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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전의 교훈에서 태어난 화력 덕후로 개발 배경과 장비의 특징과 제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BMPT-72 터미네이터 2 화력지원 차량 이미지

 

1. BMPT-72 터미네이터 2 개발 역사 

1991년 12월 8일, 소련의 핵심 국가인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3국의 정상들은 벨라루스에 위치한 벨로베슈 스카야 숲 속 별장에 모여 소련의 해체하고 느슨한 형태의 국가 모임인 독립국가연합(CIS)을 찰 설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18일 만인 1991년 12월 26일, 소련 최고회의는 소련의 공식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미국과 70년 가까이 세계 패군을 두고 다투었던 소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소련의 해체와 함께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었던 수많은 지역들이 독립을 선언하는 대혼란의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체첸 지방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91년 체첸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하르 두다예프가 단선되면서 체첸-잉구 시 공화국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했고 1992년 7월에 러시아 최고의회는 체첸 잉구 시 공화국의 분리를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반 두다예프 세력이 잠정 평의회 의회를 구성하면서 모스크바 당국에 자산들을 체첸의 합법적 권력 기관으로 인정해 줄 넋을 요 출하면서 체첸 정부군과 체첸 반정부군 간의 내전이 발발했고, 이를 빌미로 러시아 대통력 예친은 체첸 내전 당사자들에게 휴전을 촉구하면서 불응 시 파병을 할 것을 시사했습니다. 

 

러시아 체첸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던 이면에는 석유와 가스가 대량으로 매장 죄어 있는 카스피해 저지대를 이용할 수 있는 경제적 이점과 러시아 제2의 석유 정재 단지가 위치한 전력적 중요성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1994년 2월 체결된 타타르스탄 협정에 대한 경계심 고조와 체첸의 정국이 6개 정파로 갈라져서 국론이 분열된 상황에 러시아는 지금이 침공의 호기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이전 헝가리에서의 경험처럼 전격전으로 단기간에 체첸 정부를 전복하고 친 러시아 정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상황 판단하에 1995년 12월 11일 오전 7시, 러시아군은 3개 방향에서 체첸을 공격했습니다. 

 

이름바 제1차 체첸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연방군 총참모부의 작전 지침에 명기된 임무는 단 하나였습니다. 불법 무장 단체의 무장 해제와 헌법 질서의 복원, 즉 두다예프 정부의 체첸군을 무장 해제하고 친 러시아 헌법 질서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러시아군은 옐친 대통령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크렘린으로부터 전략 지침을 수령 후 신속히 동원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전쟁에 필요한 제반 준비는 매우 미흡했고 '체첸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전략 상황을 가정했으며 씨족 중심의 높은 단결력을 보이는 체첸인들의 저항 정신을 무시했습니다. 여기에 소련 붕괴 후 이제 막 탄생한 신생국 러시아의 전투준비태세는 이보다 최악일 수가 없었습니다. 

 

심각한 경제 불황으로 창끝부대 지휘관 및 지화자 임무를 수행할 젊은 장교 155,00명이 자진하여 전역했으며 전쟁 당해 연도인 1995년에는 사관생도 50%가 임관 전에 자퇴할 정도로 정신 상태는 썩어있었습니다. 

T-72 전차와 T-80 전차의 폭발 반응 장갑 내부는 화약이 충전된 경우보다 벽돌이 들었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장비의 관리 역시 부실했습니다. 

 

 

BMPT-72 터미네이터 2 관련 동영상 

여러모로 전쟁을 시작하기엔 불비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지적한 안일한 상황 판단에 기인하여 국방군, 내부군, 스페츠나츠로 구성된 38,000명의 병력과 전차 80대 장감차 208대, 포 182문, 공격헬기 90대로 구성된 군단급 부대를 구성, 자신 있게 그로즈니의 지옥 속으로 행군했은 나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체첸군이 러시아 기갑장비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대응한 것입니다. 체첸군은 러시아 전차 T-72와 T-80이 포탑의 피탄 면적을 줄이기 위해 포탑 크기를 작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은 포탑의 크기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포신을 올릴 수 있는 앙각이 적었고 이문제는 결국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T-72는 걸프전에서 증명 도니 것처럼 장갑 방호력과 설계에 많은 문제가 노출된 장비였습니다. 

 

그로즈니를 점령하기 위해 투입된 많은 부대가 체첸군 시가전 전술에 휘말려서 대량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투입된 부대 중 피해가 가장 큰 부대는 제131 차량화 소총 여단이었습니다. 그로즈니 역 일대에서 전투를 실시한 제131 차량화 소총 여단은 전토에서 전차 26대 중 20대, 장갑차 120대 중 102대, 야전 방공시스템 퉁구스카 6대 모두를 잃었으며 여단장 사빈 대령을 포함한 병력 1,500명이 죽거나 부상, 78명이 포로가 되면서 문자 그대로 전멸해 버렸습니다. 비단 제131 차량화 소충 여단뿐 아니라 그로즈니 점령 작전 1일 차에 투입된 러시아군은 체첸군과 체첸 시민들의 매복 공격인 방어선 없는 방어 전술에 철저히 기습당했고 서부 군대 집단의 제19기보 사단의 33 소총 연대(1개 대대로 구송되어 있었습니다.)는 전체 20%에 불과한 병사 24명과 장교 몇 명만 살아남을 정도로 철저히 괴명되었습니다. 

 

러시 라군의 시가전 피해가 이렇게 컸던 원인에는 무려 20%에 달하는 전투장비 기능 고장으로 대표되는 안일한 전쟁 준비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체첸군이 러시아 기갑장비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대응한 시가전 전술에 있었습니다. 

 

체첸군은 러시아 T-72나 T-80 전차들이 포신을 올려 대응 사격할 수 없는 근거리에 위치한 건물의 2층이나 3층에서 RPG를 전차의 상부 장갑을 향해 발사했습니다. 

반응 장갑이 장착된 전차는 대물 저격총으로 사격, 반응 장갑을 폭파한 후 대전차 로켓을 사격했습니다. 전차가 격파되면서 전차의 되를 따라오던 BTR 장갑차들은 사방에서 난사되는 총탄과 대전차포에 무력하게 격파되었고 기갑차량에서 하차한 보병들은 체첸 시민들에게 폭행당하거나 소화기로 공격을 받아 전사하기 일쑤였습니다. 

 

이후 러시아군은 공군의 무차별 항공 폭격으로 그로즈니 전체를 평탄화시키면서 전진했지만, 너무도 무력하게 격파당한 지상군 장비는 러시아군 지휘부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시가전에서 전차를 화력으로 지원할 수 있으며 장갑차보다 강력한 방호력을 갖춘 화력지원 전투차량의 필요성을 절감한 러시아 총참모부는 우랄 바 본 자 보드에 해당 차량의 개발을 요구, BMPT 터미네이터 전차 화력지원 전투차량을 개발하게 됩니다. 

 

 

 

2.BMPT-72 터미네이터 2 특징 알아보기 

러시아어: 전차 지원 전투차량 약자인 BMPT는 시가전을 종결한다는 뜻으로 터미네이터는 별칭 지어졌습니다. 

2000년 7월 러시아 니즈니 타길 스베르들 로프 주에서 실시된 우랄 제2차 군비 및 군사 장비 전시회에서 최초 공개되었으며 2005년 러시아군에 전력화되었습니다. BMPT는 그로즈니 전투에서의 교훈을 적용하여 T-72 전차의 차체에 대 보병 화력을 집중적으로 장착했으며 4발의 대전차 미사일을 장착, 원거리에서 대전차 교전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전차의 차체를 활용했으므로 당연하게도 장갑차보다 차체 방호력 또한 준수한 편이었습니다. 

 

차체 양측면에는 AG-17D 30mm 고속 유타 포 사수를 배치, 총 5명의 승무원을 운용합니다.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먼저 차체 분석으로, T-72 전차의 차체를 적용, BTR 계역의 장갑차보단 강한 방호력을 제공합니다. 차체 전면과 측면에 다목적 모듈식 폭발 장갑을 장착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존 T-72 전차의 차체 내부를 개조하여 좌, 우측에 AG-17D 30mm 고속 유타 포 사수를 배치합니다. 

 

BMPT -72 터미네이터 2의 엔진은 V-84MS 엔진을 채용, 12기 통의 수랭식 디젤 엔진을 채용했으며 뛰어난 내구력을 보입니다. 이 엔진은 한랭 지역과 먼지가 많은 사막 지역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작동이 가능하며 840HP의 출력을 낼 수 있습니다. 

 

파워트레인은 7개의 전진 기어와 후진 기어로 구성된 변속기와 동축 드라이브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BMPT-14 터미네이터 3에 이르면 V-92S2 디젤엔진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차체 후방에는 5kw 또는 8kw의 전력을 생산하는 DGU 5-P27.5-VM1 디젤 발전기가 배치되어 있어 시가전에서 엔진이 피격당한 비상 상황에서 포탑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차체는 토션 바 서스펜션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으며 도로사에서 최고 속도 시속 60km, 참호 극복 능력 2,8m의 성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항속 거리는 연비 주행 시 최대 550km의 성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BMPT-72 터미네이터 2의 주포는 30 mm2 A 42 쌍열 주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주포는 포구 초속 1000m/s 급속 사격은 분당 550발, 지속 사격은 분당 200~300발의 성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총신의 길이는 3,027mm이며 전동식으로 작동합니다. 유대 2,000mm 고도까지 교전이 가능합니다. 

 

차체 하단에는 AGS-17 30mm 고속유탄 기관포가 장착되어 있으며 분당 420발의 속도로 30mm 유탄을 발사할 수 있어 시가전에서 적 보병과의 근접전 시 위력적인 지역 제합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보병 화력뿐 아니라 대전차 화력도 충실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BMPT-72 터미네이터 2 전차 화력지원 전투차량은 Ataka -T 대전차 유도탄 4발을 포탑에 장착하고 있으며 이 유도탄들은 탠덤 탄두로 구성되어 있어 폭발반 응장급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장감 관통 능력은 폭발 반응 장갑(ERA) 극복 후 800mm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3세대 전차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사거리는 6km로 전차포의 유효 사거리 2km보다 3배나 길어서 대기 갑전 수행 시 구축전차로서 운용될 수 있습니다. 

 

3. 제원 살펴보기 

전장 6.96m
전고 2.1m
전투 중량 47톤
주무장 30mm 2A42 기관포 2문(쌍열, 탄약 850발), Ataka-T ATGM 4발
부무장 30mm AG-17D 고속 유탄기관포 2문(탄약 600발)
엔진 V-84ms 디젤엔진(840마력)
현가장치 토션 바(torsion bar)
항속 거리 550km(도로에서 연비 주행 시)
최고 속도 65km/h(도로에서 연비 주행 시)
참호 극복 능력 2.8m
탄약 적재량  70발
승무원 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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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솜 전투는 전투 첫날 58,000여 명의 달하는 영국군 사상자(그때까지 하루 사상자 기록으로 최고 기록이었으며 이중 3분의 1이 전사자였습니다.)로 인해 잘 알려진 전투입니다. 이전 투는 1916년 7월 1일 아라스와 알메르트 사이 솜 강 북쪽 30km에 걸친 전선에서 시작해서 11월 18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전쟁 2년차인 1915년, 배수가 안 되는 참호 속 영국군 병사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이후 사진 속 병사들은 모두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1. 솜 전투배경 

본디 솜 전투는 1915년 말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합동작전으로 계획했었습니다. 이작전은 프랑스군 최고 사령관 조세프 조르프가 입안했습니다. 영토 탈환보다 독일 예비 병력을 소모하게 해서 독일군 전체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소모전이 목적이었으나 이 계획은 1915년 12월 19일에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더글러스 헤이그가 동의하였습니다. 그는 영국 정부에 1016년 이 대규모 공세에 관한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이전 투를 위해 영국군은 공격 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그는 영국 정부에 1916년이 대규모 공세에 관한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이전 투를 위해 영국군은 공격 부대를 편성하였고, 프랑스군과 더불어 우세한 병력과 장비를 집중해 공격에 나서려고 했으나 독일 베르됭 전투로 말미암아 많은 프랑스군이 이 지역으로 파견되어 다른 성격의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결국 작전은 변경되고 프랑스 요구로 8월 1일 계획했던 작전이 7월 1일로 당기게 됩니다. 이는 베르됭에 대한 독일의 압박을 줄이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헤이그는 조프르로부터 이작전의 모든 권한을 위입받습니다. 

헤이그는 꼼꼼하게 작전을 준비하고, 선봉부대 지휘관인 롤라 손 장군과 함께 세부 작전을 수립합니다.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우)와 환담 중인 조프르 프랑스군 총사령관. 전쟁 초반에 독일의 공세를 극적으로 꺾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프랑스군의 희생이 커지면서 1916년 12월 해임되었다.

2. 솜 전투 경과 내용 알아보기. 

6월 26일 독일군 진지에 대한 5일 동안의 영국군의 대규모 포격으로 작전이 시작됩니다. 이는 독일이 베르됭 공격에서 생각한 것과 마차가지로 포격으로 독일군 병력을 괴멸시킨 뒤 보병을 무인지대를 거쳐 적의 참호로 돌격시키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특히 주안점은 기관총과 철조망의 제거였습니다. 이포 격에는 영국군의 1500문의 대포가 동원되었고 거의 비슷한 숫자의 프랑스군 대포도 합세하였습니다. 

 

대규모 포격 뒤에 보병의 돌격이 시작되었고 포병의 지원사격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보병이 첫 번째 통신망과 관측으로 정확하게 포격을 계속하였으며 즉 전방의 전선 상황에 따라 계속 포격이 대상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작전 지역 서쪽은 헨리 로리 손의 이러한 대규모 포격 진격전의 결과로 중앙부의 헤이그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들은 어느 정도 전진한 뒤 그곳의 진지를 강화했습니다. 로라손의 부대는 이작전을 위해 많은 보급품과 전투 물자를 투입합니다. 그러는 동안 영국 제4군의 나머지 부대가 있는 북쪽에서는 제3군의 1개 군단이 합류한 뒤 기병 돌격전과 함께 독일 전선 돌파를 위해 돌격하게 됩니다. 

 

또한 헤이그의 후위에 있던 7 왕립 경기병대가 독일군의 라인을 분리시키기 위해 돌격하고 같은 시간 남쪽의 프랑스 제6군의 1개 군단이 작전계획대로 전지를 시작합니다. 

27개 사단이 이 전투에 동원되었고 그중 80%가 영국군이었습니다. 연합국은 750,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그에 비해 독일군은 제2군 예하의 16개 사단이 전부였습니다. 이는 명확히 연합군에게 우세한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연합국의 대규모 포격은 독일군의 잘 짜인 철조망과 견고하게 지어진 벙커들을 파괴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연합국은 많은 수의 포탄을 낭비한 결과만을 초래합니다.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포탄에 불발탄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뇌관의 문제도 있었지만, 지상에 떨어진 포탄이 충격을 뇌관이 작동하여 터기기에는 너무 물렁해서 그대로 땅속으로 파고 들어간 채 터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지금 까지도 서부전선의 농부들은 벙커나 방공호에 숨어있었고 연합국은 엄청난 포격으로 독일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7월 1일 아침 7시 30분 대규모 17개의 지하 부설 지뢰 폭파와 함께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는데 사실 최초의 지뢰 폭파는 10분 전인 7시 20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지뢰 폭파를 통한 공격 방식은 오늘날에도 보입니다. 

 

첫 번째 대규모 돌격이 감행되었고 사실 이는 독일군들에게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독일군들은 지난 8일간의 포격으로 이미 연합국의 대공세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라나 사전 대규모 포격의 실패로 인해 영국군은 첫 주 동안 아주 짧은 구간의 전진만을 성공시킵니다. 

무엇보다 내심 제거되었을 것으로 기대했던 철조망 지대와 기관총 진지들이 상당수가 여전히 포격 전처럼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솜전투관련 내용 동영상

시실보다 성고적인 돌격은 남부 라인의 끝자락에 위치한 프랑스군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스군은 돌격전 몇 시간 포격을 계속하였고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독일군을 혼란에 빠트린 것입니다. 또한 독일군들은 베르됭에서 엄청난 피해로 인해 프랑스군이 대규모 공격을 이 지역에서 감행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전투 초반 그들의 계획을 거의 모두 달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 국군은 독일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원래의 진지로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많은 수의 보병들이 느린 속도로 독일군의 방어선을 향해 전진하였습니다. 이는 독일 기관총 사수들에게 좋은 표적이 될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영국군이 무인 진대에서 전사했습니다. 

 

첫날의 58,000명에 달하는 영국군 희생에도 불구하고 헤이그는 다음날 다시 진격을 명령합니다. 

이는 성공하긴 하지만 많은 피해와 함께 결국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진 못합니다. 아무튼 7월 11일 영국군은 독일의 첫 번째 방어 진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날 독일군은 베르됭 전투에서 15개 사단을 이 지역으로 보내 방어를 강화합니다. 

 

7월 19일 지역의 독일군은 재편되고 방어를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헤이그는 이 공세를 여름을 지나 11월까지 계속하게 됩니다. 비록 독일군의 포지오 장군을 사로잡는 등의 몇 번의 괄목한 만한 성과도 있었지만 전선은 다시 고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9월 초순 프랑스 제10군이 이 공세에 합류하고 산발적인 공세를 계속합니다. 특히 후반에는 전차가 전선에 등장해 영국군의 15개 사단에서 이탱크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 첫 번째 탱크의 등장은 처음에 50대로 시작하였으나 기관총 중대에 배속되어 3,4소대로 편성되었습니다. 그리고 9월 솜에 도착하는데 기계적 결함과 고장으로 인해 탱크의 순사는 24대로 줄어있었습니다. 

솜전투당시 영국군의 전차위에 서있는 독일군의 모습

 

이 탱크의 등장은 독일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활약도 했지만 이 초반의 탱크들은 많은 결함과 고장으로 그리 신뢰받지는 못하였습니다. 

 

9월 15일 처음으로 탱크가 전선에 투입되었고 이날의 전투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로왈슨의 부대는 프랑스의 제6군이 영국 주력의 우익으로 터 독일군의 공세를 막으며 이를 격파하는 동안 전 참호를 돌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동안 캐나다군은 그들의 7개대의 전차와 함께 Courcelette를 점령하고 제15 스코틀랜드 사단은 Martinquich를 점령합니다. 

9월 25일~27일 사이 해이그는 새로운 공세를 시작합니다. 

그 후 영국군은 여러 번의 공격을 감행하는데 그 성과는 그리크지 못했습니다. 프랑스군도 이 공세에 가담합니다. 프랑스의 조프르 장군은 헤이그에게 공세를 계속할 것을 주문하는데 이 당시 프랑스군은 베르됭에서 공격을 계속해 잃은 땅을 계속해서 되찾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는 공세의 중단으로 솜의 독일군이 베르됭으로 다시 배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1월 13일 영국군은 마지 말 공세를 취해 독일군의 Beaumont Hamel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 솜 전투는 11월 18일 폭설로 인해 중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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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인 1950년 11월 말~ 12월 초까지 함경남도 장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진호전투 당시 미 해병대 장병이미지

1950명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함경도 장진 군 지역에서 미국 제1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중국군 제9병단에 속한 3개 군단 병력과 벌인 전투입니다. 영어로 장진의 일본어 독음인 초신을 가져와 초신 호전 투나 초신호 작전이라고 합니다. 김일성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까지 진격해  갔던 유엔군이 12만 명에 이르는 중국군에 포위되어 격전을 벌이다가 흥남으로 철수한 사건입니다. 

 

1. 장진호 전투 배경과 원인 알아보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된 뒤 패퇴를 거듭하던 한국군과 미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면적인 반격으로 전환했습니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으며,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김일성 정권은 산악지대인 평안북도 강계로 달하나 그곳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중국은 10월 25일 중국 인민지원군을 창설해 북한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했으며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뒤 동부전선을 맡은 미 제10군단의 군단장 알모드 중장은 부대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시켰습니다. 국군 제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진격해서 10월 10일 함경남도 원산을 점령한 뒤 두만강 유역까지 계속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10월 29일 이원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부전호와 압록강 유역의 혜산진 방면으로 진격했고, 10월 27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은 개마고원의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11월에 들어서면서 중국군과의 전투가 본격화되면서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했던 유엔군은 청천강 유역으로 물러났습니다. 동부전선에서도 11월 8일 무렵부터는 중국군이 전투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몬드 중장은 휘하의 부대들에게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더욱 신속히 전격 할 것으로 명령했고, 11월 21일 미제 7사단 제17연대는 압록강 유역의 혜산진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장진호전투 관련 동영상

2. 장진호 전투 발발과 전개 과정 알아보기. 

미 제1해병사단은 함흥에서 장진 군을 거쳐 강계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진격했는데, 11월 11일에는 황초령(1,206m)을 지나 장진면 고토리에 이르렀고, 11월 15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 우리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11월 19일에는 장진호 서북쪽에 있는 서한면 유담리까지 나아갔습니다. 

 

낭림산맥 동쪽에 있는 장진 군은 희색복(2,185m) 아득령(1,479m), 유린산(1,925m) 문암산(1,852m) 등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해발고도 1천 미터 이상의 고원지대입니다. 이 지역은 10월이 되면 벌써 눈이 내리고 겨울 날씨가 시작되는데, 겨울철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져 중강진과 할게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꼽힙니다. 미 제1해병사단의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겨울철 추위가 닥쳐오자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하갈 우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곳에 활주로를 만드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7 연대와 제5연대를 유담리 일대로 전진 배치하고, 제1연대는 하갈우리와 고토리를 잇는 후방의 보급로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장진호전투 관련 지도

장진호 우측의 동하면 신흥리와 후동리 일대에는 아몬드 중장의 명력에 따라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병력을 중심으로 편성된 페이스 특수 임부 대가  미 제1해병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었습니다. 

 

그러자 중국군은 제9병단에 속한 3개 군단 병력(12만 명)을 장진호 일대로 집중시켰습니다. 내륙으로 깊숙이 진출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을 제압하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진출한 국군과 미군의 퇴로를 차단해서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1월 11일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건너온 중국군은 산지를 따라 은밀히 이동해 11월 20일 무렵에는 유담리 인근에 집결했습니다. 

 

미 제1해병사단은 낭림산맥을 넘어가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2사단, 한국군 제2군단 등과 청천강 상류 지역에서 연합작전을 벌이기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1월 24일 덕천, 영원 지역을 담당하던 한국군 제2군단이 중국군에 크게 패 하면서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중국군은 11월 27일 밤부터 인해전술로 장진호 일대의 미군을 에워싸고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11월 27일 밤부터 다음날까지 계속된 중국군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하갈우리, 유담리, 고토리를 있는 연결도로가 차단되면서 미군은 고립되었습니다. 특히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는 부대장인 매클레인 대령마저 전사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아몬드 군단장은 미 제1해병사단의 사단장인 스미스 소장이 장진호 일대에 배치된 유엔군 병력에 대해 통합 지휘권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유담리에 있는 병력의 일부를 하갈 우리로 이동시켜 페이스 특수임무대를 지원하고 하갈우리와 고토리 있는 도로를 회복하라는 명령를 내렸습니다. 그란 유담리에 있는 해병 제5연대와 제7연대도 중국군에 포위되어 병력을 이동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스미스 소장은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에게 하갈 우리로 집 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1월 29일 영국 해병대의 41 특공대 소속인 드라이스데일 중령이 지휘하는 드리스데일 특수임무부대가 29대의 전차와 141대의 차량을 이끌고 고토리에서 하갈 우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일부 병력만 하갈 우리에 도달하였소 있었습니다. 

 

이처럼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11월 30일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담리에 있던 제7연대와 제5연대는 12월 1일부터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미공군이 전폭기를 동원해서 네이팜탄을 퍼부으며 이들의 철수를 지원했으나,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제7연대와 제5연대는 12월 4일이 되어서야 하갈 우리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장진호 우측에 주둔하던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도 12월 1일 하갈 우리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의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공군의 오폭으로 네이팜탄이 행렬 한가운데서 터지면서 철수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천여 명이 전사했고, 3천여 명의 부대원 가운데 385명만이 부상을 입지 않은 상태로 하갈 우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3. 장진호 전투 결과와 영향 알아보기. 

하갈 우리에 집 격한 미 제1해병사단은 완성된 활 수로를 이용해 12월 2일부터 4천여 명에 이르는 부상자들을 일본으로 후송했습니다. 부상자들 가운데 3분의 1 가량은 동상 환자였습니다. 그리고 12월 6일 수 솔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은 뒤 1쳔여대의 하챨을 이용해 12월 7일 고토리로 철수했으며, 아몬드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흥남으로 이동했습니다. 

 

12월 11일 흥남에 도착한 미 제1해병사단은 흥남철수작전에 따라 제10군단 휘하의 다른 부대들과 함께 배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습니다. 

 

11월 27일부터 시작된 장진호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유엔군은 1만 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망자: 1,029명, 실종자: 4,894명, 부상자 4,582명, 동상 등 비전투 요인에 의한 사상자 7,338명) 이러한 피해는 군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어서 당시 언론들에서는 장진호 전투를 진주만 피습 이후에 미군이 겪은 최악의 패전으로 평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1996년부터 유해발굴단을 북한에 파견해서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을 벌였습니다. 

 

한편 중국군도 장진호 전투에서 4만 8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숫자는 19,202명에 이르렀고, 동상 등의 비전투 요인으로 발생한 사상자 숫자도 28,954명이나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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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덱스 전시된 한화시스템 부스에 SAR위성 이미지

SAR 위성은 악천후에도 영상 획득이 가능해 감시정찰 자산으로 맹 높은 가치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주에 SAR 위성을 동작하기 위해 필요한 고난도의 기술 개발은 해외에 의존해야 합니다. 우주급 부분의 사용, 발사들 고비용 문제로 인해 감시정찰 체계 구현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발사 비용은 문제로 인해 감시정찰 체계 구현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발사 비용은 발사체에 탐재되는 위성의 무게만큼 소요돼 개발 비용에 있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최근 이러한 개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위성 분야에서는 경제적인 개발 철학을 도입했습니다. 우주급 대신 상용부품 사용, 하나의 발사체로 다수의 위성 (군집 위성 대량 발사, 위성 경량호를 특징으로 하는 뉴스 페이스 패러다임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재 Planet, Capella Space, Oneweb 그리고 ICEYE 등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신개념이 초소형 위성을 개발 중입니다. 

미국 국방부는 민간기업의 우수한 우주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뉴스 페이스 패러 다인에 부함 하는 경제적인 위성 개발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발 경향에 맞추어 환화 시스템에선 레이더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과 독자적 개발 역량을 바탕으로 100kg 이하의 초소형 SAR 위성을 국내 기술 100%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한화 시스템이 개발한 초소형 SAR 위성은 원통 또는 박스형 본체와 날개 형태의 태양전지판이 달린 일반 위성과는 다르게 SAR 탑재체와 본체 및 태양전지판이 일체화된 얇은 직육면체 형태로 설계됐습니다. 

 

이로 인해 무게는 줄이고 하나의 발사체에 최대한 많이 실을 수 있도록 제작해 발사 비용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즉 본체-탑재체 일체형 설계를 통해 발사체 수납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또한 위설 경략화에 따른 성능 저하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집적 FPGA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수 모듈로 구서도 니 전장품을 단일 모듈로 기능 통합 경량화, 소형화를 달성하는 효과를 거뒀습니다. 또 SAR의 핵심인 안테나는 국내 최초의 한국형 전투기 KF-21 AESA 레이더 과제에서 검증된 반도체 송수신 장치를 활용해 초경량 고 이득 능동 위성 배열 안테나를 적용했고, 1m급 고해상도 관측 모드와 넓은 영상 획득이 가능한 광역 관측 모드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한화 시스템의 초소형 SAR군집 위성 군 감시정찰체계는 형재 개발 중인 초소형 SAR 위성을 사용하여 궤도 면당 약 500km

의 고도에서 재방문 주기 30분을 목표로 설계했다고 합니다. 또 위성 안테나에서 전파의 편파를 다르게 하여 (수직, 수평, 편파) 송신할 수 있다고 하고 같은 물체여도 편파에 따라 반사되어 위성으로 되돌아오는 전파의 세기가 다르므로 관심 지역의 물체파악 위한 보다 다양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게 했습니다. 

 

위성의 임무는 지상국과 교신을 통해 정해지기 때문에 지상국과 교신이 불가능하면 위성은 사전에 정의 도니 임무에 따라 감시정찰을 수행합니다. 

개발 중인 SAR 군집 위성 군은 다른 궤도 면상에 존재하는 위성 간 통신이 가능해 긴급 임무 변경이 필요할 때 위성 간 통신을 이용해 위성의 임무를 변경할 수 있게 설계됩니다. 

 

현재 감시정찰 분야에서 초소형 SAR 위성은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화 시스템은 국내 최초로 100km 이하 1m급 성능을 자랑하는 초소형 SAR 위성을 개발 중입이다. 한화 시스템은 초소형 SAR 위성 국내 개발 성공을 시작으로 위성 분야 연구, 개발(R&D) 역량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락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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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파치와 코브가 독주하고 있는 공격헬기 시장에서 세계에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이 공돌 개발한 타이거 공격헬기보다는 작은 편입니다. 그러나 설계 당시부터 적의 공격헬기와 공대공 전투를 상정해, 경쾌한 기동성을 자랑합니다. 또한 C-130 수송기로도 수출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해외 파병이 용이하며 최근에는 아프간전에도 참가해, 프랑스 지상군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형 공격헬기 타이거 전술 훈련 모습 이미지

1. 헬기가 무기로 거듭나게 되다. 

헬기를 군용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한 국가는 미국이라 합니다. 특히 한국 전쟁을 통해 미군은 헬기의 군사적 활용가치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군은 헬기를 단순히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기동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 유럽은 달랐습니다. 헬기의 운용개념을 공격 목적으로 활용하는데 큰 관심을 뒀습니다. 

 

1950년대 말 프랑스군은 알제리 전쟁 애 서, 세계 최초로 알루엣 2 헬기에 SS-10 대전차 미사일을 장착해 무장헬기로 사용 헸습니다. 이들 헬기들은 게릴라들의 거점으로 활용되던 동굴이나 건물 등을 정밀 타격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은 1962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600기 이상의 헬기를 작전에 투입하였습니다. 

 

미군은 알제리에 주재하는 미 대사관의 무관을 전전에 파견하여, 프랑스군의 헬기 운용 전술을 상세하게 평가 분석했습니다. 이들 자료는 이후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헬기 운용 전술에 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알제리 전쟁에서 알루엣 Ⅱ 헬기에 SS-10 대전차 미사일을 장착해 무장헬기로 사용했다. <출처: (cc) Eric Gab

 

2. 독일과 프랑스에서 떠오른 공격 전용헬기의 필요성

베트남전 이후 유럽과 미국의 헬기 운용개념은 명암이 엇갈리게 됩니다. 미국의 경우 본격적인 공격헬기인 코브라를 신전에 배치했습니다. 이후 아파치 공격헬기도 개 바흐 게 됩니다. 반면 유럽은 공격 전용헬기의 필요성은 공감했지만, 비용상의 문제로 무장헬기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1980년대 구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 기갑 전력은 갈수록 정예화되어 갔습니다. 

이들과 맞서야 할 다시 서독과 프랑스는 적 기갑 전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공격헬기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1984년 양국 정부는 공동으로 공격헬기를 개발하는데 합의합니다. 1986년 비용상의 문제로 개발 계획은 주춤하다가, 1987년 다시 재게 되게 됩니다. 

 

1991년 최초의 시제기가 비행에 성공합니다. 

이후 타이거라는 제식 명칭을 부여받고 2003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타이거 공격헬기는 프랑스 육군에 최초 배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독일 육군에도 배치되게 됩니다. 

 

타이거 공격헬기 동영상

 

3. 다양한 형상을 가진 타이거 공격헬기 

타이거 공격헬기는 개발 당시, 프랑스의 HAP와 독일 PAH-2두 가지 형상으로 개발되었습니다. 이러한 형상의 차이는 공격헬기에 대한 약국의 작전요구사항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3-1. 프랑스와 독일

지상군의 기동헬기를 호의 및 엄호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적의 공격헬기와 공중전을 벌일 공격헬기를 원했습니다. 반면 독일은 적 전차를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는 대전차 임무 전용의 공격헬기를 원했습니다. 

 

한 가지 형상으로 개발했다면, 개발도 쉽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나, 사정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타이거 공격헬기는 각기 다른 형상 간의 공통성을 최대한 추구해서 다양한 형상 개발에 따른 개발비 상승을 나름대로 최소화했습니다. 

 

이후 공격헬기의 다목적성이 중요시되면서 독일은 PAH-2를 다목적 공격헬기인 UH-T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운연 중인 HAP 공격헬기를 대전차 임무가 포함된 HAD로 개령할 예정이라 합니다. 

 

타이어 공격헬기는 개발국인 프랑스와 독일 외에도, 오스트레일리아와 스페인이 공격헬기로 운용할 예정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HAP 공격헬기를 기본 형상으로 개량된, ARH공격헬기를 채택했습니다. 2011년 안으로 실전 배치될 예정입니다. 스페인은 HAD 공격헬기를 채택했습니다. 

 

프랑스군의 HAP 공격헬기 5대가 스페인군에 배치되어, 공격헬기 운용에 필요한 각종 교육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4. 티이 거 공격 헤릭의 선진화된 조종석을 갖추다. 

타이거 공격헬기는 기체의 80% 이상을 복합재료를 사용하였으며, 선진화된 조종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좌석의 배열은 기존의 공격헬기에서는 볼 수 없는 파격적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공격헬기들이 전방에 사수석 후방에 조종석을 가지고 있다면, 타이거 공격헬기는 전방에 조종석 후방에 사수석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좌석 배열은 각종 센서류의 발달로, 후방석에서도 사수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저고도 비행을 주로 하는 공격 헬 기의 경우

조종사가 전방에 탑승하는 것이 조종에 유리하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장점입니다. 또한 아날로그 시현장비가 아닌 디지털 시현장비의 채용으로, 조종사의 상황 대처 능력도 이전의 공격헬기에 비해 향상되었습니다. 

 

선진화된 조종석과 함께 각종 첨단 항공전자장비도 장착되었습니다. 

항법장비로는 GPS/ 도플러 장비와 디지털 맵이 등이 탑재됐습니다. 사용하는 디지털 맥은 유로그리입니다. 

자동 배행 조종 시시템 AFCS을 사용하여 조종사의 임무를 대폭 경감시켰으며, 필수적인 생존장비인 전자전 장비와 각종 통신체계를 탑재하였습니다. 모든 항공전자장비들은 디지털 버스 체계로 통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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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개발, 제작하는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로, 1989년 개발돼 1996년부터 실전 배치가 이뤄졌습니다. 재블린 미사일은 발사 후 망각(Fire and Forget)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표적을 추적하며, 압축공기로 발사하기 때문에 추 폭풍이 거의 없는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적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제블린 미사일을 발사하는 병사 이미지   출처: Army Recognition

미국에서 1989년부터 개발돼 1996년 실전배치가 이뤄진 후대용 대전차 미사일로, 1970년대 이후 사용돼 온 유선 유도식 M47 드래건 대전차 미사일에 대체한 무기입니다. 

199년에는 단가 절감형인 FGM-148C 재블린 블록 0과 그 수촐형인 FGM-148D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1. 개발 및 생산 정보

FGM-148 재블린은 미국의 미사일 전문 생산업체 레이시언과 미국 최대 방산업체 록히드마틴의 합작사인 제블린 조인트 벤처가 생산하고 있습니다. 

  • 레이시언은 미사일 발사대, 유도부, 소프트웨어 등
  • 록히드마틴은 미사일의 적외선 시커 등을 생산하고 조립합니다. 1989년부터 개발돼 1996년 실전 배치된 재블린 미사일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에서 5000여 회 이상 사용되며 그 성능을 입증한 바 있습니다. 

2. 제원과 특징 

FGM-148 Javelin Detail View(위쪽). 발사관(Launch tube), 조준(Sight), 미사일(Missile) (출처: Army Recognition, )

 

FGM-148 재블린은 길이 1.2M의 무게 22.3KG으로 보통 2인 1조로 운용됩니다. 사정거리는 2.5~5KM에 이르며, 최대 800mm의 관통 역을 갖추고 있습니다. 구성은 크게 조준부(CLU)와 미사일이 든 발사관(LAT)으로 이뤄져 있는데, 발사관은 양끝에 마게 가 부탁된 일자 형태입니다. 발사관 상단 부분에는 미사일 본체에 전력을 공급하는 리튬 배터리와 냉각을 위한 압축 아르곤(Argon) 가스가 들어있는 배터리 냉각재 유닛이 부착돼 있습니다. 

 

재블린은 목표물을 조준해 발사만 하면 미사일이 알아서 타격하는 발수 후 망각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표적을 추적해 무력화할 수 있습니다. 

 

제블린 미사일 관련 동영상

발사관 내부에 봉인 통합되어 있는 127mm 구경의 미사일 본체는 발사 시 압축공기를 분사해서 150m까지 치솟았다가 니 꽂히며 탱크나 장갑차 등을 파괴합니다. 이처럼 압축공기로 쏘기 때문에 후폭풍이 거의 없어 부상이나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적으며 특히 탱크, 장갑차의 취약 부의 중 하나인 상부를 공격해 파괴하는 탑 어택 능역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재블린은 미사일 한 발 가격이 8만 달러(약 1억 원)에 이를 정도로 매우 비싸고, 발사기와 무게를 합쳐 22.3kg의 무개가 나가기에 휴대할 수 있는 미사일이 3 발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 복잡한 장전과 30초 이상 걸리는 조준 시간도 단점으로 꼽힙니다. 

 

3. 제블린  실전 기록 

1996년부터 실전 배치가 위뤄 진 FGM-148 재블린은 2000년대 초중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에서 5000여 회 이상 사용되며 그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때인 2017년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친러 반군과 정부군의 교전 상황이 심각해지자 2018년부터 우크라이나에 판매가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발사대 37기와 미사일 210발을 미국에서 인수했습니다. 2020년에는 발사관 10기와 미사일 150발을 추가로 들여왔습니다. 또 미국은 조지아에도 2021년 8월 82기의 재블린과 46대의 발사기 판매를 승인했으며, 에스토니아에는 수년간 128기의 재블ㄹ니을 공급한 바 있습니다. 

 

한편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조 바이든 행정부는 600만 달러 규모의 군사지원방안에 수량 미상의 재블린 미사일을 추가했습니다. 특히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재블린으로 인해 러시아군의 전차 장갑차, 헬리콥터 등에 엄청난 피해가 속출하면서 우크라이나 군 일부에서는 성스런 재블린으로 블리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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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지 전투 2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최후의 대반격에 대해 연합군이 붙인 이름입니다. 

벌지(Bulge)는 영어로 '주머니'라는 뜻입니다. 독일군의 진결에 의해 전선의 일부가 돌출 도니 것을 가리켜 미군이 붙여 준 이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독일군은 작전명[라인을 수호하라]의 아래에서 대공세를 펼쳤습니다. 대반격은 서부 전역 사령부이었던 게프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의해 입안된 것으로 룬트슈테트 공세 혹은 지명에서 유래 도니 아르덴 공세로 불리기도 합니다. 

벌지전투관련 시자전투를 시연한 그래팩이미지&amp;amp;nbsp;

1. 벌지 전투 배경 

1944년 9월 4일 영국군은 벨기에 안트베르펜을 해방하였고 보급거점으로써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독일군을 몰아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사용 가능을 위한 목적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보급선이 길어져 연합군의 진격은 전지 되고 전선은 교착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9월 17익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 계획한 마켓 가든 작전이 개시되어 라인강 확보를 위한 전투가 시도되었으나, 이 작전은 너무나도 무모하게 진행되어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전선에서도 소련에 의한 바그라티온 작적이 폴란드 동부에서 끝나가던 시기였지만 소련군은 1944년 12월 말까지 폴란 든 서부로 진격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히틀러는 건곤 인척이라 할 수 있는 반격작전을 구상했습니다. 1940년 프랑스에 대한 전격전 승리를 재현하는 것으로 벨기에 아르덴 지방의 삼림지대를 기갑부대로 돌파하여 단번에 안트베르펜까지 진격하여 이곳을 탈환하고, 서부전선 북쪽의 연합군을 포위, 괴멸시킨다는 작전 안이었습니다. 

 

군 수뇌부의 룬트슈테트와 발터 모델은 이 계획이 무모하다고 반대했으나 묵살되고 히틀러는 이 작전의 성공으로 서부전선이 정체되고 만약 연합군과 강화를 실현한다면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또 한 가지 작전 안으로써 북부의 광대한 전선에 분산된 코트니 호지스 장군 휘하의 미 1군 을 협공하여 괴멸시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적군의 포위, 분단이 쉽고, 아군의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으나 연합군 전력의 일부를 줄이는 것밖에는 성과가 없고, 전쟁의 귀추를 변화시킬 작전 안이 아니었기에 기각되었습니다. 

 

작전 시기는 아르덴 숲이 안개에 휩싸이는 겨울로 잡았습니다. 이미 제공권은 연합군으로 옮겨졌기에 항공기에 의한 격렬한 폭격으로부터 부대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작전에 참가하는 전력으로 정예 약 20개 사단을 준비하고 신예의 티거 2 전차도 포함시켰으나, 내실은 동부전선에서의 출혈의 간접적인 영향 때문에 거이 모든 부대가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훈련도가 낮고 새로 편성된 국민 척탄병 사끼지 투입시킬 정도였다고 합니다. 

군수품과 연료의 부족도 심각할 정도로 증가하여 만족할 만한 양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작전은 1944년에 전쟁 중 최대치에 도달한 독일의 병기 생산량의 대부분이 투입된 정예 부대로 작전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그러나 공격을 예정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작전 도중 연합군의 보급 거점을 탈취할 필요가 있는 등, 처음부터 위험을 안고 있던 작전이었습니다. 

한 가지라도 잘못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작전 전체에 파급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었습니다. 

연합군 상층부는 독일 집결의 정보나 공세작전의 조후를 보고 받았으나, 독일에게는 공세에 나설 여력은 남아있지 않다고 판단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르덴 지방은 깊은 삼림과 산악지대였기에 기갑부대가 쉽사리 통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지구의 방위에는 약체화 댄 부대를 배치할 정도였습니다. 

 

이 판단은 전후에 통렬한 비판이 내려졌습니다. 이미 독일군의 전차부대는 1940년에 같은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 사이를 뚫고 프랑스에 쳐들어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2. 벌지 전투 계획 

9월 중순에 아르덴 숲을 통과하여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주력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뮤즈강까지 도달한 뒤 북서쪽의 엔트워프와 브뤼셀로 진격할 예정이었습니다. 가장 곤란한 것은 작전 개시로부터 신속한 이동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뮤즈강을 넘는 다면 극적으로 개선되어 해안까지 도달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작전은 연합군 첩보 본부에 라인란트의 방어작전과 오인시키기 위해 라인을 수호하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독일의 노래에서 따온 명칭이기도 합니다. 

 

2-1. 4개군의 작전 투입 결정하다. 

  • 요제프 디트리히 가 이끄는 SS 6 기갑 군은 1944년 10월 26일에 새롭게 편성되었습니다. 이군에는 무장 친위대의 정예 사단 1 SS기 갑사단 LSAH와 12 SS기갑사단 히틀러 유젠트가 참가했습니다. 그들은 주요 공격 부대로써 북부 공격을 감행 예정이고, 목표는 엔트 위프의 확보였습니다. 
  • 하소 폰 만토이펠이 이끄는 5 기갑 군은 중아 공격을 담당해 브뤼셀 확보가 목표였습니다. 
  • 하소 폰 만토이펠이 이끄는 5 기갑 군은 중앙 공격을 담당해 브뤼셀 확보가 목표였습니다. 
  • 에리히 브란덴베르크가 이끄는 7군은 측면지원과 남부 공격을 담당하였습니다. 
  • 15군은 재편성되어 최북부 배치되었습니다. 임무는 이 지역의 미군 세력을 붙잡아 공격에 대한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벌지전투 독일군과 연합군에 대치상황 설명 이미지&amp;amp;nbsp;

2-2. 공격의 성공에는 3가지 요점

  • 공격은 완전히 기습이어야 한다는 점 
  • 악천후여야 한다는 점, 연합군의 제공권을 무효화시키고 보급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 시기는 겨울 중에도 혹설기를 설정한다. 
  • 신속한 지격이어야 한다는 점- 모델 원수는 뮤즈 강까지 4일 만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공격에 앞서 독일군의 부대 이동을 연합군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해방에서는 레지스탕스로부터 유익한 정보를 얻었으나, 연합군이 독일 국경에 달콤한 당시로써 그런 정보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애니그마에 의 암호화된 무선통신으로 지령을 내리는 독일군을 감청해 울트라 암호 해독기로 해독하였으나, 독일 국내에서는 이러한 지령이 전화와 텔레프린터를 사용하여 송수신되었습니다. 

 

또한 다가올 공세를 생각해 무선 교신의 특별차단 지령으로 교신이 감소하였습니다. 

(독일 국내에 있던 전화 난 전보 등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독일 국방군 내에서 숙청으로 독일군의 통신보안은 재 강화되어 정보 누출의 감소가 현저해졌습니다. 

또한 가을의 짙은 안개와 날씨는 연합군의 정찰기가 지형을 정찰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첨보부로부터 이전의 보고 - 독일군은 말기 상황에 다다라 공세에 나설 여력이 없습니다. 

근거로 아르덴의 정세에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아르덴 방면에는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부대를 재건 중이었습니다. 또한 같은 지역을 지키던 99 보병사단과 106 보병사단은 미국 본토에서 도착한 신참 보병사단이었기에 대부분 전투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중에 99사단은 선전했으나, SS 6 기갑 군 등의 맹공을 받았던 106사단은 순식간에 궤멸당해 다수의 병사가 독일군에게 항복했습니다. 

 

 

3. 독일군의 공격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벨기에 아르덴 숲을 통과해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끊이지 않던 악천후로 인해 연합군은 항공기를 뛰울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돌연 기습으로 허를 찔린 미들턴 장군의 미 8군은 크레르보, 히지겐 등 일부 거점에서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여단, 연대, 대대 등 고급 부대장의 전사 및 부상이 속출하여 괴멸당하거나, 포로가 되거나, 포의 되거나 하는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움과 혼란을 틈타 벌어진 독일군의 진격은 최초 수일 동안만 계속되었을 뿐이었습니다. 12월 하순에 이르고 독일군의 주력 부대는 여러 지역에서 급히 달려온 미군에 의한 강력한 저항을 만나 전진은 매우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또 각 전선의 진격 속도도 큰 편타가 생겨, 속공에 성공한 부대가 포위당해 집중적인 반격을 당하는 사태가 속출했습니다. 

히틀러는 처음엔 연함군이 이사태에 대응하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라는 것을 인시하는 데 수일 아이젠하워가 각국 수상과 상담하여 부대의 배치전환을 명령하는 데 수일, 그리고 배치전환 명령을 받을 부대가 현지에 도달하는 데 수일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이 정도 시간이 걸린다면 작전은 틀림없이 성골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합군의 반응을 히틀러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빨랐습니다. 또한 아이젠 하워의 결단도 빨랐습니다. 그는 각국 수뇌 등과 상담하지 않고 부대의 배치전환을 단행하고 당시 프랑스에서 제건 중이던 101 공수사단을 바스토뉴로 82 공수사단을 생비트로 급히 보냈습니다. 히틀러의 생각은 첫날부터 엇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4. 사퇴서 작전 알아보기 

연합국 점령지역 후방으로 골수 부대를 강하시켜, 본 작전의 지원 및 연합군의 교란을 노린 사퇴서 작전이 계획되었습니다. 사퇴서 작전에는 작적 개시가 12월 16일 이른 오전으로 예정되었으나 악천후와 연료 부족 때문에 결국 하루가 늦은 12월 17일 새벽 03:00으로 강하 시간이 설정되었습니다. 강하 부대의 목표지 전은 말메디에서 11km 북쪽의 [바라크 미하일] 십자로였습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데아 하이트 대령과 부하들은 그 지점을 확보하고 제12 SS기갑사단 히틀러 유켄트가 도착할 때까지 24시간 동안 그 지점에서 연합군의 증원과 보금을 방해할 예정이었습니다. 

제745전차대대 M4셔면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아헨에서 전투중인 미 제1보병사단 제26보병연대 시지지 전투 이미지&nbsp;

 

12월 17일 오전 0시 직후, 112대의 JU 52수 솔기에 약 1,300명의 팔슈름예거를 탐승시키고, 짙은 구름과 강한 눈보라를 헤치고 이륙했습니다. 그 결과 다수의 수송기가 예정된 코스를 벗어났고, 또 강하 지점에 접근한 수송기도 강풍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강하 예정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 낙하했습니다. 

 

17일 정오쯤 약 300명이 목적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전력이 충분하지 못해 연합군에 대한 저항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하이트 대령은 십자로를 확보한다는 계획을 파기하고 부근에서 게릴라 전술을 펼칠 것을 부하에게 명력 했습니다. 낙하 범위가 광범위하고 분산되었기 때문에 각지에서 보고가 잇달아 연합군사령부는 대규모 골수 작전이 실시된 것으로 오인하였습니다. 

 

많은 혼란이 발생한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인원 배치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전선에 대한 증원이 뒤늦은 결과 독일군의 공세를 용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5. 그라이프 작전

오토스 코르 체니 친위대 중령이 이그는 제150 기갑여단이 미군의 군복을 착용하고 영어를 구사하는 병사들이 포획한 연합군의 차량과 연합군의 것으로 위장항 차량을 사용하여 저 후방지역에 침입했고 실제 완벽하게 영어를 이야기할 수 있고, 그곳에서 태어나 후방지역에 침투하는 것이 가능한 이는 20여 명 정도였지만 이런 부대의 존재는 그 행동 이상의 혼란을 발생시켰다고 합니다. 

 

1943년 9월 친의대장교이자 전쟁영웅 오토 스토르체니와 함께찍은 아돌프히틀러 사진 이미지&nbsp;

본대는 뮤즈강에 놓여 있는 다리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였고 미군 병사의 군복을 착용한 독일 병사의 존재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조지 패튼 장군도 이 소문을 듣고 놀라 12월 17일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그라 우츠들이 여러 곳에서 출몰하여 전화선 절단하건 나 도로표식을 바꿔 아군의 방어 거점에 도착을 할 수 없게 혼란을 주고 있다고 보고 하였다고 합니다. 

 

독일 병사는 미군의 군복을 착용하다가 체포되면 대부분 그 장소에서 스파이로 간주하여 총살시켰으며 제네바 조약 아래에서 군복을 착용에 관련된 항목과 전시포로에 대한 취급이 모순이 되었지만 총살은 이 시점에서 일반적인 행위였습니다. 스코프 체니와 그 부하들은 이러한 처벌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미군 군복 안에 독일군 군복을 착용하였습니다. 

 

후방지역에서의 방해공작 중 몇 명의 병사가 연합군에 의해 채포 되었으나, 이미 각오를 다진 그들은 최후까지 거짓 자백을 하여 연합군에게 혼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임무에 관련해서 취조받을 때 파리에 있던 아이젠 하위의 유과와 살해가 목적이라고 답을 하였고 아이젠 하위의 호위는 대폭으로 증가하고 그는 사령부에서 나올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반면 그들은 정직하게 부대의 지휘관은 스코프 체니입니다.라고 자백했다고 합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만 팔에 침입하여 아이젠하워가 있는 장소에 다다르는 것이 무리인 작전이었지만 지금까지 믿지 못할 작전을 성공시킨 스코르체니가 지휘하고 있었기에 연합군은 이 자 백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그 결과 후방지역의 여러 곳에 검문소가 설치되어 병력과 장비의 이동이 정체되었습니다. 

야전헌병은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질문(미키마우스의 여자 친구 이름, 유명한 야구시합의 스코어, 일리노이주의 주도 등)을 모든 병사들에게 엄격하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헌병의 질문을 받은 오말 브랜들리 장군은 일리노이주의 주도를 수프 리핑 드라고 정확하게 답했으나 헌병은 주도를 시카고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 억류되어다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리노 이주 최대의 도시는 확실히 시카고였기에 결국 많은 미국인의 오해한 것입니다. )

이러한 일련의 사건의 여파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란 별명이 붙은 스코르체니 자신은 이 작전이 실패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첫날 달성하려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고, 부대의 존재가 밝혀진 이상 작전을 고집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코르체니의 작전을 징지 시키고 , 제150 기갑사단의 병사들을 통상의 군복으로 바꿔 입히고, 보통의 기갑여단으로서 전투에 투입시켰습니다. 

 

6. 말메디 학살사건

북부에서 SS 6 기갑 군의 주력인 4,800명의 병사와 600대의 차량으로 이루어진, 요아힘 파이 커 SS중력이 이끄는 파이퍼 전투단이 벨기에 서부로 진출했습니다. 12월 17일 07:00시에 그들은 뷰 리켄의 미군의 연료 보급기지를 확보하고, 서쪽으로 진격에 앞서 연료를 제보 급한 데 성공했습니다. 

 

12:30분 말메디와 리 누빌 사이의 고지, 보 호즈 마을 근처에서 285 포병 관득 대대와 조우했습니다. 소규모 전투 후 미군 부대는 항복하고 포로 약 150명이 무장해제되어 심자로 부근 들판에 8열 횡대로 세워졌습니다. 이어 기관총 사격으로 최소 84명이 사살되었습니다. 

 

말메디 학살사건게 윈쪽 영화 제연 이미지와 오른쪽 실제 학삭당시 사진 이미지&nbsp;

훗날 재판에서 검찰 측 기록에 의하면 기갑부대를 지휘하던 장고의 명령에 의해 곧 1명의 전차병이 포로를 피스톨로 소았고, 계속해서 다른 병사들이 기관총으로 총격을 가했다고 전해지며 공식 견해에 대해선 여러 가지 모순과 의문이 남았습니다.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실제 도망을 준비한 포로에 대해 위협 발포에 의해 패닉이 발생하고 뒤이어 도망치려는 포로들을 쏜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습니다. 최후까지 아직 숨이 붙어있던 자들을 돌면서 죽인 자들도 있다고 하며 그들은 이전에 더렌의 마을에서 미군의 폭격 앞에 희생된 벨기에 민간인의 무참한 시체를 처리하고 또 전투 경험이 낮은 자들도 많아 미군 병사에 대한 증오에 의해 사적인 보복 가능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후 파이퍼 SS중령은 체포되어 말메디 사건의 책임을 묻는 재판이 열려 파이퍼를 포함한 친위대 대원 43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저 반적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56년까지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전투는 계속되었고, 1 SS기 갑사단 LSSAH 사단은 밤까지 미 99 보병사단을 공격해 이들을 격파했습니다. 파이퍼 전투단은 스다부로에 도착했습니다. 

 

말메디학살관련 동영상 자료

7. 파이퍼 전투단의 공격

파이퍼는 12월 18일 스타 벨롯에 들어갔으나, 미군 방어부대의 격력 한 저항을 받았습니다. 미군의 배제는 어려웠기에 그는 소부대를 마을에 남기고 트로와 퐁의 다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다리는 퇴각하는 연합군에 의해 파괴된 뒤였습니다. 

 

파이퍼는 라그 레즈에서 스토몽으로 향했습니다. 파이퍼의 접근을 알아챈 미군 공병부대는 다리를 폭파하고, 미군은 참호를 파고 전투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파이퍼 전투단은 독일군 주력과 단절되고, 미군이 스타부로를 탈환하자 보급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스토몽의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파이퍼는 라 글제로 후퇴해 방어 진지에서 구원 부대를 기대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구원 부대는 연함군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했고 12월 23일 파이퍼는 퇴각을 결정했습니다. 전투단은 그들의 귀중한 차량 및 전차 등의 장비를 버리고 도보로 탈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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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생비트 

생비트의 중심부는 중요한 도로의 교차지점 에어서 폰 만토 아펠과 디트리히  부대의 주요 목표였습니다. 바 어부 대는 미군 제7 기갑사단에 제106 보병사단과 제9 기갑사단, 제28 보병사단의 일부가 함 쳐져 있었습니다. 

브르스 C 클라크 장군 지휘하의 이 부대는 독일군의 공격에 저항하여 진격을 최대한 늦추었습니다. 독이 군은 12월 21일이 되어서 겨우 생 비트를 확보했으나 미군의 저항은 계속되었기에 참호로 퇴각했습니다. 

 

12월 23일까지 독일군은 그들의 측면을 분쇄하고, 미군은 센 강의 서쪽으로 퇴각했습니다. 독일 측의 계획은 12월 17일 18:00까지 생 비트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계획의 지연으로 작전 진행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9. 바스토뉴

12월 19일 연합군 상급 지휘관들은 베르됭 요새의 지하기지에서 회의를 가졌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패튼에게 제3군을 북부에 대한 반격에 나서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패튼은 48시간 안에 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 실제 패튼은 회의 출석하기 전 부하에게 북부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이젠하워가 물었을 때 이미 그 일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2월 21일 코코트 장군의 제26국민 척탄병 사단을 주력으로 한 독일군은 연합국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제일 먼저 도착하여 전주 방위 진 지를 구축하여, 미 육군 제101 공정사단 및 제10 기갑사단의 일부가 수비하던 바스토뉴를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수비대의 책 입자였던 제101 공정 사단장 대리 앤서니 맥컬리프 준장은 독일군의 항복 권고에 대해 NUTS라고 답하고 부관이 그 말을 그대로 편지에 적어서 공식 회답으로 독일군에게 보낸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사단장 멕스웰 D 테일러 장군은 회의 때문에 부대를 떠났었고, 사단장 대리인 맥컬리프 준장이 지휘를 맡고 있었습니다. )

 

독일군은 면 군데 개별 지점에 대해 순차적으로 공격을 집중했습니다. 이것은 방어 측에게 공격이 격퇴되면 끊이지 않고 증원을 보내 이를 강화했으나, 한편으론 독일군의 병력수의 이점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조기 바스토뉴 공략은 실패했고, 귀중한 며칠을 낭비하여 바스토뉴를 포위한 채 서쪽으로 진격해야만 했습니다. 남은 부대는 그 후 몇 차례 바스토뉴에 대한 공격에 나섰으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10.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다. 

12월 23일 날씨가 회복되면서 연합군은 공중폭격과 공중 보급을 개시했습니다. 항곡 폭격은 독일군의 보급기지에 대해 괴멸적인 타격을 주었고 P-47 썬더볼트는 도로상의 독일군을 공격했습니다. 거기에 바스토뉴에 대해 공중보급으로 의약품, 식료, 모포, 탄약이 보급되었습니다.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외과의팀이 글라이더로 현지에 들어가 부상자 구원에 나섰습니다. 

12월 24일 보급선의 한계를 넘어선 독일군의 진격은 뮤즈강 근처에서 속력을 잃었습니다. 연료와 탄약의 고갈이 치명적이었습니다. 

 

또한 작전이 개시된 뒤 독일군은 무선 봉쇄를 해제했기 때문에 연합군의 정보부는 손쉽게 독일군의 위치를 알아내어 적적한 반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파이퍼 전투단의 소모와는 별도로 경미한 상황이었습니다. 24일 밤 하소 폰 만토 이펠은 작전의 중지와 철수를 진언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패튼의 제3군은 바스토뉴를 구원하기 위해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12월 26일 16:50분 제4기갑사단의 일부가 바스토뉴에 도달하여 포위를 깨뜨렸습니다. 

1월 13일 독일군은 바스토뉴에서 퇴각했습니다. 1월 23일에는 독일군 사령부에 의해 작전중지가 결정되었습니다. 전투는 공식적으로 1945년 1월 27일 날 종료되었습니다. 

 

11. 전투 후 영향

작전에 의해 연합군은 다수의 전력을 잃어 진공 계획을 수개월간 늦추게 되었으나, 연합군은 손실 도니 전력을 보충할 수 있었고 독일군은 결정적인 패퇴와 손실을 입어 전쟁 종결은 빨라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방어를 굳히지 않고 공세에 나섰던 독일군의 핵심 병력이 보급이 끊어져 궤멸당하였기에 진공에 의한 연합군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독일은 동부전선에 군을 돌릴 여력도 없어졌기에 소련의 진격 속도를 8일 빠르게 만드는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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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4세대 전차를 개발하였는데 그게 바로 T14아르마타 전차입니다. 이전 차에 관하여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T14아르마타 전차 시가지 진입 이미지 출처: Vitaly V. Kuzmin, Wikimedia Commons)

1. 개발의 역사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어 12월에는 미-소 정상이 함께 냉전의 종식을 선언했고 곧이어 1991년 12월에는 미국에 대항하여 날을 세워온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끝났습니다. 이후 소련을 이은 러시아 연방이 지속적인 경제난을 겪는 사이 냉전의 승자가 된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방산 분야에서도 입지를 단단히 굳히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미국은 냉전이 종식된 직후인 1992년부터 M1A 1의 뒤를 이은 M1A 2를 내놓았으며, 영국은 1998년부터 디젤 엔진을 넣고 두터운 장갑을 두른 차체에 120mm 강선포를 장착한 챌린져 2를 개발했습니다. 이두 전차는 모두 2003년 이라크 자유작전(OIF: Operation lraqi Freedoom) 때 처음 실전에 투입되어 이라크 군이 운용한 t-72 업그레이드형을 상대로 활약하며 성능을 입증했으며 최소한의 피해로 전쟁을 종결시키면서 그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3개월 만에 끝난 전쟁 후 안장화 작전 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두 전차는 난관에 봉착하기 시작했습니다. 

반군이 주로 급조폭발물(IED: Improvised Explosive Device)을 동원하면서 방어에 취약점을 보이기 시작했고 비대칭 환경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전차는 대전차 공격이나 반군 공격에 제한 적인 방어 능력을 보였습니다. 

 

영국 정부는 2010년 전략국방안보검토(SDSR)을 발행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소련이 서유럽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대 테러전의 시대에 전차의 효용성은 크게 낮아졌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미-영 양국은 서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전차 전력을 철수했고 영국 육군은 챌린저 2 전차를  40% 이상 감축했습니다. 

 

한편 1991년에 건국한 러시아는 소련 붕괴 직전 T-72 차체를 활용하여 재설계한 3세대 전차인 T-90을 1993년부터 실전 배치했으며, T-90은 1999년 체첸전쟁에 투입되면서 천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러시아는 RPG 공격을 여러 차례 받고도 무사히 굴러간 T-90의 성능에 만족했으나 서방 세계 전차에 밀리지 ㅇ낳는 차기 전차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차세대 전차 개발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러시라 국영 방산업체인 우라바곤자보드사는 1995년 일명 오비 엑트 195로 명명된 차세대 전차 개발에 착수했으며, 이는 2000년 러시아의 관계 지를 통해 공식적으로 공표됐습니다. 언론이 임의로 T-95라 부른 오비 엑트 195 SMS 2009년에 실전 배치를 개발 목표로 삼았으나 사업이 순탄하지 않아 반복해서 지연되었으며, 결국 러시아 정부는 2010년 5월 자로 사업비용을 모두 제외함으로써 개발 계획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해당 전차는 결국 실물로 공개 되는 것이 없어 추정으로 밖엔 실체를 알 수 없으나, 일단 기존 러시아 전차 계열의 설계를 탈피해 새로운 전차 형상을 지향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기존 소련 전차와 달리 차체를 키우고, 신형 유기압 현가장치를 도입했으며, 승무원 좌석을 모두 차체에 위치시키고 다른 전차 구성품으로부터 결기 시킨다는 아이디어 등은 기존 소련 전차와는 크게 차별화된 요소였습니다. 

 

특히 T-95 계획을 통해 러시아 육군이 구상하고 있는 미래 기갑 전력의 모습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향후 러시아의 전차는 기존 T 계열로 일컬아지는 소련식 전차 설계로부터 완전히 탈피한 것이며 최첨단 기술을 다량 도입할 것이라는 사실이며 이를 반증하듯 이고르 세르게예프 러시아 국방장관 은 향후 러시아 국방부 T-72나 T-80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였으며 2010년 실전 배치를 목표로 신형 전차를 도입하여 구형 전차와 모드 교대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T-95는 반복해서 사업이 지연되다가 2010년 러시라 국방부의 국방검토회의 후 오비 엑트 195 관련 개발 예산을 모두 취소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사업도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아르마타전자 관련 동영상

하지만 불과 1년 뒤인 2011년 러시아 국방부는 다시 차세대 전차 개발을 재개했으며, 이를 아르마타 범용 전투 플랫폼으로 명명했습니다. 아르마타는 앞서 취소한 오비 액트 195 전차와 1999년 옴스크 방산 전지회에서 단 한 번만 공개했던 블랙 이글 전차를 설계 기반으로 삼은 모듈 방식의 군용 전차 시리즈 계획이 되었습니다. 

 

아르마타 계획은 공용 설계 기반이 되는 차체를 개발한 후 이를 바탕으로 T-14 아르마타 전차, T-15 중 보병 전투차, 전투 공병 차, 장갑 구난 구호차, 중 보병 수소차, 전차 지원 전투차 및 자주포를 개발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아르마타 플랫폼의 개발이 완성되면 러시아의 기존 구형 전차 및 장갑차량을 모두 대체할 것으로 계획 중입니다. 

 

T-14의 명칭인 아르마타는 라틴어의 아르마(무기라는 의미)와 그리스어의 아르마(전차라는 의미)에서 따왔습니다. 

우랄바곤자보드가 본격적으로 아르마타의 설계 개발에 착수한 것은 2009년이었으며, 첫 결과물인 아르마타 전투 플랫폼 시제품을 일반에 공개한 것은 2013년 우라바곤자보드의 본사가 위치한 니즈니 타길에서 열린 2013년 러시아 무기 엑스포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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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랄바곤자보드는 2014년 아르마타 차체를 활용한 2S35 칼리 샤-SV 자주포 시험에 들어갔으며, 오버 엑트 148로 불린 첫 아르마타 전차 출고 차량은 2015년 모스크바 전승 기념 퍼레이드 때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지만 하지만 행진 리허설을 진행하던 중 T-14가 갑자기 정지해 버렸고 이에 군은 황급히 전차를 견인해 치우려고 했으나 이조차 용이하지 않아 고생하다가 약 15분 후 자력으로 행사장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방송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아르마타는 2015년부터 실전 배치에 들어갔으며, 최초 계획 상으로는 2020년까지 총 2,300대를 실전 배치할 예정이었습니다. 초도 물량은 타만 사단의 제1호 위전 차 연대에 배치할 예정이며, 정부 수락 검사가 끝나고 운용 판정이 나오면 2020년부터 배치에 들어가 현용 T-72B3와 교대할 예정입니다. 러시아 국방부는 T-14 전차의 시험 운용이 2019년부터 시작될 것임을 2018년 12월 자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2. 아르마타 전타 특징 알아보기 

우선 아르마타가 타 전차 체계와 구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승무원이 모두 차체 부분에 탑승하여 포탑을 원격으로 조작하는 무인 원격 조종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러시아는 우선 포탑에 대해서만 무인 원격화 설계를 적용했으나, 향후 기술과 운용 경험이 축적되면 완전 무인화가 가능한 로보틱 전차로 진화할 수 있으며 이 무인 전차는 공세작전 때 기갑부대의 선봉을 맡을 계획입니다. 

 

아르마타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며 우선 차체는 승무원이 탑승한 전면부와 파워팩이 장착된 후면부로 나뉘며, 그 위에 원격 조종 방식으로 움직이는 포탑이 중앙에 있습니다 해치는 차체 전면에 세 개가 뚫려있으며, 좌측에는 운전수 용해치, 중앙에는 포수용 해치, 그리고 우측은 전 차장용 해치가 나 있습니다. 세 승무원의 자석은 캡슐 형태로 된 장갑판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승무원 탑승 구역은 자동 급탄 장치, 엔진실 및 무장 공간과 격벽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아르마타 사격장면영상

아르마타의 외부 실루엣은 최대한 가시성을 낮출 수 있도록 설계했으며, 아르마타의 장갑은 강철 장갑 위에 금속 세라믹판을 올려 STANAG 4569 5단계 (500m 거리에서 포구 속도 1,258m/s인 25mm APDS-T 탄 혹은 TLB 073을 견디거나, 25m 거리에서 155mm 고폭탄을 견디는 수준) 성능을 발휘합니다. 

 

T-14는 현대 전차의 트렌드에 맞게 외부에 추가 능동/수동 장갑을 장착할 수 있습니다. 아르마타는 RGP 대전차 공격을 견디기 위해 전차 전면에는 반응 장갑이 장착되어 있으며, 차체 후면은 슬랫 아머를 장착해 방호력을 높였을 뿐 아니라 신형 폭발 반응 장갑(ERA: Explosive Reactive Armor)이 적용되어 있어 구형 ERA장갑에 비해 날개 안정 분리 철갑탄(APFSDS)에 대한 방어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됐습니다. 포탑 상부에는 기상관측 마스트, 위성 통신 안테나, GLONASS 위치 기반 체계, 데이터링크 안테나, 무전 안테나가 뻗어있습니다. 

 

T-14의 가장 극적인 변화는 생존성 부분인데, 우선 아르마타의 가장 큰 특징은 승무원을 상대적을 높이가 낮은 차체에 모드 탑승시켰으며, 차량에 실리는 엔진 및 기타 구성품들과 격벽으로 분리시켜 보호했습니다. 장갑 역시 영국의 초박 장갑처럼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복합 장갑을 채용했으며, 그 위에 폭발실 반응 장갑(ERA)을 추가로 장착해 방어력을 크게 높였습니다. 

 

또한 러시아 전차로는 처음으로 능동형 방어체계, 통제 APS을 채택한 것도 아르마타의 특징입니다. 

이는 전차에 대한 근접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시스템으로, T-14 하드 킬 방식인 아프가닛(AFGHANIT) 능동 방어체계를 채택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개발한 능동 방어체계인 트로피와 마찬가지로 적의 근접 대전차 공격이 이루어질 경우 운동 대응 에너지를 이용해 탄두를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아르마타에는 능동형 전자 주사식 레이더 (AESA)가 설치되어 있어 항공기 주변 탐지하다가 비행체에 대한 대응이 필요해지면 대공 기관총을 이용하여 미사일, 혹은 비행체를 제거합니다. 

 

아르마타에는 전자광학/적위선(EO/IR) 기반의 레이저 경고 수신기 (LWR: Laser Warning Receiver)가 포탑 앞에 설치되어 전면부 180도를 탐지하며, 소형 센서 4개가 포탑 측면과 후면에 퍼져 설치되어 360도 전체에 대해 경계를 실시합니다. 

 

화력 면에서 T-14는 125mm 2A82-1M 활강포를 채택했으며, 포탄은 차체와 포탑 사이에 수직 원통형으로 장정되어 있다가 자동 급탄장치를 통해  한 발씩 장전되도록 설계됐습니다. 포탑에는 총 44발, 그리고 발사관 안에 한 발이 들어가므로 한 회 출격 당 최대 45발의 포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T-14의 포신은 레이저 유도식 미사일도 발사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며 최초에는 T-14의 주포 발사 간 포탄이 심하게 요동치는 모습이 잡혀 포신 안정장치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이는 지속적으로 개발이 진행되면서 계속 안정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동성의 면에서 T-14는 기동송 확보를 위해 서방 전차들에 비해 중량을 낮춰 62톤에 맞추었습니다. 또한 효육적인 디젤 엔진을 적용하고 기존 전차보다 개선된 현가장치를 장착함으로써 항속 거리와 전략적 기동성이 모두 기존 러시아 전차에 비해 크게 좋아졌습니다. 

 

T-14 SMS 1500마력급 가스터빈 엔진을 장착했으며 변속장치는 총 8단계 변속이 가능하고 확이 되지 않았으나 아르마타에는 전기식 변속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차체 중량을 낮추었다고 알려졌으며 그 덕에 추가 장갑을 더 늘린 수 있었습니다. 

현가장치는 양 측면에 7개의 이중 고무 타이어 도로주행용 차륜으로 구성됐습니다. 

 

T-14는 도로에서 최대 90km/h로 주행할 수 있으며, 항속 거리는 최대 500km 정도로 알려졌습니다. 대부부 느이 러시아 전차는 도로 주행용 차륜이 여섯 개로 구성되어 있으나 T-14의 현가장치는 양 측면에 7개의 차륜을 장착했으며 맨 앞의 바퀴는 아이들러이고, 구동용 스프로킷이 맨 뒤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무인 포탑은 여러 면에서 획기적인 접근 방법으로 평가받습니다. 우선 포탑에 탑승 인원이 없기 때문에 안정성이 높아졌고 자동화가 이루어졌기 대문에 승무원의 업무 부담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향후 러시아는 T-14 아르마타를 완전히 무인화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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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개발되지 말았어야 할 핵무기 실험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핵을 발견은 양날의 검으로 인류에 훌륭한 에너지원이자 무시무시한 폭탄을 제조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핵실험에 관한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016년 1월 복한 조선 중양 TV에 한복을 입은 리춘히 아나운서가 등장하면서 올해 일흔두 살인 아나운서는 조선 중앙 TV에 대표적인 간판스타였습니다. 2006년 북한이 첫 핵실험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을 때, 2011년 김정일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리 아나운서가 등장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김정일의 사망 이후 방송을 끝인 줄 알았던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은 뭔가 또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등장한 리 아나운서는 특유의 격양된 목소리로 북한이 처음으로 수소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습니다.라고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북한은 2006년과 209년, 2013년에 원자폭탄 실험을 했습니다. 수소폭탄은 원자폭탄보다 만들기 어렵고 위력도 수천 배나 강하기 때문에 북한이 정말 실험에 성공했는지는 검증이 필요합니다. 

 

핵폭발 이미지 

성공 여부를 떠나 북한이 여전히 핵무기 개발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확인됐습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열었고 새로운 대북 제재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하는 핵무기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미국 언론인 위신 턴 포스트는 -1945년부터 2016년 1월 6일 북한까지 총 2055번의 핵실험이 있었다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핵실험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세계 최초의 핵실험은 1945년 7월 16일 이뤄졌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던 중이었습니다.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아인슈타인의 편지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아인슈타인 박사입니다. 독일 출신으로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고 광전효과 연구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하안 아인슈타인은 나치의 집권을 피해 1933년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39년관 1941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빨리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축구했습니다. 히틀러의 독일이 핵폭탄을 만들고 있으니 미국이 보다 빨리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독일의 위력은 세계를 집어삼킬 기세였고 불안한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핵무기를 만드는 연구였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고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과학자들도 힘을 보탰습니다. 

가제트 핵 실험의 폭탄인- 가제트 폭탄의 모습

3년의 노력 끝에 맨해튼 프로잭트 팀은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 엘라모 고도 사막에서 세계 최초의 핵실험을 실시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비밀이었던 이 핵실험에는 트리니티라는 암호명이 폭탄에는 가제트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가제트는 오전 5시 29분 45초에 성공적으로 폭발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핵폭탄을 하늘에 엄청난 섬광을 만들어 냈고 12km까지 버섯 기중을 만들었습니다. 실험 장소로부터 240km 나 떨어진 곳에서도 핵폭탄이 만들어낸 빗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가제트는 TNT20 킬로톤(kiloton)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 증명됐습니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뉴멕시코 주에선 뭔가 이상한 일어났다는 불안감으로 가득 챴습니다. 정부는 공군 기지에 있던 탄약 창고가 폭발한 것 일고 속였습니다. 

 

핵폭발영상 

2.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꼬마와 뚱보

최초의 핵실험은 핵무기가 정말 가능한 것인지 그 위력은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최초의 핵실험이 트리니티였다면 핵무기가 인류에 첫 신고식을 한 곳은 일본 히로시마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항복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끝까지 연합군과 대치했습니다. 미국은 새로 발명한 핵무기를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했습니다. 리틀 보이라는 이름의 이 폭탄은 히로시마 600m 상송에서 폭발했습니다. 폭발 당시 사망자먄 8만 명, 이후 방사능 오엽으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수십만 명에 달했습니다. 

 

사람들은 단 한 번의 폭발로 도시 하나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폭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과학적 도박을 했습니다. 성공적인 핵폭발을 자축했습니다. 1945년 8월 9일에는 일본 나가사키의 두 번째 핵폭탄 팻맨(Fat Man) 투하됐습니다. 나가사키에서 천 넉 달 동안에만 6~8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은 그 해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낸 일등공신이 꼬마와 뚱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핵폭탄의 사용이 적적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습니다. 사망자 대부분이 민간인이었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조차도 평생 후유증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갔습니다. 핵폭탄이 전쟁을 파릴 끝내긴 했지만 전쟁이 몇년 더 지속됐다고 해서 원자폭탄만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특히 미국이 나 가사 킹 두 번째 핵폭탄을 떨어뜨린 것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기보다 두 번째 핵폭탄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많습니다. 목적의 정당성을 떠나 핵폭탄의 위력이 사망자 수로 증명된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핵실험이었습니다. 

 

3. 최초의 수소 핵폭탄 실험 아이비 마이크

원자폭탄이 우라늄 원자핵을 분열시키는 과정에서 나오는 열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수소 폭탄은 수소 원자핵의 유합 반응을 이용합니다. 핵융합 과정에선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됩니다. 수소 폭탄의 위력은 원자폭탄의 수백~수천 배입니다. 

 

수소폭탄은 미국에 귀화한 헝가리의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가 1951년 폴란드 수학자 스테니 슬로 울람의 구상 (분열 폭탄을 핵융합을 위한 기폭제로 쓸 수 있다는 것)을 토대로 만든 텔러-울림 설계에 바탕해 만들어졌습니다. 

 

최초의 수소 핵폭탄의 이름은 아이비 마이크입니다. 첫 실험은 1951년 태평양의 산호초 섬에네웨타크에서 진행됐습니다. 아이비 마이크의 위력은 tnt1040만 t으로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핵폭탄의 450배에 달했습니다. 

 

태평양의 산호초섬 에네웨타크(Enewetak Atoll)에서 1956년에 행해진 핵실험. 이 섬에 서 20세기 중반에만 여러 차례의 핵실험이 있었다.

원자폭탄에 이어 수소폭탄까지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미국은 세계 엣 가장 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가진 나라이자 유일하게 핵폭탄을 써본 나라인 미국은 무서운 속도로 핵무기 수를 늘려 나갔습니다. 

미국 핵실험 사상 가장 위력이 컸던 것은 1954년 3월 실험한 수소폭탄 캐슬 브라보였습니다. 실험 당시 5만 5000도 C의 열풍이 만들어졌고 200km 거리까지 충격파가 전해졌다고 합니다. 

 

미국은 1962년 한 해에만 96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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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국에 질 수 없어 소련의 폭주를 하다. 

냉전시대의 또 한 축이었던 소련도 핵무기 개발에 욕심을 냈습니다. 미국이 1945년 핵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확인된 위 소련의 마음은 더 급해졌습니다. 소련은 독일 나치 정권에서 핍박받았던 유대계 과학자들을 납치하다시피 데려와 핵무기 개발에 투입시켰습니다. 

 

1946년부터 원자로 건설을 시작했고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의 초원 세어 처음으로 원자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소련의 첫 핵폭탄(RDS-1)은 첨보 활동을 통해 미국의 풀루토늄 설계도면을 복사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원자 핵폭탄은 미국의 것을 베낀 것이었지만 수소 핵폭탄은 자체 기술로 완성했습니다. 

매국이 만든 수 소폭탕은 습식 수소폭탄이었습니다. 폭탄의 원료 인중 수소를 액상으로 보존하기 위한 별도의 냉각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무기로 상용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소련은 이런 단점을 보완한 건식 수소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소련은 1953년 TNT40만 톤급의 건식 수소폭탄 RDS6S를 만들었습니다. 

1955년 만든 수소폭탄은 1.6메가톤 급의 위력을 보였습니다. 당시 폭발의 위력이 너무 커서 폭발 지점에서 수십km 떨어져 있던 병사 한 명이 폭발로 파괴된 건물에 깔려 숨졌고, 실험 장소 외각의 작은 마을에 있었던 두 살 소녀도 대비 소 밖에서 놀다가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수소폭탄의 위력을 나타내는 동영상 

1961년 소련이 만든 수소폭탄 '차르 붐바'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강력한 힘을 가진 폭탄으로 기록됐습니다. 차르는 황제, 붐바는 폭탄이라는 뜻입니다. 

1961년 10월 30일 소련 북극해 군도 노바야 제믈랴 제도에서 실행된 이 핵실험은 폭탄의 황제라는 이름값을 보여줬습니다. 위력은 무려 TNT5800만T이었습니다. 1000km 떨어진 곳에서도 폭발하는 모습이 보였고 폭탄으로 만들어진 지니 파는 지구를 세 바퀴나 돌았습니다. 

 

실험 장소에서 1000km 떨어진 핀란드에서 차르 붐바의 위력에 유리창이 깨진 정도였다고 합니다. 차르 붐바의 힘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 자폭탕의 3800배였습니다. 

 

5. 핵실험을 한 나라들 과연 어떤 나라들일까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 번째로 핵실험에 성공한 나라는 영국입니다. 영국은 돌 일과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 나라 핵 무개 발에 몰두하기 어려웠습니다. 영국은 자체적으로 개발하던 정보를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넘기고 대신 핵무기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정보를 건네받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영국이 직접 핵실험을 한 것은 1952년 10월 2일이었습니다. 

 

영국은 호주 몬테벨로 섬에서 처음 올 핵실험을 했습니다. 위력은 25 킬로톤, 비슷한 시기 미국과 소련이 보유한 핵무기와 비교하면 힘이 많이 떨어졌지만 영국은 독자 개발했다는 데 의미를 두었습니다. 

1957년에는 수소폭탄 실험도 성공했습니다. 

 

프랑스의 핵실험은 영국보다 늦은 1960년 2월 13일 알제리 남부 사하라 사막에서 처음 실시됐습니다. 

첫 번째 폭탄의 이름은 푸른 날쥐였습니다. 원자 핵폭탄이었고 위력은 70 킬로톤이었습니다. 1968년에는 수소폭탄 실험에도 성공했습니다.

 

중국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핵무기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첫 실험은 1964년 10월 16일 위구르 지역의 소름 호수인 로프노르에서 실시했습니다. 원자 핵폭탄이었고 위력은 22 킬로톤이었습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보단 많이 뒤졌고 위력도 약한 편이었지만 중국은 세계 어세 다섯 번째,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됐습니다. 

3년 뒤인 1967년에는 수소폭탄 실험도 성공했습니다. 

 

다섯 나라 외에도 인도가 1974년과 1998년 핵실험을 했고 파키스탄도 1998년 두 번의 핵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핵실험을 했다는 것이 곧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수소폭탄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북한은 2006년도 2009년, 2013년 원자폭탄 실험을 했습니다. 

 

 

6. 핵을 가진 인류의 미래는?

북한이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고 발표한 날 위싱턴포스트는 71년 동안 인류가 행한 핵실험을 정리해 발표했습니다. 위싱턴포스트에 따르면 1945년부터 2016년 1월까지 8개 국가가 총 2055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가장 많은 핵실험을 나 나라는 미국으로 1945년부터 1992년까지 1032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소련은 1949년~1990년까지 715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1960년부터 1996년까지 1998번의 핵실험을 한 프랑스였습니다. 

 

영국은 1952년부터 1991년까지, 중국도 1964년부터 1996년까지 45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경쟁적으로 핵폭탄을 개발하던 나라들은 1996년 유엔 산하 포 관적 핵실험 금지 조약기구(CTBTO)에 서명하고 추가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현제 CTBTO에 서명한 나라는 183개국이며 북한과 인도, 파키스탄은 이조약에 서명하지 않았고 미국과 중국은 서명은 했지만 비준은 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21세기에 핵실험을 한 유일한 나라입니다. 

 

핵을 가진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제2차 세계 대전 후 세계가 정면충돌하지 않고 21세기를 맞은 것은 열강들이 서고가 갖고 있는 핵무기의 힘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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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3~1856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연합군이 크림반도, 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국가들끼리 처음 벌인 전쟁으로 이 전쟁에서 패한 후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백의의 천사'폴 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야전병원에서 활동하여 간호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여성들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열었습니다. 

1854년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격돌하는 영국군과 러시아군.

크림전쟁 개요
전쟁주체 - 러시아vs영국, 오스만투르크, 사르디니아
전쟁 시기-1853~1856
전쟁터- 크림반도와 흑해, 백해, 발트해, 동유럽 등등
주요전투- 시노페 해전, 알마 전투, 발라클라바 전투, 세바스토폴 포위전

 

1. 하나 된 유럽 그 속의 불만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체제 하의 유럽은 한 동안 단결 속의 평화를 구가하는 듯했습니다. 1815년에 국제 평화, 세계 질서, 기독교 세계의 안보를 모토로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신성동맹을 결성했으며, 이후 영국, 교황령(참여 거부), 튀르크(비기독교 국가라 하여 참여를 권유하지 않음)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일단 이 동맹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또한 역시 1815년에 본래의 대 프랑스 동맹이던 4국 동맹(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도 부활했습니다. 

이후 신성동맹은 다분히 이념적인(가맹국의 행동에 대한 구속 조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래도 헤겔은 이를 유럽 통합 정신의 구현으로 찬양했습니다. )

 

4국 동맹 1818년에 프랑스를 추가하여 5국 동맹이 되었습니다. 실질적인 국제협의 기구가 되어 빈 체제 유지에 힘을 썼다고 합니다. 

1821년에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대항해 사르디니아에서 일어난 혁명에 러시아가 병력을 지원해준 일이 한 예였습니다. 

단결된 유럽은 비기독교 제국에 맞서 어깨를 나란히 싸우기도 했습니다. 

 

1821~1832년까지 벌어진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영국, 러시아, 프랑스가 오스만튀르크와 싸워 그리스 독립을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는 유럽 문명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기에, 이는 십자군 전쟁 이래 유럽이 거둔 의미심장한 쾌거라고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단경에는 큰 불안 요소가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바로 두강 대국,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이었습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 단일 패권 세력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대외전략에 따라 나폴레옹 타도에 앞장섰으나 이제는 러시아를 또 다늘 패권 세력 후보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신성동맹에 가입하지 않으면서 4국 동맹을 주도하고, 종전의 적인 프랑스도 그 동맹에 끌어들인 것은 확실히 러시아를 견제하는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도와 이탈리아 혁명 진암에 병력을 보내고, 남아메리카의 예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스페인을 지지하는 등의 행동도 러시아 입장에서는 구체제 유지 -복원이라는 빈 회의의 대의에 충실한 것뿐이라지만, 영국의 눈에는 야심 가득한 세력 팽창 시도로 보였습니다. 

 

당시 크게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언론도 러시아 공포증 확산에 한몫했습니다. 언론은 러시아의 야심을 경 계해 야한 드는 종말론적, 음모론적 보도로 꾸준히 독자를 자극했는데 표트르 1세의 유훈이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특집 보도가 그 최고봉이었습니다. 

 

수준 낮은 위조문서일 뿐이었던 이 유훈은 러시아는 장차 유럽을 정복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전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크림전쟁 관련 상황 지도   출처 :doopedia.co.kr

이런 영국에 러시아도 불만스럽기는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겉보기로는 러시아가 유럽의 지도자가 되면서 건국 이래 최대의 영광을 누리는 듯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국제 질서의 균형자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독일 전쟁만 해도 러시아로서는 유럽 문명의 고향을 되찾는다는 명분 외에 그리스 정교의 보하자로서 이교도들의 손에서 신도시들을 구한다는 유럽 문명의 고향을 되찾는다는 명분 외에 그리스 정교의 보호자로서 이교도들의 손에서 신도들을 구한다는 명분도 가졌지만, 독립된 그리스는 대체로 친영 국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말았습니다. 

 

2. 동방의 위기 과연 어떻게 

 

크림전쟁 관련 동영상

그러나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당시 유럽의 세력 균형에 가장 큰 변수가 되었던 것은 튀르크였습니다. 188세기 이래 계속 내리막이었던 오스만 튀르크는 이제 유럽과 아프리카에 뻗쳤던 세력권을 대부분 상실하고 튀르크의 본거지를 지킬 힘조차 의심받고 있었습니다. 유럽 각국은 저마다 튀르크에게서 영토와 이권을 빼앗으려 하면서도, 자친 제국 자체가 붕괴하여 동방이 대혼란에 빠지거나 다른 나라가 동방의 패권을 거머쥐는 일을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독립전쟁이 마무리되자마자, 시실상 독립 상태에 있던 이집트가 무하마드 알리가 시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1832년에 그리스 독립전쟁에 이집트 병력을 지원해준 대로 시리아를 내놔라고 튀르크 조정을 요구하고, 이것이 거부되자 전쟁에 들어갔습니다. 

 

코나 전투에서 이집트군이 튀르크 군을 대파하면서 독자적으로 시리아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달은 튀르크는 유럽 각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응한 나라는 러시아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1833년에 흑해 함대를 파견하여 튀르크를 돕고 나서자, 영국과 프랑스도 허겁지겁 함대를 파견했습니다. 튀르크를 돕자는 뜻이 아니라 러시아가 자친 튀르크를 지배하에 둘 지도 모르는 상황을 방지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외국의 중재로 이집트가 시리아에서 물러나기로 하고 튀르크의 위기가 해소되자, 러시아는 튀르크와 비밀리에 운키아르스켈레시 조약을 맺어 상호방위 동맹을 수립하면서 다른 외국 군함에게 튀르크의 항구를 8년간 폐쇄하기로 했습니다. 

이사실을 알게 된 영국과 프랑스는 강력히 반발했으며 우리는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러시아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3국 동맹에 합 이하고, 다시 오스트리아와 뮌헨 그레츠 협정을 맺어 중부 유럽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정책을 지지하는 데신 튀르크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을 지지받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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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도 이에 맞서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과 새로 4국 동맹을 맺었습니다 바야흐로 튀르크를 둘러싸고 유럽 주요 열강 사이의 분의 각 심상치 않아졌으며, 흑해에 파견된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의 함대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1839년에 이집트와 튀르크는 다시 시리아를 놓고 충돌하게 됩니다. 

당시 튀르크는 마흐무드 2세의 서구식 개혁으로 면모가 일신해 있었으나, 이번에도 이집트군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서구 열강은 이법에도 개입했는데, 다만 러시아가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 가운데 영국은 튀르크를 프랑스는 이집트를 지원함으로써 서로 보조가 어긋났습니다. 

 

1840년에 이집트가 시리아의 남부를 차지하되 나머지 점령지는 튀르크에 둘려주도록 하는 내용으로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합의안을 내놓자 이집트는 프랑스를 믿고 거부했으나, 영국이 곧바로 실력 행사에 들어가고 프랑스가 한걸음 물러섬으로써 결국 굴복했습니다. 

 

다시 프랑스와 다른 유럽 4개국이 협상 테이블에 않아 튀르크 문제를 논의한 결과, 1841년에 해협 조약을 체결하여 튀르크가 평상시에는 흑해로 진입하는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을 폐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즉 어떤 유럽 국가도 해군으로 튀르크를 공략하지 않도록 합의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한때 유럽이 영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두 진영으로 나누어 대전이라도 치를 듯했던 상황은 마무리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불씨는 몇 년 뒤 다시 한번, 이번에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피어올랐습니다. 

 

3. 과거의 적들과 손잡고 과거의 전우와 싸우다. 

문제는 '성지' 팔레스타인의 관할권에 있었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이 땅에 대해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의 보호자 자격을 내세우며 현지의 기독교 성직자와 교회에 대한 보호권 명목으로 사실상의 관할권을 튀르크에게서 용인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의 정확한 하계와 법적 근거는 분명하지가 않았는데 (1774년에 러시아와 튀르크가 맺은 조약에 아주 짧고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는 조항이 전부였습니다. ) 

 

1851년에 새로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프랑스 쪽에서 그러고 보니 우리도 18세기에 튀르크와 비슷한 협약을 맺었습니다. 며 팔레스타인의 가톨릭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관할권을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톨릭교도는 그리스 정교도의 십 부 느이 일에도 못 미쳤던 만큼 다소 무리한 요구였으나, 튀르크는 프랑스의 위협이 두렵기도 하고, 러시아의 과도한 관할권 행사가 못마땅하기도 해서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연히 발끈한 러시아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 남부 주둔군에 동원령을 내리고, 흑해 해군을 경비 태세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주제 영욱 대사와 면담하다가 우리가 손잡고 튀르크를 분할합니다. 

 

셀비아, 불가리아를 독립시키고, 이집트는 영국령으로 하는 게 어떻소?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엄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아무튼 그 소식을 접한 런던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특히 오래전부터 대표적인 반러시아론자로 유명했던 파머스턴 외무장관은 러시아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며 치를 떨었습니다. 

 

 

아무튼 러시아는 1853년 초 멘시코프를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해 프랑스에 대한 관할권 허가를 철회하도록 종용했습니다. 이에 프랑스는 그리스의 살라미스까지 해군을 출동시키고, 영국도 반러시아론자 스트 레드퍼드를 튀르크 주재 대사로 파견했습니다. 

 

스트 레드퍼드는 결국 멘시코프가 빈손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다뉴브 공국으로 불리는 발칸 반도의 왈라키아와 볼 다비아에 병력을 보내자(이 지역은 15세기 말부터 튀르크 제국에 속한 자치령이었는데, 러시아와 튀르크의 꾸준한 영토권 마찰이 있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가 나섰습니다. 

 

러시아의 행동이 자친 발칸 전역에서 분쟁을 일으킬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우호관계에 있는 러시아와 정면으로 맞설 수 없던 오스트리아는 1853년 7월에 빈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대표들을 초청하여 중재회의를 열었습니다. 

 

성지 관할권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체면을 세워주고, 대신 러시아는 튀르크나 다뉴브에 대한 침공을 포기한다는 선에서 대략 합의되었으나 스트 레드퍼드가 아주 사소한 문제를 꼬집고 나서면서 회단은 결렬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이후에도 거듭 중재안을 내놓았고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깨달은 러시아도 이에 호응했으나, 영국의 강경한 태도에 번번이 무산되었습니다. 

 

1853년 10월, 영국의 부추김에 따라 튀르크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많은 경우 이때를 크림전쟁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러나 유럽 세력끼리의 격돌은 그 뒤 1년이나 지나서 시작되었기에, 기점을 1854년으로 잡기도 합니다.)

 

1854년 1월에 영국과 프랑스의 해군이 흑해에 진입했으며, 3월에는 영국, 프랑스와 튀르크의 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로써 불과 얼마 전, 그리스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손잡고 튀르크와 싸웠던 두나라는 이제 편을 바꾸어 어제의 전우와 맞서게 되었습니다. 

 

6월에는 오스트리아도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했는데, 러시아와 실제로 싸우기보다는 압박하려는 목적이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이후에도 종전 때까지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9월에는 영국, 프랑스 원정군이 크림반도에 상륙, 10월에 세바스 토플 공략을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전쟁이었습니다. 기독교 유럽의 대동단결을 내걸었던 신성동맹도, 빈 체제도 결정적으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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