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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공수 작전

상륙작전의 최종 목표는 내륙으로 진공 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의 집중이 필요한 교두보의 확보입니다.

 

다음 단계는 내륙으로의 진격이고 이 과정에서 경계할 것은 교두보 확보를 거부하는 적의 반격이며 교두보 확보 단계에서는 이런 적의 반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적의 반격을 차단하기 위해서 중요 접근로와 교량 등을 선제공격을 해서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차

  1. 교두보 확보 단계에서 적의 반격 차단을 위해 공수작전을 실시 
  2. 미군의 공수 작전
  3. 미군,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급조 부대를 만들어 전투
  4. 영국·캐나다군의 공수 작전.
  5. 영국·캐나다군, 독일의 맹렬한 반격을 물리쳐

1.교두보 확보 단계에서 적의 반격 차단 위해 공수작전을 실시

노르망디에서는 특히 적이 측면 공격이 우려되는 교두보의 동쪽과 서쪽의 차단이 절실했습니다. 결과 노르망디 상륙 개시 전에 주요 거점을 사전에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공수 투하 작전이 실시됩니다.

 

공수 작전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자유 프랑스군등 4개국의 공수 부대들에 의해서 행하여졌습니다. 미군 82 공정 사단과 101 공정 사단은 유타 해안의 서쪽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 6 공정 사단은 유타 해변의 서쪽 사단의 목표가 주어졌다. 영국군에 배속된 530 자유 프랑스 낙하산 부대는 브리타니 지역의 목표가 할당되었습니다.

공수작전을 하기위한 병사들의 모습(출처: 미드 밴드오브 브라더스)

노르망디에서는 특히 적이 측면 공격이 우려되는 교두보의 동쪽과 서쪽의 차단이 절실했습니다. 결과 노르망디 상륙개시 전에 주요 거점을 사전에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공수 투하 작전이 실시됩니다. 공수 작전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자유 프랑스군 등 4개국의 공수 부대들에 의해서 행하여졌습니다. 미군 82 공정 사단과 101 공정 사단은 유타 해안의 서쪽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 6 공정 사단은 유타 해변의 서쪽 사단의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영국군에 배속된 530 자유 프랑스 낙하산 부대는 브리타니 지역의 목표가 할당되었습니다.

 


2.미군의 공수 작전

미국의 82공수 사단과 101 공수 사단은 총 13, 000명이었습니니다. 이 병력은 야간에 투하되어 서쪽에서 노르망디로 접근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간 공수 작전이라는 생소한 전술은 숱한 문제점을 야기했으며 목표를 달성함에 미흡한 점이 많았었고 야간 공수 작전은 전쟁 중에는 다시는 시도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45%나 되는 병력이 목표 지점에 낙하하지 못하고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서 병력 집중이 불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이 병력의 분산 투하는 연이어 날아올 C-47 수송기의 야간 비행을 유도할 레베카/유레카 시스템이라는 전자 비콘 발신 장치가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에서 비롯된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C-47수송기 2차세계대전시 사용되던 수송기 이미지

노르망디 공수 작전의 첫 개시는 6월 6일이 시작되는 새벽 00:48에서 01:48 사이에 101 공수사단에 의해서 감행되었습니다. 이어서 01:51에서 02:42사이 82 공수 사단이 투하되었습니다. 두 사단의 공수 작전에 무려 400기의 C-47 수송기가 동원되었습니다. 간격을 두고 새벽 직전에 글라이더들이 대전차포와 양 사단의 추가 지원 병력들이 투하되었습니다. 공수 작전은 상륙 작전이 있던 6월6일 저녁 무렵에 82사단의 포 24문이 글라이더로 공수되었습니다,

그다음 날인 6월 7일에도 325 글라이더 보병 연대가 82 사단에 증파되었고 두 번의 낙하산에 의한 보급품 투하가 있었지만 이 날의 투하는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대규모 공수 작전의 효율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24시간이 지났지만 투하된 82 공수 사단 병력 중 2,000명과 101 공수 사단의 2,500명만이 지휘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광활한 지역에 되는대로 뿌려진 병력의 대다수는 아직도 부대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3. 미군,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급조 부대를 만들어 전투

 

그러나 공수 작전의 실패는 생각지도 않은 긍정적인 결과를 부수적으로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너무 넓은 지역에 뿌려진 병력은 독일군으로 하여금 병력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작은 부대로 흩어지는 결과를 낳아 상륙작전 부대가 집중 돌파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취약한 미군 상륙 부대의 남쪽 측면을 보호하게 하는 전과를 얻게 하였습니다.

분산 낙오 된 공수 부대원은 흩어질 대로 흩어져 헤매다가 다른 부대원을 만나면 서로 급조 전투 부대를 만들어 그중 최상 계급자인 부사관이나 초급 장교들이 지휘를 하며 주력 본대를 찾아 돌아왔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82 사단은 6일 새벽 프랑스의 작은 도시(Sainte-Mere-Eglise)를 점령하였습니다. 이 도시는 노르망디 작전에서 최초로 해방된 프랑스 도시였습니다.


4.영국·캐나다군의 공수 작전.

노르망디의 최초 공수 투하는 6일이 시작되는 자정이 막 지난 6일 00:16, 캉(Caen) 운하와 오른(Orne) 강에 걸린 다리를 점령을 목적으로 영국 6 공수 사단의 글라이더 수송 공수 부대가 착륙함으로써 개시되었습니다. 이 다리들은 상륙 해안에서 단지 7km 떨어진 곳에 전략적 위치에 위에 있었습니다. 독일군이 반격하기 위해서는 이 두 교량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동쪽으로 진격하는 연합군 입장에서도 반드시 건너야 하는 요충 지중의 요충지였습니다.

 

영국군 6 공수 사단의 목표는 세 개였습니다. 이 교량들을 점령하고 연합군 상륙부대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예상되는 독일 기갑부대 반격으로부터 확보하는 것이고 부차적으로 두 다리 근처에 있는 독일군의 메르빌(Merville) 포대를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포대는 영 캐나다 군이 상륙하는 소드 해안을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세번째 목표는 디브(Dives) 강 다리에 걸린 다리를 폭파하여서 독일군 우회 돌파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었습니다.


5.영국·캐나다군, 독일의 맹렬한 반격을 물리쳐

영국군 6 공수 사단소속의 3,5 공수 연대와 이에 배속된 1 캐나다 공수 대대는 글라이더로 강하 착륙하자마자 독일 716 보병사단의 예하 부대로부터 맹렬한 반격을 받았습니다.

 

교량 점령까지는 해냈지만 새벽 무렵에 이들은 오른 강의 남쪽에서부터 강 양쪽을 따라 반격해오는 폰 록크 대령 지휘하의 독일 21 전차 사단 전투단의 강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투는 치열하였고 양쪽 다 피해가 속출했고 그러나 영국 캐나다 공수부대는 이를 잘 버티어냈습니다. 정오경 영국 1 특수 임무 여단 코만도 부대의 증원을 받았습니다. D-Day 저녁 무렵까지 영국과 캐나다 공수 부대는 잘 고수해서 오른 강의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반격은 다음 날도 계속되었습니다. 6월 10일, 독일 346 보병 사단은 대공세를 취해서 동쪽 변두리의 한 구석에 침투했습니다. 그러나 12일 영국 공수 부대원들이 브레빌(Breville) 마을의 전투에서 참호를 파고 응전하는 독일군을 강습해서 이들을 모두 패주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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