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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구르카 용병 전쟁 관련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늠늠한 구르카 용병

1.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구르카 전적

1,2차대전 구르카 용병 참전 , 작전을 지휘 하고 있는 구르카 용병들의 모습 이미지 출처:국방TV

구르카 병이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건 제2차 세계 대전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나 영국-아프라 니스탄 전쟁에서 별다른 사진 이난 취재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상당한 자료와 취재가 이뤄졌기 때문에 북 아프리카에서는 독일 국방군을 상대로,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습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 장병들의 증언에는 이들이 밤마다 독일군의 진지를 주기적으로 기습해 장병들의 목이나 귀를 베어가는 공포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고 실제로  이들의 전과를 의심하여 참호 구축이나 화장실 청소나 하라고 비아냥대던 영국 육군 장교 앞에서 적군에서 도륙해 온 귀를 한부 구니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육군은 정글전에 능해서 역국 육군 지휘관들이 정글에서 싸우기를 꺼려했는데, 그러자 구르카족은 이 정글에서 일본 육군을 겁내지 않고 맞서 싸웠고, 엄청난 활약들을 하였다고 합니다. 

 

일본군의 막 나가는 전술 반자이 돌격에도 구르카들은 코웃음 치면서 무쌍을 찍기도 했습니다. 

사실 영국군의 화력에 반자이 돌격을 하던 일본군은 마구 털리던 와중에 가까스로 영국 눈 진지에 일본도나 총칼 들고 와봐야 쿠크리 들고 기다리던 쿠르가를 만나면.. 그야말로 일본군 피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고]1997년에 월간 지오 한글판에서 이들에 관한 취재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2차 대전 당신 이들은 쿠쿠리 하나로 일본 군들을 대적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도를 단숨에 동강 내고 쿠크리 하나 나로 일본 육군 15명을 메아 죽인 구르카 병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2차 대전 당시 구르카 대의 용맹함과 무시무시함, 잔혹함은 적과 아군을 가지 않고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 생활을 하던 미군 병사들을 구르카 부대가 구출하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수용소에서 포르들을 학대하던 일분군 병사들의 귀를 잘라 선물한 일화도 있습니다. 

폭격기 승무원은 양곤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양곤에는 앞서 언급한 포로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karng thomasian 과같은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chindits병사의 이야기인데 양곤 수용소를 해방한 구르카 연대가 어디인지는 불명이지만 

(양곤 탈환 작전에는 10 구르카 소총 연대, 3구가 소총 연대, 구르카 부대에서 따로 차출한 대대로 구송돼 50인도 공수여단 등 많은 구르카 부대가 참전했기 때문에 알기 힘듭니다. ) 전우였던 chindits에 대한 일본군의 학대에 분노하여 저랬을 수 있습니다. 

 

2. 포틀랜드 전쟁의 구르카의 전설

 

1982년 포틀랜드, 포트리 스텐리를 지키는 아르헨티나 군이 구르카 들이 온다고 실제로 영국군이 계속 민사심리전을 펼쳤고 SAS부대가 기습을 담당할 예가있 었는데 아르헨티나군이 구르카들이 온다고 하자 서로들 달아나거나 손 들고 기어 나와서 이들은 무혈 입 성하여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심지어 몇몇은 이들에게 항복하면서 제발 구르카에게 우릴 넘기지 말아 달라고 울며 사정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이걸 전해 들은 구르카 병들은 우린 저항하지 않는 자, 포로는 일절 건드리지 않는다.라고 하면 불쾌해했었다고 합니다. 

 

다만 위의 서술은 레퍼런스 있는 것도 아니어서 걸러들어야 하지만 만약 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포트 스트리가 아닐 구스 그린 전투 때 벌어진 일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스 그린을 지키던 아르헨티나 군은 신병 의주로 편성되어 급조된 부여였으므로 사기도 낮았고 훈련 도도 낮았기 때문입니다. 

 

구스 그린 전투 뒤에 한 전초기 기지에서 추위와 배고픔음을 못 이겨 아르헨티나군이 (코마도와 교대 후 주둔해 있던) 구르카에게 항복했고 , 구르카들은 항복한 아르헨티나군에게 몸수색을 위해 엎드려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다 엎드렸는데 한 공군 장교가 버티고 있자 구르카 들이 쿠크리로 위협해서 엎드리게 한 기록이 있습니다. 

구스 그린 전투 후에 근방 아르헨티나군은 대체로 구르카에게 항복했다고 합니다. 

이사실은 포클 렌든 전쟁 문서에도 기록되어있는 팩트입니다. 

 

실제로 포트 스텐리 주둔 아르헨티나군은 주변 감제고지랑 방어선이 무너져 항복을 하였고 스탠리와 주변 감제고지를 지키는 아르헨티나군은 사기도 높고 혹한기 훈련 등 훈련도 제대로 받고 무장도 충분한, 나름 정예 부대였습니다. 

으외로 영국군은 제법 고전하고 있었는데 이때 구르카 대대는 스탠리 주변 감제고지인 윌리엄 산 점령에 투입되었고 감제고지를 수비하는 아르헨티나 군은 사기도 높고 장비도 충분했기에 구르카를 보고 졸기는커녕 박격보를 쏴서 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에는 아르헨티나 군의 반격으로 13명이 추가로 부상을 입은 사실도 있습니다. 

 

윌리엄 산 점령 작전은 스코츠 가드가 주도한, 그리고 또 다른 감제고지인 텀블다운 산 점령과 같은 작전 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영국군 근위대 가 텀블다운 산 점령의 주공을 맡는 동안 구르카 대대는 텀블다운 산 남쪽의 월리엄 산을 공격하는 조공 맡은 것입니다. 

 

3. 카길 전쟁

199년 파키스 타과 인도가 카슈미르에서 벌인 국지전인 카킬 전쟁에서 인도군 소속 구르카 병들도 참전했습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 의하면 역시 백병전에서 이들은 무서운 활약을 했기에 파키스탄군들이 절대로 이들과 가까이서 싸우지 말라는 분부도 내렸다고 합니다. 

 

당시 중앙일보 보대에 의하면 구르카 병 등과 백 정전을 벌이던 파키스탄군이 호되게 당하게 되어 물량전으로 반격하였을 정도로 이때 부상을 입고 포가 된 구르카들이 종전 뒤 풀려나서 인도군 훈장을 받고 후한 보상을 받은 사실도 있습니다. 

 

파키스탄 군도 용병인 그들은 꽤 우대해 줬는데, 만일 박대했다가 나중에 보복당할까 두려워해서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파키스탄에 것 주하는 파슈툰족드고 만만치 않게 전투민족이고 파키스탄의 주 인종인 펀자브 인들도 무서운 민족으로 꼽힙니다. 이들도 히말라야 못지않게 척 밥한 산지 힌두쿠시를 중심으로 온갖 외세 공격을 자기 힘으로 막아내던 전투 민족입니다.  그런 이들이 상당수인 파키스탄군도 구르카에게 무척 고전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미 120년 전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그루 카 군들이 파슈툰족이 다수히 카불을 함락할 때 이름을 날렸던 걸 보면 이게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4. 구르카 병과 30인 탈레반들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영국 구르카 용병들 출처 :AFP

네팔 비마 출신의 영국 구르카 연대 3대대 소속, 딥 프라사드 푼 하사는 2010년 9월 17일 아프간 헬만드 주 라힘 칼라이 근처에 있는 기지에서 야간 경비 근무를 서다가, 전바의 어둠 속에서 뭔가 땅 파는 소리 들었습니다. 그느 처음 짐시의 소리인 줄 알았으나 수리의 정채는 IED를 매설 중이 더 2명의 탈레반들이었습니다. 

 

그의 소대는 순찰을 나간 시점이었기에 그는 즉시 무전기로 지휘관에게 보고하고 심각대에 거치돼 있던 GPMG 1문을 때어 들고, 개인 화기인 SA80 한정과 하부 레일에 부착돼 유탄 발사기 한정, 수류탄 다수, 무전기 두대를 가지고 지붕을 올라간 후 사격을 개시 탈레반들도 RPG를 발사해서 사격을 가해왔으나 푼 하사는 15분 이상 그 위치를 사수하면서 400여 발의 탄환ㄴ고 수십 정의 수류탄 등등 손에 잡히는 무기를 몽땅 사용해 최소 세명 이상의 탈레 반응ㄹ 죽이고 다수를 부상 입혔다고 합니다. 

 

그때 푼 하사는  덩치 큰 탈레반 전자 한 명이 벽까지 완전히 접근해 왔고 그가 사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하사는 지붕 위에서 사격하고 있던지라 무거운 GPMG로는 사격 각도가 잘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놈이 접근해서 벽을 타고 오르려는 것까지 발견. 이에 푼한 L85A 2를 들고 발사 하 형 했지만, 이미 단기간 안에서 별다른  관리 조치 없이 400여 발을 연달아 손 직후라 기능 고장이 발생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주위에 무기로 사용할만한 마땅한 물건을 찾다가 삼 삭대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대응하였다고 합니다. 

홀로 30여 명의 탈레반들을 물리치 공훈으로 푼 하사는 2011년 3월 25일 용 십자훈장을 받았습니다. 

 

5. 선발과정 

 

 

구르카 용병 선발과정 동영상

구르카의 급여 난 연금은 원칙적으로 영국군의 동등합니다. 

2018년 기준으로 이병이 연간 14,000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2,260만 원 정도입니다. 이 정도면 영국에서도 고속이라 할 순 없지만 결코 적지 않는 연봉입니다. 한데 네팔에서는 이 정도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을 받는 것입니다. 

연간 국민소득이 같은 시기 한국(27000달러)의 70분의 1 수준인 400달러(50만 원 정도)가 조금 넘는 최빈국(2015년)이므로 구르카로 복무하고 전역한 사람은 부유층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2~300명 선발에 경쟁률은 매년 2만 명 가까이 응시하므로 70:1을 넘습니다. 

신체검사와 체력 테스트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면접 등 다 야한 전형을 요구하고 17세에서 21세 사이만 응시 가능하므로 사회 엘리트인 대학생 등리 몇 년씩 구리 카 준비에만 매달려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카트만두에는 구리 준비를 위한 사설 학원 20 역군 가량이 성업 중입니다. 

또 아버지가 용병 출신이면 직접 아들을 훈련시키기도 합니다. 용병 역사가 200년이나 되다 보니 3대가 용병이거나 친척 중에 용병이 많은 집안도 있습니다. 구르카 민족이 많이 모여 살고, 도시 자체가 히말랴 산자락에 있어서 심신을 단련하기 최고인 포카라에는 한국의 학원가 마냥 용병 양성 학원 단지가 있습니다. 도시 곳곳에 고등학교처럼 보이는 운동장 딸린 건물의 80%는 용병 학교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네팔 버전 한국식 공무원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08년도 기준 경쟁률이 700"1을 넘는 다고 합니다. 

2015년 2월 기준으로 영국군 가운데 구르카 출신 은 장교가 110명, 사병이 2,610명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사교육을 만이 하는 도시민에 합격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해 40명 선의 합격자를 배출하는 유명 사설 학원의 수강료는 한화 월 3만 원으로 한국이라면 용돈 수준이나 네팔에서는 부유층이거나 구르카 출신의 아버지가 있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이런 학원은 전직 구르카 출신이 운영하며 영국군의 선발 전형에 맞춘 커큘럼으로 교육을 합니다. 

 

반면 지방민이나 저소득층은 밭일이나 평소 운동 등으로 체력을 단련한 수밖에 없고, 영어나 수학도 이들에게는 큰 장애물인데 네팔은 아지 학교조차 없는 지방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천 명 가량인 1차 합격자도 한 번도 배해 보지 못한 시골 마을도 많습니다. 그러니 최종 선발되면 가문의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발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면 구르카 출신 모병관이 가을에 고향을 돌면서 지역 예선을 실시합니다. 

여기서는 키와 가슴 둘례 등 신체조건과 기본적인 체력 테스트를 치르며 약 2~3배 수를 선발합니다. 예선 통과자들은 포카라에 위치한 모병소에 입소하여 보름간 최종 경선을 진행합니다. 이때 입소자는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모병소로 들어가는데 마치 한국의 수능 등굣길 분위기입니다. 

 

다양한 선발 전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체력 테스트로서 다양한 고목을 수행하는 주에 하나라도 미달되면 그 즉시 탈락입니다. 




2021.10.02 - [특수부대] - 구르카 용병- 영국에서 활약하는 구르카 ,전쟁터의 사신으로 불리다.

 

구르카 용병- 영국에서 활약하는 구르카 ,전쟁터의 사신으로 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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