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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중동전쟁 이스라엘건국 썸네일


목차

  1. 개요
  2. 상세정보
  3. 전력상황 1) 이스라엘 전력상황 2) 아랍국가 전력상황
  4. 전황
  5. 여담

 

1. 개요 1차 중동전쟁 - 이스라엘 건국

아랍권에서는 1948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여 1948 전쟁(1948حرب)이라고 부른다.

 


2.상세정보

2차 세계대전 종결 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무주공산이 된 팔레스타인 지역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를 둘러싸고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충돌이 지속되었으며, UN의 영국령 팔레스타인 영국령 팔레스타인 분할안도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지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지도


3. 전력상황

1) 이스라엘 전력상황

1947년 11월 하가 나는 1929년 폭동 이후로 잘 조직된 유대인 민방위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1936년~1938년 의 폭동 이후로, 2,000여 명의 직업군인과 한 달에 3~4일 정도 군사 훈련을 받는 만여 명의 지원자들이 이 정예부대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이 기동부대는 25살 이상의 지역단위 민방위군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35,000명 정도가 하가 나의 구성원이었습니다. 이들은 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정규적인 군사집단이 아닌 지하조직 형태였기 때문에 화기 입수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1946년 다비드 벤구리온은 유대인 공동체가 비유대인들의 습격에 대항하여 스스로 방어할 수가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동구권 진영의 무기들로 무장하기 시작합니다. 1947년 9월, 하가 나는 1만 정의 소총과 702 정의 경기관총, 2,666 정의 기관단총, 186 정의 중기관총, 2인치 박격포 672문과 3인치 박격포 92문을 보유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47년 10월에서 48년 7월 사이, 무기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들은 3백만 발의 9mm 권총탄과 수류탄 15만 개, 기관단총 1만 6천 정, 3인치 박격포 210개를 생산하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수입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기는 부족하였고 평균적으로 하가 나의 대원 3명당 1개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정예부대도 3명당 무기 2자루 정도를 보유하는 것에 그쳤으며 그나마 M4 셔먼 30대로 쥐꼬리만큼의 기갑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전쟁 초기에 충분한 수량의 중기관총과 대포, 장갑차량이나 대전차, 대공 무기를 보유할 수 없었습니다.

2) 아랍연맹 전력 상황

팔레스타인은 국가적 무장단체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청년 측의 무장 조직이 있었다. 약 11,000~12,000명 정도가 존재했으며 크게 후 샤니 후타와 후샤니 나즈다 두 파벌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발발 이후에 팔레스타인 국가 방위군이 새로 조직되었으며 12월 아브 알 퀘디르 후세이니는 시리아에서 훈련된 100여 명의 아랍 성전 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몇몇 지원자들과 영국군 출신의 베테랑들과 합류합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군의 무장은 매우 안 습했는데, 1942년 이스라엘의 첩보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는 약 5만여 정의 화기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지만 굉장히 낡고 신뢰도가 낮았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경단 조직들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도 영국 식민 당국에게 총기를 요청하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총을 사서 조달하기도 했습니다.

아랍연합은 다양한 아랍국가에서 지원한 6천여 명의 자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아랍 해방군을 조직했고 파워 알 콰오지의 지휘 하에 사마리아와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에 파견했습니다.

요르단은 위에서 서술했듯이 영국군의 훈련 하에 정예부대를 보유했으며 8천 명에서 만 2천 명의 부대가 4개의 보병 및 기계화연대로 조직되어있었으며 40문의 야포와 75대의 장갑차를 보유했었습니다.

이라크 왕국은 12개 여단 21,000명의 군대를 보유했으며 영국제 전투기 100여대로 이루어진 공군까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 4개 보병여단을 파견했으나 최종적으로 만 5천 명에서 만 8천 명까지 증파했습니다. 5월 15일에는 이라크 공병대가 요르단 강에 가교를 건설하여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 아주 조금의 성과를 거둔 바는 있습니다. 이후, 나 블루스 예닌 툴 칼람 삼각지대 내에서 이스라엘군의 발악으로 격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위치를 고수한 바 있으며 이라크군은 예닌 지역을 사수하던 중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그나마 좀 나은 케이스이며

이집트 왕국은 약 4만여 명의 병력을 전개할 수 있었는데 군사적으로 적정 연령에 있는 인구 중 80%가 병역을 거부(…)했고 보급체계가 눈물겨워 국가 경계선 지역에만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초기에 병력만 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으며 영국제 25파운드 포 6문과 6파운드 대전차포 8문, 1 정의 중기관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집트 공군은 30기의 스핏파이어와 4기의 허리케인, C47 20기 등으로 폭격을 수행했습니다.

시리아는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만 2천여 명의 병력과 전차대대를 파견하였습니다. 5월 15일부터 16일에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마크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한 바 있으나 며칠 뒤에 다가니아에서 패주 합니다. 전반적으로 시리아군은 방어로 돌아선 6월 10일 이후 소규모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스라엘의 정착민 촌락에 소규모의 공격을 가했습니다.

레바논은 규모가 작은 3천5백 명의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천여 명의 침공군은 북부 갈릴리를 지나 이스라엘군과 교전하였으며 결국 1949년 3월 23일 휴전협정에 사인해 버렸습니다.

 


4. 전황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총리 디비드 벤구리온이 텔아비브 미술관의 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함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왕국, 이집트 왕국, 요르단은 아랍 연합군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여기에 사우디 아라비아, 예멘은 자금과 자원병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아랍 각지에서 지원자들로 구성된 아랍 해방군이 결성되어 파견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무력충돌 기간 동안 결성된 성전 군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스라엘군의 전력은 그야말로 보잘것없어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잡다한 무기들을 되는 대로 지급해서 총기를 든 병사 10명이 있으면 그중 7~8명은 각자 다른 탄을 사용하는 총기여서 탄약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부대에서는 소유한 총기에 넉넉한 탄약을 가진 병사가 주로 교전을 하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그 병사가 쉴 동안 그 총을 돌려쓰고 기지 방어만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에 반해 영국의 지도를 받은 정예군을 보유했던 요르단, 강력한 공군력을 가진 이집트, 이라크, 프랑스제 기갑장비로 무장한 시리아의 전력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방어에 주력하며 전선을 유지했습니다.

여기서 영국식 교육을 받았던 아랍 5개국 정규군에 맞서 싸운 이스라엘군의 전설이 시작됩니다.

지원도 보급도 모자란 판에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사용 가능한 모든 전략을 펼치며 총 20여 일간의 치역 한 공방전 속에서 이스라엘 군은 끝내 두 도시를 지켜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때 골다 메이어 총리의 명언도 나왔는데 :우리는 아랍을 상대로 한 최종병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면 끝장이라는 절박감이다. "

가장 격렬한 전투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테이비브 가도를 둘러싼 전선에서 벌어졌습니다. 5월 말부터 개시된 이스라엘의 공세로 인해 요르단 군은 패주 했고, 반격에 나섰던 이라크, 요르단 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북부와 남부 전선 역시 키부츠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대포까지 끌고 와 저항하는 이스라엘군에 막혀 진척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6월 11일 UN의 중재로 30일 동안 휴전이 선언되면서 양쪽 모두 숨 고르기를 할 시간을 벌었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미국 등 서방에서 무기를 대거 들여와 전력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7월 8일 이집트군의 기습으로 전쟁이 재개되자 이스라엘군은 방어에서 아랍 연합군에 대한 전면 공세로 전환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주변 거점을 점령하며 가나안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였습니다.

 

결국 10일 후인 7월 18일 UN의 중재 아래 2차 휴전이 선언되었습니다.

 

UN은 전쟁을 끝낼 중재안으로 또 다른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내놓았지만, 양쪽 모두 이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측은 도리어 분할안을 제안한 스웨덴 대표 폴케 베르나도테를 암살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평화협상은 실마리를 얻지 못한 채 10월 15일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습니다.

전쟁이 재개되자 이스라엘은 북쪽 갈릴리 호 일대를 노린 공세를 펼쳤고 단 10여 일 만에 아랍 연합군을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몰아내고 갈릴리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다음 목표로는 아랍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차지하기에는 아직 애로사항이 있는 가자지구와 요를 단강 서아지고 대신 무수지나 다름없던 남쪽 네게브 사막을 향한 파상공세를 펼쳤습니다.

 

허를 찔린 아랍 연합군은 네게브 사막 전체를 이스라엘에게 내어주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까지 진격했습니다.

 

결국 반격 능력을 상실한 아랍 국가들은 각자 차례대로 이스라엘과 휴전을 체결하였고 1949년 3월 10일 홍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에일라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78%를 장악했고, 나머지 지역 중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장악한 지역에 살고 있던 7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을 떠나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랍 연합군은 압도적인 전력이었지만 실상은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서로 간의 불신으로 인해 단합이 전혀 되지 않아 전쟁을 효율적으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얼마 전까지 영국 및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나아가 당시에는 왕가와 반 왕파들의 갈등과 내전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보입니다. 보통 아랍 연합 군위 수적, 학격면에서 오세 했던 거에만 집중하지만 사실 이들은 장비는 우살지 몰라도 내부적을 심각하게 분열되어 문 게가 이스라엘보다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집트만 해도 파루크 왕가에 불만이 큰 장교들은 일부 작전을 무시했으며 다 이겨 놓고도 일부러 후퇴하여 패배를 자초했습니다. 이는 만일 이집트군이 승리하면 왕가에 대한 지지가 커질 테고, 그러면 왕가를 뒤엎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전쟁에 패배하면서 쿠데타의 명분을 얻은 군부는 3년 만에 파루크 국왕의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기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쿠데타로 뒤집어엎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귀족 출신으로 우쭐거리는 장교와 강제 징집된 사병들의 갈등도 커서 되려 유럽인 교관들이 "장비만 좋지, 이건 허수아비 군대다."라고 비웃으며 회고할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베두인족으로 구성된 정예군을 가진 요르단 군의 경우 지금까지도 미국이나 영국 군사기관들과 교류하는 아랍권의 최정예 군대로 통합니다. 다만 요르단은 근본적으로 소국인 데다 가난하고 석유가 없어서 이 훌륭한 군인들에게 사우디나 쿠웨이트  같은 장비 빨을 세워줄 수는 없다는 점이 있어서 대세에 영향을 주기 힘들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결사적인 저항은 표면적인 전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구시가를 포함한 중요 지역을 탈환하거나 추가로 점령하기 위해서, 아랍연맹 측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제2차 중동전쟁으로 비화됩니다.

 

 


5. 여담

이스라엘 독립전쟁 기간 동안 이스라엘군은 소련의 허가하에 체코 슬로바키아에서 받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싸웠고, 아랍 연합군은 영국군이 남기고 간 대량의 영국제 무기로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쓴 독일제 무기는 상당 부분이 체코슬로 바키아에서 생산한 물량이었고, 독립 초기 이스라엘을 중동의 반서방 거점(다른 중동국가가 다 친영미 계열이던 시절이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소련이 체코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지시했기 때문에 프라하 공항에서 한동안 이스라엘행 무기 수송기만 이륙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이 보유했던 메서슈미트도 실은 독일제 오리지널이 아니라 체코 제인 아비아 S199였고,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우지 기관단총도 그 원형은 체코제의 Vz25 기관단총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체코가 보유하고 있던 카구팔(kar98) 소총 생산시설을 통째로 구입해서 Kar-98K를 생산, 한동안 제식 소총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전후 이스라엘은 빠르게 친미 노선으로 갈아탔기 때문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격노하여 책임자들을 숙청했으며 소련 내부의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반파시즘유대인위원회 위원장 솔로몬 미호옐스가 암살되었으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부인인 폴리나 젬추 지나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몰로토프에게 이혼당하고 체포당했습니다. 소련의 유대인 탄압은 크렘린 의사 음모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으나 1953년 스탈린이 급사하면서 흐지부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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