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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육군 최정예 특수부대로 특수 정찰, 대테러 진압, 인질구출 등과 같을 고난도 임무를 수행하는 대테러부대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일렛은 히브리어로 '정찰대'라는 뜻으로 , 사이렛 메크 칼은 영국 특수부대인 SAS를 모방해서 창설되었습니다. 

1976년 엔테베 작전을 포함하여 1964년 6일 전쟁의 쉬라 크락 작전, 1973년 욤프키프르 전쟁, 사보이 적전, 1982년 레바논 전쟁 등의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이스라엘 특수 부대 사일렛 미트칼 부대로고 이미지와 부대원 이미지  

한편, 사이렛 매트칼은 상당기간 대원을 비밀리에 선발했으나, 1980년대부터 지원자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일렛메트 칼에서는 네타냐후 총리 에후드 바락 전 총리, 모세 알론 에스 라엘 국방장관, 이스라엘 첨보 기관 모사드 수장인 대니 아톰 등 이스라엘 역대 총리들을 비롯해 유수의 정치인들이 배출됐습니다. 

 

1. 엔테베 작전(사일 레 메티칼 부대)

사일렛매트칼의 대표적인 작전으로 1976년 아프리카 엔테베 공항 인질 구출 작정인 일명 엔테베 작전이 있습니다. 

1976년 7월 3일 이스라엘 로드 공항을 출발하여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에어 프랑스 소속 AF-137기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ELP) 테러범 2명과 독일계 혁명 분파인 테러범 2명에게 납치돼 254명의 승객이 인질로 잡혔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즉각 아프리카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사일렛매트칼을 출동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7명의 남치범 전원과 우 간다 군 30명을 사살했으며 10대의 소련제 전투기도 파괴하는 등 기습 작전을 성공리 종료한 작전입니다. 

 

그럼 엔테베 작전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1. 에어프랑스 비행기 피랍

1976년 6월 27일 12시 30분경 이스라엘의 로드 공항을 떠나 파리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소속 A300에어버스 여객기 AF-139편이 중간 기착지인 아테네에 내렸습니다. 

아테네 공 하의 보안은 허술한 편이어서 금속탐지기에 모니터링 요원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56명의 승객을 태운 AF-137편은 이륙 3분 만에 피랍되었습니다. 승객들 가운데 테러범들이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에어프랑스 소속 AF-139편은 중간 기착지인 아테네에서 이륙하자마자 테러범에게 납치되었다. 보안이 허술한 아테네 공항은 테러범이 항공기에 잠입하는 데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이 여객기에는 254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3분 1의 이스라엘 국민이었습니다. 여객기를 남치한 테러범은 모두 4명으로 2명은 형 분파 소속의 독일 테러범이었고 2명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소속의 아랍 테러법이었습니다. 특히 독일인은 남녀 커프로, 남자는 월프리드 보세라는 유명한 청부 테러범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여객기 피랍을 예상하고 쵝 정예 부대인 사이렛 매트칼에 출동대기를 명령했습니다. 

사이렛 매트칼은 부대 명칭을 그디로 말하자면 합동 참모본부 직할 정찰 부대이지만 실제로는 대테러부대입니다. 

여객기를 납치한 4명의 테러범. (좌측 상단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자엘 나지 알 아잠(Jael Naji Al Azam), 파예즈 압둘라힘 자베르(Fayez Abdur-Rahim Jaber), 브리기테 쿨만(Brigitte Kuhlmann, 여자 테러범), 윌프리드 보세(Wilfried Böse).

테러범들은 종종 이스라엘로 여객기를 몰고 와서 정치적인 요구를 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1972년 아람 테러범들은 벨기에의 사베나 항공 여객기를 납치하여 로드 공항으로 몰고 와스는 국제 언론 앞에서 요구사항을 열거한 바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예상한 이스라엘은 사일렛 매트칼을 로드 공항에 대기시키고 인질 구출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피랍 기는 이사라엘 롤 향하지 않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리비아의 벵가지에 기착했습니다. 

사일렛 메트 칼은 다시 기지로 돌아가 추후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벵가지에서 7시간 반을 대기하던 피랍 기는 재급유를 받고 이륙하여 동쪽으로 향하였습니다 부대는 다시 출동대기 상태에 들어갔으며 피랍기가 고드 공항에 내래는 즉시 구출작전을 실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자정이 되자 놀랍게도 피랍기가 아프리카로 향하고 있다는 시실이 확인되었고 다음날 새벽 3시 피랍 기는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내리게 됩니다. 

여기서 팔레스타인 인민 해 아전 선 테러범 3명이 납치법들에 합류했습니다. 

1-2. 피랍기 아프리카로 향하다. 

승객들은 피라 된 에어버스 여객기가 엔테베 공항에 착류 하고도 무려 9시간이나 더 기내에 억류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6월 28일 월요일 정오가 되면서 테러법들은 승객들을 공항 구청사의 승객 로비에 감금하게 됩니다. 

 

그날 늦은 오후 우간다의 대통령인 이지민은 승객들에게 자신이 직접 테러법들과 인질 협사를 하고 있으며, 우간다 병사들이 승객의 안전을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아민은 이스라엘 정부가 테러범과 협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29일 15시 30분경 페루인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의 지휘 하에 움직이는 테러범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발표했습니다. 

 

엔테베 작전 관련 동영상 

서독, 프랑스, 스위스, 케냐, 그리고 이스라엘에 투옥된 테러범 53명의 석방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석방되지 않는 다면 이스라엘 시각으로 7월 1일 14시에 피랍 승객들을 살해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런 발표가 나자 당시 이스라엘 수당이던 이츠하크 라빈은 각료들을 모아 대안을 검토했습니다. 

이스라엘 국방 합참의장인 모타 그를 장군은 라비 수상과 회의에 앞서 군사적 작전을 검토할 것을 자신의 참모들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구리의 참모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공군 유일의 C-130 비행대대장이던 요수아 샤니 중령력은 엔테베에 피랍기가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이미 대략적인 비행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병력과 장비를 싣고 엔테베까지 갈 수 있는 기체는 C-130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공군 참모총장이 작전에 관하여 물었을 때 모든 문제에 대해 유 항하게 대답할 수 있다고 합니다. 

 

 

1-3.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보다!

한편 구리 장군은 라빈 수상에게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보고 했지만 당시로서는 대수롭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당시로서는 이디 아마이 피랍사건의 중재자로 공정히 활동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각은 이 독 재자와의 협상을 통해 인질을 석방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승객의 3분의 2가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으며 항공기도 이스라엘 국적자가 아니라 프랑스 국적기였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가 협상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으며 항공기도 이스라엘 구적기가 아니라 프랑스 국적기였기 때문에 프라스 정부가 협상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서 우간다는 무려 4,000KM 가까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애당초 이런 거리를 극복하고 인질구출 작전을 생 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편 같은 날 저녁 한참 부의장인 에쿠텔 아담 장군은 사이렛 메트 칼의 이전 부대장이던 애 후드 바라크 대령을 호출했습니다. 

그는 바라크에게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특공대원들과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비공식적으로 토의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바라크는 밤새 특수부대원들과 토의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 최초의 인질 구출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특수부대가 고무보트를 가지고 엔테베 공항 인근의 빅토리아 호수로 강하하여 강을 건너서 공항으로 삽입한 뒤, 인질을 구출하고 우간다군에게 투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이전까지 한 번도 고무보트로 하드 덕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그중 가장 작은 문제일 정도로 계획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로서는 이 계획이 가장 최선의 대안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1-4. 엔테베는 중립 지역이 아닌 적이었다. 

작전에 필수 요소는 정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정보가 너무 적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우간다는 원래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첨단 제트기의 제공을 거부하여 이디 아민은 1972년에 이스라엘과 단교를 선언하였습니다 

정실 외교 채널조차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정보를 수집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간다의 무관으로 파견돼 바 있던 이스라엘군의 비 루크 바 레프 준장이 이디 아민과 직접 통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비 루크 바 레프 준장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민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에게 동조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테가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인진을 구출하여 우간다군에게 투항한다는 계획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니 터였습니다 그럼에도 강하 작전 준비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C-130 대대장인 샤니 중령은 고무보트 강하 시험은 실패하여 고무보트가 터졌지만 이후 문제 해결하고 하드 덕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엔테베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승객 47명이 석방되었습니다. 

이들이 프랑스 대사관 을 거쳐 파리로 돌아가자 정보 당국은 피랍 상황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디 아민이 테러범에게 협력하고 있을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우려는 석방인질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기도 했으며 이에 따라 강하 작전의 가능성을 확인한 목요일 저녁, 전혀 다른 구출 작전을 새롭게 입안해야만 했습니다. 

작전의 침투하여 인질을 구해오는 어려운 작전이었습니다.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은 인질협상의 중재자를 자처했지만, 실은 팔레스타인 테러범을 지원하고 있었다. 사진은 이디 아민(좌)과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의 다정한 모습이다. 

1-5. 적의 심리를 이용한 기습작전

특수작전의 핵심 요고가 무엇 이냐고 물어보신다면 사람들은 보통 기습작적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정답이 아닙니다. 

 

기습이란 적이 대비되어 있지 않을 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수작전에서 적은 대개 기습을 예상하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특수부대가 타격할 주요 목표에는 언제나 우수한 경계병력이 있고 인질 구출 작전에는 특수부대의 기습을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는 테러범이 있습니다 특수부대에게 적이 대비되어 있지 않을 때 공격하는 사치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라 볼 수 있습니다. 

특수부대는 상대적 전력 우위에 승부를 거는 부대입니다. 

실제적으로 병력이 적더라도 기습 속도, 그리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적을 기만하고 압도하여 상대적 전력 우위를 통해 임무를 완수합니다. 

 

즉 특수작전의 핵심 요소는 상대적 전력 우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 엘곤은 엉뚱한 곳에 이런 상대적 전력 우위를 찾았습니다. 

 

새로운 구출작전을 입안하는 가운데 다소 엉뚱한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C-130 수송기를 곧바로 엔테베 공항에 착륙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란 이것은 매우 훌륭한 의견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군이 우간다까지 직접 날아가서 작전을 수행하는 모모한 직을 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엔테베 공항에 직접 착륙하는 것은 최고의 기습 효과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적의 심리를 활용한 기만이자 기습작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야간에 조명 없이 C-130을 착륙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은 이전에 한 번도 블랙아웃 랜딩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행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란 프로토 타입 야시경을 보유했던 이스라엘 공군은 사이 사막에서 야간 착률 시험을 성공하면서 구출작전이 가능함을 입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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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소총으로 모신나강이 있습니다. 

오늘은 모신나강 소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개발 배경과 소총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신나강 소촐 이미지 

1. 모신나강 개발의 역사 

1877년 발칸반도로 세력을 확장하기를 원하던 러시아는 오랫동안 일대를 지배해온 오스만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전쟁이 16세기 이후 12번째였을 정도로 약국은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약 10개월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한 러시아는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시킨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등을 위성국으로 거느리며 스리브족의 맹주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러시아 군부는 엄청난 피해에 곤혹스러웠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의 향방에 결정적인 역할은 담당한 플레브나 공성전에서 두배나 많은 병력을 투입해서 승리했지만 전사자가 3배가 더 많았을 정도입니다. 

보유한 무기의 성능 차이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특히 소총의 질적 격차가 컸습니다. 

오스만 군이 무장한 윈체스터 소총이 러시아군의 벼르단 소총보다 사거리가 길고 연사력도 월등한 소총입니다. 

 

이처럼 러시아는 레버 액션 윈체스터에도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1880년대가 되자 소총의 대세는 그보다 훨씬 뛰어난 볼트액션식으로 넘어가던 중이었습니다. 주변국의 최신 동향을 접한 러시아는 상황이 위중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1889년 신예 소총 개발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상금을 내건 국제 공모에 최종적으로 툴라 조병창의 모신과 벨기에의 엔지니어인 나강을 제안이 경쟁을 벌였습니다. 

모신은 프랑스의 르벨 M1886 소총과 한창 개발 중이던 오스트리아의 만리허 소총을 참조한 프로토 타입을 제출하게 됩니다. 

 

한창 개방 중이던 7.62mm탄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었으나 제작과 유지 보수가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나강의 제안은 9mm탄을 사용하므로 추가 개조가 요구되었고 바로 직전에 있었던 자국군의 소총 사업에서 독일마저 우의 M1889 소총에게 밀렸기에 품질도 의문시되었습니다. 

 

모신나강과 같은 1891년 제식화된 다양한 종류의 7.62×54mmR 탄. 120년이 지난 현재도 많이 사용 되는 걸작 총탄. < 출처 : (cc) CynicalMe at Wikimedia.org >

이에 추가 공모를 실시했으나 이 두 소총을 앞서는 후보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결국 개발자들에게 성능개선을 요구했고 그렇게 해서 개령된 모델로 시험을 진행하여 나온 결과물의 나강의 제출안이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며 가장 기초적인 무기인 소총을 계속해서 외국산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존심 문제라는 의견도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볼트액션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20세기 전반에 모든 열강들은 예외 없이 자국산 소총을 사용하였으며 고심 끈에 군부는 모신의 제출안을 개조해서 나강이 설계한 탄창을 결합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개발되어 1891년 부터 양산에 들어간 새로운 제식 소총에 세출 소총 m1891이라는 제식명이 부여되었고 모신에게는 포상금이 지급되었습니다. 그러자 나강이 자신도 개발자라며 소송을 걸어 배상받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후 세줄 소총 M1891은 모신나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소련은 공로를 가리기 위해 무기명을 개발자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비록 재정 로시아 시절에 개발되었지만 세중 소총 M1891이라는 이름은 소련군의 무기 체계가 어울리지 않았기에 혁명의 혼란기가 정기된 직후인 1924년에 모신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러한 이유와 더불어 단지 탄창 때문에 나강의 이름까지 붙이는 것은 억지라며 현제 러시아에서는 모신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모신나강 덕분에 러시아는 경쟁국들과 같은 시기에 본격적인 볼트액션 소총 시대에 돌입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의 공업 수준이 떨어져서 생산의 상당 부분을 외주에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샤텔로 조병창, 미국의 레밍턴, 웨스팅하우스 등에서도 제작이 우어졌습니다. 여담으로 설계도가 러시아의 도량형인 아르신 방식으로 표기되어 업체들이 수치를 재계산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개발 과정과 자국 산업 수준의 불신 때문에 모신나강에 대한 일선의 최초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새롭게 표준이 된 7.62 × 54 mmR탄의 초기 불량률이 높았던 점도 나쁜 평판을 만드는 데 일조했지만 선입견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뿐이지 경쟁 소총과 비교했을 때 성능은 그다지 차이 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문제가 되었던 7.62 × 54 mmR탄도 실제로는 1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 사용 중일만큼 뛰어난 총탄입니다. 

모 시나강이 생각보다 좋은 소총이라는 사실은 한참 후인 제2차 대전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개발 당시에 군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최대한 구조를 단순화시킨 덕분에 모신나강은 어지간한 악조건에서도 무난히 작정했습니다. 

 

독소전쟁 초반이던 1941년 겨울에 윤활유가 얼어붙어 돌이 군의 무기는 작동하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모신나강은 같은 상황에서도 사격에 문제가 없었고 한마디로 기본에 충실한 소총이었던 것입니다. 

 

2. 모신나강의 특징 알아보기. 

모신나강의 외관은 기존에 사용하던 베르단과 유사하나 5발을 내부 탄창에 장찬 할 수 있어 연사 속도가 빨랐습니다. 

노리쇠 작동이 악명이 높았던 카르카노 소총 같은 사계도 있지만 사실 볼트 액션 소총은 기계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아 연사력은 수의 숙련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모신나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수많은 실전을 거치며 조준기, 노리쇠, 방아쇠 등의 개량이 이루어져서 성능이 꾸준히 향상되었습니다. 

 

전설적인 저격수인 시모 헤위헤. 핀란드산 모신나강인 M24를 사용했다. < 출처 : Public Domain >

모신나강은 총신이 상당히 긴 편이며 러시아식 스파이크 총검까지 달면 무려 병사들의 신장과 맞먹은 173cm를 넘길 정도여서 휴대가 불편했습니다. 

러시아 평원처럼 넓은 개활지에서 백 병정을 벌인 경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제1차 대전에서 일상화가 된 참호전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량이 이루어질수록 총신이 중어 들었는데 특히 1907년에 등장한 기병 대용 m1907 카빈은 총신이 28.9cm나 짧아졌습니다. 

 

볼트액션 소총은 사격의 정확도가 높습니다. 여기에  모신나강은 긴 총신 덕분에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때문에 전쟁사에 길이 빛날 많은 저격수들이 애용했습니다. 1939년 발발한 겨울 전쟁 당시에 3개월 동안 적군 542명을 사살한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인 헤위헤도 핀란드산 모 시너가 인 m24를 사용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게도 소련군은 자신들이 개발한 모신 나강에 게 치욕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3. 모신나강 제원

제작사 툴라 조병창 외
구경 7.62m
탄약 7.62×54mmR
급탄 5발 들이 스트리퍼 클립
전장 1,232mm
총열 730mm
중량 4kg
유효 사거리 500m
작동 방식 볼트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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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5월 26일 19시 10분, 영국 항공모함 아크 로열에서 15기의 소 피시 노 격기들이 어둠을 가르고 차례로 날아올랐습니다. 땅거미가 내려 않아 제대로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출결을 서두른 이유는 영국 함대가 추격 중인 한 척의 독일 전함 때문입니다. 

독일 비스마르크전함 이미지 

작전에 있었던 전투에서 손상을 입고 도주 중인 목표물이 만일 독일 공군의 엄호를 받을 수 있는 안전 제대로 진입하게 되면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할 수 있었기에 영국은 초조하였던 것입니다. 

22시 47분, 소드 피시들은 마침내 목표물을 발견하였고 지체 없이 공격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투시한 12발의 어뢰 중 불과 두발만이 선체를 가격하였지만 그것은 모든 운명을 결정한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한 발이 함미의 조타장치를 파회 하면서 독일 전함은 조정 불능에 빠졌고 그 틈을 타서 영국 함대가 몰려와 맹공을 가하여 명을 재촉시켜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뇌격기들의 투혼에 물려서 생을 가감한 주인공은 너무 유명한 독일의 거함 비스마르크였던 것입니다. 

 

1. 독일해군 제건에 나서다. 

독일은 전통적인 육군 강국이지만 한때 엄청난 해군을 보유하기도 하였습니다. 

1871년 통일을 이룬 후 대외 팽창을 본격 시도한 독일은 대대적으로 국력을 쏟아부어 해군력 확장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지난 300여 년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해 온 영국을 자극하여 치열한 건함 경쟁을 벌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독일은 세계 2위로 평가되는 강력한 해군력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을 넘을 수 없었던 독일 해군은 

1961년 유틀란트 해전을 끝으로 전쟁 중에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하게 되어 그동안 어렵게 만들어 놓은 무수한 군함들은 연합군의 전리품이 되거나 나포의 굴욕을 피하려 스스로 자침 시키면서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비스마르크 전경 이미지 

더불어 독일의 무장을 제한시켜 버린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독일 해군이 전성기 수준으로 되돌아가 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권을 획득한 히틀러가 1935년 독일의 재무장을 전격 선언하며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총 10만으로 제한받던 독일군은 기하급수적으로 능어 났고 이에 발맞추어 독일 해군도 재건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타 군에 비해 전력 확충이 쉽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단기간 내 전력을 높일 수 있는 육군, 공군과 달리 해군은 보유한 함정의 규모로 전력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함정 확보는 여타 무기에 비해 막대한 비용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 사상 최대의 전함의 탄생

히틀러는 툭하면 전쟁을 언급할 만큼 호전적으로 나섰습니다. 

세계는 공포에 떨었지만 돌일 해군은 준비가 부족하였습니다. 당장 영국에 맞설 충분한 함정의 확보가 현실적으로 어려웠으며 소수라고 지적으로 앞서는 거대 전함을 먼저 보유하는 것이 낮다고 판단하였다고 합니다. 

 

영국 해군의 전술상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일대일로 대결에 나섰을 때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전함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939년 2월 14일, 블롬-보스 조선소에서 있었던 진수식 모습으로 상부 구조물이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 이날 행사에 히틀러가 직접 참석하였을 만큼 전함 비스마르크에 대한 독일의 기대는 컸다. <출처: wikipedia>

1934년 독일은 기존 바이에른 급 전함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전함 설계에 착수한 후 펴면 적으로 예전에 영국과 합의하였던 보유 군함의 배수량 제한선인 39,000톤급 전함을 건조하는 것이라 공표하였고 처음부터 이를 따를 생각은 추호 없었습니다. 

 

독일의 목표는 당시 영국이 보유한 순양 전함 후드보다 더 큰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습니다.

1940년 8월24일,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이름으로 취역한 이 최신 전함의 만재 배수량은 무려 50,300톤이었습니다. 

 

이듬해 등장한 일본의 야마토에 밀려 1년 만에 세계 최대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았지만 비스마르크는 제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역에서 활약한 가잔 큰 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제1차대전 당시에 활약한 바이 예른 급 전함이 베이스가 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설계 사상은 시대에 뒤졌습니다. 포격전이나 대공 방어전 능력이 동시대 최신 전함에 비해 떨어진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제1차 대전 패전 후 20여 년간 독일이 건함과 관련한 새로운 노하우를 축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3. 괴물을 노리고 있던 영국 함대 

비스마르크가 취역한 1940년 8월 독일이 프랑스를 불과 7주 만에 정복하여 위세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다음 상대는 홀로 남은 섬나라 영국이었습니다. 

연일 사상 초유의 대 공습을 당하던 영국의 생명선을 전 세계 식민지에서 바다를 통해 본토로 공극 되던 수많은 물자들이었습니다. 

독일은 이를 차단해 버리면 영국은 머지않아 굴복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 생각대로 독일 해군에게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독일 함대가 대서양으로 나가 영국 함대와 외각으로 유인하는 동안 유보트들이 영국으로 향하는 수송선단을 공격하는 작전을 수립하였고 이를 라인 연습이라 칭하였습니다. 

독일은 이를 위해 그동안 금송아지처럼 아껴두었던 비스마르크 외에 중순양함 1척, 순양 전함 2척으로 구성된 강력한 함대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런데 1941년 5월 18일 막상 비스마르크가 대서양을 향해 포부도 당당히 출항하였을 때 단지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만 동행하였습니다. 

 

샤른호르스트와 그 아니 제나우가 고장으로 인하여 출동한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모든 내용을 극비에 부치었음에도 영국 정보망이 비스마르크의 충동을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독일은 발각을 우려해서 야음을 틈타 대서양으로 진입하려 하였을 만큼 조심스럽게 출동을 하였지만 처음부터 영국의 추격을 받았습니다. 

 

영국군 전체가 쫓아간 비스마르크 추격전 관련 동영상

그동안 묵묵히 괴물이 바다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영국 해군에게 즉시 출동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이때 동원된 영국 함대는 전함 5, 순양함 14척, 항공모함 2척, 구축함 21척이었습니다. 

지중해에서 작적을 펼치던 함정들까지 불렀을 만큼 의지가 강하였습니다. 5월 23일 일대를 순찰하던 영국의 순양함 써 포크와 노포크가 아이슬란드와 그리란드사이를 향해 중인 비스마르크를 발견하였지만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 내고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 경험이 많던 영국 해군은 써 포크와 노포크 만으로 비스마르크에 대적한다는 것이 만용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4. 대서양을 불태운 포성이 울리다. 

비스마르크의 위치가 확인되자 영국의 추격자들이 일대로 속속 집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5월 24일 새벽 5시 37분, 마침내 비스마르크와 이를 추격한 영국 함대의 역사적인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약 35km의 거리를 두고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구성된 영국 함대와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으로 이루어진 독일 함대가 마주 보고 포격을 가하면서 대서양 하늘이 붉게 불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승패는 순식간 결정되고 말았습니다. 

비스마르크의 다섯 번째 사격이 후드의 중아를 정확히 가격하면서 탄약고가 대 폭발하였습니다. 

순식간 두 동강 난 후드는 불과 3분 만에 침몰하였고 이때 총 1,418명의 승무원 중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이는 불과 3명뿐이었습니다. 

이런 참담한 순간을 옆에서 목격한 전함 르린스 오브 웨일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시도 큰 타격을 입고 줄 행랑을 치기 바빴습니다. 영국의 우려대로 비스마르크의 위력은 무지막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비스마르크가 전사에 기록한 유일한 전과였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지만 영국 해군은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교전 중 프린스 오므 웨일스가 가한 포격에 피격당하여 비스마르크도 더 이상 애초 부여받은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라인 연습 작전을 취소되었고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브레스트로 귀환이 결정되었습니다. 

단지 결과만 놓고 비스마르크가 승리한 것은 맞지만 이는 결코 원하던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상대를 발견하였을 때 독일 함대 사령관 군터 루 첸스 제독은 뒤에 있는 영구 해군 본진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당장 앞에 있는 먹잇감을 처단하는 것보다 영국 해군을 유리하게 몰고 다니면서 유보트가 활약할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섣부른 공격을 삼가였습니다. 

 

하지만 조급한 비스 마르크의 함장 에른 스트 린덴만은 엄명을 어기고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작전은 일주일 만에 취소되어 버렸습니다. 

 

5. 강렬하였지만 짧았던 생애를 마치다. 

영국은 남아 있는 모든 군함들을 긁어 모아 곧바로 추격에 나섰고 바로 이때 처음 언급한 소드 퓌스들의 공격을 받고 

조정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비스마르크는 영국 함대에 포위당하였습니다. 

하이에나 때에게 둘러싸인 병든 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5월 27일, 영국 함대는 3,000여 발의 포탄을 날렸고 그중 600여 발의 명중되자 결국 비스마르크는 명예로운 자침을 선택하였습니다. 

 

오전 10시 40분 거함은 심연을 빨려 들어갔고 2,206명의 승무원 중 결국 비스마르크는 명예로운 자침을 선택하였습니다. 

오전 10시 40분 거함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고 , 2,206명의 승무원 중 단 115명 만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해전은 경우에 따라 단 한 번의 교전으로 모든 것을 순식간 소모시켜 버릴 수 있는 거대한 도박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처럼 전쟁의 승패를 가를 결정적 싸움이라면 당연히 피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경우에 따라 회피하여야 할 용기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전력 구축에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영국 함대가 자신들보다 전력상 우위에 섰다고 확인된 이상 확전을 삼갈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던 비스마르크는 취역한 지 8개 워만에 그리고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지 불과 9일 만에 너무 용감하게 싸우다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후드와 일대일로 전력음 맞교환해버린 상황이었지만 영국은 이후에도 강력한 해군을 유지할 수 있던 반면 독일에게 비스마르크의 손실은 너무 컸습니다. 

결국 거함 비스마르크는 거함 거포 시대의 종언을 고한 것으로 그 짧고 굵었던 생애를 역사에 남겼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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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군의 특수전단이며 해군 작전사령부 직할 전단 중 하나로

해군의 특수전부대입니다. 

모체인 해군 수중 파괴대의 영문 약칭대로 통상 UDT(Underwater Demolition Term)라 부르기도 하며, 육해공 전천후 작전팀을 의미하는 UDT/SEAL(SEA, AIR, LAND)이라고도 칭합니다. 부대 청설 과정과 SEAL임 무확 잔 과정에서 나타나들 미 해군의 네이비 씰을 모델로, 매년 시행되는 부대원들의 유학이나 연합훈련 및 다양한 교류를 통해 발전하고 있습니다. 

해군 특수전단에 씰 대원들의 훈련 모습  출처 : 해군 특수전 전단

국군 내에서 개방적이고 선진화된 특수부대 중에도 가장 손에 꼽는 부대입니다. 

미군 특수전 부대에서 세계적으로 폴란드 GROM 등과 함께 가장 같이 작전을 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탑 티어급 부대임과 동시에 성공확률이 극히 낮은 선박 작전을 성공적으로 오나 수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부대입니다. 

 

1. 해군 UDT/SEAL

UDT/SEAL이라는 이름은 미 해군 NAVY SLEAL의 모체인 UDT를 벤치마킹하여 창설한 부대에 훗날 미 해군의 UDT가 발전하면 부여된 SEAL 임무를 덧 붇여 UDT.SEAL 이 된 것입니다. 

적 해산 정찰, 첩보 획득, 해상 정찰, 내륙 기습 폭파공작, 해안 장애물 제거,  뢰 탑색 및 소해, 유격 개 및 요인 호송, 특공대 철수 지원 및 수중파괴 임무를 시작되어 UDT 육해공을 가리지않는 전천후 침투, 암살, 직접 타격(DA), 대테러, 경호 임무가 추가되었습니다. (SEAL). 

 

특수전단의 본거지이자, 각종 교육, 훈련 시설을 갖추고 있는 진해에 주둔하며, 대부분의 인원이 속해 있는 제1 특전대 대가 주력부대입니다. 

동애 1함대의 제3 특전대와 평택 2함대 제5특전대대는 함대 기지 또는 각 함대가 관할하는 접 적애 역에서 벌어지는 긴급 상황에 대비하는 부대입니다. 

이외에도 인천을 비롯하여 접적해역 모처 등에도 소수의 해군 특전대원들이 파견 근무하고 있습니다. 

 

진해의 제1특전대대는 공중대, 해상대, 해중 대대 3개 작전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1대대 대원은 이 3개 작전대 중 하나에 소속되어 해당 임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합니다. 

장기복무자의 경우 몇년에 지나면 순환근무로 소속 작전대를 옮는 경우 많아 최소한 2개 이상의 제대를 설립합니다. 

피랍선박 대응훈련을 수행하기 위해 패스트로프 강하 후 진입하고 있는 UDT/SEAL 대원들 출처: 해군특수전단

폭발물 처리(EOD)와 해상 대테러 (MCT: Maritime Counter Terror)는 별도의 교육과정이 필요하며, 장 기자 간부는 해당 제대에 속하지 않더라도 자원하여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도 있습니다. 

 

EOD 및 MCT는 고도의 전문과정이라 폭발물 처리 대대와 특수 임부 대대에는 특전병이 배속되지 않습니다. 

특전병이 배속된다 하더라도 이는 작전요원으로 배속된 것이 아닙니다. 

참고로 해상 대테러(MCT) 교육의 경우, 청해부대 파견 전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교육과정입니다. 

폭발물 처리(EOD) 임부는 1968년 4월 22일 부여되었습니다. 임무 부여에 따른 사전작업으로 1966년 장교 1명, 부사관 2명이 미 해군 폭발물 처리 교유과정에 보내졌으며 최종적으로 19968년 5월 1일 폭발물 처리 대가 창설됨으로써 마무리되었습니다. 

 

폭발물 처리대 (EOD)를 2017년에 확대 개편하여 폭발물 처리 대대로 독립/승격, 현제는 대대급 부대입니다. 

이는 폭발물 처리 임무를 수행하는 단위부대 중 전군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부대입니다. 

 

2018년 9월 1일, 5 전단 55 전대 예하의 SSU가 특수전전단의 해난 구조전대로 편입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해군 UDT/SEAL 에서 육군 특전사처럼 지역 대라는 명칭을 썼지만 이후 작전 대라는 명칭을 바꿨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제1특전대대는 육군 특수전사령부 예하로 배속되고, 오키나와와 미국 본토에서 증원된 미국 특수부대들은 주한 미군 특수전사령부 예하로 배속됩니다. 

그리고 이 대한민국 특수전사령부 육군 특전사 및 여기에 배속된 해군 특수전전단 제1특전대대)와 주한미군 특전 사령부가 병합되어 연합 특수전사령부(CUWTF)를 구성합니다. 

 

2. UDT역사 알아보기.

50년대 초창기 UDT 청사는 1 부두에서 일본 해군이 쓰던 작은 목조건물에서 UDT태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취사장은 함대 사령부에 있어서 먼 거리를 매일 이동해야 하는 매우 불편함이 있었다고 하고 당시 1등 병조 9 하사) 월급이 (100원) 이등병조(중사) 월급 5400원이었다고 합니다. 

 

UDT는 별도 부식비가 나오는데 공군 조정사와 동일한 특급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시절 상사 월급보다 부식비를 더 많이 받았던 시절이라 윤택한 생활은 물론 매끼 고기가 목욕한 기름기 있는 구을 먹을 수 있었는데 모든 것이 UDT(ㅠ-9) 훈련이 지구 상에서 얼마나 혹독하고 힘들었는지 않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6.25 사변을 거치면서 미군으로부터 전달 된 특수작전부대 편성과 운영은 그대로 해군 특전부대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1952년 2월, 미 정철 정보대 (RIU.Reconnaissance lntelligence Unit)가 해체되면서 한국 해군에 정찰 정보대의 창설을 기획했다고 합니다. 

이에 한국 함대 정보국(NID-Naval lnteligence District)은 1952년 11월, 미 해군 특수전부대 UDT양성과정인 B-6 과정에 김성권 중 의릉 유학시켰습니다. 

 

당시 UDT청설 목적은 '요인 암살 및 첩보수집이었습니다. 김중위에 이어 1953년과 1954년 미 해군 B-6 과정에 유학한 11명으로 대한 미국 해군 UDT가 탄생됐습니다. 

 

1955년 5월 25일 한국 함대 B-6 교육과정이 발족됐고 같은 해 11월 9일 제1기 과정 26명을 수료시켜 대한민국 해군 UDT가 창설되었습니다. 

1955년 미국 UDT교육과정 수료사진

해군 지휘부에서는 한국 UDT가 창설된 전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시 미군의 전쟁수행 핵심 전략인 상률 작전을 실시하기 위해 적 해안 정찰, 첩보 획득, 해상 정찰, 내륙기습폭파공작, 해안 장애물 제거, 기뢰 탑색 및 소해, 유격대 및 요인 호송, 특공대 철수 지원 및 수중파괴 임무를 수행하며 큰 활약을 보인 미 해군 UDT를 모체로 하여 창성을 준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 해군 UDT의 선진 교육을 통한 작전개념 정립과 차기 국내에서 배출해야 될 UDT 요원들의 교관 확보와 더불어 임무수행에 필요한 장비 획득이 우선시 되어 1954년과 1955년 해군 내 국가기관과 군인정신이 투철하고 체력이 우수한 대원을 공개모집, 미 8군 주도의 영어시험을 거쳐 최종적으로 장교 3명과 사병 4명 등 총 7명을 최종 선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해군은 설발된 7명을 두 차례로 나누어 미 해군 UDT과정에 유학을 보냈고 장인표 대위 등 7명 전원이 소저의 미 해군 UDT과정을 수료하여 한국 해군 UDT가 탄생되었습니다. 

 

이들은 미 해군 UDT 교육과정에서 습득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UDT찰성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제2전단 예하 함정 교육대(STU)에서 UDT 모집을 공고하였습니다. 지원 자격에 별다른 조건은 없었고, 신체 건강한 해군 장병이면 지원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수료 후 특별대우와 미국 유학 기회 보장, 파격적인 주, 부식을 제공한다는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던 시절이라 해군 내에서 보급품이 제대로 조달되지 못했고 식사 및 의복 지원도 여의치 않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해군에서 제시한 조건은 해군 내에 최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모집공고 후 300여 명의 사병들이 지원하여 지원자들은 팔굽혀펴기, 달리기, 등 1차체력검정을 실시하고 다음날 해안대 방파제 앞 해상에서 2차로 수영 및 잠영 테스트를 거쳐 최종 80명이 선발되었습니다. 

 

 

1955년 8월 5일 UDT1기생이 입교하였고 해군의 최초 UDT 교육은 교육훈련에 필요한 가종 교재와 장비 등이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력 달련과 수영 위주로 제2 전단 예하 함정 교육대(향무) 주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훈령이 필요한 장비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지만 미 해군 UDT 교육과정과 유사한 내용을 구성하여 체력, 지옥주 훈련(극기주), 구보, 수영, 잠수 등의 다양한 교육훈련을 13주간 실시하였고 특히 이때 실시한 잠수 교육은 국내 잠수 역사상 최초로 기록되어 한국 잠수 역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매일 계속되는 강한 훈련에 생도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 해군 UDT과정을 수료한 7명의 교관들은 UDT의 혼과 열정을 심어 죽 위해 미 해군 UDT과정보다 더 강한 훈련으로 교육하였고 1955년 11월 9일 마침내 병 조장 이만수 등 26명은 대한민국 UDT1기로 배출되었습니다. 

 

1955년 11월 9일 UDT1기 수료식과 더불어 장인표 대위를 초대 지휘관으로 교관 7명과 UDT1기생 26명 등 총 33명으로 해군 함대 해변단 에하에 수중파괴대 (UDT)를 창설했습니다. 원래는 해군 현역 장병만을 대상으로 모집하였으나 1988년 이후부터는 민간 모병을 병행하였고, 현재는 미간 모병을 통한 입대자가 대부분입니다. 

 

오늘은 해군 특수전단에 관해 간략하게 알아보았는데 다음에는 UDT 하는 일과 훈련과정 등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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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이 되자 아프리카에도 독립을 쟁취하는 국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해 메만 17개국의 나락 유럽 열강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기운에 힘입어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은 악명 높은 식민 통치를 해 온 프라스에 대해 강력하게 투쟁했습니다. 

 

알제리 전쟁당시 군인들의 모습

1.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라고 해도 무방하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제1회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열리면서 아프리카 대륙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피어올랐습니다. 반둥 회의에서는 서양 열강의 지배를 받아왔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29개국 대표들이 모여서 식민주의 가 사라져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3년 후인 1958년 아프리카인들은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전체 아프리카 민족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가나의 독립을 이끌었던 콰메는 쿠마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해방과 연결되지 않는 우리의 독립은 무의미합니다. 

 

이 말에 힘입어 아프리카 각국의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960년에는 아프리카 대류의 17개 국가가 영국, 프랑스, 벨기에로 부터 독립했습니다. 

2. 프랑스, 무자비한 식민 통치를 하다.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한 알제리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면적이 넓은 나라입니다. 프랑스는 1830년대에 알제리를 식민지로 차지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800만 명의 알제리인 이슬람교도들을 지배하며 통치자고 군림했습니다. 

이들은 피에 누아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00만 명에 지나지 않는 피에 누아르들은 결코 알제리인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권리를 요구하는 알 제인 들을 잔혹하게 학살했습니다. 

 

피에 누아프들은 결코 알제리인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지 않았고 권리를 요구하는 알제리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했습니다. 피에 누아르들은 1945년 5월 8일 알제리 동부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에도 무차별 학살로 답했습니다. 

 

1900년대 초의 피에 누아르 가족

3. 알제리, 프랑스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다. 

알제리인들은 이제 투쟁만이 살 길이라고 생 갈했습니다. 

1947년부터 민주 자유 슬이 운동 소속의 다원들은 비밀리에 군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봉기를 준비했습니다.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봉기를 준비하였으나 지도자 대부분이 체포되어 실패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중심 인물인 벤 베라는 이집트의 카이로로 도망치 다음, 1954년에 다시 민족해방전선을 조직했습니다. 

봉기 이도 11월 1일로 잡았습니다. 민족해방전선은 독립을 하게 되면 알제리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독립전쟁 알제리 관련 동영상 자료첨부: 토크멘터리 전쟁사

 

4. 튀니스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프랑스와 싸우다. 

민족해방전선이 주도한 알제리 무장 투쟁은 무자비한 프랑스 군대의 진압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의 독립 투쟁은 이후 8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프랑스 내부에서는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을 지지하는 쪽과 알제리의 식민 지배를 주장하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민족해방전선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알제리에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족해방전선은 같은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알제리 곳곳에서 독립을 위한 폭탄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1958년, 민족 해방전선은 알제리와 국경 릉 접히고 있는 튀니스에 알제리 공화국 임시 정부를 세우고 더욱 조직적을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알제리 전쟁 관련 지도 이미지 

5. 프랑스, 알제리 독립을 승인하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프라스와 스위스의 국경 지대에 있는 에비앙에서 민족해방전선과 협상을 벌였습니다. 

이런 중에도 피에누아르는 무장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을 원하는 알제리인들을 무 참치 죽였습니다. 

 

드골 대통렫과 민족해방전선의 협상 결과에 따라 1962년 7월 1일, 알제리에서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투표 결과, 91%가 독립을 찬성하자 드골 대통령은 이틀 후인 7월 3일, 알제리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알제리 독립 전쟁은 거대 열강 프랑스에 대한 알제리 무장 해방전선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참고문헌: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 서울대학교 푸리급은 역사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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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전쟁사 중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전쟁인 베트남전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1960년에 결성된 남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 (NLF)이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북 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 배트 남정부와 이들을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입니다. 

베트남의 독 김을 위해 프라스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1954)과 구분해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하며 월남전이라고도 합니다. 

배트남 전쟁 핼리본 작전중인 미군 이미지&nbsp;

남 베트남 정부 붕괴된 1975년 4월 30일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북 베트남이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과 남 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이라는 성격을 띠었으나,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한 뒤에 전쟁은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 하에서 한국, 타이,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등이 참전한 국제적인 전쟁으로 비화되었으며, 미국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으로 군사개입의 범위를 넓히면서 전장도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한편 전쟁 중에 미국, 한국군에 의해 미라이 학살, 빈호아 학살, 퐁니 퐁넛 양민 학살 등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1. 베트남 전쟁의 배경 

베타남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조직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자 호찌민을 중심으로 1941년 5월 19일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뒤에 베트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그해 9월 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수립과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퐁 항구에 함포 사격을 가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배트남전쟁의 전재 지도 이미지&nbsp;

전쟁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 가 함락될 때까지 9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되어, 북의 17˚선을 경계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제네바 협정에서는 1956년 국제감사위원회의 감독 아래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으나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으오딘지엠은 선거 실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이 베트민의 토지개혁으로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회수하고, 친 가톨릭 정책을 펼쳐 민중의 반발을 샀습니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 초기에 카오다이나 호아하오등의 종교집단을 중심으로 시작된 봉기에  베트민의 구성원들이 합세하면서 1950년대 중반에는 이른바 베트콩이라고 불리는 게릴라 군사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지엠 정권은 1958년 반공법을 시행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으로 반발을 억누르려 했으나, 남베트남의 반란 세력은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을 결성해 정부군과 본격적으로 맞섰습니다. 

이들은 민족민주정부의 수립, 토지개혁, 평화통일, 중립 외고 등 10개 항을 강력으로 내세웠습니다. 

 

2. 베트남 전쟁의 경과 

지엠 정권에 대한 반발이 확대되자. 

1963년 즈엉반민 등은 미국의 방조 아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 디지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이렇든 남 베트남의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의 존슨 정부는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를 늘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1964년 8월 7일 북베트남에 폭격을 가해 전쟁을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했습니다. 

 미국은 그 뒤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백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부었으며, 약 55만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병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 등에 파병을 요청해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68년 1월 30일 음력 설날을 이요한 구정 대공세를 펼쳐 주요 도시들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요 시설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를 배경으로 1969년 6월 8일에는 남베트남 공화국 임시 혁명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은 곧바로 빼앗겼던 도시와 시설들을 탈환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군사개입의 중단을 내세운 닉슨이 대통령으로 단성 되었습니다. 

닉슨은 1969년 닉스 독트린(Nixon Dodrine)을 새로운 안보 외고 전략으로 내세우며 미군의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구정 대공세 이후인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북 베트남의 정전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1972년까지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1970년 이후에는 미국이 캄보디아의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장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972년 4월 남베트남 민족해방 전선이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 미국은 북베트남의 모든 항만에 기뢰를 부설하고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는 등 북베트남에 대한 공해를 더웅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배트남 전쟁 정리동영상

그러나 1972년 여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정전 협상이 비밀리에 재개되었고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경되었습니다. 

파리협정은 남북의 휴전과 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구성, 60일 안에 모든 미군의 철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미군은 남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북베트남과 미군 상이에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으며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규모를 크게 줄였고, 오일쇼크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1974년 1월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과 남 베트남 정부 간의 강등은 다시 무력 충돌로 확대되었습니다. 

 

결국 북 베트남은 1975년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해 4 울 30일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했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던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시 이공이 점령된 뒤 남베트남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이 통합해낸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습니다. 

 

3. 베트남 전쟁과 한국

한편,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입니다.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1만 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피해 등의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1999년에는 1만 6천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고엽제 제조사들인 미국의 다우케미컬과 몬산토 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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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육군에 현대화 지뢰탐지 체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MV-4 Mine Clearance System

MV -4 지뢰제거 체계는 육군 지상작전사령부 예하 특수 기동지원여단이 운용하고 있는 국내 최초의 무인 원격화 지뢰제거장비입니다. 

크로아티아 DOK-ING사의 제품으로 군은 2020년 4월 1대를 도입했습니다. 

수대가 추가 도입될 예정이며 운영자 실습 및 지뢰제거 훈련을 거쳐 2020년 후반기부터 임무 현장에 투 이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MV-4 지뢰제거로봇 시제품 시연 장면 이미지&amp;nbsp; 출처 : 국방일보

MV4는 승무원 없이 리모컨 운용자 제어 장치(OCU)로 조정하는 무인 및 원격화 지뢰제거 장비라는 점에서 종전의 지뢰제거장비와 다릅니다. 우리 군의 지뢰제거 작전이 수작업 위주에서 무인화, 원격화 장비 중심으로 발전하는 첫걸음이라는 평가할 수 있습니다. 

 

MV4전면부에는 작전 목적이 맞게 플레일(FLAIL)를 비롯해 Tilller, Roller, Gripper, Blade 등 다양한 도구 (Tool)를 탈부착해 둉도에 따라 운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뢰제거의 경우, 쇠뭉치들이 쇠사슬에 연결된 형태의 플레일을 고속 회정시키며 기동 하는 MV4는 땅속 30cm 깊이까지 매설된 지뢰를 폭파해 제거해 준다고 합니다. 차체에는 고강도 특수강이 적용돼 대인 지뢰는 물론 대전차 지뢰가 폭발해도 견딜 수 있습니다. 

 

업계 측 자료에 따르면 시간당 2200㎡의 지뢰제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ocu에 의한 원격조정 가능 거리는 평지의 경우 1㎞ 이상으로 매설된 지뢰가 폭발해도 운용 요원이 다칠 우려가 없습니다. 장비에 달린 카메라로 원거리에서도 작전 현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뢰제거작전을 수행하는 장병들의 안전성 확보는  물론, 작전의 완전성, 효율성 강화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무게 5.1톤에 175~250마력의 엔진으로 기동력이 우수하다하며 가로 50㎝, 깊이 30㎝의 도랑, 세로 30㎝ 정도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으며 한지점에서 360˚ 회전할 수 있습니다. 

 

MV4는 평시 지뢰제거 작전은 물론 전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지뢰 매설 예상 지역을 MV4와 동일 모델인 M160을 운용하는 미군이 이라크를 비롯한 실전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한 전술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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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디펜스가 독일 GDELS와 기술 협력하여 생산하는 장비 2027년까지 총사업비 5,300억 원 투입하여 제작할 장비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상에서 최고 80km/h(비포장 35km/h)로 달릴 수 있는 M3. 사진출처:GDELS 홈페이지

자주 도하장비는 별도의 장비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땅과 하천에서 기동 하며 배 (문교)가 되거나 다리(부교)로 연결해 전차나 장갑차 등을 신속히 도하시킬 수 있는 수륙양용의 전투 지원 장비입니다. 

 

육군의 기계화 부대의 공격 속도를 유지, 보장할 수 있는 신속한 도하작전 등 미래 지상작전의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장비로 꼽혀왔습니다. 

 

현용 리본부교(RBS·Ribbon Bridge System)는 다리가 될 교절을 차량이나 헬기로 강상으로 옮겨야 하고 진수 후에는 역시 차량에 실어 이동시킨 교량가설단정(BEB·Bridge Erecion Boat)을 이용해야 하는 등 가설 속도가 현대 기동전 요구치에 미치지 못하고 생존성에도 제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군은 이같은 제한점을 극복하기 위해 자주 도하장비를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2016년 9월 30일 제96회 방위사업 추진 위원회에서는 해외 엄체와의 기술 협력 생산 방식을 획득하고자 하는 자주 도하장비 사어 추진 기본 전략을 심의 의결하였고 이에  현대로템이 영국 BAE 시스템즈(BAE Systems)와 터키 FNSS가 공동 개발한 AAAB(Armored Amphibious Assault Bridge)를 개량 국산화 생산하는 방안을 한화 디팬스는 독이르이 GDELS(Gemeral Dynamics European Land Systhems)가 개발한 M3를 기반으로 국산화하는 M3K 장비를 각각 제안하였습니다. 

 

2020년 12월 방위사업청은 자주 도하장비를 개발 , 생산할 우선 협상대상자로 한화 디팬스를 선정한 후 2021년 6월 21일 제137회 방위 사어 추진 위원회에서 기술협력 생산 범위 및 연도별 생산계획 등이 포함된 획득계획을 심의 의결했습니다. 

 

자주도하장비 관련 동영상

이에 2021년 8월 13일 방위사업청과 한화 디펜스는 사업 계약을 정식으로 체결, 시술 협력 생산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습니다. 

기술 협력 생산(Technology Cooperaation Production)이란 외국에서 개발되어 싱 용화 되었거나 실용화를 위하여 시험 평가한 결과, 전투용 적합으로 판단되어 생산 중인 무기 체계를 외국의 원 제작 업체와 기술 협력하여 생산 권한을 양도 및 대여 또는 지원 하에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연구개발에서의 기술협력과는 다른 성격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M3K는 돌일 아이제 베르크 카이저슬라우테른 이 최초 설계 후 GDELS(Genaral Dynamics European Land Systems)가 생산한 M3 자주 도하장비( Amphibious bridging and ferrying, Amphibious Vehicle)를 한화디팬가 기술협력 생산 방식으로 국산화할 자주 도하 체계입니다. 총사 어비 5,300억 원 투입될 예정입니다. 

 

이에 딸 한화 디펜스는 자주 도하장비(M3 기종) 기술을 이 저 받아 국내에서 2027년까지 한국형 자주 도하장비를 전력화할 예정이라고 방위사업청은 8월 13일 보도자료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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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기관총의 아버지 격인 맥심 기관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14년 9월 프랑스 마른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독일의 맹공을 간신히 막아낸 후 전선의 곳곳에는 상대를 견제하기 위한 참호가 깊게 파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치 상황은 잠시고 전쟁 초기의 치열한 기동전이 곧바로 재현될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 파인 참호들은 서로 연결 디어 하나의 거대한 방어 진지로 변하였고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총기발물관에 있는 초기 맥심기관총 이미지

방어 글 위한 구조물인 참호는 전선에 고착화돼었음을 의미하였고 이때부터 전재의 대부분은 양측이 만들어놓은 참호 선사에서 벌여졌습니다. 장장 4년 동안 수백만의 양측 병사들이 이곳에서 사상당했을 정도로 싸움은 참혹했습니다. 

 

전투에 많은 무기들이 동원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기관총은 최고의 살인 기계였습니다. 그러데 공교롭게도 독일군과 연합국 모두 같은 기관총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로 모든 기관총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맥심 기관총이었던 것입니다. 

 

1. 맥심 기관총의 개발 역사

기관총은 오늘 반정부 무잔 조직이나 테러 단체들도 갖추고 있는 무기입니다. 가장 커다란 수요자로 할 수 있는 구에서 분다나 소대 같은 가장 말단 소부대의 필수 무장입니다. 

그만큼 흔하기도 한 데다 소총의 위력이 향상되고 다양한 종류의 휴대용 중화 기기 등장하면서 종종 위력을 간과하는 경우마저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익숙해서 그럴 뿐이지 기관총은 탄생 이후 지금까지 보병용으로 대단한 화력 투사 수단입니다. 

기관총은 한마디로 역사를 바꾼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 즉 화기의 등장으로 역사가 크게 바뀌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많이들 간과하자만 그러한 화기의 시대에서도 19세 게 후반에 등장한 기관총은 커다란 변곡점이었습니다. 단발로 사격하는 기존 총과 연사가 가능한 기관총의 위력 차이는 그야말로 대단했습니다. 

 

인류에게는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이른바 대량 살상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습니다. 

맥심은 그러한 엄청난 역사를 이끈 최초의 기관총이 입니다. 맥심 이전에도 캐틀링 건처럼 연사가 가능한 총들이 존재했기에 범위를 어디까지로 하냐에 따라 기관총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탄생 당시에 맥심과 연사가 가능한 여타 총기와의 기술적 차이는 상이했습니다. 

맥심기관총 개발자 하이람 맥심이 기관총 앞에서 찍은 이미지

한마디로 맥심은 형제 사용 중인 모든 기관총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1866년 친구를 따라 우연히 사격장에 방문한 하이람 맥심 은 사격할 때 발생하는 충격 때문에 사수가 흔들리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이를 에너지로 이용하면 노리쇠를 일일이 조작하지 않고도 탄환을 자동으로 급탄 하고 발사가 가능한 총을 만등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동화된 총이 있다면 적은 병력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발화할 수 있을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83년에 반동을 이용하는 자동화된 총의 특허를 출원했고 이듬해 프로토 타입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총을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맥심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발가에는 장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자동화되었으므로 사수는 오로지 목표물만 바라보고 사격하면 됩니다. 

 

분당 최대 650발의 속도는 숙련된 30만 명의 사수가 발사하는 볼트액션 소총의 화력과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전문가라면 맥심의 위력을 충분히 알았지만 여려 이유로 판매는 부진했습니다. 너무 무거운 데다 이동수단의 성능이 떨어지던 시기였기에 용도가 제한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가격이 비싸서 차라리 소총을 더 많이 투입하는 것이 호율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기관총이나 자동화된 소총의 장점이 입증된 20세 게 중반까지도 탄의 낭비가 심하다고 생각했을 저도였으니 생산력이 떨어지던 당시에는 더했습니다. 

 

기대를 많인 가졌던 미군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실망한 그는 영국으로 이주해서 판촉에 나섰습니다. 

병력이 부족해 주로 요새를 거점 삼아 군을 운용하는 식민지 정부 등이 관심을 갖고 시험 삼아 구입했고 1888년 11월, 시에라리온에서 원주민 탄압에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착 군 당국에서는 이 혁신적인 화기에 대해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아 맥심은 판매를 위해 직접 유럽 각국을 돌며 시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러던 1893년 짐바브웨이에서 원주민 저항이 벌어졌을 때 4 정의 맥심을 보유한 50여 명의 경비대가 무려 4천여 명의 원주민의 공격을 막아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마디로 학살이었고 이것은 제1차 대전의 비극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습니다. 그러나 맥심 때문이 아니라 유럽인인 뛰어난 반면 식민지인들이 열등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착각해서 정착 주문량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을 때 도움을 준 이가 현재도 세계적인 방산 업체인 빅커스-암스트롱의 전신인 빅커스의 설립자의 아들인 알버트 빅커스입니다. 기관총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의 도움으로 1897년 맥심 총기사가 설림 되어 보다 체계 적으로 생산과 판매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국군이 제식 무기로 도입하자 자극을 받을 독일과 러시아도 도입에 나섰습니다. 

성능에 만족한 이들은 직도입뿐 아니라 면허 생산에 나서 자체 개량도 시도했습니다. 덕분에 빅커스, MG08, PM1910 같은 파생형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각국 기관총 역사의 중간 시조가 되었습니다. 

 

1905년 발발한 러일 전쟁에서 상당한 전과를 남겼고 이후 제1차 대전에서는 최고의 상상 무기라는 명성을 날리며 이후 세계사를 바꾼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맥심은 본격적인 기관총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맥심기관총 설명 영상

2. 맥심 기관총 특징

맥심이 새로운 역사를 개막한 기관총이나 단점도 많았습니다. 일단 무겁고 부피가 커서 다루기가 어려웠습니다. 

거기에다 최초에는 공랭식이었으나 연사력을 늘리기 위해 수랭식으로 바뀌면서 무개가 더욱 늘었습니다. 

MG08의 경우는 모든 부속 장비와 소모품을 포함해 총 69kg에 이르렀습니다. 가뜩이나 20세기 초에 이동 수단의 성능이 떨어져 주로 진지에 거치해 놓고 방어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보통 4명에서 6명으로 구송된 팀이 운영했습니다. 사격 시에는 사수에 조수만으로도 가동할 수 있지만 옮기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국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중화기 취급을 받으며 대개 독립 중대에서 운용했습니다. 분당 최대 600발의 연사력은 오늘날 기관총에 비해서는 떨어지나 기관총의 목적이 지역 제압이니 전투를 벌이는 데 충분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작은 생각에서 출발한 총기사의 이정표

제1차 대전을 계기로 많이 부각되었지만 사실 맥심 기관총은 당시 처음 등장한 신무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를 만들어낸 하이람 맥심이 1883년에 특허를 출원하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무기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 태생으로 영국으로 귀하 한 발명가 맥심은 사격 시에 발생하는 반동을 이용하면 탄환을 자동으로 재장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아이디어는 총기 역사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당시 대부부 느이 총은 수동으로 재장전하는 형태였으므로 연사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투에 많은 인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계속 방아쇠를 당겨 쏘는 반자동 총이나 캐틀링건처럼 임부 연사가 가능한 총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수동식이었고 사용이 불편하였습니다. 

 

연구 끝에 맥심은 새로운 개념의 총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고 이를 맥심 기관총이라 명명하였습니다. 

발사에서 장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자동화되었으므로 사수는 오로지 목표물만 바라보고 사격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맥심 기관총은 현대식 자동화기 또는 기관총의 호시로 보는데, 이전의 개틀링건 방식과 달리 탄띠 급탄식을 채택하여 분당 최대 650발의 발사속도를 가졌습니다. 이는 숙련된 50명의 사수가 발사하는 소총의 하력과 맞먹는 것이었을 만큼 당시 에는 상상하기 힘든 경이적인 수준이었습니다. 

 

 

4. 이미 시현돼 된 무서운 화력에 맥심 기관총

처음에는 개인이나 식민지 정부 등에서 시험 삼아 구입하였고 1888년 11월,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에라리온에서 원주민 탄압에 처음 상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착 군 당국에서는 이혁 신적인 화기에 대해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아 맥심은 판매를 위해 직접 유럽 각국을 돌며 시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시범을 본 많은 이들은 빠른 발사 속도에 경악하며 관심을 표명하였고 속속 구매의사를 보였지만 정착 주문량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1889년 최초로 도입하였지만 대량 채용을 거부하였던 영구 군의 생각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관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맥심 기관총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적어도 5~6명의 인원이 필요했고 수랭식 시스템을 채용하였음에도 종종 과열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따라서 강력한 화력을 인정하지만 일선에서 보병들이 사용하기에는 곤란한 무기로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들이 속속 등장하였습니다. 1893년 짐바브웨에서 원주민의 항거가 벌어졌는데 4 정의 맥심 기관총을 보유한 불과 50여 명의 경비대가 무려 4천여 명의 원주민의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한마디로 학살이었고 이것은 제1차 대잔의 비극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습니다. 

 

특히 정규전이었던 1905년 러일전쟁 당시에 1 정의 러시아군 맥심 기관총에 일본군 1개 대대가 도륙되기도 했습니다. 

러일전쟁의 여순 전투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을 도륙한 러시아군의 사진. 이 전투는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일본이 결국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일본 군의 인명피해는 러시아 군보다 훨씬 컸다. 

5. 피아 모두가 채택한 기관총

동 시기에 맥심 기관총의 효용성을 깨달은 여러 나라들이 라이선스 제작에 들어갔는데 그중 가장 앞장섰던 나라가 독일이었습니다. 

MG08 스팬 다 우어라 명명된 독일형 맥심 기관총은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썰매 모양의 거치 대등을 장착하는 식으로 일부 개조가 이루어졌지만 기본적인 사양은 동일하였습니다. 그 격과 1914년 제1차 대전 발발 당시에 독일은 총 10 만전의 맥심 기관총을 장비한 최대 보유국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군사대국인 러시아군도 같은 방식으로 맥심 기관총을 라이선시 생산하였습니다. 

러시아용은 별도의 제식 소총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약실이 개조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양 개조로 가장 무거웠던 맥심 기관총으로 물렸는데 이것이 PM M1905기관총입니다. 

 

제1차 대전 당시에는 이를 좀 더 개량한 PM M1910이 대량 사용되었는데 이후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에 공급되어 우리와 악연이 있습니다. 

맥심의 모국이기도 했던 영국도 애용하였지만 제1차 대전 직전에 보병대 대당 2정만 배 치아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경쟁국에 비해 홀대를 받았다고 할 수 도 있습니다. 영국군이 제식 화한 모델은 맥심 기관총의 가장 큰 단점인 무개를 반 정도로 대폭 중린 비커스 기관총이었습니다. 

 

현대식 기관총과 비교한다면 이것 또한 무거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여타 국가의 맥심 기관총과 비교한다면 훨씬 다루기 용이하였습니다. 

 

6. 맥심 기관총이 지배한 죽음의 경쟁

1914년 인류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지옥을 현실에 만들어내었습니다.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희생이 그토록 컸던 점은 무기의 발달에 비해 전쟁을 지휘하는 이들의 생각이 너무 고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나폴 레오 시대의 공격 제일 사고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돌격명령을 받고 적진을 향해 뛰쳐나간 병사들이 상대편 참호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속수무책 당하는 것이 전선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기갑장비를 이용하여 참호선을 돌파하는 작전을 펼 피겠지만 당시만 해도 포격 후 보병이 돌격하는 방식 외에 마땅히 구사할 전술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포탄의 비를 퍼부어도 상대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고 이렇게 살아남은 방어자들은 포연을 헤치고 돌격하는 공격자가 사거리 안 안에서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조금씩 다를 뿐인 맥심 기관총에 의해서 무명의 병사들은 하염없이 숨져갔습니다. 

맥심 기관총의 영국판 경량형,비커스 기관총을 쏘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영국군 병사

참호를 파고 전선이 고 차화 되자 맥심 기관초의 위력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너무 무거워 공격 시에는 재빠르게 옮겨 다니며 지원할 수 없었지만 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나섰을 때는 다가오는 적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알을 퍼부어대는 데 적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렇게 참호전과 더불어 맥심 기관총은 제1차 세계대전의 학살을 뜻하는 대명사를 바뀌어 갔습니다. 바로 죽음의 경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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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은 우리나라가 개발한 휴대용 대공 미사일입니다. 

2인 1조로 운용되며 작고 가벼워 개별적인 휴대가 가능한 점이 특징입니다. 

 

신궁은' 새로운 활'이란 특을 가진 신궁은 저고도로 침투하는 적 항공기를 요결 하는데 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이밖에 최근에는 30mm 자주 대공포인 비호에도 장착되고 있으며, 신궁을 장착한 비호는 비호 복합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lig넥스원이 개발한 신궁 이미지 

1. 휴대용 대공무기의 등장 시기 -2차 세계 대전부터

2차 세계 대전이 맙 바지에 달하던 1944년 당시 독일은 연합국에 하늘을 빼앗긴 채 힘겨운 전쟁이 벌이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루프트바패 즉 독일 공군 군은 영합 군의 공중전력에 밀려 맥을 못 추었습니다.  제공권이 상시 되자 지상군은 전투기와 폭격기의 공격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습니다. 

 

독일 골군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돌일 육군은 판처 파우스트 대전차 로켓포 같은 보병이 휴대하면서 적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 신무기를 개발하게 됩니다. 

 

플리 파우스트로 알려진 휴대용 대공무기는, 지금의 휴대용 대공 미사일과 달리 유도 기능이 없었습니다. 대신 요격 확률을 높이기 위해 20mm 로켓 발사관을 여러 개 묶어 발사하는 다연장 로켓포의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1만 여기의 발사기와 400만 발의 로켓탄이 주문되었지만, 제대로 생산되지 못했고 극히 일부가 전장에서 사용되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판저파우스와 사용법을 설명하는 독일군 이미지 

2. 소련의 아프간 철군을 이끈 스팅어 미사일

1960년대부터 적외선 호밍유도 방식을 채용한 휴대용 대공 미사일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미군의 레드아이와 소련의 SA-7은 제1세대 휴대용 대공미사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니만 미사일이 장창 된 탐색기의 기술적 한계로, 적기를 조준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고 미사일이 적기를 향해 발사되어도 플레이 같은 미사일 기만체에 쉽게 교란당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스팅어미사일 발사 이미지 

 

그러나 제2세대 휴대용 대공 미사일은 탐색기의 선의 향상되면서, 전방위 조준이 가능해졌고 미사일 기만체에 대한 대응능력도 높아졌습니다. 

대표적인 제2세대 휴대용 대공 미사일인 스팅어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다시 놀라운 전과를 기록하였습니다. 

1993년 발간된 미 육군 방공포병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으로 부터 스팅어를 제공받은 무자헤딘은 340여 회의 교전 끝에 260여 대의 소련군 항공기를 격추한 것으로 알려지지고 있습니다. 

 

스팅어를 제공받은 무자헤딘은 340여 회의 교전 끝에 260여 대의 소련군 항공기를 격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스팅어로 인해 소련군은 막대한 항공기 손실을 입어야 했고, 결구 1989년 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3. 1995년부터 개발이 시작된 한국형 휴대용 대공 미사일 

신궁이 개발되기 전까지 우리 군은 외국산 휴대용 대공 미사일을 사용해왔습니다. 

성능은 뛰어났지만 정비 및 유지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결국 외화절감 및 기술 확보 차원에서 1995년부터 한국형 휴대용 대공 미사일 개발에 들어가게 됩니다. 

 

신궁발사장면 영상

1995년부터 1998년까지 국방과 항 연구소를 중심으로 탐색개발이 이루어졌고 이후 체계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개발이 완료될 때 카지 신중은 수십 차례의 비행 시업을 거쳤습니다. 

또한 전국 산악지역을 돌며 적합성 시험을 수행하고 실제 군 운용 환경에서 철저한 검증을 마쳤습니다. 

시험을 위해서 1,000m가 넘는 험준한 산을 올라야 했는데, 차량이 오르지 못하자 연구원들이 직접 시험용 장비를 정상까지 운반해야 했습니다. 악천후로 표적기가 비행하지 못해 온종일 하늘만 쳐다보다, 허탕 치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4. 높은 명줄률을 자랑하다. 

LIG 넥스원이 생산 중인 신궁은 항공기의 적외선 호밍 유도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발사 후 망각 개념에 의해 운용된다고 합니다. 특히 2색 탐색기를 적용함으로써 플레어를 투하하는 전투기에 대한 대응능력이 대단히 우수하다 합니다. 이밖에 비행간 비례 항법과 표적 유도방식을 적용, 기존 적외선 호밍유도 미사일이 항공기 동체를 공격하기 전, 항공기 후미에서 나오는 배기 열원을 공격하는 단점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또한 근접신관 기능을 통해 미사일이 목표물의 일정 거리 내에 접근하면 폭발과 함께 720여 개의 파편이 발생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고 합니다. 

신궁발사장면과 추격시스템설명 이미지 

2중 추력 방식을 채택한 신궁은 최대 비행속도가 마하 2 이상으로 헬기는 물론 각종 고정익기까지 격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이밖에 미사일 전방에는 공기의 저항을 줄이기 위한 항력 감쇠기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첨단기술이 적요된 신궁은 시험사격을 통해 높은 명중률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스팅어와 러시아의 이글라를 훨씬 능가하는 명줄률로 알려져 있습니다. 

 

5. 완벽한 국산화를 이룬 신궁

신궁은 무기체계의 독창성과 우수한 성능으로 인해 많은 국가에서 수출 문의가 들어왔었습니다. 그란 수출 추진과정에서 미사일 탐색기 개발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신궁 구성품 대부분은 국산화되었지만 탐색기는 외국 부품을 사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수출을 하려면 원천기술 보유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전 자광 할 조립체의 부품 가격이 해마다 급상승해, 수입 탐색기는 신궁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2010년 10월부터 신궁 한국형 탐색기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신궁 한국형 탐색기는 지난 5월 궁방 기술 품질 윈 주관으로 열린 사결 시험에서 성공적으로 표적을 격추시켰습니다. 

향후 생산되는 신궁은 한국형 탐색기를 장착할 예정이며, 50% 전후에 머무르던 국산화율이 955 이상 향상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부터 육, 해, 공군과 해병대 각급 부대에 전력화되기 시작한 신궁은 , 2018년까지 배치가 완료될 예정입니다. 

 

6. 신궁 휴대용 대공 미사일 제원

  1. 사거리 - 고도 5~3km
  2. 명중률- 70% 이상
  3. 유도방식- 2색 적외선 탐색기
  4. 신관 충격- 근접, 탄 중량 15.kg
  5. 탄 직경 80mm
  6. 발사 방식 - 거치식
  7. 단가 -1억 8천만 원(2005년 기준)
  8. 신전 배치 - 2005년
  9. 제조사-LIG넥스원 

참고문헌: LIG넥스원, 국방기술 품질원, 국방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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