총인M1903스프링필드의 탄생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는데 특허권 침해로 소송을 걸어 배상까지 받아냈을 정도였습니다. 기병용 소총인 카빈(Carbine)은 기존 보병용 소총의 총신을 단축해 개발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그러한 방식대로1899년Gew98을 기반으로 탄생한 카빈이Karbiner98,즉Kar98입니다.총신이 줄어들어서 말에 탄체 사용하기는 좋았지만반동 제어가 어려워 곧바로 개량에 들어갔습니다. 1908년 문제점을 개선한Kar98azKar98 az은 제1차 대전 당시에 기병뿐만 아니라 산악병,공병,포병,지원부대 등이 애용하는 소총이 되었습니다.
제1차 대전 후,전훈을 참조해 총열을 늘려 사거리와 정확도를 향상한Kar98b이 개발되었습니다.엄밀히 말해Gew98로 회귀한 셈이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에서 개발이 용인된 카빈으로 속이기 위한 작명이었습니다.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재무장 선언 직후Kar98k가 개발되어 보급이 시작되었습니다.기존 탄약과 부품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데다 성능도 충분하다고 판단해 새로운 소총을 개발하는 대신 기존 소총을 개량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돌격소총처럼 패러다임이 혁명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소총은 어지간한 성능이면 오랫동안 활약할 수 있습니다.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소총으로 교전을 벌일 상황이나 조건이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당시 반자동소총인M1개런드의 도입을 시작한 미국을 제외한다면 열강들의 제식 소총이 제1차 대전 당시 사용한 것이나 개량형 정도여서Kar98k로 전력 균형을 유지하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연사력이 떨어지는 볼트액션 방식은 독일군의 기본 전략으로 기동전을 연구하는 군부에게 아쉬움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고심 끝에 독일은 소부대의 기본 화력은MG34같은 다목적 기관총이 담당하고Kar98k는 이를 보조하는 전술을 채택했습니다.여기에 접근전 등에서는 기관단총이 앞장서는 형태를 가미했습니다.일선 보병의 무장과 소모품이 이리저리 나뉘는 단점이 있었지만 당시 여건으로는 어쩔 수 없던 차선책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돌격소총이 등장하면서 정리되지만제2차대전 당시에는 비단 독일군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나라 군대의 공통적인 고민이었습니다.그래서Kar98k은선전물이나 영화 등에서는 시각 효과가 좋은 기관총이나 기관단총이 먼저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는 편입니다.하지만제2차대전 초기의 대승을 이끌었고 전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독일군의 주력이었습니다.
2. 특징
Kar98k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20세기 중반까지 독일이나 독일의 영향을 받는 국가들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7.92 ×57mm규격의마우저(Mauser)M98탄환을 사용한다.한 발씩 장전할 수도 있지만 대개5발 장착 스트리퍼 클립을 이용합니다.노리쇠는 끝부분이 꺾인 형태로 개선되어 작동하기 편리합니다.전체적으로구조가 단순한 편이어서 생산이 용이했고 잔고장이 적어 야전에서 신뢰성이 높았습니다.
볼트액션 소총의 연사력은 사수의 능력에 크게 좌우되지만Kar98k는 기계적 성능이 우수한 덕분에 상대적으로 연사가 쉬운 소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최대 사거리는2,700m,유효 사거리가400~500m수준으로탄젠트 조준기를 채택해서 거리별로 사격의 정확도가 뛰어났습니다.저격수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스코프를 장착해 정밀도를 높였다.다만무게가3.9kg이어서휴대가 그리 편리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언급처럼 제1, 2차 대전을 비교하면 무기 분야에서 괄목상대할 변화가 있었지만 소총만큼은 예외였습니다.그런데 돌격소총이1940년대 초반에 탄생했을 만큼 당시에 이미 충분한 기술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자면50여 년 전에 개발된 소총을 기반으로 한Kar98k은 사실 독일군의 상징인 전격전과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의 소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다만모두가 같은 상황이어서 크게 문제로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3. 운용 현황
Kar98k은1935년부터 독일이 패망한1945년까지 약1,460만 정 이상이 생산되었습니다.최초 생산은 개발자인 마우저와J.P.사우어 운트 손(J.P. Sauer und Sohn)에서 담당했으나제2차대전 발발 후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자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업체를 포함해 총8개사10개 공장에서 쉼 없이 만들어 냈습니다.당연히독일군(무장친위대포함)에 우선 배치되었고 핀란드,불가리아,루마니아 같은 동맹국에도 공급되었습니다.
Kar98k은 소련의모신나강,영국의리엔필드,미국의M1개런드와 더불어제2차대전을 상징하는 소총입니다.독일군이 활약한 곳이면 반드시 등장한 필수적인 무기였습니다.패전 후 독일이 분단되고 각각NATO와 바르샤바 조약국의 일원이 되면서 제식 소총에서 물러났지만 의장대용 등으로 지금도 일부 사용 중입니다.많은 물량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한국전쟁 당시에 중공군이,베트남 전쟁 당시에 북베트남군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1948년 발발한 제1차 중동전쟁 당시에 이스라엘군이Kar98k을 사용했습니다.당시 아랍 국가들을 친서방이라고 보았던 소련은 이스라엘을 중동에서 영향력 확장을 위한 거점으로 삼고자 했습니다.기득권을 가진 영국,프랑스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산된 무기를 공급했는데 이때 많은Kar98k이 이스라엘로넘어갔습니다.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을 탄압했던 나치 독일의 도구가 이스라엘 독립의 수단이 된 것이었습니다.
"10만 군사를 기르자" - 이이의 십만양병설 1583년 어느 날, 이이는 왕을 찾아가 “나라가 태평하니 군대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아 적이 침범해 와도 막아낼 수 없습니다.”라며 10만의 군사를 길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통신사 사신으로 일본에 간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는 달랐습니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으니 전쟁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김성일은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일본은 2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습니다.
빠르게 밀려오는 왜군 1592년 4월, 왜군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구실로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왜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한양을 향해 쳐들어왔어.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조선 군대는 여기저기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선조는 신립 장군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신립은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막아내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결국 신립은 강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왜군은 20여 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선조는 평양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습니다.
2. 의병과 관군의 승리 - 조선의 반격이 시작
우리 고장은 우리가 지키자 - 의병 전쟁 초기에는 관군의 패배로 나라 전체가 큰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손에 죽었고, 온 나라가 일본군에 짓밟혔습니다.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켜낸 분이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우리 수군이 입니다. 한편, 바다에서 승리가 계속되는 동안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의병이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난 의로운 병사들을 말합니다. 의병은 마을의 지리에 밝다는 이점을 이용해 매복·기습·유격(게릴라) 전을 벌이며 용감히 왜군을 막아냈습니다. 주로 전직 관료와 유생, 승려가 의병장이었고, 농민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은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경상도의 곽재우와 정인홍,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고경명과 김천일, 함경도의 정문부 등이 있습니다.
또 묘향산의 서산대사와 금강산의 사명대사도 승병장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특히 곽재우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채 백마를 타고 싸워 ‘홍의장군’이라 불리었는데, 왜적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3. 진주 대첩과 진주성 함락 - 피로 싸워 막아내다.
1592년 4월, 전쟁이 시작된 후 일본군의 세력은 파죽지세였습니다. 그래서 전쟁 초기 1~2개월 동안 관군은 계속 지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조선군도 승전보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전투가 10월에 벌어진 진주성 싸움이야. 당시 진주 목사 김시민은 4,000명도 안 되는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3만에 가까운 일본군에 비하면 크게 열세였습니다. 10월 6일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일본군은 사다리와 나뭇단을 성벽에 기대어 놓고 그것을 밟고 기어올라 성벽을 넘으려 했습니다. 또 3층짜리 누각을 만들어 그 위에서 조총으로 사격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성안의 백성들은 김시민의 지휘 아래 활을 쏘아 일본군을 막아내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에게는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물을 끼얹어 물리쳤습니다. 일본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김시민은 왜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1593년, 진주성에서의 패배를 앙갚음하려는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은 함락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 당시, 논개라는 여성은 적장을 끌어안고 장렬하게 순국했습니다.
4. 왜란의 영향 - 전쟁이 가져온 것들
불타고 있는 경복궁 전쟁은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도착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됐습니다. 명군과 일본군이 두 차례의 전투를 치른 뒤 1593년 4월, 휴전 회담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어서, 백성들은 왜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명나라 군대를 먹여 살리느라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1597년 일본이 휴전 회담을 깨고 다시 쳐들어 왔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해. 하지만 조선의 육군과 수군은 왜군을 모두 물리치고 전쟁을 끝냈습니다.
7년에 걸친 두 차례의 왜란으로 온 나라는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잡혀갔습니다. 또 정부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백성에게 곡물을 받고 벼슬을 팔아 신분을 높여 주어 신분 제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 경복궁, 불국사 등이 불에 타는 등 문화재의 손실도 컸습니다. 그리고 도자기 기술자와 성리학자들이 일본에 납치되어 갔는데, 이들은 후에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5. 이순신 장군을 알아보기
이순신 장군의 생애 이순신 장군은 1545년 서울에서 태어났어.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했던 그는 28세 때 무과(武科)에 응시했지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거꾸로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낙방을 했습니다. 하지만 4년 뒤 무과에 합격한 후 여러 변경 지역의 장수와 정읍 현감을 거쳐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었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전라 좌수사로 있던 이순신은 1592년 5월 옥포 해전을 첫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어 사천·당항포·한산도·부산포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거북선이란? 거북선은 조선의 판옥선을 개량해 만들었습니다. 판옥선이란? 조선 수군의 전투함이야. 노를 젓는 1층과 함포를 발사하는 2층으로 구성된 크고 높은 배로, 왜군이 쉽게 배 위에 뛰어오르지 못했습니다. 거북선은 돌격용 전투함으로, 구조는 판옥선과 비슷하지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철심이 박힌 거북 등딱지 같은 것이 있고, 그 아래 노를 젓는 사람과 포를 쏘는 포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뱃머리에 용머리와 도깨비 머리를 달고 있어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2개의 돛이 기동력을 높일 수 있어, 적의 배 사이로 깊숙이 침투하여 접근전을 펼칠 수 있는 조선 수군의 최고 무기였습니다.
한산도 대첩 이순신 장군의 가장 통쾌한 승리가 뭘까? 바로 세계 3대 해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한산도 대첩입니다. 1592년 7월 몇 차례의 해전에서 패한 일본 수군이 모든 함대를 모아 총공격에 나서자,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로 유인했습니다. 그런 다음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적의 함대를 둘러싸 포위하는 ‘학익진 전술’을 폈습니다. 포위당한 왜군은 많은 군사와 배를 잃고 도망치기에 바빴습니다.
명량 대첩 1597년 8월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돌아왔을 때, 남아 있는 배는 겨우 13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부녀자들에게 강강술래를 하며 빙글빙글 돌게 하여 군사가 많은 것 같이 위장하고, 물살이 거센 울돌목(명량)으로 왜선을 유인하여 133척을 대파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명량 대첩입니다.
노량 대첩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1598년 11월,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왜군을 격파하기 위해 일본군 전함 300척과 노량에서 최후의 해전을 벌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을 맞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죽는 순간까지도 “싸움이 위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의 진정한 영웅은 이렇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한화 디펜스가 '5조 원' 규모 호주 장갑차 수주전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합니다. 경쟁사인 독일 라인메탈이 호주군에 납품한 차륜형 장갑차 '복서'에 결함이 지적되면서 이후 진행하는 '랜드(LAND) 400 3단계'에서는 한화디펜스가 유리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업계에 따르면 한화 디펜스는 호주 육군의 차세대 장갑차 도입 사업(LAND 400 Phase 3)의 최종 사업자. 독일 라인 메탈과 최종 성능 평가 중이지만, 경쟁사가 2단계 사업에서 납품한 차륜형 장갑차 결함으로 한화 디펜스가 수주전 우위를 점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독일 라인 메탈은 지난 2018년 3월 차륜형 전투정찰 장갑차(CRV)를 도입하는 '랜드(LAND) 400 2단계' 사업을 수주했습니다.
1995년 도입된 노후 보병 경장갑차인 ASLA 차륜형 장갑차 257대를 대체하는 사업이었는데. 호주군은 24억 달러(약 2조 7,700억 원)를 투입해 독일과 네덜란드가 합작해 만든 장갑차 복서 211대를 공급받기로 했었습니다.
복서 장갑차의 경우 30mm 주포로 무장할 수 있고 최대 시속 103km로 주행이 가능한 우수한 전투차량으로 꼽습니다.
라인 메탈은 독일에서 생산된 1차분으로 25대를 호주군에 인도했으며 나머지 186대의 복서는 퀸즐랜드의 라인메탈 군용 차량 센터(MILVEHCOE)에서 건설될 예정이었습니다.
문제는 납품된 차량에서 능동 방어체계인 미사일 포탑이 너무 무겁고 미사일과 능동 방어 시스템(APS) 간 통합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또 라인 메탈의 CRV는 독일제 탄약만 발사할 수 있고 유럽에서 맞춤 제작한 타이어가 필요로 합니다.
이에 호주군 당국은 무기 체계가 무겁고 불안정해 랜스 포탑 통합이 복잡하다고 판단하여 추가 도입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호주군 관계자는 "랜스 블록 2 포탑이 과중하면 차량이 너무 무겁고, 미사일과 APS를 통합할 수 없다"라고 말했고이 같은 지적에 대해 라인 메탈은 호주군 당국으로부터 어떠한 주의를 받은 적 없고,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랜드 400 2단계 계약 의무를 정상적으로 이행 중이라는 입장입니다.
라인메탈 디펜스 오스트레일리아(RDA) 대변인 측은 "이미 인도된 '블록 1' 복서 CRV 차량에 대해 랜스 포탑 통합과 관련해 무게나 안정성의 문제가 없다"라면서 "복서 CRV에 APS를 통합하는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미래 통합과 APS 설루션을 식별하기 위해 국방부와 계속 협력하고 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만....
그러면서 복서 CRV가 유럽산 타이어와 탄약에 의존하기 때문에 해외 공급망에 취약할 수 있다는 호주 국방부 내부 우려에 대해서는 프랑스 시설에서 독점 제조된 타이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군용 응용 분야에서 흔한 일이라고 반박했습니다. 또 독일 탄약 역시 복서에서만 발사되는 유일한 탄약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라인 메탈에 대한 기술적인 우려가 제기되면서 현재 진행 중인 랜드 400 3단계에서 한화 디펜스가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게 된 것입니다.
랜드 400 3단계는 1967년 미국에서 도입해 사용 중인 M113A 1을 대체하는 궤도형 장갑차 획득 사업입니다.
보병 전투장갑차 및 계열 차량 8종을 포함해 총 400대의 장비 구매에만 5조 원이 투입되며 장갑차의 호주 국내 생산 및 후속 군수지원까지 포함하면 총사업비는 8조~12조 원에 이르는 규모가 큰 사업입니다.
한화 디펜스- 호주법인(HDA)은 이번 사업 수주를 위해 호주를 해외 생산기지 거점으로 키우고 있고, 현지 업체 등 40개 업체와 파트너십을 맺으며 '팀 한화'를 보강하고 있습니다.
호주 빅토리아주와도 손을 잡았습니다. 한화는 빅토리아주와 생산시설 건립 등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투자유치 협력 양해각서(MOU)를 맺고 장갑차 생산에 힘을 실었습니다.
현재 한화디펜스 레드백은 라인 메탈 링스와 함께 최종 시험대에 오른 상태이고. 최종 관문인 성능 평가를 위해 시제기를 전달하고 평가에 나섰습니다. 약 10개월간 호주 육군 주관으로 진행되는 평가에서는 차량 성능과 방호 능력 테스트, 운용자 교육·평가 등이 이뤄질 것입니다.
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입니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전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흔히 1939년 9월 1일에 일어난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 선전포고에서 발발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1941년 독일의 소련 공격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 등의 과정을 거쳐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습니다.
전쟁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3국 조약을 근간으로 한 추축국[樞軸國,AxisPowers] 진영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연합국 진영의 대립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경과에 따라 각 진영에 가담한 국가들은 변동이 있으며, 중립을 표방한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실제로는 어느 한 진영에 적극 가담한 나라도 있습니다.
이 전쟁으로 세계에서 수천만에 이르는 인명 피해가 나타났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도 커다란 변동이 나타났습니다.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 24일 국제연합이 창설되었으며, 전후 경제 질서의 회복을 위해 1944년 체결된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달러가 세계의 기축 통화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미국 중심의 경제 체제가 성립하였습니다. 소련 군대가 주둔한 동유럽, 외몽고, 북한 등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중국에서도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세계는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동유럽,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또한 1960년대까지 패전국의 지배 아래 식민지 상태에 있던 나라들도 상당수가 주권국가로 독립을 이루면서 국제 관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는 전반적 위기단계에 돌입하였다. 더욱이 자본주의 제국의 발전의 불균등이 두드러졌고, 1929∼33년의 세계공황은 이와 같은 불균등에 근거하는 국제 대립을 일거에 첨예화시켰습니다.
즉 자본주의 열강의 블록화와 폐쇄경제적인 경향은, 자본주의국으로서 기초가 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국내 정책의 정돈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1931년 9월 중국 동북에서 침략 행동을 개시, 1932년 ‘만주국’을 성립시켜, 이 지역에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1933년 3월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부인하자 일본은 곧 연맹을 탈퇴하였습니다. 한편 독일에서는 국내 정치의 혼란 가운데에서 1933년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외치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같은 해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의 불만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1935년 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1936년 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를 본 이탈리아는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여 36년 5월에는 전토를 정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침략의 확대, 전쟁 위기의 절박을 앞에 두고 반파시즘, 민주주의 옹호를 주창하는 민중의 반전운동도 활발해져서, 이것을 배경으로 1935년 여름의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인민전선의 결성을 제창, 1936년 2월에는 에스파냐에, 같은 해 6월에는 프랑스에 인민전선 정부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는 독 ·이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내란이 벌어졌고, 중국에서는 1936년의 시안[西安] 사건을 계기로 항일 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자, 일본은 이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1937년 7월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도발하였습니다.
1936년 11월 독 ·일은 방공협정(防共協定)을 체결하였고, 1937년 11월 이탈리아가 이에 가입하여 독 ·이 ·일 3국은 반소(反蘇)를 공공연히 외쳤으며, 이것을 구실로 하여 국내에서의 파시즘화와 대외침략을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똑같이 공산주의를 겁내는 미 ·영 ·프의 지배층으로부터 그 침략을 용인받으려고 하였습니다. 미 ·영 ·프의 지배층은 일면으로는 독 ·이 ·일과 제국주의적 대립을 나타내면서도, 일면으로는 이들 3국의 창끝이 소련이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 에로 향해지는 한, 이와 타협한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스 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合倂:안슐루스)하였습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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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독일은 동 ·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한편 국제연맹 또는 집단 안전보장 체제는 붕괴되어 갔습니다.
소련은 독 ·일의 연맹 탈퇴 후인 1934년 9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집단 안전보장정책에 노력(리트비노프 외교)하게 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이 뮌헨 회담에서 제외된 것은 리트비노프 외교의 기초가 상실된 것을 의미 한합니다.
더욱이 에스파냐에서는 1939년 1월 독 ·이가 원조하는 프랑코가 인민전선 정부를 타도했습니다.
1939년 5월 소련 외상 V.M.몰로토프가 취임하여 무력 외교로 자국의 안전을 꾀하려 하였습니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고 이어 폴란드 회랑(廻廊)과 단치히(그단스크)를 요구하였습니다. 끝없는 히틀러의 요구에 영 ·프에서도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양국은 폴란드에 원조를 약속하였습니다.
독일 ·폴란드 간의 긴장 격화와 함께 영국은 대독 개전에 대비하여 소련과 교섭을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독일과도 교섭하고 있었습니다. 뮌헨 회담 이래로 소련의 영 ·프에 대한 불신은 숨길 수 없게 되었고, 8월에는 영 ·소 교섭이 정체되고, 이에 따라 독 ·소 교섭이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이미 폴란드 공격을 결의하고 있던 히틀러는 동서에 걸치는 2 정면(二正面) 전쟁을 피할 필요가 있었고, 소련은 독일-폴란드 전쟁이 반소(反蘇) 전쟁으로 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8월 23일의 독 ·소 불가침 조약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전혀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양국이 제휴하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영 ·프의 유화정책은 결정적으로 파탄되었으며, 대소 침략을 겨냥한 일본의 대독 군사동맹 교섭은 도각으로서 끝나 버렸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파시즘에 반대해 온 유럽의 공산주의자, 소련 지지파, 인민전선 옹호자들이었습니다.
소련의 중립을 확보한 독일은 예정대로 1939년 9월 1일 폴란드에 침입하였다. 9월 3일 영 ·프는 독일에 선전(宣戰)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습니다.
폴란드에 침입한 독일군은 2주일이 못 되어서 폴란드군 주력을 격파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도한 준비뿐만 아니라, 전략공군과 기갑부대의 밀접한 제휴에 의거한 전격전의 성공에 따른 것이었다. 폴란드전 종료 후 히틀러는 영·프에게 화평을 제의하였지만 영·프는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영·프는 서부전선에서 적극적 공세를 취하지 않아, 여기에서는 약 반 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볼 수 없었다(기묘한 전쟁:PhonyWar). 영·프는 독·불 국경에 연하여 구축된 요새 마지노선에 의존하고, 해상봉쇄·경제 압박에 의하여 독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소련은 영·독전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이라 하여 중립의 입장을 취하였지만, 독일의 군사력과 침략성을 겁내어 국경 방위선을 서쪽으로 확대하려 하였습니다.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은 폴란드에 있어서의 러시아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폴란드에 침입하고 부그 강변까지 진격하여, 9월 28일 독·소 양국 사이에서 폴란드를 분할하였습니다. 이어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와 각각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1940년 7월에는 이들 3국을 소련령으로 편입하였습니다.
또 1940년 6월에는 루마니아로부터 베 시라 비아지방과 부코비나북부를 획득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습니다. 더욱이 핀란드에게는 영토의 교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1939년 11월 전쟁을 개시하여 1940년 3월에 간신히 그 요구를 실현시켰습니다(소련-핀란드 전쟁).
이때, 거의 유명무실해졌던 국제연맹은 창립 이래 최초로 소련을 제명 처분하였고, 영 ·포도 핀란드 원조를 위하여 병력을 파견코자 하였습니다. 영 ·프는 핀란드 원조를 구실로 나르비크 등 노르웨이 제항(諸港)을 확보하여, 독일 공업에 불가결한 스웨덴 철광석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독일군은 선수를 쳐서, 1940년 4월 덴마크를 점령함과 동시에 노르웨이에 침입하여 영 ·프군을 격퇴하였습니다. 이 성공에는 육군장관 V.A.크비슬링 등 노르웨이 파시스트의 공모(共謀)가 기여하였는데, 크비슬링이라는 이름은 이후 ‘조국을 판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 5월 10일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에서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체임벌린 내각이 물러나고, 대독 강경론자인 처칠이 노동당을 포함하는 거국내각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똑같이 중립국인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침입하였고, 나아가서 마지노선의 북단을 가로질러 영국 해협으로까지 진출하여 영 ·프군을 남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북부에 고립된 영 ·프군 30만은 됭케르크에서 영국 본토로 기적적으로 철수하였다(됭케르크의 철수).
한편, 독일군은 파리를 목표로 쇄도하여, 6월 14일 파리를 점령하였습니다. 이 정세를 보고 있던 이탈리아는 6월 10일 갑자기 참전하여 남프랑스에 침입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6월 16일 P.레노가 사직하고 H.P.페탱이 수상이 되어, 다음날 휴전을 제의하였습니다.
6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했을 때와 똑같이 콩피에뉴의 열차 안에서 휴전협정은 조인되었습니다. 이 결과 프랑스 본국의 약 2/3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놓였고, 남부의 나머지 지역은 ‘자유지대’로서 비시(Vichy)로 옮긴 페탱 정부에 위임되었습니다. 비시 정권은 7월 10일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파쇼적인 신헌법을 공포하였습니다.
한편 항복과 동시에 탈출한 드골은 런던에서 대독 항전(對獨抗戰)을 국민에게 호소하여 ‘자유 프랑스위원회’를 결성하였습니다. 히틀러는 계속하여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단행을 결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에 불가결한 영국 해협의 제공권을 둘러싼 전투, 즉 ‘브리튼의 싸움(BattleofBritain)’에서는 영국 공군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1940년 9월에는 이 작전을 무기 연기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방 제국’의 건설은 히틀러 본래의 목적이었는데, 이 실현에 의하여 군사 경제의 기반을 강화하여 영 ·미에 대항코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발칸제국에 대한 공작이 활발해졌습니다. 이곳은 대소(對蘇) 공격의 전진기지로서 뿐만 아니라, 터키를 거쳐 중동으로 진출하는 데에도, 더욱이 루마니아의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공급지로서도 확보해 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1940년 8월,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가하여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헝가리에, 또한 도 브루야 지방을 불가리아에 할양시켜 분규 중에 있는 영토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아울러 이들 3국을 독 ·이 ·일 3국 동맹에 가맹시켜 기지를 확보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무솔리니는 1940년 10월 돌연히 그리스에 침입하였으나, 2주간도 못되어 좌절하고 독일의 원조를 요청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우선 그리스의 고립을 획책하고 1941년 3월 유고슬라비아를 독 ·이 ·일 3국동맹에 가맹시켰으나, 2일 후에는 친서구적인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므로, 4월 유고슬라비아에 침입하여 단시일에 전토를 제압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에도 침입하여 영국군을 격퇴하고, 더욱이 5월에는 공수부대가 크레타섬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발칸 제국을 제압한 4월 말, 히틀러는 6월 22일을 소련에 대한 공격일로 명령하였습니다. 5월 10일 나치스 부총통 헤스는 단신 비행기를 조정하여 영국 본토로 가서, 대소 전(對蘇戰)을 위하여 영 ·독 휴전을 실현코자 하였으나 무위로 끝났습니다. 한편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5월 6일 스탈린이 새 수상이 되어 예상 못한 사태에 대처하게 되었습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핀란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소련으로 침입하였습니다. 북부군은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향하였고, 중부군은 모스크바로 직진하였으며, 남부군은 우크라이나로 동진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소련군 주력을 2개월 내에 분쇄하고 우크라이나와 캅카스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소련군에 대한 과소평가, 사회주의 체제의 급속한 내부 붕괴의 기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략은 엄동(嚴冬)의 도래와 함께 정체되었고, 12월에는 소련군의 반공(反攻)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대소 전의 단기 승리를 전제로 하는 히틀러의 세계전략의 좌절을 의미합니다.
더욱이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영·미는 즉각 소련에 대한 원조를 성명하였고, 8월 12일 영·미가 ‘대서양 헌장’으로 전쟁 목적을 분명히 밝히자 소련은 즉각 이를 지지하는 등, 영·미·소의 반(反) 파시즘 연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해 12월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937년 7월 이래로 일본은 중일전쟁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었고, 영·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습니다. 1940년 5월 이래 독일이 네덜란드·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 본토 상륙의 기미가 보이자, 일본은 1940년 9월에 독일·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하였고 '호기 남진(好機南進)'의 방침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수출 제한과 미·영 결속, 장제스 정권에 대한 원조 강화로 대응하였습니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에서는 재차 '북진론'이 대두되어 대소 전의 준비가 진행(관동군 특별연습)되지만, 정부로서는 '남진' 방침을 결정하고 7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였습니다. 이것은 미·일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습니다. 미국은 즉각 미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였고 대일 석유 수출을 금지하였습니다.
이 조치는 일본 군부의 대미 개전론을 자극하였고, 10월에 주전파인 도조[東條]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고, 사흘 뒤인 11일에는 독일·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 포고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세계의 여러 전장(戰場)은 일체가 되었고, 연합국(민주주의) 대 추축극(파시즘)이라는 기본적 대항 관계(성격)가 명료해졌습니다. 1942년 1월 1일, 미·영·중·소 등 26개국은 '연합국 선언'에 조인하였습니다.
한편, 중국 충칭[重慶]에 거점을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한 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와 사이판, 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습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과 함께 말레이반도 해역에서 영국의 신예 전함 2척을 격침하여 제해권을 잡았습니다.
또 개전과 동시에 육군은 말레이반도 ·필리핀에 상륙하여 1942년 2월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영국 극동군을 무조건 항복시켰습니다. 필리핀에서는 1942년 1∼3월 마닐라를 위시하여 수마트라섬 ·자바섬을 점령하고,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습니다. 또한 원장 루트의 절단, 인도에 대한 대영이 간 공작을 위해 미얀마에 침입하여 양곤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리하여 남방 작전은 일단락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주전장습인 중국 전선은 교착상태가 계속되었고 중국의 항전 체제는 강화되어 갔습니다.
1942년 1월에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건설 방침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남진’의 목적의 하나는 전략물자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에 ‘대동아공영권’이란 유럽의 식민지 지배에 대체되는 새로운 일본의 식민지적 체제에 불과하였습니다.
일본의 침략과 가혹한 점령정책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각지에서 반일 저항운동이 일어나고 이 저항을 통하여 아시아의 민족해방 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편 히틀러는 1939∼42년에 정복한 유럽 제국을 그 인종론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편성하고자 하였다(신질서).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에는 독일 사정관(司政官)에 의한 민간정부가 설치되었지만, 언젠가는 대독일 제국으로 편입할 예정이었습니다.
룩셈부르크 ·알자스로렌 ·단치히 등은 대독일 제국에 합병되었습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는 ‘열등 인종’으로 취급된 슬라브계 주민이나 유대인은 강제이주, 대량 멸절하고, 이에 대신하여 독일인을 식민시킬 계획이었습니다.
점령지역의 행정권은 히틀러의 친위대(SS)에게 위임되었습니다. 또한 히틀러의 국가 비밀경찰(게슈타포)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명령받고, 독일의 지배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 유대인을 잡아들여 아우슈비츠 ·트레 브링 카 등의 가스실에서 420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습니다.
군수생산 강화에 따라 심각화되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1942년 3월 노동 총감 자우케르는 독일 지배하의 유럽 전토에서 노동자의 강제징용을 시작하여 적어도 750만 명이 독일의 공장으로 송출되었습니다. 이상의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는 나치스의 점령지 지배에 대하여, 민중들은 지하투쟁을 포함한 갖가지 형태로 저항하였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미 회담에서 먼저 독일 타도에 전력을 다한다는 유럽 제1주의가 결정되지만, 독일 타도의 전략을 놓고 영국과 소련은 대립하였습니다.
소련이 유럽에서의 ‘제2전선’을 요구한 데 대하여 영국은 북아프리카 작전을 고집하였습니다. 지중해에서 중동·인도에 이르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체제를 확보하고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부터 공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1942년 여름에 북아프리카 전선은 긴박해졌습니다. 패배를 거듭하는 이탈리아군을 원조하러 간 롬멜 장군의 기갑사단은 토브룩을 점령하고 카이로 약 100km까지 육박하였습니다. 1942년 10월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영 ·미 연합군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습니다.
독일·이탈리아군은 동서에서 협공을 받아 1943년 5월에 북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소탕되었고, 이어서 영·미 양국은 이탈리아 진공작전을 계획합니다.
이와 같이 제2전선이 연기됨으로써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의 95%를 떠맡은 것은 소련이었습니다. 1942년 봄 재개된 독일군의 공격은 남부전선에 중점을 두었고,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에서는 독·소 양군의 촌토(寸土)를 다투는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격전 결과 포위당했던 독일군은 1943년 1월 말 항복하였는데, 이 패배가 가져다준 영향은 매우 컸다. 민중의 저항운동을 비롯하여 연합국 진영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군부 내의 히틀러에 대한 불신이 커졌으며, 이탈리아는 영·미 측과의 강화를 획책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독·소전은 히틀러에게는 ‘사활의 투쟁’이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총동원 체제를 취하였지만, 1943년 여름의 총공격에서 실패하였고, 이후 대세를 만회하지 못하였습니다.
1943년 7월 영·미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와 보수파가 무솔리니를 감금하고 바돌리오 내각을 성립시켰습니다(7월 25일).
바돌리오는 즉각 영·미와 교섭을 개시하여 9월 3일 무조건 항복을 하였습니다. 항복은 9월 8일 발표되었고, 남이탈리아로 피신하였던 국왕과 바돌리오 정부는 10월 13일 독일에 선전 포고하였습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구출하고 북이탈리아에 공화파 시스트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1945년 5월 초까지 계속되지만, 이 일종의 내란 상태에서 국왕과 보수파의 권위는 상실되었습니다(1946년 5월, 왕제폐지).
1943년 태평양에서의 전국도 전환하였습니다.
서전에 성공한 일본은 제2단계 작전으로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차단하려 하였지만,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전, 특히 같은 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일본 해군 기동함대의 주력(主力)이 상실되었고,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은 미국군이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942년 8월 미국군은 과달카날섬에 상륙하였다. 격전 끝에 1943년 2월 일본군은 패퇴하였다. 이후 미국군의 반공은 격렬하여 뉴기니·솔로몬제도·길버트 제도·마셜제도로 향하여 전개되었습니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선언에서 미·영·중은 전후 일본의 영토 처리 방침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944년 3월 미얀마의 일본군은 임팔작전으로 인도에 침입하려 하였으나 7월 대패하였습니다. 마리아나 제도에 육박하는 미군도 7월 사이판섬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 공습의 기지를 얻었습니다.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위하여 10월 레이테섬에 상륙하였습니다. 일본 해군은 전력을 다하여 레이테 만의 미 함대를 격멸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중국 전선에서도 1943∼44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산사 군에에 의하여 화북과 화중에 ‘해방구’가 만들어짐에 따라 일본군은 간신히 점과 선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이탈리아 항복 후의 1943년 11월, 영 ·미 ·소는 제2전선의 실시에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영 ·미 연합군은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습니다. 영 ·미군의 진격과 함께 프랑스의 저항운동도 활발하여져, 8월에는 파리 시민이 봉기하여 파리를 해방하고 드골을 맞아들였습니다.
독일에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가 7월 20일 반히틀러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미 ·영군에 호응하여 소련군의 진격도 활발하여, 1944년 가을에는 소련 영토를 해방하였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격과 이에 호응하는 지하 저항 전의 격화를 앞에 두고 동유럽의 동맹 제국은 동요하여, 잇달아 대독 참전으로 방향 전환하였습니다.
1944년 3월 루마니아는 소련군이 육박하자 국왕과 군부가 인민민주주의블록에 협력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9월 소련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독일에 선전하였습니다.
불가리아는 영 ·미에 선전하고 소련에는 형식상 선전하지는 않았으나, 소련이 1944년 9월 선전하자 조국전선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습니다(10월).
이어 소련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들어오지만, 이곳에서는 일찍이 저항운동이 활발하여 1942년 유고 인민해방군이 결성되었고, 1943년 11월 티토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인민해방군은 1944년 10월 베오그라드를 해방하였고, 거의 자력으로 독일군을 전토에서 일소하였습니다. 이어서 소련군은 헝가리로 향하였습니다. 홀 티 섭정이 휴전을 제의하자 독일은 홀 티를 감금하고 친독적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공산당 등의 ‘헝가리 전선’은 소련군의 협력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습니다(45.1).
소련군은 1945년 2월 부다페스트를 함락시켰으며,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동 유럽제국에는 저항운동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미 1944년 10월 스탈린과 처칠은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에는 소련의, 그리스에는 영국의 우월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영 ·소가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티토 정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분규가 생겼다. 저항운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런던 망명정부는 반소적이라고 하여 소련은 이와 단교하고, 1944년 7월 루블린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1944년 8월 런던 망명정부는 무력봉기에 의한 바르샤바 해방을 시도하였으나, 독일군에게 진압되었습니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고, 폴란드의 두 정권의 통일과 국경에 관하여는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일단 해결을 보았습니다.
또한 이 회담에서는 독일 처리 문제가 검토되었으며, 소련의 대일참전도 결정되었습니다.
히틀러는 1944년 12월 서부전선 아르덴에서 일대 반격을 시도하지만 4일 만에 괴멸당하고 말았습니다. 1945년 2월 소련군은 오데르, 4월 나이세강에 도달하였습니다.
동시에 영 ·미군도 공격을 재개하여, 3월 쾰른을 점령하고 라인강을 건너 4월 25일 엘베강의 토르고에서 소련군과 교환하였으며, 이 날 소련군은 베를린에 돌입하였습니다. 사태에 절망한 히틀러는 4월 30일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자살하였습니다.
후계자로 임명된 데니츠 제독은 군대와 민간인을 가능한 한 영 ·미 점령지구로 옮기면서 5월 7일 무조건 항복하여 9일 항복이 정식 조인되었습니다. 5월 23일 데니츠 정부의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독일의, 제3제국은 명실공히 소멸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이 4월 29일 항복하면서 무솔리니는 4월 28일 밀라노 근교에서 살해되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1944년 11월 이래, 미군 폭격기 B-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은 격화되었습니다. 19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 탈환하고 이오 섬에에 상륙하였습니다. 4월에는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 3개월이나 걸린 오키나와전에서는 전 도민이 동원되어 희생됨으로써(9만여 명), 닥쳐올 본토 결전의 비참한 양상을 암시하였습니다.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 선언’에서 대일(對日) 처리 방침을 명시함과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습니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은 이 날 대일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에 이르러 일본 군부도 항복을 결의하고 10일 밤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전파의 ‘국체 수호’ 고집으로 진통을 겪다가 일본왕의 결단으로 14일 가까스로 수락을 통고하고, 15일 일본왕은 이것을 국민에게 방송하였습니다.
30일 미군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였고,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가 조인되면서 태평양전쟁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전장(戰場)으로 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전쟁이었습니다. 참가국은 연합국 측이 49개국, 동맹국 측이 8개국이며, 중립국은 스위스 등 6개국에 불과하였습니다.
동원병력 1억 1000만 명,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 명으로, 그중에서 독 ·소 양국의 희생이 가장 많아 소련의 전사자 1,36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000만 명, 전인구의 약 1/10, 독일의 전사자 50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550만 명, 전인구의 약 1/10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일본의 전사자는 185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50만 명, 전인구의 약 1/40이라고 합니다. 이 개수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동원 병력수는 약 2배, 전사자는 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입니다.
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의 희생자가 현저히 많습니다. 이것은 나치스의 인종론적 절멸 정책에 유래합니다. 민간인의 희생자 가운데 약 500만 명은 유대인인데 이것은 나치스 지배하의 유대인 총수의 약 70%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의 전쟁이 민간인을 제외하지 않은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살육) 전쟁으로 된 데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전비, 파괴된 재산을 오늘날의 물가에 맞추어 재평가한다면 너무나 방대하여서 아마도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최초부터 전쟁 책임의 소재가 명료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국내에서는 파시즘화를 추진하면서 대외침략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연합국은
첫째로는 전쟁범죄인을 단죄하고(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군사재판),
둘째로는 일본 ·독일을 점령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민주화를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확실히 파시즘에 대항하는 연합국의 공통된 슬로건은 ‘민주주의’였으나, 자본주의국과 사회주의국과는 그 이해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차이는 일본 ·독일의 처리를 에워싸고 양 체제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최대의 피해를 받고 대독 전쟁 승리에 최대의 기여를 하였던 소련은, 내외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소련의 지도하에 동유럽 제국은 인민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체제를 취하였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오랜 대일 항전에 견디어 낸 중화민국이 5 대국의 하나가 되었으나, 국 공대 립은 내전으로 발전하여 1949년 10월 중국 정권의 성립을 보았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의 패퇴와 동시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는 베트남 공화국,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에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성립되지만, 종전의 식민국인 프랑스 ·네덜란드는 이것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민족해방운동은 고조되어 잇달아 독립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패전국 일본 ·이탈리아는 물론, 전승국 영국 ·프랑스 뒤이어 식민지를 잃었습니다. 더욱이 영국에는 노동당 내각이 성립되었고,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저항운동 가운데에서 공산당의 힘이 신장되었습니다.
미국만이 ‘민주주의 병기창’으로서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최대 최강의 자본주의국으로서 세계를 지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 ·소를 정점으로 하는 양 체제의 대립이 격화, 냉전화함으로써 추축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은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1946년 7~10월의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트리에스테(Trieste) 문제를(Trieste)문제를 둘러싸고 미 ·소가 대립하였으나, 1947년 2월 10일 간신히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에 대한 강화조약이 조인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게 영토를 할양하였습니다.
트리에스테는 국제연합 통치하의 자유지역이 되었으나, 1954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 분할되어 일단 해결을 보았습니다.
루마니아는 1940년의 소련에의 영토 할양을 재확인하였으나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대부분을 회복하였습니다. 헝가리의 국경은 거의 1938년의 국경으로 되었고, 불가리아는 도브루자남부지방의 영유가 인정되어 41년의 국경을 거의 유지하였습니다. 핀란드에 대하여는 1939년의 소련-핀란드 전쟁에 의한 소련에의 영토 할양이 인정되었습니다.
독일 처리 방침은 1945년 8월 2일 포츠담 의정서에서 명확히 되었으나 그 해석을 에워싸고 미 ·소는 매사에 대립하여, 1947년 말의 런던 4국 외상회담은 결렬되었습니다. 1949년에는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과 독일 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되었고, 미 ·영 ·프는 1952년 5월 서독과 ‘평화 확정 조약’을 맺었으며 1954년 10월 파리협정에서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고 사실상의 단독 강화를 체결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1953년 5월 동독에 자립권을 주었고, 1955년 9월 동독의 주권을 회복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두 개의 독일은 고정화되었습니다.
1945년 7월 26일의 대일 포츠담 선언에 명시되었으나, 대일 강화 문제에서도 미 ·소는 일치되지 않았으며, 또 일본 여론도 분열하였습니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습니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조인을 거부하였습니다. 중국은 초청되지 않고 인도 ·미얀마 ·유고슬라비아는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중화민국 ·인도 ·미얀마와는 별도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전쟁사 중 큰 전쟁 세계대전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고 그중에서 1차 세계대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차 세계대전
1. 제1차 세계대전 배경과 원인
1914년부터 4년간 계속되었던 세계 전쟁입니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고,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제1차 세계대전과 제국주의 열강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전쟁이었습니다.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의 성립이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 단계로 들어가, 각국은 대형화한 경제력의 배출구(판로)를 필요로 했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는데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 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 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습니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미국과 프랑스·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습니다.
2) 제1차 세계대전과 삼국 협상 및 삼국동맹
러 ·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 ·프랑스 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 ·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서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 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 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 협상을 성립시켰습니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3국 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습니다.
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을 더하여 갔습니다.
3국 협상과 3국 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18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Cairo·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
(Berlin·Byzantium·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建艦)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 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 사건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 ·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19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 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습니다.
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습니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 구인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습니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 도달하였습니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對)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습니다.
3) 제1차 세계대전과 발칸문제
발칸은 일찍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유럽의 화약고’였습니다. 이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제민족의 결집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이 영향을 겁내어, 독일의 지지하에 범게르만 주의를 주창하여 이에 대항하였습니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바랐으나 러 ·일전쟁과 제1혁명(1905)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배후의 독일과의 충돌이 두려워 1909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병합 정책 지지 성명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1912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에게 발칸 동맹을 결성케 하였고 같은 해, 동맹은 투르크와 싸워(제1차 발칸전쟁) 승리하였으나 투르크로부터 얻은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913년 재차 전쟁(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패한 불가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세르비아의 승리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승리를 뜻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리하여 유럽의 일각 발칸에서 제국주의열강은 자국의 세력 확장 때문에 소국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곳에서의 전쟁의 불꽃이 전 유럽을 휩쓰는 위험한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2.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 연습의 통감으로 이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G.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 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이것이 일부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을 포고하였습니다. 그동안, 오스트리아는 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세르비아 강경 방침에 대한 독일 측의 양해를 얻었습니다.
종래의 정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끌려서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 방침을 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독일 측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독일의 정부 ·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 전쟁으로 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와 같은 강경 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 측의 군비 강화가 1914년 여름에 그 절정에 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915년 또는 1916년이었으므로, 따라서 지금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 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대(對) 오스트리아 동원을 하고 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 이 또한 전쟁의 국지화(局地化)를 불가능케 하였습니다.
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여러 차례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29일 심야, 영국의 중립 예상이 무너지고 전쟁 개입이 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그때까지의 강경한 태도를 약간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위기로 그치지 않고 마침내 대전으로 급선회하고 말았습니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하여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의 기한부로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러시아로부터 아직 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대 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여 선전포고를 해놓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進攻)을 위하여 벨기에에 침입하였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하여 다음날(4일) 대독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 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 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3. 제1차 세계대전의 경과
독일의 작전은 서쪽에서 프랑스를 먼저 굴복시키고, 이어 동쪽으로 옮겨서 러시아를 칠 계획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일군은 개전 후 가장 먼저 북서 프랑스로 침입, 파리로 육박하였으나 1914년 9월 초순 마른(Marne)의 싸움에서 진격이 저지되었습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의외로 빨리 프로이센으로 침입하였으나,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원수의 지휘 하에 8월 말 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대패시켰다(타넨베르크 전투). 그러나 동서 공히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곧이어 참호전(塹壕戰)으로 바뀌어, 전선은 교착(膠着)되었습니다.
이 사이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연합국 측으로 참전(8.23)하여, 이 기회에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의 독일의 권익을 빼앗고, 특히 중국에서의 발판을 굳히려고 하였습니다. 한편 전전(戰前) 독일과의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 있던 오스만튀르크는 11월 2일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유럽의 전선은 캅카스,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으며, 1915년 2월에서 4월에 걸쳐 영·프 연합함대는 다르다네스 해협에서 격렬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1915년 4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최초로 독가스를 영국군을 상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동년 연합국과 동맹국 쌍방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3국 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의 동향이었습니다.
참전의 조건에 대하여 양진영과 거래하였던 이탈리아는 결국 동년 4월 ‘런던 밀약’에 의해 ‘미수복지’와 달마티아 등의등의 영토 획득을 약속받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하고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였습니다. 이탈리아는 군사적으로는 약체이었기 때문에 그 참전이 전국(戰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불가리아가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여 독일 ·오스트리아군은 그 협력을 얻어 세르비아를 점령하였습니다. 한편 1916년 8월에는 루마니아가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였으나, 곧 동맹군에 의하여 제압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1915∼16년 동맹국은 동유럽 ·발칸에서 적극적 공세로 나와 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서부전선에서의 교착상태는 의연 타결되지 않았습니다. 즉, 16년 2월에서 6월에 걸쳐, 독일군은 베르됭 요새에서 4회에 걸치는 대공 격을 가하여 50만 명의 병사를 희생하며 막대한 탄약을 소모하여 사투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페탱 장군의 지휘 하에 요새를 굳게 지켰으며, 6월 말부터 영 ·프 연합군은 서쪽의 솜(Somme)에서 총반격으로 나왔고, 9월 15일 영국은 최초로 18대의 전차를 병기로서 전장에 투입하였다(솜 전투). 약 5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영 ·프군은 90만 명, 독일군도 60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육상에서와는 달리, 해상에서는 영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습니다. 독일 해군은 대폭적 증강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비하여 수적으로도 열세이어서 개전 이래 북해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해전으로는 1915년 12월 도거 뱅크의 해전과 1916년 5월 유틀란트 해전이 있었을 뿐인데, 모두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고, 영국의 해상 지배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전쟁에서 신병기로 등장한 전차는 영국에 이어 1917년 프랑스, 1918년 독일이 각각 그 뒤를 이었으며, 주로 정찰용으로 쓰인 비행선은 독일이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4. 제1차 세계대전과 교전국의 국내 정세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즈음하여, 각국 정부는 전쟁이 각각 상대방 측의 공격에 의하여 야기된 정당방위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국민에게 그것을 믿게끔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드높은 애국심의 고양(高揚)이 엿보였습니다.
각국의 지도자가 가장 근심한 것은 국내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동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은 그 대회 때마다 전쟁 반대 결의를 하였는데, 특히 1912년의 바젤 대회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으로써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국 특히, 서유럽 대국의 사회주의 정당 내부에는 기회주의나 내셔널리즘의 경향이 강하여서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는 자세는 어느 정도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일부를 제외하고 종래의 슬로건에서 180도 전환하여 전쟁 협력으로 내달았습니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사회주의 정당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부의 군사예산에 찬성하고, 정부와 ‘성내 평화(城內平和:Burgfriede)’를 맺어(1914.8.4) 전쟁 협력을 약속하였으며,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그 뒤를 따름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장기화함으로써 국민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였습니다.
이 전쟁 중에 예를 든다면 독일에서는 인구 6,000만 명 가운데 1,100만 명이 동원되었고, 그중 전사자 177만 명, 부상자 422만 명을 내었고, 국민 가운데 5명에 1명이 동원되어 그 반수 이상이 사상(死傷) 한 것이 되는데, 이 비율은 프랑스에서 거의 같고 영국에서는 약간 떨어집니다.
또한 이 전쟁은 공전의 물량(物量) 전쟁으로 이미 개전 당초, 불과 1주일간의 나름의 싸움에서 탄약 100만 발, 솜의 싸움에서는 그 20배인 2,000만 발이 소모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쟁 수행을 위하여 각국은 자국의 경제력을 동원하고 경제 전체를 전쟁을 위한 것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여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지자, 각국 정부에게는 국민의 불만을 누르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만드는 일이 사활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는 1916년 12월에, 로이드 조지 거국 이치 내각이이 만들어졌고, 프랑스에서도 1917년 11월에 클레망소 내각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들 내각은 경제통제를 강화하고, 군수생산을 높이는 한편, 국내외 반전 평화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그러나 영 ·프 양국은 식민지에게 식량과 원료의 공급을 강제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150만 명, 아프리카에서 100만 명이나 되는 원주민을 병사 혹은 노동자로서 유럽의 전선과 공장에 투입하여, 식민지인의 희생으로써 본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식민지나 해외시장을 모두 빼앗긴 동맹국 측에서는 물자의 부족, 국민생활의 궁핍은 그야말로 심각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이미 1915년부터 빵의 배급제를 도입하였고, 곧이어 고기 ·우유 ·버터 등도 배급제가 되었습니다. 1916년 겨울을 예로 들면, 어른 한 사람의 1주일분 배급량은 빵 1,900g,감자 2,500g,버터 80g,고기 250g,설탕 180g으로서 평상시의 3분의 1에 불과하였습니다.
더욱이 1916년 말에는 노동력 부족을 보충키 위하여, 국내에 있는 16∼60세의 남자를 탄광이나 공장에 동원하는 힌덴부르크 계획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불만이 높아짐에 따라 1917년 7월 의회 다수파가 ‘화평 결의’를 행한 뒤, 재상 베트만 호르웨크는 강경노선의 군부와 의회 사이에 끼어 맥없이 사임하고, 이후 군부에 의한 사실상의 군사독재체제가 성립되었습니다.
한편 같은 해 4월 사회민주당에서 ‘성내 평화’에 협력하지 않는 좌파가 따로 분열하여 독립 사회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노동자의 반전(反戰) 운동과 스트라이크가 번져갔습니다.
5. 제1차 세계대전과 비밀 외교
제1차 세계대전중에 교전국은 결속을 다지고 또한 중립국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전후의 영토나 세력권의 재분배를 약속하였습니다. 1915년 협상국 측은 이탈리아에게 ‘미수복지’를 비롯하여 터키령과 아프리카의 독일령 식민지 등의 분할을 약속하였습니다.
또,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령 마케도니아를 약속받고 동맹국 측으로, 루마니아는 헝가리령트란시비니아의 영유를 미끼로 연합국 측에 끌려들었습니다.
또, 빈사의 ‘유럽의 환자(SickmanofEurope)’ 오스만 튀르크의 영토를 에워싸고 영 ·프는 러시아에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영유를 약속하였으며, 다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1916년 5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러시아에 흑해 동남 연안을, 프랑스에게 시리아를, 영국에는 남 메소포타미아의 영유를 각각 약속하였습니다.
또한 투르크령 서아시아에서는 아랍인의 독립운동이 고조되었는데, 영국은 1916년 초에 아랍인에게 전후 이 지방에 아랍국가 건설을 약속(마크마옹 선언)하는 한편, 1917년 11월 연합국에 사는 유대인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같은 지역의 팔레스티나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확약하였습니다(밸푸어 선언).
또 인도에 대하여서도 전쟁 협력의 대상(代償)으로서 전후의 자치(自治)가 약속되었으나,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끝났습니다. 똑같이 동맹국 측에서도 독일은 대전 중 러시아령의 핀(Finn) 사람, 발트 3국의 제민족,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에게 독립을 약속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러시아 제국의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의위아스 카이 정부에게 산둥성이나 만주, 몽골을 위시한 중국 전토에서의 일본의 권익 획득에 대한 ‘21개 조 요구’를 강요하고, 최후통첩에 의하여 그 대부분을 승인케 하였습니다.
6.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은 최종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독일은 같은 해 1월, 무제한 잠수함전의 개시를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영국 주변의 해역에서 중립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상선을 무경고로 격침하여 식량이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영국을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과 경제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 미국의 참전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미국 참전의 효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즉 6~8개월 이내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독일 자신의 패배가 결정적이 되는 위험한 도박이었습니다.
독일의 잠수함은 이 싸움에서 예정을 상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영국도 중립국의 상선까지 동원하여 곤경을 타개하였기 때문에 결국 무제한 잠수함전은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야기시켰을 뿐,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리하여 패배가 결정적으로 된 독일에게 있어, 나머지 승리의 최후의 기회라고 할 러시아 혁명이 같은 해 3월(러시아曆2월)에 일어났습니다. 러시아는 정치 ·경제 체제의 후진성 때문에 장기에 걸치는 총력전에는 견디지 못하여, 군수품 ·식량의 부족, 정정(政情) 불안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3월 혁명이 일어나 차르정부가 쓰러졌고, 이어 11월(러시아曆10월) 혁명으로 소련 정권이 성립하여, 즉각 정전을 전(全) 교전국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소련 정부의 평화 호소와비밀 외교의 폭로는 세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14개 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연합국 측의 동요를 억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의 일각이 무너졌으며, 독일과 러시아는 같은 해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동부전선의 부담에서 해방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폈으나 3~7월의 반복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자, 독일은 이 공격에서 힘이 소진되었고, 7월 18일에는 미군의 증원을 얻은 연합군이 반격으로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승리의 평화’를 주장하여 모든 타협을 거부해 오던 군부도 이에 패배를 자인하고, 9월 말에는 연합국에게 휴전 제의를 하도록 정부에 제안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군부의 괴뢰 내각은 쓰러지고, 의회 다수파로 이루어진 막스 폰 바덴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신내각은 즉시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한편,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14개 조’에 의거하는 화평 개입을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이에 동맹 측은 총 붕괴되어, 9월 30일 불가리아, 10월 27일 오스트리아, 30일에는 오스만튀르크로 항복이 잇따랐습니다.
독일에서도 11월 3일 킬 군항(軍港)에서 수병(水兵) 폭동이 일어나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곧이어 제정(帝政)이 붕괴되고, 임시정부는 11월 11일 연합국과의 휴전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리하여 5년에 걸쳐 세계의 민중에게 커다란 희생을 입히고 싸웠던 제국주의 전쟁은 2개의 혁명을 유발하고, 연합국 측의 승리로서 종결되었습니다.
7. 제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조약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강화 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심의하는 이 회의를 주도한 이념은 미국 대통령 T.W. 윌슨의 ‘14개 조’의 원칙이었으나, 이것은 세계 민중의 평화에의 원망을 대표함과 동시에 세계 정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미국의 제국주의 요구의 표출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3 대국이 주도한 이 강화 회의는 열강의 거래의 무대가 되었으며, 그러나 윌슨의 이념은, 독일에 복수하여 그 힘을 될 수 있는 한 약화시키고 그 대신 스스로 패권을 확립하려 한 영 ·프 양 제국주의 국의 현실적 이해 앞에 패하여 크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6월 28일 베르사유에서 조인된 강화조약의 내용은 독일 국민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 되었습니다. 즉, 이에 따라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각각 약간의 영토를 할양함으로써, 인구의 15%와 유럽에서의 영토의 10%를 잃었습니다.
또 엄격한 군비제한이 부과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하여졌습니다. 특히, 무거운 짐이 된 것은 배상으로서, 1921년에 1,320억 마르크가 결정되었습니다.
한편, 다른 동맹 제국과의 강화조약은 생제르맹 조약(9.10:對오스트리아), 뇌이 조약(11.27:對불가리아), 세브르 조약(20.8.10:對터키), 트리아농 조약(對헝가리) 등 각각 별개로 체결되었습니다.
베르사유조약을 중심으로 이들 조약이 형성한 전후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부릅니다. 이 체제는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 등 동맹국측의 구제국을 해체하여 단일 소국가로 하였을뿐 아니라,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서 발칸과 동유럽에는 다수의 소국가(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발트 3국)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자결’의 원칙도 패전국이나 비유럽 세계의 식민지 ·종속국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동유럽에서의 신국가 건설도 동맹 제국을 약화하고, 나아가서는 소련을 묶어 두려는 의도하에서 행하여진 것이었습니다.
또한, 베르사유조약은 세계전쟁의 비참한 경험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평화유지 기구로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안국인 미국이 가맹하지 않았으며, 독일이나 소련도 당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맹은 평화유지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었다. 결국 베르사유체제 그 자체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의 재편성에 불과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로서는 지극히 불충분하여 새로운 국제 대립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2차 세계대전 거함거포 시대에 비운에 전함으로 알려진 일본에 야마토 전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개발역사
특징
운용현황
변형 및 파생형
제원
야마토급 전함
거함 거포 시대의 종언을 알리다
1. 개발 역사
1905년에 벌어진 쓰시마 해전은 해군의 무기 체계와 전략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원거리에서 일격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거포로만 무장하는 것이 효과적임이 입증되면서 그동안 이어져온 전함의 무장체계에 대한 논쟁이 끝난 것입니다. 거포를 탑재하려면 선체도 커져야 했고 포격전을 견딜 만큼 방어력도 늘어나야 했습니다. 이듬해 드레드노트(Dreadnought) 전함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거함 거포 사상이 주인공인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20세기 초에 열강들의, 특히 영국과 독일 사이에 있었던 건함 경쟁은 제1차 대전 발발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될 만큼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국가 재정에 무리를 줄 정도였기에 제1차 대전이 끝나자 승전국 위주로 자연스럽게 군축이 논의되었습니다.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이 연이어 체결되었고 이때 중점 감축 대상이 되었던 것이 전함이었습니다.
태평양에서 우위를 달성하려면 미국, 영국과 대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본은 자국의 해군력을 계속 3위 수준에 묶어버리는 이런 제약이 못마땅했습니다. 결국 대외 침략 의지를 노골화하며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은 1940년대에 주력으로 삼을 신예 전함에 대한 연구를 비밀리에 진행함과 동시에 1937년에 제2차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을 거부하고 본격적으로 전력 확충에 나섰습니다.
일본은 미국, 영국과의 국력 격차가 크다는 현실을 인정해서 같은 수량으로 군비를 갖추기는 무리라고 보고 질로써 양의 부족을 메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전함을 위주로 한 당시의 해전 방식을 고려한다면 틀린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수적으로 열세여도 상대를 격파할 수 있을 만큼 공격력이 강하고 반대로 상대가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방어력이 좋다면 이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지난 쓰시마 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에서는 전력을 총동원해 상대방을 일거에 섬멸시켜버리는 함대 결전 사상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였습니다. 해군력은 구축하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므로 초전에 상대의 주력함들을 격멸해버리면 상당 기간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사상 최대의 전함인 야마토급은 이처럼 일본 해군이 맹신한 거함 거포 주의와 함대 결전 사상을 배경으로 탄생했습니다.
야마토급은 침몰당하는 순간까지도 주포의 규격이나 장갑을 비롯한 상당 부문을 비밀로 유지했습니다. 1936년 말, 의회에서 2척의 예산을 획득했을 당시에 서류 상으로는 35,000톤 급 전함 2척, 구축함 3척과 잠수함 1척을 건조한다는 명목이었을 정도였습니다. 1937년 11월 4일 초도함 야마토, 1938년 3월 29일 2번 함 무사시의 건조가 시작되었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순차적으로 실전 배치되었습니다.
2. 특징
야마토급의 핵심은 역사상 최대의 함포인 구경 460mm(18.1인치) 주포입니다. 이를 3 연장으로 조합한 포탑 1개의 무게가 당시 중형 구축함과 맞먹는 3,000여 톤이었습니다. 일본이 건조한 전투함 중 최초인 3연장 포탑 덕분에 이전함들보다 야마토급은 공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총 3개의 포탑을 장착했고 포탄은 91식 철갑탄의 경우 길이가 1.95m에 무게가 1.46톤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대공 용도로 155mm 포 12문(개장 후 9문)과 127mm 포 12문이 선체 좌우에 촘촘히 배치되었습니다. 부포 탑의 방어력이 취약하고 배치 위치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현대 서방 구축함의 주포가 127mm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야마토급의 화력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엔진, 레이더, 사통장치, 포신 안정장치 같은 부분은 관련 기술력이 부족해서 성능이 떨어졌고 크기도 컸습니다.
장갑은 주포 포탑 전면이 660㎜, 측면이 410㎜, 갑판이 200~226.5㎜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일본의 제철, 제강 기술이 뒤져서 두터울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방어력은 양호한 수준이었습니다. 이처럼 거포를 얹고 방어력을 키운 덕분에 선체의 크기가 263m에 만재 배수량이 72,000톤에 이르렀습니다. 덕분에 야마토급은 1950년대에 미 해군의 항공모함 포레 스타일(Forrestal) 등장 전까지 사상 최대의 군함이었습니다.
3. 운용 현황
야마토급의 획득 계획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내용이 조금 차이가 나는 편입니다. 다만 건조에 착수한 함은 총 4척이었고 그중 2척이 전함으로 건조되었습니다. 1척은 건조 도중 항공모함으로 바뀌었고 나머지 1척은 중도에 취소되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계획대로 진행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예산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약 1조 엔 정도로 추정되는 척당 9,800만 엔의 건조비는 당시 일본 경제에 많은 부담을 주었습니다.
많은 돈을 들였고 그만큼 일본 해군에게 엄청난 기대를 안겨주었지만 야마토급의 실전 결과는 초라합니다.
1번 함 야마토는 1944년 6월, 필리핀 해 전투에서 처음으로 함포를 발사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텐고 작전 중이던 1945년 4월 7일에 미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고 격침되었습니다. 2번 함 무사시 함은 그보다 이른 1944년 10월 24일 레이테만 전투에서 반복적인 항공기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별다른 전과도 기록하지 못하고 피격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야마토급은 너무 과대평가되었다는 평가를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야마토급이 배치되었을 때는 이미 바다의 주인공이 항공모함으로 바뀐 상태였고 공교롭게도 이런 변화를 선도한 이가 일본 해군이었습니다. 포격 대신 하늘을 통해 보다 멀리서 때릴 수 있는 자가 승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야마토급은 거함 거포 주의의 막을 내린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4. 변형 및 파생형
야마토
제작 : 구레 해군 공창 건조 : 1937년 11월 4일 진수 : 1940년 8월 8일 취역 : 1941년 12월 16일 비고 : 1945년 4월 7일 격침
개발의 역사 1946년 새롭게 옷을 갈아입은 이탈리아군은 마땅히 사용할 만한 자국산 무기가 그다지 많지 않아 일단 미국제로 무장했었습니다.미국은 지난1943년9월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한 이후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던 나라였기에 이런 수순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동서냉전 분위기가 서서히 조성되면서NATO가 결성되고 얼마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고슬라비아와 접한 이탈리아의 전략적 중요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사라지다시피 한 이탈리아군 기갑부대도 미국산M4, M26, M46, M47전차 등으로 무장하며 재출발했었고1970년대 이후에는M60과 서독제 레오파르트1(Leopard 1)을 사용했했었습니다.한때 이탈리아는 국산 전차로 무장하고 전쟁까지 치른 나라였지만 성능이 뒤져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전후NATO체제에 편입된 이후에는 전적으로 외부에서 전차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던 이탈리아가1990년대 이후에 사용할 제3세대 전차는 노후 전차를 적시에 교체함과 동시에 대외 수출까지도 염두에 두고 자체 개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미국(M1)을 필두로 비슷한 시기에독일레오파르트독일 레오파르트(Leopard 2),프랑스 르클레르(Leclerc),영국챌린저영국 챌린저(Challenger) 2등의 서방 국가들이 거의 동시에 신예 전차 개발을 시작했기에,이런 새로운 분야의 경쟁에서 이긴다면 거대한 해외 시장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었습니다.
무려40여 년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가 이렇게 과감히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레오파르트1을 면허 생산하면서 나름대로 기술력을 확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토 멜라라(OTO Melara)와 피아트(Fiat)가 합작하여 대외 수출용인OF-40전차를 개발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1980년대 초반 이탈리아 유수의 기업인 이베코(Iveco)와 오토 멜라라의 주도로C1아리에테(Ariete)로명명된 신예 전차의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뛰어난 전공을 올린 몇 안 되는 부대 중 하나였던아리에테기갑사단에서 이름을 따왔을 만큼 새 전차에 대한 이탈리아의 염원은 컸습니다.일사천리로 개발이 이루어져1986년에 시제차가 제작되었고,각종 실험을 거쳐1995년부터 일선에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개발 당시에는 보유하고 있던720대의 레오파르트1을 전량 대체하고자 했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이후 대대적인 군비감축이 단행되자 양산 직전 계획 물량은300대로 확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2000년대 들어 이탈리아 경제에 심각한 어려움이 닥치자2002년200대를 끝으로 제작이 종료되었습니다.
대외 판매도 실패하여 현재C1아리에테는이탈리아군만 운용하고 있습니다.
특징 C1 아리에테는 서방 제3세대 전차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120mm 44 구경장 활강포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오토 멜라라가 독일 라인 메탈(Rheinmetall)사의 L/44를 현지 면허 생산한 모델이어서 APFSDS-T, HEAT-MP를 비롯한 다양한 NATO 표준 120mm 탄을 사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따라서 탄의 위력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공격력이 같은 주포를 사용하는 M1 A1, 레오파르트 2, K1A1 등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FCS는 갈릴레오 아비 오니카(Galileo Avionica)에서 제작한OG14L3 TURMS를 장착했고 전 차장용SP-T-694파노라마 조준경,포수용 주조 준경,레이저거리측정기레이저 거리측정기,디지털식 탄도 계산기 등을 이용하여 전천후로 이동 중 사격이 가능합니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단시간 내에 여러 개의 목표를 선정하여 교전할 수 있는헌터킬러(hunter-killer)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나1990년대 등장한 전차로는 보통 수준으로 평가됩니다.
차체와 포탑은 강철과 복합 장갑으로 제작되었습니다.
NBC방호 능력이 있고360도 감시가 가능한RALM경보기를 부착하여 조기대응 능력도 향상되었으며면허 생산한 독일ZF의LSG 3000변속기와이베코(Iveco)의V-12 MTCA엔진을 결합한 파워팩(powerpack)은 최대1,270마력의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쟁 제3세대 전차들 대부분이1,500마력인 점과 비교하여 장갑을 추가 장착하여 무게가 증가하게 되면 힘이 달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C1아리에테는OF-40제작에 사용된 기술을 많이 적용하고주포나 변속기의 경우 외부 기술을 도입해 적용한 덕분에개발 기간과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었다.그래서 생산량이 많지 않았음에도 경쟁 전차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입니다.
하지만 기동력을 고려하여 가볍게 개발한 점 때문에 방어력이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아 대외 판매에는 실패했습니다.
이 때문에 엔진과 방어력을 강화한Mk.2개발을 시도했으나 여러 이유로 취소되었습니다.
운용 현황 C1 아리에트 전차는 유고 내전 당시 평화유지 임무에 투입된 바 있으며, 2004년에는 이라크전에도 투입되었다. 현재 160여 대가 현역을 지키고 있으며, 아래의 부대에서 운용되고 있습니다. •피네롤로(Pinerolo)기계화여단 제31전차 연대31 제1전차대대 •아리에테기갑여단 제32전차 연대32 제3전차대대 •아리에테기갑여단 제132전차 연대132 제8전차대대 •가리발디 베르살리에리(Garibaldi Bersaglieri)여단 제4전차 연대4 제31전차대대 •육군 기병 학교 •육군 군수학교
변형 및 파생형 ●C1아리에테:기본형 ● C2아리에테(Mk. 2):자동장전장치,최신 사격 관제장비,신형 서스펜션 장착 등을 통해교전 능력과주행력을 높이고 장갑을 강화한 개량형.2020년까지 업그레이드가 이뤄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