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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군의 특수전단이며 해군 작전사령부 직할 전단 중 하나로

해군의 특수전부대입니다. 

모체인 해군 수중 파괴대의 영문 약칭대로 통상 UDT(Underwater Demolition Term)라 부르기도 하며, 육해공 전천후 작전팀을 의미하는 UDT/SEAL(SEA, AIR, LAND)이라고도 칭합니다. 부대 청설 과정과 SEAL임 무확 잔 과정에서 나타나들 미 해군의 네이비 씰을 모델로, 매년 시행되는 부대원들의 유학이나 연합훈련 및 다양한 교류를 통해 발전하고 있습니다. 

해군 특수전단에 씰 대원들의 훈련 모습  출처 : 해군 특수전 전단

국군 내에서 개방적이고 선진화된 특수부대 중에도 가장 손에 꼽는 부대입니다. 

미군 특수전 부대에서 세계적으로 폴란드 GROM 등과 함께 가장 같이 작전을 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탑 티어급 부대임과 동시에 성공확률이 극히 낮은 선박 작전을 성공적으로 오나 수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부대입니다. 

 

1. 해군 UDT/SEAL

UDT/SEAL이라는 이름은 미 해군 NAVY SLEAL의 모체인 UDT를 벤치마킹하여 창설한 부대에 훗날 미 해군의 UDT가 발전하면 부여된 SEAL 임무를 덧 붇여 UDT.SEAL 이 된 것입니다. 

적 해산 정찰, 첩보 획득, 해상 정찰, 내륙 기습 폭파공작, 해안 장애물 제거,  뢰 탑색 및 소해, 유격 개 및 요인 호송, 특공대 철수 지원 및 수중파괴 임무를 시작되어 UDT 육해공을 가리지않는 전천후 침투, 암살, 직접 타격(DA), 대테러, 경호 임무가 추가되었습니다. (SEAL). 

 

특수전단의 본거지이자, 각종 교육, 훈련 시설을 갖추고 있는 진해에 주둔하며, 대부분의 인원이 속해 있는 제1 특전대 대가 주력부대입니다. 

동애 1함대의 제3 특전대와 평택 2함대 제5특전대대는 함대 기지 또는 각 함대가 관할하는 접 적애 역에서 벌어지는 긴급 상황에 대비하는 부대입니다. 

이외에도 인천을 비롯하여 접적해역 모처 등에도 소수의 해군 특전대원들이 파견 근무하고 있습니다. 

 

진해의 제1특전대대는 공중대, 해상대, 해중 대대 3개 작전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1대대 대원은 이 3개 작전대 중 하나에 소속되어 해당 임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합니다. 

장기복무자의 경우 몇년에 지나면 순환근무로 소속 작전대를 옮는 경우 많아 최소한 2개 이상의 제대를 설립합니다. 

피랍선박 대응훈련을 수행하기 위해 패스트로프 강하 후 진입하고 있는 UDT/SEAL 대원들 출처: 해군특수전단

폭발물 처리(EOD)와 해상 대테러 (MCT: Maritime Counter Terror)는 별도의 교육과정이 필요하며, 장 기자 간부는 해당 제대에 속하지 않더라도 자원하여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도 있습니다. 

 

EOD 및 MCT는 고도의 전문과정이라 폭발물 처리 대대와 특수 임부 대대에는 특전병이 배속되지 않습니다. 

특전병이 배속된다 하더라도 이는 작전요원으로 배속된 것이 아닙니다. 

참고로 해상 대테러(MCT) 교육의 경우, 청해부대 파견 전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교육과정입니다. 

폭발물 처리(EOD) 임부는 1968년 4월 22일 부여되었습니다. 임무 부여에 따른 사전작업으로 1966년 장교 1명, 부사관 2명이 미 해군 폭발물 처리 교유과정에 보내졌으며 최종적으로 19968년 5월 1일 폭발물 처리 대가 창설됨으로써 마무리되었습니다. 

 

폭발물 처리대 (EOD)를 2017년에 확대 개편하여 폭발물 처리 대대로 독립/승격, 현제는 대대급 부대입니다. 

이는 폭발물 처리 임무를 수행하는 단위부대 중 전군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부대입니다. 

 

2018년 9월 1일, 5 전단 55 전대 예하의 SSU가 특수전전단의 해난 구조전대로 편입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해군 UDT/SEAL 에서 육군 특전사처럼 지역 대라는 명칭을 썼지만 이후 작전 대라는 명칭을 바꿨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제1특전대대는 육군 특수전사령부 예하로 배속되고, 오키나와와 미국 본토에서 증원된 미국 특수부대들은 주한 미군 특수전사령부 예하로 배속됩니다. 

그리고 이 대한민국 특수전사령부 육군 특전사 및 여기에 배속된 해군 특수전전단 제1특전대대)와 주한미군 특전 사령부가 병합되어 연합 특수전사령부(CUWTF)를 구성합니다. 

 

2. UDT역사 알아보기.

50년대 초창기 UDT 청사는 1 부두에서 일본 해군이 쓰던 작은 목조건물에서 UDT태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취사장은 함대 사령부에 있어서 먼 거리를 매일 이동해야 하는 매우 불편함이 있었다고 하고 당시 1등 병조 9 하사) 월급이 (100원) 이등병조(중사) 월급 5400원이었다고 합니다. 

 

UDT는 별도 부식비가 나오는데 공군 조정사와 동일한 특급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시절 상사 월급보다 부식비를 더 많이 받았던 시절이라 윤택한 생활은 물론 매끼 고기가 목욕한 기름기 있는 구을 먹을 수 있었는데 모든 것이 UDT(ㅠ-9) 훈련이 지구 상에서 얼마나 혹독하고 힘들었는지 않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6.25 사변을 거치면서 미군으로부터 전달 된 특수작전부대 편성과 운영은 그대로 해군 특전부대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1952년 2월, 미 정철 정보대 (RIU.Reconnaissance lntelligence Unit)가 해체되면서 한국 해군에 정찰 정보대의 창설을 기획했다고 합니다. 

이에 한국 함대 정보국(NID-Naval lnteligence District)은 1952년 11월, 미 해군 특수전부대 UDT양성과정인 B-6 과정에 김성권 중 의릉 유학시켰습니다. 

 

당시 UDT청설 목적은 '요인 암살 및 첩보수집이었습니다. 김중위에 이어 1953년과 1954년 미 해군 B-6 과정에 유학한 11명으로 대한 미국 해군 UDT가 탄생됐습니다. 

 

1955년 5월 25일 한국 함대 B-6 교육과정이 발족됐고 같은 해 11월 9일 제1기 과정 26명을 수료시켜 대한민국 해군 UDT가 창설되었습니다. 

1955년 미국 UDT교육과정 수료사진

해군 지휘부에서는 한국 UDT가 창설된 전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시 미군의 전쟁수행 핵심 전략인 상률 작전을 실시하기 위해 적 해안 정찰, 첩보 획득, 해상 정찰, 내륙기습폭파공작, 해안 장애물 제거, 기뢰 탑색 및 소해, 유격대 및 요인 호송, 특공대 철수 지원 및 수중파괴 임무를 수행하며 큰 활약을 보인 미 해군 UDT를 모체로 하여 창성을 준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 해군 UDT의 선진 교육을 통한 작전개념 정립과 차기 국내에서 배출해야 될 UDT 요원들의 교관 확보와 더불어 임무수행에 필요한 장비 획득이 우선시 되어 1954년과 1955년 해군 내 국가기관과 군인정신이 투철하고 체력이 우수한 대원을 공개모집, 미 8군 주도의 영어시험을 거쳐 최종적으로 장교 3명과 사병 4명 등 총 7명을 최종 선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해군은 설발된 7명을 두 차례로 나누어 미 해군 UDT과정에 유학을 보냈고 장인표 대위 등 7명 전원이 소저의 미 해군 UDT과정을 수료하여 한국 해군 UDT가 탄생되었습니다. 

 

이들은 미 해군 UDT 교육과정에서 습득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UDT찰성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제2전단 예하 함정 교육대(STU)에서 UDT 모집을 공고하였습니다. 지원 자격에 별다른 조건은 없었고, 신체 건강한 해군 장병이면 지원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수료 후 특별대우와 미국 유학 기회 보장, 파격적인 주, 부식을 제공한다는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던 시절이라 해군 내에서 보급품이 제대로 조달되지 못했고 식사 및 의복 지원도 여의치 않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해군에서 제시한 조건은 해군 내에 최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모집공고 후 300여 명의 사병들이 지원하여 지원자들은 팔굽혀펴기, 달리기, 등 1차체력검정을 실시하고 다음날 해안대 방파제 앞 해상에서 2차로 수영 및 잠영 테스트를 거쳐 최종 80명이 선발되었습니다. 

 

 

1955년 8월 5일 UDT1기생이 입교하였고 해군의 최초 UDT 교육은 교육훈련에 필요한 가종 교재와 장비 등이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력 달련과 수영 위주로 제2 전단 예하 함정 교육대(향무) 주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훈령이 필요한 장비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지만 미 해군 UDT 교육과정과 유사한 내용을 구성하여 체력, 지옥주 훈련(극기주), 구보, 수영, 잠수 등의 다양한 교육훈련을 13주간 실시하였고 특히 이때 실시한 잠수 교육은 국내 잠수 역사상 최초로 기록되어 한국 잠수 역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매일 계속되는 강한 훈련에 생도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 해군 UDT과정을 수료한 7명의 교관들은 UDT의 혼과 열정을 심어 죽 위해 미 해군 UDT과정보다 더 강한 훈련으로 교육하였고 1955년 11월 9일 마침내 병 조장 이만수 등 26명은 대한민국 UDT1기로 배출되었습니다. 

 

1955년 11월 9일 UDT1기 수료식과 더불어 장인표 대위를 초대 지휘관으로 교관 7명과 UDT1기생 26명 등 총 33명으로 해군 함대 해변단 에하에 수중파괴대 (UDT)를 창설했습니다. 원래는 해군 현역 장병만을 대상으로 모집하였으나 1988년 이후부터는 민간 모병을 병행하였고, 현재는 미간 모병을 통한 입대자가 대부분입니다. 

 

오늘은 해군 특수전단에 관해 간략하게 알아보았는데 다음에는 UDT 하는 일과 훈련과정 등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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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베레(Green Berets)

 



1952년 애론 뱅크(Aaron Bank) 대령에 의해 창설된 美 육군의 특수부대로, '10 공수특전대'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린베레는 요원들이 녹색 베레모를 쓴 데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이 부대는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공수부대, 레인저 부대 및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예비역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창설자인 뱅크 대령에 의하면 주 임무는 '육해공으로부터 적지에 침투하여 저항군이나 게릴라를 양성하여 유격전을 펼치는 것'이며, 또 다른 임무는 적지 깊숙이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레인저는 강력한 기습 공격을 주로 하지만 그린베레는 적지에서 수개월간을 지내며 작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린베레 요원들은 제한된 물자로 생존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1952년 말 한국전쟁에 첫 번째 그린베레 요원들이 실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후 1957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훈련팀이 창설되었는데, 이 부대는 남베트남에 파견되어 군사자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린베레는 케네디 대통령 당시 전폭적인 지원으로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에 훈련학교의 이름을 'John F. Kennedy Special Warfare Center'라고 바꾸기도 했습니다. 

1971년 베트남에서 철수한 후 그린베레 요원의 수는 줄어들었으나 새로운 훈련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으며 부대 내에도 변화가 일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세계 각국에 파견되었으며 특히 중미의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서는 특수부대의 훈련을 돕기도 했습니다. 또 1989년 12월 파나마에서의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델타포스(Delta Force)


 


델타포스는 정규군이 투입되기 힘든 상황에 뛰어들어 요인 암살, 인질 구출, 적 기지 파괴 등의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미 육군의 특수부대입니다.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며, 대사관 및 항공기 인질 구출 작전, 마약 및 핵물질밀매단 와해 공작 등을 수행합니다. 델타포스는 특수전 장교 출신이자, SAS(Special Air Services, 영국 육군 공수특전단)에서 근무한 바 있는 차알스 베크위드(Charles Beckwith)에 의해 1977년 11월 창설됐습니다.

본부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랙(FortBragg)에  있습니다.

델타포스는 육·해·공군의 다른 특수부대와 달리 특수전사령부(USSOCOM)의 통제 체계에서 벗어나 '연합 특전사'(JSOC: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의 지휘 체계 하에 있습니다. JSOC 산하에 있는 부대는 특수부대 가운데서도 가장 비밀을 요하는 임무만을 수행하는 부대들로 해군의 연구개발단(DevGRU)과 육군의 160 항공단, 공군의 제2항 공사단 일부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델타포스는 1981년 인도네시아 여객기 구출작전, 1984년 베네수엘라 여객기 인질 구출작전, 1989년 파나마 침공 시 미국인 인질 구출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1979년 이란 혁명 때 수도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에 억류된 미국 인질 66명을 구하려다 실패하였습니다.

 


레인저(Ranger)



그린베레, 델타포스와 함께 미국 육군의 3대 특수부대로, 미 육군 특수작전사령부 소속의 경보병 특공부대입니다. 전통적으로 착용해온 검은 베레모가 유명합니다. 레인저 부대의 임무는 일반적으로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적진에 맨먼저 침투, 신속한 공격을 통해 활주로와 기타 목표지점을 점령한 후 다른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사수하는 것입니다. 특히 공항 점령과 기습은 이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모두 자원병으로 이루어진 레인저는 공중, 지상, 해상 등 어떤 경로로도 침투하고 극지, 정글, 사막,산악 지형 등 어떤 상황에서도 싸울 수 있도록 지옥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지원자 200명 중 1명 정도가 최종 과정을 마칠 정도로 선발이 까다롭고 여성 대원은 없습니다.

레인저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특수부대로서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입니다. 당시 이 부대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절벽을 기어올라 대형 포대를 폭파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이후 베트남전과 1983년 그레나다, 1989년 파나마에서 명성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1980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구출작전과 1993년 소말리아에서 모하메드 파라아이디드 체포작전에서 실패한 경험도 있습니다. 베트남전 이후에는 각 보병, 공수사단에 산재된 레인저 중대가 통합되어 '제75레인저 연대'라는 단일 지휘체계로 발족되었으며, 연대 본부는 조지아주 포트베닝에 있습니다. 

 

 


Navy SEAL(네이비실)



미국 해군의 엘리트 특수부대로, 네이비실에서 SEAL은 해상(Sea), 항공(Air), 육상(Land)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것입니다. 육·해·공 어디서든지 전투가 가능한 전천후 부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1962년 1월 1일 케네디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창설됐습니다. 미 해군의 특수전사령부(Special Operation Command) 산하에 속해 있는 SEAL은 태평양 지역에 위치한 제1 특수전단에 1·3·5 팀이, 대서양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제2 특수전단에 2·4·6·8 팀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특히 SEAL팀은 베트남전에 참가하여 군수기지(Logistics Base) 폭파 및 고급정보 수집에 커다란 공헌을 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도 투입되어 미국의 외교정책을 측면에서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SEAL팀이 순수한 군사업무의 수행에서 대테러리즘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9년 12월 발생한 이란 테헤란 미국 대사관 점거 사건 이후부터입니다. 당시 444일간이나 계속된 대사관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SEAL 내에 100명 규모의 SEAL-6을 창설하여 대테러리즘 능력을 보강하게 되었습니다. 


SEAL TEAM-6

네이비실은 1979년 11월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점거 사건 때 억류된 인질 100여 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대원 8명을 잃었습니다. 이에 해군 정보 인원 중에서도 정예요원을 선발, 100여 명으로 구성된 실 팀 6(SEAL Team 6)이 구성돼 대테러전문 부대로의 육성이 이뤄졌습니다. 

SEAL Team 6는 델타포스와 함께 합동특수전사령부(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에 소속되어 있으며, 데브그루(DEVGRU·Development Group)로도 불립니다. 대원 선발과 훈련이 혹독하기로 이름이 높으며, 적장(敵將) 참수 등 가장 까다로운 임무를 맡는 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린 레이더스(Marine Raiders)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 최전선에서 대테러전 및 침투 작전 등을 수행하는 미 해병대 특수전사령부(MARSOC)로, 2006년 2월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창설됐습니다. 이는 태평양 전쟁 때인 1942년 발족했다가 2년 만에 해체됐던 당시 특공대의 이름을 이어받은 부대입니다.

 

미 해병원정대(MEU)

미 해군당국은 MEU(Marine Expeditionary Unit)가 편제상 '특수부대'는 아니지만 '특수전이 가능한 부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해상으로부터의 작전을 지원하는 것이 주임무로, 장비와 병참 및 기술 지원·무기·군함 면에서 일반 부대보다 다양하고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어 막강한 전투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MEU의 보병대대는 일반적으로 육해공 합동작전에 투입되며 경무장 운송수단을 사용하며 또 공군작전부대는 헬리콥터와 헤리어젯(Harrier jets) 같은 고정날개가 장착된 군항 기를 이용합니다.


공군 특수부대
(Air Force Special Operations Forces)

공군특수부대는 근접 항공 지원을 제공하는 부대로, 저격, 급유 및 지원 업무 등도 수행한다. 이 부대는 최첨단의 항법, 정찰 장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Marine Recon



Marine Recon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 존재가 알려진 부대로, 1944년 이전에는 정찰·저격 부대였으나 1944년 4월 상륙 정찰 임무의 2개 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초기에는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 수중폭파팀)와 공동으로 해변 정찰 및 수위 측량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초에는 UDT와 함께 이오지마섬에 투입되어 작전에 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에서는 한국 동해에서 UDT와 함께 철도, 터널 및 교량 폭파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적 후방 200마일 지점에서 후방 교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51년에는 미 해병대 역사상 최초의 헬리콥터 침투 공격을 시도하였습니다. 또 1965년 베트남 전쟁에서는 담당 부대를 지원하여 작전에 임했으며 적의 중심 깊은 곳에서 장거리 정찰 작전을 실시하였습니다. 

1976년부터는 인질 구출작전에도 투입되었으며, 1977년에는 저격병이 추가되어 전투력이 향상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983년 10월에는 그레나다 침공에 투입되었으며 1989년에는 파나마에서의 'Just Cause' 작전에 투입되었다. 1990년에는 걸프전에 투입되어 이라크와의 최전선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여 미 해병대에게 적의 이동로를 알려기도 했으며 걸프전에서 238명의 이라크 군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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