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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중동전쟁 썸네일

이번에는 중동전쟁에 3번째 이야기 3차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차 중동전쟁은 6일전쟁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1. 개요
  2. 전쟁 배경
  3. 전쟁의 시작
  4. 분석및 결과

1개요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두어 엄청난 영토를 획득했던 전쟁. 6일 전쟁이라는 별명으로 매우 유명하다. 아랍 측에서는 6월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1,2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국제정세나 여론이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세계의 눈치를 많이 보던 상황에서 전쟁 발발 시 UN의 개입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UN이 개입하고 중재하는 순간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작전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UN이 개입하기 전의 단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장기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 언론에서는 이집트군의 가짜 승리를 계속 보도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로운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이스라엘의 승전보가 세계에 최대한 늦게 알려지는 것이 도움이 됐기 때문입니다.

 

 


2.전쟁 배경

제2차 중동전쟁에서 압도적인 패전을 당하고도,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 둔 이집트의 가멀 압델 나세르는 아랍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야심 차게 전쟁준비에 나서게 됩니다. 소련의 군사고문단과 최신 장비를 들여와 전쟁준비에 나서며, 한편으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물밑 지원하면서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합니다.

 

한편, 예루살렘 서안지구를 두고 충돌을 계속하던 요르단 및 골란고원을 거점으로 이스라엘과 무력충돌을 벌이던 시리아 역시 이집트와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아랍국과의 국경선에서 일부러 도발을 걸며 영토를 확장시키고 있었습니다.

 

원래 6일 전쟁 이전의 이스라엘 영토는 상당히 작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좁은 영토 때문에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게다가 영토 형상의 문제상 임시수도인 텔아비브가 조금만 밀리면, 함락돼서 국토가 양분될 지경이었을 정도로 중부 이스라엘 쪽 땅이 취약했습니다.

 

이후 6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얻어낸 땅을 합쳐도 남한 크기에 못 미쳤고, 가장 큰 적인 이집트와의 화해 및 현실적으로 인구문제상 관리가 힘든 시나이 지역을 돌려주면서, 현재 영토는 남한의 1/5밖에 안 되며…. 그래서 이스라엘은 빠져나갈 구멍을 둔 도발을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호 간에 비무장지대로 합의했던 곳에 경작용 트랙터를 끌고 들어가는 등의 수단으로 아랍 병사들의 선제공격을 유도했습니다.

 

아랍 병사들이 경고사격이라도 하는 순간에 국지전으로까지 전투가 확대되는 등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 이어졌으며,

그래서 제2차 중동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은 자국의 정보력을 모조리 쏟아 부어 주변국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며 전쟁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적자원의 불리함과 좁은 영토 때문에, 장기적인 소모 방어전에 유리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선제타격론으로 대표되는 예방전쟁이 군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실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제2차 중동전쟁인 수에즈 전쟁에서 나세르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군사적으로 크게 패하고도 정치적으로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때문에 나세르는 이번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시위를 통해 강력한 압박을 줌으로써,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입지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례로 이스라엘의 항구로 향하는 선박을 봉쇄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집트 공수부대는 대전차화기, 대공포, 해안포는 배치했지만, 실제 봉쇄에 중요한 기뢰는 전혀 부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이집트의 움직임이 대하서 블러핑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야 조금만 잘못 했다간 지중해 앞바다에 온 국민이 몸을 던져 죽는 수도 있는 판국이었고 주변국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결코 녹록하게 대처할 수도 없었습니다. 앞선 2차 중동전쟁도 이스라엘에서 나세르가 아랍의 결집을 위해 이스라엘을 제물로 삼을 것이 틀림없다고 이스라엘에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나세르는 3차 중동전쟁의 전야는 물론이고 2차 중동전쟁의 전야에도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가 원하던 것은 이집트를 맹주로 하는 아랍의 통합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이집트군은 예멘에서 벌어지던 왕당파와 살레의 공화파 간의 내전에 정규군 절반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심각한 손실로 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또한 당시 공군 원수인 압둘 하킴 아메르 원수의 무능함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습니다. 경직된 지휘체계와 무능력한 아메르로 인해, 이집트 공군은 공습으로부터 전투기를 보호할 쉘터 하나도 짓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압둘 하킴 아메르는 이미 2차 중동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임박했음에도, 모든 보고를 무시한 채 술과 노래로 세월을 보내며 태업을 한 무능의 대명사로서, 그 대가로 이집트는 수에즈 일대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이집트의 유능한 장교들은 이스라엘의 군사전략을 조사하고 중동전쟁의 대세는 장차 선재공격이 될 것이라며 이스라엘이 선제공격하기 전에 먼저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상부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다 떠나서 나세르는 유대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정신론적, 혈 통론적인 우월성을 맹신하면서 결전의 날이 온다면 퇴폐 서구 문명에 물든 '겁쟁이' 이스라엘은 허망하게 무너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대(對) 이스라엘 압박용으로 시나이 지역에 이집트군을 전개시켜 놓긴 했지만, 이는 블러핑 용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과 아랍권 전역에 보여주기 위한 쇼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을 집중 타격할 것으로 보였던 3국(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들 중에 그나마 이스라엘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요르단으로, 요르단 국왕 후세인1세는 대표적인 평화주의자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당시 이집트가 주도했던 언론플레이에 전(全) 아랍권이 광분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친(親) 이스라엘적 태도를 취했다가는 정권이 위태로운 처지였습니다.

 

요르단군은 이집트군의 전쟁 개시에 따라 군사행동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소나마 전쟁준비가 되어있긴 하지만, 실제 이집트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요르단의 준비는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리아군은 쿠데타에 가까운 정권 싸움 때문에(…) 이스라엘 공격 (혹은 방어)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리아군의 태도는 6일 전쟁 발발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초기 이스라엘의 기습을 받고도 언론플레이로 거짓 승리를 보도한 이집트 덕분에 계속 정권 싸움을 하고 있었고(…), 이집트군의 패퇴 이후에는 다소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UN에 의한 정전협정이 발효되자 다시 정권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집트 정보부는 해안봉쇄가 시작되며 이스라엘 내부에서 선제타격을 준비한다는 것을 포착했지만, 이 정보 역시 경직된 조직 탓으로 상부로 전달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형식적이지만 이집트의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여론은 매우 심각해집니다.

 

사실 이집트도 '아랍의 소리'란 라디오 방송으로 중동 여론을 선동하고 있었으며, 이 방송은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멸망을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과의 협상을 준비하려던 장관이 실각하고, 선제타격론파가 정권을 잡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동원령이 내려지기 시작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실제로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소련이 문제였습니다. 소련이 아랍 세력을 지원한다면, 중동의 문제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판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소련에게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연막을 치고 있었고, 다른 아랍국가들 역시 자신들의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18년간 불리한 전세를 한 번에 역전시킬 선제타격론 교리가 연구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개전 48시간 동안 상대의 공군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사막에서의 전쟁은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집트가 먼저 선제타격을 가해 이스라엘의 공군력에 큰 타격을 준다면, 좁은 영토와 부족한 인적자원을 가진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 될 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망의 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3.전쟁의 시작

6월 5일,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시간을 노려,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은 사막에서 초저공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기지들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을 자랑하던 이집트 공군에 대해 주요 공곤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동시에  기습폭격을 가했습니다.

 

약 3시간에 걸친 폭격으로, 이집트 공군은 450여 대의 항공기 중 300여 대를 상실하고, 공군기지와 레이더 기지 등을 모조리 잃는 엄청난 피해를 입습니다. 단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력 80%를 격파한 것입니다. 이후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이집트 영토를 오가며, 그야말로 이집트군을 초토화시키며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자국 영토의 3배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해 현대 전사(現代戰史)의 전설을 만들게 됩니다.

이집트 육군은 이스라엘군의 번개 같은 진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집트군은 나세르의 최측근이었던 압둘 하킴 아메르 공군원수 겸 국방장관이 시리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모든 최전선 지휘관들이 아메르를 마중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야 했고 지휘 공백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집트 육군에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제2차 중동전쟁 당시 돌파되었던 구역인 시나이 반도 방면 이스라엘 국경선의 중앙부와 남부에 강력한 병력을 모아둔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해당 방면으로 이스라엘군의 공격이 들어오면, 반격해서 꺾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좁은 남단부 영토를 관통해서 요르단과 직접 연결한 다음,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이번에는 국경선의 북부에서 강력한 공세를 해서 돌파에 성공했으며, 이후 아부 아게일라 전투에서 패하면서 시나이 반도의 전군이 포위당할 위험성에 빠지자 패주(敗走)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에 도착한 뒤였다(…). 이스라엘군은 공세가 한 번 실패하면 자국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절박감에 고속 공세를 단행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나 공세에만 목을 메달았는지 전차 부대의 기동력을 보급이 못따라가자 헬리콥터로 급히 공수했으며 전투식량이 떨어지자 보급을 기다리지 않고 장군들도 주스로 떼웠을 정도였으며 이집트군 포로가 발생하면 생수 하나 던져준 채 그대로 풀어주고 목표를 향해 기동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집트군 방어 거점이 있을 경우 후방 부대에게 소탕을 맡기고 그대로 무시하고 진격하는 기동부대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 소탕에 몰두하다가 시간을 뺏겨 UN에게 저지당하기 이전에 차라리 수에즈 운하 주요 거점을 고속 기동으로 선제 장악해 이집트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시나이 반도의 방어병력을 포위 섬멸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삼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는 개전 뒤 1시간이 지난 후부터 요르단군과 이스라엘군의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서로 예비군을 주축으로 하여 지루한 대치전 양상을 보이다가, 7일을 기점으로 이스라엘군이 전차를 동반한 부대가 강습하며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요르단 군은 그 명성답게 가장 정예화되고 훈련도가 높은 군대라, 이스라엘군이 초반에 매우 힘들어했지만, 장비가 부실하고 제공권을 상실한 처지라서 결국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서안에 남은 요르단 군은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결국 패주 하여 요르단강 동쪽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시리아군은 뒤늦게 실전에 참가했는데, 이들은 이집트군이 신나게 깨지고 있는줄은 상상도 못 하고 이집트군이 자신들이 승리하고 있다는 자체 주장을 정말인 줄 알고 참전(…)했다가, 개전 첫날 이집트군을 개박살내고 돌아온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 폭격을 당해, 역시 2/3의 전력을 상실하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습니다.

 

일부 지상군은 이스라엘 국내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아랍국들 간의 상호불신과 지휘체계의 혼란으로 대부분 격퇴당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국제사회의 개입을 더욱 빨리 요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내부 깊숙이까지 진격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으나, 국제사회 개입보다는 전선에서 싸우던 시리아군이 그 소식에 먼저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그나마 끝까지 남아있던 기갑부대가 요르단강에서 수장당하면서, 아예 지상공격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집트와 요르단을 박살 낸 이스라엘은 마지막 남은 골칫거리인 골란고원 요새에 대한 전면공격을 결정하고 전력을 투입합니다.

골란고원은 해발고도 500m의 바위산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서, 엄폐물도 찾기 힘든 척박한 지역이었습니다. 여기에 두꺼운 콘크리트 요새를 다중 철조망으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에도 시리아군의 병력 상실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은 그 난공불락의 절벽을 전차와 기계화보병이 탑승한 장갑차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골란고원은 땅이 자잘히 부서지는현무아  이라 폭약으로 현무암 바위를 부수고 그 지역을 불도저로 길을 닦으며 올라갔다. 거기다가 엘리 코헨이 상세히 관찰한 골란 고원에 대한 정보들은 이스라엘군의 요새 점령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시리아군의 지뢰지대와 포격을 버텨 내면서 여단 내 90%의 사상자가 나오면서도 현무암을 부수고 길을 내느라 철조망을 부술 폭약이 모두 소진되자 철조망을 돌파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군은 그동안 올라오느라 8명밖에 남지 않은 병력 중 일부가 자신의 몸을 철조망에 내 던져서 자기 몸에 덮어 얼마 안 남은 전우들이 지나갈 수 있게끔 길을 내어 주었고 결국 9일 밤 이처럼 이스라엘군의 처절한 진격에 방어선이 뚫리자, 날이 밝기도 전에 모든 병력이 철수해 버렸고 골란고원에 이스라엘 국기가 올려졌다. 

이를 지켜보던 골라니 여단의 여단장 요나 여단장은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골란 고원에 이스라엘 깃발이 올라왔고. 이를 망원경으로 보던 여단장은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시리아의 이러한 졸전과 이스라엘군의 영토 확장 능력에 놀란 국제사회는 즉각 정전을 요구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랍세계에서 서방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한 소련의 압박에 못 이겨 이스라엘은 정전(停戰)에 수락합니다.

 

하지만 소련 내 강경파 군부는 실제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군부의 계획대로라면 이스라엘에 소련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예정이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소련 상륙군에 이스라엘의 폭격이 가해지는 즉시 소련의 직접 개입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그런 상황이라면 미군 역시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즉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계획을 알게 된 소련 수뇌부가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막고 정전을 요구하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시켰습니다. 사실 소련이 선전하고 다니던 군사압박 역시 아랍권에 대한 립 서비스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6월 10일 오후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아랍 3국은 중동 불패 이스라엘군의 전설을 하나 더 만들어줬습니다. 

 

 

 


4. 분석 및 결과

6일 전쟁의 발발 원인은 실제 이스라엘의 예방전쟁적 성향도 있었지만 이스라엘로서는 이집트(정확히는 나세르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세르는 언론과 군사적 선계 공격의 가능성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궁지로 모는 정치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선제공격과 승리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는 이집트의 군사적 위협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와 같은 굴욕(?)을 견뎌낸다면, 평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내는 바로 이집트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더불어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내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세르 역시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예상도 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군의 공세에 이집트군이 어느 정도 방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집트군이 방어를 하는 사이에 국제사회의 중재가 개입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중재로 정전이 발효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세계에 대한 이집트의 정치, 외교적 선전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으니까. 다만 이스라엘군이 예상보다 너무 강했고, 이집트군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능했다 보니,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은 요르단의 입지가 이스라엘이나 아랍 측 모두에게 크게 상승하는 영향을 주었습니다. 물론 요르단도 풍요로운 요르단강 서안을 날려먹은 데다가 관광수입 측면에서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상실해서 큰 타격을 입었고, 영토 회복을 위한 모든 노력이 불가능해지는 등의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패전의 와중에서도 끝까지 가장 잘 싸운 국가로 인정받았기에, 제4차 중동전쟁부터는 이스라엘과도 암묵적인 우호관계를 맺고, 아랍 측에도 나름대로 군사지원을 하는 등의 양다리를 걸쳐도,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 위치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런 위치는 앞서 언급했듯 제3차 중동전쟁 때까지 이스라엘과의 교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도록 아랍 측에게 압박받은 것과는 천지차이로 달라진 것입니다. 물론 이걸로 당시 요르단 GDP 40% 이상을 생산하던 요르단강 서부 영토의 상실로 인한 영토 축소 + 경제, 인구의 대손실을 메꾸기엔 너무 손해지만... 지도에 나온 요르단강 서안지구가 1967년에 빼앗긴 요르단 영토입니다. 골란고원은 돌덩이, 시나이 반도는 사막으로 전략적 요충지지만, 인구, 경제면에선 큰 도움이 안 되는데, 이 요르단강 서안 지역 땅은 전략적 요충지 + 경제적 요지라 이후 이스라엘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이집트는 자만심과 독재 체제 특유의 경직된 의사결정 시스템으로 인해 결정적인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제 무기들을 대량으로 들여와 군사력을 강화한 것은 좋은데  이를 아랍민족주의와 연계해 정치적으로만 활용하려 했었고, 자신들의 군사력을 믿고 자신만만해한 결과 이스라엘과 전쟁하면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약점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으며 결국 이스라엘군에 제대로 허를 찔리게 된 셈이었습니다.

한편 나세르는 종전 3일 뒤 대국민 방송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하야할 것을 표명했지만, 이후 3주 동안 거리로 국민들이 밀려 나와 외치는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는 아우성에 "그렇다면 국민들의 의사에 따라 다시 복귀하겠다." 고 밝히고 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나세르의 정적, 이스라엘, 미국 등은 이 같은 과정을 나세르의 정치적 쇼로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국방장관 아메르는 패전의 책임으로 실각했으며, 이후 자신의 오랜 친구인 나세르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한다.

그동안 시리아는 골란 고원을 통해 이스라엘을 내려다보며 공격을 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유일한 수자원인 갈릴리 호수로부터의 상수도 공급을 불안정하게 할 수 있었으나 전쟁의 참패를 통해 전략적 거점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균형의 추가 완전히 이스라엘에게 기울어지는 수모를 당했습닏.

그리고 50년 만에 기밀문서를 공개하면서 이스라엘이 이집트 니나 이반도에서 핵폭탄 투하 계획을 가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쟁 이후인 1967년 11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는 이스라엘이 이 전쟁으로 인한 점령지에서 즉각 철수할 것을 주장하는 결의안(242호)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결의안을 무시하였고, 현실적인 통치의 어려움이 생긴 시이 이반도를 1981년 이집트 측에 반환한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점령지들(골란고원,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지구 등)을 자국의 영토로 삼고 있습니다.

6일 전쟁 당시 텔아비브는 이스라엘의 임시수도, (1948년~1977년)였다. 국운을 걸고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도시계획을 수립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국회의사당과 중앙정부청사와 대법원 및 복지부처와 공안기관(공안부+경찰청+소방청+교 도청)과 이스라엘 은행을 차례로 이전했습니다.

 

그래서 1977년에 이르면 예루살렘이 명실상부한 행정수도로 탈바꿈했지만, 국내외의 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여 경제부처와 방위기관(국방부+육군청+해군청+공군청)과 국유기업 및 대사 관관 공사관과 영사관은 텔 아비브 시내에 있는데, 최근에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앞장서서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했으며, 과테말라, 루마니아 등 몇몇 나라들이 상당수 국가가 대사관을 인전 하거나 고려하는 중입니다.

전쟁 도중인 6월 8일에 이스라엘군의 전투기와 어뢰정이 미군 정보 수집함 USS 리버티를 공격하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리버티 사건. 이 공격으로 34명이 사망하고 17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함선 자체도 크게 파손당했습니다.

 

당시 함장인 윌리엄 로렌 맥고나글(William L. McGonagle)은 본인도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사태를 수습하고 함선을 살렸습니다. 이 공으로 맥고나글 함장은 명예 훈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임무 자체가 기밀인 데다, 미국은 이스라엘과의 외교 문제 때문에 이 사건을 은폐해야 했습니다. 결국 사건은 한참 뒤에야 알려졌으며 일부 자세한 사안은 아직도 비밀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맥고나걸의 명예훈장 수여식조차 비밀리에 매우 조촐하게 치러야 했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얼마나 이집트군이 속절없이 털렸는지 수백 대의 이지브군 전차들이 상태가 온전한 채로 이스라엘군에 노획될 지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 T-55  전차들을 티란으로 개조해 쏠쏠하게 써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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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중동전쟁 이스라엘건국 썸네일


목차

  1. 개요
  2. 상세정보
  3. 전력상황 1) 이스라엘 전력상황 2) 아랍국가 전력상황
  4. 전황
  5. 여담

 

1. 개요 1차 중동전쟁 - 이스라엘 건국

아랍권에서는 1948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여 1948 전쟁(1948حرب)이라고 부른다.

 


2.상세정보

2차 세계대전 종결 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무주공산이 된 팔레스타인 지역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를 둘러싸고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충돌이 지속되었으며, UN의 영국령 팔레스타인 영국령 팔레스타인 분할안도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지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지도


3. 전력상황

1) 이스라엘 전력상황

1947년 11월 하가 나는 1929년 폭동 이후로 잘 조직된 유대인 민방위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1936년~1938년 의 폭동 이후로, 2,000여 명의 직업군인과 한 달에 3~4일 정도 군사 훈련을 받는 만여 명의 지원자들이 이 정예부대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이 기동부대는 25살 이상의 지역단위 민방위군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35,000명 정도가 하가 나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이들은 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정규적인 군사집단이 아닌 지하조직 형태였기 때문에 화기 입수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1946년 다비드 벤구리온은 유대인 공동체가 비유대인들의 습격에 대항하여 스스로 방어할 수가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동구권 진영의 무기들로 무장하기 시작합니다. 1947년 9월, 하가 나는 1만 정의 소총과 702 정의 경기관총, 2,666 정의 기관단총, 186 정의 중기관총, 2인치 박격포 672문과 3인치 박격포 92문을 보유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47년 10월에서 48년 7월 사이, 무기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들은 3백만 발의 9mm 권총탄과 수류탄 15만 개, 기관단총 1만 6천 정, 3인치 박격포 210개를 생산하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수입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기는 부족하였고 평균적으로 하가 나의 대원 3명당 1개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정예부대도 3명당 무기 2자루 정도를 보유하는 것에 그쳤으며 그나마 M4 셔먼 30대로 쥐꼬리만큼의 기갑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전쟁 초기에 충분한 수량의 중기관총과 대포, 장갑차량이나 대전차, 대공 무기를 보유할 수 없었습니다.

2) 아랍연맹 전력 상황

팔레스타인은 국가적 무장단체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청년 측의 무장 조직이 있었다. 약 11,000~12,000명 정도가 존재했으며 크게 후 샤니 후타와 후샤니 나즈다 두 파벌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발발 이후에 팔레스타인 국가 방위군이 새로 조직되었으며 12월 아브 알 퀘디르 후세이니는 시리아에서 훈련된 100여 명의 아랍 성전 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몇몇 지원자들과 영국군 출신의 베테랑들과 합류합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군의 무장은 매우 안 습했는데, 1942년 이스라엘의 첩보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는 약 5만여 정의 화기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지만 굉장히 낡고 신뢰도가 낮았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경단 조직들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도 영국 식민 당국에게 총기를 요청하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총을 사서 조달하기도 했습니다.

아랍연합은 다양한 아랍국가에서 지원한 6천여 명의 자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아랍 해방군을 조직했고 파워 알 콰오지의 지휘 하에 사마리아와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에 파견했습니다.

요르단은 위에서 서술했듯이 영국군의 훈련 하에 정예부대를 보유했으며 8천 명에서 만 2천 명의 부대가 4개의 보병 및 기계화연대로 조직되어있었으며 40문의 야포와 75대의 장갑차를 보유했었습니다.

이라크 왕국은 12개 여단 21,000명의 군대를 보유했으며 영국제 전투기 100여대로 이루어진 공군까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 4개 보병여단을 파견했으나 최종적으로 만 5천 명에서 만 8천 명까지 증파했습니다. 5월 15일에는 이라크 공병대가 요르단 강에 가교를 건설하여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 아주 조금의 성과를 거둔 바는 있습니다. 이후, 나 블루스 예닌 툴 칼람 삼각지대 내에서 이스라엘군의 발악으로 격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위치를 고수한 바 있으며 이라크군은 예닌 지역을 사수하던 중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그나마 좀 나은 케이스이며

이집트 왕국은 약 4만여 명의 병력을 전개할 수 있었는데 군사적으로 적정 연령에 있는 인구 중 80%가 병역을 거부(…)했고 보급체계가 눈물겨워 국가 경계선 지역에만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초기에 병력만 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으며 영국제 25파운드 포 6문과 6파운드 대전차포 8문, 1 정의 중기관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집트 공군은 30기의 스핏파이어와 4기의 허리케인, C47 20기 등으로 폭격을 수행했습니다.

시리아는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만 2천여 명의 병력과 전차대대를 파견하였습니다. 5월 15일부터 16일에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마크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한 바 있으나 며칠 뒤에 다가니아에서 패주 합니다. 전반적으로 시리아군은 방어로 돌아선 6월 10일 이후 소규모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스라엘의 정착민 촌락에 소규모의 공격을 가했습니다.

레바논은 규모가 작은 3천5백 명의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천여 명의 침공군은 북부 갈릴리를 지나 이스라엘군과 교전하였으며 결국 1949년 3월 23일 휴전협정에 사인해 버렸습니다.

 


4. 전황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총리 디비드 벤구리온이 텔아비브 미술관의 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함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왕국, 이집트 왕국, 요르단은 아랍 연합군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여기에 사우디 아라비아, 예멘은 자금과 자원병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아랍 각지에서 지원자들로 구성된 아랍 해방군이 결성되어 파견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무력충돌 기간 동안 결성된 성전 군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스라엘군의 전력은 그야말로 보잘것없어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잡다한 무기들을 되는 대로 지급해서 총기를 든 병사 10명이 있으면 그중 7~8명은 각자 다른 탄을 사용하는 총기여서 탄약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부대에서는 소유한 총기에 넉넉한 탄약을 가진 병사가 주로 교전을 하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그 병사가 쉴 동안 그 총을 돌려쓰고 기지 방어만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에 반해 영국의 지도를 받은 정예군을 보유했던 요르단, 강력한 공군력을 가진 이집트, 이라크, 프랑스제 기갑장비로 무장한 시리아의 전력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방어에 주력하며 전선을 유지했습니다.

여기서 영국식 교육을 받았던 아랍 5개국 정규군에 맞서 싸운 이스라엘군의 전설이 시작됩니다.

지원도 보급도 모자란 판에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사용 가능한 모든 전략을 펼치며 총 20여 일간의 치역 한 공방전 속에서 이스라엘 군은 끝내 두 도시를 지켜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때 골다 메이어 총리의 명언도 나왔는데 :우리는 아랍을 상대로 한 최종병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면 끝장이라는 절박감이다. "

가장 격렬한 전투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테이비브 가도를 둘러싼 전선에서 벌어졌습니다. 5월 말부터 개시된 이스라엘의 공세로 인해 요르단 군은 패주 했고, 반격에 나섰던 이라크, 요르단 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북부와 남부 전선 역시 키부츠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대포까지 끌고 와 저항하는 이스라엘군에 막혀 진척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6월 11일 UN의 중재로 30일 동안 휴전이 선언되면서 양쪽 모두 숨 고르기를 할 시간을 벌었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미국 등 서방에서 무기를 대거 들여와 전력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7월 8일 이집트군의 기습으로 전쟁이 재개되자 이스라엘군은 방어에서 아랍 연합군에 대한 전면 공세로 전환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주변 거점을 점령하며 가나안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였습니다.

 

결국 10일 후인 7월 18일 UN의 중재 아래 2차 휴전이 선언되었습니다.

 

UN은 전쟁을 끝낼 중재안으로 또 다른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내놓았지만, 양쪽 모두 이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측은 도리어 분할안을 제안한 스웨덴 대표 폴케 베르나도테를 암살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평화협상은 실마리를 얻지 못한 채 10월 15일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습니다.

전쟁이 재개되자 이스라엘은 북쪽 갈릴리 호 일대를 노린 공세를 펼쳤고 단 10여 일 만에 아랍 연합군을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몰아내고 갈릴리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다음 목표로는 아랍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차지하기에는 아직 애로사항이 있는 가자지구와 요를 단강 서아지고 대신 무수지나 다름없던 남쪽 네게브 사막을 향한 파상공세를 펼쳤습니다.

 

허를 찔린 아랍 연합군은 네게브 사막 전체를 이스라엘에게 내어주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까지 진격했습니다.

 

결국 반격 능력을 상실한 아랍 국가들은 각자 차례대로 이스라엘과 휴전을 체결하였고 1949년 3월 10일 홍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에일라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78%를 장악했고, 나머지 지역 중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장악한 지역에 살고 있던 7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을 떠나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랍 연합군은 압도적인 전력이었지만 실상은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서로 간의 불신으로 인해 단합이 전혀 되지 않아 전쟁을 효율적으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얼마 전까지 영국 및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나아가 당시에는 왕가와 반 왕파들의 갈등과 내전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보입니다. 보통 아랍 연합 군위 수적, 학격면에서 오세 했던 거에만 집중하지만 사실 이들은 장비는 우살지 몰라도 내부적을 심각하게 분열되어 문 게가 이스라엘보다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집트만 해도 파루크 왕가에 불만이 큰 장교들은 일부 작전을 무시했으며 다 이겨 놓고도 일부러 후퇴하여 패배를 자초했습니다. 이는 만일 이집트군이 승리하면 왕가에 대한 지지가 커질 테고, 그러면 왕가를 뒤엎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전쟁에 패배하면서 쿠데타의 명분을 얻은 군부는 3년 만에 파루크 국왕의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기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쿠데타로 뒤집어엎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귀족 출신으로 우쭐거리는 장교와 강제 징집된 사병들의 갈등도 커서 되려 유럽인 교관들이 "장비만 좋지, 이건 허수아비 군대다."라고 비웃으며 회고할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베두인족으로 구성된 정예군을 가진 요르단 군의 경우 지금까지도 미국이나 영국 군사기관들과 교류하는 아랍권의 최정예 군대로 통합니다. 다만 요르단은 근본적으로 소국인 데다 가난하고 석유가 없어서 이 훌륭한 군인들에게 사우디나 쿠웨이트  같은 장비 빨을 세워줄 수는 없다는 점이 있어서 대세에 영향을 주기 힘들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결사적인 저항은 표면적인 전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구시가를 포함한 중요 지역을 탈환하거나 추가로 점령하기 위해서, 아랍연맹 측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제2차 중동전쟁으로 비화됩니다.

 

 


5. 여담

이스라엘 독립전쟁 기간 동안 이스라엘군은 소련의 허가하에 체코 슬로바키아에서 받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싸웠고, 아랍 연합군은 영국군이 남기고 간 대량의 영국제 무기로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쓴 독일제 무기는 상당 부분이 체코슬로 바키아에서 생산한 물량이었고, 독립 초기 이스라엘을 중동의 반서방 거점(다른 중동국가가 다 친영미 계열이던 시절이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소련이 체코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지시했기 때문에 프라하 공항에서 한동안 이스라엘행 무기 수송기만 이륙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이 보유했던 메서슈미트도 실은 독일제 오리지널이 아니라 체코 제인 아비아 S199였고,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우지 기관단총도 그 원형은 체코제의 Vz25 기관단총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체코가 보유하고 있던 카구팔(kar98) 소총 생산시설을 통째로 구입해서 Kar-98K를 생산, 한동안 제식 소총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전후 이스라엘은 빠르게 친미 노선으로 갈아탔기 때문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격노하여 책임자들을 숙청했으며 소련 내부의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반파시즘유대인위원회 위원장 솔로몬 미호옐스가 암살되었으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부인인 폴리나 젬추 지나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몰로토프에게 이혼당하고 체포당했습니다. 소련의 유대인 탄압은 크렘린 의사 음모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으나 1953년 스탈린이 급사하면서 흐지부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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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 썸네일

중동전쟁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중동전쟁은 1차부터 4차까지 전쟁을 치른 세계대전 이후 최대 전쟁입니다. 

1차부터 4차 전쟁까지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1. 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전쟁또는 독립전쟁) - 1948년 발발
  2. 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또는 시나이 전쟁) - 1956년 발발
  3.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  1967년
  4. 4차 중동전쟁-(라마단 전쟁, 욤 키푸르 전쟁) - 1973년 발발

1948년 이스라엘 성립 이후, 1948년~1973년까지 4차례에 걸쳐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에 벌어진 전쟁을 말합니다.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은 모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쟁 전보다 확장되었습니다.

 

 

1. 제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 전쟁 또는 독립전쟁) - 1948년 발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대립 분쟁을 조율할 수 없게 된 영국은 문제 해결을 국제연합(UN)에 위임하였습니다. 이에 UN은 1947년,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인의 2개 국가로 독립시키는 결의를 채택하게 됩니다.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는 아랍 국가들의 즉각적인 반발로 이어졌으며, 아랍 국가들의 대 이스라엘 선전포고가 일어나게 됩니다.  제1차 중동전쟁은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등에서 참전하며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제국의 협공이었기에, 전세가 아랍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아랍 진영 내에 불화가 일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시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하면서 점차 이스라엘에 유리한 전세가 조성되었습니다.  

1차 중동전쟁은 1948년 11월 6일, UN 안전보장 이사회의 휴전 결의 채택으로 일시 중지되고 1949년 1월 이스라엘 대표와 이집트 대표의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휴전협정으로 1차 중동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그런데 1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쟁 전보다 더 확장되었습니다.

 

과거 UN 분할 안에 의한 이스라엘의 영토 면적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56%이었으나, 휴전 후 이스라엘-아랍 간 국경 재조정은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적용되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의 80%를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1차 중동전쟁 이후 약 80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대이동이 불가피해졌고, 이들은 인접 아랍 국가들로 피난하였습니다. 

https://rokmc76.tistory.com/46

 

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건국

목차 개요 상세정보 전력상황 1) 이스라엘 전력상황 2) 아랍국가 전력상황 전황 여담 1. 개요 1차 중동전쟁 - 이스라엘 건국 아랍권에서는 1948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여 1948 전쟁(1948حر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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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또는 시나이 전쟁) - 1956년 발발

 

이집트의 나세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경영권을 소유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은 1956년 10월 29일 시나이 반도의 요충지를 점령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하여 이집트 공군을 거의 전멸시킨 것은 물론 수에즈 운하까지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에서의 세력 신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프의 군사행동을 비난하며 엄정중립을 선언하였습니다. 또 소련도 영-프 양국의 군사 개입에 강력한 비난 성명을 냄과 동시에 이들에 대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공격 등을 시사했습니다.

 

결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는 하였지만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1956년 11월 전쟁을 중지했으며, 이후 UN총회에서 영-프-이스라엘 3개 점령군의 즉각 철수가 결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가 인정되었습니다.

https://rokmc76.tistory.com/47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또는 시나이 전쟁) -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또는 시나이 전쟁) - 1956년 발발 이번에는 2차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개요 전쟁배경배경 전쟁 전황 전쟁 영향 학살 여담 1. 개요 제2차 중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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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  1967년 발발

 

제3차 중동전쟁은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의 빈번한 충돌이 계기가 되어 발발하였습니다. 당시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1967년 4월 제1차 중동전쟁의 정전협정에서 비무장지대로 설정된 골란고원 일대에 이스라엘이 농작물을 경작한다는 일방적인 조치를 발표하면서 시리아의 분노를 촉발시켰습니다.

이집트가 아카바만의 입구인 티란 해협을 봉쇄한 것을 계기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원조를 받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가자 지역, 구예루살렘 지역, 요르단강 서안 지역, 골란고원, 시나이반도의 8,600km 2를 새로 점령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지배에 들어간 영토 면적은 이스라엘 독립 초기의 8배가 넘는 102,400km 2로

 

https://rokmc76.tistory.com/48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이번에는 중동전쟁에 3번째 이야기 3차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차 중동전쟁은 6일전쟁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개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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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중동전쟁(라마단 전쟁 또는 욤 키푸르 전쟁) - 1973년 발발

제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과거 3차례 중동전쟁에서 잃었던 영토 회복을 위해 1973년 10월 6일 수에즈 전선과 골란고원의 양 전선에서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의 피해는 막심했으나, 이스라엘은 개전 6일 만에 반격을 시작하면서 초기 열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용의주도한 작전에 따라 시나이반도의 이집트 주력부대가 포위됐고, 이후 UN에서의 미-소 결의로 휴전이 성립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점령한 골란고원을 1981년 합병했으며 이 문제로 2000년 시리아와의 평화협상이 중단됐습니다.

 

위 내용과 같이 간단하게 중동전쟁에 대해 설명하였는데요. 각 전쟁에 대해 다음 글에 세 시리즈로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https://rokmc76.tistory.com/49

 

4차중동전쟁-라마단 전쟁 또는 욤 키푸르 전쟁

오늘은 중동 전쟁사 마지막 4차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라마단 전쟁또는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전쟁... 이제 시작합니다. 목차 개요 전간기-소모전 대 복수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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