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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G3개발사 전편에 이어 2번째 시간을 이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새로운 소총을 만들어버린 HK사.

어렵사리 만들어진 CETME/HK의 소총의 앞날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서독군은 1956년 벨기에제 FN FAL 벨기에제 G1 자동소총으로 제식 채용하게 되면서 BGS도 당연히 G1을 채용하게 되면서 CETME/HK 소총을 더 이상 채용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BGS에 납품하기로 한 시제 총기의 생산은 HK의 경험 부족으로 난항을 거듭했습니다.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HK는 CETME 소총의 독일 생산에 성고하고 시험용 총기 400 여정을 1956년 10월에 BGS에 납품하였으며, 이후 1957년 4월까지 시험평가가 실시되었습니다. 

 

 

 

 

CETME/HK의 소총이 개발되는 사이 서독 연방군과 BGS는 FN FAL을 G1 소총으로 제식채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한편 1958년이 되자 이제 서독 국방부 가 CETME/HK 소총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서독군도 이미 FN FAL소총을 G1 자동소총으로 제 식체 용하고 있었지만, 서동 정부가 FAL 소총의 라이선스 생산을 요구하자 FN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2차 대전 시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기억에 벨기에 정부는 직도입은 몰라도 면허 생산은 허용할 수 없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서독군은 자국서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자동소총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마침 BGS에서 시험 평가하고 있던 CETME/HK 소총은 매우 시의 적절한 대안이었고, 결국 BMV는 1958년 4월 17일 시험 평가용 소총을 400 정이나 주문했습니다. 

 

이에 따라 HK7월 1일까지 400 정의 CETME/HK 소총과 함께 1,600개의 탄창과 기타 수리부속을 납품했습니다. 

 

독일 정부는 사실상 CETME/HK 소총의 채용을 결심하고 매우 진지하게 시험평가에 나섰습니다. 

BWB(국방기술 조달청)는 꼼꼼한 시험평가 과정을 실시하면서 여러 가지 사항을 개산 하도록 요구했습니다. 

 

BWB는 우선 본격적인 시험평가에 앞서서는 17가지의 개선사항을, 시험평가 종료 후에는 4가지 개선사항을, 그리고 양산 전에는 3가지 개선사항을 요구했습니다. 

 

2. 요구사항 내용

1. 시험평가 전 개선 요구사항

  1. 소여 기와 총류탄 발사기를 결합하여 설계할 것. 
  2. 가늠쇠 보호장치를 강화하여 제작할 것
  3. 가늠자는 플림 -업이나 다이얼 방식으로 제작할 것
  4. 운반 손잡이에 고정 장착을 장착할 것. 
  5. 조종간 고정장치의 위치를 변경할 것. 
  6. 탄피의 배출 시 발향을 바꾸는 기구를 부착할 것. 
  7. 개머리판 끝부분의 재질을 금속 대신 고무로 변경할 것. 
  8. 권총 손잡이의 양산 절차를 단순화할 것. 
  9. 멜빵의 장착 위시를 변경할 것. 
  10. 잔 전손 잡이을 길게 제작할 것. 
  11. 파이프의 위약을 변경할 것. 
  12. 반동 스프링 가이드를 변경할 것. 
  13. 권총 손잡이에 장착되는 핀을 변경할 것. 
  14. 버퍼링 장치를 변경할 것. 
  15. 개머리판의 형상을 변경할 것. 
  16. 방아쇠 안전장치의 모양을 변경할 것. 
  17. 장전 손잡이를 더울 인체공학적인 형상으로 변경할 것. 

2. 시험 평가 종료 후 개선 요구사항. 

  1. 양각대를 강화할 것. 
  2. 손 보호를 위한 대책을 강구할 것. 
  3. 권총 손잡이의 형상을 더욱 인체공학적으로 교체할 것. 
  4. 전체 중량을 감소할 것. 

3. 시험평가 종료 후 양산 전 개선사항

  1. 안전장치가 걸려있는 상태에서도 장전이 가능하도록 방아쇠 구조를 변경할 것. 
  2. 20발이 수납 가능한 탄창을 제작할 것. 
  3. 마지막 탄환 발사 이후 약실이 개방된 상태로 되도록 만들 것. 

 

 

G3소총 설명 동영상

독일군을 위한 개조 과정에서 HK가 만드는 소총은 점점 CETME 소총과는 다른 소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CETME소총의 총몸은 저탄소강, 즉 연철로 만들 졌습니다. 사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돌격소총들을 만들 때부터 총몸에 저탄소강을 썼는데, 돌격소총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CETME 소총도 단영히 이런 전철을 따랐던 것입니다. 

 

저탄소강을 사용하면 손쉽게 가공이 가능하여 부족한 설비로도 저가로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가공을 위한 저탄소강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CETME 소총은 독일의 돌격 소총처럼 상대적으로 저위력의 탄환을 발사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로러로킹의 지염블로백 작동방식을 사용한 것도 처음에 채용했던 탄환의 위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7.62mm NATO탄을 사용하면서 총기에 가해지는 스트레스가 극도로 증가하면서 더 이상 저탄소강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HK는 저탄소강을 대신하여 더욱 강성이 높은 합금강을 채용하였습니다. 또한 노리쇠를 구성하는 노리쇠 앞쪽과 노리쇠 뭉치, 롤러 등도 모두 강성이 높은 다른 재질로 바뀌었습니다. 

 

HK는 원활한 작동을 위해 무려 20가지가 넘는 롤러들을 개발하여 원하는 것을 채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3. G3소총 드디어 채용되다. 

한편 HK가 소총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라인 메탈의 HK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사실 라인 메탈은 윈래부터 CETME 소총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독일 내 생산을 CETME에 제한했지만 HK를 이미 파트너로 선정했기에 좌절된 바 있습니다. 

 

이제 독일 내 양산을 놓고 1957년 CETME는 HK/라인 메탈 팀과 협상에 들어갔는데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CETME는 이제 독일 국방부와  직접 면허생산 계약을 맺고자 했습니다. 

독일 국방부도 CETME와 직접 계약을 체결하기를 바랐지만, 해외수추권한까지도 확보하기 바랐는데, 이 부분에서 결국 CETME와 대립하면서 계약은 체결되지 못했습니다. 

 

계약이 이뤄지지 못하자 1958년 3월쯤에 이르러 CETME/HK 소총의 독일 생산을 위한 모든 준비작업이 중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페인이 채용한 CETME 모델 B 소총은 NATO표준탄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과연 FN FAL을 대체할 만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까지 더해졌습니다. 게다가 서독 연방군의 규모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애초에 50만 명 규모의 군대를 목표했지만 숫자는 계속 줄어갔습니다. 

이는 차기소총의 생산량과도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CETME는 새롭게 계약 협상을 진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심지어는 그간 꺼려왔던 해외 수출 권리까지도 독일 측에 넘길 수 있음을 밝혔습니다. 

CETME 소총의 뿌리가 독일의 STG45(M)이며 그 개발의 주역이 루드비히 포 그림러를 포함한 독일 총기 설계자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독일의 핏줄을 가진 총기가 독일인의 손에 들오온 셈이었습니다. 

 

CETME 측이 양보하자 계약은 이사천리로 잰 행 되었습니다. 

1959년 2월이 되자. CETME, HK, 라인 메탈은 물론이고 독일과 스페인 양국 국방부까지 서명한 계약서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에 딸 대금이 지급되고 생상에 필요한 기술 문건들이 이전되면서 드디어 CETME/HK 소총의 독일 생산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1959년 소독 연방군은 CETME/HK 소총을 자동소총,으로 제식 채용하였습니다. 

 

한편 연방군을 위한 G3 양산에서 서독 국방부는 신생업체인 HK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HK 이외에도 라인 메탈에서도 G3가 생상 되었으며, 초도 주문량으로 HK와 라인 메탈은 각각 65,000정을 생산했습니다. 

 

HK와 별도로 라인 메탈도 독자적인 GE변형 모델들을 개발했으나,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G3가 성공하면 할수록 CETME와 HK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특히 이미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CETME 소총의 개발자였던 포그럼러가 마우저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CETME는 마우저와 전략적 협력을 하기에 이렀는데, 포 그림러는 마우저에서 시험용 기관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5 정의 시제 기관총이 만들어져 서독 연방군의 제공되었지만, 이미 MG3라는 우수한 기관총을 보유하던 연방군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우저의 CETME소총 개발은 방향을 잃고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4. G3소총으로 미래를 HK 미래를 열다. 

실전 배치된 G3는 현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독일군의 G3실전배치와 만족스러운 운용은 다른 NATO 회원국 드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군대로부터 관심을 끌었습니다. 

독일 다음으로 채용한 것은 포르투갈로, 이들은 CETME 사양이 아니라 G3사양으로 자구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은 스칸디 나비아이 3개국으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자국에서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이외에도 터키, 파키스탄, 이란, 그리스와 프랑스에서도 G3면허 생산되었습니다. 한때 FN FAL로 나토 전역을 장악할 것 같았던 FN FAL 은 G3에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HK의 야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던 G3의 작동방식에 바탕하여 다양한 총기들을 개발했는데 5.56 × 45mm탄을 사용하는 HK33과9mm파라블러탄을 사용하는 MP5 기관단총을 만들면서 제품군을 다양화했습니다. 

 

물론 G3자체를 경기관총화여 만든 HK 11(탄창 급탄 방식)과 HK21(탄띠 급탄 방식)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G3는 기관총보다 저격총으로 만들어져 더욱 인기를 끌었습니다. G3SG/1에서 시작하여 MSG3이 등장했습니다. 

이후에는 프로 플로팅 배럴을 장착한 PSG1과 MSG90까지 등장했습니다. 

 

물론 HK의 주력 상품군은 G3만은 아니었습니다. 

HK4권충이나 P9, VP90등 다시 기준으로 획기적인 총기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HK가 마우저나 라인 메탈, 발터 등의 거물들을 제치고 독일의 대표적인 총기업체로 성장할 수 있던 것은 G3소총의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1.12.22 - [육군무기체계] - G3 소총 개발사 - 스페인이 부린 제주에 대박친 독일의 소총 을 아시나요! (1부)

 

G3 소총 개발사 - 스페인이 부린 제주에 대박친 독일의 소총 을 아시나요! (1부)

G3소총 개발 배경과 소총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해 클러& 코흐의 등장하다. 2차 대전에 패전한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무기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습니

rokmc76.tistory.com

 

참고문헌:한국 국방 안보 포럼,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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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3소총 개발 배경과 소총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해 클러& 코흐의 등장하다. 

2차 대전에 패전한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무기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STG44나 MG42 같은 당내 최고의 명작 총기를 만들던 독일 엔지니어들은 프라스나 스페인 등이 국가로 건너가서 총기연구소에서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런 가운데 전직 마우저(Mauser)사의 엔지니어들이 모여서 특수 정밀가공업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회사는 처음에는 마우저 공장 인근에 방공호로 쓰이던 자리에 작업장을 차려놓고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회사가 바로 헤클러 & 코흐(hk)입니다. 

 

헤클러 & 코흐 G3 자동소총 <출처: Public Domain>

헤클러 & 코흐는 두 창업자들의 이름에서 회사명을 따왔습니다. 

마우저의 관리자였던 에드문드 헤클러 (1906~1960)와 티오 도어 코흐(1905~1976)는 마우저 출신 총기 설계자로 HSC권총을 설계했던 알랙스 자이들(1909~1989)을 영입하고 익명의 자산가들의 지원을 받아 1949년 창업을 했습니다. 

 

HK는 원래 총기사업을 할 생각은 아니었고, 처음에는 제작기계용 정밀부품 등을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서독의 연방국경경비대(BGS)와 연합군 점령군 사령부가 K98K 소총과 MG42 기관총의 수리부속을 요청함에 따라 1951년 HK가 그 부품을 만들면서 총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HK 본사의 모습 <출처: Heckler & Koch GmbH>

총기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HK는 방공호 작업장에서 나와 오베른 도르프의 구도시인 린덴 호프의 언덕에 구 마우저의 건물로 공장을 옮겼으며 특히 1955년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여 서독은 NATO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군대를 재건하기 시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서독의 무기 생산 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 HK는 본격적으로 총기회사로 전환을 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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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ETME 와 HK가 만나게 되다. 

한편 HK주 거래처였던 BGS는 1954년 스페인의 국립 조병창인 CETME에서 발배한 7.92mm 시제 자동소총인 모델 2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시험평가를 담당했던 BGS 담장자는 이탄 환이 7.62mm 구경이라면 BGS가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CETME는 7.62mm×41mm CETME탄환을 사요 하는 모델 A1을 정식으로 발매했습니다. 

그러나 BGS에서 얘기했던 7.62mm탄환은 1954년 NATO의 제식 탄환으로 선정된 7.62 × 51mm NATO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실수를 깨달은 CETME는 NATO탄과 유사한 규격을 갖춘 7.62 mm×51mm CTTME탄을 개발하고 이를 발사하는 모델 A2와 모델 B를 속속 발매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 CETME 소총은 NATO 규격탄에 맞는 모델이 아니었고, 규격에 민감한 독일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BGS는 NATO탄을 사용하는 CETE 소총의 시제 모델 400정을 만들어 달라고 발수했습니다. 

 

독일의 엄격한 요구에 고심하던 CENTME는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독일의 협력사를 찾기 시작하였으며 

BGS와 협력하던 HK가 결국 1954년 부터 CETME와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두 회사를 연결시켜주었던 것은 네덜란드의 탄약 화사 MWM의 사장인 헨크 비저였습니다. 

 

물론 HK는 최초에는 소총의 개발에 도움을 주는 역할에 한정되었습니다. 비록 조력의 역할이었지만 HK는 CETME 개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7.62 × 51mm탄의 원활한 사격을 위하여 각인 약실을 채택하도록 약실 설계를 바꾼 것도 HK였다고 합니다. 

 

CETME 소총의 독일 도입이 구체화 되면서 독일 내의 양산이 거론되면서 CETME는 독일 내 양산을 위해 마우저와 접촉했으나, 마우저는 CETME의 제안을 비웃으며 이언 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CETME는 1956년 HK를 양산파트너로 지정하고 이에 따라 CETME의 독 일용 소총의 개발과 양산을 HK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HK는 이제 베팅에 나섰으며 당시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3개국을 제외한 CETME 소초의 전 세계 생산 권한을 갖고 있던 것도 역시 헨크비저였습니다. 

 

아예 생산설비를 갖출 것이라면 전세계로 총기를 판매하겠다고 결정한 HK는 비저에게 이 권리를 양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비저가 이를 승낙하건 아니건 간에, CETME의 결정이 없이는 전 세계의 생산 권한은 양도될 수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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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주력소총 카구팔


Kar98 k 소총

사상 최대의 전쟁에서 활약한 독일군의 주력 소총입니다.

 

목차

  1. 개발 역사
  2. 특징
  3. 운용현황
  4. 변형 및 파생형
  5. 제원

1. 개발의 역사

1935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하겠다고 전격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도발 행위였으나 제1차 대전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는 강력한 제재를 내리는 대신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잘못된 선택을 했고 이후 계속해서 수동적으로 끌려다녔습니다. 만일 이때 연합국이 군사 행동까지 불사하고 강력하게 대처했다면 인류사 최대의 비극인 2 대전의 발발을 막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제1차 대전 패전 이후 20년 가까이 가해진 제약으로 말미암아 전력이 열세인 상황이었습니다. 재군비 선언 후 10만으로 제한받았던 병력은 즉각 증강시킬 수 있었지만 개발과 배치에 시간이 걸리는 무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히틀러가 비무장으로 설정된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키라고 명령했을 때 군부가 아직 때가 아니라며 반발하고 나섰을 정도로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사실 독일은 히틀러의 집권 이전부터 비밀리에 각종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으나 재무장을 선언했다고 당장 최신 무기를 쏟아낼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독일의 국력이나 기술력을 고려할 때 시간만 충분히 준다면 전력 확충은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히틀러가 내일이라도 전쟁을 벌일 것처럼 서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필요하지만 백지상태와 다름없던 전차, 전투기 같은 분야에 투자를 우선해야 했습니다.

반면 기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분야는 개량 등을 통해 전력을 확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대표작 중 하나가 2 대전 내내 독일군의 기본 제식 화기로 사용된 Kar98 k소총입니다. 히틀러가 재무장을 선언한 바로 그 해 채택되었을 만큼 Kar98k 속전속결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에 사용하던 Gewehr 1898(이하 Gew98) 소총을 기반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Gew98은 유명한 총기 제작자인 파울 마우저(Paul Mauser) 1895년 만든 볼트액션 소총이다. 1898년부터 독일군에 공급된 Gew98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주변국의 경쟁작들과 비교하면 구조, 기능, 성능에서 상당히 조화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평가를 받아 해외에도 인기리에 판매되었다. 1차 대전 당시 미군의 제식 소총인 M1903 스프링필드의 탄생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는데 특허권 침해로 소송을 걸어 배상까지 받아냈을 정도였습니다.

기병용 소총인 카빈(Carbine)은 기존 보병용 소총의 총신을 단축해 개발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그러한 방식대로 1899 Gew98을 기반으로 탄생한 카빈이 Karbiner98,  Kar98입니다. 총신이 줄어들어서 말에 탄체 사용하기는 좋았지만 반동 제어가 어려워 곧바로 개량에 들어갔습니다. 1908년 문제점을 개선한 Kar98azKar98 az은 제1차 대전 당시에 기병뿐만 아니라 산악병, 공병, 포병, 지원부대 등이 애용하는 소총이 되었습니다.


작동 편이를 위해 끝부분이 아래로 꺾인 볼트와 거리별로 목표를 정확히 공격할 수 있는 탄젠트 조준기의 모습. < (cc) Capttenneal at Wikimedia.org >


1차 대전 후, 전훈을 참조해 총열을 늘려 사거리와 정확도를 향상한Kar98b이 개발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Gew98로 회귀한 셈이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에서 개발이 용인된 카빈으로 속이기 위한 작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재무장 선언 직후 Kar98k가 개발되어 보급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존 탄약과 부품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데다 성능도 충분하다고 판단해 새로운 소총을 개발하는 대신 기존 소총을 개량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돌격소총처럼 패러다임이 혁명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소총은 어지간한 성능이면 오랫동안 활약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소총으로 교전을 벌일 상황이나 조건이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반자동소총인 M1 개런드의 도입을 시작한 미국을 제외한다면 열강들의 제식 소총이 제1차 대전 당시 사용한 것이나 개량형 정도여서 Kar98k로 전력 균형을 유지하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구조가 단순한 편이어서 생산이 용이했고 잔고장이 적어 야전에서 신뢰성이 높았다. < (cc) Mauseraction at Wikimedia.org >


다만 연사력이 떨어지는 볼트액션 방식은 독일군의 기본 전략으로 기동전을 연구하는 군부에게 아쉬움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심 끝에 독일은 소부대의 기본 화력은 MG34 같은 다목적 기관총이 담당하고 Kar98k는 이를 보조하는 전술을 채택했습니다. 여기에 접근전 등에서는 기관단총이 앞장서는 형태를 가미했습니다. 일선 보병의 무장과 소모품이 이리저리 나뉘는 단점이 있었지만 당시 여건으로는 어쩔 수 없던 차선책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돌격소총이 등장하면서 정리되지만 2 대전 당시에는 비단 독일군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나라 군대의 공통적인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Kar98k 선전물이나 영화 등에서는 시각 효과가 좋은 기관총이나 기관단총이 먼저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는 편입니다. 하지만 2 대전 초기의 대승을 이끌었고 전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독일군의 주력이었습니다.

 

2. 특징

Kar98k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중반까지 독일이나 독일의 영향을 받는 국가들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7.92 ×57mm규격의 마우저(Mauser) M98 탄환을 사용한다. 한 발씩 장전할 수도 있지만 대개 5발 장착 스트리퍼 클립을 이용합니다. 노리쇠는 끝부분이 꺾인 형태로 개선되어 작동하기 편리합니다. 전체적으로 구조가 단순한 편이어서 생산이 용이했고 잔고장이 적어 야전에서 신뢰성이 높았습니다.


스트리퍼 클립을 이용해 장탄하는 모습. < (cc) Michael E. Cumpston at Wikimedia.org >


볼트액션 소총의 연사력은 사수의 능력에 크게 좌우되지만 Kar98k는 기계적 성능이 우수한 덕분에 상대적으로 연사가 쉬운 소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최대 사거리는 2,700m, 유효 사거리가 400~500m 수준으로 탄젠트 조준기를 채택해서 거리별로 사격의 정확도가 뛰어났습니다. 저격수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스코프를 장착해 정밀도를 높였다. 다만 무게가 3.9kg이어서 휴대가 그리 편리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언급처럼 제1, 2차 대전을 비교하면 무기 분야에서 괄목상대할 변화가 있었지만 소총만큼은 예외였습니다. 그런데 돌격소총이 1940년대 초반에 탄생했을 만큼 당시에 이미 충분한 기술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50여 년 전에 개발된 소총을 기반으로 한 Kar98k은 사실 독일군의 상징인 전격전과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의 소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모두가 같은 상황이어서 크게 문제로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Kar98k에 4배율 자이스 ZF39 조준경을 장착한 독일군 저격수 < Public Domain >


3. 운용 현황

Kar98k 1935년부터 독일이 패망한 1945년까지 약 1,460만 정 이상이 생산되었습니다. 최초 생산은 개발자인 마우저와 J.P. 사우어 운트 손(J.P. Sauer und Sohn)에서 담당했으나 2 대전 발발 후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자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업체를 포함해 총 8개사 10개 공장에서 쉼 없이 만들어 냈습니다. 당연히 독일군(무장친위대 포함)에 우선 배치되었고 핀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같은 동맹국에도 공급되었습니다.

Kar98k은 소련의 모신나강, 영국의 리엔필드, 미국의 M1 개런드와 더불어 2 대전을 상징하는 소총입니다. 독일군이 활약한 곳이면 반드시 등장한 필수적인 무기였습니다. 패전 후 독일이 분단되고 각각 NATO와 바르샤바 조약국의 일원이 되면서 제식 소총에서 물러났지만 의장대용 등으로 지금도 일부 사용 중입니다. 많은 물량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한국전쟁 당시에 중공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에 북베트남군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1948년 발발한 제1차 중동전쟁 당시에 이스라엘군이 Kar98k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아랍 국가들을 친서방이라고 보았던 소련은 이스라엘을 중동에서 영향력 확장을 위한 거점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영국, 프랑스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산된 무기를 공급했는데 이때 많은 Kar98k이 이스라엘로 넘어갔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을 탄압했던 나치 독일의 도구가 이스라엘 독립의 수단이 된 것이었습니다.

 

4. 변형 및 파생형

Kar98 k:기본형


< Public Domain >


G24(t):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사 생산형


< (cc) Szuyuan huang at Wikimedia.org >


중정식(中正式): 중국 면허생산형


< (cc) Kampfer Lin at Wikimedia.org >


G40k: 산악부 대용 총신 단축형


< (cc) Gebripe at Wikimedia.org >


5. 제원

제작사: 마우저 외
구경: 7.92m
탄약: 7.92 ×57mm M98
급탄: 5발 들이 스트리퍼 클립
전장: 1,110mm
총열: 600mm
중량: 3.7~4.1kg
유효 사거리: 500m
작동 방식: 볼트액션

 

 

참고문헌: kar98 소총 -  (무기 백과사전, 한국 국방안보포럼(KODEF), 유용원의 군사세계, 디지털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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