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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P-51 머스탱 전투기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탄생 배경과 개발 역사와 특징과 운영현황 관련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P-51머스탱 전투기 비행 이미지   출처: Public Domain 

1. 개발의 역사 

1928년 설립된 미국의 노스 아메리칸 항공은 주로 군용기를 만들어 왔으나 제1차 대전이 끝난 지 엄마 되지 않았기에 파매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장 제임스 킨들버거는 단엽기가 복엽 기를 대체하기 시작하고 1930년대 중반 이후 유럽에 서서히 전운이 고조되자 자체 자금으로 신예 전투기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만큼 기술 개발에 노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때 엔지니어 에드가 슈 무드가 이끄는 개발팀이 훗날 NA-73로 명명된 느 신예기를 설계했습니다. 충분히 군남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킨들버거는 육군 항공대(현 공군)에 도입을 제안했으나 기대와 달리 그다지 관심을 보지 않았습니다. 

노스아메리칸의 NA-73X 실험기. 단순하면서도 고속 비행에 적합한 날렵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출처: Public Domain >

당시 미군은 전쟁이 벌어져도 유럽에서 일아날 것이라 판단해 전투기보다 폭격기를 중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그렇게 확보한 기술을 더욱 갈고 다 닦으며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 고하자 그동안 히틀러를 달래는 데만 급급했던 영국이 마침내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때부터 군비 확충에 나서야 했습니다. 전투기도 마찬가지여서 생산을 늘렸지만 전력 격차를 신속히 줄이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해외에서 전투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는데 당시 여건상 영국이 전투기를 살 수 있던 곳은 중립국이지만 영국의 호의적이고 무기 거래에 크게 제한을 두지 않았던 미국뿐이었습니다. 

 

1940년 4월, 영국 구매사절단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라나 미국은 폭격기 분야에 경쟁력이 있었기에 당시 사용 중인 전투기의 성능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쓸 만하다고 판탄 한 P-40을 선택했지만 생산자인 커티스가 

미국 납품 물량을 대가에도 발차 주문을 수용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사절단은 마침 B-25 폭격기 판촉을 위해 찾아온 킨들버거에게 P-40을 하청 생산해 줄 수 있겠냐고 문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킨들버거는 넉 달의 시간만 준다면 더 좋은 전투기를 제작해 주겠다고 역으로 제안했고 특별히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한 영국이 이를 수용했습니다. 

그렇게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개발이 진행되어 1940년 10월 26일 불과 117일 만에 시제기인 NA-73이 완성되었습니다. 

 

반신반의하던 영국은 NA-73 요구 조건을 모두 충족하자 머스탱 MK I라고 명명하고 320기를 주문했고 1942년부터 본격 남 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선에서는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고도 4,000m 이상으로 올라가면 비행 성능이 급속히 저하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이르러서는 스피트 파이어가 충분히 생산되고 있었기에 머스탱은 공격기로 임무가 전환되었습니다. 

 

하지만 머스탱에 미련이 많았던 시험 비행사 롤란드 하커가 엔진이 문제라 보고 스피트 파이어의 롤스로이스 멀린 61 엔진을 장착하자는 의견을 당국에 제시했습니다. 

 

새롭게 이식된 롤스로이스 멀린 61엔진. 그저 그런 전투기로 끝날 가능성이 컸던 머스탱을 환골탈태 시킨 일등공신이다. <출처: (cc) JAW at Wikipedia.org >

이에 따라 1942년 10월, 엔진을 바꾼 5기의 머스탱이 시험 비행에 나섰습니다. 결과는 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약간의 성능 향상 정도만 기대했으나 당시 최고인 시속 700km의 속도로 비행할 수 있었고 고도에 상관없이 뛰어난 기동력을 발휘했습니다. 항속 거리도 스피트 파이어보다 30% 정도 늘어났습니다. 놀란 영국은 이를 머스탱 MK II로 명명하고 기존 물량 개조 외에 1,000기를 추가 주문했습니다. 

 

일본의 급습으로 제2차 대전에 뛰어들면서 머스탱을 도입했지만 역국과 같은 사유로 A-36 공격기로 소량 사용 중이던 미국도 놀랐습니다. 

변변한 전투기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영국 에스 들려온 소식은 복음이었습니다. 멀린 61일 엔진을 장착한 P-51은 곧바로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가 되어 제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습니다. 비록 탄생과 성능 향상은 영국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P-51은 미국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2. P-51 머스탱 특징

P-51을 개발한 에드가 슈 무드는 공기 저항 감소에 유리하도록 주익이 가장 두꺼운 부의가 중앙에 위치한 층 유식 날개 구조를 체 책했습니다. 당시까지는 드다지 많이 채용하지 않은 신기술이었으나 슈므드는 속도와 향속 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생각대로 강력한 멀린 61 엔진과 결합하면서 당대 최고의 속도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장점은 항속 거리였습니다. 

 

P51머스팅 활약상 동영상자료

 

P-51은 동 시기에 활약한 경쟁작과 비교해 기체의 크기가 그다지 차이 나지 않지만 내부 연료탱크가 큽니다. 여기에 보조 연료탱크까지 부착하면 후기형인 P-51H은 3,000여 km 가량 비행이 가능했습니다. 

 

제2차대던 말에 미국은 폭격기와 함께 적진까지 날아갈 수 있는 p-51가 등장하면서 폭격기의 손실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행 능력을 향상 시 키 층류식 날개는 얼음이 붙거나 피탄 등으로 구조에 조금만 손상을 입어도 성능이 현저히 저하되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수랭식 엔진은 피격되면 쉽게 과열되어 기체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회력이 떨어지고 저속에서 조정이 어렵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전보다 많은 장점 덕분에 P-51은 전쟁 말기에 확실하게 제공권을 장악하며 연합국의 승전을 이끈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3. 운용현황 

종전이 이루어진 1945년까지 총 16,766기가 제작되었습니다. 

1942년 1월 영국 공군을 시작으로 영연방 연합국에서 사용했고 제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친미 국가를 중심으로 20여 개국에 공급되었습니다. 당연히 가장 많이 사용한 이는 미국군 항공대였습니다. 1942년 8월부터 일선에 배치하자마자 곧바로 주력 전투기의 지위를 차지한 후 미군이 참전한 곳으면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참전 시기와 비군의 전략 때문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로 폭격기 호위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유럽 전성에서는 성능 상으로 돌일 전투기들과는 호각지세로 평가받았으나 압도적인 물량으로 제공권을 확실히 확보해 폭격기들이 원활히 작전을 펼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해군 항공대의 역할이 워낙 커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질적으로 일본 전투기를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종전 후 제트 전투기가 주력이 되면서 미국은 공격기로 임무를 전황해 1957년까지 사용했습니다. 

한국 공군에게 F-51(1947년 제식 부호 변경)은 최초의 전투기로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직후에 도입해 1955년 F-86이 도입될 때까지 주력기 임무를 담당했고 승호리 철교 폭파처럼 다양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후 1969년 축구전쟁(엘사바도르-온두라스 전쟁)처럼 중소 국가 간 분쟁 등에서 사용되었고 1984년 도미니카를 마지막으로 군용기로 전량 퇴역했습니다. 

 

 참고 문헌: 한국 국방 포럼,유용원의 군사세계, 작가 남도헌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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