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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차 대전 중 미국과 일본의 전쟁 태평양 전쟁 당시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는 해전입니다. 

미드웨이 관련 내용이 많아서 시리즈로 3편으로 작성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미드웨이 해전 을 다룬 영화 포스터 이미지 

1. 미드웨이 해전의 배경

19424월 18일 일본 해군은 미 항공모함에서 출격하여 일본을 공습하고 중국으로 탈출했었던 두리틀 폭격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항속거리가 긴 쌍발 유상 폭격기를 항공모함에 적재하고 출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던 두리틀의 폭격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항속거리가 긴 쌍발 육상 폭격기를 항공 모함에 적제 하고 출결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던 일본 군부는 공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었고 충격을 받은 일본 국민들의 군부 비난은 크게 일었습니다. 

 

일와 히로 히토가 거주하는 도쿄에 적의 폭격이 가해지는 것은 당시 군민 모두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해군 야마모토 연합 함대 사령관은 대담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야마모토는 전쟁 전부터 염두해 있던 미드웨이 알류산 열도 작전을 실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개전후의 2단 게 공세에서 중부 태평양을 주요한 목표로 보고 이를 상부에 웃겨서 관철시키고 행동을 구상 중이었습니다. 

즉 미드웨이섬을 점령하여 초계선을 멀리 하와이 근처까지 동진시켜 두리틀의 폭격대와 같은 기습의 기능성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 10월쯤 예정돼 하와이 점령 작전의 교두보로 삼 겼다는 의지도 있었습니다. 

 

그의 목포는 또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이 하와이에 가까운 미드웨이 같은 전략적 가치가 큰 섬을 일본이 점령하고 있으면 호주와 남태평양 사이에서 활동하는 미 해군의 기동부대가 급히 달려올 것이고 이를 격멸하여 전쟁의 종말을 니 어보ㅗ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일본 육군은 야마모토의 작전 안에 공감하여 미드웨이와 알류샨 작전에 필요한 병력을 협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또 있었습니다. 

미국이 하와이에 가까운 미드웨이 같은 전략적 가치가 큰 섬을 일본이 점령하고 있으면 호주와 남태평양 사이에서 활동하는 미 해군의 기동부대가 급히 달려올 것이고 이를 격멸하여 전쟁의 종말을 지어보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일본 육군은 야마모토의 작전 안에 공감하여 미드웨이와 알류샨 작전이 필요한 병력을 협조하기로 하였습니다. 

 

2. 일본의 미드웨이 작전 연기 주장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반론은 해군 내부에서 나왔는데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작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제1 기동함대(마구모 기도 부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진주만 공격 후 계속해서 남태평양과 인도양의 여러 작전에 동원되었던 함정과 항공기, 군인들의 피로가 누적되어 일전 기간 정비와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장 아며 작전의 연기를 강하게 건의하였습니다. 

 

그의 건의는 휘하 항공전의 중요한 전문가 들인 항공 참모 간다 미노루 대좌나 제2 항공 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잔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산호해 해전에서 크 타격을 입고 수리 중인 즈이카쿠의 수리가 끝나고 그의 자매함 쇼카쿠가 인원 충원과 훈련이 완료된 후에 합류하기를 기다려서 작전을 실시하여야 한다는 의경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란 야마코토는 이를 모두 거부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은 미드웨이 해전은 시간을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3. 야마모토의 고집

두리틀 공습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4월 28일 연합함대 기함 야마토에서 연합함대 제1단계 작전 전훈 연구회가 열렸고 이어서 미드웨이 공략 작전의 도상 연습이 있었습니다. 도상 연습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였습니다. 

미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고 일본군도 보급 등의 여러 문제들이 노출되었습니다. 

항모 즈이카쿠 – 쇼카쿠는 비슷한 크기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출처 : wikipedia

특히 야마모토가 야심 차게 기대하고 있는 미 항모 부대의 포착과 격퇴의 가능성 보장할 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구모 기동부대 구사카 참모장은 그이 자서전에서 미드웨이 점령과 미 기동부대 격멸,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두 마리의 토끼를 쫓는 것과 같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만약에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더라면 그 전세의 방향을 돌려놓았을지도 모그는 두 척의 항모들, 쇼카쿠는 산호 해전에서 입은 손상 수리에 무려 3개월이나 걸리는 데다가 산호해 해전에서 조종사 손실이 절반에 달했던 자매함 즈이카쿠는 트럭 섬에 적 박시 키고 정비하기로 한 상황으로 이 주력 항모 두척의 작전 참가 배제는 불안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미국 기록은 즈이카쿠가 일본 구레 군항에 입항해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의 총동원 가능한 항공기는 319기로 예상되었지만 미군은 하와이에서 출격하는 육상기까지 포함하면 348기로서 비슷한 규모가 되었습니다. 

 

미국보다 압도적인 전투력을 집중해서 작전에 돌임 하기 못하는 상황을 걱정하는 간부들이 많았습니다. 

후에 평가되었지만 미드웨이 전장에서 먼 북쪽 알류샨 열도에 경항모 류조와 효를 분산 투입하여 전투력을 분산한 것은 전투력 집중의 원칙에서 볼 때 야마모토의 또 다른 큰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작전에 집착한 야마모토는 본 작전에 이견을 가진 함장들은 조속히 퇴함이라고 워협의 훈시를 함으로써 반대나 연기 의견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4. 사전 탐지한 미국의 정보력

1942년 5월 5일 해군 니노 군령부장은 아먀모토에서 대해령 제18호를 발려하여 작전 개시를 알렸습니다. 

이무렵부터 일본군보다 항상 한 수 위였던 미군의 정보 능력이 빛을 바흐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3원 4일 장거리 비행 능력이 뛰어난 일본군의 대형 2식 비행정 두기가 하와이 오하우 섬을 폭격하고 같으 달 11일 비행정 1기가 미드웨이섬에 접근했다가 격추돼 일이 있었습니다.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는 일본이 이 해역에 공세를 취할 징후라고 판단하고 휘하 부대에 엄중한 경계를 지시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 작전 변경한 암호 체계를 절략 암호 'D'라고 불렀는데 이 암호는 미 해군에게 JIN-25 암호라고 알려져 있었고 일부 암호 해독에 성고하고 있었습니다. 

 

미 해군은 1942년 4월 말부터 암호의 부분 해독에 힘입어 일본군이 태평야 해역에서 대규모의 공세 작전을 전개할 농후한 가능성을 포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게 될 것인가는 불명이었습니다. 일본군의 암호에 자주 등장하는 AF라는 암호는 공격 목표로 판단되었는데 이것이 어느 곳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위신 턴의 미 합참본부는 이 미지의 암호가 하와이를 지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미 육군 항공대는 이것을 알래스카나 미국 서해 안으리고 추측했었습니다. 5월 중순까지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가 없이 시간이 흘러갔지만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정보를 종함 분석해 보고 이곳이 하와이 인근 미드웨이 섬일 것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릅니다. 

 

 

하와이 소재 해군 첩보부도 그 AF가 미드웨이라는 가정으로 정보 수집에 집중하였습니다. 

블래 챔버라 불리는 이 암호 부대는 워싱턴에서 하와이로 급파된 죠셉 존 로체 포트가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 해군 암호 첨보 분야에서 전설적인 전공을 남긴 사람으로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암호 분석으로 사전 예견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5월 11일 첨보대의 장교 야스퍼 홈스의 제안으로 기가 막힌 작전이 만들어졌습니다. 

미드웨이와 오하우 섬의 중간에 깔린 해저케이블로 미드웨이섬 기지 사령관과 사전에 모의한 후 무선으로는 거꾸로 하와이에 미드웨섬의 해수 정화장치가 고장 나서 식수가 다 떨어져 간다는 긴급 위장 보고를 평문으로 하게 하였습니다. 

 

미드웨이섬의 사령관은 그대로 하였습니다. 이 평문 전문이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웨이크 섬의 일본군 통신 부대에게 감청되어 암호문으로 본국에 보고 되었습니다. 

 

미드웨이에 식수가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인데 역서 미드워를 지칭하는 암호인 AF라는 내용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미드웨이섬 – 두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 wikipedia>

 

이 무선은 다시 미 해군 통신 정보대에게 감청되었습니다. 

감청된 전문은 미 해군 통신 감청 본부에게 보고되어 비로소 AF가 미드웨이임이 밝혀졌고 이어서 이곳에 대규모의 일본군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 판단이 확전 되었습니다. 추가로 암호가 더 해독되어 미드웨이 공격 부대의 병력과 지휘관 예정 항로 등과 시기가 더 밝혀졌습니다. 

 

 

5. 미 함대 출동하다. 

미드웨이 침공을 격 최하기 위한 미군의 작전 계회는 5월 28일 태평양 함대 사령관 제29~42로 발령되었습니다. 

 

주요 내용들

1. 원거리에서 적을 발결, 포착하여 기습을 방지할 것

2. 적의 항모들을 결하여 공습을 지지할 것

3. 잠수함을 초개와 공격용으로 적극 활용할 것

4. 미드웨이섬 수비대는 저력을 다해 섬을 사수할 것

 

미군은 작은 미드웨이섬에 해병 수비대 3,000명을 금파 하고 항공기만 150기를 파견하였습니다. 

조밀한 대공포 대망이 급속하게 구성됐습니다. 

니미츠 대장은 이미 남태평양에서 산호해 해전을 겪은 플레처 제독의 17 기동부대(항모 요크타운과 호의 함들)를 하와이로 이동하게 하였습니다. 니미츠 제독은 가용 항모에서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5월에 있었던 산호해 해전에서 항모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요크타운은 큰 수리를 요구하는 손상을 입어 진주만의 독에서 수리 중이었습니다. 항모 사라토가도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서 수리 중에 있었습니다. 

요크타운 -미드웨이 출동 전 수리 독크에 있는 모습 <출처 : wikipedia>

니미츠 사령관은 자치하면 플렛처 제독의 16 기동부대의 단두 척의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힘겨운 작전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5월 27일 하와이에 도착하여 수리 독에 들어가 있는 요크타운의 수리가 어는 정도인지에 따라 요크타운을 미드웨이 해전에 투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였습니다. 

 

요크타운의 최대 파괴 부분은 연료 탱크로서 이를 제대로 수리하려 하와이 수리 조선소에서는 불가능하고 미 서해안의 큰 수리 조선소에 가서 장기적으로 수리해야 하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와이 수리 도트의 인원들은 72시간의 불면불휴의 돌관 작업으로 요크타운을 일단 출항을 할 수 있게 하는 응급조치를 완료하였습니다. 

 

요크타운은 5월 30일, 수리 독에서 빠져나와 전장으로 달리는 동안 공작함 (수리선)이 옆에 붙어 계속 긴급 수리를 하였습니다. 

일본 측은 요크타운이 산호해 해전의 피해가 너무 커서 출동이 불가능하리라고 보았습니다. 

만 양 미 기동부대의 반격이 있다면 미군이 미드웨이 작전에 할지 제독의 16기 동부 대인 엔터프라 니즈와 호넷, 2척 외에 경항모 와스프가 출동하리라고 판단했었습니다. 

 

1942년 5월 28일. 미 해군의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편성된 제16 기동부대 (TF-17)가 주력으로 출동하였습니다. 

이 부대는 지난 4월에 두리틀의 폭격대를 발진시킨 부대입니다. 이어서 5월 30일 17 기동부대의 요크타운이 뒤를 이어 출동하였습니다. 

17 기동 부대는 플레처 제독이 계속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16 기동부대의 사령관인 맹장 할지 제독은 피부병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서 스풀러언스 제독이 부이하였습니다. 

 

항모 작전에 별다른 경험이 없던 그는 참모장 엘리엇 브라우닝 대령의 조언을 대폭 받아들여 작전을 수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콤비의 협동 작전은 커다란 성과를 만들게 됩니다. 연합한 두 기동함대의 통합 지위는 플레처 소장이 맡았습니다. 

 

6. 야마모토 사령관과 전함 야마토의 출동

한편 일본은 5월 27일 나구모 주이치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제1항공 전대 엄중한 무선 봉쇄를 실시하며 출결 하였습니다. 주력 항모들은 제1항공 전대의 아카키, 카가, 제2항고 전대의 히류, 소류의 네 척이었습니다. 

 

6개월 전 하와이를 공격했던 기동부대에서 제5 항공 전대의 쇼카쿠와 즈이카쿠가 빠진 것이었습니다. 

참가했더라면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을 바꿔 놓았을지도 몰랐던 항모 쇼카쿠는 산호해 해전에서 입은 손상 수리에 무려 3개월이나 걸리는 데다 산호해 해전에서 조정사 손실이 절반에 달했던 자매함 즈이카쿠는 트럭 섭에서 조종사 충원과 재정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함 기리시마와 하루나 두척의 전함이 호위함대의 주축으로 동반하였습니다. 

그 뒤를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를 포함해서 5척의 전함을 중심으로 대함대가 거리를 두고 출동하였습니다. 

사상 최대의 함대가 출동한 것이었습니다. 6월 3일 오후, 나구모 기동부대를 후속하던 주력 부대 기함 야마토에 승함 했던 연합함대 사려관 통신 감청반은 미드웨이섬 부근에서 미군이 발신하는 항모 호출의 신호를 잡았습니다. 

항모가 미드웨이 근해에 나타났다는 징조였습니다. 보그를 받은 야마모토 사령관은 즉시 앞서 가는 나구모 기동부대에 전달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선 봉쇄 상태에서 이렇게 할 수 없어서 앞서가는 나구모 부대에서도 이를 접수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전달을 포기하였습니다. 

 

항모의 통신안테나는 전함의 통신 안테나 수니 능역보다 낮아서 기동부대엣느 이를 감청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나구모 부대가 이 정보를 점수하고 경계를 했더라면 미드 에이에서 전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미군은 5월 30일 이후 미드에 기지 항공대 소속 32기의 PBY카타리나 비새 정들을 초계 임무에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6월 2일 플랫처 소장의 제17 기동부대와 스풀루언스 소장의 제16 기동부대가 미드웨이섬 북동 해역에서 합류하였습니다. 

 

7. 발견된 일본 함대

6월 3일 오후 9시 PBY 카타리나 비행정 1기가 미드웨이에서 930KM 떨어진 곳에서 일본 수송선단을 호의 하고 있던 제2 수뢰 전대를 발견하였습니다. 

일본의 미국 함대를 발견한 것보다 하루가 빠른 것이 이었습니다. 급보를 받은 미드웨이 제7 육군 항공부대 분견대 소속 B-17 9기 발진하였습니다. 

 

오후 4시경. 선단을 발견한 b-17부대는 폭격을 개시하였습니다. 

폭격 대장 월터스 위니 중령은 사령부에 자기 폭격 대가 일본 전함, 공모, 수송 선등을 공격하였고 다수 적함을 격함 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실제로는 두척의 일보 수송선이 함체 가까운 해면에 지근탄 공격을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6월 3일 21:30분 하와이 섬에서 미드웨이로 파견 도니 PBY 카카 리나 비행정 4기가 어뢰로 무장하고 뇌격 출격을 하였습니다. 

카타리나 뇌 격대는 일본 선단의 선두 선박을 발견하고 뇌격을 가했습니다. 

야간인 데다가 대공 엄호를 맡아줄 호의 함대와 잠시 격리되었던 순간이어서 야간 뇌격을 완전한 작전 성공을 하였습니다. 

두척의 수송선단 선박이 어뢰와 기총 소소의 공격을 받고 11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미드웨이에서 보내온 적 함대 발견의 보고를 받은 태평양 함대 사려 버리는 뒤따른 B-17 공격 보고에 폭격을 가한 함대는 적 주력인 기동 부대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긴급 전문이 미 기동부대에 터전 되었습니다. 

기동함대 사령관 플레처 소장은 하와이 함대 사령부의 정보 판단과 의견을 같이 하였습니다. 

 

PBY 카타리나 –걸작 비행정으로 정찰 폭격 수송등의 다목적기였다. <출처 : wikipedia>

 

8. 미 기동부대의 접근하다. 

6월 3일 저녁 미 기동함대는 일본 기동함대를 영격 할 예상 지점을 향하여 남서로 진로를 변경하였습니다. 

6월 4일 01:30 미 항모 부대의 항공대원들은 이른 아침을 먹고 후 출격 대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한 시간 후 대원들은 정렬하여 함장과 비행대장으로부터 앞으로 있을 출력에 대해 주의와 훈시를 받았습니다. 

 

04시 15분 미드웨이 기지에서 PBY 비행정이 출결 하였고 15분 후 제17 기동 함대의 항모 요크타운에서 SBD 돈트 레스 금강 하 폭격기가 정찰 임무를 받고 출결 하였습니다. 

 

정찰을 나간 SBD 폭격 대가 일본군의 수상 정찰기 1기와 교전을 했다고 보고한 시점에 나무고 기동부대는 요크타운의 서방 370KM를 향해하고 있었습니다. 

 

9. 일본 항공대의 미드 웽 공습 발진 

04시 30분에 나구모 기동부대는 미드웨이 공습대를 발진시켰습니다. 

곡 격대장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사하게 될 도모나가 조이치 대위였습니다. 공격대의 규모는 상당히 컸습니다. 

99식 함상 폭격기 (급강하 폭격기) 36기, 97식 함상 공격기 (수평 폭격기) 36기, 영식 함상전투기(제로 전투기) 36기 합계 108기였습니다. 

 

원래는 지주만 공격대와 인도향 실론 섬 공격대를 지위했던 후치다 미쓰오 중좌가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그는 맹장염이 도져 수술을 받았기에 대신 도모나가가 지휘했던 것입니다. 

일본군의 공략 부대 (곤도오 부대)가 살육 작전을 실시할 날짜를 6월 7일로 잡았기 때문에 그전에 미드웨이섬의 전투력을 섬멸할 목적으로 항고대의 공습이 행해졌던 것입니다. 

 

출격한 함재기들 외에 있을 수송 있는 미 항모 출현에 대비하여 각 항모 격 남고에는 어뢰로 무장한 함상 공격기들과 대함이나 대지 공격의 무장을 하지 않고 불시에 사황에 융통 서있게 대비하기 위한 예비기들이 있었습니다. 

 

일출 전에 공격대의 출력에 앞서 정찰기 여섯 기의 출결이 있었습니다. 제8 전대 사령관 아배 소장은 중순양함 도네의 정찰 해역을 중시하고 제일 머저 도네의 정찰기부터 발진시켰습니다. 

 

정찰기들은 모두 중순양함에서 발진한 95식 수상 정찰기나 영식 수상 정찰기들이었습니다. 

공격대를 발진시킨 나구모 기동부대는 침로를 바꾸어 함재기 수용을 위해서 미드웨이 방향으로 근접 항해를 했습니다. 

 

5시 15분 아제이 대위가 조정하는 미 해군 pby카타니라 비행정은 중 순양함 도네에서 발진한 영식 수상 정찰기를 발견하였습니다. 

 

부근 해역에 일본 함대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그는 근처 해역을 수색한 결과 대어를 낚았습니다. 

니구모 기동부대를 발 결한 것입니다. 그는 즉시 분부의 터전 했습니다. 

일 항모 1, 미드웨이 320도, 150해리 

 

일본 함대도 pby 비행정을 발견하였습니다. 

선두에 경순 양함 니가리와 뒤따르던 전함 기리시마는 비행정 발견과 동시에 연막을 살포했습니다. 

 

니구모 기동부대의 제로 전투기들이 급히 발진하여 요격했지만 pby비행정은 구름 속으로 도주해서 제로 전투기들을 따돌렸습니다. 

 

pby는 구름을 이용하여 숨바꼭질을 계속하면서 일본 함대를 미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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