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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저격수는 20세기 들어서 진화를 거듭하여 전쟁의 세기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전쟁과 분쟁이 벌어지면서 저격수의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실전에서 얻은 숱한 시행착오와 갑진 경험, 그리고 계속되는 전술 개발과 훈련으로 저격수는 갈수록 정예화되어 갔습니다. 저격용 소촉과 망원 조준경, 야시경 등 관련 기술의 개발은 더욱 정교한 필살 저격 무기체계의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격수는 현대전의 필수 전력으로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현대의 저격수 훈련 이미지   출처: 미육군

1. 제1차 세계대전, 저격수의 본격적인 등장 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 전투에서 저격수는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했습니다. 개전 초 거의 모든 참전국이 저격수를 운용했지만 망원 조준경을 갖춘 저격수 부대를 운영한 나라는 독일 제국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광학기술과 관련 산업이 발달한 덕분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은 과학기술이 국가를 위해, 전쟁을 위해 적 그적으로 나선 전쟁이었습니다. 특별히 망원 조준경을 갖춘 돌일 제국의 저격수들은 참호 위로 머리를 드러내는 적 병사를 정확하게 조준해 사살하였습니다. 

독일군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망원조준경을 채용하여 정확한 조준사격을 했다. <출처: Public Domain>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처음에는 이러한 정확한 사격이 우연히 명중시킨 것이라고 믿었지만, 나중에 독일군의 망원 조준경을 발견하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독일 제국 육군은 대전 내내 이 저격수들의 활약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에는 독일의 뛰어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산업계가 제작할 수 있었던 고품질의 렌즈가 한 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저격수의 유효성과 살상력을 한층 더 높인 셈입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머리를 참호 밖으로 내밀지도 않고도 전방을 관측할 수 있는 관측용 포대경을 사용했습니다. 

나무 꼬챙이를 이용해 철모만 참호 밖으로 올려 적 저격수의 사격을 유발해 상대 위치를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영국군은 저격수 훈련소를 설치해 전문 저격수 양성에 들어갔습니다. 영국군의 헤스케스 헤스케스-프리처드 대위는 1915년 공식 허가를 받고 저격수 양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1916년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 전선에 있는 랭엄에 제1군 저격, 감시, 정찰 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학교는 처음에는 6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연합군에서 파견된 많은 군인을 교육해 빠른 속도로 전문 저격수를 배출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저격수가 적 사격을 받지 않고 목표물을 관측할 수 있는 포대경, 적의 사격을 유발함으로써 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종이로 만든 가짜 병사 머리 등도 고안해 실전에 응용했습니다. 

가짜 머리에는 고무 튜브를 달아 담배 연기를 내뿜게 해 적이 속아 넘어가도록 유도했습니다. 일단 적이 사격하면 이를 통해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한 뒤 그쪽으로 포격을 가해 무력화했습니다. 

 

헤스케스-프리처드 대위는 저격수와 관측수가 2인 1조로 짝을 이뤄 활동하면서 시너지를 높이는 방법을 비롯해 다양한 현대 저격 기술을 도입하였다고 하고 훈련과정에서 관찰력과 기억력을 동시에 높이는 '킴의 게임'을 도입해 현대 저격수 교육의 바탕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이게임은 참가자들에게 여러 물건을 늘어놓은 것을 보여주고 잠시 눈을 떼게 한 다음 약간의 변형을 가한 뒤 참가자들에게 변화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맞히게 하는 게임으로 보이스카우트나 걸스카우트에서 즐기는 놀이라고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용 소총으로 독일군은 마우저 소총 98, 영국군은 패턴 1914 엔필드와, 리-엔필드 SMLE MK 3, 러시아군은 M1891모신나강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2. 제2차 세계대전, 저격수 전술의 비약적인 발전 하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을 비롯해 다부분의 국가는 특수 저격수 부대를 일시 폐지했지만 스페인 내란이 벌어지면서 저격수는 다시 한번 등장해 그 효율성을 입증했습니다. 저격수의 공격을 당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저격수의 위험성을 다시 절감하게 된 셈입니다. 

 

1930년대의 특수 훈련을 받은 저격수 부대를 보유한 나라는 소련이 유일했습니다. 저격수는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어서 저격하는 기술을 연마한 것을 물론 정규군과 함께 작전하는 능력도 길렀습니다. 특수전을 강조한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소련 저격수는 정상적인 전투 상황에 초점을 맞춘 훈련을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1939년 11월 30일부터 1940년 3월 13일까지 핀란드와 소련 간에 벌어진 겨울전쟁에서는 저격수의 전설이 탄생했습니다. 

당시 핀란드군 저격수 시모 해위해(1905~2002년)는 겨울전쟁 기간 중 502~542명을 사살했습니다. 

1940년 3월 6일 소련군의 야포와 카운터 저격수의 경 격을 동시에 받아 부상을 입고 후송되기까지 미처 100일일 되지 않는 기간에 이룬 대기록입니다. 당시 전선 전역에 걸쳐 섭씨 영하 40도~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계속된 데다 극지의 겨울이라 해가 떠 있는 시간도 짧았음에도 그는 하얀 설상 위장복 차림으로 숨어 눈 덮인 벌판과 숲 속에서 하루 5명꼴로 적을 사살했습니다. 

 

핀란드 저격수의 전설인 시모 해위해 <출처: Public Domain>

해위해는 러시아 모신나강 소총 파생형의 하나로 핀란드에서 제작한 M/28-30 소총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적에게 발각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소총에 망원 조준경을 장착하지 않고 육안으로 저격했다고 하며 필요한 경우 1931년식 수오미 기간 단총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핀란드군은 기후와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하얀 눈밭에서 흰색의 설상 위장복 차림으로 스키를 타고 소련군 앞에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 이 수오미 기관단총으로 연발 사격한 뒤 순식간에 사라지는 설상 기습 전술을 구사했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눈밭 저편에서 저격수가 날리는 총탄까지 더해지자, 소련군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소련군은 해위해를 하얀 죽음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뛰어난 저격수의 존재가 적군의 사기까지 떨어뜨린 경우입니다.  해위해는 1998년 사격 실력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훈련이라고 짧게 답했으며 당시 핀란드는 저격수를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활용하였고 이는 오늘날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저격수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핀란드인의 '궁즉통'은 현대전의 교리까지 바꿔놓았습니다. 

 

3. 뒹케르크 철수 보호한 영국과 프랑스의 저격수들이다. 

프랑스군과 영국군 저격수들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후퇴하는 아군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출처: Public Domain>

제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전역에서는 개전 초부터 저격수가 다시 등장해 적극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1940년 5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 벌어진 프랑스 공방전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저격수들은 각각 적절한 위치에 은폐한 채 단독으로 활용하면서 독일군의 진격을 상당 시간 지연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병, 기갑, 포병 전력의 유기적인 합동 전술을 특징으로 하는 독일의 전격전으로 프랑스가 빠른 속도로 무너졌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저격수들은 치열하고도 효과적인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저격수들이 맹활약한 대표적인 전투가 뒹케르크 전투 또는 다이 너머 작전으로 불리는 연합군 34만 명의 뒹케르크 철수 작전입니다. 맹렬한 속도로 프랑스 영내로 진입한 독일군은 영국과 가까운 북부 항구도시 뒹케르크를 눈앞에 두고 사흘간 진격을 멈췄습니다. 

 

그 틈에 영국군 원정대와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 병력의 상당수가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대형 군함을 물론 수많은 민간인 선박까지 자발적으로 나서 병력을 본국으로 데려간 것을 두고 뒹케르크 정신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군의 진격 지연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 저격수들이 뒹케르크 주변에서 필사적인 작전으로 독일 보병의 접근을 지연시킨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 이후 영국은 다시 한번 특수 저격수 부대의 훈련을 강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하게 사격의 달인을 키우는 것은 물론 은폐를 위한 특수 위장복을 착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주변 자연환경과 구분이 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적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훈련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이 저격수 훈련 대상을 장교와 부사관에 국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투 부대에 배치된 저격수는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격수의 전체 전투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4. 스탈린그라드, 저격수가 흘린 피의 꽃밭을 이루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영웅적 저격수인 바실리 자이체프(왼쪽). <출처: Public Domain>

제2차 세계 대전 중 저격수의 활약이 가장 잘 알려진 전투 중 하나가 1942년 8월 23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벌어졌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입니다. 이전 투를 계기로 독일은 특수 저격수 훈련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포격과 공습 등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와 벽돌더미로 가득한 도심부는 소련군 저격수들이 독일 국방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기에 안성맞춤의 조건이었습니다. 

건물이란 건물은 다부분 무너져 내린 도시의 폐허 속에 숨어 있는 저격수를 찾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련군 저격수들은 어렵지 않게 독일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소련군 저격수 가운데 명성을 얻은 바실리 자이체프(1915~1991)입니다. 

그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1942년 11월 10일부터 12월 17일까지 11명의 저격수를 포함한 225명의 독일군을 사살했습니다. 자이체프의 활약상은 윌리엄 크리가 그가 1973년 펴낸 논 픽선 [에너미 엣 더 게이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자이체프가 독일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자 그를 제거하기 위해 파견된 독일 귀족 출신의 에르빈 쾨니히 대위와 자이체프 간의 팽팽한 싸움을 그린 내용이 핵심입니다. 이스토리는 2001년 할리우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핵심 플루트가 되었습니다. 영국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주드 로 가 자이체프 역으로 맡았습니다. 

 

 

5. 독일 저격수, 적의 소총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다. 

 

소련군에게 노획한 SVT-40으로 사격하는 독일군 병사. 이 소총은 독일군 저격수들도 즐겨 사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독일어로 사프프쉬첸으로 불리는 독일군 저격수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상당수 양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카르비 너 98K를 쓰다가 나중에 게 베어 43으로 장비를 교체했습니다.  이장 비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 일부 저격수 중에는 소련군으로부터 노획한 망원 조준경 장착 모신나강 1891/30 소총이나 반자동 소총인 SVT-38이나 SVT-40, 체코산 마우저 소총을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자극을 받은 독일 국방군은 저격수 훈련을 1942년 새롭게 부활했으며, 1944년까지 31개의 저격수 훈련 중대를 더해 단위부대 당 저격수 수를 비약적으로 늘렸다고 합니다. 

 

ZG 1229 야시경을 장착해 야간저격용으로 활용된 StG 44 돌격소총 <출처: Public Domain>

독일은 뛰어난 광학기술을 저격수용 망원 조준경에 적용하여 세계적인 광학기업인 차이스를 비롯한 다양한 광학업체에서 저격수용 망원 조준경을 개발해 공급했습니다. 대전 말기에 독일군은 현대 돌격 소초의 선구적인 모델로 평가받는 44년형 돌격소총 stg44에 ZG 1229 야시경을 달아 야간 저격용으로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6. 저격수 42만 명을 양성한 소련에 비해 관심이 적었던 미국!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모두 42만 8,355명의 저격수를 교육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9,534명이 최고 등급을 받았습니다.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6개월 교육반을 2개 운영하면서 모두 5만 5,000명의 여성 저격수를 양성하였다고 하며 이 가운데 2,000명 이상이 실제로 군에서 저격수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소련군은 보병 소대나 정찰 소대에 최소한 한 명의 저격수를 배치한 것은 물론, 심지어 포병이나 전차 부대에서도 저격수를 배치했으며 일부 저격수는 PTRD 대전차 라이플에 망원 조준경을 장착해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소련군 저격수 영웅 중에는 몽골 주변이나 중앙아시아 유목민 출신의 소수민족도 적지 않습니다. 

 

소련은 42만8천여 명의 저격수를 키워냈으며, 그 중 5만5천여 명이 여성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미군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 교육을 실시했으나 기초 교육 수준이었고 전술적인 저격 임무보다 장거리 저격에 치중했습니다. 저격수는 머리 부분은 200M, 신체 부분은 400M 거리에서 맞힐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으나, 주변 환경 속에 자신의 신체를 은폐하는 훈련은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훈련 내용도 훈련장에 따라 서로 차이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배출된 저격수의 실력도 들쑥날쑥했습니다.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이렇게 저격수 교육에 관심을 쏟지 않은 것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가지 미군이 제한적인 지역에만 매치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되었고 미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까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등 은폐가 쉽지 않은 건조지대나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울창한 숲 지대와 관목 지대가 많은 서유럽이나 중부 유럽과는 환경이 사뭇 달랐습니다. 

 

하지만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은 서유럽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잘 훈련된 독일군 저격수를 만나 상당한 피해를 보면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노르망디에서도 독일군 저격수들은 울창한 관목 속에 숨어 미군 부대를 에워싸고 모든 방향에서 총탄을 날렸습니다. 

 

미군과 영국군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와 공격하는 것은 물론 1,000M 이상 떨어진 원걸에서도 정확하게 사격하는 독일군 저격수들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격에 대응하는 능력이 부족한 일부 미군 병사들은 총소리가 들리면 대형을 유지하며 그 자리에서 무조건 엎드렸는데 이는 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위치한 독일군 저격수는 이들을 농작물 수확하듯이 한 명씩 차례로 사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군에게 사로잡힌 독일의 히틀러유겐트 저격수 <출처: Public Domain>

일부 독일군 저격수는 전선 후방으로 이동하기도 했으며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다 미군이나 영국군의 진격으로 후방에 남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럴 경우 저격수는 계속 위치를 유지하면서 식량과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 항복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심각한 병력 손실을 입으면서 10대 청소년까지 군대에 동원한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습니다. 

급히 동원된 이들은 복잡한 부대 전술 훈련은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히틀러 유겐트 시절부터 사격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분대 전투나 소대 전투에는 서툴렀지만 전선에서 입수한 버려진 저격용 소총을 들고 단독으로 저격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대로 훈련받은 저격수는 몇 발의 치명적인 사격을 한 다음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본 전술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자신의 안전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어린병사들은 계속 같은 은폐 장소에서 버티다 죽거나 부상을 입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실탄이 떨어져 항복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고 이런 무모함 때문에 이들은 자살 소년단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독일군 저격수는 연합군의 진격에 상당한 지장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연합군은 독일군의 저격수 교육교재와 전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습니다. 

 

7. 태평양 전선에서도 위협적이었던 저격수가 있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미 해병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저격수를 활발하게 운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태평양 전선에서는 일본군이 저격수를 양성해 실전에 투입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정글과 태평양 도서 지역에서 일본군 저격수는 미군, 영국군, 호주군 등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일본군 저격수들은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고 온몸을 풀과 나뭇가지로 위장한 뒤 작은 참호 속에 숨어 저격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인내심이 강했으며 은폐 장소에서 장시간 숨어 보티는 데 능했다고 하며 정글 전투는 불과 수백 미터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진행되는 경우가 만항 장거리 저격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였습니다. 일본군 저격수는 97식 저격총을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본군을 상대로 연합군도 저격수들을 운용했으며 미 해병대가 가장 활발했습니다. 미 해병대는 M1903스프링필드를 저격용 소총을 사용했으며 미군  M1C개런드도 저격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유럽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은 소수의 저격수를 운용했는데 망원 조준경이 달린 카르카노 모델 1891 소총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8. 베트남 전쟁의 신화 하얀 깃털 저격수 해스콕에 대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활동하던 미 해병대의 저격수 카를로스 해스콕 2세(1942~1999)는 확인사살만 93건을 기록했으며 당시에는 저격수와 관측수 외에 장교인 제삼자의 확인이 필요해 공식 기록이 이 정도에 숫자에 그쳤을 뿐이며 실제로는 300~400명을 사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카를로스 해스콕은 확인사살 93건을 기록한 베트남 전쟁 최고의 저격수였다. <출처: Public Domain>

당시 저격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면서 배트 남군은 해스콕에 3만 달러에 상당하는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하며 미군 저격수를 사살할 경우 북 배트 남군이 통산 8~2,000달러의 포상을 해온 것에 비하면 이는 엄청난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스콕은 자신을 노리는 베트남 저격수를 오히려 차례로 무력화했습니다. 베트남군은 해스콕을 '두 카치 롱 짱- 하얀 깃털의 저격수'로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는 해스콕이 자신의 군모에 하얀 깃털을 단 것에서 비롯하며 해스콕을 제거하기 위해 투입된 북 배트 남군 저격수 부대가 하얀 깃털을 단 미군을 노린 것이 확 식해 지자, 미 해병대 저격수들은 모두 자신의 모자에 하얀 깃털을 달아 적을 혼란에 빠트렸다고 합니다. 당시 미 해병대 저격수들의 끈끈한 연대감을 엿볼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스콕은 다낭 서남 지역의 55 고지에서 관측수 존 버크와 함께 어는 북 베트남 저격수의 망원경 안에서 총탄을 발사해 눈을 관통해 머리에 명중시켰으며 이처럼 양측 저격수가 서로 일직선상에서 서는 것은 드문 경우인데, 이럴 경우 약 측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스콕의 북 베트남 저격수보다 먼저 기만하게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며 코브라로만 알려진 이 북베트남 저격수는 그전에 이미 수명의 미 해병을 사살했는데, 해스콕을 무력화하러 온 저격수였을 것을 짐작된다고 합니다. 

미군이나 남베트남군 포로를 잔혹하게 고문한 되 다랴의 출혈로 숨지게 한 것으로 악명 높아 아파치라는 별염을 얻었던 베트콩 저격소대의 여성 소대장도 해스콕의 총탄에 무력화되었다고 합니다. 

 

9. 목표를 무력화한 일발 필살의 신화- 3박 4일간 포복을 하며...

해스콕은 무려 3박4일 동안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하여 저격을 성공시킨 사례도 있었다. <출처: Public Domain>

헤스콕을 유명하게 한 전과는 1967년 3박 4일간의 끝 질긴 추적 끝에 복 베트남군 고위 장교를 1,500야드(약 1371.6m) 거리에서 저격한 것입니다. 이 임무를 그이 베트남 1차 파견이 끝나기 직전에 이뤄졌다고 합니다. 

헤스콕은 귀국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어려운 임무를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온몸을 초목과 나뭇잎으로 덮고 풀밭 위를 조금씩 포복으로 이동해 사격 지점을 향했다고 합니다. 적은 이러한 그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목표물이 시야에 들오자 그는 단 한 발을 발사해 가슴에 적중시켰습니다. 목표물은 즉시 무력화되었습니다. 

 

헤스콕은 이 3박 4일 동안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잠도 거의 자지 못했으며 용 본도 옷을 입은 채로 해결해야 했으며 배설물을 바지 속에 넣은 채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한 일은 저격수의 어려운 임무를 잘 보여주는 사계로 미 해병대에서 지금도 인용된다고 합니다. 

 

당시 해스콕은 자신의 상징이던 하얀 깃털도 제거하고 작전에 임했으며 저격 임무에 무게를 보여주는 일화들입니다. 

1966년 베트남에 도착한 해스콕은 미 해병대 1개 소대에 1명 이상의 저격수를 배치하는 저격수 양성 프로그램을 맡은 짐랜드 대위에게 발탁되어 훈련을 받았으며 교관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 훈련 프로그램에서 사용했던 구호는 지금도 미 해병대 저격수 훈련 과정에서 사용되며 그 말은 바로 '원샷 원킬(일발 필살)입니다. 이는 국적을 떠나 전 세계 모든 저격수의 전술 목표라고 합니다. 

 

한편 해스콕의 대기록은 이라크 전쟁에서 확약한 네이비실 소속 저격수인 크리스 카일 중사가 확인사살 160건을 기록함으로써 깨졌다고 합니다. 크리스 카일의 삼과 기록은 비극적인 총기사고로 2013년 사망한 후 그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10. 테러와 전쟁으로 계속되는 장거리 저격 기록 경신하다. 

위장복인 길리 수트를 입고 L115A1 저격용 소총을 조준하고 있는 영국 해병대 저격수 <출처: (cc)Francis Flinch at wikimedia.org>

해스콕은 베트남 전쟁 중 2,286m 떨어진 거리에서 목표물을 명중시켜 최장거리 저격의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35년 동안 깨지지 않다가 2002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캐나 가군의 롭 펄롱이 2,430m 거리의 저격을 성공하면서 깨졌습니다. 롭 펄롱의 대 기록은 2009년 11월 영국 육군의 크레이크 해리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2,475m 거리에서 목표물을 무력화하면서 새롭게 갱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기록도 2017년 5월 캐나다 특수부대인 JTF-2의 저격수가 이라크에서 3,450M 거리에서 저격의 성공함으로써 또다시 갱신되었습니다. 저격수의 기술과 전술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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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 민스크 전투에 대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민스크 시내 모습 이미지

1. 인류사 중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을 기습 침공하였습니다. 흔히 동부전선 이록 부르며 제2차 대전을 구성하던 하나의 전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라는 정의 해도 무방한 독소전쟁이 발발을 하게 됩니다. 러시아(소련)에서는 대조국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한마디로 강철과 강철이 정면으로 충돌하였은 인류사 중 최대의 재앙으로 불리는 전투입니다. 

 

역사에 일일이 기록될 수 없을 만큼 그동안 수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독소전쟁만큼 격렬하고 잔인한 전쟁은 없었으며 불과 4년이라는 기간 동안 430만의 독일군을 포함한 무려 500만의 추축국 병사들이 사망을 한 전투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1000만의 군인이 전하고 더불어 1,500만의 민간인이 전쟁의 폭풍 속에 사라져 간 소련에 비해 그다지 많은 숫자라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물절 피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인적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적, 물절 피해가 어마어마했던 이유는 편 혐한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나치와 이에 못지않은 볼셰비키가 조도한 충돌이라는 점도 있었고 일단 규모가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장소였만 일부 한정된 공간에서만 싸움이 벌어진 130여 년 전 나폴 레오의 원정 당시와 비교한다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1942년 말에 전선의 길이는 남북으로 2,500km에 달할 정도였으며 4년 동안 동서로 왕복 5000km를 이동하며 쉼 없이 교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동안, 그런 거대한 공간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전투들이 벌어지며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파르티잔의 소규모 특공 전도 있었지만, 전쟁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같은 거대한 충돌들도 많았으며 독소전쟁은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전투들의 집합체 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거대 전투 중 하나였 연 1941년 6월 민스크 전주는 독소전쟁의 서막을 알린 역사적 전투입니다. 

 

 

2. 작전명 바바로사에 대해 알아보자.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 독소전쟁의 발발 원인은 너무 많아 여러 권의 책으로 발행해도 모자랄 만큼 방대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히틀러입니다. 사실 아무리 국민 간의 감정이 나쁘더라도 전쟁은 그렇게 쉽게, 그리고 함부로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은 아닙니다. 모든 전쟁은 예외 없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한 권력자나 집단의 확고 부동한 의지에 의해서 벌어집니다. 히틀러는 동방에 순수 아리아인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임을 누누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목적을 달서 하기 위해 소련과 절멸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였을 정도로 전쟁에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망성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을 보유하자 실제로 소련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40년 12월 18일, 총통 명령 21호를 통해 히틀러는 OKH(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에 구체적인 소련 침공 계획을 입안하려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러한 총통의 의지에 따라 OKH는 바바로사 계획으로 명명된 치공 안을 수립하였으며 침공 4개월 안에 소련의 핵심을 붕괴시키고 볼가강 하구에 아스트라한에서 백해의 아르한겔스크에 이르는 이른바 A-A선까지 진출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당초 독일은 1941년 5월 15일 작전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유고슬라비아 점령 때문에 5주라는 시간을 날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후 소련이 살아날 수 있게 된 천금 같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겨울 눈보라와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물러난 히틀러는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초상화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나에게 지난 간 5주를 돌려달라고 절규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나 OKH모두 자신감이 충만했던 1941년 5주라는 시간의 중요함을 몰랐습니다. 

 

3. 사상 최대의 침공군 조직하다.

소련 침공을 위해 독일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침공군을 준비하는 독일군의 모습 이미지

독일은 소련을 일거에 석권하기 위하여 33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여타 추축국과 위성 국가들로부터 50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았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기점으로 전선의 주역으로 정립되어 가던 전차 3,300여 대와 작전기 2,000 여기가 투입되었습니다. 이는 당시까지 지구 상에 등장한 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었습니다. OKH는 이러한 대군을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군이라는 거대한 3개 병단으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관할 육해공군을 망라하여 구성된 이들 집단군은 북에서 남으로 북부 집단군, 중부 집단군, 남부 집단군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70~100여 만의 병력과 장비로 중무장하였고 전쟁이 개시되면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에 이르는 전략 목적까지 단숨에 진군하여 점령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예상 진격로 중간에 위치한 여타 요충 지긍도 당연히 접수하여야 하고 이를 막기 위해 달려들 소련군도 격파하여야 했습니다. 

 

즉, 독일군은 점령과 섬멸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전쟁 초반에 벨로루시, 서부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신속히 장악해 소련의 항전의지를 꺾을 참이었습니다 소련이 거대한 국토와 인구를 가진 나라지만 독일이 1차적 목표로 삼은 이 지역에 인구와 국부의 70%가 몰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을 독일이 점령한다면 소련은 순식간 덩치만 커다란 단 판 빠진 찐빵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속도와 집중이었는데 지금까지 일사천리로 유럽을 석권한 독일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자신감이 없이 이 정도의 전쟁을 감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석 달이 되기 전에 소련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개 될 것입니다. 우리가 대문을 박차기만 하면 러시아는 썩은 건물을 무 저닐 것이다라고 확신하며 지난 1936년 라인란트 진군 시와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 당시 보여 주었던 히틀러의 초조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4. 부족했던 소련의 준비 상황

약 2년 전인 1939년 8월 모두가 철천지 원수라고 생각하던 소련과 독일은 물로 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을 체결하여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에 이 둘은 사이좋게 폴란드를 침공하여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처럼 표면상으로 동맹국이었지만 양측 모두 이런 우호가 단지 필요에 따른 일시적인 관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라고는 가리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라고는 단정하지 않았지만 소련도 충돌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노골적인 반공, 반소, 반슬라브 신념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자신들도 공산주의 세계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럽으로 영향력을 넓혀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치 독일을 넘어야 했고 둘 사이에 양보와 타협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독일이 서유럽을 석권하자 소련의 불안감은 장가 하였고 나름대로 군비 증가에 착수하여 1942년 말까지 1차 사업을 완료할 예정이었습니다. 

 

독일이 사상 최대의 원정군을 준비하였지만, 시실 당시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500여 만에 달하는 상비군을 보유한 나라였습니다. 

거기에 더해 18,000여 대의 전차와 12,000 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였는데, 이는 수량으로 독일의 5배가 넓은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국토가 넓었기에 당연히 규모가 컸던 것인데 유럽 쪽의 위기가 점차 증가하자 그중 약 400만의 대군과 대다수의 장비를 유럽 접경 지역에 집결시켜 놓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장비가 구식이었고 가동률도 저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개전 당시에 움직일 수 있는 전차는 40%에 불과하였으며 이제 막 생산되기 시작한 T-34나 KV간은 최신 전차는 국경지역에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지난 1937년 대축 청기 간 동안 완전히 무너져 내린 지휘체계가 더 큰 문제였으며 이런 총체적인 무능이 빚은 참사가 지난 1939년에 있었던 겨울 전쟁이었고, 이 때문에 독일은 더욱 소련군을 폄하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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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무솔리니 북아프리카로 진출하고자 했으나 연합군 반격을 받아 패배했습니다. 이탈리아 군을 지원한 독일군은 롬멜 장군의 지휘 아래 영국의 사막 군단을 제압하며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알 알라메인에서 일어난 몽고메리 장군과 의 전투에서 롬멜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알알라메인 전투의 영웅 롬멜과 몽고메리 장군 이미지 

1. 롬멜과 몽고메리,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맞붙었다. 

2차대전 중 여러 전장에서는 유명한 장군들이 서로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가 가우데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대결은 독일의 롬멜 장군과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맞붙은 싸운이었습니다. 당시 언론들은 두 장군을 각각 사막의 여우와 사막의 생쥐라고 부르며 흥미 있게 보도했습니다. 

 

2. 북아프리카,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유럼 내 작전에 앞서 경험을 쌓는 훈련장이 되다. 

북아프리카는 히틀러나 연합군에게 지중해를 장악하는 요충이기는 하지만 결코 양측의 사 할을 결정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용한 전장은 엉덩이 끼지나 유럼 대륙이었습니다. 그러나 1941~42년에 영국군과 미국군이 유럼 대륙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는 입장에서 북아프리카는 독일군 전력을 분산시키고 잔 접적으로 동부 전선의 소련군을 지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등메 노르마 디 상륙작전과 같은 큰 작전을 실행하기 앞서 결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훈련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3. 보잘것 없는 군대로 서투른 공격을 감행한 무솔리니,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다. 

본래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은 히틀러가 아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일을 벌임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1940년 여름 히틀러가 프랑스를 함락시키는 모습을 보고 무솔리니는 북아프리카로 진출해 옛 로마제국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히틀러와 아무런 협의도 없이 이집트와 그리스를 침공한 그는 히틀러와 달리 전략도, 계획도 없고 보잘것없는 군대로 서투른 공격을 했다가 도리어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곧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작전지휘 롬멜 이미지 

4. 이탈리아의 패베로 독일이 지중해 지역으로 들어가 가다. 

이탈리아군의 패배는 독일을 지중해 지역으로 끌어들였습니다. 1941년 봄 독일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유린하고 크레타섬을 침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히틀러는 1941년 2월 롬멜 휘하의 1개 기갑 군단 (아프리카 군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아프리카에 파견해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군을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알 알라메인 전투 이야기 동영상

 

5. 북 아프리카에서 연전 연승하던 연합군, 롬멜이 도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다. 

롬멜이 오기 전까지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 총사령관 웨이블 대장은 비록 2개 사단 밖에 되지 않는 열세한 병력이지만 사막에서 500마일을 진격해 10개의 이탈리아 사단을 격퇴시켰고, 해상에서 커닝험 제독의 지중해 함대는 이탈리아 해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롬멜이 크리폴리에 도착한 이후 전제는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위대한 지휘관과 성능이 좋은 장비를 지닌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은 영국의 사막 군단을 제압하며 눈부신 속도로 진격했습니다. 독일 탱크는 영욱 탱크보다 속도가 빠르고, 독일의 88밀리 대전차포는 영국의 어느 대포 보도 위력이 강했습니다. 그것은 본래 고사포였으나 롬멜은 창의력을 발휘, 그것을 개조하여 대전차포로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6. 롬멜, 독일 기갑군단의 강점인 기동성과 화력의 우세를 활용하다. 

 

롬멜은 작전지역을 넓게 이용하고 독일 기갑 군단의 강점인 기동성과 화격의 우세를 최대로 활용했습니다. 그는 유인 전의 대가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선제공격으로 영국 탱크를 유인한 다음, 대전차포 엄호 하에 기갑부대를 진격시켜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7. 전진을 거듭하던 독일군, 극심한 보급 문제로 알 알라메인에서 진격을 중단하다. 

 

1941년 겨울 독일은 잠수함 u보트를 사용해 장비와 보급품의 지중해 통화를 보호함으로써 보급난을 해결했습니다. 이듬해 6월에는 중요 기지인 토부르크를 빼앗고 영국군을 계속 추격했습니다. 알래산드리아에서 55마일 떨어진 알 알라메인에까지 퇴각했을 때 영국군은 참으로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영국군은 철군을 고려하고 있었고, 이집트 정치인들은 슬리가 확실해 보이는 독일군 편에 설까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데 그 순간에 롬멜은 진격을 중단하고 말았으니, 그것은 증원군을 기대할 수 없고 보급기지에서 너무 떨어진 곳에서 최악의 보급 난을 겪고 있어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일군 주력은 소련 땅에서 카프카스를 향한 지격에 초력을 기울이고 있어 아프리카를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영국군과 영국군의 수장 몽고메리 장군 이미지 

8. 롬멜의 공격이 한계상황에 이른 가운데 영국 몽고메리 장군이 부입합니다. 

영국 지상군은 알 알라메인에서 방어진 지를 구축하고 공군은 토브룩에 대해 맹폭을 가했습니다. 토브룩 기지를 이용할 수 없게 된 독일군 보급은 후방 약 600마일 떨어진 벵가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롬멜 군의 공격이 한계상황에 이르렀더 1942년 8월경 몽고메리 장군이 이집트 주둔 영국 제8군 사령관으로 새로 부입했습니다. 

 

9. 몽고메리, 모든 면에서 크게 우세를 점할 때까지 작전을 개시하지 않고 전투 준비를 하다. 

몽고메리는 부임하자마자 곧 반격을 실시하라는 압력을 상당히 받았지만 완전히 준비될 때까지는 작전을 개시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장비와 군수품을 충분히 확보, 우선 방어에 충실하고 모든 것이 확실할 때 공격한다는 그의 작전 스타일은 과거 나폴레옹을 상대한 웰링턴 장군과 같았습니다. 

 

그는 병력, 탱크, 공군력에서 두세 배 우세를 유지할 때까지 기다리며 철저한 전투준비를 했습니다. 정교한 위장 계획을 세워 가짜 설비들을 짓고, 적에게 마치 남쪽에서 주공을 실시할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10. 몽고메리, 순전히 숫자와 화력으로 독일을 제압하고 승리하다. 

그러다가 드디어 10월 23일 보병사단을 투입, 기갑사단을 뒤따르도록 하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펼쳤습니다. 몽고메리는 독일 기갑 사단이 영국 기갑사단을 공격하도록 유도해 기갑사단 간에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 보병으로 하여금 적 보병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12일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영국군은 어떤 기발한 기동이나 전술이 아니라, 순전히 숫자와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고 승리했습니다. 전투에 투입된 영국군 병력과 탱크는 각각 23만 명과 1,030대였으며, 독일군은 10만 명과 500대였습니다. 

 

11. 롬멜, 첫 참패 후 철군하며 북 아프리카를 연합군에 내주게 되다. 

몽고메리의 우직한 전술에 처음으로 참패를 당한 롬멜은 이지 더 이상 공격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증원군과 보급품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석유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는 트리폴리를 거쳐 튀니스로 장거리 철수를 하고 1943년 5월에 시칠리아로 철군함으로써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연합군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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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영국군 총사령관을 활약하였고 1946년에 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 이미지 

1. 버나드 몽고매리 소개 

1908년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투신하였습니다. 1910~1914년에도 인도 근무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종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아일랜드, 팔레스타인에서 근문 하였습니다. 1931년 대령, 1938년에는 소장이 되어 팔레스테인에서 사단장으로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제3사단장으로서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독이 군의 공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940년 6월 됭케르크 철수 후에는 제5사단장을 거쳐 1942년에 제8군 사령관으로서 북아프리카 작전을 맡아 롬멜 휘하의 독일군을 엘 알 라멩에서 격파, 전국에 승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정에서는 영국군 총사령관을 서 활약, 원수가 되었습니다. 1946년에 백작이 디어 가터 훈장을 받았고 참모장을 거쳐 1951년~1957년에는 나토 군 최고 사령관 대리로 있었습니다. 

 

2. 몽고메리 역사적 사실 알아보기. 

2-1. 2차 세계대전 이전 사실. 

1987년 런던에서 몽고메리 가의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핸리 몽고메리가 송공회 성직자였기에 금욕적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에 엄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해 완고하고 거만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무심함을 그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으며, 훗날 버나드 몽고메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손자인 데이비드와 만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성격 면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은 그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중충한 소년기 및 청소년기를 보낸 후 왕립 군사 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왕립 워윅 셔 연대 1대대의 보병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보병 소대장으로 참가하였습니다. 몽스 전투에서 대대의 절반이 소멸하고, 국경 전투에서 오른쪽 폐에 총알이 박히고 무릎에도 적탄이 관통하여 사경을 헤매는 경험을 하는 등 여러 지옥도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전간기에는 보병 방어 전술에 대한 책을 저술하여 영국군 내에서 어느 정도 반항을 이끌어냈지만 다시 영국 육군의 화 드는 전차였기 때문에 그이 저작은 상대적으로 묻혔습니다. 

 

1925년 브리티 뉴에서 휴가를 지내던 중 사랑에 빠지고 말았는데 베티 엔더슨이라는 17세 금발미녀였습니다. 

몽고메리는 그녀에게 열심히 작업을 걸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가 부모와 함께 스위스에 렌크라는 곳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것이란 소식을 듣고 그는 그들이 묵을 장소를 알아내 그녀를 다시 만났다고 합니다. 

 

그이 관심을 돌리기 위해 엔더슨은 베티 카버라는 여성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몽고메리와 비슷한 연령대의 미망인으로 12세와 13세인 두 아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몽고메리는 그녀와 그녀의 두 아들과 함께 친구가 되었습니다. 

1927년 둘은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1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나갔고 이듬해 외아들 데이비드가 태어났습니다. 1937년 아니가 벌레에 물린 상처로 전 엽병에 걸려 사망하자 몽고메리는 평생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2-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야이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몽고메리는 프랑스 전선의 영국 원정군 지휘관으로 참전했습니다. 이후 후퇴하는 영국군을 보호하기 위해 아라스 전투로 독일군을 저지하여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도왔습니다. 이후 본토로 귀환해 육 재건에 전념했습니다. 

 

에르빈 롬멜 원수가 이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이 저지른 대삽 질을 메꾸기 위해 급파되어, 번개 같은 작전으로 오코너 중장을 사로잡고 영국 서부 사막 군을 거의 괴멸 상태까지 몰아넣었습니다. 중동 사령관 웨이 벌 대장이 인도로 전출되고  후임이 된 오킨 렉 대장은 서부 사막 군을 제8군, 일명 사막의 쥐때로 재편하고 재도전, 한때 밀어붙이는 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반격당해 닐 리치 중장이 지휘하는 8군의 전력 절반 가량을 날려먹고 (가질라 전투) 토브룩 까지 함락되는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오킨 렉은 엘 아리 메인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닐 리치 중장을 해임하고 8군의 지휘권을 직접 잡고 롬멜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차 엘 알라메인 전투 그러나 오킨 렉은 처칠의 무리한 공세 요구를 비현실적이라 불가능하다고 거부했고 이에 처질은 카이로까지 가서 오킨 렉을 마구 갈구고 패배주의에 물들었다고 해임한 뒤 후임으로 해럴드 알렉산더 대장을 임명하고 8군 사령관으로 몽고메리 중장을 임명합니다. 

하지만 처칠의 기대와 달리 몽고메리 또한 공세에 나서는 게 아니라 전력을 보강하고 우주방어를 일관하였습니다. 8월 30일에 실시된 추측 국의 마지막 대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여 알렘 엘 할파 전투 독일군의 이집트 진공 능력을 완전히 소모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섣부르게 공세에 나서는 대신 처칠의 압박에도 전력을 증가시키는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사이 8군의 전력은 하루가 다르게 증강되어 갔는데 아프리카 군단을 지워하기 위해 투입된 독일 제27전투비행단 소소 정찰기가 시속 300마일의 속도로 8군의 병력 주변을 돌면서 그 시간을 계산해 봤더니 무려 10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2-3. 엘 아라 메인의 승리

엘아라메인전투에 영국병사이미지 

결국 이러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2차 아라 메인 전투에서 아프리카 군단을 거세게 밀어붙인 결과, 상당한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아프리카에서 독이 군이 사실상 괴멸하여 이집트에서 리비아를 커쳐 튀니지 에 이르는 먼 후퇴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몽고메리는 독일군을 추적, 튀니지에 틀어박히기 전에 괴멸시키려 했으나, 기갑 지휘에 서투른 면이 이었던 데다가 롬멜이 몇 차례 효과적으로 반격을 했고, 아천 후로 공군력이 생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해 실패하였습니다. 

 

이무렵 미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류 하여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포위되었고, 독일군은 영우 시 되었던 롬멜이 또다시 패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독일로 불러들였습니다.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륙했던 미군은 카세린 계곡의 참패를 경험하는 등 처음에는 빌빌대어 영국군 장군들뿐 아니라 아이젠하워 조차 자군의 전투력을 의심할 정도였지만, 조지 S, 패튼으로 지휘관이 교체되면서 전력이 급상승, 독일군을 밀어붙이는데 성고 하였습니다. 

결국 양 방향에서 영국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은 아프리카 군단은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합쳐 거의 30만의 포로를 남기고 소멸하였습니다. 

 

2-4. 이탈리아 전역과 D-DAY 후 이야기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상륙하는 연합군 이미지 

 

이후 미국과 함께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실시하는데, 여기서 지격 방 향고 주공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패튼과 사이가 벌어지고,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항상 과감한 공격을 주장하는 패튼과 가급적이면 방어전을 위주로 적군의 힘을 소진시킨 후 마무리를 가한다는 몽고메리는 사사건건 충돌하기 일쑤였습니다. 

 

카세린 전투에서 미군의 한심한 꼴을 본 몽고메리는 미군의 전투력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전공 욕심에 불타는 패튼은 자신의 전공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명장 롬멜을 격파한 명성에 빛나는 몽고베리를 라이벌로 보고 그보다 먼저, 더 많은 전공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몽고메리는 전공 욕심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몽고메리는 다시 사령관이던 알렉산더 정군을 꼬드겨 잘 진격 중이던 미군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진격로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독일군은 무너져 내리던 이탈리아군을 수습하고 방어선을 구성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 결과 시칠리아 전역에 교착 상태에 빠지자 패튼 역시 꼼수를 써서 위력 정찰을 핑계로 진 겨울 개시해 서부 시칠리아를 쓸어버리고 파레르모에 먼저 입성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패튼이 병사들의 원성을 산 것도 이무렵입니다. 

 

몽고메리는 처음에는 패튼을 그다지 신경아 썼지만, 그가 시칠리아에서 엄청난 전과를 세워 자신의 전공이 가려지자 슬슬 약이 올랐는지 이후 패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과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몽고메리와 패튼은 서로 만날 때마다 싸웠고, 이들을 지휘하는 아이젠하워는 뒷머리를 잡고 오마 브리들리가 이를 중재하는 상황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매일 일어난 셈입니다. 이러고도 연합군 홍 사려부가 멀쩡하게 돌았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입니다. 

 

몽고메리는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총지휘하여 작전을 성공 시 켜고, 이후 노르망디에 연합군을 묶어두려는 독일군을 상대로 영연방군을 지휘하며 격전을 치르다가 이후 상륙한 패튼의 3군이 망치 역할을 하는 동안 모루 역할을 수행, 패튼의 부대가 진격하는 동안 독일군의 주력을 붙잡아 두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두 지휘관의 활약으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이후 예상보다 적은 희생으로 훨씬 빨리 파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과정에서 몽고메리와 패튼의 대립은 점차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군의 빛나는 승리를 취재 하 길원 하는데 미국 기자들이 패튼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몽고메리를 무능한 인물 답답한 영국 놈으로 포장하면서 이러한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지크프리트 선과 라인강을 넘어 독일 영내로 먼저 들어가는 장군이 되길 원했던 두 사람은 라이벌보다 먼저 전과를 거두기 위해 서로 더 많은 보충병력과 보급품을 원했고, 그에 반하여 아이젠 하워는 영국군이나 미군 모두 전력을 이것은 영국군과 미군 양부 대가 사이좋게 진격 속도가 떨어지게 만드는 좋지 않은 결과만 낳았습니다. 

 

2-5.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참패하다. 

마켓가든작적 에서 미군공수부대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독일군의 후퇴보다 빠른 진격 속도에 기고만장해져 있었고, 비실거리는 독일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걷오 차기 위해 획기적인 꼼수를 궁리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노르망디 이후 놀고먹는 공수부대가 눈에 들어왔고, 결국 마켓 가든 작전이 몽고메리의 제안으로 기획되게 됩니다. 

 

이것은 영미 3개 공수사단(영국 제1공수사단, 미국 82 공수사단 및 101 공수사단에 추가로 자유 폴란드군 공수여단이 네덜란드 일대에 강하해서 교량을 확보하고, 영국 육군의 주력인 30군단이 확보된 교량을 따라 독일군을 정리하여 최종적으로 아른험을 장악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정체된 전선을 불과 2개 군단급 전력으로 타개한다는 매력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엄청난 떡밥 이 걸려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지크 프리터 선에 전력을 집중하고 네덜란드 방어에는 그다지 ㅎㅁ을 쏟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영국군의 판단이었고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면 아군 기갑부대의 지원하에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적의 방어선을 우화 한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면 아군 기갑부대의 지원하에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적의 방어선을 우회한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렇게 작전 의도 자체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른험 주위에 2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과 정규군 1개 기갑사단, 정규군 보병사단과 그 근처에 무장 친위대 대대가 집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SS기갑 대장인 명장 빌헬름 비트리히가 지휘하는 제2 SSS기갑 군단으로, 무장 친위대 전력 중에서도 정예 부대였고 동부전선에서 죽어라 싸우다가 서부전선을 온 노련한 병사들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서부전선으로 재편된 후, 팔레즈에서 연합군에게 참패하게 됩니다. 서부전선 사령관으로 다시 부임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동부전선에서 온 B집 잔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에 의해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후방의 시골구석, 즉 아른햄으로 보내져 휴식 겸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기하던, 말이 사단이자 연대 수준도 못되게 전력 소멸하였습니다. 

 

그러니 네덜란드 방면이나 독일 본토 쪽으로 공세가 올 것을 대비해서 팔레즈 포켓에서 탈출한 제2SS기 갑 군단을 후방인 아른햄에서 보충과 휴식을 취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을 내린 사람이 하피이면 방어의 사자 모델 원수였습니다. 

 

B집 잔군 총사령관 발터 모델은 영국군 공수부대의 강하로부터 단 3시간 만에 방어 계획을 수립, 친위대뿐 아니라 해군 공군 지상 대원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연합군의 공세를 분새합니다. 

 

발 격 작전 내내 모델 자신이 매일 전선에 나아가 전황을 완전히 파악하여 증원 부대 투입이 매우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SS기갑부대 지휘관 빌헬름 비트리히와 독일군 공수부대 지휘관 쿠르트 슈트 덴트의 지휘역량까지 더해져서 연합군은 그야말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이작전의 실패가 더 뼈아픈 이유는 연합군에서 고급 인력으로 꼽히는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다 말아먹은 주제에 막상 그 상대는 독일군 최정예도 아닌, 2 선급 예비부대나 교도대라는 점에서 전투에도 지고 전쟁에도 진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모델 장군과 그 참모들에게 진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독일군이 매우 강해서 질 수밖에 없었어요 라고 징징대지 못했습니다. 

 

 

한편 이작전의 실패는 훗날 몽고메리의 평가를 크게 깎아먹는 주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작전 실패 자체도 그렇지만, 몽고메리가 작전이 실 폐한 이후 패배의 책임을 정작 용맹하게 분투했지만 정치적으로 돌봐줄 빼이 없는 외국의 망명 장군에게 몽땅 전가하는 지질한 추태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작전에 실패한 것 까지는 그럴 수 있습니다. 대원수 말마따나 인류 역사에 무적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불패의 상승장군 또한 중 없진 않으나 전쟁사를 통틀어서도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전쟁에서 승패는 병가 지상사고 모든 전투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약체화된 독일군에게 쳐 발린 것도, 고급을 통트어 용장 밑에는 약졸이 없는 법이고 다시 독일 측 지휘관인 발터 모델이 겁쟁이나 용려 한 지휘관이 아닌 당대의 손꼽히는 명장이 이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한 작전의 패전 책임을 외국의 망명 장군, 그것도 그냥 별이 아니라 충분히 전선 엣 용맹을 떠 쳤던 장군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운 졸려한 행동은 후대의 사람들이 군인을 평가함에 있어 당연히 크나큰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후세의 인물들이 보기에 몽고메리의 평가는 당연히 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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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차 대전 중 미국과 일본의 전쟁 태평양 전쟁 당시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는 해전입니다. 

미드웨이 관련 내용이 많아서 시리즈로 3편으로 작성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미드웨이 해전 을 다룬 영화 포스터 이미지 

1. 미드웨이 해전의 배경

19424월 18일 일본 해군은 미 항공모함에서 출격하여 일본을 공습하고 중국으로 탈출했었던 두리틀 폭격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항속거리가 긴 쌍발 유상 폭격기를 항공모함에 적재하고 출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던 두리틀의 폭격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항속거리가 긴 쌍발 육상 폭격기를 항공 모함에 적제 하고 출결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던 일본 군부는 공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었고 충격을 받은 일본 국민들의 군부 비난은 크게 일었습니다. 

 

일와 히로 히토가 거주하는 도쿄에 적의 폭격이 가해지는 것은 당시 군민 모두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해군 야마모토 연합 함대 사령관은 대담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야마모토는 전쟁 전부터 염두해 있던 미드웨이 알류산 열도 작전을 실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개전후의 2단 게 공세에서 중부 태평양을 주요한 목표로 보고 이를 상부에 웃겨서 관철시키고 행동을 구상 중이었습니다. 

즉 미드웨이섬을 점령하여 초계선을 멀리 하와이 근처까지 동진시켜 두리틀의 폭격대와 같은 기습의 기능성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 10월쯤 예정돼 하와이 점령 작전의 교두보로 삼 겼다는 의지도 있었습니다. 

 

그의 목포는 또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이 하와이에 가까운 미드웨이 같은 전략적 가치가 큰 섬을 일본이 점령하고 있으면 호주와 남태평양 사이에서 활동하는 미 해군의 기동부대가 급히 달려올 것이고 이를 격멸하여 전쟁의 종말을 니 어보ㅗ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일본 육군은 야마모토의 작전 안에 공감하여 미드웨이와 알류샨 작전에 필요한 병력을 협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또 있었습니다. 

미국이 하와이에 가까운 미드웨이 같은 전략적 가치가 큰 섬을 일본이 점령하고 있으면 호주와 남태평양 사이에서 활동하는 미 해군의 기동부대가 급히 달려올 것이고 이를 격멸하여 전쟁의 종말을 지어보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일본 육군은 야마모토의 작전 안에 공감하여 미드웨이와 알류샨 작전이 필요한 병력을 협조하기로 하였습니다. 

 

2. 일본의 미드웨이 작전 연기 주장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반론은 해군 내부에서 나왔는데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작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제1 기동함대(마구모 기도 부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진주만 공격 후 계속해서 남태평양과 인도양의 여러 작전에 동원되었던 함정과 항공기, 군인들의 피로가 누적되어 일전 기간 정비와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장 아며 작전의 연기를 강하게 건의하였습니다. 

 

그의 건의는 휘하 항공전의 중요한 전문가 들인 항공 참모 간다 미노루 대좌나 제2 항공 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잔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산호해 해전에서 크 타격을 입고 수리 중인 즈이카쿠의 수리가 끝나고 그의 자매함 쇼카쿠가 인원 충원과 훈련이 완료된 후에 합류하기를 기다려서 작전을 실시하여야 한다는 의경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란 야마코토는 이를 모두 거부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은 미드웨이 해전은 시간을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3. 야마모토의 고집

두리틀 공습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4월 28일 연합함대 기함 야마토에서 연합함대 제1단계 작전 전훈 연구회가 열렸고 이어서 미드웨이 공략 작전의 도상 연습이 있었습니다. 도상 연습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였습니다. 

미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고 일본군도 보급 등의 여러 문제들이 노출되었습니다. 

항모 즈이카쿠 – 쇼카쿠는 비슷한 크기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출처 : wikipedia

특히 야마모토가 야심 차게 기대하고 있는 미 항모 부대의 포착과 격퇴의 가능성 보장할 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구모 기동부대 구사카 참모장은 그이 자서전에서 미드웨이 점령과 미 기동부대 격멸,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두 마리의 토끼를 쫓는 것과 같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만약에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더라면 그 전세의 방향을 돌려놓았을지도 모그는 두 척의 항모들, 쇼카쿠는 산호 해전에서 입은 손상 수리에 무려 3개월이나 걸리는 데다가 산호해 해전에서 조종사 손실이 절반에 달했던 자매함 즈이카쿠는 트럭 섬에 적 박시 키고 정비하기로 한 상황으로 이 주력 항모 두척의 작전 참가 배제는 불안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미국 기록은 즈이카쿠가 일본 구레 군항에 입항해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의 총동원 가능한 항공기는 319기로 예상되었지만 미군은 하와이에서 출격하는 육상기까지 포함하면 348기로서 비슷한 규모가 되었습니다. 

 

미국보다 압도적인 전투력을 집중해서 작전에 돌임 하기 못하는 상황을 걱정하는 간부들이 많았습니다. 

후에 평가되었지만 미드웨이 전장에서 먼 북쪽 알류샨 열도에 경항모 류조와 효를 분산 투입하여 전투력을 분산한 것은 전투력 집중의 원칙에서 볼 때 야마모토의 또 다른 큰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작전에 집착한 야마모토는 본 작전에 이견을 가진 함장들은 조속히 퇴함이라고 워협의 훈시를 함으로써 반대나 연기 의견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4. 사전 탐지한 미국의 정보력

1942년 5월 5일 해군 니노 군령부장은 아먀모토에서 대해령 제18호를 발려하여 작전 개시를 알렸습니다. 

이무렵부터 일본군보다 항상 한 수 위였던 미군의 정보 능력이 빛을 바흐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3원 4일 장거리 비행 능력이 뛰어난 일본군의 대형 2식 비행정 두기가 하와이 오하우 섬을 폭격하고 같으 달 11일 비행정 1기가 미드웨이섬에 접근했다가 격추돼 일이 있었습니다.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는 일본이 이 해역에 공세를 취할 징후라고 판단하고 휘하 부대에 엄중한 경계를 지시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 작전 변경한 암호 체계를 절략 암호 'D'라고 불렀는데 이 암호는 미 해군에게 JIN-25 암호라고 알려져 있었고 일부 암호 해독에 성고하고 있었습니다. 

 

미 해군은 1942년 4월 말부터 암호의 부분 해독에 힘입어 일본군이 태평야 해역에서 대규모의 공세 작전을 전개할 농후한 가능성을 포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게 될 것인가는 불명이었습니다. 일본군의 암호에 자주 등장하는 AF라는 암호는 공격 목표로 판단되었는데 이것이 어느 곳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위신 턴의 미 합참본부는 이 미지의 암호가 하와이를 지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미 육군 항공대는 이것을 알래스카나 미국 서해 안으리고 추측했었습니다. 5월 중순까지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가 없이 시간이 흘러갔지만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정보를 종함 분석해 보고 이곳이 하와이 인근 미드웨이 섬일 것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릅니다. 

 

 

하와이 소재 해군 첩보부도 그 AF가 미드웨이라는 가정으로 정보 수집에 집중하였습니다. 

블래 챔버라 불리는 이 암호 부대는 워싱턴에서 하와이로 급파된 죠셉 존 로체 포트가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 해군 암호 첨보 분야에서 전설적인 전공을 남긴 사람으로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암호 분석으로 사전 예견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5월 11일 첨보대의 장교 야스퍼 홈스의 제안으로 기가 막힌 작전이 만들어졌습니다. 

미드웨이와 오하우 섬의 중간에 깔린 해저케이블로 미드웨이섬 기지 사령관과 사전에 모의한 후 무선으로는 거꾸로 하와이에 미드웨섬의 해수 정화장치가 고장 나서 식수가 다 떨어져 간다는 긴급 위장 보고를 평문으로 하게 하였습니다. 

 

미드웨이섬의 사령관은 그대로 하였습니다. 이 평문 전문이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웨이크 섬의 일본군 통신 부대에게 감청되어 암호문으로 본국에 보고 되었습니다. 

 

미드웨이에 식수가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인데 역서 미드워를 지칭하는 암호인 AF라는 내용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미드웨이섬 – 두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 wikipedia>

 

이 무선은 다시 미 해군 통신 정보대에게 감청되었습니다. 

감청된 전문은 미 해군 통신 감청 본부에게 보고되어 비로소 AF가 미드웨이임이 밝혀졌고 이어서 이곳에 대규모의 일본군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 판단이 확전 되었습니다. 추가로 암호가 더 해독되어 미드웨이 공격 부대의 병력과 지휘관 예정 항로 등과 시기가 더 밝혀졌습니다. 

 

 

5. 미 함대 출동하다. 

미드웨이 침공을 격 최하기 위한 미군의 작전 계회는 5월 28일 태평양 함대 사령관 제29~42로 발령되었습니다. 

 

주요 내용들

1. 원거리에서 적을 발결, 포착하여 기습을 방지할 것

2. 적의 항모들을 결하여 공습을 지지할 것

3. 잠수함을 초개와 공격용으로 적극 활용할 것

4. 미드웨이섬 수비대는 저력을 다해 섬을 사수할 것

 

미군은 작은 미드웨이섬에 해병 수비대 3,000명을 금파 하고 항공기만 150기를 파견하였습니다. 

조밀한 대공포 대망이 급속하게 구성됐습니다. 

니미츠 대장은 이미 남태평양에서 산호해 해전을 겪은 플레처 제독의 17 기동부대(항모 요크타운과 호의 함들)를 하와이로 이동하게 하였습니다. 니미츠 제독은 가용 항모에서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5월에 있었던 산호해 해전에서 항모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요크타운은 큰 수리를 요구하는 손상을 입어 진주만의 독에서 수리 중이었습니다. 항모 사라토가도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서 수리 중에 있었습니다. 

요크타운 -미드웨이 출동 전 수리 독크에 있는 모습 <출처 : wikipedia>

니미츠 사령관은 자치하면 플렛처 제독의 16 기동부대의 단두 척의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힘겨운 작전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5월 27일 하와이에 도착하여 수리 독에 들어가 있는 요크타운의 수리가 어는 정도인지에 따라 요크타운을 미드웨이 해전에 투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였습니다. 

 

요크타운의 최대 파괴 부분은 연료 탱크로서 이를 제대로 수리하려 하와이 수리 조선소에서는 불가능하고 미 서해안의 큰 수리 조선소에 가서 장기적으로 수리해야 하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와이 수리 도트의 인원들은 72시간의 불면불휴의 돌관 작업으로 요크타운을 일단 출항을 할 수 있게 하는 응급조치를 완료하였습니다. 

 

요크타운은 5월 30일, 수리 독에서 빠져나와 전장으로 달리는 동안 공작함 (수리선)이 옆에 붙어 계속 긴급 수리를 하였습니다. 

일본 측은 요크타운이 산호해 해전의 피해가 너무 커서 출동이 불가능하리라고 보았습니다. 

만 양 미 기동부대의 반격이 있다면 미군이 미드웨이 작전에 할지 제독의 16기 동부 대인 엔터프라 니즈와 호넷, 2척 외에 경항모 와스프가 출동하리라고 판단했었습니다. 

 

1942년 5월 28일. 미 해군의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편성된 제16 기동부대 (TF-17)가 주력으로 출동하였습니다. 

이 부대는 지난 4월에 두리틀의 폭격대를 발진시킨 부대입니다. 이어서 5월 30일 17 기동부대의 요크타운이 뒤를 이어 출동하였습니다. 

17 기동 부대는 플레처 제독이 계속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16 기동부대의 사령관인 맹장 할지 제독은 피부병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서 스풀러언스 제독이 부이하였습니다. 

 

항모 작전에 별다른 경험이 없던 그는 참모장 엘리엇 브라우닝 대령의 조언을 대폭 받아들여 작전을 수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콤비의 협동 작전은 커다란 성과를 만들게 됩니다. 연합한 두 기동함대의 통합 지위는 플레처 소장이 맡았습니다. 

 

6. 야마모토 사령관과 전함 야마토의 출동

한편 일본은 5월 27일 나구모 주이치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제1항공 전대 엄중한 무선 봉쇄를 실시하며 출결 하였습니다. 주력 항모들은 제1항공 전대의 아카키, 카가, 제2항고 전대의 히류, 소류의 네 척이었습니다. 

 

6개월 전 하와이를 공격했던 기동부대에서 제5 항공 전대의 쇼카쿠와 즈이카쿠가 빠진 것이었습니다. 

참가했더라면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을 바꿔 놓았을지도 몰랐던 항모 쇼카쿠는 산호해 해전에서 입은 손상 수리에 무려 3개월이나 걸리는 데다 산호해 해전에서 조정사 손실이 절반에 달했던 자매함 즈이카쿠는 트럭 섭에서 조종사 충원과 재정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함 기리시마와 하루나 두척의 전함이 호위함대의 주축으로 동반하였습니다. 

그 뒤를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를 포함해서 5척의 전함을 중심으로 대함대가 거리를 두고 출동하였습니다. 

사상 최대의 함대가 출동한 것이었습니다. 6월 3일 오후, 나구모 기동부대를 후속하던 주력 부대 기함 야마토에 승함 했던 연합함대 사려관 통신 감청반은 미드웨이섬 부근에서 미군이 발신하는 항모 호출의 신호를 잡았습니다. 

항모가 미드웨이 근해에 나타났다는 징조였습니다. 보그를 받은 야마모토 사령관은 즉시 앞서 가는 나구모 기동부대에 전달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선 봉쇄 상태에서 이렇게 할 수 없어서 앞서가는 나구모 부대에서도 이를 접수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전달을 포기하였습니다. 

 

항모의 통신안테나는 전함의 통신 안테나 수니 능역보다 낮아서 기동부대엣느 이를 감청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나구모 부대가 이 정보를 점수하고 경계를 했더라면 미드 에이에서 전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미군은 5월 30일 이후 미드에 기지 항공대 소속 32기의 PBY카타리나 비새 정들을 초계 임무에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6월 2일 플랫처 소장의 제17 기동부대와 스풀루언스 소장의 제16 기동부대가 미드웨이섬 북동 해역에서 합류하였습니다. 

 

7. 발견된 일본 함대

6월 3일 오후 9시 PBY 카타리나 비행정 1기가 미드웨이에서 930KM 떨어진 곳에서 일본 수송선단을 호의 하고 있던 제2 수뢰 전대를 발견하였습니다. 

일본의 미국 함대를 발견한 것보다 하루가 빠른 것이 이었습니다. 급보를 받은 미드웨이 제7 육군 항공부대 분견대 소속 B-17 9기 발진하였습니다. 

 

오후 4시경. 선단을 발견한 b-17부대는 폭격을 개시하였습니다. 

폭격 대장 월터스 위니 중령은 사령부에 자기 폭격 대가 일본 전함, 공모, 수송 선등을 공격하였고 다수 적함을 격함 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실제로는 두척의 일보 수송선이 함체 가까운 해면에 지근탄 공격을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6월 3일 21:30분 하와이 섬에서 미드웨이로 파견 도니 PBY 카카 리나 비행정 4기가 어뢰로 무장하고 뇌격 출격을 하였습니다. 

카타리나 뇌 격대는 일본 선단의 선두 선박을 발견하고 뇌격을 가했습니다. 

야간인 데다가 대공 엄호를 맡아줄 호의 함대와 잠시 격리되었던 순간이어서 야간 뇌격을 완전한 작전 성공을 하였습니다. 

두척의 수송선단 선박이 어뢰와 기총 소소의 공격을 받고 11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미드웨이에서 보내온 적 함대 발견의 보고를 받은 태평양 함대 사려 버리는 뒤따른 B-17 공격 보고에 폭격을 가한 함대는 적 주력인 기동 부대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긴급 전문이 미 기동부대에 터전 되었습니다. 

기동함대 사령관 플레처 소장은 하와이 함대 사령부의 정보 판단과 의견을 같이 하였습니다. 

 

PBY 카타리나 –걸작 비행정으로 정찰 폭격 수송등의 다목적기였다. <출처 : wikipedia>

 

8. 미 기동부대의 접근하다. 

6월 3일 저녁 미 기동함대는 일본 기동함대를 영격 할 예상 지점을 향하여 남서로 진로를 변경하였습니다. 

6월 4일 01:30 미 항모 부대의 항공대원들은 이른 아침을 먹고 후 출격 대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한 시간 후 대원들은 정렬하여 함장과 비행대장으로부터 앞으로 있을 출력에 대해 주의와 훈시를 받았습니다. 

 

04시 15분 미드웨이 기지에서 PBY 비행정이 출결 하였고 15분 후 제17 기동 함대의 항모 요크타운에서 SBD 돈트 레스 금강 하 폭격기가 정찰 임무를 받고 출결 하였습니다. 

 

정찰을 나간 SBD 폭격 대가 일본군의 수상 정찰기 1기와 교전을 했다고 보고한 시점에 나무고 기동부대는 요크타운의 서방 370KM를 향해하고 있었습니다. 

 

9. 일본 항공대의 미드 웽 공습 발진 

04시 30분에 나구모 기동부대는 미드웨이 공습대를 발진시켰습니다. 

곡 격대장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사하게 될 도모나가 조이치 대위였습니다. 공격대의 규모는 상당히 컸습니다. 

99식 함상 폭격기 (급강하 폭격기) 36기, 97식 함상 공격기 (수평 폭격기) 36기, 영식 함상전투기(제로 전투기) 36기 합계 108기였습니다. 

 

원래는 지주만 공격대와 인도향 실론 섬 공격대를 지위했던 후치다 미쓰오 중좌가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그는 맹장염이 도져 수술을 받았기에 대신 도모나가가 지휘했던 것입니다. 

일본군의 공략 부대 (곤도오 부대)가 살육 작전을 실시할 날짜를 6월 7일로 잡았기 때문에 그전에 미드웨이섬의 전투력을 섬멸할 목적으로 항고대의 공습이 행해졌던 것입니다. 

 

출격한 함재기들 외에 있을 수송 있는 미 항모 출현에 대비하여 각 항모 격 남고에는 어뢰로 무장한 함상 공격기들과 대함이나 대지 공격의 무장을 하지 않고 불시에 사황에 융통 서있게 대비하기 위한 예비기들이 있었습니다. 

 

일출 전에 공격대의 출력에 앞서 정찰기 여섯 기의 출결이 있었습니다. 제8 전대 사령관 아배 소장은 중순양함 도네의 정찰 해역을 중시하고 제일 머저 도네의 정찰기부터 발진시켰습니다. 

 

정찰기들은 모두 중순양함에서 발진한 95식 수상 정찰기나 영식 수상 정찰기들이었습니다. 

공격대를 발진시킨 나구모 기동부대는 침로를 바꾸어 함재기 수용을 위해서 미드웨이 방향으로 근접 항해를 했습니다. 

 

5시 15분 아제이 대위가 조정하는 미 해군 pby카타니라 비행정은 중 순양함 도네에서 발진한 영식 수상 정찰기를 발견하였습니다. 

 

부근 해역에 일본 함대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그는 근처 해역을 수색한 결과 대어를 낚았습니다. 

니구모 기동부대를 발 결한 것입니다. 그는 즉시 분부의 터전 했습니다. 

일 항모 1, 미드웨이 320도, 150해리 

 

일본 함대도 pby 비행정을 발견하였습니다. 

선두에 경순 양함 니가리와 뒤따르던 전함 기리시마는 비행정 발견과 동시에 연막을 살포했습니다. 

 

니구모 기동부대의 제로 전투기들이 급히 발진하여 요격했지만 pby비행정은 구름 속으로 도주해서 제로 전투기들을 따돌렸습니다. 

 

pby는 구름을 이용하여 숨바꼭질을 계속하면서 일본 함대를 미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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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중 일본과 미국과 벌어진 전쟁. 태평양 전쟁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알찬 내용으로 준비하였으니 많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태평양전쟁 썸네일 이미지

목차 

  1. 태평양전쟁 주개념
  2. 2차 세계대전 확장 개념
  3. 대동아공영권
  4. 노구교 사건
  5. 미드웨이 해전

1. 태평양전쟁 주개념

태평양전쟁

태평양전쟁당시 정글속 군인들의 모습

일본은 2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국을 만든 이후 중국에 항일 여론이 거세지자 1937년 노구교 사건(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중국군의 유격 전술로 전쟁은 점차 장기화되어갔습니다. 

 

일본은 군수물자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 인도차이나의 천연자원을 원했기 때문에 , 독일, 이탈리아와 더불어 3국 동맹을 맺고, 인도네시아 남부에 병력을 배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미국은 인도차이나와 중국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면 석유 금수조치를 취했고, 미국 내 일본 자신의 동력과 함께 모든 교역의 금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미 미국이 장개석 정부에 계속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관계는 이미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나빠진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천연자원이 나지 않는 일본은 미국이 자원 수출을 중지한다면 진행하던 모든 것을 손에서 놓고 물러나든지 동남아시아의 천연자원을 얻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주준해 있는 진주만을 기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주만 기습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미국의 함정 16척과 항공기 177대를 파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피해는 다만 항공기 29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실패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다신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은 바다에 나가 있어서 피해를 면하였습니다. 이항 공모함 들은 그 후 미국 해군의 초기 태평양 방위체제에서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진주만 해안에 있던 구사시설과 유류 저장설비도 피해를 면하여,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입은 타격을 신속히 복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제1차 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피하고자 했던 미국 내의 여론은 180도 바뀌어, 미국이 직접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본은 순식간에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 전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필리핀을 점령했고,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을 점령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남태평양을 잇는 긴 병참선을 확립하여 일본을 압박하려 하였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싸움에 결말을 내기 위해 해군력과 공군력을 미드웨이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의 대형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하고, 대형 순양함도 1척 침목 시켰습니다. 

일본이 목표로 한 미국의 항공모함 요크타운 호는 격침되었지만 미드웨이 섬은 안전했습니다.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과 가장 우수한 해군 조종사를 거의 다 잃어버렸고, 그 후 일본과 연합군의 해군력을 사실상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연합군은 일본이 점령한 지역들을 하나하나 탈환하기 시작했습니다. 

필리핀과 보는 이 섬이 연합국의 손에 들어가자 일본은 더 이상 석유를 수송할 수 없게 되었고,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지경에 처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에 투하되자 일본은 1945년 8월 14일 패전을 선언하였습니다. 

 

2. 제2차 세계대전 확장 개념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패전 국민이라는 굴욕감과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 마이 마르 공화국 아래서의 사회 혼란 및 정치 불안 때문에 몹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돌프 히틀러는 극력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지향하면서 독일 국민의 위대함을 강조함으로써 독일 민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1933년 독재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은밀히 독일을 재무자 하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는 1936년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라인란트를 점령하였고 이미 에티오피아에서 침략행위를 하고 있었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와 손을 잡고, 로마와 베를린을 잇는 추축을 선언했습니다. 

 

1938년 히틀러는 독일군을 보내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오스트리아는 당잔 독일에 병합되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폴란트를 차지하기 위해서 소련과 비밀협상을 벌야, 독, 소 불가침 조약을 맺고 1939년 마침내 히틀러는 폴란드에 침공했고,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했습니다. 

 

2차 대전 초반에는 독일인 확실한 위였습니다. 객과적 군사력은 연합국에 비해서 열세였던 독일이지만 기갑사단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뛰어난 공군력을 이용하여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접수하고 네덜란드, 심지어는 연합국의 하나였던 프랑스까지 점령하기 이르게 됩니다. 

 

이에 반해 연함군은 병력의 우위를 믿고 수비적으로 소극적인 자세로 전쟁에 임했기 때문에 독일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점에서 독일에 비해 앞서고 있었는데 그것은 막강한 해군력이었습니다. 

 

프랑스까지 집어삼킨 독일은 모든 공격을 영국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란 영국해협은 막강한 독일 육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천혜의 장벽이었으며 영국과의 공중전에서 사실상 독일이 패전함으로써 히틀러의 영국 침공은 무기한 연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독일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를 추축국으로 끌어들인 독일은 그릿 와 유고 슬라미 아를 쉽게 점령하였고 이에 미국은 무기대여정 잭을 펼쳐 1차 세계대전 이후 잉여 전쟁물자를 연합국에 공국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사실상 공사주의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싫어했습니다. 

따라서 1939년에 맺은 독, 소 불가침 조약도 그에게는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전 유럽을 점령하게 되자 시선을 소련에 두었습니다. 소련군은 핀란드를 점령하는데도 20만 이상의 사상자를 낸 약한 군대로 보였고, 정치적으로도 공산주의에서 해방돼 민중들이 독일군을 반길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소련에 대대적인 침공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연합군을 돕는 결전이었습니다. 역국은 섬에 고립되어 있었고 사실상 미국과 소련은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의 이러한 소련 침공은 연합군의 숨통을 튀어주는 결 저이 었습니다. 소련은 독일 군을 영토 깊숙이까지 끌어들여 모스크바의 겨울을 이요하여 독일의 우수한 야포와 기갑사단, 항공기를 무력화시켜 승리를 이끌어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참전은 독일에게 매우 뼈아픈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직접적인 참전으로 대대적으로 충원된 병력은 아프리카 전선에서 추축국을 밀어내었으며, 이탈리아 상륙작적으로 무솔리니 정부가 실각하고 이탈리아가 연합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스탈린의 군대가 전격적으로 진격하였으나 이미 독일은 이들을 막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독일의 점령지 정책이 너무도 가혹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저항 세력들이 암약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후방에 있는 부대들이 점령지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움직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노르망디 상류 작전으로 연합군이 유럽에 상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독일군은 히틀러의 독단적인 작전으로 계속되는 실패를 맛보았고, 고의 사령부가 몇 번 씨이나 교체되는 상황 속에서 연합군에 계속 뒤로 밀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945년 5월 8일 기점으로 유럽의 전쟁은 끝이 나게 됩니다. 

 

 

3. 대동아공영권

대동아공영권 지도 이미지[출처] 일본의 조선 침략 과정 69년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과 1941년에는 각각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확전을 개시하기 전까지, 일본 사회를 지배했던 시대적 정신음 반외세, 반 서구와는 거리가 먼 일종의 친 서구 주의였습니다. 

이는 일본이 기존의 봉건적 막부 체제를 타도하고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 시대부터 추구하여 온 가치였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화 이론 가이자 교육가, 학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에서 주장되었던 타아 입구론은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 봉건적 잔재를 털어나 개 근대 문물, 제도의 수입에 매진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더 바 있습니다. 개항 이래 끊임없이 근대화를 추가해온 일본은 1930년대 중반까지도 서구를 근대화의 모델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군국주의적 야욕이 빚어낸 침략 전쟁이었던 마주 사변-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에게는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 있던 미국이 일본에게 중국, 만주, 한국 , 대만 등지에 주둔 중인 일본군의 즉각 철수를 요청합니다. 대륙 진출을 오랫동안 꿈꿔완던 일본으로서는 이와 같은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미일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 철강, 지하자원 등 산업에 필요한 핵심 원료 수출을 전면 중단하게 됩니다. 

 

 

새로운 원료 생산지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프랑스 식민통치하에 있던 인도차이나를 침략하여 점령하고 1941년 12월에는 강경파의 주장에 따라 진주만 폭격을 감행함에 따라 4년간에 걸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기에 이릅니다. 이와 같은 군구의 가치를 파기하고 이전과는 180도로 방향을 바꾼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 논리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념 논리에 불과한 것일 뿐, 그 내면은 동아시 여러 국가와 민족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침략과 수탈, 폭력적 지배의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또한 근대화의 길을 완전히 버리고 과거의 동아시아 질서로 회귀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근대적 선짓국 대열에 동참하는 기존의 입장 자체는 크게 변한 바 없이 다만 그 모델을 미국이나 유럽의 강대국들로 삼지 않고 일본 스스로 선짓국의 모델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대동아 공영권의 정치·경제적 측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본은 1941년 인도차이나를 무력으로 점거하고 이에 대해 미국과 열국 등이 일본을 상대로 한 자금 이동과 석유 등의 자원 수출을 금지함에 따라 기존의 산업 시설과 국내외적 생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급자족적 블록경제를 구축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군부를 비롯한 정치권은 일본·만주·중국을 잇는 지역권을 중심으로 주요 산업시 서울 세우고 여기에 인도차이나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을 원료 공급지와 상품 판매 시장으로 삼는 광역 블록 경제권을 구상하였던 것입니다. 

 

'대동아공영권'은 이와 같은 침약적 영토확장을 이념적인 수준 엣 미화한 슬로건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은 대 도아 공영권을 주창하며 태평양 전쟁을 서양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동아시아 민족을 해방시키는 해방전쟁'이라는 선전 하였지만 자신들이 계획한 동아시아 경제블록 구상과 그 실제 진행 과정 자체가 제국주의적 확장 전재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4. 노구교 사건

중일전쟁이 발단이된,노구교(루거차오/마르코폴로가 극찬한 다리로 유명합니다.)

중일 전재의 발단이 된 사건으로 노구교 근체어서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몇 발의 실탄 사격 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즉각 전투태세에 들어가 이튿날 8일 새벽 중국군 진지를 공격해 루거우차오를 점령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중국 측의 계획적인 도발'이라고 단정하면서 파병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중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중국 측에서는 제2차 국 공합장이 울어졌습니다. 

 

 

5.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전쟁 당시SBD(Daurtless)급강하푝격이과 TBD데버스테터 뇌격기 이미지

일본은 태평양의 패권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서 4척의 중항 공모함과 3척의 경 항공모함을 포함한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미드웨이 섬과 알류샨 열도의 기지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암호를 해독한 뒤 일본의 이고를 예측한 미국 정보국은 미리 대비해 태평양 함대의 중항 공모함 3척을 집결시켰습니다. 

 

이전 투는 주로 공준전 위주로 벌어졌는데 일본군은 여기서 미국의 함공모함 요크타운호를 결심시키기는 했지만 모든 함공모함을 잃었고 우수한 전투기 조정사들이 거의 잔사 하게 되어 전면 철수를 하게 됩니다. 

 

이미드 훼이 해전은 로 미국은 태평야에서 일본과 비슷한 해군 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어 두 나라의 전쟁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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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민이 아닌 외국 인르로 만 구성돼 부대 

외인부대 하면 생각나는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외인부대 이미지 

1. 부대 개요

레지오 에트랑제 (Légion étrangère) 프랑스 육군 소속의 인이 부대, 프랑스군 내의 엘리트 부대이자ㅏ 1 순의 해외파병군 중 하나입니다. 외인부대 내에선 기계화 보병, 공수 보병, 경보병, 코만도, 전투공병 등 수많은 성격의 부대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속 전개군 및 충격 군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하에 프랑스 특수전 사령부 소속으로 특공, 정찰, 흑색 작전 등의 특수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인 코마 도도 존재합니다. 

 

프랑스 인이 아닌 타국인 중 18세~40세의 신체 건강한 남성을 모집 대상으로 합니다. 

여군은 뽑지 않습니다. 

 

1831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와 전쟁으로 혼란한 상태였으며 유럽 각구에서 몰려온 부랑자, 망명자 등의 유입은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두 문제를 도시에 해결하고자 루이필리프 1세는 외국인 부랑자, 망명자 등을 용병으로 모집하여 전쟁터로 치워버리다는 방안을 고안해 냈습니다. 거기다 프랑스인들 중 장 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범죄자, 실업자 등도

외인부대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창설된 이후 전제 게의 각종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최근까지 약 3만 5천여 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외인부대는 우리 고향(Legio Patria Nostra) 명예와 충성(Honneur et Fidélité)이라는 부대 정신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또한 프랑스 엘리트 부대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현제도 프랑스 정부의 명령에 따라 북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의 여러 분쟁지역에서 활약 중입니다. 

2012년 기준으로 외인부대의 총 행정 지휘관은 육군 소장이고, 부대의 총규모는 8천여 명의 수준입니다. 

 

공식 행진곡으로는 le Boudin 이 있습니다. 

 

2. 부대 구성

부대구성 마크 

 

부대 전체의 규모는 사단 병역의 규모이지만 외인부대는 지휘계통이 잇는 부대가 이니라 하나의 병과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인부대 사령관은 군령권이 있는 사단장이라기보다는 공병 감인 준종감처럼 병과감에 가깝습니다. 외인부대 사령관은 외인부대에 대한 작전 지휘 권이 없고 인사, 행정 등 군 정권만 행사합니다. 미 해병대 사령관이 미 해병대의 대해 군정권만 행사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3. 프랑스 외인부대 역사

프랑스 외인부대는 1831년 루이 피 리프가 식민지인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용병 5개 대대가 그 시조이며 이후 루리 필 리크가 식민지인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용병 5개 대대가 그 시조이며, 이후 루리 피 리프 시절에 정규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를 통제하는 역활을 부여받았고, 알제리에 기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외에도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카메론 전투에서는 65명의 외인부대가 2천 명의 멕시코 육군과 싸워 5명만 사 아남 았습니다. 전가기에는 모로코에서 리프 전쟁에 참 가히 기도 했습니다. 

 

3-1.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외인부대는 대부분 해외 식민지에 주준하였고, 제13 외인 반여단만 유럽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3 외인 바 여단은 프랑스 항복 이후 역고으로 건너가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고 식민지에 주둔하던 외인부대는 자유 프랑스군과 비사 프랑스 괴뢰군으로 양분되어 1941년 6월 시리아 레바논 전역에서는 자유 프랑스 13 외인 반 여단과 비사 프랑스 6인 외 인보 병연 대가 다마스쿠스에서 서로 교전하기도 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해외로 빠져나간 이념이 다른 독일인들의 사례도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자유 프랑스 소속으로 영국군과 함께 싸운 외인 부대원 준 독일계의 비율이 매우 높았습니다. 

 

비르 하킴 전투 당시 프랑스 외인부대 출처 외인부대 홈페이지

3-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는 베트민 측이 대포와 대공포를 분해해서 산 정상까지 끌고 온 뒤 조립해 포격하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웠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엄청난 희생 끝에 결국 항복하였습니다.

 

외인부대 역사상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전쟁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모두 10,483명이 전사했는데 외인부대 역사상 1 만당 위를 넘기는 전사자는 오로지 베트남 전쟁뿐이었다고 합니다. 전사자 중 한국 출신이 3명 있다고 합니다.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에 대하여 베트민은 악랄한 대우를 했는데 꼴랑 미숫가루 한 줌만 주고 수백 km를 걸어 가게 했습니다. 

당연히 쓰러지는 사람은 개머리판으로 패줬으며 결국 다 죽어가는 사람은 사살했습니다. 

포로 학대라고 프랑스가 분개했으나 이 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저지른 학살과 포로 학대를 내세우는 베트민의 반론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전쟁의 직간접적 원인이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배 때문이란 걸 생각한다면.. 생포된 외인부대원 가운데, 베트남과 간은 공산국가 겸 우방 국이었던 동독 지역을 비롯한 당시 공산국가 지역들의 출신자에 한정하여 고향에 가는 걸 조건으로 우방국 예우 차원에서 조기 석방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독 출신 및 공산권 출신의 왼 인부 대원중 몇 명이 조기 석방되는 경우 있었습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프랑스 군 활주로까지 포위 더어 항공 탈출도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라나 패배가 뻔히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결사항전을 각오한 것을 보면 엄청난 구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3-3. 알제리 전쟁 

우방의 도움으로 2차 대전의 승전국에 오른 프랑스 제4 공화국은 시대가 바뀌어감에도 식민지에 대한 욕심을 포기 못한 채로 이도 차이나 전쟁의 패전과  더부어 알제리 전쟁의 늪에 빠져있었습니다. 

알제리 독립군과의 전쟁에서 자행된 각종 학살과 반 인륜적인 범죄는 특히 프랑스 공수부대와 외인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는데 국내의 반전 운동 돠 해외의 비난 여론으로 프랑스 정부는 코너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알제리는 프랑스 영토라는 우파의 압력과 여론도 거셌고 특히 보수적인 프랑스 군부는 알제리를 포기할 경우 공공연한 구사 쿠데타 협박까지 일삼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 4 공화국은 무 저지고 드골이 다시 정 치르 복귀하면서 5 공화국이 성립되었습니다. 

드골은 우파와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당연히 그들은 드고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알제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드골은 군부와 국우파의 뜻대로 알제리의 기약 없는 늪에 빠져 가망 없는 구사 작전을 감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알제리 전쟁으로 프랑스 경제는 피폐해진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알제리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 알제리를 둘러싸 우파와 좌파의 좌우대립은 국민을 분 열시 킬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군의 징집에 엄청난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고 알제리 내의 프랑스 군의 학살은 해외의 비낭 여론을 형설 하고 있었습니다. 

1961년 에 드골 정부는 알제리 국민의 투표를 통해 프라스의 일부로 남아서 똑같은 프랑스 국민으로 남던지 아니면 완전한 독림을 하던지 그 선택을 알제 링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부수적인 군부에서 엄청난 반발이 있었고 4명의 최고 위급 장군들은 드골을 제거할 구사 반란을 계획했습니다. 

 

프랑스 생 사르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최고위급 엘리트 강성파 장군들이 군사반란을 계획하는 도중 윗글 감지한 드골 정부에서 주요 전쟁 지휘 간들을 속속 해임하거나, 본국이나 유럽으로 발령을 내서 드골에 충성하는 장군들로 하나 둘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 결과 군사반란 당시에는 반란군 측은 퇴역장군이 되었거나 주요 작전 사령관이 아닌 상태였습니다. 다시 주알제리 프랑스군은 47.7만 명 규모였는데, 이중 최정예 엘리트 부대인 공수부대 3개 연대가 포섭이 되어서 (당시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은 2개 구수 사단 ㅈㅇ 제1 외인 공수연대와 14샤쇠르 공수연대, 18샤쇠르 공수연대 3개 연대만 포섭)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특성상 중화기가 없이 경무장을 한 이들 3개 연대의 전투력은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의 0.6%에 불과한 전력이라 결과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반란  개시 6일 만에 반란군은 스스로 항복을 하고 , 반란에 가담한 3개 공수연대 장교 114명을 포함한 220명의 장교가 파면되었고, 이후 반란군 색출 작업을 통해 전체 프랑스군 장교의 3%에 해당하는 1,000여 명이 장교가 주로 공수부대 장교들을 중심으로 파면되었습니다. 

 

이 반란사건의 결과 반란에 가담한 장교들이 이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은 주동자들은 구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 집해는 이뤄지지 않았고 대략 평균 징역 15년 정도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군사 반란 중 사망자는 발란 군 측 외인 공수 연대의 습격에서 무선 소신 소를 지키다 사망한 병사 한 명입니다. 

당시 반란에 가담한 프랑스 정규 육군 공수부대인 녹새 베레 제1 외인 공수연대와 붉은 베레로 유명한 르파로 이제 14, 18샤쇠르 공수연대는 반란사건 후 즉시 부대가 해체되었습니다. 

 

반란군 측에는 군내 사조직인 organization armee sedrete(OAS) 회원이 많았는데 OAS는 당시 극한으로 치닫던 알제리 전쟁에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군사작전에 환멸을 느낀 장군들이 알제리 독립군에 대한 달 법, 불법적 보복을 위해 결정한 초법적 암살 테러단체로 , 임간인에게 대한 무차별 테러나 독립운동가나 정치인에 대한 암살 테라, 불법 체포 및 구금, 고문 등을 이삼았는데 알제리 군사반란을 도도한 장군들이 OAS를 창단한 주도세력들이었습니다. 

 

OAS가담 장교들은 에리트 공수부대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발 나군이 전부 공수부대였고 반란이 실패한 후에는 일부가 탕 영하여 , 드골 대통령 암살 등을 시도하다가 구속되는 가 하면 알제리에서 테러를 이 삼다가 사형을 당하는 등 여파가 있었습니다. 

알제리 반란 사거로 외인부대나 공수부대와 같은 엘트 ㅈ원병 부대의 장교들보다는 징지병 부대 장교들의 충성심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되었습니다. 

 

 

2021.09.26 - [특수부대] - 프랑스 외인부대 2번째 이야기

 

프랑스 외인부대 2번째 이야기

이번에는 저번 시간에 이어 외인 부재 2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 현대 외인부대 모습 1960년대 콩고 내전에 참가해서 활약을 많이 했습니다. 외인부대 출신 용병단이 카탕가 반군에 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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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전투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린그라드 시리즈 중 4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차례 

  1. 레닌그라드 영웅 주코프의 등장
  2. 당근 대신 채찍을 주다. 
  3. 독일 히틀러의 변심
  4. 한 번에 먹을 수 없는 먹이 

 

1. 레닌 그 가드 영웅 주코프의 등장

소련을 승리로 이끈 상승장군 게오르기 주코프이미지

레닌그라드 방어를 책임진 북서관구(Northwestern Direction) 사령관 보로실로프는 군사적 능력이 변변찮은 인물이었습니다. 군과 민간을 독려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전선까지 달려 나가 진두지휘하는 용맹함을 발휘하기도 하였지만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예하 북부전선 군 사령관 포포프와 북서 전선 군 사령관 쿠즈네초프가 실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거시적으로 지휘 통솔하기에는 그릇이나 능력이 너무 작았습니다. 

 

키예프 전투 종결 후, 전선을 재정비한 독일군이 전 전선에서 진격을 재개하였고 독일 북부 집단군도 한걸음 더 레닌 그라드에 가까워졌습니다. 

 

신인민위원회는 노약자들을 소련의 내지로 미리 피난시켰으나 이를 능가하는 더 많은 피난민들이 독일군을 피해 레닌그라드로 몰려들었습니다.

포위당하기 직전인 1941년 8월, 기관총 탄띠 제작 교육을 받고 있는 레닌그라드 시민들. 여유롭게 연출된 선전사진이지만, 실제로 남자들은 전선에 차출되었고 후방 지원은 여성들이 담당하였다. <출처: 구 소련 선전사진> 

 

보로실로프는 시민과 피난민 중에 차출한 병력을 북서관구에 긴급 편성하여 방어선에 배치했으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독일이 키예프 공략을 매달려 있는 동안 강화된 방어선이 독일군의 재개된 진격을 틀어막고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팅수 있을지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독소전쟁 개전 이후 지금까지 소련군의 큰 패전 대부분이 전선 중앙과 남부 일대에서 벌어져 북서관구 지역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편이지만 전투 의지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독일 공군의 사정권에 들어온 레닌그라드 도심은 연일 폭격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9월 8일 실리 셀 부르크가 돌일에게 점령당하자 지상으로 레닌 그라드와 연결되는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습니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와 사석에서 농과 욕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이제 친한 이유만으로 더 이상 부서 관구 사령관으로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키예프 방어전을 놓고 대립하다가 좌천시킨 전 총 참모장 주 코프를 소환하여 9월 13일 레닌그라드로 보냈습니다. 

 

2. 당근 대산 채찍을 주다. 

주코프가 레닌그라드 현지에 부임하였을 때 소련군의 사기는 망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가 시야에 보이는 외각 10여 길로 미터까지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쏘는 ㅍ포탄이 시내에 떨어지고 이었습니다. 포위된 상태에서 결사항전을 펼치려면 300여만의 시민들과 100여만의 병력이 먹을 실량이 확보되어야 했는데 그가 부임하기 하루 전에 대규모 식량 저장소가 폭격으로 전소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동안 독일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어 지난 막상 도심이 불타오르자 레닌그라드는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밖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보니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보려는 시민들의 원초적 이 기시미 팽배해지면서 곳곳에서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도심의 모습이 급속도로 흉흉하게 바뀌자 외각에 배치된 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습니다. 

이상태에서 독일군을 저지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주코프는 바닥까지 떨어진 국기를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했습니다. 그도 방어를 자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풀에 꺾여 싸워보지도 않고 순순히 도시를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패배의식에 절어 있던 휘하 장병들을 가혹하다 싶을 만큼 들들 볶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반항하는 이들은 즉각 총살하는 강경책까지 불사하였습니다. 

더불어 민간에 대한 강압적인 통제를 펼침으로써 도심의 치안도 서서히 안정시켜 나갔습니다. 

 

그는 참호를 더욱더 깊게 팠고 도심 요소요소에 대공포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선을 강화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주코프의 굳은 결심은 도시를 수호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렇게 형성돼 레닌 그라드의 단단한 방어망이 앞으로 900여 일 가까이 계속  이상태를 유지하게 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레닌그라드의 운명은 바로 이때 내려진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3. 독일 히틀러의 변심

주코프가 레닌그라드에 도착하기 하루 진인 9월 12일, 히틀러는 북부 집단군 예하의 제4기갑 집단을 모스크바 골량에 투입하라고 OKH(독일 육군 쵝사려부)에 명하였습니다. 이는 전쟁 전부터 레닌 그 가드를 우선 목표로 여기고, 불과 한단 전까지만 해도 공격을 독려하기 위해 중부 집단군에서 제39장갑 군단을 차출하여 북부 집단군을 지원하였던 히틀러의 행태를 고려한다면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모스크바를 먼저 차지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키예프 공력이 끝나자. 히틀러는 갑자기 변심하여 OKH가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입안한 태풍 작전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연이은 격전으로 소모가 컸던 중부 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레닌그라드 목전까지 다가갔던 제4 기갑 집단을 빼버리는 파 겨을 단행하였습니다. 기상천외한 총통의 지시에 사령관 레프를 비롯한 사 북부 집단군 전체가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제4 기갑 집단은 말 그대로 북부 집단군의 돌파를 담당하던 유일한 기동 부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차출하고 더구나 다른 부대를 충원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레닌그라드 점령을 유보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히틀러가 그동안 군부의 요청에도 불고하고 우선순위에서 배제시켜 놓았던 모스크바에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어쨌든 9월 들어 그는 갑자기 이곳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히틀러는 키예프 전투의 결과에 고무되어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전쟁이 거기서 탈것으로 판단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300여만 명의 소련군이 지나 두 달 동안 격파되었고, 소련군의 마지막 전력이라 추정되는 대부분의 예비대들이 모스크바 방어에 투이 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었기에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머 뭐한 피를 입고도 소련의 저항의 지는 꺾어지지 않았습니다. 

 

4. 한 번에 먹을 수 없는 먹이 

어떻게 되었든 레닌 그라드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제4기갑 집단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방향을 틀어 모스크바를 향해 남진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북부 집단군이 레닌그라드 골량을 중단한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9월 17일, 리프는 독일군 6개 사단을 앞세워 레닌그라드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지만 소련의 방어선이 강화된 반면 독일군의 돌파 능력은 현저히 저하되어 별다른 선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레닌그라드의 북쪽을 차단한 핀란드군이 진격의 멈추었습니다. 그들은 지난겨울 전쟁에서 강탈당한 카레리 야를 회복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황한 독일은 OKW(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 작적 부장 요들을 급파하여 레닌그라드 협공을 설득하였으나 핀란드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결국 레닌그라드 진입이 만만치 않자 독일 북부 집단군은 9월 25일부터 진격을 멈추고 포위전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북부 집단군의 예하 부대를 차출하여 모스크바 공략에 투입할 만큼 독일군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라는 두 개의 커다란 먹이를 동시에 먹을 능력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바바로사 계획 수립 당시에는 3개 병단이 세 곳의 전략 목표를 동시에 점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독일은 불과 석 달 만에 그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소련은 광활한 땅이었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저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저만 해도 직접 전선까지 찾아와 레닌그라드 공략이 늦어진다고 닦달하던 히틀러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독일이 진격을 멈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히틀러는 이상태로 가만히 있기만 해도 포위된 레닌그라드의 소련군이 항복하고 나올 것이라 예상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모스크바를 중시하였던 독일 군부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이런 반응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주코프는 이런 상황을 몰랐지만 소련에게 이는 엄청난 호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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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전투 두번째이야기 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닌그라드 전투 2번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차례

  1.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2.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3. 소련의 반격(대응)
  4. 쾌속의 진격

1.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독일은 얼마나 빨리 소련의 기를 꺾어버리느냐에 독소전쟁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초전에 소련의 저항 의지를 신속히 무터 뜨려 항복을 받아내는 쪽을 택했던 것이었습니다. 

 

1년 전의 프랑스가 바로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프랑스는 단지 국토의 15퍼센트만 점령당하고 150만의 대군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7주 만에 항복했습니다. 

 

독일은 우선 진출 목표는 소련 국토의 20% 정도까지만 이르면 소련인 항복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구와 결제력의 70% 정도가 몰려 있는 곳이라 독일이 생각이 결코 잘못된 것이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바로사 계획은 예정 진출선까지 신속히 진출 함과 동시에 초반에 소련군 주력을 섬멸하면 충분히 완수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를 위해 독일은 침공군을 거대한 3개 병단으로 나누어 독립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독일은 주공이 정해지면 여타 병단이 조공이나 견제의 역할을 당 담하였지만 소련 침 곶전에서는 모두 주공의 역할을 담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소련이 단지 한 곳에 돌파구만 열어서는 점령을 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란 뜻입니다. 역설적으로 독일의 배후에는 절정 한 예비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독소전쟁발발후 레닌그라드봉쇄당시 이상대성당 건너편 독일 진지

 

이때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로 예정되었던 병단은 레프 원수가 지휘하는 북부 집단군이었습니다. 

예하 부대중 창을 담당하는 제4 기갑 집단군이 전선 가운데에 돌파구를 열고 진격하면 좌우에서 제18, 16군이 병행하여 돌격할 예정이었습니다. 

 

예하 부대 중 창을 담당하는 제4 기갑 집단군이 전선 가운데에 돌파구를 열고 진격하면 좌우에서 제18, 16군이 병행하여 돌격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진격로를 제1항 공군이 하늘에서 엄중히 호의 할 예정이었고 3개 집단군 중 유일하게 발트 해로 진입할 독일 해군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북부 집단군의 우선 목표인 레닌 그 아드를 점령하려면 발트해 지역을 거쳐 북진하여야 하는데, 진격 거리로만 따지면 우측의 중부 집단군보다 멀었습니다. 

전면의 관할 섹터가 작지만 문제는 진격할수록 우측면에 노출되는 부의가 커진다는 점이었습니다. 

가잔 좋은 방법은 최대한 빨리 내달려 측면으로 등장할지 모를 소련군이 레린그라드 방어에만 몰려들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력과 예비대가 부 졸한 것은 고민 잉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북부 집단군에게 함께 보조를 맞춰서 소련군을 압박해준 강력한 동맹국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북극의 저승사자라 불리우는 핀란드였습니다. 

독소전쟁 단시에 항상 병력이 부족하였던 독일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축국에 가담한 여러 중소 국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는데 핀란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전투력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핀란든가 추축 국에 가담한 것은 독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소련이 미워서였습니다. 

핀란드에게 소련은 영토의 10%를 빼앗아 간 원수였습니다. 

1939년 11월부터 이듬해 봄 까지 4개월간 이어진 이름바 겨울전쟁(Winter War)의 결과였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의 물리적인 피해 규모는 승리한 소련 쪽이 훨씬 컸습니다. 

 

소련은 핀란드 성인 남서의 절반 정도에 해당되는 병력을 동원하였음에도 핀란드의 유격 전술에 말려 핀란드군의 5배가 넘는 처참한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독소전쟁을 고려하던 히틀러에게 두 가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먼저 소련군을 규모 또한 큰 허야 한 군대로 얕보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전투에 능한 핀란드를 독일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독일과 핀란드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약 40여만의 핀란드군이 소련 침공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를 독소전쟁과 분리하여 계속 전쟁이라고 합니다. 

 

 

 

3. 소련의 대응

독일 북부 집단군을 맞상대할 소련군은 34개 사단으로 구성된 북서 전선 군이었습니다. 

이들은 원래 소련의 후방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사이를 담당하던 2선 급 부대였는데, 1년 전 발트 3국을 기습 점령하면서 서독으로 전진 배치된 상태였습니다. 

 

이 때문에 남쪽으로 독일의 동프로이센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타 전선 군에 비해 규모가 작아 그다지 전투력이 강하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배치를 한 이유는 우선 접촉 면적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 그라드에 이르는 소련 레닌그라드 주 일대는 페이푸스호를 비롯한 많은 장애물로 인하여, 독소전쟁의 여탸전선처럼 대규모 부대가 엉켜서 싸우기가 구조적으로 곤란 지형입니다. 

바르바로사작전계획지도 이미지 출처: 국방일보

결론적으로 이일 대는 독서 전쟁 내내 치열하였지만 겉으로는 가장 정적인 전선이 되었습니다. 

사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3년 가까이 계속될 수 있었던 유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여타 전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뒤에 북부 전선 군이 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지역 내의 전체적인 전력은 소련이 우세해 보였지만 이들의 위치도 애매모호하였습니다. 

핀란드가 존재 때문이었는데, 소련이 핀란드의 추축국 가담을 눈치챘다는 증거는 없지만 설령 독일과 핀란드가 한 배를 타지 않았더라도 미리 대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현제 최전선이 되어 버린 발트 3국 민심이 바 소적이라는 점도 부담이었습니다. 강제로 점령하여 합병한 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들이 소련 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독일이 이곳으로 진격하여 온다면 소련군의 입지에서는 적진 한가운데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화이었습니다. 해당 지역에서 징집한 병력을 북서 전선 군에 배치하였지만 소수였고 이들이 소련을 위해 열심히 싸워 줄지도 미지수였습니다. 

 

 

4. 쾌속 진격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남북으로 2,000km에 이르는 전 전선에서 소련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맹렬한 폭격과 포격 직후 전차들이 쇄도하여 들어갔습니다. 소련 병사들이 정신을 차려 앞을 보면 이미 독일군은 자신 들을 지나쳐 등 뒤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저항하다 산화하거나 얌전히 항복하는 것밖에 없었으며 소련의 공군도 1,200 여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미쳐 날아보지도 못하고 개전 첫날 지상에서 격파당하며 참사의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불과 35세 소련 해군 총사령관에 오른 쿠즈네초프가 개전 전장 전선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하여 내린 비상 경계력 덕분에 해군만이 간신히 참사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게 살린 소련 해군의 전력도 전선의 상황을 호전시키는 역할을 단 담하기엔 미약한 수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독소 전쟁 개전 첫날의 모음을 요약하자면 독일의 완벽한 대승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북부 집단군도 1차 목표인 레닌그라드로 향하여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선봉은 동 프로 센 일대에 시동을 켜놓고 대기하던 제4기갑 집잔 소고의 전차들이었습니다. 

3일 후 인 6월 25일 핀란드군이 북극의 초입인 폐차모에서 남쪽의 비푸리 이르는 1,000km의 국경 전역에서 진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덕분에 여차하면 남서쪽으로 전개할 수 도 있었던 소련 북부전선군이 이곳에만 집중을 해아 했습니다. 

소련 부서 전선 군은 호수, 강 저지대 습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지연전을 펼쳤습니다. 

라 세이니에서 한대의 kv-2 전차가 돌일 제6 기갑사단의 진격을 하루 동안 막아내는 놀라운 선선을 펼 지치고 했지만 전반적으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7월 7일 되었을 때에는 독일군 서두 부대가 소련군 12개 사단을 격파하고 500여 km를 진격하여 페이푸스 호 남단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면서 이제 레닌그라드까지는 200여 km가 남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대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3편을 기대해 주시고 

1편을 읽으셨다면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rokmc76.tistory.com/57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

rokmc76.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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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해상 작전 이야기

노르망디 작전의 예비 단계는 해군의 역할이 중대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국 해군 사령관은 영국 해군의 버트람 램지 경(Sir Bertram H Ramsay)이 임명된 사실에서 알 수가 있듯이 작전에 동원된 함선들은 영국 측이 주동이 되어서 마련한 것들이었습니다.

사령관 램지 경은 전쟁 초기 독일군에게 패주한 영국군과 프랑스군들을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수송 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연합군의 북 아프리카 상륙 작전에서 해군 작전 기획 책임자로 일했었고 시실리 섬의 침공 때도 두 개 함대 중에 한 개 함대를 지휘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해군 상륙 작전 지휘의 최고 베테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목차

  1. 독일 해군의 방해를 원천봉쇄 하기.
  2. 함포 화력 지원.
  3. 연합군 해군이 피해.

1. 독일해군의 방해를 원천 봉쇄하기.

작전명 넵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중요한 해군 목표는 노르망디 침공의 해상 루트와 상륙 예정 해변을 독일 해군(Kriegsmarine)의 방어와 반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침공 해상 루트의 보호 임무는 영국 본토 해군 함대에게 부여되었습니다.

 

독일 해군이 바다에서 침공 함대에 가해올 위협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르웨이의 북방 해안과 발트해에 기지를 두고 있는 독일 함대의 주력 대형 함에 의한 해상(海上)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대형 전함들은 영국 해군과 공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었고 순양함들은 훈련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함대의 출동 연료도 부족했었고 출동한다 해도 영국 해군이 이들 수상 함대가 통과할 빌헬름 황제 운하(Kaiser-Wilhelm-Kanal, 발트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독일의 운하) 해역에 설치한 대량의 기뢰 지대에 걸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설사 이런 불리한 조건을 뚫고 상륙 해안에 출동한다 해도 영국 해군의 함대는 독일 함대가 제압하기에 너무 막강했습니다. 그러므로 독일의 수상 함대는 연합군에 대해서 별다른 위협이 될 수가 없어서 작전 수립 단계에서 독일 대형 함대에 대응하는 부분을 제외하였습니다.

 

U보트이미지 2차세계대전 악명이 높음

연합군 해군에게 예견 가능한 진짜 위협은 대서양에서 위협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일 해군의 U보트(잠수함) 부대였었습니다.

U 보트를 감시하기 위해서 미 해군의 호위 항공모함 세 척과 영국 공군 해안 감시대 소속 정찰기들이 영국 본토에서 먼바다까지 나아가서 정찰을 했지만 별다른 U 보트의 활동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합군 해군은 U 보트에 대한 경계 활동을 지속하면서 프랑스 브리타니와 비스케이 만으로부터 상륙지점에 접근할만한 길목에는 함대를 배치해서 봉쇄하였습니다.

프랑스 연안에는 기뢰 지대가 여러 곳 설치되어 독일 해군 함정이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엄호 거리 내에 항로로 통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독일 함선들이 할 수없이 연합함대의 구축함들이 출몰하는 먼바다로 나와 항해를 해야 했습니다. 연합군 해군은 만반의 대비를 하면서 독일 해군의 동정을 살폈지만 작전 개시 전까지 별다르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쯤에서 만족하지 못한 연합군 해군은 독일 해군에게 더욱 압박을 가했습니다. 도버 해협의 접근로는 모두 기뢰를 깔아 접근이 불가능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공중 초계와 레이다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독일 전투함이 출항할만한 항구들은 모두 폭격해서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훼방 놓을 수도 있는 독일 함대의 출현을 경계하는 연합군 해군이 침공 전까지 격침한 독일의 군함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 함대의 상륙작전 방해라는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리는 목표는 완수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상륙 작전 당일(D-day) 작전을 방해한 독일의 U 보트는 한 척도 없었습니다.

 


2. 함포 화력 지원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해군이 맡은 중요한 임무는 전함에서 순양함, 구축함, 그리고 상륙정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함정의 화력을 상륙 작전 지원에 최대로 동원하는 것이었스니다.

D-day에 지원된 해군 함정의 화력지원은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한 본보기를 든다면 주노 해안에서 캐나다 상륙부대에게 지원된 화력은 큰 실패로 끝났던 1942년의 디에프 기습 작전 때의 몇 배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구형 전함 HMS 라미리스와 아스파트와 포함 HMS 로버트는 오른(Orne) 동쪽의 해안 포대를, 순양함들은베르쉬르 메르(Ver-sur-Mer)와 물리노(Moulineax)의 해안 포대를, 11척의 구축함들은 각 상륙부대에 근접하여 전면 적 요새를 직접 사격으로 파괴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정통 군함 외에 수십 척의 상륙정들을 다양한 상륙 화력 지원함으로 개조하는 작업도 행해졌습니다. 8척의 상륙용 함정들에 각각 두 문의 4.7인치 포들을 장치했고 다른 8척은 기관포를, 또 다른 8척은 1,100발을 일시에 발사하는 로켓 발사기를, 8척의 상륙정은 24발의 폭뢰를 발사하는 무장을 해서 독일군이 해변에 설치한 기뢰들을 파괴하는 기능을 주었습니다. 24척의 탱크 운반 상륙정들은 상륙 해안으로 질주하는 시간에도 적 해안 목표를 향해 발사가 가능한 자주 곡사포를 장비했었습니다.

해군의 함정들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화력은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군사 목표를 타격할 뿐만 아니라 해안선 먼 후방까지도 타격하여 군 병력의 집결을 지장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독일군 룬트슈테트 원수는 이 점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적[연합군]은 매우 강한 해군력을 교두보 연안에 전개하여서 이 전력을 아주 빠르게 대응하는 기동 화력 기지로 활용하였다. 이 화력 지원은 항시 대기하고 있다가 육군이 요청하면 바로 실시되었습니다. 주간에 실시되는 해상 포격은 정찰기에 의해서 유도되었으며 육군 전방 화력 통제 장교들이 통제하였습니다. 신속하고 막강한 해군 화력은 그 유효 사거리 내에서 벌어지는 지상전투에서 연합군에게 전투의 결정적인 프리미엄을 제공하였습니다. 기갑 부대의 탱크조차도 주간에는 해군의 가공할 화력이 타격을 가하는 개활지에서는 기동 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3. 연합군 해군이 피해

큰 역할을 한 연합군 해군은 역시 독일 육상 화력에 피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상륙 지휘함의 한 척이었던 HMS 로포드는 상륙작전 3일째인 1944년 6월 8일 주노 해변에서 적의 공습을 받고 침몰하였습니다.

상륙 작전 중 유일한 수상 함끼리의 해전은 D 데이 당일 오후 소드 피시 해안 연안에서 동부 기동함대를 공격한 4척의 독일 어뢰정이 발사한 18발의 어뢰 중 한 발이 노르웨이 구축함 스베너 함에게 명중해서 이를 격침한 것입니다.

 

독일 어뢰정들이 겨눈 것은 구식 영국 전함들이었는데 빗나가서 노르웨이 구축함을 격침하게 되었다. 독일 구축함들은 어뢰를 발사한 뒤에 연막을 치고 도주해버렸습니다.

 

그 외에 독일이 해안에 설치한 기뢰에 의해서 미(美) 구축함 코리 함과 PC정, 그리고 여러 척의 상륙함이나 상륙정들이 격침되었습니다.

참고문헌: (전쟁사, 김창원,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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