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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카족은 네팔 중서부 산악지대에 사는 몽골계 소수 부족으로 구르카 용병은 이들 부족 출신의 용병들을 말합니다. 

영국이 구르카족 전사들을 용병으로 고요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는데 현제 구릉족 전사들은 영국, 인도, 브루나이, 싱가포르 등에서 용병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구르카 용병의 쿠쿠리 훈련 장면 이미지  출처: 영국군

1. 구루 카 용병 개요

영국에서 운영하는 네팔인들로 구성돼 외인부대입니다. 현지에서는 '고르카라고 불리며 고르카 지역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이는 고르카 지방에 사원이 있는 중세 힌두 성전사 그루 고 라크나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네팔의 산간 지방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입니다. 이들의 활약은 어마무시합니다. 

걸어 다니는 전쟁에 사신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세르파와 더불어 기본적으로 세계 최고 고산 재대에서 살아가는 덕에 일반인라면 정시도 못 차릴 고지대에서도 뚜어 다닐 만큼 심폐량이 높으며, 그에 딸 신체 능력도 당연히 뛰어납니다.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매우 우수한 용병으로 유명합니다. 네팔의 3대 수입원으로 마약, 관광, 구르카 용병을 꼽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네팔의 전통칼 이라고도 불리는 쿠크리를 사용합니다. 

다양한 민족이 있는 네팔 구르카 부대원들 중 상당수는 동아 시인 계통입니다. 

 

대영제국이 싱할라족이나 시크교도, 라지푸트 다음으로 가는 전투 민족으로 꼽았으며 이들과 달리 영국 육군의 용병에 긍정적이었던 구르카 용병을 지금까지 잘 고용하고 있습니다. 

영국 육군의 2개 구르카 대대 중 1개 대대는 브루나이에 주둔 중입니다.

 

인도 육군도 자체적으로 구르카 병을 모병하여 10만 명 규모의 구르카 부대를 편성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네팔군도 있습니다. 

 

싱가포르 경찰도 연국 육군에 모병을 위탁하여 2000명 규모의 구르카 부대를 편성하고 있습니다. 

 

브르나 군에도 자체적으로 구르카 병을 모병하여 2,000명 규모의 구르카 예비대가 술탄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 구르카 용병의 역사적 배경

네팔의 고르카 왕국과 동인도 회사에 구르카 전쟁(1814~1816) 중에 영국은 자신들이 구르카도 칭한 고르카 리 군인들에게 김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평화협정에 따라 고르 칼라 군은 동인도 회사 군대와 계약하여 이들로 합류하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네팔 산간 지방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체트리(타 쿠리), 머거르, 구릉의 사람들이 영국과 맞서 싸운 원조 구르카입니다. 

영국군을 공포에 떨게 한 구르카 용사 이미지

 

브리민(브리만 네팔에서는 브리민이라고 부릅니다.), 세르파/타망 들은 입대가 허용돼 않았습니다. 

오늘날 구르카는 모든 네팔의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존의 구릉, 머거르, 체트리(타 쿠리) 외에도 라이, 림부, 세르파, 타망, 네 와리 등이 속해 있습니다. 

 

원래 영국은 각지의 식민지에 현지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세포이 같은 부대)를 창설해 유지해 왔으나, 인도 및 홍콩, 아프리카 등 자국 식민지를 독립시켜주는 과정에서 현지인 부대도 대부분 해체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구르카 용병부대만은 해체하지 않은 채 지금도 대대 규모로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구르카 부대 청설 이래의 전사자도 만여 명에 달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영국 육군의 일부로 정글 등지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큰 손실을 입혔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에서도 활약했습니다. 옆 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나라들은 모두 이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1962년 다시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브루나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싱가포르에 주둔한 구르카 부대가 도입되어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포틀랜드 전쟁 때는 일부 아르헨티나 육군 병력들은 구르카 부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항복하거나 도망쳐 버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영국 육군의 규모가 많이 축소된 최근에도 여전히 중요한 전투부대 중 하나입니다. 

 

1990년대 후반 파키스탄과 국경분쟁에서 인도 육군 소속 구르카 병들이 파키스탄 육군과 대적하여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2-1. 전투 종족으로 영국 육군의 용병이 되다. 

1803년이래 네팔의 구르카 정부는 인도의 국경지대를 노골적으로 침범하여, 영국을 도발했습니다. 

특히 인도 북부의 영국령 촌락을 약 200여 개나 병합하고 갠지스 강 상류까지 침략할 기미를 보였습니다. 영국의 인도 총독 민토 겨은 이 지역은 역구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네팔은 계속 권리를 주장하여 양도하지 않았으므로 새로 부임한 총독 모이라 결이 비상 수단으로 현지에 경찰서를 설치하고 강 결한 태도로 임하였습니다. 

 

당연히 구르카 측이 가만있지 낳고 1814년에 그 경찰서를 습격, 18명의 경찰과 을 살해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도 이에 대응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4개 부대로 편성하여 네팔로 진격시켰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험난한 지세 이용한 구르카족은 여러 성세를 중심으로 완강히 저항함으로써 영국군은 초전에 고전하였으나, 서틀 레지 방변으로 진격한 사령관 D. 옥털로 나의 분전으로 요새를 차례로 격파하고 구르카군의 최후 거점인 마룬 등의 요새를 격파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패배한 구르카 득은 항복하여 영국과 사가 우리 강화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교원에서 출간흔 랜드 엔 피플에 따르면 이 당시 영국군은 구르카 족의 용맹함에 치를 떨면서도 역구 측에게 점심 먹을 시간이니 전투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고 단신들의 티타임 동안에는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구르카족의 매너에 감탄했다는 비회도 있습니다. 

 

특히 구르카족이 머리가 날아간 상태에서도 역 국군을 향해 계속 칼을 위 둘렀다든지,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쿠크리 하나를 들고 왔다든지 하는 이야기도 적혀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휴식시간에 영국이나 구르카 족이 서로 간의 부상자를 치료해주는 훈훈한 광경도 나왔다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구르카족이 적이었으나 그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고 그 결과 영국군에서도 이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2-2. 영국군이 된 전투 종족

이들이 맹활약한 전투로 알라 주는 게 세포이 인도용 병대들의 반란을 진함 한 전투와 영국 -아프가니스탄 전쟁입니다. 

1차 전쟁(1839~1842)에서 호되게 털린 영국은 당시 영국군 및 인도계들로 이뤄진 영국군이 전멸(1명만이 살아 돌아 옴) 다한 것을 교훈 삼아 산악전의 고수인 구르카병을 2차 전쟁에 벌어진 1878년에 대거 파병했습니다. 

그리고 카불 점령에 크나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20만이 넘는 구르카 병이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먼저 진격하며 전설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물로 4만에 이르는 구르카 병이 전사했을 정도로 이들의 피해도 컸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벌어진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구르카 군이 대거 파병 나갔지만 영국은 1차 대전의 피해도 엄청났던 터에 여기에 총력을 다하듯 없어 지원도 흐지부지된 상태였으며, 몇 달 안가 전쟁은 대출 끝났던 탓에 구르카 군은 2차 전쟁과 달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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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카 용병부대 구쿠리 한자루면 된다. 


구르카 용병 이야기 2편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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