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 민스크 전투에 대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민스크 시내 모습 이미지

1. 인류사 중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을 기습 침공하였습니다. 흔히 동부전선 이록 부르며 제2차 대전을 구성하던 하나의 전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라는 정의 해도 무방한 독소전쟁이 발발을 하게 됩니다. 러시아(소련)에서는 대조국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한마디로 강철과 강철이 정면으로 충돌하였은 인류사 중 최대의 재앙으로 불리는 전투입니다. 

 

역사에 일일이 기록될 수 없을 만큼 그동안 수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독소전쟁만큼 격렬하고 잔인한 전쟁은 없었으며 불과 4년이라는 기간 동안 430만의 독일군을 포함한 무려 500만의 추축국 병사들이 사망을 한 전투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1000만의 군인이 전하고 더불어 1,500만의 민간인이 전쟁의 폭풍 속에 사라져 간 소련에 비해 그다지 많은 숫자라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물절 피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인적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적, 물절 피해가 어마어마했던 이유는 편 혐한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나치와 이에 못지않은 볼셰비키가 조도한 충돌이라는 점도 있었고 일단 규모가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장소였만 일부 한정된 공간에서만 싸움이 벌어진 130여 년 전 나폴 레오의 원정 당시와 비교한다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1942년 말에 전선의 길이는 남북으로 2,500km에 달할 정도였으며 4년 동안 동서로 왕복 5000km를 이동하며 쉼 없이 교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동안, 그런 거대한 공간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전투들이 벌어지며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파르티잔의 소규모 특공 전도 있었지만, 전쟁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같은 거대한 충돌들도 많았으며 독소전쟁은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전투들의 집합체 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거대 전투 중 하나였 연 1941년 6월 민스크 전주는 독소전쟁의 서막을 알린 역사적 전투입니다. 

 

 

2. 작전명 바바로사에 대해 알아보자.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 독소전쟁의 발발 원인은 너무 많아 여러 권의 책으로 발행해도 모자랄 만큼 방대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히틀러입니다. 사실 아무리 국민 간의 감정이 나쁘더라도 전쟁은 그렇게 쉽게, 그리고 함부로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은 아닙니다. 모든 전쟁은 예외 없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한 권력자나 집단의 확고 부동한 의지에 의해서 벌어집니다. 히틀러는 동방에 순수 아리아인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임을 누누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목적을 달서 하기 위해 소련과 절멸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였을 정도로 전쟁에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망성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을 보유하자 실제로 소련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40년 12월 18일, 총통 명령 21호를 통해 히틀러는 OKH(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에 구체적인 소련 침공 계획을 입안하려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러한 총통의 의지에 따라 OKH는 바바로사 계획으로 명명된 치공 안을 수립하였으며 침공 4개월 안에 소련의 핵심을 붕괴시키고 볼가강 하구에 아스트라한에서 백해의 아르한겔스크에 이르는 이른바 A-A선까지 진출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당초 독일은 1941년 5월 15일 작전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유고슬라비아 점령 때문에 5주라는 시간을 날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후 소련이 살아날 수 있게 된 천금 같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겨울 눈보라와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물러난 히틀러는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초상화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나에게 지난 간 5주를 돌려달라고 절규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나 OKH모두 자신감이 충만했던 1941년 5주라는 시간의 중요함을 몰랐습니다. 

 

3. 사상 최대의 침공군 조직하다.

소련 침공을 위해 독일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침공군을 준비하는 독일군의 모습 이미지

독일은 소련을 일거에 석권하기 위하여 33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여타 추축국과 위성 국가들로부터 50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았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기점으로 전선의 주역으로 정립되어 가던 전차 3,300여 대와 작전기 2,000 여기가 투입되었습니다. 이는 당시까지 지구 상에 등장한 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었습니다. OKH는 이러한 대군을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군이라는 거대한 3개 병단으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관할 육해공군을 망라하여 구성된 이들 집단군은 북에서 남으로 북부 집단군, 중부 집단군, 남부 집단군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70~100여 만의 병력과 장비로 중무장하였고 전쟁이 개시되면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에 이르는 전략 목적까지 단숨에 진군하여 점령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예상 진격로 중간에 위치한 여타 요충 지긍도 당연히 접수하여야 하고 이를 막기 위해 달려들 소련군도 격파하여야 했습니다. 

 

즉, 독일군은 점령과 섬멸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전쟁 초반에 벨로루시, 서부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신속히 장악해 소련의 항전의지를 꺾을 참이었습니다 소련이 거대한 국토와 인구를 가진 나라지만 독일이 1차적 목표로 삼은 이 지역에 인구와 국부의 70%가 몰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을 독일이 점령한다면 소련은 순식간 덩치만 커다란 단 판 빠진 찐빵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속도와 집중이었는데 지금까지 일사천리로 유럽을 석권한 독일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자신감이 없이 이 정도의 전쟁을 감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석 달이 되기 전에 소련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개 될 것입니다. 우리가 대문을 박차기만 하면 러시아는 썩은 건물을 무 저닐 것이다라고 확신하며 지난 1936년 라인란트 진군 시와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 당시 보여 주었던 히틀러의 초조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4. 부족했던 소련의 준비 상황

약 2년 전인 1939년 8월 모두가 철천지 원수라고 생각하던 소련과 독일은 물로 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을 체결하여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에 이 둘은 사이좋게 폴란드를 침공하여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처럼 표면상으로 동맹국이었지만 양측 모두 이런 우호가 단지 필요에 따른 일시적인 관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라고는 가리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라고는 단정하지 않았지만 소련도 충돌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노골적인 반공, 반소, 반슬라브 신념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자신들도 공산주의 세계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럽으로 영향력을 넓혀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치 독일을 넘어야 했고 둘 사이에 양보와 타협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독일이 서유럽을 석권하자 소련의 불안감은 장가 하였고 나름대로 군비 증가에 착수하여 1942년 말까지 1차 사업을 완료할 예정이었습니다. 

 

독일이 사상 최대의 원정군을 준비하였지만, 시실 당시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500여 만에 달하는 상비군을 보유한 나라였습니다. 

거기에 더해 18,000여 대의 전차와 12,000 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였는데, 이는 수량으로 독일의 5배가 넓은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국토가 넓었기에 당연히 규모가 컸던 것인데 유럽 쪽의 위기가 점차 증가하자 그중 약 400만의 대군과 대다수의 장비를 유럽 접경 지역에 집결시켜 놓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장비가 구식이었고 가동률도 저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개전 당시에 움직일 수 있는 전차는 40%에 불과하였으며 이제 막 생산되기 시작한 T-34나 KV간은 최신 전차는 국경지역에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지난 1937년 대축 청기 간 동안 완전히 무너져 내린 지휘체계가 더 큰 문제였으며 이런 총체적인 무능이 빚은 참사가 지난 1939년에 있었던 겨울 전쟁이었고, 이 때문에 독일은 더욱 소련군을 폄하하고 있었습니다.

728x90
반응형
반응형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투기 이미지

2021.09.08 - [전쟁사] -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오늘은 지난 글에 에어 레닌그라드 전투 3번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총 시리즈 6편 정도 예정되어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독일 계획과 현실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은 전 전선에서 놀라운 속도의 진격을 선보였습니다. 무론 그 와중에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료 고전을 겪은 곳도 이부 있었지만, 마치 찻잔 속의 태 품처럼 대세를 좌우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스크 전투, 스몰 레 수프 전투처럼 인상적인 대승이 주로 독일 중부 집단군 관할에서 연이어 벌이 지다 보니 많이 이들이 전선 중앙부를 주목하였습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최근의 역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전체 전선에서 경쟁하듯이 놀라운 진격을 선보였던 1941년 8월 이전에 바바로사 계획에서 명시한 진격 목표를 달성한 부대는 북부 집단군 바 까에 없었습니다. 특히 노브고로드(Novgoorod)를 향해 진군하던 예하 제56장갑 군단은 개전 4일 만에 무려 320km로 전진하는 놀라운 기록을 선보였습니다. 

 

이처럼 연이어 엄청난 대승을 거둔 전쟁 초기의 겉모습과 달리 독일은 생각보다 어렵게 앞으로 나고 있었습니다. 

이점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데 우선 바바로사 계획에서 예정한 시간이 너무 차이트 하였음을 뜻합니다. 

연거푸 승리하고는 있었지만 이를 달서 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쟁 개시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선두의 기갑부대와 이들을 후속 지원할 보병부대 사에 간극이 생기면서 갈등이 벌어졌고, 그만큼 보급을 추진하는데도 애를 먹었습니다. 

한마디로 소련을 너무 우습게 생산 만용을 부렸던 것입니다. 

독일 북부집단군은 7월 9일이 되었을 때 A선까지 진격하였다. 독일 침공군 중 가장 빠른 속도였는데 사실 이는 바바로사 계획에 명시된 목표대로였다. 결론적으로 독일은 엄청난 대승을 연이어 거두고 있었지만 진격 목표가 너무 과하였다. <출처: (cc) JHB at English Wikipedia at Wikimedia.org> 

부 집단군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서 레닌그라드로 향하던 제4 기갑 집단의 쌍두마차인 제41장갑 군단장 라인하르트와 제56장갑 군단장 만슈타인은 레닌그라드의 계속적인 진군을 주장하였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빨리 전진하다 보니 병사들도 지쳤고 후속해야 할 보급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또한 후방에서 고립된 채 저항하는 소련군도 골칫거리였습니다. 

 

2. 불쌍한 병사들의 부대

7월 중순이 되자 독일 중부 집단군이 도심에 머물며 저항하는 30여만 소련군을 스몰렌스크 일대에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 독일이 전력을 이 일대로 집중시키자 중부 지단 군과 북부 집단군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생기기 시장하였습니다. OKH(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이상태에서 북부 집단군이 홀로 진격을 계속하면 우측 면이 길게 노출될 것이라 판단하여 정지를 명하였고 사령관 레프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라트비아의 리가(Riga)에 입성하여 해방군으로 환영받는 독일군. 이처럼 독일의 초기 진격은 순조로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급 등의 문제로 애를 먹게 된다

 

이처럼 노도와 같았던 독일의 진경이 레닌그라드에서 100km 미터 전방인 일멘(llmen)호 근처에서 멈추고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소련의 움직이도 분주해졌습니다. 

이틈을 놓치지 않고 레닌 고다드 전면에 깊은 참호가 구축되면서 도시 전체가 요새화 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소련군의 반격을 개시하면서 OKH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덧 했지만 아직 소련군의 역량은 독인 군을 넘기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7월 27일 북부 집단군 사령부를 직접 방문한 히틀러가 진경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채근하고 레닌그라드를 즉각 점령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도심에 위치한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전승 행사를 열고 도시명을 아돌프스 브르크로 바꾸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만큼, 이때만 해도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레닌그라드를 우선 목표로 생각하였습니다. 

사령관 레프는 최선을 다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러려면 좀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전선의 모든 곳에서 소모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를 제때 보충하기 힘들 만큼 독일군의 여건은 좋지 못하였습니다. 

비단 북부 집단군만이 더 많은 예비대와 지원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이들은 가장 많은 곤란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관할 섹터가 작다는 이유로 규모도 작았고 이후 전쟁 내내 지원 순위에서도 밀렸습니다. 

그래서 에든버러 대학의 에릭슨 같든 이는 북부 집단군을 '불쌍한 병사들의 부대'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3. 독일 VS소련 양측의 대응

 

이처럼 전잰 전체를 살표 볼 때 주로 조연 역할을 담당하던 북부 집단군에게 그나마 제대로 된 지원이 이루어진 때가 바로 히틀러의 사령부 방문 직후였습니다. 

8월 5일 모스크바 초입의 스몰렌스크에서 벌어진 전투가 종결되자 중부 집단군 소소의 제39 장갑 군단을 레닌그라드 점령에 투입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총통의 이러한 결정을 중부 집단군이 반겼을 리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양 집단군 사이로 벌어졌던 전선이 다시 공고하게 연결되면서 측면의 위험이 제거되고 더불어 장갑 군단의 지원이 더해지자 독일 북부 집단군은 소련을 격파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진격이 잠시 지체된 약 보름의 시간 동안 소련의 방어막도 한층 강화된 상태였습니다. 비록 밀려나고는  있었지만 그동안 소련 북서 전선 군은 나름대로 선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700여 대의 전차를 모두 소모해 버린 라 세이니 전투처럼 격렬한 저항도 있었지만 체계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손실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을 내준 대신 확보한 전력은 이후 레닌 그라드 방위에 있어 커다란 자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근정적인 결과는 스탈린의 시야가 이곳을 벗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만 정신이 파려 있던 스탈린이 해당 지역의 방위 관한 전권을 최측근이 전 국방성 모로시 로프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소련 부서 전선 군 사령관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작전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패배의 책임을 지고 8월 초에 해임되었지만 종전 후인 1948년까지 주요 부대 지휘권을 연임하였을 만큼 큰 처벌은 다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민스크 전투에서 대패한 서부전선군 사령과 파블로프가 스탈린의 분노를 사서 총살당한 것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4. 희생 대신 얻은 것

그런데 바로 이때 레닌그라드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8월 초 전선 남부의 키예프 일대에 80여만의 소련군이 고립되자 독일군이 포의 섬 면전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물에 걸린 먹잇감이 워낙 크다 보니 독일 남부 집단군이 단독으로 작적을 펼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중부 집단군 예하의 제2기갑 집단과 제2군이 진격 방향을 90도 우회하여 키예프를 향해 400여 km를 남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군부의 후퇴 요구를 스탈린이 거부하고 사수를 선언하면서 소련군이 스스로 적진에서 고립을 자초한 형국이었지만, 적을 서둘러 처단하고 싶었던 히틀러의 적극적인 맞대응으로 인하여 전선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모스크바로 직지 하 느려던 중부 집단군은 반발하였지만 독소 전쟁 이전부터 키예프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총통의 명령에 따라야 했습니다. 

 

결국 독일군이 대거 재배치에 들어가면서 키예프 일대를 제외한 전선 전체가 진격을 멈춰야 했습니다. 

이처럼 전선이 정체된 틈을 타서 레닌그라드 남쪽에는 구가 강에서 네바 강에 이르는 외각 방어선과 그 안쪽의 페테 로프에서 콜트 스키를 연결하는 2중 방어선이 완공되었습니다. 더불어 북쪽에는 겨울 전쟁으로 국경이 이르는 거대한 방어선이 구축돼 상태였습니다. 

 

70여만의 소련군이 이거에 몰락한 키예프 전투는 결론적으로 레닌그라드는 물론 이거니와 소련의 생존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독일이 전진을 멈추고 키예프 점령에만 몰입되어 있는 동안 소련 여타 지역의 방어선은 깊게 파 여고 강화되었습니다. 러시아 제국 이래로 항상 그래 왔듯이 소련은 거대한 구토와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용기를 발판 삼아 방어에 필요한 천금 같은 귀중한 시간을 얻었습니다. 

70여만의 소련군이 일거에 몰락한 키예프 전투는 결론적으로 레닌그라드는 물론이거니와 소련의 생존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독일이 전진을 멈추고 키예프 점령에만 몰입되어 있는 동안 소련 여타 지역의 방어선은 깊게 파이고 강화되었다. 러시아 제국 이래로 항상 그래 왔듯이 소련은 거대한 국토와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용기를 발판 삼아 방어에 필요한 천금같이 귀중한 시간을 얻었다.

 

참고문헌: 전쟁사 남도현

2021.09.08 - [전쟁사] -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

rokmc76.tistory.com

2021.09.09 - [전쟁사] - 레닌그라드전투 (2)-대전쟁 최장의 싸움터

 

레닌그라드전투 (2)-대전쟁 최장의 싸움터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닌그라드 전투 2번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차례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소련의 반격(대응) 쾌속의 진격 1. 대국과의 전쟁

rokmc76.tistory.com

 

728x90
반응형
반응형

레닌그라드 전투 두번째이야기 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닌그라드 전투 2번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차례

  1.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2.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3. 소련의 반격(대응)
  4. 쾌속의 진격

1.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독일은 얼마나 빨리 소련의 기를 꺾어버리느냐에 독소전쟁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초전에 소련의 저항 의지를 신속히 무터 뜨려 항복을 받아내는 쪽을 택했던 것이었습니다. 

 

1년 전의 프랑스가 바로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프랑스는 단지 국토의 15퍼센트만 점령당하고 150만의 대군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7주 만에 항복했습니다. 

 

독일은 우선 진출 목표는 소련 국토의 20% 정도까지만 이르면 소련인 항복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구와 결제력의 70% 정도가 몰려 있는 곳이라 독일이 생각이 결코 잘못된 것이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바로사 계획은 예정 진출선까지 신속히 진출 함과 동시에 초반에 소련군 주력을 섬멸하면 충분히 완수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를 위해 독일은 침공군을 거대한 3개 병단으로 나누어 독립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독일은 주공이 정해지면 여타 병단이 조공이나 견제의 역할을 당 담하였지만 소련 침 곶전에서는 모두 주공의 역할을 담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소련이 단지 한 곳에 돌파구만 열어서는 점령을 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란 뜻입니다. 역설적으로 독일의 배후에는 절정 한 예비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독소전쟁발발후 레닌그라드봉쇄당시 이상대성당 건너편 독일 진지

 

이때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로 예정되었던 병단은 레프 원수가 지휘하는 북부 집단군이었습니다. 

예하 부대중 창을 담당하는 제4 기갑 집단군이 전선 가운데에 돌파구를 열고 진격하면 좌우에서 제18, 16군이 병행하여 돌격할 예정이었습니다. 

 

예하 부대 중 창을 담당하는 제4 기갑 집단군이 전선 가운데에 돌파구를 열고 진격하면 좌우에서 제18, 16군이 병행하여 돌격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진격로를 제1항 공군이 하늘에서 엄중히 호의 할 예정이었고 3개 집단군 중 유일하게 발트 해로 진입할 독일 해군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북부 집단군의 우선 목표인 레닌 그 아드를 점령하려면 발트해 지역을 거쳐 북진하여야 하는데, 진격 거리로만 따지면 우측의 중부 집단군보다 멀었습니다. 

전면의 관할 섹터가 작지만 문제는 진격할수록 우측면에 노출되는 부의가 커진다는 점이었습니다. 

가잔 좋은 방법은 최대한 빨리 내달려 측면으로 등장할지 모를 소련군이 레린그라드 방어에만 몰려들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력과 예비대가 부 졸한 것은 고민 잉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북부 집단군에게 함께 보조를 맞춰서 소련군을 압박해준 강력한 동맹국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북극의 저승사자라 불리우는 핀란드였습니다. 

독소전쟁 단시에 항상 병력이 부족하였던 독일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축국에 가담한 여러 중소 국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는데 핀란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전투력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핀란든가 추축 국에 가담한 것은 독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소련이 미워서였습니다. 

핀란드에게 소련은 영토의 10%를 빼앗아 간 원수였습니다. 

1939년 11월부터 이듬해 봄 까지 4개월간 이어진 이름바 겨울전쟁(Winter War)의 결과였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의 물리적인 피해 규모는 승리한 소련 쪽이 훨씬 컸습니다. 

 

소련은 핀란드 성인 남서의 절반 정도에 해당되는 병력을 동원하였음에도 핀란드의 유격 전술에 말려 핀란드군의 5배가 넘는 처참한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독소전쟁을 고려하던 히틀러에게 두 가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먼저 소련군을 규모 또한 큰 허야 한 군대로 얕보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전투에 능한 핀란드를 독일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독일과 핀란드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약 40여만의 핀란드군이 소련 침공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를 독소전쟁과 분리하여 계속 전쟁이라고 합니다. 

 

 

 

3. 소련의 대응

독일 북부 집단군을 맞상대할 소련군은 34개 사단으로 구성된 북서 전선 군이었습니다. 

이들은 원래 소련의 후방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사이를 담당하던 2선 급 부대였는데, 1년 전 발트 3국을 기습 점령하면서 서독으로 전진 배치된 상태였습니다. 

 

이 때문에 남쪽으로 독일의 동프로이센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타 전선 군에 비해 규모가 작아 그다지 전투력이 강하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배치를 한 이유는 우선 접촉 면적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 그라드에 이르는 소련 레닌그라드 주 일대는 페이푸스호를 비롯한 많은 장애물로 인하여, 독소전쟁의 여탸전선처럼 대규모 부대가 엉켜서 싸우기가 구조적으로 곤란 지형입니다. 

바르바로사작전계획지도 이미지 출처: 국방일보

결론적으로 이일 대는 독서 전쟁 내내 치열하였지만 겉으로는 가장 정적인 전선이 되었습니다. 

사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3년 가까이 계속될 수 있었던 유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여타 전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뒤에 북부 전선 군이 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지역 내의 전체적인 전력은 소련이 우세해 보였지만 이들의 위치도 애매모호하였습니다. 

핀란드가 존재 때문이었는데, 소련이 핀란드의 추축국 가담을 눈치챘다는 증거는 없지만 설령 독일과 핀란드가 한 배를 타지 않았더라도 미리 대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현제 최전선이 되어 버린 발트 3국 민심이 바 소적이라는 점도 부담이었습니다. 강제로 점령하여 합병한 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들이 소련 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독일이 이곳으로 진격하여 온다면 소련군의 입지에서는 적진 한가운데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화이었습니다. 해당 지역에서 징집한 병력을 북서 전선 군에 배치하였지만 소수였고 이들이 소련을 위해 열심히 싸워 줄지도 미지수였습니다. 

 

 

4. 쾌속 진격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남북으로 2,000km에 이르는 전 전선에서 소련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맹렬한 폭격과 포격 직후 전차들이 쇄도하여 들어갔습니다. 소련 병사들이 정신을 차려 앞을 보면 이미 독일군은 자신 들을 지나쳐 등 뒤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저항하다 산화하거나 얌전히 항복하는 것밖에 없었으며 소련의 공군도 1,200 여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미쳐 날아보지도 못하고 개전 첫날 지상에서 격파당하며 참사의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불과 35세 소련 해군 총사령관에 오른 쿠즈네초프가 개전 전장 전선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하여 내린 비상 경계력 덕분에 해군만이 간신히 참사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게 살린 소련 해군의 전력도 전선의 상황을 호전시키는 역할을 단 담하기엔 미약한 수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독소 전쟁 개전 첫날의 모음을 요약하자면 독일의 완벽한 대승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북부 집단군도 1차 목표인 레닌그라드로 향하여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선봉은 동 프로 센 일대에 시동을 켜놓고 대기하던 제4기갑 집잔 소고의 전차들이었습니다. 

3일 후 인 6월 25일 핀란드군이 북극의 초입인 폐차모에서 남쪽의 비푸리 이르는 1,000km의 국경 전역에서 진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덕분에 여차하면 남서쪽으로 전개할 수 도 있었던 소련 북부전선군이 이곳에만 집중을 해아 했습니다. 

소련 부서 전선 군은 호수, 강 저지대 습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지연전을 펼쳤습니다. 

라 세이니에서 한대의 kv-2 전차가 돌일 제6 기갑사단의 진격을 하루 동안 막아내는 놀라운 선선을 펼 지치고 했지만 전반적으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7월 7일 되었을 때에는 독일군 서두 부대가 소련군 12개 사단을 격파하고 500여 km를 진격하여 페이푸스 호 남단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면서 이제 레닌그라드까지는 200여 km가 남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대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3편을 기대해 주시고 

1편을 읽으셨다면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rokmc76.tistory.com/57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

rokmc76.tistory.com


 

 

 

 

 

728x90
반응형
반응형

레닌그가드 전투 이미지 출처:영화레닌그라드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즈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차례

  1. 모두가 원했던 도시 레닌그라드
  2. 소련 혁명상징 도시
  3. 독일의 당연한목표
  4.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

1. 모두가 원했던 도시 레닌그라드 

1940년 7월 초, 프랑스를 평정한 직후,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Oberkommando des Heeres)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독일군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차출하여 이 시 조직으 설치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하달된 임무는 소련 침공에 관한 기초적 계회를 수립하는 것이 이었습니다. 

아직 히틀러의 정식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명령이 내려올 것이 분명하였기에 미리미리 대비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8월 8일, 이곳에 파견 나온 제18군 참모장 마르크스(Erich Marcks)는 러시아의 빈약한 도로망을 염두에 두고 수립한 작전 초안을 상부에 보고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후 바바로사 계획(Operation Barbarbossa)으로 알력진 소련 침공 전락의 최초 뼈대가 됩니다. 

 

마르크스는 주공을 크게 둘로 나누어 모스크바와 키예프로 신속히 진격함과 동시에 소련군의 주의를 분사시킬 목적으로 조공을 이도시로 향하도록 작전을 수립합니다. 

 

이를 검토한 참모장 항더(Franz Halder)는 키예프보다 정치적 상징성을 훨씬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먼전 점령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타당하다며, 계획을 수정하여 12월 5일 히틀러에게 보고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키예프와 레닌그라드를 우선 점령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격국 전쟁 지휘부의 갑론을박 끝에 침고군 주력을 셋으로 나누어 모스크바, 키예프 그리고 이도시를 일거에 점령하도록 수정한 최종 침고 계획이 채택되었습니다. 

 

실전이 오고 간 모스크바나 키예프와 달리, 이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당연한 목표라고 보았던 레닌그라드였습니다. 

 

독일이 그렇게 생각하였던 만큼 소련 또한 이곳을 지키고자 했으며 레닌그라드는 엄청난 혈전의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도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에서 최장이라 할 수 있는 900여 일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이전 투에 이름이 바로 레닌그다드 포위전입니다. 

 

레닌그다드 전투관련 해 히틀러와 참모들의 작전회의 이미지

 

2. 소련 혁명 상징도시

1703년 제정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원래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였지만 스웨덴이 강점하고 있던 네바강 하구의 습지대를 탈환하게 됩니다. 그는 발트해 연안의 이곳을 유럽으로 향한 창으로 삼기로 하고 새로운 도시의 건설에 착수하게 됩니다.  자신에 이름을 따서 상트 레테르 부르크로 도시의 이름을 정한 그는 1712년 이곳을 수도로 없겼을 정도로 애착과 기대가 컸습니다. 

 

이렇게 시작돼 이도시는 이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러시아 제2의 대도시가 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위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흔히 러시아의 심장으로 블리는 모스바는 정치적 상징성이 큰 반면, 해상을 통한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트 페테르브르크는 학술, 문화, 예술 분야를 선도하여 러시아의 머리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소련을 태동시킨 혁명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외부 세계의 흐름을 러시아에서 가장 먼저 접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절대 왕정에 반발한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을 만큼 반골 기질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공 산형명이 시작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905년 이른바'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발한 이후 민심이 계속 흉흉해지자 1914년 도시의 이름을 좀 더 러시아의 친화적인 페트로그라드로 개칭하였지만 이미 권력에 등을 돌린 대중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제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이 도시에서 3월 혁명, 11월 혁명이 연이어 버리시면 제정 러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 아인 소련이 탄 행하였습니다.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다시 이름을 바뀐 점만 보더라도 소련 공산 쥐의 역사에서 이도시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레닌그라드는 소련 혁명의 산징과도 같은 도시였습니다. 

 

 

 

 

3. 독일의 당연한 목표

상징성이 먹고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대도시였지만 독일이 레닌그라드를 점령해야 할 당위성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먼저 표트르 대제가 이곳에 도시를 만들었던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상 독일이 레린그라드를 점령하면 소련은 발트해를 통해 밖으로 나갈 통로가 차단되어 버립니다.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상 독일인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면 소련은 발트해를 통해 밖으로 나갈 톨로가 차단되어 버리고 맙니다. 

 

소련은 거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지만 의외로 해상 출입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 , 레린그다드는 구중 얼마 안 되는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반면 독일이 이곳을 차지하면 소련 내륙으로 칙 나갈 수 있는 중요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독일군의 핵심 브레인들이 침공 계획을 짜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 보급로였습니다. 

유럽에 비해 몹시 적은 철도와 몇 개 되지도 않은 열악한 도로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홍이어서 소련 내부에서 주공의 지향 방향은 극히 제한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독일군은 갈수록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이는 전쟁의 패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레니 그 라드가 확보는 독일 본토에서 소련의 중심으로 향하는 거대한 해상 보급로의 출입구가 개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곳을 교두보 삼아 독일이 최종 진출 목표로 설정한 A-A선(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의 북쪽 끝인 아르한겔스크는 반쪽 통로이지만 이곳이 막히면 소련이 외부와 연력 될 수 있는 바닷길은 극동과 흑해만 남게 됩니다. 

 

레닌크가드는 이처럼 혁명이니 역사성이니 하는 추상적 명분보다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독일에게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반대로 소련에게는 어떠한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사수해야 할 싸움터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외부 연결이 언제든 가능한 해안도시여서 대륙 한가운데 위치한 모스크바와 달리 소련의 전통적으로 구사해온 청야 작전이 방어에 그다지 효과가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4.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

이도시가 아무리 해안가 도시라도 해군력이 약한 독일이 바다를 통해 이곳을 점령할 수는 없었습니다. 

소련도 해군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독일 또한 이를 단숨에 격파하고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킬 만한 역량은 없었습니다. 사실 주변에 40여만의 병력이 지키고 있는 350만 인구의 대도시를 해군으로만 순식간에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타 전선과의 연결을 고려했을 때 이곳만 먼저 차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육상으로 900km를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여야 하는데,  사실 소련과의 전쟁을 한창 계획 중인 독일에게 이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설령 레닌그라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소련을 군사적으로 굴 북 시키려면 그 이상은 진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마치 깔때기 입구처럼 진격하면 할수록 넓어지는 소련의 지리적 구조에 있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전선이 커진다는 의미인데 최종 목표로 설정한 A-A선까지 가면 출발선 다시 보다 약 2배 정도 전신이 넓어지게 됩니다. 전선 남부는 추측 국에 가담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도움을 받아 후속 보급에 그다지 문제가 없었지만 레닌그라드로 다가가야 할 북부는 일단 진력 방향부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구조상 동쪽으로만 직진하면 되는 모스크바, 키예프와 달리 레닌그다는 발트해 연안을 따라 복동진 해야 했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관련지도 이미지

그것은 독일의 진격이 길어질수록 우측면이 그대로 노출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살실 소련이 1940년 6월 14일, 3국을 침공하여 합병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일 발트 3국이 독일 편에 붙는다면 레닌그라드는 바로 밑이 훤하게 열리는 샘입니다. 

풀란드를 분할할 때 독일과 사전 밀양을 맺고 취한 군사 행동이었지만, 소련의 발트 3국 점령은 레닌그라드 방어를 위한 사전조치이기도 했습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