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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저번 시간에 이어 외인 부재 2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프랑스 외인부대 두번째이야기 썸네일 

1. 현대 외인부대 모습

1960년대 콩고 내전에 참가해서 활약을 많이 했습니다. 외인부대 출신 용병단이 카탕가 반군에 협조해서 아일랜드 유엔 평화유지군과 싸운 자도빌 전투도 있습니다. 70년대에도 자이르 분란과 내전에 참가를 했고 90년대 재발한 2차 콩고 전쟁에도 외인부대 병사들이 많이 참가했습니다. 

외인부대 총기 점검중 이미지 출처 : 외인부대

걸프전, 말리 내전과 미구국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에 투입되었습니다. 

해외 파병 병력이 필요할 경우 차출 1 순 의인 신속전 개군에는 프랑스 육군 제6경 기갑여단과 제9경기갑 해양 여단 , 제11 공수여단, 제27산악 보병여단 등이 있는데, 외인부대 병력도 이들 부대에 소개 있기 때문에 파병을 자주 가는 편입니다. 

 

파병을 나가변 가보급의 3배에 달하는 수당이 나오고, 진급 점수도 팍팍 쌓이기 때문에 , 파병에 대한 선호도는 높다고 합니다. 현제도 북아프리카와 아프가니스탄 등에 여러 분쟁지역에서 활동 중입니다. 

 

2. 외인부대의 생활상 

병력 수급 방식이 모변제이고 수익이 짭짤하고 군장비가 좋다는 점, 훈련의 질이 보장되고 파병을 가서 실전 거인 분위기가 조성되며 짬밥이 아닌 경력을 따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대한 민국 국군과 판박이입니다. 

어느 나라 군대나 그렇겠지만, 한국군과 판박이라는 것은 체벌과 군기 부분에서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훈련소에서나 훈련 상황에서의 애기로 평소의 분위기와 군기는 비교도 안되게 프리 합니다. 

사격제를 취하고 서서쏴자세를 하고 있는 외인부대원 이미지 출처: 외인부대

또한 부대에 따라 다른데, 보통 그러한 불필요한 군기를 잡지 않거나 가혹행위가 덜한 부대가 장비와 훈련의 질 또한 좋은 곳입니다. 그라 해당 장병이 적절한 신체능력과 언어능력을 지녀야 그러한 것이 보장되는 부대로 보내주기 때문입니다. 

나약한 신체+ 불어구사율0%라면 낙후된 부대에 배치되어 어마어마한 부조를 겪으며 로망과는 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외인부대 부대는 훈련의 강도부터가 한국에서 흔히 메이커 부대로 불리는 여러 전방부대와 비견될 정도로 살벌해서 신체가 약하다면 입대 훈련을 중도 포기하고 나갈 확률이 높습니다. 

 

외인부대는 아무래도 프랑스인들을 대신해 전쟁에 나가는 외국인 용병부대이기 때문에 그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 당연 왠만한 한국의 정예 부대급으로 훈련이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하의 특수부대인 코만도를 가려면 아무레도 현역들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불어 실력이 종아야 하고 특전사나 UDT/SEAL과 같은 한국 눈 특수부대에 입대하여 수료 OR 자대 배치 후 거기서도 평타를 칠 정도의 체력은 되어야 합니다. 

 

외인부대 지원자의 8할은 군 경험이 없는 일반이 출신이며, 4개월간의 훈련중 본 대대에서 훈련 소대만 따로 나오서 첫 1달간 훈련을 받는데 농장, 소위 팜(FARM)이라고 부리는 프랑스 외곽에 위치한 훈련소에서의 숙식 훈련을 받는 동안은 상당히 고대 게 훈련하고 정신, 육체적으로 고생시킵니다. 

 

이때 도망가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더러있다고 하고 훈련 중의 중도 포기는 개인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이걸 통화한 사람은 나머지 3달간 특별한 문제가 있거나 정말 마음이 맞지 않아 그만 두 눈 경우를 제외하면 쭉 자재까지 가게 된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자대까지 가는 사람은 지원자의 10% 정도라고 합니다. 

 

의무 복무기간은 5년이며 6개월 단위로 연장을 신청할수 있습니다. 이는 5년은 그 어떠한 사유로도 복무해야만 합니다. 

정식으로 군번을 부여받고 의복무기간이 주어진 군인이 탈영했다가 다시 프랑스에 입국해서 체포될 경우 곧바로 군 교도소행이며 만기 출소 후에도 잔여 복무기간을 다 채워야 합니다. 

이러 경우 당연하지나 탈영한 그 계급에서 지급이 막히며 장기 복무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기본 복무 기간 기준으로 간부가 되려면 죽다 살아날 만큼 치열한 전투를 겪거나 웬만큼 큰 공훈을 세워야 합니다. 

군공이 없을 경우 간부가 되려면 10년 넘게 걸립니다. 

 

2차 대전 직후에는 갈 속이 없진 SS나 독일 국방군 출신 경미한 전범 등 독일인들이 과거를 묻지 않았던 외인부대에 입대했습니다. 

그 외에도 외국인의 신원릉 추적할 방법이 없으니 범죄자 등이 입찰 개 연서가 당시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이사이 과거에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출생지등을 철저히 따져본 다음에 훈련소 입대를 허용합니다. 

범죄자 등은 인터폴 까지 연계한 철저한 신원 조사를 거쳐 가려내고 이렇게 신원 조사를 하는 진짜 이유는 국제 수배범이 이수배를 피해 도피 입대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인데 신원조사에서 수배범이 밝혀지면 바로 인터폴에 넘깁니다. 

3. 외인부대 입대조건

 

외인부대 입대 조건은 

나이는 생일까지 꼼꼼히 따져서 17살 6개월 ~39살 6개월까지만 지원 자격이 있습니다. 39살 7개월부터는 얄짤없이 불합격이며 17살 5개월 이하의 연력은 부모 또는 후견인 동의서가 있어야 하며 외교 마찰이 생겨서는 안 되기 때문에 대사관 공증까지 받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도 14살 0개월 이하일 경우 제한됩니다. 

 

서류는 자신에게 해당되는 모든 서류를 제출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예를 들면 출신 대학교, 예비역의 경우 복무기로, 회사에 다니적이 있으면 재직 증명서 등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모국어는 할줄 알아야 하며 문맹 역시 결격사유입니다. 입대하면 프랑스어를 새로 배워야 하는데, 문맹이라 함은 언어구사능력이 전무하기 때문에 여기서 결격사유가 됩니다. 

 

지병 검사가 엄청나게 까다로운 데 충치도 결격사유입니다. 결핵을 앓은 적이 있어도 결격사유이며 단, 안경 착용자는 안 결을 지참하면 됩니다. 

모든 종류의 후유증이 존재한 지병은 결격사유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서든 복무가 가능한 병력을 충원하는 게 이들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남극, 북극부터 아프리카들의 잔혹하기 짝이없는 적도 부근의 환경, 사막, 섬 같은 환경들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후유증은 업야 하고 더디 서든 부적격해서는 안됩니다. 

 

입대 시엏은 체력 측정과 정신 검사가 있는데 엄정히 선발해서 뽑는 것이니 만큼 체력 측정 기준이 그래도 있는 편입니다. 

생각보다는 빡빡하지는 않은데 이는 '훈련소에서 만들어 준다.'라는 개념이 크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훈련소의 훈련강도는 아무래도 프랑스 정규군의 프랑스인을 대신해 파병을 갈 외국인 용병들을 단기 집중 양성할 목정이라 전체적으로 강하고 실전적인 훈련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4. 외인부대는 다 특수부대?

훈련중인 제2외인공수연대 공수특공대 요원 출처: 외인부대 

외인부대는 정규전을 수행하는 프랑스 육군 전투여단에 배속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정규 부대입니다. 

이중 해외에 가장 많이 파견되었던 부대가 공수연대였고, 또 활약도 인상 깊었기 때문에 외인 부대 특수부대라는 인식이 생겼으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공구 연대 자체는 특수부대가 아닌 공수 알 보병이며, 외인부대 내에서 특수부대는 각 연대마다 있는 코만도 팀입니다. 

 

외인부대는 5개 보병연대, 1개의 기병(기갑)연대와 2개의 공 벼 연대, 그리고 1개의 공수연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다른 2개의 연대가더 있지만 이들은 사령부와 신병훈련소를 책 입지고 있으므로 엄밀히 말해 전투부대의 성격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위이 부대중에서 각 부대 예하의 코만도 공식적으로 특수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인 것입니다. 

즉 외인부대 자체는 특수부대가 아니며 외인부대는 한의 병과로 인식이 될만크 부대 내의 담당 임무가 매우 많습니다. 

 

많은 밀덕들이 또는 특수부대 에 강한 인상을 가진 사람들이 코마도를 들어가려고 하지만 이 코마도는 일반 연대에서 우선적으로 수년 군생활을 해야 합니다. 

체력적으로도 한국의 특수 부대수준을 갖추어야만 하고 거기다 유창한 불어가 가능해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혹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일반 연대들이 다 약하다는 것은 아니며, 모병제인 프랑스군 내에도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온갖 위험한곳에투입시키는 신속전개 충격 군 용병부대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징병제 한국군 보병부대의 병사들에게 실시하는 체력 훈련보다 훨씬 강도가 세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한국에서 특수부대 필이 꼿혀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체력적인 문제 +언어장벽으로 인해 자진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애초에 외인부대 자체는 특수배도 아닐뿐더러 체력이나 언어가 안되면 자연 스래ㅐ 주변에서 갈굼을 당하게 되고 , 그러다 보면 결국 인종차별까지 당하게 되는 등 온갖 수난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강하면 혹은 강해보이면 특수부로 생각하고 보는 민간인들의 대표적인 착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부대의 성격을 굳이 따지자면 (산하에 기병(기갑) 편제가 있기는 하지만 제한적인 특수임무가 가능한 정규 경보병 부대 정도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미국에 레인저내지 한국에 수색대대나 특공대와 비슷한 성격, 물론 이들과도 다른 면모도 많이 보이긴 합니다. 

 



2021.09.26 - [특수부대] -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국민이 아닌 외국 인르로 만 구성돼 부대 외인부대 하면 생각나는 프랑스 외인부대 1. 부대 개요 레지오 에트랑제 (Légion étrangère) 프랑스 육군 소속의 인이 부대, 프랑스군 내의 엘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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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민이 아닌 외국 인르로 만 구성돼 부대 

외인부대 하면 생각나는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외인부대 이미지 

1. 부대 개요

레지오 에트랑제 (Légion étrangère) 프랑스 육군 소속의 인이 부대, 프랑스군 내의 엘리트 부대이자ㅏ 1 순의 해외파병군 중 하나입니다. 외인부대 내에선 기계화 보병, 공수 보병, 경보병, 코만도, 전투공병 등 수많은 성격의 부대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속 전개군 및 충격 군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하에 프랑스 특수전 사령부 소속으로 특공, 정찰, 흑색 작전 등의 특수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인 코마 도도 존재합니다. 

 

프랑스 인이 아닌 타국인 중 18세~40세의 신체 건강한 남성을 모집 대상으로 합니다. 

여군은 뽑지 않습니다. 

 

1831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와 전쟁으로 혼란한 상태였으며 유럽 각구에서 몰려온 부랑자, 망명자 등의 유입은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두 문제를 도시에 해결하고자 루이필리프 1세는 외국인 부랑자, 망명자 등을 용병으로 모집하여 전쟁터로 치워버리다는 방안을 고안해 냈습니다. 거기다 프랑스인들 중 장 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범죄자, 실업자 등도

외인부대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창설된 이후 전제 게의 각종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최근까지 약 3만 5천여 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외인부대는 우리 고향(Legio Patria Nostra) 명예와 충성(Honneur et Fidélité)이라는 부대 정신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또한 프랑스 엘리트 부대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현제도 프랑스 정부의 명령에 따라 북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의 여러 분쟁지역에서 활약 중입니다. 

2012년 기준으로 외인부대의 총 행정 지휘관은 육군 소장이고, 부대의 총규모는 8천여 명의 수준입니다. 

 

공식 행진곡으로는 le Boudin 이 있습니다. 

 

2. 부대 구성

부대구성 마크 

 

부대 전체의 규모는 사단 병역의 규모이지만 외인부대는 지휘계통이 잇는 부대가 이니라 하나의 병과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인부대 사령관은 군령권이 있는 사단장이라기보다는 공병 감인 준종감처럼 병과감에 가깝습니다. 외인부대 사령관은 외인부대에 대한 작전 지휘 권이 없고 인사, 행정 등 군 정권만 행사합니다. 미 해병대 사령관이 미 해병대의 대해 군정권만 행사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3. 프랑스 외인부대 역사

프랑스 외인부대는 1831년 루이 피 리프가 식민지인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용병 5개 대대가 그 시조이며 이후 루리 필 리크가 식민지인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용병 5개 대대가 그 시조이며, 이후 루리 피 리프 시절에 정규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를 통제하는 역활을 부여받았고, 알제리에 기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외에도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카메론 전투에서는 65명의 외인부대가 2천 명의 멕시코 육군과 싸워 5명만 사 아남 았습니다. 전가기에는 모로코에서 리프 전쟁에 참 가히 기도 했습니다. 

 

3-1.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외인부대는 대부분 해외 식민지에 주준하였고, 제13 외인 반여단만 유럽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3 외인 바 여단은 프랑스 항복 이후 역고으로 건너가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고 식민지에 주둔하던 외인부대는 자유 프랑스군과 비사 프랑스 괴뢰군으로 양분되어 1941년 6월 시리아 레바논 전역에서는 자유 프랑스 13 외인 반 여단과 비사 프랑스 6인 외 인보 병연 대가 다마스쿠스에서 서로 교전하기도 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해외로 빠져나간 이념이 다른 독일인들의 사례도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자유 프랑스 소속으로 영국군과 함께 싸운 외인 부대원 준 독일계의 비율이 매우 높았습니다. 

 

비르 하킴 전투 당시 프랑스 외인부대 출처 외인부대 홈페이지

3-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는 베트민 측이 대포와 대공포를 분해해서 산 정상까지 끌고 온 뒤 조립해 포격하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웠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엄청난 희생 끝에 결국 항복하였습니다.

 

외인부대 역사상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전쟁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모두 10,483명이 전사했는데 외인부대 역사상 1 만당 위를 넘기는 전사자는 오로지 베트남 전쟁뿐이었다고 합니다. 전사자 중 한국 출신이 3명 있다고 합니다.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에 대하여 베트민은 악랄한 대우를 했는데 꼴랑 미숫가루 한 줌만 주고 수백 km를 걸어 가게 했습니다. 

당연히 쓰러지는 사람은 개머리판으로 패줬으며 결국 다 죽어가는 사람은 사살했습니다. 

포로 학대라고 프랑스가 분개했으나 이 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저지른 학살과 포로 학대를 내세우는 베트민의 반론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전쟁의 직간접적 원인이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배 때문이란 걸 생각한다면.. 생포된 외인부대원 가운데, 베트남과 간은 공산국가 겸 우방 국이었던 동독 지역을 비롯한 당시 공산국가 지역들의 출신자에 한정하여 고향에 가는 걸 조건으로 우방국 예우 차원에서 조기 석방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독 출신 및 공산권 출신의 왼 인부 대원중 몇 명이 조기 석방되는 경우 있었습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프랑스 군 활주로까지 포위 더어 항공 탈출도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라나 패배가 뻔히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결사항전을 각오한 것을 보면 엄청난 구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3-3. 알제리 전쟁 

우방의 도움으로 2차 대전의 승전국에 오른 프랑스 제4 공화국은 시대가 바뀌어감에도 식민지에 대한 욕심을 포기 못한 채로 이도 차이나 전쟁의 패전과  더부어 알제리 전쟁의 늪에 빠져있었습니다. 

알제리 독립군과의 전쟁에서 자행된 각종 학살과 반 인륜적인 범죄는 특히 프랑스 공수부대와 외인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는데 국내의 반전 운동 돠 해외의 비난 여론으로 프랑스 정부는 코너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알제리는 프랑스 영토라는 우파의 압력과 여론도 거셌고 특히 보수적인 프랑스 군부는 알제리를 포기할 경우 공공연한 구사 쿠데타 협박까지 일삼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 4 공화국은 무 저지고 드골이 다시 정 치르 복귀하면서 5 공화국이 성립되었습니다. 

드골은 우파와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당연히 그들은 드고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알제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드골은 군부와 국우파의 뜻대로 알제리의 기약 없는 늪에 빠져 가망 없는 구사 작전을 감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알제리 전쟁으로 프랑스 경제는 피폐해진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알제리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 알제리를 둘러싸 우파와 좌파의 좌우대립은 국민을 분 열시 킬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군의 징집에 엄청난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고 알제리 내의 프랑스 군의 학살은 해외의 비낭 여론을 형설 하고 있었습니다. 

1961년 에 드골 정부는 알제리 국민의 투표를 통해 프라스의 일부로 남아서 똑같은 프랑스 국민으로 남던지 아니면 완전한 독림을 하던지 그 선택을 알제 링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부수적인 군부에서 엄청난 반발이 있었고 4명의 최고 위급 장군들은 드골을 제거할 구사 반란을 계획했습니다. 

 

프랑스 생 사르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최고위급 엘리트 강성파 장군들이 군사반란을 계획하는 도중 윗글 감지한 드골 정부에서 주요 전쟁 지휘 간들을 속속 해임하거나, 본국이나 유럽으로 발령을 내서 드골에 충성하는 장군들로 하나 둘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 결과 군사반란 당시에는 반란군 측은 퇴역장군이 되었거나 주요 작전 사령관이 아닌 상태였습니다. 다시 주알제리 프랑스군은 47.7만 명 규모였는데, 이중 최정예 엘리트 부대인 공수부대 3개 연대가 포섭이 되어서 (당시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은 2개 구수 사단 ㅈㅇ 제1 외인 공수연대와 14샤쇠르 공수연대, 18샤쇠르 공수연대 3개 연대만 포섭)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특성상 중화기가 없이 경무장을 한 이들 3개 연대의 전투력은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의 0.6%에 불과한 전력이라 결과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반란  개시 6일 만에 반란군은 스스로 항복을 하고 , 반란에 가담한 3개 공수연대 장교 114명을 포함한 220명의 장교가 파면되었고, 이후 반란군 색출 작업을 통해 전체 프랑스군 장교의 3%에 해당하는 1,000여 명이 장교가 주로 공수부대 장교들을 중심으로 파면되었습니다. 

 

이 반란사건의 결과 반란에 가담한 장교들이 이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은 주동자들은 구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 집해는 이뤄지지 않았고 대략 평균 징역 15년 정도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군사 반란 중 사망자는 발란 군 측 외인 공수 연대의 습격에서 무선 소신 소를 지키다 사망한 병사 한 명입니다. 

당시 반란에 가담한 프랑스 정규 육군 공수부대인 녹새 베레 제1 외인 공수연대와 붉은 베레로 유명한 르파로 이제 14, 18샤쇠르 공수연대는 반란사건 후 즉시 부대가 해체되었습니다. 

 

반란군 측에는 군내 사조직인 organization armee sedrete(OAS) 회원이 많았는데 OAS는 당시 극한으로 치닫던 알제리 전쟁에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군사작전에 환멸을 느낀 장군들이 알제리 독립군에 대한 달 법, 불법적 보복을 위해 결정한 초법적 암살 테러단체로 , 임간인에게 대한 무차별 테러나 독립운동가나 정치인에 대한 암살 테라, 불법 체포 및 구금, 고문 등을 이삼았는데 알제리 군사반란을 도도한 장군들이 OAS를 창단한 주도세력들이었습니다. 

 

OAS가담 장교들은 에리트 공수부대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발 나군이 전부 공수부대였고 반란이 실패한 후에는 일부가 탕 영하여 , 드골 대통령 암살 등을 시도하다가 구속되는 가 하면 알제리에서 테러를 이 삼다가 사형을 당하는 등 여파가 있었습니다. 

알제리 반란 사거로 외인부대나 공수부대와 같은 엘트 ㅈ원병 부대의 장교들보다는 징지병 부대 장교들의 충성심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되었습니다. 

 

 

2021.09.26 - [특수부대] - 프랑스 외인부대 2번째 이야기

 

프랑스 외인부대 2번째 이야기

이번에는 저번 시간에 이어 외인 부재 2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 현대 외인부대 모습 1960년대 콩고 내전에 참가해서 활약을 많이 했습니다. 외인부대 출신 용병단이 카탕가 반군에 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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