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즈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차례
모두가 원했던 도시 레닌그라드
소련 혁명상징 도시
독일의 당연한목표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
1. 모두가 원했던 도시 레닌그라드
1940년 7월 초, 프랑스를 평정한 직후,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Oberkommando des Heeres)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독일군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차출하여 이 시 조직으 설치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하달된 임무는 소련 침공에 관한 기초적 계회를 수립하는 것이 이었습니다.
아직 히틀러의 정식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명령이 내려올 것이 분명하였기에 미리미리 대비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8월 8일, 이곳에 파견 나온 제18군 참모장 마르크스(Erich Marcks)는 러시아의 빈약한 도로망을 염두에 두고 수립한 작전 초안을 상부에 보고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후 바바로사 계획(Operation Barbarbossa)으로 알력진 소련 침공 전락의 최초 뼈대가 됩니다.
마르크스는 주공을 크게 둘로 나누어 모스크바와 키예프로 신속히 진격함과 동시에 소련군의 주의를 분사시킬 목적으로 조공을 이도시로 향하도록 작전을 수립합니다.
이를 검토한 참모장 항더(Franz Halder)는 키예프보다 정치적 상징성을 훨씬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먼전 점령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타당하다며, 계획을 수정하여 12월 5일 히틀러에게 보고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키예프와 레닌그라드를 우선 점령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격국 전쟁 지휘부의 갑론을박 끝에 침고군 주력을 셋으로 나누어 모스크바, 키예프 그리고 이도시를 일거에 점령하도록 수정한 최종 침고 계획이 채택되었습니다.
실전이 오고 간 모스크바나 키예프와 달리, 이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당연한 목표라고 보았던 레닌그라드였습니다.
독일이 그렇게 생각하였던 만큼 소련 또한 이곳을 지키고자 했으며 레닌그라드는 엄청난 혈전의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도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에서 최장이라 할 수 있는 900여 일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이전 투에 이름이 바로 레닌그다드 포위전입니다.
2. 소련 혁명 상징도시
1703년 제정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원래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였지만 스웨덴이 강점하고 있던 네바강 하구의 습지대를 탈환하게 됩니다. 그는 발트해 연안의 이곳을 유럽으로 향한 창으로 삼기로 하고 새로운 도시의 건설에 착수하게 됩니다. 자신에 이름을 따서 상트 레테르 부르크로 도시의 이름을 정한 그는 1712년 이곳을 수도로 없겼을 정도로 애착과 기대가 컸습니다.
이렇게 시작돼 이도시는 이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러시아 제2의 대도시가 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위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흔히 러시아의 심장으로 블리는 모스바는 정치적 상징성이 큰 반면, 해상을 통한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트 페테르브르크는 학술, 문화, 예술 분야를 선도하여 러시아의 머리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소련을 태동시킨 혁명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외부 세계의 흐름을 러시아에서 가장 먼저 접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절대 왕정에 반발한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을 만큼 반골 기질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공 산형명이 시작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905년 이른바'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발한 이후 민심이 계속 흉흉해지자 1914년 도시의 이름을 좀 더 러시아의 친화적인 페트로그라드로 개칭하였지만 이미 권력에 등을 돌린 대중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제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이 도시에서 3월 혁명, 11월 혁명이 연이어 버리시면 제정 러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 아인 소련이 탄 행하였습니다.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다시 이름을 바뀐 점만 보더라도 소련 공산 쥐의 역사에서 이도시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레닌그라드는 소련 혁명의 산징과도 같은 도시였습니다.
3. 독일의 당연한 목표
상징성이 먹고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대도시였지만 독일이 레닌그라드를 점령해야 할 당위성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먼저 표트르 대제가 이곳에 도시를 만들었던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상 독일이 레린그라드를 점령하면 소련은 발트해를 통해 밖으로 나갈 통로가 차단되어 버립니다.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상 독일인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면 소련은 발트해를 통해 밖으로 나갈 톨로가 차단되어 버리고 맙니다.
소련은 거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지만 의외로 해상 출입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 , 레린그다드는 구중 얼마 안 되는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반면 독일이 이곳을 차지하면 소련 내륙으로 칙 나갈 수 있는 중요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독일군의 핵심 브레인들이 침공 계획을 짜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 보급로였습니다.
유럽에 비해 몹시 적은 철도와 몇 개 되지도 않은 열악한 도로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홍이어서 소련 내부에서 주공의 지향 방향은 극히 제한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독일군은 갈수록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이는 전쟁의 패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레니 그 라드가 확보는 독일 본토에서 소련의 중심으로 향하는 거대한 해상 보급로의 출입구가 개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곳을 교두보 삼아 독일이 최종 진출 목표로 설정한 A-A선(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의 북쪽 끝인 아르한겔스크는 반쪽 통로이지만 이곳이 막히면 소련이 외부와 연력 될 수 있는 바닷길은 극동과 흑해만 남게 됩니다.
레닌크가드는 이처럼 혁명이니 역사성이니 하는 추상적 명분보다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독일에게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반대로 소련에게는 어떠한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사수해야 할 싸움터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외부 연결이 언제든 가능한 해안도시여서 대륙 한가운데 위치한 모스크바와 달리 소련의 전통적으로 구사해온 청야 작전이 방어에 그다지 효과가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4.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
이도시가 아무리 해안가 도시라도 해군력이 약한 독일이 바다를 통해 이곳을 점령할 수는 없었습니다.
소련도 해군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독일 또한 이를 단숨에 격파하고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킬 만한 역량은 없었습니다. 사실 주변에 40여만의 병력이 지키고 있는 350만 인구의 대도시를 해군으로만 순식간에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타 전선과의 연결을 고려했을 때 이곳만 먼저 차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육상으로 900km를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여야 하는데, 사실 소련과의 전쟁을 한창 계획 중인 독일에게 이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설령 레닌그라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소련을 군사적으로 굴 북 시키려면 그 이상은 진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마치 깔때기 입구처럼 진격하면 할수록 넓어지는 소련의 지리적 구조에 있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전선이 커진다는 의미인데 최종 목표로 설정한 A-A선까지 가면 출발선 다시 보다 약 2배 정도 전신이 넓어지게 됩니다. 전선 남부는 추측 국에 가담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도움을 받아 후속 보급에 그다지 문제가 없었지만 레닌그라드로 다가가야 할 북부는 일단 진력 방향부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구조상 동쪽으로만 직진하면 되는 모스크바, 키예프와 달리 레닌그다는 발트해 연안을 따라 복동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독일의 진격이 길어질수록 우측면이 그대로 노출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살실 소련이 1940년 6월 14일, 3국을 침공하여 합병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일 발트 3국이 독일 편에 붙는다면 레닌그라드는 바로 밑이 훤하게 열리는 샘입니다.
풀란드를 분할할 때 독일과 사전 밀양을 맺고 취한 군사 행동이었지만, 소련의 발트 3국 점령은 레닌그라드 방어를 위한 사전조치이기도 했습니다.
1967년 최초의 공격헬기인 AH-1G 코브라 헬리콥터가 등장했지만 엔진의 출력부족으로 인하여 무장이나 탄약을 실는데 제약이 많았습니다. 특히 대공화기에 취약하였고 그리하여 코브라를 대체할 복녁적인 공격헬기를 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시작은 록히드 AH-56A'샤이안'을 개발하였으나 이 계획은 취소되었습니다.
취소 내용은 다음 샤이안에 내용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미군은 신형 공격 헬기 사업(Advanced Atack Helicopter program)을 1972년 부터시작했으며 지상 대공 무기로부터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기갑전력을 격파하는 전술이 개발되어 '원거리 타력의 '탱크 킬러'를 차세대 공결 헬기의 목표로 설정하였습니다.
신형 공격 헬게(AAH)는 특히 고기동성에 강력한 방탄성능에다 특수 센서와 뛰어난 항법장치가 핵심으로 결국 2개 기종이 선정되어 휴즈 항공(이후 맥도널 더글러스, 지금의 보잉)의 YAH-64와 벨의 YAH-63이 AAH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1975년 미군은 YAH-64를 차기 공격헬기로 선정했습니다.
기체의 생존성 증대에 중점을 두어 무려 1.1T의 장갑 재질이 기체를 둘러싸고 있으며, 23mm 대공포에 직격에도 조정사가 생존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엔진으로는 GE T700-701 터보 샤프트 엔진(1,696 shp)을 2개 장착하여 충분한 출력을 보장했으며, D형 블록 3부터는 T-700-701D(2,000 SHP)를 장착하여 더욱 기동성을 높였고
무장면에서는 철저하게 장거리 타격 기능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헬파이어 미사일을 무려 16발이나 장착하여 레이저 조준으로 최대 8KM의 거리에서 적 전차나 벙커를 격파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30mm 체인건을 장작 하여 두꺼운 장갑도 격파할 수 있었고, 70mm 히드라 로켓포나 스팅어, 사이드와인더 공대공 미사일을 장착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TADS/PNVS(Target Acquisitin and Designationn System, Pilot Night Vision System)라는 정교한 센서를 장착하여
야간에도 정밀한 목표 획득 및 조준이 가능합니다. 또한 TADS는 전방 화기 관제사의 헬멧과 연동하여 헬멧의 움직임에 따라 M230체인 건의 조준 방향을 결정합니다.
한편 D형에는 113kg의 롱보우 레이더를 장착합니다.
AN/APG-78 롱보우 레이더는 아파치의 로터 위 에버 선처럼 달려있는 전자장비로 사격을 통제하는 기능을 담당합니다.
안개나 연무 또는 비를 통과 통과할 수 있는 밀리미터 대역의 전파를 사용하는 롱보우 레이더는 10~15km 이내에서 1,000개 이상의 지상목표물에 대해 피아 여부를 탐지하고 그중에서 128개 목표에 움직임을 추적할 수 있으며, 다시 그중에서 16개의 우선 목표를 지정할 수 있는데, 여기에 걸리는 시간은 겨우 30초에 불가합니다. 이런 뛰언 탐색 능력은 마치 AWACS의 축소판에 해당합니다.
3. 아파치 운용현황
이번에는 아파치 운용 현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84년 1월 8일 양산 1호기를 인도하여 각종 시험 평가에 사용했으며, 1987년 2개 제대가 유럽에 배치되어 실전훈련을 실행했습니다. 최초의 실전 투입은 1989년 파나마 침공 작전이었으며, 1991년 걸프전에서는 8대의 아파치 가 투입되어 비밀 타격 작전에 성공, 이라크 방공망을 무력화하면서 다국적 공군을 위한 공중회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라크의 전차 병력에 맞서 227대의 AH-64가 투입되어 500대 이사의 전차 및 장갑차량의 파괴했습니다.
미군은 2011년 1월 기준으로 모두 727대의 아파치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A형 107대, D형 620대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은 1990년부터 모두 42대의 AH-64A를 도입했습니다.
영곡은 웨트 랜드사에서 WAH-64,67대를 면허 생산하여 아파치 AH1으로 운용 중이다. 이외에도 네덜란드 3, 아우디 아라비아(12+70), UEA(30), 이집트(36), 쿠웨이트(16), 그리스 (32), 싱가포르(20), 일본(50)등 다양한 국가가 아파치를 획득했습니다.
4. 변형 및 파생 기종
AH-64C
AH-64A의 또 다른 업그레이드 제안모델. 롱보우 레이더와 700C 엔진의 장착이 골자였으나 1993년 취소되면서 D 모델 개수사업으로 이관.
AH-64D 롱보우
글래스콕핏과 롱보우 레이더를 갖춘 개수형. AN/APG-78 롱보우 밀리미터파 화력통제레이더를 갖추어 ‘미니 AWACS’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편 D형의 모든 기체가 아니라 1/4 정도의 기체에 롱보우 레이더를 장착한다. T700-GE-701C 엔진을 장착하여 출력을 높였다. 이후 블록 I/II 업그레이드를 통해 디지털 통신능력을 보강했다.
AH-64의 영국 면허생산모델. 아구스타웨스트랜드에서 생산을 담당하여 67대를 생산했다. 롤스로이스 RTM322엔진(2,100shp)을 장착하여 아파치 가운데 가장 강력한 출력을 자랑한다. 스타스트릭 미사일과 CRV7 로켓을 운용할 수 있으며, 애로우헤드센서(M-TADS) 개수사업이 예정되어 있다.
AH-64DJP
AH-64D의 일본 면허생산모델. 후지중공업에서 생산을 담당하여 2006년 초에 면허생산 1호기를 납품했다.
전 세계에는 다양한 특수작전을 하는 특수부개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특수부대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특수작전이란 또 무엇이 있는가?
특수작전이란 :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비상사태나 전략적 우발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특수한 작적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정규병력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일이나 정규 벽력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특수작전입니다.
한마디로 정규병력이 준비 되어 있지 않은 일이나 정규 병력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특수작전인 것입니다.
1. 특수작전에는 어떤것이 있을까요?
특수부대가 수행하는 특수작전은 대표적으로 다음 9가지로 분류합니다.
타격 작전, 비정규전, 대게릴라 작전, 해외 방어 원조, 대테러작전, 민사 심리작전, 정보작전, 기타 군 통수권자나 국방장관이 지정하는 모든 임무 이렇게 특수작전의 범위는 매우 다양합니다.
보통 특수부대라고 하면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 수수의 인원이 적의 핵심 목표를 파과 하는 모습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렇게 특수작전부대가 사전에 지정된 목표물을 포획, 파괴, 회수 하는 군사작전을 '타격 작전'이라고 합니다.
타격 작전은 예로부터 특수부대의 대표적인 임무입니다.
그러나 파괴활동만 전부가 아닙니다. 특수부대는 적의 이동상황과 동태를 정확하게 살펴서 전달하는 임무도 수행합니다. 전직 깊숙이 침투하여 국가에서 요구하는 첩보와 제원을 수집하는 군사작전을 '특수 정찰'이라고 합니다.
걸프전에서 미국과 영국군 특수바대가 수행한 스커드(SCUD) 미사일 정찰활동이 이런 특수 정찰의 사례에 해당합니다.
특수부대는 정규군과는 다른 차원의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특수부대는 적진이나 적 점력지역에서 주민을 규합하여 군사 세력으로 만들어서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활동을 하는 것을 바로 '비정규전'이라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군 점령지역에서 적군의 게릴라를 색출하여 섬멸하는 임무는 '대게릴라 작전'이라 하며 9.11태러후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된 미군 특수 부대는 현지에서 반군을 조직하여 겨우 한 달 만에 수도 카불을 점령했는데, 이것이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비정규전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2. 다양한 스팩트럼을 포함하는 특수작전은?
대표적인 특수작전 영역은 바로 '대테러작전'입니다.
대테러 작전은 테러범의 활동에 예방하고 대응하며 더 나나아가 사전에 섬멸하는 모든 공세적 군사작전을 말하며 테러조직의 본거지를 공격하거나 , 테러조직이 보유한 대량 살상 무기를 회수하거나 인질을 구출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엔테베 인질 구출작전이나 영국 특수부대의이란 대사관 인질 구출작전이 역사상 유명한 대 테러 작전에 해당합니다.
삼호주얼리호 인질 구출작전의 경우도 이러 대태러 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수작전은 구사외교에서도 넓은 활약을 합니다. 해외의 동맥 국이 스스로 안보능력을 갖추도록 원조하는 임무를 특수부대가 수행하며 해외 방어 원조에도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것은 이들이 수많은 군사적인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훌륭한 교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당 국가와의 군사적인 비선을 확보하는데 특수부대원의 어학능력과 경력은 자국군에게 커다란 자산이 됩니다.
현재 우리군이 아랍에미리트(UAE)에 파병한 '아크'부대 역시 이런 해외 방어 원조 임무를 수행합니다.
특수부대라고 해서 싸움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역시 전쟁을 위해서는 정보활동이 필수적이며, 여기서도 특수부대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군 수뇌부의 결심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군사적인 기만 행동이나 심리활동 등을 수행하는 '정보작전'도 특수작전의 중요한 분야입니다.
1991년 걸프전에서 소수의 미 해군 특수 부대원이 쿠웨이트 상륙작전을 연출 하면서 이라크 군사단을 기만한 작전이 대표적인 정보작전 사례 가우데 한입니다.
여기에 더하면 '민사심리전'이란 고도의 전술 역시 특수 부대의 몫입니다.
민사심리전이란?
군사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아군에 대한 민간의 우호적인 태도를 유발하고, 더나아가 적국 정부와 국민에 대해서 아군이 원하는 행동을 유발하는 포괄적인 작전 형태입니다.
보통은 작전지역에 전문화된 부대가 대민지원활동을 통해 현지 세력을 규합해나기기도 합니다.
특히 특수작전의 정의를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 아홉가지 임무 가운데 마지막 항목입니다. 즉 군 통수권자나 국방장관이 요구하는 임무라면 '무엇이든'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정규병력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수해하는 것이 특수부대이기에, 세계 어느 특수부대를 막론하고'블가능은 없다'라든가'안되면 되게 하라'와 같은 신조가 생겨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내용은 2차 세계대전 악명을 떨치고 공포에 대상이던 u보트에 대해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목차
유보트 개요
유보트 소개
2차 세계대전중 독일해군
2차 세계대전의 활약 사항
지중해
현제 남아있는 유보트
1. 유보트 개요
카를 되니츠- 100척의 유보트로 상 함대 이상의 성과를 낼 술 있고 200척으로 영국의 보급선을 완벽히 차단할 수 있으며, 300척이 있다면 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 수 있다.
독일 해군 제독 카를 되니츠가 한 말입니다. 그만큼 2차 세계대전에서 유보트는 영국과 연합군에게 공포에 대상이 됩니다.
윈스턴 처칠- 전쟁 중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한 존재는 유보트였다. 우리들의 생명선인 바다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독일 유보트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편이 현명했을 것이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한 말입니다. 독일 유보트가 공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유보트 소개
유보트에 대해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일어로 운터 제 보트(Unterseeboot)의 약어로, 영어로 치자면 'Uner- sea- Boat'가 됩니다.
말 그대로 잠수함 독일 잠수함만 칭하는 것은 아니고 1차 대전 당시 독일어를 공용어로 쓰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잠수함도 유보트라고 불리었습니다.
이자체가 독일어로 잠수함을 뜻하고 일반 명사이지만 영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독일 해군이 운영하는 잠수함을 통틀어 지칭하고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보트라는 말만 들어도 1,2차 세게 대전 당시 운용된 독일 잠수함을 떠올릴 것입니다.
유보트 함장이 가끔 중위나 소령 함장도 존재했으나 원칙적으로 대위가 지휘관이었고 독일 해군에서 함이 아닌 정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잠수함이 아닌 잠수정이라 해야 하지만 로애 전부터 잠수함이란 용어로 고정되었기 때문에 그냥 잠수함이라고 많이 번역되어 쓰이고 이는 독일 해군이 베르사유조약에 명시한 함정 보유 수량 제한을 서류상 회피하려 일부러 타국 해군의 동급 함종보다 급수를 낮춘 탓도 있습니다.
조약으로 인해 전함과 순양함 각 6척, 구축함 12척만 보유 가능한 현실에서 가용 가능한 구축함을 늘리기 위해 다른 국가에 호의 구축함 수준인 천 톤급 고속함도 어뢰정으로 분류하고 대위를 지휘 간을 삼은 것이 대표적, 조약 파기 이후 연합국에 대한 기만책 일환으로 종전 시까지도 이런 체계를 유지했습니다.
독일 내에서는 현제 세계 각국에서 사용하는 디젤 잠수함의 베스트 설러인 209급 잠수함과 214급 잠수함, 독일 해군이 운용하는 202,206, 212급 역시 이 유보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3. 2차 세계대전중 독일해군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대전을 통틀어 엄청난 양의 연합군 함선들을 격침시켜 한때는 영국을 거의 아사 직전까지 몰아갔던 독일 해군의 효자, 크릭스 마리네의 수상함정들은 영국은 물론 대륙 국가인 프랑스 상대로도 보잘것없는 전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독일 해군은 자원과 인력이 적개 들어가는 비대칭 전력인 잠수함을 가지고 영국을 괴롭히는 작전 말고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잠수함이 일부 전투함과 싸워서 이긴 전과는 있지만 주목적은 통상 파괴였고 그개 보로 부제한 잠수작전 이리저리 통상함을 파괴하다 보니 중립국, 특히 영국 여객선 rms 루시타니아가 재수 없게 유보트의 사냥감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유보트 주임무는 영국으로 들어가는 상선을 공격하여 영국에 물자 전달을 막아 영국이 전쟁수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카를되네츠가 한말 중 '유보트는 승조원 제군이여, 이제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그동안 누구한테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잘 싸워주었다. 이제 앞서 떠난 전우들에게 경의를 표하자 '라는 말도 유명합니다.
4. 2차 세계대전의 활약상
이제 유보트의 활약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2차 세계 다전 당시 유보는 함대를 지휘한 사람이 바로 유명한 카를 되니츠입니다. 전쟁 초기 독이 해군 잠수함대는 많은 제약 안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통상 파괴와 관련된 다양한 조약들이었습니다. 정선과 검수, 공격 전 경고 등을 명시한 조약은 기습 즉 쏘고 튀는 게 전제조건인 잠수함에게는 그냥 싸우지말라는 소리나 마찮가지였지만 히틀러는 미국 참전을 우려해서 잠수함대가 이조약을 준수할 것을 명령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되니츠는 정치적인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바로 독일 제국 함대의 한이 서린 스캐퍼 플로를 유보트로 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u-47의 합장 이어던 퀀터 프린은 108일 출항했습니다 단한척이었고, 어뢰 탑재량도 넉넉하지 않았기에 만약 영국의 대잠 구축함에게 맞닥뜨리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권터 프린은 잠수함을 목고 스캐퍼플로 향하다가 수평선 너머에 연기가 보면 바로 잠항하는 방식으로 닷새 동안 항행하여 스태퍼 플로 도달했습니다.
원래 10월 13일 ~15일 사이의 달밤은 그믐이라 바닷물에 달빛이 없야 했고 , 때문에 잠망경을 내놓고 항행해도 그 뒤로 생기는 물살이 보이지 않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러데 잠망경을 올려 보니 오로라가 비추고 있습니다.
이후 몇 차례나 더위 기를 맞았지만 권터와 승조원들은 이때를 두고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권터는 오로라가 훤히 비추는 바닷물을 가르고 항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운이었는지 영국군은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권터는 무사히 쿠크 해역을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해협에는 영국군이 세 척의 패 선박을 가라앉혀 두어 잠항이 블가능했는데 , 권터는 뻔뻔하게 수상 항해로 쳐들어갔습니다.
이어서 그는 스캐퍼플 내부로 들어가 잠항한 채 영국군 전함 로열 오크호에 어뢰를 4발 쐈지만, 모조리 불발되었습니다.
이제 어뢰가 터지는 소리를 영국군이 들어은 곧 구축함들이 몰려와 폭뢰를 떨어트릴 것이었기에 후톼하려고 했는데 어롸가 불발되어서 그런지 소리가 크게 나지 않았고 영국 승조원들은 그 소리가 보일러 배관 터지는 소리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구축함들은 잠잠했고, 이에 퀀터는 어뢰 5발로 2차 공격을 가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로열 오크가 격침되고 리펄스가 대파되자 스케퍼플는 난리가 났습니다. 그제야 영국군 구축함들이 몰려가 폭뢰를 떨고이 시작했지만 설마 잠수함이 패 선박 방어선을 수상 항해로 뚫고 왔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 그 결과 남쪽 해협으로 가서 폭뢰를 떨궈댔습니다.
그러게 날이 밝아오자 권터는 다시 유유히 수상 항해로, 그것도 영국군 해병들과 지역 주민들까지 똑똑히 보는 앞에서 독일로 되돌아갔습니다.
안 그래도 거창한 걸 좋아하는 히틀러는 이 대전고에 크게 기뻐하면서 되니츠를 불러들였고, 프린 대위를 비소한 u-47승 조원들은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호기를 놓치지 앟은 카를 최니츠 제독은 "제독이 바라는 대로 300척의 유보트를 띄워주겠소!"라는 히틀러의 약속을 받아냈고 그동안 잠수함대의 발목을 잡아오던 제약도 풀어버렸습니다. 이로써 늑대 때 전술 (울프팩 전술)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전까지 잠수함의 전력은 특정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목표물이 나타나면 단독으로 공격하고 빠지는 식이였던 데 비해서 늑대 떼 전술은 산개한 유보트들이 무선 통신으로 서로 정보를 교환하다가 시야 안에 선단(영국 물자를 보급하는 배)이 나타나면 통신을 통해서 집결 지점을 선택해서 다 같이 모여서 사냥(늑대 떼)하는 전술이었습니다. (이는 굉장히 효율적이며 현재 잠수함의 전략으로 흔히 사용되는 전술입니다. )
되니츠는 -우리가 300척의 유보만 있으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라고 했는데, 100척은 작전에 투입하고 100척은 유지 보수 및 임무교대 선상에서 대기 100척은 훈련을 받으면서 앞의 100척의 소모를 보충하는 데 쓰는 것으로 계획했다고 합니다.
유보트가 한참 공포와 엄청난 전과를 불러 일으키던 시절인 1939~41년간 북대서양에서 가용 가능한 유보트는 평균 7척으로, 단 1척밖에 없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히틀러가 약속한 숫자의 유보트가 도착하는 날은 상당히 늦어졌습니다.
1942년에 가서야 100척의 유보트가 동시에 작전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독일의 역량 부족이 원인으로 유보트는 1 척당 300만 달러의 꾀 고급 장비 (단시 4호 전차가 약 5만 달러 정도)입니다.
독소전을 준히하면서 게다가 아직까지 함대도 건설 중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기간에 300척가량 건조할 수 있는 것 미국이라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국이 계속해서 대담전력으로 변경하고 확충하면서 유보트의 전과도 이전에 비해서 줄어들었고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었었습니다.
창과 방패의 전력 대결로 한쪽이 전술을 바꾸면 상대가 대응하는 방식으로 영국은 호송선단을 처음에는 함선 단독으로 운용하다가 선단을 구성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구축함 이안 호위함과 같은 수의 호송 전력을 추가가 하는 전략을 완성시 시킵니다. 하지만 유보느 함장득 중 뛰어난 함장들은 아예 그아에 파고들어 가서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호의함 들은 팀킬 할까 봐서 쉽사리 반격하지도 못했고 그 사이 연락을 받고 온 다른 유보트들이 어뢰를 발사하면 대범한 함장들 중에선 본인 함이 들키면 호송선단의 공격을 유도하면서 다른 유보트들의 공격을 수월하게 만드는 함장들까지 있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미국의 참전하고 한 달에 한 척씩 건조하는 리버티급 수송선이 투입됐지만 리버티선은 무장도 빈약한 데다 유보트에 쉽게 따라 잡혔기 때문에 대낮에 모습을 드랜 유보트의 8.8mm포의 먹잇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942~43년까지도 유보트가 성과는 무시무시했으며 리버티선의 개량형인 빅토리선(속도가 두배 가까이 늘 아남)과 소나의 이즈딕, 항공기 등의 투입됐지만 북극해를 통해 랜드리스 물품을 옮기는 미국과 소련 선단이 유보트의 새로운 먹있감이 되었으며 악명을 여전했습니다 여기에 공군이 못 이겨주는 편에 가까웠지만 대전 내내 '대서양의 악몽'이라 불린 fw200 콘돌을 제공하면서 유보트의 효율은 더우 커졌습니다. 콘 동리 소송 선데의 위흘 알려주면 유보들이 달려 등 역 공격을 감행하기 때문에, 수송 성단 선원들에게 콘돌이 보인다는 것은 곧 유보트의 공격이 시작된다는 전조였습니다.
대전 후반에는 7형에도 장비되었던 스노클을 도입하고 배터리 용량을 예전의 5~1.5배 이상으로 늘려 유보트 7형의 배리는 7000~9200AH, 9형 11,300~22600AH 21형은 33,900AH) 작전반경을 늘리고 전기모터 출력을 올리고 수중 고속 항행용의 디자인을 채용해 수중 속도를 늘린 신형 유보트인 21형의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전술을 위해서는 유보트와 사령부 간의 통신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연합군은 허프 더프라는 장치를 개발하여 이런 무전을 감청하고, 장거리 레이더로 잠수함들의 위치를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잠수함의 배터리 용량의 한계로 잠항 시간이 짧고 모터의 축력 문제로 속도 역시 느렸기 때문입니다.. 이탓에 적군의 항공기 (특히 전쟁 중 , 후반무렵부터 등장하는 상탐 색 레이더를 탑재한 초계기)에 노출되면 손발도 쓸 수 없었습니다.
물론 잠수함들도 이런 해상 초계기의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레이더 전파를 역으로 탐지하는 안테나를 달고 다니곤 했으며 호의 합이 붙는 호송선단에 대응하기 위해서 공격에 가담하는 유보트의 수도 늘리는 등 울프팩 전술을 더욱 향상 시켰으며 항공기의 항속거리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 가며 호송단으 사냥하기 위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헤지호그 폭뢰 리버레이터 등의 장거리 폭격기가 등장하고 보그급으로 대표되는 호위 항모가 호송선단호의에 투이 되자 에어갭(air gap)이라고 불렸던 대서양의 사각지대가 거의 사라졌고 호의 항공모함에, 무자 호송선에도 케너 펄트 가설치 되어 전투기를 제공할 수 있게 되면서 fw200역 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대전 초기의 위용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유보트의 가잔 큰 패인은 역시 엘런 튜링을 필도로 한 영국의 암호 해독반이 독일군의 암호 해도 고장 치인 에니그마를 해독해 낸 것입니다. 이로 인해 모든 작적이 드러나게 되고 유보트의 예상 위치, 진로, 현재 목적지가 다 드라나게 되며 모든 메리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작전이 너무 잘 들킨다는 것을 깨달은 크릭스 마리네가 에니그마 구조를 더 복잡하게 고치자 아예 유보트를 나포해서 신형 에니그마를 입수한 뒤 암호를 해독하게 됩니다.
그 결과, 독일은 2차 대전에서 9백여쳑의 유보트 중 777적(그 대부분이 1944~1945년)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그릭스 마리네의 경우 개전 이전부터 뚫려버린 육군 및 루프르 바페 보도는 오래 버티고 있었지만 초기 3 로턴 에니그마는 1941년 5월부터 하고 있었고 1942년 2월 로토를 하나 더 늘려 암호를 더 복잡하게 하자 잠시는 따돌리 수 있었으나 1942년 말부터 4 로터 에니그마 해독하기 시작하더니 1943년 9월부터는 완전히 털리게 됩니다. 이로써 유보트 승조원 4만여 명준 3만 5천여 명이 전사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무지막지한 생산력이 절정에 달하기 시작하면서 격침당하는 수보도 훨씬 많은 수송선들이 무사히 도착하게 되면서 유보트가 아무리 애를 써도 더 이상 큰 효과를 볼 수 없게 됩니다. 유보트가 전 잰 기간에 격침시킨 총 상선이 1,500만 톤이고 자체적으로 지어낸 게 600만 톤에 캐나다등 영연방국가에서 받아온 게 600만톤에 그 외 다른 연합국(프랑스 등)에서 얻어온 배들이 300만 톤으로 생산을 유지하는데 미국은 혼자서 2,500만 톤을 건조했습니다..
5. 지중해
1941년 9월부터 1944년 5월까지 총 62척의 유보트가 지중해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란 연합군의 살벌한 경비를 뚫고 지브롤터 해협을 돌 하한 다는 것부터가 매우 위험한 시도였고 막상 들어간 지중해는 북대서양보다 환경이 평온하다 보니 악천후를 이용해 몸을 숨기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해류가 대성야에서 지중해로 몰려들다 보니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 디어 벼렸고, 결국 작전에 투입된 모든 유보트가 지르볼터의 벽을 넘지 못하거나 지중해 내에서 격침 혹은 자침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특이한 케이스로 루마니아 콘스탄차를 모항으로 두고 흑해에서 활동하던 30 전장이 있었습니다.
2형 유 모트로 구성된 이전단은 유보 튼 운송경로가 매우 독특한데, 독일 본토에서 흑해까지는 해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관계로 다뉴브강과 운하, 심지어 육로를 거친 대장정 끝에 유럽 대륙을 횡단해 흑해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1944 9월 루마니아 왕국이 쿠데타로 전복되고 연합국으로 도아 서자 전부 자침 되는 참사가 벌어지게 됩니다.
6. 현재 남아있는 유보트
현재 남아 있는 유보트는 몇 척되지 않습니다. 유보트들을 하나하나 정히 해 보자면...
- 영국에는 종전 직전에 격침되었으나 거의 멀쩡한 생로 인양돼 9c/40형 유보트 u-534가 버컨헤드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 독일에는 종전 직후 노르웨이 해군에 압류되었다가 반환받은 7c/41형 유보트 U-995가 라보에 해군 기념비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u995는 전 세계 통틀어서 현존하는 유일한 7형 유보트인 만큼 매우 인기가 많은 유보트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미국에는 전신 카사 블라카급 호의 항공모함 과달카날(cve- 60) 나포한 9c/40형 유보트 u-505가 시카고 산업 과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 독일은 보존된 유보트가 한 척 더 있는데 1945년 자침 한 것을 인양해서 독일 연방군 해군이 실험함으로 1984년까지 운용한 21현 유보 튼 u02040이 브레머하펜에 박물관을 보존되고 있습니다
- 핀란드의 헬싱키에도 2차 대전 단시 독일에게서 인도받은 2형 유보트가 남 있습니다.
재미있는 접은 전쟁 중 가장 많이 생산된 유보트인 2형, 7형, 9형은 모두 최소한 한 척씩은 보존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상륙작전의 최종 목표는 내륙으로 진공 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의 집중이 필요한 교두보의 확보입니다.
다음 단계는 내륙으로의 진격이고 이 과정에서 경계할 것은 교두보 확보를 거부하는 적의 반격이며 교두보 확보 단계에서는 이런 적의 반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적의 반격을 차단하기 위해서 중요 접근로와 교량 등을 선제공격을 해서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차
교두보 확보 단계에서 적의 반격 차단을 위해 공수작전을 실시
미군의 공수 작전
미군,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급조 부대를 만들어 전투
영국·캐나다군의 공수 작전.
영국·캐나다군, 독일의 맹렬한 반격을 물리쳐
1.교두보 확보 단계에서 적의 반격 차단 위해 공수작전을 실시
노르망디에서는 특히 적이 측면 공격이 우려되는 교두보의 동쪽과 서쪽의 차단이 절실했습니다. 결과 노르망디 상륙 개시 전에 주요 거점을 사전에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공수 투하 작전이 실시됩니다.
공수 작전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자유 프랑스군등 4개국의 공수 부대들에 의해서 행하여졌습니다. 미군 82 공정 사단과 101 공정 사단은 유타 해안의 서쪽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 6 공정 사단은 유타 해변의 서쪽 사단의 목표가 주어졌다. 영국군에 배속된 530 자유 프랑스 낙하산 부대는 브리타니 지역의 목표가 할당되었습니다.
노르망디에서는 특히 적이 측면 공격이 우려되는 교두보의 동쪽과 서쪽의 차단이 절실했습니다. 결과 노르망디 상륙개시 전에 주요 거점을 사전에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공수 투하 작전이 실시됩니다. 공수 작전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자유 프랑스군 등 4개국의 공수 부대들에 의해서 행하여졌습니다. 미군 82 공정 사단과 101 공정 사단은 유타 해안의 서쪽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 6 공정 사단은 유타 해변의 서쪽 사단의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에 배속된 530 자유 프랑스 낙하산 부대는 브리타니 지역의 목표가 할당되었습니다.
2.미군의 공수 작전
미국의 82공수 사단과 101 공수 사단은 총 13, 000명이었습니니다. 이 병력은 야간에 투하되어 서쪽에서 노르망디로 접근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간 공수 작전이라는 생소한 전술은 숱한 문제점을 야기했으며 목표를 달성함에 미흡한 점이 많았었고 야간 공수 작전은 전쟁 중에는 다시는 시도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45%나 되는 병력이 목표 지점에 낙하하지 못하고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서 병력 집중이 불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이 병력의 분산 투하는 연이어 날아올C-47 수송기의 야간 비행을 유도할 레베카/유레카 시스템이라는 전자 비콘 발신 장치가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에서 비롯된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노르망디 공수 작전의 첫 개시는 6월 6일이 시작되는 새벽 00:48에서 01:48 사이에 101 공수사단에 의해서 감행되었습니다. 이어서 01:51에서 02:42사이 82 공수 사단이 투하되었습니다. 두 사단의 공수 작전에 무려 400기의C-47 수송기가 동원되었습니다. 간격을 두고 새벽 직전에 글라이더들이 대전차포와 양 사단의 추가 지원 병력들이 투하되었습니다. 공수 작전은 상륙 작전이 있던 6월6일 저녁 무렵에 82사단의 포 24문이 글라이더로 공수되었습니다,
그다음 날인 6월 7일에도 325 글라이더 보병 연대가 82 사단에 증파되었고 두 번의 낙하산에 의한 보급품 투하가 있었지만 이 날의 투하는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대규모 공수 작전의 효율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24시간이 지났지만 투하된 82 공수 사단 병력 중 2,000명과 101 공수 사단의 2,500명만이 지휘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광활한 지역에 되는대로 뿌려진 병력의 대다수는 아직도 부대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3. 미군,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급조 부대를 만들어 전투
그러나 공수 작전의 실패는 생각지도 않은 긍정적인 결과를 부수적으로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너무 넓은 지역에 뿌려진 병력은 독일군으로 하여금 병력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작은 부대로 흩어지는 결과를 낳아 상륙작전 부대가 집중 돌파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취약한 미군 상륙 부대의 남쪽 측면을 보호하게 하는 전과를 얻게 하였습니다.
분산 낙오 된 공수 부대원은 흩어질 대로 흩어져 헤매다가 다른 부대원을 만나면 서로 급조 전투 부대를 만들어 그중 최상 계급자인 부사관이나 초급 장교들이 지휘를 하며 주력 본대를 찾아 돌아왔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82 사단은 6일 새벽 프랑스의 작은 도시(Sainte-Mere-Eglise)를 점령하였습니다. 이 도시는 노르망디 작전에서 최초로 해방된 프랑스 도시였습니다.
4.영국·캐나다군의 공수 작전.
노르망디의 최초 공수 투하는 6일이 시작되는 자정이 막 지난 6일 00:16, 캉(Caen) 운하와 오른(Orne) 강에 걸린 다리를 점령을 목적으로 영국 6 공수 사단의 글라이더 수송 공수 부대가 착륙함으로써 개시되었습니다. 이 다리들은 상륙 해안에서 단지 7km떨어진 곳에 전략적 위치에 위에 있었습니다. 독일군이 반격하기 위해서는 이 두 교량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동쪽으로 진격하는 연합군 입장에서도 반드시 건너야 하는 요충 지중의 요충지였습니다.
영국군 6 공수 사단의 목표는 세 개였습니다. 이 교량들을 점령하고 연합군 상륙부대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예상되는 독일 기갑부대 반격으로부터 확보하는 것이고 부차적으로 두 다리 근처에 있는 독일군의 메르빌(Merville) 포대를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포대는 영 캐나다 군이 상륙하는 소드 해안을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세번째 목표는 디브(Dives) 강 다리에 걸린 다리를 폭파하여서 독일군 우회 돌파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었습니다.
5.영국·캐나다군, 독일의 맹렬한 반격을 물리쳐
영국군 6 공수 사단소속의 3,5 공수 연대와 이에 배속된 1 캐나다 공수 대대는 글라이더로 강하 착륙하자마자 독일 716 보병사단의 예하 부대로부터 맹렬한 반격을 받았습니다.
교량 점령까지는 해냈지만 새벽 무렵에 이들은 오른 강의 남쪽에서부터 강 양쪽을 따라 반격해오는 폰 록크 대령 지휘하의 독일 21 전차 사단 전투단의 강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투는 치열하였고 양쪽 다 피해가 속출했고 그러나 영국 캐나다 공수부대는 이를 잘 버티어냈습니다. 정오경 영국 1 특수 임무 여단 코만도 부대의 증원을 받았습니다.D-Day저녁 무렵까지 영국과 캐나다 공수 부대는 잘 고수해서 오른 강의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반격은 다음 날도 계속되었습니다. 6월 10일, 독일 346 보병 사단은 대공세를 취해서 동쪽 변두리의 한 구석에 침투했습니다. 그러나 12일 영국 공수 부대원들이 브레빌(Breville) 마을의 전투에서 참호를 파고 응전하는 독일군을 강습해서 이들을 모두 패주시켰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국 해군 사령관은 영국 해군의 버트람 램지 경(SirBertramHRamsay)이 임명된 사실에서 알 수가 있듯이 작전에 동원된 함선들은 영국 측이 주동이 되어서 마련한 것들이었습니다.
사령관 램지 경은 전쟁 초기 독일군에게 패주한 영국군과 프랑스군들을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수송 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연합군의 북 아프리카 상륙 작전에서 해군 작전 기획 책임자로 일했었고 시실리 섬의 침공 때도 두 개 함대 중에 한 개 함대를 지휘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해군 상륙 작전 지휘의 최고 베테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목차
독일 해군의 방해를 원천봉쇄 하기.
함포 화력 지원.
연합군 해군이 피해.
1. 독일해군의 방해를 원천 봉쇄하기.
작전명 넵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중요한 해군 목표는 노르망디 침공의 해상 루트와 상륙 예정 해변을 독일 해군(Kriegsmarine)의 방어와 반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침공 해상 루트의 보호 임무는 영국 본토 해군 함대에게 부여되었습니다.
독일 해군이 바다에서 침공 함대에 가해올 위협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르웨이의 북방 해안과 발트해에 기지를 두고 있는 독일 함대의 주력 대형 함에 의한 해상(海上)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대형 전함들은 영국 해군과 공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었고 순양함들은 훈련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함대의 출동 연료도 부족했었고 출동한다 해도 영국 해군이 이들 수상 함대가 통과할 빌헬름 황제 운하(Kaiser-Wilhelm-Kanal,발트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독일의 운하) 해역에 설치한 대량의 기뢰 지대에 걸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설사 이런 불리한 조건을 뚫고 상륙 해안에 출동한다 해도 영국 해군의 함대는 독일 함대가 제압하기에 너무 막강했습니다. 그러므로 독일의 수상 함대는 연합군에 대해서 별다른 위협이 될 수가 없어서 작전 수립 단계에서 독일 대형 함대에 대응하는 부분을 제외하였습니다.
연합군 해군에게 예견 가능한 진짜 위협은 대서양에서 위협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일 해군의 U보트(잠수함) 부대였었습니다.
U 보트를 감시하기 위해서 미 해군의 호위 항공모함 세 척과 영국 공군 해안 감시대 소속 정찰기들이 영국 본토에서 먼바다까지 나아가서 정찰을 했지만 별다른 U 보트의 활동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합군 해군은 U 보트에 대한 경계 활동을 지속하면서 프랑스 브리타니와 비스케이 만으로부터 상륙지점에 접근할만한 길목에는 함대를 배치해서 봉쇄하였습니다.
프랑스 연안에는 기뢰 지대가 여러 곳 설치되어 독일 해군 함정이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엄호 거리 내에 항로로 통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독일 함선들이 할 수없이 연합함대의 구축함들이 출몰하는 먼바다로 나와 항해를 해야 했습니다. 연합군 해군은 만반의 대비를 하면서 독일 해군의 동정을 살폈지만 작전 개시 전까지 별다르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쯤에서 만족하지 못한 연합군 해군은 독일 해군에게 더욱 압박을 가했습니다. 도버 해협의 접근로는 모두 기뢰를 깔아 접근이 불가능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공중 초계와 레이다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독일 전투함이 출항할만한 항구들은 모두 폭격해서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훼방 놓을 수도 있는 독일 함대의 출현을 경계하는 연합군 해군이 침공 전까지 격침한 독일의 군함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 함대의 상륙작전 방해라는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리는 목표는 완수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상륙 작전 당일(D-day) 작전을 방해한 독일의 U 보트는 한 척도 없었습니다.
2. 함포 화력 지원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해군이 맡은 중요한 임무는 전함에서 순양함, 구축함, 그리고 상륙정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함정의 화력을 상륙 작전 지원에 최대로 동원하는 것이었스니다.
D-day에 지원된 해군 함정의 화력지원은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한 본보기를 든다면 주노 해안에서 캐나다 상륙부대에게 지원된 화력은 큰 실패로 끝났던 1942년의 디에프 기습작전 때의 몇 배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구형 전함HMS 라미리스와 아스파트와 포함HMS로버트는 오른(Orne) 동쪽의 해안 포대를, 순양함들은베르쉬르 메르(Ver-sur-Mer)와 물리노(Moulineax)의 해안 포대를, 11척의 구축함들은 각 상륙부대에 근접하여 전면 적 요새를 직접 사격으로 파괴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정통 군함 외에 수십 척의 상륙정들을 다양한 상륙 화력 지원함으로 개조하는 작업도 행해졌습니다. 8척의 상륙용 함정들에 각각 두 문의 4.7인치 포들을 장치했고 다른 8척은 기관포를, 또 다른 8척은 1,100발을 일시에 발사하는 로켓 발사기를, 8척의 상륙정은 24발의 폭뢰를 발사하는 무장을 해서 독일군이 해변에 설치한 기뢰들을 파괴하는 기능을 주었습니다. 24척의 탱크 운반 상륙정들은 상륙 해안으로 질주하는 시간에도 적 해안 목표를 향해 발사가 가능한 자주 곡사포를 장비했었습니다.
해군의 함정들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화력은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군사 목표를 타격할 뿐만 아니라 해안선 먼 후방까지도 타격하여 군 병력의 집결을 지장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독일군 룬트슈테트 원수는 이 점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적[연합군]은 매우 강한 해군력을 교두보 연안에 전개하여서 이 전력을 아주 빠르게 대응하는 기동 화력 기지로 활용하였다. 이 화력 지원은 항시 대기하고 있다가 육군이 요청하면 바로 실시되었습니다. 주간에 실시되는 해상 포격은 정찰기에 의해서 유도되었으며 육군 전방 화력 통제 장교들이 통제하였습니다. 신속하고 막강한 해군 화력은 그 유효 사거리 내에서 벌어지는 지상전투에서 연합군에게 전투의 결정적인 프리미엄을 제공하였습니다. 기갑 부대의 탱크조차도 주간에는 해군의 가공할 화력이 타격을 가하는 개활지에서는 기동 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3. 연합군 해군이 피해
큰 역할을 한 연합군 해군은 역시 독일 육상 화력에 피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상륙 지휘함의 한 척이었던HMS로포드는 상륙작전 3일째인 1944년 6월 8일 주노 해변에서 적의 공습을 받고 침몰하였습니다.
상륙 작전 중 유일한 수상 함끼리의 해전은 D 데이 당일 오후 소드 피시 해안 연안에서 동부 기동함대를 공격한 4척의 독일 어뢰정이 발사한 18발의 어뢰 중 한 발이 노르웨이 구축함 스베너 함에게 명중해서 이를 격침한 것입니다.
독일 어뢰정들이 겨눈 것은 구식 영국 전함들이었는데 빗나가서 노르웨이 구축함을 격침하게 되었다. 독일 구축함들은 어뢰를 발사한 뒤에 연막을 치고 도주해버렸습니다.
그 외에 독일이 해안에 설치한 기뢰에 의해서 미(美) 구축함 코리 함과PC정, 그리고 여러 척의 상륙함이나 상륙정들이 격침되었습니다.
상륙작전은 대량의 인원과 물자를 영불해협을 횡단하는 항해를 통해 수송되어야 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지역은 그 폭이 무려 50 마일로서 이 넓은 해안은 5개의 작전 구역으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각 작전 구역에는 작전 명칭이 부여되었는데 유타(Utah), 오마하(Omaha), 골드(Gold), 주노(Juno), 그리고 소드(Sword)였습니다.
차례
연합군 상륙계획
독일군의 방어 계획
독일군의 병력 배치
히틀러의 실수
1. 연합군 상륙계획
미군과 영국군 캐나다 군이 각각 담당한 해안선의 침공 구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미군 1군은 73,000명의 병력으로 오마하와 유타, 두 개의 해안 목표를 공격했는데 이 병력 중 15,600명은 공수 병력이었습니다.
오마하 해안 :미군 5군단- 1사단과 29사단
유타 해안 :미군 7군단 -4 사단 90사단의 359 RCT. 101 공수사단과 82사단의 상륙 해안 후방 내륙 강하, 영국군 2군이 이 구간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6 공수 사단 7,900명이 침공 구역 좌측에 투하되었다
소드 해안 :영국군 코만도 부대의 2개 여단, 1군단의 3 사단과 27 기갑 여단
주노 해안 :캐나다 1군단- 캐나다 3사단, 캐나다 2 기갑여단, 영국군 제 4 코만도 부대
골드 해안 :영국군 30군단의 3 사단. 캐나다군 1개 기갑여단
2.독일군의 방어 계획
한편 연합군 침공에 대비해서 독일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원수를 대서양 해안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방어 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독일은 대서양 연안에 걸쳐 4년 동안 교통호와 화력 지원 요새와 벙커들로 바느질로 조밀하게 누빈듯한 방어선을 만들었습니다.
독일군의 최초 방어선은 영불 해협이었습니다. 영국이 영국 본토 공격을 노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나폴레옹의 해군을 분쇄한 천연의 장애물입니다. 이제는 그 반대로 독일군이 활용하게 된 것이죠.
두 번째의 방어선은 해안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총통 명령 51호로서 벨기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뻗쳐 있는 이 해안지대를 ‘대서양 방벽’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요새화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방어공사가 집중된 곳은 바로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가까운 도버해협의 해안 쪽이었습니다. 즉 앞에서 말한 기만 작전이 행해진 칼레 해안이었습니다.
롬멜은 상륙작전은 만조(滿潮)때 감행되리라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콘크리트 벙커와 포대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철조망을 밀집시켰으며 해변에는 상륙정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수천 개의 방어물과 수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습니다.
연합군은 방비가 엄중한 칼레를 공격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조금 더 떨어진 독일 7군과 15군의 전투 지경선이 있는 노르망디를 상륙 예정지로 선택했습니다.
침공이 발발하면 두 독일 군(軍) 사이에 책임 전투 구역을 두고 큰 혼선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롬멜은 상륙작전은 만조(滿潮)때 감행되리라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콘크리트 벙커와 포대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철조망을 밀집시켰고 해변에는 상륙정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수천 개의 방어물과 수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습니다.
연합군은 방비가 엄중한 칼레를 공격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조금 더 떨어진 독일 7군과 15군의 전투 지경선이 있는 노르망디를 상륙 예정지로 선택했습니다. 침공이 발발하면 두 독일 군(軍) 사이에 책임 전투 구역을 두고 큰 혼선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3.독일군의 병력 배치
연합군이 상륙 작전을 감행한 노르망디 상륙지점은 4개의 독일군 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716 독일 보병사단은 상륙 해안의 최동단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상륙할 예정이었습니다. 716 보병사단은 신체적으로 약한 독일병사들과 다른 나라들에서
징병한 병사들, 그리고 소련군 포로들로 포함 잡다한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 전투력을 의심받고 있었습니다.
오마하 해안에는 독일 정예 35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단 병사들은 대소 전쟁의 동부전선에서 실전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정예 사단이 방어하던 오마하 해안을 공격했었던 미군 병사들의 피해율이 가장 높았었습니다.
해안으로 뻗어 나온 코탕탱(Contentin) 반도 내륙에는 루프트바페 소속의 91공수 사단이 주둔했고독일 공군인 루프트바페는 보병 전투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709 보병 사단은 코탕탱 반도 동쪽과 북쪽 해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기타 노르망디 해안 인근 주변 지역에 주둔한 부대들을 여기 소개해보면, 243 보병 사단은 코탕탱 반도의 서쪽 해안을 방비했고, 711사단은 페이 드 코(PaysdeCaux)의 서쪽 지역 방어를 맡았고, 30기동 여단은 예비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30기동 여단은 아주 독특한 부대로서 모두 자전거로 이동하는 기동 부대였습니다.
독일군의 기갑 예비군에 대해서는 특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롬멜은 상륙 저지 부대로서 최고 유효 수단인 기계화 사단들의 사용을 두고 집단군 사령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는 순수하게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휘하 서부 기갑 집단군 부대들을 레오 게이르 폰 슈베펜부르그(GeyrvonSchweppenburg) 장군의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 집단군은 후에 제 5 기갑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됩니다. 5 기갑군은 노르망디 방어를 위해서 다시 재배치 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실전 경험을 풍부히 쌓은 롬멜은 연합군의 항공력이 훨씬 우세하였으며 전투가 발발하면 기갑부대의 이동에 막대한 장애가 발생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갑부대들은 이동거리가 짧은 해안으로 가능한 한 가까운 지역에 배치되기를 강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는 침공 첫 날 해안에서 적의 상륙을 저지할 한 개 기갑사단이 적이 해안에 교두보를 설치가 완료된 침공 삼일 째 되는 날 반격에 나선 3개 기갑 사단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게이르는 기갑군은 파리와 루엥의 중간 지점에 중점 위치해 있다가 적의 교두보가 확인되면 기갑군을 집중 투입해서 이를 궤멸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두 사람은 기갑의 운용을 두고 갈등을 빚다가 이 문제를 히틀러에게 직접 중재해주도록 하기로 하였습니다.
히틀러는 그의 버릇대로 양쪽 다 만족하지 못할 중재안을 내놓았습니다. 롬멜에게는 단지 3개 기갑 사단만이 주어질 예정이었습니다. 이 3개 사단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전 해안선을 커버하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나머지 사단들은 ‘OKW예비대‘라는 명칭을 주고 게이르의 휘하에 두고 적의 상륙 공격이 있을 시에 반격하도록 했는데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사용할 수 있는 사단은 단 3개 사단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4개 사단들은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상륙할 경우에 출동하도록 하였습니다.
4.히틀러의 실수
히틀러는 예의 버릇대로 집중할 병력을 분산시키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결정은 게이르 휘하의OKW예비대 3개 사단을 출동시킬 때는 히틀러의 직접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개시할 때인 6월 6일에는OKW예비대 전차 사단장들은 히틀러의 지시가 없어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히틀러는 깨우지 말라는 지시를 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그의 부관들은 감히 그의 엄명을 무시하고 그를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프랑스내의 기갑부대들은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 롬멜이 구상하던 바와는 동떨어진 역할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중 가장 큰 스케일에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많아서 시리즈로 올릴계획입니다. 그 첫 번째 내용입니다.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D-DAY: 사상 최대의 작전
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군이 주력이 되고 기타 캐나다, 자유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폴란드, 노르웨이 등 8개국의 연합군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령 노르망디 해안에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감행 습니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에 동원된 병력만 무려 15만 6천 명이었습니다.
그들의 적인 노르망디 해안의 독일 방어군은 약 1만 명으로 추산되었습니다.
D-Day : 작전명 오버로드. 작전명 넵튠
목차
D-DAY: 작전명 오버로드, 작전명넵튠
상륙작전의 전모
기만 작전
작전에 필요한 날씨
작전 강행 결정
독일의 방심
1.D-DAY: 작전명 오버로드, 작전명 넵튠
연합군 측은 당시 작전명 오버로드(Overlord)라는 북부 유럽 침공 작전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 개시 단계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작전명은 넵튠(Neptune) 작전이었습니다. 오버로드는 대군주를 뜻하고 있으며 넵튠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해신의 이름에서 따온 작전명입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영국군의 프레데릭 모건 중장이 이끄는 기획팀이 계획을 세웠는데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으며 육해공군을 모두 망라한 것이었습니다.
넵튠 작전은 1944년 6월 6일 개시되어서 노르망디 교두보가 완전하게 확보된 1944년 6월 30일 종료되었습니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제 하워장군이었고 지상군 사령관은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였었습니다.
독일 측의 방어사령관은 프랑스 주둔 독일 집단군의 총사령관인장군이 아이젠아워와 같은 격의 최고 지휘관이었으며 대서양 해안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장군은 북 아프리카에서 용맹을 떨친 에르빈 롬멜 장군이었습니다.장군이었습니다.
둘 다 원수였지만 롬멜이 훨씬 후배였습니다.
2. 상륙작전의 전모
상륙작전 개시일인 6월 6일은D-day라는 음어로서 이미 연합군 내부에서 사용했었습니다. 이 암호는 나중에 아주 유명한 명칭이 되었고 추가 설명한다면D-day의 D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Day의 약자라고 합니다.
세계 각 군마다 이D-day에 해당하는 고유의 단어가 있는데 우리에게 역시 낯익은Zero-hour와 비슷한 말입니다.
상륙 작전은 두 단계로 시행되었습니다.
1944년 6월 6일이 되자 자정 경에 공수부대의 야간 투입 작전이 있었고 이어서 날이 밝자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먼저 노르망디 침공 작전의 시작이 되는 공수 작전을 소개해보면. 24,000명이나 되는 공수 부대원의 공수작전이 상륙 작전 전야(前夜)인 6월 5일과 6일 사이 자정 조금 후에 실시되었습니다.
공수 작전에 참가한 공수 부대는 미국, 영국, 그리고 캐나다와 자유 프랑스 군의 부대들이었습니다.
해안에 보병과 기갑부대로 구성된 상륙부대가 해안에 상륙하기 시작한 것은 그날 아침 06:30분입니다.
해상의 일기가 아주 황천 상황이어서 기습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상륙작전이 아주 힘든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내린 작전 감행의 결단이 결실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3. 기만 작전
기습은 상륙작전이 불가능해 보이는 날씨의 덕도 보았지만 연합군 측이 독일군에게 전개했었던 기만 작전의 성공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그 기만 작전은 보디가드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는데 독일군의 경계심을 상륙 예상 지점인 노르망디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만 작전의 핵심은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로 하여금 연합군의 상륙이 노르망디가 아니라 영불해협의 연결항구인 칼레(Calais) 북쪽 지역에 행해질 것이라고 오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미 1군이 패턴 장군의 지휘 아래 도버 해협을 건너 칼레에 곧 상륙 작전을 할 듯이 양동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르망디에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칼레에 상륙할 듯한 위장 작전은 계속되어서 독일군의 방어 병력 집중을 막았습니다.
연합군은 기만작전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머’나 ‘텍 사블’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위장 작전이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기만작전은 연합군의 중폭격기들이 칼레 앞바다인 도버 해협 상공을 비행하며 방대한 양의 얇은 금속 박편을 살포하여 독일군 레이다를 교란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레 해안에 곧 상륙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 오산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4. 작전에 필요한 날씨
매월 10일 간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가능하였다. 그중에 만월(滿月)이 되는 날의 밝음과 조류가 작전 실시에 가장 이상적이었습니다.
밝기는 공중 침투하는 항공기 조종사나 글라이더 조종사들이 지형지물의 식별에 필수였었고 조류는 상륙정들이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상륙 저지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서 가능한 최대로 높은 해수면이 필요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6월 5일이 바로 그런 만월이 뜨는 날이었습니다.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잠정적으로 6월 5/6 사이 야간을 작전 개시일로 결정했었습니다. 그러나 5월에는 아주 쾌청했던 일기가 6월에 들어와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5. 작전 강행 결정
6월 4일 악천후는 작전 실시 불가함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강풍과 파도는 상륙 모선이 상륙정을 발진시킬 수가 없게 했고 낮은 시계(視界)는 항공기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했었습니다. 이미 병력을 싣고 영국의 항구를 출발하였던 함선들은 영국 남해안으로 다시 돌아와 만이나 강구에서 대피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상식으로 본다면 6월 5일 침공계획은 전면 취소하여야 했고 함선들은 항구로 돌아오고 병사들은 원래 머무르던 기지 생활관으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미 상륙 작전에 사용될 어마어마한 무기와 군수품들이 모두 바다에 떠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만월이 뜰 때까지는 무려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대기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6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에서 중대한 회합이 있었습니다. 이 회합에서 영국 공군 기상대장JM스태그 대령은 6월 6일에는 기상이 약간 좋아질 것이라는 예보를 브리핑했습니다. 지상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와 아이젠하워 참모장 스미스(WalterBedellSmith) 장군은 작전을 원 계획대로 강행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 항공군 사령관 레이 말로리(SirTraffordLeigh-Mallory) 경은 작전 강행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연합군 해군 사령관 버트람 램지(SirBertramHRamsay) 제독은 중도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스태그 대령의 기상예보를 근거로 작전 강행을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작전은 강행되었지만 악천후는 결과적으로 충분한 항공 지원을 불가능하게 하여, 강력하게 요새화 되어 있는 오마하와 주노(Juno)의 해안 방어력에 대한 충분한 타격을 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6. 독일의 방심
한편 영불 해협 방면보다도 더 험한 북부 프랑스의 악천후는 독일군을 안심하고 경계를 풀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그간 미영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임박했음을 계속적으로 경고받고 있어서 높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끔찍한 악천후는 적어도 며칠간은 마음을 놓아도 좋으리라고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일부 부대는 비상 경계령을 일시 해제하기도 하였고 많은 고위 지휘관들은 주말을 맞아 위치를 떠나거나 했습니다. 해안선 방어를 책임진 에르빈 롬멜 원수는 아내의 생일 축하를 위해 며칠간 독일의 집으로 귀가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 십 명의 사단장이나 연대장 그리고 대대장들이 침공 대비를 위한 워 게임(wargame) 연습을 위해서 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당일이 욤 키푸르라는 유대교 전통의 속죄이었기 때문에 흔히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10월 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전쟁 기간은 1973년 10월 6일~ 1973년 10월 25일.
2. 전간기 소모전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은 각각 시나이반도와 골란 고원을 잃어버린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의 인정과, 항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과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 지역을 반환하는 것을 비밀리에 제안했으나 이스라엘한테 영토를 빼앗긴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 8개 국가들은 같은 해 9월 수단의 하르툼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무 평화, 무인 정, 무협상, 3 무 원칙을 공식화하며 단박에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출혈을 강요하고 반환을 압박하기 위해 쇼련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벌였고 이에 양국이 대치하는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 사이에 수년 동안 국지전이 계속되었는데 이를 소모전(حرب الاستنزاف/מלחמת ההתשה)이라고 합니다.
전쟁 아닌 전쟁으로 3년 넘게 이어져 온 소모전은 1970년 8월 휴전협상이 타결되면서 끝을 맺었으나 양쪽의 대치는 수에즈 운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이집트는 주요 밥줄인 수에즈 운하가 폐쇄되면서 경제적 손해가 막심했고 이스라엘 역시 소모전으로 인한 지속적인 출혈에 점점 부담이 가해지고 있었습니다.
3. 대 복수극의 시작
1970년 9월 28일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서방국가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아랍국의 단결을 도모했고, 구태의연한 국내 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한편으로 사다트는 시나이 반도의 일괄적인 반환을 요구한 나세르와 달리 일단 폐쇄된 수에즈 운하부터 정상화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스라엘에게 수에즈 운하에서 20마일(약 32km)만 뒤로 물러날 것을 제안했으나 이스라엘의 무성의한 반응에 결국 전쟁을 통해 시나이를 회복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이스라엘한테 영토를 빼앗긴 주변국과 공조를 강화합니다. 하지만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예루살렘을 빼앗긴 요르단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PLO를 지원해 줬다가 오히려 검은 9월로 나라 전체가 뒤집히는 난리가 났기 때문에 이집트에 미온적이었고, 결국 골란 고원 문제로 이스라엘에 이를 갈던 시리아가 또 이집트와 손을 잡는다. 당시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또한 본인의 정치적 위세를 강화하기 위해 대이스라엘 적대 감정을 활용할 여지가 충분했습니다.
사다트는 군대의 체질과 훈련강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변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소련 고문단을 초빙하고, 이전의 전훈을 연구하여 대응 방법을 연구하고, 최신 병기들을 대거 도입하면서 철저한 훈련과 함께 군 조직의 개편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장교단의 경우, 병사, 수병, 부사관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이전의 귀족적 악습을 타파하고 젊은 대학생들을 장교로 선출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보안에 심혈을 기울여, 6일 전쟁처럼 시작하기도 전에 맞고 뻗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도 모사드에서 사전에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을 감지하여 보고했기에 일단은 전쟁에 대비하기는 했으나, 정작 골다 메이어 총리를 비롯한 수뇌부가 지금까지의 연승에서 비롯된 긴장감 상실과 아랍군에 대한 오판으로 인해 이전과 다른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진짜 전쟁준비를 숨기기 위해 몇 차례씩 허울뿐인 동원령을 발령했는데, 이스라엘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똑같이 동원령을 내리려 할 경우 동원령에 소집된 국민들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야 하는 문제가 있어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집트의 동원령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무리였습니다. 전쟁 개시 직전에 서로 다른 루트들을 통해서 결정적 정보들을 확인한 뒤에도 후술 할 외교적 이유로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결정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고다 메이어 총리와 모세 다얀 국방부 장관이 속한 노동당 내각의 발목을 붙잡고 말았습니다.
한편 사다트는 공격할 생각이 없으면서 이스라엘을 긴장시켰던 나세르와는 정반대로 공격할 생각을 숨기고 이스라엘이 긴장을 풀게 만드는 술책을 썼는데, 바로 이스라엘을 상대로 몇 개월에 한 번씩 곧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공갈협박을 날렸던 것입니다.
처음에야 여기에 잔뜩 졸았던 이스라엘이었으나 이집트 측이 실제로는 별다른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이를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로 파악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공갈 협박만 날리는 상황이 사다트 집권 후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자 이스라엘 측은 사다트를 그냥 위협만 일삼는 허풍쟁이로 여기게 됩니다.
심지어 사다트가 4차 중동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날린 진짜 전쟁 협박에도 거짓말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
10월 5일, 이집트에 심어놓은 최고위급 스파이인 아슈라프 마르완으로부터 당장 내일 전쟁이 시작된다는 정보가 전달되었으나 몇 달 전 마르완이 같은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 때문에 이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는 불투명한 문제였으며, 골다 메이어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간 시점은 전쟁 시작 몇 시간 전의 일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모사드는 마르완의 경고를 긴급히 메이어 총리에게 전달했고 메이어는 이를 매우 심각한 징조로 받아들여 즉시 장군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하게 했지만 예비군 동원에만 최소 24시간이 걸리는 상황에서 마르완의 첩보는 너무도 늦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욤 키푸르 당일인 10월 6일에, 이스라엘에서 많은 군인들이 휴가를 떠나고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이집트, 시리아 연합군의 전면적인 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전 세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이 모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난 것에 비해 이 전쟁에서는 이스라엘군이 초반에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개전 당일,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거대한 모래벽과 영구 진지로 구성된 바레브 선을 돌파하기 위해 8천이 넘는 특수부대를 사전에 도하시켜 미리 요새 후방과 이스라엘군의 기동로 근처에 매복시켰고, 철저한 공견 준비 사격 뒤 운하 도하를 개시했습니다. 이때 이집트 육군 공병은 독일에서 수입한 고성능의 소방펌프를 동원해 모래벽을 적셔서 무너뜨려 버리는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해 이스라엘이 요새 철거에만 이틀은 걸릴 거라고 장담하던 바레브 선을 단 9시간 만에 돌파해버렸습니다.
해당 작전의 창의성은 기존에는 병역이 면제되던 대학생들까지 입대시켜가며 군 장병들의 질적 향상을 꾀하던 이집트군의 와신상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래벽이라고 하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까지 바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국경 도발(방어선에 냅다 포격을 가하는 등)에 이스라엘군이 거의 완벽하게 대응해 왔고 심지어 전술핵의 폭발력에도 버틸 수 있을 거란 예상까지 나오던 곳이었습니다.
이집트군은 이러한 바레브 선의 약점을 꿰뚫었고 사전에 모의실험까지 거친 후 해당 작전을 실행하는 철두철미함을 발휘하였습니다. 바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모래벽에서 그치지 않고 화공을 위해 기름 탱크를 준비해 두었고 고지대에 콘크리트 벙커를 추가 설치하긴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이 날이 욤 키푸르였기에 해당 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이스라엘군 병력 대부분이 휴가 간 상황이었습니다. 이집트군은 MI-8 수송헬기로 기습 강습을 해 기름 탱크를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군의 화공 전법을 무력화시켰으며 고지대의 벙커의 경우 똑같은 높이의 토산을 쌍아 올려서 그 위에 전차를 올려 콘크리트 벙커를 격파해 버렸습니다. 이 돌파 작전에서 이집트군의 병력 8만 명 중 전사자는 단 208명에 그쳤으며, 당시 3만 명 이상의 피해를 예상하고 있던 이집트 수뇌부는 이런 예상외의 대성공에 기뻐서 날뛰었다고 합니다.
이후 잘 훈련된 이집트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수비대 요새 근처에 신속 전개하여, 이스라엘군의 기동예비대인 육군 252 기갑사단 예하 전차 여단들의 진격로를 틀어막고 적극적인 대전차 방어전을 구사합니다.
이스라엘군은 반격을 위해 전차 부대를 투입하지만 이집트군은 이미 잘 준비된 방어 진지에서 대전차 미사일을 준비시켜 놓고 잇었습니다. 이집트군은 결국 시나이 반도에 전개된 이스라엘 전차의 60%인 150여 대를 격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웁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공군조차 이집트 방공군의 지대공 미사일에게 하루 만에 전 보유대수의 10%가 넘는 전투기를 상실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어 이전 전쟁을 항상 승리로 이끌었던 공군력에도 기대기 힘들어졌습니다.
사실 항공전에서 하루 만에 10%의 손실률이면 거의 기록적인 수준으로, 앞으로도 이런 손실률이 지속된다면 항공전역 수행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열흘 내로 공군기를 모조리 상실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초 이런 끔찍한 피해를 입자 지상군 전선이 엄청난 위기에 빠져있음에도, 일시적으로 지상군에 대한 지원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주요 피해는 이집트 방공군이 보유한 러시아제 신형2 K12 KUB(나토 코드 SA-6) 지대공 미사일과 23mm 4 연장를 탑재한'쉴카 대공기관포 차량'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집트 공군은 애초부터 형편없던지라 방공군의 활약이 컸던 것입니다.
10월 8일에는 이스라엘에서 2개 기갑사단이 더 투입되었지만 이들 역시 이집트군 대전차 미사일의 화력 앞에 혼쭐이 나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전차부대가 보병부대의 지원이나 포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단독으로 진격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이 이스라엘의 인구 문제로 인한 보병의 부족, 그리고 제3차 중동전쟁에서 보여준 이스라엘군 기갑부대의 맹활약에 의한 전차 만능주의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반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보병의 대전차 공격능력 자체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이집트군이 더 많은 부대를 투입하여 시나이 사막을 가로지르기 전에 일단 그 기세부터 꺾고 보자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군의 계획이었던 것. 이 때문에 공세 주력이었던 2개 동원 기갑사단은 아예 사단 보병과 포병이 본토에서 한창 이동 중인 상태에서 전차만으로 선공에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이러한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인 편에 속했습니다. 당시 보병의 주력 대전차화기인 RPG-7은 명중률이 낮고 사거리도 짧았기에 베트남 전쟁같은 정글이면 몰라도 교전 거리가 길게 나오는 시나이 사막의 특성상 이스라엘군은 적 보병의 방어 진지 정도는 전차포로 장거리에서 공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이집트도 잘 알고 있었고,실제로 전차전 같은 정공법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던 터라, 이집트군은 RPG보다 더 강한 소련제 AT-3 말륫카(나토코드명 새 거 Sagger) 대전차 미사일을 이미 대거 들여온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1. 진지에 숨어서 이스라엘 전차를 기다린다. 이때 AT-3는 뒤에, RPG-7은 앞에 겹겹이 위치시킵니다. 2. 이스라엘 전차가 오면 AT-3을 쏘고 숨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차의 시야가 생각 이상으로 좁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위에도 서술하였듯이 당시 이스라엘군은 전차의 눈이 되고 서포트를 해줄보병 없이 전차만으로 돌격했기 때문에이 전략이 더 빛을 발했습니다. 3. 엄폐물로 숨으면서 장전하고 장전이 되면 다시 쏘는 식으로 이스라엘 전차를 순차적으로 부순다. 4. 이스라엘 전차가 만약 살아서 엄페물 방향으로 접근하면 파괴력에 비하여 정확도가 떨어지는 RPG-7으로 처리합니다.
물론 이스라엘군은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국경에서의 분쟁을 통해 말 륫카 미사일의 존재와 그 성능을 파악하고 있었고 치명적인 수준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AT-3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으며,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단점을 이를 뒷받침해줄 기동 전략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돌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 대전차 보병의 전술적 역량을 낮게 평가하는 실수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당시 시나이 사막에서 투입 가능했던 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는 참패를 겪었습니다.앞서 2일간의 전투에서만 이스라엘군은 300대가 넘는 전차를 잃었고, 골란 고원까지 포함하면 800대가 넘는 전차가 파괴되었습니다. 훗날 파괴된 전차 중에서 400여 대는 이후 회수해서 수리해 다시 쓸 수 있는 상태였고, 거기다 미국의 긴급원조로 수령한 대량의 패튼 시리즈와 아랍 측의T-55, T- 62 전차도전차도 다수 노획해 종전 후에는 전차 보유수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전차를 젊은 간부의 관이라 부를 만큼 인원 손실이 커 노련한 전차 승무원들을 잃은 것은 회복하지 못했으며 전차 보유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 후의 이야기로 전쟁 중이던 당시에는 가히 뼈를 박살 낸 치명타를 입은 상태였습니다.
이집트군은 소련식의 조직적인 보병 중심 대전차 방어진 지를 구축하여 이스라엘군을 끌어들였습니다. 특히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군의 반격에 맞선 이집트군은 이미 전날 밤 운하 일대의일대의 원래 방어책임을 맡고 있던 이스라엘군 만들러 소장의 252 기갑사단 전차 전력의 60%를 대전차 방어전에서 격파할 정도로 그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전날보다 더욱 취약한 상태로 공격해 오는 이스라엘군 2개 사단에 맞서 말 그대로 최고의 선전을 펼쳤던 것입니다. 그나마 이스라엘군의 반격은 이집트군이 진격을 멈추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만드는 효과는 거두어 결국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는다는 당초 목적 자체는 달성했습니다. 대신 만약 이집트가 작심하고 제대로 밀어붙일 경우 이에 맞서기 어렵다고 여겨졌습니다.
원래 소련식 군사교리의 특성상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합니다. 6.25 때에도 이러한 특성이 보이지만, 중앙 집중화된 지휘체계상 각 제대는 원래의 목표선까지 진출하면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상태를 보고하고 피아 간의 상황을 분석해서 다음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대기하게 됩니다.
당시 이집트 지휘부는 지난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했던 이집트군이 예상 이상의 전공을 세우자 이것이 이스라엘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이스라엘을 너무 밀어붙일 경우미군이 전면 개입하거나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어차피 이집트의 목적도 수에즈 운하 회복과 미국-이스라엘과의 수교였지 이스라엘 전멸이 아니었으므로 더 이상 진격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지리멸렬해서 상급 지도부가 공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도 여유를 얻어 일부 동원병력을 먼저 시리아 전선에 돌리는 도박수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나이 전선에서 우세를 차지한 이집트군은 예상되는 역습에 대비한 방어선을 구축하였습니다.
한편, 시리아군 역시 초전에 헬기를 이용한 대규모 특수부대 강습으로 헤르몬 산의 이스라엘군 관측소 겸 진지를 한 시간 만에 점령하고, 기갑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이스라엘군 제188기갑여단의 방어선을 남단에서 수적 우위로 돌파하며쾌조의 진격을 거듭해 7일에는 요르단 강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시리아군 기갑부대가 골란 고원 서쪽 저편에서 빛나는 갈릴리 호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진출한 것입니다.
다만, 이때 시리아군은 소련식 교리에 치중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탄약도, 연료도 아직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요단강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부대가,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는 교리를 철저히 지키느라, 자신들의 작전지역을 넘어서 요단강을 도하하여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습니다.
사실 시리아로서는 승리의 경험이 없다 보니 이것이 실제로 진격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 이스라엘 측의 유인작전인지 구분할만한 전술 안을 가진 지휘관이 없던 데다, 멋대로 행동했다가 최상층 지휘부에게 찍혀서 숙청당할 위험도 있기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시간을 끌지 않고 요단강을 넘어 진격했다면, 이스라엘 군의 동원사단이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하게 변하자 다급해진 이스라엘군은 일단 가장 가까운 시리아군부터 몰아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장 이집트 방면은 시나이 반도를 제물로 바치면서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있었으나, 시리아 방면은 골란 고원이 돌파당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시리아군의 공격 앞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용병력을 대부분 골란 고원에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골란 고원의 방어선 북단을 담당한 이스라엘 현역 부대인 제7기갑여단, 그중에서도 카할라니 중령이 이끈 제77전차대대는 1:10의 수적 열세 하에서 몰려드는 시리아군 기갑부대를 말 그대로 혈전(血戰) 끝에 격퇴하면서 동원 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으로 투입될 시간을 벌었습니다.
5. 미국의 장비 지원과 반격
자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마지막 보루인 미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8일 밤 골다 메이어 총리는 전술핵탄두 조립을 승인했습니다. 특급 비밀이어야 할 핵무기의 준비는 그다지 비밀스럽지 않게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여차하면 이집트와 시리아에 쏴버리겠다는 협박이자,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되는 것을 미국이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계산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9일 오전 미국 국무부에 날아들었다.
이스라엘이 대놓고 핵무기를 조립하는 반응을 보이자 미국은 소련에 연락을 취해 접촉하였습니다. 최악의 상황인 이스라엘이 핵공격을 실제로 실시할 경우, 소련은 이집트에 핵무기를 공급해서 핵 보복을 시행하도록 허락하여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을 공멸시키고 이후 미국과 소련은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주 내용입니다. 즉, 여차하면 미국과 소련은 양국의 전면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버섯구름 아래로 사라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교 안보 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직하며 외교정책을 장악했던 헨리 키신져는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제3차 중동전쟁의 후속 편을 찍어버리면, 이후 미국 입장에서 아랍국가들을 회유하여 평화협정을 주도,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게 될 여지가 아예 사라지기 때문에 초기에 대대적 지원을 꺼려했던 것입니다. 전쟁 초기 키신저의 큰 그림은 이스라엘이 아예 망하지 않을 만큼만 지원, 이스라엘이 아랍군을 1967년 휴전선까지 다시 몰아내면 그때 정전을 중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지원을 받긴 받았으니 군말할 수 없고, 아랍 측도 미국의 영향력으로 멸망을 모면하게 될 테니 미국이 중동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만만했던 키신저였지만 개전 초기 전황이 이스라엘에 불리해지자 지원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랍 측의 보이콧을 의식한 기업들이 차터 항공편을 내주지 않았고, 군사적 충돌에 예민했던 국방부도 협조를 거부해 첫 1주 간은 엘알 항공기 7대가 미국까지 날아와 장비를 직접 가져가는 것으로 충당해야 했습니다.
미국은 전선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12-13일 사이 영국에 부탁하여 휴전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사다트의 완강한 거부로 실패, 전쟁이 생각보다 장기전으로 돌입될 위험에 처하자 14일경에야 최대 물량 지원을 시작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워터게이트 사건에 정신이 팔려있어 중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닉슨이 당장 하라고 밀어붙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리처드 닉슨 행정부였지만 그 대응은 빨랐다. NATO 최전선, 즉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신예 M60A 1을 포함한 대규모 전차와 항공기, 막 배치가 시작된 스마트 폭탄을 비롯한 정밀 유도 병기는 물론, 일설에는 핵무기까지 포함된 대규모 지원이, 봉쇄된 바다와 지상을 넘어 항공로를 통해 날아들었다습니다.
공장에서 갓 나온 F-4 들이 공중급유기의 급유를 받으며 이스라엘까지 날아왔고 대서양과 지중해에 전개해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A-4를 잔뜩 싣고 와 이스라엘 근해에서 이함시켜 배달해주었습니다. 이 무제한 작전(니켈 그라스 작전)은 33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이스라엘이 치른 전술적 대가는 막대했지만 지난 3차 중동전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선제공격을 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미국의 압박으로 2차 중동전에 이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외교적 패배를 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략적으로는 아랍 측의 공격 가능성을 48시간 전에 파악하고도 선제공격보다 먼저 공격을 당하고, 그 뒤에 방어전에 들어간다는 도박수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둬 이것으로써 다시 전략적인 승리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군을 재정비해 반격에 성공한 것도 이스라엘군의 전술적 승리라 하겠습니다. 무기를 쥐어줘도 운영하지 못해 패한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미국의 지원에 더해 예비 병력의 바닥까지 긁어모은 3개 동원 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에 전개된 10일경,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에 대한 전면적 반격(Counter-offensive)을 실시해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완전히 박살난 시리아군은 500대가 넘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시리아 공군 역시 10일 마지막 결전을 노리고 대규모로 출격했으나 이스라엘 공군에 격퇴당해 시리아 전선은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는 상황으로 돌변했습니다.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군의 포격이 떨어지고 있었고 시리아 정부는 일대 패닉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는 요르단에 대한 성의와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소련의 으름장으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암만-다마스쿠스 가도에서 진격을 중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리아가 하도 박살이 난 관계로 이라크군과 요르단 군도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과의 전투에 일부 참전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도 애초에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오면 요르단이 아랍 연합국을 구원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고, 요르단도 전쟁을 요르단 본토 쪽으로 확대시키지 않으려 했기에 투입한 병력의 수가 적었습니다.
이라크군은 투입되자마자 이스라엘군에게 관광당하고 공군은 시리아를 도와주러 급파된 소수의 요르단군 전투기와 오인 교전을 벌이다가 패해서 퇴각하는 등 시리아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전투력 면에서는 별 도움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사우디 군도 일부 참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 주장은 여단 규모 부대를 골란 고원에 파병해서 시리아의 방위를 지원하긴 했으나 파견 시점이 늦어져서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나 시리아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시리아 영내 작전 기간 중 미국제와 영국제 장비를 상당량 노획했는데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조기 참전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시나이의 이집트군은 지난 제3차 중동전쟁과는 다르게 시리아가 말아먹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에서 뛰어나와 이스라엘로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정면대결은 무리였는지 아주 박살이 나버렸고, 16일 새벽 아리에 샤론 소장(나중에 수상이 된 바로 그 사람)이 지휘하는 이스라엘군이 이집트군의 전투 지경선을 파고들어 수에즈 운하를 기습도 하해 텅텅 빈 수에즈 서안으로 밀고 들어가 수에즈 운하 남반부의 이집트 3군 병력을 포위하면서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3군을 포위 섬멸함으로 이집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려 했지만 이스라엘을 기사회생시킨 미국과 이집트, 시리아의 뒤에 있던 소련이 개입했습니다. 두 나라는 모두 이스라엘이 3군을 물리적으로 섬멸하여 이집트에 불필요한 굴욕을 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천명했으며 이스라엘이 포위된 3군에게 식량, 의료지원을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특히 키신저는 만약 이스라엘이 3군을 섬멸하려 한다면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이집트 편으로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선을 넘는 순간 이스라엘이 얻은 모든 성과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중대한 개입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대한 결정적인 설욕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외교적 승리만 거둔 수에즈 전쟁이나 군사적으로 재앙적으로 가깝게 패한 6일 전쟁과 달리 이집트 쪽이 외교적, 군사적으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던 지상전과 달리 해상전에선 이스라엘 해군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개전 첫날 저녁 시리아 라타키아항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자국산 가브리엘 함대함 미사일을 이용해 시리아 해군 소속 미사일 고속정 3척과 어뢰정 1척, 소해정 1척을 격침시켰고 시리아군이 발사한 스틱스 미사일은 ECM에 의해 모조리 빗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후 발팀에서 벌어진 이집트 해군과의 결전에서도, 이스라엘군 고속정 6척이 이집트군 고속정 4척 중 3척을 격침시키는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6. 결과
개전 초기 궁지에 몰리게 된 이스라엘은 자국의 핵미사일 제리코 1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이집트 또한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핵탄두가 탑재 가능한 스커드 미사일 B형으로 반격할 준비를 해 핵전쟁으로 확전 될 양상을 보인 무시무시한 전쟁이었습니다. 게다가 양측을 지원했던 미국의 닉슨과 키신져, 소련의 브레즈네프와 각료들은 서로의 잘못된 판단과 오해가 쌓여 이스라엘과 이집트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초강대국 간의 전면 핵전쟁 직전의 상태까지 갈 뻔했습니다.
이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대의 전면 핵전쟁 위기였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두 번에 걸친 정전 시도가 무산되자 위험천만한 미-소 대립 양상으로 치닫긴 했지만, 미국에서 소련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데프콘이 상향 조정되었다는 주장은 과장에 가깝습니다.
여러 학자들도 굳이 핵무기가 아닌 재래식 병력도 소련이 실제로 투입했을 가능성이 적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24-25일의 위기는 브레즈 네프의 과장 섞인 일방적 개입 위협과 극도로 긴장을 탄 키신저의 강경 대응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우발적 핵전쟁 문서에도 나와있듯, 그 이후 사소한 오해나 경솔한 행동이 누적되어 핵전쟁이 발발했을 위험은 충분하지만 말입니다.
이스라엘군은 그렇게 자랑하던 정예 기갑부대와 공군이 이스라엘군의 자만심과 방심으로 인해 이집트 대전차 보병들과 방공군에게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이 닥치면 자연히 해결된다는 임기응변적 사상과 예비군을 빨리 소집하면 된다는 현역병 최소화 사상이 동시에 파기됩니다.
이는 실제로 전쟁에 돌입하니 예비군이 동원 완료되는 72시간을 소수의 현역병이 다수의 적군을 상대로 버티지 못해서 파국이 일어났으며, 후방에 비축해둔 물자도 일선 부대로 제대로 수송되지 않아 곤란을 겪었습니다. 전후 탈 장군(메르카바 전차 개발로 유명합니다.)에 의하면 이스라엘군이 소모한 각종 탄약은 비축되어 있던 물량 내였고 유일하게 175mm 포탄(M107 자주포)만 비축분을 다 소모하고 미국의 긴급지원 포탄까지 사용했을 뿐 105mm 전차포탄의 경우 약 30만 발의 비축분 중 절반 정도를 소모했다고 합니다.
급박한 전황 속에 보급체계도 혼돈에 빠져 급한 대로 전방 탄약고들의 탄약들이 우선 일선 부대에 공급되어 소모된 후 후방 비축탄들이 보급대의 트럭에 실린 채 원활하게 보급되지 않아 일선 부대들이 탄약 부족에 시달린 것입니다.
무엇보다 극심한 소모전을 겪고 나니 세 집 걸러 한 집 꼴로 집안 남자들이 죽어서 돌아오는 끔찍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때 다수의 이스라엘군 장교와 장군들이 전사해서 여단장과 대대장, 중대장이 전사하지 않은 부대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에 이스라엘은 사회적으로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사전에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난 여론이 빗발쳐 이스라엘 의회에서는 전쟁 대비 실패에 대한 조사를 위해 아그라 나트 위원회가 구성되어 청문회를 벌였고,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모세다 얀 국방장관은 하루아침에 나라를 말아먹을 뻔한 졸장이 되어 사직서를 내야만 했습니다. 전쟁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은 간신히 승리를 거두고 메이어는 총리직은 유지하긴 했으나, 결국 새 내각이 구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어 역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임해야만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수많은 전쟁 영웅들, 이스라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장성들이 되려 범죄자들로 몰리면서 많은 수의 별이 떨어지고 배신감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난 장성들과 고급 장교들의 수도 상당했습니다. 이스라엘군에서 가장 미약하고 천대받던 해군 만이 라타키아 해전의 승리 덕분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중동의 지역 강국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무너졌으며, 언제든지 전멸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이스라엘 스스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는 비교적 온건파인 노동당 내각을 무너뜨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과격파들 간의 난맥상을 낳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군사전략은 다시 6 일전쟁 때처럼 외부의 위협이 들이닥치기 전에 예방적으로 선제공격으로 회귀했고, 이는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에서 증명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F-15 전투기를 해외 도입국 중 세계 최초로 도입하고, 자국 사정에 걸맞은 메르카바 전차를 개발하는 등 무기 도입 과정에서 욤 키푸르 전쟁의 뼈저린 교훈을 대폭 반영했고, 1982년 레바논 내전에서 일방적으로 시리아군을 격파하며 복수를 단행합니다.
한편, 이집트는 놀라운 선전 덕에 협상 테이블에서 당당한 기조를 유지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군이 반격하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는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집트 역시 전보다 훨씬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보다 더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는 사실은 지난 전쟁과 똑같았고,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무릎 꿇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사다트는 이스라엘과의 화평 정책으로 외교정책을 180도 선회했습니다.
결국 이집트에게 입은 피해와 이집트의 전향적 태도에 이스라엘이 한 발 양보해 1974년 시나이 잠정 협정으로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습니다. 그 후 몇 년에 걸친 협상 끝에 지미 카터 행정부 때인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워싱턴 D.C. 협정으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 후 시나이 반도는 1982년 완전히 이집트의 손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다트 대통령은 이 공로로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과 함께 78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지만,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체결에 반발한 이슬람 과격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그리고는 전쟁 중에 활약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권좌에 앉아 30년간 집권하게 됩니다.
이는 아직도 골란고원을 못 찾은 시리아와 비교되는데, 사실 골란 고원의 전략적 가치는 단순한 완충지대인 시나이 반도와는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골란 고원을 차지하면 고지대에서 이스라엘 영토를 내려다볼 수 있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요르단 강을 수원을 차단하여 이스라엘의 목을 죄는 게 가능하게 되기 때문. 단 이 경우 요르단도 같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방어에 성공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영토를 되찾는 데 성공한 이집트도 전략적으로 성공을 이뤘다고 할 수 있지만 시리아는 빼도 박도 못하게 완벽한 패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집트는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이기지 못한 적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는 점을 근거로 이 전쟁을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으로 대대적으로 기념합니다.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한 10월 6일은 이집트의 국경일인 국군의 날로 지정되어 있으며 10월 6일(السادس من أكتوبر), 또는 라마단 10일(العاشر من رمضان)이라는 지명이 이집트 곳곳에 존재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협정을 체결하면서 시나이 반도를 포기한 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는데 우선 시나이에 사는 베드인 유목민에게 자치권을 주면서 달래고 유전 탐사 등 시나이 반도 내 여러 지하자원 개발을 실시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여러 곳 건설하는 등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점령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통치 자체는 꽤나 안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직후 닥친 오일 쇼크로 인해 이스라엘 경제가 휘청하면서 안 그래도 군사비 확보를 위해 쩔쩔매는 이스라엘이 막대한 돈을 들여 이스라엘 본토 면 적에 3배에 달하는 시나이 반도를 개발해야 할 동기를 상실하였습니다.
또 시나이 개발을 위해서는 인구가 필요한데 당시 1980년 당시의 이집트의 인구는 약 4500만 명이었던 것에 반해 이스라엘 인구는 고작 390만 명에 불과하여 이스라엘은 부족한 인구를 늘리기 위해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여기 유대인들은 당연히 위험한 데 오기 싫어하여 거부했습니다.
동원 병력 또한 차이가 났는데 이스라엘은 예비군까지 포함해서 총력전으로 열심히 긁어모은 병력이 41만 5천 명이었던데 반해 이집트 주도의 아랍 연합군 측은 백만이 넘었고, 이것도 전력을 동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 없이 이스라엘군만으로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을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에서 밀어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이는 이집트가 6일 전쟁 이전 영토를 모두 차지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소련이 정전에 합의하자, 이스라엘과 이집트도 협상에 들어가 국경선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7. 전쟁 영향
제4차 중동전쟁은 여러 가지 일화를 만들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수출을 금하는 바람에 오일쇼크가 발생해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때의 오일쇼크로 이스라엘 경제도 큰 타격을 입어서 1970년대 중후반에 두 자릿수대, 1980년대 상반기에 세 자릿수대 인플레이션으로 경기침체를 겪게 되었습니다.
특히 1984년 당시의 물가상승률은 445%를 기록하여 중남미 국가들을 제치고 세계 최악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렸습니다. 이 탓에 1977년 총선에서 리쿠드가 집권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를 내주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플레이션 문제는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해결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이미 위력을 보여준 지대공 미사일은 여기서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는 미국에 자극을 주어 페트리어트 미사일이 부활하는 데에 기폭제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이전까지 무적을 자랑했던 전차부대가 대전차 미사일에 농락당하면서, 전차 무용론까지 등장할 정도로 군사 학계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제기된 전차 무용론은 보병 등의 지원 세력이 없는 전차부대의 단독 공격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이 골자이며, 보병-전차 합동 전술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었습니다.
또한 전차의 장갑 강화와 정밀 FCS 도입을 골자로 한 3세대 전차 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쟁의 당사자인 이스라엘군에서는 단시간에 숙련된 기갑 병력이 쓸려나간 뼈저린 교훈으로 주력 전차인 메르카바 전차의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메르카바의 특징인 보병 탑승 능력과 승무원의 생존성에 대한 집착 등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개전 당일 이스라엘 공군의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대공전력 중 SA-6에 대한 ECM 미비와 이스라엘 해군의 스틱스 교란 성공은 이후 서방, 특히 미국의 ECM 및 ECCM 개발 집착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즉, 현대전과 근미래 전의 다양한 무기체계 및 전술 개념과 그 효용이 이 전쟁에서 확고해진 것입니다.
또한, 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주변의 여러 아랍 국가들 중에서 유달리 이집트와 과하게 적대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할 수 있는 세력과의 적대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건국 이래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던 데다 환골탈태한 이집트에게 제일 피해를 많이 본 뒤, 이집트만 배제시켜도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월등히 유리해짐을 깨달은 것입니다. 거기에 사다트와 무바라크 정권도 이스라엘과 크게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고 있어, 시나이 반도 쪽은 그나마 평화로워졌습니다. 2018년 경, 시나이 반도의 다에시를 소탕하기 위해 이집트군이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했는데 이스라엘을 자극할 소지가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은 이를 묵인하며 오히려 협력하는 모습까지 보여줬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역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 가운데 군사력이 이스라엘에 비해 뒤처지지 않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크게 개선하였습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무력을 포함한 분쟁을 겪는 국가는 레바논이나 시리아 같은 중동 내에서도 군사력이 한 수 아래이거나 혼란 속에 빠진 국가들이며 그 이외에는 이란, 이라크, 오만, 쿠웨이트, 기타 북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국경을 맞닿지도 않으며 거리가 멀어 실제적인 군사력 투입이 서로 무리인 국가 정도입니다.
인구가 적어 전쟁을 수행할 인원이 늘 부족한 이스라엘군이지만 이 전쟁에서의 병력 부족은 여러모로 치명적이었고 이를 벌충하기 위해 징병제는 꾸준히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성까지 징병하고 3년 가까운 기간을 청년들을 군대에 붙잡아 놓고 있어 이스라엘 사회가 군국주의, 근본주의에 경도되고 보수화, 극우화가 진행됨에도 징병이 면제된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인 하레디가 사회적인 혜택에 힘입어 꾸준히 늘어나고 젊은이들의 군 기피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징병 가능 인원이 계속 줄어들자 결국 반발을 무릅쓰고 하레디에 대한 징병을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제4차 중동전쟁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에 시큰둥했고 오히려 중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트러블메이커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미국이 대놓고 이스라엘 편을 들면서 2020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밀월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몇 년 뒤 미국의 주요 중동 파트너인 이란 팔라비 왕조가 붕괴하면서 더욱 이러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걸프전쟁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주요 우방이 된 이후에도 미국-이스라엘의 밀월관계(라기보다는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관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친 이스라엘 정책은 이스라엘과 관계가 험악한 중동 주요 국가가 미국을 더욱 혐오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미국의 중동 정책에 운신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미국 정계에서도 맹목적인 이스라엘 편애와 지원이 얻는 이득(이스라엘과의 관계 유지, 미국 내 유대인의 자본 및 지지 확보)에 비해 손실(석유, 중동에서의 외교 전략의 한계, 중동 및 이슬람계 테러 조직의 준동 등)이 크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조금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은 있었으나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오히려 더욱 강해진 친 이스라엘 외교 정책을 꺼내 들면서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
그러나 2020년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낙선하고, 중동 이슬람권과의 관계 개선을 주창하는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 역시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해졌습니다.
3차 중동전쟁은 6일전쟁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개요
전쟁 배경
전쟁의 시작
분석및 결과
1개요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두어 엄청난 영토를 획득했던 전쟁. 6일 전쟁이라는 별명으로 매우 유명하다. 아랍 측에서는 6월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1,2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국제정세나 여론이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세계의 눈치를 많이 보던 상황에서 전쟁 발발 시 UN의 개입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UN이 개입하고 중재하는 순간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작전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UN이 개입하기 전의 단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장기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 언론에서는 이집트군의 가짜 승리를 계속 보도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로운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이스라엘의 승전보가 세계에 최대한 늦게 알려지는 것이 도움이 됐기 때문입니다.
2.전쟁 배경
제2차 중동전쟁에서 압도적인 패전을 당하고도,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 둔 이집트의 가멀 압델 나세르는 아랍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야심 차게 전쟁준비에 나서게 됩니다. 소련의 군사고문단과 최신 장비를 들여와 전쟁준비에 나서며, 한편으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물밑 지원하면서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합니다.
한편, 예루살렘 서안지구를 두고 충돌을 계속하던 요르단 및 골란고원을 거점으로 이스라엘과 무력충돌을 벌이던 시리아 역시 이집트와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아랍국과의 국경선에서 일부러 도발을 걸며 영토를 확장시키고 있었습니다.
원래 6일 전쟁 이전의 이스라엘 영토는 상당히 작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좁은 영토 때문에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게다가 영토 형상의 문제상 임시수도인 텔아비브가 조금만 밀리면, 함락돼서 국토가 양분될 지경이었을 정도로 중부 이스라엘 쪽 땅이 취약했습니다.
이후 6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얻어낸 땅을 합쳐도 남한 크기에 못 미쳤고, 가장 큰 적인 이집트와의 화해 및 현실적으로 인구문제상 관리가 힘든 시나이 지역을 돌려주면서, 현재 영토는 남한의 1/5밖에 안 되며…. 그래서 이스라엘은 빠져나갈 구멍을 둔 도발을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호 간에 비무장지대로 합의했던 곳에 경작용 트랙터를 끌고 들어가는 등의 수단으로 아랍 병사들의 선제공격을 유도했습니다.
아랍 병사들이 경고사격이라도 하는 순간에 국지전으로까지 전투가 확대되는 등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 이어졌으며,
그래서 제2차 중동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은 자국의 정보력을 모조리 쏟아 부어 주변국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며 전쟁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적자원의 불리함과 좁은 영토 때문에, 장기적인 소모 방어전에 유리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선제타격론으로 대표되는 예방전쟁이 군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실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제2차 중동전쟁인 수에즈 전쟁에서 나세르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군사적으로 크게 패하고도 정치적으로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때문에 나세르는 이번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시위를 통해 강력한 압박을 줌으로써,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입지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례로 이스라엘의 항구로 향하는 선박을 봉쇄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집트 공수부대는 대전차화기, 대공포, 해안포는 배치했지만, 실제 봉쇄에 중요한 기뢰는 전혀 부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이집트의 움직임이 대하서 블러핑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야 조금만 잘못 했다간 지중해 앞바다에 온 국민이 몸을 던져 죽는 수도 있는 판국이었고 주변국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결코 녹록하게 대처할 수도 없었습니다. 앞선 2차 중동전쟁도 이스라엘에서 나세르가 아랍의 결집을 위해 이스라엘을 제물로 삼을 것이 틀림없다고 이스라엘에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나세르는 3차 중동전쟁의 전야는 물론이고 2차 중동전쟁의 전야에도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가 원하던 것은 이집트를 맹주로 하는 아랍의 통합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이집트군은 예멘에서 벌어지던 왕당파와 살레의 공화파 간의 내전에 정규군 절반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심각한 손실로 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또한 당시 공군 원수인 압둘 하킴 아메르 원수의 무능함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습니다. 경직된 지휘체계와 무능력한 아메르로 인해, 이집트 공군은 공습으로부터 전투기를 보호할 쉘터 하나도 짓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압둘 하킴 아메르는 이미 2차 중동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임박했음에도, 모든 보고를 무시한 채 술과 노래로 세월을 보내며 태업을 한 무능의 대명사로서, 그 대가로 이집트는 수에즈 일대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이집트의 유능한 장교들은 이스라엘의 군사전략을 조사하고 중동전쟁의 대세는 장차 선재공격이 될 것이라며 이스라엘이 선제공격하기 전에 먼저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상부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다 떠나서 나세르는 유대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정신론적, 혈 통론적인 우월성을 맹신하면서 결전의 날이 온다면 퇴폐 서구 문명에 물든 '겁쟁이' 이스라엘은 허망하게 무너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대(對) 이스라엘 압박용으로 시나이 지역에 이집트군을 전개시켜 놓긴 했지만, 이는 블러핑 용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과 아랍권 전역에 보여주기 위한 쇼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을 집중 타격할 것으로 보였던 3국(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들 중에 그나마 이스라엘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요르단으로, 요르단 국왕 후세인1세는 대표적인 평화주의자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당시 이집트가 주도했던 언론플레이에 전(全) 아랍권이 광분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친(親) 이스라엘적 태도를 취했다가는 정권이 위태로운 처지였습니다.
요르단군은 이집트군의 전쟁 개시에 따라 군사행동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소나마 전쟁준비가 되어있긴 하지만, 실제 이집트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요르단의 준비는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리아군은 쿠데타에 가까운 정권 싸움 때문에(…) 이스라엘 공격 (혹은 방어)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리아군의 태도는 6일 전쟁 발발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초기 이스라엘의 기습을 받고도 언론플레이로 거짓 승리를 보도한 이집트 덕분에 계속 정권 싸움을 하고 있었고(…), 이집트군의 패퇴 이후에는 다소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UN에 의한 정전협정이 발효되자 다시 정권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집트 정보부는 해안봉쇄가 시작되며 이스라엘 내부에서 선제타격을 준비한다는 것을 포착했지만, 이 정보 역시 경직된 조직 탓으로 상부로 전달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형식적이지만 이집트의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여론은 매우 심각해집니다.
사실 이집트도 '아랍의 소리'란 라디오 방송으로 중동 여론을 선동하고 있었으며, 이 방송은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멸망을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과의 협상을 준비하려던 장관이 실각하고, 선제타격론파가 정권을 잡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동원령이 내려지기 시작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실제로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소련이 문제였습니다. 소련이 아랍 세력을 지원한다면, 중동의 문제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판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소련에게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연막을 치고 있었고, 다른 아랍국가들 역시 자신들의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18년간 불리한 전세를 한 번에 역전시킬 선제타격론 교리가 연구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개전 48시간 동안 상대의 공군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사막에서의 전쟁은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집트가 먼저 선제타격을 가해 이스라엘의 공군력에 큰 타격을 준다면, 좁은 영토와 부족한 인적자원을 가진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 될 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망의 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3.전쟁의 시작
6월 5일,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시간을 노려,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은 사막에서 초저공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기지들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을 자랑하던 이집트 공군에 대해 주요 공곤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동시에 기습폭격을 가했습니다.
약 3시간에 걸친 폭격으로, 이집트 공군은 450여 대의 항공기 중 300여 대를 상실하고, 공군기지와 레이더 기지 등을 모조리 잃는 엄청난 피해를 입습니다. 단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력 80%를 격파한 것입니다. 이후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이집트 영토를 오가며, 그야말로 이집트군을 초토화시키며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자국 영토의 3배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해 현대 전사(現代戰史)의 전설을 만들게 됩니다.
이집트 육군은 이스라엘군의 번개 같은 진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집트군은 나세르의 최측근이었던 압둘 하킴 아메르 공군원수 겸 국방장관이 시리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모든 최전선 지휘관들이 아메르를 마중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야 했고 지휘 공백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집트 육군에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제2차 중동전쟁 당시 돌파되었던 구역인 시나이 반도 방면 이스라엘 국경선의 중앙부와 남부에 강력한 병력을 모아둔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해당 방면으로 이스라엘군의 공격이 들어오면, 반격해서 꺾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좁은 남단부 영토를 관통해서 요르단과 직접 연결한 다음,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이번에는 국경선의 북부에서 강력한 공세를 해서 돌파에 성공했으며, 이후 아부 아게일라 전투에서 패하면서 시나이 반도의 전군이 포위당할 위험성에 빠지자 패주(敗走)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에 도착한 뒤였다(…). 이스라엘군은 공세가 한 번 실패하면 자국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절박감에 고속 공세를 단행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나 공세에만 목을 메달았는지 전차 부대의 기동력을 보급이 못따라가자 헬리콥터로 급히 공수했으며 전투식량이 떨어지자 보급을 기다리지 않고 장군들도 주스로 떼웠을 정도였으며 이집트군 포로가 발생하면 생수 하나 던져준 채 그대로 풀어주고 목표를 향해 기동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집트군 방어 거점이 있을 경우 후방 부대에게 소탕을 맡기고 그대로 무시하고 진격하는 기동부대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 소탕에 몰두하다가 시간을 뺏겨 UN에게 저지당하기 이전에 차라리 수에즈 운하 주요 거점을 고속 기동으로 선제 장악해 이집트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시나이 반도의 방어병력을 포위 섬멸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삼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는 개전 뒤 1시간이 지난 후부터 요르단군과 이스라엘군의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서로 예비군을 주축으로 하여 지루한 대치전 양상을 보이다가, 7일을 기점으로 이스라엘군이 전차를 동반한 부대가 강습하며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요르단 군은 그 명성답게 가장 정예화되고 훈련도가 높은 군대라, 이스라엘군이 초반에 매우 힘들어했지만, 장비가 부실하고 제공권을 상실한 처지라서 결국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서안에 남은 요르단 군은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결국 패주 하여 요르단강 동쪽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시리아군은 뒤늦게 실전에 참가했는데, 이들은 이집트군이 신나게 깨지고 있는줄은 상상도 못 하고 이집트군이 자신들이 승리하고 있다는 자체 주장을 정말인 줄 알고 참전(…)했다가, 개전 첫날 이집트군을 개박살내고 돌아온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 폭격을 당해, 역시 2/3의 전력을 상실하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습니다.
일부 지상군은 이스라엘 국내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아랍국들 간의 상호불신과 지휘체계의 혼란으로 대부분 격퇴당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국제사회의 개입을 더욱 빨리 요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내부 깊숙이까지 진격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으나, 국제사회 개입보다는 전선에서 싸우던 시리아군이 그 소식에 먼저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그나마 끝까지 남아있던 기갑부대가 요르단강에서 수장당하면서, 아예 지상공격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집트와 요르단을 박살 낸 이스라엘은 마지막 남은 골칫거리인 골란고원 요새에 대한 전면공격을 결정하고 전력을 투입합니다.
골란고원은 해발고도 500m의 바위산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서, 엄폐물도 찾기 힘든 척박한 지역이었습니다. 여기에 두꺼운 콘크리트 요새를 다중 철조망으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에도 시리아군의 병력 상실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은 그 난공불락의 절벽을 전차와 기계화보병이 탑승한 장갑차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골란고원은 땅이 자잘히 부서지는현무아 이라 폭약으로 현무암 바위를 부수고 그 지역을 불도저로 길을 닦으며 올라갔다. 거기다가 엘리 코헨이 상세히 관찰한 골란 고원에 대한 정보들은 이스라엘군의 요새 점령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시리아군의 지뢰지대와 포격을 버텨 내면서 여단 내 90%의 사상자가 나오면서도 현무암을 부수고 길을 내느라 철조망을 부술 폭약이 모두 소진되자 철조망을 돌파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군은 그동안 올라오느라 8명밖에 남지 않은 병력 중 일부가 자신의 몸을 철조망에 내 던져서 자기 몸에 덮어 얼마 안 남은 전우들이 지나갈 수 있게끔 길을 내어 주었고 결국 9일 밤 이처럼 이스라엘군의 처절한 진격에 방어선이 뚫리자, 날이 밝기도 전에 모든 병력이 철수해 버렸고 골란고원에 이스라엘 국기가 올려졌다.
이를 지켜보던 골라니 여단의 여단장 요나 여단장은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골란 고원에 이스라엘 깃발이 올라왔고. 이를 망원경으로 보던 여단장은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시리아의 이러한 졸전과 이스라엘군의 영토 확장 능력에 놀란 국제사회는 즉각 정전을 요구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랍세계에서 서방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한 소련의 압박에 못 이겨 이스라엘은 정전(停戰)에 수락합니다.
하지만 소련 내 강경파 군부는 실제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군부의 계획대로라면 이스라엘에 소련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예정이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소련 상륙군에 이스라엘의 폭격이 가해지는 즉시 소련의 직접 개입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그런 상황이라면 미군 역시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즉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계획을 알게 된 소련 수뇌부가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막고 정전을 요구하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시켰습니다. 사실 소련이 선전하고 다니던 군사압박 역시 아랍권에 대한 립 서비스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6월 10일 오후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아랍 3국은 중동 불패 이스라엘군의 전설을 하나 더 만들어줬습니다.
4. 분석 및 결과
6일 전쟁의 발발 원인은 실제 이스라엘의 예방전쟁적 성향도 있었지만 이스라엘로서는 이집트(정확히는 나세르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세르는 언론과 군사적 선계 공격의 가능성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궁지로 모는 정치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선제공격과 승리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는 이집트의 군사적 위협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와 같은 굴욕(?)을 견뎌낸다면, 평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내는 바로 이집트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더불어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내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세르 역시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예상도 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군의 공세에 이집트군이 어느 정도 방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집트군이 방어를 하는 사이에 국제사회의 중재가 개입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중재로 정전이 발효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세계에 대한 이집트의 정치, 외교적 선전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으니까. 다만 이스라엘군이 예상보다 너무 강했고, 이집트군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능했다 보니,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은 요르단의 입지가 이스라엘이나 아랍 측 모두에게 크게 상승하는 영향을 주었습니다. 물론 요르단도 풍요로운 요르단강 서안을 날려먹은 데다가 관광수입 측면에서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상실해서 큰 타격을 입었고, 영토 회복을 위한 모든 노력이 불가능해지는 등의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패전의 와중에서도 끝까지 가장 잘 싸운 국가로 인정받았기에, 제4차 중동전쟁부터는 이스라엘과도 암묵적인 우호관계를 맺고, 아랍 측에도 나름대로 군사지원을 하는 등의 양다리를 걸쳐도,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 위치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런 위치는 앞서 언급했듯 제3차 중동전쟁 때까지 이스라엘과의 교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도록 아랍 측에게 압박받은 것과는 천지차이로 달라진 것입니다. 물론 이걸로 당시 요르단 GDP 40% 이상을 생산하던 요르단강 서부 영토의 상실로 인한 영토 축소 + 경제, 인구의 대손실을 메꾸기엔 너무 손해지만... 지도에 나온 요르단강 서안지구가 1967년에 빼앗긴 요르단 영토입니다. 골란고원은 돌덩이, 시나이 반도는 사막으로 전략적 요충지지만, 인구, 경제면에선 큰 도움이 안 되는데, 이 요르단강 서안 지역 땅은 전략적 요충지 + 경제적 요지라 이후 이스라엘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이집트는 자만심과 독재 체제 특유의 경직된 의사결정 시스템으로 인해 결정적인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제 무기들을 대량으로 들여와 군사력을 강화한 것은 좋은데 이를 아랍민족주의와 연계해 정치적으로만 활용하려 했었고, 자신들의 군사력을 믿고 자신만만해한 결과 이스라엘과 전쟁하면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약점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으며 결국 이스라엘군에 제대로 허를 찔리게 된 셈이었습니다.
한편 나세르는 종전 3일 뒤 대국민 방송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하야할 것을 표명했지만, 이후 3주 동안 거리로 국민들이 밀려 나와 외치는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는 아우성에 "그렇다면 국민들의 의사에 따라 다시 복귀하겠다." 고 밝히고 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나세르의 정적, 이스라엘, 미국 등은 이 같은 과정을 나세르의 정치적 쇼로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국방장관 아메르는 패전의 책임으로 실각했으며, 이후 자신의 오랜 친구인 나세르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한다.
그동안 시리아는 골란 고원을 통해 이스라엘을 내려다보며 공격을 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유일한 수자원인 갈릴리 호수로부터의 상수도 공급을 불안정하게 할 수 있었으나 전쟁의 참패를 통해 전략적 거점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균형의 추가 완전히 이스라엘에게 기울어지는 수모를 당했습닏.
그리고 50년 만에 기밀문서를 공개하면서 이스라엘이 이집트 니나 이반도에서 핵폭탄 투하 계획을 가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쟁 이후인 1967년 11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는 이스라엘이 이 전쟁으로 인한 점령지에서 즉각 철수할 것을 주장하는 결의안(242호)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결의안을 무시하였고, 현실적인 통치의 어려움이 생긴 시이 이반도를 1981년 이집트 측에 반환한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점령지들(골란고원,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지구 등)을 자국의 영토로 삼고 있습니다.
6일 전쟁 당시 텔아비브는 이스라엘의 임시수도, (1948년~1977년)였다. 국운을 걸고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도시계획을 수립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국회의사당과 중앙정부청사와 대법원 및 복지부처와 공안기관(공안부+경찰청+소방청+교 도청)과 이스라엘 은행을 차례로 이전했습니다.
그래서 1977년에 이르면 예루살렘이 명실상부한 행정수도로 탈바꿈했지만, 국내외의 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여 경제부처와 방위기관(국방부+육군청+해군청+공군청)과 국유기업 및 대사 관관 공사관과 영사관은 텔 아비브 시내에 있는데, 최근에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앞장서서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했으며, 과테말라, 루마니아 등 몇몇 나라들이 상당수 국가가 대사관을 인전 하거나 고려하는 중입니다.
전쟁 도중인 6월 8일에 이스라엘군의 전투기와 어뢰정이 미군 정보 수집함 USS 리버티를 공격하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리버티 사건. 이 공격으로 34명이 사망하고 17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함선 자체도 크게 파손당했습니다.
당시 함장인 윌리엄 로렌 맥고나글(William L. McGonagle)은 본인도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사태를 수습하고 함선을 살렸습니다. 이 공으로 맥고나글 함장은 명예 훈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임무 자체가 기밀인 데다, 미국은 이스라엘과의 외교 문제 때문에 이 사건을 은폐해야 했습니다. 결국 사건은 한참 뒤에야 알려졌으며 일부 자세한 사안은 아직도 비밀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맥고나걸의 명예훈장 수여식조차 비밀리에 매우 조촐하게 치러야 했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얼마나 이집트군이 속절없이 털렸는지 수백 대의 이지브군 전차들이 상태가 온전한 채로 이스라엘군에 노획될 지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 T-55 전차들을 티란으로 개조해 쏠쏠하게 써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