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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양측 작전계획

노르망디 상륙작전 두번째 이야기

상륙작전은 대량의 인원과 물자를 영불해협을 횡단하는 항해를 통해 수송되어야 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지역은 그 폭이 무려 50 마일로서 이 넓은 해안은 5개의 작전 구역으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각 작전 구역에는 작전 명칭이 부여되었는데 유타(Utah), 오마하(Omaha), 골드(Gold), 주노(Juno), 그리고 소드(Sword)였습니다.


차례

  1. 연합군 상륙계획
  2. 독일군의 방어 계획
  3. 독일군의 병력 배치
  4. 히틀러의 실수

1. 연합군 상륙계획

미군과 영국군 캐나다 군이 각각 담당한 해안선의 침공 구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미군 1군은 73,000명의 병력으로 오마하와 유타, 두 개의 해안 목표를 공격했는데 이 병력 중 15,600명은 공수 병력이었습니다.

  • 오마하 해안 : 미군 5군단- 1사단과 29사단
  • 유타 해안 : 미군 7군단 -4 사단 90사단의 359 RCT. 101 공수사단과 82사단의 상륙 해안 후방 내륙 강하, 영국군 2군이 이 구간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6 공수 사단 7,900명이 침공 구역 좌측에 투하되었다
  • 소드 해안 : 영국군 코만도 부대의 2개 여단, 1군단의 3 사단과 27 기갑 여단
  • 주노 해안 : 캐나다 1군단- 캐나다 3사단, 캐나다 2 기갑여단, 영국군 제 4 코만도 부대
  • 골드 해안 : 영국군 30군단의 3 사단. 캐나다군 1개 기갑여단

노르망디상륙작전상황지도이미지 


2.독일군의 방어 계획

한편 연합군 침공에 대비해서 독일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원수를 대서양 해안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방어 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독일은 대서양 연안에 걸쳐 4년 동안 교통호와 화력 지원 요새와 벙커들로 바느질로 조밀하게 누빈듯한 방어선을 만들었습니다.

 

독일군의 최초 방어선은 영불 해협이었습니다. 영국이 영국 본토 공격을 노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나폴레옹의 해군을 분쇄한 천연의 장애물입니다. 이제는 그 반대로 독일군이 활용하게 된 것이죠.

 

두 번째의 방어선은 해안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총통 명령 51호로서 벨기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뻗쳐 있는 이 해안지대를 ‘대서양 방벽’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요새화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방어공사가 집중된 곳은 바로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가까운 도버해협의 해안 쪽이었습니다. 즉 앞에서 말한 기만 작전이 행해진 칼레 해안이었습니다.

 

롬멜은 상륙작전은 만조(滿)때 감행되리라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콘크리트 벙커와 포대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철조망을 밀집시켰으며 해변에는 상륙정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수천 개의 방어물과 수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습니다.

 

연합군은 방비가 엄중한 칼레를 공격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조금 더 떨어진 독일 7군과 15군의 전투 지경선이 있는 노르망디를 상륙 예정지로 선택했습니다.

침공이 발발하면 두 독일 군() 사이에 책임 전투 구역을 두고 큰 혼선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대서양 방벽’으로 마련한 방어시설 <출처 (cc) Bundesarchiv>

롬멜은 상륙작전은 만조(滿)때 감행되리라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콘크리트 벙커와 포대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철조망을 밀집시켰고 해변에는 상륙정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수천 개의 방어물과 수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습니다.

연합군은 방비가 엄중한 칼레를 공격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조금 더 떨어진 독일 7군과 15군의 전투 지경선이 있는 노르망디를 상륙 예정지로 선택했습니다. 침공이 발발하면 두 독일 군() 사이에 책임 전투 구역을 두고 큰 혼선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3.독일군의 병력 배치

롬멜사진 이미지

연합군이 상륙 작전을 감행한 노르망디 상륙지점은 4개의 독일군 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716 독일 보병사단은 상륙 해안의 최동단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상륙할 예정이었습니다. 716 보병사단은 신체적으로 약한 독일병사들과 다른 나라들에서

 

징병한 병사들, 그리고 소련군 포로들로 포함 잡다한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 전투력을 의심받고 있었습니다.

 

오마하 해안에는 독일 정예 35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단 병사들은 대소 전쟁의 동부전선에서 실전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정예 사단이 방어하던 오마하 해안을 공격했었던 미군 병사들의 피해율이 가장 높았었습니다.

해안으로 뻗어 나온 코탕탱(Contentin) 반도 내륙에는 루프트바페 소속의 91공수 사단이 주둔했고독일 공군인 루프트바페는 보병 전투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709 보병 사단은 코탕탱 반도 동쪽과 북쪽 해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기타 노르망디 해안 인근 주변 지역에 주둔한 부대들을 여기 소개해보면, 243 보병 사단은 코탕탱 반도의 서쪽 해안을 방비했고, 711사단은 페이 드 코(Pays de Caux)의 서쪽 지역 방어를 맡았고, 30기동 여단은 예비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30기동 여단은 아주 독특한 부대로서 모두 자전거로 이동하는 기동 부대였습니다.

독일군의 기갑 예비군에 대해서는 특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롬멜은 상륙 저지 부대로서 최고 유효 수단인 기계화 사단들의 사용을 두고 집단군 사령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는 순수하게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휘하 서부 기갑 집단군 부대들을 레오 게이르 폰 슈베펜부르그(Geyr von Schweppenburg) 장군의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 집단군은 후에 제 5 기갑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됩니다. 5 기갑군은 노르망디 방어를 위해서 다시 재배치 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실전 경험을 풍부히 쌓은 롬멜은 연합군의 항공력이 훨씬 우세하였으며 전투가 발발하면 기갑부대의 이동에 막대한 장애가 발생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갑부대들은 이동거리가 짧은 해안으로 가능한 한 가까운 지역에 배치되기를 강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는 침공 첫 날 해안에서 적의 상륙을 저지할 한 개 기갑사단이 적이 해안에 교두보를 설치가 완료된 침공 삼일 째 되는 날 반격에 나선 3개 기갑 사단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게이르는 기갑군은 파리와 루엥의 중간 지점에 중점 위치해 있다가 적의 교두보가 확인되면 기갑군을 집중 투입해서 이를 궤멸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두 사람은 기갑의 운용을 두고 갈등을 빚다가 이 문제를 히틀러에게 직접 중재해주도록 하기로 하였습니다.

 

히틀러는 그의 버릇대로 양쪽 다 만족하지 못할 중재안을 내놓았습니다. 롬멜에게는 단지 3개 기갑 사단만이 주어질 예정이었습니다. 이 3개 사단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전 해안선을 커버하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나머지 사단들은 ‘OKW 예비대‘라는 명칭을 주고 게이르의 휘하에 두고 적의 상륙 공격이 있을 시에 반격하도록 했는데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사용할 수 있는 사단은 단 3개 사단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4개 사단들은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상륙할 경우에 출동하도록 하였습니다.


 

4.히틀러의 실수

히틀러는 예의 버릇대로 집중할 병력을 분산시키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결정은 게이르 휘하의 OKW 예비대 3개 사단을 출동시킬 때는 히틀러의 직접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개시할 때인 6월 6일에는 OKW 예비대 전차 사단장들은 히틀러의 지시가 없어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히틀러는 깨우지 말라는 지시를 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그의 부관들은 감히 그의 엄명을 무시하고 그를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프랑스내의 기갑부대들은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 롬멜이 구상하던 바와는 동떨어진 역할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출처및 참고사항: (전쟁사, 김창원,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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