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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대(大) 전쟁 최장의 싸움터 그 다섯 번째 이야기

스탈린과 레닌그라드 전투 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 레닌 그라드 전투의 5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차례

  1. 양날의 칼
  2. 티흐빈에서의 반전
  3. 지옥으로 변한 도시
  4. 생명의 길 

1. 양날의 칼

봉쇄당하기 이전에 많은 이들이 소개되었음에 여전히 레닌그라드에는 300여만의 시민과 병력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 외부의 지원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시 동쪽의 라도가 호수를 통하여 물자가 보급되고는 있었지만 수량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독일 공군의 차단 작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통한 보급로도 압도적인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어 활용이 불가능한 지경이었습니다. 

협궤 열차가 곧바로 진입할 수 있게 제작되어 운송 효율을 높인 라도가 호수 횡단 보급선. 운항 도중 독일 공군의 공습에 격침당하기도 하였다. <출처: (cc) RIA Novosti archive, image #310 / Boris Kudoyarov at Wikimedia.org> 

독일이 레닌그라드의 점령을 유보하고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모스크바 공량에 나서기로 한 이상, 상대를 최대한 춥고 배고프게 만들어 항복을 받아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켜 승리를 얻는 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전술입니다. 

더구나 포 의도니 인구가 많을수록 저항 기간을 단축시킬 가능성이 컸습니다. 

 

70년 전 보불전쟁 당시에 독일은 파리를 포의 하여 느긋하게 굴복시킨 전례가 있었습니다. 

10월 들어 라스푸타차(Rasputitsa)가 시작되면서 모스크바 점령을 위한 독일의 태풍 작전이 난관에 부딪히는 시작 하였습니다.  진흙 장군은 결국 모스크바를 구했지만 레닌그라드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스스로 진격을 멈춘 상태였기에 라스푸티차가 독일 북부 집단군에게 끼친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반면, 고립된 레닌그라드로 향한 소련의 생명선이 오히려 장애물을 만났던 것입니다. 

 

라도가 호수를 건너 레닌그라드로 보급품이 가려면 일단 내지에서 호수 남측 연안의 볼호프(volkhov)까지 소송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로 향하던 독일군을 막을 라스푸티차가 여기서는 소련의 보급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됐던 것입니다. 

아무리 소련인들에게 익숙한 자연현상이라 해도 엄청난 진흙 구덩이를 빠져나오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941년 가을의 라스푸티차는 모스크바를 구한 조력자인 동시에 레닌그라드를 고통스럽게 만든 양날의 칼입니다. 

 

 

2. 티흐빈에서의 반전

이처럼 레닌그라드 일대가 안 정화 되자. 스탈린은 10월 8일 주코프를 소환하여 모스크바 방어의 중책을 부여하였습니다. 이는 독일과 소려 모두 레닌그라드를 차후의 문제로 보기 시작하였다는 뜻입니다. 양측 합쳐 800만에 가까운 대군이 쉽없이 충돌하여도 모든 곳에서 동시에 싸우기 힘들 만큼 소련은 넓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닌그라드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전투가 끈났다는 의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레닌그라드 도심에 설치된 대공 감시장치인 청음기. 레닌그라드 일대의 전선은 정체되었지만 싸움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연일 도심을 향한 포격을 계속하였고 그러 수록 소련군의 저항 의지는 커졌습니다. 1941년 겨울 이전까지 소련군이 보여준 모습은 모든 무능의 총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전선으로 달려 나오며 저항하는 놀라운 모습음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권력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점령지에서 나치가 소련인들과 포로들에게 가한 잔학행위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면 항복할 것이라 예상했던 독일은 당황하였고 침공 4개월이 지나면서 이 전쟁에서 이기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볼호프 남부의 티흐빈에서 벌어진 전투는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독일일 볼호프와 이곳을 거쳐 오네가호 서안의 페트로자보츠크를 점령한다면 핀란드군와 직접 연결이 되면서 소련의 유일한 생명선인 라도가 호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라스푸티차가 끝난 직후인 11월 8일, 독일이 타흐빈을 점령하자 소련은 즉각 반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모스크바 방어에 혈안이었음에도 stavka(소련군 최고 사령부)가 반역죄 명목으로 수감 중인 메레츠코프에게 직할대인 제4군을 맡겨 투입하였을 만큼 중대한 위기로 인식할 것이었습니다. 한 달간의 격전 끝에 소련군은 12월 9일 티흐빈을 탕 환하였고 이를 계속 확보하려 제4군을 기반으로 볼호프 전선 군을 창설하여 독일 북부 집단군의 측면을 견제하였습니다. 

 

3. 지옥으로 변한 도시

하지만 포위망 외각에서 선전과 달리 도심의 모습은 비참하였습니다. 쉴 새 없이 계속되는 독일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말미암아 기반 시설은 파괴 도어 갔지만 이를 복구할 자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무섭고 두려웠던 것은 식량난이었습니다. 

10월이 되었을 때 레닌 그라드에는 불과 20일분의 식량만이 남아 잇었습니다. 히틀러가 레닌그라드는 가만 놔두어도 몰락할 거라 자시 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정치국원인 주다노프는 군인과 노동자들에게 1주당 빵 8온스, 나머지 시민들에게는 4온스만 배급하였을 정도로 강력히 식량을 통제하였지만 50만 명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었습니다. 

도시에 널브러진 사체를 수습하는 모습. 독일의 공격에 의한 사상자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기아와 추위에 숨져간 이들이었다. <출처: (cc) RIA Novosti archive, image #216 / Boris Kudoyarov at Wikimedia.org> 

거기에다가 12월이 되어 북극으로부터 엄청난 한파가 몰려오면서 영하 4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고 난방용 에너지가 고갈되자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많은 이들이 죽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루 사망자가 5천 명 선에 이르면서 시가지 곳곳에 시체가 쌓여 가는 모습이 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처절하게 도시를 사수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결국 아사 직전의 수많은 시민들이 사체를 먹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보안대에서 이를 단속하였지만 오로지 생존 본능에만 매달리 이들의 행위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사실 이런 참담한 상황을 신속히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극적인 치안 행위나 강력한 통제보다 식량과 연료를 즉시 공급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주간의 폭격 위험을 피해 가며 라도가 호수 위로 보급품을 가득 실은 선박이 오갔지만 공급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데 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시민들에게 추워 떨다 죽게 만든 엄청난 겨울 한파가 역설적으로 레닌그라드를 구한 생명의 밧줄이 되었습니다. 

 

4. 생명의 길

우선 독일군의 공격이 멎었습니다. 그해 겨울은 따뜻할 것이라는 기상대의 장기 예보만 믿고 전쟁을 벌인 독일은 동계 전투용 장비와 소모품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아 더 이상 싸움을 벌일 여건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모스크바와 로스토프 앞에서 진격이 좌절돼 중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에 비해 9월부터 참호를 파고 포위전을 편 쳤던 북부 집단군의 여건이 상대적으로 나았지만 얼어붙은 대포에서 포탄이 발사되지 않기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의 겨울 혹한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결빙된 라도가 호수가 그동안 볼호프 등에서 레닌그라드로 이어지는 뱃길을 막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좋은 수송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1941년 겨울은 40년 만의 혹한이었다. 동계 피복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한 일선의 독일군들은 더 이상 전투를 벌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11월 20일 이후부터는 구호물자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꽁꽁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 위를 달리기 시작하였고 돌아올 때는 50만의 시민들과 부상당한 4만여 명의 병사들을 싣고 지옥의 도시를 빠져나왔습니다. 

 

물론 이러 수송이 마냥 쉬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야간에도 움직인다 하더라고 독일 공군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었고 얼음이 깨지면서 호수 아래로 차량이 가라앉은 경우도 비일비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미 배로 보급품을 수송할 때도 있었던 위험이었습니다. 이처럼 레닌그라드의 구언 행렬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고 도시는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던 수송차량의 기사들은 죽음의 길이라 불렀지만, 이듬해 4월 24일까지 152일간 열려 있던 라도가 호수의 에 고속도로는 '생명의 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생 명선을 통하여 배급량이 다시 늘리기 시작하였고 시 미들의 사기도 서서히 올라갔습니다. 당연히 소련군의 방어선도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반면 예상을 빗나간 레닌그라드의 회생에 히틀러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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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전투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린그라드 시리즈 중 4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차례 

  1. 레닌그라드 영웅 주코프의 등장
  2. 당근 대신 채찍을 주다. 
  3. 독일 히틀러의 변심
  4. 한 번에 먹을 수 없는 먹이 

 

1. 레닌 그 가드 영웅 주코프의 등장

소련을 승리로 이끈 상승장군 게오르기 주코프이미지

레닌그라드 방어를 책임진 북서관구(Northwestern Direction) 사령관 보로실로프는 군사적 능력이 변변찮은 인물이었습니다. 군과 민간을 독려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전선까지 달려 나가 진두지휘하는 용맹함을 발휘하기도 하였지만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예하 북부전선 군 사령관 포포프와 북서 전선 군 사령관 쿠즈네초프가 실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거시적으로 지휘 통솔하기에는 그릇이나 능력이 너무 작았습니다. 

 

키예프 전투 종결 후, 전선을 재정비한 독일군이 전 전선에서 진격을 재개하였고 독일 북부 집단군도 한걸음 더 레닌 그라드에 가까워졌습니다. 

 

신인민위원회는 노약자들을 소련의 내지로 미리 피난시켰으나 이를 능가하는 더 많은 피난민들이 독일군을 피해 레닌그라드로 몰려들었습니다.

포위당하기 직전인 1941년 8월, 기관총 탄띠 제작 교육을 받고 있는 레닌그라드 시민들. 여유롭게 연출된 선전사진이지만, 실제로 남자들은 전선에 차출되었고 후방 지원은 여성들이 담당하였다. <출처: 구 소련 선전사진> 

 

보로실로프는 시민과 피난민 중에 차출한 병력을 북서관구에 긴급 편성하여 방어선에 배치했으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독일이 키예프 공략을 매달려 있는 동안 강화된 방어선이 독일군의 재개된 진격을 틀어막고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팅수 있을지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독소전쟁 개전 이후 지금까지 소련군의 큰 패전 대부분이 전선 중앙과 남부 일대에서 벌어져 북서관구 지역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편이지만 전투 의지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독일 공군의 사정권에 들어온 레닌그라드 도심은 연일 폭격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9월 8일 실리 셀 부르크가 돌일에게 점령당하자 지상으로 레닌 그라드와 연결되는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습니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와 사석에서 농과 욕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이제 친한 이유만으로 더 이상 부서 관구 사령관으로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키예프 방어전을 놓고 대립하다가 좌천시킨 전 총 참모장 주 코프를 소환하여 9월 13일 레닌그라드로 보냈습니다. 

 

2. 당근 대산 채찍을 주다. 

주코프가 레닌그라드 현지에 부임하였을 때 소련군의 사기는 망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가 시야에 보이는 외각 10여 길로 미터까지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쏘는 ㅍ포탄이 시내에 떨어지고 이었습니다. 포위된 상태에서 결사항전을 펼치려면 300여만의 시민들과 100여만의 병력이 먹을 실량이 확보되어야 했는데 그가 부임하기 하루 전에 대규모 식량 저장소가 폭격으로 전소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동안 독일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어 지난 막상 도심이 불타오르자 레닌그라드는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밖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보니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보려는 시민들의 원초적 이 기시미 팽배해지면서 곳곳에서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도심의 모습이 급속도로 흉흉하게 바뀌자 외각에 배치된 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습니다. 

이상태에서 독일군을 저지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주코프는 바닥까지 떨어진 국기를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했습니다. 그도 방어를 자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풀에 꺾여 싸워보지도 않고 순순히 도시를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패배의식에 절어 있던 휘하 장병들을 가혹하다 싶을 만큼 들들 볶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반항하는 이들은 즉각 총살하는 강경책까지 불사하였습니다. 

더불어 민간에 대한 강압적인 통제를 펼침으로써 도심의 치안도 서서히 안정시켜 나갔습니다. 

 

그는 참호를 더욱더 깊게 팠고 도심 요소요소에 대공포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선을 강화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주코프의 굳은 결심은 도시를 수호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렇게 형성돼 레닌 그라드의 단단한 방어망이 앞으로 900여 일 가까이 계속  이상태를 유지하게 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레닌그라드의 운명은 바로 이때 내려진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3. 독일 히틀러의 변심

주코프가 레닌그라드에 도착하기 하루 진인 9월 12일, 히틀러는 북부 집단군 예하의 제4기갑 집단을 모스크바 골량에 투입하라고 OKH(독일 육군 쵝사려부)에 명하였습니다. 이는 전쟁 전부터 레닌 그 가드를 우선 목표로 여기고, 불과 한단 전까지만 해도 공격을 독려하기 위해 중부 집단군에서 제39장갑 군단을 차출하여 북부 집단군을 지원하였던 히틀러의 행태를 고려한다면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모스크바를 먼저 차지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키예프 공력이 끝나자. 히틀러는 갑자기 변심하여 OKH가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입안한 태풍 작전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연이은 격전으로 소모가 컸던 중부 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레닌그라드 목전까지 다가갔던 제4 기갑 집단을 빼버리는 파 겨을 단행하였습니다. 기상천외한 총통의 지시에 사령관 레프를 비롯한 사 북부 집단군 전체가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제4 기갑 집단은 말 그대로 북부 집단군의 돌파를 담당하던 유일한 기동 부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차출하고 더구나 다른 부대를 충원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레닌그라드 점령을 유보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히틀러가 그동안 군부의 요청에도 불고하고 우선순위에서 배제시켜 놓았던 모스크바에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어쨌든 9월 들어 그는 갑자기 이곳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히틀러는 키예프 전투의 결과에 고무되어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전쟁이 거기서 탈것으로 판단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300여만 명의 소련군이 지나 두 달 동안 격파되었고, 소련군의 마지막 전력이라 추정되는 대부분의 예비대들이 모스크바 방어에 투이 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었기에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머 뭐한 피를 입고도 소련의 저항의 지는 꺾어지지 않았습니다. 

 

4. 한 번에 먹을 수 없는 먹이 

어떻게 되었든 레닌 그라드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제4기갑 집단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방향을 틀어 모스크바를 향해 남진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북부 집단군이 레닌그라드 골량을 중단한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9월 17일, 리프는 독일군 6개 사단을 앞세워 레닌그라드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지만 소련의 방어선이 강화된 반면 독일군의 돌파 능력은 현저히 저하되어 별다른 선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레닌그라드의 북쪽을 차단한 핀란드군이 진격의 멈추었습니다. 그들은 지난겨울 전쟁에서 강탈당한 카레리 야를 회복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황한 독일은 OKW(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 작적 부장 요들을 급파하여 레닌그라드 협공을 설득하였으나 핀란드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결국 레닌그라드 진입이 만만치 않자 독일 북부 집단군은 9월 25일부터 진격을 멈추고 포위전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북부 집단군의 예하 부대를 차출하여 모스크바 공략에 투입할 만큼 독일군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라는 두 개의 커다란 먹이를 동시에 먹을 능력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바바로사 계획 수립 당시에는 3개 병단이 세 곳의 전략 목표를 동시에 점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독일은 불과 석 달 만에 그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소련은 광활한 땅이었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저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저만 해도 직접 전선까지 찾아와 레닌그라드 공략이 늦어진다고 닦달하던 히틀러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독일이 진격을 멈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히틀러는 이상태로 가만히 있기만 해도 포위된 레닌그라드의 소련군이 항복하고 나올 것이라 예상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모스크바를 중시하였던 독일 군부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이런 반응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주코프는 이런 상황을 몰랐지만 소련에게 이는 엄청난 호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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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가드 전투 이미지 출처:영화레닌그라드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즈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차례

  1. 모두가 원했던 도시 레닌그라드
  2. 소련 혁명상징 도시
  3. 독일의 당연한목표
  4.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

1. 모두가 원했던 도시 레닌그라드 

1940년 7월 초, 프랑스를 평정한 직후,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Oberkommando des Heeres)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독일군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차출하여 이 시 조직으 설치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하달된 임무는 소련 침공에 관한 기초적 계회를 수립하는 것이 이었습니다. 

아직 히틀러의 정식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명령이 내려올 것이 분명하였기에 미리미리 대비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8월 8일, 이곳에 파견 나온 제18군 참모장 마르크스(Erich Marcks)는 러시아의 빈약한 도로망을 염두에 두고 수립한 작전 초안을 상부에 보고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후 바바로사 계획(Operation Barbarbossa)으로 알력진 소련 침공 전락의 최초 뼈대가 됩니다. 

 

마르크스는 주공을 크게 둘로 나누어 모스크바와 키예프로 신속히 진격함과 동시에 소련군의 주의를 분사시킬 목적으로 조공을 이도시로 향하도록 작전을 수립합니다. 

 

이를 검토한 참모장 항더(Franz Halder)는 키예프보다 정치적 상징성을 훨씬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먼전 점령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타당하다며, 계획을 수정하여 12월 5일 히틀러에게 보고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키예프와 레닌그라드를 우선 점령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격국 전쟁 지휘부의 갑론을박 끝에 침고군 주력을 셋으로 나누어 모스크바, 키예프 그리고 이도시를 일거에 점령하도록 수정한 최종 침고 계획이 채택되었습니다. 

 

실전이 오고 간 모스크바나 키예프와 달리, 이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당연한 목표라고 보았던 레닌그라드였습니다. 

 

독일이 그렇게 생각하였던 만큼 소련 또한 이곳을 지키고자 했으며 레닌그라드는 엄청난 혈전의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도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에서 최장이라 할 수 있는 900여 일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이전 투에 이름이 바로 레닌그다드 포위전입니다. 

 

레닌그다드 전투관련 해 히틀러와 참모들의 작전회의 이미지

 

2. 소련 혁명 상징도시

1703년 제정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원래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였지만 스웨덴이 강점하고 있던 네바강 하구의 습지대를 탈환하게 됩니다. 그는 발트해 연안의 이곳을 유럽으로 향한 창으로 삼기로 하고 새로운 도시의 건설에 착수하게 됩니다.  자신에 이름을 따서 상트 레테르 부르크로 도시의 이름을 정한 그는 1712년 이곳을 수도로 없겼을 정도로 애착과 기대가 컸습니다. 

 

이렇게 시작돼 이도시는 이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러시아 제2의 대도시가 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위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흔히 러시아의 심장으로 블리는 모스바는 정치적 상징성이 큰 반면, 해상을 통한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트 페테르브르크는 학술, 문화, 예술 분야를 선도하여 러시아의 머리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소련을 태동시킨 혁명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외부 세계의 흐름을 러시아에서 가장 먼저 접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절대 왕정에 반발한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을 만큼 반골 기질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공 산형명이 시작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905년 이른바'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발한 이후 민심이 계속 흉흉해지자 1914년 도시의 이름을 좀 더 러시아의 친화적인 페트로그라드로 개칭하였지만 이미 권력에 등을 돌린 대중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제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이 도시에서 3월 혁명, 11월 혁명이 연이어 버리시면 제정 러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 아인 소련이 탄 행하였습니다.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다시 이름을 바뀐 점만 보더라도 소련 공산 쥐의 역사에서 이도시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레닌그라드는 소련 혁명의 산징과도 같은 도시였습니다. 

 

 

 

 

3. 독일의 당연한 목표

상징성이 먹고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대도시였지만 독일이 레닌그라드를 점령해야 할 당위성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먼저 표트르 대제가 이곳에 도시를 만들었던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상 독일이 레린그라드를 점령하면 소련은 발트해를 통해 밖으로 나갈 통로가 차단되어 버립니다.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상 독일인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면 소련은 발트해를 통해 밖으로 나갈 톨로가 차단되어 버리고 맙니다. 

 

소련은 거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지만 의외로 해상 출입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 , 레린그다드는 구중 얼마 안 되는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반면 독일이 이곳을 차지하면 소련 내륙으로 칙 나갈 수 있는 중요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독일군의 핵심 브레인들이 침공 계획을 짜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 보급로였습니다. 

유럽에 비해 몹시 적은 철도와 몇 개 되지도 않은 열악한 도로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홍이어서 소련 내부에서 주공의 지향 방향은 극히 제한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독일군은 갈수록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이는 전쟁의 패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레니 그 라드가 확보는 독일 본토에서 소련의 중심으로 향하는 거대한 해상 보급로의 출입구가 개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곳을 교두보 삼아 독일이 최종 진출 목표로 설정한 A-A선(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의 북쪽 끝인 아르한겔스크는 반쪽 통로이지만 이곳이 막히면 소련이 외부와 연력 될 수 있는 바닷길은 극동과 흑해만 남게 됩니다. 

 

레닌크가드는 이처럼 혁명이니 역사성이니 하는 추상적 명분보다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독일에게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반대로 소련에게는 어떠한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사수해야 할 싸움터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외부 연결이 언제든 가능한 해안도시여서 대륙 한가운데 위치한 모스크바와 달리 소련의 전통적으로 구사해온 청야 작전이 방어에 그다지 효과가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4.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

이도시가 아무리 해안가 도시라도 해군력이 약한 독일이 바다를 통해 이곳을 점령할 수는 없었습니다. 

소련도 해군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독일 또한 이를 단숨에 격파하고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킬 만한 역량은 없었습니다. 사실 주변에 40여만의 병력이 지키고 있는 350만 인구의 대도시를 해군으로만 순식간에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타 전선과의 연결을 고려했을 때 이곳만 먼저 차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육상으로 900km를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여야 하는데,  사실 소련과의 전쟁을 한창 계획 중인 독일에게 이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설령 레닌그라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소련을 군사적으로 굴 북 시키려면 그 이상은 진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마치 깔때기 입구처럼 진격하면 할수록 넓어지는 소련의 지리적 구조에 있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전선이 커진다는 의미인데 최종 목표로 설정한 A-A선까지 가면 출발선 다시 보다 약 2배 정도 전신이 넓어지게 됩니다. 전선 남부는 추측 국에 가담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도움을 받아 후속 보급에 그다지 문제가 없었지만 레닌그라드로 다가가야 할 북부는 일단 진력 방향부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구조상 동쪽으로만 직진하면 되는 모스크바, 키예프와 달리 레닌그다는 발트해 연안을 따라 복동진 해야 했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관련지도 이미지

그것은 독일의 진격이 길어질수록 우측면이 그대로 노출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살실 소련이 1940년 6월 14일, 3국을 침공하여 합병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일 발트 3국이 독일 편에 붙는다면 레닌그라드는 바로 밑이 훤하게 열리는 샘입니다. 

풀란드를 분할할 때 독일과 사전 밀양을 맺고 취한 군사 행동이었지만, 소련의 발트 3국 점령은 레닌그라드 방어를 위한 사전조치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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