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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가드 전투 이미지 출처:영화레닌그라드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즈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차례

  1. 모두가 원했던 도시 레닌그라드
  2. 소련 혁명상징 도시
  3. 독일의 당연한목표
  4.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

1. 모두가 원했던 도시 레닌그라드 

1940년 7월 초, 프랑스를 평정한 직후,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Oberkommando des Heeres)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독일군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차출하여 이 시 조직으 설치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하달된 임무는 소련 침공에 관한 기초적 계회를 수립하는 것이 이었습니다. 

아직 히틀러의 정식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명령이 내려올 것이 분명하였기에 미리미리 대비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8월 8일, 이곳에 파견 나온 제18군 참모장 마르크스(Erich Marcks)는 러시아의 빈약한 도로망을 염두에 두고 수립한 작전 초안을 상부에 보고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후 바바로사 계획(Operation Barbarbossa)으로 알력진 소련 침공 전락의 최초 뼈대가 됩니다. 

 

마르크스는 주공을 크게 둘로 나누어 모스크바와 키예프로 신속히 진격함과 동시에 소련군의 주의를 분사시킬 목적으로 조공을 이도시로 향하도록 작전을 수립합니다. 

 

이를 검토한 참모장 항더(Franz Halder)는 키예프보다 정치적 상징성을 훨씬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먼전 점령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타당하다며, 계획을 수정하여 12월 5일 히틀러에게 보고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키예프와 레닌그라드를 우선 점령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격국 전쟁 지휘부의 갑론을박 끝에 침고군 주력을 셋으로 나누어 모스크바, 키예프 그리고 이도시를 일거에 점령하도록 수정한 최종 침고 계획이 채택되었습니다. 

 

실전이 오고 간 모스크바나 키예프와 달리, 이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당연한 목표라고 보았던 레닌그라드였습니다. 

 

독일이 그렇게 생각하였던 만큼 소련 또한 이곳을 지키고자 했으며 레닌그라드는 엄청난 혈전의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도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에서 최장이라 할 수 있는 900여 일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이전 투에 이름이 바로 레닌그다드 포위전입니다. 

 

레닌그다드 전투관련 해 히틀러와 참모들의 작전회의 이미지

 

2. 소련 혁명 상징도시

1703년 제정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원래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였지만 스웨덴이 강점하고 있던 네바강 하구의 습지대를 탈환하게 됩니다. 그는 발트해 연안의 이곳을 유럽으로 향한 창으로 삼기로 하고 새로운 도시의 건설에 착수하게 됩니다.  자신에 이름을 따서 상트 레테르 부르크로 도시의 이름을 정한 그는 1712년 이곳을 수도로 없겼을 정도로 애착과 기대가 컸습니다. 

 

이렇게 시작돼 이도시는 이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러시아 제2의 대도시가 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위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흔히 러시아의 심장으로 블리는 모스바는 정치적 상징성이 큰 반면, 해상을 통한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트 페테르브르크는 학술, 문화, 예술 분야를 선도하여 러시아의 머리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소련을 태동시킨 혁명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외부 세계의 흐름을 러시아에서 가장 먼저 접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절대 왕정에 반발한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을 만큼 반골 기질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공 산형명이 시작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905년 이른바'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발한 이후 민심이 계속 흉흉해지자 1914년 도시의 이름을 좀 더 러시아의 친화적인 페트로그라드로 개칭하였지만 이미 권력에 등을 돌린 대중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제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이 도시에서 3월 혁명, 11월 혁명이 연이어 버리시면 제정 러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 아인 소련이 탄 행하였습니다.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다시 이름을 바뀐 점만 보더라도 소련 공산 쥐의 역사에서 이도시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레닌그라드는 소련 혁명의 산징과도 같은 도시였습니다. 

 

 

 

 

3. 독일의 당연한 목표

상징성이 먹고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대도시였지만 독일이 레닌그라드를 점령해야 할 당위성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먼저 표트르 대제가 이곳에 도시를 만들었던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상 독일이 레린그라드를 점령하면 소련은 발트해를 통해 밖으로 나갈 통로가 차단되어 버립니다.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상 독일인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면 소련은 발트해를 통해 밖으로 나갈 톨로가 차단되어 버리고 맙니다. 

 

소련은 거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지만 의외로 해상 출입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 , 레린그다드는 구중 얼마 안 되는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반면 독일이 이곳을 차지하면 소련 내륙으로 칙 나갈 수 있는 중요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독일군의 핵심 브레인들이 침공 계획을 짜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 보급로였습니다. 

유럽에 비해 몹시 적은 철도와 몇 개 되지도 않은 열악한 도로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홍이어서 소련 내부에서 주공의 지향 방향은 극히 제한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독일군은 갈수록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이는 전쟁의 패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레니 그 라드가 확보는 독일 본토에서 소련의 중심으로 향하는 거대한 해상 보급로의 출입구가 개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곳을 교두보 삼아 독일이 최종 진출 목표로 설정한 A-A선(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의 북쪽 끝인 아르한겔스크는 반쪽 통로이지만 이곳이 막히면 소련이 외부와 연력 될 수 있는 바닷길은 극동과 흑해만 남게 됩니다. 

 

레닌크가드는 이처럼 혁명이니 역사성이니 하는 추상적 명분보다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독일에게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반대로 소련에게는 어떠한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사수해야 할 싸움터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외부 연결이 언제든 가능한 해안도시여서 대륙 한가운데 위치한 모스크바와 달리 소련의 전통적으로 구사해온 청야 작전이 방어에 그다지 효과가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4.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

이도시가 아무리 해안가 도시라도 해군력이 약한 독일이 바다를 통해 이곳을 점령할 수는 없었습니다. 

소련도 해군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독일 또한 이를 단숨에 격파하고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킬 만한 역량은 없었습니다. 사실 주변에 40여만의 병력이 지키고 있는 350만 인구의 대도시를 해군으로만 순식간에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타 전선과의 연결을 고려했을 때 이곳만 먼저 차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육상으로 900km를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여야 하는데,  사실 소련과의 전쟁을 한창 계획 중인 독일에게 이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설령 레닌그라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소련을 군사적으로 굴 북 시키려면 그 이상은 진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마치 깔때기 입구처럼 진격하면 할수록 넓어지는 소련의 지리적 구조에 있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전선이 커진다는 의미인데 최종 목표로 설정한 A-A선까지 가면 출발선 다시 보다 약 2배 정도 전신이 넓어지게 됩니다. 전선 남부는 추측 국에 가담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도움을 받아 후속 보급에 그다지 문제가 없었지만 레닌그라드로 다가가야 할 북부는 일단 진력 방향부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구조상 동쪽으로만 직진하면 되는 모스크바, 키예프와 달리 레닌그다는 발트해 연안을 따라 복동진 해야 했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관련지도 이미지

그것은 독일의 진격이 길어질수록 우측면이 그대로 노출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살실 소련이 1940년 6월 14일, 3국을 침공하여 합병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일 발트 3국이 독일 편에 붙는다면 레닌그라드는 바로 밑이 훤하게 열리는 샘입니다. 

풀란드를 분할할 때 독일과 사전 밀양을 맺고 취한 군사 행동이었지만, 소련의 발트 3국 점령은 레닌그라드 방어를 위한 사전조치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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