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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공수 작전

상륙작전의 최종 목표는 내륙으로 진공 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의 집중이 필요한 교두보의 확보입니다.

 

다음 단계는 내륙으로의 진격이고 이 과정에서 경계할 것은 교두보 확보를 거부하는 적의 반격이며 교두보 확보 단계에서는 이런 적의 반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적의 반격을 차단하기 위해서 중요 접근로와 교량 등을 선제공격을 해서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차

  1. 교두보 확보 단계에서 적의 반격 차단을 위해 공수작전을 실시 
  2. 미군의 공수 작전
  3. 미군,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급조 부대를 만들어 전투
  4. 영국·캐나다군의 공수 작전.
  5. 영국·캐나다군, 독일의 맹렬한 반격을 물리쳐

1.교두보 확보 단계에서 적의 반격 차단 위해 공수작전을 실시

노르망디에서는 특히 적이 측면 공격이 우려되는 교두보의 동쪽과 서쪽의 차단이 절실했습니다. 결과 노르망디 상륙 개시 전에 주요 거점을 사전에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공수 투하 작전이 실시됩니다.

 

공수 작전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자유 프랑스군등 4개국의 공수 부대들에 의해서 행하여졌습니다. 미군 82 공정 사단과 101 공정 사단은 유타 해안의 서쪽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 6 공정 사단은 유타 해변의 서쪽 사단의 목표가 주어졌다. 영국군에 배속된 530 자유 프랑스 낙하산 부대는 브리타니 지역의 목표가 할당되었습니다.

공수작전을 하기위한 병사들의 모습(출처: 미드 밴드오브 브라더스)

노르망디에서는 특히 적이 측면 공격이 우려되는 교두보의 동쪽과 서쪽의 차단이 절실했습니다. 결과 노르망디 상륙개시 전에 주요 거점을 사전에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공수 투하 작전이 실시됩니다. 공수 작전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자유 프랑스군 등 4개국의 공수 부대들에 의해서 행하여졌습니다. 미군 82 공정 사단과 101 공정 사단은 유타 해안의 서쪽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 6 공정 사단은 유타 해변의 서쪽 사단의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에 배속된 530 자유 프랑스 낙하산 부대는 브리타니 지역의 목표가 할당되었습니다.

 


2.미군의 공수 작전

미국의 82공수 사단과 101 공수 사단은 총 13, 000명이었습니니다. 이 병력은 야간에 투하되어 서쪽에서 노르망디로 접근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간 공수 작전이라는 생소한 전술은 숱한 문제점을 야기했으며 목표를 달성함에 미흡한 점이 많았었고 야간 공수 작전은 전쟁 중에는 다시는 시도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45%나 되는 병력이 목표 지점에 낙하하지 못하고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서 병력 집중이 불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이 병력의 분산 투하는 연이어 날아올 C-47 수송기의 야간 비행을 유도할 레베카/유레카 시스템이라는 전자 비콘 발신 장치가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에서 비롯된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C-47수송기 2차세계대전시 사용되던 수송기 이미지

노르망디 공수 작전의 첫 개시는 6월 6일이 시작되는 새벽 00:48에서 01:48 사이에 101 공수사단에 의해서 감행되었습니다. 이어서 01:51에서 02:42사이 82 공수 사단이 투하되었습니다. 두 사단의 공수 작전에 무려 400기의 C-47 수송기가 동원되었습니다. 간격을 두고 새벽 직전에 글라이더들이 대전차포와 양 사단의 추가 지원 병력들이 투하되었습니다. 공수 작전은 상륙 작전이 있던 6월6일 저녁 무렵에 82사단의 포 24문이 글라이더로 공수되었습니다,

그다음 날인 6월 7일에도 325 글라이더 보병 연대가 82 사단에 증파되었고 두 번의 낙하산에 의한 보급품 투하가 있었지만 이 날의 투하는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대규모 공수 작전의 효율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24시간이 지났지만 투하된 82 공수 사단 병력 중 2,000명과 101 공수 사단의 2,500명만이 지휘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광활한 지역에 되는대로 뿌려진 병력의 대다수는 아직도 부대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3. 미군,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급조 부대를 만들어 전투

 

그러나 공수 작전의 실패는 생각지도 않은 긍정적인 결과를 부수적으로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너무 넓은 지역에 뿌려진 병력은 독일군으로 하여금 병력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작은 부대로 흩어지는 결과를 낳아 상륙작전 부대가 집중 돌파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취약한 미군 상륙 부대의 남쪽 측면을 보호하게 하는 전과를 얻게 하였습니다.

분산 낙오 된 공수 부대원은 흩어질 대로 흩어져 헤매다가 다른 부대원을 만나면 서로 급조 전투 부대를 만들어 그중 최상 계급자인 부사관이나 초급 장교들이 지휘를 하며 주력 본대를 찾아 돌아왔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82 사단은 6일 새벽 프랑스의 작은 도시(Sainte-Mere-Eglise)를 점령하였습니다. 이 도시는 노르망디 작전에서 최초로 해방된 프랑스 도시였습니다.


4.영국·캐나다군의 공수 작전.

노르망디의 최초 공수 투하는 6일이 시작되는 자정이 막 지난 6일 00:16, 캉(Caen) 운하와 오른(Orne) 강에 걸린 다리를 점령을 목적으로 영국 6 공수 사단의 글라이더 수송 공수 부대가 착륙함으로써 개시되었습니다. 이 다리들은 상륙 해안에서 단지 7km 떨어진 곳에 전략적 위치에 위에 있었습니다. 독일군이 반격하기 위해서는 이 두 교량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동쪽으로 진격하는 연합군 입장에서도 반드시 건너야 하는 요충 지중의 요충지였습니다.

 

영국군 6 공수 사단의 목표는 세 개였습니다. 이 교량들을 점령하고 연합군 상륙부대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예상되는 독일 기갑부대 반격으로부터 확보하는 것이고 부차적으로 두 다리 근처에 있는 독일군의 메르빌(Merville) 포대를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포대는 영 캐나다 군이 상륙하는 소드 해안을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세번째 목표는 디브(Dives) 강 다리에 걸린 다리를 폭파하여서 독일군 우회 돌파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었습니다.


5.영국·캐나다군, 독일의 맹렬한 반격을 물리쳐

영국군 6 공수 사단소속의 3,5 공수 연대와 이에 배속된 1 캐나다 공수 대대는 글라이더로 강하 착륙하자마자 독일 716 보병사단의 예하 부대로부터 맹렬한 반격을 받았습니다.

 

교량 점령까지는 해냈지만 새벽 무렵에 이들은 오른 강의 남쪽에서부터 강 양쪽을 따라 반격해오는 폰 록크 대령 지휘하의 독일 21 전차 사단 전투단의 강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투는 치열하였고 양쪽 다 피해가 속출했고 그러나 영국 캐나다 공수부대는 이를 잘 버티어냈습니다. 정오경 영국 1 특수 임무 여단 코만도 부대의 증원을 받았습니다. D-Day 저녁 무렵까지 영국과 캐나다 공수 부대는 잘 고수해서 오른 강의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반격은 다음 날도 계속되었습니다. 6월 10일, 독일 346 보병 사단은 대공세를 취해서 동쪽 변두리의 한 구석에 침투했습니다. 그러나 12일 영국 공수 부대원들이 브레빌(Breville) 마을의 전투에서 참호를 파고 응전하는 독일군을 강습해서 이들을 모두 패주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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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해상 작전 이야기

노르망디 작전의 예비 단계는 해군의 역할이 중대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국 해군 사령관은 영국 해군의 버트람 램지 경(Sir Bertram H Ramsay)이 임명된 사실에서 알 수가 있듯이 작전에 동원된 함선들은 영국 측이 주동이 되어서 마련한 것들이었습니다.

사령관 램지 경은 전쟁 초기 독일군에게 패주한 영국군과 프랑스군들을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수송 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연합군의 북 아프리카 상륙 작전에서 해군 작전 기획 책임자로 일했었고 시실리 섬의 침공 때도 두 개 함대 중에 한 개 함대를 지휘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해군 상륙 작전 지휘의 최고 베테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목차

  1. 독일 해군의 방해를 원천봉쇄 하기.
  2. 함포 화력 지원.
  3. 연합군 해군이 피해.

1. 독일해군의 방해를 원천 봉쇄하기.

작전명 넵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중요한 해군 목표는 노르망디 침공의 해상 루트와 상륙 예정 해변을 독일 해군(Kriegsmarine)의 방어와 반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침공 해상 루트의 보호 임무는 영국 본토 해군 함대에게 부여되었습니다.

 

독일 해군이 바다에서 침공 함대에 가해올 위협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르웨이의 북방 해안과 발트해에 기지를 두고 있는 독일 함대의 주력 대형 함에 의한 해상(海上)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대형 전함들은 영국 해군과 공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었고 순양함들은 훈련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함대의 출동 연료도 부족했었고 출동한다 해도 영국 해군이 이들 수상 함대가 통과할 빌헬름 황제 운하(Kaiser-Wilhelm-Kanal, 발트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독일의 운하) 해역에 설치한 대량의 기뢰 지대에 걸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설사 이런 불리한 조건을 뚫고 상륙 해안에 출동한다 해도 영국 해군의 함대는 독일 함대가 제압하기에 너무 막강했습니다. 그러므로 독일의 수상 함대는 연합군에 대해서 별다른 위협이 될 수가 없어서 작전 수립 단계에서 독일 대형 함대에 대응하는 부분을 제외하였습니다.

 

U보트이미지 2차세계대전 악명이 높음

연합군 해군에게 예견 가능한 진짜 위협은 대서양에서 위협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일 해군의 U보트(잠수함) 부대였었습니다.

U 보트를 감시하기 위해서 미 해군의 호위 항공모함 세 척과 영국 공군 해안 감시대 소속 정찰기들이 영국 본토에서 먼바다까지 나아가서 정찰을 했지만 별다른 U 보트의 활동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합군 해군은 U 보트에 대한 경계 활동을 지속하면서 프랑스 브리타니와 비스케이 만으로부터 상륙지점에 접근할만한 길목에는 함대를 배치해서 봉쇄하였습니다.

프랑스 연안에는 기뢰 지대가 여러 곳 설치되어 독일 해군 함정이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엄호 거리 내에 항로로 통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독일 함선들이 할 수없이 연합함대의 구축함들이 출몰하는 먼바다로 나와 항해를 해야 했습니다. 연합군 해군은 만반의 대비를 하면서 독일 해군의 동정을 살폈지만 작전 개시 전까지 별다르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쯤에서 만족하지 못한 연합군 해군은 독일 해군에게 더욱 압박을 가했습니다. 도버 해협의 접근로는 모두 기뢰를 깔아 접근이 불가능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공중 초계와 레이다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독일 전투함이 출항할만한 항구들은 모두 폭격해서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훼방 놓을 수도 있는 독일 함대의 출현을 경계하는 연합군 해군이 침공 전까지 격침한 독일의 군함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 함대의 상륙작전 방해라는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리는 목표는 완수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상륙 작전 당일(D-day) 작전을 방해한 독일의 U 보트는 한 척도 없었습니다.

 


2. 함포 화력 지원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해군이 맡은 중요한 임무는 전함에서 순양함, 구축함, 그리고 상륙정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함정의 화력을 상륙 작전 지원에 최대로 동원하는 것이었스니다.

D-day에 지원된 해군 함정의 화력지원은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한 본보기를 든다면 주노 해안에서 캐나다 상륙부대에게 지원된 화력은 큰 실패로 끝났던 1942년의 디에프 기습 작전 때의 몇 배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구형 전함 HMS 라미리스와 아스파트와 포함 HMS 로버트는 오른(Orne) 동쪽의 해안 포대를, 순양함들은베르쉬르 메르(Ver-sur-Mer)와 물리노(Moulineax)의 해안 포대를, 11척의 구축함들은 각 상륙부대에 근접하여 전면 적 요새를 직접 사격으로 파괴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정통 군함 외에 수십 척의 상륙정들을 다양한 상륙 화력 지원함으로 개조하는 작업도 행해졌습니다. 8척의 상륙용 함정들에 각각 두 문의 4.7인치 포들을 장치했고 다른 8척은 기관포를, 또 다른 8척은 1,100발을 일시에 발사하는 로켓 발사기를, 8척의 상륙정은 24발의 폭뢰를 발사하는 무장을 해서 독일군이 해변에 설치한 기뢰들을 파괴하는 기능을 주었습니다. 24척의 탱크 운반 상륙정들은 상륙 해안으로 질주하는 시간에도 적 해안 목표를 향해 발사가 가능한 자주 곡사포를 장비했었습니다.

해군의 함정들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화력은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군사 목표를 타격할 뿐만 아니라 해안선 먼 후방까지도 타격하여 군 병력의 집결을 지장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독일군 룬트슈테트 원수는 이 점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적[연합군]은 매우 강한 해군력을 교두보 연안에 전개하여서 이 전력을 아주 빠르게 대응하는 기동 화력 기지로 활용하였다. 이 화력 지원은 항시 대기하고 있다가 육군이 요청하면 바로 실시되었습니다. 주간에 실시되는 해상 포격은 정찰기에 의해서 유도되었으며 육군 전방 화력 통제 장교들이 통제하였습니다. 신속하고 막강한 해군 화력은 그 유효 사거리 내에서 벌어지는 지상전투에서 연합군에게 전투의 결정적인 프리미엄을 제공하였습니다. 기갑 부대의 탱크조차도 주간에는 해군의 가공할 화력이 타격을 가하는 개활지에서는 기동 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3. 연합군 해군이 피해

큰 역할을 한 연합군 해군은 역시 독일 육상 화력에 피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상륙 지휘함의 한 척이었던 HMS 로포드는 상륙작전 3일째인 1944년 6월 8일 주노 해변에서 적의 공습을 받고 침몰하였습니다.

상륙 작전 중 유일한 수상 함끼리의 해전은 D 데이 당일 오후 소드 피시 해안 연안에서 동부 기동함대를 공격한 4척의 독일 어뢰정이 발사한 18발의 어뢰 중 한 발이 노르웨이 구축함 스베너 함에게 명중해서 이를 격침한 것입니다.

 

독일 어뢰정들이 겨눈 것은 구식 영국 전함들이었는데 빗나가서 노르웨이 구축함을 격침하게 되었다. 독일 구축함들은 어뢰를 발사한 뒤에 연막을 치고 도주해버렸습니다.

 

그 외에 독일이 해안에 설치한 기뢰에 의해서 미(美) 구축함 코리 함과 PC정, 그리고 여러 척의 상륙함이나 상륙정들이 격침되었습니다.

참고문헌: (전쟁사, 김창원,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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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양측 작전계획

노르망디 상륙작전 두번째 이야기

상륙작전은 대량의 인원과 물자를 영불해협을 횡단하는 항해를 통해 수송되어야 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지역은 그 폭이 무려 50 마일로서 이 넓은 해안은 5개의 작전 구역으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각 작전 구역에는 작전 명칭이 부여되었는데 유타(Utah), 오마하(Omaha), 골드(Gold), 주노(Juno), 그리고 소드(Sword)였습니다.


차례

  1. 연합군 상륙계획
  2. 독일군의 방어 계획
  3. 독일군의 병력 배치
  4. 히틀러의 실수

1. 연합군 상륙계획

미군과 영국군 캐나다 군이 각각 담당한 해안선의 침공 구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미군 1군은 73,000명의 병력으로 오마하와 유타, 두 개의 해안 목표를 공격했는데 이 병력 중 15,600명은 공수 병력이었습니다.

  • 오마하 해안 : 미군 5군단- 1사단과 29사단
  • 유타 해안 : 미군 7군단 -4 사단 90사단의 359 RCT. 101 공수사단과 82사단의 상륙 해안 후방 내륙 강하, 영국군 2군이 이 구간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6 공수 사단 7,900명이 침공 구역 좌측에 투하되었다
  • 소드 해안 : 영국군 코만도 부대의 2개 여단, 1군단의 3 사단과 27 기갑 여단
  • 주노 해안 : 캐나다 1군단- 캐나다 3사단, 캐나다 2 기갑여단, 영국군 제 4 코만도 부대
  • 골드 해안 : 영국군 30군단의 3 사단. 캐나다군 1개 기갑여단

노르망디상륙작전상황지도이미지 


2.독일군의 방어 계획

한편 연합군 침공에 대비해서 독일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원수를 대서양 해안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방어 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독일은 대서양 연안에 걸쳐 4년 동안 교통호와 화력 지원 요새와 벙커들로 바느질로 조밀하게 누빈듯한 방어선을 만들었습니다.

 

독일군의 최초 방어선은 영불 해협이었습니다. 영국이 영국 본토 공격을 노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나폴레옹의 해군을 분쇄한 천연의 장애물입니다. 이제는 그 반대로 독일군이 활용하게 된 것이죠.

 

두 번째의 방어선은 해안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총통 명령 51호로서 벨기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뻗쳐 있는 이 해안지대를 ‘대서양 방벽’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요새화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방어공사가 집중된 곳은 바로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가까운 도버해협의 해안 쪽이었습니다. 즉 앞에서 말한 기만 작전이 행해진 칼레 해안이었습니다.

 

롬멜은 상륙작전은 만조(滿)때 감행되리라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콘크리트 벙커와 포대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철조망을 밀집시켰으며 해변에는 상륙정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수천 개의 방어물과 수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습니다.

 

연합군은 방비가 엄중한 칼레를 공격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조금 더 떨어진 독일 7군과 15군의 전투 지경선이 있는 노르망디를 상륙 예정지로 선택했습니다.

침공이 발발하면 두 독일 군() 사이에 책임 전투 구역을 두고 큰 혼선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대서양 방벽’으로 마련한 방어시설 <출처 (cc) Bundesarchiv>

롬멜은 상륙작전은 만조(滿)때 감행되리라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콘크리트 벙커와 포대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철조망을 밀집시켰고 해변에는 상륙정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수천 개의 방어물과 수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습니다.

연합군은 방비가 엄중한 칼레를 공격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조금 더 떨어진 독일 7군과 15군의 전투 지경선이 있는 노르망디를 상륙 예정지로 선택했습니다. 침공이 발발하면 두 독일 군() 사이에 책임 전투 구역을 두고 큰 혼선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3.독일군의 병력 배치

롬멜사진 이미지

연합군이 상륙 작전을 감행한 노르망디 상륙지점은 4개의 독일군 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716 독일 보병사단은 상륙 해안의 최동단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상륙할 예정이었습니다. 716 보병사단은 신체적으로 약한 독일병사들과 다른 나라들에서

 

징병한 병사들, 그리고 소련군 포로들로 포함 잡다한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 전투력을 의심받고 있었습니다.

 

오마하 해안에는 독일 정예 35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단 병사들은 대소 전쟁의 동부전선에서 실전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정예 사단이 방어하던 오마하 해안을 공격했었던 미군 병사들의 피해율이 가장 높았었습니다.

해안으로 뻗어 나온 코탕탱(Contentin) 반도 내륙에는 루프트바페 소속의 91공수 사단이 주둔했고독일 공군인 루프트바페는 보병 전투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709 보병 사단은 코탕탱 반도 동쪽과 북쪽 해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기타 노르망디 해안 인근 주변 지역에 주둔한 부대들을 여기 소개해보면, 243 보병 사단은 코탕탱 반도의 서쪽 해안을 방비했고, 711사단은 페이 드 코(Pays de Caux)의 서쪽 지역 방어를 맡았고, 30기동 여단은 예비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30기동 여단은 아주 독특한 부대로서 모두 자전거로 이동하는 기동 부대였습니다.

독일군의 기갑 예비군에 대해서는 특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롬멜은 상륙 저지 부대로서 최고 유효 수단인 기계화 사단들의 사용을 두고 집단군 사령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는 순수하게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휘하 서부 기갑 집단군 부대들을 레오 게이르 폰 슈베펜부르그(Geyr von Schweppenburg) 장군의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 집단군은 후에 제 5 기갑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됩니다. 5 기갑군은 노르망디 방어를 위해서 다시 재배치 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실전 경험을 풍부히 쌓은 롬멜은 연합군의 항공력이 훨씬 우세하였으며 전투가 발발하면 기갑부대의 이동에 막대한 장애가 발생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갑부대들은 이동거리가 짧은 해안으로 가능한 한 가까운 지역에 배치되기를 강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는 침공 첫 날 해안에서 적의 상륙을 저지할 한 개 기갑사단이 적이 해안에 교두보를 설치가 완료된 침공 삼일 째 되는 날 반격에 나선 3개 기갑 사단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게이르는 기갑군은 파리와 루엥의 중간 지점에 중점 위치해 있다가 적의 교두보가 확인되면 기갑군을 집중 투입해서 이를 궤멸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두 사람은 기갑의 운용을 두고 갈등을 빚다가 이 문제를 히틀러에게 직접 중재해주도록 하기로 하였습니다.

 

히틀러는 그의 버릇대로 양쪽 다 만족하지 못할 중재안을 내놓았습니다. 롬멜에게는 단지 3개 기갑 사단만이 주어질 예정이었습니다. 이 3개 사단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전 해안선을 커버하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나머지 사단들은 ‘OKW 예비대‘라는 명칭을 주고 게이르의 휘하에 두고 적의 상륙 공격이 있을 시에 반격하도록 했는데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사용할 수 있는 사단은 단 3개 사단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4개 사단들은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상륙할 경우에 출동하도록 하였습니다.


 

4.히틀러의 실수

히틀러는 예의 버릇대로 집중할 병력을 분산시키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결정은 게이르 휘하의 OKW 예비대 3개 사단을 출동시킬 때는 히틀러의 직접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개시할 때인 6월 6일에는 OKW 예비대 전차 사단장들은 히틀러의 지시가 없어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히틀러는 깨우지 말라는 지시를 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그의 부관들은 감히 그의 엄명을 무시하고 그를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프랑스내의 기갑부대들은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 롬멜이 구상하던 바와는 동떨어진 역할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출처및 참고사항: (전쟁사, 김창원,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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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상륙작전 썸네일 이미지

노르망디 상륙작적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중 가장 큰 스케일에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많아서 시리즈로 올릴계획입니다. 그 첫 번째 내용입니다.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D-DAY: 사상 최대의 작전

 

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군이 주력이 되고 기타 캐나다, 자유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폴란드, 노르웨이 등 8개국의 연합군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령 노르망디 해안에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감행 습니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에 동원된 병력만 무려 15만 6천 명이었습니다.

그들의 적인 노르망디 해안의 독일 방어군은 약 1만 명으로 추산되었습니다.

 

D-Day : 작전명 오버로드. 작전명 넵튠

노르망디상륙작전투입전 상륙정에 탑승장면 이미지


목차

  1. D-DAY: 작전명 오버로드, 작전명넵튠
  2. 상륙작전의 전모
  3. 기만 작전
  4. 작전에 필요한 날씨
  5. 작전 강행 결정
  6. 독일의 방심

1.D-DAY: 작전명 오버로드, 작전명 넵튠

연합군 측은 당시 작전명 오버로드(Overlord)라는 북부 유럽 침공 작전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 개시 단계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작전명은 넵튠(Neptune) 작전이었습니다. 오버로드는 대군주를 뜻하고 있으며 넵튠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해신의 이름에서 따온 작전명입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영국군의 프레데릭 모건 중장이 이끄는 기획팀이 계획을 세웠는데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으며 육해공군을 모두 망라한 것이었습니다.

 

넵튠 작전은 1944년 6월 6일 개시되어서 노르망디 교두보가 완전하게 확보된 1944년 6월 30일 종료되었습니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제 하워장군이었고 지상군 사령관은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였었습니다.

독일 측의 방어사령관은 프랑스 주둔 독일 집단군의 총사령관인 장군이 아이젠아워와 같은 격의 최고 지휘관이었으며 대서양 해안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장군은 북 아프리카에서 용맹을 떨친 에르빈 롬멜 장군이었습니다.장군이었습니다.

둘 다 원수였지만 롬멜이 훨씬 후배였습니다.

아이젠하아워가 공수부재원들에게 독려하는 장면이미지 


2. 상륙작전의 전모

상륙작전 개시일인 6월 6일은 D-day라는 음어로서 이미 연합군 내부에서 사용했었습니다. 이 암호는 나중에 아주 유명한 명칭이 되었고 추가 설명한다면D-day의 D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Day의 약자라고 합니다.

 

세계 각 군마다 이 D-day에 해당하는 고유의 단어가 있는데 우리에게 역시 낯익은 Zero-hour와 비슷한 말입니다.

상륙 작전은 두 단계로 시행되었습니다.

 

1944년 6월 6일이 되자 자정 경에 공수부대의 야간 투입 작전이 있었고 이어서 날이 밝자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먼저 노르망디 침공 작전의 시작이 되는 공수 작전을 소개해보면. 24,000명이나 되는 공수 부대원의 공수작전이 상륙 작전 전야()인 6월 5일과 6일 사이 자정 조금 후에 실시되었습니다.

 

공수 작전에 참가한 공수 부대는 미국, 영국, 그리고 캐나다와 자유 프랑스 군의 부대들이었습니다.

해안에 보병과 기갑부대로 구성된 상륙부대가 해안에 상륙하기 시작한 것은 그날 아침 06:30분입니다.

해상의 일기가 아주 황천 상황이어서 기습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상륙작전이 아주 힘든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내린 작전 감행의 결단이 결실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3. 기만 작전

기습은 상륙작전이 불가능해 보이는 날씨의 덕도 보았지만 연합군 측이 독일군에게 전개했었던 기만 작전의 성공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그 기만 작전은 보디가드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는데 독일군의 경계심을 상륙 예상 지점인 노르망디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만 작전의 핵심은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로 하여금 연합군의 상륙이 노르망디가 아니라 영불해협의 연결항구인 칼레(Calais) 북쪽 지역에 행해질 것이라고 오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미 1군이 패턴 장군의 지휘 아래 도버 해협을 건너 칼레에 곧 상륙 작전을 할 듯이 양동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르망디에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칼레에 상륙할 듯한 위장 작전은 계속되어서 독일군의 방어 병력 집중을 막았습니다.

 

연합군은 기만작전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머’나 ‘텍 사블’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위장 작전이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기만작전은 연합군의 중폭격기들이 칼레 앞바다인 도버 해협 상공을 비행하며 방대한 양의 얇은 금속 박편을 살포하여 독일군 레이다를 교란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레 해안에 곧 상륙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 오산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위장 작전에 사용된 가짜 전차.위장작전에 사용된 가짜 비행기 사진이미지


4. 작전에 필요한 날씨

매월 10일 간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가능하였다. 그중에 만월(滿)이 되는 날의 밝음과 조류가 작전 실시에 가장 이상적이었습니다.

밝기는 공중 침투하는 항공기 조종사나 글라이더 조종사들이 지형지물의 식별에 필수였었고 조류는 상륙정들이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상륙 저지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서 가능한 최대로 높은 해수면이 필요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6월 5일이 바로 그런 만월이 뜨는 날이었습니다.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잠정적으로 6월 5/6 사이 야간을 작전 개시일로 결정했었습니다. 그러나 5월에는 아주 쾌청했던 일기가 6월에 들어와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5. 작전 강행 결정

6월 4일 악천후는 작전 실시 불가함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강풍과 파도는 상륙 모선이 상륙정을 발진시킬 수가 없게 했고 낮은 시계()는 항공기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했었습니다. 이미 병력을 싣고 영국의 항구를 출발하였던 함선들은 영국 남해안으로 다시 돌아와 만이나 강구에서 대피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상식으로 본다면 6월 5일 침공계획은 전면 취소하여야 했고 함선들은 항구로 돌아오고 병사들은 원래 머무르던 기지 생활관으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미 상륙 작전에 사용될 어마어마한 무기와 군수품들이 모두 바다에 떠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만월이 뜰 때까지는 무려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대기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6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에서 중대한 회합이 있었습니다. 이 회합에서 영국 공군 기상대장 JM 스태그 대령은 6월 6일에는 기상이 약간 좋아질 것이라는 예보를 브리핑했습니다. 지상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와 아이젠하워 참모장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장군은 작전을 원 계획대로 강행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 항공군 사령관 레이 말로리(Sir Trafford Leigh-Mallory) 경은 작전 강행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연합군 해군 사령관 버트람 램지(Sir Bertram H Ramsay) 제독은 중도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스태그 대령의 기상예보를 근거로 작전 강행을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작전은 강행되었지만 악천후는 결과적으로 충분한 항공 지원을 불가능하게 하여, 강력하게 요새화 되어 있는 오마하와 주노(Juno)의 해안 방어력에 대한 충분한 타격을 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6. 독일의 방심

한편 영불 해협 방면보다도 더 험한 북부 프랑스의 악천후는 독일군을 안심하고 경계를 풀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그간 미영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임박했음을 계속적으로 경고받고 있어서 높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끔찍한 악천후는 적어도 며칠간은 마음을 놓아도 좋으리라고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일부 부대는 비상 경계령을 일시 해제하기도 하였고 많은 고위 지휘관들은 주말을 맞아 위치를 떠나거나 했습니다. 해안선 방어를 책임진 에르빈 롬멜 원수는 아내의 생일 축하를 위해 며칠간 독일의 집으로 귀가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 십 명의 사단장이나 연대장 그리고 대대장들이 침공 대비를 위한 워 게임(war game) 연습을 위해서 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상륙작전후 오마하해변모습 사진이미지

참고문헌: 유용원에 군사세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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