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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투기 이미지

2021.09.08 - [전쟁사] -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오늘은 지난 글에 에어 레닌그라드 전투 3번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총 시리즈 6편 정도 예정되어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독일 계획과 현실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은 전 전선에서 놀라운 속도의 진격을 선보였습니다. 무론 그 와중에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료 고전을 겪은 곳도 이부 있었지만, 마치 찻잔 속의 태 품처럼 대세를 좌우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스크 전투, 스몰 레 수프 전투처럼 인상적인 대승이 주로 독일 중부 집단군 관할에서 연이어 벌이 지다 보니 많이 이들이 전선 중앙부를 주목하였습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최근의 역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전체 전선에서 경쟁하듯이 놀라운 진격을 선보였던 1941년 8월 이전에 바바로사 계획에서 명시한 진격 목표를 달성한 부대는 북부 집단군 바 까에 없었습니다. 특히 노브고로드(Novgoorod)를 향해 진군하던 예하 제56장갑 군단은 개전 4일 만에 무려 320km로 전진하는 놀라운 기록을 선보였습니다. 

 

이처럼 연이어 엄청난 대승을 거둔 전쟁 초기의 겉모습과 달리 독일은 생각보다 어렵게 앞으로 나고 있었습니다. 

이점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데 우선 바바로사 계획에서 예정한 시간이 너무 차이트 하였음을 뜻합니다. 

연거푸 승리하고는 있었지만 이를 달서 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쟁 개시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선두의 기갑부대와 이들을 후속 지원할 보병부대 사에 간극이 생기면서 갈등이 벌어졌고, 그만큼 보급을 추진하는데도 애를 먹었습니다. 

한마디로 소련을 너무 우습게 생산 만용을 부렸던 것입니다. 

독일 북부집단군은 7월 9일이 되었을 때 A선까지 진격하였다. 독일 침공군 중 가장 빠른 속도였는데 사실 이는 바바로사 계획에 명시된 목표대로였다. 결론적으로 독일은 엄청난 대승을 연이어 거두고 있었지만 진격 목표가 너무 과하였다. <출처: (cc) JHB at English Wikipedia at Wikimedia.org> 

부 집단군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서 레닌그라드로 향하던 제4 기갑 집단의 쌍두마차인 제41장갑 군단장 라인하르트와 제56장갑 군단장 만슈타인은 레닌그라드의 계속적인 진군을 주장하였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빨리 전진하다 보니 병사들도 지쳤고 후속해야 할 보급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또한 후방에서 고립된 채 저항하는 소련군도 골칫거리였습니다. 

 

2. 불쌍한 병사들의 부대

7월 중순이 되자 독일 중부 집단군이 도심에 머물며 저항하는 30여만 소련군을 스몰렌스크 일대에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 독일이 전력을 이 일대로 집중시키자 중부 지단 군과 북부 집단군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생기기 시장하였습니다. OKH(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이상태에서 북부 집단군이 홀로 진격을 계속하면 우측 면이 길게 노출될 것이라 판단하여 정지를 명하였고 사령관 레프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라트비아의 리가(Riga)에 입성하여 해방군으로 환영받는 독일군. 이처럼 독일의 초기 진격은 순조로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급 등의 문제로 애를 먹게 된다

 

이처럼 노도와 같았던 독일의 진경이 레닌그라드에서 100km 미터 전방인 일멘(llmen)호 근처에서 멈추고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소련의 움직이도 분주해졌습니다. 

이틈을 놓치지 않고 레닌 고다드 전면에 깊은 참호가 구축되면서 도시 전체가 요새화 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소련군의 반격을 개시하면서 OKH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덧 했지만 아직 소련군의 역량은 독인 군을 넘기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7월 27일 북부 집단군 사령부를 직접 방문한 히틀러가 진경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채근하고 레닌그라드를 즉각 점령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도심에 위치한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전승 행사를 열고 도시명을 아돌프스 브르크로 바꾸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만큼, 이때만 해도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레닌그라드를 우선 목표로 생각하였습니다. 

사령관 레프는 최선을 다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러려면 좀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전선의 모든 곳에서 소모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를 제때 보충하기 힘들 만큼 독일군의 여건은 좋지 못하였습니다. 

비단 북부 집단군만이 더 많은 예비대와 지원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이들은 가장 많은 곤란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관할 섹터가 작다는 이유로 규모도 작았고 이후 전쟁 내내 지원 순위에서도 밀렸습니다. 

그래서 에든버러 대학의 에릭슨 같든 이는 북부 집단군을 '불쌍한 병사들의 부대'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3. 독일 VS소련 양측의 대응

 

이처럼 전잰 전체를 살표 볼 때 주로 조연 역할을 담당하던 북부 집단군에게 그나마 제대로 된 지원이 이루어진 때가 바로 히틀러의 사령부 방문 직후였습니다. 

8월 5일 모스크바 초입의 스몰렌스크에서 벌어진 전투가 종결되자 중부 집단군 소소의 제39 장갑 군단을 레닌그라드 점령에 투입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총통의 이러한 결정을 중부 집단군이 반겼을 리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양 집단군 사이로 벌어졌던 전선이 다시 공고하게 연결되면서 측면의 위험이 제거되고 더불어 장갑 군단의 지원이 더해지자 독일 북부 집단군은 소련을 격파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진격이 잠시 지체된 약 보름의 시간 동안 소련의 방어막도 한층 강화된 상태였습니다. 비록 밀려나고는  있었지만 그동안 소련 북서 전선 군은 나름대로 선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700여 대의 전차를 모두 소모해 버린 라 세이니 전투처럼 격렬한 저항도 있었지만 체계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손실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을 내준 대신 확보한 전력은 이후 레닌 그라드 방위에 있어 커다란 자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근정적인 결과는 스탈린의 시야가 이곳을 벗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만 정신이 파려 있던 스탈린이 해당 지역의 방위 관한 전권을 최측근이 전 국방성 모로시 로프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소련 부서 전선 군 사령관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작전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패배의 책임을 지고 8월 초에 해임되었지만 종전 후인 1948년까지 주요 부대 지휘권을 연임하였을 만큼 큰 처벌은 다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민스크 전투에서 대패한 서부전선군 사령과 파블로프가 스탈린의 분노를 사서 총살당한 것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4. 희생 대신 얻은 것

그런데 바로 이때 레닌그라드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8월 초 전선 남부의 키예프 일대에 80여만의 소련군이 고립되자 독일군이 포의 섬 면전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물에 걸린 먹잇감이 워낙 크다 보니 독일 남부 집단군이 단독으로 작적을 펼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중부 집단군 예하의 제2기갑 집단과 제2군이 진격 방향을 90도 우회하여 키예프를 향해 400여 km를 남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군부의 후퇴 요구를 스탈린이 거부하고 사수를 선언하면서 소련군이 스스로 적진에서 고립을 자초한 형국이었지만, 적을 서둘러 처단하고 싶었던 히틀러의 적극적인 맞대응으로 인하여 전선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모스크바로 직지 하 느려던 중부 집단군은 반발하였지만 독소 전쟁 이전부터 키예프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총통의 명령에 따라야 했습니다. 

 

결국 독일군이 대거 재배치에 들어가면서 키예프 일대를 제외한 전선 전체가 진격을 멈춰야 했습니다. 

이처럼 전선이 정체된 틈을 타서 레닌그라드 남쪽에는 구가 강에서 네바 강에 이르는 외각 방어선과 그 안쪽의 페테 로프에서 콜트 스키를 연결하는 2중 방어선이 완공되었습니다. 더불어 북쪽에는 겨울 전쟁으로 국경이 이르는 거대한 방어선이 구축돼 상태였습니다. 

 

70여만의 소련군이 이거에 몰락한 키예프 전투는 결론적으로 레닌그라드는 물론 이거니와 소련의 생존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독일이 전진을 멈추고 키예프 점령에만 몰입되어 있는 동안 소련 여타 지역의 방어선은 깊게 파 여고 강화되었습니다. 러시아 제국 이래로 항상 그래 왔듯이 소련은 거대한 구토와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용기를 발판 삼아 방어에 필요한 천금 같은 귀중한 시간을 얻었습니다. 

70여만의 소련군이 일거에 몰락한 키예프 전투는 결론적으로 레닌그라드는 물론이거니와 소련의 생존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독일이 전진을 멈추고 키예프 점령에만 몰입되어 있는 동안 소련 여타 지역의 방어선은 깊게 파이고 강화되었다. 러시아 제국 이래로 항상 그래 왔듯이 소련은 거대한 국토와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용기를 발판 삼아 방어에 필요한 천금같이 귀중한 시간을 얻었다.

 

참고문헌: 전쟁사 남도현

2021.09.08 - [전쟁사] -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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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전투 (2)-대전쟁 최장의 싸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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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전투 두번째이야기 이미지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레닌그라드 전투 2번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차례

  1.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2.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3. 소련의 반격(대응)
  4. 쾌속의 진격

1. 대국과의 전쟁에 시작

독일은 얼마나 빨리 소련의 기를 꺾어버리느냐에 독소전쟁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초전에 소련의 저항 의지를 신속히 무터 뜨려 항복을 받아내는 쪽을 택했던 것이었습니다. 

 

1년 전의 프랑스가 바로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프랑스는 단지 국토의 15퍼센트만 점령당하고 150만의 대군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7주 만에 항복했습니다. 

 

독일은 우선 진출 목표는 소련 국토의 20% 정도까지만 이르면 소련인 항복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구와 결제력의 70% 정도가 몰려 있는 곳이라 독일이 생각이 결코 잘못된 것이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바로사 계획은 예정 진출선까지 신속히 진출 함과 동시에 초반에 소련군 주력을 섬멸하면 충분히 완수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를 위해 독일은 침공군을 거대한 3개 병단으로 나누어 독립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독일은 주공이 정해지면 여타 병단이 조공이나 견제의 역할을 당 담하였지만 소련 침 곶전에서는 모두 주공의 역할을 담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소련이 단지 한 곳에 돌파구만 열어서는 점령을 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란 뜻입니다. 역설적으로 독일의 배후에는 절정 한 예비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독소전쟁발발후 레닌그라드봉쇄당시 이상대성당 건너편 독일 진지

 

이때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로 예정되었던 병단은 레프 원수가 지휘하는 북부 집단군이었습니다. 

예하 부대중 창을 담당하는 제4 기갑 집단군이 전선 가운데에 돌파구를 열고 진격하면 좌우에서 제18, 16군이 병행하여 돌격할 예정이었습니다. 

 

예하 부대 중 창을 담당하는 제4 기갑 집단군이 전선 가운데에 돌파구를 열고 진격하면 좌우에서 제18, 16군이 병행하여 돌격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진격로를 제1항 공군이 하늘에서 엄중히 호의 할 예정이었고 3개 집단군 중 유일하게 발트 해로 진입할 독일 해군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 북극에 저승사자 핀란드

북부 집단군의 우선 목표인 레닌 그 아드를 점령하려면 발트해 지역을 거쳐 북진하여야 하는데, 진격 거리로만 따지면 우측의 중부 집단군보다 멀었습니다. 

전면의 관할 섹터가 작지만 문제는 진격할수록 우측면에 노출되는 부의가 커진다는 점이었습니다. 

가잔 좋은 방법은 최대한 빨리 내달려 측면으로 등장할지 모를 소련군이 레린그라드 방어에만 몰려들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력과 예비대가 부 졸한 것은 고민 잉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북부 집단군에게 함께 보조를 맞춰서 소련군을 압박해준 강력한 동맹국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북극의 저승사자라 불리우는 핀란드였습니다. 

독소전쟁 단시에 항상 병력이 부족하였던 독일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축국에 가담한 여러 중소 국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는데 핀란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전투력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핀란든가 추축 국에 가담한 것은 독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소련이 미워서였습니다. 

핀란드에게 소련은 영토의 10%를 빼앗아 간 원수였습니다. 

1939년 11월부터 이듬해 봄 까지 4개월간 이어진 이름바 겨울전쟁(Winter War)의 결과였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의 물리적인 피해 규모는 승리한 소련 쪽이 훨씬 컸습니다. 

 

소련은 핀란드 성인 남서의 절반 정도에 해당되는 병력을 동원하였음에도 핀란드의 유격 전술에 말려 핀란드군의 5배가 넘는 처참한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독소전쟁을 고려하던 히틀러에게 두 가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먼저 소련군을 규모 또한 큰 허야 한 군대로 얕보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전투에 능한 핀란드를 독일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독일과 핀란드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약 40여만의 핀란드군이 소련 침공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를 독소전쟁과 분리하여 계속 전쟁이라고 합니다. 

 

 

 

3. 소련의 대응

독일 북부 집단군을 맞상대할 소련군은 34개 사단으로 구성된 북서 전선 군이었습니다. 

이들은 원래 소련의 후방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사이를 담당하던 2선 급 부대였는데, 1년 전 발트 3국을 기습 점령하면서 서독으로 전진 배치된 상태였습니다. 

 

이 때문에 남쪽으로 독일의 동프로이센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타 전선 군에 비해 규모가 작아 그다지 전투력이 강하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배치를 한 이유는 우선 접촉 면적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 그라드에 이르는 소련 레닌그라드 주 일대는 페이푸스호를 비롯한 많은 장애물로 인하여, 독소전쟁의 여탸전선처럼 대규모 부대가 엉켜서 싸우기가 구조적으로 곤란 지형입니다. 

바르바로사작전계획지도 이미지 출처: 국방일보

결론적으로 이일 대는 독서 전쟁 내내 치열하였지만 겉으로는 가장 정적인 전선이 되었습니다. 

사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3년 가까이 계속될 수 있었던 유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여타 전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뒤에 북부 전선 군이 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지역 내의 전체적인 전력은 소련이 우세해 보였지만 이들의 위치도 애매모호하였습니다. 

핀란드가 존재 때문이었는데, 소련이 핀란드의 추축국 가담을 눈치챘다는 증거는 없지만 설령 독일과 핀란드가 한 배를 타지 않았더라도 미리 대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현제 최전선이 되어 버린 발트 3국 민심이 바 소적이라는 점도 부담이었습니다. 강제로 점령하여 합병한 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들이 소련 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독일이 이곳으로 진격하여 온다면 소련군의 입지에서는 적진 한가운데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화이었습니다. 해당 지역에서 징집한 병력을 북서 전선 군에 배치하였지만 소수였고 이들이 소련을 위해 열심히 싸워 줄지도 미지수였습니다. 

 

 

4. 쾌속 진격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남북으로 2,000km에 이르는 전 전선에서 소련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맹렬한 폭격과 포격 직후 전차들이 쇄도하여 들어갔습니다. 소련 병사들이 정신을 차려 앞을 보면 이미 독일군은 자신 들을 지나쳐 등 뒤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저항하다 산화하거나 얌전히 항복하는 것밖에 없었으며 소련의 공군도 1,200 여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미쳐 날아보지도 못하고 개전 첫날 지상에서 격파당하며 참사의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불과 35세 소련 해군 총사령관에 오른 쿠즈네초프가 개전 전장 전선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하여 내린 비상 경계력 덕분에 해군만이 간신히 참사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게 살린 소련 해군의 전력도 전선의 상황을 호전시키는 역할을 단 담하기엔 미약한 수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독소 전쟁 개전 첫날의 모음을 요약하자면 독일의 완벽한 대승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북부 집단군도 1차 목표인 레닌그라드로 향하여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선봉은 동 프로 센 일대에 시동을 켜놓고 대기하던 제4기갑 집잔 소고의 전차들이었습니다. 

3일 후 인 6월 25일 핀란드군이 북극의 초입인 폐차모에서 남쪽의 비푸리 이르는 1,000km의 국경 전역에서 진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덕분에 여차하면 남서쪽으로 전개할 수 도 있었던 소련 북부전선군이 이곳에만 집중을 해아 했습니다. 

소련 부서 전선 군은 호수, 강 저지대 습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지연전을 펼쳤습니다. 

라 세이니에서 한대의 kv-2 전차가 돌일 제6 기갑사단의 진격을 하루 동안 막아내는 놀라운 선선을 펼 지치고 했지만 전반적으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7월 7일 되었을 때에는 독일군 서두 부대가 소련군 12개 사단을 격파하고 500여 km를 진격하여 페이푸스 호 남단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면서 이제 레닌그라드까지는 200여 km가 남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대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3편을 기대해 주시고 

1편을 읽으셨다면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rokmc76.tistory.com/57

 

독소전쟁/2차세계대전 -레닌그라드 전투

안녕하세요.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오늘은 2차세계대전 전쟁사 중 독일과 소련에 전쟁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같도록 하겠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 에피소드가 많아서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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